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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고통이 삶에 질문할 때(독서편지)

크리스찬북뉴스 | 2017.10.24 21:47
고통이 삶에 질문할 때(독서편지) 고통의 문제/C. S. Lewis/이종태/홍성사/정현욱 편집위원

 여보, 오늘은 많이 힘들었죠? 어제부터 당신은 내게 물었어요. 내가 그곳에 가야 하냐고? 왜 나에게 이런 힘든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겠다고 했어요. 하나 넘으면 또 하나의 산이 있고, 강하나 건너면 더 넓은 바다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네요.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이리 힘든 적이 몇 번이나 될까요? 누군가에게 하루는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몸부림치며 살아내야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아파했을 당신을 생각하니 마음이 무너지는 것만 같습니다. 당신이 조금만 더 이기적이고, 조금만 더 독한 사람이었다면 그런 고민 따위는 있지도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혹시나 자신 때문에 누군가 누를 끼치지 않을까 걱정하는 당신을 보면 아직도 당신 같은 사람이 있는가 싶어 의아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왜 이리도 착한 당신에게 고난이 많을까요?

 

그래서 오늘 당신에게 좋은 책 한 권을 소개하고 싶어 꺼내 들었습니다. 영국의 저명한 인문학자요 교인이면서 신학자를 능가는 신학적 통찰력을 가진 C. S. Lewis<고통의 문제>라는 책입니다. 아마 이 책도 최소한 세 번은 읽은 것 같습니다. 책을 사면 날짜와 이름, 구입한 장소를 적고 마지막으로 사인을 하죠. 그런데 이 책에는 그런 신고식이 되어있지 않았습니다.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여기저기 뒤적거려보니 뒤 내지에 학생처장의 계좌가 보였습니다.

 

학생처장, 그 학교는 신학대학원입니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이 메모는 학생처 직원으로부터 등록금을 내라는 전화를 받고 적은 것이 분명합니다. 그 직원은 내게 만약 수업료를 00까지 내지 않으면 퇴학되고 졸업은 할 수 없습니다.’고 말했습니다. 무거운 마음으로 알겠다고 했고, 난 당시 수업료를 관리하던 학생처장의 계좌번호를 달라고 해서 받아 적은 것입니다. 그때가 졸업을 얼마 앞둔 신대원 3학년 겨울이었습니다. 그리고 16년이 흘렀고, 여전히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고 지겹도록 괴로웠던 가난과의 전쟁은 나의 마음을 지리멸렬(支離滅裂)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목사이기에, 돈을 버는 직업이 아니기에 어쩔 수 없었어라고 자위해 보아도 찢어지게 아픈 가난을 변명하기에는 저의 삶이 너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픔에 대해서는 당신은 저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일본에서 태어난 한국에 건너와 십 대를 보내야 했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대학을 다녔지만 결코 당신의 인생은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잔인하고 무능한 남편으로 당신은 가슴 시린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세 자녀를 홀로된 몸으로 지켜 내면서 신학을 했을 때도 당신은 하루하루 연명하듯 살아갔습니다. 겉으론 멋진 사역자, 훌륭한 전도사였지만 속은 문드러지고, 삶은 한 푼이 아까운 남루함의 경계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자녀들은 당신의 삶을 보며 우린 절대로 신학은 하지 않을 거예요.’라며 우겼죠. 아니 고3 딸은 신학과가 있는 고신대도 가기 싫다고 우기고 있습니다. 그래도 당신은 초롱초롱 빛나는 교회 아이들을 바라보며 행복해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청소년을 전도하겠다는 열정으로 불탔습니다. 시간과 물질, 그리고 자식들까지 희생해 가면서 열심히 섬겼던 교회로부터 버림을 받았고, 빈털터리가 되어 저의 곁에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어찌 이리 구겨진 종이 같을까요? 그래서 오늘 당신과 함께 나누고 싶어 C. S. Lewis<고통의 문제>를 꺼내 읽습니다.

 

C. S. Lewis에 대한 저의 추억은 결코 적지 않습니다. 언제부터, 어떻게 읽게 되었는지 그 근원을 알 수 없지만 번역된 모든 책을 다 읽겠다는 다짐으로 루이스의 책들을 사들였고 읽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은 아무래도 <순전한 기독교>일 겁니다. 또한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도 무척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감동적인 책은 루이스의 회심을 다룬 <뜻밖의 기쁨>이란 책이었습니다. 자전 소설처럼 써 내려간 그의 회심 이야기는 노크라는 단어에서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하나님은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완악한 루이스의 마음의 문 앞에 섭니다. 그리고 노크합니다. 똑똑똑. 노크하시는 하나님, 그 신비스러운 정의에 울컥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찾아오시니까요. 그리고 노크하시죠. 노크하시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우리와 교제하시고 싶기 때문이죠. 요한계시록 3:20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오늘 이 책을 통해 당신과 저의 마음을 노크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길 원합니다. 이 책은 어떤 사람이 루이스가 무신론자 일 때 던진 질문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왜 하나님을 믿지 않느냐?”

 

루이스는 답변합니다. 우주를 보라. 얼마나 어둡고 추운가. 자연계를 보라 서로 먹고 먹힌다. 그들은 삶 자체가 고통이다. 인간은 어떤가? 역시 삶 자체가 고통이 아닌가? 가난, 사기, 전쟁과 질병과 테러가 난무하다. 그리고 마지막 결론을 내립니다.

 

당신이 이런 우주를 자비롭고 전능한 영의 작품으로 믿으라고 한다면, 저는 모든 증거가 오히려 정반대의 결론을 가리키고 있다고 대답하겠습니다. 즉 우주의 배후에는 어떤 영도 존재하지 않거나, 선과 악에 무관심한 영이 존재하거나, 악한 영이 존재하거나 셋 중에 하나라는 것입니다”(19).

 

저는 루이스의 대답이 결코 가볍거나 우습게 여길 것이 아니라고 확신합니다. 정말 우주나 세상을 볼 때 거짓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발달사를 보십시오. 진화론자들이든 성경이 말하는 역사든지 간에 인류의 역사에서 평화로운 적이 몇 번이나 있었고, 행복하고 죽음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간이 존재하기나 했나요? 석기에서 청동기로 넘어갈 때 사람들은 새로운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믿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역시 불행했습니다. 그들은 더 강력한 무기로 서로를 죽이고 정복했습니다. 철기 시대로 넘어가도, 최첨단 핵의 시대가 도래했어도 사람들은 여전히 두려워하고 삶의 짐을 무겁게 지고 가고 있습니다. 과학의 발달과 인간의 행복은 절대 정비례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고통스러운 존재입니다. 루이스는 1장을 마무리하면서 고통을 배제한다는 것은 삶 그 자체를 배제하는 것’(50)이라고 단언합니다.

 

그래요. 맞아요. 삶이 고통이에요. 그럼 왜 고통이 찾아올까요. 하나님은 세상을 선하게 지으셨는데 세상에는 왜 악이 있고, 고통이 존재할까요? 어거스틴이 한때 빠졌던 마니교처럼 간편하게 세상에 선과 악이 동시에 존재하며 서로 싸운다고 말하고 싶은 충동에 빠져들 것 같습니다. 세상을 그렇게 단순하게 보기에 우리가 가진 기독교 신앙은 만만하지 않습니다. 루이스는 다시 하나님의 선함이 무엇인지 탐색해 들어갑니다. 하나님의 선한을 이야기하는 루이스는 갑자기 적자와 서자의 이야기를 끌고 옵니다. 히브리서에 보면 아들을 징계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12:6-9).

 

사랑하시기 때문에 징계하시는 것이고, 그 징계는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당연히 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꾸짖고 책망하신 적은 자주 있었지만 우리를 경멸하신 적은 단 한 번도 없’(61)습니다. 맞아요.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속의 악함을 고난을 통해 징계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더 사랑하지 말고 덜 사랑해 주기를 바라게 됩니다(63). 당신은 이 부분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는 사실 이 부분을 읽고 마음에 많이 찔림을 받았어요. 그러나 여전히 이 무거운 짐을 지기 싫어 마음으로는 하나님께서 덜 사랑해 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그냥 평범하게 살고 싶을 뿐이니까요.

 

그런데 루이스는 우리의 그런 마음을 간파했는지, ‘하나님의 사랑을 향해 현재의 우리 모습에 만족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께 하나님이기를 그만 두시라고 요구하는 것’(70)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 안에 남아있는 흠들을 고치시고 회복시키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 표현은 박영선 목사의 하나님의 열심이란 책에서 말한 그 의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니까요. 질투는 사랑이고, 그 사랑은 우리를 향한 거룩의 열망이니까요. 맥스 루카도의 예수님처럼 이란 책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지만 변화되기를 원하신다는 말도 통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께 덜 사랑해달라고 말할 수도 없고, 그만 멈추어 달라고 기도할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주시는 고난과 고통을 감사함으로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게 너무나 아프고 힘이 드네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싶지만 고통으로 찾아오는 사랑을 누가 환영하겠습니까? 부모는 자식이 거룩하게 되기를 바라지만 고통 속에서 지내기를 바라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고통을 싫어하는 인간의 본성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고통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싶으면서도 괴로움을 싫어하는 딜레마에 빠진 인간의 실존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자유의지론>에서 악의 기원을 정욕에 정복된 의지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성령의 지배를 받지 못하는 자연인들은 의지의 자유를 탐욕에게 빼앗겨 필연적 멸망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거듭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악의 습성을 남아있는 육체를 벗지 않는 한 어느 정도의 악을 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불가피하게 고난을 주시며, 고통은 우리 안의 탐욕을 말씀에 굴복시키게 만듭니다. 고통은 우리를 떠날 수 없습니다. 고통은 우리에게 넌 아직 영화에 이르지 않았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고통을 통해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우리는 그 사랑에 주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너무나 아픈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쾌락 속에서 우리에게 속삭이시고, 양심 속에서 말씀하시며, 고통 속에서 소리치십니다. 고통은 귀먹은 세상을 불러 깨우는 하나님의 메가폰입니다”(141).

 

고통은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우리를 사랑한다는 사랑의 세리머니입니다. 고통이 없는 자들은 영혼의 잠을 자는 자들이며, 죽은 자들입니다. 키에르케고어는 <스스로 판단하라>에서 잠자는 자들, 즉 술 취한 자들에 대해 경고합니다.

 

결과적으로 세속주의는 기독교가 술 취했다고 생각하고 기독교는 세속주의가 술 취했다고 생각한다”(11).

 

고통은 만사가 잘 돌아가고 있다는 환상을 깨뜨립니다. 실제로 우리가 당하는 고통은 하나님의 고통입니다. 죄인들을 구원(사랑)하기 위해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입니다. 그것은 아픔이고 고통입니다. 십자가는 사랑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진노의 표상입니다. 그러나 결국 십자가는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러브콜이 됩니다.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면 할수록 인간에게 고통은 피할 수 없는 운명임이 분명합니다. 간사하고 악한 인간은 고통이 사라지는 순간 다시 세상의 허무한 장난감’(160)에 한눈을 팔고, ‘싫어하는 목욕을 끝낸 강아지 꼴’(161)이 되어 더러운 거름 더미로 자신의 몸을 던질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에게 고통은 필연이고 운명이 분명합니다. 그런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결코 달갑지 않고 현실을 부정하고 싶지만 어쩔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고통이 깊어지면 영혼의 성장과 인격의 성숙을 이루어 갑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파괴적인 효과’(241)를 내기도 합니다. 이것은 고통의 원인을 직시하거나 알아보지 못할 때입니다.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묻고 우리 안에 있는 악을 버리기를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도 분명히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충고했습니다(16:24). 만약 우리가 현재의 고통을 잘 참고 이겨낸다면 분명 우리에게 좋은 미래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현세이든 내세이든 분명히 비교할 수 없는 영관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받는 딸 후우카여! 힘을 내십시오. 아직 우리가 절망할 때는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고난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는 뜻이고, 말씀하고 계신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주어진 이 기회들을 불평과 원망으로 채우지 말고 더 깊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감사하는 시간으로 채워가길 원합니다. 우리가 날마다 더 거룩하여진다면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얼마나 더 기쁠까요? 또한 한 편으로 고통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 질 멋진 기회를 붙잡는 수고 또한 멈추지 않길 소망해 봅니다. 루이스가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이렇게 힘을 주네요.

 

고통은 영웅의 자질을 드러낼 기회를 제공합니다. 그리고 놀라울 만큼 많은 이들이 그 기회를 잡고 있습니다”(242).

 

그러니 조금 더 힘내요. 고난은 우리를 본질에 천착하게 합니다. 어쩌면 고난은 우리 둘 사이의 접합제가 되어 사랑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하고, 환상이 아닌 진정한 서로의 모습을 보게 하여 사랑으로 하나되게 하실 것입니다. 고난은 결국 거룩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이고,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속삭임이라 확신합니다. 저도 당신과 함께 하겠습니다. 고난과 슬픔의 터널을 함께 지나는 동안 든든한 영혼의 동반자로 세워지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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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자유주의는 다른 종교다 기독교와 자유주의는 다른 종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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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G. 메이첸/황영철/복있는사람/조정의 편집인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 있다. 역사적으로 적실한 내용을 탁월하게 담고 있는 책, 그래서 굉장히 많은 세월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의미 있고 도전을 주는 책. 메이첸의 <기독교와 자유주의>가 그런 책 중에 하나다. 웨인 그루뎀은 추천사에서 “나는 모든 신학 입문 강의에서 이 책을 필독서로 삼고 있다”라고 말했다. 지금의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을 설립하게 된 배경이자 수많은 선교사를 파송하는 사역을 시작하게 만든 계기, 자유주의 신학과 논쟁하는 데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전제를 구축한 책이 바로 <기독교와 자유주의>이다...
이제는 성령론을 바르게 정립할 때다 이제는 성령론을 바르게 정립할 때다
삼위일체론적 성령신학
유태화/아바서원/조정의 편집인


삼위일체론은 교회사 초기부터 교회 안에 큰 문제를 일으켰다.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에 관한 반복된 논쟁은 결국 싸움에서 진 상대방을 이단으로 축출하기에 이르렀고, 다른 측면에서 이는 성경이 말하는 삼위일체론을 자연스럽게 정립해 가는 과정으로 작용했다. 이렇게 정립된 삼위일체론은 성경을 진지하게 믿는 모든 교회가 공통적으로 수용하는 건전한 교리가 되었다. 초기 기독교가 기독론 때문에 삼위일체론을 정립할 필요가 있었다면, 비교적 최근에 교회가 겪고 있는 교리적-실천적 문제는 성령론 때문이다. 성령에 관한 가르침 자체가 너무 빈약한 것도...
예수님을 만나면 영원한 행복이 시작됩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영원한 행복이 시작됩니다
만화,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조현삼 글 크레마인드 그림/생명의말씀사/조정의 편집인


'감자탕교회’로 알려진 서울광염교회 담임목사 조현삼은 처음 교회를 개척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약 30년 동안 전도에 열정적이었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전도지를 만들었고 그 결과물이 바로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라는 전도 책자였다. 믿음이 없는 대상자를 염두에 두고, 읽기만 해도 복음이 선포되기를 바라는 내용으로, 성경을 기반으로 한, 예수님 중심적인 전도지를 책으로 출간하기까지 했다. 그 책이 만화로 나온 것이 바로 <만화: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이다(생명의말씀사, 2023). 기본적인 내용(글)은...
정치를 말하기 전, 꼭 한 번 읽어봐야 할 책 정치를 말하기 전, 꼭 한 번 읽어봐야 할 책
웨인 그루뎀의 성경과 정치(상)
웨인 그루뎀/조평세/도서출판언약/조정의 편집인


웨인 그루뎀은 <조직신학>, <기독교 윤리학>을 통하여 복음주의적 교리와 실천을 체계적으로 정립하고 가르쳐온 실력 있는 학자다. 현재 미국 애리조나 피닉스 신학교에서 가르치고 있으며, ESV 성경 번역 감독과 ESV 스터디 바이블 총괄 편집을 하기도 했다. 2010년 그루뎀이 이 책 <Politics - According to the Bible>을 냈을 때, 정말 탁월한 저자라고 생각했다. 복잡하고 다양한 정치 현안에 관하여 그루뎀 만큼 조직적으로 풀어낼 만한 사람이 없을 것 같고, 또 <복음주...
바람이 불 때, 예수님 손을 더 굳게 붙잡으라 바람이 불 때, 예수님 손을 더 굳게 붙잡으라
하나님을 신뢰할 수 없을 때
해럴드 센크바일/김태형/구름이머무는동안/조정의 편집인


우주에서 가장 막강한 힘과 지혜를 가지고 있어서 하지 못하는 일이 없고 알지 못하는 것이 없는 신이 있다면, 그리고 그 신이 나를 너무 사랑해서 자기의 하나뿐인 아들을 내어주기까지 했다면, 그러면 내 삶은 형통하고 행복하기만 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런데 “하나님을 신뢰할 수 없을 때”가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 분명한 간극을 줄어들게 하는 지혜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특별히 삶이 곤고하고 괴로우며 견딜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울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아니, 하나님은 정말 계시는가? 고통의 문제는 기독교를 가장 의심스...
하나님을 안으면 불안과 함께 잘 지낼 수 있다 하나님을 안으면 불안과 함께 잘 지낼 수 있다
당신은 불안을 안고 잘 지내는 사람
헬렌 손/신하영/좋은씨앗/조정의 편집인


제목이 독특하다. <당신은 불안을 안고 잘 지내는 사람>. 원제는 “Hope in an Anxious World”으로, 직역하면 ‘불안한 세상 가운데 소망’ 정도가 될 것이다. 무난한 책 제목을 독특한 제목으로 바꾼 이유는 이 책의 저자인 헬렌 손(한국 발음 ‘손’이 아니라 ‘Thorne, ‘톤’에 가까운 ‘쏜’)이 이 책을 통하여 우리 모두가 불안을 안고 살아간다는 현실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그 가운데 우리가 불안을 안고 잘 지낼 수 있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 말하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저자는 불안을 감쪽...
우동 한 그릇이 주는 감동 우동 한 그릇이 주는 감동
우동 한 그릇
구리 료헤이/최영혁/청조사/고경태 편집위원


일본 작가 구리 료헤이가 쓴 <우동 한 그릇>(1989년)이라는 책이 있다. 1989년 2월 일본 국회 예산 심의위원회에서 공명당의 오쿠보 의원이 대정부 질문에서 질문이 아닌 이 소설책을 읽어서 화제였다. 의원들은 오쿠보 의원의 행위에 대해 비난을 한 것이 아니라 함께 울었다고 한다. 예산 심의에서 <우동 한 그릇>를 낭독한 의원의 행동을 이해하기 어려운데, 함께한 의원들이 울면서 들었다는 것도 그렇게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우리나라에는 40여년 전에 창조사에서 번역해서 출판하고 있다. <...
'너'의 고통에 반응하는 영성 '너'의 고통에 반응하는 영성
영성 없는 진보-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를 생각함
김상봉/온뜰/모중현 편집위원


누군가를 이겨야만 끝나는 전쟁과 같습니다. '역사적 사실'이나 '사건의 진실 여부'보다 자신의 정치 성향에 따라 시비가 결정됩니다. 사용하는 언어는 같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가 매우 다릅니다. 자신과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을 적으로 간주하는 시대입니다. ​지금의 우리나라를 보면 숨이 막혀 옵니다. 솔직하게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기 어렵습니다. 기본적인 소통이 되지 않다 보니 대화의 가능성조차 없습니다. 서로는 상대방을 향해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저렇게 비상식적이고 합리적이지 않은 해괴망측한 사람을 지지하지?'​민주주...
우리에게 '희망'은 존재하는가? 우리에게 '희망'은 존재하는가?
희망의 신학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이신건/대한기독교서회/모중현 편집위원


세상이나 현실을 바라볼 때 좌절하게 됩니다. 언제 세상이 옳은 방향, 좋은 방향으로 변화될지에 대한 기대까지 사라지게 만듭니다. 여전히 세상은 잔혹하고, 전쟁은 끊이지 않습니다. 우리의 일상에서도 각자의 이익을 위해 상대방의 사소한 실수는 크게 부각시키며, 자신의 잘못에는 관대합니다.​자본의 노예가 되어버린 사회는 새로운 계급이 형성됩니다. 사회적 제도로 인한 계층 구조는 아니지만, 부자와 가난한 자의 위치는 점점 더 멀어집니다. 가진 자는 현대 사회에서 더 많은 힘을 얻고, 그 힘을 자유롭게 사용합니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힘없는...
칠십인역에 대한 새로운 이해 칠십인역에 대한 새로운 이해
칠십인역 입문
윌리엄 A. 로스(William A. Ross), 그레고리 R. 래니어(Gregory R. Lanier/이민희/북오븐/모중현 편집위원


목회자들이나 신학생들에게 칠십인역이 그렇게 낯설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칠십인역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는 천차만별입니다. 70명의 번역자가 아닌 72명의 유대 학자들이 번역했다는 정도를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지적 만족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실제로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경이 그리스어로 번역된 것은 시기와 장소를 특정할 수 없습니다. 칠십인역에 대한 우리의 정보는 『아리스테아스의 편지』의 설명입니다.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포스의 요청으로, 72명의 번역가들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파견되어 프톨레마이오스 궁궐에서 72일만에 과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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