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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이 6월 항쟁 때 ‘50년대’로 가도 좋다고 허락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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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1. 26. 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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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이 6월 항쟁 때 ‘50년대’로 가도 좋다고 허락했나요?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 6:34)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대하 7:1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마 7:24)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롬 9:8)

 

 

0. 국민이 6월 항쟁 때 ‘50년대’로 가도 좋다고 허락했나요?

⑴ 6월 항쟁 = 反共→ 좌익 제도화

⑵ 민주화 체제는 50년대 체제의 부활이었다.

⑶. 한국인 본성과 국가체제

⑷ ‘일반 국민의 사고’와 ‘드러난 현실’의 차이

⑸ 모든 것의 근원. 한국인의 人性에 대한 쌩뚱맞은 착각. 한국에 시민사회가 있다는 착각.

⑹ 권위주의 정치 vs 식민사관

⑺ 2014년에 되새겨 본 87년 6월 항쟁의 평가

⑻ 어떻게 이 상황을 다시 회복시킬 수 있을까?

 

Ⅰ.

 

1. 사회계약론

㈎ 홉스

① 공포의 시대

② 자연상태

㈏ 루소

㈐ 로크

㈑ 헤겔

㈒ 칸트

 

2. 공론장

⑴ 유교 공론장

⑵ 하버마스

⑶  동독의 붕괴

⑷ 공론장과 시민사회

⑸ 한국 사회와 공론장

 

3. 시민

⑴ 87년 이후 복원된 한국의 시민사회

⑵ 민중민주단체로 불려야 할 시민사회 관련 판례들

⑶ 시민사회론

 

4. 근대화

⑴ 근대화 以前

⑵ 국가중심 경제발전

⑶ 脫근대(50년대로 복귀)로서의 민주화

⑷ 유교자본주의론

⑸ 북한 공산당은 천도교 종교 심리에 토대하여 만들어졌다.

 

5. 3.1운동 : 한국현대사에서 근대민족담론을 지향한 계약주의 전통

 

 

1, 붕당

⑴ 정치집단으로서의 붕당

⑵ 유교(샤머니즘)의 산물인 붕당과 서구 문명 산물인 사회계약 기반 시민사회

⑶ 붕당정치와 공론 파괴에 기반한 비극

 

2. 민주당

⑴ 내각책임제와 붕당 균열 폭발

⑵ 제2공화국은 무능 정부였나?

⑶ 붕당 극복의 중요성

⑷ 붕당은 붕당을 낳고,

 

3. 이승만

⑴ 50년대 경제

⑵ ‘충성하는 이’를 편애한 권위주의 정치

⑶ 건국과정

⑷ 종북좌파 민족해방운동의 敵

⑸ 4․19 직전

 

4. 박정희

⑴ 반공이 국시였던 516정부

⑵ 북한과 좌파진영의 오판, 박정희는 진보인사 아닌가?

⑶ 근대화 운동

⑷ 파벌 = 非 생산적

⑸ 민중민주주의 운동의 저항대상

⑹ 한국적 민주주의

 

5. 반공

⑴ 개신교 반공주의

⑵ ‘억압․과잉․폭력’이란 표현으로 기록된 역사

 

6. 혁신계 통일운동

⑴ 625 전쟁을 둘러싼 혈연주의적 뒷끝 + 계급혁명 사상

⑵ 일반국민에겐 강한 규제 필요성 인식. 당사자는 억울한 피해의식

⑶ 혁신계 통일운동 = 친북좌파 운동의 흐름

 

국민이 6월 항쟁 때 ‘50년대’로 가도 좋다고 허락했나요?

 

1) 좌익담론이 제도권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6월 항쟁 이후다. 53년 휴전부터 34년이 지난 시점이다. 반공 성향 2세대는 많이 흘렀으니 변했을 것이라 했고, 반공성향 1세대는 그들은 변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언뜻 보면, 2세대가 이긴 것 같다. 실제로 脫냉전이란 이름하에 2세대가 중용되며, 反共코드는 90년대이후 장기적으로 사회의 제도권에서 축출됐다. 그러나, 제도권의 중심을 차지한 좌익진영은 제도권 안의 반공 2세대를 축출했다. 고로, 사회는 좌편향 지식만을 말하는 권력만 남았다.

 

ⓐ 50년대는 국가에 복속한 엘리트의 부정한 이익. 엘리트가 다 해먹는 체제. 빈곤의 악순환, 약체정부로 역사책은 기록한다. 정확히 말하면, 원조경제  궁물을 지향한 친일관료 중심 대기업집단과, 각 대학 지하조직을 이끄는 혁신계가 공존한 무질서의 극대화시대였다.

 

ⓑ 6월 항쟁은 민주항쟁으로 불린다.

-민주화란 표현은 '중의'적이다. 미국 보호 아래 주도되는 안보 우산 속에서 '민주화'는 미국식 민주주의를 뜻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민중민주주의 계급혁명의 진보적 민주주의를 뜻한다. 대체로, 좌파는 미국과 제도권에서는 미국식 보편민주주의로 포장하면서, 속으로는 민중민주주의 현실임을 감추지 않고 있다. 천도교 종교다원주의 어법으로 접붙이기 공작을 시도했다.

 

- 6월 항쟁으로 인해서 모든 것을 바꾸는 것이 가능했다면, 그러면 국민에 위임받은 한계가 어디까지냐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한계를 넘어서는 부분은 ‘국민저항권’의 가능영역이 되기 때문이다. 87년 6월 항쟁 때 18세 이상이었던 국민을 대상으로 한 심층 여론조사가 절실한 시점이 됐다.

 

2) 민주화체제는 50년대 체제의 부활이었다.

- 좌로든 우로든 엘리트 중심주의이며, 국민은 엘리트에 의타주의적으로 영합해서 복속되는 인질로만 가능했다. 그 어떤 정책 담론도 투명하지 않으며, 엘리트끼리만 알 수 있는 암호화됐다. 모든 것이 오픈되면서 모든 것이 숨어 버린다.

 

3) 서구 사회는 인간 본성과 국가체제의 상응을 말한다.

민주화세력은 한국이 서구식 보편민주주의가 가능한 것처럼 말했다. 반면 반공세력은 한국인은 결코 붕당 문화를 벗을 수 없다고 보았다.

 

제도적 장치는 민주화세력 기준으로 규제를 다 풀었는데, 드러나는 것은 엘리트의 甲질 폭주다. 그로 인해서 드러나는 부작용을 호소하려고 하는데, 국가는 분권으로 병신된 경우를 만나는 게 '세월호 사태'의 본질이다. (샤머니즘 인간본성으로서 중앙집권주의 체질인 엘리트와 국민, 그리고 계약주의 법인식이 가능한 전제로 다 쪼개놓은 법→ 엘리트의 甲질은 노터치랑께)

 

4) 인간본성과 국가체제 상응에 대한 국민적 혼란은, 수 많은 국민적 인식착오를 낳았다.

 

- 대학의 자율성은 순수학문의 가능성으로 그런 줄 알았는데, 대학의 민주기지화 때문

 

- 언론규제 해제는 정말 순수공론을 위한 줄 알았는데, '언론사-정당-기업의 학연 지연 이해관계 연합 때문

 

- 매사에 샤머니즘 기복주의 감성 문화 자극 하면서, 행정은 지방자치

 

- 학연·지연 마피아 연고주의와 아예 국회는 처음부터 민주화 관련 마피아성을 밝히는데, 시민단체가 '자연'적 합목적성을 지향할까? 그 마피아의 꼬붕짓할까? 당연히 꼬붕짓이다. 그러나, 사회는 막히면 자연적 합목적성을 할 것인양 뻥을 치신다.

 

- 헌법책들은 대한민국 국가계약 + 북한 자유화가 통일

  그러나 정치인들은 대한민국 국가계약 관련 문화는 강화는 안되고, 그것을 느슨하게 하는 방향만 된다네. 그 이면에는 월북자가족이 배후에서 이끌고 있고, 그것에 연고주의로 정치가 단절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 통일운동 관련으로 조화와 균형 이야기가 많다. 국민은 막연한 피상성을 말하나, 사실은 부분적 전공자들이 정치에 접근해서 틀렸네 마네 한마디도 못하게 하려는 모순논리다. 물론, 계산 불가 모순상태는 엘리트가 말하는 것만 정답이 된다.

 

- 엘리트에 의타적 상태로 언론은 엘리트 인기주의를 몰아주고, 그런 데에 낚인 대중인 엘리트에 제대로 우상神처럼 칭얼댄다. 그로면서 정치인은 추종자에 부담감 느끼고, 그 부담감은 국가재정걸레로 국민에 고통으로 복수한다. 이는 다시 찾아온 신판 빈곤의 악순환이다.

 

- 통일대통령 담론도 문제가 있다. 통일전선전술 담론과 분리가 되지 않는다. 단선연계 차원으로 공산당과 자기가 직접 연결되면서 어중이 떠중이와 매개하는 것은, 샤머니즘 조화주의 토착정서와 연결된다. 실제로, 이런 차원으로 일제시대 지역공산당은 사림파 향약 조직이 변형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 조선조는 백성의 나라를 말하지만 철두철미 사대부의 나라였고, 북한공산당은 인민의 나라를 말하지만 철두철미 공산당의 나라. 그리고 공산당은 지도자 김일성-김정일-김정은 3부자가 된다.

 

5) 한국에 시민사회가 있고 공론장이 있다는 생각은 착각이다. 국가 권위주의 시대와는 다른 방식으로, 일반 국민의사를 다른 방향에서 무시하고 있다. 대체로, 민주화 이후 시민사회는 특정 엘리트 권력의 지배욕구를 그대로 전하는 통로가 되고, 일반 국민과 위임관계 및 자연의 합목적성 지향이 전혀 안 보인다.

 

6) 붕당 지향적으로 사는 차원은 사회에, 서로 다른 가치관의 충돌과 대화결여로 혼란의 극대화를 안겨준다. 그 혼란을 줄이는 게 바로 권위주의였다.

 

경제발전은 결국 기업의 창의력이 예측가능한 법질서를 기반한다. 간단히 말해서 권위주의 정부는 붕당질서로 인한 무질서를 억누르지 않으면 중화학공업화를 이룰 수 없었다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붕당은 이기적 나르시시즘이 있는데, 이런 팩트를 허용할 수 없었다.이런 팩트만 말하면 식민사관으로 봉쇄했다.

 

72-87년은 극도의 권위주의시대로 말한다. 그러나, 사실은 붕당정서에 기초한 통일전선전술의 극대화시대로 말하는 게 더 온당하다. (군사정권의 규제로 인한 발언 봉쇄보다, 지금의 돈 지원과 학연으로 엮어서 발언의 다양성을 차단하는 게 더 '저질'정치다.)

 

7) 2014년에 87년 6월 항쟁을 바라보면, 48년부터 63년까지 진행된 붕당질서로 인한 무질서를 기독교도덕으로 억눌러 성장에너지로 바꾸는 힘의 중단이다. 그리고, 무질서가 차츰 복원돼서 도로 원위치해서 50년대의 빈곤의 악순환에 다시 빠진 게 현재다. 지금, 성장을 위해서 규제해제가 필요한 게 아니라, 냉정히 말해서 국민통합과 소통을 이루는 게 필요하다. 지금 국회마피아는 정신없이 붕당 지향적 이기적 법을 만든다. 이런 속에서 규제해제 논하기는 무책임하게 만드는 것 못지 않은, 무책임한 벗기기라는 지적을 피할 수 없다.

 

8)  하나의 민중신학 코드를 가진 패거리가 영원히 집권하기 위해, 두 패로 나뉘어 노론-소론 연합정권 때처럼 하며, 다른 담론을 일체 받아들이지 않을 때, 국가분열은 항구화되고 그로 인해서 점점 無秩序가 증가돼 제2의 亡國이 도래할 것은 반드시 일어날 일이다. 제2망국이 적화통일로 드러나지 않을까 심각하게 두렵다.

→ 국민은 엘리트에 욕심 버리라며, 하나님 나라 공의 차원에서 무질서의 증가를 억누르는 개혁을 해야 한다. 그러나 국민대중은 엘리트 앞에 너무 약하다. 기독교 엘리트에 ‘복음적인 행동을 하세요’하는 말 밖엔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리고, 더 신앙의 삶을 견결히 하는 수 밖에 없다.

 

 

 

0. 국민이 6월 항쟁 때 ‘50년대’로 가도 좋다고 허락했나요?

 

좌파 기록 50년대

군사정부 기록 50년대

- 친일 자본가가 국가에 복속 부정한 이익

- 일반대중은 없다. 엘리트가 다 해 먹었다.

- 군사정부에 비한 상대적 진보성(기복주의 빨아줬으니)

- 빈곤의 악순환

- 약체 정부

- 혼란

 

 

⑴ 6월 항쟁 = 反共→ 좌익 제도화

  ㉠. 6.25 전쟁 이후 얼마나 흘렀느냐, 좌익은 변했다. 괜찮다. - 2세대

  ㉡. 그들은 변하지 않는다. 6.25는 지속된다. - 1세대

※. 언뜻 보면, 2세대가 이긴 것 같다. 실제로 脫냉전이란 이름하에 2세대가 중용되며, 反共코드는 90년대이후 장기적으로 사회의 제도권에서 축출됐다. 그러나, 제도권의 중심을 차지한 좌익진영은 제도권 안의 반공 2세대를 축출했다. 고로, 사회는 좌편향 지식만을 말하는 권력만 남았다.

㈎ 6월 항쟁 이후 사회 변화 = 일종의 사회계약적 상태

   - 국민에 엘리트가 ‘위임’을 받고 변화시켰다.

   → 위임의 한계가 어디까지냐? 중요한 문제. (국민저항권의 근거화)

◆. 최근 6월 항쟁 관련 논문들의 경향 : 6월 항쟁 + 7•8월 노동자 대투쟁+민족해방이데올로기 숙지 와 동의가 1987년 6월 항쟁 때 있었다. → 이는 명백한 허위사실.

 

 *. 6월 항쟁 당시에 모두에 공개된 수준은

- 대통령 직선제 / 박종철 인권/ 보편적 자유민주주의.

- ([신동아]에 그려진 당시 기사를 봐도 시위대는 인위적으로 자신들의 계급운동적 실체를 대중들이 알게 하지 못하게 하는 움직임이 있었음.)

6•15와 10•4를 포함한 대부분의 좌파통일안은, 87년 6월 항쟁 당시에 국민의 민족해방운동에 대한 동의와 그에 대한 ‘위임’이 있었다는 전제가 깔림 → ‘동의’도 없었고 ‘위임’도 없었다.

 

6월 항쟁의 민중세력 승리 – 미국의 개입 + 反共으로 인해 국민대중의 공산주의 정보 ‘부족’과 이를 활용한 대중 속이기(人情작전) 성공

 - 좌익은 좌익을 아는 놈은 좌익 뿐이라면서, 암호(코드) 정치를 당연히 즐겼다.

 - 美國에서 민중진영의 反박정희 운동의 누적에 의한 영향과, 인식 착오를 겪는 대중을 진정한 의사표시로 이해하는 착오가 결합됐다.

 

 

⑵ 민주화 체제는 50년대 체제의 부활이었다.

 

50년대 

4•19 공간

이승만 체제

구파(윤보선)/ 신파 (장면)

엘리트 중심

국민 소외

63~87년 

근대화 체제

일반국민 중심

엘리트의 소외

87년 이후

민주화체제 

구파(김영삼)/신파(김대중) 

민중중심 눈속임

엘리트 위주 폭주

김영삼 때 신한국당 때 슬로건 : 박정희 以前에는 민주주의가 있었다.

→ 50년대 말 부패와, 그보다 더 부패했던 윤보선/장면 집권 시기의 그리움의 표현. (당시에는 그토록 당리당략적인 발언인지 알지 못했음)

 

박현채(김대중)의 ‘대중경제론’ : 美 공화당 신자유주의 + 민중민주주의 (反국가로서 공통분모)

   ㉠ 新자유주의 ‘작은 정부’ : 민주화 엘리트 위주를 위한 체제에 국가병신 만들기(신하 중심 체제에서 왕권제가 병신돼야 신하권력이 영원하듯) + 민주화엘리트 아닌 사람 쫓아내기 (민주화 엘리트가 아닌 이들에게만 작은 정부 명분으로 ‘엽관질’이 남발됐다)

   ㉡ 혁신계 통일안 논리의 적극 포용

대중경제론 = 민주당 신•구파 경제론 = 통일민주당 경제론

   - 혁신계 통일안에 반대하여 ‘보수’에 선들 이익은 민중좌파로 흐르고,

  - 혁신계 통일안에 줄 서면, 보수 전통은 궁물도 없다.

  

 

⑶. 한국인 본성과 국가체제

민주화세력 

한국인은 서구식 보편민주주의 가능

(계약주의 인식이 가능한 것처럼)

권위주의 정부 & 6•25세력

한국인의 서구식 가능성 부정

(한국인은 붕당 문화전통을 확 못 벗는다)

  ㈎. 87년 6월 항쟁 – 자연상태의 붕당(샤머니즘)정서를 보수기독교 정신으로 억눌러온 것의 폭발

  ㈏ 온 사회에 빚어지는 총체적 혼란 + 세월호 정국

    ㉠ 한국인은 붕당 정신을 결코 벗지 못했는데

    ㉡ 법질서는 계약주의 인식 속에서 분권화로 다 벗었고, 그런 전제로 갖가지 혼란

 

샤머니즘 

그리스 인본주의

제정일치 왕정희구

시민 민주주의

대통령제 불가피

(시민들은 결코 상호 배려로 제도를 만들지 못하며, 임금만 바라볼 것)

분권 정치

(시민들은 상호 배려로 원활한 제도를 만들 것이고, 국가주도 정치는 군더더기)

한국인이 실제로 계속 머물고 있는 정서

민주화 이후 만들어진 법 제도

   → 박근혜 정부는 김영삼 이후 존재한 경제 관료들의 담론을 민주화 정치권력의 당리당략에 오염되지 않은 가치중립적인 것으로 ‘誤認’

 

㈐ 한국인이 샤머니즘 상태에 머물렀는데 그리스 인본주의적 시민정치를 할 수 있으며 하고 있다는 문민 엘리트의 對 국민 억지의 시점은, 4.19 공간의 ‘윤보선/장면체제’의 문제

㉠ 붕당 – 대화 단절 • 사회 악순환 → 5•16 불가피 인정

㉡ 붕당이 시민민주주의다. 그러므로 5•16은 쿠데타다.

(5•16이 쿠데타라는 인식에 줄을 선 엘리트들은 논리적으로, ‘마피아’(붕당)문제로 국가기구가 꼬여서 생긴 문제에도, 지금이 시민민주주의가 대단히 잘되고 있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⑷ ‘일반 국민의 사고’와 ‘드러난 현실’의 차이

- 5.16은 군사쿠데타로 부정하다고 한다. 그러나, 민주화 체제의 승리는 ‘뻥치기 승리’아니가?

 

㈎ 김영삼 때 박세일씨의 백낙청 주도 문예통일전선 조직을 新자유주의 교육개혁 아래 메인으로 옮김. 통일전선 조직으로 “고도로 짜고친다”는 것을 대중 인지 실패, 서구식 시민주의로 짜고치는 조직이 ‘自然의 합목적성’을 향해 논증과 토론을 할 것이란 헛된 기대

 

㉠ 87년 헌법에서 기록된 ‘대학의 자율성’

일반 국민의 사고

진정한 순수학문을 위해 대학을 놔둬라

(순수한 액면가 차원의 엘리트 주장 인식)

- 국민들은 한국의 대학이 수직 서열 체계로 좁은 풀의 엘리트의 마피아 조직을 모름.

드러난 현실

대학의 ‘민주(좌파) 기지화’를 하는데, 국가는 손떼라. (학원의 좌익기지화를 방임해라)

-마피아 짓하면서 서구 시민주의 코스프레

 

㈏ 국가 규제만 사라지면, 언론은 진실대로 보도할까?

<학연•지연> --- <언론사> ---<정당> ---<기업>

(이해관계 연합)

  ㉠ 일반 국민 – 보편민주주의는 가능할 것이다. (커텐 뒤에 학연 지연 으로 얽혀지고, 양김씨로 수렴되는 것을 모른다)

  ㉡ 드러난 현실 – 드러난 현실은 이해관계로 언론은 특정정파의 이익을 편든다.

※. 英美 신자유주의 - 국가든 민간이든 권력집중은 자유를 침해한다.

  - 한국판 신자유주의(보수와 진보 모두)- 통일민주당 세력이 아닌 사람이 주도하는 國家의 분산 기능만 장려. 자신들의 붕당은 초집중. 그러면서, 자신들은 절대로 규제 안 받음.

 

㈐ 중앙집권 감성을 자극하는 샤머니즘문화를 채우고 실시하는 지방자치는 제대로?

  ㉠ 일반국민 - 아무리 분권해도 어려우면 ‘정부’ 찾고, ‘대통령’찾는다. (도대체, 지방자치를 왜 한 거야? )

  ㉡ 드러난 현실 – 관료의 부정 때 분권화로 병신 정부는 고치지 못하고,

                 위기시에 분권정부는 조직적 대응에 치명적 한계

   (붕당 이해관계로 왜곡될 것이 뻔한 것을, 그렇지 않다는 엘리트의 선전에 국민이 일방적 설계 당해서 빚어진 문제)

 

㈑ 마피아 연고주의가 많은데 시민단체 다운게 하나라도 있을까?

  ㉠ 일반 국민 – 국민을 진심으로 위하며 그 대변으로 시민가치를 해 주겠지

  ㉡ 드러난 현실 – 통일전선체, 혹은 모체가 되는 상부 정치세력의 핵심 엘리트 발언을 하위 단위에 그대로 전파하는 하수인

   (붕당 이해관계로 설정된 것을, 보편민주주의 표현으로 살짝이 포장한 것을 그대로 속은 문제)

 

㈒ 통일운동은 제대로일까?

  ㉠ 일반 국민 : 헌법 조문대로 모든 국민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 속에서 평화적 통일을 구현해주겠지. (자신들의 안정은 기본 메뉴)

  ㉡ 드러난 현실 : WCC 쪽의 민중신학 마피아 정치인의 헌법 질서 수호라는 검증안된 통일방안의 무차별적 획일화 적용. (국민의 안정이 없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물질적 낚시밥’을 던짐)

 (사실은 민중신학 한 정파이면서도, 그런 엘리트가 보수에 와서 연기를 하는 것을 실제로 변한 것처럼 속아서 빚어진 문제. 대동소이한 가치관으로 보수에서 보수지지층에 어거지로 퍼먹이면, 언론은 보수와 진보의 합의로 기록한다.)

 

반공

민주화 

국가안정 

   X

국가

한반도

민족(진보적 민족주의)

민족(48년 건국 반공민족주의)

국민 (48년 건국질서)

국민 (48년 건국질서 속 국민은 친일. 통일국가만)

이승만 대한민국 건국~ 박정희~전두환~노태우~… 現在

민주주의 민족전선~4.19 이후 혁신계 ~72-87년 통일전선 운동

대한민국 안정 속에 북한의 자유화

◆. 대한민국 문화 응집을 약화 + 헌법 골격 파괴+ 북한과 결속 – 좌파

◆. 대한민국 응집 약화+헌법 골격 부분파괴+북한공격 – 90년대 이후 김영삼계 보수

(민주화 이후 보수․진보 모두 국민안정은 관심 없다.)

 

- 반공인맥은 6.25 참전 세대 중심으로 이어졌다.

- 진보인맥은 4.19 세대 중에서 월북자 가족이 중심이 되고, 보수는 그런 쪽에 학연 가족주의로 분리가 되지 않는다. 반공인맥을 완전히 때려 부실 적으로 설정하거나(진보), 아니면 반공을 계승하는 척하면서 6.25 전란 속에서 핀 사회안정기제를 값싸게 무시하며-그런 피해는 반공 극우에 앞서 일반 국민이 받는데- 진보측과 끈이 단절되지 않음을 자랑스레 생각한다.(보수) 결론은 보수 진보 모두 엘리트 ‘당신’ 맘대로. 국민 민심은 우덜 인맥 언론이 설계해서 세뇌공작 해줄꺼야. 

 

- 보수는 국가안보와 국가관의 헌법학원론에 드러난 실체로서 사회계약론 차원으로 국가관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 이야기를 하면 어떻게 하든지 반공반탁을 피해갈 수 없고 그렇게 보면 통일민주당에 안 친했던 이철승 前의원을 이야기해야 한다.

- 민주화 됐다면서 어떻게 56년 이후 이승만 프레임, 유신 말기 박정희 프레임 같은 인물 영웅화로 논하며, 국가관으로 보편이성 담론으로서 사회계약주의는 포기?→ 보수 안에서 특정엘리트가 보수진영은 이렇게 붙들어 맸으니, 진보에 때리는 방향을 정해주는 건가??

- 정전협정이 부식돼 평화체제 개편 주장하면서, 전 지구적 시민질서로서 칸트의 ‘영구평화론’이란 평화체제 사회계약은 왜 안 말하지? 왜??

   

㈓ 통일운동과 연관된 문화로서 ‘조화․균형’

㉠ 일반 국민 : 그저 피상적 수준의 다양성 선호. + 획일주의보다 오순도순 하는 감정이 人情 넘친다는 수준.

㉡ 드러난 현실 : 모순 논리로 보편이성으로는 설명 안되는 담론을 전부 꽈 버려서, 해당 분야 부분전문가들의 반론을 차단하여, 엘리트끼리 다 해먹고 책임 안질 수 있는 시스템.

(1988년 KNCC 선언에서 시작하여, 신한국당을 거쳐 좌파정부를 거쳐, 한나라당 새누리당을 이어오는 이런 프레임은 보수와 진보의 합의 같다. 그러나, 사실은 민중신학 마피아 한 그룹이 두패로 나뉘어 왔다갔다 한 것이다.)

 

- 성장과 환경, 성장과 복지, 등 모순 어법의 조화 정답은 아무도 모른다. 그저, 무당이 되는데로 ‘대중 빨’ 좋은 것을 무차별적으로 연결하는 것을 정치에 끌어들이는 수준이다.

 

붕당---사람(엘리트) 중심--- 사람에 샤머니즘 기복주의 무당 呪術의 욕망 투사

성장 - 누구 관료 믿어 봐---잘 될꺼야

개혁 - 누구 관료 믿어봐 ---잘 될꺼야

(구조주의 神話분석론으로 보면, 『조선일보』의 경제관료 분석과 『오마이뉴스』와 『한겨레』의 개혁인사 분석이 거의 같은 어법으로 샤머니즘 기복욕망을 머리가 되는 엘리트에 꽂아넣는 무속신앙주의임을 알 수 있다.)

 

언론이 대중을 특정 엘리트에 의타적 상태로 몰아주기 → 정치인이 인기영합주의 이전에, 국민이 정치인에 뭐 달라 뭐 달라 응석 댐 → 정치인들은 자기 추종 응석 장이 달래기 →국가 재정 찢어진 걸레 짝 되기 (新版 ‘빈곤’의 악순환 - 50년대에 정치인들은 세계 최고 빈곤국이면서도 허벌나게 가난한 가까운 인맥에 인심 못 써서 안달 복달. 그로 인한 부패와 정치혼돈이 극에 달함. 이 짓거리 또 하고 있음. 아 놔!!! )



㈔ 정치인이 대중에 통일대통령담론을 기복신앙 코드로 몰아넣는 이유는??









통일전선전술 - 동학(천도교) 샤머니즘 (토착 종교속 사람 중심 연결고리)

지역(지하) 공산당 - 활동가당

 

 

지역공산당 

사림파 붕당

조직 중심

조직 수장 엘리트

(한국 공산당사는 파벌 오야붕 숫자만큼 파벌사)

우덜 선비를 중앙으로 모셔줄 캡짱 파워 道統 선비님께 받들어 총!!! 

목적

엘리트가 한번 거하게 세상 지배 해야 하지 않겠나?

無도덕적 입신양명

입신양명 빼면 선비는 시체지!!

하는 일

공산혁명은 나와바리 관리부터

중앙을 진출하려면 지역관리부터 해야지

- 박정희 대통령이 말하는 ‘좌파’를 朋黨으로 보는 것은 ‘관념론’이 아니라(조갑제기자의 해석은 어처구니 없는 誤讀이다), 실제로 ‘혁신계’ 좌파의 내면 코드가 사림파 향약의 朋黨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북한 공산당

사림파 붕당

그들의 꿈

노멘클라투라에 해당되는 혁명귀족 당관료

-온갖 공신전

王 세워 ‘공신전’돼서 특급 귀족 되면 좋겠네, 좋겠네

명분

인민의 나라

(그러나, 당관료가 다 해먹는 나라)

백성의 나라

(그러나, 사대부가 다 해먹는 나라)

 

 

 

 

 

백성을 위해서 모든 것을 다 해줄 것 처럼 말하는 정치인이 남김없이 국민의 ‘등골 브레이커’로서, 자기이익 챙기는 것이다. (국민에 기복주의 욕망 = 엘리트 밥줄로서 인기주의. 국민 위함 아님!)


민주화 이후 - 국민에 모든 것을 품어주는 다정다감한 ‘탕평군주’로서, 모든 것을 연결시키는 샤머니즘 조화주의가 강화된 이유는?

민주팔이 엘리트가 보수와 진보 나눠서서 엘리트끼리 다 해먹기 위해서,

- 노무현 때 관료가 박근혜 때 보이고, 아마도 차기 정부에 또 보일 것이다.

- 노무현 때 통일정책 설계하던 사람이 박근혜 때 보이고, 차기 정부에 또 보일 것이다.

국민은 핑계고, 엘리트 끼리 짜고 치고 다 해먹는다.

※.  탕평군주 神話 = “신하의 나라”의 눈가리개. 탕평군주는 신하 왕국에 성공한 바지저고리 오야붕.

 

⑸ 모든 것의 근원. 한국인의 人性에 대한 쌩뚱맞은 착각. 한국에 시민사회가 있다는 착각.


㉠ 공론장 = 시민사회의 존재

㉡ 시민사회 - 무역으로 富를 획득한 시민층의 존재

              (한국은 농사나 짓고 물물교환만 해서 성공하려면 한양으로 가야 혀.)

              他者와 더불어 공동체적 존재

             (아따 궁물은 혼자 먹는 것이지라. 뭘, 궁물을 같이 먹고 그러냐? )

 

자유민주주의 - 시민층의 자유로운 공공행위의 自然의 合目的性 수렴

→ 아따, 자연의 合目的性 ? 自然은 내 맘대로 조작되는겨. 알긋냐?

 

서구 시민단체

한국 시민단체

다원주의 질서 속 합목적성 구현

 

정치권력에 연결된 파워 논객의 주장을

고스란히 확산 전파시키는 시다발이 역할

 

다원적 절서 

 

학연․지연․연고주의

- 한국 시민단체는 불리할 때, 사실상 구현하지 않고 있는 다원주의 질서란 명분을 내세우고, 현실에서는 엘리트 마피아 끼리 연계된 고도로 조직적인 아시아 마피아주의(행님 알겠습니다)에, 이 사실을 모르는 얼치기 대중을 연결하는 구조다.

  

⑹ 권위주의 정치 vs 식민사관


- 고도로 붕당적으로 행동하나, 순수한 시민사회를 구현하고 있다고 믿는 패거리 안에서,

㉠ 붕당정치로 인한 무질서 상황을 개혁하여 국민의 편을 들어주는 것은 선량(?) 한 엘리트님을 괴롭히는 나쁜(?) 행위

㉡ 붕당정치로 겪는 차원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은 ‘일본 제국주의’에 비롯된 문제

엘리트님은 뭘해도 착각하고, 뭘해도 깨끗하고, 뭘 해도 오류 없으니까, 우덜 엘리트 하는 것에 ‘토’달지 말어라. (93년 이후 보수와 진보는 표현은 다르지만, 사실은 같은 말을 하고 있음→ 처음에 ‘통일민주당’ 하나 아니었나? )

㉢ 72-87년은 ‘권위주의정치’의 폭풍기? → 북괴와 결탁된 통일전선전술의 제대로 들썩이기란 근거는 왜 숨김. (국립중앙도서관 본관 6층 북한자료실에서, [로동신문] 제목 검색대에 ‘아무 대학’이름이나 넣고 쳐보라. 60-70년대에 시시콜콜하게 각 대학 운동권 조직이 북괴에 보고 바친게 드러난다. 이런 게, 민주화운동 단체는 전부가 정상행위로 보는 것이다.)

 

보이는 현실

진짜 진실

다원주의 정치에 공론장이 있는 것처럼

외부에 인지

모든 매스미디어에는 동일한 인맥의 엘리트가 파견분파 돼 있고, 고도로 언론 문화가 조작되고 있음

 

⑺ 2014년에 되새겨 본 87년 6월 항쟁의 평가

- 자연상태에서의 ‘亡國奴 유전자’에 대한 기독교 도덕으로 억누르는 것에서, 천도교 샤머니즘에 기토를 둔 민중신학 진영의 대중 선동 성공으로 망국노 유전자의 복귀? (50년대에 엘리트 중심에, 일반 국민이 다 낮게 깔아앉아서, 폭동 아니면 억울함을 하소연할 데 없는 상황 연출?)

 

48-63

붕당 중심

(엘리트중심)

샤머니즘 기복주의(제사장에 몰아줌)

63-87

기독교도덕

(일반국민 중심)

샤머니즘 기복주의 엄금

87-현재 

붕당중심

(샤머니즘에 왜곡된 기독교-민중신학: 엘리트 중심)

 

 

⑻ 어떻게 이 상황을 다시 회복시킬 수 있을까?


㈎ 먼저 하나님 나라를 구하며, ‘먼저 방석’․‘먼저 궁물’․‘먼저 공신’을 찾는 문화를 개혁하자 → 한국 사회 혼란의 근원은 ‘기독교 엘리트’에, 그리고 궁물과 방석 찾기에 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 6:34)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 거리로 삼을지어다(시 37:3)

→ 조선왕조는 명목상 백성이 근본이라 했지만 사대부의 나라.

→ 민주화시대 좌파는 명목상 민중을 위한다지면, 민중을 위하는 개혁 담론이란 呪術을 거느린 개혁인사로서 민주유공자의 나라였다. 그리고 그에 더불어 공생을 하는 차원은 대기업 甲질을 뒤봐주는 엘리트의 나라였다.

(일반 국민의 참여를 논한다면, 정치가 투명하게 보편적 이론에 기초돼야 한다. 평화체제를 논하면서도 국민에 ‘평화체제’담론에 평소에 엘리트가 한번도 원래 이론을 소개 안해주는 것은, 엘리트가 말해주는 데로 믿어라 하는 고도로 엘리트 맘대로 주의)

 

㈏ 악한 길에서 떠나라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대하 7:14)

- 골육상쟁, 당파․파쟁, 공의가 없는 정치

국민 각자에 이조 500년 망국노 유전자인 붕당 유전자가 있음을 솔직히 인정하고, 이것을 서로 고치기 위해 어떻게 서로 경주할까 그런 이야기를 나누기를 그치지 말아야 한다.

 

 

민중신학

조갑제닷컴 

척결대상 

구조악으로서 자본주의

친북좌파 

응집 대상

찍어놓은 정당, 그리고 지도자

찍어 놓은 정당, 그리고 지도자

최종목적

(남한 붕괴?)통일

북한 붕괴 통일

 ※. 한국의 통일담론은 ‘에큐메니칼 기독교’라면서 예수 제자이되 다르게 믿는 지체의 얼굴은 바라보지 못할까?


㈐ 자유민주주의를 기독교도덕위에 반석에 세우자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마 7:24)

- 정당한 자유는 방종이 아님.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고후 3:17)

 

㈑ 이웃을 바라보자. 그리고 그 마음으로 북한동포와 세계를 바라보자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롬 9:3)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롬 9:8)

→ 한국 개신교는 성리학 당쟁가들이 기독교로 옷 바꿔 입은 거 아닌가?

㉠ 염전노예․좌파 인권의 공존

㉡ 북한인권․국민기본권 몰인식(남한 국민의 정당한 항의 무시)의 공존

㉢ 서울시의 좌파 약진의 꼼수를 앉은 인권 담론

(현재 한국 에큐메니칼 교회의 기독교 도덕은 성령의 조명을 받았다기보다, 정파의 이해관계가 성령의 조명을 압도하는 측면이 대단히 강하다)

※ 기독교를 ‘송자(송시열)대전’쯤으로 만드는 罪를 저지르고 있다.


㈒ 믿는 사람은 그 어떠한 유혹에도 ‘믿음의 적’을 물리치는 경주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딤후 2:3)

- 믿음의 적 : 공산주의, 유물론, 무신론, 死神論, 인본주의, 향락주의, 샤머니즘적 영지주의

 

㈓ 기독교적 애국심을 가진 사람은 어떤 식으로, 어떤 땅에 있던지, 어떤 정당이나 어떤 세계관을 가지고 있든지, 하나님의 입장에서 모든 것을 냉철히 비판한다. (결코, 붕당 오야붕 지점으로 사실을 왜곡하지 않는다)

 

㈔ 대한민국의 제헌헌법 사회계약을 하나님이 맺어주신 것으로, 그리고 그 전통을 계승하면서 국민단합을 이끌었던 민족복음화 신앙의 전통을 이어가야 한다.

 

- 민족복음화 신앙은 이승만 대통령의 ‘기독교적 건국론’과 가깝다.

- 한국 전통종교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바탕한 시민사회 보다는 전부 朋黨을 이끈다.

- 오직 기독교만이 시민사회와 병행 발전해 왔다.

- 시민사회는 여러 사람들이 동시에 상호존중하고 배려하는 문화다. 우리 나라가 그렇게 되도록 ‘성서적 애국심’으로 무장해야 한다.

 

㈕ 중화학공업화와 민족복음화 운동이 함께 했다면, 성장과 복지 및 성장과 환경을 동시에 추구해야 하는 이때에는 ‘의사소통적 근대화’와 ‘민족복음화’운동이 돼야 한다.

 

중화학공업화 

의사소통적 근대화

모범을 보이는 통치자의 솔선수범 토대

‘3.1운동’이란 계약주의 근대 전통을 토대로, 반공민족이 서로 보듬어 대화하는 기초를 이룩해야 한다. 

- 샤머니즘 = 붕당 좌장 우상화 = 공론 파괴 = 소통성 파괴

- 3.1운동의 종교간 연합 (고종황제의 상징성) --- 현대철학에서 대화와 소통철학은 개인들 간 소통을 연결해줄 공평한 절대적 지점을 전제함.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이 될 것임.

 

- 하나의 민중신학 코드를 가진 패거리가 영원히 집권하기 위해, 두 패로 나뉘어 노론-소론 연합정권 때처럼 하며, 다른 담론을 일체 받아들이지 않을 때, 국가분열은 항구화되고 그로 인해서 점점 無秩序가 증가돼 제2의 亡國이 도래할 것은 반드시 일어날 일이다. 제2망국이 적화통일로 드러나지 않을까 심각하게 두렵다.

→ 국민은 엘리트에 욕심 버리라며, 하나님 나라 공의 차원에서 무질서의 증가를 억누르는 개혁을 해야 한다. 그러나 국민대중은 엘리트 앞에 너무 약하다. 기독교 엘리트에 ‘복음적인 행동을 하세요’하는 말 밖엔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리고, 더 신앙의 삶을 견결히 하는 수 밖에 없다.

 

 

 

 

Ⅰ.

 

1. 사회계약론

 

㈎ 홉스

 

① 공포의 시대

 

한 편으로는 이기적인 개인주의의 씨를 뿌리고 당시의 신분 질서 속에서 만인은 평등하다고 하여 근대 시민사회의 문을 활짝 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절대 권력을 열렬히 옹호하는 홉스의 모순된 자세는 그의 시대적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다. 홉스는 1588년 4월 5일 가난한 목사의 아들로 스페인 무적함대가 쳐들어 온 날 태어났다. 홉스는 후에 두려움은 나의 쌍둥이라고 말하였다(Germino, 1972: 90). 홉스가 살은 시대는 중세의 봉건체제가 해체되고 도시를 중심으로 수공업이 발달하면서 자본주의 사회가 태동한 시대였다. 이와 함께 구질서를 대변하는 교회의 권위와 새로운 질서를 대변하는 세속화가 첨예하게 대립했던 시기이다(박만섭, 2003: 145). 그의 개인주의는 이런 시대적 분위기에 영향을 받았을 것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그의 생애 내내 그에게 드리워졌던 시대의 공포는 그에게 절대 권력 존재를 받아들이게 하였다.

당시 영국은 왕족을 중심으로 한 귀족 세력과 새롭게 떠오르는 상공업 계층과 자영 농민등과의 사이에 사회적 갈등이 생겨났으며, 영국 국교와 가톨릭 그리고 청교도 간의 종교적갈등도 격화되고 있었다(하승우, 2007: 174; Bobio, 1993: 29). 홉스가 살았던 16세기와 17세기는 치열한 종교전쟁으로 공포로 얼룩진 시대였다. 1519년부터 시작된 가톨릭 지지자와 프로테스탄트 지지자들 간의 100년 넘은 전쟁의 참혹함은 17세기 30년 전쟁(1618-1648)으로 그 절정에 이른다. 홉스의 생애의 한복판이었던 때이다. 열강들의 정치적 야욕과 종교적 맹신으로 유럽 전역은 살육과 폭력 그리고 공포로 가득 찼다. 죽음의 위협을 막아줄 수 있다면 그 어떤 것도 희생할 수 있다는 홉스의 절대 국가관은 이러한 참혹한 사회적, 정치적 상황에 대한 자기 보호의 산물이다. 살 수만 있다면 1651년 출판된 그의 대표작인 '리바이어던' 만큼이나 무시무시한 정부조차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홉스의 개인적 삶을 조명해보더라도 그는 대내외의 정치적, 종교적, 사회적 갈등 속에서 생존을 위한 줄타기를 계속하였다. 왕권신수설을 부인하는 그의 개인주의 사상은 당시 찰스1세를 역정케 하고 교회를 분노케 하였다(Wood and Wood, 1997: 104). 홉스는 이로 인해 매우 불안해하였다. 홉스는 군비 조달을 위한 당시 찰스 1세의 입장에 섰고 그것이 다시 당시의 불안정한 권력 투쟁으로 미래에 어떤 박해로 이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게 하였다. 그는 이 두려움으로 1640년 11월 갑작스럽게 프랑스로 피신하였으며 영국의 격렬한 내전 기간을 피해 10년 넘게 그곳에서 머물렀다. 그 기간 찰스 1세는 처형되었으며 그의 ‘레비디안’은 이 기간에 집필하여 영국에서 출판되었다. 실로 홉스의 ‘레비디안’은 당시의 영국 내전에 큰 영향을 받았다(O’Connor and Sabato, 2002: 7; Bobbio, 1993: 30). ‘레비디안’에서 그가 주장하는 통치구조는 여전히 군주제를 지지하는 것이었으나 그의 교회질서에 관한 3부와 4부는 종전의 입장을 번복하여 교회의 분노를 샀다(툭, 1993: 39-59). 이로 인해 그는 죽을 때까지 감옥이나 망명 생활을 해야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 속에 시달렸고 그의 독백처럼 생애 내내 세상을 빠져나갈 구멍만을 찾고 있었다. 그의 사회계약론은 그가 살았던 시대적 상황이 만들어 낸 그의 절박함의 산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점에서 그의 내면적 성향은 개인의 자유로움과 강력하지만 작은 정부를 지향하고 있음이 분명하다(King and Kendall, 2004: 86-87)는 생각을 갖게 한다.(배진영, 13-14쪽)

 

홉스는 자기보존에 대한 자신의 이론을 구상함에 있어 '자연법과 자연권'을 새롭게 구성한다. 즉 홉스는 자기보존에 대한 인간의 관심에서 자연법과 자연권을 도출하고 있다. 홉스가 주장하는 제1의 자연법은 "모든 사람은, 달성될 가망이 있는 한, 평화를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평화를 달성하는 일이 불가능할 경우에는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어떤 수단이라도 사용해도 좋다."이다. 이 원칙의 앞부분은 자연법의 기본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서 '평화를 추구하라'는 것이고, 뒷부분은 자연권의 요지를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자신을 방어하라'는 것이다. 홉스가 주장하는 제2의 자연법은 평화추구의 의무를 규정한 제1의 자연법으로부터 도출된다. 자기보존에 대한 자연권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 평화추구에 대한 제1의 자연법을 지킬 수 없으므로, 자기보존에 대한 자연권은 포기되어야 한다. 인간은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자기보존의 자연권을 타인에게 양도하지 않고 자기가 계속 가지고 있는 경우에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종식시키지 못한다. 제1의 자연법(평화를 추구하라)과 제2의 자연법(자연권을 포기하라)은 자기보존의 자연권을 타인에게 양도할 것을 명하는데, 이로부터 제3의 자연법이 생겨난다. "신의계약을 맺었으면 지켜야 한다."(고봉진, 60-61쪽)

 

홉스가 설명하는 자연상태로부터 인위적 국가의 성립까지의 과정에서 계약체결은 인간적 상황의 질적인 비약으로 묘사된다. 계약 체결을 통해 자연상태는 극복되고, 문명 상태로의 진입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위급한 상황에서 생기는 이러한 계약행위는 생존에의 필요와 그로 인한 계산적 이성(오성)을 토대로 하고 있다.

홉스는 잘 알려진 것처럼 영국의 시민전쟁 및 유럽 열강의 세력다툼의 혼돈을 경험하면서 인간의 본원적 공포(horror)를 정치 공동체 형성의 주요한 원동력으로 간주하였다. 이렇게 볼 때, 홉스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으로 표현했던 자연상태라고 하는 것도 미개인의 자연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근대적 의미에서의 자본주의적 혼돈 및 정치적 분쟁상태를 형상화하고자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홉스의 정치사상이 태동한 당시의 사회상황을 고려할 때, 홉스가 정치공동체로서의 국가의 형성을 설명하는 것의 귀착점은 크게 두 지점으로 볼 수 있다. 하나는 사회적 혼란을 불식시키기 위한 통치자 중심의 주권론 이고, 다른 하나는 피치자적 관점에서의 소유적 개인주의가 그것이다. 이러한 이원적 구도에서 보면 홉스의 정치이론은 안정을 주도할 주체로서의 절대국가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해석될 수 있으며, 따라서 개별자로서의 인간이 누리는 자유는 소유적 자유라고 하는 소극적 의미에 국한된다. 또한 홉스가 그리 고 있는 사회 상태나 국가의 형성과정에서도 인간은 자신의 배타적 이익에만 몰두하는 원자화된 존재로 나타나기 때문에 자기 지향적, 자기 폐쇄적 존재(Macpherson, 1990 : 36)를 사회적 상태로 밀어 넣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국가폭력(Staatsgewalt), 즉 개별자로서의 인간 외부에 존재하는 절대권력(주권)이 요청될 수밖에 없다. 요컨대 홉스의 사상에서 소유적 권리라는 소극적 권리상황과 절대주권은 하나의 완결된 논리구조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자유 및 권리와 도덕의 견지에서 볼 때, 홉스의 이러한 논의구조는 여전히 사회적, 공적 윤리를 주장하는 입장으로부터의 지속적인 비판에 직면한다. 홉스의 이론에 나타나는 욕구 충족적, 자동기계적 인간은 전통적 윤리학에서의 당위 의식 자체를 해소시킨 측면이 있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헤겔 역시도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홉스의 사상을 평가하고 있는데, 홉스는 법과 실정적 종교 그리고 외적 관계들에 대한 고려 없이 이 모든 것(법, 종교, 기타 모든 관계들)을 국가에 종속시켜버리고, 국가에 최고의 결정권을 부여하기 때문에 그의 사상에는 신민의 수동적 복종과 통치자의 신적 권위라는 두 가지 원칙 (Hegel, HP : 3 15- 3 16)만이 존재하게 된다고 헤겔은 평가한다. 따라서 헤겔은 이러한 홉스의 관점에 대해 (홉스적 의미에서) 법은 인간의 본원적 사악함으로부터 나온 철의 필연성(iron necessity)에 의해 강요된 평화조약의 총합에 불과하다 (Hegel,HP : 3 19)고 평가하는데, 이는 홉스의 사상에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인간의 자율적 의지가 존재할 여지가 없음을 비판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김민혜, 12-14쪽)

 

홉스의 계약은 계약 당사자들이 그들 모두를 두렵게 하며 결국 계약의 내용을 이행하도록 강제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가진 ‘리바이어던’에 자신들의 자연적 권리를 양도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그리고 홉스는 리바이어던의 개념을 통해 새로운 국가 형태를 제시한다. 홉스는 ‘모든 실체(substance)는 인과적 관계에 입각하여 운동하는 물체일 뿐’이라는 유물론적전제 하에 철저히 근대적 합리성의 원칙에 의거하여 전제된 인간성과 자연상태에 대한 가정으로부터 국가 권력의 절대성을 주장하였는데, 그가 실제의 자연상태로부터 그러한 주장을 도출할 수 없었던 까닭은 그의 저술의 전체적인 목적이 불완전한 군주국가(즉 실제 자연상태에 있지 않은)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통치권에 대한 완전한 복종을 인정할 수 있고 또 인정해야만 한다는 것과 그들 스스로 완전한 군주 국가로 이행해가야만 한다는 것을 설득하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장효민, 62쪽)

 

② 자연상태

 

◆. 계약적 인식 부재 속에서 분권이란?

 

코먼웰스의 본질에 분명하게, 그리고 직접적으로 어긋나는 여섯 번째 학설은 ‘주권은 분할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분할된 권력은 서로를 파괴하기 때문에 코먼웰스의 권력을 분할한다는 것은 코먼웰스를 해체하는 것이다. (토마스 홉스, 317쪽)

 

그렇지 아니하고 만일 그것이 하나의 왕국이라면 시민적 권력, 즉 코먼웰스의 권력이 영적 권력에 종속되어 영적 권력 이외의 주권은 존재하지 않거나 또는 영적 권력이 현세적 권력에 종속되어 현세적 권력 이외의 지상권은 있을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이 두 개의 권력이 서로 대립할 경우 코먼웰스는 내란과 해체라는 위험처하게 된다. 왜냐하면 시민적 권위는 쉽게 눈에 보이고, 자연적 이성의 밝은 빛 속에 있기 때문에 시대를 막론하고 상당수의 국민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고, 영적 권위는 스콜라적 구별과 나해한 말들의 어둠 속에 있기는 하지만, 어둠과 유령에 대한 공포는 다른 공포들 보다 더 크기 때문에, 코먼웰스를 괴롭히고, 때로는 파괴하기에 충분한 당파를 형성하는 데 부족함이 없기 때문이다.(토마스 홉스, 320쪽)

 

이 말은 우리를 다음 관심 분야로 이끌어 간다. 이 ‘오이쿠메네’는 예수 그리스도가 성육신하는 장소요 그가 살다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되었다가 무덤에서 부활하여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곳이다. 예수는 이 지상에서 제자들과 함께 인류를 위한 구속사역을 전개하셨다. 그의 승천 후에는 그의 영을 보내셔서 펜테코스트 사건을 일으키게 하시고, 제자들을 시켜 그의 몸된 교회를 세워 인류 역사 안에서 구속 사역의 기능을 계승하여 교회의 역사를 엮어나가게 했다. 그리스도는 그의 몸된 교회와 함께 영적으로 인류 역사안에 현존한다. 그와 우리와의 관계 성립은 이 지구를 떠나서는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이 지구를 떠날 수 없다. 지구인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창조질서에 속하는 사실이다. 이 창조질서를 파괴하지 않으려고 그리스도가 땅 위에, 역사안에, 인간 속에 내려 오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구인으로서의 예수를 알 뿐이다. 역사위에서 제자들과 함께 사시던 예수밖에 우리는 모른다. 그러므로 그는 완전한 지구인이요 역사적 인물이었다.

우리는 앞에서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그 몸은 한 인간으로서의 유형적 몸을 구성한다고 했다. 그러기 때문에 교회는 지상에 있을 수 밖에 없다. 지구를 떠나서는 교회가 있을 수 없다. 불가견 교회를 말하나 가견교회를 떠나서는 그것이 존재할 수 없다. 교회는 가견교회로서 지구상에 실존하며 이 지구 즉 ‘오이쿠메네’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실존하는 장소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구를 상대하고 지구 안에서 선교운동을 전개하고 있으며 궁극적으로 지구를 성화시키려고 한다. 그러므로 에큐메니칼 운동은 일어날 수 밖에 없다.(이종성, 285-286쪽)

완전한 자연 상태, 즉 주권자도 없고 국민도 없는 절대적 자유의 상태는 무정부 상태이며 또 전쟁 상태라는 것, 그 상태를 피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계율은 자연법이라는 것, 코먼웰스는 주권자 권력이 없으면 실체가 없는 공허한 말에 불과하며 존립할 수 없다는 것, 국민은 그 복종이 하나님의 버에 어긋나지 않는 한, 모든 사항에 대하여 주권자에게 단순히 복종해야 한다는 것 등은 이미 앞의 논의에서 충분히 증명되었다. (토마스 홉스, 344쪽)

 

그러므로 홉스에게 있어서 자연권은 인간의 자유로운 권리이지만 자연법은 권리인 동시에 의무로서 서로의 공존을 위해 그 자연권이 억제되어야 함을 요구한다. 그 억제는 인간의 이성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며 그것은 자기보존과 자유권의 향유를 위한 개인의 자발적인 의무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 의무는 사회에 대한 책임을 강요하는 의무가 아니라 개인의 권리를 유지하기 위한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일 뿐이다. 이것은 신의 의도가 반영된 그 때까지의 전통적 사회질서 사상에서 인간 이성에 의한 자발적 사회질서의 창조를 위한 출발점이기도 하다.

홉스에게 있어서 권리의 포기는 일방적 포기가 아니라 권리의 자발적 양도이며 모든 권리의 양도가 아니라 그 일부만의 양도를 의미한다(Germino, 1972: 103). ‘리바이던’에 의하면 자발적 양도는 어떤 경우에도 양도에 따른 보상을 기대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그 보상은 생명 유지와 이를 위해 필요한 수단 확보이기 때문에 양도는 일방적인 한쪽만의 권리 인도나 무상증여가 아니라 상호 계약의 성격을 갖는다. 계약은 상호 약속이기 때문에 서로는 신의(信義)를 지켜 약속을 이행해야 하는 의무를 지게 된다(Hobbes, 1967: 105-107). 그에게 있어서 약속을 이행하는 것이 정의이며 그러하지 않는 것은 정의롭지 못하다. 이것이 제 3의 자연법이다(Hobbes, 1967: 113). 그는 약속의 이행을 엄격히 요구하고 있다. 약속 이행이 아무리 해도 불가능하다고 판명될 때까지는 그 약속은 유효하며, 상호간의 약속이 공포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도 또 다른 약속이 체결되지 않는 한 그것을 이행할 의무가 있다고 하였다(Hobbes, 1967: 109-110).(배진영, 7쪽)

 

자연법이 수단이라는 말은 자연법을 준수하고도 자연권을 보장 받지 못한다면 오히려 지키지 않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것을 시사한다. 그러므로 홉스의 자연법은 항상 단서가 따라 붙는다. “모든 사람은, 달성될 가망이 있는 한, 평화를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평화를 달성하는 일이 불가능할 경우에는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어떤 수단이라도 사용해도 좋다.” 첫 문장은 ‘평화를 추구하라’는 기본 자연법이고, 뒤 문장은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자신을 방어하라’는 자연권의 요지라고 홉스는 말한다. 기본 자연법의 평화추구는 그것이 ‘달성될 가망이 있는 한’에서만 통용된다. 그럴 가능성이 없다면 그건 여전히 전쟁상태임을 의미하므로 자연권을 행사해야 한다. 제2자연법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평화와, 그리고 자기 방어가 보장되는 한, 또한 다른 사람들도 다 같이 그렇게 할 경우, 만물에 대한 이러한 권리를 기꺼이 포기하고, 자신이 타인에게 허락한 만큼의 자유를 타인에 대해 갖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제2자연법은 평화를 추구하는 구체적인 방법으로서 권리포기를 말하고 있다. 이 또한 모든 사람들이 포기할 경우에 비로소 성립하는 명령이다. 다른 이들은 포기하지 않는데 나만 권리를 포기한다면, 이는 평화를 위한 선구자이기는커녕 오히려 자기 자신을 타인의 먹이로 내던지는 자기 파괴에 불과하다. 따라서 나만이 아니라, 전체가 자기의 자연적 권리를 포기할 때만 이 법은 지켜지는 것이고, 거꾸로 말하자면 모두가 자연법을 지킬 때 자기보존의 자연적 권리는 보장될 수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홉스의 자연법은 정언적인 명령이라기보다 자기보존의 여부에 따라서 준수의 여부가 달라지는 가언적 명령이다.(송석현, 100쪽)

 

홉스가 바라보는 인간의 자연 상태는 극단적 불충분 및 혼란 상태로 이해되고 있는데 왜냐하면 각자가 그의 동료들에게 가할 수 있는 위협의 강도가 각자가 스스로를 보존하려는 능력 보다 월등하기 때문이다. 홉스가 말하기를 물리적인 평등이 각 개인에게 주어져 있기 때문에 비록 근소한 차이는 있을지라도 가장 약한자가 가장 강한 자의 생명을 빼앗아 갈 수 있기에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이는 모든 인간이 스스로를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상호간 적대적일 수 밖에 없는 불가피한 전쟁상황으로 묘사된다.

홉스의 자연법관에 있어서 핵심적인 것은 자연법에 대한 기존의 이해방식을 결정적으로 뒤바꾸어 놓았다는 사실이다. 기존의 자연법은 고대 그리스 이래 서구 사상사의 전통을 형성해 왔으며 그 내용은 개별적인 사건이나 인간 개개인을 초월하는 하나의 보편적이 법칙이 영원하고 절대적인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보편적 법칙은 세계를 움직이고 인간의 행위를 지배하는 규범이어 왔다. 홉스의 자연법관은 당시에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스토이즘과 기독교 사상의 자연법을 자유를 부분적으로 양도하도록 요구하는 이성의 격률로 전환시키게 된다. 따라서 홉스에게 있어서 자연법은 평화를 지향하는 사회적 인간에게 새로운 원리로 구성되며 이는 권리와 법의 의미나 그 관계를 역전시킴으로써 인간의 권리와 이성을 행위의 중심으로 가져다 놓는 계기를 마련한다.

이러한 자연법의 근대성은 도덕이 주관적 가치관으로부터 발생한다는 현대적 합의관으로 다시 한번 정리될 수 있다. 고티에는 합리적 선호를 위한 조건을 다룰 때 각 개인의 선호도가 다른 이들의 가치와는 무관하게 자신의 가치를 결정한다고 주장하면서 비록 가치가 상태에 부여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는 하지만 그러한 가치 부여는 태도의 문제이고 주관의 문제이지 관찰이나 객관의 문제는 아니라고 밝히고 있다.

인간이 평화를 추구한다면 그것을 위해 권리의 일부를 포기함으로써 서로에 대해 갖는 자유의 정도만큼만 만족해야 한다. 각자는 자신이 포기하는 것으로부터가 아닌 자기 이외의 모든 이들의 포기 행위로부터 혜택을 기대할 수 있다. 이 사실은 각자가 자신의 권리 일부를 포기할 합리적인 이유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상호간의 권리를 포기한다는 것은 상호간의 제약을 인정한다는 의미이고 이는 오직합의를 통해서만 발생하는 의무이다.(오재호, 8-9쪽)

 

로크는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평등하다는 자연법 사상을 주장하였다. 허지만, 절대적인 평등의 원칙을 언급하는 것은 아니고, 권한, 능력, 성취, 덕성적인 측면에서 인간은 평등하지 않음을 인식하였다. 로크에게서 불평등한 사적 소유도 정당화된다. 홉스가 “생명의 보존”과 로크는 “재산의 보존”에 주된 관심을 두었다. 이 사적 소유는 국가에 의해서 통제되는 것이 아니라 보호되어야 한다. 로크는 신의 제작물이라는 목적론적 관점에서 인간을 조명하고 있다. 로크적 인간은 신적 의지와 명령이라는 자연법적 도덕률 안에서 권리와 의무의 주체로서 설정된다. 인간은 신으로부터 자신의 생명과 인격에 대한 자유로운 자율성과 자신의 노동의 결과물에 대한 소유권도 부여받는다(Locke, 1960).

홉스적인 인간관은 자신의 권리 향유를 위해서 타인을 침해할 수 있었다. 홉스의 자연법은 단지 개인의 보존이 절대적임을 밝혀준다. 그러나 로크의 개념은 정부의 권력 행사의 한계와 개인의 도덕적인 관점을 표출하고 있다. 자연법에 의하면, 개인은 타인의 생명, 자유, 소유의 권리를 침해할 수 없고 국가는 국민의 권리의 보존이라는 의무를 수행하여야 한다.

홉스의 관심은 자연 상태에서 주권의 붕괴나 분열이 전쟁 상태를 야기한다는 점에서 자연법에 근거한 절대적인 주권의 존재를 강조한다. 이와 같이, 홉스는 주권의 합법성 문제보다도 인간의 이기적 정념을 통제할 수 있는 주권의 존재 여부에 주목한다. 반면 로크는 주권이 존재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전쟁상태가 야기될 수 있다는 관점에서, 자연법으로부터 파생된 개인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실증법의 이론적 바탕을 제공하였다. 로크에 있어서 인간의 이성은 신의 선물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신의 법은 자연법이다. 자연법으로부터 파생된 인간의 이성은 도덕적인 법과 헌법인 실증법의 기초를 제공하였다.

로크는 홉스적인 견해와 다르게 자연 상태를 “도덕적인 질서”로, 개인을 “도덕적인 행위자”로 규정할 수 있었다. 로크의 의미에서 홉스의 자연 상태는 “반도덕적인 방종의 상태”에 불과하며, 홉스적 개인들은 “반도덕적 행위자”에 불과하다. 로크의 관점에서, 자연 상태의 문제점은 반도덕적 행위자들의 극한적인 갈등과 무절제한 행위자들의 도덕적 일탈 가능성이다. 이들 도덕적 결함을 지닌 인간들의 무절제한 사적 이기심과 편파성은 도덕 질서인 자연공동체의 질서를 파괴할 수 있다. 자연 상태의 이러한 결함을 방지하기 위해 법과 정의에 입각한 합법적인 권력의 권한이 부여되었다.(윤은기, 4쪽)

 

오늘날 국가성립에 대한 통설은 사회계약론이다. 사회계약이론은 국가를 계약, 즉 사회 구성원인 국민적 합의의 산물로 파악하는 국가탄생이론이다. 사회계약이론은 자연상태에서 사람들이 상호 동시적인 합의를 통하여 연합하여 국가로 나가는 것을 설명하는 이론이다. 사회계약론의 출발점은 어떤 통치회질서도 구축되어 있지 않는 있는 그대로의 소위 자연상태에 대한 가상체험에서 시작한다. 그 결과 사회계약론은 정통성 있는 정부는 피치자들의 동의(同意)에 의해서만 출현이 가능하다는 이론으로 역사적으로 국가출범 이론 가운데 핵심을 이룬다. 후술하는 바와 같이 토머스 홉스, 쟝 자크 루소, 존 로크가 대표적인 사회계약론자들이다. 이들의 사회계약론은 모두 인간사회의 출발점을 ‘자연상태'라고 가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러나 이 세 사람의 사회계약론자들이 상정하는 자연상태(state of nature)에는 차이가 있다.

이 경우에 자연상태는 국가가 탄생하기 이전의 원래대로의 상태를 말한다. 그러므로 자연상태는 어떤 통치 질서나 체계도 구축되어 있지 않는 상태이다. 자연상태라는 용어는 토머스 홉스에 의해 특별한 의미로 사용되면서 정치철학적 용어로 굳어진 말이다. 홉스는 자연상태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상태”, 즉 전쟁상태(戰爭狀態)로 보았다. 반면에 루소는 근대문명사회를 비판하기 위해 자연상태를 활용했다. 자연상태에서 인간은 야생의 동물에 가깝다고 보았다. 루소가 보기에 자연상태에서는 선과 악이란 개념조차 없다. 자연상태는 가치판단이 없는 어떤 무위(無爲)ㆍ평등(平等)의 상태이다. 한편 존 로크는 자연상태를 홉스와는 다르게 자유상태(自由狀態)로 보았다. 로크에 따르면 태초에 모든 인간은 평등했고 자유로웠다. 위와 같은 자유로운 자연상태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을 각자 자유롭게 결정했다. 따라서 개개인의 행동은 각자 스스로의 힘이나 양심에만 기초하게 된다(한희원, 51-52쪽)

 

자연권이란 자연 상태에서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태어나면서 누릴 수 있는 자연적인 권리를 말한다. 자연권은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폭 넓게 인정되어 왔으며 오늘날 미국을 비롯한 근대국가 정치구조의 뿌리가 되었다(O’Connor and Sabato, 2002: 5; Melusky, 2000:18-22). 홉스는 인간이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고 그의 욕구와 이성적 판단에 따라 자유롭게 자기의 힘을 사용하는 것은 자연적 현상이며 모든 인간은 이러한 자연적 현상을 누릴 수 있는 권한 즉 자연권을 갖고 있다고 보았다(Hobbes, 1967: 103). 따라서 홉스에게 있어서 자연권은 인간의 의지를 초월하는 권리가 아니라 각자가 자기가 원하는 바를 자신의 이성적 판단으로서 자유롭게 추구해 나갈 수 있는 권리이다. 즉 인간 그대로의 자연적 성향과 의지대로 행동할 수 있는 권리가 자연권이다. 이기주의적 인간관에 입각한 개인주의는 홉스의 자연권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Flathman, 2002: 1, 95; King, 1999: 270-271).  개인주의가 자유주의 전통의 가장 핵심적인 전통이란 점에서 그의 사상은 자유주의에 속하기도 한다(Macpherson, 1962: 1; 툭, 1993: 127; Ball, 2004: 29).(배진영, 5쪽)

 

그러므로 주권자는 국가를 보호하고, 무엇보다 ‘인민의 안전’ 획득을 그 직무로 삼아야 한다. 여기서 안전은 생명의 보존은 물론이고, 생활상의 만족, 즉 모든 사람이 국가에 위험이나 해악을 가함이 없이 합법적 근로에 의해 얻을 수 있는 모든 생활상의 만족을 의미한다. 이러한 직무는 개개인에 대한 보살핌이 아니라, 일반적 배려(general providence)의 형태로 수행되어야 한다. 일반적 배려는 학설과 사례를 통한 공민 교육과 좋은 법의 제정 및 집행을 통해 나타난다. 홉스는 주권자의 권리를 온전하게 보존하는 것이 첫 번째 직무지만, 동시에 그러한 주권자의 본질적 권리에 대해서 인민들에게 반드시 알리고 가르쳐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특히 잘못된 학설에 넘어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홉스는 인민 교육을 통해서 주권자의 권리와 백성의 의무의 타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송석현, 107-108쪽)

 

그들은 정의란 각자에게 각자의 것을 부여하려는 변함없는 의지라고 정의한다. 그러므로 자기의 것이 없는 곳 즉 소유권이 없는 곳에는 불의가 없으며, 강제적 권력이 세워져 있지 않은 곳, 즉 코먼웰스가 없는 곳에는 소유도 없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만물에 대하여 권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코먼웰스가 없는 곳에서는 어떠한 일도 불의가 아니다. 따라서 정의는 유효한 신약을 지키는 데 본질을 두지만, 계약의 유효성은 그 계약의 이행을 충분히 강제할 수 있는 사회 권력의 수립과 함께 시작되며, 그때에야 비로소 소유권도 발생한다. (토마스 홉스, 150쪽)

 

따라서 소유권의 도입은 코먼웰스가 세워진 결이며, 코먼웰스는 이를 대표하는 인격을 통해서만 행동하기 때문에 그것은 오직 주권자만이 할 수 있는 행위이다. 또한 주권을 지닌 사람 말고는 아무도 만들 수 없는 법에 뿌리를 두고 있다. 예로부터 사람들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는데 우리가 법이라고 부르는 것을 옛 사람들은 ‘노모스’(즉 분배)라고 하였으며, 각자에게 그의 것을 분배하는 것이라 정의했다. (토마스 홉스, 248쪽)

 

이러한 죄의 법에 대한 관계 그리고 범죄와 시민법의 관계로부터 다음을 추론할 수 있다. 첫째, 법이 소멸하면 죄도 소멸한다. 그러나 자연법은 영원하기 때문에 信約의 유린, 背恩, 오만, 기타 도덕에 반하는 모든 사실이 죄가 되지 않는 일은 결코 없다. 둘째, 시민법이 소멸하면 범죄도 소멸한다. 자연법만이 남게 되므로 고소의 여지가 없고, 만인은 자신의 재판관이 되며, 자신의 양심에 의해서만 고소를 당하고, 자신의 의도의 고결성 때문에 결백해지기 때문이다. (중략) 셋째, 주권이 소멸하면 범죄 또한 소멸한다. 그러한 권력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는 법으로 보장되는 보호도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저마다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를 보호하며 된다.(토마스 홉스, 287쪽)

 

그러나 누군가의 욕구 또는 의욕의 대상은 그것이 무엇이건 그에게는 선(good)이며, 증오 또는 혐오의 대상은 악(evil)이다. 그리고 경시의 대상은 시시하고 하찮은 것이다. 즉 선한 것, 악한 것, 경시할만한 것, 이런 말들은 항상 그 말을 사용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사용되기 때문에 단정적․절대적으로 그런 것이 아니며, 선악의 공통규칙을 대상 자체의 성질에서 도출해 낼 수도 없다. 코먼웰스가 없는 곳에서 선악의 법칙은 오직 그 사람의 인격에서 나올 뿐이며, 코먼웰스가 있는 곳에서는 그것을 대표하는 인격으로부터 나온다. 또는 의견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합의하여 중재자 또는 재판관을 두는 경우에는 그 판결을 그것에 대한 규칙으로 삼는, 중재자 또는 재판관에게서 공통규칙이 있는 것이다. (토마스 홉스, 61쪽)

 

㈏ 루소

 

루소가 그 대답으로 제시한 『사회계약론』안에서 펼쳐지고 있는 정치사상의 요체, 기본적 문제의식은 바로 정치적 권위 또는 권력(autorite politique)의 본질 그리고 그것의 정당성의 문제로 귀착된다(이환, 2002:193). 루소는 사회체제의 정당성 문제를 천착하는 데 있어서 자연법과 자연권 사상을 새로이 검토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였다(진미경, 1994: 103). 그리고 루소가 도달한 결론은 고전적인 자연법 사상을 거부하고 ‘자유’와 이성에 의거한 가치를 강조하는 것이었다. 루소에 따르면 우리의 자유는 우리 스스로 쟁취해야 하며 자유는 잘 짜여진 독특한 정치체제에서 발생하고 그 국민들은 이러한 자유를 향유하기 위한 특별한 노력이 요구된다고 한다.

루소의 사상에서 ‘자유’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축을 형성하고 있는데, 루소에 따르면 자유를 포기하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자격과 인간이면 갖는 권리, 심지어는 자신의 의무까지도 포기하는 일에 해당한다(Rousseau, 1968: 55). 그리고 이러한 자유가 인간의 필연적인 사회적 삶 속에서 존중되고 보존될 수 있는 것은 오직 ‘사회계약’으로 가능하다.

계약을 통해 인간은 한 집단에 자신을 소속시키고 공동체적 목적에 복종해야 한다. 그러나 합의에 의해 성립되는 약속에 해당하는 “계약”은 개인의 의지적인 행동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그는 전체 안에서 오직 자신에게만 복종하며 여전히 자신의 주인으로 머물 수 있다. 자유로운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관점은 루소 철학의 중심에 있다. 이러한 자유에 대한 루소의 열망은 로크가 제안한 대의민주제를 강경하게 비판하고 직접민주제를 주창하였다는 점에서도 극명히 드러난다.

루소에 따르면 각 개인은 일반의지가 언제나 옳다는 것과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리고 계약에 의해 형성된 통치체(corps politique) 및 정치적 집단은 이러한 ‘일반의지’ 및 ‘주권’ 개념에 입각하여 ‘공동의 이익’이라는 목적을 추구하게 됨으로써 “통일성과 공동의 자아와 생명과 의지”를 갖게 된다. 따라서 국민은 법에 종속된 한편 그것의 제정자로서 ‘자유’를 향유하게 되는 것이다. 이로써 사회계약적 구도에 내재된 주권재민(主權在民)의 원리가 명확하게 천명되는데, 이것은 루소가 전하는 가장 가공할 폭발력을 지닌 정치적 메시지임에 틀림없다(이환, 2002: 197).(장효민, 66-67쪽)

 

본 논문이 다루고 있는 ‘의지의 정치’에 대한 비판은 정치를 비주권적 토대 위에서 사유하고 주권을 넘어선 자유와 다원성의 정치에 대한 탐구를 목표로 한다. 아렌트가 자주 강조하듯이 “인간이 주권적이려고 할 때 자유는 파괴된다. 그래서 인간이 자유롭고자 한다면 주권은 포기 되어야만 한다.”(Arendt, 2000a, 215). 의지의 정치는 잠재적으로 토론을 배제하며 그와 함께 대립을 조장하기 때문에, 의지의 관철이라는 주권 원리를 포기할 때라야 사람들은 논의적이고 비폭력적으로 공존할 수 있으며 그들 사이의 많은 관계와 결합의 공동공간을 만들 수 있다. 그러한 맥락에서 아렌트가 자신의 정치이론을 최종적으로 정치적 판단력이라는 주제로 발전시켜 나갔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의지의 정치를 판단과 의견의 정치로 대체하려는 아렌트의 노력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미 주어진 일반성 아래 특수하고 개별적인 것들을 포섭하려는 의지의 정치와는 반대로 판단과 의견의 정치는 특수한 것들로부터, 특수한 것들이 자신들의 의미를 상실하지 않은 채, 보편적인 것을 형성하려는 시도를 의미한다. 그를 통해 정치의 조건인 다원성은 유지될 수 있고 민주적 정치는 힘을 발휘하게 된다. 공적영역 즉, 정치적 영역은 개별 참여자들의 판단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판단에 대한 책임을 지운다. 그러한 공간이 없이 판단과 의견을 의지로 대체하고 일반의지의 실현을 통해 사회적 갈등과 긴장을 제거하려는 사회는 민주 정치의 가능성 자체를 위협한다.(박혁, 181쪽)

 

인간 본성을 자연으로부터 시작된 역사의 흐름 가운데 실제로 존재하는 것으로 구축하겠다는 루소의 의지는 신적 질서를 대변해왔던 역사적 진리가 보인 추상성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시작한다. 루소가 보기에 신적 질서를 대변해왔던 역사적 진리는 현재의 불평등한 상황을 설명할 수 없는 추상적인 질서일 뿐이었다. 그는 이와 같이 자연상태의 인간으로부터 실제의 인간 본성을 구축하려는 시도 가운데서, 자연인에 대한 기존의 추상적인 접근을 비판한다. 즉 루소의 종교가 지시하는 역사의 추상성에 대한 비판은 불평등한 사회관계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루소는 인간 불평등에 대한 탐구를 위해서 자연상태라는 상황을 일종의 가설적 상황으로 조심스럽게 가정하지만, “역설적이고 조건적인 추리”를 통해 불평등의 역사를 탐구하고 이로부터 인간 본성을 재조명하는 작업을 시작한다고 주장한다. 루소는 역설적으로 불평등한 사회가 자연적인 것이 아님을 자연상태의 평등으로부터 설명하려고 시도하면서 인간의 본성이 평등을 지시하는 토대로서 작동할 수 있도록 만든다. 그러므로 루소는 자연상태에 대한 추리가 가설적인 것이긴 하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인간에 대한 탐구임을 명확히 하고자 노력한다. 그의 자연상태에 대한 추리가 “자연과학자들이 매일같이 세계의 생성에 대해 하고 있는 추리”와 유사하다는 주장은 이러한 실제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처럼 ‘인간을 자연의 손에서 나온 그대로의 상태에서 고찰’하겠다는 루소의 주장은 불평등한 사회를 ‘있는 그대로’ 지시하는 기존 질서의 추상성을 비판하는 동시에, 평등한 인간상태를 제시해보고자 하는 노력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므로 루소는 자연상태의 ‘평등한’ 인간으로부터 선한 본성을 설정한다. 그는 홉스와 로크의 자연상태의 설정으로부터 논의를 시작하는 구도를 그대로 재현하고 있긴 하지만, ‘최초의 선하고 자유로우며 평등했던 인간’으로 자연인을 설정하면서 그들의 자연상태를 비판한다. 루소는 여기에서도 그들의 자연인에 대한 논의가 추상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에 의하면, 홉스와 로크의 자연상태는 “자기들이 사회 속에서 얻은 관념을 자연상태 속에 끌어들였을 뿐”인 것으로, “미개인에 대해 말하면서 사실은 사회인을 그린” 것이었다. 이에 루소는 홉스와 로크의 자연인의 모습은 탐욕적이고 이기적인 사회인의 모습에 다름이 아니었다고 비판한다.

특히 비판은 고립되어있으면서도 독립적인 자연인의 특징을 기술한 기존의 관찰 결과에 근거한다. 이로부터 루소는 자연상태를 역사적 사실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든다. 『불평등기원론』에서 루소는 뷔퐁의 박물관지를 비롯한 여러 여행기를 통해 원시인, 미개인으로 지칭하는 자연인의 고립적・독립적 특징을 도출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자연상태는 가설적인 것이라고 루소 역시 말하기도 했지만, 역사적・사실적 성격을 지닌 것임을 또한 말하고자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루소는 ‘사회・정치적 존재로서의 인간’ 이전의 존재를 설명할 수 있는 역사적 사실로 자연상태를 만들었기 때문에 홉스와 로크에 대해 비판할 수 있었다. 홉스는 자연상태를 전쟁상태로 보았고, 로크는 자연상태가 소유의 관념을 지켜줄 수 있을 만큼의 선한 의지를 가진 인간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았다. 이 둘 모두는 루소에 의하면 ‘역사의 조건이자 사실로서의 자연상태’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홉스와 로크, 루소 모두에게 자연상태는 존재한다. 그러나 홉스에게 자연상태는 이전에 존재했던 사회가 전쟁의 발생과 함께 파괴되는 경험으로부터 도출되는 반면에, 루소에게 자연상태는 사회 상태로의 진행과정에서 발견되었던 진화의 결과 확인되는 것이다. 자연상태는 사회 이전 상태의 탐구를 위해 필요한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로크의 소유 관념은 변치 않고 시민 사회에서도 지속되는 관념이지만, 루소의 소유 관념은 자연상태로부터 이루어진 진화에서 발견되는 관념이다. 이것은 진화의 또 다른 한 면인 타락과 함께 형성되는 관념이다.(민경연, 28-29쪽)

 

반면, 18세기 프랑스 철학자였던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는 오직 인민의 의지만이 정당한 구속력을 창출해낼 수 있다고 주장했던 인민주권론자이면서도, 정치적 권력의 정당성과 헌법제정의 정당성 문제는 해결될 수 있는 문제라고 보았으며 『사회계약론』을 통해 그 문제에 답하고자 했다. 루소는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나며, 도처에서 쇠사슬에 얽매여 있다. (…) 무엇이 그것을 정당한 상태로 만들었는가? 나는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다고 믿는다.”라는 『사회계약론』의 첫 문장을 통해, 자신의 작업은 마치 쇠사슬에 묶인 상태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한 지배관계가 상존하는 ‘문명사회(civilized society) 상태’를 ‘정당한 상태’로 만드는 과정, 즉 정당한 정치공동체의 창출과정을 설명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음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정치적 권력의 기원, 즉 최초의 약속이 성립되고 헌법이 제정되는 정초(定礎)의 순간에 주목함으로써 정당성의 문제를 풀어내고자 했다. 루소는 인간들 사이에 인정되는 모든 정당한 권위의 기초는 오직 약속뿐이므로(SC, 44), 하나의 집합적인 단체인 ‘정치체(body politic)’는 인민들에 의한 최초의 약속인 ‘사회계약(social contract)’과 입법자의 도움을 얻어 수행되는 제헌을 통해 창출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렇게 창출된 정치체는 정당한 법률에 따라 지배되는 ‘공화국(republic)’이라는 점에서 정당하며, 이 때 정당한 법률은 주권의 소지자인 인민들의 ‘일반의지(general will)’를 반영하고 있어야 한다. 루소에 따르면, 인민은 스스로 제정한 법률에 복종함으로써만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루소에게 있어서 정치공동체의 정당성과 정치적 권력의 정당성의 핵심에는 인민이 소지한 주권이 있으며, 그 주권은 최초의 계약인 사회계약과 최초의 법률인 헌법의 제정을 통해 창출된다.

루소는 정당성의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정치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자치(self-rule)를 통한 진정한 자유를 달성하게 하는 것을 사회계약론의 목표로 삼았으나, 루소에게는 평등한 개인의 탄생을 알린 학자이자 인민주권론의 창시자, 민주주의의 강력한 옹호자라는 찬사가 따르는 한편, 권위주의적, 반자유주의적, 전체주의적 사상가라는 상반된 평가들도 동시에 존재한다. 콩스탕(B. Constant)은 루소를 개인적 자유를 위협하는 적으로 보았고, 탈몬(J. L. Talmon)은 루소가 모든 개인을 노예 상태로 만드는 ‘전체주의적 민주주의(totalitarian democracy)’의 도래를 야기했다고 평가했으며, 퓌레(F. Furet)는 사회계약론에 포함되어 있는 권위주의적 요소들이 프랑스 혁명을 주도한 급진적 혁명가들의 정신에 영향을 끼침으로써 끔찍한 결과를 야기했다고 주장하였다. 더 나아가 벌린(I. Berlin)은 루소를 “근대 사상사를 통틀어서 자유에 대한 가장 사악하면서도 무서운 적들 중 한 명”으로 지목하기도 했다.(황소희, 3-4쪽)

 

헌법제정의 민주적 정당성의 근거는 헌법의 지배를 받는 인민들의 자발적 동의라는 행위 그 자체에 있다. 그러므로 법이 민주적 정당성을 갖기 위해서는 제헌 과정에서 구성원들의 명시적 동의가 존재했거나, 혹은 기존 질서에 대한 구성원들의 묵시적 동의(tacit consent)가 존재해야만 한다. 이러한 민주적 정당성의 핵심은 정치공동체의 운영을 가능하게 하는 기본법칙과 최고규범의 내용은 오직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 결정되어야 하며, 타자에 의한 지배가 아닌 자치(self-rule)만이 정당하다는 믿음에 기반하고 있다. 그로 인해 민주적 정당성은 주권을 가진 인민만이 자기결정(self-determination)에 의해 정당성을 스스로 창출해낼 수 있다는 인민주권론과, 정치공동체가 추구해야 할 공동선의 내용은 보편적 가치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실제적으로 추구하는 바에 의해 정해져야 한다는 공동체주의(communitarianism)의 주장과 친화성을 갖는다. 헌법의 민주적 정당성을 강조하는 입장에서 인민은 정당한 헌법을 만들어내는 제헌권력(constituent power)으로 묘사되곤 하는데, 특히 프랑스 혁명을 이끈 시에예스(E. Sieyes)는 제헌권력의 소지자로서의 인민이 신과 같은 권위를 통해 헌법에 정당성을 부여한다고 주장하였다.

반면, 헌법제정의 도덕적 정당성을 강조하는 입장에서는 헌법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아니라 헌법의 내용 그 자체에 주목한다. 최고 규범의 총체로서의 헌법이 마땅히 따를만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모든 개인이 옳다고 여길만한 도덕적 규범을 포함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헌법제정의 도덕적 정당성은 자연법 이론가들에 의해 체계적으로 주장되었는데, 그들은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자연법적 규범의 도덕적 당위성으로부터 실정법의 정당성을 얻고자 하였다. 기본권과 권력의 분립을 보장하고 있는 헌법만이 진정으로 정당한 헌법임을 선포하는 프랑스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1789). 16조가 이와 관련된 대표적인 구문이며, 이는 당위적으로 옳다고 여겨지는 특정한 가치들이 반드시 최고 규범으로 헌법에 포함되어야만 그것이 정당한 질서로서 기능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자유주의(liberalism)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헌법이 정치체가 어떤 가치에 기반을 두고서 어떤 지향점을 향해 운영되어야 할지에 대한 “열망적 역할(aspirational role)”을 수행해야 한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그리고 헌법의 구성요소로서 개인의 기본권에 대한 권리장전이 헌법의 중요한 부분을 구성한다는 점을 상기해볼 때, 도덕적 옳음이 정당한 헌법의 근간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인민의 의지를 근간으로 내세우는 주장만큼이나 합당하다.(황소희, 12-13쪽)

 

루소에 따르면, 정초의 순간의 인민은 ‘무지한 군중’일뿐만 아니라 “초기 상태의 무리(inchoate herd)”로 존재한다. 그러한 상태에 머물러 있는 인간들은 동일한 정체성을 공유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정의가 아닌 본능만을 행위의 원칙으로 삼고 있으므로 (SC, 53), 스스로의 힘으로 정당한 질서를 창출하기 위한 사회계약을 맺을 수 없다. 그러므로 비록 루소가 건국과 제헌을 시기적으로 구분하고는 있지만, 입법자는 건국에 대해서도 일정한 역할을 수행해야만 한다. “인간의 본성을 샅샅이 다 알고는 있지만 그 본성에 따라 움직이지는 않으며, 인민의 행복을 위하여 기꺼이 전념할 수 있는”(SC, 68-69) 현명한 입법자는 인민들의 본성을 변화시킴으로써 그들이 “어리석고 몽매한 동물의 상태로부터 지성적인 존재, 즉 인간이 되도록”(SC, 53) 만들고, 그를 통해 “영혼이 전체적으로 고양된”(SC, 53) 인민들이 정당한 질서를 창출하기 위한 큰 전체로 결합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여야 한다.

입법자는 이러한 역할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입법권위(legislative authority)만을 소지하여야만 한다. 입법권력(legislative power/right)이 오직 인민에게만 속할 수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으므로, 일체의 권력을 소지하지 않는 입법자는 “불가피하게 다른 질서에 속하는 권위”, 즉 “폭력을 쓰지 않고도 강제할 수 있고 강요하지 않고도 설득할 수 있는 권위”에 의존하여 인민을 통솔해야 한다. 또한 입법자는 반드시 인민과 관계없는 외부인이어야 한다. “입법자의 개인적 욕망은 필연적으로 그가 만든 법률의 신성을 손상시킬 것”(SC, 70)이며, 입법권위를 소지하는 인민보다 우월한 존재로서의 입법자는 정치체 구성원들의 “계약과 권리에 따른 평등”(SC, 56)을 해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입법자는 인민과 관계없는 외부인이어야 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자신의 임무를 수행한 이후 반드시 정치체를 떠나야 하는 존재로 묘사되었다.(황소희, 26-27쪽)

 

과잉금지원칙은 18세기 프로이센의 자연법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국가의 임의적인 권력행사에 대해서 인간에게 주어진 천부적 권리로써 개인의 자유를 보호하려고 한 18세기 자연법 사상의 배경에 따라 공권력을 제한하고 예측 가능하게 해주는 원칙들이 생겨났던 바, 영국의 W. Blackston은 “자연법 자유는 공공의 이익을 위해 필요하고 충분한 것 이상으로 제한되어져서는 안된다”고 하였고, 또 “자유를 제한함에 있어서 회피되어야 할 손해는 그와 같은 제한을 통하여 전체 또는 개인이 감내하는 손실보다 현저한 것이어야 한다”라고 한 Karl Gotteieb Svarez는 국가는 시민사회 전체의 이익을 위해 필수 불가결한 범위내에서만 개인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고영하, 13쪽)

 

결과적으로 사회계약으로 탄생한 결과물인 국가가 토머스 홉스의 경우에는 절대적인 전제군주제(authoritarian monarchy)이다. 쟝 자크 루소는 대의제가 아닌 직접민주제 국가를 탄생시켰다. 반면에 존 로크는 자유 공화정(liberal republicanism)을 주창했다. 그 가운데 존 로크의 사회계약론은 1776년 미국 독립선언문에서 문서로 발현된 이래로, 1789년의 프랑스 인권선언으로 이어졌고, 이어서 1948년 12월 10일 제3회 국제연합(UN) 총회에서 채택된 인권에 관한 인류선언인 세계인권선언(UDHR)으로 그 이념이 이어졌으며 최근에 존 롤즈(John Rawls)에 의해 다시 상기(想起)되었다.

그런데 국가안보(National Security)는 바로 국가탄생의 목적, 즉 사회계약의 내용을 지켜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국가안보의 정치철학적 그리고 주권국가의 헌정질서로 편입된 이후에의 법이념적 목표는 바로 사회계약의 내용을 확인하는 것에 있다. 따라서 국가안보의 이념에 대한 명백한 이해는 자칫 국가안보라는 용어가 냉전적 산물 또는 정치•이념적 도구로 오해되고 악용될 수도 있는 그 위험성을 근본적으로 타파하게 해 주는데도 매우 유용하다. 오늘날 우리사회의 많은 정치•이념적 혼동의 커다란 한 가지 원인은 국가안보의 이념에 대한 성찰이 태부족한 것에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한희원, 53쪽)

 

사회계약론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계약 당사자가 계약을 준수 하지 않을 경우에 주로 발생한다. 계약을 준수하지 않는 이유를 밝히려면 계약 체결동기, 체결 시점, 계약 당사자, 계약의 내용을 살펴야 할 것이다. 나아가 계약을 어길 경우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를 밝혀야 한다. (윤은기, 156쪽)

 

그는 사적인 이익의 추구를 막아 일반의지를 잘 드러낼 수 있는 법이 필요하다고 보고, 이를 위해서는 유능한 입법가와 그 법을 준수하기에 적합한 자질을 갖춘 인민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문제는 사회계약의 체결과 그에 다른 법률을 제정하는 시점에 그러한 유능한 입법가가 등장해야 하는데, 이는 요행에 의존해야 하는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또한 법률을 준수하기에 적합한 수많은 자질을 구비한 이른바 고상한 시민을 현실 속에서 찾기란 지난한 과제였다. 결국 그 당시 프랑스에서는 일반의지를 잘 드러내고 사적인 이익의 추구를 막을 수 있는 법을 제정할 유능한 입법자의 등장도 어려웠고 그리고 고상한 시민도 사실상 존재하기지 않았기 때문에 루소의 입법론은 현실성을 상실하고 있었다.

루소는 전제정부와 전제군주의 독단을 막고 사회계약을 유지할 방책으로 전 인민이 한 곳에 모이게 되는 정기 집회를 내세우고 있다. 즉 주권자인 전체 인민은 정기집회에서 전제군주의 폐단을 금지하는 결정을 할 수 있으며, 심지어 정부를 교체하기로 결정하면 곧 전제정부의 폐단은 해소된다고 보았다. 즉 모든 시민이 집회를 열어 만장일치로 정부의 교체도 결정할 수 있으며, 심지어 사회계약조차도 파기할 수 있음을 피력했다. 이러한 주장에 따를 경우 인민의 결의에 의해 정체변경 즉 사회혁명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윤은기, 170쪽)

 

��사회계약론��에 표명된 국가운영에 대한 위정자와 인민에게 기대되는 역할이란, 「헌사」와 비교하여 큰 차이는 없다. 루소는 사회계약론에 의해 설립된 국가도 결국은 타락하며, 사멸해간다고 생각하지만, 그 원인의 하나로 위정자의 단체의사와 특수의사의 행사를 들고 있다. 즉 루소는 위정자가 자신들의 본분을 지키지 않고 권한을 남용하는 사태를 대단히 경계하고 있다. 또한 루소는 처음부터 일관되게 국가전체의 이익보다도 일부의 이익을 우선하는 당파적 행동에 대하여 대단히 비판적이었다. 그는 일반의사의 충분한 표명을 위해 불가결한 조건으로 도당(徒党, des brigues)과 부분적 사회(des sociétés partielles)가 존재하지 않는 점을 거론하고 있다. 또한 통치형태의 재선택을 의사일정에 포함시킨 정기 인민집회를 제창할 때에, ‘전인민의 의사’와 ‘일부 반도(une faction)의 불평’을 구별하기 위해서 절차를 엄정하게 준수해야 한다고 호소하며, 국가의 운영에 당파적인 활동이 개입되는 것을 강하게 경계하고 있다. 따라서 루소가 국가사멸의 원인이라고 염려한 것은 위정자의 단체의사와 특수의사만이 아니라, 통상의 공민에 의한 국가적 결합의 이완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러한 이완에 의해서 국가가 해체되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한 방책으로 참조되고 있는 것이, 고대 로마의 민회와 호민부(護民府) 제도, 독재관(独裁官), 감찰관(監察官) 제도 등이다.(고바야시 요시노리, 187쪽)

 

루소가 시민의 정치참여에 공적인 토론이나 논쟁을 전폭적으로, 무조건적으로 용인한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거듭 확인한 것처럼, 루소는 사적 이익과 특수의지에서 비롯되는 소모적인 갈등을 수반하지 않는 만장일치나 압도적 다수결 등 조화로운 의사결정을 선호한다. 그렇다고 해서 루소가 공적인 심의에 불가피하게 수반되는 토론이나 논쟁을 그 자체로 거부했다고 단정하는 것은 루소사상 전체에 대한 왜곡된 해석이다. 이는 루소가 『사회계약론』에서와 마찬가지로 『고찰』에서도 시민들의“헛된 장광설”이나“아첨”에 대해 여전히 비판적이면서도 시민들의 공적인 발언 자체를 억압하기보다는 규제하는 선에서 해결책을 찾으려 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이로써 정치적 갈등을 어느 정도 용인하려 했다는 점에서 확인된다.

이 모든 사항을 고려할 때, 시민들의 정치참여에 공적인 토론이나 논쟁이 허용되는가에 관해 필자가 도달한 해석론은 일종의‘절제된 긍정론’이라 할 수 있다.(강정인, 22-23쪽)

 

자연법을 인식하는 ‘이성’의 역할을 강조한 로크는 자연상태에서도 자연법에 의해 질서가 유지되지만 갈등이나 분쟁 해결의 조절자로서의 국가의 역할이 요구되기에 시민들은 스스로 계약에 의한 합의에 의거하여 선출된 대표를 통해 의결된 법률을 근거로 갈등 해결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로크의 사회계약론에 따르면 사회계약에 기초한 국가는 자연법에 기초하여 입법해야 하며 그러한 법의 해석 및 적용과 관련한 사법권이 중요하게 여겨졌다.

한편 루소는 자유인으로 태어났고 이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도록 만들어진 인간을 구속한 사회 질서의 기원을 찾으려면 만장일치로 성립된 최초의 계약 상황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그의 기본 명제에 설 때 인간이 동의하지 않은 타인의 자의적 지배와 같은 권위에 종속될 경우 인간은 그의 본성에 어긋난 최악의 상태에 처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왜곡된 관계로 인한 문제 상황을 예방하려면 모든 시민들이 타인들에 대해 완전한 독립성을 누리고 주체적으로 그들의 삶을 계획하도록 사회 구조를 구성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사회계약이란 일단 동의를 표명하면 그것을 지키고 따르도록 강제되나 전적으로 자유로운 의지로 인해 가담하는 것이기에 사회계약적 구도에는 개개인의 자발적 참여를 전제로 하는 국민이 주권자라는 명제가 이미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요컨대, 루소는 사회계약론은 ‘자유민주주의적 기본질서’에 그 본질과 기원이 있으며 이러한 기본질서가 전제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성립된 계약의 내용들은 그 이념의 허상에 불과하다고 강조하였다.(장효민, 18쪽)

 

㈐ 로크

 

로크는 또한 자연 속에서 자연법칙이 존재하는 한 인간은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고 주장하였으며, 내 자신이 도난을 당했을시에는 도둑에 대한 처벌을 할 수 있는 권리가 누구에게나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의 재산을 보다 더 효과적으로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서 다른 어떠한 기관이 필요하였는데, 그 기관을 만들기 위한 중간과정이 바로 사회계약설이다. 사회계약설에 의하여 국가는 성립되었으나 국가는 절대권력을 행사하는 기관이 아니며, 홉스의 국가관과 대조, 입법부가 정한 법에 의해 행정부에서 통치되는 기관이었다. 국가는 그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을 경우, 국민의 재산을 안전하게 보호할 의무, 계약을 성립한 국민에 의해 파기될 수 있다는 것도 로크의 주장에서 주목할 만하다.

로크의 계약 개념은 각자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나의 사회 속으로 결합해 들어가는 계약이며, 국가를 수립하거나 혹은 그 속으로 들어가는 개인들 사이에 맺어지는 계약으로 이른바 사회계약이다.

로크는 공동체를 형성하는 과정과 정부를 수립하는 과정을 분리시킨다. 공동체는 일단 형성된 후에는 정부와 계약을 맺지는 않지만 수탁자로서 정부를 임명하고 신탁의 성격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석에 근거하여 신탁 위반을 이유로 정부를 해임할 수 있다. 로크는 통치계약의 관념을 받아들이는 대신, 그것을 신탁관념으로 대치시켰다. 로크는 정부 권력을 설명하는 곳곳에서 계약 대신에 신탁관념을 도입하고 있으며, 그것을 어디까지나 수탁된 권력으로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 로크가 얘기했던 자연상태를 떠올려 볼 필요가 있다. 로크에 의하면 자연의 역사적 상태는 평화, 선의, 상호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인간은 자유와 평등의 권리 그리고 노동과 재산의 권리를 누렸다고 한다. 자연의 법이 정의를 명령하지만 그것을 실시하는 데는 시민사회의 권위가 필요하다고 본 로크는 정치적인 조직사회가 이러한 사회계약에서 유래하였으나 시민들 쪽에서는 계속적인 의무는 주권자가 그러한 계약을 적절하게 준수하는 데 달려 있다고 보았다. 그는 자연법을 실제적인 상식의 명령, 즉 개인의 사적인 이익을 반영하고 있는 권리들을 위한 유명론적 상징이라 하고 있는데 이러한 권리들은 본래적인 필요에 의해서 자연법으로 발산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정치적 주권자들을 제한하며 또한 인간적인 실정법에 의해 시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문종욱, 74-75쪽)

 

1) 과연 인간이 스스로 자연상태의 자연법을 공정하게 집행하는 심판자 역할을 훌륭히 수행할 수 있겠느냐는 의문점이 제기될 수 있다. 인간의 이기심이 작동하여 스스로 재판관이 되기 어렵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이런 반문에 대해서 로크는 전제군주제를 부정하고 모든 개인들이 “시민정부”를 구성하는 대책을 제안한다. 로크에 의하면 인간을 이기적 존재로 전제하여 그런 자연상태에서 발생할 폐단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서 한 인간에 불과한 전제군주의 지배를 주장하는 통치계약론은 정작 극복해야할 자연 상태보다 더 좋은 상태를 보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계약은 정치권력에 대한 시민복종 의무의 정당근거가 결코 될수 없다.

2) 로크는 자연상태의 역사성과 실재성에 대한 의문에 대답하면서 처음으로 계약을 정의한다. “오직 하나의 공동체에 가담하고 하나의 정치공동체를 형성할 것에 동의하는 계약만이 자연상태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고 … 그 이외의 약정이나 계약을 상호간에 맺더라도 사람들은 여전히 자연상태에 머물게 된다.”

그리고 로크는 전 세계의 독립된 정부의 군주와 통치자들은 모두가 자연상태에 있으며, 아메리카의 밀림 속에서 마주친 한 사람의 스위스인과 한 사람의 인디언이 서로 상대방에 대해 전적으로 자연상태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계약은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이 자연상태에서 가지고 있는 권력으로 합리적인 공동체를 구성함으로써 자연상태의 자연법이 존속되도록 정치공동체를 구성하는 조건이다. 로크가 그런 방법으로 정부를 창설한 사례는 명시하지 않았지만 어네스트 바커는 로크가 계약 발생의 몇몇 역사적 실례를 찾아내고자 고심했다고 주장하며, 그러나 계약의 역사적 실재성 해명이 로크에게 중대한 문제는 아니고 “이성은 본래 인간이 자유롭다고 하는 우리의 입장과 같은 편”이라는 로크의 결론은 그의 중요한 관심사가 계약의 역사적 기원에 있는 게 아니라 합리적인 원칙에 입각한 정부를 정당화하는 데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볼 때 자연상태와 최초의 계약은 문자그대로의 의미가 아니다. 로크의 논지는 모든 사람 사이의 자연상태에서는 자신들을 구속할 수 있는 협약을 체결하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진실됨(truth)과 신의(faith, trust)를 준수하는 것은 사회적 관계의 맥락에서 인간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인간에 고유한 의무이기 때문이다.”

3) 자발적인 계약은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화폐사용의 암묵적 동의 및 노동과 근로에 의해 발생한 소유권의 규정 근거이고 정치적으로는 준법 또는 시민복종의 정당성 근거이며 그리고 정치체제로는 전제군주제를 비판하는 근거이다. “전제적 권력은 자연이나 신이 부여한 권력도 아니고 계약에 의해 양도될 수 있는 성질의 권력도 아니다.”

4) 계약에 관한 로크의 종합적인 입장은 정치사회의 기원에 관해 설명하는 『통치론』 제8장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계약은 합법적인 정부(국가)를 형성하는 근거이면서 계약 사항에 복종해야 하는 의무 근거이다. “자연상태를 벗어나서 공동체를 결성한 사람은 누구나, 목적달성에 필요한 일체의 권력을 다수파에게 양도한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권력의 양도는 하나의 정치사회에 동의하는 것만으로써 이루어진다. 이것이 국가를 구성하는 계약의 전부이다.”(박성호, 231-232쪽)

 

1) 그 용어는 먼저 소유권에 관하여 설명하는 제5장에서 처음 등장한다. 토지소유권은 사람들이 “화폐에 가치를 부여하고 사용하는 묵시적 동의”에서 비롯되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태초에 공유물이었던 토지를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토지만큼 소유해야 한다는 규칙이 어느 누구도 곤란케 하지 않고 통용되었을 것이다. 심지어 명시적으로든 묵시적으로든 권리주장을 포기한 타국 또는 왕국과의 연맹도 맺어진 것이다.

2) 가족공동체에서 “아버지의 군주적인 지배 권리는 명시적 또는 묵시적 동의에 의해 주어지며 … 부권에서 기인되지 않고 전적으로 자식들의 동의에 근거한다.” 이 주장은 필머의 가부장제에 대한 로크의 비판이다. 로크는 예를 들어 설명한다. 예컨대 낯선 사람으로부터 가족의 일원이 살해당하거나 피해를 입었을 때 그 피해자의 아버지가 가해자를 처벌하는 것은 “자연법의 집행권”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사실은 자식들로서는 거의 피할 수 없는 묵시적 동의에 의해 아버지의 권위와 지배의 길을 열어주는 당연한 일이다.

3) 정치사회 또는 시민사회에서 최초에는 “선량하고 뛰어난 사람이 우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고 … 그의 선행과 미덕에 대해 자연적 권위의 경의를 표시하게 되었다. 그 결과 최고의 지배권은 암묵적으로 그에게 위임되었다.”

4) 가족이 점차 커져서 국가로 발전하면서 “아버지의 권위는 큰 아들에게 계승되고, 그 이후 그 아들 밑에서 자란 사람은 누구나 묵시적으로 그에게 복종하게 되었다.” 단 그런 방식으로 묵시적으로 복종하게 된 이유는 권위의 계승자가 사람들에게 불안감을 주지 않았고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대했고 누구의 권리도 침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국가의 토지를 향유하면서 국가에 대해 묵시적으로만 동의하는 자는 토지를 증여하거나 매각하는 등의 방법으로 다른 국가에 가입할 수 있다.

5) 로크가 말하는 묵시적 동의는 성문화되지 않은 동의를 자연법 관념으로 보충하려는 의도라고 볼 수 있다. 즉 묵시적 동의는 자연법에 토대를 둔 명문화되지 않은 동의라고 정의할 수 있다. “선량한 지배자의 권력을 묵인하며 법조문에 없거나 있다할지라도 공공의 복지라는 목적이 추구되는 경우에 그리고 대권이 그들의 이익을 위해서 행사되고 있는 동안에는 백성이 불만 없이 묵인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사악한 지배자의 권력에 대해서는 자연법에 비추어 백성이 그들의 권리를 주장하며 군주의 권력에 제한을 가하지 않을 수 없다.

6) 부권과 정치권력 그리고 전제권력에 관해 총괄적으로 주장하는 제15장에서“정치권력은 그 사회 구성원의 복지와 재산의 보전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는 [책임과 의무에 대한] 명시적 또는 묵시적 신뢰에서 위임된 것이다.” 그리고 국왕이 의무를 준수해야할 서약도 두 가지 의미로 구별된다. “명시적 서약은 대관식에서 행하는 서약이고, 암묵적 서약은 국왕이기 때문에 국민을 보호해야 할 의무사항이다.”(이종철, 234-235쪽)

 

 

㈑ 헤겔

 

사회계약론의 국가와 시민사회는 모두 국가가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의 의지를 토대로 성립해야 한다는 요구에 대한 답이다. 이를 위해 모두는 개인의 생존권, 욕망을 추구할 권리, 그리고 이를 위한 소유권을 국가의 원리로 삼는다. 그래서 국가 안에서 개인의 자유는 각자의 권리를 서로에 의해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사회계약론에서 각자에게 이러한 권리가 주어져 있음은 ‘자연법’에 의해 정당화되며, 서로의 권리는 계약 이전의 자연 상태에서 사회 상태로 이행될 때 인정된다. 헤겔은 『법철학』의 앞부분을 차지하는 ‘추상법’에서 자신을 자유라고 인식하는 자기의식의 현실적 자유가 소유에 의해 가능하며, 소유 대상에 대한 권리는 단순히 나와 대상과의 관계를 넘어서 타인의 동의를 통해 비로소 가능해진다고 설명한다. 이렇게 현실에서 평등한 개인은 자유롭게 욕망을 추구하도록 서로 인정된, 소유의 주체다.

따라서 개인의 의지를 토대로 국가를 형성해야 한다는 요구에 대해 사회계약론과 시민사회 모두 개인의 권리 실현을 중심으로 국가를 형성하려는 노력으로 응한다. 그러나 국가와 개인의 권리주장이 욕망하는 개인에게 양립하지는 않는다. 개인이 계약을 통해 국가의 구성원이 된 다는 것, 그리고 그 안에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국가에 대해 내면적인 자발적 복종으로까지는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즉, 개인들의 결합체 안에서 개인들은 자신이 완전히 자유롭다고 느끼지 못한다. 여전히 개인들에게는 자신의 권리만이 절대적이므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타인 혹은 공공의 이익과의 충돌은 개인의 자유를 조금씩 희생할 것을 요구한다. 개인에게 현실적 자유는 자신이 생각하는 완전한 자유에는 못 미치는 것으로 간주된다. 무제한적인 내면적 자유는 국가라는 현실 속에서는 완전히 실현될 수 없다.

개인의 내적인 자유, 즉 그 자신이 생각하는 완전한 자유가 중심이 되기 때문에, 핵심적인 권리의 보호를 위해 요청되는 사회상태의 자유는 불가피하게 권리의 희생으로 간주된다. 시민사회에서 개인은 자기 자신을 욕망으로서 간주한다. 앞서 언급했듯, 욕망은 근대 주관적 자유의 표현이다. 사회계약론에서도 이는 마찬가지다. 단, 사회계약론에서는 자연 상태를 통해 주관적 자유가 표출된 상태를 일종의 원형적 자유로 설정한다. 여기서는 개인에게 생명과 재산의 보존이라는 핵심적인 권리에 의해 정당화되는 무제한적 권리가 주어진다. 자연 상태의 자유는 그들이 생각할 수 있는 최대한의 자유인 것이다. 배타성을 원리로 하는 자유는 개인을 타인과의 경쟁관계로 몰아넣는다. 그러나 이 무제한적인 자유가 초래할 부자유의 가능성 때문에라도, 자신의 권익을 효율적으로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사회 상태는 요청되었다. 자연 상태에서 국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개인의 권리의 일부 혹은 전체는 양도되어야 한다. 생명권과 재산권과 같은 중요한 권리의 보호에 대한 책임을 자신보다 더 큰 권력에 맡김으로써 그에 부가되었던 무제한적 자유도 제한된다. 이렇게 시민사회와 사회계약론의 국가의 개인은 자유의 기준을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갖기 때문에 현실적 자유의 어떠한 조건도 고려되지 않는다. 따라서 타인과의 관계는 자신에게 강제로 나타나게 된다.(백송이, 20-22쪽)

 

근대 자연법론자들의 일반적인 특징은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을 내세우면서 동시에 사회적 질서를 확립하고자 하는 양면성을 보인다. 자연법론자들은 질서를 중시하면서 개인의 자유를 왜소하게 다루는 중세적 논의를 더 이상 수용하지 않으려고 한다. 따라서 초월적 영원법이나 신법에 바탕을 두고 인간의 내면세계에까지 간섭해 오는 과거의 지나친 지배 방식의 악용을 차단하여 인간의 내적 자유가 강제되는 것을 금지하고자 한다. 또한 다른 한편 개인간의 충돌에서 발생하는 이익 갈등을 제어할 수 있는 강제하는 협의의 법을 확립하고자 한다. 그래서 근대의 자연법론자들은 법적 의무와 덕적 의무, 합법성과 도덕성을 구별하고자 했다. 이것은 법의 도덕화나 도덕의 법화가 빚어내는 신화를 종식시키기 위함이다.

근대 자연법론자들이 주장하는 자연 상태 라는 것은 고․중세에 지배적이었던 유기체적 자연관에 바탕을 둔 신분제 사회에 대한 반란 선포를 제기하는 기초가 되며,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위하여 사회의 구조를 완전히 재편하는 기능을 담당한다. 근대인의 자연 상태라는 것에서 등장하는 인간은 자기의 권리를 당당히 주장하는 개인으로 자리하고 있으며, 시대사적 맥락에서 보면 신흥 상업 계층들의 자기 모습이기도 하다. 더 이상 이들은 자신들의 개인적 권리와 이익이 전체의 이름으로 희생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따라서 자신들의 권리와 생명을 유지하는, 이른바 자기 보존을 일차적인 목적으로 삼았다. 그러나 자기의 보존은 타인과의 관계를 떠나서 논의될 수 없으므로 타인과의 안전한 관계 정립이 요구된다. 여기에 사회 계약론이라는 새로운 근대의 사회질서 유지론이 등장한다. 근대인은 고·중세의 구속으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그 노력의 대가로 자유와 해방을 확보하지만, 반면에 그로 인해 상호 침입의 위험과 불안을 감수해야 하는 상태가 초래된다. 여기에 사회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법의 확립이 절실하게 된다. 그래서 근대인은 무법적인 자연 상태로부터 법이 확립되는 시민 상태를 요구하게 된다.(홍상호, 15-16쪽)

 

시민사회는 헤겔이 말하는 국가에서의 애타주의의 존재방식, 타인을 위하여 기꺼이 희생하려는 것, 연대와 공동체 의식이라는 국가와 개인을 연결시켜 주는 방식과는 다르다. 시민사회는 자신의 욕구만을 만족시키려는 구체적 인격을 그 주체로 하고 있는 것으로 타인을 욕구충족을 위한 수단으로 간주하는 인륜의 상실태로 존립하고 있다. 이제까지 논의된 시민사회는 개별자의 특수성의 욕구가 여전히 지배되는 상태로, 의식적으로 자기의식(Selbstbewußtsein)에 도달하지 못한 불행한 의식에 머무른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즉 불행한 의식이라고 하는 하나의 의식 속에는 언제나 그 자신과 또 다른 하나의 의식이 있게 마련이다. 즉 특수성에 머무른 의식과 보편적 의식이 서로 갈등하는 그러한 상태에 머물러 있는 상태가 바로 불행한 자기의식이다. 자기의 욕망(Bedurfnis)충족의 체계로서 대상, 즉 사물에 얽매어 있는 욕구의 차원에만 머무르는 상태에서 보편적 의식으로 나아가려는 의식의 운동과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오성적인 차원에 머무른 국가의 이해는 비천한 의식에서 나타나며, 국가와 나와의 합일을 의식하는 고귀한 의식으로 이행해 간다. 불행한 의식의 극복은 바로 특수성과 보편성, 두 양극을 종합한 개체성의 의식의 확립, 즉 동일성과 차이성의 종합, 추상성과 구체성의 종합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개념의 추상성과 주체의 구체성이 종합된 것을 헤겔은 정신이라고 설명한다. 나(Ich)가 우리(Wir)가 되고 우리가 나가 될 때 그러한 보편적 개체가 정신이다. 이러한 개체성과 보편성의 통일이 국가에서 이루어진다. 정신의 본질은 자유이며 법, 도덕, 시민사회, 국가는 모두 자유를 본질로 하는 인간의 행위에 의해 생겨나고 지탱하는 것으로서 자유의 객관태이다. 결국 불행한 자기의식에 대한 서술은 개별적 자기의식 혹은 자연적 자기의식이 보편적 자기의식, 즉 주관성의 관계에서 진정한 객관성과 합치되는 단계로 이행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홍상호, 53-54쪽)

 

헤겔은 『법철학』 이전의 초기 저작에서부터 소유를 두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점유(Besitz)와 소유(Eigentum)의 구분이 그것인데, 대상에 대한 물리적 점거에 지나지 않는 점유는 타자의 인정 (Anerkennung, 승인)에 의해 즉 서로간의 인정을 통해 개인 소유적 재산으로 전화된다.(Hegel, Enz. : 423) 사유재산에 대한 헤겔의 인식은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적 자본주의의 기저에 공동체적 상호인정의 개념이 전제되어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며, 이는 후에 국가로의 매개를 가능하게 하는 시민사회의 한축으로서 부각된다.(Hegel, PR : 306) 헤겔은 자유주의적 사상가들이 사적 소유를 절대화하는 경향과 달리 소유는 사회 구성원 상호간의 인정 을 토대로 하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비개인적인 속성을 내재하고 있다는 데 주목한 것이다. 소유는 이제 물리적 욕구의 충족이라는 일차적 의미로부터 사회적 인정이라는 사회적 의미로 확대되기에 이른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개인적 소유를 사회구성원 상호간에 인정하도록 만드는 기준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이 점이 해명되지 않는다면, 사회 내에서 개인의 소유는 지속적인 불안정 상태에 놓이게 될 것이다. 헤겔은 소유에 대한 상호인정을 가능하게 하는 기준으로 노동 을 제시한다. 소유의 사회적 인정에 있어 노동을 주요한 요소로 꼽고 있다는 점은 헤겔을 자유주의적 사회계약론과 구별할 수 있는 중요한 준거이다. 왜냐하면 자유주의적 사회계약론에서는 개인의 생명과 재산을 타인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상호간에 사회계약을 맺게 되고, 이러한 관계가 정치영역에까지 확대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헤겔은 계약이란 추상적 법의 단계, 즉 소유를 사회적으로, 법적으로 객관화하는 단계에서만 유효한 원리라고 못 박는다.(김민혜, 26쪽)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보듯 근대 자연법론은 경험주의나 형식주의 모두 근대 시민 사회의 분화의 결과인 개인과 공동체의 대립, 합법성과 도덕성의 대립 등을 방법론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대립을 통해 양자의 실체적 통일인 인륜적 총체성이 해체되고 사회는 “하나의 필연성에 복종하면서 물리적 욕구들에 관한 보편적인 상호 의존의 체계”로 변질되며, 이 체계의 유지를 위해 “노동과 축적의 체계 그리고 학문으로는 이른바 정치경제학의 체계를 형성하는 물리적 욕구와 향유”가 전면적으로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예나 초기의 헤겔은 이러한 의미의 해체와 분열, 개별적 주체의 욕구의 전면화 현상을 근대사회를 파국으로 이끄는 부정적 현상으로 보고 그것을 ‘부정적 총체성’이나 ‘부정적 절대자’ 혹은 ‘상대적 인륜성’으로 간주한다. 다음에서 우리는 『자연법』과 『인륜성의 체계』 두 작품을 통해 고대의 인륜적 세계를 하나의 이상(Ideal)으로 정립하고 부활하고자 하는 청년 헤겔의 이러한 소박하면서도 분명한 의지를 검토하고, 절대적 인륜성의 문제를 둘러싼 두 저작 사이의 미묘한 차이를 밝히고자 한다. 우리가 여기서 ‘절대적 인륜성’이라 함은 개체와 공동체, 특수자와 보편자가 통일을 이루고 있는 고대 폴리스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이종철, 475-476쪽)

 

㈒ 칸트

 

원초적 계약 혹은 사회 계약에 관한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견해는 《윤리형이상학(Die Metaphysik der Sitten)》에서 체계적으로 나타나며 《영구평화론(Zum ewigen Frieden, Ein philosophischer Entwurf)》에서는 이 개념을 적용하고 있다. 『윤리형이상학』에서 칸트는 자유의 법칙을 자연 법칙과 구분하여 도덕 법칙이라 부른다. 그런데 문제는 정의의 법칙(Gesetz) 자체는 도덕 법칙으로부터 곧바로 도출되지 않기에 칸트는 정의(Recht) 개념에 대한 천착을 선행시키는 방식으로 국가론, 나아가 궁극적으로 원초적 계약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맹주만,2002: 92). 모든 입법가들은 전 국민의 통일된 의지로부터 나온 것으로서 법을 제정함으로서 개인의 특수한 의지를 공동의 공적 의지로 결합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칸트에게 있어서 사회계약(원초적 계약)이란 일종의 논리적 구성물로서 ‘도덕적 이상’으로서 이성적인 지위를 갖는다.(장효민, 24쪽)

 

따라서 정치적 준칙은, 오직 정의에 대한 의무의 순수개념에서 도출되어야 한다. 순수한 법적 원리는 그것이 실현될 수 있음을 가정해야 하며, 이는 필연적으로 정치와 연결되어 있다. 진정한 정치는 도덕성에 충실하지 않고서는 일보도 전진할 수 없다. 결론적으로 정치적 준칙과 도덕간의 대립은 '정치'가 '도덕'앞에 무릎을 꿇음으로서 해소되는 것이며, 이를 통해 정치는 완만하지만 영원히 빛나는 단계에 도달하게될 것이다. (오정민, 173-174쪽)

 

◆. 영구평화론

 

글로벌 시티즌십의 법적․제도적 한계에 대한 반박은 대부분 이와 같은 논거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반박은 일견 타당하다. 왜냐하면 앞서 보았듯이 시티즌십을 이루는 요소들이 법적 지위뿐만 아니라 정체성, 의식, 소양 등도 해당하기 때문이다. 법적․제도적 지위 및 권리에만 매달릴 경우 자칫 균형을 잃을 수도 있다. 하지만 글로벌 시티즌십, 또는 세계 시민이라고 할 때 시민으로서의 지위가 확보되지 않은 덕성만 강조된다면, 그것을 (정치적)시민의 의미를 내포한 세계시민이라고 개념화해야 할 필요성과 타당성이 떨어진다. 다시 말해서, 앞서 제시된 주장의 경우, ‘세계시민’이라는 관념이 아닌 ‘세계인’으로서의 윤리의식으로 지칭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세계시민성의 함양’이라는 구호는 세계시민에 대한 이론적 한계를 내포하고 있음으로 ‘세계인으로서의 윤리’라는 표현이 더욱 적절하다. 결국 세계시민으로서의 세계시민의식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세계인으로서의 윤리와 구별되는 정치적 개념화 작업이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이론적 선행 작업이 없다면, ‘세계시민’이라는 용어도 유보되어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시티즌십이 글로벌 시티즌십으로 확장되기 위해서는 글로벌 시티즌의 지위 확보와 그에 따른 법적․제도적 권리 및 의무의 부여가 담보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경우는 엄밀한 의미의 세계 시민이라고 할 수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현 시점에서 현대사회에는 아직 글로벌 시티즌십, 또는 세계시민의식, 세계시민성 등의 개념들은 재검토되어야 한다.(이지훈, 58쪽)

 

세계시민에 대한 사상적 관념을 착안하게 된 데에는 다양한 배경이 있겠지만, 크게 세 가지로 분석해 볼 수 있다. 보편 이성에 근거한 선험적 요청과 평화적 공존을 위한 당위적 요청, 그리고 지구적 차원의 문제 해결을 위한 현실적 요청이 그것이다. 이러한 분류는 서로 중첩되는 부분도 존재하지만, 각각의 입장에서 추구하고자 하는 바가 상이하다.

먼저 보편 이성에 근거한 선험적 요청은 세계시민주의의 가장 오래된 전통에서 볼 수 있다. 이러한 입장에서는 신과 인간을 포함한 우주를 지배하는 원리가 로고스, 즉 이성이라고 보며, 모든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는 이성으로 인해 인류의 단일성을 파악한다. 따라서 우리가 세계시민으로 살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에게 선험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보편이성 때문이다.역사적으로 볼 때 보편 이성에 근거한 선험적인 세계시민관념을 주장한 학자들은 고대 그리스의 견유학파와 로마의 스토아 학파이다. 견유학파는 세속의 폴리스를 부정하고, 코스모폴리스의 일원으로 살아갈 것을 주장한다. 견유학파에게 코스모폴리스는 자연의 법칙에 따라 운행되는 곳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에게 주어진 이성을 통해 자연의 법칙을 따라 살아야하며, 다른 시민과 동물, 신까지 함께 코스모폴리스를 구성하게 된다. 이들에게 세계 시민으로 살아가야 할 의무의 동인이 있다면 인간애(philanthropia), 즉 휴머니즘이다(이창우, 2000: 191-192). 이러한 인간애는결국 이성을 따라서 사는 진정한 인간, 즉 현자가 되어야 가능하다(성염,1999: 30).(이지훈, 26쪽)

 

칸트는 누구든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할 때 완전한 공동체 또는 세계시민사회의 일원이 된다고 생각하였다. 결국 이 말은 이성의 공적 사용을 통한 ‘완전한 시민적 정체’와 ‘세계시민사회’는 별개일 수 없다는 것이다(김상준, 2007: 287-289). 또한 칸트는 자유국가들 간의 대립을 인정하면서 영구평화를 위한 방법으로 ‘국제연합’을 주장하였다. 그는 국가 간의 계약 없이는 어떠한 평화도 보장받을 수도 없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평화연맹’과 ‘평화조약’은 구별되어야 한다. 평화조약은 그 때 그 때의 전쟁을 단지 종식시킬 뿐이지만, 평화연맹은 모든 종류의 전쟁종식을 영구히 추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평화연맹은 국가 자체의 자유를 보호하며, 타 국가들의 자유도 보호하고 지속시켜준다. 이를 통해 평화연맹의 이념은 점차적으로 모든 국가들로 확산되어 가게 되며, 그 결과로 영구평화의 길이 실현된다. 이와 더불어 칸트는 ‘세계공화국(weltrepublik)’ 대신에 그 소극적 대안으로서 칸트는 ‘연맹(Bund)’을 구성하도록 권하였다(백승균, 2007: 381-382). 그는 『영구평화론』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이지훈, 24쪽)

 

칸트는 ‘영구평화론’에 ‘철학의 기획’이라는 부제를 달았다. 이것은 그의 평화론이 ‘순수이성의 기획’으로써 제시된 것임을 말해준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이성의 자연 상태’가 지닌 문제를 이성의 자기비판의 법정을 통해 해결한다. 마찬가지로 그는 우리가 소송을 통해 분쟁을 해결할 수 있도록 안정된 법적 상태를 마련한다. 칸트는 영원한 평화를 위해 개인과 사회 그리고 국가들 간의 자연 상태를 벗어난 법적 체제를 구상한다. 무엇보다 칸트는 예비조항으로 현실적 정치권력의 투쟁 속에서 전쟁을 유발하고 평화를 교란시키는 것, 적과 아군 사이의 증오나 공포, 즉 적의의 감정을 자극하는 모든 가능한 원인들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3개의 확정조항은 다음의 세 가지 항목을 포함하고 있다. 첫째, 모든 국가의 시민체제를 공화제로 할 것. 둘째, 국제법을 자유로운 여러 국가의 연합체 위에 구축할 것. 셋째, 세계시민법이 보편적인 우호를 초래하는 조건에 제한되도록 할 것. 우리는 이와 같은 3개의 확정조항을 통해 영구평화를 달성하게 되고 자연은 그것을 보증하게 된다. 칸트가 세계시민법에 입각해 내세운 세계시민주의 사상은 현재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지구의 주민이라는 의식’은 핵전쟁의 위험에 노출된 우리에게 더불어 살아가야 할 이유를 제시한다. 인간은 전쟁의 궁핍과 비참 속에서 서서히 영구평화의 길로 나아간다. “칸트가 영구평화론의 맺음말에서 지적한 것처럼 영구평화는 결코 공허한 이념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인류의 의무이자 과제다.”(조방걸, 21쪽)

 

칸트의 첫 번째 해답은 ‘어떤 경우에도 항구적인 평화를 좌절시키는 요소들을 배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우선 국가간에 비밀스런 행위는 그만두어야 한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언제나 다음 전쟁을 위한 요소를 묵시적으로 유보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한 국가에 의한 다른 국가의 귀속에 관한 생각은 배제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국가는 사적 소유가 아니기 때문이다. 국가는 오히려 도덕적인 인격과 같이 고려되어야 한다. 또한 무엇보다도 전쟁에 대한 유혹들이 제거되어야 한다. 그것들 가운데는 현존하는 군사력을 들 수 있다. 왜냐하면 군대는 군비경쟁의 원인이 되며, 따라서 전쟁의 원인이 된다. 아울러 대외정책에서 어떤 종류의 국가부채도 용납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국가 경제가 파탄을 가져오면, 그 다음에는 전쟁으로 이어지는 것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다른 국가의 내정에 군사력을 통해 간섭하는 것은 금지되어야 한다. 또한 전쟁에서의 형태가 미래의 평화에서 상호간 신뢰를 파괴하는 암살․독살행위․반역․항복한 적에 대한 박해 등을 해서는 안된다.

칸트의 두 번째 해답은 ‘각 국가의 공민적 체제는 공화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칸트는 각 국가 안에서의 법상태의 관철을 통해서 항구적 평화의 실현을 위한 결정적 전제가 국가들 사이에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렇기 때문에 영원한 평화를 위하여 각 국가의 시민적 헌법은 공화국이어야 한다는 요청으로부터 시작된다. 각각 국가들 안에서 시민평화의 필요한 조건을 구성하는 법 상태와 항구적으로 민족간의 평화를 보장할 수 있는 법 상태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성립된다는 것이다. 즉, 국가적 평화가 개개인들이 사회계약을 통한 자결로부터 법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을 통해서 성립되듯이, 국제적 평화도 국가들이 자유로운 자결을 통해서 국제연맹을 구성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해결을 위한 하나의 가능성은 전세계를 포괄하는 공화국, 세계공화국의 성립에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칸트는 실천적 어려움 때문에 세계국가의 모델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가 민족의 자결권에서 자결을 위한 개개인의 권리에 대한 포기할 수 없는 상응성을 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국제연맹에서 공화국적 국가형식의 세 가지 전제들에 대한 적대관계가 등장하게 되는데 이 전제에 따르면 시민들은 모두 자유롭고, 동등하게 인정되며, 모든 사람들에게 통용되는 법에 복종하는 것이다. 이러한 명제는 국제연맹 안에서 국가들은 그들이 승인한 법에 굴복하는 자유롭고 동등한 주체들로서 승인된다는 사실에 놓여 있다.

결국 국내법과 국제법은 보편적 세계시민법을 통해서 보완된다는 것이다. 국가의 내적 헌법상태, 모든 국가들의 법적으로 정돈된 동등권, 그리고 공적 인권의 승인, 이 세 가지가 영원한 평화의 필연적 조건을 형성한다는 것이다.(정태일, 191-192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칸트가 말하는 인권의 보편성은 네 인격 속의 인간성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인격 속의 인간성까지도 결코 수단으로만 사용하지 말고, 언제나 수단과 동시에 목적으로 사용하도록 그렇게 행위하라는 말에 잘 나타나고 있다. 이에 대해 밀레(A. J. M. Milne)는 모든 개별특수적인 도덕성이 이성적인 근거에서 따라야만 하는 최소한의 보편적인 도덕적 기준을 세웠다고 하였다(A. J. M. Milne, 1986: 85). 칸트가 주장한 인권의 보편성은 세계인권선언에도 잘 나타나고 있다. 국제연합이 제3차 총회에서 인권존중을 위한 국제협력을 위한 목적으로 세계인권선언(1948.12.10)을 채택하였다(신동아편집부, 1975: 86-90).

세계인권선언의 주요내용은, 모든 사람은 날 때부터 자유롭고 평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종족과 피부색, 성별, 민족적 혹은 사회적 출신등으로 인하여 차별을 받지 않는다. 또한 모든 사람의 생명과 자유 및 신체의 안전에 대한 권리를 가지며, 사람은 법률 앞에 사람으로 인정받을 권리와 법 앞에서 동등하다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세계인권선언은 칸트가 말하는 인권의 보편성이 국제적인 연대를 바탕으로 실현할수 있는 토대를 제공한 것으로 볼 수 있다.(정태일 1, 19쪽)

 

 

◆. 친북좌파는 평화체제론을 종북좌파 연고주의 맥락에서 읽고, 선험적으로 읽지 않는다.

 

경계인이 단지 '기회주의자'로, 세계시민이 단지 '조국 없는 건달'로 낙인 찍혀 억압당하는 사회에서는 당연히 이러한 사유모델은 완전히 낯설 수 밖에 없다. 'A(남한)'냐 'A아닌 것(북한)'이냐만이 존재할 뿐이다. 나는 프랑스의 현대철학자의 어려운 탈 현대이론 대신에 불교 경전의 도움으로 이분법적 사고방식에서 생기는 문제를 설명하려 했지만, 법관들은 내 의견을 이해하지 못했거나, 아니면 아예 이해자려 들지 않으려 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러한 태도는 서울에서 뿐만 아니라 어느 곳에서나 관찰할 수 있다. 항상 듣게 되는 비난은 경계인이든 세계시민이든 코스모폴리턴은 구체적인 공동체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 자신의 안락만을 좇는다는 것이다. (송두율, 182쪽)

 

2. 공론장

 

그러나 서구의 공론장과 '향약'은 여러 가지 면에서 같은 면과 다른 면을 가지고 있으므로 본 연구의본 장에서는 그것을 고찰하여 한국적 전통에서 공론장이 어떻게 작동되었는지,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를 살펴 볼것이다. 아울러 오늘날 한국시민사회가 서구의 '시민사회'의 맥락과 함께하기 보다는 오랜 한국사회의 전통적 힘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음을 밝히고자 한다. 하버마스에 의하면 자유주의 부르주아 공론장은 발달하는 도시의 시민계층이 봉건권력과 전제군주에 직·간접적으로 대립하는 가운데 생겨난다. 즉 사유재산의 영역인 사적 부문의 보호를 자신의 임무로 삼는 근대공인이 탄생되는데, 이들은 살롱에 모여 문자매체를 매개로 봉권권력과 해방된 문화에 대해 이성적이며 비판적인 토론을 하였고, 이렇게 발전한 문자매체 공론장과 정당 등의 자발적 결사를 중심으로 전제 국가에 대항한다. 이러한 시기에 자본주의 발달에 따른 산업과 시장의 성장으로 자신의 세를 확장해 가던 시민사회는  당시 국가의 규제 정책 등과 맞부딪치게 되었다. 절대주의의 규제로부터의 탈출이라는 상황 속에서 하나의 공중으로 용이하게 묶인 식사 세계 공론장의 시민층은 자신들의 제도들을 이에 대한 저항과 비판에 사용하기 시작했으니 그것이 정치영역에서의 공론장의 태동이다. 그 결과 공론장의 이념인 공공성(Publicity)을 제도화시킨 부르주아 입헌국가가 탄생한다. 귄위의 전시(display)와 복종만이 있던 근대이전의 밀실의 정치, 정치의 황무지에서 자신들의 문제를 토론하고 결정하는 새로운 정치의 공간이 생성된 것이다.

이와 같은 공공권역적 모습을 조선의 '향약운동'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비록 시민사회가 분화되지 못했고 부르주아가 담당한 것은 아니지만 서구부르주아와 같이 절대주의의 규제로부터 탈피하기 위한 운동이 향약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초 사람들이 주장한 향약은 지방유력자들 중심의 '독립 영역'으로서 자기들 중심의 향권체제를 고집하는 지방세력과 군현내부에까지 왕권을 침투시킴으로서 중앙집권화를 기하려는 중앙정권과의 사이에서 그 타협, 절충의 결과 형성된 것이다. 즉 지방유력자들이 군주의 자의적 정치, 자의적 공공성에 제동을 걸고 보편적 진리로서의 주자학적 공공성을 도입할 것과 그럼으로써 향촌사회의 자치권을 확보하려는 노력의 결실이었던 것이다.

향약보급운동의 기본적인 목표는 주자학적 공공성을 형성하여 중앙권세가들의 지방사회에 대한 기존의 자의적 수탈구조를 파쇄시키려는 것이었다. 즉 사림파는 왕과 훈구대신들의 자의적 밀실정치로 인한 지방사회의 수탈을 차단하기 위해 보편적사회질서로 주자학적 공공성을 형성하기 위해 향약의 실시를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들은 《소학》, 《주자가례》를 보급하고, 향음사례와 향사례의 시행을 주장하면서 왕도 그에 따라야 한다며 주자학적 보편질서를 확립하려고 노력하였고, 이를 토대로 조선의 중앙집권정책으로 위기에 빠진 향촌지배권을 확립하려고 하였다. 비록 일반 서민들이 함께 한 것은 아니었지만 서민들의 경제적 침탈을 막는 것이었기 때문에 주자학적 질서는 광범위한 지지를 획득할 수 있었다. 이는 곧 밀실의 자의적 정치를 공공성의 정치로 바꾸려는 노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김주영, 48-49쪽)

 

 

⑴ 유교 공론장

 

우암의 일생은 大一統思想을 기반으로 한 소중화론에 근거를 둔 춘추대의로 일관되고 있는데, 그에게서 뚜렷이 부각되는 춘추대의의 의리는 尊周攘夷, 誅討亂賊, 復讐雪恥 의리이다. 존주양이의 의리는 周에 대한 문화적인 존숭을 의미하지 이적에 대한 지역적 종족적인 무분별한 부정이 아니며, 단지 周를 높여 개별집단을 종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부분적인 집단이 자기의 주체성을 지키면서 전체를 위해 공헌하는 정신이다. 주토난적의 의리는 父子간의 천륜과 君臣간의 公道를 저버린 무도한 자들에게 筆誅를 가하여 윤리적 심판을 내리는 것이다. 복수설치의 의리는 ‘君父之讐不共戴天’의 의리로서 군부를 죽인 원수들에 대한 응징의 정당화이며, 비인륜적인 만행에 대한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인륜도덕의 실현이다.

대일통사상을 기반으로 하는 소중화론에 근거한 우암의 춘추대의는 그의 문학 작품 속에 그대로 투영되고 있다. 우암의 詩와 祭文에 나타나는 춘추대의를 尊周攘夷, 誅討亂賊, 復讐雪恥 의리로 나누어 살펴보면, 먼저 촉한이나 조선을 읊은 詩와 李時稷의 挽詩 등에서 존주양이의 의리를 볼 수 있다. 우암은 패권을 일삼는 魏의 정통을 부정하고 蜀漢에게 정통을 부여하여 貴王賤覇 의리와 대일통사상에 기반한 정통론을 제시하였고, 조선을 用華變夷의 완성으로 설정하여 명의 멸망 이후 조선에게 중화 문화를 담당할 책무를 부과하였으며, 무도하게 평화를 깨뜨린 청을 이적으로 규정하고 물리쳐 중화문화를 존숭하려는 尊周攘夷의 의리를 밝혔다.

다음으로 사문난적을 성토하는 詩에서 주토난적의 의리를 규명할 수 있는 데, 학문을 바로 세우고 이단을 막아야 五倫을 돈독히 하여 인륜공동체가 실현된다는 입장에서 사문난적을 성토하였다. 宋時榮과 黃君美를 애도하는 祭文에서는 복수설치의 의리가 드러나는데, 청의 야만적인 침략을 응징하는 복수설치가 우암의 필생의 사업이었다.(박도균, 71-72쪽)

 

그러나 조선후기 향촌사회의 공론은 士들에 의해 주도한 향회를 통해 형성되었으며, 19세기에는 그나마 향회나 사족들도 수령의 거수기 노릇을 하는 존재로 전락하는 사례가 대부분이었다. 공론의 사안과 관련하여 소민들은 직접적인 당사자였지만, 타자화되어 발언권을 가지지 못했다. 물론 소민들의 의사가 완전히 배제된 것은 아니었다. 특히 공동납 이후 관의 부세부과에 대해 이회 내지 동회, 면회를 통한 공론과 공론에 의한 조정 작업은 상시화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회나 동회, 면회를 통해 형성된 소민들의 ‘공론’도 어느 정도 향회에 반영될 수밖에 없었다. 또 관과 유착한 대민들, 혹은 동원과 협박을 통해 관이 조성한 향중공론이 소민들의 이해와 대립되었을 때 소민들은 이회, 동회, 면회를 통해 소민들의 공론을 형성하여 관권은 물론 대민들에 대항하였다. 나아가 그것이 민란으로 비화되면 대체로 민란 주도자의 처형이나 정배, 수령의 파면 등의 과정을 수반하면서 중앙정국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는 임술민란이 발발하였을 때 민란의 원인이 자신의 부덕 때문이라고 스스로 책망하면서 按覈使와 道臣・帥臣들로 하여금 백성들에게 사죄할 것을 명령한 국왕의 교시를 통해서도, 민란 수습대책으로 전국 각지로부터 삼정이 정책을 받고 이정청을 설치, 이 정책을 시행한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동리→면→군현→중앙으로 이어지는 바, 소민들의 공론과 그에 의한 정치과정의 동심원적 구조를 그려볼 수 있다.

한편 민란에서 형성된 소민 주도의 공론은 사족 중심의 공론 혹은 수령에 의해 강요된 사이비 공론에 저항하는 대항적 공론이라고 할수 있다. 이들은 거창, 상주, 성주 등의 사례에서 보이듯 주로 과세부담액수를 둘러싸고 기왕의 공론과 경합하였지만, 대민들은 자신들이 면제받는 군포에 대해 거론하지 않는 데 반해 소민들은 군포의 균등 요구 “毋論上下”, “勿偏徵於小民 均排於齊戶야” 등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소민들이 부세부담 면에서 균・평의 논리로 무장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며, 이 점에서 소민들의 공론은 사림공론이나 사족 중심의 향중공론과 달리 기왕의 제도나 질서, 관행을 전복하려는 ‘민중적 공공성’을 내장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배항섭, 340-341쪽)

 

또한 조선 왕조에서 공론이 중시된 이유는 그것이 정치적 정당성의 근거로 작동했기 때문이다. 이상익에 의하면 유교에서 정치적 정당성의 근거는 천명 天命에서 민심 民心다시 민심에서 공론 公論으로 점차 이행되었다. 선진 先秦시대의 유교는 본래 천명을 정치적 정당성의 근거로 보았지만 천명은 알기도 어렵고 또 그것이 실재하는지도 의심스러워서 대신 민심론이 등장하게 되었다. 즉 민심에 따르는 정치적 결정은 정당한 것이며 민심에 위배되는 정치적 결정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민심이 중요한 기준이기는 하나 민심이 항상 정당한 것은 아니라는 자각이 있었다. 그 후 송대 宋代에 주자는 선진유학의 천명론과 민심론을 지양하면서 공론을 정당성의 근거로 제시하였고 그 후부터 주자학에서는 공론을 정치적 정당성의 근거로 간주하게 되었다. 주자에게 공론이란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 万口一辭로서 천리에 따르고 인심에 부합되어 천하가 함께 옳다고 여기는 것 天下之所同是者을 의미한다.

조선정치에서 주자의 공론은 조금 수정되기도 하는데 박현모는 이율곡을 그 예로 들고 있다 율곡은 맹자의 말을 빌어 공론을 사람의 마음이 모두 그렇다고 여기는 것 人心之所同然者으로 해석하면서 주자가 말한 모두 옳다고 여기는 것을 모두가 그렇다라는 말로 대체함으로써 진리의 문제보다는 동의의 문제를 중요시한다. 따라서 율곡에게 공론은 토론과 타협의 여지가 존재하고 있음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시대 공론정치는 비록 그것이 상당히 제도화되었다손 치더라도 일정한 한계를 지닌다 첫째 조선시대 공론의 주체는 사림士林에게만 제한되었다. 사림이란 유교적 학식과 덕망을 갖춘 사람을 일컬으며 말이 없는 하늘과 일관되게 말하지 않는 민심 을 헤아려 자신의 견해를 표출하고 사물을 판단하는 정치적주체였으며 보통 이런 사림들간의 논쟁을 통해 공론이 정해지는 것이었다. 따라서 일반백성은 아직 정치적 주체로서의 자격과 지위를 갖지 못했으며 공론장에서 말할 수 있는 기회가 박탈되어 있었다(이동수, 13쪽)

 

 

주자학적 공론은 先秦儒家의 王道정치를 계승하고 있다. 선진유가의 왕도정치에서는 天心이 民心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군주는 하늘을 대신하여 백성을 통치해야 함을 강조한다. 즉, 천명은 백성들의 여론을 반영하고 있는 이상, 군주는 천명을 통해 권력의 정당성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자의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의 요구를 수용해서 통치해야 한다. 이와 같이 선진시기의 천명은 자유민주주의에서와 같이 시민들의 권리가 제도적으로 보장되어 있지 않는 정치체제에서 군주의 독단과 횡포를 견제할 수 있는 중요한 정치적 기능을 담당하였다.

주자학은 先秦시기의 천명개념을 天理로 해석하고 있다. 천명이 초월적이며 상징적인 의미가 강한 반면, 천리는 현상세계의 보편법칙을 의미하며, 군주 또한 이런 보편성에 근거해서 정치를 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군주는 자의적으로 정치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신하와 백성과의 의사소통에 의해서 합의되어진 공론에 근거해 정치를 해야 한다. 그래서 주자학은 선진유학의 왕도정치를 계승하면서도 백성들의 의견을 수렴할 수 있는 절차로서 공개적인 토론정치로 발전시키고자 하였다. 이러한 주자학의 토론정치는 유가사에서 볼 때 그 이전의 정치철학에서 찾아 볼 수 없는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주자학적 공공영역에서는 모든 향민들이 자발적으로 공적인 문제에 참여할 수 있었지만, 그 공론의 주도세력은 사림이다. 그들은 향촌사회에서 논의 규정을 제정하고, 회의를 주재하기도 하였으며, 또한 향민들이 공평무사한 태도로 공론에 참여할 수 있도록 그들의 도덕교육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율곡은 이러한 사대부 중심의 논의를 일반인들의 여론, 즉 衆論과 구별하여 士論이라 칭하였다.(권상우, 48-49쪽)

 

주자학에서 氣는 개체 사물의 고유한 기능을 의미하며, 理는 모든 개체사물이 공유하고 있는 보편성과 공공성으로 설명하고 있다. 주자는 理와 氣의 관계를 가치론에서는 상이한 의미를 지니지만, 존재론적 측면에서는 양자가 분리될 수 없다고 본다. 즉, 개체성(氣)은 바로 理에 의해 존재의미를 지니게 되며, 理는 또한 개체성에 의탁해서 존재하고 실현할 수 있다고 본다. 그래서 理는 개체가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있는, 즉 타자와 소통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본성을 의미하지 않고, 타자와 소통을 통해서 존재할 수 있는 본성을 의미한다. 그래서 주자는 리의 의미를 이천의 “한번 양이 되고 한번 음이 되는 까닭(所以之一陰一陽)”이라는 해석을 따르고 있다. 그래서 주자는 “자연이 만물을 생하는 것은 단지 음만으로는 할 수 없고 반드시 양이 있어야 하며, 또한 단지 양만으로는 불가능하여반드시 음을 가지야 한다.”고 본다. 이와 같이 음과 양이 상호 존재근거가 되면서 생명을 창출할 수 있다고 본다.(二氣交感, 化生萬物) 주자는 음기와 양기의 차이성은 개체의 내재적 가치와 자율성을 의미하지만, 차이성은 결코 상대방과 대립과 갈등으로 치닫기 위한 전제가 아니라 양자간의 이해지평을 넓힐 수 있는 共生의 관계를 위한 전제가 된다. 이 양자의 共生이 바로 전체성을 의미하며, 의사소통에서는 의사소통주체들에 의해 합의되어진 공론이 된다. 그래서 주자학에서의 전체성, 공공성은 반드시 개체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와 같이 주자학에서는 개체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그 개체성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항상 타자와의 소통을 통해서 존재해야 한다고 본다.

그래서 주자학에서는 상대방과의 토론을 할 때 구체적인 상황, 즉 의사소통주체간의 차이성에 대한 이해와 양자의 관계성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필요로 한다. 만약 상호소통의 구체적인 상황에 대한 배제 없이 단지 소통만 강조하게 되면, 그 소통주체들은 단지 ‘추상화되어진 의사소통주체’로 전락될 수 있다. 그러나 주자학에서는 의사소통주체간의 차이성을 충분히 반영해야 한다고 본다. 그래서 주자학에서의 상호주체는 또한 상호객체가 된다. 즉, 나는 의사소통의 주체(I)이기도 하지만 상대방의 객체로서의 나(Me)가 되기도 한다.(권상우, 59-60쪽)

 

이처럼 조선시대 정치는 재조뿐만 아니라 재야 양반유생의 공론형성을 보장한 공론정치 구조를 근간으로 하여 전개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공론정치는 정치참여 가능층의 확대를 보장하여 특정 집단의 권력독점을 차단하기 위한 장치로서, 그 과정에 굴곡과 파탄이 있었다 할지라도 18세기까지 군주와 양반사림의 합의에 따른 정국운영의 근간으로 존속하였다. 또한 공론정치는 양반사림이 상호 공존과 견제의 논리로서 적용해 온 붕당정치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으며 공론을 앞세운 당론대결을 불가피하게 하는 것이기도 했다. 붕당체제가 군주를 비롯한 권력구조에서 경계의 대상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정치세력의 당론대결을 공론대결로 간주하는 시각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조선왕조 정치는 현실적으로 붕당과 공론이 유기적인 관계에 있었으나, 명분상으로는 붕당을 부정하고 공론을 보장하는 이율배반적 형태로 전개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한편으로 붕당정치가 정치세력의 역학관계의 구조에서 운영된 것이라면, 공론정치는 군주를 비롯한 권력구조를 포괄하여 운영된 것이라는 점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결국 조선시대 양반정치는 조․야 양반사림의 공론형성을 보장한 공론정치를 근간으로 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정치세력의 공론대결을 통한 역학관계를 지향하는 붕당정치를 원리로 하여 전개된 정치형태였던 셈이다.(설석규, 30쪽)

 

그러나 양반유생 공론의 위상강화는 유생의 대립과 분열을 심화시킴과 동시에 특정 정치세력의 공론조작에 악용될 개연성을 안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따라서 그들이 정치세력과 긴밀하게 연대하고 있는 한 관유소나 향유소가 공론을 표방했다고 할지라도 그 자체 공론일 경우는 드물다고 하겠으며, 대부분이 특정 정치세력의 이해를 반영하는 당론이라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것이 결과적으로 성균관과 향촌유생 내부의 대립과 분열을 초래하는 요인이 되었다.

사실 성균관 유생의 공론형성은 국가의 중대사나 관학에 관련된 문제와 같은 것은 별다른 논란이 없겠지만, 정치적인 견해 차이나 이해관계가 발생하게 되면 상당한 진통을 겪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물론 그들 내부의 의견이 엇갈려 공론형성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면 상소를 포기하는 경우도 있으나, 주동자들이 반대자를 성균관에서 축출하거나 각종 유벌(儒罰)을 가하면서 소회를 강행하는 예도 적지 않았다. 광해군대 폐모의 공론화를 주도하던 대북계 유생들이 서인 및 남인계 유생을 축출한 가운데 폐모정청(廢母庭請)에 소극적인 조관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린 것은 대표적인 예에 해당한다.

이같이 성균관 유생의 공론이 특정 정치세력의 파행적 정국운영에 일방적으로 악용됨에 따라 당시 세간에서는 성균관을 ‘수선지지(首善之地)’가 아닌 ‘수오지지(首괒之地)’라며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그렇게 되면 다른 유생들은 별도의 장소에 모여 그것이 조작된 공론임을 폭로하거나 반대상소를 함으로써 당파적 이해관계에 따른 그들의 분열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서인과 남인계 유생들의 우율(牛괻)의 문묘종사를 둘러싼 논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을 당시, 명륜당이 그들의 싸움판으로 변해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거나 타국인을 대하듯이 서로가 외면하며 지냈다는 것은 그 산물이었다. 그러한 경우는 향촌 유생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성균관이 유생공론을 반영하는 대표성을 갖지 못한 데 주된 원인이 있는 것으로, 그들 역시 정치세력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별도의 상소활동을 전개한 결과였다. 따라서 그들이 공론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반대하는 유생의 경우 부황(付黃)이나 정거(停擧) 등 유벌 외에도 아예 집을 헐어 그곳에서 살 수 없도록 하는 훼가출향(毁家黜鄕)의 극단적 방법을 동원하여 배척하는 일이 다반사로 벌어지고 있었다. 17세기 이래 향촌 유생들 사이에 향전(鄕戰)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것도 향촌 내부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는 양반유생의 대립을 반영하는 것이었다.(설석규, 41-42쪽)

 

한편, 조선의 정치를 특징짓는 이념이자 실제로서 공론정치란 표현이 널리 사용되고 있다. 공론이란 말이 당대의 용어임에 비해, 공론정치는 과거의 역사적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현대의 연구자들이 만든 개념어임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또한 공론정치는 공론을 구현하기 위한 각종 機制들의 존재와 그 작동 메커니즘 등 공론보다 더 넓은 범위와 과정을 포괄하는 개념이기도 하다. 그런데 현재 공론정치란 용어는 그것이 지칭하는 내용이 무엇인가에 대한 명확한 설명이 없거나 합의가 부재한 채 관습적으로 유통되고 있다. 연구 분야 또는 연구자마다 조선 정치에 대한 특정한 理解와 시각을 투영한 공론정치의 像을 그린 다음 그 전제 위에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가령 국사학계는 공론정치에서 士林이라는 ‘주체’를, 정치학계는 심의와 토론이라는 ‘원리’를 강조한다. 공론정치를 말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핵심 요소인 공론 개념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해야 함에도, 기왕의 연구는 각각이 구상하는 바람직한 정치의 모습을 먼저 공론정치라 상정하고 역으로 거기서 공론의 의미를 추출하였다는 혐의가 짙다. 그 결과 조선의 공론, 공론정치는 당대 사유의 맥락에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공론정치론’에 의해 이해되고 있다.(김경래, 109쪽)

 

지금까지 검토한 내용들을 바탕으로, 현재 일반적으로 국사학계에서 상정하는 조선 공론정치의 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공론이란 士林의 정치적 의견(여론)을 뜻하며, 공론정치란 사림의 정치적 견해를 기반으로 정국이 운영되는 상황을 의미한다. 공론정치에 대한 국사학계 연구의 가장 큰 특징은 무엇보다 사림과의 긴밀성을 강조한다는 점이며, 조선은 국왕이나 民등 다른 정치주체보다도 사림이 주도하는 정치를 추구하였고 실제 상당 기간 그러한 방식으로 진행된 것으로 파악한다. 둘째, 조선의 공론정치는 理想의 현실화 과정이었다. 공론정치의 이상은 이미 조선 건국 직후부터 존재하였는데, 그것이 실제 현실로 구현되기 시작하는 것은 점진적 과정을 통해서였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성종대 공론정치의 단초를 열었으며, 중종대 전면적 시행을 위한 기반이 마련되었고, 선조대 완전히 정립된 것으로 정리한다. 이러한 설명은 곧 사림의 대두와 정치적 영향력의 확대 과정에 대한 記述과 궤를 같이한다. 셋째, 조선의 공론정치에서 핵심적인 장치는 三司를 위시한 언론 기관으로, 이들은 사림 일반의 공론을 수렴하여 조정에서 제기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사림은 중앙 진출과 함께 자신들의 정치적 견해를 반영하기 위한 시스템을 정부 조직 내에 구축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 결과 삼사의 언론은 국왕과 대신으로부터 독립성을 확보하는 한편, 사림 일반의 견해에는 보다 충실할 수 있었다. 넷째, 조선에서 공론정치의 구현과 정립 과정은 곧 정치 참여층의 확대 과정으로, 그 과정에서 공론의 담지자는 조정에서 재야 사림 일반으로까지 넓어졌다. 나아가 재야 사림의 견해는 정책 결정 과정에 중요한 근거가 되는 데까지 이르렀다. 이때 재야 사림은 주로 상소 등의 직접적인 방법을 통해 자신들의 견해를 표출하였다. 다섯째, 조선의 공론은 사림의 분열과 함께 黨論으로 바뀌었고, 그 결과 공론정치는 왜곡되었다. 공론이란 곧 사림의 정치적 견해이므로, 사림의 분열은 곧 공론의 분열이자 공론의 변질로 설명되는 것이다. 이때도 여전히 사림들은 자신들의 견해를 공론이라고 표방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았으며, 표방과 실제의 괴리가 발생했다고 보았다.(김경래, 118-119쪽)

 

결국 그 내부에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성리학의 ‘公한 마음’이란 개인이 가진 개체성의 한계와 제약으로부터 벗어난 마음, 그리고 개체적 욕심과 이익으로부터 탈피하여 공동체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마음이라 정리할 수 있다. 이는 오로지 자신의 문제에만 집중하고,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사로운 마음이 아니라, 공동체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나아가 공공의 입장에서 사안을 판단하는 마음 자세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인간은 그런 마음으로써 일을 대할 때, 공정, 공평한 판단과 행동이가능하게 된다. 人心의 公이 일[事]의 公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따라서 私意, 私心, 私欲과 같은 것들은 항상 公心가 대비되어 부정적인 존재, 극복의 대상으로 인식되었다.

그런데 공론정치의 틀에서 이 公心은 공론의 주체인 사대부층은 물론, 최종 결정자인 군주에게도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덕목이었다. 먼저 사대부들에게는 그들이 올바른 의견, 즉 진정한 공론을 제기하려면, 그들의 마음이 공정한 상태이어야 했다. 이때 사대부들은 개인적 사사로움은 물론, 붕당이라는 집단적 차원의 사사로움을 극복하는 것이 요구되었다. 君子의 무리와 小人의 무리를 구분하는 전형적인 기준은 그 마음의 公私여부였다. 이이의 경우에도 사림의 분열을 해소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가운데, 私意를 배격하고 公心을 추구할 것을 강조하였다.(김경래, 140쪽)

 

이상을 종합하면, 주희가 얘기한 ‘천하가 함께 옳다고 하는 것’, 이이가 말한 ‘인심이 똑같이 그러하다고 하는 것’의 의미가 명확히 드러난다. 공론 개념은 정치 주체 개개인이 사욕을 제거하고 천리를 온전히 한 상태에 있다면, 그들이 가지는 정치적 견해는 자연 하나로 일치할 것이며, 그때의 견해는 개별 주체나 집단을 위한 결정이 아니라 공동체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공동체 전체를 위하는 의견이 될 것이라는 전망을 제시한다. 이때 자연스런 일치는 사대부나 군주나 똑같이 공한 마음임을 가정한 상태이다. 이는 다른 한편으로, 公心을 가지는 것은 사대부나 군주에게나 똑같이 요구되는 덕목임을 의미한다. 따라서 현실 정치에서 公心은 신료 및 사대부들이 군주를 압박하는 수단으로 이용될 수도 있었고, 군주가 아래서 올라오는 정치적 견해들을 거부하는 명분으로 기능할 수도 있었다. 또, 사대부 세력 간의 논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처럼 공론정치에서 정치적 정당성의 핵심에는 ‘公’이란 가치가 있었다.(김경래, 142쪽)

 

한비자는 공적 영역에서 ‘인의’와 같은 도덕 가치를 배격하고 ‘법’만을 유일한 사회규범으로 인정하고자 했다. 한비자가 ‘인의’를 배격하는 이유를 간략하게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신하에 의한 ‘인의’의 시행은 군주의 권위를 손상케 한다.

② 공이 없는 자에게 ‘인의’를 베풀면 사회적 신뢰가 훼손된다.

③ ‘인의’는 사회적 이익관계에서 통용되기 어려운 규범이다.

백성들의 인성은 비열하기 때문에 ‘인의’로 교화할 수 없다.

⑤ ‘인의’는 사적 도덕으로서 법 제도의 공공성을 파괴한다.

⑥ 효율적인 지배질서 확립을 위해서는 ‘인의’보다 중형(重刑)이 효율적이다.

⑦ 공공성의 확립을 위해서는 법이라는 엄격한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

⑧ 시대의 변천으로 말미암아 ‘인의’에 의한 도덕정치는 효력을 상실했다.(이승환, 378쪽)

 

또한 한비는 유가의 人治를 비판한다. 유가는 개인도덕(가족중심의 윤리)과 국가이익이 충돌하는 경우 개인의 의무 또는 가족윤리를 우선적으로 수행하는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유가는 도덕적으로 완성된 성인에 의한 정치를 이상으로 한다. ‘각 개인의 본성이 선한’ 백성들은 덕이 충만한 왕에 의해 도덕적이고 사회적인 존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유가에 있어서 개인윤리의 실현은 국가의 이익에 선행하고, 따라서 개인은 우선 자기의 仁義禮智 실현을 최고의 목적으로 한다. 이에 대해 한비는 인간이 본래 선하다는 유가의 견해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유가적 덕은 결국 개인 또는 가족을 중심으로 한 사적인 것에 불과한 것으로 보고, 이는 정치사상에 있어서 배제되어야 할 것으로 간주하였다. 한비는 주관적이고 사적인 德을 배제하고 객관성을 갖는 ‘法’으로 통치할 것을 강조한다. 그에 의하면 공정한 법의 시행을 통해서만 객관적인 통치가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이다.(김유지, 36쪽)

 

18세기 민국정치 시기의 특징적 양상은 민서들의 공론적 영향력이 새롭게 확대되었다는 점이다. 실제 군주는 당인들의 의견을 구하는 대신 직접 민과의 접촉 범위를 넓혀갔다. 단적인 예로, 정조 재위 24년간 77회에 걸친 행차에서 접수된 ‘상언’과 ‘격쟁’이 무려 4,427건에 달하였다. 정조는 민의가 상달될 수 있는 통로를 적극 제도화하여 사회문제를 파악하는 한편, 이로써 새로 성장하는 사회세력을 체제 내로 흡수하여 사회를 안정시키려 하였다. 특히 서얼층을 위시한 중간계층 대책, 노비해방 문제를 생각한 고공법 정비, 수원성 건설에 모군을 써서 유이민 안집책까지 고려한 시책들이 대표적이다. 다른 한편, ‘공론’ 및 ‘향중공론’ 형성에 기반 역할을 한 사랑방 모임, 시사・강학의 전통은, 18세기 전후 시기가 되면 중간계층 및 상층 민인들에 일반화되었고, 위항문학, 평민문학, 여류문학으로 확산되면서, ‘이가환(李家煥)의 문화(文華), 박지원(朴趾源)의 신체(新體)’ 같이 양반문화의 평민화 현상과 상호 교류를 불러왔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민국정치는 유학적 군주제의 공공성, 즉 민본주의를 회복하고 이를 ‘민국’ 이념으로 실체화하여 관철하려는 정치적 시도였다. 18세기의 특징적 양상은 민의 신분적 지위와 범위가 확대되었을 뿐만 아니라 국가정책적으로 민본을 강화하는 실효적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민’을 실체화했다는 점이다. 민국이념이 민을 실체화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는 측면은 다양한 맥락에서 확인된다. 첫째, 균역법의 실시이다. 민국체제는 양민의 군역을 경감하고 그 부족분을 사대부와 중인 이상의 세수확보로 채웠다. 둘째, <경국대전>을 헌법으로 삼아 소민의 새로운 권리・의무관계를 분명히 하기 위해 <속대전>을 편찬하는 등 법전편찬을 지속적으로 시행하여 법치주의를 강화했다. 셋째, 영조는 소민보호를 위해 형정(刑政)을 획기적으로 개선하였다. 넷째, 정조는 소민보호를 위하여 어사제도를 크게 쇄신・강화하였다. 다섯째, 상언・격쟁제도를 활성화하였다. 여섯째, 노비제도의 혁파를 추진하였다. 일곱째, 영조는 ‘서얼허통’(庶孼許通)과, ‘서얼통청’(庶孼通廳)을 확대하여 서얼의 국정참여 수위를 대폭 높였다.(이영재, 74-75쪽)

 

이 사건의 처리에서 보듯이 대개 체제도전세력의 처리를 중심으로 한 문제에 있어서 이익갈등은 주로 동인과 서인간에 일어났다. 대체로 동인은 이상적 유교주의의 입장을 지니고 있었고, 중소지주층에 기반을 둔 퇴계학파가 중심이 되어 조직의 상층부에서 활동하였다. 반면에 서인은 현실적 유교주의의 입장에서 대지주층에 기반을 둔 율곡학파가 중심이 되어 조직의 하층부에서 활동하였다. 이러한 이익갈등은 적대의 형태로 전개되었고, 반대세력의 일부를 축출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자신이 속한 정파의 구성원이 체제변동세력과 다소 관련이 있을 경우 그 정파는 온건한 처리를 주장하였고, 이들 세력과 별 관련이 없을 경우 강경한 처리를 주장한 측면도 없지 않다. 특히 이러한 문제의 처리에 국왕의 역할도 크다고 볼 수 있다. 선조가 역모의 처리 담당자를 교체한 다음 이 사건을 다스리도록 한 점이라든가 역모의 혐의가 분명치 않은데도 이를 중벌로 다스린 점이 그러하다.

대체로 위의 연구결과를 토대로 파악할 때 조선조의 붕당은 이념이나 논리적 근거없는 단순한 도당적 성격을 지닌 집단이 아니라 이념, 조직구조적 특성, 지지기반이 동일한 집단임이 밝혀졌다.(이병갑, 495-496쪽)

 

양반정치는 정치참여 자격이 지배층인 지식계층에 국한되고 있는 점이나 정치적 명분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있는 점, 그리고 공론을 대변하는 제도적 대의장치가 결여되어 있는 데다 공론 여부를 군주의 판단에 의존함으로써 조정장치가 결여된 점 등 분명 중세적 한계를 안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공론정치를 근간으로 붕당의 역학관계를 지향하는 양반정치는 여론정치를 토대로 정당정치를 표방하는 오늘날의 정치형태와 원리상 크게 다른 것은 아니었다. 특히 그것들이 정치참여 계층의 폭을 확대하고 집권세력의 독점적 이익획득을 견제함으로써, 독점체제에서 빚어지는 각종 병리현상의 예방을 통한 정치·사회적 건전성 확보를 목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성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조선왕조가 세계 근세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5백 년 이상의 수명을 유지한 원동력이 여기에 있었으며, 광복 후 독재정권에 저항해 지속적으로 전개된 민주화운동도 그것과 맥이 닿아 있는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점에서 양반정치는 우리에게 청산의 대상이 아닌 비판적 계승의 대상이라 하겠으며, 그것은 특히 보편적 가치의 공감보다는 세속적 이해갈등에 치중하고 있는 현재의 정치적 상황에 비추어 새롭게 음미되어야 할 부분이라 하겠다.(설석규, 44-45쪽)

 

조선 전기의 정쟁(政爭)은 대체로 척신과 훈신, 척신과 사림, 권신과 사림 간의 정쟁인 까닭에 사림의 분열은 없었으나 중기인 선조대에 이르러 동서분당이 이루어지면서 사림간의 정쟁으로 진화되었다. 사림이 분열되면서 관학생들도 자연스럽게 지맥․인맥․학맥에 따라 당색을 선택하였는데, 이것은 그들의 출세와 생존전략상 필수요건으로 인식되었다.

당시 붕당과 관련지어 성균관 내부의 상황을 예리하게 지적한 글이 남아있는데, “성균관 반장(泮長;大司成을 지칭)이 노론이면 초시합격자 10명 가운데 노론이 가장 많고 소론이 그 다음이며 소북․남인은 한자리로 그 수를 채운다. 반장이 소론이면 소론이 가장 많고 그 다음이 노론이다”(『泮中雜詠』, “老論泮長則初試十人中, 老論最多, 少論次之, 小北南人與一窠, 以充其數, 少論泮長則少論最多, 老論次之”)라고 언급하였다.

이처럼 과거시험 결과가 벌어지는 정치현실에서, 당색을 가진 관학생들은 붕당간의 모든 정치적 쟁점에 개입하여 자신의 당을 위해 능동적으로 활약했을 뿐만 아니라, 당인들의 주구가 되어 당리당략적 차원에서 그들 상호간에도 이전투구식 각축전을 벌리기도 하였다(『肅宗實錄』肅宗 卽位年 十一月 庚午條 ; 『英祖實錄』英祖 十一年 十一月 戊戌條 ; 『景宗實錄』景宗 卽位年 九月辛未條 ; 『孝宗實錄』孝宗 元年 六月 甲申條).

특히, 광해조부터 고종조에 이르기까지 태학생과 향유의 언론활동뿐만 아니라 심지어 조정공론의 핵심부서인 언론 삼사와 승정원의 언론활동까지도 당론에 편승되어 있는 까닭에, 그들의 언론활동은 더 이상 공론이기를 포기한 사실상의 당파적 선전선동활동이었다.

조선시대 전 기간에 걸쳐 발생하였던 권당․공관은 조신들과 언론 삼사의 비호 아래 성균관 유생들의 여러 가지 언로양식들 예컨대 통문과 관학소, 복궐 등과 철저하게 연동하면서 전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학생들의 권당․공관은 삼사 및 조신들의 언론활동과 비교해 볼 때 실질적인 효력을 거두지 못한 채 사림공론정치(士林公論政治)라는 명분만을 담보한 것으로 평가할수 있다.(김영주, 284-285쪽)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의 원인을 주왕실의 권위가 무너진 것에서 찾았던 한비는, 강력한 군주를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권력을 확립함으로써 국가의 안정과 더 나아가 공공의 이익을 확보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한나라는 성인에 의하여 다스려지는 그러한 나라도 아니었고 관료들이 도덕적으로 무장된 그러한 나라도 아니었다. 그 무엇도 뛰어나지 않은 나라에서 그나마 명목을 유지하며 국가를 경영하는 방법은 모든 구성원이 믿고 따를 기준인 법을 제정하고, 관료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맡은 바 책임을 다하게 하고, 정한 상과 벌로써 장려와 금지를 확실히 행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것이 바로 한비자가 말하는 넓은 의미의 법치의 내용이다. 이러한 법치는 그 세목별로 구분하여 법치와 술치와 세치로 구분되나 그것은 하나로 연결 되어 있고, 이는 군주에게 집중되어 있다고 보았다.(김유지, 52쪽)

 

하지만 봉건제도의 체제적인 약점은 주대에 이미 나타났으니 그 결과는 귀족정치의 몰락이었고 종법질서의 파괴였다. 각 제후국의 주권영토국가로의 변모‧발전과 상호항쟁은 大宗과 小宗間의 혈연적 유대에 기반을 둔 종법질서의 부정이었으며, 씨족공동체의 해체와 천민의 사회적 신분상승은 농업에 그 경제적 기반을 구축하고 그 농경사회에 사회적 윤리와 도덕 그리고 전통을 확립한 봉건사회에 대한 직접적 도전이었으며 예질서의 부정이었다. 이러한 현상은 東周 시에 더욱 심하였으며, 특히 東遷 300년에 이르는 기간은 ‘전쟁의 시대’라 할 수 있을 만큼 북쪽으로는 戎狄의 소란이 있었고, 남쪽에서는 楚‧吳가 쟁패하였다. 동천 당시 중원에는 晋‧鄭‧魯의 三侯만이 다투었으나, 그 후 鄭·魯는 쇠퇴하고 齊桓公‧晋文公‧宋襄公‧秦穆公‧楚莊王의 이른바 春秋 5覇시대가 도래하였다. 이 3백여 년 동안 수많은 나라가 명멸하였고, 수많은 가옥은 파괴되었으며, 무수한 인명이 살해되는 실로 유혈의 참화가 계속된 기간이었다.(김명하, 9쪽)

 

한비자의 의도는 군주의 자질이 중간 정도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시스템만 잘 가동된다면 다스림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중간 정도 자질을 가진 보통의 군주 곧 용주庸主는 유가의 군주처럼 현명함이나 지혜를 추구하지 않고 또 신의를 중시하지 않으며, 오직 명찰明察을 추구한다. 다시 말하면 내면적 덕성을 함양하기 위해 수기修己에 매달리지 않고 신하들의 간사함을 꿰뚫을 수 있는 술術을 추구하는 것에 그친다. 신하의 자질도 마찬가지다. 현명한 신하를 구하지 않고 법을 따르고 법을 충실하게 집행하는 신하를 능력 있는 신하로 본다.(이원택, 122쪽)

 

신하의 세력확대를 경계하는 한비자의 입장은 그가 처했던 전국말기 한(韓)나라의 상황 에서 의미있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한비자 당시의 한나라는 전국 7웅 가운데 제일 국력이 약한 나라였으며, 이런 상황에서 귀족 중신(重臣)과 권문세가(私家)에 의해 군주의 통치권이 위협받고 있던 실정이었다. 강대국의 틈에 끼어 국가의 존망을 염려하던 한비자의 입장에서는 ‘군권의 강화’를 위하여 신하가 자의적으로 선심을 베풀며 세력을 확장하려는 음모를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이 ‘인의’를 본래적 가치가 아닌 도구적 수단으로 파악하는 한비자의 입장에서는, ‘인의’를 내세우며 세력을 확장하려는 중신(重臣) 세력의 음모를 저지하고자 안간힘을 썼던 것은 당연한 이다. 만약 공자나 맹자가 한비자의 상황에 처했더라도 신하들이 ‘인의’를 가장하고 세력을 확대하려는 음모에는 비판적이었을 것이다. 겉으로 ‘인의’를 내세우며 세력을 확장하는 일은 ‘가인’(仮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맹자 역시 공자 못지않게 신하가 갖추어야 할 덕목으로 ‘인’과 ‘의’를 강조했다. “탕 임금은 이윤으로부터 배우고 나서 그를 신하로 삼았으며, 그랬기 때문에 힘을 들이지 않고도 왕 노릇을 할 수 있었다. 환공은 관중에게 배우고 나서 신하로 삼았으며, 그랬기 때문에 힘들이지 않고도 패자가 될 수 있었다.”(이승환, 380쪽)

 

⑵ 하버마스

 

공론장의 몰락, 과학기술 및 기술관료체제의 이데올로기적 조작, 후기 자본주의의 국가개입과 정당성 위기라는 세 국면을 인과관계나 선후관계로 명확히 관계짓기는 힘들다. 하지만 ‘시민의 정치적 주체성’이라는 민주주의의 기준에서 볼 때, 공론장의 몰락은 시민들이 정치의 이념과 과정에서 탈각되는 과정이고, 후기 자본주의는 이 자리를 지배정향적 체계가 대체하고 있는 과정이다. 이 때 후기 자본주의의 정당성 위기는 민주주의의 이념훼손이 어떤 수준에서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정당성 위기는 과도한 목적합리성, 과학기술과 기술관료체제의 지배정향적 성격과 이데올로기로서의 기능, 자발적 의지형성을 대체한 각 체계의 기능과 실패, 정당성의 빈 자리를 메꾸기 위해 동원되는 국가개입과 이의 필연적인 실패를 요약한 개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당, 의회, 선거와 같은 대의 민주주의의 요소들은 의미를 상실한다.

이에 몰락한 것으로 진단되었던 공론장을 활성화시켜야 하는 과제가 제기된다. 근대 사회에서는 민주적 의지형성으로서의 공론장과 지배정향적인 체계가 동시에 형성되고 발달했다. 자본주의 경제와 국가를 중심으로 하는 체계가 시민들을 정치의 객체로 규정하고 있다면 위기 극복의 방향은 시민이 다시 정치의 주체로 자리매김되는 것이다. 공론장을 통한 민주주의의 부활은 이미 공고화된 체계를 손상시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공론장이 제시했던 참여가능성과 대화가능성이라는 이념을 통해 체계의 비민주성에 대항할 수 있는 공간을 창출하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기반과 공간으로서의 공론장의 재활성화는 시민의 정치적 주체성 회복이라는 이념을 내세우며 의사소통적 합리성을 목적합리성과, 상향적 의지형성을 하향적 지배과 대등하게 하는 기반 창출을 목표로 한다.(황재준, 29-30쪽)

 

한편 하버마스는 고대 그리스적 공론장이 중세로 접어들면서 사라졌다고 본다. 그에 의하면 중세엔 국가가 공적인 것을 대변하고 그럼으로써 일반인들의 삶은 단지 사적 생활을 영위하는 데에만 국한되었다. 따라서 공론장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지배권력을 가진 전제적 군주나 영주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독점적권력을 일방적으로 과시하는 과시적 공론장 에 불과할 뿐이다. 그런 점에서 중세사회는 지배권력이 사적 영역을 국가에 흡수시키고 권력정치가 횡행하던 시대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근대가 되면서 재산과 교양을 갖춘 부르조아들이 스스로의 이해관계를 지키고 국가에 대항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형성된 다른 형태의 공적영역이 탄생한다. 하버마스는 이것을 부르조아 근대적 공론장이라 부른다 이 공론장이 탄생함으로써 생기는 결과는 국가와 사회의 분리이며 공론장 혹은 공적인 영역은 바로 사회부분에서 형성된다.

부르조아 공론장의 탄생은 사적 영역에서부터 기원한다. 그것은 공적인 관심사에 대해 토의하고자 하는 사적 개인들이 구성하는 영역이다. 이 영역이 처음부터 정치적 성격을 띤 것은 아니었다. 17-18세기에 도시인구가 크게 확대되고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발전되면서 경제적 역량을 축적한 부르조아들은 여가시간을 이용해 살롱과 클럽을 중심으로 만나면서 일종의 문예적 공론장을 형성한다. 그 후 이런 자생적 만남의 장은 결국 부르조아들의 사회적․정치적 요구를 담아내는 정치적 공론장으로 변모하기 시작했으며 결국 부르조아들은 공적인 영역에서 자신이 시민으로 성장해감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이동수, 9-10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버마스가 공론장의 발생과정을 부르주아 시민이라는 특정한 역사적 발생사를 통해 규명하고, 그 작동방식을 보여주고자 한 것은 보편성이라는 이름 뒤에 감추어진 지배계급의 합의과정을 정당화한다든가, 특정한 집단을 배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수행한 것은 결코 아니다. 또한 하버마스는 부르주아들이 형성한 공론장과 거기에서 도출된 의견들이 자신들의 특정한 이데올로기로 인해 일방적인 방식으로 여론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위험을 모르지도 않았다. 애초에 하버마스의 기획은 공론장을 통해 정치적 저항과 해방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시민들의 공론장은 "지배일반이 해체되는 질서"이며, "정치적으로 기능하는 공론장은 권력 그 자체에 토론"에 부치는 기능을 수행한다. 그가 공론장에 대한 역사적 전개과정을 통해 기대했던 것은 다름 아닌 "체계명령이 생활 세계 영역으로 식민적으로 침범하는 것을 민주적으로 저지하는 것"이었다. 화폐와 행정권력으로 상지되는 근대국가의 권력장치에 맞서 사회통합의 연대력을 형성하고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만들어낸 생활세계의 요구를 관철시키는 것, 이를 통해 급진적인 민주주의를 형성하는 것이 공론장의 구조변동이 함의하고 있는 바다. (최경환, 199쪽)

 

특히 하버마스의 논의에서 민주주의는 근대사회의 통합 및 조절의 필요성을 충족시키는 화폐와 행정권력 그리고 연대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권력의 균형변화에 대한 요구가 갖는 규범적 함의에서 도출된다. 그래서 그는 “연대의 사회통합적 힘은 폭넓게 분화된 자율적 공론장과 법치국가적으로 제도화된 민주적 의견 및 의사형성의 절차를 매개로 발전되어야 하며, 다른 두 가지 힘, 즉 화폐와 행정권력에 대항해서 관철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하버마스, 2000: 290; 2007: 401-2). 하지만 민주적 절차를 통하여 의사소통적 권력으로 가공된 공적 의견은 스스로 ‘지배할’ 수 없고 단지 행정권력의 사용을 특정한 방향으로 인도할 수 있을 뿐이다. 의사소통권력은 국가와 경제에 대해 똑같이 거리를 두는 시민사회의 결사체라는 기초 위에서 문화적으로 동원되는 공론장과 법치국가의 원리에 따라 제도화된 의지형성 사이의 상호작용으로부터 도출되기 때문이다(Habermas, 2007: 403-404). 이런 점에서 체계-생활세계에서 작동하는 권력의 집중과 분산은 공공성의 정치과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맥락을 이룬다.(홍성태, 179쪽)

 

‘공론장’은 사적인 것의 형성과 공적인 것의 형성, 자본주의 발전과 민주주의 발전의 엇물림에 주목하며 이 사이에서 의사소통이라는 민주주의의 원리를 찾아낸 하버마스의 발견물이다.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을 구분하는 서구의 정치철학적 특징은 고대 그리스 시대의 “개인에게 고유한(idia) 오이코스(Oikos)”와 “공통된 (koine) 폴리스(Polis)”의 분리에서 그 예를 얻는다(Habermas, 1962[2001]: 63-64). 하버마스가 말하는 ‘헬레니즘 공론장’의 모델은 노예노동과 여성의 서비스를 ‘전제적’으로 소유한 사적 자유시민이 공공생활(bios politikos)의 광장(agora)에 대화(lexis)와 공동행위(praxis)의 형태로 참여하는 것이다. 이 모델이 갖고 있는 ‘공공성’이라는 규범적 힘이 로마법을 거쳐 봉건시대를 지나 부르주아 공론장의 형성에 기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봉건시기에는 고대 그리스 시기의 공공성이나 근대시민사회의 공공성 대신 ‘과시적(誇示的) 공공성(repräsentative Öffentlichkeit)’이 지배적으로 존재했다(Habermas, 1962[2001]: 68-69). 국가와 사회가 분리되지 않고, 경제가 독립적인 영역을 이루지 못했던 이 시기의 공공성은 하나의 사회학적인 공론장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하버마스에 의하면, 세속적 차원에서 궁정-기사적 과시와 교회의 의식행렬을 통한 성직자적 과시가 정치적 의사소통이 아닌 봉건적 권위의 아우라로서 표현되었으며, 이러한 과시적 공공성은 이 영역에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사적’이라고 규정하여 배제하고 자신들은 내부적인 비밀(Arkanum)의 원리들을 향유했다. 즉, 과시적 공공성은 신분적 상층의 하향적 권위과시와 신분적 하층의 상향적 충성심의 구조를 갖고 있었고, 공과 사의 구별은 위계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으며, 토론이나 비판, 수평적 의사교환과 의사결정이라는 민주적 요소들을 결여하고 있었다.

이후 발생하는 부르주아 공론장은 봉건시기 이후 나타난 정치적․경제적 변화에 기인한다. 근대국가의 형성과 자본주의의 발전, 국가와 시민사회의 분리, 자율적 주체로서의 부르주아의 등장과 의사소통의 장인 공론장의 형성은 복합적으로 구조화되기에 이른다. 상품교환과 뉴스교류의 요소를 갖고 있는 초기 자본주의와 민족단위의 경제․국가적 권위․국가기구와 행정력을 확보한 근대국가는 중상주의 시대를 거치며 본격화되고, 이제 사회는 “관청 : 부르주아 사회”라는 분리의 형태를 띠게 된다(Habermas, 1962[2001]: 82-86).(황재준, 18-19쪽)

 

시민사회를 개인과 단체의 공적 행위가 자유롭게 행해질 수 있는 영역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면, 영국에서 시민사회의 핵심으로서 ‘공중’(the public)의 개념은 17세기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즉, 한편에는 왕실과 귀족 위주의 의회가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백성들’ 혹은 ‘민중의 무리’가 존재했을 뿐이었다. 사적 개인들의 공적 모임과 활동을 위한합법적 공간이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17세기를 경과하면서 정치, 경제, 문화의 기능적 분화가 일어났고, 그 결과 커피하우스, 신문, 잡지, 다양한 클럽과 협회들이 이른바 ‘여론’(public opinion)의 형성을 위한 토대를 마련해주었다. 시민사회의 한쪽 끝에는 국가의 관할지대가 접하고 있으며, 그 반대의 다른 끝에는 개인의 사적 영역이 존재하고 있다. 이 둘 사이의 공간, 즉 시민사회의 공간을 채우고 시민사회의 성격과 가치를 규정하는 기관과 제도들은 시대에 따라 다르고, 또 늘 변화한다. 마찬가지로, 국가의 구조와 시민사회의 공적 세계 그리고 개인의 은밀한 사적 영역 간의 관계도 시간과 공간에 따라 다르다. 따라서 어떤 시점에서의 시민사회의 동력을 이해하려면 세 요소들-국가의 제도적 측면, 시민사회의 공공영역, 그리고 개인의 사적 세계-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공공영역의 진화를 추적하면서 이 글이 특히 살펴보려는 것은 자원단체들이 추구한 여러 목표들 중, 특히 도덕개혁의 구체적 내용은 무엇이었으며, 그것의 추진 과정에서 국가와 자원단체들의 역할은 어떻게 변화했으며, 그에 따라 국가, 공공영역, 사적영역의 관계와 그 경계가 어떻게 변모하게 됐던가 라는 문제들이다.(조용욱, 70-71쪽)

 

여기서 권력의 유형은 사회적 권력, 의사소통적 권력, 행정권력 등의 세 가지로 파악할 수 있다. 하버마스는 베버의 권력개념을 따라 사회적 권력을 “사회관계에서 타인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지와 이익을 관철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정의한다(Habermas, 1996: 175). 이는 시민사회 내에 존재하는 자원의 분배상태에 따라 모습을 달리 하며, 따라서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권력으로 전환된 것이라고 파악할 수 있다. 한편, 의사소통적 권력은 시민들이 공론장에 모여 정치적 의사결정을 위한 합의를 산출할 때 발생한다. 권력의 원천은 자유로운 의사소통이며, 따라서 본질적으로 집합적이고 상호주관적(intersubjective)이다(Eriksen & Weigard, 2003: 173). 마지막으로 행정권력은 정치체계와 경제체계를 포괄하는 체계의 권력이다. 하버마스는 베버의 분석에 따른 근대 관료제의 합리화 과정과 목적합리성의 증대를 체계의 영역으로 간주한다. 본 연구를 위해 개념을 단순화하자면, 공식적인 정치적 의사결정이 발휘하는 법적강제성이 행정권력의 효과인 것이다.

다른 심의민주주의 이론가들이 공유하듯, 하버마스도 공적 심의를 정당성의 원천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그에 따르면, 공적 심의는 그 자체만으로 구속력을 갖지 않는다. 즉, “의사소통적으로 유동하는 인민주권은 비공식적인 공적 담론의 영향력만으로는 효력을 발휘할 수 없다”(Habermas, 1996: 371). 그런데 모든 시민들이 받아들일 수있는 정당한 합의를 산출해내더라도, 이것이 국가적 정책에 반영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유명무실한 권력이 될 따름이다. 여기서 하버마스는 의사소통적 권력에 행정권력의 안내자라는 성격을 부여한다. 즉, “민주적 절차를 통해 의사소통적 권력으로 확대된 여론은 스스로 지배할 수 없고 다만 행정권력의 행사를 특정한 방향으로 향하게 할 수 있을 뿐이다”(Habermas, 1996: 300). 이러한 맥락에서 공적 심의에 따른 합의는 입법과정에 반영되어 법적 매개를 통해 강제력을 획득한다. 결국, 시민사회 내의 사회적 권력이 공론장을 통해 의사소통적 권력으로 전환되고, 이것이 법을 통해 다시 행정권력으로 전환되는 것이 하버마스가 상정하는 정치권력의 순환모델인 것이다.(김도윤, 30-31쪽)

 

이러한 맥락에서 하버마스가 주장하는 민주적 절차로서의 공론장은 절차적 정당성을 얻게 된다. 즉, “…갈등에 대한 의사소통적인 해결만이 폭력을 거부하고 공동의 삶을 함께 조정하면서 타인으로서 살아갈 서로의 권리를 용인하는 타인들 간의 연대의 유일한 원천을 구성한다”(Habermas, 1996: 308). 심의민주주의가 적대의 차원을 제거한다는 무페의 비판을 받아들이더라도, 그것이 곧 특정한 형태의 담론적 접합을 정당화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는 그러한 접합은 결국 특정한 윤리적-정치적 지향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페는 그에 따른 정치적 의사결정을 위한 절차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이는 그녀가 의사결정 내지 합의를 잠정적이고 일시적인 헤게모니라고 간주하기 때문이지만, 결국 ‘어떻게’ 경쟁할 것인가에 대한 대안은 무페의 논의에서 지속적인 과제로 남는다. 즉, 무페는 위협, 강압, 기만 등 설득이나 논증이 아닌 방식의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절차적 정당성의 확보에 취약한 모습을 보인다. 그녀에게 있어서 대화나 설교는 지배계급으로 하여금 권력을 포기하게 만드는 수단이 아니며, 나아가 폭력은 제거될 수 없는 사회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Mouffe, 2000: 15, 134-135). 이에 반해 하버마스는 갈등해결수단으로서 의사소통의 불가피성을 강조하면서 그러한 의사소통적 실천 속에서의 성찰적 태도와 상호이해를 통한 학습의 과정을 중시한다(Habermas, 1996: 26, 310-312;Dahlberg, 2005: 128). 기든스(Anthony Giddens)도 주장하듯, 대화의 중요성은 폭력을 방지함과 함께 사회통합을 위한 ‘그들’과의 연대성을 창출하는 데에 있다(Giddens,1994: 115-116).(김도윤, 42쪽)

 

⑶  동독의 붕괴

 

정치적, 경제적 그리고 사회구조적 관계에 있어 사회주의통일당의 “미화(美化)적 정치”(Beschönigungspolitik)는 1970년대부터 대안적인 “뿌리단체들”(Basisgruppen)의 생성을 촉진시켰다(Schenkel & Thaa, 1992, p.259). 뿌리단체들은 ‘대화, 진실, 독자적인 생각과 공론장’을 요구하면서, 사회주의통일당이 선전하는 허구세계에 의문을 던졌다. 이러한 허구세계에서는 의견의 다양성과 논쟁이 전혀 없고, 단지 선교와 교화의 목적을 가진 당 간부들간의 상호독백만 존재할 뿐이었다(Von zur Mühlen, 2000, p.42). 비공식 단체 가입의 결정적인 동기는 동독의 사회화 과정과 커뮤니케이션 결함에 놓여 있었다. 공식적인 사회시스템에 속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은 본인 자신 혹은 사회적 문제들을 표명하고 의견이나 정보들을 교환할 수 있는 대안적인 공간이 필요했다. 비공식적 단체의 한 조직원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나 지금이나 강요당하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이 단체에서는 나의 문제들을 설명할 수 있다. 나는 이곳에서 표현할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얻었다”(Pollack, 1990,p.129). 변혁의 가장 근본적인 조건은 시민들 각자가 정치적 요구들을 표명하고, 공개적으로 사회주의통일당의 전체주의적 요구들과 싸우는 용기와 결의였다. 뿌리단체들은 국가와 사회의 획일적인 발전에 대한 집권당의 구상들을 무마시키고자 했으며, 결국 집권당에 의해 독점적으로 형성된 사회구조의 붕괴를 이끄는 데 기여했다. 대안적이고 비판적인 공론장에서 축적되어진 커뮤니케이션의 힘은 다른 요소들과 결합해 1989년 사회주의통일당의 몰락을 가져오는데 기여했다(Schenkel & Thaa, 1992, p.259).

사회주의통일당의 몰락이 변화하는 공론장 형성의 조건이었는지 아니면 그의 결과였는지에 대해서는 양면의 동전과 같다. 폰 쭈어 뮐러는 “사회주의통일당의 독재적 실권의 상실은 공론장 구조의 변화와 동일한 의미에서 바라볼 수 있다”고 말했다(Von zur Mühlen, 2000,p.44).(고흥숙, 109-110쪽)

 

동독 공론장이 작동하는 방식은 이미 동독 사회의 잠재적인 모순을 내포하고 있었다. 동독 사회주의 공론장은 당에 충성하는 의식구조 형성의 장으로, 정보 및 의견의 자유로운 교환, 토론과 비판의 장으로서의 규범적인 기능은 갖고 있지 않았다. 권력에 의해 왜곡된 커뮤니케이션 형태는 지배세력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기여했다. 이처럼 대화와 공론장에 대한 요구는 동독시스템의 구조적인 민주주의 결함에서 나왔으며, 이는 결국 민중의 개혁의지를 부추겼다고 볼 수 있다.

시민운동은 대립이 아닌 커뮤니케이션을 지향하며, 대립의 해결수단은 비폭력적인 사회적 대화였고, 목적은 공론장의 부활이었다. 시민운동가들은 무분별한 행동주의를 경고하고 폭력이 아니라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한 결정적인 수단은 ‘대화’에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지금까지 행해지지 않던 방식, 즉 사회적 대화에 비중을 두면서 스스로를 뿌리민주적이라 성격 지으며 ‘아래’에서부터의 개혁 컨셉을 완성시키고자 했다. 민주주의 사회의 목표, 내용 그리고 과제들이 일련의 공적 대화들 속에서 토론되고, 이러한 토론은 결과론적이 아니라 과정지향적이어야 한다고 보았다. ‘과정지향적’이라는 것은 하버마스의 생활세계 개념처럼 커뮤니케이션 행위는 대화 자체, 즉 커뮤니케이션을 통한 담론형성이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대화는 협상을 하고 결정을 내리는 절차적 도구가 아니라 자아, 자기이익, 정의, 그리고 커뮤니케이션 이성의 개념들을 세울 수 있는 기초가 되는 것이라 볼 수 있다(김주환,2005, 77쪽).(고흥숙, 117쪽)

 

⑷ 공론장과 시민사회

 

끝으로 이 연구의 한계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한국사회에 공론장을 적용하는데 있어 이론적 한계가 존재한다. 본 연구에서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한국에서도 공론장이 조선조 향약으로 존재했었고 운영된 바 있었지만 공론장이란 것은 결국 서구 정치철학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공론장은 한국의 민주주의와 시민사회 그리고 인터넷의 현상을 설명하는데 있어 충분하지 못한 부분이 존재한다. 공론장과 시민사회의 정치철학적 배경에 대해 엄밀히 고찰하고, 필요하면 수정을 거쳐 한국사회에 적용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연구자는 이러한 한계 극복을 위해 한국의 시민사회의 특수성에 대한 논의를 통해 이 부분을 보완하려고 시도했지만 본 연구에서는 만족스러운 해답을 얻지 못했다.(김주영, 93쪽)

 

사적 영역의 ‘聖所’를 이렇게 국가가 침범할 수 있도록 허용해주는 것은 개인과 국가를 구분 짓는 전통적 경계선이 허물어지는 것을 의미했다. 1880년대에 버틀러와 같은 인사들은 사적 영역에 큰 공간을 부여한 일련의 전제 하에 활동하고 있었으며, 접촉성전염병법의 침범에 반대하는 운동에 그들이 참여한 것도 바로 이 영역에 대한 공격 때문이었다. 하지만, 1880년대 초 도덕개혁의 이름으로 가정의 성스러운 영역을 집어삼키려는 사회순화운동과 협력할 것인가의 문제에 직면했을 때, 버틀러는 국가개입에 대한 저항과 아동매춘과의 투쟁 사이에서 잠시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버틀러는 스테드의 감시운동에 합류했으나, 스테드가 제시하고 폭로한 사례들이 개인의 자유와 영역을 무자비하게 침해한다고 판단되자 곧 그와 결별했다. 버틀러와 동료 인사들은 가정성이념의 모순과 모호함을 드러내기 위해 그 이념의 전제와 담론을 이용했다. 빅토리아 중기의 여권주의자들은 가정성 이념에 깃든 이중적 기준의 비도덕성을 줄기차고 강력하게 공격했다. 이 과정에서 들은 부지불식간에 시민사회 자체의 구조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게 됐고, 국가-공공영역-사적 영역의 三者 관계와 경계를 뒤흔들게 됐다. 동시에, 버틀러가 혐오한 스테드의 사회순화운동은 국가간섭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때로는 고무함으로써 공공영역의 ‘자발성’이 위축되게 하는 데 기여했다. 전통적 민중놀이문화의 쇠퇴에 기여한 국가간섭의 증대와 더불어, 아동학대, 근친상간, 매춘, 동성애에 관한 일련의 법률들은 도덕개혁을 추구해오던 자원단체들의 주도권을 크게 약화시키면서 20세기의 ‘간섭적이고 규제적인’ 국가의 도래를 예고했다.(조용욱, 93-94쪽)

 

이와 관련하여 볼 때 공론장은 개개인들로 구성되어 있으나 원자론적 인간상을 극복하고 있기 때문에 구성원은 타자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시민 개개인의 정체성(동일성)은 자신의 노력뿐만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에서도 형성되며, 자신의 타자아(他自我)가 존재하듯이 공동체 구성원 간에 동일성과 타자성이 함께 공존한다고 볼 수 있다. 타자의 정치가 실현되지 않는 영역에서 시민은 이기적인 존재로 머물 뿐이지만, 공동체적 조화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실천하는 공론장적 시민은 정치공동체에 안주하지 않고 미래지향적인 공동체를 구성하면서 자신의 정치적 위상을 확립할 수 있는 실체로 승화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진정한 시민성이 구성되기 위해서는 동일성과 타자성이 동시에 구현될 수 있는 공론장의 정치원리를 실현시켜야 한다. 공동체적 조화로서의 공론장적 시민성이 제대로 구현되어야만 정치과정에서의 집단이기적 편향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시민성은 인간 이성과 지성의 단순한 파생물이 아니다. 시민성은 타고난 능력으로서의 이성의 문제로 파악될 수 없다. 그것은 새로이 학습되고 교육되어야 할 어떤 것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참여의 열정과 욕망을 말살하거나 천시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신뢰, 관용, 협조 능력 등과 같은 것들을 교육시킴으로써 공동체적 조화를 이루도록 주의 깊게 성형시켜 나아가야 할 것이 바로 시민성인 것이다.

그러므로 공적인 문제에 대한 이성적인 토론이 이루어지는 공론장의 형성을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우선 상대방을 존중하고, 모든 문제가 폭력적 수단이 아니라 평화적인 대화와 토론을 통해서 해결되어야 한다는 ‘에티켓 사회’가 선행적으로 형성되어야 한다. 그리고 사회적으로도 남이 나와 다를 수 있다는 차이를 인정하고 수용하려는 다원주의적 가치를 형성해야 한다. 에티켓 사회, 관용의 문화, 차이를 인정하고 수용하는 정치가 정착되어 있지 않은 사회에서 대화·토론·심의를 통해 공적 문제에 관한 합의를 이루어 내려는 참여민주주의의 토양은 척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주선미 1, 179-180쪽)

 

그러나, 자유주의의 실천계급으로서의 부르주아적 경험이 결핍된 한국의 중산층은 중산층의 가장 중요한 덕목인 ‘교양’을 배양하고 내면화할 겨를도 없이 전쟁과 산업화의 공간에 던져졌다. 공론장은 오랫동안 왜곡되었고, 재구축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 한국전쟁은 공론장에서의 이념격돌을 殺傷과 파괴라는 극단적 방법으로 해결했던 역사적 상처였다. 해방 공간에서 터져 나온 자유개념의 혼란상과 이념세력간 충돌은 어떤 식으로든 공론장에서 걸러졌어야 했다. 그러나, 냉전 속에 휘말린 한국에겐 그럴 계기가 주어지지 않았다. 커밍스가 냉소적으로 표현한 바 있는 ‘이념의 정화’ (ideological purification)는 최고의 폭력과 물리적 수단에 의한 것이었지, 공론장의 자율적 정화작용에 의한 결과가 아니었다. 또 한 차례의 외압에 의해 해방 공간의 공론장은 정리되어야 했고, 전쟁의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국가동원의 회오리 속에 새로이 움트기 시작한 유아적 형태의 공론장은 증발되었다. 이 일련의 과정에서 공론장의 구조변동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는 심층적 연구를 요한다. 아무튼, 전쟁에서 살아남은 소시민들은 1960년대 군부독재와 1970년대, 80년대 강성권위주의 하에서 교양을 우선 배양하기보다 출세와 성공을 위해 전문기술과 생존수단을 먼저 습득해야 했다. 대중교육이 확대되었지만, 그것은 경제성장을 향한 동원체제에서 국가의 기본이념을 전파하는 기능이 오히려 승했다. 강성권위주의정권에서 자유는 불온한 사상이었다. 1970년대와 80년대 중산층이 갈구한 자유는 권위주의적 압제로부터의 ‘탈출’에 역점이 주어진 것이었지, 재산권의 합리적 행사, 정당한 재산축적 방식, 공익 함양 등 교양과 관련된 덕목이 강조된 것은 아니었다. 성장전략이 성공을 거두면서 중산층의 경제적 기반이 점차 단단해지자 재산축적에 관한 중산층의 욕망은 더욱 확대되었다. 여기에 권위주의정권이 추진했던 성장전략의 최대의 수혜계층이 중산층이라는 사실에 주목을 요한다. 1987년 민주화 과정은 재산축적을 향해 무한 질주를 해온 ‘교양 없는 중산층’과 ‘결과의 평등’을 앞세운 노동계급간 전면 대결이었다. 민주화과정이 재분배 문제를 둘러싸고 각 집단과 계급의 이해충돌과 갈등으로 점철되고, 급속히 개화된 공론장이 권리투쟁으로 얼룩진 이유를 이렇게 설명할 수 있겠다.(송호근, 37쪽)

 

그러므로 공론장에 관한 이러한 논의들이 전해주는 것은 한 사회에서 무엇이 공적인 것인가를 결정하는 방식이 중앙집권적 시스템. 목적합리적 효율성. 관료제를 통해서가 아니라, 분권적 시스템. 의사소통적 합리성. 시민의 참여. 주요 행위자간의 민주적인 파트너십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또한 정치적인 것이 형성되는 장소도 국가에서 지방자치단체로, 지방자치단체에서시민의 공론장으로 중심이동을 해야 하며, 관리와 통제 지향에서 참여 지향으로, 관료적 효율 중심에서 의사소통적 효율 중심으로 정치의 의미가 전환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김기성, 1999: 175).

특히 한국의 경우 기존 정치공동체의 성장중심적 정치를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동일성과 타자성의 동시적 발현을 가능케 하는 공론장의 활성화가 더욱 절실히 요망된다. 새로운 정치공동체는 시민사회의 공적인 역할과 기능을 확대시킬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정책결정구조의 변화가 불가피하다. 공공문제에 대한 정책결정은 이제 제한적인 대표기구만의 행위라는 차원을 넘어서 공공이익을 추구하는 행위자들의 복합적 노력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정치의 목적을 사적 이익의 극대화로 치부하는 소유주의적 정치의 전통이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 탈개인주의적. 논쟁적 정치적 담론과 정책결정을 가능케 하는 제도적 장치의 정립은 성장중심적 정치를 극복하고 삶의 질을 증진시키기 위한 출발점을 마련할 것이다(홍원표, 1997: 25-26).(주선미, 234쪽)

 

토론프로그램이 사교적 대화적인 요소들을 반영해야 하는 한편, 사회적으로는 비목적적인 사교적 대화를 활성화하는 문화를 정착시켜야 한다. 현재까지 우리 사회는 거대담론을 중시하는 풍토 속에서 사교적인 대화를 경시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사교적 대화는 민주주의의 근본이다. 사교적 대화를 통해 커뮤니케이션 이성이 생겨나고, 여론이 형성되며, 개인들의 삶이 공공의 영역과 연결될 수 있다. 토론은 이러한 사교적 대화의 세련된 형태로 이해되어야 한다. 의사소통행위로서의 대화는 사람들이 자아와 타인의 정체성을 구성하고, 공동체를 위한 상호 이해를 달성하게 하며, 커뮤니케이션 이성(reason)을 확립시키고, 원칙에 대한 일반적인 합의에 도달하게 하며, 사적인 삶의 의미를 공적사안들과 연결시켜 주고, 나아가 생활세계라 불리는 상호육체적(intercorporeal) 공동체에 참여하게 한다. 토론이 지향해야 할 이상적 토론의 모습은 바로 이러한 대화일 것이며, 이를 가능하게 하는 문화야말로 바람직한 토론문화일 것이다.(김주환, 94쪽)

 

최근에 많은 학자들은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의 위기, 즉 한국사회에서 실질적 민주주의가 신장되지 못했음을 지적하며 시민성(citizenship)을 갖춘 공중(the public)의 등장이 가장 중요함을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논의들은 본 논문과 넓은 의미에서 동일한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본 논문은 시민성 가운데도 덕성, 즉 민주주의적 덕성에 논의를 집중했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이러한 민주주의적 덕성에 대한 논의는 시민성의 형성과정과 방법에 대해 효과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기존의 논의보다 실천적이다. 공론장의 실질적 절차와 참여를 강조하는 기존의 논의들이, 민주주의적 덕성에 주목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부분적으로 덕성 함양의 조건에 부합하여 의도하지 않은 덕성 함양의 효과를 얻기도 했다. 그렇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언급했던 것처럼, 우리가 시민성을 갖춘 공중을 효과적으로 형성할 수 있는 논의를 제공할 수 있다면, 마치 과녁을 가지고 있는 궁수처럼 마땅히 그래야 할 바에 더 잘 적중시킬 수 있고, 이를 위해 더 효과적으로 노력할 수 있을 것이다. 민주주의적 덕성을 중심으로 실질적 민주주의의 신장을 고양하려는 본 논문은 이러한 의미에서 민주주의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한다.(목광수, 393쪽)

 

그러나 구체적인 상황들에서 공론은 확정하려 하면 할수록 애매한 것으로 드러난다. 비록 일상적인 상황들에서는 그런 공론이 무리가 없이 작동하지만 말이다. 가령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인권,’ ‘권리,’ ‘자유’ 등의 명백해 보이는 말들이 구체적인 상황에 적용될 때 그 용법들은 모호함을 가질 수밖에 없다. 더 큰 문제는 어떠한 견해나 학설을 근거지우려 하면 할수록 그 근거는 점차 확실성을 상실해 갈 것이라는 데 있다. 이런 까닭에 공론을 세우려는 시도에 대해 필자는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일상적인 의미로 존재하는 공론에 대해서는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엄격한 의미에서의 합의된 공론을 도출하려는 시도에 대해서는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자신의 제한성을 인정할수록 그런 시도들이 전제적인 성격의 것임을 지각하게 될 것이다. 불편부당을 지향하려는 태도는 이런 회의적인 시각에 기초하고 있다. 자신의 제한성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나오는 불편부당의 태도로부터 보다 세련되고 확장된(refined and enlarged) 정책적인 시선이 나올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다른 한편으로 공론의 미확정성 때문에 정치세계에서는 그때그때의 상황마다 통치를 위해서 결의(resolution)가 요구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법을 통한 통치도 앞서 홈즈 판사의 주장에서 보았듯이 논리적인 결론이라기보다는 여러 가지 경험적인 요소들을 포괄하는 결의라고 볼 수 있다. 흄의 《영국사》나 홈즈 판사의 《보통법》의 위대한 점은 바로 경험적인 요소를 포괄하는 결의양식의 변화를 추적해 나간 점에 있다. 이런 점에서 필자는 결의의 순간에 존재하는 ‘비-결정’(indeterminacy) 이란 일종의 선험적인 형식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포스트 모든 철학자들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갖고 있다. 사실상 비-결정의 형식을 강조하다보니 결의의 양식들에 대한 탐구는 지나치게 단순화 되었다고 생각된다. 그런 접근법은 경험으로부터 멀어진 어떤 의미에서는 새로운 형이상학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것이 ‘해체주의’가 다소 부정적인 모습으로 비치는 까닭이다.(이병택, 15-16쪽)

 

 

⑸ 한국 사회와 공론장

 

민주화로 인해 시민사회는 보다 민주화되었지만, 현재 한국의 시민사회는 두 가지 측면에서 그 활력을 잃어가고 있다. 먼저 세력관계의 측면에서 권력의 다원화는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민주화 이후 비제도적인 영역에서 시민사회의 활성화가 일어났지만, 제도적인 영역에서는 여전히 기득권집단들 이 제도권력을 장악함으로써 시민사회를 통제하고 있다. 특히 국가와 시민사회의 매개역할을 하는 의회의 영역에서의 보수독과점적 정당구조와 공론장 구조는 시민사회의 다원화를 저지하고, 다양한 가치를 주변화함으로써 시민사회의 민주화에 장애가 되고 있다. 둘째, 공간적 분화로 인한 경제의 자유화는 경제영역의 영향력을 확대시킴으로써 시민사회를 경제의 식민지로 만들고 있다. 여기에 IMF 외환위기로 상징되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로 인해 양극화가 심화되고, 이를 방어해야 할 정치영역이 오히려 이를 조장하면서 시민사회에서는‘효율성’의 논리가‘소통’의 논리를 잠식하게 되었다. 건강한 시민이 형성될 토대가 침식되고 있는 것이다.(신형식, 39쪽)

언론 내부의 사정을 보면 경영과 편집의 분화가 거의 없었다. 1950년대의 신문기업의 활동은 거의 편집부문으로만 이루어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강상현, 1988: 189-190). 이와 같은 상황에서 신문사의 경영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편집부문에 대한 운영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당시 기자들의 사회적 지위는 매우 불안한 상태에 놓여있었는데, 높은 전업률과 매우 낮은 보수가 그 주요 특징이다.

1961년의 언론 정리 후에 나온 1964년의 조사에서도(이강수 외, 1964: 39) 중앙 일간신문사와 통신사의 종사자들 중 45%가량이 2회 이상 전직을 하고 있으며 5회 이상 전직하는 경우도 약 10%가량 되는데 이를 통해 볼 때 1950년대의 언론인들은 대부분 전직을 경험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한국의 언론인의 당시 급여수준은 매우 낮았는데 1969년에 가서 나온 통계에서 중앙언론사의 경력기자가 되어야 겨우 동시대 도시근로자의 최저 임금수준에 도달했다고 한다.(김남석, 174-175쪽)

 

우선, 이 시기의 한국개신교 교회는 ‘국가의 권위주의와 개입주의’에 저항하기보다는 근본적으로 국가영역에 ‘포섭되어’ 있었다. 국가의 종교통제시도 그리고 자율성과 종교의 자유를 보장받으려는 종교측의 이해관계 사이에 긴장이 현재화된 것은 한국전쟁 말부터 천주교, 1950년대 중반 이후의 유교와 불교에서였다. 특히 개신교의 주요 교파들이 해방 후 급속한 교세 성장과 함께 ‘교회’ dg형의 조직에 가까워짐에 다라 성직자집단은 국가의 압력과 타협하고자 하는 경향을 보였다. 또 한국전쟁 이후 대부분의 종교집단들이 극도로 제한된 이익 표출기능을 정치적으로 대행하라는 시민사회의 잠재적 압력에 직면했으나, 개신교 교회의 반응은 대체로 지배집단의 이익만을 선택적으로 대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950년대 말부터 일부의 젊은 성직자들이 사회의 요구에 호응하고 이를 정당화하는 종교적 생산을 시도하기도 했으나, 그것이 사회운동의 형태로 나타난 것은 1960년대 이후였다.

해방후 국가권력의 담당자로 부상한 집단은 고등교육을 받고 다수가 개신교 신자인 근대적 지식인층과 친일 관료들의 복합체였다. 농지개혁 이후 유교적 의식에 젖어있던 지주층은 급속도로 사회적 기반을 상실했고, 그에 따라 그들의 사회적 영향력도 급속도로 감소되었다. 일제 지배하에서 자본주의적 기업들은 대부분 일본인 소유였고 해방 후 이들은 모두 국가소유로 변화되었으며, 이 같은 적산의 불하와 미국으로부터의 원조 배분을 기반으로 하여 한국의 유치한 자본가층이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성장해갔다.(강인철, 191쪽)

 

국내 산업자본의 형성이 미약해 원조자금의 배분을 중심으로 하는 국가의 자본통제 체제에 종속된 관료자본주의적 자본축적과정이 자본형성의 주된 성격이었다. 저급한 공업화 수준으로 빈농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층이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새로운 계급세력인 도시중간층이나 노동계급은 미발달한 상태에 머물렀으며, 도시인구의 증대가 전쟁이후로 심화되었으나 대부분의 도시 인구 층이 반실업의 빈민들로 구성되어 전쟁의 잔재처럼 남게 되었다.

한편 국가의 능력은 상대적으로 발달되어 있었는데, 이는 식민지 통치시대에서부터 사회통제기구로 과잉 성장시켜온 경찰 관료기구 중심의 억압기구가 그대로 온존 계승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반면 정치적 활동에 있어서의 시민사회의 참여는 극도로 제한되어 있었는데, 그 이유로 다음의 세 가지를 지적할 수 있다.

첫째, 해방이후 정부수립 전까지 활성화되어 있던 시민사회의 정치적 참여를 정부수립 후부터 전쟁을 거치면서 극도로 제한해 왔기 때문이다.

둘째, 중간계층의 형성미약으로 정치적 활동을 주도할 수 있는 단체가 시민사회에 뿌리를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당시의 사회조직화는 방직협회 등과 같이 자본가의 조직이면서 관료의 지원에 의존하는 이익단체가 고작이었다. 이러한 단체들의 활동도 관료기구의 장악 하에 있었다.

셋째,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농민들의 조직은 거의 와해된 상태에 있었으며, 노동계급의 조직화도 극히 미약하고 초보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이러한 사회상태 하에서 국가의 사회재생산은 거의 억압기구에 의존하고 있었다. 억압의 기초가 되는 이념은 반공주의이었으며, 제 사회부문의 일탈적 활동에 대해 국가보안법을 폭넓게 적용하는 외에도 반공이념을 초법적으로 구사해 왔다(박원순, 1992: 15-23).

국가의 정당화기구의 발전은 미미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국회의 활동은 시민사회의 정치적 이념을 반영하지 못하고 정권의 후견역할에 머물러 시민사회의 정치적 활동을 연계하여 강화하거나 또는 권력의 정통성을 적극적으로 창출하는 기능을 담당할 수도 없었다(김영명, 1992: 174-190).

한편 행정부 내 정당화기구의 발전 정도는 억압기구에 비교할 때 매우 열악한 상태에 놓여 있었으며, 라디오 방송의 경우 공보처 산하 관영기구로서 전쟁이후 송출기관이 증가되고 출력도 커졌으나 정부 행정 공보매체 이상의 역할은 하지 못하였고(정순일, 1992), 민간에서도 수신기 보유 현황을 매우 저급한 상태에 있었다,(김남석, 170-171쪽)

 

제1공화국에서 언론은 대체로 정파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직후의 정치선전 매체적 특성의 언론은 미군정 하에서의 좌파언론에 대한 탄압과 전쟁으로 인해 거의 사라지고, 전쟁 후에도 이승만 정권의 신문정비의 결과 언론의 진보적 성향도 억제되었다. 그러나 언론과 정치세력이 결합한 형태의 정파적 언론 성격이 온존되고 강화되었는데, 서울에서 발간되는 주요신문들은 정치적 배경을 가진 관료 의존적 자본가들이나 정치인들에 의해 운영되어, 신문운영의 기본 방침은 정치적 입장을 유지 강화하기 위한 방편이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표 4>에서 보는 바와 같이 최영석(1989)이 정리한 1950년대 신문의 정치적 성향을 보면 그런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이러한 정파적 성격으로 인해 정치권력과 언론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제휴와 배제의 관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제휴와 배제는 자파 세력에 대한 정권 차원의 특혜 제공과 반대 세력에 대한 억압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제휴의 방법은 주로 물질적인 보상과 같은 것으로서, 열악한 상태에 놓여 있었던 신문 산업의 자원에 대한 우선적 확보라고 하는 특혜의 형태이었다. 그러한 특혜 중에서 용지배정과 인쇄기 구입자금 조달 지원이 주요 사항이었는데 1950년대의 신문용지 사정은 매우 어려워서 대부분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편이었다. 인쇄기의 경우에도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당시의 신문기업의 취약한 재정구조와 생산비 중 재료비 비중이 매우 큰 것으로 볼 때 정부의 자금지원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김동민, 1990: 58-60).

배제의 방법은 기본적으로 테러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국가보안법」을 내세워 신문통제에 반공주의를 무차별 적용했으며,「미군정법령 제88조」등의 구래의 악법을 온존시켜 신문에 허가취소를 강제하는 한편, 실제 테러상황도 빈번히 자행하였다.

그러나 신문기업들은 대체로 정파적으로 정치권력과 강한 연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언론체제 정비와 같은 형태의 전면적인 배제적 언론 통제방식에는 저항할 수 있었다. 제1공화국 정권은 1950년과 1954년 두 차례에 걸쳐 신문기업들을 정리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두 번 다 언론계의 거센 반발에 부딪혀 실패로 돌아갔고, 다만 신규언론을 허가하지 않는 것으로 신문기업 정리를 마무리 했다.

징치권력의 언론에 대한 대응에 있어서 테러적 성격이 나타난다는 것은 시민사회에 대해서는 일상화된 통치방식임을 말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문 언론은 시민사회와의 연계를 여론이라는 형태로 중개할 수 있는 여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으며 시민사회의 발전수준도 매우 낮은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이제 우리 사회에서도 유교적 근대화에 대한 논의들은 다시금 적극적으로 검토될 필요가 있다. 서구 사회에서 계몽주의가 확립되는 시기에 동양으로부터 유교 경전들을 받아들여 번역하고 그로부터 인간 중심의 도덕적 질서를 확립하는 데 필요한 ‘관용’과 ‘소통’의 논리를 받아들였던 것처럼, 민본의 이상을 담보하기 위해 ‘민주’의 가치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제도적 질서 속에 체현하는 일은 여전히 유교권 사회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과제이다. 공공에 대한 관심과 가족애 등 전통적인 유교적 가치들을어떻게 긍정적인 사회윤리로 발전시켜야 할지 해법을 모색하는 일도 더욱 관심을 가지고 지며봐야 한다. 반대로 서열의식과 위계화된 질서 속에 녹아 있는 지나친 권위주의와 성차별 등 불평등한 인간적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반성적으로 검토해야 할 일들도 많이 있다. 허례와 형식주의에 대해서도 경계해야 한다. 인권과 자유의 신장 등 서구의 근대화 과정에서 발견된 가치를 수용하고 그것을 담보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모색하는 동시에, 국가의 강력한 힘과 견주면서 조화로운 시민사회를 구축해야 하는 과제도 보다 많은 민주적 질서를 얻기 위한 유교권 국가들의 과제이다.(박희, 142-143쪽)

 

1920년대 민족성이론의 세례를 받았던 함석헌은, 3․1운동과 세계 1차대전이후의 ‘개조’의 시기에 청년기를 보내고 종교와 역사인식을 통해 근대 자본주의 문명에 대한 반성적 성찰에 도달하였는데, 그것은 1950년대에 일상에까지 스며든 상품화, 비인격적인 노동, 이데올로기 기구화된 종교와 교육․정치․민족국가에 대한 비판으로 나아갔다.

민족주의와 근대성에 대한 성찰이라는 상호모순적일 수 있는 두 개의 세계 인식은, 억압과 통제가 일상화된 1957년 이후 그에 대한 저항의 필요로 구성된 주체인 ‘민중’ 속에서 결합되었다. 이는 ‘민중이 하나님’이라는 종교적 언술과 태도를 통해 정치적 혁명과 변화를 가능케했던 순간의 가능성이기도 했다. 당대의 국가주의적 - 자유주의적 담론들이 국가 구성이라는 지배적 이데올로기로서 ‘국가전체의 운명이 내 운명’ ‘국민이야말로 진인간’이라는 언술 대 ‘특권계급’에 대한 ‘사회적 정의’와 ‘시민적 권리’를 주장했던, 대항적 관계에 위치하지만 그 틀거리를 넘어서지 않는 공존적 주체를 형성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나라 없는 백성”이라는 역동일시의 주체 형성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1950년대 후반 공론장에서 함석헌의 ‘민중’ 호명 전략은, 일상적인 근대성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하여 ‘민중’을 ‘민족’으로부터 치환하여 그 우위에 둠으로써 『새벽』, 『세계』, 『사상계』 등이 구성해낸 반동일시 전략과 ‘절합’을 가능케 하였다.

그러나 민족성이론보다 근대성에 대한 비판에 더 근접함으로써 가능했던 지점은, 4․19혁명에 뒤이은 경제제일주의의 확산, 통일운동에 대한 개입의 불가피함, 자유주의적 장면정권에 대한 거리의 모호함 등으로 ‘국민 = 민족’으로의 이동을 낳게 되었다. 계급, 성, 민족, 인종의 문제가 횡단하는 급진민주주의의 시대, 생산관계를 넘어서서 결코 충족될 리 없는 끊임없는 소비 욕망을 창출하는 포스트포디즘의 시대에 그의 근대성 비판과 주체 형성 전략의 부침(浮沈)은 새로이 조망될 필요가 있다. 가장 날카로운 문명의 이기와 총탄 앞에 맨살을 드러냈던 4․19의 두려움과 용기 위에 지금 발을 디디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윤상현, 397-398쪽)

 

스미스에게 드러나듯이 편당의 치우침을 벗어나고픈 조급증은 상당히 흔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이론적인 조급증과는 달리 현실적으로 보면 편당만큼 치유가 불가능해 보이는 것도 없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공론에 대한 요구는 매력적인 것으로 드러날 것이다. 한국사회에는 ‘정론’(正論)이란 말이 있다.

이 표현이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공론의 의미가 아닐까 생각한다. 어떤 용어의 의미는 그 반대어와 비교함으로써 더 잘 이해된다. 정론의 반대어는 무엇일까? ‘私論’일까 아니면 ‘邪論’일까? 아니면 ‘異端’일까?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기독교의 전파에 있어서 ‘개종’의 문제는 ‘이단’의 문제보다 그다지 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개종에서의 탄압의 문제보다는 이단의 박해사가 더 심각하고 폭력적이었다는 말이다. 공론의 처방은 편파와 편당의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더욱더 악화시킬 것이다. 그리고 다른 의견을 박해하면 할수록 편당의 문제는 더 고질화될 것이다. 공론의 처방이 불가한 이유이다.(이병택, 6-7쪽)

 

그러나 현실적인 수준에서 한국사회의 공공성은 대단히 취약한 구조적 기반 위에 노출되어 있다. 사회적 공존의 원칙은 보편주의가 아닌 권력과 이데올로기에 의해 특수주의로 변질돼 버렸다. 자율적 행위자들의 규범적 공간으로서 공론장은 소통 없는 저돌적 국정운영에서 나타난 배제의 원칙에 따라 공론의 흐름을 지하로 스며들게 했다. 이런 가운데 의사소통을 통한 정치적 상호작용은 힘의 논리에 의해 원천적으로 봉쇄되고 일부는 조작의 혐의마저 받고 있다. 미국산쇠고기수입, 세종시 수정안, 4대강사업, 한미FTA, 제주해군기지 등 끊임없는 사회적 갈등이 증폭되는 과정에서 시민들의 정치적 면역력은 갈수록 커져가고 있다. 보다 심각한 문제는 정치적 면역력이 시민들의 탈정치화를 가속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에 있다. 반복적으로 축적된 정치적 불신과 실망감이 더 이상 정치에 기대를 갖지 않도록, 그래서 공론장의 기능을 무색하도록 만들고 있다. 그럼에도 아직 포기하기엔 이르다. 공론장의 논리가 내장된 공공성의 정치과정은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는 점에서 앞으로 미지의 변화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기 때문이다.(홍성태, 189쪽)

 

총회는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를 운영할 수 없어 합동을 결의하고 합동 7원칙을 발표하였으나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측의 의견이 대립되어 결국은 성취를 보지 못하였다. 특히 장로회신학교측은 자유주의 신학자 김재준은 당연히 교수진에서 제외될 것을 주장하였다.

1950년 4월 21일 대구 제일교회에서 제36회 총회가 개회되었으나 두 신학교의 충돌로 무장경관의 출동저지로 해산된 총회는 동년 7월까지 정회할 것을 선언하고 끝이 났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해 모이지 못하고 1951년 5월 25일 부산 중앙교회에서 계속회를 열었다. 계속회는 양 신학교의 직영을 취소하고 새로운 직영신학교를 대구에 설립하자는 안이 결정되었다. 조선신학교측은 불법이라고 반대하였으나 총회는 이를 강행하여 다수결로 결정되었다. 이 결정에 따라 ‘총회신학교’가 1951년 9월 8일 대구에서 개교하였다. 장로회신학교는 총회의 명령에 따라 폐교하였으나 조선신학교는 대학령에 의해 한국신학대학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새로운 출발을 하였다.

다음해에 열린 제37차 총회에서 경기노회로 하여금 김재준을 목사직에서 제명토록 하며 또한 이와 더불어 조선신학교 졸업생들에게는 일체 교역자 자격을 부여하지 않는다고 결정하였고, 서고도 선교사도 노회에 명하여 처단케하며 각 노회에서 위 두 교수의 사상을 옹호지지 선전하는 자는 해당 노회에서 처벌한다고까지 덧붙여졌다. 경기노회가 이에 불복하자 53년 4월의 제38차 총회에서 직접 김재준을 목사직에서 파면하였다. 조선신학교파는 총회로부터 탈퇴하여 새로운 교단을 구성하기에 이르렀고 오늘까지 이어오고 있다.(최병천, 19-20쪽)

 

박형룡의 성서관을 평가하여 보면 장점으로는 성경의 완전 영감을 통하여 한국의 보수주의를 극단적 자유주의와 구별하는 잣대를 놓았고, 성경의 절대 권위를 확립하였다. 또한 성경의 주관적이고 신비적인 해석으로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노력과 열정이 있었다. 그의 노력은 후대까지 한국교회가 성서의 권위를 존중하는 교회가 되었다.

그러나 단점으로는 첫째 기계적인 영감설을 주장하여 고착화된 성서이해를 가진다. 박형룡은 말로는 유기적 영감을 주장하나 하나님이 성서 저자들을 오류 없도록 완전케했다는 것은 결국 인간의 인격은 무시되었음을 말한다. 박형룡의 완전영감은 기계적인 영감 외에 다른 것일 수가 없다. 둘째 문자적 성경해석은 시대정신의 변화를 거부하고, 전통을 만고불변의 진리로서 고집하여 성서를 역사와 단절시키는 비역사적인 경향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성경의 권위를 강조한 나머지 성경이 내포하고 있는 과학적 철학적 오류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거부하는 반지성적인 경향을 가지므로 교회가 학문적으로 배타성을 가진 공동체로 인식되어졌다. 이 같은 비역사적이고 반지성적인 성서 이해는 다른 해석을 비판하고 정죄하므로 교파 분열의 기수가 되었다. 또한 후대에 한국장로교회가 역사책임을 외면하고 불의에 대하여 방관자가 되는 발판이 되었다.

김재준, 박형룡의 성서관이 후대에 한국장로교회에 미친 영향은 대단하다. 그러나 이 논문에서는 그들의 성서관을 비교하는 것에 치중하여 영향사에 대하여 충분히 다루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차후에 이들의 한국장로교회에 끼친 영향을 보다 역사적으로 세밀하게 연구하는 과제로 남겨 놓았다.(최병천, 62-63쪽)

 

3. 시민

 

⑴ 87년 이후 복원된 한국의 시민사회

 

남북분단과 냉전의 상황은 한국정부로 하여금 ‘민주적 가치’보다는 ‘반공이념’에 치중하게 하였고, 공산주의 위협은 변화보다는 안정에 집착하도록 하여 단지 기본적 인권을 제한했을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정착에 알맞도록 사회・경제적 구조를 개혁하려는 시도도 크게 둔화시켰기 때문이다. 심지어 반공에 대한 정치문화로 말미암아 사회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중도적 정당이 뿌리내리는데 저해하는 요소가 되었으며 혁신정당인 진보당의 몰락은 가져오게 된 배경이 되었다. 반공이라는 정치적 명분을 앞세워 개인의 진보적 입장을 탄압하거나 갖은 수단을 동원하여 개인의 일상생활을 제약하게 되었다. 이러한 획일적 이데올로기의 강조는 의 의견이나 정책들이 분출하거나 성숙될 수 있는 분위기를 억압하게 되었다. 국민의 다양한 이익을 대변할 중간 매개집단의 형성과 발전을 방해하였다. 민주주의 정치문화는 다원적인 정치활동을 용납하는 정치 환경에서 성숙하며, 사상과 토론의 자유가 허용되는 가운데 배양되는 것이다. 그러나 반공으로 인한 획일적인 이데올로기의 강조는 민주주의 정치문화가 성숙할 수 있는 여지를 완전히 제거하였다. 이러한 반공이데올로기는 어느 정도 자신의 이데올로기적 지배의 기반을 가지면서, 체제외적 주장에 대해서는 탄압의 명분으로 또한 체제내적 반대파에 대해서는 권위주의 지배의 통치이데올로기로서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성병욱, 111쪽)

 

과거 독재정권이 전국을 중심으로 탈분화전략을 취함으로써 중앙을 특권화했다면, 시민사회는 아래로부터의 탈분화, 즉 지역을 중심으로 한 연대전략을 구사해야 한다. 이것은 시민운동이 추구하는 녹색정치, 생활정치, 자치의 가치에 가장 적합할 뿐 아니라 다양성 속의 연대가 또 다른 중앙주의로 흐를 가능성을 파단하는 것이다. 또한 사이버 영역에서의 탈 분화 전략은 지역간의 단순한 분화가 아니라 중앙이 수평적 네트워크를 구성하는데에도 적합할 것이다. 아래로부터의 탈 분화전략은 시민운동이 추구해야 하는 전문화 및 풀뿌리화가 접합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전략임과 동시에 시민운동의 또 다른 경향인 정치세력화와 시민운동이 접합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지점이기도 하다.(김정훈, 26쪽)

 

한국에서 시민이라는 용어가 광범하게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87년 6월 항쟁부터이다. 이어 1989년에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이 등장하면서 시민운동이라는 용어도 널리 사용되게 되었다. 6월 항쟁 이후 급속히 성장한 시민운동은 기왕의 민중운동과 선을 그으면서 새로움을 주장했는데, 이 새로움은 운동노선에서의 새로움(변혁적 지향의 포기)과 또한 운동영역에서의 새로움(신사회운동들과 같은 새로운 사회운동 영역들이 포괄)을 결합하는 것이었다. (서관모, 104쪽)

 

이렇게 다시 부활한 시민사회는 19852․12 총선을 기점으로 '동원적 시민사회'로 탈바꿈하게 된다. 유화국면에서 부활한 한국의 시민사회는 권위주의 정권이 설정한 제도적 공간내에서 자신의 이익의 실현을 위한 투쟁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거리에서의 동원을 통해 제도적 틀 자체를 바꾸려는 투쟁에 돌입하게 되었다. 즉 민주화를 위한 시민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2․12 총선에서 한국의 시민운동 조직은 새로운 야당인 신한민주당의 선거운동을 적극 지원하여 신당의 바람을 일으키는 데 적극적인 역할을 하였다.(임혁백 1, 53쪽)

 

그러나 87년 한국사회의 민주화, 91년 지방자치 부활을 계기로 시민운동 르네상스라고 불릴 정도로 수많은 시민사회단체들이 다양한 영역(환경, 여성, 소비자, 인권, 교통, 지방자치, 복지 등)과 지역에서 출현하게 된다. 이처럼 90년대 초반부터 다양한 영역과 지역에서 공익적 활동을 전개하는 시민사회단체는 과거의 민중운동 단체와 달리 시민들의 생활과 밀접한 문제를 중심으로 활동하게 되고, 이에 따라 교육대상은 과거의 의식화된 소수에서 일반 시민으로, 교육내용은 사회구조나 거시적 담론에서 생활세계의 다양하고, 시민생활에 직결되는 문제들로 변하게 된다. 이처럼 90년대 초반은 시민운동의 르네상스라는 물결에 힘입어 YMCA, 흥사단 등 전통적인 시민교육 단체를 넘어 수많은 크고, 작은 시민사회단체에서 다양하고, 활발한 시민교육이 만들어지고, 시도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이러한 큰 변화의 물결에 따라 그 전에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범위와 양상으로 각종 시민사회단체에서 환경, 여성, 소비자, 지역 등 시민들의 직접적인 필요에 부응하는 시민교육이 활발하게 진행된다. 하지만 적극적이고, 활발하게 시민사회단체의 시민교육이 전개되던 시기는 다른 한편 시민교육을 직접 기획하고, 실행하는 담당자들에게는 큰 도전의 시기이기도 했다.

90년대 중반에 이르자 시민사회단체 시민교육 담당자들은 시민교육이 새롭게 분출하여 활발하게 전개되고는 있지만 시민교육의 내용과 방법이 급격히 변화하는 사회변화를 충분히 담아내지 못하고, 복잡한 사회문제를 적절히 다루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문제의식을 갖게 된다. 무엇보다도 과거와 다른 새로운 시민교육이라고 말하지만 과거의 사회구조적인 문제 영역에서 생활상의 문제영역으로 주제와 내용이 바뀌었을 뿐 아직도 학습자의 문제의식과 상태는 무시된 채 주입식, 강의 위주, 교육자 위주, 일방통행식으로 구성되어 있는 시민교육의 한계를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를 새롭게 고민하고, 모색하게 된다.(김기현, 52쪽)

 

87년 이전까지 권위주의적 국가의 지배는 시민사회의 성장을 극도로 억압함으로써 국가-시민사회 관계를 즉자적인 대립관계로 구조화 시켰다. 이런 이유 때문에 국가와 시민사회의 관계는 제로섬 게임의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즉 시민사회의 성장 자체가 국가의 권위주의적 지배를 약화시키며, 반대로 권위주의적 지배가 강화될수록 시민사회는 약화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87년 민주화운동의 성공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민주화 최대연합’의 형성은 이러한 국가-시민사회 관계의 구조적 조건 하에서 가능했던 측면이 크다고 하겠다.

시민사회의 성장 자체가 민주화연합의 성격을 거의 자동적으로 부여받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87년을 기점으로 이루어진 정치사회의 절차적 민주화의 형성, 그리고 정치적 시민권의 복원은 국가-시민사회관계를 재조정하는 계기가 되면서, 이전의 대립적 국가-시민사회 관계의 일정한 변형을 초래하게 되었다.(박해광, 11쪽)

 

한국의 시민사회는 식민지 지배와 분단 상황이라는 역사적 과정을 거치면서 성장해 왔기 때문에, 서구에서 강조하는 시민사회와는 상이한 특성을 지닌다. 한국의 시민사회는 해방 이후 신식민지적 조건과 분단 상황이라는 구조 속에서, 국가와 자본주의의 발달과 자유주의적 전통이 약한 한국의 시민사회는, 오랫동안 유교사회의 영향으로 이해 자율적인 결사체의 연대활동보다는 혈연, 지연, 학연을 기반으로 하는 전통적 단체들의 영향력이 지속되어 왔다. (김태룡, 83쪽)

 

셋째, 한국의 시민사회가 성장산업이 되게 된 은 서장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정치지체 현상에 기인한 바 크다. 시민사회의 성장은 정당과 국회의 정치적 경쟁성, 대표성, 응답성과 책임성의 약화와 연관되어 있다. 한국의 정치사회는 ‘경쟁적 담합구조’ (competitive collusion)를 통하여 을 형성함으로써 시민들로 하여금 민주적 책임성을 강제할 수 없게 하였으며, ‘색깔론’의 온존은 한국정치가 이데올로기적으로 편협한 배제적 민주주의 (exclusionary democracy)를 벗어나지 못하게 하였고, 지역주의는 지역적으로 사실상의 일당독재를 가져와 한국 민주주의의 경쟁성 (competitiveness)을 약화시켜고, 3김의 1인지배 사당적 정당은 근대화된 한국에서 전근대적인 ‘가산주의’ (patrimonialism)를 부활시켰을 뿐 아니라 지연, 혈연, 학연의 연고주의 정치를 확산시킴으로써 한국정치의 사회적, 정치적 ‘신뢰의 반경’ (radius of trust)을 매우 협소하게 좁혔다. 정치적 발전의 지체현상은 시민사회로 하여금 정당과 국회의 약화에 의한 제도적 공백을 메꾸는 역할을 수행하게 하였다. 시민사회는 정치권 밖에서 시민의 이익과 선호를 대표하는 대안적 연결채널을 제공하였던 것이다.(임혁백, 106쪽)

 

하지만 이 연구가 87년 체제의 성격에 주목한 보다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시민사회의 정치참여와 관련한 구조적 부재를 함축하고 있음을 드러내 보이기 위한 것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포괄적 운동으로서의 시민운동이 가진 첫번째 문제는 전문성의 부재다. 이 전문성의 부재는 전문적 지식이나 지식인의 부재의 문제 보다는 운동의 내용을 전문화함으로써 보다 앞선 철학과 전망을 제시할 수 있는 가능성과 능력의 문제라 할 수 있다. 정치 발전의 지체를 특징으로 하는 87년 체제 하에서 초기 시민운동이 가진 전문성의 가능성은 매우 높았다. 하지만 20여 년간의 시민운동의 결과는 시민운동의 전문성 제고의 지체라 평가해야 할 것이다. 두 번째는 정치적 역할의 약화라는 문제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적 개혁을 주요 목적으로 삼은 시민운동은 정치가 부재한 곳에서 준정당적 정책들을 수행해 왔다. 그리고 이런 형태의 운동은 2000년 낙천․낙선 운동을 통해 그 영향력을 인상 깊게 보여 주었다. 하지만 문제는 2000년 이후 이러한 시민사회의 정치적 영향력은 급격히 감소하고, 시민운동이 제기했던 문제들이 정부의 정책 의제화하면서 그 활동성을 급격히 상실 당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시민운동이 국가 정책과 끊임없이 근접 조우함으로써 야기된 필연적 결과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시민운동을 통한 정치참여의 형식이 근본적으로 반성되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세 번째 부재는 역설적이지만 대중성을 표방한 시민운동이 초래한 대중성의 부재다. 초기 시민운동 단체들의 회원 가입이 급격하게 이루어졌던 반면, 2000년대에 들어서는 심각한 참여 저하의 문제들이 발생했다.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시민운동을 암묵적․명시적으로 노동자운동 및 민중운동과 차별화시킨 것도 중요하게 작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대중성을 단지 많은 대중을 대상으로 한, 혹은 대중들을 회원으로 확보한 운동으로 간주하는 인식의 한계가 여기에 있다. 과연 시민운동은 대중의 필요, 욕망을 진지하게 고려하면서 이들과 함께 하는 운동을 고민해 왔을까?(박해광, 42-43쪽)

 

시민운동과 대중적 결합을 이야기할 때 흔히 두 가지 방향을 이야기하곤 한다. 하나가 지역이라는 방향이다. 시민단체가 시민의 주체적 참여를 조직하는 직접적 공간 중 하나가 '지역'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 점에서 시민운동이 보다 대중적인 결합을 이루어 내기 위해서는 지역이라는 현장과의 결합은 반드시 자신의 조직적 목표로 두어야 하는 방향이다. 그러나 현재의 지역 시민단체들의 주류는 중앙 조직 소위 메이저 단체들의 복사판에 가깝다는 것이 솔직한 진단일 것이다. 이 점에서 부안의 주민투표관리위원회의 경험은 시민운동에 중요한 자산이다.

다른 하나는 시민운동과 민중운동의 연대라는 방향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를 고리로 하여 시민운동이 기층대중 조직과 제휴하고 연대해야 한다는 것은 90년대 사회운동의 숙제처럼 이야기되어 온 것이다. 그러나 시민운동과 민중운동과의 연대는 공통의 정치적 목표에 대한 추구라는 전제에 대한 합의가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민중운동이 자신의 정치적 목표를 분명히 하고 있는 반면 시민운동은 이를 설정하고 있지 않는 실정이다.

지금까지의 시민운동과 민중운동의 연대는 목표의 동질성이라기보다 개별 사안에 대한 일시적 제휴오 합의에 기초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같은 경향은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보는데, 민중운동의 경우 민주노동당고 같은 정당을 매개로 한 권력에 대한 프로그램이 있지만 시민운동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시민운동과 민중운동의 연대방향은 민중운동의 프로그램이라는 성격이 더 강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하승창, 55-56쪽)

 

시민사회안에 착근한 대중정당을 창설하는 것, 그리하여 산업화와 서양 문명의 충격 속에서 산산이 부수어진 국가사회를 다시 통합하고 갈등을 자유의식과 평등이념의 동력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 분명히 이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이자 역사적 사명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갈등으로 가득찬 산업화의 시대에 한국인은 아직도 전통 사회의 향수에 집착하며 민족적 동질성을 은신처로 삼고 있다. 그리고 갈등을 담아 소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질성 회복'이라는 정치 구호 아래 갈등을 '정복'하려 한다. 서로 다른 자아와 타아가 민족·국가·사회라는 전체속으로 사라지는 갈등 없는 사회를 동경하는 것이다. 아니 삶의 하부구조가 동질성을 잃으면 잃을 수록 한층 더 강화되어 역사를 움직이는 것이 동질성에 대한 향수이자 전체지향적 의식일 것이다.(김병국, 194쪽)

 

 

⑵ 민중민주단체로 불려야 할 시민사회 관련 판례들

 

사업계획 중 홍보실 사업계획(안)에는, 정부와 여당, 수구보수언론의 통합공무원노조 탄압사례를 묶어 심각성을 공유하고, 이에 맞선 4대 야당의 협력, 시민사회단체의 반 MB정서, 연대운동이 확산되고 있다는 것을 알려 통합공무원노조 조합원의 의지와 단결을 독려하기 위한 조합속보발행 및 사회공공성강화, 부정부패추방, 부자정책 반대, 광우병 쇠고기 수입반대 등을 위한 신문광고, 신문간지, 거점 현수막사업 등의 사업방향을 내용으로 하는 대 시민 선전사업안이 포함되어 있는 점(2013노576)

 

㈁ 전국◆◆◆◆연합, 경기◆◆◆◆연합, 6·2 수원지방자치◆◆◆◆ 등 전국 300여 시민단체들이 참여한 2010 유권자◆◆◆◆는 2010. 3. 24. 출범하면서 ‘4대강 죽이기 사업으로부터 강의 생태계를 살리고 전 국민 3분의 2가 마시는 식수원을 지키는 역할을 할 수 있는 후보가 당선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라고 선언하고, ‘4대강 사업 중단, 친환경 무상급식 실현 등 시민사회의 요구를 실현하기 위한 전국공동행동 추진’을 활동목표로, ‘4대강 사업 추진 찬성후보, 반대후보의 명단공개 등을 통해 후보자들로 하여금 4대강 사업 반대 공약 채택 촉구’, ‘4월 한 달을 전국 공동실천의 달로 선포하고 4대강 사업의 문제점을 홍보하는 등 전국적 반대 여론전을 진행’ 등을 주요 추진 사업으로 각 설정하였다. (2011노716)

 

2009. 1. 20. 서울 용산구 한강로 2가에 있는 남일당 빌딩 옥상에서 전국철거민연합회(이하 ‘♣♠♠’이라 한다) 회원들이 용산 4구역 재개발부지 내 세입자 및 상가들의 이주대책을 요구하며 망루를 설치한 후 농성을 하면서 화염병과 벽돌 등을 투척하였는데, 경찰이 위 ♣♠♠ 회원들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화재로 인하여 ♣♠♠ 회원 5명이 사망하게 되었다. 

위와 같이 ♣♠♠ 회원 5명이 사망한 것을 기화로 진보신당 등 시민사회단체들은 ‘이명박 정권 퇴진 및 책임자 처벌’ 등을 주장하면서 조직적인 투쟁을 전개하기 위하여 ‘용산철거민 경찰 살인진압 ▣◎◎◎◎원회’를 결성하게 되었다. 

위 ▣◎◎◎◎원회는 2009. 1. 20. 19:10경 서울 용산구 한강로 3가에 있는 남일당 건물 앞에서부터 ▷♤약국 앞까지 편도 4개 차로를 점거하고, 회원 1,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살인정권 이명박 정권 퇴진” 등의 구호를 제창하는 방법으로 촛불집회를 개최하였다.

집회참가자 1,000여 명은 같은 날 21:00경부터 시내로 이동하려다가 대비경력과 대치하게 되자 대비경력에게 폭력을 행사하였고, 경찰이 물포를 사용하자 일부 시위대는 보도블록을 깨서 순찰차를 손괴하고, 경찰들을 향해 투척하였으며 경찰들을 시위대쪽으로 끌고 간 후 폭행하였다.  (2010노2468)

 

2009. 5. 23. O 전 대통령이 서거한 것을 계기로 P당과 Q당 등 야당은 각종 논평과 당대표 기자회견 등을 통하여 당시 정국을 민주주의의 위기로 규정하면서 O 전 대통 령 서거 원인과 결부하여 정부와 여당에 대해 대통령 사과와 국정쇄신, 미디어 관련법 등 소위 'R악법' 철회, 대북 강경정책 폐기 등을 요구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현 정권에 비판적인 모든 세력의 결집을 주장하면서 M.S 등 노동단체, Q당 ․ T당 .U당 V당 등 정당, 참여연대 ․ 녹색연합 등 각종 시민사회단체들의 참여 하 2008. 10. 25. 출범한 민생민주국민회의 준비위원회는 2009. 5. 28. 참여연대 사무실에서 제27차 운영위원회를 개최하여 'O 전 대통령 영결식을 범국민적 추모와 대통령 사과, 민주회복, R악법 철회, 1% 부자정책 중단 등 국민적 지향을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장으로 만들고, 전면적 국정쇄신의 내용과 형식에 대한 시민사회의 광범한 합의를 우선하고, 이를 6.10 대희를 통해 대중적으로 선포․공유하며, 국정쇄신의 전제인 반민주․반민생 R악법 철회를 국희일정에 맞물려 전개한다'는 대응책을 논의하였다.

이에 따라 2009. 6. 5. 「6월 항쟁 계승 민주회복 범국민대회」(이하 '범국민대회'라고 한다) 준비위원회가 구성되었고, 같은 날 S은 제13차 중앙집행위원회를 개최하여 '현 정국에 대한 입장과 노동계의 대정부 요구를 분명히 담은 시국선언문을 6. 9. 발표하고, 각계각층․ 지역별로 광범위한 시국선언 확산 등 전국적 반정부 여론사업 조직화 사업 등 현 정부에 반대하는 대중여론 및 전국적인 대중투쟁의 토대를 확대하고, 6. 10. 지역별 범국민대회 및 지역촛불대회를 개최'하기로 하는 「6월 주요 투쟁 결의의 건」을 확정하여 2009. 6. 6. M를 비롯한 산하조직에 통보하였다. (2010노2212)

 

그리고 위 이메일에 첨부된 <7. 19. 2차 범국민대회 기획안(초안)>에는 7. 19. 2차 범국민대회 개최와 관련하여 공무원노조, 전교조 이외에 민주당, 민노당, 창조한국당, 진보신당 등 정당과 국민회의, 참여연대, 진보연대, 다함께. 미디어행동 등 사회단체, 민주노총 등이 함께 범국민대희와 관련하여 논의를 하고, 〈언론악법 중단하고 언론자유 보장하라 용산참사 사과하고 책임자를 처벌하라 해고는 살인이다. 쌍용자동차 정상화하라 시국선언 탄압 말고 표현의 자유 보장하라 공안탄압 중단하고 민주주의 회복하라〉와 같이 정치적 주장이 담긴 구호를 집회 당일 제창하기로 하는 한편, 전공노 500명, 민공노 2,000명, 전교조 5,000명, 민주당 3,000명, 민노당 1,500명, 창조한국당 300명, 진보신당 500명, 시민 2,000명, 민주노총 3,000명 등과 같이 각 정당, 노동단체, 사회단체 등이 동원할 인원수를 정하고, 집회 경비 3,000만 원에 대하여 야4담․ 시민사회와 전교조·공무원 2개 조직이 각 절반씩 부담하기로 기재되어 있었다. (2010구합6060)

 

2002. 11.경 《학교급식 전국 네트워크》 서울시 교육위원, 교사, 학부모, 영양사, 지역학교운영위원협의회 등에서 학교급식의 실질적인 개선을 위해서는 학교급식법. 조례를 제(개)정해야 하며 또한 여러 교육시민단체 대표와 정책담당자들이 함께 하는 광범위한 연대회의를 결성하여 힘을 모아야 한다는 데 생각을 같이 하게 되었다. 이에 광범위한 연대를 모색하기 위한 매우 구체적이고도 실천적인 모임을 설립하자는 취지하에 《학교급식법개정과 조례제정을 위한 시민사회단체 연대회의》(이하, 《연대회의》라고 한다)가 출범하게 되었다.

 변호인 제출 증 제8호(학교급식운동백서) 207면, 제5회 공판조서 중 이○○ 증인신문조서 2면   연대회의는 학교급식법 개정안을 국회에 입법 청원하여 이○○ 의원으로 하여금 발의하게 하거나, 이○○ 의원에게 개정안을 전달하기도 하는 등 학교급식법 개정운동을 벌였다.(2010고합1468)

 

피고인은 2005. 9.경 ‘분단 60주년 반미자주선포대회’를 개최하면서 주한미군 철수 및 예속적 한미동맹 해체를 주장하였다. 또한 남과 북이 천안함 피격사건으로 인하여 극도의 대립관계에 있는 상태에서 통일부의 승인 없이 임의로 방북하였고, 나아가 북한 언론의 보도 속에서 북한 내 여러 장소를 방문하며 북한 체제 및 북한의 주체사상이나 선군정치를 찬양하고, 연방제 통일방안 등 북한의 주장에 지지하고 동조하는 발언을 하였다. 

이에 대하여 피고인은 주님의 소명에 따라 6․15 정신을 살려 우리 민족의 통일과 평화를 위하여 방북하였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피고인의 북한 내에서의 활동이 결국 북한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어 반국가단체인 북한의 체제선전에 이용되었고, 피고인의 행위로 인해 남북관계에 적지 않은 파급효과가 발생한 점을 고려할 때, 피고인의 행위가 반국가단체인 북한을 이롭게 함과 동시에 대한민국의 존립. 안전과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대한 실질적 해악을 끼칠 명백한 위험성이 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따라서, 피고인이 그 동안 시민사회활동을 하면서 민간통일운동을 활성화하고 이를 통해 남북한의 교류확대 및 긴장완화에 어느 정도 기여해왔으며, 이 사건 밀입북이 개인적인 영달이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함이 아닌 종교적 내지 통일에 대한 주관적 신념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더라도, 피고인에 대한 엄벌이 불가피한바, 결국 위와 같은 양형요소에다가, 피고인의 연령, 성행, 가족관계, 가정환경, 범행의 동기와 수단, 범행 후의 정황 등 이 사건 기록에 나타난 양형 조건이 되는 사정들을 종합하여 주문과 같은 형을 정한다.  (2010고합1268)

 

위 회의에서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대책회의를 2008. 5. 6. 한국프레스센터에 개최하기로 하면서, 그 사회자와 식순을 정하였고, 회의자료 회람과 인쇄의 실무는 피고 참여연대와 피고 한국진보연대가 맡기로 하였다. 위 회의에서는, <광우병 안전지대 선언운동> <사이버 실천 안티행동> <매주 토요일 문화제><매주 수요일 12시 거점도시별 선전캠페인> <5월 22일 국회앞 집회> 등을 <국민행동계획>으로 논의하였고, 보다 세부적인 <국민행동계획>은 피고 한국진보연대가 제안서를 만들어 회람하기로 하였다. 위 회의에서는 또한, 중ㆍ고ㆍ대학교 급식과 학생식당에는 광우병위험 쇠고기가 들어갈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학생들이 나설수 있도록 지침을 마련하자는 제안이 있었다. 이에 따라 피고 참여연대와 피고 한국진보연대 등이 전국의 시민사회단체들에게,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긴급회의 개최를 제안한다는 서면을 보냈다. 한편으로 2008. 5. 3. 서울 종로구 보신각 부근에서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집회가 개최되었다. (2008가합74845)

 

다. 민주당, 민주노동당 등 대부분의 야당 및 야당의 후보자들은 6.2 지방선거에서 4대강 사업을 반대한다는 정책 및 공약을 발표하였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2010. 4. 12.경 ‘4대강 살리기 사업 홍보에 관한 질의회답’을 통해 ‘정부가 국가 정책을 국민들에게 알리고 이해를 구하기 위하여 홍보활동을 하는 것은 본연의 직무라 할 것이나, 다수의 정당이나 후보자들이 선거의 쟁점으로 삼고 있는 정책에 대하여 선거가 임박한 시기에 광범위한 홍보활동을 하는 것은 선거에서 특정 정당이나 후보자에게 유리하거나 불리한 영향을 미칠 수 있으므로 이를 자제해야 한다.’는 내용의 의견을 발표한 이래 수차례에 걸쳐 4대강 사업과 같이 선거쟁점으로 볼 수 있는 사안에 관하여 정부. 정당. 단체가 일반 선거구민을 상대로 홍보활동 내지 반대활동을 하는 것은 공직선거법에 위반된다는 취지의 의견을 발표하였다. 

라. 한편, 수원환경운동연합 등 수원지역 시민단체들을 주축으로 하여 2010. 3. 10. 출범한 6.2 수원지방자치희망연대는 발족 선언문에서 ‘현 정부의 4대강 사업을 반대한다.’는 취지의 의견을 표명하였고, 경기환경운동연합, 6.2 수원지방자치희망연대 등 경기지역 시민단체 등을 주축으로 하여 출범한 6.2 경기지방자치희망연대는 2010. 4. 15.경 야 3당(민주당, 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의 경기도지사 후보와 함께 ‘하천과 생명을 죽이는 4대강 사업을 반대한다.’, ‘친환경 무상급식을 실시한다.’는 내용의 희망정책 협약을 발표하였다. 전국환경운동연합, 경기환경운동연합 등 전국 300여 시민단체들이 참여한 2010 유권자희망연대는 2010. 3. 24. 출범하면서 ‘4대강 죽이기 사업으로부터 강의 생태계를 살리고 전 국민 3분의 2가 마시는 식수원을 지키는 역할을 할 수 있는 후보가 당선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라고 선언하고, ‘4대강 사업 중단, 친환경 무상급식 실현 등 시민사회의 요구를 실현하기 위한 전국공동행동 추진’을 활동목표로, ‘4대강 사업 추진 찬성후보, 반대후보의 명단공개 등을 통해 후보자들로 하여금 4대강 사업 반대 공약 채택 촉구’, ‘4월 한 달을 전국 공동실천의 달로 선포하고 4대강 사업의 문제점을 홍보하는 등 전국적 반대 여론전을 진행’ 등을 주요 추진 사업으로 각 설정하였다.  (2010고합486)

 

2008. 5. 6. 한국진보연대, 참여연대 등 1,500 시민사회단체는 미국산 쇠고기 전면 수입 반대 투장을 조직적으로 하기 위해 ‘○○병위험 미국산 쇠고기 전면 수입을 반대하는 국민대책회의(이하 ’대책회의‘라 한다)를 결성하였다. 

대책회의는 2008. 5. 6.부터 매일 저녁 청계광장에서 야간 옥외집회인 촛불집회를 개최하여 오다가 2008. 5. 24.부터는 매일 저녁 촛불집회 후 다음 날 새벽 또는 아침까지 세종로 등 도심 도로점거 시위를 벌이면서 청와대 진출 등을 시도하였다. 

한편, 정부가 2008. 6. 21. 미국산 쇠고기 수입 확대 합의에 관한 추가협상 결과를 발표하고, 2008. 6. 26. 미국산 쇠고기 수입위생조건을 관보에 게재하였음에도 대책회의는 추가협상이 아닌 전면 재협상을 주장하면서 촛불시위를 계속하였다. 

금속노조 서울남부지회 등 최대 800여 명은 2008. 6. 28. 14:50경부터 서울 중구에 있는 서울광장에서, ‘이명박 대통령, 최○○ 회장은 비정규노동자 요구 즉각 수용하라’ 등 플래카드 4개, 민주노동당, 다함께, 안티 이명박 등 깃발을 준비하고, ‘투쟁 1040일 기념 1일 단식투쟁 기자회견’을 개최한 후 태평로 진행방향 전 차로를 점거한 채 청계 광장, 모전교, 서린로터리, 일본대사관, 안국로터리, 동십자로터리 등을 경유하여 한국 일보 앞까지 8보 1배를 하며 행진하였다.  (2010고합463, 464, 465, 466, 467, 468, 469, 470, 527(병합) )

 

2009. 5. 23.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한 것을 계기로 민주당과 민주노동당 등 야당은 각종 논평과 당대표 기자회견 등을 통하여 당시 정국을 민주주의의 위기로 규정하면서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원인과 결부하여 정부와 여당에 대해 대통령 사과와 국정쇄신, 미디어 관련법 등 소위 《mb악법》 철회, 대북 강경정책 폐기 등을 요구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현 정권에 비판적인 모든 세력의 결집을 주장하면서 전교조. 민노총 등 노동단체, 민주노동당.진보신당. 창조한국당. 사회당 등 정당, 참여연대. 녹색연합 등 각종 시민사회단체들의 참여 하에 2008. 10. 25. 출범한 민생민주국민회의 준비위원회는 2009. 5. 28. 참여연대 사무실에서 제27차 운영위원회를 개최하여 《노무현 전 대통령영결식을 범국민적 추모와 대통령 사과, 민주회복, mb악법 철회, 1% 부자정책 중단 등 국민적 지향을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장으로 만들고, 전면적 국정쇄신의 내용과 형식에 대한 시민사회의 광범한 합의를 우선하고, 이를 6.10 대회를 통해 대중적으로 선포. 공유하며, 국정쇄신의 전제인 반민주반민생 mb악법 철회를 국회일정에 맞물려 전개한다.》는 대응책을 논의하였다.  (2010고합95)

 

2008. 5. 6. ****연대, **연대 등 1,500 시민사회단체는 ‘2008. 4. 18. 정부가 미국과 체결한 미국산 쇠고기의 단계적인 수입확대 합의가 졸속 협상일 뿐만 아니라 국민의 건강권을 해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미국산 쇠고기 전면 수입 반대 투쟁을 조직적으로 하기 위해 “광우병위험 미국산 쇠고기 전면 수입을 반대하는 국민▶◇◇◇(이하 ‘▶◇◇◇’라 한다)”를 결성하였다.

이후 ▶◇◇◇는, 2008. 5. 2.부터 ‘***탄핵투쟁연대’, ‘***.net’ 등의 주도로 서울 종로구 ooo에 있는 청계광장 등에서 개최하여 오던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집회를 이어받아 2008. 5. 6. 저녁부터 매일 저녁 청계광장에서 일몰시간 후 옥외집회인 촛불집회를 개최하여 오다가, 2008. 5. 24.부터는 매일 저녁 청계광장 또는 서울광장에서 촛불집회 후 다음날 새벽 또는 아침까지 세종로, 종로, 신문로 등 도심 도로점거 시위를 벌이면서 청와대 진출 등을 시도하였다. (2009노2511)

 

○○○○○○○○(이하 ‘○○○’이라 한다) 회원들이 2009. 1. 20. 서울 용산구 ○○○○○에 있는 ○○○ 빌딩 옥상에서 재개발부지내 세입자 및 상가들의 이주대책을요구하면서 망루를 설치한 후 농성을 하면서 화염병과 벽돌 등을 투척하였는데, 경찰이 위 ○○○ 회원들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화재로 인하여 ○○○ 회원 5명이 사망하게되자, ○○○○ 등 시민사회단체들은 ‘이○○ 정권 퇴진 및 책임자 처벌’ 등을 주장하면서 조직적인 투쟁 전개를 위하여 ‘용산철거민 경찰살인진압 비상대책위원회’를 결성하게 되었고, ‘용산철거민 경찰살인진압 비상대책위원회’는 2009. 1. 21. ○○○○, ○○○ 등 88개 단체가 참여한 가운데 용산범대위로 결성되었다. (2009고합1530)

 

이에 따라 진보연대는 2008.5.4.피고인 및 김○○ 명의로 전국 시민사회단체에“광우병 위험 미국산 쇠고기 전면 수입에 대응하는 국민긴급회의 개최를 제안합니다.”라는 내용의 긴급제안문을 발송한 후,5.6.서울 중구 ○○○○○에 있는 ○○○○○에서 오○○, 한○○ 등을 비롯한 약 80여개 시민사회단체 간부 및 회원이 참석한 가운데 ‘광우병위험 미국쇠고기 전면수입을 반대하는 국민긴급대책회의’(약칭 ‘대책회의’)를 결성하였다.

대책회의는 2008.5.초순경 대책회의에 참여한 단체들의 집행책임자들이 참석한 실무회의에서 대책회의에 운영위원회, 상황실을 두고, 상황실 산하 실무 조직으로 조직팀, 기획팀, 정책팀, 재정팀, 언론홍보팀 등을 설치하는 것으로 조직구성을 하였다. (2009고합929, 89, 2010고합194, 2010고합794(병합))

 

2009. 1. 20. 서울 용산구 ○○○ ○○에 있는 ○○○ 빌딩 옥상에서 ○○○○○○○○(이하 ‘○○○’이라 한다) 회원들이 용산 ○구역 재개발부지 내 세입자 및 상가들의 이주대책을 요구하며 망루를 설치한 후 농성을 하면서 화염병과 벽돌 등을 투척하였는데, 경찰이 위 ○○○ 회원들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화재로 인하여 ○○○ 회원 5 명이 사망하게 되었다. 

위와 같이 ○○○ 회원 5명이 사망한 것을 기화로 ○○○○등 시민사회단체들은 ‘이명박 정권 퇴진 및 책임자 처벌’ 등을 주장하면서 조직적인 투쟁을 전개하기 위하여 ‘용산철거민 경찰 살인진압 비상대책위원회’를 결성하게 되었다.  (2009고정4513)

 

2008. 5. 6. ○○○○○○, ○○○○ 등 1,500여 시민사회단체는 ‘2008. 4. 18. 정부가 미국과 체결한 미국산 쇠고기의 단계적인 수입확대 합의가 졸속 협상일 뿐만 아니라 국민의 건강권을 해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미국산 쇠고기 전면 수입 반대 투쟁을 조작적으로 하기 위해 “광우병위험 미국산 쇠고기 전면 수입을 반대하는 국민대책회의(이하 ‘대책회의’라 한다)”를 결성하였다. 

이후 대책회의는 2008. 5. 2.부터 ‘2mb탄핵투쟁연대’, ‘미친소.net'등 주도로 서울 종로구 ○○동에 있는 ○○광장 등에서 개최하여 오던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집회를 이어받아 2008. 5. 6. 저녁부터 매일 저녁 ○○광장에서 일몰시간 후 옥외집회인 촛불집회를 개최하여 오다가, 2008. 5. 24.부터는 매일 저녁 ○○광장 또는 ○○광장에서 촛불집회 후 다음 날 새벽 또는 아침까지 세종로, 종로, 신문로 등 도심 도로점거 시위를 벌이면서 청와대 진출 등을 시도하였다.  (2009고정1111)

 

6. 위 이메일에 첨부된 7. 19. 2차 범국민대회 기획안(초안)에는 7. 19. 2차 범국민대회 개최와 관련하여 공무원노조, 전교조 이외에 민주당, 민노당, 창조한국당, 진보신당 등 정당과 국민회의, 참여연대, 진보연대, 다함께, 미디어행동 등 사회단체, 민노총 등이 함께 논의를 하고, 언론악법 중단하고 언론자유 보장하라 용산참사 사과하고 책임자를 처벌하라 해고는 살인이다. 쌍용자동차 정상화하라 시국선언 탄압말고 표현의 자유 보장하라 공안탄압 중단하고 민주주의 회복하라와 같이 정치적 주장이 담긴 구호를 집회 당일 제창하기로 하였으며, 전공노 500명, 민공노 2,000명, 전교조 5,000명, 민주장 3,000명, 민노당 1,500명, 창조한국당 300명, 진보신당 500명, 시민 2,000명, 민노총 3,000명 등 각 정당, 노동단체, 사회단체 등이 동원할 인원수를 정하고, 집회 경비 3,000만원에 대하여 야 4당· 시민사회와 전교조·공무원 2조직이 각 절반을 부담하기로 논의하는 등 3개 공무원 노족 정당, 사회단체, 노동단체와 함께 현 정부를 비판하는 내용의 정치적 주장을 위한 제2차 범국민대회에 관하여 사전에 논의한 사실이 기재되었다. (2009고단4584)

 

우선 피고인들이 그들 나름대로 국가를 걱정하는 마음을 담아 국정쇄신을 요구하는 취지로이 사건 행위에 이른 내심에서의 취지 자체는 우리사회에서 수용될 수도 있는 동기와 목적이라고 볼 여지가 있긴 하다. 하지만 피고인들이 이 사건 시국선언에 이르게 된 경위가 애초부터 시국상황에 대한 충분한 논의와 숙고를 거쳐 시국선언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행한 것이라기보다는 2009.5.말경부터 사회 각계각층에서 정부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시국선언의 방식을 통해 몰아닥치자 이러한 비판세력과 연대하고 그에 편승하여 정부에 부담을 가중시키려 한 목적이 주된 동기가 아니었는지 의심이 드는 상황도 다수 존재한다. 즉, 민주 시민사회에서 서명운동은 통상 비조직적이고 자유로운 상황에서 서명의제를 제시받은 시민이 그 의제에 동조할 경우 자신의 자유로운 의사에 기초하여 서명을 하고 이러한 다수인의 합치된 의사표시로서의 서명을 모아 상향적인 의사전달을 통해 정부, 기관, 사회 기타 대상단체에 대하여 의견을 표출하는 운동이라 할 것이고 시민적 정치참여의 유형 중 자발적 접촉활동을 통한 아래로부터의 소통방식이어야 할 것이다.그런데 전교조 각 지부에 하달된 공문이나 제360차 및 제361차 중앙집행위원회 회의록 등에서 드러나는 이 사건 제1차 시국선언의 경과를 보면 시국선언의 계획과 집행 자체가 매우 촉박하게 이루어졌고, 1만 6,000여 명이나 되는 교사들로부터 팩스서명을 단기간에 수집하기에 이른 것으로 보이며(동명이인 여부 등 서명자의 인적사항이 모두 제대로 확인되었는지도 의문이다), 전교조 지부 명의의 공문에 첨부된 시국선언 초안 내용 이외에는 시국선언의 취지나 필요성에 관하여 서명자를 상대로 충분한 전달과 설득 및 동의가 이루어 진 것인지 단정하기 어려운 점 등이 나타나 조직적, 계획적, 상명하달적 기한부 서명모집이 이루어진 상황을 엿볼 수 있고, 제2차 시국선언은 앞에서 인정한 바와 같은 공익에 반하는 집단행위인 제1차 시국선언 참가자에게 제재를 가하려는 정부방침에 반발하는 의도하에 행해진 것이다. 이러한 점을 볼 때 피고인들의 행위에 동기나 목적의 정당성, 행위의 수단이나 방법의 상당성이 갖추어져 있다고 보기 어렵고, 나아가 법익 균형성, 긴급성, 보충성은 모두 결여되어 있다고 판단된다. 결국 이 사건 집단행위가 정당행위라는 피고인들 및 변호인의 위 주장은 받아들이지 아니한다. ( 2009고단606)

 

2008년 미국산 소고기 수입반대 촛불집회 당시 ○○ㆍ○○ㆍ○○ 등 이른바 보수언론을 대표하는 신문들의 보도에 비판적인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인터넷의 커뮤니티를 통해 만든 모임이다. 의 대표이고, 피고 박○○은 시민단체인 《○○》

민주사회의 주권자인 시민들이 언론의 진정한 주인이라는 인식 아래, 회원 상호간의 단결 및 상호 협력을 통해 언론민주화와 민족의 공동체적 삶의 가치구현에 앞장서 사회 발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하는 시민사회단체(약칭, ○○)로서 1984. 12.19. 《○○라는 이름의 재야언론운동 단체(초대 의장 송○○)로 창립되었다. 의 공동대표이며, 피고 나○○은 《○○》 (2009가합57915)

 

(2) 청구인들은 역사학자, 국회의원, 독립운동관련단체·민족운동단체 및 시민사회단체의 구성원들인 자들로서, 정부가 건국60년 기념사업위원회를 설치하여 2008. 8. 15. 행사를 ‘광복절’보다는 ‘건국절’이 더욱 강조되도록 건국60주년 기념행사를 준비하는 것은 한민족의 역사를 단절시키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통성도 부인하는 것으로서 청구인들의 명예권, 행복추구권, 납세자로서의 권리, 재산권, 영토권 등 기본권을 침해하는 동시에 헌법전문, 국민주권원리( 헌법 제1조 제2항 ), 영토조항 및 통일정신( 헌법 제3조 ,  제4조 ), 헌법개정절차 등에 위배된다며 2008. 8. 7. 이 사건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하였다. (2008헌마517)

 

해방기 주권의 담지자로 번역된 자 중 빈도수 면에서 가장 압도적인 우위로 출현하는 것은 ‘인민’이다. 대개 ‘인민’은 좌파의 용어로 간주되지만, 그간 연구사에서 밝혀진 대로, 이미 전근대 시기부터 사용되었던 이념을 초월한 개념이다. ‘인민’은 가장 보편적으로 소통되는 ‘people’의 번역어이다. 통상 ‘인민’으로 번역되는 영어의 ‘people’은 정치적 상황과 입장에 따라, 인민 외에도 민중, 시민, 국민, 평민, 대중으로 번역될 수 있다. 근대 국민국가 이후에는 세계사적으로 인민이 사회나 국가를 구성하는 피지배자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 된다. 우리의 경우도 해방 직후에는 마찬가지의 뜻으로 ‘인민’이 사용되었다. 해방 직후 어떠한 종파든 아우르는 국가(건설 준비) 조직의 명칭이 ‘인민위원회’였던 것은 이러한 점을 반영하는 것이다. 당대에는 우파로 분류되었던 『조선일보』, 『동아일보』에 번역되어 실린, 하지 준장의 포고문에서도 1948년 까지 조선인이 대개 ‘조선인민’으로 번역하는 것은 이러한 점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민주조선』에서도 한치진 역시 링컨의 잠언에서 “people”를 ‘인민’으로 번역한다.

그러나 좌파들의 경우는 ‘인민’을 이러한 포괄적 의미가 아닌 다소 제한된 의미로 사용한다. 임화, 박헌영 등 좌파 이론가들은 ‘인민’을 노동자나 농민, 기타 중간층이나 지식계급 등을 포섭하는 의미로, 피착취 사회계급이라는 사회계급적인 요소가 보다 더 많이 내포된 개념으로 본다. 이들은 인민을 일부 친일파/매판자본가를 제외한 광범위한 통일전선적 주체로서 호명하여 이들을 혁명의 주체로, 나아가 혁명 이후 민주주의 주권자로 세운 것이다.

그렇다면 ‘민중’, ‘시민’ 등의 번역어들은 어떠한 개념이었을까. 임화는 ‘인민’과 비교하여 ‘민중’을 더 포괄적인 개념으로 보고, ‘대중’이라는 말과 같이 주로 피치자를 가리킨다고 한다. 좌파 이론가인 박치우는 ‘시민’을 ‘인민’과 비교하여 정의한다. ‘시민’을 ‘인민’의 이름으로 봉건특권계급의 손아귀로부터 모든 권력을 빼앗아 잡은 시민혁명의 주체 부르주아 계급을 통칭하는 용어로 본다. 이를 볼 때 박치우에게 ‘인민’은 시민보다 더 포괄적인 개념으로 진보적인(혁명적인) 집단이라는 의미가 내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특별히 ‘인민’을 근로대중이라고 호명한다. 박치우의 개념이 임화보다 더 프롤레타리아트에 가까운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계급적인 관점을 견지하려는 자세는 같지만, 좌파 내부에서도 미세한 차이점이 있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박지영, 64-65쪽)

 

⑶ 시민사회론

 

나는 현재 당면한 이러한 질문들에 답변하기 위한 일환으로 16-17세기 근대시대가 시작할 당시 정치신학의 역사를 다룬 하나의 기고문을 제시하고자 한다. 아마도 우리는 16세기와 17세기의 시대적 정황 속에서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 자신의 문제를 재인식하고 근대시대의 시작점에서 정치신학의 완성의 가능성을 파악하게 될 것이다.

‘계약’이라는 단어는 연방제 국가의 사상을 대변하는데, 이 사상은 이른바 깔뱅의 ‘왕정 반대 투쟁자들’에 의해 프랑스에서 발흥한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절대주의에 저항하는 저항권의 확산 속에서 발전하였다. (위르겐 몰트만, 46-47쪽)

 

청교도들이 영국의 ‘옛 세계’에서 아메리카의 ‘새 세계’로 이주한 것에 대해- ‘이집트’의 신정적인 독재로부터 새로운 이스라엘 안에서 ‘자유와 평등’의 언약의 공동체로의 탈출로 해석되는 상황 속에서 계약 사상은 새로운 영국과 미국 혁명의 정치적 역사로 구현되었다. 매사추세츠에 식민지를 건설한 존 윈스럽이 1630년 매사추세츠 베이 컴퍼니에서 행했던 계약에 관한 설교는 초기 정착민들의 정치적 자의식이 시작된 계기로 인정되고 있다. 아메리카는 계약된 국가이다. 자유로운 공동체들의 교회-계약과 정착민들의 사회-계약은 상호간에 서로를 강화하였다. 연방주의적인 본보기는 개별적인 국가들 안에서 1776년의 독립선언과 같이 법령의 제정에 영향을 끼쳤다. 찰스 맥코이는 저명한 연방주의자 제임스 매디슨이 프린스턴에 있는 뉴저지 칼리지의 전임자였던 존 위더스푼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최근에 입증하였다. 공화국의 직무는 연방제적 원칙에 의해 실현되었다. 헌법 대신에 계약을 말하는 것에 대한 토론도 있었다. 이는 우리에게 기본법인 헌법이 하나님 앞에서 남녀 모두 각자의 합의이며, 이러한 헌법에 의거하여 모든 정부가 불법적이고 부당하게 인권을 침해하는 권력 행사에 대항해야 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전제 군주에 대한 저항은 하나님과 민주주의가 위급한 상황에 봉착했을 때 마땅히 행해야 할 순종이다. (위르겐 몰트만, 54-55쪽)

 

부르조아 계몽주의 장르로서 시민담화 역시 작가의 의도, 독자의 욕구, 의사소통 체계로 이루어진 고유한 담화공동체를 가지고 있다. 이 담화공동체는 초기 근대 영국의 대중 정치문화의 등장과 발달의 산물이면서 동시에 그 과정을 주도했던 사회적 주체이기도 하다. 시민담화에 내재되어 있는 문화적 기획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근대적 사회관계가 확립되고 근대적 주체가 형성되면서 서구사회가 겪게 되는 구조적 변혁을 접근하는데 필수적인 몇가지 개념들 ――계몽주의, 부르조아 공공영역, 근대 시민사회 ――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계몽주의는 주로 몇몇 중요한 계몽주의 사상가들의 지적 노력, 철학적 체계, 그리고 그러한 체계 간의 상호관련이라는 측면에서 연구되어왔다. 최근의 문화연구는 계몽주의를 권위 관계의 구조적 재편과정으로 이해하고, 이 과정을 추진했던 다양한 사회적․문화적 실천행위들에 주목하고 있다.

새롭게 이해된 계몽주의의 주요 관심은 대중 정치문화의 담론적 실천행위들이 지난 시대의 정치권력의 권위들 ――즉 국가와 교회, 귀족계급 ――을 어떻게 시민사회의 새로운 권위들로 대치해나가는가 하는 문제이다. 중요한 것은 한 사회 속에서 정치적 상징과 사회적 자기이해의 양식들이 어떤 기제들을 통해 생산되고 유통되는가 하는 것이다. 사회에 흩어져 있는 개인들을 하나의 상상적 공동체(imaginary community)로 결집해주는 일종의 ‘공동의 광장’을 제공했던 시민사회내의 자생적 제도들을 통해서, 그동안 교회와 절대국가의 권위가 그 해석을 독점적으로 장악해왔던 대중의 일상적인 삶의 여러 관심사들이 비로소 대중 스스로의 비판적 논의의 대상이 된다. 근대 시민사회의 등장이 가져온 가장 중요한 변화는 바로 사회적 자기이해의 양식, 즉 대중이 자신이 속한 사회 속의 여러가지 관계와 조건들을 이해하고 받아 들이거나, 혹은 거부하고 저항하는 양식을 시민사회의 자율적 공간 안에서 창출해냈다는 점이다.(여건종, 14-15쪽)

 

17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시민사회의 사적 영역이 가지는 고유한 공적 특질에 대한 부르조아 엘리뜨들의 새로운 자의식은 공공성의 개념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공중의 실제적인 구성원이었던 교육받은 신흥 부르조아 계층은 점차적으로 스스로를 국가 관료체제나 궁정과 대립되는 실체로 규정하면서 공공성을 자신들의 고유한 집단적 속성으로 파악하게 된다. 하버마스에 의하면 “기본적으로 사적이지만 공적 특성을 고유하게 가지고 있는, 상품 교환과 사회적 노동의 영역에서의 여러 관계들을 지배하는 일반적 규칙에 대해 논의하는 공중”(27면)의 공적 권위의 원천은 비판적 이성의 보편적 능력이다. 이러한 능력은 시민사회 내에서 자생적으로 등장했던 다양한 형태의 부르조아 공공영역의 제도들을 통해 계발되고 신장된다. 서구 근대화 이행기에 권위관계의 구조적 재편과정의 가장 강력한 사회적 주체로서 기능했던 부르조아 공공영역의 제도들은 대중출판, 신문, 잡지 등의 정기간행물, 커피하우스, 살롱 등의 사회적 공간, 그리고 독서모임, 철학․과학 등을 논의하는 토론모임, 평신도들의 종교모임, 숙련공조합 등의 자발적 시민결사체, 그리고 소설과 같은 근대적 담화양식을 포함한다(여건종, 18쪽)

 

그러면 시민운동 진영은 왜 '시민들의 사회로서의 시민사회'라는 자신의 독창적인 개념을 수미일관하게 쓰지 않고, 서양의 civil society 개념을 끌어다가 '시민사회'를 어느 때에는 '시민들의 사회'로, 어느 때에는 ' civil society'로 쓰는 곡예를 부리는가? 필시 이것은 자신들의 시민운동을 국가 및 경제의 외부인 시민사회의 시민들이 운동, 따라서 국가로부터도 자유롭고 경제로부터, 즉 계급으로부터 자유로운 운동, 한마디로 '공동선'을 지향하는 초계급적 운동으로 이상화시키기 위함일 것이다. 경실련의 선언이나 김성국의 논의에서 보듯이, 민중운동은 계급적·당파적임에 비해 시민운동은 초계급적·초당파적임을 천명하는데 시민사회 개념의 이러한 이중적 사용은 더할 나위 없이 유용할 것이다. 이러한 왜곡된 용어법은 초계급적 본성을 자임하는 한국 시민운동의 계급적 성격의 뚜렷한 지표라 할 수 있을 것이다.(서관모, 111쪽)

 

인간성과 종교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 속에 있다면 종교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 즉 인간의 공동성과 관계한다. 인간과 인간의 공동성은 상호주관성으로 표현될 수 있다. 앞서 언급했지만 상호주관성으로서의 인간성은 사회적인 관계와 무관하지 않지만 사회적인 관계를 통해 마련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상호주관성으로서의 인간성은 내면성의 운동에서 시작된 개인의 적극적인 활동의 결과이다. 인간성은 내면성의 동경을 통해 도달된 개인적 직관의 결과인 것이다. 개인의 직관은 인간성을 향하고 인간성은 개인을 향한다. 개인의 진정한 개인성은 자기 가운데 침잠하지 않고 다른 개인을 바라보면서 상호주관성을 발견하는 데 있다. 반대로 진정한 상호 주관성은 추상적인 보편성으로서 개인 위에 군림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속에 다른 개인을 독립적으로 인식하는 데 있다. (최신한, 82쪽)

 

간단하게 말하면, ‘시민사회’란 바로 이런 시민들의 상호교섭의 공간이었다. 따라서 시민사회란 중세의 전통, 신분, 종교등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시민들의 존재를 전제한다. 외부의 어떤 강제도 부정하고 시민들의 자율적인 공간이라는 점에서 국가 영역과 대비되어 사용된다. 또한 각각의 개인들이 사사로운 필요와 이해관계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사적 영역이지만, 동시에 모든 사람들의 관심사가 논의되고 스스로 살아갈 질서를 만드는 곳이라는 점에서 공공영역이기도 하였다. 이처럼 시민사회는 개인과 공동체, 사사로움과 공공성이 서로 충돌하고 조절되는 공간으로 이해되었다. 시민사회사상 역시 국가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운 시민들만의 공간이 분리되는 과정에 대한 설명이자, 자유로운 개인들이 어떻게 서로 협력하여 사회의 질서를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의 역사라 할 수 있을 것이다.(이승훈, 45-46쪽)

 

우리는 여기서 현대사회에서 얘기하는 ‘시민’의 모델을 발견하는 것이다. 시민은 자기 자신의 이익을 구하거나 자기 가족의 이익을 구하는 사람이 아니고 자신과 가족의 울타리를 넘어서 공공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토론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런 시민은 결코 약자나 사회 소수자를 무시하지 않고 그들을 배려할 수 있는 사람이다. 참다운 그리스도인은 참 이웃, 참 시민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이러한 시민다움은 그저 되는 것이 아니라, 훈련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원죄를 가진 인간의 본성은 자기 중심적이고, 우리가 몸담고 있는 사회 역시 도덕성을 상실하고 있다. 흔히 교회에서 제자 ‘훈련’을 하듯이 바른 ‘시민’ 덕성도 훈련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 안에서는 제자 훈련을 통해서 선하고 믿음 좋은 그리스도인을 만들 뿐만 아니라 바른 시민을 만들기 위해서도 노력해야만 한다.(정재영, 98-99쪽)

 

그러나 교회는 계속 교회로 있어야 한다. 만약 기독교 공동체가 시민공동체에 흡수된다면 기독교 공동체는 시민공동체의 복지를 위하여 도움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기독교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와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선포한다. 이것은 시민공동체의 과업이 아니다. 시민공동체는 전할 메시지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시민공동체가 전해지는 메시지에 의존한다. 시민공동체는 기도하지 않으며 시민공동체를 위하여 기도하는 다른 사람들에 의존한다. 시민공동체는 인간의 오만을 근본적으로 문제시할 수 없으며 그 방면에서 시민공동체를 위협하는 혼돈에 대한 어떤 궁극적 방어책도 알고 있지 못한다. 시민공동체는 자연법이라는 구멍 많은 우물을 길어낼 수 있을 뿐이며 자체 의의 진정한 기준을 설정할 수 없고 명백히 어딘가 다른 곳에서 꾸어오고 있는 그 자체의 인간관에 의존한다. 중립적이고 이교적인 성격의 국가는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아무것도 모른다. 국가는 자연법에 기초한 다양한 이념들에 관하여 알 뿐이다. 그러나 국가내에 있는 기독교공동체는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알고 있고, 그것에 사람의 주의를 환기한다. 교회는 그분이 교회의 주이시듯 세계의 주이신 것을 믿고 설교한다. 이렇듯 기독교공동체는 세계와 공동관심사를 가지며 시민공동체를 위하여 기도함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국가를 위하여 책임있는 존재가 된다. (이범성, 80-81쪽)

 

만약 ‘정치신학’이라는 표제로서 이제부터는 신학과 정치, 교회와 국가로서만이 주제화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이 모든 책임적 신학의 전조가 되는 것이라면 어떠한 경우에도 슈미트의 정치가 곧 전체로서 부상되거나 혹은 신학과 교회가 국가 정치의 조건과 그 요구하에 놓일 수 없게 된다. 이 말 역시도 차후로는 정치 문제가 그리스도교 신학의 핵심 테마 (십자가 그리스도교적 신인식의 유일한 자료로서 높여지는 십자가 신학의 언어 구성에 상당하는)가 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정치신학은 현대 그리스도교 신학이 자의식적으로 행해지는 분야, 배경 공간과 그 무대를 특징 지운다.

정치신학은 모든 그리스도교신학의 정치적 자의식을 일깨우고자 한다. 이 보편성에서의 이해야말로 순수하며, 그것은 정치적으로 무의식적인 신학은 있으나 근본적으로 비정치적인 신학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확실히 두드러진 비정치적 신학은 언제나 그들의 침묵으로서 특히 보수적인 정치운동과 더불어 견고한 동맹을 맺는다. 그러므로 비정치적 그리고 초월 정치적 중립지대로 은둔하는 교회일수록 실은 더욱 더 정치화된 교회이다. 그들은 그 중립성으로서 그들의 특권과 비논쟁성의 대가를 치룬다. 따라서 비평가들이 우려하는 것처럼 오늘날의 교회들이 과연 ‘정치화’될 수 있느냐가 문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그들이 무의식적으로 실천한 정치적 신학과 혹은 그들 자신에게는 흔히 은폐되나 다른 이들이 그들에게 자행한 정치적 신학으로부터 헤어나와 비판적이고도 자기 비판적인 정치신학으로 이행할 수 있겠느냐가 문제인 것이다. (J 몰트만, 50-51쪽)

 

4, 근대화

 

⑴ 근대화 以前

 

전통적인 한국은 신흥 메이지 국가와 거의 반대였다. 조선왕조가 경제적 책임을 진 것은 주로 필요한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서였으며, 언제나 필요한 수준까지만 거둬들였지 잉여를 축척하여 경제성장에 사용할 의도를 가진 적은 결코 없었다. 조선왕조는 이 점에서 전통적인 중국의 국가기구와 같았으며, 주된 과업이 단기적 운영과 적응인 다른 관료체제와 유사하였다. 조선시대의 제도는 대치되는 세력의 장기적인 균형유지와 꾸준한 자조적 경제유지에 필요한 사소한 조정을 한다는 면에 있어서 융통성이 있으며 유순한 것이었다. 구한국의 국가가 고도로 중앙집권화되었으며 그 사회 자체와의 관계에 있어서 막강한 것이었다고 묘사한 최근의 연구들에도 불구하고, 제임스 팔레스는 국가기관이 약했으며 토지를 소유한 양반계급에 의하여 지배되었음을 보여주었다. 그는 형식적으로 중앙집권적이며 전제적인 제도는 실제적인 仕宦의 권력을 약하게 보이려는 가식에 지나지 않았다라고 설파했다. 사환계층은 국권을 이용하여 특권을 유지했다. 이것은 일본에 의한 병합의 직전까지 진행되었다.

한국에서는 양반과 국가가 손댈 수 있는 잉여자원을 소유하기 위해 서로 경쟁하였는데 국가가 지는 경우가 많았다. 관료체제는 양반의 필요에 맞도록 되어 있었으므로 강력한 국가가 흔히 지니고 있는 자유재량권과 수탕능력을 갖지 못하였다. 대신 전통적인 한국은 강한 계급제도를 갖고 있었다. ‘양반 겸 지주’의 지위는 중앙정부의 간섭을 거부하는 능력에 있어서 거의 자동적으로 ‘실제적인 봉건 귀족’에 버금갔다. 반면 왕실은 비교적 정체된 재산을 놓고 양반계층과 벌이는 쟁탈전에서 패배당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그러한 왕조가 어떻게 현대적 의미의 공공영역과 개인영역의 한계를 이해하고, 전반적인 성장을 위한 재산의 축적을 자극하기 위하여 공공적 영역이 개입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었겠는가. 한편 농업의 쇠퇴와 유사한 정치적 쇠퇴가 일어났으며, 그럴 때면 국가는 기존 자원에서 보다 많은 것을 얻어 내기 위한 새로운 방법을 강구하든가, 징수의 노력을 배가시켰다.

결국 조선왕조는 형식적으로는 중앙에 있어서 강했으나 실제로는 변방에 약하고 희미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지주계급은 국가를 이용하여 자신의 지위를 지속시키고 농민대중을 지배하였다. (부르스 커밍스, 38-39쪽)

 

대체로 한국인 학자들은 일본인들이 자본주의를 한국에 강제 이식시켰으며, 식미치하의 한국인 자본가들은 그들의 잉여를 유흥과 자녀교육에 소비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몇 안되는 소수를 제외하고 이러한 자본가들은 모조리 친일파였다는 것이다. 1960년대에 들어와서도 한국의 정세는 본질적으로 변함이 없어서 기업가는 없고 상품에 대한 투기가 아니면 정부와의 결탁을 통한 모리배가 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중략)

우리는 1945년까지는 물론이고 1960년대 중엽까지도 한국에서 활력 있는 상업 계급을 찾을 수 없었으며, 유교의 교의에 젖은 의식 때문에 자본주의의 추구가 찬미를 받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외래적 자본주의를 강요받은 식민시대 뿐만 아니라 ‘자연적’ 절차대신 강력하고 외래적인 국가기관이 개입한 경험 때문에 더욱 그러하였다. 우리는 이러한 경험이 얼마나 일그러진 것이며 시간적으로 압축된 것인지를 상상할 수 있다. 그리고 제도는 외래의 표피를 이식한 것 같았으며, 사상은 전혀 실체가 없어 보였고, 가정들은 단순하게 제기되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상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한국은 강대하고 현대적인 세력들이 적나라하게 부딪친 거친 싸움터였던 것이다.(부르스 커밍스, 56-57쪽)

 

1945년 당시 한국에서 공산주의는 세계정세에 대한 깊은 조예가 없었으며, 소련당국에 근거를 둔 권위에 집착하지도 않았고, 마르크스와 국제주의에 구속되어 있지도 않았다. 이것은 특수한 한국의 공산주의였다. 그 신봉자들은 한인의 민족적 특성과 전통에 대한 신봉, 이를 보존해야 겠다는 신념, 독특한 해결책이 필요하다는 인식에서 민족주의자나 보수분자들과 분간하기 어려운 정도였다. (부르스 커밍스, 128쪽)

 

1960년 이전의 한국 자본주의의 상황은 극심한 민중소외로 특징지워진다. 그것은 한국 자본주의의 대외의존적이고 매판적인 관료 자본주의적 성격의 확립에서 주어지고 있다.

한국의 독점자본이 8·15와 6·25 후에 농지개혁의 실패와 전쟁의 타격 속에서도 단기간에 급속히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민족적이고 민중적인 국민경제의 자주적이고 내포적인 발전에 따르는 필연의 귀결이다. 그것은 대내적으로는 정치권력과의 결탁을 통하여 재정·금융·외환·원조에서 각종 특혜라는 경제 외적 방식과 국가기구를 매개로 한 국민대중의 수탈에 의해, 그리고 대외적으로는 외국 독점자본과의 매판적 결합으로써만 그 축적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가운데서도 특히 소비재 위주의 원조는 값싼 원자재를 수입에 이존하게 하는 소비재 산업을 급격히 성장시켰다. 이것은 국내에 분업의 기초를 갖는 토착적 중소기업을 몰락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값싼 미국 잉여 농산물의 도입은 농지개혁의 미봉성과 함께 농촌경제를 파탄시켰다. 국민경제의 생산력 수준과 관련 없는 막대한 소비재 공급은 국민경제의 소비구조를 부단히 고도화하게 하고 제3차 산업의 비대화를 가져왔다. 그리하여 미국원조는 한국경제에서 한 쪽에서는 근로자들의 저 노임 수탈에 기초하면서 다른 쪽으로는 중소기업과 농촌의 수탈을 통하여 민족자본 형성의 물질적 기초에 결정적 타격을 가하면서 한국경제를 대외 종속적인 것으로 발전시켜 왔다. (박현채, 206-207쪽)

 

한국이 경제발전에 성공한 요인으로 가장 많이 지적되는 것이 효과적인 국가개입과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 발전국가이다. 발전국가의 속성으로는 국가 자율성과 능력이 상대적으로 높다는 점이 주로 거론된다. 한국에서 이러한 발전국가가 본격적으로 형성․발전된 것은 1960년대 이후이지만 그 사회적 토대는 1950년대에 만들어졌다. 특히 농지개혁과 전쟁은 자율성이 큰 국가를 낳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국가의 상대적 자율성이란 국가가 사회의 지배계급의 의사에 반해 정책을 입안하고 추진할 수 있는 정도를 말한다. 농지개혁과 전쟁은 한국의 전통적 지배계급인 지주를 몰락시켰다. 따라서 남미나 동남아 국가들과 비교할 때 한국의 국가는 지주계급에게 발목 잡혀 어떤 정책을 추진하지 못하는 일은 없게 되었다. 물론 이들의 공백을 신흥자본가가 메웠다. 그러나 그들은 처음부터 국가(정치)에 의존하지 않고는 성장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그들의 부상이 곧 지주 몰락이 가져온 사회세력의 공백을 메워주지는 못했다. 그렇게 되기에는 당시 자본가들은 너무 자생력이 약했다. 그들은 국가나 정치를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기에 의존해야만 클 수 있는 정치적 자본가들이었다. (김일영, 169쪽)

 

⑵ 국가중심 경제발전

 

“요사이 많은 사람들이 박대통령은 경제에는 성공했지만 민주주의에서는 실패했다고들 말한다. 심지어는 박 대통령 아래서 장관을 지냈던 이들조차 공개적으로 중화합공업화와 유신개혁을 별개의 문제처럼 이야기한다. 나는 이렇게 말한다. 중화학공업화가 유신이고 유신이 중화학공업화라는 것이 쓰라린 진실이라고. 하나 없이는 다른 하나도 존재할 수 없다. 한국이 중화학공업화에 성공한 것은 박 대통령이 중화학공업화가 계획한대로 정확하게 시행되도록 국가를 훈련시켰기 때문이다. 유신이 없었다면, 대통령은 그런 식으로 국가를 훈련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사실을 무시하는 것은 비양심적이다. (1996년 10월, 2000년 1월 오원철 인터뷰)(김형아, 194쪽 재인용)

 

이로써 노동복지에 대한 국가의 입장은 명백히 정리되었다. 국가는 우선 노동 복지의 유일한 대책으로 ‘고용창출’에 전력을 기울이는 한편, 여분의 자원을 산업계가 요구하는 숙련 노동력의 대량 공급을 위한 훈련체제와 제도 구축에 돌리기로 했던 것이다. 정책 당국자들이 대량의 잠재적․현재적 실업자들을 흡수하기 위한 고용증대와 고도성장의 성취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는데 가장 적합한 산업은 고용흡수율이 높은 노동집약적 산업을 확대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입장은 이 시기에 정부가 전력을 기울여 추진코자 했던 제2자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자료 등에서 “양적으로 증대되는 노동력이 금후로 계속될 것이 예상되므로 되도록 고용흡수율이 높은 노동집약적 산업을 확대시킨다.” “많은 잠재 실업자가 고용권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표면상 낮은 실업률을 시현하고 있는 바, 계획기간 중 고용에 내포된 잠재실업자를 극소화시켜야 한다”는 등의 언급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고용수요의 창출과 더불어 국가가 관심을 기울였던 문제는 생산체제를 위한 노동력의 대규모 동원 문제였다. 경제개발의 유일무이한 자원이 노동력일 수 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국가의 노동행정은 산업에 요구되는 대규모의 노동력을 양성․투입하는 데 모든 초점이 모아지고 있었다. 노동행정의 초점은 경제개발을 지원하기 위한 인력개발 행정에 맞추어지고 있었고, 이러한 체계 속에 경제성장 성과의 분배를 의미하는 정책영역들은 거의 들어 있지 않았다. 당시 노동청에서 발간한 자료에 따르면, 정부는 516 군사쿠데타와 경제개발 계획의 추진과 더불어 노동행정을 ‘소극적인 노동보호 행정에서 적극적인 인력개발 행정으로’ 변화시켰고, ‘경제개발의 중요전략요소로서’ 종합적인 인력관리 기능을 중시하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볼 때 60년대 정부의 노동 및 복지정책은 경제개발의 투입요소로서 인력개발의 중요성을 크게 강조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박준식, 178-179쪽)

 

60년대의 한국 사회는 급속한 자본주의적 산업화의 와중에서 거대한 사회적 변동이 이제 막 용트림치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 변화는 곧 농촌에 잠재해 있던 거대한 인구층의 도시 노동시장에로의 편입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도시의 노동시장과 사회제도는 끝없이 추락하는 이들 거대한 인구층을 받아들일 아무런 제도적 안전망을 갖고 있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노동자들이 의존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가족적 연결망의 끈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다행히 60년대의 한국 사회는 핵가족화가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견고한 가족적 연결망을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었다. 가족의 공간적 분리에도 불구하고 가족이라는 사회적 연결망은 취약하나마 마지막 유대의 끈을 유지하고 있었고, 이 끈을 통해 상당한 규모의 화폐와 음식물, 서비스가 교환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가족적 교환의 망은 급속한 산업화 과정에서 일거에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를 전환시켜야 했던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산업화의 사회적 전환비용’을 조금이나마 감소시키는데 일정한 기여를 했던 것이다.(박준식, 193쪽)

 

516 이후 제3공화정 시기에는, 이른바 ‘선건설․후통일’의 정책 기조하에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의욕적으로 추진하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대일본 국교정상화와 국군의 베트남 파병 등을 통해 ‘한․미․일 삼각 협조체제’를 강화하게 됨에 따라, 196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부터는 남북관계의 풍향이 크게 달라지게 되었다. 남북한 공히 체제 내부의 결속과 정비작업에 몰두하는 양상을 보이게 되었고, 이에 수반하여 북한의 대남정책은 극도로 경색되는 양상을 보였다. 따라서 이 시기에 있어서는 일반 국민의 통일논의가 다시 엄격히 제약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주요 정책 현안에 국한된 국회 차원의 정책 논의만이 간헐적으로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통일에 대비한 실력배양론’에 대한 국민적 합의기반의 점진적 확산과 더불어 통일문제를 전담할 기구를 정부안에 설치하게 됨으로써 통일에 대비한 실사구시적인 정책 기반을 형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강광식 1, 204쪽)

 

정치적 근대화와 경제적 근대화가 진행된 1960년대 작품 들 중 최인훈의 작품에서 인물들은 정체성의 괴리 또는 상실로 인해 소외를 경험한다. 이들에게 정치적 정체성의 상실은 정신적 망명을 의미할 정도로 소외감은 크게 나타난다. 이청준은 자본주의로 이행해 가는 근대 산업사회에서 조직의 체계에 편입을 하든지 편입하지 못하든지 간에 인간은 조직의 일원으로 소외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아울러 자본주의 체제에 편입되지 못한 전통적 기예가 소외되고 소멸되는 양상도 보여준다. 김승옥 또한 자본주의 체제의 조직 사회에서 소외되는 개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 뿐 아니라 이러한 소외의 양상이 개인들이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그 곳에 빠져 들어가 스스로 고립됨으로써 소외 상황을 즐긴다는 점에서 사회의 건강성을 위협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양윤모,109쪽)

 

⑶ 脫근대(50년대로 복귀)로서의 민주화

 

안병무가 가장 혐오하는 것은 정부가 권력을 독점하고, 거기다 더하여 다른 모든 것을 독점하는 행태다. 언론을 통제하고, 집회 결사의 자유를 통제 또는 박탈하고, 신체까지 구금 구속당하는 경우는 참아내기 어려운 모독이었다. 이 제안은 통일논의까지 정부창구 단일화를 강제하는 시대에 안병무가 내놓은 것이다. 몇 차례가 정부가 바뀌면서 남북관계는 정부마다 방법론에서 시소를 방불케 했다. 이명박 정부부터 불안한 남북관계는 지금 박근혜정부까지도 이어져 변화되기 좀체 쉽지 않고 21년 전 안병무의 이 제안이 제시될 때로 회귀한 듯한 착각이 들 정도이니 안병무의 이 제안은 새삼스럽게 그 의미가 소중해지고 이 요구를 강력히 표명해야 할 시대적 사명을 확인하게 된다.

안병무의 제안은, 통일코리아의 초석이 될 통일헌법은, 첫째 원칙으로 통일이 민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 둘째는 통일헌법의 초석을 놓는, 흔들릴 수 없는 가치판단의 기준은 절대자(신)에게 둬야 한다는 것, 셋째 원칙은 공(公)사상을 적용하는 것, 넷째 원칙은 민의 압력권을 법제화하는 것이다.(임태환, 217쪽)

 

Ⅱ장에서 우리는 1987년도의 대통령 직선제를 통한 형식적 의미의 정치적 민주화가 역설적으로 국가의 자율성, 관료의 중립성을 약화시키는 한 요인으로 작용했음을 살펴보았다. 국가가 재벌에 포획되어 도덕적 해이가 구조화됙 산업의 구조조정과 개혁도 힘들어지고 이것이 급기야 IMF 사태를 낳았다는 점을 밝혔다. 그리고 이러한 사태까지 낳게 된 경제모델로서 발전국가론과 그 이론가들의 주장의 약점들을 비판하였다. 또한 한보사태를 통한 발전국가 연합의 반 사회적 성격과 한국의 국가가 어떻게 재벌에 잡혀 있었는지를, 또 노동법 개정 파동을 통해 개발연대적 발상으로 발전국가 전략을 추구하는 것이 어떻게 노동세력과 국제부문의 저항을 불러일으켜 한계에 부딪혔는지를 살펴보았다. IMF 사태는 결국 이러한 모든 일들이 벌어진 하나의 제도적 틀- 발전국가 모델, 또는 박정희 모델-을 혁신하라는 메시지라는 점도 인식하게 되었다.(윤영관, 123쪽)

 

이제 합리적이고 地高하고 국가이익만을 생각하는 정치지도자나 선의의 독재자의 존재를 전제하고, 그들이 재벌을 다스려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다는 가정 위에 서 있었던 과거의 발전 모델은 더 이상 작동될 수 없다. 1970년대 이후 급속히 성장하던 재벌 중심의 경제 권력은 198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정치권력을 압도하기 시작해 버렸다. 한국형 발전 국가 모델의 창시자 박정희 대통령도 집중과 규모의 경제전략이 후대에 미칠 정치경제적 의미와 여파를 예측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1960년대, 70년대의 박정희 대통령을 그리워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21세기의 한국에 60년대, 70년대의 박정희와 그 모델을 부활시키려 한다면 그것은 대단히 시대착오적이고 퇴행적일 수 밖에 없다. 에 담아야 한다.(윤영관, 218쪽)

 

이러한 집중의 구조와 유착의 관행을 그대로 내버려 두고 일반 국민들에게 도덕심에 호소하여 법을 지키고 상식을 지키라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이다. 결국 개혁의 핵심과제는 각 부문 별로 집중되어 있는 권력구조를 얼마만큼 분산구조로 바꿀 수 있느냐, 그리고 그 분산된 힘의 중심들간에 유착이 아닌 상호견제와 균형의 메카니즘을 얼마만큼 정착시킬 수 있을 것이냐의 문제로 요약된다.

이러한 과제가 성공적으로 달성된다면 국가의 자율성 확보가 가능해지고 이를 통한 정치적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효율적인 작동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동시에 잡을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될 것이다. 오늘날의 세계화된 고도산업시대에 우리는 더 이상 선의의 독재자에게 국부의 창출을 맡길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해졌다. 결국은 “실질적인” 민주화 작업을 통해서 시장 메커니즘이 작동하도록 만들 수 밖에 없는, 즉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에 몰려 있는 것이다.(윤영관, 169-170쪽)

 

4·19 민주혁명에서 주어진 민족 민중운동을 위한 계기는 역사적인 시행착오를 거치면서도 자기를 관철하고 있다. 516에 뒤따르는 10.26이나 6.29 그리고 그후 사태의 진전과정은 우리에게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민족 민중운동의 전개는 더욱 고양되고 있으며, 민족 민중운동에 위협을 느낀 반동적인 보수세력은 보수대연합을 제기하여 민족 민중적 소망을 저버린채 3당합당을 통해 자기들의 지배를 보다 굳건히 하고 영속시키려 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에서 민족 민중운동의 요구는 더욱 거센 현실적 힘으로 되고 있다. 전교조, 전민련, 전대협, 전노협 등 민중조직은 합법성 쟁취를 위한 투쟁에서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으며 이제는 사회적 실체가 된 민중구성을 대표하기에 이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4․19는 역사 속에서 자기를 관철하고 있으며 민족 민중적 삶에 기초한 요구는 시행착오 과정을 거치고 있기는 하나 현실적인 자기실현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박현채, 222-223쪽)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그리고 이명박정부에 접어들어서도 자신과 의견을 달리하는 개인이나 집단은 처 부셔야 할 타도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다면 이는 조속히 불식시켜야한다. 타협은 반동이고 투쟁만이 살길이라는 의식과 함께, 중간에 서 있는 개인과 집단을 백안시하는 태도는 민주정치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사회에 진정 필요한 가치는 무엇인가. 남북관계와 통일문제를 관통하는 보수와 진보의 공통분모는 무엇이며 그 공통분모를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것인가. 시장의 논리와 복지의 확장이 맞닿는 접점은 어디인지도 찾아내야 한다. 언론의 자유와 그에 따른 책임, 정치권력과 언론의 관계는 어떻게 정립되어야하는가를 제시하고 이 모든 것을 합리적인 토론을 통해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 낼 수 있을 때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앞길은 훤히 트일 것이다. 이러한 합리적 토론과 결정과정에 효율적으로 참여하기 위해서 유권자들은 문제의 본질을 정확하게 파악해야하며, 자신의 견해를 표출할 수 있는 채널을 넓혀야한다. 정치가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유권자의 삶과 정치의 연계가 두터워질수록 국민들은 구체적인 제도와 정책결정과정 그리고 정책 사안에 대해 많은 정보를 숙지해야한다. 조세정책과 주택정책, 자녀들의 교육과 관련된 정책, 환경과 소비자 정책 등에 대해 폭넓은 지식을 축적해야한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현대 민주정치를 만끽하기위해서는 감수해야할 일이다. 똑똑하고 깨어있는 국민들만이 권력자들을 감시하고 자신들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 물이 높아야 배가 높아진다는 경구를 언제나 새롭다. 4․19 DNA를 모두의 마음에 복원해야한다.(이정희, 17쪽)

 

◆. 원론적 보편민주주의로 이해한 민주화 논거는 소수파며, 힘이 늘 없었다.

 

보수세력들은 보수이념의 고수와 관련하여 과거 권위주의 시대를 그리워하기도 한다. 한국이 역동적으로 근대화를 추구했던 80년대까지 보수세력은 유신독재•국가보안법•5공화국 등을 통하여 사회선택론의 관점에서 보거나 혹은 일반 정치적 의미에서 보거나 마찬가지로 독재자의 위치를 고수하는 데 성공해 왔다. 그러나 민주화가 급속도로 진전되면서 보수진영은 진보주의로부터 기인하는 도전과 위협을 절감하고 있다. 하지만 이처럼 진보주의로부터 도전이 크다고 해도 가치함축적 차원에서 비자유주의적인 권위주의 체제에 연연해 하는 태도는 정당화되기 어렵다.

오히려 보수주의자들은 민주화의 사회에서, 혹은 절차 민주주의를 통하여 헤게모니를 추구하는 데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박효종, 181쪽)

 

⑷ 유교자본주의론

 

『중국의 종교』에서 베버가 분석한 내용은 몇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중국에서도 도시의 인구 증가와 화폐 경제가 발달하였으나 경제는 생산이 아니라 소비와 관련된 개념으로 인식되었을 뿐 아니라 근대적 자본주의적의 합리적 성격을 지니지 못했고, 둘째 도시와 동업조직이 융성하였으나 지배질서로부터 정치적, 법적 자율성을 확보하지는 못했으며, 셋째 국가관리의 문인화 경향이 이루어지는 동시에 과거제도를 통한 인재 등용과정에서 시험의 내용은 유교적 지배질서의 공고화에 기여하는 내용으로 일관되었고, 넷째로 정통(orthodoxy)의 가치 체계 또는 에드워드 쉴즈(Edward Shils)의 표현으로는 ‘중심’(Center)의 위치에 있었던 유교가 현존 질서의 정당화에 기여하는 동시에 이단(heterodoxy)의 가치체계, 또는 쉴즈의 용어로 ‘주변’(Periphery)에 속하였던 도교도 현실도피적이고 신비주의적인 경향을 드러냄으로써 기존 질서의 혁파하고 혁신을 이룰 수 있는 ‘현세와의 긴장’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앞의 두 가지 특징은 사회구조와 제도적 측면에 대한 분석이라고 할 수 있는 바. 유석춘(1998: 125)은 이러한 특징들이 중국의 국가가 매우 일찍 통일된 사실과 가산적 지배구조의 전형적인 특징인 중앙 집권적 관료제가 서구에 비해 훨씬 강력하게 확립된 사실과 관련이 있다고 지적한다. 서구와 같이 소유가 가능한 봉토가 아니라 녹봉을 받는 관리들이 독립적인 사회경제적 기반을 구축할 수 없도록 예방하는 특성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뒤의 두 가지 특징과 간련해서 유석춘은 “유교에서 발견할 수 없는 것은 바로 개신교에 내포되어 있는 결연하고 윤리적인 합리화에 따라 (인간의) 자연적인 충동을 엄격하게 통제하고 자제하는 긴장이었다”는 베버의 설명으로 마무리하고 있다(유석춘, 1998, 126).

그런데 이 베버의 결론에서 유석춘은 자연적 충동의 억제를 가능케 하는 긴장의 결여 상태에 대해서는 별로 주목하지 않는 편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베버가 아시아 사회와 관련해서 결정적으로 중요하게 보았던 것은 자연적 충동을 오히려 사회질서 속에 융해시켜 제도화하는 데 기여하였던 유교적 가치의 작동 방식이다. 그리고 베버는 유교적 가치의 핵심인 ‘효제'(filial piety)의 윤리가 바로 그러한 자연적 충동의 발현을 억제하지 못하게 만들 분만 아니라 그것이 유교권 아시아 사회를 씨족의 굴레에서 해방시키지 못하고 가족주의의 틀 속에 가둬놓고 말았다 점을 여러 곳에서 반복적으로 강조하며 자신의 논지를 입증시키고자 하였다.(박희, 121-122쪽)

 

그런데 유교 자본주의론과 관련해서 주의 깊게 살펴볼 변화가 나타나고 있는 면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유교 자본주의의 가능성과 관련해서 유교적 사유가 자본축적에 의미 있는 정합관계를 보여주고 있다는 경험적 증거들을 수집하고 기록하는 사례들도 최근에는 많이 발견되고 있다. 보기로 일본을 경제 대국으로 만드는데 일조한 것으로 알려진 시부사와 에이치(澁澤榮一, 2009 )는『논어』(論語)에서 ‘논어·주판 통일이론’이라는 경제 윤리를 추출해서 “한 손에는 건전한 부의 윤리를 강조하는 『논어』를, 그리고 다른 한 손에는 화식(貨殖)의 ‘주판’을 들고 당당하게 경제 활동을 하라’는 메시지를 던진 바 있으며, 이에 대한 기록은 현재 일본 만이 아니라 아시아의 각국으로 전달되고 있다.

사실 일본 경제 부흥의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시부사와 에이치의 주장은 이른바 ‘도덕 경제 합일설’을 제시한 것으로서, 서구에서 애덤 스미스(Adam Smith)가 제시한 『국부론』(The Wealth of Nations, 1776)에서의 공리주의적 시각과 『도덕 감성론』(Moral sentiment, 1759)에서 강조된 ‘공감의 원리’의 통일을 실천적으로 제시한 셈이었다. 그의 생각은 시부사와 켄(渋澤健, 2008)에게로 옮겨졌고, 한국에서 최고로 꼽히는 삼성그룹을 일으킨 고(故) 이병철 회장이 그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국에서 포항제철을 일으킨 고(故)박태준 회장과 현대 그룹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일구어낸 고(故) 정주영 회장에게서도 유교적 가치의 흔적을 찾기는 어렵지 않다(송복 외, 2012). 또한 북경에 동방신천지(東方新天地)를 만든 홍콩 최고의 거부이자 장강실업(長江實業)의 대주주인 광둥성 출신의 리자청(李嘉诚)은 1962년 결혼하기 전에 구입한 집에서 계속 살면서 청빈을 실천하며 인(仁)의 유교적 가치를 기업 경영과 접목시킨 전형으로 꼽히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유교 자본주의론의 문제는 동아시아의 경제 성과에 따라 확연하게 해석이 달라진다는 단점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또한 유교적 가치 이외의 종교에서도 기독교 윤리의 기능적 등가물이 될 수 있는 측면들이 많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기도 한다. 심지어 유교없는 유교 자본주의라는 비판이 제기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렇지만 유교자본주의론의 결정적인 문제는 그것이 서구 중심주의 또는 서구의 잣대를 기준으로 아시아의 상황을 살펴보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비판도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박희, 132-133쪽)

 

-부정적 의미의 유교적 가치

 

국회 내에서의 의원들의 행태는 대단히 조직적인 것이었고 당론에 따른 집단적인 행동이 이루어졌다. 이는 제헌국회와는 현저히 다른 것이었다. 의원 개개인의 선호에 따라 비교적 분산적이고 개별적인 행태를 보였던 제헌국회와는 달리 4대 국회에 와서 의원들은 정책과 당론에 따른 ‘조직화’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여당 의원들은 으레 법안 통과를 무조건적으로 지지하고 야당 의원들은 이를 전면 거부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당은 ‘다수의 횡포’를 지배의 수단으로 생각하였고 야당은 방어의 수단으로서 ‘소수의 폭거’에 의존했다. 그러한 행동들은 종종 휴회와 회기의 정지를 초래했고 급기야 의원들 간의 최소한의 절차적 합의마저 위협하게 되었다. 고수준의 실질적 합의가 저수준의 절차적 합의를 수반함으로써 역으로 격렬한 적나의 정치투쟁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백영철, 268-269쪽)

 

한국전쟁으로 남성들이 사망•실종되고 동원되었던 상황은 많은 ‘어머니 중심’가족을 양산했다. ‘어머니 중심 ’가족은 협의로는 아버지 없이 어머니와 자녀들(혹은 부양가족으로서 부모)로 이루어진 가족이라고 할 수 있고, 광의로는 아버지가 생존해 있지만 가족을 부양하지 않고 어머니가 생계를 책임지는 가족이라고 볼 수 있다.후자는 주로 생계활동이 불가능한 상이군인, 실업자•무직자, 처와 자식을 유기한 남성 등의 가족이 이에 해당된다. 전쟁과 그 여파로 인한 ‘어머니 중심’가족의 증가는 50년대 여성의 삶과 가족구조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어머니 중심’가족은 여성이 가족의 생계를 전담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여성의 경제활동 인구를 증가시켰다. 그동안 많은 여성들이 생계의 일부를 담당하여 왔던 사실은 그리 새로울 것이 없지만, 전쟁을 겪은 후의 경제적 빈곤과 남성 부재의 현실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여성들을 사회로 불러들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전쟁미망인은 대부분 생활 정도가 낮아 생계를 직접 책임지기 위해 직업을 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반 미망인들이 종사했던 직업의 종류와 직업자 수를 조사한 50년대의 한 통계를 보면, 대체로 전체의 70%에 달하는 미망인들이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조사 대상의 미망인 중 30% 정도가 50대 이상이었다는 점을 감안해 본다면 무직자로 조사된 나머지 30%도 대개는 나이가 든 경우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부유한 소수의 미망인과 나이가 많은 미망인을 제외한 대부분의 미망인들은 직업에 종사하며 생계를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김은경, 30-31쪽)

 

셋째, 부계혈통주의를 핵심으로 하는 가부장제는 가족담론을 구성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앞서 설명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가족에 대한 요구, 재래의 부계계승을 핵심으로 하는 가부장적 가족관과 충돌하였다. 재래의 전제적인 가부장권을 부정하고 변화를 요구하는 상황에 직면하여, 가부장제의 위기는 ‘민족’의 위기로 확장되었다. 이에 부계주의를 고수하는 것은 ‘전통 수호’의 차원에서 담론화되었다. 부계주의를 강조하는 담론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가족상을 서구적인 것으로 배척했고, ‘민족 전통’인 부계중심주의는 ‘미풍양속’으로 설명했다. 이를 통해 부계혈연주의는 자기 존립의 근거를 마련했다.

이와 같은 제 요구들은 서로 충돌하고, 혹은 타협하면서 50년대 가족담론을 형성하였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복합적인 과정을 통해 구성된 50년대 국가의 가족론은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50년대 교육과정, 법제도, 가정개량정책에 나타난 가족론을 종합해 볼 때, 50년대 가족담론은 그 구조에서는 핵가족과 직계가족이 복합된 이중구조를 지향했고, 규범으로는 부부화목과 함께 효의 덕목을 중시했다. 하지만 가정은 근대적이고 합리적인 공간으로 개량하고자 했다. 50년대 국가의 가족론은 대가족제도를 ‘봉건적’인 것으로 인식했고, 부부 중심의 핵가족은 더욱 발전된 가족형태로 설명했다.핵가족 모델은 민주주의적 가정상(像)으로 이상화되었다. 그러나 또 한편 여전히 조상숭배와 효를 중시함으로써 부자중심의 직계원리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호주제도는 이러한 이중구조를 법제적으로 뒷받침해 주었다. 호주권을 대폭 약화시킴으로써 부부 중심성을 확보하는 대신, 상징적 권위뿐인 호주를 폐지하지 않음으로써 부계의 ‘가’계승의 관념과 직계가족 모델을 옹호하였다.(김은경, 229쪽)

 

⑸ 북한 공산당은 천도교 종교 심리에 토대하여 만들어졌다.

 

그러니까 북한의 민주주의는 일반성을 띠는 것이 아니라 이제 말한 것과 같이 노동자, 농민, 청년학생, 지식인 이 사람들이 민주주의이지, 지주, 자본가 민주주의가 아니라 이겁니다. 진보적 민주주의도 그렇고 인민민주주의도 그렇고 사회민주주의도 그렇다는 거빈다. 사회주의의 민주주의는 노동계급의 민주주의입니다. 사회민주주의 민주주의의 기본은 노동계급입니다. 노동계급,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는 이런 여기서 계급성을 띤다고 그래요. 북한에서의 민주주의라고 하는 것은 주체의 만민의 민주주의가 아니라 이겁니다. 한국에서의 자유민주주의는 만민의 민주주의가 아닙니까. 다 포함하는. 노동자 농민은 다 포함되지만 지주, 자본가는 제외되는 북한의 민주주의는 그런게 아닙니다. 그 차이가 있다 그것만 이야기합니다. 북의 민주주의는 그렇고, 민주주의는 그렇고.

민주기지라는 것은 무엇인가 민주기지라는 게 북한의 독특한 건데, 8.15 우리가 해방이 8.15 해방될 때 결국은 우리 조선 사람들의 주체적 힘에 의해 이룩되지 못했기 때문에 이렇기 때문에 결국 무엇이냐면, 해방된 사람들이 이렇기 때문에 결국 해방된 남쪽은 미국이 통치를 하고 북쪽은 소련군대가 진주하고 말이죠. 그래서 삼팔선이 분단되지 않습니까. 삼팔선이 분단이 되었기 때문에 북한이라는 당을 북한의 공산당이 김일성이를 위시한 공산당에서 분단된 조건하에서 공산주의 국가의 군대인 소련군대가 점령하고 있지 않습니까? 점령하고 있는 유리한 조건 아니에요. 유리한 조건이기 때문에 결국 전국혁명 남쪽까지 전국에서 그 당시의 민주주의 혁명이지요. 그러니까 민주주의 혁명 다시 말해서 민주주의 공화국, 민주공화국을 창건하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신경완 증언, 249쪽)

 

북한 결집력의 실체는 무엇인가. 결국은 이 북한의 결집력의 실체는 당입니다. 당의 조직력, 노동당의 조직력이죠. 사상이라면 주체사상 아닙니까. 사상과 조직력입니다. 그리고 이제 더 구체적인 것은 나중애 얘기하지만 首領입니다. 이런 걸 실체는 그런데, 단결시키고 집결시키는, 결집시키는 그것은 조직, 당 조직입니다. 당 조직을 통해서 집결되고 결집되는 것입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당이 있고 당원이 결집되고 당 주위에 근로단체가 있지 않습니까. 렇게 인전대가, 당을 원 중심으로. 당의 중심에는 무엇이 있는가 하면 수령이라고 있습니다. 수령. 당의 수령의 주위에 당이 이렇게 있고 당의 주위에 근로단체가 있지 않습니까? 조직적으로?(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신경완 증언, 256-257쪽)

 

 

5. 3.1운동 : 한국현대사에서 근대민족담론을 지향한 계약주의 전통

 

동학과 개신교는 상극에서 시작하여 소통과 경쟁을 넘어 3.1운동에서 연대함으로써 관계가 최고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후 사회적 공통의제를 중심으로 협력 연대한 전통은 잘 계승되지 못하였다. 오늘날 한국사회의 여러 종단은 사회적 의제를 중심으로 소통하면서 시공간 속의 종단으로 공존을 모색하기보다는, 시공간을 초월한 종교내적 논리로 무장하여 상호 타자화함으로써 적대적 병립의 상황에 놓여 있다고 보는 것이 현실에 가까운 진단일 것이다. (이영호, 29쪽)

 

3 • 1운동 당시 기독교지도자들은 모두 이 실력양성론자였다. 앞에서 살펴보았지만 기독교가 천도교와 연합하여 독립운동 하기를 주저하였는데, 그 이유는 천도교가 과격한 무력시위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우선은 온 국민이 신앙을 가지게 되고, 그 신앙의 발현으로서 각자 현실 속에서 자신의 실력을 키우면 독립이 올 수 있다는 이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참으로 소박한 생각이라 아니할 수 없다. 당시 사회주의자들이 노동조합을 조직하고, 파업과 소작쟁의를 통하여 일제를 굴복시킨다는 투쟁노선을 가진 것과 비교한다면 참으로 온건한 것이었다. 이런 이상을 가진 사람들이 아이디얼리스트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에 감동을 받아 독립을 ‘청원’한 것이다. 80년대 이후의 표현을 빌린다면 “민중민주주의”가 아니라 “부르주아민족주의”라고 할 수 있겠다.(장동민, 205쪽)

 

'교정쌍전'의 국가건설의 주체는 민이다. 동학이 보는 민은 성찰적 자각을 통하여 새로이 탄생한 영적 주체다. 새로운 민은 천주를 모신 영적 존재이고, 존엄하고, 편응한 인격이며, 역사를 창조하고 사회를 형성하는 적극적 주체다. 누구나 이러한 인격체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새로운 국가형성의 정치주체라는 근대적 관념이 싹트게 된다. 의암은 이러한 동학적 인간론에 입각하여 서구 계몽주의적 문명을 교육을 통하여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언론을 통하여 확장하고자 하였다. '만세보'는 서구의 근대적 국가론을 소개하기도 하고 위생관념을 계몽하기도 하였다. 의암은 재정적 어려움에 처한 중고등학교에 적지 않은 후원을 하고 보성학원과 동덕학원의 경우에는 직접 맡아서 경영하면서 독립의식을 함양하고 근대적 계몽을 촉진하였다. (오문환, 62-63쪽)

 

그러나 1900년대에 들어와 일제가 권력을 잡고 근대 서양문물이 들어오면서 포교의 자유가 보장되게 되었다. 천도교로 개명하고 교세도 점차로 늘어나 1919년 당시 손병희는 3백만을 헤아린다고 하였다. 기성종교로서 체계를 잡아가기 시작하였다. 양한묵, 최린 등 현대 문물을 이해하는 지식인이 속속 귀의하였다. 교리체계를 근대적인 언어로 집대성하였고, 이에 맞추어 조직도 재정비되었다. 이제 천도교는 백성의 오해와 관헌의 핍박을 받는 소규모 집단이 아니라 식민지 조선을 대표하는 민족종교로서 자리매김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손병희는 천도교에 대한 자신감을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다. “천도교는 문호적(門戶的) 종교가 아니요 개방적 종교이니라. 천도교는 계급적 종교가 아니요 평등적 종교이며, 구역적 종교가 아니요 세계적 종교 이며, 편파적 종교가 아니요 광박적(廣博的) 종교이며, 인위적 종교가 아니요 천연적 종교로서, 지금에도 듣지 못하고 옛적에도 듣지 못하였으며, 지금에도 비할 수 없고 옛적에도 비할 수 없는 새로운 종교이니라.”

분파에서 기성교회를 나아갈 때 빼어 놓을 수 없는 사상이 바로 “정교분리”이다. 앞서 3대 교주 의암 손병희가 교정쌍전론(敎政雙全論)을 주창한 것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동학의 전통이 종교와 정치활동의 일치라는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수운이나 해월이 생각하던 일치와 의암이 생각한 일치 간에 차이가 있다. 수운과 해월은 종교와 정치 사이에 분화(分化)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고, 의암은 이를 분화시켰고 이를 다시 통합한다는 것이었다. 구분(distinction)은 짓되 분리(separation)시키면 안 된다는 말이다. 해월이 동학농민전쟁을 이끌 때는 교단 차원에서 운동을 이끈 것이었지만, 의암의 3·1운동의 경우는 교단의 참여가 아니라 개인적인 자격으로 참여한 것이다. 3 • 1운동 시 중앙집권의 전통을 갖고 있던 천도교의 경우 교주의 서명에 의하여 천도교인들이 참여하기는 하겠으나 교단 차원에서 조직과 재정지원을 한 것은 아니었다. 권동진의 증언은 중요하다.

“천도교 신도는 교주를 믿고 있기 때문에 교주가 (독립을) 계획하고 있으므로” 이에 찬성할 줄은 알고 있었으나 이를 선동할 계획은 없었다고 한다. 손병희는 3 ․ 1운동이 일어나기 하루 전날 2월 28일에 천도교 교주로서의 모든 전권을 박인호에게 위임하는 “유시문”(諭示文)을 발표하였다. 자신은 “세계종족평등의 대기운(大機運) 하에서 아(我) 동양동족의 공동향복(共同享福)과 평화를 위하여”, “정치방면”에 일시 진참(進參)하게 되었기 때문에, 박인호가 다른 간부들과 함께 “교무”(敎務)에 전념하도록 하려 한다는 것이다. “정치”와 “교무”를 분명히 구분한다. 이렇게 하는 목적은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일반교인이 교주가 참여한 것을 보고 이 일에 과격하게 뛰어들까를 염려하여 교단과 개인적 참여 사이에 일정한 선을 긋기 위함이요, 다른 하나는 일제가 천도교 자체를 핍박할까 두려워함이었다.(장동민, 198-200쪽)

 

의암은 앞장서서 민을 조직적으로 동원하였고, 자금을 지원하였고, 기독교계와 불교계 지도자들을 규합하는 중심적 역할을 하였다. 당시 일제에 의하여 철저한 감시를 받고 있었던 의암은 여암 최린을 통하여 개신교 인사들과 협조하였으며, 천도교 조직을 통하여 전국적 운동을 할 수 있는 인원동원과 자금동원을 할 수 있었다. 최남선이 작성한 독립선언서는 오세창의 총책임하에 천도교 직영 출판사인 보성사에서 인쇄·배포키로 하여 천도교와 기독교에서 지방별로 책임자를 두어 전국에 배포하였으며 만세시위는 천도교와 기독교 지도자가 앞장서서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3.1운동은 2백만명 이상이 참여하는 민족적 거사로 발전하였다.

(중략)

동학의 '동귀일리'와 '동귀일체'의 사상은 천도교가 자주적인 보편주의로 나아갈 수 있는 종교철학적 근본원리로 작용하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천도교는 민족주의적 성격보다는 인류보편주의적 성격이 강하다고 하겠다. 단지 민족자체가 존망의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세계적 보편주의에 호소하면서 민족 독립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민족주의적 성격을 갖는다. 민족독립이란 특수가치의 선언이 아니라 인류의 보편가치를 실현하는 운동이 3.1운동이라는 주장은 강한 정치철학적 호소력을 가졌다. 이러한 주장은 해월이 조선왕조에 대하여 동학이야말로 정통 도학의 적통인 '正學'이라는 주장과 맥을 같이 한다고 하겠다.

천도라고 하는 보편진리는 동서가 따로 없다고 하는 수운의 인식에서 보자면 일부 논자들의 주장처럼 의암이 일본에서 서구 또는 일본의 근대성의 보편성을 인정하여 독립운동의 자기정당화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동학에 있었던 자주적인 보편성의 철학에 의거하여 독립운동의 이념으로 삼았다고 할 수 있다. (오문환, 78-79쪽)

 

 

 

1. 붕당

 

⑴ 정치집단으로서의 붕당

 

解放 이후 朝鮮時期 연구는 양적 질적으로 괄목할만한 발전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政治史 연구는 상대적으로 뒤쳐져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로 인해 社會經濟史나 思想史와 같은 인접 분야의 연구가 보다 심화되는 것을 가로막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심지어는 우리의 전근대사회인 조선사회에도 정치사가 있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이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전근대 연구자들이 다양하고 복잡한 정치 현상을 자기 취향에 따라서 어느 한 요소만 부각시켜서 단순화해 버린 때문이라는 선배 연구자의 지적은 경청할만하다.

예를 들면 日帝 植民統를 지원한 연구자들은 조선에는 私的인 이해관계를 위해 싸운 黨爭史는 있지만 公的社會統合이나 進步 문제를 놓고 싸운 政治史는 없다고 단언하였는데, 이러한 植民史觀의 잔재 내지 선입관으로부터 오늘날의 연구자들 역시 자유롭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어쩌면 우리는 아직도 조선후기의 정치적 대립․갈등에 대하여 그 구체적 내용을 정면으로 맞대응할 자신감을 갖고 있지 못한지도 모른다. 당시의 정치적 대립에는 學緣․地緣․血緣과 같은 전근대적 요소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여 모든 정치적 갈등이 무의미하다고 규정하게 되면 결국 黨派性論에 빠져드는 것을 피할 수 없게 된다. 학연․지연․혈연적 요소는 형태를 바꾸어 가면서 현대 정치에서도 위력을 떨치고 있다. 그렇다고 모든 정치가와 정치 행위를 부정하고 매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로 인해 빚어진 정치적 허무주의와 냉소주의가 현실 정치에서 많은 폐단을 낳아서 민주주의의 발전에 부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일상적으로 보고 있다.

전근대 정치적 갈등에서 학연․지연․혈연을 벗어날 수 없었다면 그렇게 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도 당시 정치 현실의 문제점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그것을 타파하려는 흐름 또한 분명히 존재하였다. 단지 연구자들의 한계에 의해 그것이 제대로 부각되지 못하였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김용흠, 75-76쪽)

 

복수 종파의 정치 참여가 당연히 붕당을 낳은 것은 아니고 거기에는 몇 가지 매개 변수가 개제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는 데 그 중요한 것으로 조선의 정부 조직상에 있었던 변화가 있다. 즉 붕당의 출현은 이조전랑에게 삼사에 관한 인사권을 주어 의정부에 대항할 수 있도록 한 제도상의 개혁과 결부되어 있었다. 그러한 특정한 제도개혁은 그러나 조선 정부 조직이 일반적으로 지니고 있는 이율배반을 심화시키는 역할을 한 것에 불과하였다. 조선의 정부 조직 원리는 한편으로는 왕의 권한을 절대적으로 만들면서 또 한편으로는 그 실제 행사를 비교적 방대한 관료 집단에 위임시킴으로써 왕의 실질적 권력은 이를 심하게 제약하는 이율배반적인 것이었던 것이다. 조선의 정부 조직은 비단 왕의 실권만이 약한 것이 아니라 어떤 관직도 중추적인 실권을 쥐지 못하는, 견제가 균형보다 강조된 정부조직이었다. 조선 붕당원들이 자기들끼리 그렇게 소란스럽게 다툴 수 있었다는 것은 그들이 그 앞에서 근신해야 할 막강한 실권자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또한 그들 자신이 다툼에 대한 최종 심판을 내릴 힘을 가지지 못했음도 동시에 의미한다. 그 힘, 즉 조선 정부를 대표하는 최종적인 권한은 왕으로부터 그들에게 위임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실제적인 권력은 약하나 원칙적인 권한은 절대적이었던 조선의 왕은 조선의 붕당적 정치활동의 빠질 수 없는 구성요소였던 것이다. (조혜인, 224-225쪽)

 

이 땅의 정당은 끊임없는 이성적 대화를 통해 두서없이 분출하는 각계각층의 주의주장을 수렴하고 국가정치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공론과 정론의 산실이 아니다. 게다가 각 계층과 부문에 하부조직을 전략적으로 짜가면서 국민의 일상적인 정치 참여를 장려하고 거기서 우러나오는 민의를 지도부로 연결시켜 정책과 전략을 구상하는 대중조직체도 아니다. 이렇게 각종 시민운동과 차단된 채 밀실에서 끼리 끼리 수근대며 싸우느라 분주한 한국의 정당이 정권을 창출하고 유지하는 정치투쟁의 주체가 아님은 더더욱 분명하다. 즉, 여론형성과 정치참여 그리고 정권 창출이라는 이념형 대중정당의 세 가지 기능 중 어느 한 가지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정당이다.

우선 이 땅의 여당은 정치투쟁과 동원을 통해 권력을 창출한 자생적 결사체가 아니다. 그보다는 이미 내정된 권력자가 단순히 정당정치의 요식을 갖추고자 가건물처럼 서두르며 쌓아놓은 붕당이다. 그렇기에 국가의 거대한 억압구조가 잠시나마 그 추상같은 권력을 움츠리며 개혁과 개방의 함성에 굴복하는 듯한 정치의 해빙기에 가장 먼저 사라져 버리는 것이 이땅의 정당 아닌 정당이다. 시민사회에 침투하여 갈등을 적극적으로 조직하기는 커녕 도리어 국민에게 침묵을 강요하고 여론을 조작하며 독재를 연장하던 억압정치의 하수인 역할이 민심을 붕당으로부터 이반시켜 놓은 것이다. 국민의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간 이승만의 자유당과 박정희의 공화당 그리고 전두환의 민정당이 이 악순환의 끊기지 않은 고리를 웅변하고 있다. (김병국, 186-187쪽)

 

우리가 ‘사람 중심’의 붕당으로부터 政爭중심의 공당으로 전환하여야 한다는 것은 그와 같은 검은 속심을 사전에 방지하자는 데 목적이 있다.

붕당은 ‘사람’과 ‘계보’와 ‘이해관계’의 영합에서 이루어지지만, 공당은 ‘철학’과 ‘이념’, ‘정책’이 주요, 그 다음이 ‘사람의 실력’으로 이루어진다.

붕당은 그 문이 편협하고 배타적인데 대하여, 공당은 개방적이요 보편적인데서 구별되기도 한다.

또한, 붕당은 대개 감정적이요, 비타협적이며 파괴적이나, 공당은 이성적이고, 협조적이고 건설적이다.

붕당은 그 신진대사가 봉건적이고 계보적인데 비하여, 공당은 그것이 진취적이며 능력 본위이며, 붕당은 그 운영이 비밀적인데 반하여 공당은 공개적이며 활달한 것이다.

시로 공당과 붕당은 이같이 판연한데, 우리는 어찌하여 붕당만을 집권하게 하였던 것일까. (박정희, 259쪽)

 

⑵ 유교(샤머니즘)의 산물인 붕당과 서구 문명 산물인 사회계약 기반 시민사회

 

사실 붕당의 뿌리는 조선 사림의 전통에 있었는데 사림은 바로 종파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전통이었다. 사림은 조선 왕조가 수립될 당시 조선 사회의 건국에 참여한 주자학자들과 결별하고 '들'로 나가 거기에 머물면서 후진 양성에 전념한 주자학자들 및 그들을 따르게 된 사람들의 전통이다. 이 전통은 조선체제의 주역이 된 사람들을 백안시하면서 그들과의 타협을 거부하는 자세를 핵으로 삼는 전통이었다. 이 전통을 따르는 사람들은 이렇듯 체제로부터 탈퇴하여 자신들의 순수성을 지키려고 한다는 점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의 일반 사람들을 자기들의 길로 개종시키려는 사명감을 지니는 소수의 교도 집단이었다는 점에서 종파의 정의를 만족시켜 준다. 사림을 유교적 종파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베버가 주로 다루고 있는 기독교적 종파와 이렇듯 전혀 같은 방위의 지향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놓여져 있는 좌표는 조금 달랐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기독교와 달리 유교는 원래 정-교 합일적인 전통이었기 때문이다. (조혜인, 220-221쪽)

 

 

‘종교권력의 진공상태’가 조성되면서, 밀려났던 자유주의자들이 다시 교권에 접근했다. 1939년과 1940년에 개교한 두 개의 장로회신학교들은 모두 자유주의자들의 주도하에 세워진 것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일제히 친일로 전향한 수양동우회․흥업구락부 사건 관련자들이 가세했다. 따라서 도식화해서 말하자면, 극소수의 비타협적인 민족주의 집단을 제외한 종교적 집단들이 교권세력이자 적극적 친일파가 되고, 보수주의적인 다수집단은 소극적 친일파 혹은 소극적 반일파가 되며, 소수파인 극단적 보수주의 집단은 적극적 반일파가 되는-착종적이고 기형적인 지형이 형성되었다. 종교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강조는 일제에의 자발적인 협조로, ‘조선적 기독교’의 수립은 ‘동양적 기독교’를 거쳐 ‘일본적 기독교’로 변질되었다. 불구적인 신학적 자유주의를 매개로 한 종교적 진보성과 정치적 어용성의 결합, 이것이 일제 말기 장로교의 총체적 어용화의 저변에 자리잡은 이데올로기 구조의 특징이었다. (강인철, 143쪽)

 

개신교교회들은 정경옥․최병헌 등 일부 감리교 신학자에게서 예외적인 사례가 발견되기도 했지만, 다른 전통종교들에 대해 부정적 태도를 취했고, 따라서 전통문화와 긴밀히 결합되어 있던 전통종교들에 대해서도 부정적 태도를 고수했다. 초기의 개신교 교회의 ‘총회회의록’을 살펴보면, 거의 매회 마다 타종교나 전통문화에 대한 접근을 차단하는 조치들이 취해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같은 상황은 근본주의 신앙에 의해 조장된, 自敎派에만 구원이 있다는 지적 절대주의의 태도에 의해 강화되었음이 분명하다. 3.1운동과 신간회운동 등에서 개신교와 타종교(천도교와 불교) 인사들 간에 부분적인 교류와 협력의 사례가 발견되기도 했지만, 이는 교회의 극히 일부분에 국한된 현상이었을 뿐 아니라, ‘교리적인 개방성’의 발로였던 것은 더더욱 아니었던 것이다. 그나마 1930년대 이후에는 어떠한 교류나 협조의 사례도 발견되지 않는다.

우리는 한국개신교 교회가 초기부터 전통문화 및 그 일부를 이루고 있던 전통종교들에 대해 배제적인 태도를 분명히 했던 데서도 선교사들의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다. 무엇보다 선교사들의 서구우월주의에 배어 있는 문화제국주의적 태도, 그리고 그들의 근본주의적 신앙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는 지적 절대주의는 한국의 개신교 신자들이 전통 문화 및 전통종교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갖도록 유도한 가장 강력한 요인들이었을 것이다.(강인철, 146쪽)

 

근본주의가 탈 정치적․탈 사회적 태도를 강화하는 역할을 수행했다는 점에서, 직접적인 형태는 아닐지라도 근본주의적 교리와 지배이데올로기간의 친화성은 분명하다. 그리고 근본주의적 신앙을 내면화한 한국인 신자들이 종말론적인 신앙을 통해 국권을 상실한 분노를 종교적으로 분출했을 때, 근본주의의 정치사회적 역할의 모호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한편 한국에서 자유주의는 다른 사회에서와 마찬가지로 정치적․사회적 참여를 강화하는 역할을 주로 수행했다. 이 신학 및 신앙형태는 기독교가 상황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면에서 사회참여를 정당화할 잠재력을 근본주의보다 훨씬 많이 갖고 있다. 실제로 한국의 개신교 신자들 가운데 활발하게 민족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은 대부분 이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일제 말엽 자유주의자들이 이 신앙에 근거하여 일지지배에 야합했을 때 자유주의의 정치사회적 역할의 모호성이 잘 드러났다. 특히 이들의 ‘종교적 민족주이’가 ‘정치적 민족주의’와 거꾸로 결합했다는 점에서 정치사회적 역할의 모호성은 극적으로 강화된다. (중략)

또, 이와 관련하여 한국에서 출신지역과 계층적 성격에 따라 수용한 신앙형태가 상이하게 나타났다는 사실을 강조해둘 필요가 있다. 대체로 민중은 근본주의적 신앙형태를 수용한 반면, 유산층과 지식인층은 자유주의적 신앙형태를 수용하는 경향을 보였다. (강인철, 130-131쪽)

 

중요한 점은 개신교는 19세기 이래 한국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종교들(천주교․동학․개신교) 가운데 지식인층과 결합하는 데 성공한 유일한 종교였다는 사실이다. 나아가 개신교 교회는 자체의 교육기관들을 통해 수많은 지식인들을 배출해 냈다. 한국개신교 교회는 일제시대에 한국전체 중등교육의 20-40%를 담당했다. 또 이 학교들의 졸업생은 대부분 개신교 신자였다. 1922년에 개신교계 10개 중등학교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이들 학교의 재학생 가운데 비기독교인은 9.3%에 불과했다. 또 1931년에 북장로교 선교지역의 8개 중등학교의 졸업생 2,6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 가운데 18%가 개신교계 학교의 교사였고, 11%가 교회의 유급직원이었다. 같은 해에 4개 전문학교(숭실․연희․이화․세브란스)를 졸업한 사람은 4천명 이상이었다. 이들과 성직자 집단, 그리고 선교사 집단이 한국개신교의 방대한 지도자층을 구성하고 있었다. (강인철, 132쪽)

 

⑶ 붕당정치와 공론 파괴에 기반한 비극

 

먼저, 조선조 초기에는 이른바 사족의 신분으로 개별적으로 왕정에 참여하는 '왕신' 형태로 지배연합에 가담하고 있었던 만큼, 그들의 성향은 대체로 권력 지향적 양상을 보여주게 마련이었다. 따라서 왕정체제 역시 이러한 성향을 반영하여 함유교적 왕정체제에서 일탈되는 사례를 자주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 시기의 특징적인 지배연합 양상은 대체로 '군왕·왕신(공신)·왕신(척신)'의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다.

다음으로, 훈척세력의 발호가 극심해지게 된 성종대에는 이들의 불법·비리를 비판하는 대항세력으로서 사림이 이념집단으로 결속되기 시작하여 그들을 대표하는 '사신'의 형태로 왕정에 참여하게 됐으며, 그리고 4대 사화의 연속된 박해를 받는 과정에서는 정치세력으로 성장, 왕정에 참여하고 있는 '사신'과 긴밀히 제휴하여 급기야는 왕정 운영을 주도하는 지배적인 정치세력으로 부상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조선조 왕정체제가 함유교적 왕정체제로 그 체질을 조정하는 과정이었으며, 이에 따라 지배구조도 유교화(도덕화)되는 양상을 보여주었다. 이 시기의 지배연합 형태는 대체로 ‘군왕·왕신(공신과 척신)·사신’의 복합적 양상을 보여주었다.

세번째로, 선조대 이후에는 사림세력이 사회·정치적 헤게모니를 장악하게 됨에 따라서 왕정 운영이 그들의 주도로 전개되게 되었지만, 현실문제에 대처하는 구체적인 입장의 차이에 따라 그들 내부에 분화양상이 제기되어 급기야는 정치적 이해관계나 사문관계를 중심으로 다기한 분파 양상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분파별로 각기 붕당을 형성, 자파의 종장을 구심점으로 결속관계를 강화하는 한편으로 중앙에 진출한 '사신'을 매개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함으로 상호 비판·견제의 경합 양상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붕당정치는 호란 이후의 북벌정책과 관련하여 산림의 거유가 직접 출사하게 되면서부터 국면 전환을 보여주게 되었다. 이들의 직접적인 왕정 참여는 군왕에게는 물론 경합관계에 있는 다른 붕당에게도 심각한 부담을 주게 되어 급기야는 붕당정치 전체가 경직화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됐기 때문이다. 숙종에 의한 환국정치나 영·정조에 의한 탕평책은 이러한 사정을 배경으로 제기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조직들은 당초부터 붕당 타파의 기본적 지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종국적으로는 다원적 종파의 존재를 불가능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 시기의 특징적인 지배연합 형태는 사림·산림·산림·사신이 상호 밀접한 제휴관계를 유지하는 다원적 붕당의 존재가 전제된 말하자면 '군왕·사신·사신'이었다.

끝으로, 붕당정치를 뒷받침하는 제도적 기제가 사실상 인멸하게 된 정조대 말기부터는 모든 지배권이 군왕의 신임을 독점하는 특정한 권신에게 집중되어 세도정치를 초래하였다. 이러한 세도는 군왕에 의한 개별적 견제가 실효성을 나타내고 있는 한에서 그 폐해가 적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회수불능의 권귀적 속성에 따라 함유교적 성향을 완전히 벗어나게 마련이었다. 그래서 이후 조선조 왕정체제는 60여년간 척족 세도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유교적 왕정체제로서의 기본적 특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강광식, 132-133쪽)

 

그러나 붕당의 현실을 전제로 한 이러한 사고가 등장했던 반면, 붕당이 대립하는 현실에서는 '공론'형성이 매우 어렵다는 인식도 심화됐다. 예를 들면 이이를 스승으로 섬겼던 이귀는 돌아가신 스승 이이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무망을 고발하면서, 이이의 언행과 의도, 그리고 동인과 서인이 대립하게 된 경위를 밝힌 장문의 상소를 올렸다. 거기에는 "돌아가신 스승 이이는 평생 붕당을 만들지 않고, 오직 사류의 조제 보합에 힘을 다했"고, 초연히 홀로 서서 동인과 서인의 당파에 물들지 않은 사람은 오직 이이뿐이었다"고 누누이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귀는 동인과 서인의 설이 나온 이후 "서인"으로 지목된 대상이 네번 바뀌었다고 했다. 첫번째는 심의겸의 동료였고, 두번째는 서인을 도우려 했던 자였다. 세번째는 동인도 서인도 아니고 중립을 지켜 치우치지 않는 자, 즉 이이와 같은 사람들이 여기에 포함됐다. 네번째로 이이가 사망한 이후였던 당시에는 "사림으로 이이와 성혼을 높일 줄 아는자"또한 서인으로 불리고 있음을 지적했다. (야마다 에이코, 338쪽)

 

사림 세력의 분열 조짐은 이황과 조식의 학통을 이은 영남학파와 이이와 성혼의 학통을 이은 기호학파간에 나타났다. 1572년 노련한 정치인 이준경은 죽기 직전 조정에 붕당이 일어날 것을 경고했다. 그리고 그 예언은 적중했다. 1575년(선조 8) 이조전랑직을 둘러싼 김효원과 심의겸의 마찰을 계기로 완전히 당을 달리하는 분당이 이루어진 것이다. 사건의 전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572년 이황과 조식에게 학문을 배운 영남학파의 학자 오건은 자신의 후임으로 김효원을 추천했다. 그런데 명종비 인순왕후의 아우였던 외척 심의겸은 오건의 추천을 거부했다. 심의겸은 윤원형의 세도가 하늘을 찌르던 시절 윤원형의 집을 방문한 김효원을 기억하고 그를 권신의 집에 드나드는 소인배로 인식했던 것이다. 그러나 김효원은 심의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574년 이조정랑에 임명되었다. 이조전랑은 조선시대 관리들의 인사권을 담당하던 이조의 정랑과 좌랑을 통칭하는데, 직급은 낮았지만 관리들의 인사문제를 결정하여 청요직 중에서도 으뜸으로 치는 관직이었다. 특히 전랑직은 자신의 후임을 직접 추천하는 자천권(自薦權)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상당한 권한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김효원의 후임자로 심의겸의 아우인 심충겸이 거론되면서 상황은 역전되었다. 김효원은 심의겸이 인순왕후의 아우인 점을 들어 이조전랑과 같은 청요직을 외척에게는 절대 맡길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고, 이것이 발단이 되어 당론이 나뉘게 되었다. 심의겸을 지지하는 세력은 심의겸이 외척이긴 하지만 명종 후반 이량(李樑)이 정국을 주도하면서 사림파를 탄압할 때 이를 적극적으로 저지한 점을 들어 심의겸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이었다. 이들은 주로 서울과 경기지역에 기반을 둔 기호학파의 학자들이었다. 김효원을 지지하는 세력은 이제 본격적인 사림정치가 구현된 마당에 심의겸과 같은 외척의 등용은 역사를 후퇴시키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김효원을 지지하는 세력의 중추는 이황과 조식의 학문을 이은 영남학파들이었다. 당시 김효원의 집이 서울의 동쪽인 건천동(지금의 동대문역사문화공원 근처)에 있었고, 심의겸의 집이 서울의 서쪽인 정릉(지금의 덕수궁 일대정동)에 있다 하여 동인과 서인으로 부르게 되었다. 최근까지도 정치인의 거주지를 따라, 김대중 대통령의 사람들을 ‘동교동계’, 김영삼 대통령의 사람들을 ‘상도동계’라고 부른 것과도 흡사하다.(신병주, 72-73쪽)

 

이상 대제학의 인맥을 정리하면 첫째로 눈에 띄는 것이 ‘귀현’한 가문 출신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사실이다. 이 부류로는 우선 종친인 이계전, 국구國舅인 민제, 부마를 아들로 두거나 형제가 부마인 권근‧권제‧정인지‧김안로, 삼촌이 부마인 권람, 효령대군의 장인인 정역 등을 우선 꼽을 수 있다. 영의정을 비롯해 정승의 아들이나 손자‧동생‧조카인 경우는 성석인‧유사눌‧권제‧허성‧안숭선‧안지‧허후‧박중손‧권람‧노공필‧신용개‧성세창‧신광한‧정사룡‧홍섬‧정유길등으로 16명에 이른다. 여기에 고려 때의 재상 후손이나 조선시대 재상(2품관), 공신과 연결된 인물을 헤아리면 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이 이에 해당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권근의 후손‧신숙주의 후손은 여기에 문형 또는 주문자의 후손이라는 점이 덧붙어 작용하고 있고, 이색의 후손에서도 15세기 동안 계속 대제학이 배출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정 반대의 측면, 가계의 배경이 화려하지 않은데도 대제학에 오른 인물도 결코 적다고는 할 수 없다. 이첨‧이수‧이명덕‧정인지‧박안신‧강혼‧김안국‧이황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들은 다시 조선 건국과정에 입신한 부류(이첨‧이수), 조선 건국 후 세종연간까지 문과에 급제한 뒤 능력을 인정받은 부류(이명덕‧박안신‧정인지), 16세기에 사림세력의 저변이 확대되는 시기에 사림으로서 과거에 급제하여 능력을 인정받은 부류(김안국‧이황)로 분류가 가능하다. 15세기 후반부터는 명문가의 후손이 거의 대제학을 맡다가, 중종연간에 이르러서는 기존의 배경이 없지는 않으나 그 가계의 성격 상 명문가의 축에는 끼기 어려운 가문 출신들이 대제학에 진출하고 있다는 사실도 주목된다. 즉 15세기 후반 이후 한 동안 화려한 훈구적 배경을 지닌 대제학이 대거 배출된 데 비해, 16세기에는 연산군~중종 연간에 새로 등장한 세력이 대제학으로 대두하고 있었다. 그리고 16세기 후반부터는 사림 출신이 대두하는데, 정유길과 같은 존재는 그 가교와 같은 구실을 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15세기 중‧후반기의 대제학 역임자는 거의 집현전 학사 출신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에 비해 16세기에는 홍문관에서 주된 경력을 쌓은 인물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한편으로 어느 시기나 조선전기 동안에는 승지 경력이 큰 의미를 지녔음도 확인할 수 있으며, 외국 특히 명에 사신으로 다녀온 경우가 대부분이었다는 점도 중요한 점으로 생각된다. 요컨대 명에 대한 외교는 국제정세의 안정기에도 그 중요성이 매우 컸고, 외교문서를 잘 작성할 수 있는 능력은 대제학으로 성장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오종록, 113-114쪽)

 

 

 

2. 민주당

 

⑴ 내각책임제와 붕당 균열 폭발

 

제2공화국 헌법상 의원내각제의 좌절에 대한 이러한 평가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먼저 어려운 경제적 여건과 절제되지 못한 자유의 남용, 그리고 서구 민주주의의 일천한 경험 등과 같은 사회․문화적인 배경이 원인이 되었다. 다음으로 정부여당의 분열과 분당으로 인한 내각의 弱體化와 정부의 지지 기반의 약화 및 안정된 양당제도의 결여 등과 같은 정치적인 측면도 원인으로 지적된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문화적인 배경과 정치적인 요인으로 인해 의원내각제가 가진 의회와 정부 간의 공화와 협력 및 책임성과 균형성의 원리가 거의 작동되지 못한 제도적 운용의 문제점도 지적할 수 있다. 이러한 평가는 대체로 타당한 것으로 생각된다.

생각건대, 제2공화국 헌법상 의원내각제의 좌절에 대한 평가는 단편적으로 접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즉 결과론적으로 접근하거나 운용론적으로 접근하거나 아니면 시대적 배경이나 정치․경제적인 여건에 기초하여 접근하거나 제도적으로만 접근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좀 더 다각적으로 봐야한다. 제2공화국 헌법의 아버지들도 당시의 사회적 여건이 의원내각제를 소화할 만큼 성숙되지 못했다는 점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원내각제를 도입한 것은 불가항력적인 시대적 요청이었다. 이렇게 출발한 의원내각제는 제도적인 면에서 순수한 의원내각제에서는 생경한 대통령과 국무총리 간 불협화음의 원인을 제공하고, 민주당 신․구파 간의 대립은 그 상황을 더 심각하게 했다. 이는 민주적 정당제도가 의원내각제와 조화될 수 없었던 원인으로 작용했다. 앞에서 소개한 용례에서도 보았듯이, 내각불신임이나 의회해산도 헌법 규정에 근거하여 제대로 활용되지도 못했다. 결국 의원내각제의 본질이자 그 가치인 의회와 정부 간의 공화와 협력은 기대할 수 없었던 것이다.(이병규, 249-250쪽)

 

-원: 그때 이제 보면은 제헌 국회 때 흐름이 이승만 박사가 4․19로 물러갔고, 그 다음에 이제 민주당 정부가 정권을 잡아가지고 내각책임제를 하지 않았어요? 내각책임제를 해가지고 민주주의를 확산한다고 해서 얼마 안돼 가지고 군사혁명이 났거든. 우리나라는, 저는 그래요. 지금도 내각책임제 논의가 나오고 있지 않습니까? 현재도 아직까지는 남북통일이 되기전까지는 내각책임제는 극히 너무 산만적인 정치가 된다. 이래봐요, 해서 그때 항상 얘기합니다. 제헌 때 만든 헌법, 그 정신을 되살려 가야 합니다. 그 정신을 되살려…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김인식·원장길 증언 파트 중, 원장길씨 증언, 201쪽)

 

통치구조의 원리로 볼 때 권력의 분산을 추구하는 제도는 ‘미국의 대통령제’이다. 미국 대통령제는 입법, 사법, 행정의 3권이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으며, 이들 3개 권력 간의 상호 견제와 이를 통한 제도간의 힘의 균형에 헌정 제도의 초점이 맞춰져 있다. 예컨대, 법률 제정과 관련된 권한을 두고 본다면, 오직 의회 의원들만이 법안을 제출하고, 발의하고, 의결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으나, 대통령은 그 법안에 대한 거부권을 가지며 법원은 위헌심사의 권한을 갖는다. 이처럼 대통령제에서는 한 제도적 기구가 다른 제도적 기구에 의해 견제 받지 않는 무제한의 권력을 행사할 수는 없다. 해밀턴과 매디슨이 <연방주의자 논고 51> (Federalist Papers 51)에 적은 “야심은 또 다른 야심에 의해 좌절되도록 하여야 한다”는 유명한 문구는 미국대통령제의 고안자들이 독재 혹은 권한의 집중을 막기 위한 견제와 균형을 얼마나 중시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강원택 2006, 34-35).

이에 비해 내각제는 권력분산이 아니라 권력 융합의 체제이다. 내각제에서 행정 권력과 입법 권력은 상호 융합되어 있다. 영국의 내각제에서는 사법적 최종 심사권까지 의회에 주어져 있다. 영국 내각제에는 3권이 모두 한 곳에 융합되어 있는 셈이다. 이처럼 내각제에서 권력은 의회에 집중되어 있다. 내각이라는 행정권의 장악은 입법부 내 다수 의석의 확보를 통해서 이뤄진다. 즉 내각제에서는 의회를 장악해야 행정 권력을 장악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집권당의 지도자인 내각 총리가 자기 당의 소속 의원들을 통제할 수 있다면, 내각이 원하는 정책은 다수 의석이 확보되어 있는 의회 내에서 매우 쉽게 입법화될 수 있다 (Lijphart 1994, 102). 쟁점이 되는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의회 지도자의 협조를 구하고 의원들의 반응을 일일이 챙겨야 하는 미국 대통령보다는 내각제 하의 총리가 훨씬 강력하고 손쉽게 국정을 이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우리나라에서 내각제는 기본적으로 권력분산의 제도로 이해되고 있다는 점이다.(강원택, 48쪽)

 

군사 쿠데타라고 하는 헌법 파괴 행위에 대한 비판보다 장면 정부의 실정에 대한 비판에 집중하고 있는 이러한 대화 내용을 보면, 윤보선이 초당적인 통합의 상징으로서의 대통령이 아니라 사실상 장면 총리의 정적(政敵)으로 행동해 왔음을 다시 확인시켜 준다. 윤보선의 이러한 견해는 그가 군대의 힘을 빌려 장면 내각을 몰아내려고 했다는 세간의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한다. 실제로 윤보선은 쿠데타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었거나 적어도 쿠데타를 진압하고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윤보선은 516에 대해 최초에 부정적이던 미국의 진압 요청을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일부 군대가 자발적으로 쿠데타 진압을 위해 출동할 기미를 보이자 대통령 친서를 통해 이들의 출동을 억제했다 (김세중 2001, 90). 이러한 태도는 당시 미국 측 보고서에서도 확인된다. 매그루더 장군의 보고서를 보면“윤보선은 우선 헌법에 대해 말로는 수호하겠다고 했지만 쿠데타를 그의 정적인 장면을 제거하고 새로운 정부를 수립할 수 있는 방법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박태균 2006, 209)고 지적하고 있다. 내각제 하에서 체제를 수호하고 안정화시켜야 할 책임을 맡고 있는 국가 원수가 스스로 정파적인 속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총리를 정치적 경쟁자로 생각하고 이를 외부적 힘에 의해 내쫓으려고 한 것이다. 내각제의 제도적 근간이 흔들린 것이다.

더욱이 윤보선은 장면을 내쫓고 그 대신 자신이 직접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통치체제를 구상하기도 했다. 미국 대사관과의 접촉 과정에서 윤보선은 거국내각을 통해 드골 식 대통령제로 정치체제를 개편할 필요가 있다는 구상도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박태균 2006, 229). 사실상 자신을 중심으로 한 정계 개편, 자신에게 정치권력이 모아지는 형태의 통치 구조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내각제 하에서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국가 원수가 아니라 직접 정치권력의 정점에 서는 프랑스의 이원정부제적 정치재편을 통해, 그동안 그가 ‘제한적이고 불편하게’행해왔던 정치적 영향력의 행사를 제도화하고 공식화하고자 했던 것이다. 체제의 수호자를 자임해야 할 대통령이 자신의 정치적 욕심을 위해서 체제 개편을 생각했다는 것 자체가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내각제라는 통치구조의 운영원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정파적 이해관계만을 쫓은 것은 윤대통령뿐만이 아니었다.“(강원택, 58-59쪽)

 

이 같은 상황은 한국인의 전통적인 분파적 행동 유형 때문에 한국에서는 내각책임제 정치가 성공할 수 없다고 주장했던 이승만의 말을 마치 입증해 주는 것 같았다. 이승만정권 하에서 각료들의 평균 재임기간이 9개월 이었던 데에 당혹감을 느꼈던 사람들은 민주당 정부의 장면 내각에서의 평균재임기간은 2개월 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더욱 놀라게 될 것이다.

민주당은 이처럼 조직기반이 급속히 붕괴되어 가고 있는 한편, 다른 효과적인 정치수단도 확보하지 못하고 있었다. 민주당이 내건 이데올로기의 핵심은 이승만의 ‘독재’에 반대하고 내각책임제를 지지한다는 것이 그 전부였다. 따라서 이승만정권이 무너지고 내각책임제가 도입된 시점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민주당원들을 결속시킬 이데올로기가 없었다. 1960년대 말 정부는 예산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국회의원들을 개별적으로 매수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였다.

한 업저버가 지적하고 있듯이, 민주당은 사욕을 채우는 데 권력을 이용하고 있었으며, 행정 집행 과정에서 자신들의 권력 소외에 분노를 느끼는 다수 세력과 발전지향적 목표를 가진 소수세력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민주당 의원들은 자신들이 더욱 ‘민주적’, 다시 말해서 이승만정권보다 더 ‘자유주의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사실 따지고 보면 민주당 의원들의 40% 이상이 구지주계급의 자제들이었고, 거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의원들이 일제 때 총독부의 관리를 지낸 자들이었다. 결국 이데올로기적 구심력의 결여라는 요인은 민주당정권의 결정적인 약점의 하나가 되었다.

민주당이 뚜렷한 이데올로기를 갖지 못했다는 사실은, 민주당 정권이 집권기간 동안 독자적인 정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단지 대중의 압력에 순응하는 정책 지향을 취했다는 점에서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민주당정권이 내세운 제1목표인 ‘경제개발 제일주의’도 독자적으로 설정된 정책이 아니라 1960년 11월 내각 사무처가 실시한 여론조사에 나타난 국민들의 요구에 따라 취해진 것이었다. 이 조사 결과에서 응답자의 70% 이상이 정부가 가장 시급하게 해결할 분야는 국가의 경제문제라는 견해를 보였던 것이다. (김정원 1, 79-80쪽)

 

민주당에서는 구파가 적극적이었다. 4월 23일 오후 30여명의 구파 원내외 간부들이 모여 정부통령 선거 재실시 투쟁과 별개로 내각책임제 개헌을 적극 추진키로 하는 한편 4월 25일 경 개헌안 기초를 완료하고 곧바로 서명공작에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민주당 구파가 제시한 개헌의 전제조건은 ① 보안법·지방자치법 등 악법의 폐지 내지 개정, ② 정부통령선거법과 민의원선거법 개정, ③ 경찰중립화의 제도화 ④ 개헌안 통과와 동시에 민의원 총사직, ⑤ 선거 내각을 조직해 공명선거로써 민의원 선출 등이었다.(중략)

민주당 구파의 개헌 주장은 개헌안 통과와 동시에 의원 총사퇴를 전제했다는 점에서 정치적 생존책으로서 내각책임제 개헌에 착목한 자유당 혁신파와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자유당 혁신파는 개헌과 동시에 자유당을 탈당하고 신당운동을 추진하는 것도 고려하고 있었으며, 개헌 후 의원직 총사퇴의 시점은 가급적 늦출 것을 선호했다.

한편 민주당 구파의 개헌 추진 이면에 깔린 것은 파벌적 이해, 즉 이승만 이후 정권 장악에 대한 고민이었다. 4월 항쟁으로 이승만의 집권체제가 급속도로 흔들리는 상황에서, 마땅한 대통령 후보를 갖지 못한 구파로서는 새로운 정부통령 선거가 불리할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들은 내각책임제 속에서 자유당과 권력을 분점함으로써 정치적 활로를 찾으려 했다. (이혜영, 250-251쪽)

 

선거운동 기간 중 각파는 당의 공천 후보 받은 자파 후보를 후원했고 이로 인해 분당론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여론이 좋지 않아 자제했었다. 그러나 막상 선거에서 “너무 많이 당선되니까 당이 쪼개지게 되었다”는 분석이 나와 정도로 민주당이 압승하게 되자 구파측에서 분당론이 표면화되었다. 구파는 자파 당선자가 신파 당선자보다 많아지자 분당을 하더라도 원내 제1당이 되며, 이렇게 될 경우 대통령직과 국무총리직을 모두 차지하리라는 계산에서 분당론을 공식화한 것이다.

신파는 이에 맞서 대통령과 국무총리의 분리, 즉 요직안배를 명분으로 내세우고, 대통령직을 구파에 양보하는 대신 내각 책임제 아래에서 정권의 핵이라고 할 수 있는 국무총리직을 차지한다는 전략이었다. 그리하여 양파는 별도의 당선자대회를 개최, 위원회를 조지해 소속이 분명하지 않은 의원들을 포섭하는 한편 정권 장악을 위해 치열한 경쟁을 전개했다.

양파의 전략을 보면, 구파로서는 대통령에 윤보선, 국무총리에 김도연을 당선시킴으로써 요직을 독점한다는 것이고, 신파로서는 대통령으로 구파의 윤보선을 미는 대신 국무총리로 장면의 당선을 유도한다는 전략이었다. 양파가 다 대통령에는 윤보선이라는 데 이의가 없었기 때문에 윤보선은 국회에서 무난히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대통령이 된 윤보선은 국무총리에 김도연을 지명함으로써 구파의 전략을 그대로 수행했다. 그러나 김도연은 국회 인준표결에서 가 111, 부 112로 부결되어 어쩔 수 없이 윤보선은 2차 지명을 할 수 밖에 없었고, 이에 따라 신파의 장면이 지명된 것이다. 8월 19일의 인준표결에서 장면은 가 117, 부 107를 얻어 국무총리로 선출됨으로써 신파는 조각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신파에 패배한 구파는 장면이 선출되자 그날로 즉시 회합을 갖고 정치적 생리를 달리하는 신파와는 더 이상 제휴할 수 없다는 의견을 개진하고 “민주당을 분당하여 건전한 야당으로 발족하겠다”는 방침을 세우고 별도의 원내교섭단체를 등록하기로 했다. 그러나 국민들은 민주당이 파벌을 초월하여 거국내각을 구성할 것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에 양파는 협상을 벌여 신파 5석, 구파 5석, 무소속 2석으로 내각을 안배하기로 합의 했다. 거국내각을 구성하기로 한 것이었다. 신파로서는 각계를 망라할 계획으로 널리 교섭해 보았지만 “불행히도 구파 인사들은 신파 총리하에서 생사라도 같이할 동지적 협조의 기색을 보여주지 않았다”고 불만을 토로했고, 구파에서는 거국내각을 출범시키기로 하였으나 “신파쪽의 일방적인 거부태도에 부딪쳐 결국 실현되지 못했다”고 불평, 결국 신파 위주의 조각이 이루어지고 말았다. (심지연, 247-248쪽)

 

내각책임제 개헌을 명료하게 주장한 인물은 연세대 총장 백낙준과 고려대 총장 유진오, 서울법대학장 신태환등이다. 백낙준은 일시적인 군사 지배는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며, 대신 연립내각을 구성해 총선을 실시하고 내각책임제 개헌을 하는 정치일정을 제시했다. 반면 이승만에 대해서는 대중의 분노가 그를 향하고 있기는 하지만, 국가 상징으로 존속시켜 체면을 살려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유진오의 구상도 대체로 비슷했다. 단, 그는 이것이 이승만과 자유당의 양보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승만이 '무대 뒤편으로 나앉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거나, 자유당이 자신들에게 불리할 것이 분명한 총선을 수용할 수 없다면 현실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대통령의 권한을 제한해야 한다고 했는데, 그렇지 않으면 누가 총리가 되든 이승만이 자기 욕심대로 쓰다 버린 김성수, 이기붕의 운명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혜영, 255쪽)

 

내각 책임제는 1950년대 정치, 대중들의 정치 감정에서 독특한 위상을 갖고 있었다. 이승만 통치의 무책임성과 일인독재에 반대되는 '책임정치'의 구현체이자 '독재종식'이 상징물로 전형화된 것이 내각 책임제였다. 이는 야당 세력이 구축해 놓은 인식틀이었고, 12년에 걸친 이승만 통치에 대한 반작용으로 대중적 호응을 얻었다. 그 결과 이승만 하야 이후 "정부통령 선거 다시하자"는 민중운동의 참다운 목적이 다시는 독재자가 나타날 수 없도록 법제도를 개혁하는 한편, 독재자가 군림할 수 있는 사회적 기풍을 일신해 놓자는 데 있었다"는 해석이 등장하고, 내각책임제가 모든 양식있는 국민들의 소원이고 제2공화국의 당연히 채택할 정치체제인 것에는 아무런 이의가 없다는 주장까지 생겨났다. 내각 책임제 개헌이 새로운 당면과제로 부상하고, 마치 3·15 부정선거에서 비롯된 민중저항의 최종적인 정치지향점인양 되어 버린 것이다. (이혜영, 269-270쪽)

 

그러나 특기할만한 사실은 민주당이 집권당이 됨과 동시에 구파와 신파로 분열되는 양상을 보였다는 점이다. 민주당의 공천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동일 선거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했기 때문에 구파공천, 신파공천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았고, 거의 대부분의 선거구에서 양파가 경쟁을 벌였다는 사실이다. 선거운동 기간 중 양파는 당의 공천 후보보다 자파 후보를 지원했고, 이로 인해 분당론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여론이 좋지 않아 자제 했었다. 그러나 막상 선거결과 "너무 많이 당선되니까 당이 쪼개지게 되었다"는 분석이 나올 정도로 구파측에서 먼저 분당론을 표면화시켰다.

구파는 자파 당선자가 신파 당선자보다 많으므로 분당을 하더라도 제1당이 된다는 생각이었다. 이럴 경우 자신들이 대통령직과 국무총리직을 모두 차지할 수 있다는 계산에서 분당론을 공식화한 것이다. 신파는 이에 맞서 대통령과 국무총리의 분리, 즉 요직 안배를 내세웠다. 대통령직을 구파에 양보하는 대신 정권의 핵이라고 할 수 잇는 국무총리를 차지한다는 전략이었다. 그리하여 양파는 별도로 당선자 대회를 개최, 위원회를 조직하여 소속이 분명하지 않은 의원들을 포섭하는 한편 정권 장악을 위한 치열한 경쟁을 전개했다.(심지연, 149쪽)

 

위의 인용문에서 나타난 파벌주의는 신구파 사이에 오랜 내분을 지칭하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1950년대 자유당과 민주당 사이의 여야 대립보다 민주다 내부의 신구파 사이 대립이 더 심각했다고 평가할 정도로 이승만 정권 하에서도 신구파 갈등은 정계의 주요한 이슈가 되었다. 이미 1955년 민주당이 결성되는 시점에서부터 신구파 간의 계파 대립이 시작되었다. 이전 한국민주당과 민주국민당 출신의 구파들과, 1954년 사사오입 개헌 이후 호헌동지회에서 합류한 신파 의원들은 출신에서뿐 아니라 이념적으로도 서로 다른 내용을 갖고 있었다.

구파 계열에는 과거 신간회 활동을 했던 인사(조병옥)와 임시정부 계열 인사(신익희)까지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좀 더 국가주의적 성향에 가까웠다면, 일제 강점기 조선일보사에서 활동했던 인사들(주요한, 김영선)의 주도 하에 있던 신파 계열은 시장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사상을 갖고 있었다.

조봉암을 비롯한 혁신계 인사들이 호헌동지회에 합류하고자 했을 때, 구파에서는 이에 대해 적극적인 입장이었지만, 신파는 그렇지 않았다. 또한 1956년의 대통령 선거에서도 신익희 후보가 급서하면서 대통령 후보가 자동적으로 단일화되었을 때, 구파는 뚜렷한 입장을 보이지 않았지만, 신파의 일부 인사들은 조봉암을 지지하느니 이승만대통령을 지지하는 편이 낫다는 입자이었고, 신파인 장면 후보의 부통령 당선에 모든 힘을 기울였다. (박태균, 494-495쪽)

 

제 2 공화국의 내각제가 생존했던 기간이 무척 짧았기 때문에 대통령과 총리간의 직접적인 갈등을 촉발 시킨 사건을 찾기란 쉽지 않지만, 제 2 공화국의 주요 정치인들이 대통령직을 정파적 입장에서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은 여기저기서 확인할 수 있다. 우선 들 수 있는 사실은 대통령직을 계파 간 자리다툼의 하나로 바라보았다는 점이다. 즉 총선 승리에 따라 ‘나눠 먹을’ 전리품 가운데 하나로 대통령직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구파 지도자인 윤보선이 대통령으로 선출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전리품 분배에 대해 ”신파와 구파의 정치적 계산이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7.29 선거 이후 보다 많은 당선자를 낸 구파는 대통령 윤보선, 국무총리 김도연을 당선시켜 자파가 모든‘요직’을 독점한다는 것이며, 이에 맞서 신파는 ‘요직’안배를 명분으로 대통령직을 구파에 양보하는 대신 국무총리직을 차지하겠다는 전략을 세운 것이다“ (심지연 2001, 139-140). 즉 총선 직후부터 양 계파는 차지해야 할‘요직’가운데 하나로 대통령직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내각제에서라도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국가의 최고 지위를 의미하는 만큼 대단히 영예스러운 직책이다. 그러나 통합의 상징이 되어야 할 직책이 파벌의 이해관계에 따른‘나눠먹기’의 대상이 된다면 그 대통령의 중립성은 처음부터 훼손될 수밖에 없다. 어느 한 파벌의 지도자가 대통령이 되었다면 적어도 그 경쟁 파벌의 입장에서는 그 대통령의 정치적 중립성에 대해 처음부터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강원택, 55-56쪽)

 

의원내각제는 이러한 다양한 유형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닌다.

첫째, 권력구조상 국민→의회(다수당)→내각→책임정치라는 등식과 같이 국민의 뜻에 따르는 권력 장치라는 점에서 민주적 정당성이 강조된다. 둘째, 행정부의 구조가 국가원수인 왕이나 대통령과 정부로 二元化되어 행정권의 집중을 초래하지 않고, 행정권이 내각에 있기 때문에 행정권의 분담을 가져온다. 셋째, 입법부와 행정부의 공화와 협력은 국민이 선택한 정당이 정부를 담당하여 국민과 약속한 정책을 국가기관 간의 협조를 통해 적극적으로 실현해 나갈 수 있다. 넷째, 정부와 의회의 성립과 존속의 상호 연계를 이루는 수단인 의회의 내각불신임권과 내각의 의회해산권은 입법부와 행정부의 권력 균형을 유지시키면서 국정 운영을 신중하게 하는 장치가 될 수 있다. 또한 정치적 책임의 소재를 밝힘으로써 권력의 공화에도 기여할 수 있다. 다섯째, 의회와 내각 혹은 여당과 야당 사이의 관계는 국민의 신임을 상실하면 그 입장의 전환이 예정되어 있기 때문에 구조적으로 타협과 관용의 미덕을 유발하는 장치가 된다. 여섯째, 의원내각제는 구조적으로 정당제를 전제로 하면서 정책 정당일 것을 요구하므로 어떤 권력구조보다도 정당이 정치의 중심적인 기구로 육성될 수 있는 정부형태이다.

결국 의원내각제는 권력의 공화와 협력이라는 원리 하에서 행정부의 이원적 구조와 의회에 대하여 책임지는 정부, 그리고 정부의 의회해산권이라는 세 가지 요소를 중심으로 특징지어진다. 의원내각제는 의회의 민주적 정당성을 토대로 정치적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할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이 제도 하에서의 정치적 불안정은 정부의 불안정 내지는 국가 자체의 불안정으로 귀결될 수 있기 때문에 의원내각제의 정립을 위한 정치․문화적인 성숙도를 조건으로 제시하기도 한다.(이병규, 242쪽)

 

⑵ 제2공화국은 무능 정부였나?

 

미국은 5․16군사쿠데타 세력의 장면정권 붕괴를 묵인했고, 승공통일을 외치는 쿠데타 세력은 군사쿠데타 직후 바로 한국사회가 분출한 민족주의적 열망을 공론장에서 검열, 제거했다. 이제 군사쿠데타 이후 한국에서 민족주의라는 기표는 경제발전, 전통 유지 등 분단국가의 강화에 기여하는 내용으로 채워지고, 근대화 지배담론과 접합되었다. 그 후 유신 독재를 거쳐 전두환과 노태우로 이어지는 암울한 군사독재의 긴 터널을 피하지 못하였다. 그렇다하더라도 학생들의 제안들이 오늘날 통일정책에 거의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민족주의 기준에서 4․19혁명은 민족 자각에 근거하여 민주주의 혁명, 독립운동이념의 복원, 그리고 통일운동의 전개를 단계적으로 추진한 민족운동이었다. 4월혁명은, 5·16군사쿠데타로 말미암은 군사정권 속에서 6·3항쟁으로, 1970년대의 유신반대운동과 부마항쟁으로, 1980년대의 광주민주화운동과 6월항쟁으로 끊임없이 강렬한 의지를 분출하며 피어나기를 마지않는다.(임태환, 38쪽)

 

다른 한 가지는 이 비조직적인 참가자들,  다시 말해서 직업군으로 보았을 때 하위주체에 속하는 자들은 위의 분석적 판단이 제기한 그들의 참여형태와 참여양상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목소리를 혁명 기간 중 드러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들이 도시화의 과정에서 발생한 빈곤층 혹은 도시빈민자들이었고,  사회경제적 차별과 절대빈곤이라는 고통에 대한 대단히 높은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모든 불만은 혁명 당시 ‘부정선거 규탄’이라는 절차 민주주의적 요구에 흡수·용해될 뿐이었다.  뿐만 아니라,  혁명 이후에도 장면 정권의 미온적 정책은 물론 탈독재적 열린 공간에서 학생들의 ‘농촌계몽화’, ‘학원자주화’, ‘평화통일운동’이나 노동자들의 노동운동의 복원을 위한 폭발적인 노동조합운동 그 어느 영역에서도 하위주체들의 존재를 여전히 파악하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혁명 이후 그들은 혁명 이전 자신들의 ‘아노미적’상황으로 되돌아 갔으며,  혹은 1961년 박정희의 쿠데타 이후 이들의 일부는 군사혁명위원회의 ‘깡패숙청’, ‘사회정화’, ‘국가재건’등의 목표를 위한 가장 직접적인 희생자들로 전락하기까지 하였다.

그렇다면,  하위주체들은 그 참여형태와 양상에도 불구하고 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 없었으며,  혁명 이후 다시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게 되었는가?  독재정권이 물러난 새로운 민주주의의 공간에서조차 그들의 존재가 인식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보다 구체적이고 집중적인 연구가 향후 필요함을 전제로 그 이유를 간단히 언급하자면,  그들은 그 참여의 ‘무리’에도 불구하고 파편적이었으며,   무엇보다 학생들이 ‘민주주의’라는 자신들의 언어를 통한 자신들의 주체성 혹은 대표성을 가지고서 혁명에 참여했던 것과 달리,  그들은 자신들을 대표하는 언어(타자들과의 소통을 위한 것이든 자신들 내부의 소통을 위한 것이든)와 주체성을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그들의 언어는 ‘과격성’이었고 그들의 주체성은 부상 또는 죽음이라는 ‘희생’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들은 그 어느 세력이나 제도도 자신들을 대표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으로 자신들의 대표성을 느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이승원, 201-202족)

 

 

애초에는 새 정권이 들어선 이후에 본격적인 개편을 추진할 계획이었지만, 정작 장면 정권이 출범한 이후에는 정부조직 개편이 조금도 진척되지 않았다. 정부조직 개편 관련 논의가 아예 없었다는 표현이 지나친 과장이 아닐 정도로 진전이 없었다. 이 시기의 주요 행위자는 장면 총리와 윤보선 대통령이라는 개인 행위자들과 민주당 신파․구파라는 집단적 행위자들이다. 물론 이런 저런 시위를 주도하던 시민사회 분야의 지도자들도 당시 무시할 수 없는 행위자들이었지만 정부조직법이라는 법률을 개정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제도권 범위 내에서는 이 네 행위자들이 주요 행위자들이었다.

이 글은 이 시기에 아무런 진전이 없었던 가장 큰 이유로 정치 리더십 문제와 집단사고의 병폐를 지적하고자 한다. 장면 총리는 카톨릭 종교 색채가 강해서 그런지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산적해 있던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맞지 않게 이상주의적이고 자유방임적 민주주의관을 가지고 있었다. 국민이 열망하는 자유를 한 번 실컷 주어보자는 입장이었다. 억눌려 살면서 쌓였던 울분을 한 번 마음껏 발산시켜야 사회가 가라앉을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시간의 효과를 믿었다. 세월이 지나 혁명의열기가 가라앉으면 국민들이 무절제한 자유가 어떤 폐해를 가져오는지 스스로 자각하게 될 것이고, 그 후에야 진정한 민주주의가 가능할 것이라고 보았다(이용원, 1999, 178-179쪽). 6․25 전쟁이 끝난지 채 10년도 안되었고, 당시까지만 해도 국력이 더 강했던 북한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상황을 고려 하면 너무나 순진한 접근법이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윤보선 대통령 역시 상황을 냉철하게 파악하고 국가의 운명을 걱정하는 큰 지도자는 아니었다. 민주당 구파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쉼없이 장면 총리와 충돌했고, 설상가상으로 내각책임제 하에서 대통령의 지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대통령제 하의 대통령처럼 내각과 장관들 위에 군림하려고 들었다. 조속한 사회 안정을 위해서 국무총리에게 힘을 실어주는 명예로운 후견자 같은 국가원수이라기보다는 자신을 행정수반으로 착각하고 내치에서 권력을 행사하려고 하였다. 당시 여당 국회의원들도 집단사고의 문제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당시의 상황에서 정부가 어떤 문제들을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것인지를 고민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자기파벌의 정치적 이익을 조금이라도 더 챙길 수 있을지에 몰두하였다. 파벌 수장들이 편협한 생각으로 국가의 앞날을 내다보지 못하면 소속 의원들이라도 각성했어야 했는데 이들마저 집단사고에 빠져 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들어갔다.(하태수, 49-50쪽)

 

하지만 이러한 논의는 대중적으로 설득력을 가질 수 없었다. ‘3신’ 중 하나인 신문이 이들의 분당 논리보다는 분당의 파벌적 양상을 더 집중적으로 보도했던 것도 하나의 요인이었지만, 이보다 더 큰 요인은 이들의 분열이 심해지는 국면이 조각 및 개각과 관련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본고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신구파 사이에서, 그리고 민주당 내의 노장과 소장파 사이에서의 갈등은 조각이나 개각 전에는 미봉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다가도 각료 명단이 발표된 이후에 갈등은 더욱 심해졌다. 그리고 이러한 갈등의 핵심에는 파벌에서 몇 명의 관료가 나왔으며, 그 관료들의 직위가 어느 정도 중요한 자리인가였다. 물론 이러한 파벌의 논의 역시 신문에서 무책임하게 보도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4월 혁명 시기 김승옥의 만화나 김수영의 시를 통해 민주당 정부의 무능과 부패, 그리고 파벌에 따른 분열에 대한 사회적 공가대가 형성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민주당과 민주당 정부의 이러한 갈등과 무능은 미국으로 하여금 새로운 정치세력의 필요성을 느끼게 하였고, 군부로 하여금 5․16 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는 명분을 제공했다. (박태균, 514-515쪽)

 

‘4․19혁명’ 이후 집권한 장면 정권은 정치적 보수주의의 입장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밑으로부터의 요구였던 정치제도의 민주화를 실현해 가야했다. 국가의 통치체제를 내각책임제로 바꾼 상황에서 급선무는 관치화된 지방행정을 민주화하는 문제였다.

1960년 8월 11일 국회는 지방자치제 실시를 둘러싸고, 지방자치임시조치법을 통한 지방선거와 의회 구성을 논의하면서, 본격적인 지방제도 개편작업에 착수했다. 2공화국기 국회는 민주당이 의석의 과반을 점한 가운데, 지방자치법을 둘러싸고 구파와 신파 간의 갈등이 심하였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지방자치라는 제도적 개편의 방향에는 동의했지만, 지방 행정기관을 장악하는데서 우위를 확보하고자단체장의 선임방식에 커다란 이견을 보였다. 그런 가운데, 10월 22일 모든 단체장을 주민투표로 선출하도록 결정됨에 따라 지방자치의 전면화가 이루어졌다.

장면 정권은 이러한 개정 지방자치법의 방향을 수용하면서 행정구역의 확대를 통한 자치권 확대와 세제개혁에 의해 지방재정을 증대시키고자 했다. 행정구역 개편은 기존의 기초단체인 읍․면이 규모와 인구, 재정 면에서 지나치게 협소하고 열악한 점을 시정하기 위한 조치로 읍․면의 행정구역을 확대해 대읍․면을 만들고, 국가기관인 군을 폐지한 가운데, 도를 중심으로 한 도자치제를 계획하였다.(곽경상, 10쪽)

 

식민지 해방후, 한반도에서 미소양국의 이해관계에 의한 분할통치는 국내의 좌우이념투쟁을 격화시켰고, 한반도내 두개의 정부를 초래하였다. 이후 남북간의 대립은 불가피하게 되었고, 38선 부근의 잦은 무력충돌은 결국 3년간에 걸친 전면전으로 치닫게 되었다. (임영태 2010, 140) 이 전쟁은 한반도에 엄청난 인명살상과 그에 따른 정신적, 물질적파괴를 가져왔고, ‘분단’의 고착화와 동시에 반공주의 및 북진통일이라는 ‘사회적합의’를 일거에 형성시키는 획기적 사건이 되었다. 그리고 이는 정부수립 초기부터 미약했던 이승만의 정치적 기반 강화로 이어졌는데, 그 예로 부산정치파동, 사사오입개헌 그리고 조봉암사건 등을 들수 있다. 하지만 안보를 빙자한 이승만정권의 절차적 민주주의의 파행적 운영은, 야당 및 대항세력으로 하여금 반이승만이란 구실을 제공하였고, 국민으로부터의 심각한 지지이탈현상도 동반되었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이승만 정권은 1960년 여당, 관료, 경찰 등을 총동원한 3.15 부정선거를 기획하였지만, 4․19혁명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19혁명은 이승만의 반공주의 및 북진통일에 대한 근본적인‘문제제기’라기 보단, 자유당의 절차적 민주주의에 대한 파행적 운영 및 억압적 정치행태, 그리고 계속되는 경기후퇴에 대한 반발이라는 의미가 컸었기에, 이후에 들어선 장면정권도 이승만 정권을 대체할만한 새로운‘대안’을 형성하지 못한 채 막을 내리게 되었다. 예를 들어 이승만정권 퇴진후, 당시 야당이었던 민주당은 새로운 정치적 대안으로 부상하였지만, 4․19혁명을 통해 나타났던 정치개혁에 대한 국민적 요구에 부응하기 보다는 차기정권에서의 권력지분을 둘러싼 파벌싸움만 계속했다. 즉 민주당은 반이승만이라는 기치 하에 결성된 정당이었으나, ‘분단’에서 비롯된 배타적 보수독점체제 속에서 자유당과 같은 좌표에 있던 정당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당은 이승만퇴진이라는 목표달성 후, 4․19정신을 반영하고, 이승만정권과 차별화된 정치개혁을 추진시킬만한 이념적기반이 취약할 수 밖에 없었다.(이정길, 328쪽)

 

자유당의 억압적 정치행태와 계속되는 경기침체로 인한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은 붕괴하였지만, ‘분단’하에서 만들어진 배타적 보수독점적 정치구조는 민주당으로 하여금 이승만 정권과의 차별화된‘문제제기’와 통일된‘대안’에 기반한‘사회적합의’형성을 곤란케 하였고, (李正吉2012, 15) 권력을 둘러싼 당내분열은 개혁의 동력을 완전히 상실케 하였다. 반대로 통일된‘대안’의 부재 속에서 위와 같은 구조적상황은 한국전쟁후 비약적으로 성장해왔던 군부에게 정치개입을 위한 충분한 근거를 제공하였고, 전쟁을 통해 단련되어왔던 군부 특유의 조직력, 추진력, 안보의식은 비록 그들이 민주주의적 정통성이 결여되어 있었다 하더라도 당시의 혼돈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대안’으로서 국민들로부터 안정적인 지지조달을 가능케 하였다.(이정길, 330쪽)

 

지금까지 2공화국의 정부조직개편은 한 두 편의 연구를 제외하면 학자들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내각책임제로의 개헌이 있었기는 했지만 정부조직에서 큰 폭의 변화가 있었던 것이 아니고, 정권이 단명했기 때문에 정책에서도 큰 변화가 없었기 때문인 것으로 사료된다. 이 시기에 관한 대부분의 연구는 이 시기를 무능․혼란․부패로 점철된 기간으로 규정해왔다.

그러나 이런 시각은 이후에 들어선 군사정권의 입장으로 편향된 것이라 사료된다. 장면 정권은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점차 사회혼란을 안정시키면서 경제개발을 차곡차곡 준비해나갔다. 1961년 봄 정도에는 데모가 많이 줄어들었고 사회가 다소 안정을 찾아갔다. 민주당(신파)과 신민당(구파)의 갈등도 1961년 4월경부터는 약화되기 시작했다(이용원, 1999, 179쪽, 186쪽). 부패 정도도 전임 이승만 정권 때보다 훨씬 줄어들었고, 뒤이은 군부정권보다도 낮았다. 또한 미국과 일본의 도움을 받아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작성하고, 단기적 경기부양을 위해 국토건설사업을 시작하는 등 경제개발을 위한 첫걸음도 내딛었다. 정부조직 측면에서도 이 시기에 개편이 논의되던 내용들이 516 쿠데타 직후부터 1963년 말까지 전개된 정부조직법 개정 과정에 대폭 반영되었다. 군부정권은 밑도 끝도 없이 완전히 상상력을 발휘하여 개편 내용을 입안한 것이 아니라, 장면 정권기에 논의되던 문제들과 대안들을 참고하여 개편의 가닥을 잡은 것이다. 역사에 가정은 무의미하다지만, 장면 정권이 군대개혁을 조금만 더 신속하게 추진하여 516 쿠데타를 방지했다면, 한국 현대사에서 민주주의와 경제성장이라는 두 목표를 좀 더 빨리 달성했었을 가능성도 있다.(하태수, 51-52쪽)

 

이와 같은 내각제 안은 당시 사실상 유일한 정당인 한민당이 내각 책임제하에서 이승만을 단지 명목적인 국가원수로서 내세우고 행정의 실권은 한민당이 차지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유진오는 “대통령제는 미국 특유의 정치제도로서 미국은 18세기 고립정책을 쓸 수 있었고, 19세기 까지는 국내적으로 풍부한 예산으로 정부와 국회가 대립하지 않았으므로 대통령제가 가능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반면에 “국토양단, 경제 파탄, 공산주의자들의 극렬한 파괴활동 등 생사의 문제를 산더미 같이 떠 안고 있는 대한민국이 대통령제를 채택해 가지고는 국회와 정부가 대립할 가능성이 있었으므로 내각제가 타당하다”는 주장을 하겠다.

결국 이승만이나 유진오나 건국 당시 북한과 대치하는 등 산적한 문제점에 관해서는 인식을 같이 하면서 그 방법론에 있어서 차이를 보인 것으로 볼 수 밖에 없다. 다만 방법론에 있어서 차이를 보인 것으로 볼 수 밖에 없다. 다만 방법론인 정부형태에서 이승만에게는 대중의 지지가 있었으므로 대통령제가 유리했을 것이며, 국회의 상대적인 다수파이고 이승만 보다는 국내적 기반이 단단한 한민당이 내각책임제를 선택하는 것은 보기에 따라서는 당연한 것이었다. 사실 두 정파 모두 강력한 정부를 원했고 이는 당연히 독재의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내각책임제의 문제점은 이승만만이 제기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무소속의 조봉암은 유진오에게 사석에서 보다 직설적으로 “자기는 이론상으로는 내각책임제가 옳다고 생각하지만 한민당계가 정계를 좌지우지하는 한 반대한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따지고 보면 사실 그 당시 새로운 제3의 정치세력이 등장하지 않는 한, 한민당이 주장한 내각제의 정부형태였다면 현실적으로 한민당은 상당기간 정권을 잡게 될 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결론적으로 한국의 헌정이 훗날 독재로 이행한 것은 시각에 따라 다를 수는 있겠지만, 정부선택의 문제가 아닌 분단조국이라는 위기상황이 가장 큰 지배원인이었을 것이다. 이미 이념에 따라 경합하는 두 개의 국가가 38도선을 경계로 수립됨은 당시 이미 예정되어 있음에 따라, 자칫하면 내전으로 치닫을 가능성 또한 예상할 수 있었던 상황이다. (권영설, 529-530쪽)

 

이승만은 미국이 옹립한 대한민국의 대통령이었지만 미국의 모든 정책결정자들이 처음부터 그를 전폭 지지했던 것은 아니었다. 전쟁이 일어난 후에도 이승만이 1952년 부산정치파동과 1954년의 사사오입 개헌 등 두 차례에 걸친 탈법적인 개헌으로 장기집권을 도모하자 미국은 이승만을 제거하려 했다. 부산정치파동때는 한국의 헌정이 완전히 유린되는 것을 막았으며 휴전협상 중에는 미군철수로 위협하여 이승만을 제어했다. 이승만을 교체했을 때 과연 그만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을까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미국은 이승만 제거를 실행하지는 않았다. 1950년대 말 한국정치가 자유당과 내각 및 경무대의 강경파에 의해 농단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미국은 이승만의 리더십에 회의하게 되었고, 민주당(1956년 총선 이후 부상)내 구파와 자유당 내 온건파를 결합시켜 온건파 연합에 의한 대안체제를 모색하는 구체적 구상을 진전시켰다. 한국의 주권을 무시하는 이승만 제거계획과 같은 1950년대 전반기식 물리적 수술 공작(한국 군부에 쿠데타를 사주)을 실현시키기에는 내정간섭이라는 부담이 있었기에 1950년대 말에는 지양했고, 군부에 의지하는 전반기 전략에서 벗어나 민간인 후계자 양성 전략을 보다 구체적으로 은밀하게 추진하다가 결국 1960년 이승만 하야로 미국의 비밀공작은 일정한 결실을 맺었다.

1950년대 전반기에는 권력의 중심이 이승만 1인에게 집중되면서 민주주의는 뿌리를 내리지 못했고 정당(야당)은 제 기능을 다하지 못했으므로 정치적 위기는 비교적 약했으나 1950년대 후반기에는 야당이 약진하여 위기가 비교적 심화되었다. 1950년대 내내 추진되던 미국의 대안 모색이 구체화될 수 있었던 결정적 모멘텀은 1960년 한국인들의 힘으로부터 나왔고 미국은 4⋅19 직후의 상황을 적절히 제어해 이승만 정권의 교체를 실현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의 최초 정치적 구도는 미국이 마련했고 제1공화국 내내 최고권력의 교체 혹은 유사시 승계가 논의되었다. 미국의 개입이 만약 내정간섭으로 비쳐진다면 국민들이 저항하여 혁명이 발생하고 공산화가 될까봐 비밀리에 공작했으며 물리적 제거 계획은 계속 검토했지만 유보했다. 따라서 미국 영향력의 한계를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렇지만 마지막 단계에서는 미국과 이승만의 담판에 의해 대통령 운명의 향배가 결말이 났을 정도로 이승만과 그가 이끄는 정부는 취약한 對美 자율성을 확보하는데 그쳤던 것이다.(이완범, 227-228쪽)

⑶ 붕당 극복의 중요성

 

그 동안의 우리 정치체제는 조선왕조 500년의 가부장적 군주제로서 임금을 중심으로 하는 지배계급 밑에는 그 명령에 복종하는 臣民만이 있었을 뿐이다. 그들에게는 조세 납부와 賦役의 의무만 주어져 있었다. 권리와 의무가 함께 주어진 公民이 아니었고, 정치에 관심을 갖는 市民은 더더욱 아니었다.

일제 36년의 식민지배를 겪으면서도 마찬가지였다. 외세에 의한 피지배 민족으로 착취와 소외 속에 살아옴으로써 자기 주장과 권리를 내세울 수가 없었다. 이런 반봉건 예속상태에서 풀려난 것은 해방으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였다. 국가의 구성원들이 비로소 평등하게 의무와 권리를 함께 나누어 갖는 근대의 국민이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또한 헌법 규정의 테두리에서만 가능한 얘기였다. 실생활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 민족상잔의 6․25전란을 겪어야 했다. 다시 빈곤과 소외가 닥쳐왔고, 국민 대다수는 그러한 현실 앞에서 국가적 귀속의식을 느낄 겨를이나 여유가 없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해준 것이 바로 박대통령의 경제개발 계획이었다. 빈곤한 경제구조를 근대화하여 생산성을 높임으로써 국민의 경제 생활 수준과 참여욕구를 향상시켰던 것이다. 공민의식을 갖춘 사회계층이 등장하면서 국가적 귀속의식이 싹텄고, 그 결과 근대적 국가건설의 기초가 마련되었다. (황병태, 285-286쪽)

 

그래서 그런지 박정희는 적어도 당시의 한국과 같은 후진지역에서 서양의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되게 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제도의 ‘직수입에 그치지 않고 그 지역의 양심적이고 혁신적인 엘리트들에 의한 지도력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민주정치에서도 하나의 강력한 지도원리가 확립되어야’한다고 강조했다. 즉 “서구의 고전적 민주주의가 한국과 같은 동양적 전제주의의 역사적 전통을 지닌 사회에 그대로 적용되기를 바라는 것은 하나의 妄想에 불과한 것이다. 민주주의적 자유를 마치 지도자의 不要로 오인하는 것은 마치 팽이에 축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고 설명했다. (정윤재, 201쪽)

 

셋째로, 당시 한국의 정당에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여야 관계의 문제이다. 여당의 지나친 비대현상과는 대조적으로 야당의 활동은 지나치게 위축되어 있었다. 이른바 흔히 지적되고 있는 ‘1.5정당제도의 성격을 보여주었다. 여당과 야당 사이의 건전한 경쟁관계가 아니라 여당의 독주에 대하여 야당의 무한계적인 저지라는 두 개의 정당적 책략이 맞부딪침으로 인해서 정치의 현실은 혼돈으로만 거듭될 뿐이었다. 여당은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서 때로는 경찰권을 자신들의 당세확장에 이용하였으며 자발적인 결사체들을 그들 산하에 소속시키기도 했다. 경찰을 중심으로 하는 행정부의 관료들이 모두 정당의 보조기관으로 기능함으로서 선거와 같은 정치적 문제에 대하여 관권선거라는 극히 반민주적인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진덕규, 26쪽)

 

1956년 제3대 정․부통령 선거부터 투표성향에서 여촌야도가 뚜렷해졌다. 당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자유당에 편향적인 경찰은 농촌을 장악했고, 민주당에 편향적인 신문은 도시를 장악했다”는 말이 이런 투표성향의 원인을 잘 말해주고 있다.

당과 내각의 강경파는 도시에서 신문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국가보안법을 개정하기로 했다.(김일영, 224쪽)

 

⑷ 붕당은 붕당을 낳고,

 

인물중심적 성격 이외에 자유당과 민주당의 조직상 공통적인 또 하나의 특질은 양당이 모두 고도의 의원 중심적 조직이라는 점이다. 선거전략의 작성, 후보자의 선택, 정책의 결정 등 양당의 정당활동은 원내에 의석을 가지고 있는 당원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의석확보의 정도가 당세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자유당과 민주당은 당기구를 통해 훈련된 직업적 정치인보다는 당선 가능성이 있는 지명도 높은 저명인사가 중시되었으며 이들이 당선됨으로써 쉽게 당의 중심부터 접근할 수 있는 조직적 특질을 지니게 되었다.

이러한 의원중심적 조직의 특질로 인해 양당은 당원을 계획성 있게 충원하고 이들을 체계적으로 훈련, 양성시킬 수 있는 체제를 갖추지 못하였으며 당의 하부조직인 지방 당부를 능동적 조직체로 발전시킬 수 없었다. (백운선, 105쪽)

 

위와 같은 문제가 주로 지역 주재 기자들이나 신생 신문사 기자들의 문제였다면, 기존의 주요 신문사들은 정치적 선정주의라는 또다른 문제를 드러냈다. 즉 “한국의 저널리즘은 정치적 불안과 민중의 불만, 그리고 저항정신에 최대한으로 편승, 영합하는 정치적 쎈세이셔날리즘이 상업주의를 위한 유력한 방법으로 살아왔다”는 평가까지 나왔다. 이승만 정권 때부터의 언론계 보도관행이 언론자유가 확대된 현실에서 더욱 극성을 부렸던 것이다. 이승만 정권 하에서 광고보다는 판매 수입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고, 당시 독자들의 정치적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것이 판매 확대에 도움이 되었기에 선정적인 정치기사에 중점을 두는 보도관행이 생겨났던 것이다. 4․19 이후에는 이런 관행이 더욱 일반화되어, 이제 거의 모든 신문들이 이런 경향을 보였다.

정헌주는 “419 이전에는 정부에 비판을 서슴지 않았던 이른바 야당지와, 정부의 입장을 무조건 옹호하는 여당지가 확연히 구분되어 있었다. 그러나 4․19 이후에는 모두 야당지가 되었다. 독재정권에 대해서 무조건 두둔만 하던 정부 기관지들 조차 민주당 정부에 대해서는 한 술 더 뜬 비판적 자세가 되었다. 이런 민주당 정부에 대한 무차별적 공격이 이승만 정권 하의 야당지처럼 권위를 인정 받는 것으로 착각 했다”고 회고했다. 최준은 신문의 논조에 대해 “한낱 비판에 그치고, 그 결함을 시정할 수 있는 대안 내지 건설적인 논설이 드물었다”고 지적하고, 이것은 “자유당 시대의 독재정권과 싸우던 논법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데 기인하는 것”이러고 주장했다.(박용규, 553쪽)

 

민주당 정부가 추진한 통일정책은 ‘선건설․후통일’론에 기조를 두고 있었던 만큼, 북한이 제기하는 각양각색의 남북교류․협상 제의에 대하여 단호히 배격하는 입장으로 일관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혁신계는 통일의 전제조건으로 남한의 국력신장을 강조하면서도 민주당 정부의 ‘선건설․후통일’론은 ‘통일을 않겠다’는 주장이라고 비판하면서 통일우선론을 폈으며, 특히 7.29 총선에서 참패한 이후에는 마치 혁신운동의 새로운 활로를 통일운동에서 모색하려는 것처럼 특히 중립화 통일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게 되었다.

혁신운동의 새로운 구심점으로 지목된 중립화 통일운동의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선 당시 혁신계 인사들과 대학생들에게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김삼규의 ‘중립화통한론’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의 논지를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① 한반도가 양대진영의 어느 한쪽에 편입되면 이것은 타방에게 위협이 되고 끊임없는 음모와 위협의 원인이 되므로, 통일한국은 국제적 동의에 의해 중립화되어야 한다.

② 남북한 정권은 대립적 강국의 지지에 의해서 수립되었으며, 그들의 이익 대변자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양 정권은 자유 총선거에 의해 수립된 통일정부에 의해 대체되어야 한다.

③ 남북한 정권은 그네들의 정책을 강요하는 것과 같은 여하한 선언도 배제하고 자유로운 총서넉를 확보하기 위해서 한반도에 아무런 이해관계도 없는 중립국에 의해 선거위원회든지 또는 중공까지도 가맹 시킨 유엔에 의한 선거위원회가 곧 구성되어 헌법제정을 제일의 사명으로 하는 대의원 선거 준비를 하도록 한다.

요컨대 김삼규의 주장은 한반도 중립화만이 한반도에 통일과 독립과 평화를 가져오고 양대진영의 긴장을 완화시키는 대전제가 된다는 것이다. 즉 그에 의하면, “우리가 통일․독립한다는 그것은 단적으로 말하면 미․소의 세력권 투쟁에서 해방되는 것이며, 따라서 이것을 이데올로기 문제와 착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관계 각국이 한국의 통일을 반대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일방적 통일을 반대한다는 것이지 통일독립 그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며, 분단되어 있다는 것은 위험한 화약고적 존재일 뿐만 아니라 한민족 자체의 퇴보를 의미하기 때문에” 한국의 통일독립은 어느 세력권에도 속하지 않는 통일독립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통일독립국가를 ‘중립국이라 부르고 이러한 중립국을 만드는 운동을 ‘중립화운동’이라고 하면서, 이러한 중립화운동을 우선 “기본적 인권이 확보된 남한 동포들 사이에서 초당파적 국민운동으로 전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강광식 1, 180-182쪽)

 

제1공화국 시대의 지방자치는 이승만의 독재와 장기집권의 도구로 활용되면서 시민의 자율에 의한, 시민을 위한 지방자치라 할 수 없었으나 제2공화국 지방자치는 제1공화국 지방자치의 잘못된 점을 교훈 삼아서, 지방자치 실시초기부터 국민과 정부는 자발적으로 지방자치를 실시하게 되었고, 거의 완벽에 가까운 법적 완비와 제도적인 민주적 운영실태는 큰 성과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짧은 제2공화국의 민주적 지방자치 운영정신과 경험은 30년 동안 군사정부의 질곡 속에서도 죽지 않고, 새로운 지방자치를 부활시키는데 큰 사상적, 정신적, 경험적 밑거름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516쿠데타 이후 중단된 지방자치를 부활시켜야 한다고 하면서도 권위주의정권들은 경제적 낙후성과 시민들의 자치의식 부족 등을 핑계로 시기상조론을 제기하며 지방자치 부활을 반대하였다. 이에 반론을 제기하는 측은 현재보다 더 정치·경제·사회적 물적 토대가 약하고 주민들의 자치의식도 낮았던 제1공화국과 제2공화국 시대에도 지방자치를 실시했는데 그때보다 훨씬 좋은 조건이 형성되었는데도 지방자치를 재실시하지 않은 것은 장기집권에 유리하게 하려는 의도라고 비판하면서 지방자치 부활을 요구하였다. 1991년 이후 부활된 지방자치법의 내용도 제2공화국 지방자치법의 내용을 모델로 한 것을 보면 제2공화국의 지방자치가 오늘날의 지방자치 부활의 큰 밑거름 역할을 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윤용희, 287쪽)

 

 

 

 

 

3. 이승만

 

역사적 사실을 평가함에 있어서 평가주체의 주관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주관성을 모두 포용하는 것으로는 역사적 진실의 정확성을 득할 수 없다. 그러므로 만델보옴이 주장하였듯이 주관성에도 ‘좋은 주관성’과 ‘나쁜 주관성’이 있고 따라서 ‘좋은 주관성’은 ‘나쁜 주관성’과 차별되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가주체의 이데올로기는 제1공화국과 이승만 초대대통령의 평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본 연구결과가 보여주고 있다. ‘좋은 주관성’은 평가주체의 이데올로기적 관점을 최소화하고 ‘역사적 진실의 객관성’을 최대화함으로써 “현 단계에서 역사에 대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혹은 더 나은 과학적 인식의 길”로 가는 대안이 될 수 있겠지만 ‘나쁜 주관성’은 ‘역사적 진실의 객관성’보다 평가주체의 ‘이데올로기적 관점’이 더 우선적으로 작용함으로써 역사적 진실의 왜곡을 초래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이미애, 211쪽)

 

대한민국 근현대사에 있어서 제1공화국과 이승만 초대대통령의 업적에 대한 평가만큼 논란이 많은 주제도 없을 것이다. 역사적 고찰의 진가는 정확성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과거를 올바르게 이해함으로써만이 현실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고 미래의 도전에도 성공적으로 맞설 수 있다는 점에서 제1공화국에 대한 평가는 정확성을 획득하여야 할 정치사의 과제로 남아있다(올리버, 2008). 제1공화국에 대한 기존의 고찰을 살펴보면 정확성에 근거하기보다는 21세기에서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평가의 최우선 기준으로 활용된 바 없는 소위 ‘이데올로기’적 관점이라는 가치가 제1공화국의 평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왔고 따라서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관점에 따른 제1공화국의 평가는 때로는 왜곡된 해석으로 이어지기도 하였음을 부정할 수 없다(올리버, 2008).

‘이데올로기’적 관점으로 제1공화국을 고찰한 한 가지 예를 들어보면 “이승만은 미국의 앞잡이이며 따라서 대한민국은 순전히 한반도에서 미국에게 군사 기지를 제공하기 위하여 수립되었다”는 왜곡된 해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올리버, 2008). 이러한 왜곡된 해석은 역사적 고찰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프로파겐다(선전)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제1공화국에 대한 평가는 이승만 초대대통령에 대한 평가와 맞물려 있고 한 인물에 대한 평가는 광범위하고도 정확성에 근거한 작업이므로 방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미애, 194쪽)

 

⑴ 50년대 경제

 

문제는 사람들이 서울에 대해 어떠한 욕망을 투사시키고 실현시키려 했는가 하는 점이다. 최일남의 「서울의 초상」에서 상경한 청년들이 서울을 진정으로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들르는 상징적 장소들이 이에 대한 간단한 암시를 준다. 바로 ‘르네상스’라는 인사동의 음악다방과 ‘종삼(鐘三)’의 창녀촌이다. 이 장소들은 당시 사람들에게 각인되어 있던 서울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일종의 상징으로 기능한다. 이 장소에서 이들이 겉핥기처럼 접하는 서양문화의 향유나 성적인 자유 등은, 당시의 서울이 단순히 경제적 우위와 제반 시설의 보유 같은 요인에 한정되지 않는 다양한 흡인력을 강력하게 발휘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성적 욕망처럼 가장 억압된 욕망도 배출할 수 있을 만큼 무한한 자유와 기회를 허용하는 공간이자 사람들이 동경하던 서양의 교양과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첨단의 공간이라는 점 등이 서울에 대한 선망과 자부심을 가지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살펴보려는 것은 소비문화와 유흥문화를 통해 실현되는 환상의 차원이 아니라, 실제 도시공간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일상적 삶의 양상들이다.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의 서울을 배경으로 삼은 작품들은 서울과 농촌의 격차라든가 서울의 물질적 풍요 같은 경제적 양상 등에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는다. 당시의 작품들은 상경민들을 주인공으로 설정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서울이 안겨주는 혼란과 환멸을 부각시키며 서울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할 뿐, 상경 이후 나아진 생활 수준 따위는 거의 드러내지 않는다. 오히려 소설 속 상경민들의 서울 생활은시골에서 겪었던 것보다 더 혹독하게 가난을 체험하는 것처럼 그려진다. 이 시기 문학 작품들에서 전면화되어 있는 것은, 어렵게 입성한 서울에서 또 다시 겪게 된 경제적 궁핍에 대한 호소이다.(송은영, 507-508쪽)

 

이데올로기 면에서도 민주당 정권은 실패했다. 5․16 당시 일반 대중은 5․16을 열광적으로 지지하지는 않았지만 민주당정권을 위해 앞장 서는 사람들 또한 없었다. 재정면에서도 민주당 정부는 실패를 거듭했다. 이승만정권이 퇴진하게 된 원인의 하나가 국민의 경제적 불만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은 국가경제를 자유당 때보다 더 나쁜 상태로 방치하고 있었다. 또 확고한 정치자금원도 민주당은 갖추지 못했다. 끝으로 민주당 정부는 국내 질서 유지에 실패했을뿐더러 한국에서 가장 강력하고 조직력이 강한 군부를 소외시켰었다.

민주당 정부는 한국의 전통적인 정치행태가 적나라하게 노출된 두드러진 예다. 관권 장악을 위한 당내의 파벌 투쟁은 국민들을 실망케 했고, 한국에서의 효과적인 민주적 정부의 수립가능성을 의심케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같은 민주당 정권이 경험을 국민들의 정치적 미숙에 기인한 것으로 생각했고, 그로 인해 당시의 경험은 국민적 수치로 간주하는 소리들이 높이 일었다. 어떤 평론가는 516 직후의 지식인들의 태도에 관해 “한국인들의 국민성 가운데 현대 민주적 생활 방식을 건설치 못하게 하는 결정적인 결합이 있지 않나 하는 끈질긴 의문이 한국인들의 마음 속에 존재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김정원 1, 93쪽)

 

⑵ ‘충성하는 이’를 편애한 권위주의 정치

 

이상의 설명에서, 자유당 지도부에 대한 몇가지 흥미 있는 관찰이 가능하다. 자유당의 강경파 핵심인물들 중 한명을 제외한 모든 인물이 일제 치하에서 변호사 훈련을 받아 검사나 판사로서 일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단 한명의 예외인물인 이익홍은 경찰관을 지냈다. 이들은 모두 과거에 교육을 제대로 받고 관료로 화려한 경력을 가진 인물들이었다. 이들 대다수는 과거 경찰이었거나 내무부에 근무한 적이 있어 경찰 조직과 긴밀한 유대를 가지고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들은 한결같이 어느 야당정치가가 ‘해바라기성 정객’이라 쏘아붙인 속성을 지닌 인물들이었다. 민주당 국회의원이었던 엄상섭 의원의 말에 의하면, 이 같은 인물은 “정치적이거나 심리적, 기타 여러 가지 이유에서 권력의 그늘에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인물들이었다. 이 같은 ‘권력의존적인’ 인물은 언제나 권력을 잡은 사람에게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길 밖에 선택할 줄 모른다. 동시에, 이들이 권력을 얻는 방법으로 알고 있는 유일한 방법은 억압적인 힘을 사용하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경찰이 이 같은 힘을 제공하였다. 권력 의존적인 엘리트들은 이승만의 총애를 얻기 위해 내부 투쟁을 벌이지 않을 수 없었고, 이 투쟁에서 이기는 사람이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경찰을 장악할 수 있었다.

이승만 행정부의 마지막 4년간은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경찰은 자유당의 실력자들의 압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 자기 관할 하에서 자유당이 다른 지역에서 보다 적은 득표를 할 경우 해당 경찰서장(최고 책임자)은 파면되거나 좌천되었다. 자유당의 실력자들이 지닌 정치권력은 유권자들에게서 얻은 자신의 인기도나, 자신의 지도력에서 온 것이니 아니고 이승만에게 충성을 보일 수 있는 능력에서 온 것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승만 자신의 권력은 어디서 온 것인가? 그가 가진 개인적인 카리스마에서 온 면도 있었다. 그러나 이 개인적인 카리스마의 효과는 급격히 떨어지고 있었다. 그 이외에 이승만이 강압적인 경찰력을 조종할 수 있는 능력이 그의 권력을 뒷받침했다. (한승주, 48쪽)

 

한국인은 일본의 식민통치로부터 권위적 발전 모델을 경험했으며, 이러한 경향은 한국의 국가형성을 담당하는 미국관료들과 협조하는 과정에서 강하게 드러났다. 일본의 식민통치를 경험하는 동안 한반도에는 근대적 산업 시설이 들어섰고, 많은 한국인이 일본 군대에 징집 및 징용되었으며 그 중 일부는 식민 관료 체제를 경험하는 등 새로운 형태의 통치와 생산양식을 경험했다. 때로는 한국인이 식민 경험에서 배운 능력이 독재정권을 허용하는 미국인의 참을성과 잘 맞아떨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것들은 한국에서 반공정권의 등장을 촉진했는데, 군대를 만들거나 부유한 자본주의 국가를 실현할 수 있는 경제발전 모델을 모색하는 것이 이에 해당한다. 또한 한국인은 자신들의 식민지배 경험에서 미국인이 소개한 것과 큰 차이가 있는 근대화에 대한 想을 갖게 되었다. 결국 미국의 영향에 의해 한국에 등장한 국가와 군대 등 많은 기구와 조직은 지나친 중앙집권화를 수용했는데, 그 정도는 미국 정부가 예상했던 것보다 심했다. (그렉 브라진스키, 23-24쪽)

 

첫째, 한국의 전통적 정치문화는 가족주의이다. 오랜 전통으로 가문 또는 효 개념을 중심으로 하는 가족주의, 두레, 품앗이 등의 풍습, 상호 협동을 목적으로 하는 각종 계의 전통, 혈연, 지연, 학연 등의 1차적 지대의 강조에 의해 공동체성을 형성하게 된 역사적 근거로 지적되고 있다. 가족주의는 가족이나 문벌에 대한 강렬한 소속감과 충성심을 뜻하지만 이러한 심리적 차원이 제1차적 집단에 대한 집착으로 나타나 분파주의나 파벌주의가 정치문화에 뿌리 깊게 남아 사회적 통합을 지연시켰다.

가족주의의 의식이 지배하는 정치문화에서는 사람을 뽑거나 승진시키고 평가하는데 있어서 객관적인 실적이나 능력보다는 연고관계를 더욱 강조하여 귀속주의적 현상이 나타나고 정실주의가 더욱 강조되게 된다. 또한 지배층과 피지배층인 일반 국민과의 관계에 있어서 일반적, 보편적 관계보다는 친족, 친구, 동향, 동창 등의 귀속주의적 정실관계가 크게 작용한다. 나아가 정책결정이나 행정행위와 같은 공적 차원의 행태에 있어서 합리적 근거나 객관적 기준에 의해 판단보다는 제1차적 관계 집단의 이익이나 가치를 먼저 고려하는 나머지 사회 전체의 이익이 그만큼 소홀하게 취급되는 것이다.

이러한 정치문화에서는 공과 사의 구분이 혼돈되고 인적, 물적 자원은 개관적 우선순위에 의한 기준이나 능률의 원리에 따라 배분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지배 계층의 개인적 관심에 따라 선호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개인이 지배하는 사회이기 때문에 집단간에는 적대적인 관계를 조성하여 사회적 통합을 막고 사회체제의 응집력을 저하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따라서 가족주의는 전통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데 기여하였지만 사회적 활력을 저해하여 전통사회의 정체성을 면치 못하는 부정적 요소가 존재한다.

둘째, 한국의 전통적 정치문화는 권위주의이다. 고대로부터 강력한 신권적 통치의식, 경천경애사상, 가부장적 전통, 남자지배 전통, 왕도정치사상, 군주주의 전통, 관료적 엘리트주의, 소수권력층의 엘리트 의식, 전통적으로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치, 유교의 삼강오륜, 계층에 따른 위계적인 사회적 구조와 계급의식, 관의 지배와 민의 복종적 전통, 관습과 규범에 대한 복종, 일제의 관료적 식민통치, 지도자에 대한 신뢰와 복종적 태도 등 권위주의적 성향을 형성한 역사적 근거라 지적하고 있다. 조선조의 정치문화에 있어서 유교는 조선의 거의 모든 지역과 시기에 있어서 파급되었으며 각 사회계층에 있어서 다소 차이가 있었을지라도 어떠한 형태로든 침투되어 정치 환경의 요소로서 작용하게 되었다. 유교적 이념에 의해 정치적 목표를 세우면서 대외적으로는 사대교린의 국제관계가 성립되고, 사회적으로는 사대부를 중심으로 엄격한 신분제도가 이루어지면서 집단내의 가부장권을 강화하고 문화적 정향이 우선하는 문화 지향적 정치체제가 형성되었다. 조선시대의 규범윤리와 정치는 지배자와 피지배의 구분에 의한 위계적, 수직적으로 복종하는 관계로 정치사회가 이루어졌다. 유교적 도덕주의는 법과 제도를 정치권력의 정당성과 사회권위의 원천으로 파악했던 서양의 현실적 인간관과는 대조적인 정치이론을 형성시켰다.(성병욱, 105-106쪽)

 

해방후 한국 사회에서 종교지도자들의 정치사회적 태도는 국가와의 관계에 의해 중요한 영향을 받아왔다. 특히 종교적 시장상황에 대한 국가의 빈번하고도 강력한 개입은 종교적 시장상황에서의 성공에 사활적 이해관계를 갖는 성직자층의 정치사회적 태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미군정과 1공화국은 주로 차별적인 법률을 통해(불교와 유교, 민간신앙의 경우), 진보적 분파에 대한 억압을 통해(유교․천도교․대종교의 경우), 특권과 부의 제공에 의해(불교의 비구측과 기독교인들의 경우) 종교영역을 통제하고자 했다. 이 시기의 국가는 마두로가 제시한 다양한 헤게모니 전략들 가운데, ‘법적-정치적 전략’ ‘억압전략’, ‘경제전략’을 주로 구사했다고 말할 수 있다. 국가의 권위적이고 차별적인 종교개입이 보다 현저했고 따라서 이것이 국민적 관심사로 부상했던 것은 미 군정기보다는 이승만을 정점으로 하는 1인 독재체제였던 제1공화국 시기였다. 종교영역에 대해 고도로 개입주의적인 국가에 대해 각 종교의 지도자들은 높은 정치적 관심으로 반응했다. 이 시기에 정치참여에 소극적이었던 종교를 발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개신교에 국한해서 보면, 혼인을 통한 인척관계 수립이나 기존 문화과정과 교육제도에 대한 개신교 지도자들의 편입이 적지 않았다는 점에서, ‘혼인전략’과 ‘교육-문화전략’도 중요한 헤게모니 전략으로 활용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종교영역에 대한 국가의 편파적인 개입에 의해 기존개신교 교회들의 지위는 점점 특혜적인 것으로 되어갔으며, 개신교 지도자들은 국가정책에 대해 거의 맹목적인 지지를 계속했다. 개신교 지도자들과 고위 관료 및 정치인들과의 교류와 통합이 매우 활발하게 진행되고 개신교 신자들은 국가기구의 중핵으로 진출했던 반면, 다른 종교들은 국가권력에 대한 접근능력을 점차 박탈당했다. 국가의 종교적 특혜에서 배제된 다른 종교의 지도자들은 대체로 국가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다. 한국전쟁 이후의 천주교 지도자들, 단정 수립 이후의 유교 및 대종교 지도자들, 대처승들을 중심으로 한 불교 교권세력에게서 이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갚은 상황은 필자가 ‘권위주의적 통제 모델’이라고 이름붙인 일련의 가설들, 즉 “국가가 권위주의적이고 개입주의적일 수록, 국가는 종교영역의 특정 부문에 대해 선택적․편파적으로 행동할 가능성이 높다. 특히 1인독재체제에 가까울 수록 이 같은 경향은 더욱 두드러질 것이다. 이 경우 종교 지도자층은 교리를 불문하고 정치에 대한 높은 관심을 나타내는 경향이 있다. 권위주의적 국가가 공직 취임이나 다른 특혜들에서 특정종교 혹은 종교분파에 대해 배제적일 수록, 그 종교 혹은 종교 분파의 지도자층은 국가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취할 가능성이 높다. 반면 권위주의적 국가가 공적 취임이나 다른 특혜들에게서 특정 종교 혹은 종교 분파에 대해 포용적일 수록, 그 종교 혹은 종교분파의 지도자층은 국가에 대해 투항적 태도를 취할 가능성이 높다. 한편 국가가 민주주의적이고 자유방임적일 수록, 국가는 종교영역의 특정 부문에 대해 공정하고 중립적으로 행동할 가능성이 높으며, 종교지도자층은 정치에 대해 무관심한 태도를 취할 가능성이 높다”는 가설들을 대체로 지지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거이다.(강인철, 192-193쪽)

 

 

이승만의 권위주의적 행태가 점점 뚜렷해짐에 따라 자유당은 다시 한번 중앙집권화의 정도를 강화시키기 위해 당을 재조직하였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당무위원회라는 강력한 집행기구가 설치되었다. 당무위원회는 이승만에게 충성스러운 9명의 위원으로 구성되었는데, 이승만의 후계자로 지목된 당의 실질적 리더이던 이기붕이 위원장을 맡아 이끌어 나갔다. 당무위원회는 당무를 주도해나가는 핵심적 결정권을 공식적으로 부여 받았다.

당의 통제 강화 목적은 의회내에서 당의 통일성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하여 당의 공천과정은 중앙집권화되었다. 공천과정에서 지구당 전당대회는 폐지되었고 이기붕을 중심으로 하는 4인의 비공식적 코커스가 모든 후보공천에 관한 결정을 내린 이후에 이승만의 최종적 승인을 받는 절차를 거쳤다.(백영철, 181쪽)

 

유교사상의 영향은 한국정치에서 사회관계의 조직이나 제도보다는 가족, 혈통 등 귀속적인 인간관계나 사적 유대를 중심으로 발전하도록 하였다. 민주주의 가치관이나 자유주의, 합리주의와 같은 정치적 태도에 서툴게 되어 능력이나 업적 또는 정책과 정당중심의 선택보다는 친척, 동창, 파벌 등 비공식적 차원의 연대관계를 중시하고, 이를 통해 지지와 충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정치의식의 경향으로 남게 되었다. 유교문화는 시대상황이 어려울수록 공동체관리를 위한 효율적인 가치로 시작된 유교사회의 보수적인 성격으로 인하여 도덕적인 강조가 사회일반에 퍼지고, 이러한 추상적인 가치의 지식적 확산은 사회일반에 대하여 억압적 구조를 지니면서 지배층을 공고히 하는 경향으로 유지되어 왔다. 전근대적인 유교문화가 해방 후에도 강인하게 온존하는 한편 정치나 사회의 퇴영성을 반영하는 위세를 떨쳤다. 이승만의 통치는 전근대적인 유교문화의 제약을 받음과 동시에 통치자와 지배층의 성격을 반영하여 정치문화에 영향을 미쳤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에서 공부하고 오래 생활하면서 민주주의를 체득하였음에도 양녕대군의 후예로서 지배의식이나 양반의식이 매우 강하였다. 자유당은 제1공화국의 거대 여당이었으나 정책정당이 아니라 이승만 대통령의 담화나 유시를 봉행하는 권력기관이었다. 자유당은 이승만의 사적 정당이었고, 이승만 대통령과 운명을 같이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이승만의 국무회의 운영방식, 정당운영 방식은 한국의 국가운영과 정당정치, 의회정치, 관료행정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다. 앞 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제1공화국 시기 전근대적인 의식이나 문화가 꽤 광범위하게 잔존해 있었기 때문에 이승만 대통령은 전근대적인 성격이 강한 유교문화를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활용하고자 하는 의도가 강하였다. 유교의 유산은 해방 이후 민주주의를 도입하고 정착시키는 과정에서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으며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국민들의 삶과 사고의 전반에 걸쳐 유교적 가치는 알게 모르게 내재해 있다.(성병욱, 113쪽)

 

그때까지 이승만과 한민당은 서로의 필요에 의해 제휴했지만, 권력을 장악한 이승만으로서는 더 이상 한민당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았기에 한민당세력을 배제한 것이다. 당시 한민당은 미 군정 하에서 빚어진 부패와 혼란에 책임이 잇다고 인식되었기에 국민들로부터 인기도 없었다. 그리하여 이승만은 군정관리를 배제할 방침이라고 밝혔고, 이 일환으로 그는 한민당의 주축을 이루고 있던 지주계급을 약화시키기 위해 농지개혁을 단행했던 것이다. 이에 대한 반발에서 한민당은 그 후 내각책임제 개헌을 추진했다.(심지연, 136쪽)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정권을 장악한 이승만은 정치권력 강화에 나섰다. 우선 그 동안 협력 관계를 취해왔던 한민당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 강화를 시도했다. 그는 1948년 8월 정부 수립이후에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서 한민당의 보수세력과 격렬한 힘겨루기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이승만은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하고 정치적 라이벌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지지자와 반대자 모두를 뒤흔들어 놓을 정도로 강력한 전략적 수완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이 과정을 능수능란하게 조절했으며, 자신의 정치기반을 구축하고 강화하기 위한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특히 자신에게 충성하는 사람에게 요직을 제공하고, 경쟁자는 제거했다. 대통령 취임 직후 그는 미 군정에서 활약했던 한민당 인사를 모두 핵심 관직에서 몰아냈고, 대신 자신에게 충성하며 신뢰할만한 인사를 대거 채용했다. 1949년 3월에 주한 미국 대사관이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미 군정에서 주요보직을 지냈던 사람들 중에서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한 이후에 장관이나 차관으로 채용된 사람은 없었다. 이 보고서는 “내각에 등용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이승만과의 개인적 친분이나 그에 대한 충성심이다”라고 평가하며, “(이승만은)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반대되는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은 아예 배제했다”라고 덧붙였다. 이처럼 지지자를 관료로 채용하고, 반대파를 배제하는 경향은 이승만이 집권하는 동안 한국 정치문화의 뚜렷한 특징으로 자리잡았다.(그렉 브라진스키, 42-43쪽)

 

그러나, 제2공화국에서 실질적인 행정수반의 역할을 수행하였던 국무총리의 행정권력 집중도와 제1공화국 이승만정권의 대통령에 대한 행정권력 집중도를 정부조직법에 근거하여 비교하면 제2공화국에서의 행정권력이 실제적으로 더욱 집중되고 강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본 연구는 두 공화국의 정부조직법을 법리적으로 해석한 결과, 제2공화국이 의원내각제로 나아가게 된 배경으로 널리 알려진 보편적 인식, 즉 이승만대통령 일인에게 권력을 집중함으로써 야기되었던 독재적 정부운용을 타파하고 더욱 민주적인, 즉 권력분산적인 정부체계를 구현하고자 했다는 보편적 인식과 실제 제2공화국의 정부조직법에서 국무총리에게 허용하고 있는 집중된 행정권력이 서로 부합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제2공화국이 의원내각제를 채택하였으므로 행정수반의 기능이 대통령에서 국무총리로 이동된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지만 정부조직법을 상세히 살펴보면 주요 조항에 특수 조문 내지 조항을 삽입하여 국무총리의 행정 각부에 대한 지휘・감독 권한과 공무원 조직에 대한 통제력을 오히려 강화하고 확대함으로써 행정권력이 제1공화국 후반기 대통령제 하에서보다 훨씬 더 집중되어 있다는 점에서 다두제적 경쟁체계를 지향하였던 제2공화국의 설립이념과 법리적으로는 아이러니칼하게도 상반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제2공화국은 정부 형태 및 행정의 실제적 운용에 있어서 정부조직법에 명시하였던 국무총리의 행정권력 강화 및 확대 시도와는 달리 국무총리가정국의 주도권을 전혀 장악하지도, 또한 할 수도 없었던 상황으로 점철되었었다. 즉 극단적인 정국혼란과 사회무질서, 공무원 관료조직에 대한 통제력 상실 등으로 법으로 명시된 행정권력이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 없었던 시기로 평가할 수 있다. 이는 정부조직법이라는 법적 체계 또는 법적 근거와 상관없이 국정지도자 또는 행정수반의 개인적 정치력과 지도력, 그리고 사회상황이 적절히 부합하여 질 때, 행정권력의 집중과 운용이 독재적・독단적이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아니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 점에서 행정권력의 집중도가 상대적으로 미약하였던 제1공화국의 이승만정부는 독재적 정부운용이었다고 평가되고, 거의 수상독재에 가까울 정도로 행정권력을 강화하였던 제2공화국 장면정부는 민주적 정부운용이었다고 평가되는 역사적 아이러니가 나타났던 것이다.(이미애·박윤성, 51-52쪽)

 

부산정치파동은 대통령 직선제와 양원제를 골자로 하는 ‘발췌개헌안’을 임시수도 부산의 국회에서 이승만의 재집권을 위해 통과시킨 최초의 헌정파괴행위였으며 전시독재의 정점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국회내의 간선 방식으로는 대통령 재선이 어렵다고 판단한 이승만은 1951년 11월 30일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을 제출했으나 원내자유당 세력도 반대하는 가운데 진행된 1952년 1월 18일의 표결에서 반대 143대 찬성 19 기권 1로 간단히 부결되었다. 정부에서는 임기 말기의 국회가 의원들의 무대를 상하양원으로 확대시킬 수 있는 양원제를 받아들이는 대신 국회 내의 대통령선거권을 국민전체에 양보할 것으로 기대하여 통과를 낙관했었다. 그러나 국회로서는 최대의 권한인 대통령 선출권을 양보할 이유도 없었고 입법권을 독점할 수 있는 단원제의 특권도 포기할 이유가 없었다. 결국 이승만은 대통령직선제 반대 세력이 다수였던 당시 국회의 야당성을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국회의 의견을 거스르면서까지 개헌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당시 개헌 반대파의 반대 이유는 양원제가 국민의사를 양분하여 국회 기능을 약화시키고 국정처리를 지연시키며 대통령직선제는 당시 국민의 교육수준이 저급하고 무비판적이어서 집권당의 권력 이용대상이 되기 쉽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국민을 저평가하는 야당의 반대논리는 정부가 국민을 동원하여 관제데모(개헌안부결 반대민중대회, 국민대표 소환운동, 국회해산 데모 등)를 할 수 있게 하는 빌미를 제공했다. 야당은 야당대로 정공법을 택했다. 민주국민당과 원내자유당 간부로 구성된 구공화구락부, 민우회의 일부 및 무소속의 일부 의원들이 야당연합을 형성하여 1952년 4월 16일 재적의원 3분의 2를 상회하는 123명의 연서로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던 것이다. 이에 이승만은 1월 18일 부결된 개헌안을 다소 수정하여 5월 14일 국회에 다시 제출했다. 이에 야당계는 호헌구국투쟁위원회를 구성하여 원외투쟁을 전개했으며 유엔한국부흥위원단 및 기타 호응단체의 응원을 얻어 이승만의 개헌안에 맞섰으나 5월 15일 경부터 민족자결단, 백골단, 딱벌떼 등등의 관제 데모대가 국회의원 소환⋅국회해산 등을 외치며 부산거리를 누비고 국회 앞에 운집하여 절규하는가 하면 신익희 의장을 포위 위협하기도 했다.

살벌한 분위기 조성과 함께 1952년 5월 대구의 이종찬 육군참모총장실에 1개 사단을 부산에 파견해 치안을 유지하라는 이승만으로부터 긴급명령이 하달되었다. 목적은 치안유지가 아니라 국회에 군대를 동원해서 압력을 가하려 했던 것이다. 이종찬은 미국의 압력도 있고 해서 파병을 거부했다. 이승만은 이종찬의 파병 거부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그의 충복인 원용덕 헌병 사령관을 동원해 5월 25일 0시를 기해 임시수도 부산을 포함한 영남과 호남 지방에 잔여 공비 소탕이란 명분아래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또한 50여명의 국회의원들을 국제공산당과 관련 있다고 조작하여 연행 한 후, 정헌주 원내자유당 의원 등 8명을 구속했다. 사태 초기에 미국은 국제여론을 의식해서 직접적으로 한국에 압력을 가하기보다는 유엔한국부흥위원단을 내세워 이승만의 국회탄압을 제지하는 정책을 택했다. 위원장 플림솔(Plimsoll)을 비롯한 유엔한국부흥위원단 위원들은 5월 28일 저녁 이승만을 방문하고, 한국의 헌법조항을 들며 계엄령의 불법성을 지적하면서 부산시의 계엄령해제, 국회의원 석방 등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전달했다.(이완범, 201-202쪽)

 

이것은 이승만이 주도하는 정당의 결성은 국내 다른 정치세력과이 대립관계로 인해 자신의 권력기반으로 정당을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공산주의에 대항하기 위한 것과 민주주의를 위한 것이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이승만은 당시 정세와 관련하여 재차 통합과 반공을 강조하였따. 즉, 이승만 자신이 일민주의 4대 정강을 중심으로 전 국민적인 통합운동을 전개시키고자 하였으나, 정당만이 중요시되고 당파성만이 나타나니 정당주의를 정지시키고자 한 것은 대한국민당 결성에서 보여준 소극적인 태도의 이유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정당운동 대신 이승만은 사상, 교육적 측면의 국민운동을 강화하였는데 그 내용은 일민주의의 보급과 확대였다. 이는 당시 국민운동의 주축을 이루었던 대한국민회, 대한청년단의 사상교육의 주 내용인 반공과 일맥상통하는 활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안호상은 공산주의를 ‘인류의 적’이요 ‘평화의 좀’이라고 규정하고, 공산주의는 가는 곳마다 파괴요, 닥치는 때마다 싸움만을 일으킨다며, 공산주의에 대한 증오심을 유발시키고 있다. 그리고 최대의 적이며, 세계 공통의 적인 공산당을 제거하려면 일체의 지방열과 파당심을 버리고 서로 함께 뭉쳐 한겨레, 곧 일민의 정신만을 지켜야 민족의 평화와 국토의 통일을 쉽사리 이루고 자유로운 한겨레 일민이 되며, 또 위대한 일민의 나라와 일민의 세계를 만들게 될 것이라며 공산주의에 대한 적대감과 함께 이민주의로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김수자, 55쪽)

 

국가 만들기의 문화적 기획을 이승만을 중심으로 구축하고 실천해가려고 했던 제1공화국의 기념에 대해, 516 이후 집권한 박정희 체제는 “개인 우상화의 내용에 편중하는 경향”이 많았고, “구정권의 시정이 정도를 벗어”나 정부와 국민의 거리가 멀어졌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새로운 정부는 김구, 신익희, 김창숙 등 이승만의 정적이었던 인물들에 대한 재평가와 기념사업을 통해 정권의 도덕성을 설득시키려고 했고, 제대군인과 전몰장병, 유가족들에 대한 보훈 사업을 강화하면서 이들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제1공화국의 대한뉴스가 이승만과 한복 입은 서양인 아내 프란체스카, 군복을 입은 수양아들 이강석을 끌어들여 연출했던 어색한 홈드라마였다면, 박정희 시대의 대한뉴스는 장모에게 절하는 대통령 사위까지 등장하는 박정희 일가의 그럴 듯한 홈드라마로 교체된 것이었다. 전쟁은 여전히 국민 동원과 규율의 측면에서만 반복적으로 환기되었고,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으로서만 기념될 뿐이었다.(이화진, 222쪽)

 

정부 수립 후, 해방 공간에서 극대화되었던 지도자에 대한 열망은 곧 이승만으로 수렴되어 갔다. 국가의 존립을 위해 국민과 민족의 대표자이자 최고 영도자는 오직 이승만이어야 했다. 1949년 이승만은 “하나의 국민으로 대동단결하여 민주주의의 토대를 마련하고 공산주의에 대항한다.” 는 일민주의(一民主義)를 선포했다. 그리고 이것은 대한민국의 국시이자 민족의 지도원리가 되었다. 여기에서 하나의 국민이란 피와 사상이 동일한 사람들의 집단을 가리킨다. 통합을 방해하는 분자들(공산주의자들)을 국민으로 보지 않는, 철저한 반공주의 노선으로 똘똘 뭉친 그 통합의 중심에는 ‘국민의 (피와 사상의) 아버지’ 이승만이 있었다.

대통령을 ‘국부(國父)’로 표상한다는 것은 사실 만인의 평등을 주창한 근대 민주주의 이념에 위배된다. 하지만 오랫동안 서구 민주주의 체제를 몸으로 경험해 왔다는 이승만은 스스로도 국민과 대통령 사이의 관계를 전근대적인 위계로 설정하고 이를 자연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잘 알려진대로 그는 조선 왕조의 후손인 ‘전주 이씨’임을 공공연히 강조했다. ��이승만박사전��에 대해 발매 금지 처분을 내린 것도 그와 그의 가계가 국민위에 군림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이화진, 204-205쪽)

 

이승만 정권의 성격으로 거론되는 또 하나의 정치이론으로는 권위주의 체제가 있다. 권위주의 체제는 2차 대전 종결 이후 독립된 신생국가의 정치적 성격으로 많이 거론되고 있다.

권위주의 정치체제는 단일권력보유자가 정치권력을 독점하여 권력 대상자 즉 국민들은 정책결정, 또는 결정과정에 효과적으로 참여시키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의 정책결정을 국민에게 부과하는 과정만 거치기 때문에 형식상 민주주의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해도 그 실질적 운영이 헌법상의 규정과는 다르게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민주적 헌법제도는 단지 외관을 장식하는 데 불과하게 되며 제도는 집권자의 조종에 의해 헌법상의 규정과는 관계 없이 운영되므로 집권자, 즉 대통령에게 정치권력이 다른 어떠한 국가기관보다 월등하게 집중하게 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승만 정권은 여러 정치조직 및 정치과정을 민주적으로 제도화시키는데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이승만 1인에 의해 권력이 전횡적으로 독점되는 통치체제가 구축되었다고 할 수 있다. 즉 헌법과 권력기구 등 법적, 제도적인 측면에 있어서는 민주적인 성격을 나타냈지만 이승만은 자신의 정권 장악, 권력독점과 그 유지를 위하여 독단적 행동을 취하였으며 정치적 다원성을 상당 부분 억압적으로 통제하였다. 이러한 것들을 이유로 이승만 정권은 권위주의적 성격이 강하였다고 할 수 있으며, 이것은 1954년 이후 영구집권체제를 위한 사사오입 개헌이 통과되는 시점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김수자, 7쪽)

 

제헌 작업을 주도한 유진오는 한민당의 의견을 반영하여 애초에 헌법의 권력구조를 내각책임제로 만들었다. 원내 다수의석을 차지한 한민당으로서는 내각책임제가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가장 잘 부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로부터 대통령 후보로 인정받고 있던 이승만은 허울뿐인 대통령이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내각책임제를 강력히 반대했다. 그 결과 헌법의 권력구조는 대통령제로 급선회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내각제적 요소가 다분히 섞인 대통령제 헌법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김일영, 71-72쪽)

 

한국전쟁 이후 한국군은 부산정치파동 당시와는 다른 의미에서 정치화되어 있었다. 이 당시 군의 정치화는 주로 부패와 선거관여로 나타났다. 한국전쟁이 끝나자 이승만은 탁월한 용인술을 가지고 이중지배구조하의 정치화된 군부를 요리했다. 그는 군부의 직업적 이해를 가능한 한 보장해 주면서 동시에 육군 특무대를 이용해 군부에 대한 감시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또한 군내부에서 특정 세력이 지나치게 비대해져 자신에게 도전해오는 것을 막기 위해 몇 개의 파벌을 양성하여 서로 견제토록 하는 수법을 사용했다. 이러한 용인술 덕에 이승만 정부하에서 군부의 정치화는 주로 부패로 나타났다. 막대한 군수물자를 빼돌려 사리사욕을 채우고, 그 중 일부를 정치권에 상납함으로써 자신들의 진급을 보장 받는 것이 1950년대 정치화된 군인의 대표적인 모습이었다. 그리고 선거 때마다 여당에 유리하게 군을 동원하는 것도 이 무렵 군의 정치화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그러나 4․19 혁명을 거치면서 군의 정치화는 그 양상이 변하기 시작했다. 사회의 민주화 움직임은 군에도 영향을 미쳤다. 군 내부에서도 이승만 독재에 협력했거나 부패한 장성이나 장교들을 추방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김일영, 302-303쪽)

 

앞서 논의한대로 제헌국회 말기까지 정부는 국회내에 자신을 지지해줄 어떠한 정당적 기반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반 이승만 경향의 민국당과 진보적인 반정부 성향의 소장파의 존재는 국회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정부에 불리하게 만들어놓은 상태였다. 일부 갈등의원 중에는 토론과정에서 정부를 지지하는 의원이 전무한 경우도 있었다. 헌법개정안이 국회에 회부되었을 때도 원내의 친이승만 세력인 대한국민당은 반이승만세력인 민국당에 비해 여전히 소수였다. 종종 정부는 ‘삼권 분립 원칙의 위반’과 ‘의회우월주의’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

이러한 조건에서 정부는 법안 제출이나 토론에서의 자기방어와 같은 의회갈등에 직접적으로 개입할 수 밖에 없었다. 정부는 국회가 통과시킨 법안들에 대해서 재의와 수정을 요구함으로써 반대의사를 표시했다. (백영철, 130-131쪽)

 

⑶ 건국과정

 

미국이 냉전정책을 한반도에서 구체화한 그 산물로 성립한 이승만 중심의 정부는 출발에서 單政 반대파를 제외함으로써 국민의 상당부분을 참여에서 배제시켰으며, 이승만 집권 기간을 통하여 초창기 건국에 참여했던 정치세력들은 분화되어 이승만과의 정권 투쟁 상대로 변화해 갔다. 이승만은 그 개인의 평가로는 어떤 정권경쟁자에게도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자신을 가질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국민적 지지를 확대함으로써 이러한 자신을 밑받침하는 데는 실패함으로써 개인적 확신은 망집으로 그친 것은 같다. 이승만이 두려움을 가질 수 있는 국민적 기반을 가진 경쟁자나 경쟁세력은 제거되거나 死去해 갔고, 6․25 전쟁의 발발로 극단적 반공정책이 정당화될 수 있는 상황이 전개되자, 해방 직후만 해도 친일 지주 정당의 평가를 면하지 못했던 한민당을 뿌리로 한 세력과 권력경쟁에서 탈락한 정치인들이 ‘호헌 민주’의 명분을 독차지하면서 유일한 대체세력으로 남을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전개가 이승만의 권위와 강권에 의한 책략적 지배를 정당화시켰고 가능하게 한 것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리고 이것은 이승만정권의 비극적 종말 이상으로 부정적 경향을 현재에까지 미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른바 ‘일체감의 위기’는 건국초부터 내재화되었고 그것은 건국과정과 그 이후의 국가건설을 통해 극복되었다기보다는 더욱 심화되었다. 이승만정부의 강권성은 가엵한 지배력에서 나온 것이라기기 보다 심각하고 적대화해가는 위기에 대한 이승만 정권의 유지를 위한 유일한 수단에 불과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나마 미국의 지원이 철회되고 군대의 동원이 중지되자 일시에 붕괴되고 마는 것으로 보아 그 강권성의 기반이 무엇이었나도 폭로되고 마는 것이다. (김도현, 87쪽)

 

두 작품은 공통점으로 ‘4․19’를 배경으로, ‘연좌제’를 문제 삼고 있다. 4․19와 연좌제라는 소재의 결합은 독특하면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주지하다시피 연좌제는 죄인의 죄를 가족ㆍ친지들에게도 함께적용하는 전근대적인 형벌이다. 연좌제는 1894년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으나 공식ㆍ비공식적으로 통용되어 왔는데, 이데올로기의 대립과 분단 상황에 직면하여 이승만은 반공이데올로기의 확장과 유포차원에서 연좌제를 제도적으로 활용했다. 작중에서 4․19에 가담한 대학생과 고등학생은 가족들의 부역과 월북으로 말미암아 전도유망한 청춘의 꿈을 접어야 했다. 그들은 연좌제에 묶인 채 미국유학도가지 못하고 사관학교도 진학할 수 없다. 4․19가 추구한 민권이 궁극적으로 자유를 지향한다고 할 때, 이들은 연좌제에 묶인 채 자신의 삶을 살기보다 전대의 유업으로 인해 창살 없는 형벌을 현실에서 살아나가야 했다. 독재자의 횡포로부터 자유를 거세당했으므로, 이들이야말로 그 누구보다 자유가 목마른 상황이다. 작가는 작중에서 이들에게 자유를 가져다주지 못한다. 연좌제라는 현실의 장벽에 부딪힌 이들은 공히 4․19에 가담하여 자신을 희생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종결된다.(안미영, 319-320쪽)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적통성을 둘러싼 좌우익간의 갈등은 이후 신탁통치 문제에 이르러 본격화된다.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국에 미소공동위윈회를 설치하여 일정기간 신탁통치를 할것을 협의한 것이 알려지자 국내에서는 신탁통치 찬반논쟁이 격화되었다. 당시 미국은 조선의 임시정부를 부인하고 신탁통치를 찬성했고, 소련은 조선의 임시정부와 사회단체들의 참여를 보장하면서 신탁통치를 하는데 합의한 상황이었다. 즉, 모스크바 3상회의는 신탁통치를 전제로 한 상태에서 임시정부 인정여부가 가장 큰 쟁점이었다. 그러나 미국이 한국의 즉시독립을 주장하고,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한 것으로 언론에 알려지면서 우익 민족주의계열을 중심으로 전국적인 반탁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이때 우익계열의 여성단체인 한국애국부인회와 여자국민당은 1946년 1월 10일 독립촉성중앙부인단을 결성하여 조직적인 반탁운동을 전개해나간다. 1946년 1월 9일에는 황기성, 박순천, 황신덕, 이숙종, 유각경, 박승호, 송금선 등이 모여 독립촉성 중앙부인단을 발족하고 미군정의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반탁운동시위와 반탁을 주장하는 부녀시국강연회 개최에 주력한다. 이후 한국애국부인회와 독립촉성중앙부인단은 다시 1946년 4월에 독립촉성애국부인회(이하 독촉애부)로 통합하고, 전국에 조직되어있던 부인회를 통합하면서 조직의 세력을 키워갔다(신영숙, 2000). 이들은 해방 이듬해인 1946년 5월 31일에 우익 여성단체들을 중심으로 전국 곳곳에 조직된 부인회를 통합하기 위해 전국여성대표자대회를 개최한다(대한부인회, 1960). 1946년 11월 5일 독립촉성애국부인회와 여자국민당, 불교여성총연맹, 가톨릭여자청년연합회, 여자기독교청년회, 천도교내수회, 독립촉성여자청년단, 미군정청 부녀국 등 8개 단체가 모여 부총에 대항할 수 있는 전국적인 연대조직인 전국여성단체총연맹(이하 여총)을 설립한다. 한편, 부총은 광범위한 여성대중을 끌어들이고자 했고 조선공산당과의 긴밀한 관계를 맺었지만, 이들의 활동은 미군정 하에서 극도로 위축되어갔다.(김은실·김현영, 127-128쪽)

 

국민회의 활동 중 가장 활발하게 전개된 것이 바로 국민운동 사업이었다. 국민운동이라는 용어는 일제강점기부터 빈번하게 사용되기 시작하여 해방 이후 신탁통치 문제가 붉어지면서 대대적으로 사용되었다. 제1공화국 시기에는 국민회 뿐만 아니라 정부를 비롯하여 각 정당이나 여타 사회단체들도 국민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이러한 국민운동은 농업증산 운동, 문맹 퇴치 운동, 양곡 소비 절약 운동, 비행기․군함 헌납 운동, 의생활 개선 운동, 절전 운동, 미신타파 운동, 경제적 자주 운동, 국민 생활 개선 운동 등 여러 방면에서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제1공화국 시기 대부분의 국민운동은 국민회의 주도로 전개되었고, 그 중에서도 국민회의 관민합작 국민운동이 가장 주요한 국민운동으로 손꼽혔다. 이에 따라 국민회는 제1공화국 시기 국민운동을 주도하였으며, 명실공히 국민운동단체로 자리매김하였다.(강행숙, 43쪽)

 

자유당 조직의 또 하나의 특징으로는 각종 사회단체가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점이다. 즉 대한국민회 대한청년단 노총 농총 대한부인회 등으로, 이들 단체들의 대표들이 자유당이라고 하는 정당조직에 참여했다. 이로써 사회단체로써 자율성을 갖고 구성원의 이익을 위해 존립해야 할 조직이 정치화하는 선례를 남긴 것이다. 이 여파로 사회단체들이 후일 권력 추구에 급급하거나 정권의 도구로 변질되어 갔으며, 구성원의 이익보다는 항상 집권당의 이익을 옹호하고 대변하는 어용단체로 전락해 갔다. 자유당의 결정이 바로 이러한 성격을 지님으로 해서, 권력자의 의도에 따라 권력자의 장기집권을 위한 도구로 정당이 결성되는 선례를 남긴 셈이 되었다.

민주적인 방식에 의해 당원을 충원하고 이를 바탕으로 해서 권력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권력의 편의에 따라 정당이 창출되는 현상을 초래한 것이다. 이렇게 존립하게 된 자유당은 이승만의 권력유지를 위해 온갖 불법과 부정을 자행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이승만의 권력유지는 물론 당의 존립마저 불가능하게 만든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심지연, 138쪽)

 

한편, 이승만은 1948년 9월 독촉의 정당조직설에 대한 담화를 발표하여 정당 결성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였다. 이 담화에서 이승만은 독촉을 통해 정당을 만들어 “제1당, 여당을 만들고자 함이 아니며, 정당 제도에는 제2당이나 제3당이 있어야 민주제도가 발전할 수 있으므로” 일반 민중의 지지를 받는 정당이 결성되는 것을 지지한다는 의사를 나타내었다. 이는 당시 이승만과 대립 구도에 있던 한민당이 제1당을 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자신을 지지하는 다른 정당이 결성되기를 기대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후 이승만은 정당 결성에 대해 소극적 태도를 보인다. 그 이유는 독촉이 가지고 있는 전국적인 규모의 조직력을 그대로 유지시키는 것이 전 국민의 지도자로서의 위상을 유지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한민당 및 민국당의 조직적 활동에 대해 파당적이라며 비난하였기 때문에 본인 스스로 정당을 결성하기 보다는 정당과는 무관해 보이는 사회단체를 통해 우회적으로 정치 기반을 강화시키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1948년 10월에 발생한 여순사건은 이승만으로 하여금 반공사상을 강화시켜줄 국민운동단체의 필요성을 인식시켰다. 이것은 독촉의 국민운동 단체로의 존속을 의미하는 것이었다.(강행숙, 13쪽)

 

1948년 8월 20일, 국회는 제45차 본회의에서 “지방자치조직과 지방행정권에 대한 법안을 내무치안위원회가 만들도록 요청함”으로써 지방자치법안 마련의 준비에 착수하였다. 내무치안위원회는 12월 초순 지방자치법 제정을 위한 법률초안을 마련한 가운데, 법제사법위원회와 연석회의를 통해 법안의 최종 윤곽을 그려냈다. 내무치안위원장 羅容均은 1949년 2월 2일과 2월 8일 두 차례에 걸쳐 국회 본회의장에서 지방자치법 기획안을 낭독한 가운데, 법안 결정을 위한 심의를 가졌다. 내무치안위원회가 성안한 이 지방자치법안은 세 가지 주요한 특징을 지니는데 첫째, 지방의 자치단체를 도와 서울특별시, 시, 읍, 면으로 정하였다(1조). 둘째, 각 지방자치기관은 의회를 설치하고(12조, 13조, 17조), 셋째, 도지사와 서울특별시장, 시, 읍, 면장은 지방의회에서 무기명으로 선거한다는 점이었다(98조).

이 지방자치법안은 郡을 제외한 모든 지방기관을 기초단체로 삼는 가운데, 단체장은 지방의회에서 선출하는 간선제 방식을 택하였다. 이 법안은 지방자치의 전면화라는 관점에서 볼 때, 비록 주민 참여의 한계를 보이지만 지방의 분권과 재정자립도를 확대해 지역 주민을 위한 행정활동을 강화해 가고자했다. 이러한 사실은 1949년 2월 8일과 9일 지방자치법안의 내용과 성격에 대해 설명을 나선 윤길중의 발언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는 지방의 행정사무에 대해 국가적 사무와 분리해 “자치사무가 지방사무의 위주가 되고, 국가적 사무는 부수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지방재정에 대한 자립을 강조하며, 조세수취가 “지방세로 많이 충당”될 필요가 있다고 말하였다. 이러한 지방자치법 발의안에 대해 국회에서는 열띤 토론을 벌인 가운데, 1949년 3월 9일 본회의를 통해 이를 통과시켰다. 통과된 지방자치법의 내용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점은 서울특별시와 시․읍․면의 단체장을 직선제로 하고, 도지사를 도․시․읍․면의원이 선거하도록 하는 등 원안보다 지방인 참여의 폭을 확대시켰다는 점이다. 이 지방자치법은 공포 후 10일을 경과한 후에 시행토록 규정되었으나, 정부에서는 이 법안에 대해 재의를 요청했다.

당시 이승만 정부는 이 지방자치법을 수용할 수 있는 상황에 처해있지 못하였다. 그 배경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는데 첫째, 4․3항쟁과 여순사건 등 정부 수립 이후 발생한 민중봉기로 인해 국내의 사회혼란이 가중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14연대 군인들의 ‘반란’으로 촉발된 여순사건은 분단정부에 대한 ‘국민의 반감’을 표출한 것이며, 신생국가인 남한의 안보적 한계 역시 여실히 드러내 보였다.이 사건 이후 정부는 국민반 설치와 국가보안법 실시 등 사회적 감시와 통제를 강화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방자치를 실시한다는 것은 자칫, 사회적 감시와 통제를 이완시켜 분열을 높일 소지가 있었다.(곽경상, 5-6쪽)

 

독촉은 이승만 중심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김구 중심의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가 통합하여 결성되었으며, 해방 직후 우익진영을 대표하는 가장 중요한 사회단체였다. 결성 초기에는 오하영의 신한민족당계열을 중심으로 하여 임정 세력이 주도하였지만, 1946년 6월 신익희가 정치공작대를 이끌고 이승만 진영에 가담함으로서 이승만이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다. 동년 9월 이후 신익희 계열이 중앙에서 탈락되고 민족통일총본부 계열의 인물들이 중앙 본부를 장악하게 됨으로서 이승만의 주도권이 강화되었다. 이와 같이 임정 계열과 이승만 계열의 권력 다툼 끝에 이승만이 중앙 조직을 장악하게 되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며 독촉은 ‘국민회’로 명칭을 바꾸고 이승만의 가장 강력한 지지 세력이자 주요 우익단체로 거듭나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전쟁 이후 국민회를 통한 정치적 활동에 한계를 느낀 이승만은 자유당을 창당하였다. 이에 국민회는 자유당의 기간단체로 편입되어 활동하였다.

국민회의 조직과 운영을 살펴보면 국민회는 중앙에 전국대회,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집행위원회, 운영위원회의 4개 기관을 두고 조직의 운영을 이끌어 나갔으며, 총무부•재무부•조직부•선전부•훈련부•정경부•문화부•청년부•조사부•감찰부 등의 각 부서에서 중앙 본부의 실질적인 관련 업무를 수행하였다. 또한 일찍부터 지방 조직에 관심을 기울임으로서 미군정기에 이미 지방 지부의 결성이 활발하게 진행되어 지방 우익세력의 주요한 근거지가 되었다. 그리고 제1공화국 시기에 지방 지부 조직을 더욱 강화하여 전국적인 조직망을 완성하였다. 특히, 국민회는 다른 여타 사회단체와 달리 모든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자동적으로 국민회원이 되게 하였고, 이를 통해 전국민의 뜻을 대표하는 단체를 표방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 행정의 말단 조직을 담당하였던 애국반을 국민반으로 개편하여 국민회의 하부 조직이 되게 함으로서 대중에 대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와 같이 국민회는 중앙 및 지방의 조직 구조를 확립하고 이를 더욱 강화하여 총재 이승만으로부터 중앙 본부, 지방 지부, 말단의 국민반에 이르는 체계적인 지방 조직을 완성하였다.(강행숙, 71-72쪽)

 

그 이후 미군정과 이승만․한민당 세력은 긴밀히 합심하였다. 우선 1948년 3월 17일, 미 군정은 국회의원 선거법과 선거구역표를 확정․발표했는데, 이는 대부분이 이승만과 한민당세력에게 유리한 것이었다. 우선 중앙선거관리위원회를 국회 선거위원회로 개칭하였는데, 국회선거위원회 대다수 구성원은 한민당원들이었다. 또한 그 예하의 도․서울시 선거위원회와 선거구 선거위원회 및 투표구 선거위원회 구성에 있어서도 각급 심리원(법원)장의 겸직이나 추천인사가 많았고, 행정구역의 장이 이를 담당하는 경우도 흔해 일반적으로는 각급 선거위원회는 이승만과 한민당세력에게 극히 유리한 官制적 성격을 띠었다.

이와 함께 미군정은 다가오는 총선거를 앞두고 이승만과 한민당을 외곽에서 지원하기 위한 대대적인 선거홍보 캠페인을 벌였다. 이는 미국식 자유민주주의의 우월성을 선전하여 소련식 사회주의체제를 비판하는 것이 주 목적이었지만, 김구 등이 표방한 민족주의 노선을 제압하기 위한 의도도 포함된 것이었다. (전상인, 464쪽)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이 상해에 머무는 동안 하지는 동 위원단의 최종결정을 기다리지 않고 일방적으로 5월 31일 국회를 소집했다. 그리고 초대의장에는 이승만이 선출되었다. 이승만은 개회사에서 5․10 선거에 의한 국회의 정통성을 두 가지로 설명했다. 첫째는 ‘역사적’ 정통성으로서 그는 국회를 1919년 기미독립선언을 위해 서울에서 개최된 국민대회 계승자로 평가했다. 둘째는 ‘상대적’ 정통성으로서 분단 이후 450만명의 북한주민이 남하하여 5․10 총선거에 참여했으며 그 일부는 국회의원으로 진출했을 뿐만 아니라 북한지역을 대표하는 국회의석 100여개를 배려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이 6월 25일에 5․10 총선거가 합당한 수준의 자유분위기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실시되었따고 결의하면서 선거 결과를 인준한 것은 따라서 사후적인 조처에 불과했다. 선거 이후 정부 수립때까지 미국은 나름대로 이승만의 권력남용을 경계했다. 미국 관리들은 한때 제헌국회에 행사되고 있는 이승만의 자의적인 권력을 견제하기 위해 상원 설치를 고려하기도 했고, 초대 대통령으로 서재필의 영입을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어떤 조처도 이승만의 권력 질주를 멈출 수는 없었다. 헌법 제정과정에서 이승만은 한민당이 제시한 의원내각제를 거부하고 대통령 중심제를 관철시켰고, 김구의 강력한 어필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헌법 전문에 명문화시켰다. (전상인, 476-477쪽)

 

-원: 그리고 또 하나 회장님 말씀에 그때 국회에 일부를 얘기하겠는데요, 참 너·나가 없었습니다. 대한민국의 건국을 이룩했는데 하나의 정신가지고 했지 한민당이고, 대동청년단이고 없었어요. 오로지 건국하자는 그 정신 하나였어요. 그거 무슨 얘기냐? 8개월 동안을 국회의석을…도별로 안 갔어요, 도별로, 강원도면 강원도 그런 것을 없애버리자. 강원도만이 우리가 대표하는 국회의원이 아니고 전 국회의원인데 전국을 잘하자는 말이야. 그러면 섞어 앉아야 그 도에 가보지 못한 사람 서로의 사정을 알아가지고 전체적인 전국 수습을 해 나가고 건설해 나갈 것 아니냐! 의석을 바꾸자! 그런 투표를 했어요. 1번, 2번, 3번 … 뒤범벅을 했죠. 나도 그때 섞어 앉았습니다. 그것을 보더라도 대한민국 건국은 국민 전체의사를 가지고 권리 가지고 하는 자부심을 가져요. 우리로선 그런데 요새 와서는 지역감정, 정권내에서 전라도, 경상도…웃기는 얘기들을 하고 앉았어요. 후배들이 우리 선배로서 그런 예가 있으니 이것을 빨리 없애라. 그 정신을 자기 고향을 사랑하는 게 우리 국민의 기본 문화에요.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김인식·원장길 증언 파트 중, 원장길씨 증언, 186쪽)

 

얘기를 들어보니까 대전 비전향 교도소에서 사소한 말다툼이 생긴 겁니다. “북로당 당원이 당성이 더 세다”“남로당 당원이 당성이 더 세다”면서 다툰 겁니다. 그러다가 “그럼 누가 죽을 때까지 당에 충성하는지 내기해 보자”이렇게 된 겁니다. 그래서 북에서 내려온 무장 안내원, 인민군대에 나온 사람들이 안내원이고, 공작원은 대개 남쪽 출신들입니다. 일할 사람은 정치공작원하고 다투다가 내기를 하게 된 거에요. 죽을 때까지. 그럼, 어떻게 하면 죽느냐 이렇게 된 겁니다. 그래서 ‘만세’를 부르게 된 겁니다. 자꾸 만세를 부르면 가중처벌이 되어서 죽지 않느냐는 겁니다. 북에서 온 사람은 인민군대 장교출신으로서 다 알다시피 당성이 센 사람이지요. 저 사람들은 안내원하는 사람도 쓸모 없는 사람은 안 보내거든요. 당성이 강한 사람을 보내는 겁니다. 여기서는 불량배를 잡아다가 하지 않습니까? 남한 출신은 인민군이 서울에 왔을 때 여기서 검사를 했다고 그러더라구요. 그러다가 인민군이 가는 과정에서 교도소에 들어오게 된 거구요. 결국 북로당 출신은 더 못해버리고 말았습니다. 몇 번 만세 부르다가 죽음에까지는 못 갔거든요. 그런데 그 남로당 출신이 만세를 계속 부르다가 가중 처벌이 되어서 결국 사형이 됐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만세를 부르니까 다른 사람들도 동조 만세를 불러가지고, 재판을 받아야 하는데 서울에서 받아야 하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다 서울로 올라온 겁니다. 그런 상황은 그 내부에 이는 심리적 상황이나 콤플렉스를 드러내는 것 아니겠습니까?(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1, 김정강 증언, 77쪽)

 

⑷ 종북좌파 민족해방운동의 敵

 

근데 이제 방안을 이렇게 보니까, 도배도 안하고, 시골 토담집은 일년에 한번이나 두 번 흙물을 타 가지고 이렇게 벽을 깨끗하게 한다구요. 인제 돈 있는 사람은 뭐 창호지로 도배하고, 돈 조금 없는 사람은 신문지로 붙이고, 그것도 없는 사람은 그냥 흙물로 이렇게 씼어요. 그걸로 벽을 이렇게 떡 씼었는데, 그 씻은 안에 글씨가, 다 인제 마르니까 보일 것 아닙니까? 그게 거기에 전부 인제 낙선데, 낙서의 문구가, 뭐라고 썼는가 하니, “민족의 반역자 친일파 이승만, 김구 타도!” 이거야, 그랬는데 써놓고 전부 그냥 그렇게 막 벼림박에 벽에 기둥에 써붙였는데, 눈에 잘 띄는데는 그거를 김구를 김성수로 바꿨어. 김구는 왔으니까. ‘민족반역자 친일파 이승만, 김성수 타도!“ 뭐 그 외에 표어가 많죠. 그리고 인제 만화를 그렸는데, 그 뭐 이승만이니 김구니 뭐 이런 사람들은 그냥 노동자가 손에다가 이런 만화를 잡아서 훑어제끼는, 거꾸로 그냥, 이런 지독한 만화도 그려놓고, 이루 말할 수 없어. 아예 내중에는 웃어 버리는, 그야말로 만화지, 그걸 실물이라고 생각하다가는, 이쪽이 신경질이 날 것 같아서 웃고 말았죠.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조만제씨 증언, 연석회의 참석 방북 때 모습 117-118쪽)

 

이승만 정권은 1950년대의 노동운동을 해방 정국의 노동운동과 단절시키는 전략으로 대처하면서 노동자들을 억압하거나 노동운동의 지도부들을 정치적으로 포섭하는 정책을 추구하였다. 주요 수단은 노동자 계급의 사회변혁적인 정치를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위해 군대․경찰을 동원하는 전략, 국가보안법과 반공법으로 노동운동을 탄압하는 전략, 노동관계법을 제․개정하여 민주적인 노동조합운동을 억압하는 전략, 그리고 언론을 중심으로 한 반공 이데올로기로 노동자들의 의식을 동원하는 전략이었다. 따라서 노동운동도 1950년대 후반기부터 이승만 정권의 이러한 통치전략에 대응하는 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4․19혁명기에는 어용적 노동조합운동을 극복하려는 이념과 노선, 노동조합운동의 조직주체를 재구성하는 이념과 노선, 그리고 정치적 민주주의의 이행 및 공고화를 위한 이념과 노선등을 응축하고 있는, 밑으로부터 다층적인 대중투쟁을 추구하였다. (김영수, 295쪽)

 

한국근대는 한민족이 제국주의의 침략에 저항하면서 국민으로 결집하여 독립된 국민국가를 건설하는 과정이었다. 1945년 광복이전까지 한국 민족주의의 주요 과제는 민주와 독립이었다. 그러나 광복이후 국토가 분단되고 남과 북에 서로 다른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에 한국 민족주의는 민족 통일을 주요과제로 떠맡게 되었다. 광복 직후 좌우익의 대립을 극복하여 좌우연합, 나아가 남북이 합작하여 통일정부를 수립하려는 노력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통일운동은 미소 냉전체제에 편승한 분단세력에 의해 탄압을 받았다. 이승만 정부는 반공주의 원칙 아래 멸공 통일 노선을 취했으며, 이러한 노선은 6․25 전쟁 이후 더욱 강화되었다. 정전이 되었지만, 남북한의 무력적 대치 상황은 계속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반공주의 지배 이데올로기는 이승만 정부의 독재체제를 강화하는 빌미가 되었다. 반공주의적 독재체제 아래에서 민족 자주적인 평화통일은 불가능하였다. 4월 혁명은 민족 자주와 민족통일이라는 민족주의적 과제를 정면으로 다시 제기하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다. (김기승, 189쪽)

 

⑸ 4․19 직전

 

4월혁명기에 정의는 정의감과 같은 도덕적 행동을 촉구하는 용어로 쓰이는 동시에 정의/불의 대립쌍을 통해 민주주의와 반민주주의를 가르는 기준으로 작동하였다. 물론 4월 20일에 대통령 이승만이 발표한 담화문에서 “우리가 법과 질서, 그리고 정의의 원칙에 충실하는 일치단결 국민으로서 서로 전진할 수 있게 되기를 오직 바”란다고 강조하고 있듯이, 정의는 저항 세력만의 전유물이 아니었지만, 혁명기에 정의의 저항적 성격이 크게 부각됨으로써 지배 집단의 정의 개념은 정당성을 상실당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학생들이 “일당독재의 횡포로 사회질서, 법질서가 극도로 파탄되어, 정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이 컸다는 점”을 봉기의 일차적 동기로 들면서 봉기가 “순수한 의거”에 해당함을 강조하였듯이, 정의는 무엇보다 법적 질서의 확립이라는 차원에서 이해되었으며 이것은 당대에 인식한 민주주의의 내포를 잘 설명해준다. 비록 건국 헌법에서 정의는 경제 정의의 차원까지 함축하고 있지만, 4월혁명기를 통해 정의는 정치적 정의로 의미가 고정되었다. 그리고 정치적 정의를 침해하는 이승만 정권은 정의에 반하는 불의의 주범으로 확정되었던 것이다. 정의에 대한 이러한 개념화 방식은 오염/정화의 상상력을 빌어 정치적 공간을 재구조화하는 데 기여했다. 그 점에서 혁명기의 정의 개념은 공간 표상 및 공간 인식과도 상관이 있다. “부정과 불의의 소굴”을 향해 학생들은 “서울의 한복판을 향해 질풍같이 달”렸다는 진술에서 우리는 정치적 공간이 바야흐로 학생들의 항거로 정화되어 새로운 정치적 공간으로 재탄생하고 있음을 목도할 수 있다. 또한 오염과 부패의 상상력은 4월혁명기에 광범위하게 확대되어 “썩은 정치 갈아보자”, “의학도여 칼을 들라 썩은 정치 수술하자”와 같은 정치 권력 비판에서부터 “우리 선배는 썩었다”와 같은 기성세대 비판에 이르기까지 큰 폭으로 확장되었다. “청․소년 학생들은 권력 앞에 굴복하는 무력한 부모 형제들을 원망도 하고 동정도 하였다. 부패 되어가는 이 나라의 현실을 젊은 우리 세대들이 타개하고 민주주의를 바로 잡을 수 있는 것이”라는 진술이나 “썩을 대로 썩어 빠진 기성사회, 낡아빠진 세대들의 장난의 흙탕 물결은 백합꽃처럼 순결한 우리 학도들에게까지 미쳐, 이젠 우리 젊은이들의 혼마저 강제로 빼앗아 가려고 한다”는 주장이 대표적인 사례에 해당한다. 이처럼 오염과 부패가 특정한 정치인들에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기성세대 전반에 걸쳐 있는 것으로 상상되었다는 점에서 ‘불의’는 전국에 범람했으며, 그 점에서 청년 학생들의 대결 대상은 광범위했던 것이다.(김미란, 197-198쪽)

 

게다가 1956년 대통령 선거, 1958년 보안법 파동 등을 거치면서 이승만 정권의 안정성에 대한 미국의 의구심은 날로 높아갔다. 1959년 콜론 보고서는 이러한 미국의 입장을 잘 보여주었다. 즉 한국정부는 대외적인 문제와 함께 “국내에서도 증대해가는 정치적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민주주의 제 제도의 성장 여부가 시련을 받았으며 정치적 불안정은 하나의 위협”이 되고, “관리들에 의한 전단과 경찰국가적 탄압은 증대하는 정치적 불안과 보조를 같이”하고 있다고 판단하였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일정한 진전이 있기는 했지만 “지난 10년-아닌 지난 반세기의 제 조건을 생각해 볼 때 민주주의의 외형이나마 현존하고 있다는 것은 아마 기적에 가까운 일”일 것이라고 할 정도였다. 그렇기에 “민주주의 제 제도는 극히 심한 시련에 직면하고 있으며 그 결과는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세계에서 보기 드물게 “미국의 신망”이 걸려있는 한국의 이러한 문제는 미국의 책임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이 보고서의 판단이었다.(황병주, 75쪽)

 

시종을 일관하여 미국식의 사법심사제 도입을 가장 적극적으로 추진한 측은 법원을 중심으로 한 법조계였다. 법조계의 노력은 짧은 시간 내에 거의 완벽한 성공을 거두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한 헌법학자의 헌법위원회제구상이 선을 보인 후, 정치인들의 본격적인 반격이 본무대를 통해 시도되었다. 그 결과는 철저히 양자의 타협이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정작 제도의 본질과 역할, 그리고 실효성 등에 관한 바른 이해 노력은 실종되고 말았다.

제1공화국 헌법위원회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 것은 바로 이러한 탄생배경과도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위헌법률심사의 제청권만을 보유하게 된 법원으로서는 더 이상 그 성공적인 운영에 초기의 열의를 유지할수 없었다. 마지못해 헌법위원회제 도입에 동의한 국회의원들 역시 말할 것이 없었다. 더구나 헌법위원회가 초미의 관심사인 행정부와의 권한 분쟁에 무용지물이거나 위험하기조차 하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되자, 의원들의 관심은 급속도로 탄핵재판 쪽으로 쏠렸다. 성공적인 운영을 책임져야 할 두 주체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진 헌법위원회제가 활성화되는 것은 애초부터 기대하기가 어려웠다. 소수자 보호라는 본래의 목적이 제대로 이해되지도 않고, 오히려 철저히 외면당한 채 도입된 헌법위원회제의 실패는 이미 예견되어 있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이영록, 331-332쪽)

 

4. 박정희

 

⑴ 반공이 국시였던 516정부

 

박정희 정권의 보수주의는 내용적인 면에서 볼 때도 개혁적 보수주의에서 후퇴한 반동적인 것이었다. 보수주의가 자기 논리를 갖추게 되면서 그리고 시대의 변화로 인해 귀족계급이 유산자 계급으로 대체되면서 보수주의는 자유주의적 특성을 갖거나 자유주의로 변모하게 된다. 이러한 자유주의는 사회주의와 경쟁하게 되자 더 많은 민심의 확보를 위해 민주주의를 수용하게 되었으며 또한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와 다르다는 점을 표현하기 위해 자유민주주의를 강조하게 된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자유민주주의를 강하게 비판했는데 이는 반동적 보수주의의 특징이었다. 반동적 보수주의는 일체의 개혁을 수용하려 하지 않으며 따라서 자유주의적 개혁도 반대한다. 자유주의는 그 특성상 개인주의적이므로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을 중시하지만 반동주의에 따르면 모든 개인은 공동체의 엄격한 전통과 결정을 따라야 한다. 일제는 천황에 대한 절대적 충성을 강조하고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보내기 위해 자유주의 이념을 비판했으며 해방 후 독재정권들은 자신의 정권 연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서구의 자유주의 이념이 한국에 맞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그중에서도 박정희 정권은 가장 강하게 자유민주주의를 비판하고 불신했다

반공주의는 보수주의 이념의 중요한 특징으로 보수주의는 유토피아와 혁명에 반대하므로 본질적으로 공산주의에 비판적일 수밖에 없다. 또한 반공주의는 한국 보수주의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한국 보수주의의 특징적인 모습이다. 한국 사회에서 반공주의가 강고해진 이유는 이승만의 단정 수립 과정에서 일어난 좌우 갈등 북한에서 배제와 폭력으로 희생된 사람들이 남하해와서 형성된 반공 극우세력의 영향등을 원인으로 들 수 있다. 이러한 가운데 보수주의는 곧 반공 반북한과 동일시되었다. 그런데 박정희 정권 시기에 들어와 반공주의는 이전과 다른 국면으로 전개된다. 반공은 제 1의 국시가 되고 반공정책과 반공교육이 대폭 강화되었으며 박정희의 집권기간 내내 독재를 정당화한 이념으로 활용되었다.(이나미, 60-61쪽)

 

박정희와 쿠데타세력은 이승만 정권의 반공이 구호에만 그쳤을 뿐만 아니라 반공을 ‘정치의 시녀’로 만들었다고 비판하였다. 반공이 반대당의 세력 확장과 집권을 막기 위한 정치도구로 전락했으며, 그에 따라 반공은 ‘허울 좋은 구두선’이 돼버렸다는 것이다. 또한 정적을 말살하는 편리한 구실로 반공이 활용되었으며, 결국 정치의 장난감으로 전락한 반공운동은 대중 속에 뿌리박지 못한채 오히려 국민의 생명을 위협하는 금기(taboo)로서 경원시되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 군부 역시 반공을 정치적 도구로 삼기 시작하였다. 쿠데타 세력은 혁명공약에서 ‘반공’과 ‘친미’를 앞세웠는데, 그 까닭은 자신들의 노선과 지향점을 드러냄과 동시에 쿠데타의 성공과 안착을 위한 정치적 고려 때문이었다. 김형욱은 “미국은 주둔 국가에서 쿠데타가 발생했을 경우 적어도 그 쿠데타 주동세력이 반공친미를 주장하는 한 미군을 동원하여 진압시킨 예가 없었다”는 의식이 있었음을 밝힌 바 있다. 반공을 매개로 쿠데타 권력의 안착을 도모한 것이다.

5․16세력은 반공을 기치로 내세웠지만 정작 쿠데타 시도시, 북한의 남침에 대해 어떠한 대비를 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쿠데타 모의 당시 ‘혁명계획서’에 대한 논의를 거듭하던 중에 동원될 부대 선정이 이루어졌다. 군 장교들의 논의과정에서 서울 김포에 자리잡은 공수특전단이 가장 적당한 부대로 지목받게 되었다. 반공을 표방한 쿠데타군이 비교적 휴전선에 인접한 공수특전단을 빼내 쿠데타군으로 활용키로 한 사실은 그들의 ‘반공’이 궁극적으로 권력 장악이라는 대의 아래 머물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또한 ‘반일’ 역시 반공주의에 수렴되기 시작하였다. 방미 길에 들른 도쿄에서 박정희는 여러차례 극동 자유진영에서 한국과 일본의 중요한 역할을 강조하였다. 뿌리 깊은 반일, 배일 감정을 ‘극동 반공자유국가’라는 동질감으로 치환해 나감으로써 한일관계의 재인식을 도모하였다. 여기에는 무엇보다도 한일 국교정상화를 통한 자금 도입의 필요성이 가로놓여 있었다. 일본 자금에 의한 경제개발 욕구는 ‘반공’을 매개로 ‘어제의 원수’와의 관계 정상화를 정당시하였는데, 이는 곧 민족의 자존심 역시 반공 이데올로기의 하위 체계 내에 한정시킨 것으로 이해된다.(김지형, 230-231쪽)

 

푸코의 논의를 바탕으로 한다면, 박정희시대는 국가권력이 규율화를 통해 전 국민을 근대적 신체로 개조시키는 시기였다. 개화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진행되어온 근대적 규율은 바로 이 시기를 통해 일상생활의 깊숙한 곳까지 침투했으며, 이러한 과정을 보다 효율적이고 강력하게 추동시켰던 것이 ‘음악’이다. 세상은 온통 무언가를 지시하는 ‘음악’으로 가득 차있었다. 군대의 나팔 소리처럼 라디오와 텔레비전에서는 애국가로 하루의 시작과 끝을 알렸으며, “국민체조 시~~작, 헛, 둘, 셋, 넷”이라는 소리인지 음악인지 모를 무언가에 맞춰 ‘건강한 육체’가 깨어나야 했다. 쓰러지는 아이들이 적어도 한 명은 있었던 애국조회에서는 사이렌 소리에 맞춰 국기에 대한 맹세를 다짐해야했고, 군복차림의 교련 교사는 호루라기를 불어댔고 이에 맞춰 구령소리, 기합소리가 울려 나왔다. 매일 아침 교실에서는 입을 모아 국민교육헌장을 외우는 아이들의 소리들이 울려 나왔으며, 점심시간에는 ‘혼분식의 노래’ 소리가 흘러나왔다. 온 국민이 일시 정지 해야만 했던 국기하강식에도 어디선가 예의 그 ‘음악’이 흘러나왔고, 자정 통행금지를 알리는 사이렌 소리, 한 달에 한번 민방위훈련을 알리는 사이렌소리가 울리면 그 북적거리던 거리는 갑작스레 휑해졌다.(송화숙, 173쪽)

 

⑵ 북한과 좌파진영의 오판, 박정희는 진보인사 아닌가?

 

박정희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셨습니까?

- 미국에서 나온 책을 보면 “과거의 그런 관계 때문에 북에서 어떤 기대를 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오판했다”라는 예기가 있더라구요.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516이 나지 않았다면 저도 안 내려왔을지도 모르죠. 그러니까 주석님이요, 제가 이렇게 말할 위치가 아닙니다만요,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참 관대하시거든요. 누가 전향했다고 하면 화내지 않습니다. 심지어 월남자 가족들이 있지 않습니까? 국군들 들어갔을 때 누구를 죽이고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도망쳤죠? 그런 사람들을 한 마을에 같이 두면 서로 원수지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다 옮겼습니다. 원수를 보지 않도록요. 당시는 사는 게 형편 없잖아요. 더구나 월남자 가족을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인민군으로 가서 잘 싸운 사람도 생활이 곤란한데요. 가장이 도망을 쳤으니 부인과 자녀들만 모여서 생활이 잘 될 리가 있습니까? 그런데 김일성 주석이 그 지방에 현지지도 가셨거든요. 실지 월남 가족들만 만나서 들으니까, 학교에서 차별 받는 이러저러한 불편이나 중혼을 못하는 그런 애로 등을 들었죠. 그 자리에서 해결해 주기로 했습니다. “통일이 되면 도망친 여러분의 가족이 돌아온다. 그때 이 나라에서는 어떻게 우리를 돌보아 주었다고, 이런 조치를 취하겠다. 남으로 갔던 사람들이 안심하고 돌아오고 안심하고 살 수 있도록 여러분이 해야 한다.” 이렇게 말씀하고 나와서는, 각료들에게 “무슨 일을 이렇게 하나? 가족이 차별 받앗다고 하면 그 사람들이 돌아와서 마땅한 통일이 되겠나?라고 나무라고 전국적인 조치를 취했습니다.

주석을 실제로 만난 사람들이 본국으로 돌아가서 욕한 사람이 없어요. 일본의 가네마루 같은 사람도 형님 형님 하고, 서경원 의원도 완전히 반했어요. (중략)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민족문화연구소 편, 최하종 증언, 380-391쪽)

 

정변에 대해 지지성명을 발표하기로 한 이유와, 다음날 발표한 성명의 내용으로 봐서는 북한 당국이 정변의 진보성에 기대를 품고 있었으며, 정변에 대한 지지를 통해 미국이 한반도 내정에 개입하는 것에 반대 입장을 표명하고 “조선 문제는 조선인민이 자주적으로 해결”한다는 원칙을 내세우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또한 나아가서 “남조선의 정세를 진정한 혁명 행동으로 전환시키”고자 하였음을 알 수가 있다.

16일 회담 당시 김일성은 조선이 곧 지지성명을 발표할 것이라는 입장을 표명하고 나서, 만약 중국정부에서 중요한 정보를 얻게 되면 통보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다른 한편, 중국 역시 최선을 다해 관련된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으며, 수집된 정보를 북한 당국에 발송함으로써 정보를 공유하였다. 17일 중국 외교부에서는 조선 주재 중국대사관에 「장개석 일당의 특무가 반영한 남조선 군사정변 상황」을 발송하는 동시에 이를 북한 당국에 전달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는 중국인민해방군 총참모부의 정보부문에서 한국에 침투한 대만 첩자로부터 탈취한 정보로서 “남조선 군사정변을 직접 계획하고 지휘한 지도자는 육군 제2집단군 부사령관 박정희 소장” 등이며, “정변이 일어난 뒤, 박정희는 조선침략 미군 사령관 매그루더, 괴뢰 총리 장면과 ‘협상’을 진행한 바 있는데 박정희의 태도는 극히 강경했다”, “장개석 일당의 특무는 군사정변이 성공할 희망이 아주 크다고 예측하였다.” 등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보다시피 중국 역시 신속히 자신이 수집한 정보를 전달함으로써 북한 당국이 참고할 수 있도록 하였던 것이다.(학군환, 240-241쪽)

 

둘째, 5․16군사정변 전야 남한에서 조성된 정세 역시 북한으로 하여금 남한 내의 통일을 지향하는 진보 세력에 대해 큰 기대를 지니도록 하였다. 말하자면 1960년 3월 중순 마산 민중봉기에서 4․19혁명 및 그 이후로 이어지는 남한 각지의 끊임없는 대규모 시위운동 등은 고무적인 현실이었다. “남조선 인민들의 거센 투쟁의 심대한 타격으로 남조선에서의 미 제국주의 통치의 대리인이며 12년간의 파쇼 테러 통치를 진행한 독재자인 이승만은 할 수 없이 정권에서 물러 날 것을 선포하였다.” 남한에서의 이러한 줄기찬 반미 반독재 민중 운동의 발전은 북한 당국으로 하여금 통일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도록 하였던 것이다.

실제로 정변 발생 전야의 북한의 자료들을 살펴보면 북한 당국이 남한의 진보 세력에 대해 얼마만큼 기대를 걸고 있었는지를 잘 알 수가 있다. 북한은 “최근 남조선에서의 사태 발전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이 실현될 날이 가까워 오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남조선 인민들 속에서도 조선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정부의 제의를 절대적으로 지지하며 외세에 의존함이 없이 주체적 역량으로 통일을 실현하기 위하여 남북 간의 협상과 경제 문화 교류를 진행할 것을 주장하는 운동이 미증유(未曾有)의 기세와 규모로 앙양(昻揚)되고 있다”고 보고 있었다. 또한 “자주적인 평화 통일과 남북 간의 협상 및 교류를 절박하게 요구하여 급격히 앙양되는 인민 운동의 강력한 압력 하에서 남조선의 지배층 내에서와 일부 정권 당국자들도 부득불 남북 간의 경제 문화교류의 필연성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을 수 없게까지 사태는 바꾸어지게 되였다”고 낙관하고 있으며 “최근 남조선에서 미제의 침략정책을 반대하여 ≪양키는 물러가라≫는 인민들의 목소리가 더욱 세차게 울려 퍼지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한 현상이 아니다.”라고 단정 짓고 있다.(학군환, 250-251쪽)

 

5·16군사정변의 발생 원인과 배경에 대한 판단이 사실상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여론상 북한에 큰 성원을 보냈다. 『인민일보』는 여러 편의 관련 사설을 발표하여 5·16군사정변은 “미 제국주의가 책동한 것”이라고 규탄함으로써 북한과 일치한 입장을 표명하였다. 신문이나 잡지를 통해 발표한 사설과 글들 외에도 중국의 지도자들 역시 여러 기회를 통해 미국이 남한에서 “군사정변을 책동”함으로써 파쇼 통치를 강화하고 있다고 지탄하였다. 뿐만 아니라 북한이 미국이 남한에서 군사정변을 책동한 “죄행”을 고소하는 「전 세계 인민들에게 고함」 통문을 보내어 오자, 중국 정부에서는 이에 관해 자국 내 각 기구에 구체적 지시를 내린다. 즉 “(1) 조선 측에서 보내온 “성토”문을 접수한 모든 기구는 특수한 경우 외에 답신을 보내어 지지를 표시할 것. (2) 공산주의 청년단, 전국학생연합, 전국부녀연합, 평화대회, 아세아 아프리카 단결위원회, 정법학회, 신문종사자협회 등 인민단체들에서는 지지 서한을 신문과 방송을 통해 발표할 것. 기타 기구의 지지 서한은 게재하거나 방송하지 않을 수도 있음. (3) 각 기구의 지지 전문은 각 기구의 당 조직에서 책임지고 심사할 것. (4) 조선 측에서 보내온 성토문은 『인민일보』, 신화통신사, 방송사에서 적절히 보도를 할 것” 등이다. 이러한 대폭적인 여론 지지를 통해 중국과 북한은 해당 선전에 있어 완전히 일치한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학군환, 256쪽)

 

그러니까 초기 비판세력의 516 지지는 단순한 실수나 개별적인 참여가 아니라 고도의 인식일치, 또는 집단적 지지라고 볼 수 있는 어떤 것이었다. 이러한 인식의 혼재 상황은, 민정이양을 위한 1963년 대통령선거 시점까지 지속되었다. 대선에서 박정희의 과거 공산주의 조직 참가전력에 대한 반대당 후보 윤보선의 이념공격으로부터 파생된 두 세력의 전도된 이념 관계로 인해 오히려 쿠데타세력이 진보적 요소로 인식되었다. 비밀 재판기록에 따르면 실제로 박정희는 남조선로동당(남로당)이 만들어지기 이전인 1946년 7월부터 조선공산당 산하 조직에 가입한 공산주의자였다. 물론 대선 과정에서 그와 민주공화당은 야당의 공세를 날조라고 반박하였다. 미국 역시 군사쿠데타 직후 한번 전향한 적이 있는 박정희의 (공산주의자로의) 재전향가능성에 대해 예의 주시하였다. 아무튼 6∙3사태 이전까지 사회운동이 침묵하였던 것은 박정희세력에 대한 진보적 이해와 인식의 소산이었음에 틀림없었다(이재오, 1984, 222-223).

그러나 박정희 정부의 한일협정의 추진을 계기로 상호인식의 모호한 혼재는 더 이상 가능하지 않았다. 1964년 3월 9일 반대당과 각계 대표 200여명이「대일 굴욕외교 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전국적인 반대투쟁에 돌입하자 박정희세력과 반박정희세력은 처음으로 분명한 대립각을 갖고 정렬되었다. 이 분화는 대일국교정상화 문제에 국한되어 민족주의 문제의 범주 내에서 표출된 것이었지만 이후 지속될 두 세력의 긴 투쟁의 서막이 되었다. 박정희정부가 내세운 기본적 정치강령인 ‘민족적 민주주의’ 에 대해 학생들은 1964년 5월 20일‘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을 거행하였다.: “4월 항쟁의 참다운 가치성은 반외세, 반매판, 반봉건에 있으며 민족민주의 참된 길로 나아기 위한 도정이었으나 5월 군부쿠데타는 이러한 민족민주이념에 대한 정면적인 도전이었으며, 노골적인 대중탄압의 시작이었다.”(박명림, 33-34쪽)

 

⑶ 근대화 운동

 

그러나 모든 지식인들이 자본주의적 전망 속에 갇혀 있던 것은 아니었다. 70년대 함석헌과 안병무는 자본주의적 경쟁 논리로부터의 탈주를 모색하였다. 한국은 후진국이기에 하루빨리 선진국을 따라잡아야 한다는 근대화에의 논리가 바로 식민주의가 낳은 서구컴플렉스로부터 나왔음을 이들은 예리하게 간파하고 있었다. 이 논리 선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식민지를 경험한 ‘후진국’은 제국주의를 모방하며 약육강식의 침략주의를 내면화할 수밖에 없다는 점도 인식하였다. 그리고 이는 강자를 더욱 살찌우고, 약자를 더욱 메마르게 하는 강자를 위한, 강자가 구획한 경기장이라고 비판하였다. 함석헌과 안병무의 이 같은 인식이 가능할 수 있었던 데에는 경제개발의 결과 소외된 존재로서의 민중의 발견, 그리고 반식민 비폭력 공동체주의자로서의 간디 등에 대한 관심 등이 작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서구 타자화의 시선을 극복하지 못한 것은 시대적 한계인 동시에 식민지를 경험한 지식인의 탈식민화 전략에서 발생할 수 있는 딜레마와 고충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명화에의 사명’으로서의 식민주의 의식으로부터 벗어나 자본주의적 근대화 전략을 비판했던 이들의 목소리는 70년대 지성계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이상록, 248쪽)

 

그런데 재현물들의 서사를 그대로 받아들일 때, 평범한 농민들이 그리고 ‘쉬지 않고’ 일하게 된데에는 그들이 조국근대화란 대업을 수행할 주체․국민으로 되어가는 다른 한편에서, 바로 ‘금전’의 맛을 체감한 것이 작용하였다. 주지하다시피 박정희는 초반부터 “농가마다 소득이 불어난다 하는 재미를 느껴야만 …농민들의 열의가 식지 않”을 것이라면서 새마을운동이 소득증대와 직결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이전부터 이미 수익성관념과 금전의 효용을 체득한 이들이 있었지만, 새마을운동은 농민들에게 그러한 관념과 감수성을 폭넓게 깊게, 또한 빠르게 확산․심화시켜 갔을 것으로 보인다. (김보현, 69쪽)

 

한편 박정희체제에게 근대적 출세 욕망은 판도라의 상자와 같았다. 더 높은 생산력과 더 많은 물질적 재화를 위한 자본의 확대재생산을 욕망하는 국가에게 이윤 동기와 물질적 욕망 곧 출세 욕망을 거세당한 개체란 이미 죽은 노동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잘살고 싶다는 욕망을 최대한 증폭시킨 경제개발 동원은 집단적 욕망과 국가적 출세를 넘어 개인적 출세 욕망이 범람하게 만들었다. 자유주의를 극단적으로 혐오했던 박정희에게 그것은 체제를 위협하는 서구적 타락 현대사회의 병폐와 다름없다. 개발연대를 거치면서 나타난 현상이 물질 만능주의와 이기주의 였음은 이미 박정희 자신이 한탄해마지 않았던 바이다

박정희는 소아 小我를 버리고 대아 大我에 충실해야 한다고 강변했지만 그렇게 순진한 국민적 주체는 현실에 존재하기 힘들었다. 박정희체제는 개인적 금욕과 국가주의적 욕망의 주체를 구성하고자 했지만 대중은 그것을 간단하게 빙공영사 憑公營私로 수렴해버렸다. 사실 그것은 체제의 특수이익의 보편이익화에 대한 대중의 풍자였는지도 모른다. 결국 박정희체제는 욕망의 정치를 실천하면서 금욕의 정치를 주문하는 역설을 드러냈다.(황병주 1, 278쪽)

 

그러나 4․19 혁명은 이듬해에 516 쿠데타가 발생하면서 미완의 혁명이 된다.(중략) 이 글의 핵심 요지는 모두 잘살기 위해 민족 대동 단결하여 조국근대화를 완수하자는 내용이다. 이때 박정희는 조국근대화를 방해하는 모든 것들을 적으로 규정한다. 군사정권이 인정한 것만이 근대성의 범주에 들어갔고, 그 이외의 것들은 반근대성 내지 전근대성으로 규정된다. 이러한 이분법적 군사문화의 확산 속에 박정희의 군사정권에 협조하지 않거나 비판적인 타자들은 차별과 배제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수직적 질서인 충과 효의 강조는 이러한 국가주의 파시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이데올로기 학습의 산물이다. (최강민, 318쪽)

 

특히 근대화 경험과 식민지 피지배 경험이 긴밀한 역학관계를 이루며 형성되어 갔던 한국의 경우를 고려해본다면 근대화에 대한 보다 다층적이며 다각적인 접근이 요구됨을 확인할 수 있다. 소위 압축적이라 불리는 한국의 근대화 과정은 전통적인 사회구조의 붕괴, 급격한 서구화, 산업화, 도시화 등을 수반하고 있으며 이들에 대한 가치평가는 단순한 이분법적 구도를 비껴가고 있다. 김진송이 지적한 바처럼, 근대성을 둘러싼 한 축의 표상체계는 “서양=산업화=도시화=발전된=훌륭한 것”의 반대편에 “동양=비산업적=농촌=저개발=나쁜 것”을 위치시키지만, 다른 한 축에서 “민족적=전통적=주체적=소중한=좋은 것”과 “서양적=현대적=비주체적=천박한 것=나쁜 것”이라는 대립적 표상체계 역시 동시적으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반되고 모순된 가치축들이 가장 첨예하게 부딪히고 상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바로 1960년대에서 70년대에 이르는 박정희시대다. 1961년 5ㆍ16 군사쿠데타를 통한 권력 장악 이후 박정희 정권이 보인 정치적 행보는 경찰과 군대를 통한 폭력과 억압이라는 일관성을 가진다. 비상계엄령, 위수령, 휴교령, 비상사태, 긴급령 등 5대에서 9대에 이르는 대통령 재임 18년 동안 평균 1년에 한번 이상 비정상적 조치들이 이어졌다. <표1> 자신의 정치적 권한이 위협받는다고 판단될 때, 정권이 표방하는 정치적 목표에 반대하는 의견이 일정 선을 넘는다고 판단될 때, 정권의 장기화 같은 무리한 정치적 사안에 대한 사전안전조치가 필요하다고 판단될 때, 예외 없이 국가 전체에 ‘비상 알람’을 울려댔다. 이 굉음에 대한 정당성을 보장한 것은 군사적 물리력만이 아니었다. 그 보다 더 강력한 효과-최소한의 국민적 동의와 합의를 끌어냈다는 점에서-를 발휘했던 것은 ‘반공주의’, ‘발전주의’, ‘개발주의’, ‘국가ㆍ민족주의’ 등의 이데올로기적 장치들이었으며, 이들 모두를 아우르는 상위담론으로써 전면에 부각되고 강조되었던 것이 ‘근대화’라는 구호였다. 문제는, GNP 성장률로 대변되는 경제적 성장만이 근대성을 담보하는 유일의 가치로 부각되면서 여타 근대성을 구성하는 다양한 특질들은 삭제되거나, 배제되거나, 억압되거나, 변형되거나, 선택적으로 활용되었다는 점이다. 무리한 외자도입, 선성장후분배형 자본주의, 수출의존형 경제모델, 재벌특혜나 정경유착에 의한 불균형적 경제구조, 저열한 노동조건, 하층계급의 정치ㆍ경제적 착취와 소외, 정치체제의 비민주성, 지역주의, 권위주의 등 오늘날에까지도 주요한 사회문제로 지적되고 있는 수많은 한계점들의 뒤덮는 윗 편에는 “한강의 기적”이라는 화려한 수사와 더불어 “전 세계에서 유래를 찾기 힘들다”는 경제 성장 신화가 놓여있다. 그리고 “누구든 무조건 빨리 숨도 쉬지 않고 달려가야 할 곳”의 끝에는 근대화라는 이름이 서있었다.(송화숙, 168-169쪽)

 

모범부락의 사업내용은 부락 심사기준과 연계되어 추진되었다. 경상남도의 ‘새마을’건설작업은 개인 가정생활과 부락 공동생활로 구분하고 주민의 개량과 보존 등 10개 작업항목과 36개 작업내용이 제시되었다. 특히 ‘새마을’의 경우 부락종합발전계획 수립 및 실천을 작업내용에 포함하여 모범부락조성사업을 토대로 마을개발의 계획적 기틀을 마련하고자 한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경기도의 ‘혁명촌’의 경우 실천요목이 생산증가, 생활개선, 사회복지, 발전 등 도정목표 달성에 기여할 수 있는 사항 144개 항목으로 책정되었다(대한지방행정협회, 1962g).

사업비 자부담이 융자로 이루어지는 상황에서 일부 도에서는 “자금활용의 시련이나 능력과 투자계획이 없는 농촌에 많은 돈을 융자하여 개인이나 리동에 본의 아닌 부채를 가중시키면 오히려 실효가 없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자력활동에 주력하였다(대한지방행정협회, 1962c). 강원도의 경우 「9월은 생활개선의 달」로 책정하여 농촌건설운동에 집중하였다(대한지방행정협회, 1962a).(서만용․박수영, 657쪽)

 

한국에서도 국가에 의한 대학 구조 조정이 진행되면서 5․16 직후부터 대학의 자율성 확보와 국가 관리 체제 강화를 둘러싼 논란이 불거졌다. 장면 정부에서 문교부 장관을 역임한 오천석의 표현에 따르면, ‘교육의 내용, 인사에 대한 통제는 말할 것도 없고, 학교 관리의 세목에 이르기까지 획일적인 지시와 명령으로 군림하려는 정부’에 대해 대학의 자치자율을 수호하는 데 가장 적극적인 것은 학생들이었다. 특히, 한일협정 체결을 둘러싸고 박정희 정부와 학생운동세력 간에 격렬한 충돌이 일어난 1964년에 여당인 공화당이 학생과 교원의 정치활동을 금지하고 수사기관의 학원 출입을 허용하는 것 등을 내용으로 하는 「학원보호법」 제정을 시도하자, 학생들은 학문은 국가의 생존을 위한 수단이아니며 대학은 학문의 전당이여야 한다며 강력히 반발했다.

대학교수를 중심으로 한 지식인 중에도 국가에 의한 대학 자치의 훼손을 우려하는 목소리를 내는 이들이 있었다. 성내운은 정부의 대학 통제가 고등교육의 질적 향상을 위한 방책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정부는 행정적인 통제를 해제하고 오직 부패에 대한 감독만 철저히 하면 된다는 것이다. 또한 대학 존립의 성패를 가늠하는 것은 국가가 아니고 국민이어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즉, 자유경쟁에 의해 대학이 자연도태하도록 유도하는 정책으로 전환하라는 것이다. 유기천은 독일과 일본처럼 후진국가도 학문의 자유를 보장한 덕에 발전했으며, 더불어 학문을 멸시하고 학원의 자유를 침범한 나라는 모두 망했다고 주장하며 대학의 자유를 적극 옹호했다. 이처럼 대학의 자치를 중시하는 지식인들 국가가 대학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것이 곧 대학교육 정상화의 길임을 역설했다. 반면에 사학이 무절제하게 난립하고 있다고 비판하던 지식인중에는 국가가 나서 대학을 통제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는 이도 있었다. 국가가 대학 관리 체제를 확고히 확립하고 대학의 질적 향상을 도모하기 위해 교수와 학생을 보조하는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김정인, 248-249쪽)

 

1960년대 대학 근대화는 국가 주도의 대학 정비와 사학 통제를 기반으로 이공계 중심의 인력 개발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추진되었다. 군사정부와 박정희 정부가 마련한 대학 관리 체제는 대학 자율성과 국가 통제를 둘러싼 논란을 거쳐 196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정부의 통제와 지원 전략에 맞추어 국공립과 사립 모두 이공계 중심의 인력 개발과 대학원과 연구소를 통한 연구 인력 확충에 나서게 되는 과정과 맞물리며 정착되어갔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1960년대를 거치면서 대학은 국가 주도의 근대화전략에 따라 연구와 교육의 방향이 결정되면서 고유의 개성을 잃은 채 차츰 획일화되어갔다. 사학 위주로 형성된 대학권력은 경제 성장에 따른 급격한 근대화에 발맞추어 그야말로 살아남기 위한 자구책을 마련할 여력이 부족했다. 결국 급변하는 변화에 허약한 체질로 대응할 수 없었던 대학권력 앞에 국가는 통제와 함께 지원 전략을 구사하며 국가가 목표로 하는 과학 기술 인력 개발을 위한 대학 개조를 유도했다. 즉 1960년대 대학 근대화는 국가와 대학권력 각자의 필요에 따라 형성된 공생관계에 기반한 것이었다. 대학 스스로 학문 공동체로서의 면모와 자존감을 존중하기보다는 국가의 교육과 학문 정책에 순응하며 더 많은 재정 지원을 확보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오늘날 대학의 원형은 이렇게 국가권력이 국가 전반의 근대화에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었던 1960년대에 형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김정인, 270쪽)

 

1960년대 미국은 대한정책 장기목표를 한국이 정치, 경제, 사회적 발전을 달성하여 ‘자립적인 통일국가’로 거듭나도록 하는데 맞추었다. 그러나 이는 미국의 헤게모니 질서 내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했다. 더구나 미국은 단기목표에서 한반도의 통일은 미국과 자유진영의 동의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점을 주지시키고자 했고, 분단이란 구조 내에서 경제발전과 진보를 달성할 수 있다는 인식을 불어넣고자 했다. 실제 추진되었던 근대화 노선은 자립적인 통일국가 수립과는 배치되는 것이었다. 미국의 근대화 노선 추진과 대외적 영향력 강화를 동일시한 미국의 근대화론자들은 근대화 달성을 위해서는 대중의 ‘심리적 변화’가 매우 중요하다고 보았다. 통일적 국민의식, 국가적 자긍심, 경제적 성취에 대한 믿음, 근대적 개인관 등은 근대화 달성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파악되었다.(허은, 240쪽)

 

김정한은 1960년대 조국 근대화의 일환인 경제 개발, 산업화, 도시화 과정에 의해 소외된 하위 계층에 관심을 둔다. 달리 말하면 삶의 터전인 땅을 잃고 도시로 떠나온 이농민, 도시 변두리 철거민, 천형의 병을 앓는 한센인 등 소외 계층이다. 김정한은 유력자로 인해 더욱 고통을 받는 민중의 현실을 직시하고 작품을 통해 담론화한다.

조국 근대화는 민중을 희생물로 삼아 기업의 이익을 창출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김정한의 생각은 조국 근대화란 민중을 포함한 하위 계층 모두 안락하고 행복한 삶을 누리기 위해 필요한 것이지 민중을 수탈하면서까지 달성한 조국 근대화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 담론화 한 것이다. 이처럼 조국 근대화란 미명 아래조상 대대로 지켜오던 민중의 터전을 빼앗는 유력자의 횡포에 대한 비판이다.(정주일, 37쪽)

 

‘근대화’라는 용어는 1950년대 말 미국에서 만들어진 ‘근대화론’을 통해 널리 퍼졌지만, 그 뿌리는 1949년 1월 20일에 발표된 트루먼의 대통령 취임 연설에 닿아 있다. 이 연설에서 투르먼은 ‘저개발국에 대한 기술적․경제적 원조를 행하고, 투자를 하여 발전시킨다.’는 ‘새로운 정책’을 내놓았다.‘근대화론’은 2차 대전 이후의 변화된 국제 질서에 대응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지만, 그것의 실제 목표는 민족 해방을 이룬 많은 제3세계 국가들을 미국이 주도하는 자본주의 세계체제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미군정과 성립과 함께 개시된 미국의 경제원조는 한국 단독정부 성립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전쟁목적 수행 및 전쟁으로 인한 재난구호 목적의 원조가 급격히 증가하였으며, 휴전 이후에는 전후복구 및 부흥을 목적으로 하는 원조가 제공되었다. 이러한 미국의 대한경제원조는 1950년대 후반에 절정을 이루다가 1950년대 말부터 미국의 대외원조정책이 변화하면서 점차 감소되기 시작하였고, 무상원조 대신 유상의 차관이 대외경제관계의 지배적 형태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결국 미국 경제원조의 최대 수혜자는 국내 독점자본이었고 가장 큰 피해자는 농민이었다. 이처럼 무상 원조가 유상의 차관으로 바뀌면서 한국 사회는 궁핍화가 문제화 되었다.(정주일, 149쪽)

 

박정희는 “공업화 또는 근대화가 결코 서구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강하게 부정하면서 그것이 “한 민족의 역사적 내지는 문화적 전통과 상충되는 것”이 아님을 강조했다. 즉 서구사회의 공업화와 과학화는 서구 나름의 “합리주의사상, 청교도 정신이라고 불리는 엄격한 도덕율” 등의 “정신적 지주”를 바탕으로 한 것, 다시 말해 서구사회의 근대화는 서구의 “전통문화를 토양”으로 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정리하고, 마찬가지로 한국의 근대화는 서구의 맹목적 모방추종이 아니라 “우리의 전통적인 가치를 창조적으로 계발하여 그 토양 위에 근대화가 뿌리”박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지성인들’에게는 과학과 기술을 배우는 것과 함께 “우리 고유의 전통적 가치관을 합리적으로 체계화해서 근대화의 정신적 지주를 확립”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근대화의 정신적 지주는 다름아닌 우리의 주체적 민족사관”에 근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박정희는 “민족의 르네상스”라는 표현을 동원하면서 서구를 참조하되 “국적없는 정신적 방랑아”가 아닌 주체적 민족사관에 근거한 근대화를 강조했다. 이것은 새마을 정신을 “민족의 얼이며, 인간존중과 자조․자치자활의 민주주의 이념을 창조적으로…재정립한 우리 국민정신의 기조”라는 규정으로 구체화되었다.(황병주, 220쪽)

 

(1) 1963년 집단적 노동관계법 개정의 의도는 통치수단적인 성질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1963년 개정법은 1971년 및 1980년 이후에서 발견되는 통치수단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1963년 집단적 노동관계법은 1971년 이후보다 훨씬 이성적인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1960년대 전개된 통치일변도의 노동행정을 감안하면 개정법의 의도는 통치적인 측면만이 부각된다. 그러나 1963년법은 노조 재편에 기반한, 위로부터 통치를 통하여 산업사회의 갈등을 제어함으로써 성장전략에 협력을 받을 수 있는 것으로 보아도 된다. 1963년법의 의도는 입법상 낮은 단계의 통제 및 노동행정상 높은 통제를 통하여 경제 개발정책이라는 통치자의 정책에 협조를 강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개별적 노동관계법의 변용은 성장전략과 더욱 긴밀한 관계를 보이고 있다. 1961년 근로기준법과 이후에 전개된 노동시장관련 입법 및 정책은 내부동원형 성장전략에 적극 부응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들 법령은 노동력 동원의 길을 터놓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다만 노동력 동원에 편입되는데 그칠 뿐 개발에 집착한 나머지 파이를 키우는 동안 동원된 노동력에 대한 최소한의 보호 규정이 제대로 준수되지 않은 문제(전태일 사건)가 컸었다. 요컨대 1960년대 노동관계법은 성장전략에 필요한 노동력 동원을 최대한 가동하기 위한 노동시장 전략을 계획하고 구사하는 한편, 위로부터 통치를 통하여 성장에 장애가 되는 산업사회의 갈등을 제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2) 1970년의 외국인투자기업의노동조합및노동쟁의조정에관한임시특례법은 성장전략의 전환에 따른 노동통제기제의 변용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이다. 이 법의 적용을 받는 외국인투자기업에서는 노동쟁의조정법상 쟁의조정 규정의 적용을 배제하고, 강제중재를 통하여 쟁의행위를 전면 봉쇄하는 내용이다. 이 법은 외국인 투자자들을 유인하기 위한 입법임에 틀림없다. 다만 처음부터 통제가 계획되고 구사된 것이라 하기는 어렵다. 박정희는 이미 1965~66년부터 외국인 직접투자 유치 등 외부의존형 성장수단을 구사하여 왔음에도 기존의 내부동원형 성장전략에 부응하는 노동통제기제를 유지하여 왔다. 그러나 일련의 외투기업 쟁의 발생 직후 외투기업에 대한 임시특례법을 통하여 외부의존형 성장전략을 위한 새로운 통제기제로 변용을 드러낸 것이다. 같은 해 수출자유지역설치법도 마찬가지이다. 박정희는 외화 없이 내부동원만으로 계획한 성장을 달성할 수 없다는 강박관념을 여러 곳에서 드러내었다. 온갖 방법을 동원한 수출진흥책의 실시, 이미 외국인 투자기업의 유치에 전력하고 있으면서도 처음부터 1970년 외투기업에 대한 임시특례법과 같은 무제한의 통제는 취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3) 박정희는 쿠데타 직후부터 조국통일이라든가 자주국방을 거론하면서 안보에 대한 남다른 사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안보를 이유로 무단의 통치를 보인 1971년 이후와 달리 1963년 집단적 노동관계법과 1970년 외국인투자기업의 노동조합 및 노동쟁의조정법은 보다 자유적이고 이성적이었다. 1970년 외투기업에 대한 임시특례법도 외투기업에 대한 단체행동권의 전면적 제한이라는 실질을 담고 있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외투기업에 한정한 것이지 전면적이지는 않았다. 말하자면 성장전략의 일환으로서 노동통제책을 구사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1971년 이후에는 ‘국가보위에관한특별조치법’이라는 비상한 법 하나로 제5공화국이 들어선 1982년까지 집단적 노동관계법의 개정과 무관하게 근로자 쟁의에 대한 무단의 통제로 일관하였다. 이것은 타당한 기반을 가지기 어려웠고, 따라서 안보가 전면에 등장하는 정치적 통제기제로 판단된다.(이상희, 125-126쪽)

 

5‧16 직후 5‧16 정부는 이전 제1, 제2공화국의 두 정부를 거치며 추진되었지만 실효가 없었던 종합제철건설을 구체화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5‧16직후 가장 중점 공업정책의 하나로 추진된 종합제철소 건설계획은 주요 정책결정권자들이 5‧16 당시 군인들로 이루어짐으로써 남북한 군사력경쟁을 중요시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입지를 1950년대부터 계속된 중부지역입지에서 1962년 동남부 지역으로 바꾸었다. 이러한 이전은 집중에 따른 투자비용 절감이라는 목적 외에도 한국전쟁을 겪은 군출신 인사들이 미국-일본과 연결통로를 고려한 군사적 측면을 주요하게 고려한 때문이었다.

이후 5‧16정부는 차관도입을 위해 사회간접자본의 대대적 건설에 들어갔는데 이는 성과를 거두었고 이후 1970년대 공업기지에도 계속 적용되어 한국 공업화의 전략으로 성공하였다. 동시에 5‧16정부는 계속 종합제철공장의 계획규모를 확대시켜 나갔는데 이 역시 북한의 생산능력을 고려한 것이었다. 이렇게 입지와 규모의 책정기준이 북한을 의식한 것이었다는 것은 5‧16 직후 종합제철 추진의 추진주체와 추진성격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5‧16추진주체들의 이러한 성격과 공업에 대한 준비부족으로 1965년이 되도록 울산종합제철공장건설계획은 여러 문제점들이 드러나고 있었고 특히 차관도입 등 자금문제는 어느 것 하나 확정된 것이 없었다. 결국 종합제철계획이 순연되면서 단계론이 정면으로 대두되었고 이후 단계론은 중요한 공업전략으로 자리잡았다.

계속되는 실패 속에서 정부는 그 원인과 돌파책을 찾아내어야 하였고 결국 1965년 5‧16정부의 철강정책에 두 가지 주요한 시각전환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 두 가지는 첫째, 수출을 확대하여야 한다는 것과 둘째, 북한과의 경쟁규모를 고려한 건설이 아닌 산업 자체의 규모의 경제를 고려한 규모의 종합제철소 건설이라는 경제성을 도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인식의 전환은 5‧16정부의 철강공업정책이 마침내 5‧16 직후부터 1965년까지의 과도기를 벗어나 비용과 경제적인 효율성이 도입된 정상적인 산업정책으로 전환되기 시작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5‧16직후부터 1965년까지의 이 시기 시행착오와 대응과정 역시 한국산업사나 현대사의 주요한 학습과정이었다.(박영구, 22-23쪽)

 

⑷ 파벌 = 非 생산적

 

그래도 아직 과거의 세력 기반이 남아있던 김종필에게 마지막 타격을 가한 것이 바로 삼선개헌이었다. 김종필계열의 붕괴는 곧 공화당 우위파의 失權이자 당내민주주의의 弔鐘이었다. 당내에 복수의 파벌이 있을 때에는 정치적 쟁점에 대해 의원총회에서 자유로운 토론이 이루어지기도 했고, 대통령도 그 결과를 어느 정도 존중해주는 태도를 취했어야 했다. 그런데 삼선개헌으로 당내 파벌의 한축인 김종필 계열이 사라지자, 이제 당에는 단일 파벌만 남게 되었고, 그것은 앞서 지적했듯이 박정희의 집권 연장에서 자신들의 존재근거를 찾는 집단이었다.(중략)

이제 당내에는 어떤 파벌도 존재하지 않게 되었고, 의견 불일치도 있을 수 없게 되었다. 당의 의견은 존재할 수 없게 되었고, 모든 결정은 청와대에서 내려져 하달되는 식으로 되었다. (김일영, 389쪽)

 

공화당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문제는 후계자 선정 문제로 발전한 당내 파벌투쟁이었따. 헌법에 따르면 박대통령은 1971년 물러나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후계자 선택을 둘러싼 파벌간의 투쟁은 곧 비등점에 달했다. 1968년 5월 24일 국회의원 김용태는 김종필 의장을 박 대통령의 후계자로 옹립하려는 행동 때문에 공화당으로부터 제명되었다. 당기 위원회는 김용태 의원의 제명 이유를 그가 김종필 의장의 당권장악을 위해 ‘국민복지위원회’ 란 명목으로 900여명의 前사무국 요원을 규합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제명된 김의원은 1970년까지 후계자 경쟁을 자제하라는 박대통령의 명을 거역했을 뿐 아니라 ‘黨中黨’을 만들어 분파행위를 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국민복지위원회는 박대통령의 3선을 허용하는 개헌에 반대하는 전략문서를 준비했었다. 5월 30일 김종필 의장은 복지회 사건에 대한 강력한 하으이로 당의장직을 사퇴하고 탈당함으로써 의원직을 상실하였다. 비주류는 당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1969년이 되자 당을 깨뜨리지 않고 박대통령의 후계자를 옹립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주류는 김종필씨 이외의 어느 누구도 지지하지 않았으며, 비주류(이제 당권을 장악했다)는 김종필씨에 정면으로 반대하였다. 당의 분열은 위험한 것이었다. 1971년 대통령 선거에 분열된 공화당에서 두 명의 후보가 출마한다면 야당은 쉽게 승리할 것이었다. 공화당의 정치자금 조달과정에서 ‘부패’와 관련하여 신민당은 그들이 군정하에서 받았던 박해를 보복할 것이었다. 권좌에서의 실추는 감당하기엔 엄청난 것이었다. 김종필씨 이외의 사람을 후계자로 옹립하는 것은 분당을 초래할 것이었지만, 김종필씨 지지자의 반대를 무릅쓰고 박대통령을 3선 시키는 일은 최소한 분당을 피하고 선택을 연기할 수 있었다. 즉 개헌이 필요하였다. (김정원, 196-197쪽)

 

교회 국가 관계와 관련된 ‘대립 협력과 균열 통합의 동학’이라는 관점에서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해 보자. 첫째, 1960년대의 상황이 전형적으로 보여주었듯이, 교회 지도자들의 ‘정치적 관심 부재’ 혹은 ‘정치적 저항의 부재’라는 상황에서 교회 내적 균열의 가능성은 최소화되는 것으로 보인다. 교회 지도자들의 ‘낮은 정치적 관심’은 ‘정치적 순응성’(저항의 부재)과 결합하는 경향이 있고, 이 경우 교회 국가 관계는 ‘협력’의 측면이 지배적일 것이다. 둘째, 1950년대 말과 제2공화국 시기에 드러났듯이, 교회 지도자들이 제도정치권 내의 특정한 정치 분파와 연결되어 교회 자신의 협소한 제도적 이익을 우선적으로 추구하는, 이른바 ‘이익정치’에 몰두할 경우에도 교회의 조직적 통합성은 크게 흔들리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셋째, ‘천주교의 거대한 회심’이라고 할 만한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영향으로 1970년대 이후 한국 교회 안에 ‘공동선 정치’(공익 정치)를 추구하는 진영이 형성되었으며, 사회적 약자들의 인권을 대변하거나 민주적 통치 체제 구축을 교회의 제도적 이익(교회의 복음화 사명)으로 재해석하는 것이 이 진영의 특징이었다. 1974년 지학순 주교 구속이라는 ‘촉발 사건’을 거친 후, 한국 교회 안에서는 정의구현사제단의 등장 및 정의평화위원회 재활성화 등 ‘비판 저항의 제도화’라는 과정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넷째, 대구대교구를 중심으로 한 일부 교구들에서는 특정 정파와 연계된 ‘이익 정치’가 지속됨으로써, 1970년대 이후에는 교회 안에서도 ‘이익 정치’와 ‘공동선 정치’의 갈등이 거의 일상화되었다. ‘공의회 해석 혹은 인정 투쟁’이라고도 할 만한 ‘세대 갈등’을 포함하여, 다양한 요인들이 교회 내적 균열을 오히려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만들어간다. 특히 ‘비판 저항의 제도화’ 추세가 현저하면 할수록, 교회 지도자대다수가 ‘매우 중대한 교회 이익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시적으로라도 비판 저항을 중단해야 한다고 합의하는’ 일부 예외적인 상황이 있기는 하지만, 정치적 정당성이 낮은 정권과의 협력 추구는 그 자체가 교회 내적 균열을 촉발할 가능성을 높인다.(강인철 2, 147-148쪽)

 

부분적 갈등에도 불구하고, 1960년대의 교회 국가 관계는 협력의 측면이 대립 측면을 압도했다. 군사 쿠데타가 발발한 후 주한교황사절인 하비에르 주피 몬시뇰은 주한 외교사절 가운데 가장 먼저 쿠데타 주도세력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한국인 지도자들 역시 쿠데타 직후인 1961년 5월 말부터 8월에 걸쳐 가톨릭시보에 거의 매호 ‘반공’과 관련된 기사들을 내보냄으로써, ‘반공 가톨릭’의 면모를 부각시킴과 동시에 군사 쿠데타에 대한 지지를 간접적으로 표명했다. 당시 메리놀회 선교사로서 백령도본당 주임신부이던 에드워드 모펫(부영발) 신부 역시 자신의 친구이자 역사상 최초의 천주교 신자 대통령이 이끄는 미국정부로 하여금 군사쿠데타를 수용하고 승인하는 데 중요하게 기여했다.

1961년 9월이 되자 교회의 군사정부 지지 움직임이 더욱 직접적인 행동으로 나타났다. 재건국민운동본부의 요청에 따라 서울대교구는 9월 3일, 매월 개최되는 ‘평신도사도직추진위원회’ 회의에 이 문제를 부의하여 동 위원회를 모체로 한 ‘재건국민운동 천주교 서울교구 촉진회’를 결정하기로 결정했고, 9월 10일 명동성당주교관에서 각 본당 신부와 회장들이 모인 가운데 정식으로 결성식을 치렀다. 1961년 5월 재건국민운동본부가 “모자보건과 가정안정사업”을 재건운동 목표에 추가했고 7월 말에는 ‘국민운동 제1차 실천사항’을 발표하면서 “가족계획운동”을 포함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반대할 것을 회칙에 명시”한다는 편법을 쓰면서까지 교구 차원에서 재건국민운동에 참여했던 것이다. 1961년 11월 23일 11개 교구 주교들이 참여한 가운데 서울가톨릭대학 강당에서 연차 주교회의가 열렸는데, 군사 쿠데타 이후 처음 소집된 정례주교회의였다. 이 회의의 결정에 따라 11월 4일자로 “영육의 각 분야에서 신앙을 실천하라!”는 제목을 단, 다소 이례적인 공동교서가 발표되었다. “국가적 사업”인 재건국민운동 참여를 독려하고 그런 사회 참여를 정당화하는 것이 이 교서의 목적이었다.(강인철 2, 100-101쪽)

 

 

⑸ 민중민주주의 운동의 저항대상

 

크리스챤 아카데미에서는 1970년 10월 8일부터 11일까지 한국사회에서 진행되고 있는 ‘비인간화’ 현상의 심각성을 깨닫고 ‘인간화’를 위한 대대적인 ‘대화의 모임’을 개최하였다. 여기에서는 현대사회에 접어들어 서구로부터 수입된 물질문명으로 인해 비인간화 현상이 초래되고 있으며, 이에 따라 근대화가 빠르게 진행될수록 사람들은 더 많은 소외감을 느끼고 있다는 진단이 쏟아졌다. 즉, 현대 기술사회에서는 기술적 수단 그 자체가 자기목적화될 위험성이 존재하며, 대량생산 시스템 하에서 인간은 평균화・획일화되어 몰개성적인 존재로 되어간다는 것이다. 또한 과학기술의 경이적인 산물인 핵무기가 인류 절멸의 위기를 불러일으켰다는 사실과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해 공해와 생태계 파괴가 가속화되고있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되었다.

또한 크리스챤 아카데미 진영의 지식인들은 도시화의 진전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시선을 드러냈다. 도시화의 진행은 곧 생활환경의 오염을 수반할 뿐만 아니라 공공질서와 윤리의 파괴, 불량화와 폭력화 현상을 가중시키면서 비인간화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또한 도시는 환락・소비・사치를 부추기는 유혹의 공간으로서 물질만능풍조를 조장하여 혜택과 기회로부터 소외된 자들에게 좌절감과 열등감만을 안겨주게 된다는 것이다.(이상록, 237쪽)

 

그러다가 어떤 얘기가 나오냐 하면 도예종씨가 말이죠, 지하당을 제의했습니다. 그러니까 이일구씨가 빨치산 투쟁을 제의했고, 도예종씨는 그로부터 몇 달뒤에 지하당 운동을 제의한 겁니다. 이일구씨의 경우는, (빨치산 투쟁을) 해야 되겠나 안 되겠나 하는 순수한 토론적인 입장이었습니다. 그런데 도예종씨의 경우는, (지하당운동을) 하려는 방향을 정해놓고, 질문의 형식을 던졌지만 저에게 강하게 권유하는 그런 쪽이었습니다.

정세판단은 같았습니다. 혁명이 만조하려고 하니까, 마침내 외세에 뒷받침되는 파시스트가 권력을 탈취하고 대중을 짓밟기 때문에 여기에 대해서 우리는 저항을 하고 엎어야 한다는 거죠ㅗ. 엎기 전에 맨 먼저 지하당을 조직해야 한다. 지하당의 조직은 4․19 이후의 활동을 통해 상당히 되어간다는 그런 예기였습니다. 그런 많은 얘기를 들었는데, 그때 저하고는 의견이 달랐습니다. 그 얘기를 반대하기가 상당히 미안하더라구요. 게다가 박영섭씨 집에 있으면서 그 사람을 따돌리지 않았습니까? 저하고 이틀간이나 같이 지내면서 한 얘기고, 당시 저보다 훨씬 연세도 많았거든요.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안 되겠어서 반대했는데, 왜냐하면 ‘당을 만들 수 있는 기반이 안 되어 있다’는 거였습니다. 물론 사회경제적 조건은 반봉건 식민상태니까, 전위당이 나와야 되지만, 전위당 이전에 상당한 대중적 기반과 대중적 운동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전혀 없다는 거죠. 노동단체나 노동운동, 인텔리운동이나 인텔리 단체도 없지 않느냐 하는 겁니다. 학생운동은 다 궤멸되고 말이죠. 그리고 학생운동도 외부적으로는 허장성세적이었고, 기실 내부적으로는 상당히 약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정도를 기반으로 해서 어떻게 전위당을 만들겠냐 하는 거였습니다. 그러면 결국 우리가 전위당을 만든다고 했을 때, 레닌이 말하는 ‘페이퍼 올가니제이션’이라는 내실이 없는, 결구 또 하나의 인텔리의 허영심 발동으로 될 위험성이 다분이 내재하고 있다는 것을 얘기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뭘 해야 하는 가 하면, 군중적 계층운동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학생은 학생 대중들 속에서 전위당이 아니라 학생회, 지사에도 있겠지만 지하의 학생 서클등도 활성화시켜서 이념을 선전해야 하고, 노동자들도 레닌이 말했듯이 노동자 자신이 각성해서 혁명으로 진입할 수 없는 거니까, 인텔리 중에서 우리 같은 사람들이 노동자들 속에 들어가서 노동자 서클을 만들어서 우선 마르크스주의를 선전해야 한다는 겁니다.(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1, 김정강 증언, 51-52쪽)

 

1969년 박정희가 추진한 현직 대통령의 3선연임을 보장하는 개헌시도는 두 가지 점에서 재야에게 중요한 분수령이었다. 하나는 느슨한 재야단일조직의 결성이었고, 다른 하나는 민주주의 문제를 저항의제에 포함시켰다는 점이었다. 헌법개정 논란을 계기로 비로소 민주주의 회복 문제는 재야의 중심 저항의제로 자리잡았다. 민족주의의제(한일협정시도)와 민주주의 의제(3선개헌시도) 모두 국가의 특정 선택으로부터 반대세력의 결집을 강화시키는 계기가 주어졌던 것이다. 한국재야의 저항운동 역사에서 3선개헌시도와 반대의 충돌은 박정희 정부의 장기집권과 이에 대한 본격적 저항의 출발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3선개헌 시도 이전까지만 해도, 박정희체제는 헌법적 질서를 준수하는 형식적 민주주의를 실천하고 있었다. 언론과 야당의 활동도 크게 제한받지 않았다. 1960년대의 박정희 정부가 비교적 충실한 의회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있었다는 점은 재야의 발전을 봉쇄하였다. 그렇다면 정당과 의회로 대표되는 의회민주주의 제도적 영역의 축소가 재야로 대표되는 거리의 정치를 확장시켰을 것이라는 가설이 성립가능하다.(박명림, 36쪽)

 

전태일 분신사건의 충격은 심중하고도 빨랐다. 서울대학교 학생들은 전태일의 분신 다음날‘민권수호학생연맹 준비위원회’를 결성하여 노동문제에 대해 즉각 반응하기 시작하였다. 여러 대학의 학생들은 전태일 추모회를 시도했고, “근로조건을 개선하고 노조결성 보장하라”는 선언을 발표하는 일방 노동실태조사단을 구성하였다. 노동실태 조사를 명분으로 한 노동문제에의 참여시도였다. 일부 교회에서는 추모기도회를 강행하였다. 전태일 분신사건은 한국사회운동을 넘어 정치균열의 지형, 나아가 한국정치 자체의 영역을 확장시킨 결정적 전환점이었다. 이 분신사건은 이제 한국의 국가와 재야, 정당들이 노동의 문제를 정치의 영역으로 끌어들여 해소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었다.《6∙3사태》의 민족문제,《3선개헌》의 민주주의 문제에 이어 전태일 분신 사건을 계기로 노동-사회-인권문제가 한국의 정치∙사회운동의 핵심의제로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이었다. 현대 한국정치의 주요의제는, 80년대 격렬했던 반미민족주의와 통일 문제를 빼놓으면, 1970년대 초반에 전부 드러났던 것이다.

한국에서 특정한 의미를 갖는 민중인식이 등장하기 시작한 계기 역시 이 사건으로부터였다. 학생들은 민중의 문제를 해결하는 기본 주체는 민중자신의 역량임을 확인하고 그들을 지도해야할 존재가 바로 민중 속의 지식인이라고 인식하게 된다. 따라서 모든 인간적이고 민중적인 지식인은 지식인 기회주의적 악성을 극복하고 민중 속에 뛰어들어 민중을 조직하고 민중과 더불어 생존권 보장을 위하여 싸우는 것만이 남았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이제 민중은 과거의 체념과 좌절을 딛고 새로운 민중의 역사를 창조하기 시작하였다. 민중은 지금까지 강요된 반인간적 사회질서에 항의하고 인간적 질서를 요구하기에 이르렀다.”(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사회법학회,「광주대단지 빈민실태 조사보고서」(1971.10), 3,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1982. 99 재인용)

전태일 분신사건과 비슷한 시점에 발생한 1971년 8월 10일 서울근교의 경기도 광주이주단지(廣州移住團地. 현 성남시) 소요사건 역시 민중생존권문제가 심각한 수준이라는 사실을 웅변하였다. 광주이주단지 주민 3만 여명은 생활대책수립을 요구하며 공공건물과 경찰관서를 공격, 방화하는 소요사태를 일으켰다. 주민들은 경찰과의 격렬한 대결 속에 6시간이나 광주이주단지 전역을 장악하였다. 전태일 분신사건이, 노동문제가 단일 전형을 통해 표출된 것이었다면 광주이주단지 소요는 기층대중이 삶의 조건 문제로 인해 소요를 통해 집단적으로 저항한 최초의 사건이었다.(박명림, 40-41쪽)

 

민청학련 명의로 된「민중∙민족∙민주선언」은 자신들의 궐기를 “학생과 민중과 민족의 의사를 대변하고 이 땅에 진정한 자유와 평등을 실현하기 위한 민중적 민족적 민주적 운동”이라고 규정하였다. 이 선언의 제목과 내용을 보면, 80년대 내내 재야의 핵심가치였던 “민중∙민족∙민주”, 이른바「삼민주의」의 단초가 등장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들은 또한 부패특권족벌의 치부를 위한 경제정책 시정, 세금감면과 근로대중의 최저 생활보장, 노동악법 철폐와 노동운동 자유보장, 구속된 모든 애국인사의 석방 및 유신체제의 폐기와 진정한 민주주의체제의 확립, 중앙정보부 즉각 해체, 자립적 민족경제체제의 확립의 6개항을 요구하였다. 또한 근로대중의 궐기를 촉구하는 격문이 살포되었고, 학생들에게는 시민-노동자와의 연대를 위해 시청광장(서울의 중심) 및 청계천 5가(노동자 밀집지역)로 결집하라고 촉구하였다. 학생운동이 민중운동적 성격으로 변모되고 있었던 것이다.(박명림, 47쪽)

 

한국현대정치사에서 1972년부터 87년까지 권위주의의 절정의 시기와 재야투쟁의 절정의 시기는 일치하였다. 그러나 그 힘의 배분관계는 서서히 변화하였다. 1961년의 시점에서 정권은 압도적인 힘의 우위에 놓여있었고 사회운동세력은 군사정권을 지지하였다. 한국재야의 등장의 계기가 1961년이 아니었고, 또 한국재야의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의 출발이 군사쿠데타의 시점이 아니었다는 점은 현대한국정치의 역설의 하나였다. 그러나 한일협정추진을 계기로 민족문제로부터 발원한 양자의 균열은 정권의 3선개헌을 기화로 민주주의문제에 까지 확대되었다. 1971년 전태일 분신사건을 계기로 민중의제가 등장하고 여러 영역에 걸쳐 재야의 연대가 형성되자 재야와 정권의 정면대결은 맞물리기 시작하였다. 동시에 노동∙민중의 문제가 처음으로 한국정치의 핵심의제로 등장하였다. 노동∙민중문제가 핵심정치의제로 등장한 시점에 유신체제가 성립하였다는 점은 매우 시사적이다. 강화되는 재야의 도전에 맞서 정권은 유신체제라는 높은 수준의 억압능력을 갖는 체제로의 전이로 응답하였고 이후 긴급조치 시기에서 보듯 재야와 정권의 투쟁은 비로소 하나의 소멸로써만 종식될 수 있는 생사 투쟁관계로 돌입하였다.(박명림, 56쪽)

 

본 연구에서는 1960년대 정치세력의 통일론과 통일논의가 4월 민중항쟁시기와 외형적 연속성을 가지고 있음을 규명했다. 특히 1966년의 통일논의는 4월 민중항쟁시기 전개된 보수 정치세력의 통일논의를 외형적으로는 그대로 추종하고 있었다. 하지만 1960년대 통일논의는 보수 정치세력을 견제할만한 사회운동세력의 미약이라는 측면에서 4월 민중항쟁시기와 차이점이 있었다. 장면 정권 시기는 혁신세력의 통일론과 신민당 일부의 제안을 비판했지만 이를 법으로 통제하고 정권이 통일론을 독점할 수 없는 정치적 분위기였다. 그러나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반공법 등을 통해 합법적 정치공간에서 4월 민중항쟁시기 혁신세력을 배제하고 통일논의를 봉쇄하여 통일론을 독점하려 했다. 여기서 남한 사회에서 통일논의 및 남북관계 개선에 있어 혁신세력(사회운동세력)의 역할이 지니는 중요성이 확인된다.

한편 본 연구에서는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의 적극적인 통일공세가 등장할 수 있었던 내재적 원인을 찾아보았다. 1966년을 시점으로 야당들이 통일론으로 남북교류론을 천명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남북접촉을 통한 통일문제 해결이라는 방식이 정치세력 사이에서 통일론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그리고 박정희 정권의 실질적 통일론인 70년대 후반기론은 남한의 경제성장이 가시화 될 경우 북한에 대해 적극적인 통일공세를 펼치게 될 수 있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었다. 요컨대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의 통일 정책 변화는 1960년대 후반 남북교류의 필요성에 동의하는 남한 사회 정치 지형과 데탕트라는 외부적 충격이 맞물리면서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1960년대 후반기에 국내외에서 유엔감시하 총선거안의 의미가 퇴색되어가던 흐름은 6・23 평화통일외교정책선언으로 이어져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천명과 함께 결국 분단을 고착화하는 두 개의 한국은 공식화되었다.(이주봉, 241-242쪽)

 

그리고 내가 뒤에 김지하를 굉장히 주목하게 된 것은 제가 6.3운동을 나름대로 지휘한 겁니다. 그 6.3운동을 지도한 사람들은 제가 지휘했다고 생각하지 않겠죠. 당연히 그런데 거기서 중요하게 활동하고 있던 분자들하고 내가 접선을 하고 지침을 내려줘야 하기 때문에, 그때는 딱 조직이 이미 돼 있던 겁니다. 그게 굉장히 효율적입니다. 그런 걸 안하는 사람들하고, 이면에서 점조직을 하고 있는 사람들하고는 대비가 안되지 않습니까? 한 사람 놔두고 두 사람이 가서 모르는 체 하면서 설득을 하는데 그 사람이 안 넘어갈 수 있나요? 그리고 이번 누구 세워라 이런 것도 다 우리맘대로 되요, 조직적으로 다 가니까, 그리고 상호간에도 모르고 한단 말이에요. 자기는 제 생각대로 하나보다 하지만, 배후에서 다 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안될 턱이 있습니까? 맘대로 되는 거죠.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1, 김정강 증언, 108쪽)

 

⑹ 한국적 민주주의

 

민주주의는 1950년대 담론지형의 특징을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내는 것이었다. 민주주의는 불과 10여 년 만에 한국사회의 지배적 담론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어 지배체제의 정당화는 물론 저항담론의 중심 역할로 확장되었다. 4․19는 그 결정적 결과였으며 쿠데타 세력이 직면한 담론지형의 핵심에 놓여 있었다. 박정희 체제는 이후 민주주의 담론과 갈등, 대립, 경쟁, 전유, 봉쇄 등 복잡한 관계 하에 놓이게 되었다.

4․19에서 극적으로 확인된 민주주의 담론의 놀라운 성장은 1950년대를 거치면서 형성된 독특한 담론지형의 효과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담론지형이 형성된 것은 ‘대한민국’ 수립에 결정적 역할을 한 미국 및 미군정의 대한 정책으로부터 출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민주주의 담론은 해방공간 좌우를 막론하고 중요한 정치적 동원과 정당화 담론으로 기능하고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국가운영 메커니즘으로 구조화된 것은 미국 주도하의 대한민국 수립과 자유 민주주의적 국가제도, 법체계의 형성을 통해서였다. 미국은 반공 체제를 제1차적 목표로 상정 하였으면서도 “국가권력 장악 및 국가권력의 행사는 자유 민주주의의 제도와 이념의 틀 내에서 이루어지도록 제약”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는 ‘미국의 한계선’이란 개념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즉 “반공국가이자 민주주의 체제를 가져야 한다는 이율배반적 과제의 동시 수행”이 요구되었고, “분단국가의 최소한의 안정이라는 하한선민주주의의 최소한의 유지라는 상한선 사이의 정치적 공간”이 미국이 허용한 범위라는 것이다.

한국에서 미국식 자유 민주주의는 분명 지배담론으로 출발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세계체제적 수준에서 구조화된 냉전 체제에 규정되어 공산주의에 대한 안티테제로 부과된 것이었다. 냉전체제 효과는 외적 조건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한국 내부의 주요한 정치적 정당화 담론으로 작동하게 되었다. 50년대 내내 야당의 핵심 인물로 활동한 신익희의 인식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그는 한국전쟁 무렵 ‘우리의 잘 살아 가는 길, 인간의 목적을 달성하는 길’이 “다른 것 없이 민주주의”라고 단언하고 전쟁을 지원하고 있는 국가들을 열거한 다음 “우리의 살길인 민주주의라는 것이 국내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국제적으로 또한 절대 규정”이라고 했다.(황병주, 26-27쪽)

 

박정희는 1961년 8월 10일 전국시읍 재건국민운동촉진회 부책임자 회의의 격려사를 통해 “지난날의 왜곡된 민주주의를 지양하여 우리에게 알맞은 민주주의를 재확립”할 것 주문하였다. ‘왜곡된’ 민주주의는 이승만, 장면 시대의 자유민주주의를 의미한 반면 ‘우리에게 알맞은’ 민주주의는 ‘우리의’ 민주주의를 의미하였다. ‘영국식’ 민주주의, ‘미국식’ 민주주의가 있는 만큼 “대한민국도 나라와 민족의 안팎을 세밀히 살피고 헤아려 우리에게 맞는 성질의 민주주의”를 해야 하는데, 그것이 서구 민주주의의 한국적 변용 즉, ‘한국적 민주주의’ 또는 ‘민족적 민주주의’였다. ‘민주주의의 한국화’라는 표현도 사용하였다. 또한 과거 이승만, 장면 시기의 민주주의는 “주어진 서구 민주주의 제도를 이식해서 그 형태만을 모방”했다고 비판하였다. “그것은 든든한 주춧돌 없이 지어진 큰 정각과도 같은 민주주의”라는 인식이었다. 그 점에서 박정희의 민주주의관은 민족주의적 사고와 강하게 연계돼 있었다. 박정희는 “민족적 이념이 없는 곳에서는 결코 진정한 자유민주주의가 꽃피지 않는 법”이라고 생각했다. 즉 자유민주주의는 건전한 민족주의의 바탕 위에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같은 민족주의와 민주주의의 관계 설정이 ‘민족적 민주주의’를 배태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때의 민족주의는 한국사회의 특수성이 전제되었다. 정부 수립 이후 수입된 어떤 사상, 제도도 올바르게 이식된 것이 없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는 대선 유세과정에서 “외국에서 들어오는 주의, 사상, 정치제도를 우리 체질과 체격에 맞추어서 우리에게 알맞은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 자신이 생각하는 민족주의”라고 밝힌 바 있다. 오히려 ‘민주정치’를 ‘유동성 있는 제도’로 인식했다. 민주정치는 시대와 환경에 따라서 다르며 방법과 격식 또한 고쳐나가는 제도라는 것이다. 곧 민주주의의 본질을 ‘가변성’으로 이해하였다.(김지형, 235-236쪽)

 

박정희 정권 하에서 국가적으로 공인된 ‘민족’은 한편으로는 여전히 종족적 범주를 강조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그것을 벗어나는 존재들도 포괄한다. 하지만 동일 종족이라도 이데올로기를 기준으로 배척하기도 한다. 그것은 사범학교와 군관학교, 사관학교 시절에 배운 황민화 교육이 내면화된 박정희라는 개인이 가진 국가관이 일본의 ‘아시아 주의’에 근간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 식민제국의 관료들 중 상당수가 남한 정부의 고위 각료로, 제국군에 복무하던 이들이 또 다시 대한민국의 군 간부로 이양되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민족적 압제를 가했던 ‘일본’을 대중 통합을 위한 ‘공공의 적’으로 설정하는 것은 이론적으로만 가능했다. 그리고 미국의 원조 없이 경제적 성장이 불가능했던 한국의 경제적 여건 또한 종족적 범주를 벗어난 ‘민족’ 개념의 울타리를 확장시키는 데 일조했다.

해방 정국의 이데올로기 대립과 신탁 통치를 둘러싼 두 진영의 갈등과 반목 그리고 6․25를 통해 가시화된 적군과 아군이라는 대립양상은 남북한에서 ‘민족’을 종족적 표상을 넘어 이념적 표상으로 위치 이동시켰다. 두 진영은 표면적으로 ‘민족’ 통일을 주장하면서도 그 민족통일의 가장 큰 걸림돌로 동일 민족내의 반대 이데올로기 진영을 손꼽고 있었다. 박정희 정권은 표면적으로는 민족 주체성을 강조하면서도 조국 근대화의 모델로서 일본을, 정권의 승인자로 미국을 ‘민족’ 표상의 친연적 존재로 인정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1960년대 민족’ 표상 안에는 단일 민족이라는 종족적 의미와 이데올로기적 요소들이 혼란스럽게 접합되었다.(김지미, 537-538쪽)

 

그렇다면 민주주의 신봉자인 장준하가 군인들의 집권에 환호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저 일시적인 판단착오나 착각에 불과한 것일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5․16 직전 장준하가 가장 두려워하고 있던 것은 한국이 돌이킬 수 없는 ‘후진국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이었다. 장준하가 제2공화국의 국토건설본부 기획부장으로 들어간 것도 ‘후진국의 나락’에 떨어지지 않는 길이 ‘국토건설’이라는 근대화에의 모색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이 무렵 장준하는 “국토가 내던져져 있어 국민생활의 토대를 위협받고 있는 상태”이기에 국토건설을 통해 “경제의 발전을 촉진하여 초토의 생지옥으로부터 살기 좋은 樂土를 건설하자”고 주장하였다. 과거에는 사람도 자연과 같은 일부에 지나지 않았으나, 이제 인간이 “타자연계를 정복하고 스스로 왕자가 된” 시대를 살고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인간의 “자각과 지혜를 밑받침으로 한 부단한 노력”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성과 과학기술에 의해 자연을 정복할 수 있다는 식의 서구중심적 근대지향 의식이 이 무렵 장준하를 압도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절정에 달한 국정의 문란, 고질화한 부패, 마비상태에 빠진 사회적 기강”을 바로잡지 못하고 빈곤・실업의 홍수에서 헤어나지 못한다면, 결국 ‘후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고 그것은 곧 언제든지 한국이 열강의 식민지가 될 수 있는 것을 의미했기에 과거 식민지의 아픈 기억을 떠올리면서 근대를 욕망했던 것이다.(이상록, 225-226쪽)

 

박정희를 비롯한 군부집권 세력은 ‘국가 재건’과 ‘조국 근대화’를 가치의 중심에 두며, 국가의 통치체계와 행정운영을 새롭게 개편하고자 했다. 이들은 국가주도적 산업화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중앙의 행정체계를 하나로 통합하는 가운데, 지방행정 역시 중앙에 통합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내무부 산하 지방행정연구위원회에서 진행된 지방제도 개편 논의는 위원들 간의 정세 인식과 정치적 정향의 차이로 상이한 방안을 제시하며 대립하였다. 김운태와 윤세창은 군정시기를 ‘과도기’로 보고, 지방에 대한 자치행정의 체제를 훼손하지 않는 가운데 지방제도 개편이 진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한신과 이상조는 경제건설을 성취하기 위해 지방에 대한 중앙의 강력한 행정 집중과 통합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견해의 차이는 1962년 민정 이양을 앞두고 제기된 지방제도 개편 논의에서도 이어졌다. 김운태는 지방제도에 대해 대도시를 중심으로 자치권을 확대시켜 가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이상조는 ‘국민의 민도’를 향상시키고, 산업화를 달성한 이후에 지방자치제를 실시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대립된 논의 속에서 군정은 산업화와 경제건설을 우선의 가치로 두는 가운데, 지방에 대한 중앙의 통제력을 강화시켜 갔다.(곽경상, 45쪽)

 

그러나 박정희는 기존의 민주주의를 단순 수용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일정한 정정을 시도하게 되었다. 즉 그는 “지난날의 왜곡된 민주주의를 지양하여 우리에게 알맞은 민주주의를 재확립”할 것을 천명했다. 박정희는 왜곡된 민주주의의 중요 원인이 서구 민주주의의 제도적 형태 모방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것이 ‘풍토와 생리’에 맞지 않아 수많은 부작용을 발생시켰다는 것이었다. 김종필도 1963년 외유 중 미국의 대한정책이 알맹이 없는 ‘형식만의 민주주의’를 실현시키려 한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박정희는 미국에 의해 제공된 민주주의가 단지 껍질 뿐이었고 ‘위대한 민주주의의 꽃을 피우게 하는 데 토대가 된, 길고 고생스러운 투쟁으로 이루어진 뿌리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박정희가 강조한 그 뿌리의 구체적 모습은 자발적 규율과 책임이었다. 그는 이러한 자질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내적으로 향유”하는 데 필요한 핵심 요소로 규정하고 국민 대부분은 “무기력․의타심․이기주의”에 빠진 상태였고 ‘책임이 따르지 않는 자유의 결과’로 “방종․혼란․무질서 및 낙담”만이 팽배한 상태라고 진단했다. 결국 ‘민주주의는 음모․중상․모략으로 타락’했다는게 그의 인식이었다. 요컨대 박정희는 당시의 한국사회가 “민주주의의 대해 가장 중요한 기반 즉 경제자립, 건전한 정신, 법적 질서 및 사회정의를 인식하고 발전시키지 못하였”다고 규정함으로써 민주주의의 변형이 불가피함을 강조했다.(황병주, 261쪽)

 

박정희에 이어 군부통치를 계승한 전두환 군사정권도 영남 지역 패권주의를 통치의 수단으로 활용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표3>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영남 지역 출신의 정치충원율은 1-5공화국 기간 중 평균 28.5%로 1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박정희․전두환의 집권기간인 3-5공화국 기간에는 1-5공화국 기간의 평균치를 훨씬 상회하는 33.5%의 충원율을 보이고 있다. 전두환 정권의 집권시기인 5공화국에 들어와서는 영․호남 간의 격차는 더욱 현격하다. 이 시기에 영남출신이 43.6%의 충원율을 보인데 대하여 호남출신은 고작 9.6%에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1960년대 이후의 집권기간 중 박정희 정권은 군부와 중앙정보부등을 국가통치기구로 활용하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군부는 통치자 유형의 군부로서 기능했으며, 국가조합주의에 의거한 권위주의적 독재체제하에서 정권유지의 물리력으로 활용되었던 것이다. 또한 1960년대 국가통치기구의 재편과정에서 주목할 것은 박정희 정권의 군사정권의 출범 이후에 추진된 영남지역 패권주의와 이를 통한 정권 안보의 재생산 시도였다.(양병기, 272쪽)

 

오늘날 대부분의 연구자들과 평론가들은 현재 부산이 보여주고 있는 압도적인 여권 우세 현상의 결정적 계기를 1990년에 단행된 3당합당에서 찾는다. 이는 매우 정확한 평가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박정희 정권기 동안 부산 지역에서 40%대의 득표율을 유지한 공화당계 정치세력의 의미를 완전히 무시하는 것은 옳지 않다. 1963년 총선의 돌풍이 끝난 뒤 공화당은 부산에서만큼은 줄곧 소수정당이었지만 공화당을 만들었던 이들과 공화당에 합류한 지역 엘리트들 대부분은 그로 인해 심각한 피해를 입은 적이 거의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공화당에 참여함으로서 국가권력에 접근할 기회를 얻었고 그들 중 많은 이들이 경제적 이익과 높은 사회적 지위라는 보답을 받았다.

1979년 박정희의 죽음과 함께 공화당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부산지역에서 공화당계 정치세력의 핵심부에 있던 인물들은 공화당의 몰락 이후에도 지역의 유지층으로서 영향력을 유지했으며 그 영향력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본 논문에 등장하는 공화당계 정치세력에 속한 인사들 중 상당수는 공화당이 소멸한 뒤에도 여전히 지역에서 높은 지위를 유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공화당은 사라졌지만 공화당계 정치세력에 속한 인사들의 권력과 그들 사이의 사회적 연결망은 건재했던 것이다.(김호민, 48-49쪽)

 

5. 반공

 

⑴ 개신교 반공주의

 

김광수에 의하면, 해방 직후 압도적 다수의 개신교인들이 공산주의를 배격했던 논리는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고 한다. "공산주의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무신론이다. 공산주의는 유물론을 내세우면서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고 있다. 공산주의는 종교를 인정하지 아니하는 고로 여하한 종교도 말살당한다. 공산주의는 독재체제이기 때문에 인간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다. 공산주의가 한국을 지배하는 날에는 소련의 지배를 받게 될 것이 분명하다 등등." 무엇보다 반공주의적 개신교 지도자들은 소련을 세계 적화야욕을 지닌 제국주의 세력으로, 남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을 소련제국주의의 하수인인 반민족세력으로 낙인찍고, 반면에 자신들을 이에 대항하는 민족진영 혹은 자유진영으로 묘사함으로써 세계적 차원의 냉전체제에 적응해 갔다. 남한에서는 신탁통치 반대운동(반탁운동)을 통해 이런 논리가 빠르게 확산되었는데, 좌파와 우파세력의 폭력적 충돌로 이어진 1946년 3.1절 행사에서 우파측 행사를 개신교인들이 주도함으로써, 개신교는 대표적인 반공세력 중 하나로 남한 사회 전반에 각인되었다. 또 남한의 단독정부를 대공투쟁의 1단계 승리로 해석하고 정당화함으로써, 남한 개신교인들은 한반도 차원의 분단체제에도 적응해 갔다. 이것은 말하자면 "소련이 38선을 이용하여 북한에 주둔하면서 일찌감치 사실상의 괴뢰국가를 세운 마당에 남한에도 강력한 반공국가를 수립함으로써 소련의 제국주의적 팽창을 저지할 단단한 보루를 마련하고, 이를 기반으로 삼아 실력을 키운 후 역으로 다시 북진함으로써 진정한 민족통일을 달성한다는 논리였다.(강인철 1, 45-46쪽)

 

한기련은 4․19 혁명의 와중에서 '전세계 민주국가 진영의 최전선'에서 공산세력에 대결할 중대한 책무'가 하나님에 의해 한국에 부여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공산주의 세력을 사탄 내지 적그리스도로 파악하는 '사탄론', 그리고 신이 부여한 악마적 공산주의 세력과의 대결사명이라는 반공주의적 선민의식이 결합될 때, 개신교 반공주의의 종교적 성격이 매우 뚜렷해지고 강력해질 수 밖에 없고, 이런 담론에 구원론적 색채가 어느 정도 들어가는 것 또한 피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전쟁 이후 개신교 대중의 종말론적 상상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많은 개신교 신자들은 전쟁후 '한반도 중심의 세계 구원', 나아가 '한반도에 재림주 출현' 혹은 '예수의 한반도 재림'등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런 주장들을 주류 교단의 정통교리로 담을 수는 없었을 것이며, 따라서 이런 욕구들은 다양한 개신교 게통 신종교를 통해 분출되었다. 그러나 박태선이나 나운몽 등 신종교 지도자들이 상당기간 동안 주류교파들에서 인기 있는 부흥사였던 데다가 이단으로 배척받기 시작한 후에도 주류 교파 신자들에게 강력한 흡인력을 발휘했음을 고려하면, 이 당시 이런 부류의 종말론적 구원론은 신자 대중 사이에 꽤 널리 퍼져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한국전쟁 직후에 출현했거나 재활성화된 많은 신종교들은 강한 반공사상을 공통분모로 갖고 있었고, 이런 반공사상을 종말론적 구원론과 적극적으로 결부시켰던 것이다. (강인철 1, 49쪽)

 

개신교 반공주의의 역사에서 7.4 남북공동성명에 대한 교회협의 성명서는 주요한 분기점을 이룬다. 무엇보다 남북간 긴장완화와 평화적 방식에 의한 통일을 지지했다는 것은 분단 이후 개신교 반공담론에 전제되어 왔던 멸공-무력 통일 방식이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철회되어 왔음을 의미할 것이다. 나아가 이것은 개신교의 반공담론의 핵심 내용 중 하나였던 '악의 화신인 공산주의와의 접촉(대화·공존·협)에 대한 금기'가 더 이상 지켜질 수 없음을 의미할 것이다. 거의 같은 시기에 개신교 반공주의에 대한 또다른 변화 압력은 개신교 일각이 참여한 민주화운동에서 나왔는데, 이는 서로 연관된 두 측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한편으로 민주화운동경험은 군부집권세력이 반공을 이용하여 독재와 억압, 착취를 정당화하고 있고, 반공을 앞세워 비판세력을 탄압하거나 배제하고 있다는 깨달음을 제공했다. 개신교 민주화운동가들은 처음으로 또 다른 강력한 반공세력과 맞서 싸워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면서, 군부 집권세력의 반공 혹은 국가안보 담론 속에 들어있는 이데올로기적 함정에 대해 고민해야 했다. 다른 한편으로 1970년대 중반부터 스스로 반공의 보루라 자부해왔고 한국 사회 안에서 반공의 상징으로 인정받아왔던 개신교 지도자들이 정부당국에 의해 '용공세력'이나 '빨갱이', 혹은 그런 세력을 옹호하는 자들로 몰리는 곤혹스러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이처럼 반공주의의 이데올로기적 위험에 대한 성찰, 스스로 용공세력으로 낙인찍히는 경험, 악마적 세력과의 접촉금지 터부의 위기 혹은 해체, 무력 통일 방식의 포기 등이 1970년대 이후 개신교 반공주의에서 나타났던 가장 중요한 변화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강인철 1, 53-54쪽)

 

물론 그는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사회제도를 초월”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하지만 기독교와 공산주의 사상은 근본적으로 공존할 수 없는 것이었다. 특히 공산주의 유물론과 계급투쟁론 그리고 도덕관념 등을 기독교가 전혀 수용할 수 없느 것이었다. 그래서 한경직 목사는 공산주의를 “묵시록에 있는 붉은 용”과 동일시하면서, 기독교인들에게 “이 용을 멸할자가 누구냐?”고 촉구하면서 공산주의자들과의 싸움을 독려하였다. 이명직 목사도 공산주의를 계시록의 “붉은 용”과 동일시하며, 적그리스도를 상징한다고 보았다. 한국의 대표적인 보수주의 신학자였던 박형룡 박사도 공산주의를 “붉은 용”이라고 부르면서 그에 철저히 반대하였다. 공산주의와 그 종주국인 러시아에 계시록 12장에 등장하는 마귀의 이름을 붙여 종교적인 의미를 부여했던 것이다.

해방 이후 대표적인 기독교 언론 매체였던 <기독공보>는 “기독교의 한국적 사명”이라는 사설에서 한국교회의 사명은 첫째로 “민주건국”이며, 둘째는 “공산주의를 반대하고 기독교주의”를 확립하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한국의 동맥”이며 “건국의 밑천”인 한국교회와 기독교인들이 滅共救族에 앞장설 것을 요청하였다.(허명섭, 94-95쪽)

 

이미 언급했듯이 기독교인들의 정치 참여 배경에는 친 기독교적인 미군정의 수립, 좌익세력에 대한 위기의식, 일제 말 교계 지도자들의 경험 등이 자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 중 가장 크게 영향을 끼쳤던 것은 기독교계에 우호적인 미 군정의 수립이었다. 이는 북한에서도 교회 지도자들의 정치참여가 활발하게 일어났지만, 결국 북한 정권의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와 마찰을 빚게 되면서 실패했던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소련 군정의 근본적인 사상은 반종교적이었으며, 북한에 친소정권을 세우는 데 기독교세력은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것이다.

사실 미군정과 한국교회 간에 우호적인 관계를 촉진하는 요인들은 매우 다양했다. 첫째는 해방 이전부터 형성되었던 한국교회의 친미적 태도이다. 둘째는 미군정 관료들 대다수가 기독교적 배경을 갖고 있었다. 셋째는 기독교인들의 영어 구사능력이다. 영어는 미군정의 공식 언어로 의사소통에 필수적인 것이었다. 한국교회는 타 집단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미국 유학 경험자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넷째로 재한 경험의 선교사 또는 선교사 2세들의 역할이다. 그들은 참모, 통역, 고문 등의 자격으로 미군정에 참여하면서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정치참여를 도왔던 것이다. 다섯째로 한국인 군정 고문들의 활동이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미국정부의 관리로 재직했던 배민수•임창영 목사를 비롯하여 황성수•임병직•이순용•유일한•한영교 등 다수의 한국교회 신자들이 종전 직후에 내한하여 군정 고문으로 활동했던 것이다. (허명섭, 150-151쪽)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러면 당시 한국 기독교인들의 이러한 정치참여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1960년대 이후 진보적인 지식인들과 신학자들은 친미․반공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정권에 영합하는 자들이고, 민족에 대한 애국심이 없는 사람들로 糊塗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해방 이전과 관련해서도 공산주의자들의 민족운동만을 높게 평가하고 기독교-민족주의 계열에 대해서는 개량주의로 매도하는 것이 일반적인 풍토였다. 하지만 대다수 한국기독교인들과 신학자들, 특히 서북지방 출신자들의 경우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을 主敵으로 하는 애국심을 갖고 있었으며, 해방후에는 자연스럽게 친미․반공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가지고 있던 기독교-민족주의적인 성향이 아주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민족에 대한 이해가 그 이전과 달라졌던 것이다. 일제 치하에서는 민족관념이 항일로 이해되었지만, 해방 후에는 그것이 건국과 연결되었다. 이러한 이해에 따라 기독교인들은 정치참여를 통한 건국운동에 적극 가담했던 것이다. 그리고 미군정기에 대두된 이러한 경향은 대체로 제1공화국 중반까지 이어졌다.

한편 진보적인 지식인은 한국교회가 1970-80년대에 유신정권과 군사독재 정권에 대항하여 펼쳤던 인권운동이나 민주화운동에 대해서는 매우 높게 평가한다. (필자도 이러한 평가에 대해 어느 정도 동의한다). 반면에 그들은 해방 이후 미군정기와 제1공화국에서 있었던 한국 기독교인들의 정치참여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입장에서 평가하려는 경향이 짙다. 그래서 혹자는 해방공간에서 이루어진 정치활동에 대해서 ‘기형적’인 것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물론 이는 객관적인 데이터를 중히 여기는 사회과학적인 입장에서는 지극히 타당하다. 그리고 타종교들과의 비교분석을 통해 도출된 결론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평가는 객관성의 논리에 집중한 나머지 시대의 연속성이라는 차원을 간과하고 있는 것 같다. 즉 이러한 평가는 개신교 수용 이후 한국교회가 한국사회에 끼쳤던 영향을 간과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허명섭, 158-159쪽)

 

⑵ ‘억압․과잉․폭력’이란 표현으로 기록된 역사 

 

민중들을 탄압하는 창구는 강력했고 강고했다. 정권의 태생적 성격으로서 남북 대결 속 반공 이데올로기를 강화하고 신 국가보안법을 제정하여 대공사찰 강화와 언론 통제에 부심해온 이승만 정권은 시민의 항거를 공산당의 배후 조종으로 몰아 빌미하고 볼모로 잡아 탄압하였다. 3.15 마산시민의 1차항쟁에서부터 경찰이 기관단총 등으로 무차별 총격을 가해 8명의 사망자와 72명의 중상자가 발생했으나 이승만 체제는 오히려 시민들을 폭도로, 시위는 ‘공산당의 책동’에 의한 것으로 여론조작을 자행했다. 놀랍게도 먼저 지방으로부터 고등학생 시위, 1,2차 마산, 광주 의거가 연달아 일어나 4․19의 도화선, 선봉이 되고, 이어 4월 19일 서울에서 학생들이 아침부터 선언문을 낭독하고 거리로 뛰쳐나오고, 시민들도 학생들의 대열에 합류하고, 국회의사당에서 경무대로 시위대가 향하고,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이 정권에게는 다만 공산 폭도들의 준동일 뿐이었다. 경찰은 시위대에 무차별 발포를 하고 사상자는 증가하는데도 이승만 정부는 극우반공 분단체제에 고착하여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민을 위협하고 억압하여 사태를 수습하려 하였다.(임태환, 32쪽)

 

김승옥 문학에 대한 그간의 연구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다. 김승옥 문학에 관한 연구물이 그렇게 오랫동안 쏟아져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반공의 검열 효과를 중심으로 한 분석은 거의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유는 무엇보다 김승옥의 문학이 통상적인 의미의 반공주의에서 멀리 떨어져 나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실은 김승옥 스스로 검열에 관해 간헐적으로 속내를 비친 일이 있다. 그는 소설 쓰는 일의 괴로움에 대해 말하면서 “이런 글을 썼다가 당국에 걸리는 게 아닐까」하는, 참으로 내놓고 얘기할 수 없는 걱정이 있다.”, “당국의 어떤 오해에 의한 어떤 사태를 예상하면 등에 식은 땀이 나는 것이다. 당국이라고 반드시 실수를 저지르거나 오해하지 말라는 법은 없”기 때문이라고 토로했던 것이다. 작가의 진술에서 우리는 글을 쓸 때마다 그가 항상 검열에 대한 두려움과 조바심을 강도 높게 느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두려움과 조바심이 아버지와 삼촌이 연루된 여순사건(1948.10.19.~10.27.)의 경험에서 생겨난 것임은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국가에 의해 공산주의자로 오인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심정은 “여순사건 이후 집안에 대한 감시가 심”했던 “반체제분자의 자식”으로서 살면서 오랫동안 그가 이를 직접적인 발언으로 든 텍스트를 통해서든 거론한 적이 없다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여수와 순천을 문학적 공간으로 자주 선택하면서도 여순사건은 텍스트 내에 은폐되어 있거나 삭제되었던 것이다. 이를 반공적 검열을 의식한 결과라고 보는 견해는 지나친 것이 아닐 터이다.(김미란 1, 8-10쪽)

 

이를 위해서는 그의 여순사건 체험뿐만 아니라 한국전쟁과 4월혁명 등과 같은 다른 역사적 사건들을 비롯해서 그를 둘러싼 한국의 정치적, 문화적 상황까지 고려하는 것이 필요하였다. 작가의 소설적 배경이 여수와 순천이라 해도 그 표상에 담긴 의미의 층위는 복합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에 관여한 다양한 문학 내적, 외적 계기들이 가능한 한 모두 고려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 결과 알게 된 것은 김승옥의 텍스트에서, 자유주의적 관점에 따라 정치가 문화론적 차원에서 조명되면서 역사가 진공상태에 놓이게 되는 경위이다. 이는 이념에 대한 그의 혐오와 두려움이라는 양가감정에서 기인한다. 김승옥은 현재까지도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지만, 좌우익의 이념 모두 인간다운 삶을 억압한다는 신념 또한 고수하고 있다. 이것은 그의 문학 텍스트에서 이념을 휘발시킴으로써 여수와 순천을 정치적 공간에서 문화적 공간으로 조형하는 방식으로 구체화된다. 그런데 이념을 소거하려는 작가의 태도는 개인의 신념에 의한 것이기도 하지만, 이념과의 직접적인 대결을 피하려는 의도에 따른 것이기도 하다. 국가 권력은 이 시기에 무소불위의 반공 논리를 동원하여 자신에게 위협이 되는 혁신 사상을 토대로부터 철저히 붕괴시켰기 때문에, 자유주의 정치학은 자신의 사유 공간을 반공 담론의 울타리 안에 힘겹게 마련해야 했다. 이는 무한 증식하는 반공 논리 언저리에 거처를 마련함으로써 자기 보존을 꾀하는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반공 논리 내부를 비균질적으로 만들어 파열을 일으킨다는 점에서 완전한 순응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따라서 작가의 글쓰기 작업이 일관되고 명징한 의식의 경로를 따라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드러내면서 숨기고자 하는 분산되고 모순적인 의식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며, 이 의식이 금기에 대해 간접적으로 발언하는 방법을 택하게 하였다고 평할 수도 있을 터이다.(김미란 1, 34쪽)

 

제2공화국 시기에 등장한 혁신계와 사회운동세력의 통일논의와 통일운동에 대한 박정희의 관점은 매우 부정적이었다. 통일운동에 나선 혁신계와 학생들은 ‘용공분자’와 동일시되었다. 5․16이 없었다면 “끝내 공산화되었을 지도 모른다”는 가정이 쿠데타세력 내에 팽배해있었다. 혁신정당들의 활동이 데모, 남북교류 집회, 신문 등을 통해 용공적인 색채를 띠었으며, 순진한 학생과 불순분자들을 선동하여 나라를 공산당한테 팔아먹었을지도 몰랐다는 것이다. 5․16 직후 제1공수특전단 장교들의 좌담회에서는 장면 정권 하의 혁신계 통일논의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대체 우리의 적은 누구이냐? 장교들은 의문에 사로잡히게 되었고 사기마저 저하”되었다는 게 군 내부 정서의 일단이었다. 그 같은 분위기에서 쿠데타 주도세력은 ‘용공세력’ 검거에 나섰다. 5월 16일부터 21일까지 6일 동안 2,014명이 체포되었으며 이후 두 달 동안 예비 검속된 자들은 총 3,098명에 달하였다. 이어서 7월 3일에는 “국가의 안전과 국민의 자유를 확보할 목적으로” 반공법을 제정, 공포하였다. 이같은 조처는 ‘반공 공약’을 실천에 옮기는 과정으로서 내적 논리와 근거에 의한 조치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과도한 반공주의와 용공혐의자들에 대한 인신 구속 등의 조치가 군사쿠데타의 지도자 박정희의 과거 경력과 관련된 과잉행동일 가능성 또한 고려할 필요가 있다. 과거 남로당 경력에 대한 지나친 의식은 자신을 견결한 반공주의자로 보이게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김지형, 224-225쪽)

 

좀 더 구체적으로 4월 혁명의 주체들은 정치․사회적 가치와 운동 과정 및 결과를 요약하면, 4월 혁명을 주도했던 학생들은 초등학교 또는 중학교시기에 한국전쟁을 겪은 세대이며 따라서 1950년대 내내 지닐 수 밖에 없었던 반공의식을 완전히 덜쳐버릴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해방 이후부터 자유당정권이 들어선 시점에도 불거져 나오는 미군의 행패로 인한 반미감정과 민족주의적 자각이 신생활운동, 국민계몽운동등에 깔려 있다.

이러한 운동 주체들의 정치적 태도와 한계로 인해 오히려 516쿠데타로 등장한 박정희에 대해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고 판단된다. 즉, 자유당 폭정에 대한 불만, 민간정치인에 대한 불신, 경제성장, 그리고 반공이데올로기는 박정희의 쿠데타를 인정하는 주요 기준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윤상진, 148쪽)

 

1950년대 한국의 국민국가 형성과정은 미국 주도의 반공진영에 깊숙이 편입되면서 진행되었고 그 과정에서 미국의 영향력은 정치·군사적인 면을 넘어 사회·문화·사상적 차원으로까지 확장되었다. 부르주아 국민 국가의 통합과 유지에 민주주의와 민족주의는 핵심 담론의 역할을 담당해왔고 한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대외적 단일성과 대내적 동질성을 강조하는 민족주의는 내적 갈등과 대립을 관리할 정치운영원리로서의 민주주의와 결합될 필요성이 있었고, 형식적으로 정치적 평등을 전제한 인민주권은 민주주의를 통해 '모든 저항'이 가능함을 설득하는 것이었다. 더욱이 50년대 한국이 경험한 민주주의는 미국의 자유민주주의, 즉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모순적이자 보수적인 결합으로서 좌파담론의 민주주의와 날카롭게 대비되는 것이었다. 요컨대 1950년대 한국에서 민주주의는 분명 지배담론으로 출발했다. (황병주, 249쪽)

 

이렇게 통일된 ‘대안’이 만들어지지 않는 상태에서, 위와 같은 구조적상황이 지속된다면 언제든 지배세력의 안보이슈동원으로 상황은 급변할 가능성이 있다. 과거의 사례를 보면, ‘분단’이후 한국정치에서는 반공주의라는 틀을 넘는 ‘문제제기’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오랫동안 권위주의체제가 지속되었고, 몇번의 시행착오 끝에 ‘분단’에 대한 근본적 ‘문제제기’를 했었음에도, 1987년 당시 ‘분단’의 실재와 지배세력의 지속적인 안보이슈 동원으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 이상의 논의로는 진행되지 못하였다. 즉 이것은 안보이슈를 선취하지 않고서는 국정원 선거개입설과 같은 절차적 민주주의의 문제 해결도 요원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대항세력에서는 ‘분단’에 대한 근본적 ‘문제제기’와 그에 따른 통일된 ‘대안’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 이유로는 ‘분단’후 형성되었던 보수독점적 정치지형에서 출발한 협소한 이데올로기적 스펙트럼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하겠다. (최장집 2004, 59) 이러한 점에서 ‘분단’은 여전히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있어 장해요인이 되고 있다 할 수 있다.(이정길, 337쪽)

 

 

6. 혁신계 통일운동

 

⑴ 625 전쟁을 둘러싼 혈연주의적 뒷끝 + 계급혁명 사상

 

4월 혁명의 후반기 국면에서 주목해야 할 현상은 한국전쟁 전후에 ‘학살’된 ‘양민’들이 유족들이 제기하는 진상규명운동이다. 민주주의가 고양되고 국가권력의 권위주의적 독재성이 약화되자 탈 식민이나 탈 전쟁을 향한 집단적 움직임이 가시화되었다. 이 과정은 한국의 중층적 정치구성을 잘 보여준다. 즉 정치적으로는 보수정당 지배하에서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정당은 주변에 머물러 이었다. 사회적으로는 분단 국가 형성과 전쟁에 적극 참여한 주류층이 완전한 정치 사회적 권리를 향유하는 가운데, 여기에서 배제된 사회적 소수자 집단이 광범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이런 중층적 구성은 ‘최소 민주주의’가 이루어지기 전에는 은폐되어 있다가 민주주의가 진전되면, 비로소 공적 영역으로 진입하여 가시화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국가형성기의 민주공화제가 정치공동체를 구성하는 성원들이 어떤 차별 엇이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갖는 것으로 표방되지만, 실제로는 분단과 전쟁에 의해 이 원리가 제한적으로만 관철된다는 점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된다. 더구나 내전적 국제전쟁을 겪은 한국 사회에서 전쟁의 후과가 강력하게 남아있던 시기에 완전한 시민성의 원리가 작동했다고 보는 것은 무리이다. 따라서 4월 혁명 후반기 국면에서의 유족이나 혁신계의 활동은 국가형성기에 배제되었던 소수자들의 성원권 확인운동, 또는 ‘국가’의 재구성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국면의 유족운동 또는 진보 혁신계 운동은 지역에 따라 양상이 달랐다. 이들은 한국전쟁기의 점령 경험의 양과 질에 따라, 보다 구체적으로는 북한정권에 대한 시각에 따라 분화될 소지를 아고 있었으며, 이것이 현실화된 것이 1961년 초의 혁신계 정당의 분화와 경쟁이다. (정근식, 30-31쪽)

 

4월 혁명의 후반기 국면에서 주목해야 할 현상은 한국전쟁 전후에 ‘학살’된 ‘양민’들이 유족들이 제기하는 진상규명운동이다. 민주주의가 고양되고 국가권력의 권위주의적 독재성이 약화되자 탈 식민이나 탈 전쟁을 향한 집단적 움직임이 가시화되었다. 이 과정은 한국의 중층적 정치구성을 잘 보여준다. 즉 정치적으로는 보수정당 지배하에서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정당은 주변에 머물러 이었다. 사회적으로는 분단 국가 형성과 전쟁에 적극 참여한 주류층이 완전한 정치 사회적 권리를 향유하는 가운데, 여기에서 배제된 사회적 소수자 집단이 광범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이런 중층적 구성은 ‘최소 민주주의’가 이루어지기 전에는 은폐되어 있다가 민주주의가 진전되면, 비로소 공적 영역으로 진입하여 가시화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국가형성기의 민주공화제가 정치공동체를 구성하는 성원들이 어떤 차별 엇이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갖는 것으로 표방되지만, 실제로는 분단과 전쟁에 의해 이 원리가 제한적으로만 관철된다는 점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된다. 더구나 내전적 국제전쟁을 겪은 한국 사회에서 전쟁의 후과가 강력하게 남아있던 시기에 완전한 시민성의 원리가 작동했다고 보는 것은 무리이다. 따라서 4월 혁명 후반기 국면에서의 유족이나 혁신계의 활동은 국가형성기에 배제되었던 소수자들의 성원권 확인운동, 또는 ‘국가’의 재구성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국면의 유족운동 또는 진보 혁신계 운동은 지역에 따라 양상이 달랐다. 이들은 한국전쟁기의 점령 경험의 양과 질에 따라, 보다 구체적으로는 북한정권에 대한 시각에 따라 분화될 소지를 아고 있었으며, 이것이 현실화된 것이 1961년 초의 혁신계 정당의 분화와 경쟁이다. (정근식, 30-31쪽)

 

<김일성 저작선집>은 그때까지는 8권까지 읽었고요, 그리고 <빨치산 회상기>, 그리고 이런 류의 소설들. 그때 저는 <김일성 저작선집>을 처음부터 마지막 글자까지 틀림없이 읽었습니다. 명지대학교 명예교수인 윤원구 교수는 대전교도소에서 한 70시간을 반공에 대해 강의했습니다. 대전교도소에는 수감자가 600명 있었는데 공부기초가 있는 사람을 한 50명을 추려서 맑스의 ‘자본론’을 뒤집어서 비판하더라고요. 한번은 이런 얘기를 하더군요. “여러분 역사상 제일 유명한 책이 둘이 있는데 <자본론>과 <성경>입니다. 내용이 정반대되는 이 두 책의 공통점이 뭔지 아십니까? 첫 글자부터 마지막자까지 다 읽은 사람이 몇 없다는 겁니다.” 저도 감옥에서 성경을 몇 번이나 다 읽었는데 그 내용을 해석하는 건 잘 알지 못해도 글로는 다 읽었죠.

그리고 <지하당 조직방법>이라는 게 있습니다. 지하에서 혁명당이 절대로 당 원수를 많이 해서는 안됩니다. 혁명이 유리할 때는, 지상에 나왔을 때는 많이 불리고, 불리할 때는 질적으로 높이는 겁니다. 정간은폐라는 건데 정수분자를 정밀하고 간단하게 단순하게 해서 깊이 박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양명천일 용병일시, 군대를 양성하는 데 길게 해서, 결정적인 시기에 한번에 쓴다. 지하에 있는 사람들이 부단히 움직여야 하죠. 내가 살기 위해 가만히 있으면 안되고, 움직이지만 절대로 정체를 밝혀서는 안되죠. 내가 공산주의자라는 것을 밝히지 않고 목사가 되기도 하고 혹은 교수가 될 수도 있는 거고, 절대로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라고 해야 하고요. 저변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게, 식민지 현실에 눈뜨게 해야 하고, 그런데 당조직은 만들 수 있어요. 단선으로요. 내 위의 사람은 나만 알고요, 내 밑의 사람은 내 위의 사람이 절대로 알아서는 안되고, 또 횡선해도 안됩니다. 지하당조직방법 원칙이라는 게 그겁니다. 심복들을 많이 만들고 유사시에 일어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드는 거죠.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민족문화연구소 편, 최하종 증언, 363쪽)

 

항소심은, 우선 원심이 이적동조의 공소사실에 대하여 아무런 판단을 하지 않았다는 위법을 지적하여 원심판결을 파기하였고, 다시 판결을 하면서 이 사건 각 공소사실을 모두 유죄로 인정하였다. 나아가 양형에 있어, 최근 남북한 사이에 화해협력 및 교류의 분위기가 조성되는 등의 현상은 냉전체제의 종식이나 우리 사회의 경제적 번영 등에 따른 자신감과 역량, 북한의 인권탄압과 경제적 피폐 등 정치ㆍ경제적 현실의 변화에 힘입은 것인 만큼, 현실세계의 변화에 따라 또 다른 국면이 조성될 가능성이 상존하고 있는 점, 통일의 모색과 북한과의 접촉에서 일관된 조율과 신중한 정책추진이 필요함에도, 북한의 각종 전술전략에 따른 주장을 그대로 답습하는 형태의 감상적이고 독단적인 통일운동을 벌이는 행위는 국가의 존립ㆍ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하는 범죄행위인 점, 우리 국가 사회가 보장하는 사상과 양심의 자유는 오직 자유민주적 기본질서가 평화롭게 수호될 때에만 향유할 수 있기 때문에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고 위협하는 세력과 현실적으로 대치하고 있는 한 이에 동조하고 영합하는 자유는 일정 부분 유보될 수밖에 없는 점, 원심판결 후에도 이적단체로부터 탈퇴하지 않고 그러한 의사도 밝히지 않고 있는 피고인의 태도는 묵과하기 어려운 점 등에 비추어 원심의 형이 가벼워서 부당하다는 검사의 주장이 이유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피고인을 원심보다 무거운 형인 징역 2년 및 자격정지 2년에 처하였고, 피고인의 나이, 건강 상태 등을 고려하여 징역형의 집행은 3년간 유예하면서 실정법의 규범력과 판결의 실효성 보장하고 피고인의 준법의식 제고와 원만한 사회복귀를 촉진하기 위해 보호관찰을 받을 것을 명하였다.  ( 2006노2194)

 

북한공산집단(이하 ‘북한’이라 한다)은 정부를 참칭하고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조직된 반국가단체로서, 사회주의 혁명이론인 마르크스-레닌주의 사상 및 그 변형인 김○○ 독재사상(소위 ‘주체사상’)에 입각하여, 인류 역사는 생산수단을 소유한 지배계급의 피지배계급에 대한 착취와 억압의 역사이자 이에 대항하는 계급투쟁의 역사이고, 한반도 분단은 미 제국주의의 한반도 예속화 정책에 따른 산물로 파악한다. 북한은 미제국주의의 침략을 극복하고 인민이 주인 되는 사회를 건설한 민족사적·혁명사적 정통성을 보유한 자주적·민주적 정권인 반면, 대한민국은 미제의 군사적 강점하에 예속된 식민지·반자본주의 사회이고, 대한민국 정부는 미제에 의하여 세워지고 미제의 비호로 유지되며 미제의 식민지 정책을 집행하는 친미예속 파쇼 정권으로서, 미제와 결탁하여 정권의 계급적 이익을 옹호·유지하고자 국가보안법 등 각종 악법과 폭압기구를 두어 민중의 모든 기본적 인권을 탄압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북한은 남한의 억압받는 민중을 해방하고 한반도 평화통일을 이룩하기 위해 소위 ‘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혁명(nlpdr)’ 사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우선 남한내에서 미군철수 요구 등 미제 타도를 위한 ‘반미자주화’ 투쟁 및 파쇼권력과 그들의 민중 지배도구인 국가보안법 등 각종 악법의 철폐 요구 등 ‘반파쇼’ 투쟁을 전개하여야 하고, 그 투쟁 방식으로 노동자·농민·도시빈민·청년학생·진보적 지식인 등 미제와 파쇼권력에 의하여 억압받고 있는 모든 계층이 소위 ‘통일전선(united front)'을 구축한 다음, 합법·비합법, 폭력·비폭력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투쟁해 나가야 하며, 이러한 투쟁으로 미제 및 파쇼권력을 타도한 후 남한 내에 소위 ‘자주적인 민주정권’을 수립하여 민중을 해방하고, 북한의 연방제 통일론에 따라 소위 ‘자주적인 평화통일’을 이룩하여야 한다고 끊임없이 선전·선동하고 있다. (중략)

위와 같이 제정된 ○○○○의 강령에서는 “1) 나라의 통일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한다. 2)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음을 인정하고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해 나간다. 3) 남북의 이산가족과 비전향 장기수 문제 등 인도적 문제를 조속히 해결한다. 4) 남북이 경제협력을 통하여 민족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고 사회, 문화, 보건, 체육, 환경 등 제반분야의 협력과 교류를 활성화하여 서로의 신뢰를 다져 나간다. 5) 남북공동선언을 실천하는 남북 당국 사이의 대화를 지지한다. 6) 남북공동선언 실현의 인적, 물적, 제도적 장애들을 극복하고 장기간의 분단으로 초래된 민중의 생존권 문제를 해결한다. 7) 사상과 정견, 신앙과 양심의 차이를 넘어 남북공동선언을 지지하는 모든 민족구성원의 단결, 단합을 실현한다.” 등 자주적 통일, 낮은 단계 연방제 통일지향, 남북 협력과 교류활성화, 남북공동선언 실현의 인적ㆍ물적ㆍ제도적 장애 극복, 남북공동선언을 지지하는 민족구성원 단결 실현 등을 활동목표로 제시하였다. (2009고합1530)

 

○○○○○○○○○(약칭 ‘○○○○’)」는 북한 대남공작부서인「○○○○○」의 지도하에 일본의「○○○」을 모방하여 중국내 북한 지지세력 확대 및 주체위업의 완성과 조국통일, 사회주의 위업실현, 김○○의 조국통일 3대헌장을 받들어 자주적 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 반민족·반통일 외세들을 저지·파탄 등을 목적으로 북한 국적을 가진 조선족을 중심으로 결성된 단체이며, 1991. 3.「○○○○○○○○○○」로 출범 후 1998. 8.「○○○○○○○○○」(약칭 ‘○○○○’)로 명칭을 변경하고 중국을 거점으로 하여 북한의 지령에 따라 대남공작 임무 등을 수행중인 단체로서 북한은 중국 북경 주재 북한 대사관 및 홍콩·심양 영사관에「○○○○○」의「○○○○」담당 요원을 파견하여 한국인 포섭과 대한민국 정보 수집을 병행하는 한편「○○○○」이 대한민국 내 제 사회단체에 대정부 투쟁 지침을 제공, 선전·선동하면서 이른바 고려연방제통일방안 실현을 위해 "남조선의 반공정권 퇴진, 평화협정 체결, 주한미군 철수" 등을 주장하며 적화통일 투쟁을 전개 중이다.

한편, 피고인 김○○은 2002. 이후 수차례에 걸쳐 강○○과 함께 혹은 단독으로 ○○○○ 의장 양○○과 만나 오면서 ○○○○를 매개로 한 ○○○ 이후의 새로운 남-북-해외 3자연대체 구성을 협의해 왔으며, 위 단체의 명칭 자체가 ‘○○○○○○○○○’인 점, 양○○의 명함에는 북한의 인공기가 인쇄되어 있는 점, 양○○은 ○○○○의장임과 동시에 ○○○ 중국본부 의장으로서 북한으로부터 중국에서의 대남공작활동등에 관한 지령을 받아 중국 내 북한 국적자들과 북한을 연결하는 활동을 하고 있으며, ○○○○ 결성 당시부터 2009. 12.까지 20여 년간 ○○○○ 의장으로 활동해온 양○○이 중국 거주 북한국적자(일명 조교)로 북한의 노동당 창건 기념일, 김○○, 김○○ 부자 생일 등 각종 행사시마다 입북하여 사회주의 강성대국 건설, 주한미군 철수 등을 주장하며, 북한 대남공작부서「○○○○○」의 직접 지령에 따라 ○○○○의 활동노선을 결정하고 북한의 이익을 위하여 활동 중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2010고합1102, 1208(병합) )

 

 피고인은 2010. 6. 14.경 평양 소재 ○○○○○○에서 개최된 ‘6․15공동선언 발표 10돌 기념 중앙보고회’에 참가하여 양○○(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후보위원,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 부위원장)으로부터 “북남수뇌 상봉과 6․15공동선언은 김○○의 영원불멸할 특출한 업적으로, 김○○이 탁월한 선군혁명영도로 6․15북남공동선언과 10․4선언을 마련해주었다. 이○○ 패당은 천안함 침몰사건을 북한과 억지로 연결시키는 이른바 조사결과라는 것을 발표하고 단호한 조치니, 전쟁 불사니 하고 떠들면서 북남관계를 완전히 파탄시키고 전면대결로 나오고 있다. 용납 못할 도발이고 공공연한 선전포고이다. 선군의 기치를 높이 들고 세계 자주화위업을 주도해 나가는 우리 공화국을 고립 압살하기 위해 피눈이 되어 날뛰는 미국과 이○○ 패당은 괴뢰함선 침몰사건을 조작하고 악의에 차서 북한을 걸고 들면서 반공화국 제재와 전쟁책동에 더욱 광분하고 있다. 조국통일과 북남 사이에 제기되는 모든 문제들을 철두철미 남북공동선언을 자로하여 재어보고 우리 민족끼리의 이념에 따라 풀어 나가야 한다. 온 겨레의 커다란 관심과 기대 속에 추진되어온 6․15공동선언 발표 10돌 기념 민족공동행사를 파탄시킨 이○○ 역적패당의 책동을 북남공동선언과 겨레의 자주통일 지향에 전면 도전하는 극악한 반민족적 반통일적 범죄행위로 낙인하면서 이를 준열히 단죄 규탄한다. 북과 남, 해외의 온 겨레는 민족의 운명은 안중에 없이 미국의 반공화국 압살정책에 추종하여 이 땅에서 감히 전쟁의 불을 지르려는 이○○ 패당의 무분별한 전쟁책동을 철저히 분쇄하기 위한 투쟁에 한사람 같이 떨쳐나서야 한다. 천안함 침몰사건과 같은 유례없는 특대형 모략극을 조작하고 북한을 악랄하게 걸고드는 이○○ 역적패당의 반공화국 대결과 전쟁 책동을 산산이 짓부셔 버려야 한다. 괴뢰 보수패당은 외세와 공조하여 그 무슨 응징과 보복의 사소한 움직임이라도 보인다면 우리의 무자비한 징벌이 어떤 것인가를 맛보게 될 것이며 반드시 비싼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는 것을 명심하고 함부로 경거망동하지 말아야 한다. 모두 다 위대한 김○○ 동지를 수반으로 하는 혁명의 수뇌부 두리(‘주위’라는 뜻의 북한말)에 굳게 뭉쳐 사회주의 강성대국 건설을 위한 총진군을 힘있게 다그치며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앞당기기 위하여 더욱 힘차게 싸워나가자. 위대한 수령 김○○ 동지 혁명사상 만세, 위대한 영도자 김○○ 동지 만세, 우리 인민의 모든 승리의 조직자이며 향도자인 영광스러운 조선노동당 만세”라는 내용의 연설을 듣고 박수를 치며 동조하였다. 

이로써 피고인은 김○○, 김○○ 찬양, 연방제 통일방안 지지 등 국가의 존립ㆍ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정을 알면서 반국가단체인 북한의 구성원 또는 그 지령을 받은 자의 활동에 동조하였다.  (3) 피고인은 2010. 6. 20.경 평양 소재 ‘○○교회’에서 열린 일요예배에 참석하여 “6․15야말로 평화이고 통일이다. 참다운 그리스도교인이라면 외세와의 공조를 배격하고 민족공조를 실현하여 승리의 날을 안아오는데 적극 이바지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 2010고합1268)

 

 

⑵ 일반국민에겐 강한 규제 필요성 인식. 당사자는 억울한 피해의식

 

무엇보다 계몽운동이든 통일운동이든 당시 학생운동은 운동의 기반인 학생 대중들로부터 충분한 지지를 얻지 못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혁명에 대해 회의를 갖기 시작한 많은 학생들이 더 이상 자신들을 혁명의 주체로 호명하지 않았다.(『대학신문』 1961년 4월 10일자) 얼마전까지 학생들은 자신들이 혁명을 했다고 믿었지만, 정권이 바뀌었을 뿐 세상은 하나도 변한 것이 없었다. 이제 많은 학생들이 혁명주체로서 자신감에 가득 찬 모습에서 이전의 무기력하고 냉소적인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4․19 1주년을 기념하여 학생들을 상대로 실시된 여론조사에 따르면, 혁명에 보람이 있다고 응답한 사람은 전체의 2.5%에 불과했으며, 오히려 혁명 전보다 현재가 더 나빠졌다고 응답한 사람이 전체의 11.0%나 차지하였다. 그리고 신생활운동에 대해서도 90% 이상이 그 취지에 공감․동조하고 있었지만, 그 방식에 있어서는 17.5%만이 동의를 하였고, 34.2%는 아예 운동방식에 대해 고민을 해보지도 않았다. 또한 학생회와 민통련을 포함하여 당시 난립하고 있었던 각종 학생단체에 대해서는 46.5% 정도만이 그 필요성을 인정했고, 필요없다고 답하거나 관심없다고 답한 사람이 52.2%에 달하였다. 특히 학생 혁명 단체의 활동에 대해서는 단 6.5%만이 긍정적으로 답했을 뿐, 대다수가 정치적으로 이용당하고 있다거나 무의미한 활동이라고 답하였다. 민통련의 통일운동 역시 아직은 많은 학생들에게 공감을 얻지 못하고 있었다. 같은 조사에서 22.4%만이 남북대표의 협상을 통한 통일을 지지했고, 43.7%는 유엔감시하 남북총선을 지지했다. 또 남북통일의 시기에 있어서도 52.0%가 선건설 후통일을 지지하는 반면, 34.4%만이 선통일 후건설을 지지했다. 이를 통해 볼 때 학생회든 민통련이든 이들의 활동이 광범한 학생 대중에게 기반하지 못했던 것만은 분명하다.(오제연, 258-259쪽)

 

쿠데타 세력은 달랐다. 정권을 장악한 직후 쿠데타 세력은 혁명재판과 정치정화법을 통해 기존의 정치세력 전부를 무력화시켰다. 혁신계 정당들은 금지되었고 그 인사들은 투옥되었으며 보수 양당의 정치인 또한 활동을 금지 당했다. 기존 정치세력들의 파괴로 인해 광범위한 정치적 공백이 발생했고 이 공백을 채운 세력은 군부였다. 중앙에서는 군부 인사들이 중심이 된 국가재건최고회의가 2공화국의 내각을 대신했고, 지방에서는 민선 시장과 도지사들이 장군들로 대체되었다. 쿠데타 세력은 군정을 통해 국가권력을 완전히 장악했지만 한편으로 민정이양을 요구하는 미국의 압력과 군정 연장에 대한 국민들의 반발 등으로 인해 무한정 군정을 이어갈 수는 없었다. 1961년 8월 12일에 박정희는 기자회견을 열어 민정이양 시기를 밝혔다. 그에 따르면 1963년 3월까지 신헌법을 제정공포한 뒤 동년 5월에 총선거를 실시하고 그 해 여름에 정권을 민간에 이양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쿠데타 이후 일체 금지된 정당 활동 역시 총선거를 앞둔 1963년 초를 기해 허용하겠다고 발표했다. 박정희는 미국을 방문 중이던 1961년 11월 16일에 미국 기자클럽에서 행한 연설에서 재차 군정을 연장하지 않을 것이며 민정이양과 함께 자신 또한 군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했다.(김호민, 23쪽)

 

경찰의 강력한 탄압 이외에도, 학생들이 혁신계에 사주를 받았다는 유언비어는 학생들의 움직임을 위축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이에 3월 23일 악법반대 전국학생투쟁위원회는 위원장 노정훈의 명의로 성명서를 발표하여, “탄압 일관책을 수립하고 있는 반동정권은 본 투위의 대표 노정훈 동지와 토일사회당의 고정훈 선생을 고의로 신문시장에 클로즈업 시킴으로써 우리 투위를 혁신제당의 사주를 약간이나 받은 것처럼 유언비어를 유포시키고 있다. 본 학생투위는 악법 반대의 전 민족운동을 전개함에 있어서 민족적 양심에서 결성되고, 그에 따라 공투위와의 공통투쟁 전열에 참여했을 뿐이다.(중략) 전체 학생 동지들은 반동세력의 매스콤과 유언비어를 통한 허위선전을 깨끗이 배격하고 끝까지 공동전선의 깃발아래로 단결하라고 주문했다.(민족일보, 1961년 3월 25일자) 앞서 계몽운동의 정치적 소극.성을 강제했던 ‘학생은 순수하다’는 인식은 이 운동에서도 일종의 강박증처럼 운동주체들을 게속 따라다녔던 것이다. 2대 악법 반대운동에서 학생들의 움직임은 그만큼 제한될 수 밖에 없었다.(오제연, 250-251쪽)

 

쿠데타 세력은 1962년 3월 16일 정치활동정화법을 제정함으로서 보수 정치인들을 더욱 옥죄었다. 쿠데타 세력은 ‘정치활동을 정화하고 참신한 정치도의를 확립’하기 위해 정치활동정화법을 제정했다고 주장했으나 법안의 실질적인 목적은 제2공화국에서 활동했던 정치인들의 활동을 봉쇄하기 위한 것이었다. 정치활동제한법에 다르면 제2공화국에서 활동한 주요 정치인들은 차후 정치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쿠데타 세력의 최고기구인 국가재건최고회의 산하에 설치된 정치정화위원회의 심사를 통과해야 했다. 정치정화법의 적용 대상은 민주·신민의 보수 양당외에도 혁신계 정당 및 학생·사회운동단체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했으나 후자에 속한 이들 중 상당수는 법안이 제정될 당시 이미 혁명재판소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정치활동제한법은 실질적으로 민주·신민 양당을 겨냥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심사 범위에 있어 민주·신민 양당의 간부들에 대한 범위가 혁신계 정당 간부들에 대한 범위보다 넓었다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혁신계 정당과 사회운동단체의 경우 중앙조직의 부장급 이상(중앙위원포함) 및 서울특별시 또는 도 조직의 정부책임자급이 심사 대상이었던 반면 민주·신민 양당은 국회의원 및 중앙당부의 주요 간부들뿐만 아니라 도당부와 선거구 단위로 설치되어 있는 핵심당부의 정·부위원장까지도 심사 대상에 포함되어 있었다.(김호민, 19-20쪽)

 

⑶ 혁신계 통일운동 = 친북좌파 운동의 흐름

 

4‧19혁명공간에서 정치세력화를 위한 혁신세력 최초의 조직적 대응은 혁신정당의 결성이었다. 이는 7‧29총선이 예정된 상황에서 다른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혁신계의 주요 인사들이 지식인 출신이 많았고, 민주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위한 방법으로 선거를 통한 평화적 정권교체를 상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합법적인 혁신정당의 결성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나 혁신세력 내에서도 좌익적 성향의 인사들은 합법적인 대중정당 건설과 선거참여를 통한 민주적 사회주의 건설의 가능성과 전망에 대해 회의적이었고, 대중운동과 결합하는 대중투쟁을 조직하는 선도적 세력의 결집체로서 정당을 사고하게 된다. 이 경우 정당결성의 목표는 선거 참여와 당선, 의정활동보다는 대중투쟁의 조직화와 지도가 우선하게 된다.

전자의 흐름이 7‧29총선 이전 사회대중당 창당준비위와 같은 합법적인 혁신정당의 건설노력에서 관철되었다면, 후자의 흐름은 7‧29총선 실패 이후 사회당과 같은 좌익적 성향의 혁신정당에서 관철되었던 흐름이라고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혁신세력들의 조직화 시도는 합법적인 대중정당의 결성과 대중정치조직의 건설이라는 두 가지 큰 흐름으로 대별되었다. 사회대중당 창당준비위는 진보당 계열, 민혁당 계열, 근민당 계열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발기했고, 참여하는 계파들이 다양했기에 단일지도체제의 채택은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이러한 현실적 조건 하에서 정당결성 참여자들 간의 차이를 임시 봉합할 수 있는 최선책은 집단지도체제의 채택이었다. 그러나 집단지도체제는 선거를 치르기에 효과적이지 않았다. 입후보자 공천문제로 계파간 배분문제가 불거지면서 일부 혁신계 인사들이 탈당하여 무소속으로 출마하는 경우가 많았고, 선거운동을 끝까지 책임지고 이끌어갈 수 있는 지도력을 발휘하기도 힘든 지도체제였다.(오승용, 138쪽)

 

본문에서의 검토를 통해 전남지역 혁신세력의 조직결성과 정치활동의 몇 가지 특징들을 살펴보았다. 우선, 전남지역의 경우 지역적 특수성으로 인해 혁신정당 중에서도 사회당의 강세가 두드러졌다. 이는 사회운동의 대중적 기반이 다른 지역보다 광범위했다는 사실의 반증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전남지역 혁신정당의 활동은 청년운동이 중심이 되어 혁신정당을 ‘채찍질하는’ 형태로 운동이 전개되었다. 7‧29총선까지 혁신운동의 중심은 혁신정당이었다. 이는 선거공간의 특성상 불가피한 측면이었고, 실제로 사회대중당 전남도당 창준위가 중심이 되어 7‧29총선까지 전남지역의 혁신세력 활동을 지도 및 주도했다. 그러나 7‧29총선 실패 이후 혁신세력 운동의 주도권은 청년운동으로 이전되었다. 혁신정당은 통민청으로 대표되는 청년운동조직의 활동을 사상적으로 지도하고, 재정적으로 보조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사회당과 민자통의 지도하에 통민청이 실천 활동을 주도하되, 지역의 혁신정당들이 재정․인력 등을 지원하는 형태로 장면정부 하의 ‘3대 대중투쟁’을 수행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미 본문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전남지역 혁신세력의 정당결성 및 정치활동은 4‧19혁명과 5‧16군사쿠데타 사이의 짧은 기간 동안 이루어졌지만, 사실 혁신세력의 영향력은 1970년대 말, 5‧18 광주민중항쟁 이전까지 사회운동의 기저에 면면히 이어져왔다는 다수의 증언이 제출된 바 있다. 그 근거는 4‧19혁명 이후 혁신세력의 정치조직 결성과 정치활동의 경험을 통해 1960년대와 1970년대를 관통하는 반권위주의 저항운동의 주체역량이 양성되었기 때문이다. 주체역량의 양성은 직접적인 지도․육성의 관계뿐만 아니라 집단적 경험의 공유를 통한 운동역량의 성장까지 모두 포함한다. 저항운동의 주체역량은 5‧16군사쿠데타로 인해 단절된 4‧19혁명공간의 복원투쟁과정에서 형성된 것인데, 그 이념적․조직적 자원은 4‧19혁명이후 5‧16군사쿠데타 직전까지 이어졌던 혁신세력의 정치활동과 대중운동이었다. 즉 혁신세력의 존재와 활동은 이후 사회변혁운동과 학생운동의 원류를 이룬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려져서는 안된다.(오승용, 142-143쪽)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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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개, 한 개, 남에게 선물이 될 자료이길 바라며 작성하는 보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