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 좌경화의 이면에 ‘하나님 사기’-‘나라 사기’가 있었다. -자유민주주의 수호 운동이 ‘국제예수사기단’과의 思想戰爭이 될 수 밖에 없는 이유-

프로필

2019. 6. 10. 19:00

이웃추가

한국 사회 좌경화의 이면에 ‘하나님 사기’-‘나라 사기’가 있었다.

-자유민주주의 수호 운동이 ‘국제예수사기단’과의 思想戰爭이 될 수 밖에 없는 이유-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계 3:15)

첨부파일
국제예수사기단.hwp
파일 다운로드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계 3:21)

1. 한국 사회 좌경화의 이면에 ‘하나님 사기’-‘나라 사기’가 있었다.

-자유민주주의 수호 운동이 ‘국제예수사기단’과의 思想戰爭이 될 수 밖에 없는 이유-

가. 군사정권의 ‘고문’이라는 불법행위 vs 민주화체제의 ‘국제 예수 사기극’이란 불법행위

나. 기독교인줄 알았는데 천도교였네 : 천도교로 몰트만의 통전적 종말론를 읽으면?

다. 서양의 선진문화인줄 알았는데, 선진문화가 아닌 동방교회 영성과 관련된 북유럽 신화와 닮은(그것조차도 아닌) 단군신화(민족신화)였네.

라. 시민적 자아인줄 알았는데, 부족적 자아네 : 중국 역사와 서양 역사

마. 기독교인줄 알았는데, 천도교였네 : 민중신학

1). 기독교 부활신앙이 절대 아닌, 미래에 찾아올 대동사회인 후천개벽

2). 기독교의 弱者용어인줄 알았는데, 그냥 무당신앙 ‘恨풀이’이네 (feat 파시즘 & 볼셰비즘적 계급투쟁)

3). 표현은 기독교, 신앙내용은 유교나 천도교 : 뭘 믿는지도 모르는데 행동하라니

4). 기독교 외형을 비는, 기독교적 자아관을 종식시키는 대동신앙(유교/천도교) 신앙이네.

5). 세계교회협의회의 종교통합 신학이라 포장된 천도교 유불선 삼교통합 : 기독교라면서 신앙의 대상이 성경의 예수가 아니다.

바. 시장경제인줄 알았는데 주술경제더라.

사. 시민정치인줄 알았는데, 부족주의더라

아. 민주주의 인줄 알았는데 파시즘이다.

자. 서양자연법(이성)인줄 알았는데, 동북아자연법(연고주의 편들기)이었다.

차. 영미식 혹은 독일식 연방제인줄 알았는데, 고려연방제(좋게 봐도 중국식 연방제)였다.

카. 좌파 지배체제를 해체하는 방법을 모르는 2019년 우파 사회의 치명적 문제점

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2. 라오디게아 교회 (요한계시록 3:14-3:22)

3. 한국교회가 몰트만을 손절해야 하는 이유

-위르겐 몰트만, 김균진 역, 『신학의 방법과 형식-나의 신학여정』, 대한기독교서회, 2001. 요약-

한국교회는 무엇을 믿는 것인가? 한국 교회 지도부가 성경적 신앙을 강조하지만, 한국 기독교 신자들은 사교와 친교등의 이유로 교회 출석하고, 신앙적 대상이 모호한 경우가 많았다.

믿는 대상을 분명히

사도신경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에 관한 것입니다. 이 믿음은 궁극적으로는 삼위 하나님에 대한 고백입니다. 예수님과 연합하기 위해서 예수님만 믿으면 된다는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믿음이라고 하면, “예수 믿으세요”라고 하는데,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가장 잘 믿는다고 자부하는 사람들 중에는 이단들도 많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가 전도할 때는 “예수 믿으세요”라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지만, 제대로 예수를 믿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어떠한 분인지를 알아야 하는데, 이때는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어야 하고, 또한 그 분을 보내신 성부 하나님에 대해서도 알아야 합니다. 그 분은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을 뿐 아니라 성령을 교회에 보내신 분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참된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에 대해서 알아야 하고,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보편적 믿음으로 이끌며, 우리를 구원으로 이끕니다.

사도신경의 구조 = 성부하나님+우리의 창조/성자 하나님+우리의 구속/성령 하나님+우리의 성화

믿으라고 말하기는 하는데…

이 점에서 오늘날 한국교회는 심각한 결함이 있습니다. 믿음의 대상이 불분명합니다. 정확히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무조건 열심히 믿으면 좋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은 치우치지 말아야 하는데, 어떤 사람은 “오직 예수”라는 구호에 사로잡혀서, 성부와 성령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에 싫증을 느낀 사람들은 “오직 성령”으로 옮겨 갔습니다. 성경에 계시된 가르침은, 성부, 성자, 성령은 서로 분리시켜서 생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비록 서로 구분되는 위격으로 계시지만 한 하나님으로 존재합니다.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을 항상 같이 섬기고 예배드립니다. 이 삼위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창조, 구속, 성화를 생각해야 합니다.

사도신경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인간에 대한 지식’이 어떻게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고백이라는 것은 단순히 객관적 사실이 옳다고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고백하는 대상과 자신과의 관계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단순히 객관적으로 창조자, 구속자, 성화자가 아닙니다. 삼위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자, 우리의 구속자, 우리의 성화자입니다. 반대로 이야기한다면, 우리의 피조물이고, 포로이고,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만약 우리가 피조물이 아니고, 죄의 포로가 아니고, 본성이 부패된 죄인도 아니라면, 삼위 하나님을 필요로 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만약 성부 하나님이 우리의 창조주이고 우리가 그 분의 피조물이라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그냥 그것을 인정하는 것에서 끝날 수 있겠습니까? 그냥 그것을 인정하는 것에서 끝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믿음의 고백이 아니라 그저 객관적 진술일 뿐입니다. 모든 창조자는 무엇을 만들 때 목적을 가지고 만듭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의 창조자라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우리를 향하신 그 분의 뜻에 따라서 살아야 마땅합니다. 입으로만 고백하고 실제 삶에서 멋대로 살아간다면, 그 믿음은 가짜 하나님입니다.

만약 성자 하나님이 우리 구속자이고, 우리가 마귀와 육신이 포로였다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성자 하나님은 친히 인간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자신을 주심으로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켰습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같은 영화를 보셨을 것입니다. 많은 부대원이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죽었습니다. 그런데 구원을 받은 사람이 “이렇게 애써 준 것은 고맙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이대로 좋네요, 다시 돌아갈래요”라고 할 수 있을까요?

만약 성령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라면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비록 우리는 삼위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구속과 해방을 얻었지만, 죄인 되었을 때의 못된 심성은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이 못된 심성을 제거하기 위해서 우리는 육신대로 사는 것이 아니고 성령님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이 변화되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 거룩한 삶을 살게 됩니다. (이성호, 117-119쪽, 이성호, 『특강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상)』, 흑곰북스, 2013)

1. 한국 사회 좌경화의 이면에 ‘하나님 사기’-‘나라 사기’가 있었다.

-자유민주주의 수호 운동이 ‘국제예수사기단’과의 思想戰爭이 될 수 밖에 없는 이유-

가. 군사정권의 ‘고문’이라는 불법행위 vs 민주화체제의 ‘국제 예수 사기극’이란 불법행위

군사정권은 ‘경제발전’과 ‘국가안보’의 주제로 국가중심으로 권력집중을 하는 체제였다. 이는 ‘저 발전 사회’에서 기인하는 사회전반의 문화 결여로 인한 야만상태와, 사회 저변에 뿌리 깊은 중국 적 관료주의문화를 당연시하던 흐름, 그리고 사회 요소에 자리한 일본제국주의의 부정적 관행에서 거리감이 결여된 엘리트의 존재가 <고문 문제>로 나타났다. “고문”이라는 불법행위 문제는 군사정권의 모든 시스템의 문제화로 나타났고, 이후에 反共우파(한미동맹파)는 ‘권력집중’형 지배체제를 포기했다.

군사정부는 대한민국 체제 질서를 인정하지 않는 좌파 엘리트를 ‘권위주의’로 규제하고, 일반 국민대중을 ‘민족신화’를 통해서 종속시키는 지배전략을 썼다. 군사정권은 좌파 엘리트에 정당한 기회를 제공하지 않았다. 그리고, 국민대중을 파시즘적으로 포획하는 것의 불의함을 전제하여, 이에 대항하는 사회운동을 ‘민주화운동’이라 지적한다.

군사정권 권위주의 체제는 ‘국가공권력의 과잉’이 문제였다. ‘고문’은 이에 대한 산물이다. 경제발전과 국가안보를 중심으로 1인 지도자에 권력집중을 한다는 군사정권 사회 시스템의 불의함이 대중화되고서, 민주화세력으로 권력 이양이 이루어졌다. 군사정권을 이끈 지배세력은 유교 성리학에 있어서의 家産制 정치로서 지배자와 맞지 않는 이들을 제거하는 斯文亂賊 의미를 가진 담론이 과잉 되게 사용됐고 이는 사회에 강한 거부반응으로 나타났다.

민주화 체제는 “통일”을 추구하며 그에 상응하는 정치경제 형태를 추구한다. 두 파벌의 정치세력이 한 세력은 ‘민주통일’, 그리고 다른 세력이 ‘자유통일’이라고 부르며 서로 경쟁했다. 그런데, 두 시대를 겪어본 사람들은 민주화체제는 다른 형태로 ‘독재’라고 느낀다. 군사정권 때 소외의식을 느낀 세력의 ‘정치적 기득권 행위’가 상식을 넘어서서, 아시아적 전제주의로서 야만 상태에 다다르고 일반국민에 그러한 피해가 전가됐기 때문이다.

한국은 대한민국 건국 이전에 ‘일제 식민지 사회’ 및 ‘조선왕조 사회’에서 民法이 발달된 역사가 없었다. 민주화체제의 개방 담론은 민법이 발달되지 못한 상황을 이용하여 ‘정치귀족’이 권력을 과대하게 획득했다. 군사정권은 1인 통치자 중심의 제동 걸리지 않는 상황이 문제였지만, 민주화체제는 좌파 귀족 마피아의 문제에 제동이 걸리지 않는 상황이 문제였다. 민주화세력은 군사정권 보다는 월등히 정교하게 ‘민족신화’를 사용하여 ‘귀족 마피아’가 사회 요직에서 지배하는 체제로 설정하고, 그러한 가운데 빚어지는 국가 시스템 붕괴는 외면했다.

최근 한국의 기성세대들은 민주화체제의 본질이 19세기 ‘노론독재’의 부활로 보이는 귀족 과두정 독재로 판단한다. (이러한 귀족 과두정 독재를 유지하면서, 기존의 대한민국을 붕괴시키고 김정은 공산당과 통합하면 공산화 되는 것이라고도 판단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문제가 <국제사회>와 <일반대중>에 서구적 시장경제와, 서구적 시민정치, 서구적 민주주의, 서양의 보편이성, 英美式 혹은 獨逸式 지방자치에 기초된 연방제의 구현인 것처럼 비춰지고 있다. 샤머니즘 신앙에서는 동양적 삶을 전제로 서구의 개념을 덧 씌우는 일이 가능하다. 그래서, 아시아적 주술경제, 아시아적 주술경제, 아시아적 부족주의, 아시아적 파시즘, 동북아 자연법의 혈연연고주의, 고려연방제나 중국 연방제가 실체인데도 그것을 위장하는 포장정치로 나타났다. 그 포장정치의 가장 심층에는 ‘국제예수사기극’이 자리한다.

제 108조 【통정허위표시】 ① 상대방과 짜고 거짓으로 한 의사표시는 무효이다.

② 제1항에 따라서 의사표시가 무효인 경우에도 그 무효로써 선의의 제3자에게 대항 할 수 없다.

부족사회로 서로 얽혀 있지 않은 관계에서는 ‘東道西器’란 이름으로 아시아적 삶을 살면서 서양적인 표현으로 덧 씌우는 것은 긍정적일 수 있다. 그러나, 상대방에 진실을 은폐함으로 정치적 이익을 목적으로 한다면 이는 불법행위일 것이다. 군사정권에 있어서 ‘고문’의 불법행위도 군사정권 시대에도 민간에서 퍼졌듯이, 민주화 체제의 ‘통정허위표시’ 는 ‘코드(암호)정치’란 이름으로 이미 퍼져 있다.

이승만 대통령이 ‘기독교’를 통해서 한국 민족이 서구 자유주의 사회와 연결되길 기대했던 흐름이 있었지만, 동시에 1920년대에 천도교 사회주의 세력이 ‘개신교 교회’를 서구 사회에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이용하는 도구로서의 문화가 자리하고 있다.

천도교를 기독교란 외관을 주장하고 그것을 세계교회협의회가 추인해 버렸다. 천도교는 위정척사파 유교로서 反제국주의 성향을 가졌는데 기독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반면에, 세계교회협의회는 몰트만이 권력을 쥐게 딘 이후로 反美지향적인 해방신학을 주로 하지만 어쨌든 기독교기구이다. 한국은 20세기에 복음이 처음으로 전파가 됐다. 천도교로서의 反美와 해방신학의 反美가 反美만 같을 뿐이지, 천도교는 중국 문명의 조상숭배 신앙을 전제로 하고 있고, 해방신학은 성경의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다. 물론, 韓美동맹이 중심이 되는 대한민국에 해방신학을 主로 하는 몰트만 지배 이후의 세계교회협의회와 연결되는 관계 자체를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판단도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좌파들은 세계교회협의회 기구의 세계 속에서 ‘기독교’에서 대표성을 주장하면 정보 부족으로 믿을 수 밖에 없었고, 한중수교 이후에 중국문화가 제대로 소개돼 있지 않은 상황에서 ‘천도교’를 ‘기독교’라고 속이는 외형을 믿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완전히 한 세대(30년)가 지나서 과거를 살펴본다면, 좌파 사회를 이끄는 상부 엘리트들은 천도교와 기독교 사이의 문화의 차이를 명백히 알고 있었으나 정치적 목적으로 ‘허위표시’로서 외관을 믿는 사람들에 진실을 알리려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몰트만이 방한 하여 민중신학자들과 논쟁을 하며 ‘천도교 교리’로 해석한 표현들을 공교회 신조로 계몽하려 하는 자세를 볼 때, 몰트만도 90년대까지는 ‘허위 외관’을 신뢰하고 민중신학의 신앙상태를 정확히 인지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면서, 몰트만은 자신의 세계적인 反美기독교의 확장 문제로 본 문제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최근의 몰트만의 한국강연인 ‘미완의 종교개혁’에 이르러서는 민중신학의 ‘통정한 허위표시’의 실체를 이해하고, 그 외관을 지켜주려는 통정행위의 연대의식을 느낄 수 있다. 몰트만 입장에서는 기독교를 통하여 동구권의 反美권력 확장만이 중요했으니, 한국인들의 성경적 복음주의 신앙의 중요성이 무의미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강연을 하면서 세계교회협의회 전체가 민중신학의 ‘통정한 허위표시’와 연대하면서, 한국 국민들의 복음주의 신앙 기독교인에 대하여 ‘국제인권법’ 상에서 종교의 자유를 짓밟는 <국제예수사기단>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성경의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중국문명 조상신을 숭배하는 종교를 믿으면서 ‘통정한 허위표시’로서 정치이익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개신교 외관>으로서 모든 행위는 무효이다. 동시에, ‘신흥종교’로서는 유효가 된다. 그리고, 군사정권 때에 ‘천도교’신앙을 ‘기독교’ 외관으로 북한과 연결된 민족해방계급투쟁 통일전선전략을 구현하는 것은, 헌법과 세계인권선언 보호를 받는 개신교 신앙으로 무효이다. 민중신학의 기독교적 외관을 중시하는 전제의 세계교회의 기독교신앙적 연대는 유효이지만, 그것을 초월하여 성경적인 복음주의 신앙을 믿는 다른 신자들의 권리를 인정치 않고 反美를 위한 정치목적을 위하는 경우는 ‘무효’일 것이다. 이는 가수 ‘아이유’ 콘서트에 개그우먼 신봉선이 가수 ‘아이유’의 이름으로 노래 부르는 것이 유효인가, 영화배우 ‘유해진’이 축구선수 박지성의 축구경기에 박지성 이름으로 뛰는 것이 유효인가 문제와 연결된다.

군사정권의 지배 이데올로기가 ‘국가주의’로 표현된다. 좌파 운동권들의 신앙인 ‘천도교’를 교횟말로 읽는 민중신학은 지배이데올로기로서 ‘道敎的 유토피아’로서 大同의식을 이끄는 ‘영웅주의’로 연결된다. 칼 마르크스는 이데올로기를 ‘도덕’ ‘종교’ ‘형이상학’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쓰고 있으며, ‘종교’와 ‘이데올로기’를 동의어로 보고 있다. ‘道敎的인 유토피아’는 좌파정권을 ‘동북아’의 그리스적인 재정 방만 상태로 이끌고, 국가안보를 무장해제 상태로 이끄는 이데올로기가 됐다. 그리고, 각종 法治를 붕괴시면서 국민을 法治이전의 상태로 만드는 조작 장치가 됐다. ‘김정일과 김대중’, ‘김정일과 노무현’, ‘김정은과 문석탄’이 결합한 주권을 하나의 중국 君主(영웅)로 설정하는 大同의식에 포괄시키고, 기존의 자유민주주의 한미동맹의 대한민국을 해체시키는 전략을 쓰는 것이다. ‘大同의식’의 중국적인 儒彿仙 신앙이 러시아혁명 때의 볼셰비키 세력의 ‘공산당 당의식’과 일치시켜 보면, 이 상황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상황은 ‘허위표시’로서 대학에서 나타나는 서양 인문학 나타나는 허위표시가 나타날 것이며, 反美라면 그리스도 신앙도 내버리고 있는 세계교회협의회는 이러한 문석탄을 지원할 것이 예상된다. ‘親北좌파’ 이데올로기는 진공상태가 아니라, 한국현대사라는 문화적 콘텍스트 속에서 생겨난다. 동시에, 샤머니즘 영웅 신화와 部族神을 띄우는 민담 설화라는 神話를 통해서 김정은을 지원하는 문석탄에 줄 섰던 정치귀족들을 偶像化하는 흐름으로 나타날 것이다. 문석탄과 김정은이 하는 행위는 모든 것이, 반만년 역사에서 반복된 ‘특정한 부족’이 甲을 이루면 ‘나머지 부족’이 극심한 피해를 당하는 관행을 끌어들이며, 기존 헌법과 서구 사회의 서구법 기준을 망각시킬 것이다. 그러면서, 모든 작업이 완료될 때까지 벌어지고 있는 작업은 공산화 과정이 아니며, 민족문화의 작업인데 이를 외세 지향적인 세력들이 무시했다고 억울해하는 모습을 나타내며 일반국민을 현혹할 것이 예상된다.

한국은 민사재판이 발달돼 있지 않다. ‘통정허위표시’로서 불법행위의 누적은 그 가해주체가 ‘귀족연합’이기에, 민사재판으로 바로 잡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및 모든 법치와 국가시스템이 붕괴되고 있으면서도, 그렇지 않은 듯한 외형을 띠는 것은 ‘통정허위표시’로서 기독교 외관 때문이다. 문석탄은 美國에 대항하여 김정은을 편들 때면, 언제나 세계교회협의회 영역에 속한 국가들로 달려간다. 민사재판으로 이 부분을 시정하기는 어려운 영역일 수 있지만, <국제예수사기단> 문제로서는 바로 잡을 수 있는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나. 기독교인줄 알았는데 천도교였네 : 천도교로 몰트만의 통전적 종말론를 읽으면?

㉮ 세계교회협의회의 종교통합이라 말하는데 알고 보니, 천도교의 유불선 삼교합일이네

㉯ 민중 메시아론이라길래 기독교인줄 알았더니, 삼위일체 십자가 신앙이 아니라 天人合一 논리에 서 있는 인내천(人 =民衆, 天=메시아) 천도교 담론이네

㉰ 예수 부활신앙인줄 알았더니, 조상신 上帝가 미래에 오길 기다리는 천도교 후천개벽 신앙이네

㉱ 통전적인 히브리 영성인줄 알았더니, 중국적 영육 결합 신앙이네

㉲ 교회의 공동체 신앙이라더니, 알고보면 천도교 공동체의 各知不移교리네

㉳ 성령이라더니, 알고보니 至人, 眞人, 神人과 연결되는 천도교의 至氣였네

㉴ 기독교의 여호와 하나님인 줄 알았는데, 동학의 천주 하늘님이네. : 공산당= 민족=상제 神을 하나님으로 부르면, 통일전선전술이 유교합종연횡이 되고, 교회 에큐메니칼처럼 포장됨.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못박힘과 부활사건을 통한 삼위일체 신학이 없이, 천도교로 후천개벽 신학을 읽으면 교횟말로 포장되지만, 사실상 중국 신앙의 의미를 띤다. 사도신경적인 신앙 고백은 불가능(기독교가 아니게 되고)하고, 샤머니즘적 중국신앙 형태를 교횟말로 읽는 것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신앙 양상을 기독교라 주장하고 그것을 국민과 세계가 속아버린 데 모든 문제가 발생했다.

삼위일체 교리는 기독교복음의 진수이자 보호될 영역이다. 삼위일체 교리는 구원의 실재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하나님 계시의 논리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리고 기독교인의 삶과 사상으로 인내하는 실천적 교리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원한 자기 지식과 창조와 구속 경륜에서 자신을 알리기 위한 활동은 구분되지만 분리될 수 없다. (마 11:27, 16:16-17)

삼위일체 교리는 구약에서 시작된다. 하나님 말씀은 우주가 그것으로 창조되고 유지되는 큰 능력이다. (창 1:3, 시 33:6, 9, 147:18, 148:8, 욜 2:11) 구약에서 하나님 말씀은 능동적이며 창조적이다. 창조와 섭리는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나타나며, 중보자인 말씀을 통해서 나타나고, 성령을 통해서 나타난다.

스토아 철학자는 신적이고 합리적인 원리가 모든 현상의 근거로 본다. 로고스는 하나의 신적인 속성이요, 하나의 최고의 로고스(이성, 이데아, 세력)로 다 파악한다.

신약의 원칙은 구약의 전 경륜에 포함된다. 신약성경 전체가 삼위일체적이다. 구원의 삼중적 신적 원인으로, 기뻐하심, 선택, 권능, 나라, 는 아버지에 속한다(마6:13, 11:26, 요 3:16, 롬 8:29, 엡 1:9, 벧전 1:2), 화해, 중보자 됨, 구속, 은혜, 지혜, 의는 아들에 속한다.(마 1:21, 고전 1:30, 엡 1:10, 딤전 2:5, 벧전 1:2, 요일 2:2) 중생, 재생, 성화, 교제는 성령에 속한다.(요 3:5, 14:16, 롬 5:5, 8:15, 14:17, 고후 1:21, 22, 벧전 1:2, 요일 5:6)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지식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견고한 닻을 내린다.(마 11:27, 요 1:18, 요 14:6)

예수의 부활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구원의 하나님은 한분이며, 아버지․아들․성령은 내적인 관계 속에서 연합했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조정하는 일로 그는 모든 축복의 원천이다.(마 28:19, 고전 12:4-6, 고후 13:13. 계 1:4) 하나님은 한분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성부, 성자, 성령으로 계시된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된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계시는 그 분(하나님)의 활동이다. 하나님의 계시는 성부․성자․성령의 계시이고, 믿음과 고백과 순종과 예배를 요구한다. 하나님 계시는 복음(롬 1:1-6)으로 그리스도를 통해(딤전 2:5) 나타난다.

몰트만의 만유화해 희망의 기독교적 근거는 십자가 신학이다. 몰트만의 통전적 종말론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에서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은 모든 사물의 회복을 말한다. 그리스도의 열정과 연합하는 삶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열정에 동참하는 삶을 말한다. 그리고, 삼위일체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며 십자가 신학이 기독교의 중심이다. 십자가에 속하지 않으면 무엇이든 하나님 존재에 속할 수 없다. 동방교회는 구원 받은 사람은 메시아 예수와의 사귐을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의 속성에 참여한다고 설명한다. 몰트만에게 성경은 역사의 완성이자 종말론적 미래를 말한다. 그리스도교 종말론은 우주적 종말론을 말한다.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고전 15:28)을 다루는 종말론은 본래 상태의 회복을 말하며, 모든 사물의 새 창조와 하나님의 그 속에서의 보편적인 거하시는 것을 말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사물의 끝은 시작에 상응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모든 것이 한분 하나님께로부터 나타나며, 끝이 시작에 상응하고, 시작이 끝에 상응하는 것을 말한다. 태초의 창조는 본래 상태로의 회복을 다룬다. 피조물의 구원은 하나님께 상응하는 세계와 하나님께 상응하는 삶을 말한다.

그리스도 십자가는 올바른 하나님 신앙을 말한다. 십자가가 모든 것을 판단한다. 십자가 신앙에서 계시되는 것은 역사 속에서 연합하여 일하시는 성부, 성자, 성령으로서의 하나님이다. 십자가 신앙이 곧 이러한 삼위일체 믿음을 통해서 존재한다. 하나님께서는 고난당하는 분이시며 피조물에 적극 개입하신다. 그리스도의 고난神적인 것이다. 하나님은 無感情의 神이 아니라, 십자가 사건을 통해 인간에게 가장 가까이 내려오셨고, 오늘도 성령 안에서 인간의 모든 고통 속에서 함께 고통당하는 하나님이다.

후천개벽 천도교 종말론으로 읽는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은 기독교라 부를 수 있는가?

몰트만의 삼위일체론은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에 기초한다. 몰트만은 서방교회의 정치적·종교적 단일신론을 혹독히 비판한다. 몰트만에게 칼 바르트와 라너라는 서방교회의 단일신론적 삼위일체론이다. 서방교회는 하나님의 일체성에서 성부, 성자, 성령을 논하고, 동방교회는 하나님의 삼위성에서 하나님의 일체성을 논한다. 서방교회는 성부와 성자로부터 성령의 나오심을 논하고, 동방교회는 성자와 성령이 모두 성부로부터 나온다고 본다. 이는 종속론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보여진다. 몰트만은 세 분 하나님의 페리코레시스적 관계성 속에서 일체를 이루는 것을 삼위일체로 본다. 이는 세 위격의 상호교제 안에서 발견된다. 동방교회의 삼위일체론이다. 심리적 삼위일체론은 서방교회의 것이고, 사회적 삼위일체론은 동방교회의 것이다. (요 10:30, 14:9, 14:11, 14:20, 17:21이 주목된다.) 서로 각기 다른 인격 개념을 가진 성부, 성자, 성령을 통해 나타난다. 경륜적 삼위일체는 내재적 삼위일체에 영향을 미치며 그것을 결정한다. 경륜적 삼위일체는 계시의 삼위일체이고 인식 순서 우선하며, 내재적 삼위일체는 본질적 삼위일체이고 존재의 순서에서 우선한다. 인간에 대한 하나님 사랑 촉발되며, 이는 사랑이 행위로 드러난 구원 행위 자체를 하나님 자체 안에 가지고 있는 본질에서 나온 것으로 본다. 하나님의 구원사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역사다.

몰트만은 서방교회 고유한 ‘필리오케’를 거부한다. 그는 아들에게서 나오는 성령이 아니라 아들의 아버지로부터 나온 성령을 다룬다. 하나님의 수난이 아들의 수난에 이른다. 몰트만의 삼위일체 하나님은 종말론적 단일신론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일치성.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성령의 영원한 순환(페리코레시스)안에서 이해된다. 하나님은 자체 존재의 주체다. ‘나’와 ‘너’의 사회적 일치는 순환론적 일치를 통하여 세 위격은 상호적인 사랑을 통하여 서로 안에서 전적으로 함께 느끼며 존재하기 때문에 그들은 완전히 하나이다. 교회의 일치는 성령의 사귐을 논한다.

그리스도론의 출발점은 십자가에 달린 나사렛 예수를 통해 나타난다. 신약성서에 의하면 메시아 예수는 평화를 자신의 인격과 구원의 사역을 통해 성취(골 1:19-20, 막 9;1, 13:30, 마 10:23)하신다. 기독교-종말론적 희망이스라엘의 언어와 희망과 경험을 만들어낸 약속이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하나님 나라 사건이다. 몰트만은 만유의 회복(행 3:21)과 만물의 화해(엡 1:10, 골 1:20)를 주장한다. 그의 우주적 그리스도론은 사물의 회복과 만유의 귀향을 다루는 만유구원론(고전 15:21)이다. 이는 종말론에 근본적인 우주적 변화를 포함한다. 부활사건은 고난당하는 자연이 구원받고 해방되어 영원한 메시아 생명이다. 희망차원에서 만유화해는 모든 피조물이 만물에는 하나님의 새 창조에 참여한다. 구원의 미래는 ‘오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생성된 神적인 차원을 갖는 전적인 새로운 미래이며, 눌리고 억압된 자들을 해방하는 미래이다. 메시아적 구원의 총괄 개념(요 1:4-5)에서, 하나님의 존재는 되어감이 아니라 도래 가운데 존재한다. 희망의 하나님은 오시는 하나님(사 35:4, 40:5)이다. 메시아적 미래의 새로움을 약속하는 하나님이다. 메시아적 미래를 모르는 하나님은 고대 그리스의 파르메니데스의 하나님이다. 스토아철학에서 무감정은 神的 본질이자 인간구원의 총괄개념이다. 대리적 고난은 메시아 예수가 겪는 고난의 특징이다.

구약의 하나님은 약속의 하나님이다. 몰트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 사건으로 종말론적 힘을 가지며 그 분이 다시 오심을 기다린다. 그 분의 오심은 모든 만물이 함께 기다린다. 하나님은 죽은 사람들을 생명의 영을 통해 부활시킬 것이다. 구원의 주체는 인간에서 하나님에게로 변한다. 선교는 하나님의 사랑을 전파해야 한다.

하나님의 약속이 그리스도 안에서 종말론적 확실성(고전 1:12.)으로 나타난다. 종말론의 진정한 중심은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지배로 약속이다. 피조물에게 있어서 최고의 해방은 죽음의 운명에서 벗어나 영원한 새 생명을 얻는 것으로,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에서 시작이 된다. 공감의 하나님 이해는 하나님과 고난당하는 세계 사이의 연대성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고난 받은 자들을 외면하지 않고 그들과 하나가 되고자 하는 사랑의 존재이며, 고난당하고 탄식하는 모든 피조물과 연대하고 이들을 능력으로 구원하는 존재로서 이해된다. 메시아 예수의 공생애는 성령이 임할 때 비로소 시작된다.

창조는 그 자체로서 역사의 시작이다. 창조는 삼위일체의 과정이다.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영의 임재에 의존이다. 선교의 주체는 삼위일체 하나님이며, 그 목표는 하나님 나라 확장을 지향한다. 교회의 본질은 전 세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 동참하는 것이다. 종말론적 미래에서 역사적 시간으로 도래하는 약속의 하나님이다. 종말론은 메시아적 세계를 드러내고 결정하는 계시의 미래다. 성서에 계시된 하나님은 희망의 하나님(롬 15:13)이다. 기독교 종말론의 중심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그의 미래를 열어준 하나님이다.

교회는 메시아적 하나님의 백성이다. 세상에 관여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종말론적 역사에 동참하는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메시아 사명에 동참한다. 교회는 성령의 과정 안에 있는 공동체다. 교회 속의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평화의 하나님(고전 14:33)이다. 그리고, 교회 공동체는 그리스도께서 자유케 하신 자유 (갈 5:1)를 구현한다. 공동체에 주어진 위임과 공동체 내에서의 과제로서 보편적 공교회를 구현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교회란 특정 장소와 모든 장소에 현존한다. 교제로서 교회의 형태를 구현해야 한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미래의 하나님이고, 우리 앞에 계신 하나님이다. 바르트에게서 <창조-계약>의 이분법은, 몰트만에게서 <창조-계약>, 그리고 <계약과 창조를 성취하는 영광의 변증법>으로 나타난다. 몰트만의 그리스도 창조론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을 통해서 나타난다.

다. 서양의 선진문화인줄 알았는데, 선진문화가 아닌 동방교회 영성과 관련된 북유럽 신화와 닮은(그것조차도 아닌) 단군신화(민족신화)였네.

神話는 인간 상상력의 원천이며, 인류 문화의 모태다. 다양한 해석을 통해 의미가 쏟아져 나오는 화수분이다. 그 시대를 살던 사람들의 불안을 해결하려는 필요에서 발생한다. 신화시대 인류의 시대적 한계는 자연과 결합하는 한계다. 神話의 치유적 힘은 그 시대 요구에 맞춰 산출된 스토리텔링을 말한다. 신화의 이야기 캐릭터는 신화시대의 요구에 맞는 형태로 형상화를 말한다. 그리스 神은 대지의 여신 가이아로, 하늘은 천신이자 제우스의 할아버지는 우라노스로 표현한다.

18세기 말의 독일에는 민족 신화가 풍부하다. 정치신화는. 해당공동체의 집단정체성과 상관한다. 정치공동체의 집단기억을 형성하는 데 기여한다. 과거를 재구성은 문화적 기억을 통해서 나타난다. 북유럽 신화는 인간 정신의 원형으로 인간의 심층 심리로서 집단 무의식을 다룬다. ‘에다’는 북유럽 신앙이며, 국가적 낭만과 민족 상상력의 정수를 나타낸다. 북유럽 신화는 영국의 관습, 법, 언어에 영향을 주었다. 과거는 그 전체가 현재의 소유물을 다룬다. 고대 게르만 사제는 신과 인간 사이, 그리고 부족민과 통치자 사이를 이었다. 게르만 민족에서 ‘사제’와 ‘왕’은 동일한 인물이다.

그리스 신화는 개인주의적 성격이며 문명권 신화다. 반면에, 게르만 신화는 더 복잡하고 역동적이며 비 문명권 신화다. 게르만신화의 주신인 ‘오딘/토르’는 민중의 신이다. ‘오딘’은 북유럽의 최고신이다. 북유럽 신들이 모두 ‘오딘’의 후손이다. 세상의 창조자요 인간의 창조자다. 게르만인 들은 전투의 신이며, 승리의 신 ‘오딘’에 대한 절대적 믿음 속에서 승리에 대한 확신으로 죽음의 공포를 잊고 엑스터시 상태에서 전투에 나가 두려움 없이 싸운다. 게르만 신화에서 지혜를 관장하는 신은 오딘이다. 토르는 오딘의 아들이며 농부와 하층민들이 수호신이다. 그리고, 천둥과 번개의 신이며, 농사를 통해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에게 절대적 위안을 준다.

게르만 신화의 근원으로서 기원의 신화가 超논리와 前논리가 반복되는 것이 파시즘이다. 파시즘은 대중동원으로 자발적 동의와 합의에 의한 것이라는 합법성의 가장으로 나타난다. 히틀러 나치 체제는 대중의 자발적 합의에 기했다는 합법성의 외양으로 나타난다. 파시즘의 광기는 대공황을 전제로 한다. 대중들의 원한과 복수의 감정에 행해야 할 대상이며. 적을 생산하고 가공하는 것이다. 의미 있는 존재임을 주입하는 것이다.

독일 토착신앙의 비밀은 독일인의 토착신앙으로 침투한다. 민중들에게 이 토착신앙은 친숙하고 묵은 친구들이다. 토착신앙은 기사계급이나 수도원 사제들에 영향을 주었다. 고대 게르만 미신들이 기독교 관념들과 관습을 장악한다. 민간 미신은 사제계급의 정신적․규범적 타락의 산물을 갖는다. 신화는 옛 시절의 종교적 색채를 띤 자연 문학이며 항상 창조한다. 神話는 존재의 시초이며, 진정한 역사를 다룬다.

사제와 왕이 일치하는 게르만족의 민족신화는, 추장이 제사장과 임금을 공유하는 민족신화와 비슷하다. 독일 사회라고 하면 통상적으로 한국인들은 ‘서독문화’로 선진 사회로 생각한다. 그러나, 독일 사회에는 중국 문명권 문화와 흡사한 선진문화에서 뒤쳐진 문화가 존재했다. 독일 민족성이 ‘히틀러 파시즘’과 ‘볼셰비즘’의 위협을 느끼게 됐다면, 한국 사회의 후진적인 민족성에 있어서는 일제 말기에 일제 파시즘에 빠졌던 군중이 해방공간에는 소련의 지휘에 끌리는 남로당 종속에 빠지게 됐다.

라. 시민적 자아인줄 알았는데, 부족적 자아네 : 중국 역사와 서양 역사

역사철학은 계몽시대의 산물이다. 역사철학을 통해서 역사과정 전체의 기원, 목적, 의미, 가치 등을 발견하고, 더 나아가 역사적 운동의 기원과 법칙을 발견하고, 그 근거 추구. 경험적 역사 배후에 존재한다고 여겨지는 이면의 가치를 연구한다. 그리고, 역사적 인식의 본질, 한계, 학문성, 역사에서 사용되는 개념에 관한 문제. 한 인물, 한 민족, 한 시대 등 구체적인 특수성에 대한 이해다. 서구 시민사회는 이성적 판단이 가능한 자율적 개인을 사회주체로 상정한다. 서양의 역사인식은 서구 시민 사회속에 속한 부르주아 개인의 자기 인식에서 나타난다.

서양의 역사인식은 시민들이 세속공간에서는 투명한 원칙과 규칙 속에서 경쟁하면서 협력하고, 신앙 공간에서는 서로 종되는 교회공동체 속에서 존재하는 부르주아 계급의 자기인식 속에서 존재한다.

역사주의는 인간의 모든 행위, 업적, 가치를 의미한다. 역사적 배경을 통해 이해한다. 헤겔은 세계사의 진행과정은 정신(이성)이 자신의 본질인 자유를 실현해가고 진보시켜 가는 과정으로 이해다. 정신의 진보는 정신의 자기의식이며 정신의 자기반성을 말한다. Geschite는 사건사로서 일어나고 있는 것, 일어난 것, 그리고 이 일어난 것들에 대한 지식이나 이야기를 말하며, history는 연대기로서 탐구하여 얻은 지식을 의미한다. 이는 씌어진 역사의 근저에 사실로서의 역사를 말한다. 歷史는 특정한 시대에, 특정한 사회의 개성적인 발전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神은 세계, 자연, 인간본성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일정한 한계와 질서에 의해 운행되는 삼라만상의 변화가 역사의 조건이라 본다. 플라톤의 역사는,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을 모사하는 세계를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역사는 <그가 실제로 무엇을 했는가 하는 것>만을 다룬다. 그에게 歷史는 특수한 사실에 대해 말한다. 유대․기독교 역사관은 神에 대한 인간의 불복종행위를 담고 있다. 반면에, 그리스적 시간은 자연적인 무엇이다. 유대․기독교적(히브리적)사고에서 역사는 구원사를 말한다.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설정된 대우회의 길이다. 기독교 역사관은 ‘원죄’의 세계를 넘어서 ‘소외’된 세상에 이르고, 이를 넘어서 ‘神.’에 도달하는 역사를 다룬다. 유대 기독교적 역사관에서 역사의 목적은 神의 의도와 명령에 충실한 삶의 추구를 다룬다. 히브리적 사고는 일회적이고 결정적인 사건에 주목이며 그리스도의 출현을 담고 있다. 히브리적 역사는 신의 계획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된다. 神에게 불복종했던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고 현재의 책임감을 강조하며 미래에 대한 약속을 내용으로 한다. 독일 종교개혁은 학생, 성직자, 수도자, 신도의 연합운동이다. 분쟁과 헤게모니 쟁탈전에서 성서를 최종적인 권위로 한다. ‘神國’이란 계급이나 사유재산, 사회구성원에서 독립된 국가권위가 없는 사회로 나타난다.

헤겔의 歷史哲學은 精神의 현실성을 담고 있다. 정신(Geist)은 독일 철학 고유의 개념으로, 물질과 非물질을 포함한다. 헤겔에게 자연철학은 정신이 자신을 외적 존재의 형태로 파악하는 요구다. 정신철학은 정신이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단계다. 세계사의 사태는 理性에 관한, 理性이 지니는 단순한 사상이다. 理性은 세계사 속에 정신적 우주 내에 깃들어 있는 내면세계로부터 현상화되는 바로 그 궁극목적의 활동이며 성취다. 역사 속에서 하나의 보편적 목적은 세계사의 궁극목적을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理性的인 것은 ‘즉자-대자적인 존재자’로서 모든 것은 이것을 통하여 스스로의 가치를 지닌다. 理性은 세계사 속에서 입증될 뿐이다. 철학적 세계사의 관점으로 철학적 세계사의 정신적 원리는 모든 관점의 총체성, 역사적 개체, 역사적 개인은 바로 세계정신이다.

정신은 자기를 고양하고 정화하는 것이다. 정신은 자기 자신에 관여하고 자기 자신과 겨룬다. 세계사는 영원한 理性의 산물이다. 정신은 자기의 시원이다. 정신의 자유는 끊임없는 부정 속에 있다. 정신은 오로지 대자이며 자기 자신만을 위한 것이다. 모든 국민정신은 정신이 자기 자신에 대한 자유로운 인식에 다다르는 국민정신의 일환이다. 헤겔의 歷史哲學은 정신의 자기 전개가 구체적인 역사 현실 속에서 드러내는 양상을 보여주려 작업한다. 정신의 행위로서 역사철학은, 세계사 속에서 자기 자신을 계속하는 정신을 인식한다. 세계사는 인간의 의지, 인간적 자유의 요소 속에서 표준이다.

칸트의 歷史哲學의 과제는 역사의 이념을 발견하고 제시하는 것이다. 헤겔에 있어 인간의 역사는 정신의 자유의 실현 과정이며, 행위 내지 노동으로서의 역사는 인간 개인의 정신이 자유를 실현하는 것이다. 인간성과 인간역사는 인간성의 과학이다. 자기 자신을 알기로서 ‘인식하다’는 자기를 인식함을 말한다. 이는 자기 능력, 사고, 이해, 理性에 대한 인식을 말한다. 중세의 역사서술은 神적인 계획을 찾아 해설. 종말론은 역사의 해로운 요소다. 역사가의 임무는 과거를 아는 것이어서 미래를 아는 것이 아니다. 로크는 자연과학과 같은 인식방법을 주장했고, 칸트는 이해에 대한 자기의 연구를 말한다. 모든 역사는 과거의 사고를 역사가의 정신 속에서 추체험을 말한다. 역사적 사고는 철학과 정치에 대한 모든 지식을 집중함을 요구 한다. 역사적 사고는 능동적이면서 비판적인 사고의 작업이다. 모든 사고는 비판적인 사고이며, 과거의 사고를 추체험하는 사고는 과거의 사고를 비판하는 것이다.

精神의 인식으로서의 歷史에 있어서, 역사적 인식은 精神이 과거에 행한 것의 인식과 과거의 행동을 현재에서 영구화하는 것을 말한다. 역사의 활동은 자신의 정신 속에서 경험하는 생생한 체험이다. 역사적 사고의 성격 연구는 철학의 임무다. 역사의 본질은 기억․전거다. 역사는 누가 기억한 것을 믿는 것. 믿는 사람은 역사가이고, 믿어야 할 대상이 전거다.

歷史家는 과거에 대한 지식이 한 사람 또는 몇 사람의 정신을 통해 나타난다. 역사는. 현재의 눈을 통해서 현재의 문제를 비추어 과거를 보는 것이다. 歷史家의 주된 일은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평가하는 것이다. 역사가가 연구하는 과거는 현재에 여전히 살아있는 과거다. 역사가의 생각 속에서 과거의 재구성은 경험적인 증거에 의한다. 역사란 역사가의 경험이다. 역사는 역사가만이 만든 것이며, 역사를 쓰는 것만이 역사를 만드는 유일한 방법이다. 역사의 사실들은 순수한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언제나 기록자의 생각을 통해 굴절된다. 우리의 첫 관심사는 책의 사실보다, 그 책을 쓴 역사가를 의미한다. 역사가는 자기가 연구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그들이 행위를 하는 배후에 있는 사상을 상상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쓰고자 하는 대상들의 마음과 접촉할 수 없다면, 歷史는 쓰일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현재의 눈>을 통해서만 과거를 바라볼 수 있고 과거를 이해하는 데 성공을 한다. 역사가의 기능은 현재를 이해하는 열쇠로서 과거를 이해하고 정복하고 이해하는 것(과거를 추억하는 중심으로 현재를 해석하는 것이 아닌)이다. 歷史는 歷史家와 사실로 나타난다. 歷史는 현재와 과거 사이의 그칠 줄 모르는 대화다. 그리고, 歷史家는 개인과 사회적 현상 사회적 산물이다.

歷史가 다시 쓰여져야 하는 이유가 있다. 첫째, 歷史的 狀況의 변화가 나타날 때이다. 새로운 방법의 출현, 새로운 자료의 발견, 새로운 비판의식의 대두, 새로운 음미의 요구로 나타난다. 둘째, 역사의 발전에 따른 새로운 학문의 출현과 제 사회과학의 진보로 나타난다. 군사정권의 역사가는 이기백이었다. 『한국사신론』과『한국사시민강좌』가 대표적으로 기억된다. 이는 국정교육에 상응하는 문화로 나타난다. 민주화체제 역사가는 강만길이었다. 『고쳐 쓴 한국현대사』, 『20세기 우리역사』를 통해서 좌파 부족주의(민족해방주의) 역사를 나타냈다. 과연, 우리 시대의 요구인 좌우통합의 역사학은? 지금은 좌파와 우파는 각각의 산물이 나오고 있으나, 아무도 종합하고자 하는 시도를 하고 있지 않다. 좌파는 우파의 기억을 부정적인 기억만 대중에 기억시키려 하고, 90년대 이후 우파의 기득권자들은 이러한 상황을 타파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이 부족해 보인다.

한국 민주화(민족해방) 세력은 90년대 이후의 현대사를 그리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90년 이전의 우파역사는 부정적 기억만 남긴다. 또, 민주화운동사는 위정척사파 유교에서 천도교를 거쳐 사회주의 운동을 하고, 이어서 민족해방운동을 했던 부족의 역사로 이어진다. 이러한 부족 역사로서 ‘종교권력’이 될 때, 역사가 다시 쓰여진다는 것은 자신들의 권력을 내려놓는 것을 이야기한다.(그런 의미로 좌파는 박근혜 정권 때 한국사 고쳐쓰기를 완강히 거부했다. 또, 역사의 고정을 조선시대 양반들의 정치투쟁을 연상시키게 주장했다.) 우파의 역사는 무조건 바뀌어야 한다면서, 민주화(민족해방)세력은 20-40세대 우파에겐 지겨워 몸서리쳐질 내용을 고치지 않는다.

歷史는 국민들에게 유기체적 생명력을 지닌 실체로 인식된다. 神學의 실체를 神으로 인식하듯, 역사과학의 실체로서 역사의 실체 또는 보편적 세계사를 인정한다. 보편사로서의 역사는 제반 사회과학에 대한 깊은 영향을 받는다. 歷史學이 각 시대마다 실용적 목적을 갖는다. 역사학은 각각의 시대적 요구에 부응해야 한다. 시민들로 하여금 현재를 올바르게 인식하도록 하는 것이 역사학의 사명을 갖는다. 역사가는 시민들에게 현재에 관련한 많은 지식을 제공해주어야 하는 책임을 갖는다.

歷史學의 할 일은 <현재를 이용하여 과거를 개발하는 것>이다. 현재사는 인류학, 고고학, 정치학, 경제학, 사회심리학, 종교학 등을 동원한다. 역사학문은 현재에 대한 학문이다. 역사학은 겸허한 자기 성찰이 요구된다.

한국 사회는 70대 운동권 세력이 좌․우파로 나뉘어서 서서 어지간한 현재 사건은 과거의 연장편에서 해석한다. 현재가 바뀌는 것을 현재를 중심으로 과거를 해석하지 않는다. 70대 운동권의 독재는 씨족 사회 족장권력에 이어서 있다. 비록, 서양철학용어가 쓰인다 해도 그것은 철저한 장식적 효과에 지나지 않는다.

서양 역사에 있어서 역사의식은 시민사회 속에서 이성과 규칙위에 서 있는 시민계급의 자기 인식을 담고 있다.

大一統은 공자의 대동사회의 뿌리다. 공자의 중국에 있어서, 모든 토지와 인민은 王의 것이다. 민중신학이 민중메시아라 말하는 것은 大同신앙을 논한다. 『예기』 「예운」편에 기록된 대동사회 이상향은 만물이 서로 해치지 않는 조화로운 사회를 논한다. (理는 氣의 시원. 氣의 주재자) 대동사상은 모든 유가들이 추구하는 학문적 목적이다. 大同은 仁을 실현하는 聖人이라는 인간상을 논한다. 춘추 후기의 경대부․종족은 임금 조종․농단을 했다. 제후들에게는 주 천자가 없고, 제후국 대부들에게는 임금이 없는 국면이 나타났다. 중국의 씨족국가에 있어서는 적자의 왕위계승과 종법제도의 준수가 중시가 됐다. 그러한 사회에 있어서 逆祀의 잘못(부친의 제사를 조부보다 먼저)은 큰 罪惡이다.

강유위의 『대동서』는 ‘춘추공양전’의 삼세설에 의해서 씌어졌다. 역사의 진화는 거란세-승평세-태평세로 진화과정을 취한다. ‘대동성취 태평세’에서 모든 성현들의 가르침이 두루 통해야 한다. 가족제도의 폐지와 대동의 실현은. <나와 너가 되고 너가 나가 되는 철학적 인간학>을 말한다. 老子의 소국과민은 꿈이며 상징을 다룬다. 國家는 정치적 집단주의의 산물이다. 좌파들은 大同세상 유토피아의 현실적 나타남인 1980년 광주민중항쟁의 공동체는 자치의 이상적 모델이라 본다. 그런 의미는 광주민중항쟁의 진정한 의미는 특정한 유교적 가치를 구현하는 핏줄 연고주의가 핵심이라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舊韓末 한국은 東道西器論을 고대 민주주의 근거한 ‘大同사상’ 의거했다고 본다. 이 사상은 전통적 사상은 보존하면서 서구의 침략을 막는 사상이다. 동양의 정신문화는 보존한 채 서구 과학만을 수용한다는 것이다. 박은식은 서양의 계몽사상, 과학사상, 사회진화론을 적극 수용했다. 박은식은 군주 중심 유교에서 민중중심유교를 주장하고, 공자의 구세주의 실천을 회복을 논하며, 사변적인 주자학 대신 실천적인 양명학을 진흥한다. ‘주자학’과 ‘양명학’의 차이는 『大學』의 格物致知의 해석의 차이로 나타났다. 그는 제왕 중심의 지배자 철학에서 벗어나 공자의 대동사상과 맹자의 민본주의로 환원됐다.

부족적 자아는 씨족 집단 안에서 해방의식을 느끼는 자아의식이다. 大同의식은 동성촌으로서 해당 부족이 가족주의로 원만하게 잘 지낸다는 신화의식을 이야기한다. 이런 사회에서는 ‘군주’와 ‘제후’와 ‘백성’이라는 수직관계의 정당화가 중요하다.

양계초의『음빙실문집』은 사회진화론을 담고 있으며, 한국의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이며 문명개화를 다룬다. 서구와 같은 실력을 갖추어야 한다고 본다. 유교는 교육의 목적은 요나 순과 같은 성인을 양성이다. 멸사봉공의 정신으로 백성을 이끌어 구세 안민할 수 있는 治者를 양성한다. 한나라 시대의 음양오행은 한 대 유학의 체계적인 우주관을 다룬다. ‘지식 권력’으로서의 문제는 공양학의 성격을 나타낸다. 공양학은 한 대의 통치 질서 확립을 위한 이념적 담론의 생산근거다. ‘춘추’는 노나라의 역사서다. 공양학은 지식의 선택과 배제를 통해 인간을 표준화하고 규격화하는 지배현상을 의미한다. 철저하게 공양학은 정치와 지배 권력과 연관성 속에서 전개 속에서 전개가 됐다. 春秋筆法은 유가의 왕도정치가 실현되는 통일국가를 정치의 이상으로 설정됐다. 난세를 바로잡아 올바른 도리로 돌리는 것으로, 발란반정은 인간행위의 모든 도덕적 기준이 됐다. ‘춘추공양전’은 살해당한 군주가 36이며, 멸망된 군주 52명이다. 이는 유교의리가 없는 사회를 말한다. 찬탈 혹은 시해된 것이다.

大一統은 천하를 하나로 인정한다. 천하를 하나의 통치 질서로 결합한다. 왕자의 정치가 원근을 가리지 않는다. 尊王의식으로, 왕의 신하된 자들이 大一統的 지배질서에 편입 시킨다. 大居正은 올바른 절차에 따라 왕위를 계승하는 것을 말한다. 올바름을 지키는 왕자라야 천하를 하나로 통일하게 한다. 『春秋公羊傳』은 원칙과 이념에 기초한 명분으로 군신관계의 禮儀를 최대한 부각시켜 정명과 명분관계에 기초한 군신관계의 확립시킨다.

유교의 궁극적 존재인 天은 만물을 상생하게 한다. 誠은 天道와 같다. 人道는 끊임없이 誠해지는 노력을 하는 것이다. 天道는 誠이며, 인간은 그 근본원리에 맞게 살아야 한다. 天道는 스스로 완전하며 매우 자주적인 존재다. 誠은 힘쓰지 않아도 적중하고 생각하지 않아도 얻고 저절로 道에 맞으니 聖人을 만든다. 天道는 만물을 낳는 근원적 존재다. 誠은 자기를 이룰 뿐 아니라 만물을 이루어주는 것이다. 天道는 만물을 기를 수 있는 높은 단계다. 天道를 통해 생긴 萬物을 서로 해치고 어긋남이 없다. 天道는 쉼없이 계속 운행된다. 天道는 어디든지 만물에 내재해 있다.

백성은 誠을 실현함으로써 다른 인민들이 형이상학적 본질로 밝게 되어 모두가 誠을 실천하게 되는 대동사회를 만드는 것이 맹자의 왕도정치다. 형이상학적 본질을 회복한 것이 大同 사회다. 대동 사회는 天道와 같은 상태다. 이는 만물이 서로 공생하게 한다. 모든 사람이 바름을 얻어 편안하게 사는 것이 대동 사회다. 天道는 만물을 올바르게 돌아가는 근본원리다.

부족적 자아=부족관습에 복종

마. 기독교인줄 알았는데, 천도교였네 : 민중신학

천도교 종말론인 후천개벽은 본래의 하늘을 다시 열고 본래의 땅을 다시 회복하는 것이며, 원시반본을 말한다. 다시 개벽은 ‘나’안에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는 것이다. 인심 개벽은 ‘한 마음’[이 되는 것을 말한다. 개인주의에 빠지지 않고, 가족, 국가, 민족, 인류, 우주로 확장된 마음이며 하나를 모심이다. 하나는 근원적 일자로서 하나인 마음이다. 신종교에 있어서 종교는 ‘한 나(一元, 同一我, 大我) 믿음’을 말한다. 이는 만물이 한 몸임을 말하는 것을 말한다. 동서융합이 大同이다. 유교의 大同은 잃어버린 이상, 요순시대 에덴 동산을 뜻한다. 친족적 신뢰 시스템이 약화되면, 쿠데타, 부친살해, 친족살해, 국왕살해가 나타난다.

侍天主는 한울님을 모심을 말한다. 이는 인간의 신성과 생명의 유기성 및 상호관통을 깨달아 천지합덕․천지합일의 대공한 경계를 지향하는 것을 말한다. 만물에 편재해 있는 우주적 본성과 혼원일기다. 이는 합일적 경지로 한울님의 의지 실현이며, 한울님을 모시는 주체적 관계다. ‘시천주 조화정’은 만물화생의 근본이고, ‘영세불망 만사지’는 사람이 먹고 사는 녹의 원천이다. 侍天主의 도덕적 자각은 수심정기로 나타나는데 본래의 ‘진여한 마음’(분별자가 나타나기 이전의 근본지)을 지키고 기운을 바르게 하는 것을 말한다. 수심정기는 우주적 본성을 지키는 것과 우주적 한 생명에 대한 자각과 실천이 연결돼 있다.

侍天主로서 吾心卽汝心의 心法은 내 안의 한울님(우주가 한 기운의 덩어리임을 깨닫는 일)으로 요약된다. 侍天主의 모심은 동일한 기운으로 연결된다. 侍天主는 지상신선들의 공동체인 同歸一體로 연결된다. 그리고 동학은 各自爲心에 빠진 당시 사람들에 참된 인간의 길을 제시한다. 개벽사상은 侍天主의 사회적 실천이다. 내유신령은 처음 태어나는 아이의 마음으로. 자신이 한울님인 우주와 하나가 돼 있음을 자각하는 일을 말한다. 외유기화는 포태될 때 기운이 바탕에 응하여 체를 이루는 것이다. 한울님의 기운과 나의 기운이 융화일체를 이룬다. 안으로 정신적인 영이 있고, 밖으로 기화가 있는 한울을 부모와 더불어 섬긴다면, 無爲而化로 그 德에 합하고 그 마음을 정하여 한 평생 이것을 잊지 않고 생각을 보존한다면 만사에 道를 알게 되어 그 자체를 받는다는 것이다.

敬天개념은 인간 각자에게는 동학사상에서 말하는 ‘한울’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天은 한(큰)과 울(우리)이 결합된 것으로, 무궁한 한울 안에 사람도 무궁하다. 만물의 형상을 만드는 것은 지기의 無爲而化다. 無極大道는 하느님과 영적인 접촉을 함으로써 깨닫는 것이다. 한울님은 至氣로 인간과 연결된다. 至氣는 우주의 본체인 동시에 삼라만상의 개체의 현상이며, 세계의 능동적인 원인이다.

誠은 道를 이루고 일을 성사시키는 근본이다. 敬은 德을 세우는 전부이고 조화의 질서를 이루는 원천이다. 우주 만물에 대한 차별 없는 사랑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그 비밀은 一心에 의해 이루어진다. 동학은 無爲而化다. 마음을 지키고 그 기운을 바르게 하고 한울님 성품을 거느리고 한울님의 가르침을 받으면 자연스런 가운데 화하는 것이다. 한울님으로부터 품부받은 마음을 지키고, 그 기운을 바르게 하여, 한울님의 기운과 하나가 돼야 한다. 무위이화의 힘은 至氣一元論이며 이를 잘 알아야 한다. 仁義禮智는 앞 성인들의 수행법인데, 수심정기는 동학의 자신들의 수행법으로 마음을 닦아 한울님 마음을 지킨다는 것을 말한다. 한울님 마음을 회복하고 실천하는 동학의 수행법이다.

1) 기독교 부활신앙이 절대 아닌, 미래에 찾아올 대동사회인 후천개벽

‘분단’과 ‘통일’이란 용어가 ‘대동사회’를 지향하는 천도교 종말론 속에 있는 용어이고, 기독교와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메시아의 도래가 아니라 ‘治世’를 이끄는 聖君을 기대하는 중국문명권 농민 정서일 뿐이다.

□. 분단극복과 통일을 지향하면서 신학이 담지해야 할 과제라고나 할까요? 그런 것에 대해 선생님께서 평소에 생각하신 것이 있으면 말씀해주십시오.

왜 없겠습니까? 밤낮 생각하는 것이 그것이지요. 민중신학이란 것이 분단 상황이 아니었으면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가 한국신학연구소를 만들 때, 그 첫 번째 설립목적이 분단극복의 과제를 신학적으로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 하는 문제의식이 있었어요. 그때는 신학이 이데올로기 문제에 무관심하고 있었고 그래서 우선 그 문제에 국한했지요.

얼마 전에 기독교장로교단의 ‘평화와 통일 위원회’에서 모임을 열었을 때 가보니까 통일원 사람이 와서 북한의 사정이라는 발제를 하는데, 북한은 절대로 양보 안한다고 전제를 해요. 그래서 내가, 그러면 어떻게 할 건가 하고 물었더니, 양쪽을 서로 인정하면서 통일헌법을 만들고 서서히 서로 접근한다 그런 소리를 하고 있어요. 절대로 양보 안한다면서 통일헌법을 어떻게 만든다는 건지, 그거 우스운 얘기 아닙니까? 저쪽은 공산주의 고수하겠다 하고 이쪽은 자본주의 양보 안하겠다 하고 그러면서 어떻게 접근이 될 수 있겠어요? 접근을 하려면 서로 양보를 해서 제3의 길을 찾아야지요.

우리가 ‘민중’을 말하는 것도 분단시대를 사는 민족적 염원이 그런 언어로 표현됐다고 봅니다. 어떻게 하면 이 분단상황에서 신음하는 민중의 현실을 극복할 수 있을까? 거기에서 민중신학이 나온 것이지요.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말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자본주의 체제를 승인하지도 않아요. 우리가 함께 살 수 있는 길이 뭔가 하는 과정에서 ‘민중’이라는 말이 떠올라온 것입니다. 자본주의 체제 아래 눌리고 빼앗긴 민중의 힘을 살리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란 이름 아래 일부 엘리트들에 의해 조종당하고 있는 민중의 힘이 되살아나서, 즉 남북 민중의 힘이 하나로 규합할 때, 이 민중이 주체가 되어서 민족통일을 이룩할 수 있다고 봅니다. 이 모든 염원이 한데 응결되어 표출된 언어가 ‘민중’입니다. 나는 실제로 이것 아니고서는 민족통일․민족해방의 길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두 체제의 사이에 나는 엄밀하게 민중의 자리가 있다고 믿고 있어요. 옛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세력이 들어와도 거기에 흡수되어 자기의 생각을 바꾸지 않은 ‘층’이 있습니다. 외부문화의 영향을 안 받았으면 안 받은 그만큼 순수한 층이지요.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받은 그 만큼 바깥물이 들었는데 그것은 이북이나 이남이나 마찬가지예요. 나는 공산세력도 있고 자본주의 세력도 있고 그리고 그 두 세력 외에 우리 민족의 정말 주체세력이 있다는 전제 밑에서 ‘민중’을 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미 존재하고 있는 민중을 우리가 규명해 보자는 것이지요. 민중은 민중신학이 발견한 언어가 아니고, 또, 우연히 나온 것도 아니고, 한국의 분단상황에서 특수한 의미를 가지고 성립된 언어라고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민중신학도 민족통일을 지향하기 위해서 탄생한 신학이고, 이 신학의 종당의 목적도 민족통일이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안병무, 41-42쪽. 안병무, 『민중신학 이야기』, 한국신학연구소, 1987. )

2) 기독교의 弱者용어인줄 알았는데, 그냥 무당신앙 ‘恨풀이’이네 (feat 파시즘 & 볼셰비즘적 계급투쟁)

좌파는 巫敎를 많이 쓴다. 세월호 문제에서 ‘시체 팔이’라고 말하는 것이, 사실은 ‘무교적 죽음 숭배’+‘무교적 원망’+‘무교적 복수의식’이 결합된 것이다. 그들은 끝없이 ‘진실 규명’을 외치는 선동가에 선동된다. 그 과정은 성경에 기록된 弱者를 다루는 용어로 포장될지라도, 기독교 신앙 감정과는 전혀 무관하다. ‘파시즘’에서 대중의 적개감을 유발하는 ‘정적 몰이’를 할 떄와, 계급투쟁에서 계급적대 세력을 몰아붙일 때의 바탕신앙으로 존재한다.

서남동 교수가 “죄란 지배자의 언어이고 민중에 있어서는 그것이 바로 恨”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참 예리한 인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이 죄인이라고 규정한 저들의 삶 자체가 한의 덩어리요, 저들의 한을 죄로 규정하는 것이 한을 더하게 하는 것입니다. 저들은 약자들이니까 세상에서 소외된 채 묵묵히 모든 책임을 자기 등에 짊어지고 있으며, 세상의 규정을 그대로 받아 창기, 전과자, 살인자라는 콤플렉스에 빠져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그들의 죄를 규탄하는 설교는 수렁에 빠져 있는 사람의 머리를 발로 밥아 누르는 행위 이상 아무 것도 아닙니다. 저들을 구하는 길은 죄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죄의 콤플렉스에서의 해방이요, 이것이 일차적으로 던져져야 할 求命의 밧줄입니다. 그와 동시에 저들을 죄인으로 만든 세상의 구조를 분명히 인식하게 하고 바로 그 세계의 체제를 변혁하겠다는 결의로 전환하게 되면, 이른 바 죄인의 반열에서 더나 세계구원의 주체가 되는 민중대열에 서게 되는 사건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안병무, 208쪽, 안병무, 『민중신학 이야기』, 한국신학연구소, 1987. )

얘기가 좀 빗나갑니다만, 한국에서는 家屋에 얽힌 이야기가 많습니다. 밤이 이슥해지면 흰 옷을 입은 유령이 머리를 풀고 피를 흘리면서 칼을 들고 나타납니다. 유령의 얘기는 대부분 여자에 관한 것입니다. 여자는 ‘’에 사무쳐 억울하게 죽었기 때문에 죽은 뒤에 寃鬼가 되어 나타나며, 이 ‘’을 풀어달라고 간청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 샤머니즘의 무당과는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샤머니즘의 무당은 이 ‘’으로부터 해방시킵니다. 이런 의미에서 ‘무당’은 그리스도의 역할을 합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사실입니다. 이제까지 교회는 이것을 무시해왔습니다만, 이제는 그래서는 안됩니다. 예수는 이른바 ‘의 사제’로서의 그리스도가 아니었던가. 에 사무친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역할을 무당이 해왔다면 이런 의미에서 예수도 무당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무당은 환상의 세계에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그것으로부터 해방됩니다. 죽은 자의 유령이 무당에게 잡아먹혀서 구당 속으로 들어가, 살아있을 때 말하지 못했던 것을 전부 토해내는 것입니다. 그 결과 병도 낫습니다. ‘’을 푸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타오르는 불처럼 발병하는 경우에는 기존의 질서도 무엇도 안중에 없게 되고 전부를 파괴해야 버리게 됩니다. 그렇게 되기 전에 으로부터 해방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민중신학에서 ‘’이라는 것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성직자는 ‘’의 사제가 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어떤 의미에서이건, 넉넉한 자도 가난한 자도 부지불식간에 ‘’에 사무쳐 있습니다. (안병무, 261쪽, 안병무, 『민중신학 이야기』, 한국신학연구소, 1987. )

그 중 교회는 어떠한가?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볼 줄 모르는 교회 지도자들, 정치․경제의 제도적 모순과 상관이 없는 관념론적 신학, 기업과 경영 능력으로 변질된 교회 확장, 반공의 보루 속에 숨어 잠든 교회, 모든 사회적 불의를 알고 있으면서도 조직 교회의 존속을 염려하여 말 못하는 교권, 이러한 것들이 우리의 실정인 것 같다. 이러한 현실에서 하느님의 선교에 부름을 받고 나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나는 여러분에게 제사장을 저버리고 예언자직을 수행하라고 하는, 잘못된 신학적 판단으로 권면한 것은 아니다. 내가 말하는 증인의 족보는 사제가 아닌 예언자들만의 족보는 아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선교에서 사제직을 잘 감당해야 한다. 그것은 지배계층, 부유계층의 횡포를 극복하고 눌린 자들의 자기 생존을 위한 항거를 마취시키고 거세하는 사제직이 아니고, 진정으로, 저들의 상처를 사매주고 비굴해진 저들의 주체성을 되찾는데 함께하고, 저들의 역사적 갈망에 호응하고, 저들의 가슴 속에 쌓이고 한을 풀어주고 위로하는 ‘恨의 사제’가 될 것을 권한다.

땅에서부터 하늘에 호소하는 아벨의 피소리(창 4:10)를 대변하고, 여리고 길에서 강도 만나 빼앗기고 얻어맞는 이웃의 신음소리를 듣고 그 아픈 상처를 싸매주고(눅 10:25), 일꾼들에게 지불되지 아니한 품삯이 만군의 주님의 귀에 들리도록 외치는 소리(약 5:4)이 ‘소리의 내력’을 밝히는 ‘한의 사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벙어리와 고독한 자의 소리 없는 소리를 위하여 입을 열고, 학대받는 자, 가난한 자들의 을 풀어주자”(잠 31:8)는 것이다.

전통적인 신학, 서구에서 이식해온 교회가 죄와 회개를 강요하고 스스로를 속죄의 매체로 자처하는 사제직을 말하고 있는 데 대해서 이 땅에서 ‘하느님의 선교’에 종사하는 일꾼들은 민중의 을 풀어 주는 사제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죄와 회개는 역사상 지배계층이 피지배계층을 누르는 이데올로기의 구실을 해온 것도 사실이고, 민중의 한은 복수의 악순환을 거듭한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잘못된 굴절을 우리는 항상 다시 반성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죄와 회개는 개인도덕에 결부되어온 데 대해서, 민중의 은 사회정의에 결부시켜서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상 집단체의 죄 의식이나 회개는 있을 수 없는 이야기다. 이란 눌린 자 약한 자가 불의를 당하고 그 권리가 짓밟혀서 참으로 억울하다고 생각할 대, 그 호소를 들어주는 자도, 풀어주겠다는 자도 없는 경우에 생기는 감정 상태이다. 그렇기에 은 하늘에 호소되는 억울함의 소리, 무명의 무고의 민중의 소리 바로 그것이다.

한의 사제는 이러한 민중의 갈망을 듣고 전달하는 매체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황야에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의 울음소리이다. 저들은 구원의 손길을 찾고 있다.(서남동, 43-44쪽, 서남동, 『민중신학의 탐구』, 한길사, 1983. )

민중신학의 과제는 민중의 ‘한’을 풀자는 것이다.

이제까지 우리가 다룬 그리스도교 신학의 문제는 의 문제였다. 그러나 앞으로의 민중신학, 즉 한국에 전개되는 민중신학의 핵심 문제는 의 문제보다 ‘한’의 문제인 것이다. 교회의 역할은 어떻게 민중의 을 푸는가이다. 이는 죄를 용서받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역사적으로, 그리고 대체적인 우리의 경험으로 볼 때 죄 즉 범죄라고 하는 것은 힘 있는 자가 약하고 없는 자에게 둘러씌우는 누명이나 딱지인 수가 많다. 예수님이 죽음을 당하시던 시대도 그러했다. 그 시대는 종교적 지배집단이 천민에게 붙인 딱지가 죄였다. 직업이 비천하다든지 무식하다든지 그리고 가난하다든지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바탕으로 지배자가 자기의 지배권을 정당화시키고 누리기 위해 피지배자에 대해 붙인 딱지였다. (서남동, 243쪽, 서남동, 『민중신학의 탐구』, 한길사, 1983. )

3) 표현은 기독교, 신앙내용은 유교나 천도교 : 뭘 믿는지도 모르는데 행동하라니

천도교는 유교가 변화된 것이다. 유교에서 儀節하는 계통을 억지로 기독교용어로 번역하는 것이 있다. 그리고, 유교는 세상참여의 종교다. 君主를 바라보고 같은 씨족 의식으로서 義理가 참여원인의 핵심을 차지한다. 여기에는 본 회퍼의 『나를 따르라』에서 논하는 ‘제자도’로서 세상참여가 전혀 아니다. 그런 것은 1도 반영되지 않는다. 유교적 세상참여를 억지로 기독교용어로 번역하는 경우도 나타난다. 이제는 본회퍼 신학의 참고서와 번역서가 나온 때다.

예수는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살아났습니다. 무력한 민중들이 예수의 가던 길을 걸어감으로써 그의 살아남을 입증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의 역사는 순교의 역사로 점철되었습니다. 죽음과 부활의 역사가 그리스도교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는 안정된 자들끼리 안위하는 영역이 된 채 조용히 시들어가고 있습니다. 이에 반하여 교회 밖에서는 속속 순교자의 역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눈을 똑바로 뜨고 보십시오. 조용히 귀 기울여 들어보십시오. 어디에서 부활의 그리스도사건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교회입니까? 교회 밖입니까?

또 하나의 사건을 증언하겠습니다. 저는 지금 1985년 5월에 똑같이 자기를 희생한 기록을 가지고 왔습니다. 최근 한국에는 많은 분신자살의 기록이 있습니다만 그 중의 한 경우를 소개하겠습니다.

여러 대학에 학생들의 데모가 있었고 경찰은 여러 날 동안 그 대학들을 포위했습니다. 그때 어느 학교에서 송광영이라는 학생이 학생들을 향해 이렇게 외쳤습니다.

지금은 몸을 버려 나라를 구할 때다. 우리는 폭력으로 저항할 힘도 없고 사람을 죽일 입장에 있지도 않다. 오직 유일한 방법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바쳐 기도하는 길 밖에 없다.” 이 말을 마치고 그는 분신을 기도했습니다. 그는 곧 병원에 운반되었으나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수천의 학생들과 민주인사들이 순교자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그 병원으로 몰려 왔으나 병원입구는 경찰로 포위되어 출입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아들의 시체를 인수하려고 병원에 들어갈 때 나의 동료인 문익환 목사가 요행히 같이 갈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와 문익환 목사 단 둘만이 시체가 된 이 학생과 함께 있었는데 그때 어머니와 나눈 대화를 문 목사는 詩로 적어놓았습니다. (안병무, 342쪽, 안병무, 『민중신학 이야기』, 한국신학연구소, 1987. )

우리의 부활은 곧 메시아 왕국의 도래요, 메시아 왕국의 도래는 곧 민중의 역사적 주체성의 획득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메시아 왕국’에 관한 짧은 상황을 삽입할 필요를 느낀다. ① 메시아 왕국(곧 천년왕국)은 첫째로 신국과 구별된다는 것을 위에서 말했다. ② 둘째로 메시아 왕국은 ‘유토피아’와 다르다. 서양 사회사상사에서 유토피아는 그리스 사상의 흐름에서 나온 것이고, 천년왕국은 히브리 사상의 흐름에서 나온 것인바, 전자는 엘리트가 이 썩어져가는 사회를 피해 대체적으로 외딴 섬에 가서 이 새 사회를 건설한다는 시나리오인데 대해서, 천년왕국은 이 썩어가는 사회가 전체적으로 새로와지는 후천개벽이다. ③ 셋쨰로 메시아 왕국은 현대신학이 밝히는 대로 메시아의 통치, 메시아 정치를 의미한다. ‘왕국’이라면 봉건사회를 연상하게 하고 또 지역적 공간이 그 지배적인 내용이 되기 때문에 정권이나 政體 이상의 내용을 의미하는 메시아 정치라는 말이 더 정당하다. ④ 그리고 메시아 정치는 ‘정치적 메시아니즘’과 대립시켜서 이해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이점 김용복 박사가 강조하는 제안) 과학기술주의거나 공산주의거나 또 어떤 이념이거나를 불문하고 정치이념과 정치권력을 가지고 인간을 구원한다는 주장을 정치적 메시아 신앙이라고 하는 것인데 세속의 지배자나 피지배자는 다 같이 일반적으로 정치적 메시아 신앙에 사로잡혀 있다. ⑤ 그러면 메시아 정치의 내용이 무엇이냐. ㉠ 그것은 민중이 그 역사적 주체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그것은 메시아 잔치(눅 14:12-24 참조)와 같은 것이다. ㉡ 메시아 정치는 그 정치방식으로서 통치하는 정치, 지배하는 정치, 다스리는 정치가 아니라 민중을 섬기는 정치다.(막 10:42-44 참조) ㉢ 그리고 그 내용은 친교(코이노이아, 행 4:32-37)와 평화(샬롬 사 11장)다. 결론적으로 적요하면, 민중의 역사적 주권을 회복하는 부활의 약속인 메시아 정치는 정권교체적인 혁명의 테두리나 그러한 차원에 맴도는 것이 아니고 더 포괄적이며 더 철저한 종말론적 형태 변화를 의미한다. 그것은 ‘몸의 부활’이라는 종교적 상징으로 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다. (서남동, 130-131쪽, 서남동, 『민중신학의 탐구』, 한길사, 1983. )

4) 기독교 외형을 비는, 기독교적 자아관을 종식시키는 대동신앙(유교/천도교) 신앙이네.

중국 신앙에서 民亂은 현세의 君主를 자신들의 씨족에서 배출한 영웅으로 교체한다는 이야기다. 유교의 愛民 사상으로서 仁은, 유교제사를 다루는 부족신앙을 매개로 존재한다. 반면에, 기독교 에큐메니칼 신앙에서 ‘통전적 세계관’은 그렇지 않다. 세계교회협의회가 부족 신앙으로 바라보는 유교의 愛民사상을 에큐메니칼 신앙으로 보려는 것은, 反美네트워크 확장에만 골몰하여 기독교신앙 자체에 대단히 소홀한 기구가 됐다는 이야기다.

민중신앙에서 무교는 꾸준히 지배계층에 대한 적개감 만들기 속에서 ‘신분사회’를 납득하면서 살아왔다. 이런 상황은 신분사회가 약화될 때, ‘살인’이 빈발하는 사회로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 무교는 유불선 신앙이 그러하듯, ‘부족사회 공동체’환상 속에서 존재한다.

예수의 기도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기원함에서 출발됩니다. 마태오 전승은 이것을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덧붙여 주석을 했습니다. 그러면 ‘하느님의 나라가 임하옵소서’라는 기도에 직결된 것은 ‘오늘 먹을 밥을 달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지금까지 얼마나 무시되어 왔는지요. 이 기도가 진실했다면 그리스도교의 역사는 오늘과 전혀 달라졌을 것이며 따라서 맑시즘의 공격을 받지 않아도 됐을 것입니다. 왜 이 기도가 무시되었을까? 그것은 종교지도자들이 귀족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이미 가난이 무엇인지 모르는 포식가들이 되었고 그들의 여유 있는 물질은 바로 그 물질을 생산한 계층에서 공짜로 가로챈 것이기에 그들은 물질의 소중함을 모릅니다. 이로써 민중과 더불어 먹고 마셨던 가난한 예수와도 단절된 셈입니다. 복음서에는 돌로 떡을 만들라는 악마의 유혹에 대해 예수는 사람은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고 대응했던 전승이 있습니다. 그런데 풍요해진 교회의 대변자인 신학자들은 이 말을 마치 <하느님의 말씀으로만> 인 것처럼 받아들이고 빵의 문제를 완전히 무시하여 왔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주장하는 그리스도의 몸이니, 코이노이아이니, 사랑이니 하는 따위의 설교는 허구일 수밖에 없습니다.

食口라는 말에는 단순히 먹는다는 의미를 넘어 선 종교적 배경이 있습니다. 일본에도 그런 전통이 있는지 모릅니다만 한국에는 돌아가신 선조를 표시하는 위패를 모시고 식사 때마다 일단 선조 앞에 음식을 바쳤다가 그것을 내려서 가족이 함께 먹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밥을 먹는다는 것이 아니라 선조와 함께 밥을 먹는다는 것입니다. 한 곳에 바쳤던 음식을 나눠 먹는 것, 그래서 食口입니다. 그래서 가까운 관계를 한솥밥을 먹는 관계라는 표현을 씁니다.

또 우리에게는 부락제라는 것이 있습니다. 계절에 따라 약간의 돈을 걷어 소나 돼지를 잡고 집집마다 淨하게 지은 밥을 그릇에 수북히 담아 동리에 있는 성별된 장소에 제물을 나란히 차려놓고 그 동리의 원로가 임시 司祭가 되어 일정한 제사의식을 행한 다음 거기에 바쳤던 음식을 모두 나누어 먹습니다. 이 날처럼 즐거운 때는 없습니다. 일년 내내 먹어 보지 못한 고기를 먹는 재미도 재미려니와 아무런 빈부의 차이도 없고 계급의 차이도 없이 한 神에게 바쳤던 음식을 나눠 먹는 것이 그렇게 흥겨운 것입니다. (안병무, 322-323쪽, 안병무, 『민중신학 이야기』, 한국신학연구소, 1987. )

세계가 하나 되는 시대

이것이 역사의 새 장의 제목이다. 이제는 모든 인류의 아들들을 지금까지 서로 원수인 듯 서로서로 다투고 죽이던 모든 민족, 나라, 인종, 교도, 주의자를 총동원하여 한 전선에 내세워서, 모든 모순, 모든 허비, 모든 오해를 다 내버리고 새로운 건설적인 하나로 향하게 하여야 한다. 그것을 못하면 가장 열심 있는 노력이 도리어 길을 더디게 하는 방해가 되고, 가장 높은 도덕이 도리어 역사를 떨어뜨리는 추가 되고, 가장 깊은 재주가 도리어 사람을 죽이는 독이 되어 버린다. 그러므로 이 전일화하는 인류적 동원령은 절대 시급하다.

그런데 그것은 세계역사의 새로운 해석이 아니고는 안된다. 한 조상을 어서 발견하여야, 그리하여 한 형제인줄 알아야 싸움을 그만둔다. 한 나라 백성인줄 알아야, 그리하여 한 곳에 가서 만날 것을 알아야, 서로 제 주장하기를 그칠 것이다. ‘하나’를 어서 의식하여야, 그리하여 각각 서로 한 몸의 지체인 것을 깨달아야, 이 미친 자살적인 경련이 그칠 것이다. 그러나 그 새것, 그 하나를 가르쳐줄 자가 누구냐? 하나를 믿는 자만이 할 수 있을 것이다. 씨족이 거짓말이라는 것이 아니라, 민족을 버리라는 말이 아니라, 국가가 쓸데없다는 말이 아니라, 종교가 거짓말이라는 말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이 다 문제가 되지 않는 자리에 서야 한다는 말이다.

새 종교, 하나의 종교, 참 종교가 필요하다. 있는 모든 것을 버리라는 말이 아니라, 살리라는 말이다. 그러나 살리려면 일단은 버리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야 한다. 이러한 기대를 가지고 오늘의 종교를 보면, 한편에서는 벌써 동이 트는 것이 보이나 대부분은 멀었다. 아마 가거에 언제나 그랬던 것 같이, 기성종교는 그대로 화석이 되어, 역사의 지층 속에 남고 말 것이다. 그들은 돌같이 굳어진 신조만을 주장하고 경전의 해석은 기계적으로 되어 생명을 자라나게 는 못하고 도리어 얽매는 줄이 된다. 돌 같은 지라 생활체험이 들어갈 수 없고, 기계적인지라 전체적․생장적인 역사 파악을 하지 못하여 도리어 그것을 이단시하여 버린다.

본래 종교경전이라는 것은 개조적인 법률서가 아니요, 자라는 힘을 가진 원리를 보여주는 것이다. 석가요, 예수요 하는 위대한 종교의 스승은 하나도 빠짐 없이 다 그때의 제도를 전적으로 깨뜨리고 나서는 혁명가들이었다. 그들이 고정된 율법서를 만들 리가 없다. 그것은 그들의 정신에는 정반대 되는 것이다. 그런 것을 만든 것은 그들이 아니요, 그들에서 생동하는 인격성을 빼고 우상화하여 숭배하기를 좋아하는 추종자들이다. 경전의 생명은 그 정신에 있으므로 늘 끊임없이 고쳐 해석하여야 한다. 새로운 생활 체험이 있어야 하고, 새로운 역사 이해가 있어 그것을 뒷받침해주어야 한다. 새 술은 새 부대를 요구한다. 소위 정통주의라 하여 믿음의 살고 남은 껍질인 경전의 글귀를 그대로 지키려는 가엾은 것들은 사정 없는 역사의 행진에서 버림을 당할 것이다. 아니다, 역사가 버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네가 스스로 역사를 버리는 것이다. (함석헌, 34-35쪽, 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 역사』, 한길사, 2002.)

내가 감히 종교적인 것을 말하는 것은 모든 종교를 다 믿어보아서가 아니요, 연구해 보아서도 아니다. 아무도 사람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알기 위하여 천하의 사람을 다 만나볼 필요는 없고, 모든 사람의 경험을 다 들을 필요도 없고, 어느 한 사람을 실지로 사랑해보면 그만이듯이, 내가 종교적인 것을 말하는 것도 다만 내 믿는 것이 있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내가 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것을 말하면 그것이 사랑의 원리인 줄을 믿듯이, 나는 내 믿는 바를 말하면 그것이 보편적․종교적인 것인줄 믿는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비교적 관계가 깊은 기독교의 성경에 나타나 있는 사관을 간단히 말해보기로 한다.

그러나 그것은 기독교가 홀로 참 종교라는 생각에서도 아니요, 기독교에만 참 사간이 있다 하여서도 아니다. 전날에는 내가 그렇게 생각한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 와서 보면 역시 종파심을 면치 못한 생각이었다. 기독교가 결코 유일의 진리도 아니요, 참 사관이 성경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같은 진리가 기독교에서는 기독교식으로 나타났을 뿐이다.

그러나 좀 더 엄정히 말하면, 내가 기독교를 말할 자격도 없고 성경의 사관을 말할 자격도 없다. 나는 다만 내가 본 성경의 사관을 말할 뿐이다. 기독교를 내가 말할 자격도 없고 또 기독교란 것이 내게 문제도 아니다. 나는 나의 믿음이 있을 뿐이고, 내가 본 성경의 진리를 알 뿐이다. 종교란 가장 구체적․개인적인 사실이다. 가장 구체적이요, 가장 개인적이라는 말은 나와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교섭이란 말이다. 그러므로 가장 내 일이지만 또 모든 사람에 통할 수 있는 줄로 믿는다. 내가 알기에는 성경은 그렇게 각 사람이 각각 제 자리에서 제 식으로 직접 하나님을 대하기를, 다른 말로 하면 나에게 전체를 나타내기를 가르치는 진리다. (함석헌, 50-51쪽, 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 역사』, 한길사, 2002.)

統一이 治世를 이끄는 君主의 찾아옴으로써, 치세군주의 주권이 전 영토에 미치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에, 자유민주사회의 국민의 기본권은 자동으로 실종하게 된다.

『신생철학』이란 책에는, ‘틈, 사이’를 가장 정치적으로 바라보면서 날카롭고 격정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 책의 지은이는 『동학의 세계 사상적 의미』라는 글로 유명한 윤 노빈이다. 윤노빈은 동학사상에 정통한 사람이니 ‘동학의 비결’에 그의 생각을 소개하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것이리라. : ‘나누고 쪼개고 분단하는 자가 악마다. 서양말로 악마란 ’둘로 쪼개며‘, ’이간질하며‘, ’속이며 중상한다‘는 말에서 생긴 것이다. 악마들은 사람들 사이를 갈라 놓으며 사람과 사람의 틈을 넓힌다. 이 사이의 ’틈‘은 ’불신‘이라는 악마의 날파소리에 따라 점점 넓어진다. 악마의 거리, 악마의 통로는 틈이다. 인화가 깨진 틈에서 협동이 붕괴딘 틈으로 악마는 지나다닌다. 악마는 정신과 마음을 쪼개놓으며 사람을 분열시키며 민족 내부 분단을 조장하며 민족들 사이를 갈라놓는 절단기일 뿐만 아니라 갈라진 사람을 가두어 두는 감금자이다. 분단된 정신, 분단된 개인, 분단된 민족은 이미 자유로운 정신, 자유로운 개인, 자유로운 민족이 아니다.

윤노빈은 ‘쪼개고 나누고 분단시키는’ 것이 악마이며, 악마의 통로는 틈이라고 밝힌다. 그리고 악마는 정신, 마음, 개인 그리고 민족을 이간질하고 싸움을 붙여 분단시킨다고 한다. 분단된 것들은 자유롭지 못한 노예의 정신, 노예적 개인, 노예적 민족이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악마를 퇴치하는 방법은 간단하다며, 악마와의 동업에서 손을 떼고, 사람들끼리 손을 잡으면 된다고 단언한다. (심국보, 44-45쪽, 심국보, 『동학의 비결- 그 이치가 한 마음에 있다』, 도서출판 모시는 사람들, 2015. )

좌우분열 의식은 제국주의 일본이 이 땅에 뿌려 놓은 저주라고 혹자는 말한다. 동족을 남과 북으로, 동과 서로, 보수와 진보로 쪼개어 서로를 원수로 삼도록 하는 저주! 그 틈을 비집고 다시 일본은 한반도 진출을 노리고 있다는 보도는 섬뜩하다. ‘개같은 왜적 놈’이라고 한 수운 선생의 말씀이 새삼스럽다.

수운 선생이 제시하는 비결은 이렇다. : ‘닦아서 필법을 이루니 그 이치가 한 마음에 있도다.“

이 말씀을 회암 하준천은 아래와 같이 설명하였다.

“우리 천도교나 국가가 이 흉악한 운수를 피하는 것은 在於一心입니다.”(심국보, 109쪽, 심국보, 『동학의 비결- 그 이치가 한 마음에 있다』, 도서출판 모시는 사람들, 2015. )

궁궁은 『정감록』에서 피난처이며 특정한 공간을 뜻했다. 동학에서의 궁궁은 영부의 모양으로 태극이기도 하며, 나아가 이것은 약동하는 마음을 의미한다. 수운 선생과 해월 선생이 강조한 궁궁은 정감록에서 말하는 피난처와 특정한 장소를 뜻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피난처로서의 궁궁 또는 이상적인 삶의 공동체로서의 궁을에 대한 숱한 민중의 열망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弓乙村이라는 이상적인 공동체를 형성하고자 했던 노력이 그것이다. 이러한 노력은 특히 일제의 민족적 차별과 억압에 항거하는 항일운동과 깊은 연관을 가지며, 주로 중국 동북지방, 즉 만주지역에서 전개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궁궁은 여전히 피난처이며 십승지이기도 하였다.(심국보, 99쪽, 심국보, 『동학의 비결- 그 이치가 한 마음에 있다』, 도서출판 모시는 사람들, 2015. )

5) 세계교회협의회의 종교통합 신학이라 포장된 천도교 유불선 삼교통합 : 기독교라면서 신앙의 대상이 성경의 예수가 아니다.

중국문명 속에서 어떤 종교나 ‘족장’ 중심의 사상이다. 그렇기에, 한 명의 지도자가 샤머니즘 신앙의 다른 표현을 한꺼번에 제시할 수 있다고 본다. 다른 신으로 나타나도 결국은 上帝라는 조상신이란 이야기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 이런 식의 종교통합이 가능하다는 기독교인이 있다면, 정통 신앙으로는 무효이며 기독교계의 신흥종교라고 보아야 한다.

수운은 상제가 내려준 무궁의 조화, 즉 오심즉여심의 심법을 직접 체험으로 확인하고 존재(수운-상제)의 근원적 동일성을 알게 되었다. 개체 존재인 나는 곧 궁극적 실재인 상제와 동일하다 즉, 내 마음 속에 한울님이 모셔져 있다(侍天主)는 것은 내 마음이 곧 한울님과 궁극적 차원에서 동일하다는 것을 아는(吾心卽汝心) 사건과 다름없다. 또 이런 무궁과 조화를 알게 만드는 통로에는 한 조각 수운 마음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한울님을 모신다는 것(시천주)은 존재 전체에 편만하고, 동시에 수운의 마음 속에 깊은 곳에 내재해 있는 지고 존재를 드러나게(혹은 강령하게) 만들어 궁극적 동일성을 체험으로 알게 하는 무극대도였다. 이 깨달음이야말로 상제가 수운에게 전하려 했던 최종적인 가르침이었다. (성해영, 128-129쪽, 성해영, 『수운 최제우의 종교체험과 신비주의』,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4)

수운에게는 지고 존재가 ‘상제’, ‘한울님’, ‘천주’, ‘지기’, ‘귀신’, ‘신’, ‘영’ 등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 중요하지 않았다. 우리가 정성과 믿음을 가지고 마음을 올바르게 세우면 언어로 포착할 수 없는 지고 존재가 자연스럽게 드러난다는 사실을 오심즉여심 체험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또 수운은 오심즉여심 체험이 우리에게 궁극적인 형태의 앎을 주지만, 동시에 존재의 경이로움은 여전히 지속된다는 사실도 실감했다. 그렇기 때문에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까지 수운은 不然其然을 노래했다. 모든 존재가 유래하는 궁극적 차원과 하나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상제와의 관계를 포함해 이 세계의 경이로움은 결코 다하는 법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수운은 자신이 느낀 존재의 경이로움과 기쁨을 이웃과 나누고 싶어 했다.

동학은 상제의 계시, 비판적인 지성, 신비주의적 통찰이라는 세 가지 요소를 고루 갖추고 있다. 바로 이 때문에 당대의 동서양 종교 전통을 아우르는 통합성과 더불어 고유의 독자성과 독창성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핵심에는 수운을 찾아왔던 일련의 비범한 종교체험이 자리한다. 상제와의 예기치 않았던 만남으로 시작된 수운의 종교적 여정은 그에게 커다란 당혹감과 기쁨을 동시에 주었다. 물론 그가 겪게 될 가혹한 탄압과 죽음도 함께, 그러나 그의 삶과 가르침을 기억했던 당대는 물론이거니와 후대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경이로움을 선물했다.

이처럼 수운의 삶과 동학은 그의 비범한 종교 체험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그 전모가 적절히 이해될 수 없다. 동학은 수운의 비범한 종교체험에서 출발하여 존재론, 인식론, 수행론, 실천적 윤리관 등을 총망라하고 있는 통합적인 종교사상이기 때문이다. (성해영, 212-213쪽, 성해영, 『수운 최제우의 종교체험과 신비주의』,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4)

수운은 경신년에 실제로 상제라는 지고 존재를 만났을까? 만약 그랬다면 왜 상제는 하필 경신년에 수운 앞에 갑자기 등장했을까? 우리로서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상제와의 만남에서 시작된 수운의 비범한 종교체험이 그의 삶 뿐만 아니라 절망과 고통 속에 신음했던 수 많은 사람들에게 가슴 벅찬 희망을 주고 그들의 삶을 놀랍게 뒤바꾸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래서일까. 예기치 않았던 상제의 출현이 그러했던 것처럼, 당대를 한참이나 앞선 동학의 보편성과 독창성은 우리에게 여전히 경이롭다.(성해영, 218쪽, 성해영, 『수운 최제우의 종교체험과 신비주의』,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4)

이렇게 다신에서 일신, 다시 그것이 지고신으로 발전해서 생겨난 개념이 ‘상제’인데, 은족은 처음에 자기들의 조상신이 ‘상제’라고 믿어 조상신에 대한 숭배가 바로 지고신을 신봉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중략) 동작빈에 따르면 은족의 조상신인 ‘제’ 또는 ‘상제’는 기후의 변화를 장악하고 기근을 관장하며, 화복과 길상을 내리고 심지어는 생사여탈권까지 갖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은족은 이렇게 전능한 조상신을 잘 받들어야 그 신의 위력을 빌려서 다른 부족을 제압하고 자기 부복과 보호와 강성을 도모할 수 있다고 믿었다.(김충열, 151쪽, 『김충열교수의 중국철학사 1, 중국철학의 원류』, 예문서원, 1994)

이것이 下帝와 上帝의 출현이다. 하제란 지상의 중심체요, 上帝란 인간세를 초월한 천상의 중심체이다. 다음의 홍범구주에 나오는 皇極개념은 여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중심체는 輻輳의 기능을 한다.(김충열, 145쪽, 『김충열교수의 중국철학사 1, 중국철학의 원류』, 예문서원, 1994)

통정허위표시로서 예수 신앙에 대한 의문은 과거에도 있었다. 그러나, 제도권 매체에서는 표현은 온건했다.

안병무는 그리스도교인이었는가? 그리스도교에서 내세우는 그리스도에 관한 교리는 안병무가 이해한 정직한 예수상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으므로, 만일 그리스도에 관한 교리가 그리스도교인을 결정하는 필수조건이라면 안병무는 결코 그리스도교인이라고 말할 수 없다. 역사의 예수에 대한 안병무의 올바른 이해와 정직한 해석과 깊은 친밀감이 그를 그리스도교인이 될 수 없게 만든다. 안병무의 예수는 그리스도교의 그리스도와는 무관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리스도교의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결론은 재고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가 예수를 민중해방자인 그리스도로 고백한다면 그 때의 그리스도교는 그 면모를 달리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전통 그리스도교의 해체를 뜻할지 모른다.

안병무는 글로써나 말로써나 공공연하게 “나는 그리스도교인이 아니다”라고 하진 않았다. 그러나 위선을 싫어하는 안병무는 “나는 그리스도교인이 아니다”라고 소리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특히 교회가 “예수는 그리스도이다”라고 고백하면서 역사의 예수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그리스도론을 말하고 있는 것을 보면, 성급한 그는 분통이 터졌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안병무는 예수를 그리스도로서 고백한 그리스도로부터 역사의 예수를 해방시키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안병무는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에 관한 교리를 인정하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야. 오늘의 역사 현장에서 역사의 예수를 만나는 거야. 그리고 그의 뜻을 따르는 거야. 그래서 예수처럼 민중해방운동에 참여하는 거야.”

그리고 또한 그는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그리스도교가 예수를 수용해서 자기변혁을 도모하지 않는다면, 그 따위 그리스도교는 파기되어야 한다. 역사에 존재할 하등의 의의가 없기 때문이다.”

안병무는 그리스도교인이었는가? 아니다. 그는 전통적인 의미의 그리스도교인이 아니었다. 그는 그렇게 될 수 없었다. ‘안병무의 예수’는 그것을 결코 허용할 수가 없었다. 그를 굳이 그리스도교인이라고 하려면 예수를 민중해방자라고 고백할 때가 가능하다. 그러나 그때 안병무는 ‘그리스도교인’이 아니고 ‘예수교인’이 될 것이다. (송기득, 221-222쪽, 송기득, 「안병무는 그리스도교인이었는가-‘역사의 예수’에 대한 그의 이해를 바탕으로」, 『기독교사상』, 2001. 1. )

바. 시장경제인줄 알았는데 주술경제더라.

시장경제는 서로 다른 주체가 어울려 있는 공간에서의 시민의 이성을 기준으로 한다. 반면에, 주술주의는 농민 사회에서 우월한 능력을 보유한 제사장 관료가 펼치는 농민들의 욕망을 해소해주는 하늘에 대한 제사를 의미한다. 경제는 시민이 어울린 공간에서 부르주아 계층의 상호경쟁이 아니라, 富를 축적하고 싶은 이들의 주관적 욕망의 표출이었다.

군사정권과는 다른 방식으로, 군사정권 경제학보다는 월등히 더 나쁜 최악의 의미로 치닫고 있는데, 현실을 분석하는 용어를 군사정권 비판할 때 용어를 쓰는 경우가 빈발한다. 이는 고쳐져야 한다.

시장경제는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며 경쟁원리, 인센티브, 자기 책임, 법치를 강조한다. 근대 서구 계몽주의로 서양이성에 연결됐다. 시장경제는 이기적이며 물질적이고 근시안적이며 무책임적이며 돈에만 관심 있는 혼자만 아는 돈벌레 인간을 전제하지 않는다. 시장경제는 지도자의 呪術로 인한 자동성도 아니고, 스스로 자기 구성하는 마법적 장치도 아니다. 시장은 경쟁을 통해서 거래 비용을 줄이는 효과를 갖는다. 시장경제는 경제주체의 자유로운 활동보장을 통해서 시장조절한다. 즉, 각자가 규칙의 범위 안에서 독자적으로 추구를 통한다. 시장경제는 계약자유원칙이며, 이는 로마민법의 시민상호간의 상대의 신뢰를 지키려는 신의성실 원칙과 연결된다.

呪術은 道의 형이상학적 세계로서 神仙에 대한 갈망을 담고 있다. 神仙不死는 道의 근원성을 의미한다. 이는 현세복락을 祭神께 빌고 보답 받는다는 주술적 이해와 연결돼 있다. 도교는 유불선 등 모든 계통의 사유를 습합한다. 韓國 巫俗은 多神的이며 역사의식과, 사회의식과, 윤리성이 결여돼 있다.. 주술과 저주 행위로 기복적/포용적, 융합적/가무로서 神을 섬긴다. 소망이나 기원이익의 현실이익의 공리관으로, 샤머니즘의 주술적 신비의식이 잠재돼 있고, 어떤 계기만 생기면 본성이 노출된다. 신령-무당-단골의 삼각관계로서 지나치게 주술에 의존한다. 박현채의 민족경제론은 대동세상을 지향하는 주술(윤리성 결여의 의식→경제 브레이크)정치로 나타난다.

경제전문가가 좌파들의 당골무당으로 좌파들에게 굿을 통해서 복을 내려주는 무당사제로 존재하는 것이 현금 살포정치의 원인이다.

사. 시민정치인줄 알았는데, 부족주의더라

군사정권은 국민들에 공개된 차원의 특정한 귀족들의 지배정치다. 그러면 민주화 체제는 상호 다른 국민주체간의 대화와 합의가 진전이 된 것이 아니다. 국민들에게 그러한 합의를 상상하게 하면서, 조선시대 부족정치의 양반통치 모습의 부활을 구현했다. 민주화체제의 용어는 언제나 정치를 지원하는 연고 편파성을 깔고 있다. 우파 정권에서는 공정함이 강요되고, 좌파정권에서는 세계교회협의회의 후원을 받은 좌파세력의 무제한의 편파성이 나타난다.

시민정치는 시민들의 자유로운 결사참여를 통해 존재한다. 시민정치는 계약주의적으로 多者를 포괄한다. 시민정치는 理性주권을 행사하는 부르주아 귀족들의 정치다. 이는 귀족들만이 공유하는 정치와 작별을 말한다. 서양 사람들이 모두가 공유하는 로마 인본주의를 통해서, 귀족종교로서의 천주교를 포함한 특정종교 혹은 국가권력으로부터의 자유의 구현을 의미한다. 이성의 공적 사용을 통해 나타난 공공시민성은 이웃, 결사체, 전문적 조직체의 목표와 목적을 지닌 멤버십을 말한다. 시민종교로서 자유로운 고백들의 연합은 사회구성원의 쉽게 동의. 사회구성원 생활의 종교적 토대가 된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시민운동은 모든 사회권력을 독식해도 좌파는 언제나 부정적 의미의 권력자가 아니고, 우파만 부정적인 의미의 권력이라고 해석하여 <우파에 소속되지 않았다>는 의미로 해석하여, 좌파 권력과 좌파의 前근대성에 연결된 모든 것을 그렇게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 천도교라는 민란신앙에서 ‘民會’라는 부족주의 양식이, 민중운동을 통해서 민중단체로 나타났고, 그것을 ‘시민단체’라고 고쳐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한국에 있어서 ‘시민운동’과 ‘시민단체’란 말도 ‘통정한 허위표시’로서 실제의 의미가 없다고 보는 게 맞다. (재판 판례집에서 ‘시민운동’이라고 검색하면 특정정당으로서 더불어 만진당에 일사분란하게 돌아가는 대단히 연고적인 부족단체 입장으로 나타난다.)

儒敎와 道敎는 중국의 제자백가 신앙에서 ‘족장’을 미화하는 신앙 형태로 겹친다. 족장 미화는 대동신앙으로 나타난다. 道敎는 유교와 다르게 多者를 포괄한다. 그러나, 신분노예제를 행사하는 중국 군주의 유교 밖 버전을 의미한다. 부족 내부에서 유교적 신분제로 배제되는 영역을 포괄한다는 의미이지, 서구적 포괄적 가치를 한다는 것이 아니다.

민란신앙에 입각하여 좌파의 혁명담론에 일사분란하게 돌아가는 연고 부족적 단체를 시민단체로 부르는 것에서 <아니라>는 의심을 넘어서서, 1987년 6월 항쟁 직후에 ‘민중단체’를 ‘시민단체’로 바꾸어 부를 때부터 30년간 국민을 속여 먹었다고 말하는 게 사실적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의 시민정치는 실제로는 부족주의에 의해서 움직이면서, 서구적 자연이성에 의해서 돌아간다는 통정한 허위표시로 위장해 왔다. 환경단체가 왜 어떤 경우만 움직이고, 여성단체가 왜 어떤 경우만 움직이는가? 시민단체 이냐/아니냐를 따지는 것은 민망하다. 1987년 직후부터 시작한 시민운동의 처음부터 ‘통정한 허위표시’로서 시민운동이었다.

老子의 자연철학은 모든 개념이 같은 부족끼리만 알아듣는 개념으로 흘러간다. 1987년 이후 시민정치는 老子·莊子의 多者 포용론을 깔고 있다. 서구 시민정치의 多者포용이 아니라, 중국 봉건제의 다른 형태의 나타남일 뿐이다.

老子에 있어서 돌아가는 것은 道의 움직임이다. 道는 우주의 영원한 本體(常道․常名)에 도달해야 한다고 본다. 일체의 상대세계의 상대가치를 뛰어넘은 다음, 다시 至高無上의 가치로 돌아가야 한다고 본다. 인류가 우주 진상 속에서 大道의 본체를 파악하고, 大道의 진상을 파악하며, 大道의 진정한 정신을 체험한 다음, 성인 자신의 생명으로 그것을 실천해내는 것이다.

老子의 德은 씨족의 습관적 법규다. 老子의 시각에서 볼 때 재물 약탈 윤리가 天命의 윤리다. 씨족부락의 영도자를 대표로 하는 제사나 출정등의 정치적 행위와 관련된다. 혈연적 종족을 유대로 하는 제사․사회․정치적 조직체계를 수립하고 확정한다. 세계관 인식을 중지시키고 직관 요청이며, 직관으로 사물을 있는 그대로 인식시키고 순응이다. 道는 만물의 宗主이다. 그 존재는 上帝보다 앞선다. 道는 철학상의 上帝(조상신)와 같은 것이므로, 그것을 우주의 본체로 삼을 수 있다.

莊子는 상․무․유로써 도를 세우고 太一로써 종주를 삼는다. 장자의 형이상학은 도를 무궁한 시궁 범주 속에 투사하고, 그 작용에 따라 원기 완성하게 모두를 다 발휘하게 하여, 생명 정신의 최고 경지를 이룬 것이다. 『장자』 「소요유」는 寓言의 형이상학 의미로서 조물주와 함께 소요유한다.

莊子의 至人은 그 정신을 無始로 돌아가게 하여, 정신은 無下有之鄕에서 노닐고, 小知를 버리고 형체의 번거로움을 끊어 버리는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장자의 至人은 진리를 살펴, 이익을 따라 움직이지 않으며, 사물의 변화에 명을 맡겨, 중심에 도를 지키는 사람이며, 진실을 살펴, 이익을 따라 움직이지 않으며, 사물의 진실을 규명하여, 그 근본을 지킬 수 있다. 장자의 至人은 “그 하나를 지킴으로써 그 조화에 산다. 무궁한 道의 문으로 들어감으로써 무극의 들판에서 소요하면서, 일월과 더불어 빛을 함께 하고, 천지와 더불어 영구 불변한다”고 주장한다. 장자의 至人은 ‘조물주와 더불어 벗이 된다.’ 至人이 수양에 성공하면 진정한 聖人이 되는 것이다. 일체 관점상의 차별은 모두 전면을 통합하는 최고 관점에서 조화․융화되어, 우주 일체는 오묘한 道의 운행 아닌 것이 없음을 보게 된다. 자연스러운 본성 회복은 몸의 보존이다. 道家는 사회질서와 표준화(경제마인드 기초)에 회의적이다.

시장경제에 있어서 市場을 중국의 자연과 일치시키면서, 경제학에서 천도교의 無爲而化가 된다고 주장하며 英美 자유방임경제라 주장하는 것도, <통정한 허위표시>에 속한다. 서구 경제학도 자연철학이고 김대중의 대중참여경제학의 시장경제 이해도 자연철학인데 중국의 것을 다루었다고 차별한다고 보는 시각은 유치한 종족주의 산물이다. 자유시장경제의 포장을 사용한 관료주의가 실체인 것이다. (김대중 경제학인 대중참여경제학 이후에 관료가 국가주의 경제학보다 더 나은 판단력을 보이기보다, 더 강력한 관료주의로 들어섰다.) 실체를 분석하는 정확한 경제 분석이 아니라, 感에 의존하는 관료주의가 실체인 것이다. 그러나, 老子와 莊子의 脫규제는 부족주의를 전제한다. 여기에는 계약주의 인식도 없고, 상호간 신의성실 원칙도 없었다. 脫규제를 통해서 복잡한 세상사를 도피하는 율도국 이상세계를 구현하라고 하지만, 세상은 변하는게 없었다.

통정허위표시로서의 시장경제, 영미 자유방임경제인줄 알았는데 천도교 무위이화더라

아. 민주주의 인줄 알았는데 파시즘이다.

민주주의는 종교개혁 이후 서구 사회에서 상식이 된 단독적 개인을 전제로 한다. 반면에, 파시즘은 서구 문화 기준으로 후진적인 부족 사회의 민족신화를 이용한다. 기독교가 아니라 천도교이고, 시민정치가 아니라 부족주의이고, 시장경제가 아니라 주술주의라면, 민주주의가 아니고 파시즘이 되는 것은 논리적이다.

시민들이 주체가 되는 부르주아 공론장은 군주의 절대지배에는 반대한다. 시민들이 상호 경쟁하는 부르주아 공론장은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法개념을 중심으로 한다. 공중으로서 교양 있는 사람들의 평등은, 평등과 자유라는 상투어 속에서 존재한다.

공론장의 정치적 기능은 공중에 호소하여 새로운 포럼 앞에서 그들의 요구를 정당화한다. 이는 여론의 포럼 앞에서 소환되는 공권력이다. 18세기 중반에 프랑스에서도 정치적으로 공중이 출현한다. 부르주아지는 신분사회에 포위됐다. 공중은 부르주아 사람들의 사적인 모임으로 존재하는 공론장을 통해 존재한다. 공론장은 국가권력과 자기를 매개하는 기관을 말한다. 근대사법의 역사는 18세기 자연법의 시정법화와 연결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법적 위임이 없는 국가개입이 비난 받는 이유는 자연법적으로 확정된 정의 원칙 위반하기 때문이다. 法의 지배는 <지배 일반의 해체>를 말한다. 法은 의지가 아니라 理性이다. 공론자의 지배는 권위가 아니라 진리가 법을 말한다.

파시즘은 첫째, 제1차 세계대전 후유증으로 인한 바이마르 공화체제에 대한 불신 때문에 나타났다. 실향민과 전쟁을 마친 군인들의 유입으로 사회적 불안을 가중됐다. 둘째, 세계 경제 대공황에 따른 실업자의 증가 때문이다. 호전적이고 공격적인 체제로 불길한 대공황을 전제한다. 셋째,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치적 불안정 때문이다.

파시즘은 대중독재체제의 문화상징이며 공통분모는 민족주의를 포함한다. 국민대중이 통일적인 정치규범과 집단적인 사회도덕을 지닌 채 전체에 대해 진정한 헌신과 충성을 바치는 강력한 연대의 공동체이며, 종교적 신념에 기초한다. 전체주의 유토피아 절대화에 기초한다.

反유대주의는 인종주의 원리를 포함한다. 파시즘은 인간해방의 기획을 위하여 노동계급을 동원하고자 하는 사회주의 세력과 공산주의 세력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난다. 르봉은 대중심리가 정치적으로 중요하며, 군중은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환상에 사로잡힐 것이라고 주장한다. 파시즘 사회적 신화의 본질적인 특징은 집합적이고 비합리적인 힘을 활용해 집합적 행위자를 묶어내는 데 있다. 공동체 정서. 강력한 지도자가 이끄는 집단이 필요하다. 나치즘의 ‘민족’은 피로 채워진 단일체를 말한다. 나치즘의 생물학적 인종주의와 反유태주의가 민족주의의 이방인 혐오증에서 비롯됐다.

선진 사회가 와서 복지가 늘어나는 줄 알지만, 사실은 국가 붕괴 수준의 정치가 나타나기 때문에 귀족 안보를 위한 국민성 타락 때문에 복지가 늘어나고 있다.

국민의 신탁을 받은 사람들이 자신의 부패를 숨기기 위해 국민을 부패시키려고 할 때 국민은 이 같은 불행에 빠진다. 그들은 국민이 자기들의 야심을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오직 국민에게는 국민의 위대성만을 이야기한다. 그들의 탐욕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오직 국민에게는 국민의 위대성만을 이야기한다. 그들의 탐욕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국민의 탐욕을 부채질한다.

부패는 부패를 일삼는 자들 사이에서 커질 것이고, 또 이미 부패한 자들 사이에서도 늘어날 것이다. 국민은 모든 국고금을 서로 분배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게으르면서도 나라 일을 관리하고 있는 것처럼 가난하면서도 사치의 즐거움을 누리고자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게으름과 사치 때문에 그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은 국고금 외에는 없을 것이다.

만일 투표가 돈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을 보았다 하더라도 놀라서는 안될 것이다. 국민으로부터 더 빼앗지 않고는 국민에게 많은 것을 줄 수가 없다. 그러나 더 많이 빼앗기 위해서는 국가를 전복시켜야 한다. 국민이 자기의 자유로부터 보다 많은 이익을 끄집어 내는 것처럼 보이면 보일수록 그들은 자유를 잃어버릴 시기에 보다 더 접근하게 된다. 그럴 때는 단 한 사람의 압제자가 나타나고, 국민은 모든 것을, 그 부패 이익마저도 잃게 될 것이다.

따라서 민주정체는 두 가지 극단을 피해야 한다. 즉 그것은 귀족정체 또는 1인 통치제도로 인도할 불평등 정신, 그리고 그것을 1인 전체 정체로 인도할-1인 전제정치가 결국 정복이 되는 경우의-극단적인 평등 정신이다.

그리스의 여러 공화국을 부패시킨 사람들이 반드시 참주였던 것은 아니다. 모든 그리스인의 가슴 속에 공화정체를 뒤집어 엎으려는 자에 대한 뿌리 뽑을 수 없는 증오심이 있었던 것 외에 그들은 무술보다도 변설에 더욱 더 애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몽테스키외, 136쪽, 몽테스키외, 하재홍 역, 『법의 정신』, 동서문화사, 2007. )

중국 종교에는 國家를 이룰 요소가 상당히 부족하다. 제자백가 사상이 부족 마을을 기반으로 귀족 제후가 마을을 이끄는 것으로, 이성을 갖춘 주체가 여럿이 공존하는 세계를 그리고 있지 않다. 이성적 판단을 갖춘 한 개인과 신분노예로서 복종의 의무가 주어진 공간을 다룬다. 그런 공간에서 자라난 사람들이 서로 공통감각을 가지고 대화하기는 어렵다. 함석헌의 전체 사상은 ‘서구적 국가’를 비난하고, 중국적 부족주의와 함께 하는 자아로서 ‘참나/얼나’를 강조했다. 그러나, 함석헌의 사상은 완벽한 체계성을 갖추지 않았기에, 부분적으로 우파 자유민주주의 법치주의자의 시점에 맞는 표현이 발견되기도 한다.

국가사상의 결핍이다.

또 그 다음 나라 생각할 줄을 모른다. 나라 생각 아니하는 죄로 천 오백 년 동안 이 꼴인데 아직도 나라를 사랑하지 아니한다. 이 민중은 이 날껏 속아온 민중이므로 무리도 아니다. 본래 정치란 묵인이다. 임금질을 누가 해달랬느냐? 정치를 누가 해달랬느냐? 저희가 나서서 한답시고 떠드니, 사람 살기에 알맞게 하면 묵인해 두는 것이고, 잘못이 있어도 사람이란 평안을 요구하는 것이니 과히 심한 것 없으면 참을 대로 참다가, 정말 아니 되겠으면 그대는 민중이 일어나 혁명을 하고, 또 나서는 놈 중에서 비교적 그럴 듯한 것을 골라 맡기고 또 묵인해두는 것이다.

그렇게 몇 천년을 오던 것이 이제는 그럴 수 없다. 우리는 직접 하자 하는 것이 민주주의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역대로 그 정치한다는 자마다 민중 생각을 아니하였기 때문에 백성이 정치의 따뜻한 혜택을 입어본 일이 없다. 그러므로 벼슬아치라면 이리 같이만 알았다. 그런데다가 다른 민족으로서 억누르고 업신여기는 데서 몇십년을 살아왔으니 정부요 관청이라 하면 벌써 대적으로만 아는 버릇이 박혔다. 해방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공유물․관청을 모두 파괴하고 제각기 뜯어가고, 심지어 학교는 일본 놈이 지은 것이니 마음대로 물건을 가져가도 좋다. 길가의 나무도 찍어 쓰자, 공원의 꽃도 일본 놈의 것, 양력은 일본의 것, 없애자 없애자 식으로 나간 것은 무지라면 참 무지지만 역사를 생각해볼 떄 무리가 아니다. 불쌍한 가엾은 민족이다. 제 민족을 모르는 것도 아니요, 제 나라도 모르는 것도 아니다. 인간성을 가지면서도 의붓어미 밑에서 자랐기 때문에 그 인간성이 찌그러져 나타나는 자식 모양으로, 국가사상이 옳게 발달이 되지 못하였다. 이 사람들을 가지고 정치를 해야 하는 것이었다. 이 백성을 무지하다 마라. 저들은 이날껏 임금도 없었고 지도자도 없었다. 도둑한테 끌려왔고, 이리한테 몰려왔다. 저들은 나라 없는 백성이다. 이제 저들이 스스로 나라를 하도록 하는 것이 일이다. (함석헌, 190-191쪽, 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 역사』, 한길사, 2002.)

나치스는 ‘국수주의’와 ‘사회주의’가 결합된 형태로 나타났다. 첫째, 1차 세계대전 후유증으로 바이마르 공화체제 불신이 나타났다. 실향민과 전쟁을 마친 군인들의 유입됐다. 둘째, 세계 경제 대공황에 따른 실업자들의 증가다. 셋째,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치적 불안정이다.

파시즘은 대중독재의 문화상징이며, 공통분모는 민족주의다. 국민대중이 통일적인 정치규범과 집단적인 사회도덕을 지닌 채 전체에 대해 진정한 헌신과 충성을 바치는 강력한 연대의 공동체다. 사회적 신화는 본질적인 특징은 집합적이고 비합리적인 힘을 활용해 집합적 행위자를 묶어내는 데 있다. 인간해방의 기획을 위하여 노동계급을 동원하고자 하는 사회주의 세력과 공산주의 세력에 대한 반작용이다. 공동체 정서는 강력한 지도자가 이끄는 집단이 필요하다. 지도자 숭배는 反지성주의로 의지에 대한 찬양이다. 파시즘은 종교적 신념에 기초하며 전체주의 유토피아 절대화를 말한다. 나치즘에 있어서 민족은 피로 채워진 단일체다. 나치즘의 생물학적 인종주의와 반유태주의가 이방인혐오증에서 비롯됐다. 파시즘은 정치살인을 구현하는 아시아적 야만으로 존재한다. (反共이 파시즘이면, 북한정권의 이념으로 정치살인이 빈발하는 민족해방주의가 어째서 아니란 말인가?)

자. 서양자연법(이성)인줄 알았는데, 동북아자연법(연고주의 편들기)이었다.

좌파정권은 ‘코드 인사’로 헌법재판소를 채웠다. 헌법 심사를 제대로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법치를 수호하려면 코드 인사를 하지 않는 방향으로 갔어야 한다. 재판이 우파에게 편파적으로 불리하고 좌파에만 유리한 것이 나오는 것을 확정하기 위한 인사는, 그 시도 자체가 불법하다.

서양에 있어서 민중종교는 그가 스스로 이성의 책무를 통찰하고 느끼게 해야 한다고 본다. 참다운 교설은 인간적이며, 보편이성에 기초한 단순한 교설이다. 민중종교이고자 하는 모든 종교는 마음과 환상의 문제다. 평신도가 자신의 신앙관에 따라 자기 자신을 표현할 권리가 없다는 것은 문제다. 신앙의 법은 완전히 그 통치자들에 의해 만들어져 있는데, 민중종교의 입장에서는 부당하다. 계약은 만인의 합의에 기초한다. 신앙을 다수결의 원리에 종속시켜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교회계약이 아니다. 교회의 계약은 성경에 기초한 신앙을 믿는 계약을 말한다.

프로테스탄트의 많은 信經들이 전체 민중에 의해 인정받지 못했다. 교회의 신앙은 보편적 신앙이며 모든 개별자들의 신앙이다. 자신의 신앙의 충실은 자기 종교에서 자유롭게 실천이며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보호된다. 이성적인 것은 체계적인 자기의식을 획득한 개념적인 내용이다. 이념으로서 이성의 개념이 타당한 것은 로고스 질서다. 개념의 직접적 근거는 존재이며 존재의 현상이다.

서양 자연법은 에피쿠로스에게 법은 사적 관계 속에 성립된 계약으로 나타나고, 스토아 학파에는 자연법으로 나타난다. 피지스는 <사물의 변화 속에 도사린 지속성>이며, <사물의 다양성 속에 도사린 어떤 동일성>이다. 피지스는 인간의 법인 노모스에 대항한다. 에피쿠로스 자연법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법칙에 의해 형성된다. 자연법은 스토아사상에 의해 보편적이고 우주적이며 국제적인 면모다. 자연법은 태고시대 공동체에 대한 신화적 기억을 담고 있다. 스토아 자연법은 여러 공동적 사고. 자연과 일치하게 살아가기를 말한다. 스토아학파가 늘 바라던 공동소유의 이상을 안고 있다. 기독교 자연법은 고대의 교부에서 나타나며, 새로운 방식으로 십계명 정신에 입각한다.

로마세계는 自然法이며, 근대세계는 理性法으로 나타난다. 이는 선 실정적, 초실정적 법 이념이 아니다. 근대 자연법은 舊체제를 무너뜨리는데 이념적 무기였다. 파시즘의 인권유린을 야기한 실정법 체게의 청산이다. 자연법은 법 이념이며, 사물정의이고, 사물본성이고, 창조질서다. 자연법론은 서구의 정신활동사에서 이데올로기를 초월하는 법 이념을 끊임없이 추구해온 노력의 산물이다. 법철학은 법의 근본문제를 다함께 비판적으로 생각해보는 학문이다.

천도교에 있어서 자연법은 부족주의로서 연고주의를 전제한다. 天道敎는 天人合一과 인내천, 侍天主 개념인데, 그것은 동성촌 부족의식을 전제하고 있다. 吾心卽汝心는 인간과 上帝가 존재론적으로 동일(동성촌 의식)하다. 한울님과 합일은, 吾心卽汝心의 心法, 無極大道, 無窮의 조화다. 인내천은 반드시 侍天主를 전제로 성립한다. 天道의 실체가 無爲而化다. 우주의 궁극적 실재는 至氣다. 이는 無爲而化의 理다. 개벽은 모든 사람이 깨달아 생성한다. 조화는 하늘이 만물을 만들어 화생 시키는 것이다.

한국인들의 민중신앙은 조직화된 종교소속은 없으나, 초자연적 힘과 존재 신뢰를 의미한다. 한국인에게 민중신앙에 있어서 상세정의는 불필요하다. 그런 만큼, 민중들의 민중신앙에 기초하여 보편타당한 法治를 구현하는 게 불가능하다. 이 두 개 같다고 주장하는 것도 ‘통정한 허위표시’다. 민주화(민족해방)세력은 종북좌파 귀족들의 연고자 이기주의를 부리면서도, 그것이 보편타당한 원칙인양, 국민과 세계를 동시에 속인 것이다.

한국종교는 신학보다 윤리를 중시한다. 한국종교의 일차적인 관심은 개인이라기보다는 집단에 있다. 한국의 민중신앙을 기준하여 ‘인권’을 세울 수 없다. 한국의 민중신앙으로 인권을 논하면, 결국 자기 마을 사람 편들어주기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인권 변호사란 문석탄과 노무현이 북한인권에 둔감한 이유는, 한국의 민중신앙으로 서양의 자연이성을 구현했다는 통정한 허위표시 때문이다. ‘인권 변호사’란 표현은 허위표시에 가까우며, ‘연고자 변호사’란 표현이 사실을 반영할 것이라고 본다. 한국은 민간종교가 제도화라는 덫에 걸리지 않고 성행한다. 한국인들은 聖人이 되기를 추구는 우주전체와 조화다. 한국인 전통적인 영적 수행은 애니미즘과 샤머니즘이다. 지역 정령들과 대화는 무당(가정주부&할머니)이 중심이다. 무당은 카리스마 샤먼이나 세습화된 샤먼으로 나타나는 데, 한국에서 무속의 대다수는 여성이다. 한국 민간신앙의 핵심적 가정은 뭔가 잘못되면 신령들과 관계의 틀어졌다고 본다. 무당신앙은 사랑, 정의보다 복종과 흥정하는 무교가 정신적 바탕이다.

실정법 이전의 자연법은 서구나 통할 일이다. 아시아는 실정법 이전의 야만적 전제주의다. 이승만 대통령 이후에 대한민국이 서양법제를 수용한 역사를 모두 부정하기 위한 ‘위정척사파’ 의식이 본체이고, 자연법 운운하는 것은 ‘통정한 허위표시’라고 봐야 한다.

창세 신화는 부족 족장의 지배를 자연화(씨족마다 창세 신화 있음)로 나타난다. 중국신화 이데올로기는 기원의 관심을 통해서 중국민족주의로 국가주의 이데올로기 정당화 (중국 공산당 지배 부족의 정당화)이다. 한국 사회에서도 씨족 신화가 활용되면, 아시아적 전제주의의 활성화로 이어질 것이다. 남한이 권위주의를 할 수 없게 되자, 씨족 신화를 쓰게 되면 북한공산당의 아시아적 전제주의만을 정당화한다. 한국 신화(영웅이야기)는 신분제 귀족중심 사회의 이데올로기를 의미한다. 한국 신화의 부적절한 남발은 권력을 쥔 지배귀족의 정당화를 말한다. 자연은 샤머니즘과 애니미즘으로 자연법으로서 보편타당한 법은 한국 역사 속에 없었다. (내버려두면 사회가 잘 풀린다는 주장은, 샤머니즘 기복주술의 환상일 뿐이지, 사실성은 아니다.)

차. 영미식 혹은 독일식 연방제인줄 알았는데, 고려연방제(좋게 봐도 중국식 연방제)였다.

서방 자유세계의 국가조직법은 교황지배체제의 국가조직법과 같다. 가톨릭 지배체제로서 존재하지만, 가톨릭이나 개신교용법은 전면화되지 않는다. 김대중씨는 박정희-김대중 대선 이래 영미식 혹은 독일식 연방제를 한다고 했다. 천도교의 조직법은 결국은 중국문명의 사회조직법이다. 귀족 과두정체제이며 유교봉건제의 변주곡의 테두리 안에 든다. 고려연방제는 북한공산당의 지배권이 사회 전체에 미치는 중국 군주의 위치를 차지하는 것을 말한다.

영미식 혹은 독일식 연방제는 서구 계몽주의와 교황지배체제에서의 교회 연합적 국가관을 의미한다. 각 개인이 자유로우면서 평등한 관계의 구현은, 각 개인을 분할 정치(devide & rule)하는 것과 연결된다. 각 개인에게 평등한 기회와 권리 보장을 하면서, 지도자가 통치할 수 있는 계기를 갖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 대하여 기독교민주동맹 소속의 Hermann v Mangoldt가 한마디로 명료하게 설명하였다.

“자유로운 민주적 질서와 달리, 인민민주주의 같이 거의 자유롭지 못한 민주적 질서가 존재한다.”

즉, 우리가 추구하는 민주주의는 “자유”민주주의이어야 하며 정당의 자유와 규제질서로서의 민주적 질서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문광삼, 209쪽,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관한 연구」, 『법학연구』, 제31권 1호. 통권 39호)

서독기본법의 제정자들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대한 신봉은 우선 과거의 전체주의 체제에 대한 부정을 의미하며, 다음으로 그 내용상 바이마르 헌법에서와 같은 상대적 민주주의를 극복하는 데 있다.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는 독일연방공화국의 기본이념이며 헌법의 기본원리․기본질서이다. 따라서 헌법의 근본결단으로서의 국가의 도덕적․정치적 실체를 형성하는 헌법의 근본 가치이다. 또한 그것은 파시즘이나 공산주의와 같은 전체주의 국가에 대한 부정이며, 인민민주주의 또는 군사독재체제까지도 부인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박규하, 94∼95쪽, 「서독기본법상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 『고시연구』, 90.6.)

이것을 사람들은 독일연방헌법재판소가 1952. 10. 23. 사회주의제국당(SRP) 위헌 판결에서 내린 다음과 같은 정의를 거의 그대로 또는 유사하게 수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란 모든 폭력적 지배와 자의적 지배를 배제하고 그때 그때의 다수의사에 따른 국민의 자기결정과 자유 및 평등에 기초한 법치국가적 통치 질서를 말한다. 이 질서의 기본적 원리에는 적어도 다음과 같은 것이 포함되어야 한다: 기본법에 구체화된 인권, 특히 생명권과 인격의 자유발현권의 존중, 국민주권, 권력분립, 정부의 책임성, 행정의 합법률성, 사법권의 독립, 복수정당제와 헌법상 야당 결성 및 활동권을 포함한 모든 정당의 기회균등.(김명재, 69쪽, 「헌법상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개념」, 전남대학교 법학연구소『법학논총』 法律行政論叢 第二十三輯 第一號 2003.06 67, )

서구 사회에서 일반 민중들에게 퍼진 로마 인본주의를 기준으로 한 서구 자연법 이성으로 국가를 설계하는 구상 속에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권력분립은 ‘각자의 생명’, ‘재산’, ‘종교’가 기준이 된다. 개인으로서 신앙적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단독자 개인이면서, 세상 적으로는 세상을 지배하는 계몽된 개인이다. 신앙인으로서 개인은 공교회 신조와 교회공동체 속에서 검증되고, 세상적으로 개인은 세상적인 규칙과 관습이 놓여진 시민 사회 공간에서 검증이 됐다.

헌법이 공직자의 종교다. 천도교의 向我設位 신앙 안에서는 헌법은 死文化가 된다. 자기에 주관적으로 가까우면 남들에겐 이해가 될 수 없다. 그렇기에 보편타당성을 상실하게 된다. 종교는 결코 국민의 권리를 제한하는 자격요건이 돼서는 안된다. 정치인은 종교를 초월한 헌법에 대한 신앙을 공표해야 한다.

한국 우파는 문석탄 시대에 헌법이 궤멸된 것에서 당황한다. 문석탄이 헌법을 지킨 숫자보다 안 지킨 숫자가 더 많다. 이것은 전적으로 좌파는 물론이고 우파 사회에서도 천도교 신앙으로 준법정신 마인드를, 국민들에게 장기간 망각시킨 원인이 크다. 천도교 우파 마인드에서는 憲法은 法을 담당하는 관료나 전문가의 주술도구다. 그러나, 그 마인드 자체가 문석탄의 헌법파괴의 도우미 관계였다. 천도교 신앙 마인드를 온 세상에 퍼뜨리면, 헌법은 자연스럽게 붕괴가 된다. 천도교인만의 세상으로 굽혀지며, 천도교나 신종교를 믿지 않는 예수를 主로 고백하는 기독교인의 권리가 장기간 이미 침해돼 왔으며, 그들이 꿈꾸는 권력이 확보되면 완전히 침해될 것이 논리적으로 예측된다.

권력분립은 인간의 惡에 빠질 수 있음에 대한 경계심으로, 스스로 자기들을 규제하는 마인드에서 시작한다. 그런데, 민주화(민족해방)정치는 김정일-김정은을 위해서 저항할 수 없도록 사회가 분해되는 것을 권력분립으로 오해했다. 자신들을 추종하는 양반 귀족에게 관직을 최대한 나눠주는 것을 권력 분립으로 오해했다. 있는 자리를 쪼개서 나누는 게 서양 법치의 권력분립으로 오해했다는 이야기다. 이것도 민주화(민족해방) 세력의 ‘통정한 허위표시’다.

헌법 4조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을 논한다. 그러나, 나타난 것은 ‘천도교’신앙 렌즈를 통해진 가치관에 입각한 통일을 말한다.

統一은 사회주의 씨족의 大同사회 구현과 같고, 분단해소는 천도교인끼리의 권력집중으로 이어진다. 남북관계로 남북대치 상황은 한미동맹파를 오랑캐 이미지 처리하고, 그들끼리의 남북한 사회주의 씨족간에서는 농민신앙 천도교 안에서의 후천개벽 담론의 地上仙境 이미지를 방출한다.

한국 민주화(민족해방)세력의 통일담론에서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구현하는 고민을 느낄 수 없다. 남북한 사회주의 씨족의 통합과 대동사회구현을 통한, 천도교 좌파만의 영구한 권력집중과 그에 기반한 자손만대를 이어갈(?) 관료주의를 지향함이 느껴진다. 즉, 19세기 노론의 세도독재라는 귀족과두정 독재에서 바로 이어진 것이다. 그들의 논리에서 ‘脫냉전’은 실제로 脫냉전이 아니라, 천도교 농민신앙안의 도교적 大同사회 구현 코드에 덧붙여진 ‘통정한 허위표시’였다.

남북한에 서로 다른 체제를 인정한다는 김일성 연방제(고려연방제)는 종북좌파 통일론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서로 다른 체제가 공동 번영한다는 것에만 강조점이 찍혀 있지, 남북한 사회주의 씨족의 ‘인종주의’를 超 논리와 前논리로 무제한 강조하는 파시즘 구현이라는 환경은 잘 설명돼 있지 않다. 북한의 남한 선전선동 삐라에서 이미 사회주의 씨족의 超논리와 前논리화는 조짐이 완연하다. 그런 의미로 남한의 단군학회가 북한 꼭두각시가 돼 왔다고 본다. 북한의 평양 단군릉 문제는 90년대는 웃어 넘겼지만 갈수록, 남북한 사회주의 씨족간의 파시즘적 인종주의 논리의 전 단계 설계로 보여진다. 그런 취지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단계’에선 적폐청산으로 우파 관료들이 감옥생활이지만, ‘인민 민주주의 혁명 단계’에서는 우파 국민 상당수에 ‘아우슈비츠’가 강제 선물될 것이 뻔하다.

아우슈비츠가 결국은 중국 정쟁과 조선시대 정쟁에서 존재한 정적 살해 문화와 연결된다. 서구 마르크스주의가 모택동을 옹호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아우슈비츠로 지네들이 고통 받는 것은 아픈데, 아우슈비츠로 중국 민중이 고통 받는 것은 상관없다고 본 것이다. 그런 식으로 反美블록 확장으로 박근혜 탄핵 정국에 세계교회협의회가 지원한 것이다.

‘화해 협력’이란 표현에서도 노무현 정권 때 칼 바르트의 ‘화해’론이 사용됐다는 역대급 ‘통정 허위표시’가 나왔다. 그리고, 문석탄 정권의 ‘평화’담론도 서구의 평화가 아니라, 천도교의 ‘평화’개념에 교횟말을 씌우는 ‘통정 허위 표시’였다. 좌파들은 공존·공생이란 말을 선호한다. 이것도 부족주의로 좌파 끼리만의 의미를 말한다. 이러한 단어에 서구 시민적 가치가 있다는 주장도, ‘통정 허위표시’다.

카. 좌파 지배체제를 해체하는 방법을 모르는 2019년 우파 사회의 치명적 문제점

권력은 소유가 아니다. 권력은 네트워크 속에 존재한다. 군사정권이 ‘국가권력’이었다면, 민주화(민족해방)권력은 ‘신종교 권력’이다. 중국문명에서는 권력은 소유였다. 교육받은 계층이 제한돼 있고, 그 인사를 독점하는 지위에 있으면 무조건 권력을 쥘 수 있었다. 그러나, 유튜브에 개방된 공간이 존재하는 상황에서는 유투버들이 연합된 지식/권력을 형성할 수 있다면, 국민들이 연합하는 공간에 어디든지 권력이 존재할 수 있다.

그람시는 ‘국가’와 ‘시민사회’의 이분법을 설정하고, ‘시민사회’ 속에서 좌익 혁명의 진지전을 주장했다. 알튀세르는 ‘국가’를 ‘억압적 국가장치’로 부르고 시민사회를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라 부르며,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로서 ‘종교기관’ , ‘교육기관’, ‘매스미디어’가 특정 세력에 장악되는 것에서 형성되는 권력의 변화를 계급투쟁이라고 부른다.

<국제예수사기단>과의 전쟁은 단순한 개인 신앙 문제가 아니다.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로서 모든 사회조직을 붕괴시키는 ‘신종교’적인 인간 결합양식을 창출하는 기존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해체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개신교 신자에게는 세계인권선언이 보호하는 ‘신앙의 자유’이자 ‘양심의 자유’의 구현으로 나타나지만,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지형도에서는 민족해방 계급주의 혁명세력의 대중권력 지배양식의 해체를 의미한다.

군사정권이 ‘국가’를 중심으로 경제발전과 국가안보를 중심으로 국가에 권력집중을 승인하는 문화를 만든다. 이에 기초하여 엘리트들은 국가에 줄서서 官에 의존한다. 이에 배제된 민주화 세력은 반공자유민주세력에 강한 적개감을 가졌다. 일반국민은 國家를 국민의 객관적 기본권을 보호하는 보편타당한 존재로 보았지만, 민주화(민족해방)세력은 국가주의가 왕권제 유교의 변종이라고 비판했다.

실생활에 가장 중요한 재원을 관리하는 공공기구로서 국가를 둘러싸고 관료들이 권력집중을 하고, 국민들이 이에 관리되는 양상을 보인다. 따라서, 권력집중을 당연시하는 ‘지식/권력’을 파괴하면서 군사정권의 지배 방식이 흔들리게 됐다. 70대 우파 할아버지들은 權力을 조선왕조시대의 문제로 박정희나 전두환의 소유물로 바라보는 경향이 강하다. 이런 문제는 한국의 현대정치를 분석하는데 무의미하다. 군사정권의 국가주의 체제의 양식을 존재하게 하는 재생산 기제로서 문화에 포위된 인간 결합에 권력이 있다고 봐야 한다.

군사정권은 國家를 향한 관료들의 네트워크와 국민의 네트워크로 존재한다. 국민은 국방의 의무와 대기업 중심의 경제발전을 당연시하게 생각했다. 반공체제 속에서 김대중은 몸 조심하며 활동했다.

민주화(민족해방) 권력은 에큐메니칼 기독교로 위장된 ‘新종교 권력’이다.

천도교는 天人合一 유교 양식위에 있다. 하늘을 대변하는 ‘제후/군주’와 ‘백성’이 하나로 합일된다는 이야기인데, 실제 의미는 신분노예제 사회를 정당화하는 것을 말한다. 백성 안에 ‘한울’이 있다는 이야기는, 백성이 스스로 君主와 귀족에 복종하는 것을 말한다. 侍天主나 人乃天 개념은 결과적으로 天의 개념을 독점하는 이들에 민중이 종속되는 양식을 말한다.

에큐메니칼 기독교로 위장된 新 종교 권력으로서 민주화(민족해방)세력에겐, ‘민주화’개념을 독점하는 차원이 천도교의 天의 해석권을 독점하는 것과 연결된다. (이는 마치 볼셰비키 공산당의 마르크스 레닌주의 해석을 독점한 스탈린의 권력과, 북한공산당의 김일성 어록의 해석권을 독점한 김정일 김정은 문제와 연결된다.) 민주화세력이 있는 공간은 서구 사회의 ‘공론장’ 같이 ‘특정한 계층을 날카롭게 배제하지 않는’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新종교가 특정 지역에 연고를 둔 유교의 개혁 운동에서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언제나 자신들과 연고를 달리하는 이들을 날카롭게 배제한다. 그리고는, 서구사회에 기독교외형을 빌려서 서구의 시민민주주의 결과로 나타난 결과로 소개하고, 그렇게 서구사회를 속인 결과를 국내로 수입하여 ‘20대 대학생’과 ‘30대 머리 나쁜 여자들’을 속이게 됐다.

군사정권은 권위주의 독재의 문제점을 만들기는 했지만, 국민 모두에게 法은 공평한 것이 정상이라는 신념을 국민에 심어주었다. 지금까지 자유민주체제로 존재하고 있는 힘은 모두 군사정권 국민교육에서 기인한다. 반면에, 민주화(민족해방)운동의 주축세력인 에큐메니칼 기독교 좌파로 변장한 ‘新종교세력’은 法을 특정한 귀족마피아의 주술도구로 바꾸어 버렸다. 이는 조선시대 양반 독재 시대에 ‘족보’가 권력 지향적 가치로 왜곡되는 것과 연결돼 해석된다. 물론, 이러한 문제는 유럽의 에큐메니칼 좌파를 속이고 나서 나온 결과를 한국에 수입하는 방식으로 20대 대학생과 머리가 빈 30대 여성들을 현혹하는 방식이 된다.

그들은 이전의 기존의 대한민국은 무조건적으로 나쁜 기억만 남게 한다. 새로운 세상에 대해서는 일제시대 사회주의 운동을 둘러싸고 형성된 道敎 이상향을 깔고 있다. 일반국민 영역은 愚民化와 욕망 중심으로 권력의 응집을 파괴한다. (군사정권은 인위적으로 사람의 결집을 파괴했다면, 문화를 통해서 저절로 쪼개지게 시도한다.) 이는 중국인들의 권력 책략과 연결된다. ‘권력’에서 패배한 씨족의 지배역사는 부정적인 것만 남기는 것이다. 그들이 반공시대에 느꼈던 피해 문제를 고스란히 보복하는 것이다. 세계인권선언의 ‘국교금지·종교중립·정교분리’는 철저하게 외면한다. 그들은 기독교의 종교중립을 주장하면서, 에큐메니칼 좌파로 변장한 新종교의 정교일치는 일관한다. 독일 에큐메니칼 좌파의 <정치신학>이라 주장하지만, 대한민국 국민에겐 性理學의 일제시대 변이형인 천도교의 지배가 실체였다. 물론, 이러한 문제는 유럽 에큐메니칼 좌파를 속이고 그 결과를 국내에 20대 대학생과 30대 골빈 여성들을 속이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英雄담론은 혈연 연고자들끼리 줄 서는 관료들과 수직 종속된 일반 국민 문화로 이어진다. 실제로 작동되는 것은 권력을 독점한 사회주의 지향적인 귀족의 씨족 연합집단의 고도의 편파성이다. 영웅의 민란을 성공시키기 위해서, 혈연 연고자들이 후원하는 네트워크는 수직적이며 종속적이다. 英雄이 마을 사람들에 恩人으로 자리해도, 성경의 예수 그리스도는 아니다. 몰트만의 교회론을 따른다고 보더라도 문제가 발생한다. <그리스도교적인 삼위일체론은 원래부터 보내시고 찾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열려 있는 삼위일체를 생각해야 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인간과 세계와 시대를 위해 열려 있는 하나님이다.(위르겐 몰트만, 이신건 역,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메시아적 교회론』, 대한기독교서회, 2017. 96-97쪽> 그리스도 자체가 중국문명 조상신(上帝神)의 아들이 아니다. 당연히, 삼위일체는 없어진다. 삼위일체 가운데 성부와 성자의 상호 내주(페리코레시스)도 불가능해진다. 무당신앙의 굿 신앙에서 뜨겁게 느끼는 脫魂忘我 체험은 기독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인데, 좌파 기독교세력은 그것을 유발시키고 페리코레시스 개념이 작동된 것이라고 믿으라는 것으로 나타난다.

『성경』이 나타내는 서구 자유세계의 인간 결합 양식은 하나님을 향해 연합하는 양식이다. 미국이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 In God We Trust)로 미국 연방이 결합됐다. 반면에, 『논어』와 『맹자』같은 중국인들의 인간 결합 양식은 ‘권력찬탈’에 의한 쿠데타가 벌어지지 못하는 신분노예제 사회와 씨족중심의 귀족 과두정 사회의 정당화를 한다. 중국문화의 인간결합양식은 ‘씨족 귀족’을 중심으로 수직적 체계로 존재한다. 1987년 이후의 한국정치의 문제점은 민주화(민족해방)세력이 반공군사정부를 ‘유교 자본주의’라고 비난하며 유교를 벗어나라고 주장하며 ‘한국적 민주주의’를 맹비판하면서, 자신들이 ‘토착화신학’을 통해서 다른 의미로 똑같은 짓(혹은 더 사악한 짓)을 한다는 점에 있다. 에큐메니칼 좌파로 위장한 新종교세력은 ‘서양철학 개념’의 대중화도 허락하지 않는다. 그 여파는 영화 『내부자들』처럼 어떤 세력이면 ‘-로 보인다’, 어떤 세력이면 ‘-로 보이지 않는다’는 ‘자의적 재판’을 남발하게 했다. (한국은 서양의 이성법이 매우 어렵게 비춰지는 사회다. 서양의 법철학을 읽어도 이해를 하지 못하니까, 서양법 법이론 도식에서 생성맥락을 떼어내서 도식적으로 적용하는 수준이 많다. 김평우 변호사가 최근에 모 유튜브에서 보여준 인식도 그러하고, 『탄핵 인사이드 아웃』에서 보여준 채명성 변호사의 인식도 그러하다. 오히려, 서양의 이성법 개념은 한국의 법학과 졸업생에서 기대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게 현실적이다. 사법시험에 붙어서 법조인으로 근무하려면 공부해야만 할 분량이 엄청나다. 그런 사람들에게 법이론의 형성맥락에 깔린 배경지식 이해까지는 불가능하다. 이는 법학교수 수준에서도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발견된다. 그런 상황에서 서양의 자연법 이성 기준으로 한다는 재판이 온전한 게 있을까? 한국의 지금 재판은 좌파에 편파적인 ‘자의적 재판’이 빈발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헌법재판소가 ‘코드 인사’로 특정한 파벌로 가득 채워졌다.) 물론, 에큐메니칼 좌파를 속이고 그 반응을 국내로 수입하여, <철부지 20대 대학생들>과 <골빈 30대 여성들>을 속이는 방식은 동일하다.

좌파들이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장악으로서 기독교 기구를 이용함을 통해서 유럽의 ‘에큐메니칼 좌파’를 포획하여 북한 천도교 청우당에 종속적으로 나아가고 있다. ‘매스미디어’ ‘교육기관’ ‘종교기관’ ‘국가기관’을 통해서 나타나는 특정한 상징(현재로서는 新종교의 ‘후천개벽’과 ‘해원상생’ 종말론이 가장 많다)의 반복적 사용에 기인한 국민대중의 포획과, 여기에 근거한 ‘권력’이 가장 크다.

민중신학이 ‘천도교’에 교횟말을 씌워서 성경의 예수를 믿지 않았다는 사실을 국제화하여 국제예수사기단 문제를 전면화하고, ‘세계인권선언’에 기초한 종교의 자유라는 인권조문에 근거하여 좌파통일부가 ‘천도교 종말론’으로 ‘대중세뇌’를 못하게 하는 것은, 공산혁명을 막는 자유민주주의 수호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70대 할아버지들의 한물 간 이론에서는 ‘권력’은 조선시대처럼 ‘소유’지만, 지금에 있어서 권력은 ‘국민 대중’속에서 형성된다고 본다. 그러한 국민대중 권력을 만드는 특정한 상징영역에서 좌경화로 맺어지는 상징조작을 파괴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에서, 털끝만큼도 하지 않고 자한당 ‘황교안’대표만 비난하면 어쩌란 말인가?)

한국은 민법이 발달되지 못한 부족사회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대한민국은 부족사회로 민간의 소통이 형성되지 못한 채, 국가계약이 형성됐다. 헌법을 통한 국가계약은 1948년부터인데, 민법은 1958년에 제정돼서 1960년에야 공포됐다. 한국 사회에서는 부족사회 영향으로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하는 가치관이 이면에 존재한다. 이런 부족사회 문화에서는 시장 자유주의는 존재할 수 없다.

한국은 民法이 있기는 있으나 한국 사회에서는 재판을 좋아하면 패가망신되는 사회다. 强者로 기울어진 민법 공간에서 민사재판은 하는 게 무의미할 지경이다. 그래서, 國家에 ‘주관적 공권’으로서 헌법소원을 청구해도 ‘좌파 귀족 신분’이 아닌 이들에게는 달라지는 게 없다. 한국 좌파 세력은 東西를 아울러 가면서, 민간 영역에서 좌파 귀족 중심의 독점체제를 유지한다. 이명박·박근혜 정권 때 이러한 상황을 고치지 못한 이유가 있다. 바로, 우파의 70대 노인 논객들의 한계 때문이다.

東道西器는 중국문명 맥락에서는 긍정적으로 판단된다. 아시아적인 삶의 윤리를 지키면서 서구를 끌어안으면 슬기롭게 조화를 구현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서구 문화의 외형을 액면가로 믿은 사람은 어떻게 딜까? 실제로 믿는 것은 ‘천도교 신앙’이면서 ‘유럽 기독교 좌파’의 외관을 띄거나, ‘천도교 신앙’을 믿으면서 ‘퀘이커’ 신앙의 외관을 띠는 일은 ‘통정한 허위표시’ 문제다. 연고 관계자들에개만 진솔하고, 그 밖의 영역은 속여도 된다는 중국문명을 기반으로 성숙된 시장 자유주의는 구현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에서는 ‘조화’나 ‘균형’의 문제로 ‘신뢰의 이중매매’가 빈발한다. 문석탄이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다고 개입하거나, 미국과 북한 사이에 균형을 잡는다고 개입한다. 이는 모두 中華主義의 연장편으로 원래의 당사자가 어디에 더 가까운가를 바라보면 판단할 수 있다. 시장경제는 상호간의 신뢰를 지키는 속에 존재한다. 그런데, 新종교인들의 마인드에서는 특정한 씨족의 이익을 위해서, 타 씨족에 피해를 전가하는 것을 정당화하고 있다.

그래서 형성되는 것은 ‘좌파’는 권리만 누리고 ‘우파’는 의무만 지는 편파적 불공정상황이 나타난다. 美中관계에서 문석탄정권의 모습과 美北관계에서의 모습, 그리고 트럼프와 화웨이 사이에서 대기업이 가지는 모습은 미국 트럼프에게 상호 신뢰를 지키는 서구의 로마법 기준으로 신뢰를 어기는 불공정으로 인식할 수 있다. 한국 우익 국민을 속여 먹듯이, 美國에 쭉 손해를 감수하라는 입장을 취해 왔던 것이다.

㉮ <국제예수사기단>에 대한 문제제기 없이는, 포퓰리즘 문제를 결코 해결할 수 없다.

제조업의 기반인 근로 문화는 청교도 문화를 기반으로 한다. 반면에, 천도교를 기독교로 부르는 국제예수사기 상황에서는 정반대의 상황으로 국민을 길들이게 된다. 천도교 안에 있는 道敎문화는 문석탄정권에서 빚어지는 각종 포퓰리즘 정치의 배경문화다. 文化를 도교적 잣대로 길들이고서 정치인만이 反포퓰리즘을 논할 수 없다. 이러한 문화지형도를 고치는 것이, ‘포퓰리즘 문화’해결의 첩경이다.

‘문화 지형도’에 있어서 ‘세금살포’를 기반으로 하는 부패한 정치인에 부패했다고 손가락질하기는커녕, 뭔가를 받아먹기 바쁜 부패한 국민성 문화로 짜여져 있다. 민사재판으로는 도저히 이 문제를 바꿀 수 없다. <국제예수사기단> 문제로 국제 문제화하는 방법 뿐이다.

㉯ <국제예수사기단>에 대한 문제제기 없이는, 좌파 척결의 자유 민주 사회 버전을 할 수 없다.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문서로서 세계교회협의회가 기독교인의 문서로 인정한 대부분에서 성경의 ‘기독교 신앙’을 느낄 수 없다. 교횟말로 덮어쓴 천도교신앙이다. 이번에 몰트만의 ‘미완의 종교개혁’이란 한국 강연에서 드러났듯이, 反美의 쓸모로 바라보면서 한국인의 기독교신앙의 현실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게 나타났다. 몰트만은 ‘독일사회’를 전제로 쓰여진 자신의 신학서를 한글로 번역해서 ‘대한기독교서회’에서 몰트만 선집으로 출간하는 것은, 사실은 그런 신학이 한국에는 무관할 것이라는 게 진심(‘미완의 종교개혁’이란 한국 강연)이라는 입장에서 보면, ‘예수 사기’의 혐의가 강하게 나타난다.

외국 기독교인들이 신학 비판의 공론장의 후원을 하는 상황이 빚어진다면, 1980년대 민주화운동에 참여힌 기독교문서의 상당부분은 ‘한국교회사’가 아니라 ‘천도교 역사’에 들어가야 맞다. 물론, 한국에 개신교가 도입된 이후에 종교혼합 단계에서 그런 비슷한 신앙이 나타나는 일도 있다. <기독교인가/기독교가 아닌가>의 기준은 개인의 내심의 진정한 신앙이 ‘예수 그리스도’를 지향하느냐의 문제로 판단해야 할 것이다. 민주화운동사의 상당 부분에는 핵심주체들이 의도적으로 ‘천도교’와의 종교혼합을 통해서, 일제시대 사회주의(민족해방)운동의 전통을 복원하려는 의식적 노력이 확인된다. ‘신쩐지’가 정통교회를 접수하는 방식으로, ‘천도교’인이 한국의 기독교기구를 접수하여 ‘천도교’ 방향으로 뒤엎으려는 시도로 보여진다. ‘신앙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를 추구하는 기독교인들에게, 이 문제는 중요한 문제다.

㉰ <국제 예수 사기단>에 대한 문제제기 없이는, ‘좌파 우위’ 사회를 고칠 수 없다.

한국사회는 法治가 붕괴되고 있다. 문석탄 정권의 ‘자의적 정치’가 벌어지고 있다. 자의적 정치는 중국 문명의 ‘씨족제 귀족사회’를 재생산하는 천도교 문화가 기독교처럼 위장돼 사용되고 있기 떄문이다. 중국문명의 ‘씨족제 귀족사회’에서는 그 귀족의 존재 자체가 法이다. 좌파들은 중국문명을 선호한다. ‘씨족제 귀족사회’에서의 귀족중심의 ‘자의 정치’를 선호한다.

천도교를 기독교라 부르는 세력들은 위정척사파 중국 문명으로서 反美이며 ‘해방신학’과는 무관하다. 그러나, 그렇게 자신들을 포장해 왔다. 이들은 反美라면 뭐든지 괜찮다고 받아주는 세계교회협의회 때문에 이러한 종교사기가 퍼진 것이다. 군사정권 때 보수 개신교가 우대를 받았다. 이점을 종교의 자유의 침해를 주장하더니, 자신들의 ‘천도교’를 기독교로 부르는 신앙을 도배하고 있다.

20-40세대 우파가 분통 터뜨리는 문석탄 정권의 ‘자의적 정치’는 중국 문명의 부족 神을 강조하는 문화속의 상징 구조 속에 존재한다. 이에 대한 총체적 문제제기 없이는 좌파 우위 사회를 고칠 수 없다.

그리고, 군사정권이 공권력으로 국민을 인위적으로 분리하는 것을 깨뜨리는 민주화 집단의 횡적 연합에 무너졌듯이, 민주화 권력도 횡적 연합의 극대화에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군사정권이 國家를 중심으로 권력을 장악한 계층에 지식 묘사가 편중됨을 드러냈다면, 민주화(민족해방)권력은 신종교 제사장 권력으로 권력을 장악한 계층에 편중되게 드러나는 것을 주장하고 일반국민의 실생활의 피해를 주장하여, 권력과 대중을 분리시키는 전략을 써야 한다. 좌파정치의 국민에 대한 ‘사회주의’ 지향적인 세뇌가 사회주의 전문학술서의 실현으로 나타나지 않고, 민중들이 가진 무당신앙에 포함된 老子的 이상향 속에서 유럽의 사회주의 개념이 덧 씌워져서 나타나고 있다.

Divide et impera(나누어라 그리고 통치하라) 이것은 옛날부터 잘 알려진 통치방법이다. 자유가 주권을 뜻하는 한 우리는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있기 위하여 그것을 나누고 분리시키며 개체화시키고 구분해야 한다. 그러나 자유가 사귐을 뜻하는 경우, 우리는 모든 분리된 사물의 결합을 경험하게 된다. 인간이 다시 하나가 될 때, 즉 서로 서로 하나가 되고 자연과 하나가 되며, 하나님과 하나가 될 때 인간으로부터 인간의 소외, 자연과 인간 사회의 분리, 영혼과 육체의 분열, 끝으로 종교적 불안이 극복되며 해방이 경험된다. 권력의 투쟁과 계급투쟁에 있어서 자유는 단지 주권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사귐으로서의 자유는 이러한 권력투쟁과 계급투쟁의 역사에 대항하는 운동을 뜻한다. (위르겐 몰트만, 김균진 역,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삼위일체론적 신론을 위하여』, 대한기독교서회, 2017., 336쪽)

한국의 좌파정치는 新종교의 혈연 연고주의 세력에 대해서는 위르겐 몰트만으로 대표되는 에큐메니칼 유럽 좌파 정치의 후원을 받아서 분열 정치로서 서구 세계의 법의 통치를 배제한다. 박근혜 정부의 ‘블랙리스트’ 사건에 대한 유죄 입장이 그 예일 것이다. 그러나, 문석탄 정권의 훨씬 더 체계적인 권력 안보주의적인 도구정치에 대해서는 다른 평가를 해 버린다. 교회 공동체를 생각하는 성경의 계시(행 2:44-46, 갈 3:28 이하)는 한국 좌파정치에선 냉소적인 상황에 처하게 된다.

몰트만이 이미 알고 있듯이 한국에 유대인과 유대교 문명의 힘이 거의 없다. 그리고, 한국은 중국문명의 힘이 강했고, 마을마다 전혀 다른 ‘부족 神’이 존재하는 민간신앙이 있다. 또, 로마 인본주의에 기초된 서양철학 문화도 약하다. 한국 땅에 복음이 처음 전도된 것도 미국 선교사 중심으로 서방 자유주의 세계의 복음이 전해졌다. <내재적 삼위일체론은 찬미의 총괄 개념인 점에서 종말론에 속한다. 경륜적 삼위일체는 구원의 역사와 경험이 완성될 때 내재적 삼위일체로 완성된다. 모든 것이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이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될 그때에 경륜적 삼위일체는 내재적 삼위일체로 지양된다>(위르겐 몰트만, 김균진 역,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삼위일체론적 신론을 위하여』, 대한기독교서회, 2017., 256쪽)>는 삼위일체론의 종말론적 일치는 한국 사회에서는 유대 인본주의가 사회적 힘이 존재해야 가능하다. 그러나 몰트만은 한국에 유대인본주의의 힘이 약한 것을 알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결론이 가능하다. 위르겐 몰트만은 한국 땅에서 동방교회 에큐메니칼 좌파식의 기독교신앙이 실현된다는 기대가 없이 反美의 확장으로만 이해했고, 한국의 민중신학 세력은 중국문명 ‘위정척사’식의 反美를 하기 위해서 동방교회 에큐메니칼 좌파를 정치적 후원 세력으로 이용하려 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몰트만은 <라틴 아메리카에서 생겨난 혁명 신학은 억압과 착취를 당하는 민중해방을 위해 범 세계적인 계급투쟁을 전개하는 사회주의를 위해> <계급지배를 통한 경제적 착취의 제거로부터 정치적 억압과 독재의 극복, 문화적 인종주의의 철폐를 포함>하는 내용에 대하여, 신학적으로 <하나님, 인간, 자연의 친교를 위한 해방>이라고 정치적 핑계를 붙이는 수준이었다는 이야기다.

천도교의 후천개벽 종말론은 삼위일체 구원 체험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특히, 道敎의 同姓村에서 형성되는 그러한 미래적인 신선들의 세상은, 성경의 하나님의 영에 기반된 ‘창조론’으로 설명이 불가능하다. 천도교 후천개벽 종말론의 이끄는 자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아니라 결국은 중국 문명의 ‘조상 神’이다. 그 어떠한 이름을 붙이더라도 결국 神의 실체는 그러하다. 몰트만은 서방사회의 통치법을 비난하며 동로마 사회의 통치법을 우월화한다. 그러나, 중국 문명의 ‘조상 神’숭배가 말하는 가산제 연고주의 정치 속에서 빚어지는 통치법은 과연 알고 하는 소리일까? 대한기독교서회에서 나온 몰트만 저작집 어디에도 중국문명에 대한 섬세한 탐구를 확인할 수 없다.

<국제 예수 사기단> 문제는 민주화 권력 전체를 무너뜨릴 큰 이슈다. 동시에 자유민주체제의 왜곡된 모습을 전부 되살릴 수 있는 주제다.

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2019년 좌파의 대한민국 지배 상태는 ‘비정상’이다. 이를 극복은 어떻게 할 것인가?

첫 번째, 군사정권 복귀를 통한 권위주의적 척결이다. 이는 한국 사회의 저학력 노인층에서의 꿈가 희망이다. 그러나, 실현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본다.

두 번째, 깨끗하게 좌파청산을 포기하고 좌파의 노예 생활을 각오하는 것이다.

세 번째, 좌파의 위법성을 모두 증명하고, 그러한 객간적 토대를 통해서 좌파를 해체하는 것이다.

군사정권 체제의 모든 위법성은 ‘고문’으로 요약된다.

민주화(민족해방)체제의 모든 위법성은 ‘코드정치’(통정허위표시)로 요약된다.

이는 천도교로 추정되는 운동권 세력에 포진된 동일한 씨족 혈연 세력들이 고도로 집단적인 전략전술적 합의를 통하여, 다른 일반국민을 현혹하여 국민들에게 ‘진의 아닌 의사표시’를 끌어내는 과정(국민들을 속이는 과정)이 계속됐다는 이야기다. 이는 지금도 ‘통일부’나 각종 좌파 정치에서 방대한 분량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 불공정한 사기행위로 얻어진 권력이며 국민의 이성적 판단에 기초된 권력 변화가 아니었다.

이를 시정하려는 방법은 원칙적으로는 민사재판이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가능하지만 한국에서는 그 어떤 누구도 ‘패가망신’하지 않을 수 없다. 재판비용을 견딜 수 없을뿐더러, 재판과정에서 상식적인 이성으로 나온다는 보장을 할 수 없다.

정권 교체를 통해서 우파정권이 된다고 해도 ‘국가에 헌법소원’을 한다고 해도, 국가공무원은 이를 해결하려는 적극적인 의지가 없을 것이다. 이미, 박근혜 정권에서 ‘리스트’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범죄행위로 구속되는 일이 벌어졌다.

한국 좌파 정치는

㉮ 말하는 내용은 대부분 ‘천도교’, ‘원불교’, ‘증산교’ 교리에 입각하여 (합리적 의심으로 아직도 反유신시대처럼 북한 천도교 청우당의 지휘를 받고 있다는 생각이 가능하다)

㉯ 북한의 이익을 위하여

㉰ 철부지 20대와 골빈 30대 여성을 동원하고, 그런 의도로 그럴싸 한 서구 정치철학용어를 덧 씌워서,

㉱ 세계교회협의회 기구를 이용하여 에큐메니칼 좌파 형식으로 나타난다. 문석탄은 무슨 일만 생기면 ‘교황’을 이용하려 했고 ‘몰트만’을 이용하려 했고, 세계교회협의회 산하의 국가를 이용한다. 문석탄은 지금도 북유럽에 가려 한다. 합리적 의심으로 ‘몰트만’에 연결된 ‘유럽의 에큐메니칼 좌파’의 중개로 이어진 북한의 이익을 위한 행위로 추정할 수 있다.

결국, 한국 민주화운동사에 걸쳐진 대부분의 문서가 에큐메니칼 기독교 좌파라는 ‘허위의 외관’을 입은 ‘위장 천도교’인이라는 국제적 증명이 필요해졌다고 본다. 몰트만은 한국에서 이를 뒤늦게 발견한 듯, 개신교의 기원인 ‘루터’를 비판하며 이를 적법화해주려는 것으로 읽혀지는 ‘미완의 종교개혁’이라는 강연을 했으나, 그 순간 ‘기독교’가 아니라 ‘몰트만교’로서 성격이 전환되는 것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 이는 세계교회협의회의 남북한 한반도 간섭에 있어서 정치신학의 이름을 빈 ‘선교’란 이름으로 해석될 수 없는, 그냥 ‘생짜’의 불법행위 문제로 그들을 남북한 문제에서 떼어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 우파 국민의 의도와는 전혀 무관한 좌파 국민들만의 의사를 반영하는 남북 문제 발생은 문석탄이 세계교회협의회를 업고서, 트럼프를 설득하는 구조로 나타난다. 세계교회협의회의 남한 간섭 역사의 그 뿌리에 <국제예수사기단>에 속할 불법행위 문제를 전면화하는 것이다. 이는 <神學觀의 차이>문제가 아니라, 그야말로 <국제예수사기단>의 문제다.

동구권 지향적으로 세계질서를 재편하려는 문제(이 문제와 ‘중국’의 세계패권화가 밀접하다)와, 북한의 이익을 위하여 재편하려는 문제 가운데에서, 예수 그리스도 신앙을 완전히 팽개친 ‘신앙적 패륜행위’로서 자신들의 신앙 기준도 위반하는 것이 드러났다.

㉯ 과거부터 지금까지 민주화운동사에 걸쳐진 상당수의 문서의 ‘효력’을 무효로 만드는 것이다.

-가장 근본이 되는 부분이 ‘무효’가 되면, 연쇄적으로 좌파들의 영역은 국내재판으로도 연쇄적으로 ‘무효’화운동이 가능할 것이다.

㉰ 전 세계에 좌파 우위로만 알려진 한국현대사 문제를 바로잡는 것이다.

-이것이 수반되지 않는 국내 문제로는 좌편향 대한민국의 수정은 어렵다.

조갑제씨를 중심으로 하는 우파 노인 논객은 이러한 문제에 전혀 무기력하고, 이를 전혀 고치지 않은 상태로 70대 우파 노인들의 추억놀음으로 빠지는 경향이 있다.

㉱ ‘통정허위표시’로서 위장신앙인들의 존재는, 한국 기독교 지식인 층에서의 의도적 침묵과 한국 일반 성도 층에서의 신앙의 열정이 식은 문제와 밀접하다. 이는 세계 11위의 경제소득이 신앙열정의 순위로 착각하는 요한계시록의 ‘라오디게아’ 교회 문제와 연결된다.

㉲ 한국 사회의 모든 포퓰리즘 정치는 ‘천도교’에 포함된 老子의 이상향 상징 이미지가 국제사회에 에큐메니칼 좌파 문제로 소개되는 가운데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게 붕괴된다.

조갑제기자를 중심으로 하는 70대 우파 논객들은 포퓰리즘은 지도자만 교체가 되면 한꺼번에 교쳐된다고 본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중국문명 유교 사회가 가져다주는 착각이다. 문화구조를 교체해야 한다.

한국 현대사에서 국민의 통합기제는

㉮ 국가주의 시대의 국가중심의 공교육이 있었다. 국가의 행정이 먹힐 수 있을 정도까지만의 국민의 통합에 필요한 지식을 전파한다. (통치자 ‘1인’을 미화하는 이데올로기의 확산이란 비판이 가능하다)

- 국민들에게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他者지향적인 감정이 있었지만, 대다수는 그렇지 않았다. 사회가 발전되지 못해서 지식문화가 모자랐기 때문이다.

㉯ 민주화 좌우연합전선(민족해방통일전선)의 바탕에 해당될 귀족 독재 시대의 부족연합 두레 방식이 있다. 이는 부족연합에 해당될 제일 상층에 차지한 ‘노인 지식인’의 선택을 아랫 서열에서 복면복창하는 것을 말한다. (이 부분은 ‘1파벌’을 미화하는 이데올로기의 확산이란 비판이 정당하다. 다수 국민에게는 현재도 군사정권과 다름 없는 독재로 비춰지는 가장 큰 이유다. 자유한국당은 도대체 ‘좌파 독재’라고 kf하고서는 증명을 못한다. 이기이기. 문제다.)

- 대한민국의 모든 사회에서는 他者지향적인 인문학책 정보로 넘쳐나지만, 대다수 국민들에게는 그런 정보가 적용되지 않았다. 그것은 좌파 세력이 권력을 잡게 우파 세력의 응집을 떨어뜨리는 도구로만 사용됐기 때문이다.

㉰ 1987년 6월 10일 당시의 ‘보수 민주화’세력이 한다고 하되 가지 않은 길이 있다.

군사정권에 의해서 왜곡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가 아니라, 원래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구현하자고 ‘보수 민주화세력’이 주장했었다.

군사정권에 의해 왜곡되지 않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국가관은 ‘계약주의’인식이다. 자유세계의 국가는 서방 사회의 교황지배체제의 국가관을 가지고 있다.

군사정권 때 국민의 사고 속에는 ‘국가’가 제일 위에 있다.

좌파 정권 시대의 국민의 사고 속에는 ‘지도자정치인’이 제일 위에 있다. 그런 의미로 문석탄이 ‘자의적 정치’를 해도, 무엇을 해도 다 되게 됐다. (이는 조갑제 기자가 말하는 이승만, 박정희를 인물 우상으로 높이 띄우는 국민 기억 양식에서 더욱 확정적으로 나타난다) 중국식 봉건제도에서 중국 군주의 자의적 정치를 국민에게 가짜 동의를 얻도록, 민족신화를 사용하는 일이 빈발한다. 이런 일을 하면서도 서구 사회에는 反파시즘을 지향한 것처럼 선전하고 있다.

‘좌우를 아울러’, ‘동서를 아울러’, 그런 표현과, ‘참나/얼나’ 표현이 초래하는 언어 산출 효과는 중국식 부족사회에서의 ‘귀족’과 ‘백성’관계로 국민을 길들이는 것이다. 道敎로 되더라도 士계급이 전 우주를 통괄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무당에서 바뀐 유교에서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참나/얼나’는 그러한 유교양반계급의 씨족 마을에 속한 자기인식을 강화하는 것이다.

중국 신앙에 있어서 ‘大同신앙’ 속으로 목가적 사회를 상상하더라도, 이러한 신앙이 나타내는 현실은 전혀 목가적이지 않았다. 일제 식민지 사회에서 1922년부터 1945년 사이에는 소련 사회주의 세력만이 항일 세력에 자금을 지원했다. 항일운동 내부는 유교가 변해서 생겨난 新종교를 바탕으로 사회주의 세력으로 연결됐다. 일제시대 사회주의 운동에 있어서도 ‘統一’이 주제로 자주 올랐다. 일제 공산주의 운동사에 있어서 엄청난 숫자의 파벌로 인해 빚어지는 내부 고통 문제를 극복하자는 상상으로 나타난 문제이다. 해방공간의 ‘남로당’(공산당) 문제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났으며, 이승만과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한 김구 선생 세력이 북한 공산당과 남북연석회의를 치루면서도 나타난 것은 ‘統一’ 담론이었다. 그것은 유교의 ‘治亂’사관에 있어서 治世의 성군을 그리는 담론이 미래를 향해서, 적극적으로 나타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그것은 실제의 ‘공동체’의 시민사회의 통일이 아니라, 민족 구성원을 다른 세상으로 이끄는 ‘봉건 전제 군주(영웅)’이 도래하면서 빚어지는 모습이다. 소련 공산당은 ‘조선의 스탈린’을 세우려는 목적으로 북한정권에 김일성을 세웠다. 김일성에 피해 당하고 월남한 실향민들에게는 북한주민은 소련 꼭두각시로 비춰졌지만, 좌파들이 기억하는 과거는 소련을 ‘중국 명나라’를 대체한 유교 의리론으로서 종속을 정당화하며 그것을 따르지 않은 한미동맹파 우파를 ‘인민재판’과 같은 정치재판으로 학살한 것을 당연시하고 있다.

몰트만의 저작집은 ‘군사정권’의 反共 권위주의와 그에 복종하는 일반국민만 나왔지, 도대체 왜 그러한 反共 권위주의 정권이 나왔는지를 모르고 있다. 조선후기는 양반계급이 권력을 장악하면 적대계층을 ‘아우슈비츠’로 만들었다. 독일인들은 2차 대전 말기의 ‘아우슈비츠’ 사건만을 문제 삼았지만, 조선 후기 이후의 한반도는 200년 이상 벌어지는 ‘아우슈비츠’ 상황이 나타났다.

이러한 문화 안에서는 국민의 기본권을 중시하는 서양의 법치주의를 향한 국민의 인식을 이끄는 게 불가능해진다.

국민에게 “대한민국 계약”인식이 제일 위에 있게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 국민들에겐 중국 유교에서 빚어지는 ‘국법을 어기겠느냐’ 하는 식의 법치인식이 있다. 『論語』와 『孟子』는 귀족 중심의 신분노예제가 禮治로 나타난다. 법치는 그러한 사회신분제를 유지하는 도구가 된다.

서양의 자유세계의 정치질서는 ‘종교의 자유’가 가장 심층에 차지한다. ‘개신교 신앙’을 통해서 인간의 개인의 존엄성을 확인하고, 그 연장선상에서 개인의 자유권을 이해하였다. 서양의 자유주의는 무제한적 자유로운 것 같지만, 서로 다른 시민주체가 더불어 사는 삶으로서 ‘시민윤리’ 구현 속에서 작동된다.

한국의 정치질서가 크게 무너지는 것은, 바로 ‘천도교’인이 기독교기구를 위장개신교인으로 존재하여, 세계기독교기구를 이용하여 한국 개신교인을 등쳐먹는 상황에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 대한민국을 공산화하려니 좌파 귀족 권력이 권력독점해야 겠고

㉯ 그것을 세계교회협의회를 통해서 이미지 세탁하고

㉰ 국민을 우민화시키고 귀족계급을 매수해서 문제가 없는 것처럼 비춰지게 한다.

㉱ 이러한 문화는 ‘영웅’ (씨족장 이미지)상징의 한국문화 지배 현상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동시에 국민상호간에 보편이성으로서 理性法의 붕괴를 말한다. ‘자의정치’에 순응하는 무의식 만들기로 나타났다.

최근에 황교안 대표가 사찰을 찾았을 때, 참석만 하고 불교의 예식을 하지 않았다. 이에 성공회 신부가 황교안 대표를 비판했다. 불교 신자가 자신도 교회에 가서 찬송가 부르고 싶지 않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상식적 반응이다. 성공회 신부가 주장하는 것은 ‘천도교인’의 도덕으로, 지도자에게 모든 종교를 건사해야 하는 ‘중국 군주’로서 도덕이다. (바티칸 성당도 등쳐먹는 데 성공했나?)

한국 사회에서 ‘천도교’인이 기독교 교횟말을 덧 씌우는 양상이 지배하게 되자 <정치/경제/사회/문화/국가안보/한미동맹…>등 모든 질서가 망가지고 있다. 국제 예수 사기단과 전쟁을 통해서,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서 예수 그리스도 신앙의 중심을 분명히 하는 것(서방교회)이거나, 혹은 태초에 삼위가 있다는 신앙 관점(동방교회)이라 하더라도 십자가 부활신앙 중심의 예수 그리스도 입장을 분명히 하는 것이, 한국 사회에 비틀려져 버린 사회 문제를 제 자리에 있게 할 것이다.

‘위장 개신교인들에게는 ‘조직신학’(교의학)은 어떤 행위를 포장하는 명분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문화가 일반화되면 ‘귀족중심’의 자의적인 정치가 빈발한다. 한국의 우파 커뮤니티인 ‘일간베스트 저장소’는 좌편향 위주로 편파적인 사법행정에 대한 불만의 성토가 연일 이어진다. 그 모든 원인의 심층에는 ‘천도교인’의 한국기독교를 등쳐먹고 세계교회협의회와 연합한 국제예수사기단의 문제가 자리한다. 신앙대로 살아야 진정한 기독교인이다. 하나님의 명예가 곧 기독교인의 명예다.

(1) 국제 예수 사기단 문제에 있어서 국제기구가 ‘의도적’ 혹은 ‘판단착오’로 한국 국민(기독교인)의 예수 그리스도를 성경대로 믿을 자유를 침해하고 있어서, 국제기구 제소감이 된다고 본다. 세계인권선언은 ‘국교금지-정교분리-종교중립’을 구현하고 있고, 기독교로 위장한 천도교인들은 그 천도교 교리 본성상 ‘정교일치’의 의지를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 중국사에서 ‘부족전쟁’은 권력을 차지한 이들 씨족의 종교를 다른 국민에게 강제로 믿게 하는 것을 깔고 있다. 국제기구에 제소할 수 있고, 해외 한인동포가 자신들이 사는 국가의 법정에(한국 사법부는 그들 세력이 차지하고 있기에 신뢰할 수 없음) 제소할 수 있다.

(2) 국제 예수 사기단의 문제는 한국 국민들에게 진정한 의미에서의 ‘종교간 문제’ 해결의 문제를 제기한다.

1922-1945년 사이에 천도교가 조선공산당 운동을 후원하는 통일전선 운동의 역할을 했다. 그리고, 그 여파가 해방공간에서도 계속되자 이승만 대통령은 ‘천도교 청우당’을 불법화했다. 그러자, 그들이 기독교기구를 이용하여 일제 강점기와 해방공간에 했던 ‘민족해방 통일전선’의 조직 구현을 한 것이다.

反共 권위주의 정권 시대처럼 ‘천도교’를 규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종교중립’은 서양의 理性法이 통하는 사회를 말한다. 종교중립 자체가 ‘천도교신앙’이 도배가 되는 상황이 아니다.

(3) 국제 예수 사기단 척결 문제는 ‘한국’ 사회의 좌파 부족사회 중심으로 편파적으로 휘어져 버린 사법부의 원상회복을 의미한다.

(4) 국제 예수 사기단 척결 문제는 한국의 왜곡된 시장경제의 회복을 의미한다.

(5) 국제 예수 사기단 척결 문제는 한국 사회에서 중국 문화 중심으로 휘어지게 하는 구조를 깨뜨리고, 美中 무역 전쟁 중에서 美國이 억울한 부분을 진지하게 이해할 수 있는 文化의 형성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6) 국제 예수 사기단 척결 문제는 한국 사회에서 각종 포퓰리즘 문제로 합리성을 현저하게 깨뜨려 버린 좌파 씨족만을 겨냥한 정치의 해체를 가져온다.

(7) 국제 예수 사기단 척결 문제는 한국 사회에서 좌파 부족들만을 배려하고, 한미동맹파 우파를 적대시하는 모든 문화에 대한 불법화를 가져온다.

(8) 국제 예수 사기단 척결 문제는 좌파 정부의 ‘고려연방제’ 과정을 통하여 기존의 존재하는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위법하게 무너뜨리는 모든 시도를 불법화한다.

(9) 국제 예수 사기단 척결 문제는 한국의 잘못된 지방자치 문제를 불법화한다. 더불어, 바른 한국 사회의 정치조직 문제를 공론화하게 된다.

한국사회는 반공시대에 반공 귀족의 의도 중심으로 이분법 문화가 홍수를 이루었고, 이제는 좌파 귀족 중심으로 이분법 문화가 홍수를 이루었다. 기독교 신앙에서 기인하는 ‘화해’ 문화가 아직도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하기 때문이다. 권력을 가진 귀족은 자의적으로 권력을 오래가지고 싶어했고, 그에 기반하여 자신들을 지지하는 군중의 상대파벌에 대한 낯가림 문제를 이용했다.

(10) 국제 예수 사기단 척결문제는, 어떤 귀족이 권력을 쥐면, 반대세력이 영원히 도전하지 못하도록 짓밟아 놓는 문제의 반복된 문제를 합리적으로 극복하게 한다.

이 모든 것이 세계교회협의회의 잘못된 한국 정치 간섭 때문이다. 세계교회협의회가 ‘칼 바르트’의 『교회교의학』이거나, 본회퍼의 『저항과 복종(옥중서간)』이전의 저작 수준으로 영미 사회의 장로교파가 거부감이 없는 수준으로만 이해했다면 모르겠는데, 철저하게 反美권력 확장을 우선시하고 한국인들의 예수 그리스도 신앙에 무관심 문제가 있다. (이런 기구가 세계교회기구 대표인가?)

美國의 중앙정부는 ‘공화당’과 ‘민중당’ 양 세력 모두의 역사를 공평하게 중앙정부가 시민교육으로 가르친다. 반면에, 한국은 반공시대는 좌파역사가 왜곡됐고, 지금은 우파 역사가 왜곡됐다.

(11) 국제 예수 사기단 척결 문제는, 勝者 중심의 잘못된 한국사교육 문제를 합리적으로 극복하게 한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사건은, 화해 사건 속에서 성취된 계약이다. 화해 사역 속에서 성취된 계약을 그리스도교적 희망의 내용으로 중심으로 표시한다. 이는 그리스도교 복음의 핵심이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과 함께 하신다.’ (사 7:14, 8:8, 10. 마 1:21.)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행동 속에 하나님이 계시다. 하나의 사건으로서, 하나님은 자신 안에, 세상 위에, 세상 속에,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존재하신다.

한국 사회에서는 우파는 ‘의무’만을 누리고 좌파는 ‘권리’만을 지는 일이 빈발한다. 우파가 기독교 도덕을 복종하더라도, 좌파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언젠가는 배제해야 하며 중국적 질서를 우위에 놓고 보면 그렇게 된다. 이를 세계교회협의회가 뒤를 받쳐주니까 한국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가 위태롭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과 더불어, 곧 하나님 자신에 의해서 피조된 인간 존재와 함께 구원 그 자체를 창출하고 지켜나갈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인간을 위한 구원의 규정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셨다는 사실로 나타난다. 하나님이 인간 안에서 평화의 설립자로, 우리들의 구원의 증여자와 선물로 만드신 운동 속에 참여하도록 선택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것은 그리스도교적 희망, 사랑, 신앙으로 나타난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설립자, 수호자, 통치자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며, 곧 인간으로서 하나님이다.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은 화해의 사건 속에 계시는 하나님이다. 화해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맺은 계약의 성취다. 계약은 (렘 7:23, 11:4, 30:22, 31:33, 32:38, 겔 36:28)- 하나님 주권 안에서 자유로운 결단과 결의다. 계약은 상호결속을 통하여 서로 자신들의 상황에서 계약 파트너 당사자들은 상호 교차적으로 서로에게 의무를 지는 것이다. 이스라엘 전체 사건 속에서 나타나고 작용하였던 계약이다.

대한민국은 1948년에 국가계약을 통해 형성됐다. 문석탄이 북한정권의 요직에 종사하고 6.25 남침전쟁의 주역인 김원봉을 높인다는 것은, 국가계약으로서 국민에 대한 의무를 구현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유교적 씨족주의에만 종사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문석탄이 말하는 ‘평화’와 ‘화해’는 기독교가치가 아니다. 특정한 부족만의 恨 풀이를 ‘평화’와 ‘화해’로 부르는 것은 非기독교적이며 중국문명적인 것이다. 세계교회협의회는 전 세계적인 反美의 확산을 위해서, 국제 예수 사기극을 확산시킨 것이다. ‘신학관’의 차이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사기행위’의 문제일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화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과 맺은 하나님 계약이 하나님 자신에 의해서 실현된 주장이며, 관철이며, 성취이다. 이스라엘의 계약은 온 인류를 위하여 체결되었으며, 아직도 그 효력이 있음을 계시하신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역은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화해는 바로 하나님의 원의지 혹은 근본 의지를 계시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언약하신 것을 계시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일어난 화해는 인간의 죄와 그에 다른 결과에 대한 답변이다. 화해의 전제로서 계약에 대한 인식은 그리스도교 복음과 그리스도교적 믿음의 확고한 근거에 대한 인식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역이다.

계약의 성취는 화해다.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는,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세상의 기초가 놓이기 전에 수립하신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계약에 두고 있다. 그 분은 자신의 인격 안에서 성취된 계약(언약)이고 가까이 다가온 하나님 나라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이자 화해자로서 도한 양쪽 모두의 계시자이다. 화해란 하나님으로부터만 시작될 수 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결코 포기할 수 없다. (요 3:16. 고후 5:19). 계약, 죄, 그리고 화해라는 그리스도적 변증법은 어던 경우에도 명제, 반명제, 그리고 종합명제라는 헤겔식 변증법으로 이해돼서 안된다. 화해는 하나님의 주도권적 행위다. 화해는 무엇보다 계명을 의미한다. ‘칭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죽음 안에서 그의 부활 속에서 실현되었고 계시된 판결이다. 성화란 인간에게 일어나는 칭의의 보충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사역의 총체성 안에서 화해자로 실존한다. 그 분만이 홀로 화해의 집행자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며 참 인간이다. 그 분은 종으로서 하나님이 되셨고, 주님으로서 종이 되셨다. 그 분은 화해하시는 분이며, 화해된 인간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화해의 현실이고, 화해 그 자체로서, 자기 자신에 대하여 선포하고 있는 화해의 진실(참된 내용)이다. 罪는 오직 계약으로부터만 감지될 수 있다. 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고, 다시 회복된 계약으로부터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화해로부터 인식될 수 있다. 화해교리의 원리는 예수 그리스도 뿐이다.

화해는 하나님의 말씀과 판결이 형성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에 의해서, 즉 십자가 상에서 예수의 죽음에서, 이러한 판결이 선포되어짐으로써 형성된 것이다. 화해는 사건의 역사이며 진리다. 그 진리는 특정한 한 역사 속에서 일어난, 그리고 이러한 역사 자체 속에서 계시된 진리다. 화해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인간의 최고로 특별한 역사다. 화해는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으로서, 자기 자신을 그렇게 낮아지시고, 그렇게 낮추실 수 있는 능력이 있고, 의지가 있으시며, 또 그럴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신성의 비밀이다. 고난의 순종인 이러한 순종의 특성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비하에서, 그 비밀은 밖으로 향하는 그 분의 행업 속에 있는, 세상에 계시는 그 분의 현존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의 비밀이다.

罪란 총체적 교만이다. 罪는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것이다. 罪는 율법 위반이고, 無法상태에 바지는 것을 말한다. 罪는 사실상 불신앙이다. 罪는 인간이 하나님의 자유로운 은혜로부터 스스로 돌아서는 것이다. 인간의 罪는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불신앙이다. (요 12:48, 요 3:18, 요 5:23, 요 3:36, 요 8:24, 요 5:10, 요 16:5) 불신앙은 罪이고 모든 罪가 흘러나오는 원천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항상 높이려고 하고, 항상 하나님 같이 되려고 한다. 그러나 인간을 결코 그렇게 될 수도 없고, 그렇게 존재할 수도 없다. 인간이 하나님이 되려고 함으로써, 인간은 非인간으로 전락한다.

중국문명의 족장은 ‘천리 앞’에서 민중을 이끌어야 有能함을 인정 받았다. 그러나, 그러한 댓가로 중국 문명은 권력 찬탈이 빈발하는 무질서를 겪거나, 아니면 그런 권력 찬탈을 막기 위한 ‘권위주의 체제’를 유지해야 했다.

칼 바르트는 『교회교의학』을 통해서 히틀러 파시즘에 부역하는 이들이 게르만 신화에 연결된 헤겔 신학이거나 슐라이어마허 신학인 자유주의 신학에 연결된 것을, 기독교에 있어서 ‘교만’이며 그리스도 앞에 ‘罪’라고 비판한다. 중국 문명의 ‘부족주의’를 둘러싼 儒彿仙 신앙은 서구의 자유주의 신앙보다도 더 人本的이다. 독일 파시즘이 문제가 되는 것은 유럽 문명에서 일탈하여 중국문명적인 정치를 했따는 것이다. 한국 기독교인에 있어서는 ‘복음’은 서방세계를 이어주는 것만이 의미가 있지, 중국문명의 지속을 이어가도록 변조된 복음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미국 선교사도 한국 땅에서 복음이 중국문명을 벗어나는 계기가 되길 바랬고, 한국인들의 기독교신앙의 계기도 그러했다.

위르겐 몰트만의 저작집에 나타난 한국현대사 이해는 한국사 자체에 익숙하지 못한 유럽사람의 ‘反美’확장을 위한 편리적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한국현대사는 군사정권 이전과 이후의 역사를 다루지 않고, 군사정권 시기만을 유럽적인 시각으로 평가한다. 그리고, 몰트만은 한국에서 민중신학을 둘러싼 규제 현상만 바라보고 있다. ‘나라 없던 세월’을 보냈던 사회에서 공산당에 줄을 섰던 신종교인들에게 의해서 소련 공산당에 충성하는 가운데 그들에 잘 보이기 위해서 6.25 전쟁기 때에‘기독교인을 학살’하는 일이 벌어졌다. (군사정권 때는 이를 국민 구성원에 책임을 전가하지 않기 위해서 ‘공산당 탓’으로 평가했다. 노무현 정권 때부터 김정일의 책임을 면하게 하려는 듯, 공산당 탓으로 평가하지 말라고 한다. 그렇다. 공산당에 줄 선 신종교인들이 기독교인을 학살했다. 이 말 듣고 싶었던 것인가?) 몰트만은 반공 군사정권의 권위주의 규제가 벌어졌던 원인을 알지 못했다. 물론, 그러한 권위주의를 변론하려는 입장이 아니다. 한국 현대정치에 있어서 쌍방 모두의 시각을 면밀히 살펴보지 않고 40년 가깝게, 편파적으로 실제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세력을 지원해온 것의 문제를 제기하려는 것이다. 몰트만이 후원한 민중신학에 연결된 세력은 아직도 중국문명에 기반된 위정척사 개념으로 反서구 기독교(뭐, 세계교회협의회는 예수 신앙 자체를 안 믿고 反美만 하면 엿장수 맘대로 신앙도 다 된다고 하니까)로서, 과거의 살인 폭력 행사를 정당화하고 있다. 위르겐 몰트만은 ‘요한계시록’의 龍이 사람으로 환생한 것인가?

출 32:1-6의 계약파기는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신앙에서의 이탈이다. 이는 황소의 모습을 한 여호와, 황소상으로 계시는 여호와를 위한 축제로 나타나는 데 그것은 계약파기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보기에는 계약의 최상의 성취이고, 그들이 행한 구체적인 신앙의 행위이다. 교만은 타락의 선봉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높여서는 안되는 곳에서, 자기 자신을 높임으로써 타락하고, 인간을 하나님 은혜에 상응하게 겸손 가운데 자유롭게 있는 곳에서, 참된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한국 사회의 국민소득 11위이거나 아니면 위장 신자까지 포함된 한국 개신교인의 신자 부피는, 한국교회의 신앙 열정의 반영이 아니다. 라오디게아 교회 문제와 한국교회 문제가 비슷하다. 영적회복이 시급하다. 국제예수사기단과의 사상전쟁은 한국 교회에 있어서는 위르겐 몰트만이 말했던 ‘만유구원론’의 실현이라고 볼 수 있다고 본다. 한국교회에 주어진 그리스도 신앙의 회복이 모든 사물의 제 위치를 회복하게 한다고 본다. 교회에 출석한다는 의미가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主로 고백하고,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이들이 진정한 기독교인일 것이다.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

그리스도

칭찬

책망

권면

약속

에베소

(2:1-7)

오른 손에 일곱별을 붙잡고, 일곱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

행위, 수고, 인내, 보존, 악한자들을 용납지 아니함

처음 사랑을 버림

생각하고, 회개하라, 처음 행위를 가지라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으리라

서머나

(2:8-11)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

환난, 박해, 가난

-

두려워하지 말라. 죽도록 충성하라

생명의 관을 받으리라.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버가모

(2:12-17)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

신실함, 믿음을 저버리지 않음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음

회개하라

감추었던 만나와 새 이름을 기록한 흰 돌을 받으리라

두아디라

(2:18-29)

눈이 불꽃 같고, 발이 빛난 주석 같은 하나님의 아들

사업, 사랑, 믿음, 섬김, 인내, 처음 보다 더 잘함

이세벨과 그녀의 음란과 우상숭배를 용납함

회개하라.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으라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와 새벽별을 바으리라

사데

(3:1-6)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

행위, 살았다 하는 이름

죽음

일깨워서 그 남은 바를 굳건하게 하라! 네가 받은 것을 기억하고 지켜 회개하라

흰옷을 입으리라. 이름을 아버지 앞과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빌라델비아

(3:7-13)

거룩하고 진실하시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행위,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키며 이름을 배반하지 않음. 인내함

-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으라

이기는 그에게는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하리라. 하나님의 이름과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그리스도의 새 이름을 그들 위에 기록하리라

라오디게아

(314-22)

아멘, 충성되고 참된 증인,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

-

차지도 덥지도 않고 미지근함, 곤고, 가련, 가난, 눈멀음, 벌거벗음.

연단함 금과 흰 옷과 안약을 사라.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이기는 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먹고 함께 다스리리라.

2. 라오디게아 교회 (요한계시록 3:14-3:22)

라오디게아는 어떤 곳인가? 빌라델비아에서 동남쪽으로 65킬로미터쯤 가면 라커스강 유역에 유명한 세 도시가 모여 있다. 강 북편에는 히에라볼라가 있고 남편 기슭에는 15킬로미터 정도의 거리를 두고 라오디게아와 골로새가 자리하고 있다. 라오디게아는 프리기아의 라커스 계곡에 위치한다. 골로새로부터 서쪽으로 10마일이며, 히에라 폴리스로부터 남쪽으로 6마일이다. 그러니까 라오디게아는 편지를 받는 일곱 교회중 가장 남쪽, 에베소의 가장 정동쪽에 있는 셈이다. 주전 2세기 말 번창은 네로 통치시대였다. 지진이 나고 주후 2세기에는 중요한 무역 중심지. 라오디게아 기독교사회는 골로새의 기독교사회와 밀접하게 연결됐다. 라오디게아는 이교 예배로, 제우스 신 및 다른 신 (디오니소스, 헬리오스, 헤라, 아데나 등 숭배) 예언의 신 아폴로와 치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 모두 크게 숭배한다. 라오디게아의 대표적 종교는 지방 신들과 로마제국의 신들이 결합된 혼합주의 종교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비대하고 안주하는 교회였다.

라오디게아는 부르기아 남부의 중심도시로 상당히 유명한 곳이었으나 그곳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진 시기나 교회가 뿌리를 내린 경위는 아무도 모른다. 아마 사도바울은 라커스 유역의 도시들을 한번도 방문한 적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골로새 교회에 편지를 쓸 때 라오디게아 교회에도 같이 편지를 썼다.

사실 많은 학자들은 라오디게아 서신을 다름 아닌 에베소서로 보고 있다. 에베소서의 가장 오래되고 가장 정확한 세사본 서두에 ‘에베소’라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라오디게아에 일착으로 보내진 회람용 편지였을 수 있다. 아울러 골로새서에 에바브라가 두 차례 언급된 것은 골로새에 복음을 전한 사람이 그였고 그가 라오디게아와도 유대가 있었음을 시사한다. 그러므로 라오디게아 교회를 세운 사람은 어쩌면 에바브라 일 수 있다.(골 1:7, 2:1, 4:12-16)

라오디게아는 로마 시대에만 중요한 도시가 되었다. 그것은 적어도 스물다섯 개의 성읍을 포함하고 있던 시브라틱(Ciblyatic) 협정의 중심지였다. 그곳은 또한 가장 부유한 브루기아 도시로서 특히 이 시기에 번창했으며,골로새에서 서쪽으로 14킬로미터,히에라볼리에서 남쪽으로 약 8킬로미터 떨어져 있었다. 제우스가 그 도시의 후원 신이었으나,라오디게아인은 아폴로,아스클레피우스(치유의 신),하데스,헤라,아테나,세라피스 디오니수스 그리고 다른 신들을 위한 신전을 가지고 있었다. 많은 유대인이 브루기아에 살았다.

그는 약속하신 모든 것에 확신(고후 1:20)했다. 예수님은 충성되고 참된 분(계 3:14)이다. 라오디게아는 부요함을 자랑(계 3:17)했다. 자족에 대한 도시 사람들의 자부심이 있다. 그들은 물 공급에 대한 불만도 공유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과 같이 이기는 자들과 그의 통치를 공유(계 3:21)했다. 주님은 오직 회개하고 상한 심령들과 함께 하신다.(사 57:15, 66:2, 약 4:6)

각 일곱 편지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 있는 참된 교회의 특징이 돼야 할 각각의 표지를 강조하신다. 에베소 교인들은 그 분을 향한 첫 사랑을 돌이켜야 했다. 서머나 교인들은 타협하지 않으면 반드시 고난이 온다는 경고를 받았다. 버가모 교회는 오류 앞에서 진리를, 두아디라 교회는 죄악 속에서 의를 수호해야 한다. 사데 교회는 외적 허영이 아닌 내적 실체가 필요하다. 부활하신 주님은 빌라델비아 교회 앞에 복음 전파의 기회의 문을 열어 두시고 그들에게 담대히 들어가라 명하신다. 이제 일곱 번째 편지의 수신자는 라오디게아 교회다. 자만에 대한 매서운 책망과 전심을 다하라는 애틋한 호소가 어우러진 편지이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샤데교회처럼 칭찬 대신에 비판과 책망만 있는 교회다. 과연 라오디게아 교회에 어떤 심각한 문제가 있었기에 후덕하신 주님에게서 한마디의 칭찬도 듣지 못하는 수치스러운 교회가 된 것일까? 사대교회의 문제가 실상은 죽어 있으면서도 명목뿐인 기독교인의 삶을 사는 것이었다면,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제는 거짓된 자기만족에 빠졌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가 보기에는 이것이 그렇게 대단한 죄목인가 싶은 생각을 할 수 있지만, 주님이 한마디 칭찬도 하시지 않은 것을 판단해볼 때, 자기만족은 심각한 죄악인 것이 분명하다. 이는 영적으로 죽은 것 못지않은, 치료가 불가능해 보이는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거짓된 자기만족올바르지 못한 자기인식에 뿌리를 둔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외적으로 어떤 극심한 핍박이 없는 평온한 교회의 모습이었다. 외부적으로 편안한 환경이 라오디게아 교회로 하여금 거짓된 포만감으로 잠들게 했던 중요한 원인이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하여 우리 주님은 자신을 “아멘이시오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오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라고 밝히신다. 주님에 대한 표현 가운데서 우리가 특별히 주목해야 할 것은 이사야서 65:16에 근거한 아멘의 하나님, 다시 말하면 진리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이다. 라오디게아 교회를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은 하나님의 진리와 그 분의 참되심이다. 그 기준 앞에서 벌거벗은 모습으로 서서 나를 발견할 때 진정한 나를 찾게 된다. 그렇지 않을 때 우리는 세상 안에서 나를 발견하려고 든다.

라오디게아 기독교인들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했다.(3:15) 그들은 全心이 부족했다. 라오디게아 신앙은 미지근한 폭포와 같다. 예수 그리스도는 마땅히 그 이상의 대우를 받으셔야 했다. 우리 내면의 영적 불은 언제나 꺼질 위험이 있다. 연료를 붓고 들쑤셔 활활 지펴야 한다.(롬 12:11, 행 18:25, 딤후 1:6)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께 사려 깊게 전폭적으로 헌신할 수 있는 강인하고 용감한 남녀들이 필요하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경고들을 귀담아 들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한때 번창하고 자만했던 도시가 지금 황량한 폐가 된 것만은 분명하다. 20세기의 한 여행객은 “라오디게아 지역의 폐허와 을씨년한 모습을 능가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다. 트렌치 대주교는 그 광경을 생생히 묘사했다. “지금은 모든 것이 자취를 감추었다. 에베소의 촛대를 옮기신 분이 라오디게아를 입에서 토해 내셨다. 광활한 기억에 널브러진 수로들과 극장들의 잔해만이 지난날 이 도시의 영광을 말해준다. 그나마 한때 유명했던 그 교회는 흔적조차 없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계 3:14)

라오디게아는 백성을 의미하는 ‘라오스’와 통치하다를 의미하는 ‘디카오’의 합성어다. 이 용어는 백성의 통치, 정의라는 뜻이다. ‘근본’(Beginning)이라는 말은 신을 나타내는 칭호이다. 1:8- 22:13에 대한 해설을 보라 [로마 황제의 주요 청호가 ‘프린셉스’, ‘첫째’, 즉 로마 시민 중 첫째라는 것 역시 이와 관련 있을 수 있다]

그리스도는 ‘아멘’이다. (이사야 65:16). 하나님은 믿을만하고 진실된 분이며, 진실로 그러하다는 의미이며, 하나님 칭호가 예수님에 쓰인 것이다. 그 분은 ‘아멘’을 말씀하실 뿐 아니라 아멘 그 자체이시다. 그 분의 사역은 하나님의 모든 약속을 실현하신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또한 ‘아멘’ 곧 하나님의 진리의 확인이었다. (cf. 고린도후서 1: 20) 자신이 신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자로서 말씀하신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위하여 말씀하는 자신의 권위를 직접 주목하도록 하기 위하여 사용했다. 기독론적으로 이 직함이 중요하다. 하나님 이외에는 관련시킬 수 없는 직함을 그리스도에게 사용한 것이다.

“충성되고 참된(계19:11, 메시아의 백마를 탄 인물의 이름) 증인”은 세상을 이기는 최후의 증거로서 순교와 연관(계 1:5)이다. 그 분의 마름은 참되기에 믿을 수 있다. 니고데모와의 대화 중에 그분은 “우리가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노라”고 단언하셨다.(요 3:11) 그래서 그 분의 증거는 받아야만 한다. 그것은 정확하고 확실하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분이다. 아멘이시오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오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시다. 그런 분의 권고를 우리가 어찌 무시할 수 있을까?

그리스도의 부활은 새 창조의 시작으로 이해다. 충성된 증인의 배경이 되는 시편 89편이 계 1;5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메시아는 장차 있을 회복과 새 창조의 증인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과거 우주의 창조 행위와 출애굽 당시의 이스라엘을 한 국가로서 창조한 행위의 증인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주입 받아야 한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경제적 번영을 준다고 여기는 수호신에 대한 충성심을 가지고 황제 숭배를 했다.

하나님은 창조의 근본(사 65:17. 골 1:15)이다. 아르케는 ‘시작/통치자’이며, 당국, 공직/원인, 그리스도가 시작이다. 하나님의 ‘참되심’은 피조물을 통제하시는 일 속에 있다. 골로새 교회의 이단이 라오디게아 교회도 똑같이 출현했을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창조의 시작과 원천이다. 메시아는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피조물 가운데 처음으로 창조주일 뿐 아니라 창조의 근원이다. (요 1:1-3, 고전 1:30, 골 1:15, 잠 8:22-31, 히 1:2,3)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계 3:15)

찬물은 마시기에 좋고 뜨거운 물은 목욕하기에 좋았지만, 라오디게아에는 자연 적인 물이 부족했다. 남쪽으로 약 8킬로미터 떨어진 온천에서 파이프를 통해 운반된 물은 산에서 조달되는 찬물과 마찬가지로 라오디게아에 이를 때쯤 미지근해졌을 것이다. 물을 데울 수는 있었지만,그 지역의 물이 자연적으로 미지근하다는 것(인근의 히에라볼리에서 구할 수 있는 뜨거운 물과는 대조적으로)은 물 문제만 빼고는 안락한 생활을 누리고 있던 그 지역 주민들의 일반적 불만이었음이 분명 하다. 그들이 수입한 물 역시 히에라볼리보다 약간 낫기는 했지만 퇴적물로 가득했다고 지리학자인 스트라보는 말했다)

당시 라오디게아는 히에라폴리스와 골로새라는 두 도시와 이웃하고 있다. 히에라폴리스는 사람들의 질병을 고쳐주는 뜨거운 물이, 골로새에는 차고 시원한 물이 있었다. 더운 물은 더운 물의 기능이 있다. 뜨거운 것은 영적인 정열, 나를 지지하는, 나에게 우호적인, 인접한 히에라볼리의 온천수를 나타낸다. 또한 찬물은 찬물의 기능이 있다. 찬 것은 하나님의 일에 적대적, 나에게 적대하는, 14km 떨어진 골로새로부터 냉수를 온수를 공급을 말한다. 두 가지 가운데 어느 하나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진짜 심각한 문제가 되는 것은 미지근한 물의 상태다. 좋지 않은 수질에서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은 미지근한 물은 참으로 역겹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상태가 바로 그러했다. 그들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공존의 땅, 회색 지대의 삶을 익숙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주님은 그들을 자신의 입에서 토해 내치리라고 말씀하신다. 미지근한 상태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으신다고 경고하신다. 고대 사람들은 종교적인 희생 제사나 연회에서 뜨거운 술이나 찬 술을 마시는 습관이 있었다. 하나님 말씀과 그리스도에 대해 무관심하고 자만하는 자들이다. 주님께서는 미지근한 것보다 솔직한 거절을 좋아하신다. ‘미지근하다’는 쓸모없는 ‘무익한’이란 뜻이다. 무능하고 무력함 아니 좀더 심각하게 말하면 주님이 그들을 심판하신다는 말씀이 된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인들이 자신들의 상태에 대하여 전혀 다르게 느낀다는 점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세상적으로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순풍에 돛 단 듯이 항해하는 배와 같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바로 라오디게아 교회가 가지는 문제의 핵심이다. 이 교회는 자신을 의지했기 때문에 가난했고 헐 벗었고 눈이 멀었다. 예수님은 말씀 하신다. “네가 뜨겁든지 [즉 목욕을 위해] 아니면 차든지 [마시기 위해] 하다면 너는 유용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상태로는 나는 너회가 물에 대해 느끼는 것과 같은 느낌을 너희에게서 받는다. 너희가 메스껍다” 이는 라오디게아 물공급에서 연원하는 것이다. 라오디게아가 교역로 교차지점에 세워진 것은 상업적이고 군사적인 이점 때문이다. 목적지에 도달했을 때는 미지근한 물이었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계 3:16)

‘멜로’는 임박함(계 2:10, 3:2, 10)을 말한다. 이는 조만간에 하나님의 심판이 닥칠 것을 말한다. 광천수는 탄산칼슘 침전물로 바꾼 것이다. 그 물을 마시게 되면 결과는 토하는 일이 된 것이다. (레 18:25, 28, 20:22) ‘땅에서 토하다’는 표현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으로 들어갈 때 가나안 인들의 운명에 대해,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 자신들의 잠재적인 운명에 대해 사용된다.-주께서 토해내기 전 회개의 기회가 있다. 라오디게아 문화 구석 구석이 우상 숭배에 참여 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계 3:17)

라오디게아는 번창하는 금융 중심지였다. 그 도시는 자신의 부에 자부심을 가진 나머지 주후 60년에 있었던 지진 후에 로마의 재난 구제 기금을 거부하고 자신의 자원으로 도시를 재건했다 그 곳은 또한 직물〈특히 모직)과 의료 학교 및 귀약 그리고 명성이 자자했던 브루기아의 안약 연고로 알려져 있었다. 그 문화를 반영하던 교회는 라오디게아가 외적으로 신뢰하던 모든 것을 영적으로 결여하고 있었다. 헬라인은 나체에 대해 팔레스틴 유대인처럼 도덕적 혐오감을 느끼지는 않았지만,‘견유학파 현자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은 본문에 묘사된 벌거벗음과 빈곤(여기에서는 영적 빈곤) 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에 동의했다.

그들은 물질적으로 부자였기 때문에 자기들의 영성이 부요하고 가정. 문제는 부 자체가 아니라 부가 일으킨 독선적인 자기 만족에 빠졌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물질적인 부에 영적 부가 내포되어 있다고 믿었다. 라오디게아 교회 신자들은 물질적으로는 부요하나 영적 파산 (마 5:3)을 느꼈다. (호 12:8,슥 1:9)

이방인이나(사데교회처럼), 유대인에게서나(서머나 교회나 빌라델비아 교회처럼), 외적 압력이 전혀 없었는데도, 라오디게아 교회 교인들은 풍족한 생활에 빠져 자신의 영적 실상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영적으로 미지근하다는 것은 영적부요에 만족함을 말한다. 영적 빈곤의식 아니다. 하나님은 부유하시며 자신과 바른 관계를 갖는 사람에게 부를 베푸신다.(롬 2:4, 10:12, 11:33, 고후 6:10, 9:11, 엡 2:4, 빌 4:19, 약 2:5) ‘곤고한 것’은 전쟁으로 인한 파괴(시 137:8, 롬 7:24)를 말한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서머나 교회와 정반대로 우상숭배에 참여했다.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일에 무기력했다. 지나친 교만과 자만 때문에 진리에 대하여 눈이 멀어 버렸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자신들이 좋은 상태에 있다고 평가했다. 호 12:8(그들의 물질적 풍요를 그들이 섬기는 우상이 내려준 혜택으로 본다. 호 2:5, 8, 12:8, 호 11장, 13장)과 계 3:17이 병행한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계 3:18)

‘불로 연단함 금을 사도록’에서 ‘정련한 금’은 죄를 제거함으로써 생활을 순결하게 하는 성경적 관용어 (욥 23:10, 잠 27:21, 말 3:2-3)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는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자신들의 재산을 영적인 보상을 위해 사용해야 함을 말한다. 그리스도에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야할 필요성을 주장한다. 예수님으로부터 불로 연단된 금을 사라는 구절에서 <불로 태워진, 정련된 금>은 불순물이나 찌꺼기가 제거된 순수한 금(시 66:10, 사 1:25, 슥 13:9)을 말한다. 벌거벗음은 심판의 상징(사 20:1-4, 겔 16:36, 23:10)이며, 수치는 불명예를 당하고 심판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적으로 눈먼 상태에서는, 땅의 업적은 무의미 하다. 불로 연단한 금은 연단을 통해서 진짜임을 입증한 의로운 성품이다.

라오디게아는 광택이 만든 검은 털로 만든 옷이 유명한 지역이다. ‘흰 옷을 입으라’는 말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벌거벗은 모습을 가리기를 말한다. ‘흰 옷’은 요한계시록에서 비유적으로 언급 (3:4-5, 4:4, 6:11, 7:9, 13:14)된다.

‘안약’은 영적인 눈이 뜨여 주께 돌아오다.는 의미다. 안약이미지는 라오디게아 교회가 영적 분별력 상실(요 9:39-41)됐기 때문에 나왔다. 라오디게아 아스클레피아소의 신전에는 의술학교가 있고, 안약으로 널리 알려진 부르기아 가루를 수출됐다. 안약을 사서 눈에 바르라 (요 9:1-12, 요 9:41, 골 1:19)는 내용이다. 그 분께 오라. 그 분은 가난한 그들을 부요하게 하시고, 헐벗은 그들을 입히시며, 눈먼 그들을 고치실 수 있다. 그 분은 그들을 눈뜨게 해 꿈에도 몰랐던 영적 세계를 보게 하실 수 있다. 그분은 그들의 죄와 수치를 덮어 빛 가운데 성도의 기업에 동참하기에 합당한 자로 만드실 수 있다. 그 분은 생명과 풍성한 삶으로 그들을 부요하게 하실 수 있다. 한마디로 예수님은 그들을 구원하실 수 있다. 우상숭배를 거부하는 일은 성도들에게 박해와 고난을 촉발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병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새롭게 함으로써만 치유됐다. 브루기아의 ‘안약 은 연고가 아니라 가루로 만들어서 눈꺼풀에 바르는 것이었을 것이다. ’흰 옷‘에 대해서는 요한계시록 3:4을 참고할 수 있다. 여기에서 그것은 라오디게아의 유명한 ‘검은 모직’ 과 현저한 대조를 이루었을 것이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계 3:19)

승리한 교회에서만큼 패배한 교회에 대해서도 신적 사랑이 있으셨다. 우선 회개해야 한다. 예수님은 이미 에베소와 사데교인들에게 회개를 명하셨다.(2:5, 3:3) 라오디게아에게도 똑같은 메시지가 주어진다.

잠 3:11-12은 징계를 통한 신적 사랑의 표현을 하고 열심을 내고 회개를 말한다. 열정은 초점을 자아에서 하나님으로 변화시킬 필요를 나타낸다. 성경은 책망과 시련의 원리가 하나님의 사랑(신 8:5, 삼하 7:14, 잠 3:11, 12, 히 12:5, 6)을 나타낸다. 아비가 사랑하는 아들을 기꺼이 징계하는 것처럼(잠 3:11, 12) 예수님은 사랑하는 자들을 책망하시며 징계하신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요한복음 10:1-4; 마태복음 24:33,42와 대조해보면, 식탁의 교제는 친밀함의 표시였으며, 손님과 주인이 우호적인 관계를 맺도록 해주었다 여기서 예수님은 라오디게아 그리스도인들이 현재 메시아연회에서 함께 식사 하도록(참고 계 2:7; 2:14, 20과 대조) 초대하신다. 그것은 정말로 풍성한 연회에 초청하는 것으로,다시 한번 그들의 영적 빈곤을 암시 한다(참고 3:17-18) 하지만 교제를 위한 문은 현재 닫혀 있다 즉 그들 쪽에서 닫은 것이다.

예수님은 연약한 교회에 회개촉구를 요구하신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은 인격적 반응의 중요성을 주장하신다. 식탁교제는 죄인들과 식사(막 3:3-17)와 죄인들의 친구(마 11:16-19)로 공관복음서에 나타난다. 약속은 받아들여짐. 함께 나눔. 죄사함과 화목을 제공받은 사람들의 하나님과 깊은 교제다. 영적 성숙은 그리스도와 교제이며 하나님과 예수님이 궁극적인 하나가 된(요 17:21, 23)다.

기본적으로 이 구절은 불신자를 전도하거나 초대하기 위한 말씀이라기보다는 주님과의 교제 가운데 부요한 교회공동체를 회복되는 길로 초청하는 메시지이다.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는 막 13:33-37, 눅 12:35-37, 문지기 비유의 재구성이다. ‘문’은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교제를 나누어야 하는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마음이다.

아 5:2는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의 맥락에서 이스라엘의 회개를 촉구한다. 세상의 부요함을 숭배하는 라오디게아의 검은 옷감을 버리고, 거룩한 백성의 흰 옷을 입으라. 약 5:1-9와 통하는 말씀이다.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순종한다.는 뜻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계 3:21)

여기에 나오는 개념은 하나님의 통치를 공유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공동 섭정자 혹은 총독으로 함께 참여하시며,한편 그분의 백성은 땅을 통치하도록 높임을 받았기 때문에 동참한다. (구약에서처럼 그리고 이스라엘이 높임 받는 것에 대한 유대인의 기대처럼) 하나님의 선재하시고 영광스러운 보좌는 유대 ‘묵시 저자들과 신비주의자들이 많이 논의 하던 주제였다.

‘내 보좌에 함께 앉게’는 마 19:28, (눅 22:29, 30) 고전 6:2, 딤후 2:12 계 2:26-27. 3:‘21, 20:4)에 나타나며, 승리한 성도들 또한 영광의 심판에 참여 하게 한다. 시편 110:1은 그리스도의 승리에 대한 신약성경의 핵심 모티프(마 22:44, 행 2:34-35, 엡 1:20, 히 8:1, 10:12-13. 12:2)를 담고 있다. 정복자 그리스도 주제는 신약신학의 본질적 요소다. 예수의 승리는 그 분의 보좌의 기초였고, 성도들이 세상과 세상의 악을 물리칠 때 주어지는 그들의 승리는 그들의 보좌의 기초다. 이기는 자나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는 자에게 큰 보상이 약속 된다.

이 장래는 그 영광 면에서 여태껏 이기는 자에게 주신 다른 모든 약속을 능가한다. 보좌는 승리와 권세의 상징이다. 예수님은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 그 분을 좇은 열 두 제자들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고 약속하셨다.(마 19:28) 이제 이 약속은 충성하여 이기는 모든 기독교인에게 주어진다. 예수님이 세상과 마귀를 이기시고 아버지의 오른 편에 들리신 것처럼 기독교인들도 이기면 영광을 얻을 것이다. 우상숭배에 저항하는 이들에게는 눅 22:28-30. 마 19:28. 막 8:38-9:1.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하게 될 가능성으로 나타난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릴 것(딤후 2:12)이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다니엘 7:18, 27을 모방하는 개념을 나타낸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 3:22)

경청에 대한 촉구로 듣고 순종하라로 표현한다. 귀를 가진 사람에게 명령하신 예수님(마 11:15, 13:9, 막 4:9, 23, 눅 8:8, 14:35)을 말한다.

듣고 응답하라는 초대가 다시 반복된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지어다”.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들은 오늘날의 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들에 대한 완전한 치료책들이다. 처음 사랑을 잃어버림(2:4), 고난에 대한 두려움(2:10), 교리의 오염(2:14-15), 도덕적 타락(2:20), 영적 죽음(3:1-2), 굳게 잡지 못함(3:11), 미지근함 (3:15-16)등은 1세기의 교회에서부터 지금까지 반복적으로 유행하고 있다. 이 편지들은 그리스도 자신의 입으로부터 직접 나온 것이기 때문에 그 이후 오늘에 이르는 동안, 교회에 주시는 하나님의 마지막 권면으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듣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마지막으로 호소하고 계신다.

이 말씀은 각 편지마다 조금도 다르지 않게 추신처럼 되풀이 된다. 예수님이 공생애 중에 사용하신 특징적 표현인 “들을 귀 잇는 자는 들으라”를 상기시키는 말씀이다.(막 4:9 외) 계시록의 표현도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더해진 것 빼고는 거의 똑같다. 편지를 구술하신 분은 예수님이지만 메시지는 성령의 말씀이다. 이전에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시고 신약계시에서 사도들을 통해 말씀하신 성령이 이제 교회들에게 성자 예수님의 명령을 전하신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이 있다. 편지마다 수신 교회가 다른데도 종결 문구는 매번 교회들로 되어 있다. 각 교회를 향한 개별적 메시지는 모든 교회에 주시는 보편적 도전이기도 하다. 매시지가 서로 다른 것은 각 교회의 상황 때문이지 저자이신 예수님의 목표가 달라서는 아니다. 그 분의 교회를 향한 그 분의 뜻은 어느 시대, 어느 장소, 어느 교회에서나 동일하다. 이 긴박한 메시지에 귀 기울이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3. 한국교회가 몰트만을 손절해야 하는 이유

-위르겐 몰트만, 김균진 역, 『신학의 방법과 형식-나의 신학여정』, 대한기독교서회, 2001. 요약-

머리말

<서론을 대신한 결론>

교의학, 혹은 조직신학은 소위 서론(프롤레고메나)과 함께 시작한다. 신학은 몰트만에게 관념들의 모험이었다. 몰트만 신학은 길을 걸어가는 가운데서 생성됐다.

<신학을 위한 조직신학적 기여들>

몰트만에게 신학은, 인간이 하나님을 인식하게 되며 그들의 삶의 행복과 고난의 실천 속에서 모든 감각을 가지고 하나님의 현재를 인지할 때 일어난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신학적 접근은 대화적이며, 상호 교통적이며 동지적이다.

<신학과 전기>

몰트만은 자신의 상황과 삶의 역사를 고려하지 않고 말하는 것은, 주체적으로 혹은 상황에 따라 표현되는 구체적 진리에 비해 전달되는 것이 훨씬 적다. 구체적 진리가 비로소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삶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발견하도록 자극한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신학>

몰트만은 바르트주의자들이 칼 바르트의『교회교의학』을 요새로 생각하는 것과 같은 유혹에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해 왔다. 하나님 나라 신학은 선교신학이자 공적 신학이 되는데, 이 공적 신학은 “이 시대의 고난”에 참여하며, 동시대인들이 실존하는 바로 거기에서 하나님을 향한 희망을 나타낸다. 하나님 나라 신학은 근본주의적으로 자신의 신앙 공동체 속으로 퇴각하지 않고, 현대주의적으로 사회의 경향에 편승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저항적으로 땅 위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의 생명의 미래에 관심을 가진다.

<교파 신학인가, 에큐메니칼 신학인가?>

몰트만은 개혁교회와 개신교에 속해 있지만, 자신의 미래는 에큐메니칼에 있다고 본다. 오늘날 필연적인 기독교 대 교단 사이의 한계들은 더 이상 전통적인 교파적 경계선을 따르지 않는다. 칭의론과 삼위일체론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제1부 신학이란 무엇인가?

1. 신학은 어디에 있는가? 자신의 신학적 실존의 장소들

신학의 자리를 인지하는 것은 해석학과 정치적 의식을 가진 모든 신학을 위해 불가결한 일이다.

1) 자신의 인격에 있어서의 신학

전쟁이 끝날 무렵에 겪은 죽음의 경험들을 겪었다. 나의 민족의 죄책에 대한 우울한 마음이 있다. 가시 철조망 뒤에서 일어날 뻔하였던 철저한 좌절의 내적 위험들 때문이다. 이것들이 첫 번째 신학의 자리다.

2)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학문적 신학을 공부한 다음, 가족과 생존을 위한 그들의 죽은 자들에 대한 회상과 그들의 자녀들을 위한 염려 속에서 살아가는 민중의 신학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본문과 교인들을 심방하면서, 가정과 이웃과 노동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의 친교의 순환을 느꼈다.

3) 교회를 위하여

1958년부터 1963년 까지의 시대에 절실했던 문제는 동서로 분열된 독일의 서쪽에 자리잡은 연방공화국의 문제라기보다 독일 개신교회의 통일 문제였다. 동독에 있는“형제 자매들과의 연대”가 그 후 40년이나 존속하였던 과도정부에 대한 충성보다 더 중요하였다.

4) 대학 안에서

아카데믹 신학은 남녀 목사들과 남녀 종교교사들을 교육하는 교회의 신학을, 기독교이든 아니든 간에 타 학과들의 관심 있는 사람들을 위한 보편적 신학의 제의를 결합시키는 재주를 부려야 한다. 아카데믹한 신학은 다양한 분야들의 합성품이기 때문에, 신학에게 유익한 타학문들의 관심들과 교차한다. 아카데믹 신학은 남녀 목사들과 남녀종교 교사들을 교육하는 교회적 신학을, 기독교이든 아니든 간에 타학과들의 관심 있는 사람들을 위한 보편적 신학의 제의를 결합시키는 재주를 부려야 한다.

2. 남자 신학자 혹은 여자 신학자는 누구인가?

아카데미 신학의 발전은 내용적으로는 제한된 가치를 가질 뿐이다. 그것은 거룩한 제국 안에서 교회와 국가, 신앙과 문화의 저 특이하고 유일한 통일성, 곧 유럽의 기독교 왕국에서만 가능하였다. 아카데미 신학과 통속적 신학은 서로 관계돼야 하며, 서로를 고려해야 하며, 서로에게서 배워야 한다.

1) 모든 신자들을 공동의 신학

신학은 단지 신학부와 교회 세미나의 과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백성의 과제이다. 짐을 무겁게 하는 소외는 교회 공동체에 대칭하는 아카데미 신학을 통해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천년이나 된 전통적인 신학의 지배이다. 여성신학과 에큐메니칼 신학은 그런 과정에서 비판을 통해서 나타났다. 유럽중심주의에서 자신을 해방시키는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신학이 서서히 형성되고 있다. 신학은 신자들만을 위해 존재할 수 없다. 하나님은 신자들의 하나님일 뿐 아니라, 하늘과 땅의 창조자요, 인간의 신앙과 같이 부분적이 아니라, 악한 사람과 선한 사람 위에 뜨는 태양,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 위에 내리며 모든 피조물에게 생명을 주는 바와 같이 (마 5:45) 보편적이다. 기독교 신학에서도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은 공공성 가운데서 기독교적인 것을 기술하는 하나님 나라의 지평 속에서의 공공성을 서술하는 것이다.

2) 무신론자들의 신학

몰트만은 니체의 『안티 크리스트』로부터 참된 기독교에 대하여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고 본다. 하나님에 대한 기독교신앙은 단순한 근원적 신뢰가 아니라, 극복되어진 불신앙이다. 기독교 신학은 그리스도 때문에 신학이며, 단순한 유신론이냐 아니면 이에 상응하는 무신론이냐의 양자택일을 넘어선다.

3) 종교간의 대화 속에 있는 신학

유태인은 기독교인에게, 기독교인은 회교도에게, 회교도는 기독교인과 유태교에게 증인이된다. 모든 참여자는 그의 공동체를 위하여 말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종교간의 대화를 위하여 국가적 차원에서 필요한 조건은 다음과 같다. 1. 종교로부터 국가의 물라남과 국가로부터 종교의 물러남을 통한 종교와 국가의 분리, 2. 종교의 공동체적 실천과 개인의 종교적 자유를 위한 국가적 보호, 3. 모든 종교 공동체들에 대한 평등한 공동의 법적 질서 인정. 종교들보다 더 상위에 있는 것은 종교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인간의 권리이다.

3. 어떻게 참된 신학자가 되는가? 하나님으로 인한 고난과 하나님의 즐거움

신학은 그 핵심에 있어서 하나님의 문제를 다룬다. 하나님을 인식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감내하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을 감내함으로써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은 실존적 신학의 한 면에 불과하다. 찬미(송영)에 신학의 아름다움이 있다.

4. 역사신학

1)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 : 역사의 종교

아시아의 거대한 우주 종교들과 비교하여 우리는 기독교를 유대교 그리고 이슬람교와 함께 역사의 종교라고 부른다. 우리는 이 세 가지 종교들을 아브라함의 종교라고 부른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는 그들 각자의 방법으로 아브라함의 믿음(롬 4:16)에 근거하며 따라서 아브라함과 사라의 특별한 하나님 경험에 근거한다.

2) 시간 경험- 회상- 이야기 : 문서 종교

성서적 역사종교들은 기념과 회상으로 산다. 이것은 과거 역사에 대한 유대교의 회상에 아주 분명히 나타난다. 회상의 수단은 먼저 역사의 이야기에 있다. 이야기되는 역사의 매개는 그후 읽혀지고 해석되는 문서가 된다.

3) 역사에서의 하나님 인식

엑소더스 사건은 하나의 복합적 사건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속에서 출애굽기 서술에 따라 역사의 하나님 인식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인식할 수 있다.‘주’라는 이름과 함께 하나님의 자기 낮추심이 의미되어진다. 주의 계약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은 이 엑소더스로부터 태어나며 자신의 존재를 얻게 된다. 하나님 계시는 출애굽기에 의하면 모세에 대한 하나님의 자기 소개를 통하여 일어난다. 출애굽 사건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역사를 열어주듯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사건이 민족들 가운데 있는 기독교의 하나님 역사를 열어준다. 성만찬은 앞을 향하여 열려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미래를 개방하며,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로 인도하는 이 역사 속으로 우리를 세우기 때문이다.

4) 하나님을 인식함- 하나님을 망각함

하나님에 대한 역사적 경험이 역사신학으로 된다. 가장 중요하고 오래된 요약은 신명기 26:5-9의 신앙고백이다. 하나님 인식은 1. 계약의 성실, 2. 이집트로부터 탈출시킨 하나님의 행위들에 대한 지식. 3. 너희를 여기로 인도하신(신 9:3) 야웨에 대한 지식. 4. 야웨의 끊임 없는 임재함에 대한 지식. 이 하나님 지식 없이는 역사적 하나님 신앙은 실존할 수 없으며 존속할 수 없다. 하나님 지식은 하나님 신앙을 과거의 하나님 역사와 결합시키고, 현재의 역사를 그 밑바닥에 놓여 있는 하나님의 해방행위와 결합시킨다. 하나님 인식의 보편성은 하나님의 보편적인 실제적 임재를 전제한다.

5) 현대적 역사의 종말?

하나님 경험과 하나님 인식은 회상과 희망 속에 생동하는 문화를 영원한 현재의 포스트모던 문화로 지양시키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인다.

역사적-비판적 학문을 통하여 우리는 역사적 되어감의 과정들을 사실적 행위들과 사실적 관계들로 실사화시킨다. 수많은 경축일을 통하여 우리는 새로운 미래를 개방하거나 그것을 요구하는 역사의 유일회적 사건들을 동일한 것의 영원한 회귀로 변질시킨다.

결코 침묵하지 않는 역사의 희생자들의 부르짖음이 우리를 과거와 결합시키고, 심판하고 구원하는 하나님의 약속들이 우리를 미래 앞에 세우며, 이 두 가지가 우리의 영원한 현재의 시시하고 파멸적인 환상을 깨버린다.

5. 기독교신학

‘신학’이라는 단어는 기독교 이전 고대 시대로부터 유래한다. 스토아철학 학파에서 신들에 관한 이야기를 뜻하는 시인들의 신화신학과, 국가와 정치가들의 국가 제사 제사자들의 정치신학과, 철학자들이 신들의 본질에 대하여 묻는 자연신학이 구분되었다. 기독교신학은 먼저 예배에 속하였으며, 예배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찬양에 속하였다. 기독교에서 구원에 관한 이론은 하나님의 경륜이라 불리었다. 기독교신앙에서 특별한 것은 그리스도 자신이다. 메시아의 오심과 함께 역사의 시간은 메시아의 시간으로 승화된다. 역사의 시간들은 역사의 종말이 된다. 기독교 신앙은 신앙에서 인식으로, 희망에서 직관으로, 사랑에서 이해로 이르는 길과 넘어감이다.

1) 신앙의 이성 : 나는 이해하기 위하여 믿는다.

첫째 넘어감은 신앙으로부터 인식으로의 길이다. 신뢰하는 신앙으로부터 인식하는 신앙으로의 길이다. “마음의 신리”에서 “확실한 인식”으로 나아감이다. 이 인식은 기독교 신앙에서 본질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신앙과 인식은 기독교 신앙의 두 가지 면들, 곧 인격적인 면과 사실적인 면을 가리킨다. 신앙에서 나는 그리스도와 인격적으로 관계하며 나의 현재를 그의 현재와 결합시킨다. 기독교신앙은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이다. 다시 말하여 기독교 신앙은 그가 믿는 바의 이해를 추구한다. 한 걸음 더 발전하여 말한다면, 나는 이해하기 위하여 믿는다. 이해하는 것이 이 신앙의 목적이다. 이러한 신앙이 추구하는 신학은 외부로부터 오는 공격이나 자신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회의에 대하여 신앙을 방어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가 신앙하는 바의 것이 어떤 점에서 그러한지를 말해야 한다.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은 신학이란 미리 계시되었고, 교회에 의하여 신앙되는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뒤따르는 성찰을 뜻한다. 우리는 신뢰하는 마음과 인식하는 이성 사이의 일치는 물론, 하나님을 신앙하면서 인식하는 인간과, 신앙되고 인식되는 하나님 자신 사이의 일치로 말미암아 큰 기쁨을 경험하게 된다. 이것이 신학적인 대상과 이해의 일치이다. 진리는 언제나 일치, 상응 그리고 조화이다. 안셀름에서 신앙되어지는 이해는 뒤따르는 성찰일 뿐 아니라, 이와 동시에 앞서는 성찰이기도 하다. 이해하기 위해 나는 믿는다는 것은 방향을 제시한다. 이 땅 위에서 신앙은 이해를 추구한다. 그는 저기에서 진리의 직관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2) 희망의 이성 : 가르침을 얻은 희망

기독교의 희망은 신앙보다 한층 더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보고 맛보는 것을 지향한다. 원시 기독교는 임박한 재림에 대한 기다림의 힘으로 완전히 재림을 지향하고 있었으며, 그의 신앙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오심에 대한 희망이었다. 해결되지 못한 문제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개인의 희망과 하나님에 대한 우주적 희망이 분리된 데에 있다. 기독교 세계에서 교회는 그 자신을 성취된 약속 곧 하나님의 나라로 이해하였으며, 이 나라의 또 다른 미래에 대한 어떠한 다른 희망도 허용하지 않았다.

희망의 로고스는 약속이다. 성서의 문헌들이 이야기하는 역사에는 하나님의 약속의 역사가 하나의 ‘생명선’처럼 관통하고 있다. 이 약속의 역사는 말씀의 역사이기도 하고 행위의 역사이기도 하다.

3) 사랑의 이성

신앙의 이론적 이성과 희망의 역사적 이성이 있다. 해방신학은 전제되어진 기독교적, 해방하는 실천적 이론이고자 한다. 소브리노는 억압받는 자들과 가난한 자들의 해방의 이 실천을 사랑이라고 부른다.‘사랑’이란 권리를 상실한 자들에게 그들의 권리를 회복하여 주며, 짐 진 자들을 다시 세우며, 슬퍼하는 자들을 위로하며,‘땅의 표면을 갱생하는’성령에 대한 다른 이름이다. 창조적 사랑은 원수를 사랑함으로써 그의 신적 완전성에 도달한다.(마 5:43-48)

사랑 가운데 활동하게 되는 신앙은 콘텍스트적이며, 카이로스를 통하여 규정되어 있으며, 공동체와 관계되어져 있다. 신학적 사고와, 신학적 언어와 신학적 은유의 형식들은 언제나 긔고 언제나 콘텍스트적이며, 상황을 통하여 규정돼 있다.

4) 기독교 신학은 ‘계시 신학’인가?

계시는 특별히 기독교적인 개념도 아니고 신학적 개념도 아니다. 기독교 신학은 계시에 대하여 언제나 인간의 이성과 대칭시켜 말하였다. 근대 신학에 의하여 하나님의 자기 계시 혹은 하나님의 자기 전달이란 개념이 중심 개념으로 사용된다. 하나님의 자기계시는 삼위일체 신학의 개념이요, 세 신적 품격들로서 1. 계시자, 2. 계시, 3, 계시될 수 있음을 포괄한다. 한 인격의 자기 계시는 언제나 총체적 계시다. 인간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은 약속과 성취의 일치를 통하여 자기를 계시한다. 이 일치 속에서 그의 신실하심이 계시되며, 그의 신실하심이 그의 본질이다.

6. 자연신학

신학의 물리적 종류는 자연신학이라 불리기도 했다. 기독교 신학은 자연신학을 받아들였으나, 창조신앙에 근거하여 자연의 개념을 변형시켜, 자연은 이제 본질 직관을 통해서가 아니라 경험을 통하여 인식되는 사물들의 유한하고 우연적이며 경험될 수 있는 현실을 뜻하게 되었다.

⑴ 자연신학은 특별히 기독교적 신학에 대한 일반적 전제다.

⑵ 자연신학은 역사적이며 기독교적인 신학의 귀결이며 종말론적 목적이다.

⑶ 기독교 신학 자체가 참된 자연신학이다.

기독교신학은 자연신학 없이 존재한 적이 없다.

1) 기독교 신학의 전제로서의 자연신학

계시의 신학은 은혜가 자연을 전제하는 것과 같은 동일한 방법으로 자연신학을 전제한다. 자연신학은 인간의 타고난 이성에게, 한분 하나님이 존재하며, 하나님은 한분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자연적 인식은 인간의 양심 속에 주어져 있으며, 초자연적 인식은 성서의 책에서 온다. 하나님에 관한 질문은 인류의 문제이다.

2) 기독교 신학의 목적으로서의 자연신학

참된 종교의 주제는 신학의 종말론적 목적이다. 자연신학을 계시신학의 전제에서 목적으로 도치시키는 것에 관한 이러한 요구는 이미 독일 계몽주의가 시작하면서 제기되었다. 보편적이고 윤리적 이성종교의 신학은 이제 자연신학이라 불리운다. 순수한 이성의 신앙은 언제나 교회적 신앙의 목적이었다. 왜냐하면 교회의 신앙은 순수한 이성의 신앙을 위한 운반체이기 때문이다. 종말론적 신학이 참된 자연신학이라면, 세계의 자연과 인간의 양심 속에 전제돼 있는 자연 종교는 영광의 나라의 ‘미리-나타남’과 약속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3) 기독교 신학 자체가 참된 자연신학이다.

자연신학이 하나님의 보편성이 문제되는 한, 우리는 계시 신학의 차원으로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자기 자신을 관철시키는 하나님의 자기 증명으로 생각돼야 한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와 일치한다고 생각하는 신학은 모든 것에 대한 심판자와 주가 될 것이다.

바르트의 계시신학은 교회라고 하는 특별한 내부 영역으로의 퇴각이 아니라, 한분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고려할 때 자신의 고유한 성격을 가진 공적이며 보편적 신학이다. 자연신학은 종말론적 영광의 신학의 미리-나타남일 뿐이다. 화해는 구원의 선취요, 구원은 화해의 완성이다. 모든 자연신학의 참 문제는 그의 본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없는 그 자신을 신격화시키는 인간을 통한 그의 사용에 있다.

4) 기독교 신학의 과제로서의 자연 신학

기독교 신학이 그 자신을,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위하여 세상에 오셨고 또 교회가 존재하는 하나님 나라의 기능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사회의 공공성 안에서 공적 신학으로서 자기를 전개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기독교 신학은 그 자신의 종말론적 신학으로부터 하나의 새로운‘창조 신학’을 기획해야 할 것이다.‘자연신학’은‘땅의 종교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나타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제2부 희망의 해석학

1. 약속의 논리

1) “희망의 신학”의 근원들

몰트만은 에른스트 블로흐의 『희망의 원리』에 대하여 자주 말했다. 그는 동독판 『희망의 원리』 1권, 2권을 구하여, 유대교적 기독교적 메시아니즘에 열광했다고 한다. 종말론적 양심은 성서를 통하여 세상에 왔다. 몰트만이 원한 것은 희망에 대한 신학이 아니라, 희망으로부터의 신학 곧 종말론으로서의 신학, 세계 안에서 해방하는 하나님 나라의 신학이었다.

2) 약속이지 예언이 아니다.

약속은 말의 행위이다. 그것은 약속하는 사람 자신을 통하여 보증되는 확약이다. 그것은 시사하는 말이 아니라 행위의 말이다. 말을 하고 자기의 말에 자기가 묶여 있음을 아는 사람은, 이를 통하여 정체성을 얻는다. 우리가 우리의 약속을 지킬 때, 우리는 신뢰를 얻고, 우리가 우리의 약속을 깨뜨릴 때, 사람들은 우리를 불신하며,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 일부를 잃어버리고, 마지막에는 우리 자신을 더 이상 알지 못하게 된다.

3) 계약의 맹세

하나님은 약속한다. 그라 그는 예언하지 않는다. 신적 약속은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계약으로 이끌어간다.(창 15:18, 17:2등) 하나님이 계약을 세우며, 그것을 지키기로 자기 자신에게 의무를 지운다. 그러나 계약 자체는 하나님과 인간의 상호성에 기초하며, 계약에 걸맞는 인간의 태도를 요구한다. 이 계약의 근원적 형식은 시내산 계약인데, 이 계약 형식은 한편으로 자기 자신을 구속하는 하나님의 계약의 임재의 약속을 내포하며, 다른 한편 그의 백성을 그의 소유로 선택하는 것을 내포한다. 이스라엘의 선택의 목적은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민족들의 해방과 땅의 축복을 위하여 봉사하는 데 있다. 하나님의 모든 계약의 약속들이 지닌 이 보편적이며 종말론적 방향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의무를 지우는 사건 자체에 숨어 있다.

4) 약속은 하나님의 미래를 현재화시킨다.

하나님의 약속들은 역사적으로 아브라함과 같은 특정한 인물에게 일어나며 회상과 이야기를 통하여 현재화된다. 모든 사물들의 새 창조에는 죽음이 더 이상 있지 않으며 시간이 그의 마지막에 이를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이 약속들의 성취에 대하여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들로부터 산다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영은, 삶으로 영위되는 약속으로 되며 생동하는 희망으로 된다. 희망 안에서 사는 삶은 미래의 세계의 삶 속에 있는 그 자신의 성취의 실재적 약속이 된다.

5) 약속은 하나님의 가능성들 안에 있는 역사를 연다.

모든 약속은 약속된 것의 성취를 촉구한다. 하나님의 모든 계약은 모든 것을 성취하는 하나님의 임재를 촉구한다. 따라서 성취의 관점에서 볼 때, 모든 약속은 장차 올 것의 미리 보냄을 뜻한다. 역사적 현재와 종말론적 미래의 중재는 오직 약속의 언어 속에서만 일어날 수 있으며, 개념의 언어 속에서만 일어날 수 있다. 하나님의 위대한 약속들은 경험될 수 있는 현실에 상응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을 넘어 미래를 지향한다. 하나님의 약속들은 종말론적으로 하나님의 오심을 지향하며, 그러나 역사적 현실은 시간적으로 지나가버리는 것이며, 그러므로 약속들의 미래 잠재성을 다 퍼낼 수 없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6) 종교개혁의 약속 개념에 대한 비판

죄인의 칭의를 안셀름의 보상설과 십자가 신학에 근거시킴으로 말미암아 칭의의 과정을 고해성사와 같이 죄의 용서로 위축시켰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죄의 용서를 넘어서며, 의, 다시 태어남, 새 창조, 성령의 부으심으로 지칭되는 그 자신의 의미를 가진다. 루터가 칭의를 죄의 용서로 위축시킴으로 말미암아 초기 경건주의의 중생론이 초래됐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칭의의 밀접한 관계는 어거스틴으로부터 유래된다. 칭의의 사건은 죄의 용서와 칭의의 약속의 통일적이고 나누어질 수 없는 활동으로 이루어진다. 칭의의 약속 가운데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우리의 삶 속에 등장하며 우리를 그의 나라의 미래 속으로 취한다. 최후의 심판 자체가 아니라, 최후의 심판과 하께 시작하는 모든 사물들의 새 창조가 현재적 칭의 사건의 종말론적 지펴이다.

7) 창조의 실재적 약속

하나님 창조의 이야기는 어떤 종말을 가리키는가에 대한 질문을 담는다. 모든 시작에는 끝이 속하기 때문이다. 여하튼 간에 이 시작의 목적을 우리는 종말론적이라 부를 수 있다. 조직신학적으로 ‘태초’와 함께 정립된 시간의 창조로부터 귀결된다.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역사는 죄의 타락 다음에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창조 자체와 함게 시작하며, 창조의 시간은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이다.

2. 역사적 해석학

1) ‘새로운 정치신학’과 ‘정치적 해석학’의 생성

모든 종말론적 신학은 사회 비판적 신학으로서의 정치신학이 될 수 밖에 없다. 라틴 아메리카의 출발의 대륙에서는 해방신학이 생성하였고, 1968년 메델린 주교 회의에서 필연적인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일차적 선택을 확신시켰다. 새로운 정치신학과 하께 에른스트 블로흐의 메시아적 희망들과 아도르노의 묵시사상적 변증법을 받아들였고, 그들과 신학적으로 논쟁하였다. 나에게는 함께 고난당하는 하나님에 관한 십자가 신학과, 정치적 종교적 우상들과 시민종교의 요구들에 대한 기독교적 비판이 중요하게 되었다.

2) 미래의 역사적 해석학

‘역사적’이라는 말은 미래와의 관련 속에 있는 과거와 현재의 통일성을 뜻한다. 그것은 정치적인 것을 포괄한다. 모든 역사적 해석학은 역사에 대한 이해를 전제한다. 역사와의 모든 인식적 관계는 역사의 존재론을 내포한다. 정치적 해석학은 억압으로부터 생명으로의 해방을 지향한다. 하나님의 영은 생명의 원천이다. 역사적 현존은 현존의 역사성일 뿐 아니라, 역사 안에 있는 현존이다. 역사에의 참여는 역사의 관찰로 끝날 수 없다. 순수한 역사가는 일반적으로 좋은 정치가가 아니며, 정치가는 좋은 역사가가 아니다. 참여는 이론과 실천을 역사의 경험 속으로, 실로 역사의 공동체적 경험 속으로 결합시킨다.

3) 성서적 약속사의 해석학

기독교 기본문서의 두 가지 독특한 특성이 있다. 그것은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이원을 말하는데, 이 이원은 기독교를 유대교와 분리될 수 없이 결합시키며, 기독교에 대하여 구약성서는 그 자신의 토라이다. 다른 한편, 이것은 그 자신을 넘어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오심을 가리키는 성서의 전통들의 약속사적 특징이다.

구약성서의 약속의 넘침은 그리스도에 대한 관찰과 성령의 경험을 하나님 나라의 미래를 지향한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종말론적 상징과 함께 성서의 미래가 표현되며, 이로써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통일성이 표현된다. 종교개혁의 해석학적 기본 명제에 의하면, 성서는 바로 그 자신의 해석자이다. 성서의 주체성을 인정할 때, 성서는 그 자신을 독자에게 스스로 개방한다. 성서가 교회를 해석한다면, 교회는 장차 올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되며, 하나님의 약속의 모든 가운데 있는 것으로 파악되는 사건을 따른다. 실존론적 해석의 학파에서 성서 해석과 서로 강화되고 심화되듯이, 정치적, 해방신학적 해석학에서 본문 해석과 콘텍스트 분석도 서로 강화되고 심화된다.

교회는 믿는 사람들의 백성이다.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과 고난당하는 사라들의 백성이다. 가난한 사라들의 해석학 없이는, 소위 성서의 일에 비추어 적절한 교회적 해석학은 없으며, 가난한 사람들의 친교와 해방 없는 소위 적절한 해석학적 실천은 없다.

3. 성서의 삼위일체적 해석학

1) 무엇을 통하여 문헌들이 성서가 되는가?

내용의 해석학은 성서의 일과 성서의 보는 사이의 차이와 내적 순환을 전제하며, 성서에 대한 내용적 비판에 대하여 열려 있다.‘토라/구약’의 성서의 일은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계약이요, 이 계약과 함께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들, 곧 이스라엘을 넘어 모든 민족들의 구원과 모든 창조의 평화를 목적으로 하는 하나님의 약속들이다. 계약과 함께 하나님의 위대한 약속들의 역사가 열려진다.

교회를 생성케 하는 일의 견지에서는 성서가 교회의 주체이다. 성서의 독립을 우리는 성서의 축자영감에 관한 다양한 이론들에서 발견한다. 근본주의는 성서의 일을 바르게 파악하지 못한다. 성서의 이해에 의하면 성령을 종말론적 성서의 성취와 모든 창조를 거룩하게 하는 하나님의 장차 올 영광의 시작이다. 성서를 읽고 그것을 이해하며, 성서에 상응하여 살고 또 성서를 선포하고자 하는 욕구는 오직 성서의 일로부터 생성한다.

2)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인가 아니면 인간의 신앙의 증언인가?

성서는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이기 때문에 신적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의 성육신 다음에 이 말씀의 성문화가 뒤 따른다. 성령으로부터 성서를 통하여 선포 안에서, 이것은 삼위의 차이들을 결코 폐기하지 않는 동일화들의 삼위일체적이며 해석학적인 순서들이다. 영원한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기를 계시하였는가 아니면 모세의 토라를 통하여 계시하였는가? 아래로부터의 해석학은, 우리가 성서의 문헌들을 인간적이며, 역사적이며, 사회적 그리고 문화적으로 제약된 신앙의 증언들로 생각할 때 일어난다. 기독교의 해석학에서 실존의 역사성의 이러한 보편적 해석학에 첨가하여, 처음부터 인간을 신앙의 결단 아래 세운 케리그마의 역사가 첨부된다. 역사 속에 있는 인간 실존의 종교적 자기 해석들은 유동적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영원이 아니라, 인간 실존의 구성적 역사성이 여기서 常數가 된다는 것이다. 위로부터의 해석학에서 상수는 신적 주체라면, 아래로부터의 해석학에서 그것은 자기를 진술하며 계시하는 인간의 주체성이다. 이 아래로부터의 해석학은 실존론적 존재론이나 가정된 인간학적 상수를 통하여 근거되어서는 안된다. 하나님 인식의 길은 한 영으로부터 한 아들을 통하여 한 아버지에게로 간다.

3) 본래적 해석자인 생명의 영

요한복음 14-16장에 기록된 예수의 고별사에 의하면, 보혜사가 오도록 하기 위햐여 아들이 죽는다. 그는 보혜사를 보내달라고 아버지께 간구한다. 보혜사는 감추어져 있는 것을 드러낼 진리의 영이다. 진리의 영이 전달하는 것은, 주님이신 그리스도와 그를 부활시킨 하나님의 인식이다. 하나님은 오직 하나님을 통하여 인식되기 때문에, 우리는 오직 그의 빛 속에서 빛을 볼 수 있다.(시 36:10) 하나님으로부터 단지 하나님의 인식만이 오는 것이 아니라 인식함도 온다. 그리스도를 인식하고 그를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시킨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영이신 하나님에 의하여 밝게 깨달음을 얻으며 영원한 빛 속으로 등장한다. 영이신 하나님은 생명의 원천이다. 그리스도 자신이 인격 안에 이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살리는 영은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활동을 계속 이어진다. 1. 성령은 예수도 성령 가운데서 계속 활동하며, 성령을 통하여 병든 사람들을 고친다. 2. 성령은 죄를 용서하며 인간을 억누르는 죄책의 짐을 제거한다. 3. 성령은 억압을 당하며 착취를 당하는 백성의 불의한 구조들과 폭력을 행하는 자들로부터 해방시킨다. 생명을 생동케하는 것은 니체가 말한 치명적 “힘에의 의지”가 아니라, 생명을 향한 창조적 사랑이다.

4) 성서본문들의 생명을 장려하는 요소

생명은 언제나 다른 생명의 희생으로 살며, 생명의 투쟁은 생명을 상승시킨다.

4. 신학적 인식론

1) 동일성의 기본명제

인식을 유도하는 관심은, 동일한 것을 동일한 것과 결합하도록 노력하는 에로스의 힘이다. 동일성의 기본 명제를 하나님 인식에 적용할 경우, 인식하는 인간의 신격화가 일어나거나, 하나님의 인간화가 일어난다. 우리 위에 신적인 것을 우리는 오직 우리 안에 있는 신적인 것을 가지고 인식할 수 있다. 하나님 인식에서 동일성의 기본 명제는 모든 하나님 상들과 하나님 개념들의 인간화를 초래한다.

2) 아날로기아의 원리

하나님은 만유도 아니고 절대 정신도 아니며, 가장 높은 관념도 아니고 통일성도 아니다. 하나님은 파악될 수 있는 모든 내용들의 저편에 있기 때문이다. 피조물적 존재의 총체성은 위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계시이며, 하나님의 현존과 활동이 그것으로부터 읽혀질 수 있는 비유가 아니라, 비유를 선택한 비유를 넘어서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비유이다. 하나님의 형상에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관계를 다시 한번 구분할 필요가 있다.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 위에 계신 하나님은, 영광의 나라에서 이루어질 창조 전체의 다시 태어남의 시작인 성령의 에너지 가운데서 이미 여기에 이루어지는 하나님과 그 자신의 경험이다. 인간적이며 아날로기아적인 하나님 인식의 가능성은 인간의 창조와 함께 하나님 형상으로 주어져 있다. 아날로기아의 원리는 신학적 체계 형성을 위한 지침이 아니라, 신학적 사고활동의 묘사이다.

3) 은유들의 놀이

인간의 경험될 수 있는 세계로부터 오는 은유들을 가지고 경험될 수 없는 신적 현실을 이해하도록 시도하는 것이, 종교적 진술의 기본 특징이다. 우리의 일상 언어는 윤유들로 가득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은유적 언어라 지칭할 수 있다. 은유는 놀이의 형식을 취하기도 한다. 은유들은 존재할 수 있음을 상정함으로써, 기존의 것을 넘어 가능한 미래를 선취한다. 공관복음서의 비유들은 전체적으로 놀이의 형식을 가진다. 그들은 주역들과 조역들, 대화와 그리고 청중들에 대한 질문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이 비유들은 성서 드라마에서와 같이 흉내 내어 연기될 수 있다.

4) 부정적 신학-부정주의

하나님에 관해서 우리는, 그가 무엇인가를 말할 수 없으며, 단지 그가 무엇이 아닌가를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부정적 신학은 아놀로기아적 신학의 필연적 동반자이다.

동방교회가 말하는 부정적 신학, 혹은 부정주의적 신학은 두 가지 뿌리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이미 소크라테스 이전의 그리스 철학에서 시작하는 하나님의 의인적 진술에 대한 비판과 구약성서의 형상 금지 명령에 있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본질의 신학은 --본성의 종은- 다양한 신들의 현상들 배후에 있는 신성의 본질에 대하여 질문하였으며, 오직 부정을 통하여 묘사될 수 있는, 다양한 것 속에 있는 일자로서의 이 신적 본질은 은폐되어 잇고, 인식될 수 없으며, 진술 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리스 종교 계몽주의의 이 부정적 신학은 기독교 신학에 깊은 영향을 주엇고, 기독교 신학은 이것을 받아들여, 그 자신의 성서적 전통들과 결합시켰다. 그리스 철학은 현상 세계의 다양성의 변화와 허무에 대하여 일자의 부동성과 불변성을 지키고자 노력한다면, 이스라엘의 형상 금지 명령은 하나님의 상들과 비유들을 가지고 신적인 권능을 자기에게 보장하려는 인간의 시도에 대하여, 그의 약속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의 역사성을 보존한다. 그리스적으로 진리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 동일하게 존속하는 일자를 뜻한다면, 성서적으로는 그것은 그의 약속에 대한, 따라서 자기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뜻한다. 인식을 유도하는 관심은 에로스다. 서로 다른 것의 보충을 동경한다. 하나님 인식에 적용할 때, 이 변증법적 원리는 친교 가운데 있는 다양성을 인정하도록 인도한다. 하나님을 인식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감내한다는 것을 뜻한다.

6) 체제 와해적 하나님 진술의 반대상들, 반대 이야기들과 반대세계들.

이스라엘과 기독교의 성서적 전통들과 외경의 전통들 속에서, 자신의 종교의 협력자들에 대항하여 말하는 체제 와해적 지하언어를 더 많이 발견한다. 성서의 이야기들과 시편들 가운데 명백히 예언자적이지 않으며 묵시사상적이지 않은 부분들에서도 우리는, 이방인들의 지배와 백성들의 노예화의 경험들 속에 있는 역사의 근원적 상황을 발견할 수 있다. 이집트의 神政 하에서 당하던 노예생활로부터의 해방에 대한 회상은, 바빌론의 유배 생활 속에서 바빌론의 신정의 지배하에서 하나의 다른 양자택일로서 이야기되며, 제2이사야가 말하는 ‘새로운 출애굽’에 대한 희망을 일으킨다. 세계의 현 상태와 낮선 주인들의 지배에 완전히 조화된 기독교는, 십자가에 달려 죽은 그리스도를 회상하지 않는 기독교일 것이며, 그것은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일 것이다.

7) 성례전적 하나님 진술 :믿음을 창조하는 말씀.

믿음을 창조하며 확실하게 만드는 이 하나님 진술을 우리는 성례전적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말씀 안에서 경청될 수 있고, 이에 대한 전권은 성령의 내주하는 능력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 진술의 성례전적 이해에 대한 언어적 상을 루터는 함께 이해함이라 불렀다. 기독교적 하나님 진술은 그 핵심에서 성례전적 하나님 진술이다.

제3부 해방하는 신학의 영상들

1. 억압의 두 가지 면들.

제1세계와 비판적으로 논쟁하는 제3세계의 상황적 신학들을 논한다. 이 신학들은 승리잗르이 세계사라고 부르는 여가의 밑바닥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자리잡고 있으며, 억압받는 자들, 가난하게 된 자들, 차별 대우 받는 자들이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는 압제로부터 자신을 해방하는 실천으로부터 생성되었다. 우리의 편협한 유럽 중심주의가 지닌 제한성의 한계를 시사하기 위해서 중요하다. 미국의 흑인신학, 라틴아메리카에서 생성된 해방신학, 한국의 민중신학, 세계 도처에 현존하는 여성신학을 논하자.

인간을 통한 인간의 억압은 많은 얼굴을 가진다. 그것은 정치적 예속, 경제적 착취, 사회적 차별, 문화적 소외, 성차별적 비하 그리고 더 많은 다른 것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생명에 대한 범죄이다. 억압은 언제나 두 가지 면을 가진다. 한 면에는 지배자가 있고, 다른 한 면에는 노예가 있다. 한 면에는 착취자가 자기를 높이 올리고, 다른 한 면에서는 그의 희생자가 고난을 당한다. 억압은 언재나 이 두 가지 면들을 가지기 때문에, 해방의 과정은 두 면에서 함께 시작돼야 한다. 억압받는 자들의 해방은 하나의 의무이며, 많은 상황들에 있어서 좌우지간 억압받는 자들을 위하여 자명적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제3세계 해방신학들은, 흑인신학, 해방신학, 민중신학, 혹은 여성신학이든 간에 예외 없이 가난하고 억압받는 대중들의, 그들을 착취하는 과두정치의 지배로부터 해방을 위한 신학이다.

2. 백인들을 위한 흑인신학

1) 나의 개인적 접근

엄청난 수의 아프리카인들의 노예화를 그 당시의 사회적 콘텍스트 속에서 보아야 한다. 그것은 사회적 틀의 산물인데, 아메리카의 농장 제국들의 서구 산업사회의 건설은 아프리카인들의 노예화를 통하여 확립됐다. 미국에서 강연여행을 할 때마다 흑인신학교에서 강연을 했다.

2) 아프리카인들의 노예화(1513-1888)와 근대 서구 세계의 건설

노예제도는 근대 이전 대부분의 사회들이 가진 제도다. 계몽주의의 민주주의 운동과 산업혁명을 통하여 사회제도로서의 노예제도는 철폐됐다.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게 창조되었으며, 양도할 수 없는 인권의 담지자이다. 유럽의 나라들에서는 18세기와 19세기에 이르기까지 농노제도가 지배하였다. 농민들은 토지와 함께 판매됐다. 노예제도는 정치적으로 폐지됐으나, 백인의 인종주의는 사라지지 않았다.

3) 마르쿠스 모사이야 가르비(1887-1940)와 아프리카 복귀 운동

마르쿠스 가르비는 1919년부터 1930년까지의 시대에 일어난 흑인 민족주의의 카리스마적 영도자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아프리카의 고향을 회상함으로써 가나한 흑인들의 자기의식을 강화시키려고 하였던 그의 시도였다. 우리는 자랑스러운 아프리카 국가의 한 부분이요 파라오들의 후손이다. 그는 1940년 영국에서 사망하였다. 그러나 1962년 자마이카가 독립한 이후로 그는 거기서 민족의 영웅으로 숭배되고 있다.

4) 말콤엑스(1925-1965)와 흑인분리

노예화가 남기는 더 심각한 문제는 포로 상태라기보다, 해당하는 노예들과 그의 후손들의 영혼 속에 깊이 새겨진 상처이다. 미국의 흑인들이 1. 인종주의를 통하여 2. 빈곤을 통하여 이중으로 억압되고 있다. 그러므로 흑인의 공동체를 세우고 백인들의 인종주의에 대항하여 싸우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 말콤엑스는 북부에 사는 가난한 흑인들의 대표자였다. 말콤엑스는 1950년대와 60년대 흑인 공동체 안에서 마틴 루터 킹에 대한 하나의 위대한 대안을 제시하였다. 백인들에게 그는 극단주의자, 흑색 인종주의자, 증오의 설교자였고, 많은 흑인들에게 느느 흑인들의 새로운 자기 존경을 가르치는 사도였다.

5) 마틴 루터 킹(1929-1968)과 아메리카적 통합

미국 흑인들은 아프리카적 영혼과 아메리카적 영혼이 있다. 마틴 루터킹은 흑인들이 아메리카 사회로 완전히 통합되는 것을 주장하였다. 마틴 루터킹은 자기를 먼저 아메리카인으로 느겼고, 그 다음에 흑인으로 느꼈다. 그들의 권리에 대한 투쟁을 통하여 아메리카의 흑인들 또한 백인들을 인종에 대한 불안과 인종에 대한 증오에서 구원해야 한다고 킹은 생각하였다. 킹의 정치신학은 미국에사는 흑인들의 고난으로부터 생성하였으나, 보편적으로 모든 사람들의 자유와 관련되어 있었다.

6) 제임스 콘과 흑인신학

흑인신학은 아프리카 신학이 아니라, 아프리카의 문화 콘텍스트 속에 있는 신학과 대조되는, 백인의 문화 콘텍스트 속에 있는 억압받는 자들의 신학을 가리킨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그들 조상의 노예화의 무거운 짐으로 고난당하는, 굴욕을 향하여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들에 대하여 특별한 연관성을 가진다. 흑인의 존재는 아메리카에서 억압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가장 잘 묘사하는 존재론적 상징이요, 눈에 보이는 실재라는 것을 듯한다. 기독교인들은 그의 고난 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있다. 하나님은 불의와 폭력의 역사 속에서 모든 사람들을 악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억압당하는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의 편을 드신다. 흑인신학의 종말론은 현재적이며 공격적이다. 흑인신학은 이 삶에 대한 희망이다. 흑인들의 조망에서 볼 때 기독교의 희망은, 이 세계에 참여하며, 이 세계를 그것이 되어야 할 바로 만드는 것을 뜻한다.

3. 제1세계를 위한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신학

1) 개인적 경험들

‘희망의 신학’의 전망 속에서 정치신학의 실천을 유럽의 콘텍스트가 아니라, 유럽과는 전혀 다른 라틴 아메리카의 콘텍스트 속에서 발견하였다.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신학과 몰트만은 1989년 11월 16일 산살바도르 대학교에서 살해되면서 결합됐다.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은 살해당한 형제들과 자매들의 순교에 대한 상징적 암시로서 유리판 아래 놓여 있다.

2) 한 대륙의 착취와 서구 세계의 건설

해방신학은 라틴 아메리카 대륙의 인지와 함께 시작한다.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착취는 스페인의 금에 대한 열병과 함께 시작됐다. 금은 기독교인들의 하나님이다. 해방신학자들의 첫 세대가 라틴 아메리카의 현재상황에 대한 분석은 종속이론을 통하여 지배됐다. 라틴 아메리카는 유럽의 식민지였으며, 제1세계의 발전을 통하여 함께 발전된 것이 아니라, 변두리로 밀려났다. 종속이론에는, 민족주의적 학파에서 이 주체는 국가이고, 마르크시즘적 학파에서 그것은 착취당한 계급이며, 민중론적 학파에서 그것은 민중이다.

3)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 그리스도를 위한 선택

교회가, 가난한 사람들의 포괄적 자유의 나라가 그 속에서 오는 하나님 나라의 교회가 될 때,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의 교회로 된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은 먼저 그리스도의 교회의 새로운 방향 정립과 자리 매김을 위한 교회적 개념이요, 또한 그러한 한에서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과의 연대, 빈곤에 대한 저항,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자신의 참여를 위한 정치적이며 도덕적 개념이다. 가난한 사람들 속에서 현존하는 그리스도를 보아야 할 것이며, 골 1:24에서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고난에서 결여되어 있는 세계의 구원을 위한 고난을 그들의 고난 속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4) 역사적 해방과 종말론적 구원

해방신학은 인간이 역사적으로 억압에서 자기를 해방하며 자기를 자신의 역사의 주체로 만드는 과정에 대한 신학적 해석이다. 해방신학자들은 그들의 자유에 대한 동경과 해방을 위한 투쟁에서 민족들의 역동성이라 부르는 것은, 교회가 현재 세계의 역동성과 연결을 추구하였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에 철저히 상응한다. 해방신학에서 자유는 무엇인가? 그리스도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세계의 역사 속에서 인간이 됐다. 해방신학에서 총체성이란 무엇인가? 그는 역사의 통일성에서 출발하며, 세계사와 구원사를 구분하고자 하지 않는다. 착취에 대항하여 싸우는 사람은, 구원의 종말론적 활동에 참여한다. 해방신학에서 역사적 진보란 무엇인가? 역사의 마지막 목적과 연관된 역사적 통일성에 대한 생각은 필연적으로 역사적 진보에 대한 표상으로 인도한다.

3) 해방신학에 대한 로마교회의 투쟁

교서의 비판 가운데 첫 비판의 대상은 마르크스주의다. 마르크스주의는 反복음이다. 만일 가난한 자들이 구원자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은 쓸데 없는 것이다. 몰트만은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은 인정하지만, 공산주의적 처방은 부정한다. 두 번째 비난은 내재주의라 불린다. 하나님의 나라는 해방운동과 동일시되며, 계급투쟁이 구원사의 구성 요소로 됐으며, 가난한 자들이 메시아적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언된다. 셋째 비판은 폐기의 비판이다. 하나님 나라와 그것의 돼감을 인간 해방운동과 동일화시키며, 계급투쟁을 통한 인간의 자기 구원과정을 뜻하는 역사 자체의 발전의 주체를 역사로부터 만들고자 그들은 노력한다.

4. 지배계급을 위한 민중신학

1) 한국에서 개인적 만남들

1975년 3월에 몰트만은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고, 서울에 있는 한신대에서 안병무 교수를 알게 됐다. 1945-1948년까지 3년 동안 전쟁 포로 생활 속에서 패전 민족의 한 사람으로 몰트만이 얻었던 경험들을, 정치신학의 희망들로 결합시켰다. 박정희 체제에서는 많은 대학생들이 구속되었고 고문을 받았다. 김대중씨는 감옥에 갇혀 있었다. 감옥에서 보낸 그의 서신들을 독일에서 번역하여 출판하였다. 1975년 한국은 노동자들을 혹독하게 착취하는 제3세계의 개발국가였다. 그러나 오늘날은 엄청난 외채를 짊어진 첨단과학기술의 국가이다. 서울에 있는 빈민지역의 민중교회들이 행하는 것과 같은 고유한 방법으로 한국의 민중신학은 가난한 자들(민중)의 예수의 복음을 이 토착적 민중적통을 그리고 저항전통들과 결합시킨다. 한국의 고난당하는 민중의 상황적 신학이요, 그러므로 예수께서 복이 있다고 선언하는 전 세계의 하나님 나라 백성에 대하여 열려 잇다. 또한 ᅟᅵᆫ중신학은 한국의 최초의 정치신학이다.

2) 마가복음에 나타나는 예수와 민중

민중은 누구인가? 예수 주변에 몰려서 그의 뒤를 따르는 사람들이 마가복음에서는 항상 ㅇ클로스라 불린다. 유대 사회에서 배제된 자들로 구성된다. 예수는 민중을 가르친다.(막 7:14, 8:34, 5:10), 예수는 민중을 불쌍히 여긴다.(막 6:34), 예수는 민중의 병든 사람들을 고친다.(막 1:34, 6:56), 예수는 민중을 먹인다(막 8장), 예수는 배로부터 민중에게 설교한다. (막 3:7) 예수는 민중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비유로 선포한다.(막 4:2) 안박사는 오클로스는 사회적 계층 개념이 아니라 관계의 개념, 예속된 사람들과 지배를 당하는 사라들에 대한 통치의 개념이다. 불의한 자들과 힘이 있는 자들은 오클로스를 두려워 한다. 예수는 아무 조건 없이 오클로스의 편에 선다.

3) 메시아와 민중

버림 받았고 흩어졌으며 병든 민중의 눈으로 볼 때, 예수는 멀리 떨어진 교회의 금관을 쓴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들을 이해하며 고난 가운데 잇는 형제이다. 그는 그들의 운명을 자신의 몸에서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형제로서 그는 가난한 사람들과 사귐을 가지며, 主로서 그들 위에 있지 않다. 모든 대리행위의 기독론은 연대성의 기독론에 근거한다. 민중은 그의 고난 속에서 예수를 이해한다. 고난당하며 죽어가는 예수에 의하여 그가 이해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남북으로 분열된 한국에는 사실 민중 메시아니즘이 존재하며, 이 메시아니즘은 동학운동으로 소급된다.

4) ‘고난당하는 하나님의 종’은 누구인가?

제1 세계의 죄는 누가 짊어져야 하는가? 제3세계가 그것을 짊어질 수 밖에 없다. 민중이 고난당하는 백성일 뿐 아니라, 그의 고난을 통하여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기독론에 관한 질문들이 제기되며, 그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과도한 것을 민중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니냐는 문제가 제기된다. 민중신학자들은 하나님 없는 세계에서 하나님의 고난의 장소를 억압과 착취를 당하는 민중 속에서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은 유대인이 없기에 유대인 배척주의가 없다. 아유슈비츠는 세계 기독교에서 발생하지 않았다.

5) 민주주의와 교회 안에서 ‘우리는 국민이다’

예수와 백성에게 상응하는 백성의 교회는 오직 교회 공동체의 혁신을 통하여 백성으로부터, 백성을 통하여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라틴 아메리카 가톨릭교회의 기초 공동체들과 자유교회들 그리고 오순절 교회들은 이에 대한 예와 모범이 된다. 예수는 가난한 사람들과 어린이들이 복되다고 축복한다. 그리스도교가 계신 거기에 교회가 잇다. 그리스도의 참교회는 그리스도의 친교가 있는 거기에 있다.

5. 남성들을 위한 여성신학

1) 개인적 개방들

교회 안에서 가능하게 되는 새로운 기독교적 사귐은 여성들에게 하나의 거대한 카리스마적 유익이 되며, 아마 그것은 남성들에게 더 큰 유익이 될 것이다. 기독교 교의학과 윤리학에는 언제나 창조의 질서에서, 죄와 타락 다음의 구원의 질서에서 남자와 여자의 올바른, 하나님이 원하는 관계에 대한 장이 있었다. 새로운 여성신학은 소위 여자들의 문제에서 본래 문제 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해명하였다.

여성신학자들이 자신을 여성 해방신학자들로 이해하든지 하지 않든지간에, 여성신학자들에게 중요한 문제는 억압받는 여자들을 가부장제와 남성의 성차별주의, 그리고 우리 문화의 일반적으로 남성 중심적 성격으로부터 해방하는 일이다. 남성 지배 역사의 밑바닥에서 속하는 흑인 노예들과 그들의 후손들, 제3세계의 억압당하는 사람들과 착취당하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가부장제 이후로 남자들에 의하여 착취당하는 여자들이다. 여성신학의 비판적 질문들과 고발들은 해방신학의 그것들과 유사하다. 그러나 그것들은 제1세계의 남성 중심주의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제3세계의 여성차별, 유교에서 가치의 평가, 아프리카에서 여자들의 신체 훼손, 인도에서 여아의 낙태에도 해당한다. 문화의 남성 중심의 성격은 피부 색깔과 전통을 초월하여 거의 모든 민족들 속에서 발견된다.

2) 가부장제와 그것의 귀결들 : 사실들과 해석들

막스 베버는 가부장제 개념을 사회학적으로 사용하여, 가정과 사회에서 남자의 법적 통치를 묘사했다. 가부장제는 남성의 세습을 뜻한다. 이 남성적 성차별주의는 하나의 집단 현상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지배당해야 할 여자들에 대하여 지배하는 남자들이 심리적으로 수행하는 전투의 수단이기도 하다. 가부장제와 또 그것으로 말미암아 남성적 차별주의에 나타나는 현상들은 여자들을 비하시킬 뿐 아니라, 남자들의 인간성을 파괴한다.

3) 성서와 가부장제

가부장제적 성의 질서는 성서를 통하여 세계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성서가 가부장제의 세계 속으로 생성됐다. 신약성서가 증언하는 그리스도 신앙은, 토라/구약성서에서 야웨 신앙과 비슷한, 가부장제적 율법들과 질서들과의 긴장 관계 속에 있다. 그들 모두가 하나님의 영의 에너지로 충만케 되는 반면, 나중에 등장한 ‘성직자들’의 ‘거룩한 통치’는 카리스마적 공동체의 자유를 몰아내었다.

4) 가부장제와 교회

아버지 하나님이 모든 권위의 원형이 되는 가부장제적 교회 형태 다음에, 또한 아들 하나님이 형제 자매 사귐의 원형이 되는 형제 자매적 교회 형태 다음에, 성령 하나님의 사귐을 새롭게 인지해야 할 단계에 이르렀다.

하나님의 형상은 자유롭고 동등하게 창조됐다. 여자와 남자의 관계에서 한 가지 문제는 인간으로서 그들이 가지는 동등함과, 여자와 남자로서 그들이 가진 독특성을 조화시키는 데에 있다.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의 사회적 개념이며, 남자들과 여자들의 충만한 인간적 사귐에 대하여 신적 광채와 가치를 부여한다.

생명의 복음을 통하여 불리움을 받았고, 의롭다함을 얻었으며 성화됐다. 그리스도의 공동체는 애초부터 남자들과 여자들에게 동등하게 세례를 베풀었으며 단 하나의 세례를 통하여 그들을 평등한 존재로 세웠다. 그리스도의 공동체의 모든 상이한 은사들과 과제들은 단 하나의 세례로 말미암아 오기 때문에, 세례를 받은 남자들과 여자들을 구분하여 다루는 것은 근본적으로 있을 수 없다.

성령을 통하여 생동케 되며 땅의 갱신을 통해 세워진다. 통일성은 은사들의 획일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복수성의 원천에 잇다. 인간이 공동체 곧 “그리스도의 몸”의 공동생활을 위하여 기여하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영의 에너지로 말미암은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카리스마적 공동체 안에서 작은 규모로 경험되는 것은, 모든 사물들의 새 창조의 우주적 지평 속에 있다.

5) 가부장제적 하나님 콤플렉스로부터의 남성 해방

남자들에 대한 여성신학의 의미를 질문할 때, 가부장제의 흉한 모습들로부터 남자들 자신을 해방시키고 그들 자신의 충만한 삶을 발견할 수 있는 출발점들이 무엇인가를 질문해야 할 것이다. 가부장제의 하나님은 유일신론의 언제나 더 큰 하나님이다. 유일신론은 우주적이며 정치적인 군주론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가장 오래된 가부장제적 통치의 정당화이며, 중국에서 로마에 이르기까지 거의 우주적으로 증명된다. 성령 하나님은 인간적인 사귐 속에서 그리고 이 사귐을 통하여 언제나 공동체적 하나님으로 경험됐다. 성령의 에너지들은 고나계들의 힘이다. 하나님의 영 안에 있는 이 사귐의 경험은 유일신론적 하나님 상의 개체주의에서 해방한다. 하나님의 영 안에 있는 생명은 새로운 신체성과 새로운 감성을 열어준다. 가부장제적 유일신론을 신학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길은, 기독교의 삼위일체론에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풍부한 관계를 가지며, 공동체적이며, 연합시키는 하나님이다. 그의 본질은 전능이 아니라 사랑이다. 삼위일체적 사랑은 “나누어라. 그리고 지배하라”는 로마의 격언에 따라 분열시키고 개체화시킴으로써 다스리는 것이 아니다. 삼위일체에 관한 생각은, 하나님의 현존을 우리 위에 있는 저 높은 하늘이나 우리 안에 있는 존재의 심연 속에서 물론, 사람들 사이의 사귐과 모든 피조물 사이의 사귐 속에서 찾도록 도와준다.

6. 답변되지 않은 질문들

1) 실천이 이론의 규범이라면, 실천의 규범은 무엇인가?

억압당하는 백성의 비참을 야기하는 원인들에 대한 분석을 근거로 그들을 위한 개입이 신학의 첫째 행위이며, 신학적 반성은 첫째행위를 전제하는 둘째 행위이어야 한다는 명제를, 그는 일면적이라 생각한다. 실천을 이론 앞에 선행시키는 것은, 나는 믿기 위하여 이해한다는 변증법적 반대면을 결여한 나는 이해하기 위하여 믿는다는 명제처럼, 안셀름적-교권적으로 보인다. 교회의 신조를 이해하지 못한 채 미리 맹목적으로 전제하는 신학은, 교회 밖의 학문들과 아무 관계도 없는 단지 교회 내의 학문일 뿐이다. 해방신학이 ‘개입하는 자들의 신학’이 돼야 한다면, 그것은 선한 의향을 가진 일종의 사회 경건주의가 될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은 그 자신의 실천, 곧 십자가에 달린 그 분의 뒤를 따름을 가진다. 이것은 사회주의적 선택을 넘어선다. 그것은 그들과 함께 혁명이나 국가를 일으킬 수 없는 그러한 사람들과의 연대적 사귐을 갖도록 인도하기 때문이다. 의의 이 실천의 규범은 누구인가?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 어린이들 속에 숨어 현존하는 그리스도이다.(마 25장)

2) 십자가에 달린 민중이 세계를 구원해야 한다면, 민중은 누구를 구원할 것인가?

가난한 사람들이 아무 보호를 받지 못하고 부유한 자들의 폭력적 행위들에 내맡겨져 있으며, 약한 사람들에 대한 폭력행위가 죄라고 볼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이 제1세계의 죄들을 고통당한다는 사실이다. 공관 복음서에서 그리스도는 장차 올 사람들의 아들-세계 심판자로서 가난한 사람들 속에 숨어 있는 상태로 이미 현존하며, 그에게 속한 사람들의 의로운 행위들을 기다리며,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혹은 그들에 대항하여 행하는 바에 따라 심판한 것이라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가난하고 착취당한 민중이 제1세계의 죄를 짊어짐으로써 세계를 구원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극복돼야 할 빈곤의 짐을 신학자들이 그들에게 지우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모든 나라의 프롤레타리아는 전위대적으로 인류의 해방을 위해서 투쟁한다.

3) 민중을 그 자신의 역사의 주체로 만드는 것이 해방의 목적이라면, 이 역사의 목적은 무엇인가?

각 사람과 온 인류들 “그들 자신의 역사의 주체”로 만드는 것이, 근대의 민주주의적, 사회주의적 모든 해방운동들의 선언된 목적이다. 모든 국민들이 민주적으로 자신을 조직하고, 모든 정부의 법적 권한이 자유로운 찬성에서 나올 때, 민주주의 사상은 비로소 그의 목적에 도달한다. 모든 해방의 목적은 자유이다. 그러나 자유는 무엇에 사용되는가? 역사를 완성하여 모든 것을 바르게 회복할 장차 올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기다림 속에 있는 정의와 평화와 창조의 보전을 위한 자신의 역사의 주체. 모든 것을 완성할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계 속에서 묶여 있는 자들의 해방과, 폭력으로 고난을 당하는 자들의 권리 회복과, 가난한 사람들의 어린이들의 축복과, 희망 가운데 있는 새로운 삶의 시작과 함께 시작한다.

4) 해방신학은 기독교 신학으로 하여금 가난한 자와 여성의 해방을 유도하는가?

제3세계 신학들의 출발점은 다수에 대한 소수의 지배와 불의의 모든 형식에 대한 가난한 사람들과 억압당하는 사람들의 투쟁에 있다. 신학의 참된 주체는 해방된 의식을 가진 가난한 민중이다.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들의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라틴 아메리카에서 대부분의 가난한 사람들은 기독교인데, 많은 사람들은 강제적으로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인 인디오와 흑인들이다. 그들이 정치적, 문화적 자유를 다시 얻게 될 때, 그들은 자신을 교회와 신학의 기독교에서 해방할 것이며, 그들의 억압당한 문화적, 종교적 전통들을 재발견할 것이다.

제4부 삼위일체의 넓은 공간에서

1. 개인적 접근들

삼위일체 하나님 신앙에 대한 이해는 세 가지 타당성을 열어주었다.

1960년대 말 이래 정치신학에 대해서 몰트만이 성찰했다. 독일의 열광하는 대중들이 한 민족-한 제국-한 영도자를 부르짖었으며, 1933년 히틀러가 그의 권력장악을 세계사적 섭리를 통하여 정당화하면서 스스로 이 섭리의 집행자로 자처하던 시대에 출판되었다. 이에 반하여 기독교 삼위일체론은 영원한 하나님을 하나님과 유사한 통치자와 결합시키지 않고, 세계 제국 로마의 이름으로 십자가의 형벌을 받은 그리스도, 그리고 하나님 개념에서 삼위일체론이 형성되면서, 정치적 문제로서 유일신론은 끝나 버렸다.

1972년 몰트만이 십자가의 신학을 연구하고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을 저술하였을 때, 하나님 아들의 십자가는 하나님 자신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의 신학적 질문으로 전환시켰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세계의 구원에 대한 의미를 얻기 이전에, 내재적 삼위일체의 사건이다. 삼위일체론의 다른 상은 중세기 라틴 계열 서방교회의 은혜의 의자이다. 아버지 하나님이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나타내면서, 죽은 아들이 그 위에 달려 있는 십자가의 횡목을 양손에 들고 있고, 성령이 비둘기의 모습으로 아버지에게서 아들에게로 내려온다.

몰트만은 필리오케라는 첨가물은 불필요하며 해롭다는 것을 정교회신학을 통해서 확신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삼위일체론으로 볼 때 아들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거꾸로, 필리오케의 첨가물이 없을 때, 아들은 아버지는 물론 성령으로부터 나올 수 있으며, 이로 인하여 기독론은 성령론과 상호관계 속에서 더 풍요롭게 된다.

2. 나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습니다.

1) 삼위일체 하나님의 단 하나의 이름

우리는 하나님의 비밀을 삼위일체라 부른다. 우리가 하나님의 하나됨에서 출발하여 이 하나됨이 그 속으로 전개하는 세 신적 품격들을 파악할 대, 우리는 삼면성에 대하여 말할 수 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영원한 사랑을 통하여 서로 결합되어 있다면, 그들의 하나됨은 그들의 일치성에 있다. 그들은 서로를 향한 희생을 통하여 그들의 독특한, 신적 사귐을 형성한다. 넘치는 사랑을 통하여 그들은 그들 자신 바깥으로 나가며, 유한하고 모순되며 사멸하는 피조물들의 다른 본질을 위하여 창조와 화해와 구원 속으로 그들 자신을 개방한다.

2)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역사

세계와 함께 하는 하나님의 역사는 삼위일체적 역사이다. 성부가 성자를 통하여 성령의 능력 가운데서 세계를 창조하며 그의 나라의 오심을 위하여 세계를 유지할 때, 성자가 성부에 의하여 성령을 통하여 세계를 향하여 파송되고 자기 편에서 성령을 성부로부터 세계 속으로 파송할 때, 또한 성령이 성자와 성부를 밝혀 변용하며 세계를 삼위일체의 영원한 삶 속으로 이끌어들일 때, 삼위일체의 모든 세 신적 품격들은 참여되어 있다. 성부에 대한 사랑으로 말미암아 성자는 인류와 모든 살아 있는 것을 구원하기 위하여, 스스로 인간이 되며, 지혜는 육이 된다. 성령이 존재하는 모든 것을 생명으로 가득 채우며 피조된 모든 것을 함께 유지한다. 신적 품격들의 상호 작용 속에서 일어나는 하나님과 세계의 삼위일체적 역사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역사 속에서 인식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사귐에서는 물론 삼위일체적 신앙에서 모든 것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 되심에 달려 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이해하는 사람은, 그 자신의 하나님의 자녀됨을 파악하며, 하나님의 나라 안에 있는 자기의 미래를 확신하게 된다.

3.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역사적 희망에서 하나님의 內住의 공간적 경험으로

상호간의 내주 곧 페리코레시스 사상은 그리스 교부들의 신학에서 유래한다. 이 개념은 획일성 없는 사귐, 개인주의 없는 인격성을 시사한다. 기독론에서 페리코레시스는 하나님인 동시에 사람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두 가지 다른 본성들, 곧 신적 본성과 인간적 본성의 상호 침투를 묘사한다. 예수와 아버지 하나님은 일자가 아니라, 상호간의 내주 속에서 하나이다. 신적 존재는 개인적인 현-존재, 사회적인 공동-존재, 그리고 페리코레시스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내-존재이다.

4. 삼위일체 통일성의 페리코레시스적 개념

삼위일체론의 발전에 대한 두 가지 출발점이 있다. 즉 형이상학적 출발저과 성서적 출발점이 있다. 형이상학적 방법은, 한 하나님이 있으며 하나님은 하나라는 통지를 전제한다. 삼위일체론의 발전에 대한 성서적 출발점은, 성자-성부-성령으로부터 시작해서 그들의 통일성을 질문한다. 통일성의 이 페리코레시스적 형성은 생각될 수 있는 유일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통일성의 삼위일체적 개념이다.

5. 삼위일체적 하나님 경험

삼위일체적 하나님 경험은 그리스도의 만남과 사귐 속에서 우리 인간이 받을 자격이 없는 은혜의 경험과 함께 시작한다.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통하여 삼위일체 안에 있는 그들의 삶이 시작한다. 신앙이란 하나님 약속에 대한 신뢰를 뜻한다. 그리스도의 사귐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는 또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며,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하나님을 신앙하기 시작한다. 성령의 사귐은 분명히 먼저 신자들과의 사귐이다. 은혜와 사랑과 사귐이 함께 작용하는 가운데서 삼위일체적 하나님 경험이 생성된다.

6. 삼위일체적 사귐의 경험

교회의 통일성은 삼위일체의 한 품격이 아니라, 세 신적 품격들의 페리코레시스적 통일성에 상응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중요하다. 삼위일체적 페리코레시스의 한 몸됨을 세 신적 품격들의 페리코레시스적 공동의 작용에 있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예수의 기도의 둘째 차원을 이해할 수 있다. 교회는 성령의 내주를 위한 공간일 뿐 아니라, 온 삼위일체를 위한 공간이기도 하다.

7. 삼위일체는 사회적 프로그램이다.

하나님 안에 있는 거룩한 삼위일체와, 정교회의 사귐의 원리는 자유와 정의가 있는 참으로 인간적 사회에 대한 모범이 된다고 몰트만은 생각했다. 하나님의 삼위일체에 상응하며, 그 속에 사는 인간의 공동체는, 특권과 자유의 침해가 없는 사회일 수 밖에 없다. 현대의 개인은 ‘나누어라 그리고 지배하라’는 고대 로마의 통치원리의 산물이 아닌가 의심한다. 개인의 인간 가치를 보호하기 위한 저항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 공동체를 형성하고 그들의 삶을 그들 자신이 사회적으로 결정할 때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바다찾기
바다찾기

한 개, 한 개, 남에게 선물이 될 자료이길 바라며 작성하는 보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