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을 사랑한 교회 - 신성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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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본질을 생각하는 글

돈을 사랑한 교회

Money Church

Life 신성남 지음 바른사역연구소


“세상에 어느 바보가 매주 꼬박꼬박 교회당에 돈을 바치며 교권적 목회자의

종노릇하길

원할까.

세상은

변하는데

아직도

어떤

교회들은 요지부동으로 돈과 권력을 추구한다. 그리고 결국 그런 몰상식이 체질화한 교회가 젊은이들을 질식시키며 그들을 떠나게 하고 있다.

한국교회에

바리새적

'경건의 모습'은

넘치지만, 실제

능력'은 갈수록 사라지고 있다는 증거다.” – 본문 중에서

'경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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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교회 돈'과 '눈먼 돈' 5 신학은 '정통', 사역은 '밥통' 17 개신교가 실패하고 있는 이유 29 "칼뱅은 이단 학살을 주도했다" 40 성직자가 '부자'인 종교 48

"교인들이 제사장이다" 56 어느 대형교회 목사의 기이한 퇴임 66 기도 잘 하는 '강도'들 72 '헌금 없는 주일'을 지지하는 이유 81 "시골 교회 잔혹사" 89

"목사가 교인에게 나가라고 한다" 98 "설교는 '하나님 말씀' 아니다" 108 속이는 '정치', 더 속이는 '종교' 122 예배로 영업하는 교회 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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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재미 없으면 지는 거다 146

목사의 호위무사 154 '설교 우상화'와 개신교의 변질 166 십일조 꼭 교회에 내야 하나 179 '예배주의'를 극복해야 한다 189 축도, 목사만 할 수 있나 194

어느 장로님의 탄식 206 '여성 사역자' 울리는 교회 213 가나안 현상은 '교회'가 탈출하는 거다 222 목사만 말하는 교회 231 "욕심대로 살다 천국 가겠다" 242

"돈 때문에 교회 못 간다" 253 칼뱅은 세습을 혐오했다 261 '무당 예배'와 '종교 영업 방해죄' 269 목사 아무나 한다 277 교회 속의 꼭두각시 285


3

'목사 연봉' 얼마가 정당할까 292 교회는 '벙어리 개'가 아니다 301 '명성교회' 세습 본격화하나? 309 설교에 속지 말라

314

예수는 돈 받고 설교하지 않았다 321

평신도가 꿈꾸는 교회 332 월급 주면 목회 누군 못 하나 341 자비량 사역과 '삯꾼 목회' 350 "교회에서는 계급장 떼자" 359 예수는 종교가 아니다 367

예수를 파는 사람들 374 "교회는 목사님이 독재하는 곳이야!" 381 같잖은 설교가 너무 많다 388 종교는 장사다 396 돈 바쳐야 복 받는 건 무당 종교 404


4

"난 교회를 떠나본 적이 없다" 410 목사는 교회의 지배자가 아니다 416 설교 남용과 교회의 변질 423 '목사교'는 변하지 않는다 431 칼뱅의 신정통치와 '사역적 이단' 436

준삯꾼 목사가 많다 447 "교회는 창녀다" 452 '목회자'와 '목회업자' 458 교회병에 걸린 기독교인들 466 돈을 사랑한 교회 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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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돈'과 '눈먼 돈' 예수님 시대의 성전은 '강도의 소굴'

근자에 어느 성도의 안타까운 탄식을 들었다. "모교회의 담임목사는 아들과 딸 모두 유학을 보냈다. 자식 잘 되기 바라서 최대한 뒷바라지하고 싶어하는 부모 마음이야 뭐라 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럼에도 가난한 교우들이 바친 헌금으로 생활하는 목사가 유학간 자식들 자랑하는 건 정말 봐주기 힘들었다. 설교 시간에 자기가 하나님 잘 섬겨서 자식들이 잘 되고 가정이 흥왕한다며 교우들에게 자기를 본받으라고 뻐긴 적이 있다. 재수 삼수하는 자식들 학원비 한번 선뜻 내주지 못해 가슴을 치는 가난한 부모들 앞에서 할 소리가 아니었다. 말은 청산유수인데 인성이 바닥인 자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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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사실 이는 종교 귀족들의 극히 일반적인

인생관이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 이런 부류의 목회자들이 생각보다 아주 많다. 단순히 '잘 먹고 잘사는 것'이 하나님을 잘 섬긴 결과라고 확신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대단히 용감무지한 사고방식이다. 만일 그런 천박한 논리를 그대로 따르자면, 이스람교도인 두바이 사람들이나 온갖 잡신을 숭배하는 일본 사람들이 하나님을 매우 잘 섬기는 사람들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런 귀족 교회들은 목사 대신에 차라리 재벌 회장을 모셔다가 당회장을 삼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아니 이미 일부 대형 교회 담임목사들의 사치는 충분히 재벌급이다.

아무튼 이 종교 귀족들은 입으로는 늘 예수님의 십자가를 따른다고 하지만, 막상 예수님처럼 가난하게 사는 것만은 결코 못 참는 인생들이다. 오히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기필코 부자로 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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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성이 바닥인 자들

요즘

웬만한

중대형

교회의

담임목사들은

연봉

외에도

각종

지원비나 수당으로 받아가는 돈이 어마어마하다. 심지어 너무 째째해서 창피할 정도로 소소한 것까지 모두 교회에서 돈을 청구해 추가로 챙겨가고 있다.

많은 경우 교회 돈은 거의 눈먼 돈이다. 먼저 먹는 목사가 임자다. 대부분 목회자들이 기본 연봉 외에도 사택유지비, 차량유지비, 목회활동비, 판공비, 강사비, 심방비, 교육비, 장학비, 통신비, 보험료, 도서비, 사무비, 절기수당, 안식년비, 휴가비, 여행비, 의료비, 그리고 상여금까지

일일이

열거하기조차

힘들

만큼

이런저런

잡다한

명목으로 교회 돈을 열심히 가져간다. 그래서 어떤 목사의 배꼽은 배보다 더 크다.

과연 세상의 어느 직업이 이렇게 이중삼중으로 알토란처럼 돈을 챙겨갈까. 대부분의 교인들은 모두 본봉 하나로 해결하며 힘들게 먹고 산다. 많지 않은 연봉으로 생활비, 주거비, 의료비, 교육비, 대출금, 연료비, 그리고 교통비 등 모든 것을 다 지불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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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교회처럼 '눈가리고 아웅'하는 집단이 우리 사회 어디에 또 있을까.

돈을 안 밝히는 교회와 목회자들을 얼마나 보았는가. 갖은 치졸한 수단을 동원하며 교회들이 얼마나 돈독이 올랐는지, 양식이 있는 성도라면 부끄러워 머리를 들 수 없을 지경이다. 예수님은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하셨지만, 종교적 재능이 뛰어난

한국교회는 '하나님과 돈'을 동시에 잘 섬기고 있다.

경기도의 P 교회는 1 년간 헌금 총액이 15 억 원인데, 그 중에 무려 6 억 원을 담임목사가 가져 갔다. 외형상 사례비는 6 천만 원이지만 실제는 교회 장부를 분산처리해서 이런저런 명목으로 챙겼다. 그런데 그것도 부족해서 추가로 교회 돈을 13 억 원이나 횡령한 사실이 드러났다. 더욱 기막힌 사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성스런 당회와 교인들의 전폭적인 지지로 여전히 담임목사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부패한 목사보다 더욱 더 부끄러운 것은 그런 목사를 거룩한 교회의 공의로 제대로 치리하지 못 하고 있는 우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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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패한 양심이다. 지도자도 소경이고 신도도 소경이니 백약이 무효다.

아무튼 미국에도 아주 통크게 돈을 잘 걷는 목사들이 있다. 월드체인저스교회의 '크레플로 달러' 목사는 세계 선교 명목으로 무려 6,500 만불(약 700 억 원)짜리 초호화 전용기를 마련하기 위해 20 만 명의 신도들에게 각각 300 달러씩의 헌금을 요구하여 큰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호화 생활을 한 '베니 힌' 목사 또한 이 방면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목사였다.

우리는 예수님 시대의 성전이 '강도의 소굴'이었다는 충격적 사실을 결코 잊어선 안 된다. 중세 시대의 성당 역시 '강도의 굴혈'이었다. 그리고 오늘날도 어떤 교회들은 십자가를 내걸고 '예수교'라는 간판을 번듯하게 달고 있지만 그건 그저 인조로 성형한 미끈한 외모일 뿐이고 실상은 그냥 돈 바치고 돈 뺏는 강도의 소굴이다. 물론 신앙이라는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범죄적인 강도질을 종교적인 무당질로 위장하는 것은 언제나 그들이 애용하는 상투적 수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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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이런 사교집단들이 더 번창해서 뭘 어쩌자는 건가. 어쩌면 차라리 '헤롯성전'처럼 조속히 망해주는 것이 세상을 이롭게 하며 크게 돕는 일이다.

광명한 천사로 위장한 '무당 목사'들

한국

개신교가

회개하고

변화하는

것은

바리새인의

교회가

예수님께 돌아오는 것보다도 더욱 큰 기적이 필요한 상태다. 그래서 실질적인 '교회 회복'이란 거의 불가능하고, 도리어 교회가 새롭게 소생하는 유일한 방법은 '어서 속히 망하는 길' 뿐이라는 '역설적 상황'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 사회 일각에서 "사찰이 망해야 불교가 살고, 교회가 망해야 기독교가 산다"는 한탄이 괜히 나오는 것은 아니다. 상당수 직업종교인들의 끝없는 탐심이 자기 신앙의 정체성과 순수성을 밑뿌리부터 통채로 훼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가 지난 30 년간 여러 교회들을 관찰하면서 얻은 가장 확실한 결론 중에 하나는 이단이나 사이비보다 더욱 위험하고 간악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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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력들이 정통으로 치장한 평범한 교회들 속에 긴옷을 입은 광명한 천사의 모습으로 뿌리 깊히 서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떤 교역자들은 입만 열면 '성전'과 '성직'을 노래하지만, 그것은 대단한 기만이다. 벽돌 덩어리 건물은 결코 거룩한 성전이 아니고, '가르치는 장로'의 직분인 목사는 사제나 제사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직전 제자인 12 사도들조차 제사장직이 아니었는데, 현행 목사직이

어떻게

사도의

전승을

이은

제사장이라고

주장하는

것인지 그 무식의 심오한 깊이를 도저히 알 수가 없다.

게다가 최근 강남에서 악취를 풍기고 있는 한 대형 교회의 목사는 순장들을 모아 놓고 노골적으로 '목사님들은 레위 지파요, 성도는 나머지 지파이니 레위 지파를 옹위해야 한다'는 헛소리를 했다고 한다. 한국의 대표적인 보수 교단 소속 목사의 이런 무지한 망말을 들을 때면, 도대체 저들의 신학교에서는 뭘 가르치고 배우고 있는지 지극히 의심이 갈 정도다.

성전주의자들은

어찌하든

교회당을

신성시하여

신도들의

삶을

교회에 가두고 종교적 야심을 채우려 한다. 그리고 성직주의자들은 자신의

신분을

하나님과

신도들

사이에

대리자로

격상시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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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하려 한다. 그러나 도대체 어떤 인간들이 제 맘대로 교단법에 장난을 쳐서 단지 종의 직분 중에 하나일 뿐인 일개 목사를 사실상 개신교의 교주로 둔갑시키고 있는지 정말 통탄할 일이다.

1500 년 전 중세 교회가 사도들이 원하거나 명하지도 않은 엉뚱한 '교황 제도'와 '사제 제도'를 만들어 교회의 직분을 수직적으로 계급화한 것은 아주 큰 잘못이었다. 마찬가지로 불과 500 년 전 개혁자 칼뱅이 최초로 만든 개신교의 '목사 제도' 역시 무조건 절대적인 제도는 아님을 알아야 한다. 교회는 성경의 원리에 따라 필요시 얼마든지 미흡한 제도를 보완하거나 바꿀 수 있다.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널뛰고 있는 일부 종교 귀족들을 보자. 이들은 늘 교회성장과 선교를 외치지만, 그 속내가 정말 하나님 나라의 확장일까. 그건 아니다. 어떤 무리들은 그저 자기들 밥상을 키우기 위해 불철주야 애쓰고 있을 뿐이다. 목회로 인한 거룩한 고난은 늘 작은 교회의 가난한 목사들 어깨에 지우고, 목회의 달콤한 열매는 대부분 중대형 교회의 귀족 목사들이 독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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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도의 무덤'으로 진화 중

여하튼

교회

비리를

비판할

때마다

일부에선

"진부하다!

지겹다!" 하며 다시 난리이겠지만, 그런 상투적 반박 논리는 아직도 한국교회의 적나라한 현실을 덮거나 왜곡하려는 간교한 잔수일 뿐이다. 그러면 예레미야 선지자가 같은 논리의 비판을 평생 반복한 것도 그냥 진부하고 지겨운 것인가.

아니 자신들은 허구한 날 똑같은 '기복적 무당설교'와 똑같은 '헌금 도적질'을

매주

반복하면서,

같은

논리의

비판은

이제

그만

삼가하라니 이는 얼마나 후안무치하고 적반하장인가.

교회 지도자들이 먼저 회개하고 스스로 비리를 멈추면 당연히 비판은 저절로 사라진다. 그런데 아직도 염치없이 목회 비리는 계속 확대하고 재생산하면서 반복적 비판은 멈추라는 건 도대체 어느 교단식 '목회신학'인지 모르겠다.

물론 단순히 외형적인 교회 부패를 척결하는 것이 교회 개혁의 본질은 아니다. 그럼에도 목회 독재, 헌금 횡령, 뇌물 수수, 표절, 성추행, 성직 매매, 그리고 교회 세습 등 고질적인 '목회 비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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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적으로' 해소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교회가 교권주의자들의 화려한 밥상이 되고 있고, 또한 그런 사심을 가진 잡배들이 교회를 장악하고 있는 한 그 어떤 개혁 논의도 현실적으로 별 실효성이 없기 때문이다. 즉 부패한 직분자들을 먼저 뿌리 뽑아야 비로소 바른 교회론을 사역 현장에 적용하여 실천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반대로 애초에 교회에 먹을 것이 없었다면, 벌레도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성경적 교회를 바르게 정립하기 위한 신학적 논의와 노력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상식의 회복을 위한 사전 정지 작업이다. 좋은 모종을 밭에 심기 전에 우선 지속적으로 유기농 살충제를 뿌려 거기에 기생하고 있는 해충들을 철저히 제거하는 것이 바른 순서이기 때문이다.

성전을 열심히 건축했다고 해서 모두가 참 신앙인은 아니다. 도리어 유대의 마지막 성전을 지은 헤롯이란 자는 신앙은 커녕 기본적인 인간성마저 개차반인 사악한 왕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는 백성의 환심을 얻어 자신의 정치적 야욕을 이루기 위해 성전을 지었다. 따라서 한국의 '성전주의자'들과는 아주 완벽하게 닮은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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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예수님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성전을

모독했다는 죄목으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껍데기 성전신앙을

악용하던

종교

지도자들이

도리어

성전이신

예수님을 박해한 것이다. 그런데 그 때처럼 또 다시 종교의 탈을 쓴 도적들이 지배자가 되어 주인의 성전을 차지한 교회, 이것이 현재 우리의 참담한 모습은 아닐까.

사실

신실한

목회자들을

비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성도들은 오히려 그들을 존경한다. 그러니 열심히 잔머리 돌리며 정당한 비판에 대해 불평분자로 매도하거나 비틀지 말라. 지금 성도들이 정녕 비판하고 있는 것은 감히 거룩한 교회 내에서 하나님의 대리자로 행세하며 무당질하고 있는 거짓 목사, 유사 목사,

귀족

목사,

그리고

사이비

목사이다.

그리고

그런

자들이야말로 매주 백주에 양들을 약탈하고 있는 노상 강도들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목사를

제사장으로

우상화하고

한낱

벽돌

덩어리를 성전이라고 기만하며 대형 건물에 명운을 걸던 많은 교회들은 마치 폐허가 된 로마의 카타콤 유적처럼 또 하나의 역사적 매장지가 되어 오히려 '강도의 무덤'으로 진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진정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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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눅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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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은 '정통', 사역은 '밥통' '칼뱅'의 제네바 학살과 종교개혁사의 그늘

칼뱅(1509-1564)은

장로교의

창시자이다.

그가

저술한

<기독교강요>는 사실상 개신교 신학의 큰 흐름을 주도한 최초의 조직신학

책이다.

특히

중세

가톨릭의

'토마스

아퀴나스'에

대항해서 그만한 신학을 체계화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해야 마땅할 것이다. 단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나중에 침례교, 감리교, 성결교, 그리고 성공회 등 대부분의 개신교 신학은 칼뱅의 작업을 기반으로 도전과 영향을 받으며 발전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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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칼뱅 역시 홀로 독창적인 신학을 창안한 것은 아니다. 그보다 훨씬 앞에 섰던 선각자들인 위클리프, 후스, 루터, 에라스머스, 그리고 아나뱁티스트 등의 신학과 사상이 그의 신학을 체계화하는 데에 직간접적으로 큰 도움을 주었다.

여하튼 칼뱅의 신학적 업적과 종교개혁사에 남긴 선도적 역활은 가히 지대하다고 단언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오늘날의 모든 개혁 교회들은 그의 열정적 헌신에 결코 적지 않은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필자가 여기서 굳이 칼뱅 사역의 어두운 부분을 재론하게 된 이유는 일부 목회자나 성도들 중에는 칼뱅의 신학이나 또는 그가 수립한 교회 제도에 대해서 다소 절대시하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칼뱅의 장점이 자주 부각되다보니 그에게도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간혹 간과하고 있다.

아울러 근자에 보면 국사 교과서를 가지고 장난치려는 자들이 적지 않은데,

앞으로

교회도

그런

발칙한

꼴을

보지

않으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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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사를

조금이라도

왜곡하거나

미화하지

말고

진상을

사실대로 알리고 바르게 가르쳐야 옳다고 본다.

종교개혁사의 어두운 진실, 제네바 학살

16 세기 칼뱅의 종교 개혁은 스위스 제네바를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제네바는 인구가 겨우 1 만 3 천명의 아주 작은 도시였다. 칼뱅은

여러

유여곡절을

겪었으나

결과적으로

그는

자신을

지지하는 시 의회와 종교국을 기반으로 많은 개혁을 추진하였다.

아래에

서술한

'카스텔로(Sebastian

내용은 Castellio,

한때

칼뱅의

1515-1563)'를

동료 인용한

신학자였던 전기작가

'슈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 1881-1942)'의 글과 교회사 학자 '필립 샤프(Phillip Schaff, 1819-1893'의 글을 참조하여 정리한 내용이다.

물론 이 내용에 대해 강한 반론이 있고 칼뱅의 무고를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지만, 독자들의 보다 객관적인 판단을 위해 여기에 일부 내용을 그대로 옮긴다. 필자는 '카스텔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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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을 소설로 보거나 일방적으로 묵살할 근거가 부족하고, 또한 '세르베투스' 화형에서 보여준 칼뱅의 살인적 처신이 결코 우발적인 것은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칼뱅과 그의 지지자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불과 4 년 동안 적어도 58 명을 처형하고, 76 명을 시외로 강제 추방했다고 마녀사냥처럼

한다.

처참한

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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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형이었다.

명은

참수형이었고,

그들은

"이

35

부패한

명은 도시에

실질적인 도덕과 기율을 도입하기 위해서는 칠, 팔백명을 처형할 교수대가 필요하다"고까지 말했다.

심지어 칼뱅은 "이단을 처형한다는 일은 결코 그리스교도적 사랑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일반 신자가 이단의 거짓 가르침에 물드는 것을 막아주는 구실을 하기 때문에 그것은 사랑의 행위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이 목적을 위해서는 한 도시의 주민 전부를 없앨 수도 있는 것이다."고 말했다.

한 출판업자는 칼뱅을 비난했다고 해서 불에 달군 쇠꼬챙이로 혀를 잘렸다. 어떤 사람은 '예정설'을 반대하는 말을 했다고 해서 가혹한 고문을 받고 광장에서 화형을 당했다. 게다가 '자크 그뤼에'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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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단지 칼뱅의 정책을 반대하고 그를 '위선자'라고 불렀다는 이유만으로 극한 고문을 받은 후 처형되었다.

또한 칼뱅과 그의 종교국은 80 세 노인과 그녀의 딸을 무참하게 처형했다. 헌데 그 유일한 사유는 자녀들에게 유아세례 주기를 거부했다는 것이다. 더구나 그 딸은 여섯 아이의 어머니였다. 그러니 어떤 소녀가 부모를 구타했을 때 그녀의 목을 자른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제네바 시민들은 가정생활까지 사찰을 당해야 했고, 주일예배를 몇 번 불참했다거나, 춤을 추었다거나, 술을 마셨다거나 하는 사유로도 가차없이 투옥됐다.

보다 엄청난 사실은 단순히 '혐의'만 받고 잡혀온 사람들에게도 잔인한 고문이 행해졌다는 점이다. 그리고 너무나 심한 고문을 가했기 때문에 그들은 고문실로 다시 끌려가지 않기 위해서 차라리 미리 목숨을 끊기도 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자주 빈발하자 나중에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 마침내 시의회는 "죄수들은 밤낮으로 손뼉을 치라"는 규정까지 만들어야만 했다.

그들이

받은

고문을

대략

열거하자면,

엄지손가락을

조이고

발바닥을 불로 지지는 고문, 천장에 도르레를 달아 놓고 공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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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다는 고문, 사람들의 배를 가르고 꼬챙이로 쑤시는 고문, 신체의 일부분을 절단하는 고문, 발가벗긴 채 밧줄로 묶고 물 속에 넣어 죽이는 고문 등이 그것이다. 심지어 그들은 사람의 가죽을 벗겨낸 후

소금으로

문질렀다.

중세

가톨릭

교회의

'이단심문소'에서

행했던 악마적 만행을 거의 그대로 재연했다.

특히 삼위일체론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화형을 당한 '세르베투스'는 칼뱅이 "그 자가 제네바에 나타나기만 하면 결코 살려 두지 않겠다"고 작심했던 중요한 목표였다. 지하 감옥에서 세르베투스는 "벼룩이 나를 산 채로 물어뜯어 죽이고 있다. 신발은 다 망가졌고 옷도 내복도 없다. 나의 배설물조차 치울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은 너무나 잔혹한 짓이다!"고 절규했다. 그는 무려 2 개월 13 일 동안이나 인간 이하의 동물적 학대와 고문를 받았으나 끝까지 자기 신념을 지키다가 화형대에서 죽었다.

'신학'과 '사역'의 간극

여하튼

칼뱅과

그의

지지자들은

교회법과

국법을

명분으로

비인간적인 범죄를 무수히 저질렀다. 초대 교회 사도들의 치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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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까지나 교회 내부로 한정시켰지만, 칼뱅은 이를 일반 시민 전체에 적용하였다. 이는 가톨릭 교황의 중세적 신정국가 통치 발상에서 별로 벗어나지 못한 무지막지한 행위였다.

결국 칼뱅의 일부 사역은 교회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신앙이나 신념을 잘못 적용하면 얼마나 끔찍하고 무서운 결과가 가능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여기서 비록 칼뱅의 과오를 아프게 지적했지만, 그의 학문적 능력이나 신앙적 열정까지 폄하하는 것은 이 글의 의도가 아니다. 칼뱅은 검소하게

분명히

뛰어난

살았다.

교권주의자들과는 사기꾼들이니

신학자이다.

적어도 질

당연히

그리고

돈으로

사이비들이야 막장이다.

그런데

그는

부패한 본래

평생

매우

한국의

저질

애초부터

전문

멀쩡한

정통

교단의

목회자들이 엉뚱한 짓을 하는 것은 단순히 신학의 문제가 아니다. 그건 근본적으로 인간 양심의 문제이고, 상식의 문제이고, 그리고 자질의 문제이다.

그들은 결코 신학적으로 무식해서 교회 돈을 횡령하는 것이 아니다. 일반 교인들보다 훨씬 더 성경을 잘 알고 신학을 잘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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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기복 설교하고, 교권 독재하고, 장부 숨기고, 표절하고, 세습하고, 성추행하고, 그리고 패거리 작당하여 신도를 우민화한다.

물론 바른 신학을 추구하며 열심히 연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지난 2000 년 동안 허구한 날 파먹은 것이 신학이다. 지금 우리에게 시급히 필요한 것은 무슨 새롭게 영감을 받은 특별한 신학의 발견이나 성취가 아니라, 도리어 사도들의 교회가 지녔던 처음 사랑과 처음 양심과 그리고 처음 상식의 회복이 아닐까.

요즘 어떤 사역은 너무 방자하다. 세계 최대 교회의 창립자란 위인은 거액의 교회 공금 횡령자이고, 교계의 슈퍼스타였던 한 대형 교회 목사는 노련한 성추행자이다. 그리고 초호화 예배당을 건축한 표절 목사는 치졸한 학력 사칭자이다. 비리 목사들은 결코 우발적 실수로 부정을 저지르는 것이 아니다. 매우 상습적이다. 따라서 교계를 조금만 유심히 살피면 목회는 물론이고 인생 자체가 사기인 자들이 제법 많다.

그럼에도 저들은 여전히 교인들의 뜨거운 지지를 받으며 강단에서 큰 소리로 설교하고 있다. 이게 바로 한국 개신교의 독보적인 영적 수준이며 적나라한 현주소다. 신학은 정통이고 설교도 형통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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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역이 영 밥통이다. 그러니 "목사도 밥통, 신도도 밥통"이란 말이 절로 터져나오고 있는 것이다.

물론 건강한 교회와 진실한 목회자들도 아주 많다. 그걸 부인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밥그릇에 쌀알이 돌알보다 많아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 아닌가. 반면에 흰 돌은 단지 몇 개만 섞여있어도 어금니가 부러지는 법이다. 그러니 "오직 극소수가 돌이니 괜찮다"는 식의 구차한 변명은 이제 그만 하는 것이 좋다. 게다가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절대로 극소수는 아니다.

도리어 옛말에도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했다. 오랜 기간 비교적 체계가 잘 잡혀있다는 유명한 대형 교회들마저 저 모양이니 나머지 상당수의 중소형 교회들은 또 오죽할까. 사실 더 이상 언급하기조차 부끄럽다.

칼뱅은 학문적으로 매우 뛰어난 신학자이며 논리적인 설교자였으나 그럼에도 성경의 가르침을 크게 오해하여 비상식적이고 비인간적인 살육을 저질렀다. 따라서 어느 목사가 제 아무리 신학 공부를 많이 했고 설교를 청산유수로 잘 하더라도 그것을 너무 과신할 필요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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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다. 개인의 신학이 홀로 완벽할 수도 없고, 또한 신학과 사역이 항상 정비례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어느 경우이든 교회가 특정 직분자나 개인 중심으로 운영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결정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덩치만 큰 중세적 바보들

칼뱅은 그의 저서에서 당시 로마교의 성직자인 주교들을 향해 가차없이 '무례한 바보들'이라고 아주 원색적인 독설을 날렸다. 그런데 만일 그가 오늘날의 혼란한 한국교회를 본다면 또 뭐라고 말할지 매우 궁금하다.

특히

칼뱅

신학의

후계자로

자처하는

한국

장로교의

소위

'개혁주의' 정통 보수 교단들인 '합동', '고신', 그리고 '합신' 등 대부분이 사실상의 성직매매인 중세적 교회 세습을 노골적으로 허용하고 있는 이 한심한 꼬락서니를 보았다면 그의 심정은 어떨까. 과연 그런 북한 공산당식 부자 세습이 "성경만을 따르며 오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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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는 개혁교회 목사들이 할 짓인가. 정말 표리가 부동하고 양심머리 없는 작자들이다.

그러니

고작

유아세례를

반대했다는

이유로

평범한

시민들을

비정하게 처형했던 평소 칼뱅의 칼같은 성정으로 볼 때 그는 또 다시 교수대를 세우거나, 아니면 그 철없는 애송이 세습목사들의 목을 당장 자르겠다고 달려들지도 모르겠다.

아마 적어도 "목사도 바보, 신도도 바보"라고 하며 덩치만 큰 아이처럼

자기

밥상만

챙기는

여러

교회들을 매우

신랄하게

책망했을 것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도 정통과 밥통의 혼돈 속에서 개신교 부패와 몰락의 방조적 공범자가 되어 '중세적 바보'로 변신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정녕 두려워해야 할 시대이다. 과거 칼뱅의 제네바 학살 못지않게 더욱 더 무서운 것은 현재 교인들의 영혼을 조용히 말살하고 있는 '유사 교회'들의 타락한 사역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상당수의

밥통같은

교회들로

인해

어차피

모든

기독교인들이 바보로 조롱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 피할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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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이라면, 그래도 이왕이면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만을 겸허히 따르면서 이웃 사랑을 위해 기꺼이 손해를 감수하며 사는 그런 '거룩한 바보'들이나 더욱 많아지기를 간절히 소원할 뿐이다.

"교회가

혼돈하고

바보들이며

믿음에

공허한 대한

가운데 초보적

주교들은 상식도

대부분

이해하지

유모에게서 방금 떨어진 덩치만 큰 아이들이다." - 칼뱅

무례한 못하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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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가 실패하고 있는 이유 "더 이상 숨길 수치조차 없다"

근자에 어느 교회 장로가 "교회의 목사도 사람이니 교회 돈을 횡령하거나 착복하더라도 눈감아 주고, 오로지 하나님만 믿고 살면 된다"고 한 말을 들었다. 정말 대단한 맹신이다.

나만 바르게 살다가 천국에 가면 된다는 뜻인지, 아니면 용서와 사랑이 너무 넘쳐서 그러시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사실 우리 주변에

이런

수준의

장로나

집사들이

제법

많다.

상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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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직들마저 이토록 무지하고 무능하니 어찌 한국교회가 무사할 수 있을까.

물론 어떤 경우이든 필자는 정상적인 사역자들의 헌신적 수고와 숭고한

희생을

폄하할

마음은

조금도

없다.

하지만

입은

비뚤어져도 말을 바르게 해야 옳다. 진정으로 교회를 힘들게 하고 사역을 방해하는 것은 '교회 비리'이지 결코 '교회 비판'이 아니기 때문이다.

'종교'라는 간판

요즘 개신교의 평판이 하도 안 좋아서 미자립 교회들은 거의 다 고사 직전이다. 교인들 자신 외에는 교회를 신뢰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한때 '세습은 안 한다!'고 단언하던 아들 목사에게 변칙 '분가 세습'을 하여 호되게 비판을 받고 있는 서울의 M 교회는 수 만명의 신도들이 출석하는 초대형 교회이다. 그런데 이번엔 아예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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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의 교회와 다시 합병을 통해 몸통 세습까지 고려하고 있다는 기막힌 소식이 들려온다.

이는 단지 청빙위원회를 통한 '여론 떠보기'라는 시각도 있지만, 새파란 아들 목사가 주일에 자기 강단을 비우고 아버지 목사의 교회에 가서 설교하며 군불을 열심히 지피는 모양을 보노라면 왠지 석연치가 않다. 성도들의 불길한 우려가 막장 드라마의 예고편처럼 현실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표절', '학력 사칭 ', '장부 은닉', 그리고 '고소 남발'로 위명을 높힌 다른 대형 교회의 담임목사는 자신을 반대하는 장로들을 내몰고 당회를 장악하기 위해 요즘도 불철주야 수고하고 있다고 한다. 그 역시 '꼼수 목회'에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매우 부지런한 위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하기야

교회를

세습하거나

재정을

사유화하는

작자들이

언제

체면과 염치 따위를 따진 적이 있었던가. 이리저리 잔수와 속수를 날리며 여론의 몰매를 피하기 위해 몸부림치며 애쓰는 그 가련한 모습에서 필자는 "한국 개신교의 장례 절차가 이미 시작되고 있다"는 느낌을 피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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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적 흥행에 도취하여 목사들이 무슨 파렴치한 비리를 저질러도 '아니오'가 없는 교회, 장로들이 무슨 부끄러운 야합을 해도 마냥 태평한 교회, 그리고 신도들을 우민화하여 기복과 맹신을 더욱 부추기는 교회들을 보면서 제 정신을 지닌 보통 사람으로서 이런 비상식적인 교회를 신뢰할 바보가 세상 어디에 그리 많겠는가.

인간이 만든 요상한 종교적 전통과 교묘한 교단법으로 교회를 사유화하여 거룩해야 할 교회가 특정 직분자들의 대를 이은 가업이 되고, 유리하는 양들은 이리 찟기고 저리 터져 만신창이 되어 신음하건만

그래도

"어떤

경우든

목사를

비판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눈먼 교회를 과연 맹신도들 외에는 누가 신뢰할까.

그럼에도 그런 영적 소경들 덕분에 그저 '종교'라는 간판만 걸면 그 어떤 무식한 억지도 다 고상한 진리로 둔갑하는 맹랑한 기적이 오늘도 이 땅에서 여전히 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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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만 무려 200 만이라니

최근 '불교사회연구소'가 3 대 종교의 사회적 신뢰도를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천주교(39.8%), 불교(32.8%), 그리고 개신교(10.2%) 순으로

개신교는

아주

처참한

꼴찌를

했다.

이는

자기

신도들조차도 교회를 온전히 신뢰하지 못 하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한국 개신교의 몸통은 더 이상 가리고 숨길 만한 수치조차 없이 모조리 벗겨져 있건만, 아직도 그 기름진 얼굴에 유해성 화장품만 처바르며 거룩한 척 위선을 떨고 있다.

더구나 현재 개신교 교세가 대략 860 만이라고 하는데, 그 중에 이단만 해도 무려 200 만이라는 통계가 있다. 이는 교회가 얼마나 심각하게 변질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수치이다. 소위 스스로 정통이라고 그나마 것이다.

자부하는

이단을

정화할

교단들마저 최소한의

윤리적으로 설득력마저도

하도

개막장이니

통채로

상실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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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이제

우린

어찌

해야

할까.

물론

가장

좋은

길은

한국교회의 지도자들과 직분자들이 순교적 각오로 각성하여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다. 그동안 탐익하던 과도한 교권과 불의한 기득권을 버리고 다시 회복과 갱신의 길로 가는 것이다.

하지만 과거의 행색으로 볼 때 이는 마치 중세 교황들의 회개를 기대하는 것 만큼이나 아득한 일로 보인다. 설사 베드로가 다시 와도 한국 특유의 고절한 수법으로 뿌리까지 변절한 한국 개신교를 새롭게 바꾸기는 어려울 것 같다.

시대의 선각자들과 개혁자들이 아무리 '바른 신학'과 '바른 사역'을 역설해도 교회 역사에 스스로 자기 교리를 바꾼 교회는 거의 없다. 그 이름이 장로교든, 감리교든, 성결교든, 그리고 침례교든 그들은 각자 자기들의 신조가 가장 성경적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한국의 모든 교단들은 끝까지 자기 생긴 대로 살 것이다.

그러므로 거기서 '목사교'로 변질된 교회들도 완전히 무너질 때까지 끝내 '자기 개혁'을 거부하다가 망할 것이 자명하다. 우리는 지금 단순히 '패배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한국 개신교 성장 신화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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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은 이미 진행 중이다. 굳이 필자가 별도로 주장하지 않더라도 이를 부인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어떤 분은 이를 탄식하여 말하기를 "지금처럼 급속하게 망하고 있는 그 이유가 어디 있을까? 도대체 그 '주범'이 누구일까? 한국교회를 망친 주범은 다름 아닌 목사들이다. 그것도 대형교회 목사들이다. 신학교 교수들이다. 총회장, 노회장들이 그 주범들이다. 어찌하여 그들이 한국교회를 망친 주범들인가? 교회의 열쇠를 그들이 쥐고 있기 때문이다."고 분석하기도 한다. 또한 "교회가 타락한 것이 아니라, 실상은 목사가 타락한 것이다"라고 아프게 일침을 가하는 성도도 있다.

"차라리 거룩하게 망하자"

아무튼 거룩한 감동을 잃은 다수의 대형 교회들은 계속 먹고 흥청거리며 망하고 있고, 반대로 수많은 미자립 교회들은 고생하고 굶주리다 문을 닫고 있다. 그리고 나머지 어중간한 교회들은 담임목사를 교주로 모시고 세속적 '복'을 합창하며 맹신으로 향하고 있다. 극소수의 교회만이 예외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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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제는 교회가 망하는 시대가 되었다. 따라서 만일 개신교가 현재처럼

여전히

사회로부터

외면을

당하다가

끝내

무더기로

버림받는 것을 어차피 피할 수 없다면, 이왕이면 한번 제대로 망하면 좋겠다. '진짜 교회'와 '유사 교회'와 '사이비 교회'의 난잡한 혼재 속에서 만일 모든 교회들이 무차별로 동반하여 망할 수밖에 없다면, 비록 모든 것을 다 잃더라도 끝까지 그리스도의 정신을 따르다 망하자는 것이다.

예수님은 평생 동안 가난, 불명예, 핍박, 그리고 배신을 감수하며 사셨다.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하셨으니 그게 보통 가난은 아니었을 것이다. 게다가 신성모독과 성전모독과 반역죄로 몰려 죽으셨다.

병든

자를

고치시고

가난하게

사셨지만

정말

세상에서 달리 이익을 보신 적이 없다. 그러므로 명리를 추구하는 세상의 눈으로만 보자면 틀림없이 망한 인생이다.

사도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 대부분 각자의 선교지로 흩어져 평생 지지리 고생하며 나누고 주다가 제 명대로 살지 못 하고 죽임을 당했다.

그러니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제자된

소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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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들만이라도 먼저 장부를 털어 가난한 이웃과 약자를 도우며 부지런히 손해를 보고 살자는 것이다.

어차피 망할 것이라면 정말 세상이 깜짝 놀랄 정도로 열심히 퍼주며 망할 짓만 골라서 하다가 건물도, 재산도, 권력도, 이름도, 명예도, 그리고 교세도 없이 제대로 폭삭 망하자는 것이다.

유럽의

개신교처럼

기껏 고가의

대형

교회당들

잔뜩

지어서

헐값으로 이교도들에게 넘겨주거나, 아니면 술집이나 도박장이 되게 하느니 차라리 그 돈으로 가난한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다.

그래서 필자는 "21 세기의 한국 개신교는 정말 신나게 퍼주다 망했다"고 세계 교회사에 기록되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과거처럼 허구한 날 허탄한 욕심을 부리며 거두고, 모으고, 쌓고, 올리고, 짓고, 세우고, 그리고 누리는 일은 이제 그만 멈추고 차라리 거룩하게 망하는 것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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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천하고 보잘 것 없는 모습으로

지금 한국에 교회당이 모자라고 목사가 모자라서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다고 생각하나. 결코 아니다. 오히려 너무 많아서 탈이다. 그리고 건물 교회가 망한다고 해서 복음이 망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니 어떤 경우 더러운 우상들을 세우고 찬양하는 것보다는 그냥 망하는 것이 다시 사는 길이다.

다만 서구의 교회들처럼 그렇게 점잖고 맥없이 망하지 말고, 이왕이면 그리스도의 제자답게 아낌없이 퍼주고, 깨지고, 그리고 끝까지 비우다가 치열하게 망하자는 것이다.

목사가 무당이 된 교회, 상식을 학살하는 교회, 성직자의 밥상이 된 교회, 권력에 아부하는 교회, 하나님의 공의를 망각한 교회, 가난한 자와 약자를 멸시하는 교회, 신도들의 성황당이 된 교회, 그리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상실한 교회는 어서 속히 망하는 것이 좋다.

그러면 우리가 무너지고 썩어진 그 자리에 샤론의 꽃 예수님의 순결한 신부가 된 '진정한 교회'가 다시 아름답게 피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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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진짜 교회는 고작 벽돌 덩어리 건물이나 또는 긴옷을 입은 성직자 조직 따위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일찍이 이렇게 말했다. "진정한 교회는 세상적인 눈으로 보면 참으로 누추하고 보잘 것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귀중하고 사랑스러우며 높은 평가를 받는다. 제사장 아론은 성전에 나올 때, 장식품을 걸친 화려한 외모로 향기를 풍기며 영광스럽게 나타났으나, 그리스도는 가장 천하고 보잘 것 없는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다."

사실 한국 개신교가 실패하고 있는 근본 이유는 그리 복잡한 게 아니다. 금과 은에 취한 많은 교회들은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그 '십자가의 길'을 체질적으로 배신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술을 마시고서, 금과 은과 동과 철과 나무와 돌로 만든 신들을 찬양하였다(다니엘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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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뱅은 이단 학살을 주도했다" 제네바 신정통치 사역의 오류

그 동안 칼뱅의 이단 학살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었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칼뱅의 무고를 지지하는 신학자들이 펼치던 대표적인 논리가 있다.

우선

'카스텔로(Sebastian

Castellio,

1515-1563)'나

'슈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 1881-1942)' 등 '반칼뱅적 저서'들은 모두 믿을 수 없는 책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칼뱅은 사람들을 학살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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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한 정치적 권력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매우 궁색한 변명에 불과하다.

카스텔로는

무명인이

아니다.

그는

칼뱅의

동료로서

제네바

신학교의 교장이었으며 당대에 이미 베스트셀러 책을 내기도 한 유명한 신학자이다. 따라서 칼뱅에 대한 글을 허위 조작하여 '공상소설'을 쓸 정도로 몰지각한 사람이라고 일방적으로 매도할 근거가 없다. 백보 양보하여 그가 신학 이론이나 논조에 있어서는 적대적이고 감정적으로 서술할 수는 있겠으나, 칼뱅의 폭력과 관련한

여러

사실(Fact)들을

실명까지

동원하며

전체

내용을

소설처럼 조작했다고 '단정'하는 것은 오히려 그게 더 무리한 주장이다.

츠바이크 역시 수십 권의 책을 쓴 유명 작가로 그렇게 무책임하고 몰상식한 사람이 결코 아니다. 더구나 칼뱅에 대한 서술 내용이 한두 개가 아니고 아주 구체적으로 많은데 그것을 모두 일방적으로 무시하는 것이 더 몰상식하다. 다른 자료들도 마찬가지이다. 특정 사안에 관련된 책들에 대해 그렇게 "모 아니면, 도"로 묵살하는 것은 옳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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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당시 제네바에는 분명히 가톨릭의 이단심문소와 유사한 '종교재판국(종교법원

또는

장로치리회)'이

설치

되어

있었고,

그들의 행위는 온 유럽에 널리 알려졌다. 그리고 같은 기간 제네바 외에

스위스의

다른

도시들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방법으로 죽었다. 그런데 근 25 년간 그곳의 실제적 지도자였던 칼뱅이

그런

마녀사냥

재판과

만행에

별로

책임이

없다고

주장한다면, 아마 제네바 시의 강아지들도 비웃을 것이다.

칼뱅은 분명히 이단 학살의 반대자가 아니었고, 방관자나 동조자는 더욱 아니었다. 그는 이단 학살을 주도했다. 이는 필자의 개인적 주장이 아니다. 그런 사실을 직접 확인하여 주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바로 칼뱅 자신의 발언이기 때문이다.

칼뱅은 자신을 반대하던 학자 '세르베투스'가 화형을 당한 다음 해에 자기 신학을 방어하기 위해 '정통신앙옹호론'이란 책을 썼다. 원전의 제목은 'Defensio orthodoxae fidei in Calvini '

또는

'Defensio'라고 되어 있다. 필자는 원문을 해독할 능력이 없기에 대신 그 책 속에 있는 칼뱅의 발언을 직접 인용한 다른 영문 자료를 여기에 소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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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뱅은 '이단 처형'에 대해 방어했다. 칼뱅은 1554 년 발간한 '정통신앙옹호론'에서 그를 영원히 더럽힐 만한 소름끼치는 발언을 했다.

"많은 사람들은 내가 파괴한 사람을 내가 '다시' 죽이고 싶어하는 잔학성에 대해 나를 비난하고 있다. 나는 그들의 말에 관심이 없을 뿐만이

아니라,

나는

그들이

얼굴에

침을

뱉는

사실에

기뻐한다."

Calvin now defended 'death to heretics'. In a horrifying quote that forever will tarnish Calvin, he wrote in 'Defensio' of 1554:

"Many people have accused me of such ferocious cruelty that I would like to kill 'again' the man I have destroyed. Not only am I indifferent to their comments, but I rejoice in the fact that they spit in my face. (출처 1: T.H. Dyer, "The Life of John Calvin", Harper 1855, citing 'Defensio' Calvini Opera Vol.8, at 516.A. / 출처 2: Stanford Rives, "Did Calvin Murder Servetus?", p87-88,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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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보면, 칼뱅이 이단을 학살할 의지나 책임이 없었다는 일부의 주장은 지극히 일방적이고 애절한 희망일 뿐임을 잘 알 수 있다.

게다가 칼뱅은 노골적으로 포악한 말을 했다. "우리는 개들의 입을 막고,

사람들이

즐겁게

말하도록

그냥

놔둘

것인가?

칼뱅은

'아니다'라고 했다. 우리는 잔인해져야 하고, "인간적 애정을 모두 발꿈치 아래에 부셔야 한다."고 말했다.

Calvin similarily spoke with blatant viciouseness: "But we muzzle dogs, and shall we leave men free to open their mouths as they please?" Calvin said no, and we must be cruel, and "crush beneath our heel all affections of nature."(출처: Reynolds, et al, Religious Liberty in Western Thought, p111-12, 1996.)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할까. 칼뱅의 이단 학살은 우발적인 것도 아니었고, 결코 부득이한 것도 아니었다. 1542 년 2 월 16 일자 당시 종교법원의 회의록이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다. 그 내용을 보면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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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인은 카톨릭의 책 「성자들의 생애」라는 책자를 소지하고 있다가 적발되어서 출두했고 어느 이발사는 사제에게 삭발식을 해 주었다고 고소되었다. 어느 금속공은 미사에 쓸 잔을 만들어 주었다고 적발되었고 어떤 이는 교황을 좋은 사람이라고 했다가 적발되었으며 이러한 사소한 것들까지도 모두 재판을 하였다."(출처: 정수영, '새교회사', 1991)

이런 사소한 것들까지 기소되었으니 당시 제네바의 교회가 얼마나 신정정치, 탄압정치, 그리고 공포정치를 행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만일 오늘날 교회의 당회나 노회가 이런 종류의 심사를 했다면, 아마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종교적 폭력을 당시의 '시대적 상황'으로 변명하지는 말기 바란다. 만일 누구라도 "그게 그 시대에는 어쩔 수 없었다"고 핑계를 댄다면, 역으로 그런 옹색한 변명은 그 시대 제네바에서는 다른 학살들도 얼마든지 가능했다는 보다 강력한 증거가 될 뿐이다.

아무튼 필자는 카스텔로나 츠바이크가 얼마나 진실을 기록했는지 정확히 모른다. 그러나 그들을 마치 동네 건달이라도 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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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방적으로

매도하고,

따라서

그들의

책은

'사료'에서

반드시

제외되어야 한다는 주장에는 결단코 동의할 수 없다.

제네바

교회는

영혼이

자유로웠던

신학자

세르베투스를

억울하게 죽게한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큰 죄를 지었다. 그런데 그런 억울한 목록에 굳이 카스텔로와 츠바이크까지 추가할 권리는 우리에게 없다고 본다.

따라서

카스텔로와

츠바이크의

입을

막지

말고

그들이

계속

말하도록 놔두자는 것이다. 그리고 조찬선 교수나 정수영 교수나 심상용 목사의 견해도 경청하자는 것이다. 서로 시각이 다른 다양한 자료와 함께 그들의 말도 중시하며 종교개혁사를 더욱 깊히 연구하고 검증하자는 것이다.

다만 칼뱅 사역의 오류를 여기에 지적했다고 해서 그의 신학을 전체적으로 폄하하는 것은 이 글의 의도가 아님을 분명히 밝힌다. 필자는 칼뱅의 신학을 지지하는 개혁주의 신앙의 품에서 장성했다. 지금까지도 가장 아끼는 책 중에 하나가 칼뱅의 '기독교강요'이고 아브라함 카이퍼의 'Lectures on Calvinism'이다. 그래서 사실 이 글을 쓰는 심정은 슬프고 아프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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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는 단순히 장로교단의 문제만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다른 모든 교단들도 마찬가지로 조심해야 한다. 앞으로 자기 신학에 너무 자만하지 말고 늘 자신을 살피며 그 사역에 있어서 늘 겸허하게 처신해야함이 마땅할 것이다.

"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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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직자가 '부자'인 종교 '교회 돈'으로 부자가 된 사람들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하나님의

율법

가르치는

일을

통해

금전적인 또는 물질적인 이익 얻는 것을 죄악시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율법 교육'과 동시에 '직업 교육'을 받았고, 하나님 말씀 전하는 사역을 통해 그 어떠한 사익 추구도 금했다고 한다.

특히 1 세기 전후 많은 랍비가 여러 숙련업에 종사했고, 사실상 그들은 심한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것을 긍지로 여기기까지 했다. 어느 제사장은 석재 절단업에 종사했다. 게다가 위대한 랍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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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렐(Hillel)은

목재

샴마이(Shammai)는

절단사였고,

목수였다.

그의

그 외에도

라이벌인

다수의

명망이

랍비 높은

랍비들이 신발 만들기, 재봉사, 대장장이, 그릇 만들기, 건축 등 전문 기술을 지니고 숙련직에 종사했다.

랍비의 사역 원리

그들 랍비의 사역 원리는 다음의 한마디에서도 잘 알 수 있다. "누구든지 아들에게 생업(숙련 기술)을 가르치지 않는 사람은 마치 그 아들을 강도로 키우는 것과 같다(Alfred Edersheim, Sketches of Jewish Social Life in The Days of Christ, 1867)."

사실 '생업'이란 누구에게나 가벼운 것이 아니다. 제 아무리 위대한 인물도 밥을 먹지 않고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유대의 랍비들은 이런 사실을 누구보다 더 잘 이해했다. 그래서 자신들의 밥그릇 때문에 혹시라도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이 손상되지 않도록 저런 강경한 원칙을 수립했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종교 지도자'라는 고상한 신분에도 불구하고 고된 육체 노동을 마다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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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교회 양극화로 인해 절대 다수의 목회자들이 일일이 필설로 다 표현하기 힘들 만큼 어려운 경제적 고통을 받고 있다. 참으로 마음 아픈 일이다. 그럼에도 묵묵히 이름없이 빛도 없이 검소하게 사역하는 신실한 목회자들이 아주 많다.

반면에 일부 중대형 교회 목회자들 중에는 '그리스도의 제자'답지 못한 사치와 물질적 부귀를 누리며 시건방을 떠는 위인들이 적지 않다.

교회의 성직을 맡은 목사가 과연 무슨 비상한 재주로 그런 부를 이루었는지는 자세히 모르겠으나, 하여간에 대형 교회를 세운 목사도 부자이고, 삼대 세습의 과업을 이룬 목사도 부자이고, 표절을

좋아하는

목사도

부자이고,

여신도와

간통한

목사도

부자이고, 상습적으로 교회 돈을 횡령한 목사도 부자이고, 그리고 교단을 장악하여 종교 마피아의 소두목이 된 목사들도 제법 부자다.

게다가 강해 설교 잘하는 어느 목사도 부자이고, 금식 기도 잘하는 목사도 부자이고, 새벽 예배 잘 인도하는 목사도 부자이고, 부흥회 잘하는 목사도 부자이고, 직통 계시를 받는다는 목사도 부자이고, 신유 은사가 충만하다는 목사도 부자이고, 그리고

거액 헌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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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하는 목사도 알부자이다. 이들은 분명히 충성스럽게 일을 많이 하는 것 같은데 나중에 보면 희안하게도 상당수가 부자이다.

그래서 어떤 경우는 교인들이 헌금한 돈으로 신학교를 세운 목사도 부자이고, 기도원을 세운 목사도 부자이고, 유치원과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세운 목사도 부자이다. 아울러 언론사를 만든 목사도 부자이고, 선교 단체를 만든 목사도 부자이고, 구호 단체를 만든 목사도 부자이고, 병원을 만든 목사도 부자이고, 교회 묘지를 만든 목사도 부자이고, 그리고 수십 억 목돈을 마련해 장학 재단를 만든 세습 목사도 상당한 부자이다.

'교회 돈'으로 부자가 된 사람들

그래도 그들은 여전히 교회 돈으로 자식을 유학 보내고, 고급 주택 사고, 고급차 타고, 주거 관리비 충당하고, 목회활동비는 물론 별 자질구레한 경비까지도 모두 교회에 부담시킨다. 그리고 덤으로 고액 연봉을 알뜰이 챙겨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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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목사를 '제사장'이나 '기독교 무당'으로 착각하는 상당수의 신도들은 "목사님을 잘 대접하면 큰 복을 받는다"는 무속적 미망 속에서 아직도 기복과 맹신의 잠을 자고 있다.

그러니 이런 '종교적 등신 집단'을 누가 말릴 수 있을까. 아버지 목사도 부자이고, 아들 목사도 부자이고, 머지않아 현재 신학을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손자나 사위나 조카도 곧 부자가 될 것이 자명하다. 이른바 세계 교회사에 길이 빛날 '한국형 목사 왕조'가 견고하게 건설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일부 정통이란 곳마저 저 모양이니, 소위 이단이나 사이비 교단의 교주란 작자들 중에 부자가 아닌 자가 없고, 자식에게 세습 안 한 자가 별로 없다. 아니 거의 예외 없이 모두 부자이고, 또한 세습하고 있다.

이는 비단 기독교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타종교를 함부로 폄훼하고픈 마음은 전혀 없지만, 과연 이 땅에 '종교'라는 이름을 빙자하거나 '진리'라는 명분을 내세워 신도들을 등치고 사기치는 자들이 또 얼마나 많은지 스스로 물어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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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지금 "진실한 직분자가 없다"거나, 또는 "유급 목회를 폐지하자"고 주장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우리 손에 오기까지는 과거에 수많은 헌신과 숭고한 희생이 있었다. 진리를 위해 순교한 초대교회의 사도들이 있었고, 아울러 그것을 바르게 전하기 위해 수고한 속사도들, 교부들, 아타나시우스, 왈도, 위클리프, 후스, 루터, 칼뱅, 요한 낙스, 웨슬리, 그리고 무디 등 수많은 성도들이 있었다.

거기에는 분명히 자비량 사역도 있었고, 동시에 유급 사역도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바른 직분자들의 사역에 자기 욕심과 자기 배를 채우는 '귀족 목회'만은 없었다는 사실을 결단코 잊지 말아야 한다. 배부른 '종교 귀족'이 난무한 교회는 오로지 성직이 타락한 중세 교회나 직분이 교권화한 근현대 교회의 이야기일 뿐이다.

'밥벌이 노동'도 거룩한 성직이다

오늘날 우리는 1 세기 유대의 성경 교사였던 랍비들의 그 아름답고 감동적인 '장인 정신'을 점차 잃어가고 있다. 혹시 그들이 생업 때문에 현재의 목회자들보다 경건과 지식이 부족했을까. 필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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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도리어 그들에겐 '밥벌이 노동'도 거룩한 성직이었다.

교회 돈을 몰래 가져가서 부자가 된 장로나 권사나 교사나 집사는 매우 드물다. 그리고 그건 어느 목사라도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다. 그런데 반대로 교회 돈으로 장난을 쳐서 부자가 된 목사들은 왜 이리도 많은가.

그 중에서도 특히 "몸은 부자라도, 마음만 가난하면 된다"고 궤변을 늘어놓는 자들은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마 5:3)."고 하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대적하는

사특한

자들이다.

진정으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결코 몸으로 부자의 길을 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초창기 천막을 치거나 상가건물을 세 내어 경제적 궁핍의 개천에서 헤매던 목사들이 오로지 목회만으로 불과 십수 년만에 용꿈을 이룬 개부자가

되었다면,

생각하는가.

천만의

그게

과연

말씀이다.

진정한

그것은

하나님의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나라'와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다. 단지 종교와 위선의 가면을 쓰고 신도들에게 열심히 사기친 결과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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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무슨 구구한 명분을 대든 성직자가 부자인 종교는 그냥 '사교

집단'이다.

오죽하면

예수님께서

이런

엄청난

말씀을

하셨을까.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지나가는 것이 더 쉽다(막 10:25)."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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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인들이 제사장이다" 개신교는 썰물, 가톨릭은 밀물

한국 가톨릭은 지난 25 년간 무려 400%의 급성장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런 일은 현대 가톨릭 역사에 매우 드문 외국에서도

경이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다.

기현상으로

대부분의

다른

나라들에서는 가톨릭 역시 개신교와 마찬가지로 결코 지속적으로 큰 성장과 부흥을 이루고 있지 못 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같은 기간 한국 개신교는 성장은 커녕 답보와 퇴보를 반복하며 크게 위축되었다. 가톨릭은 밀물인데 개신교는 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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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세대 전만 해도 한국 개신교는 가톨릭에 비해 그 교세가 적어도 몇 곱절 이상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다음 세대가 넘기 전에 오히려 가톨릭보다도 더 작아질 수 있다는 자조적 전망마저 나오고 있다. 현실이 이 모양 이 지경인데도 여전히 "한국교회는 평안하다"고 하며 '천하태평'에 '요지부동'인 직분자들은 도대체 무슨 배포인지 모르겠다.

교세 역조 현상은 구조적 원인에 기인

더구나 이는 단순히 양적인 문제만이 아니다. 최근 한국 3 대 종교에 대한 어느 신뢰도 조사에서 개신교는 고작 10%의 지지율로 최하위를 얻었다. 이는 개신교가 노쇠한 솔로몬처럼 질적으로도 타락하여 신도들조차 자기 교회를 온전히 신뢰하고 있지 못 하다는 이야기이다.

게다가 요즘은 어느 유명 목사의 '600 억 횡령설'까지 나돌고 있어 충격을 더하고 있다. 하여튼 이 양반은 한번 터졌다 하면 최소 100 억 단위이다. 도대체 개신교의 추락은 바닥이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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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개신교의

교리나

신학이

가톨릭보다 열등해서 그럴까. 또는 가톨릭 사제들은 모두 신실하고, 개신교 목회자들은 그렇지 못 할까. 그도 아니라면, 개신교인들이 가톨릭 신도들보다 기도나 충성심에서 크게 부족할까. 필자는 결코 그리 생각하지 않는다.

만일 이것이 단순히 교리나 직분자나 신도 자질의 문제였다면, 처음부터

한국

가톨릭은

개신교보다

교세적

우위를

계속

유지했어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선교 역사도 가톨릭이 훨씬 더 오래 되었다.

따라서 한국 개신교의 교세 역조 현상은 근본적으로 신학과 인성의 문제라기 보다는 다른 '구조적 문제'에 있다는 점을 주시해야 한다.

실제로 여러 정황상 한국 가톨릭 급성장의 이면에는 자기 혁신과 순수한 헌신을 아끼지 않은 사역자들의 기도와 수고 뿐만이 아니라, 개신교를 탈출한 신도들의 수평적 이동이 적지 않았다는 분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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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같은 시대에 같은 지역의 동일한 사회적 환경 속에서 같은 하나님을 섬기고 있던 두 종교 집단에게 이처럼 심각한 역조 현상이 발생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거기에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래도 제도가 중요한 이유

물론 한국 가톨릭 역시 문제가 전혀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거기에도 일부 사제들의 타락 현상이 있고 부패도 있고 신도들의 무관심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현대 가톨릭은 중세 교회의 오류를 바로 잡기 위해 제도적으로 과감하게 자기 개혁을 많이 추진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 중에 하나가 중세적 '십일조 의무화'의 전면적 폐지이다. 세계 어느 나라의 성당을 가도 십일조 봉투를 내미는 곳은 없다. 소액의 교무금 정도 외에는 별도의 헌금 강요도 없다. 교무금도 내기 싫으면 안 내도 된다. 적어도 헌금을 이유로 '교인의 자격'을 제한한다는 식의 반기독교적 억지를 부리는 성당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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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지금 헌금을 적게 하자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공교회가

자율적이어야

헌금 문제로

신도들을

압제하거나

차별하는 것은 성경의 바른 가르침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루터

생각해보아도 기만하고

종교개혁의 이는

왜곡하며

당연한

원인이 지적이다.

돈을 걷으려

하는

무었이었는지를 교회가

자기

시대는 분명히

잠시

신학까지 불행한

시대이다.

가톨릭의 제도적인 노력을 높히 평가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들은 '순환 사역제'를 성실하게 시행하고 있다. 수 년마다 사역지를 계속 바꾸기 때문에 '교회 사유화'란 악한 뿌리가 내릴 여지가 거의 없다. 오히려 '공동 사역'과 '팀 사역'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지역 교회의 신도들도 정기적으로 다양한 사역자들과 동역을 할 기회가 주어진다.

이런 목회적 토양에서는 전임자와 후임자 사이에 '인수인계'의 투명성과 정확성이 더욱 중요시되고, 일부 개신교의 교회들처럼 제왕적 목회 독재나 교회 세습은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따라서 교회 운영이나 재정 관리가 '구조적으로' 투명하게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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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어떤 경우는 제도만 조금 바꾸어도 당장 교회 부패를 크게 줄일 수 있슴을 우리는 잘 안다. 예를 들어 '세습 방지법'을 제도화하여 실행하면 세습은 당연히 크게 줄어들기 마련이다. 목회자들도 바보가 아니다. 그들이 이를 모르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어떤 목사들은 절대로 그리 안 한다. 왜 그럴까.

솔직하게 한 가지만 스스로 자문해보자. 작금의 개신교 현실에서 노회나 연회를 중심으로 '순환사역제'를 하자고 하면, 과연 어느 교단의 담임목사가 자기 자리를 순순히 내려 놓으려 할까. 대형 교회 담임목사를 하다가 같은 지역의 작은 교회로 가라고 하면 기꺼이

목사가

몇이나

있을까.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을

밥상보다 중요시하는 목회자가 얼마나 많을까. 독자들은 그 답을 이미 스스로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교회 부패는 인위적 제도의 소산

필자는

지금

특정

직분자를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다.

한국

개신교는 현재 제도적으로 심각한 구조적 취약점을 지니고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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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보다 더욱 심각한 점은 대다수의 직분자들은 물론 대부분의 교인들도

이를

근원적으로

고치고자

하는

최소한의

의지조차

부족하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분명히 사람이 즉시 처리할 수 있는 일이 아주 많이 있는데도, 종교

귀족들은

그것을

인위적으로

기피하거나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교회 개혁이 늘 겉돌 수 밖에 없다. 자기 목에 스스로 방울을 다는 그런 거룩한 고양이는 별로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기득권의

단맛에

심취한

일부

귀족

목사들은

명목상의

제도만이라도 바르게 고칠 마음조차 전혀 없다.

대부분의 이슬람권 국가에는 도둑이 매우 드물다고 한다. 그 이유는 이슬람 경전에 남의 물건을 고의로 훔치면 손을 자르는 법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우리보다 크게 정직하고 선해서 훔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제도가 무섭기에 법을 지킨다. 때로는 제도란 이처럼 강력한 역활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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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들은 "근본적으로 사람이 변화하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제도도 소용이 없다"고 주장하며 '제도무용론'을 열심히 역설한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자기 개혁을 기피하기 위한 궤변적 기만이며 알량한 속임수이다. 사람이 쉽게 변화하지 않으니, 그럴수록 도리어 제도라도 더욱 바로 잡아야 하는 것이 옳기 때문이다.

현재 여러 교단에서 '세습 방지법', '담임목사 임기제', '무기명 헌금제', '십일조 자율화', 그리고 '교회 장부 공개' 등이 어떻게 표류하고 있는지만 살펴 보아도 이들의 속내를 잘 알 수 있다.

따라서

교권과

조직을

장악한

성직주의자들이

새로운

변화를

완강하게 거부하는데, 어찌 하든 외형적 제도만이라도 다소 개선해 보려고 일부 사역자들이 애쓰며 수고를 반복있는 것이 작금의 개신교가 깊은 수렁에서 고생하고 있는 애처로운 모습인 것이다.

더구나 대다수의 순진한 교인들은 그저 개인적으로 복 많이 받고 은혜 받는 것만 알지,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지금 어찌 돌아가고 있는지 그 정확한 실상을 잘 모를 경우가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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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인들이 '제사장'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마냥 비관론을 펼치자는 것은 아니다. 교회가

바르게

성도들이

시대도

많았다.

각성하여

교회와

세상

어떤

속에서

시대였을까. 진정한

그것은

'제사장'으로

사역하던 시대이다.

성경은 모든 성도들이 왕과 같은 제사장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여러분은

택하심을

받은

족속이요,

왕과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민족이요,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벧전 2:9)."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인

양들은

거짓된

이리들에게

빼앗긴

'교권'과 '성직권'을 되찾고, 신앙 공동체 운영의 진정한 주체가 되는 교회를 회복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오늘날 개신교에서 이 '교인 제사장 정신'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으니 교회가 갈수록 부패하고 교세가 급격히 퇴조하는 것이다.

본래 개신교의 목사직은 교인들 위에 군림하여 제사장 행세를 하라고 세운 직분이 아니다. 참된 목사는 오히려 교인들이 스스로 제사장의 역활을 잘 감당하도록 도와주고 세워주는 사역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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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바로 이 점이 모든 성도가 세속적인 '기복신앙'과 무속적인 '목사 중심 신앙'을 극복하고, 배부른 꿈에서 어서 속히 깨어나야 하는 이유이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 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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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대형교회 목사의 기이한 퇴임 한국 교권주의의 본색은 '비상식'

그동안 교회 세습 여부를 놓고 세인들로부터 초미의 관심을 받고 있던 M 교회의 담임목사가 이제 정년이 되어 교회를 사임하고 은퇴한다고 한다.

지난달 청빙위원들과의 모임에 참석한 한 위원에 따르면, K 목사는 "아들에게 교회를 물려주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다. 한국교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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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이 되고, 귀감이 돼야 한다. 총회 헌법을 준수해야 한다"는 취지의 뜻을 분명히 밝혔다고 한다. 대단히 좋은 말씀이다.

이에

대해

많은

기독

매체들에서는

"세습은

없을

듯하다"고

앞다투어 발 빠른 전망을 내놓고 있다. 필자 역시 그 순수한 뜻을 높히

평가하며,

발언

그대로

후임자

선정이

순리적으로

이루어지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

그럼에도 이 사안에 대해 별도의 언급을 추가하는 이유가 있다. 우선 한두 해도 아니고 수십 년간이나 교회를 개척해서 목회한 원로 목사가 사전에 미리 후임자를 확정하지 않고 굳이 이렇게 어설픈

방법으로

퇴임을

해야

하냐는

것이다.

수순이

부자연스럽다.

그의 은퇴가 예측 불능으로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니기에, 사전에 최적의 후임자 선정을 위한 충분한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는 점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동네의 무슨 작은 교회도 아니고, 조직과 인력이 잘 갖추어진 전통있는 대형교회에서 이런 식의 퇴임은 전혀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아마 이런 전례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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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전임 목사가 후임자 선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조금이라도 주지 않기 위해 취한 조치라면 상당히 긍정적인 면도 있겠지만, 이 역시 큰 설득력은 별로 없다. 어차피 원로 목사로 추대되어 2 선으로 물러나도 현실적으로 계속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보통의 경우이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여의도의 한 대형교회이다.

게다가 M 교회는 이미 아들 목사에게 교회당을 분가시켜준 전력이 있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이를 '증여 세습'이라고 판단하여 호된 비판을 하고 있고, 더구나 차후에는 '교회 합병'이나 '징검다리 세습' 등의 편법으로 결국 교회를 아들 목사에게 세습하는 것이 아니냐는 깊은 우려를 보내고 있다.

그리고 크게 유감스럽지만 사실 그동안 한국 개신교에서 아버지 목사가 세습을 추진하다가 교인들의 반대로 실패한 적은 별로 없다. 그 정도로 대부분의 교회에서 담임목사의 입김이 절대적이란 말이 된다. 그러니 어떤 목사들에겐 교회 세습이라는 '선악과'는 너무도 먹음직하기에 그것을 포기하기란 그리 쉬운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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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 시점에서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특정 사실에 대해 섣부른 예측 기사를 쓰는 것은 바람직하지도 않고, 또한 매우 어리석은 시도가 될 것이다. 아울러 필자는 '예언의 은사'와는 아주 거리가 먼 사람이다.

하지만 유명한 대형교회의 담임목사가 후임자 선정 없이 퇴임하는 사유에 대해 현재도 강한 의심의 눈초리가 있다는 사실만은 꼭 지적하고 싶다.

그런 시각의 배후에는 나중에 교회의 청빙위가 이런저런 다양한 편법을 동원으로 결국 아들 목사를 모셔다가 담임목사의 자리에 앉히고,

그때

가서

이미

은퇴한

아버지

목사는

"난

모르는

일이다"고 주장하며 그 책임을 모두 교인들에게 전가할 가능성이 다시 지적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목사 자신의 욕심을 교인들의 '자율적 결정'이라고 예쁘게 포장하는 것이 과거 세습 목사들이 자주 애용하던 수법이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면 과연 이게 지나친 우려일까? 맞다. 이건 분명히 억측이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필자 또한 이런 우려는 불필요한 염려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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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으로 믿고 있다. 실제로 많은 성도들도 이게 정말 전혀 쓸데 없는 억측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하고 있다.

그럼에도

요즘

일부

교회와

목회자들의

비상식적인

처신과

몰염치한 억지가 하도 많다보니, 이를 보는 성도들의 마음은 의심이 많을 수 밖에 없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십일조를 강요하면서 교회 장부를 공개하지 않는 교회, 헌신을 강조하면서 헌금을 유용하는 교회, 사랑을 강조하면서 구제하지 않는 교회, 진리를 강조하면서 표절과 거짓말을 방조하는 교회, 하나님의 공의를 강조하면서 학력 사칭과 성추행을 묵인하는 교회, 제자도를 노래하면서 터무니 없는 연봉과 고액 강사비 나누며 사치 떠는 교회, 그리고 종북을 비판하면서 부자세습을 하는 교회들은 결단코 우리가 배운 성경에 있는 교회가 아니다.

그러나

목회자들은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성도들은

지금

도덕적으로 '완벽한 교회'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그저 '상식적인 교회'를 원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런 소박한 소원은 어느 교인의 다음 한마디가 아직도 계속 귓가에 맴돌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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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바라는 교회는 완벽하고 이상적인 교회가 아니다. 그런 건 이 땅에 없다. 내가 바라는 교회는 상식적인 교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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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잘 하는 '강도'들 "양들이 울고 있다"

대부분의

교인들처럼

필자의

주변에도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목회자가 적지 않다. 그들 중엔 친구도 있고, 선후배도 있고, 또한 친인척도 있다. 물론 신앙적으로, 인격적으로, 그리고 학문적으로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경우가 많다. 특히 스스로 고난의 길을 선택하였다는 면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사'라는 명칭을 들을 때마다 마음 속에서는 두

가지 복합적인 의미가 상충하는 경우가 자주

목사답지 못한 일부 목회자들 때문이다.

있다. 전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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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을 오용한 종교지도자들

복음서를 읽으면 예수님께서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탄식하신 구절이 나온다. 성전에서 장사하던 무리들을 내쫓으며 하신 말씀이다. 그런데 왜 굳이 '강도'라는 극단적인 표현을 사용하셨을까.

사실 성전의 상인들은 직접적으로 강도 행위를 하지는 않았다. 제물을 서로 사고 팔았을 뿐이다. 또한 당시 제사장들도 백성들의 재산을 노상강도처럼 물리적으로 강탈한 것은 아니다. 더구나 그들은 안식일을 잘 지키고, 제사에 열심이었고, 그리고 금식기도 또한 잘 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성전이 강도의 소굴이 되었다고 분명히 단언하신 것이다.

오늘날도 신도들의 돈이나 재산을 마치 강도처럼 흉기를 들고 협박하며 빼앗는 교회는 없다. 막가는 이단이나 사이비들조차 그런 무식하고 유치한 방법을 쓰지는 않는다. 그런 원색적 도적질은 사회의 실정법에도 위반이 될 뿐만이 아니라, 결코 교인들의 공감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74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보다 교묘한 수법을 사용했다. 명분은 언제나 좋았다. 표면적으로는 하나님의 계명을 내세웠다. 그리하여 거룩한 성전에서 제물을 바치는 구약의 율법을 이용하였다. 가장 중요한 점은 자신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분량을 넘어 추가로 욕심을 채울 수 있는 편법을 가미하였다는 사실이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바로 성전 마당에서 장사를 허용한 것이다. 그 결과 막대한 부수입을 챙길 수 있었다. 그리고 기타 잡다한 수법을 동원하여 결국 그들은 '과부의 가산'까지도 삼켰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물론 그 과정에서 항상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것(눅 20:47)'을 결코 빠트리지 않았다.

해 아래 새 것은 없고 역사는 반복한다고 했다. 이미 수천 년 전부터 일컬음을

하나님께서는 받는

보이느냐(렘 7:11)"고 교회사는

구약

예레미야 집이 준엄한

시대나,

선지자를 너희

경고를

예수님

눈에는

"내 도둑의

이름으로 소굴로

하셨건만, 죄인들이

당시나,

지금까지도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이다.

통해

중세

시대나,

쓰는

그리고


75

성직으로 위장한 강도질

오늘날도 교회 내의 '진정한 강도'는 기도 잘 하는 목사들 중에 있다. 누가 보아도 생도적이 분명한 일부 대형 교회의 유명 목사들 중에 기도 못 하는 작자를 보았는가. 모두 다 청산유수로 기도엔 도사들이다.

마찬가지로 설교 잘 하는 목사들 중에 강도가 있고, 병을 잘 고치는 목사들 중에 강도가 있고, 선교에 열심인 목사들 중에 강도가 있고, 구제를 잘하는 목사들 중에 강도가 있고, 그리고 교회를 크게 성장시킨 목사들 중에도 완전 날강도가 있다. "대형 교회 목사들 재벌 회장과 다를 바 없다!"며 그들의 사치한 생활을 폭로한 MBC <뉴스후>의 보도가 결코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더구나 그것도 부족해서 교인들의 소중한 헌금을 수십 억, 또는 수백 억씩 횡령하는 자들이 강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렇다면 과연 큰 교회에서만 횡령이 일어나고 있을까. 그건 아니다. 일일이 언론에 보도가 다 안 되서 그렇지 실상은 중소형 교회들에서도 비일비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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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노골적인 공금 횡령만이 강도짓은 아니다. 이들보다 더욱 사특한 자들은 성직과 합법을 가장한 제도의 틀 속에서 노련하게 교회 돈을 삼키고 있는 자들이다.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자처하는 자들이 상식 이상으로 터무니 없는 연봉을 받아가고, 교회 장부 분산처리하여 교인들의 눈을 속이며 목회활동비나 기타 지원비가 연봉보다 더 많게 하고, 수시로 거룩한 성회를 빙자하여 고액 강사 사례비 흥청망청 나누어 먹고, 교육이나

복지나

설립하여

교회

선교 돈을

등 퍼부은

그럴듯한

명분으로 다양한

후 나중에

목사 가족들의

재단을 족벌

사업체로 사유화하고, 그리고 평생 철밥통 목회도 부족해서 철없는 애송이 아들 목사에게 교회를 세습하는 자들은 분명히 강도보다 더 사악한 자들이다.

그들은 겉으로는 경건한 척 늘 하나님 말씀을 들먹이나, 그 속은 회칠한 무덤이다.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를 삼키는 자들이다. 중학생도 알만한 명백한 상식을 거짓 신학으로 가리려는 파렴치한 자들이다.


77

교회 돈으로 주일 점심 한끼에 무려 25 만 원을 쓰면서 "교인들은 교회

재정

장부를

필요가

없다"고

가르치는

목사

또한

마찬가지이다. 부패한 목회자들은 교인들에게 늘 '사랑과 관용'을 강조하지만,

정작

자신들은

결단코

'공의와

책임'을

실행하지

않는다.

그러나

강도들보다

간교한

자들은

강도질을

방관하거나

방조하는 자들이다. 특히 소위 정통이라는 교단들

속에 이런

위인들이 아주 많다. 여러 교단의 총회나 노회나 연회에 가보라. 이런 '정치 목사'들이 아주 떼로 몰려 다닌다. 상습적인 성추행 목사를 감싸고 도는 어떤 노회가 그 좋은 예이다. 그들은 돈만 쥐어 주면 아무 때나 표를 몰아 준다. 그러니 이건 교회가 아니라 강도의 소굴이다.

가장 쉬운 신앙 생활

사실 어떤 목사가 강도인지 아닌지 분별하는 법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다. '강도'와 '돈'은 애초부터 태생적으로 끊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목회자가

모두

거지

나사로처럼


78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반대로

목사로서 교인들의 평균보다 더 잘 먹고 잘살려는 자가 있다면 그는 거의 틀림없이 현대판 '성전의 강도'로 보아도 무방하다고 본다.

어느

성도는

"'영혼

구원'을

강조하는

교파와

교회일수록

세속적이다!"고 말한다. 영혼 구원을 강조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런 고상한 사역을 빙자하여 신도들에게 고도의 영적 사기를

치고

있으니

나온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변질된

교회일수록 교인수가 돈이고, 십일조가 십자가를 대신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성도에게 부가 큰 축복"이라고 설교하는 목사들을 크게 경계해야 한다. 그렇게 주장하는 자들 중에 제대로 된 목사는 단 한 사람도 본 기억이 없다. 도리어 교회 공금 떼먹는 인간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대부분이 그런 기복 설교를 남발하던 자들이다.

만일 그들의 논리가 정말 옳다면, 예수님과 제자들은 모두 복이 없어 가난하게 사셨고 고난의 삶을 사신 것이란 말인가. 절대로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계명에 따라 가난한 이들과 물질을 나누는 성도는 결단코 부자의 자리에 안주하지 않는다.


79

그래서 어찌 보면 주일날 교회에 가서 예배에 참석하고, 헌금 잘 하고, 하루 종일 봉사 잘 하는 것은 가장 쉬운 신앙 생활이다. 그것은 마치 안락한 온실 속에서 화초를 가꾸는 일과 같다. 헌데 많은 목회자들은 그런 교회당 중심의 종교사업적 열심에 자기 인생의 명운을 걸고 있다. 그 덕분에 필자도 한때는 그런 사역에 제법 뛰어난 선수였다.

그러나 정작 더욱 어려운 신앙 생활은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가난한 이웃과 내 것을 함께 나누며 소외된 이들을 돕는 일이다. 아울러 이렇게 사랑을 실천하는 삶이야말로 하나님의 계명에

합당한

참된

기도이다.

성도에게는

일상의

삶이

예배이고, 일상의 삶이 기도이다.

이제 한국교회는 성직의 탈을 쓴 이리들에게 찢기고 있는 양들의 울음 소리를 들어야 한다. "왜 이 땅에 정의는 없고, 정치만 있나. 왜 이 땅에 교회는 적고, 교회당만 많나. 그리고 어찌하여 이 땅에 목자는 드물고, 목사만 득실거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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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눅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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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금 없는 주일'을 지지하는 이유 "공교회가 타락한 시대에는 성도가 교회다"

최근 '높은뜻정의교회'가 '헌금 없는 주일' 운동을 시작하여 교계의 큰 주목을 받고 있다. 매달 세 번째 주일에 헌금을 교회에 내지 않고, 교인들이 선교나 구제에 직접 사용하도록 하는 운동이다.


82

찬반이 뜨겁게 표출

오대식

담임목사는

운동을

미국

캘리포니아

'코스테스힐교회'에서 실시한 '하늘나라 프로젝트'에서 착안했다고 한다. 그 프로젝트는 100 명의 지원자에게 100 달러씩 나누어주고서 이 돈이 하나님의 돈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여 오직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데만 사용하도록 했다. 나중에 NBC 방송의 보도에 따르면,

결과

보고

자리에서는

눈물의

간증이

이어졌고

구체적인 결실이 많이 맺힌 사실이 알려졌다.

이에 대해 온라인에서는 초반부터 찬반이 뜨겁게 표출되고 있다. 찬성하는 측의 의견을 보면 "훌륭한 생각이다.", "한발 앞서는 것이 감동입니다.", "헌금이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라면 왜 하나님 것을 목사님이 마음대로 개인의 욕심을 위해 사용하는지도 묻고 싶다. 목사님을 위한 것 최우선으로 지불하고, 남는 몇 안되는 밥풀 가지고 교회 운영하고 그리고 무슨 구제를 한다는 것인지.", "속이 시원해지는

좋은

운동이다.

십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느낌이다.", 그리고 심지어 "반대로 한 달에 한 번만 헌금을 받으신다면 어떨까요?"라고 제안하는 분도 있었다.


83

이와는 반대로 "어이가 없네 이게 과연 개혁이냐? 헌금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고 예배때 내가 하나님께 들고 나아가는 것이지", "예배도 인본주의고 인기주의고 복지군요!", "많은 교회들이 선교와 구제에도 헌금을 사용하고 있음에도 세상 앞에서의 교회의 명망을 위해 이런 날을 굳이 만들어서 헌금의 본질을 흐리고 교회를 흔드는 모습이 우려스럽다", 그리고 "헌금의 본질적 용도와 부차적 용도를

혼동하는

지극히

영적으로

둔한

가치관에서

나오는

주장이네요"라는 다양한 반론이 있었다.

참 재미있는 세상이다. 자주 느끼는 사실이지만, 특정 사안에 대해 어쩌면 이렇게 상반된 다양한 생각들이 가능한지 늘 놀랍기만 하다. 아무튼

필자는

여기서

"왜

그리

하면

되나?"를

역으로

자문해보았다.

왜 안 되나?

우선 '헌금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고 예배때 내가 하나님께 들고 나아가는 것이다'는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신약교회의 예배는 구약의 무슨 희생제사가 아니다. 즉 예배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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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물을

바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제

그런

바침은

이방

종교들이나 하는 행위이다.

본래 신약 교회의 연보란 구약의 제물처럼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형제들과 나누는 것이다. 제물을 바치는 제사는 어린 양 예수님께서 이미 다 이루셨다. 하나님은 자녀들의 돈을 필요로 하시는 분이 아니다. 사도바울은 "모든 사람을 섬기는 너희의 후한 연보(고후 9:11)"라며 연보의 목적이 '사람을 섬기는 것'임을

분명히

했다.

같은

앞부분의

"성도를

섬기는

일(고후 9:1)"도 역시 연보를 의미한다.

실제로 사도들의 교회에서 공식적인 헌금은 오직 구제를 위한 '연보'만이 있었을 뿐이다. 십일조도 없었고, 건축헌금도 없었다. 후일 추가적인 용도로 연보가 선교와 사역자를 위해서도 일부 사용되었지만,

적어도

'예배

도중에

헌금을

바쳐야

한다'는

가르침은 신약 성경에 결코 없다. 초대 교회의 예배에는 헌금채를 돌리거나, 헌금함을 들고 기도하는 순서 자체가 아예 없었다.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고전 16:2)."고 권면한 사도바울의 이 말씀은 당시 교회가 매주 연보를 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슴을 잘 보여준다.


85

다시 말하자면, 연보가 예배 순서에 없었으니 어떤 주는 안 한 것이다.

따라서 '헌금의 본질적 용도'를 지적한 다른 분의 주장 역시 큰 설득력은

없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교회를

흔드는

모습이

우려스럽다'는 견해는 더욱 이해하기 힘들다. 아니 한 달에 한 번 정도 교인들이 헌금을 직접 집행한다고 해서, 그게 어찌 교회를 흔드는 일이 되는지 정말 당혹스럽다. 그 돈이 없으면 교회가 큰 피해를 입고 망하기라도 한다는 뜻인지. 오히려 교회가 교인들에게 수고했다고 격려해야 하는 일이 아닐까 한다.

다음으로

'예배도

인본주의고

인기주의고

복지'라는

지적이

있었는데, 이 분은 '인본주의'란 용어를 어떤 뜻으로 사용한 것인지 도리어 묻고 싶은 심정이다. 선교를 하고 이웃을 돕는 데에 헌금을 사용하는 것이야말로 도리어 하나님의 계명을 적극적으로 따르는 지극히 '신본주의'적 사역이기 때문이다. 역으로 선교와 구제는 반드시 예배당의 이름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더 큰 오류가 아닐까 한다. 성도 자신과 그들의 가정도 이미 충분히 '그리스도의 교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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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도 필자가 '헌금 없는 주일' 운동을 지지하는 가장 큰 이유는 공교회가 교인들의 개인적인 형편을 자세히 파악하고 직접 돕는 데에 여러모로 한계와 제약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내가 출석하는 교회는 나의 형제나 자매가 얼마나 궁핍한지 잘 모른다. 삼촌이나 이모가 얼마나 아픈지 모른다. 조카의 등록금이 얼마나 부족한지 모른다. 노부모님의 밥상이 얼마나 열악한지 모른다. 이웃에 사는 독거 어르신의 필요가 무엇인지 모른다. 친구의 파산을 모른다. 직장 동료의 실직을 모른다. 그리고 같은 동네 미자립교회 목사님의 월세가 얼마인지 모른다.

한국교회사에 길이 빛날 '명품'

이제 과거처럼 공교회라는 '단일 통로'로 선교하고 구제하는 시대는 지나갔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공교회가 하도 거짓말과 기만을 많이 해서 세상은 더 이상 교회를 깊히 신뢰하지 않는다. 말로는 늘 사랑을 노래하면서 돈만 모이면 대형 건물 올리며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외면하는데 누가 교회를 신뢰하겠는가. 웬만한 동네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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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임목사가 장관보다 더 많은 고액 연봉에 고급차 타고 우쭐하는데 누가 그들을 가난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믿어줄까. 턱도 없는 소리이다.

앞으로는

성도들이

직접 몸으로

선교하고

구제하는

시대라고

믿는다. 교회사를 잠시 살펴 보아도 공교회가 제대로 교회다운 적은

지극히

드물었다.

소위

성직자란

위인들이

틈만

나면

신도들을 등치며 외도한 것이 기독교의 부끄러운 역사이다. 성경도 '가라지'를 말하지 않던가. 이는 당돌하게 '교회 불신'을 조장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숨길 수 없는 냉엄한 역사이기에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다.

여하튼 결론은 그리 복잡한 게 아니다. 공교회가 타락한 시대에는 성도가 교회다. 유형교회인 공교회가 순수하고 헌신적으로 사역을 잘하면 그것은 정말 감사하고 좋은 일이다. 그런 경우 성도들은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크게 격려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공교회에 너무 기대지 마시기 바란다. 말세에는 교회답지 못 한 교회가 제법 많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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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다가오는 새시대에는 전문직 선교사가 선교하고, 교회 부서가 구제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래서 공교회 사역의 부족한 부분을 성도들 각자가 분담하여 가정, 학교, 직장, 사업장, 그리고 지역 사회 속에서 직접 나누는 일이 더 이상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자각해야 옳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높은뜻정의교회'의 교인들과 교역자들께 깊은 존경과 감사를 전하고 싶다. '헌금 없는 주일' 운동, 정말 멋진 사역이다. 한국교회사에 길이 빛날 '명품'이라고 확신한다.

"이제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그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그들의 넉넉한 것으로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균등'하게 하려 함이라(고후 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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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교회 잔혹사" '빈 지게'를 진 머슴들

평소에 소식을 나누던 한 지인이 고향 교회의 시골 목사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여기에 막상 '시골'이라고 표현을 했지만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교회는 대전에서 멀지 않은 K 군 내의 면단위 소읍에 위치한 작은 교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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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술로는 '하늘', 행위로는 '땅'

그 교회의 1 년 예산은 1 억이 약간 넘는 정도다. 그런데 이 목사님 자녀들의 대학교와 대학원 학비를 모두 교회에서 지급했다. 본봉 외에 별도로 사택 공과금 및 식비도 교회가 지불한다. 개인 승용차 연료비도 교회 부담이다. 게다가 연말이 되면 양복을 교회에서 사주고, 3 달에 한번씩 매년 400%의 보너스를 준다. 그러니 결국 이 핑계 저 핑계로 지출 항목을 열심히 분산 처리했지만, 사실상 교회의 재정 대부분을 담임목사가 가져 간다.

더구나 이 목사님은 정치에 관심이 많다. 보수 장로교단 소속인 이 분은 대전광역시의 더 큰 교회로 나가기 위해 10 년을 넘게 계속 청빙 원서를 보냈다. 그러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직까지 그 거룩한 소원을 이루지 못 했다.

근자에는 그동안 시골에서 23 년 이상 목회해서 번 돈으로 '농촌 사역'을 빙자하며 땅을 샀다. 그러자 주변의 동료 목사들도 서로 뒤질세라 땅 투자로 눈을 돌리고 있단다. 물론 실제 목적은 돈을 벌기 위함이다. 그래서 이를 지켜 본 성도들 중에서는 "목사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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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소망을 둔 것인지, '땅'에 소망을 둔 건지 모르겠다"는 말을 하고 있다.

일부 지각있는 교인들은 "어떤 목사들은 교인들이 얼마나 힘들게 돈을 버는지 너무 모르는 것 같다"고 탄식을 하지만, 대부분의 순진한

시골

성도들은

그래도

목사를

구약의

대제사장처럼

생각하며 충성한다. 도리어 "목사에게 한번 말 잘못하면 천벌을 받는다"고 두려워 한다. 이는 너무나 오랫동안 무지한 가르침에 깊히 세뇌를 당한 덕분이다.

목사가 '사장'인가

게다가 군 내에서 가장 크다는 한 감리교회는 담임목사가 세상을 떠나자, 그 목사의 부인이 불과 6 개월짜리 군소신학교를 나온 후 교단을 탈퇴하고 스스로 담임목사의 자리에 앉았다. 그럼에도 다수의 교인들은 이 여성 목사를 추종했다.

그러자 교단에서는 소송을 냈다. 그리고 2 년을 넘게 끌어온 재판에서 한 번은 교단이 이기고, 다른 한 번은 이 여성 목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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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겼다. 어떤 교회들은 '개판오분전'이다. 상식이 안 통한다. 그 교회는 사별한 남편 목사가 개척한 교회이다. 그러니 부인이 다른 목사에게 담임 자리를 내주기 아까워서 변칙적으로 세습했다는 말이 나돌고 있다. 공교회가 무슨 개인 사업체인가.

같은 읍에 있는 교인수 100 여 명의 다른 교회는 더 심각하다. 그 교회는 어린이집과 지역아동센타를 운영했다. 본래

원장은 이

교회의 한 성도가 했었는데, 담임목사가 그 원장을 내보내고 목사 부인이 원장이 되어서 월급을 받았다. 덕분에 부부가 나란히 짭짤하게 수입을 챙겼다.

어느날 이 교회 담임목사가 몸이 아파서 설교를 할 수 없었는데, 그 목사는 이제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자기 아들에게 주일 낮 설교를 시켰다. 참다참다 장로들이 "담임목사 나가라"고 했다. 그러나 담임목사는 나가지 않고, 오히려 교인들이 많이 떠났다.

나중에 장로님들이 교단에 가서 항의를 했다. 하지만 개교회 장로들보다 교단 목사들 권한이 더 셌다. 교단이 목사편을 들어준 것이다. 그래서 담임목사는 교회를 움켜쥐고 끝까지 잘 버티다가 거의 죽을 때쯤에야 교회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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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같은 군 내의 가장 큰 장로교회에서는 담임목사와 부목사가 한판

붙었다.

교회도

현재의

담임목사가

개척한

교회다.

성도수는 약 300 명 정도인데 수 년 전부터 수십 명 이상 줄었다.

담임목사

부인의

성격이

워낙

고약해서

떠난 교인들도

더러

있었지만, 더 큰 이유는 멀쩡한 교회를 놔두고 굳이 빚내서 땅을 사고 교회를 새로 건축한 것이 결정타였다. 엄청난 돈이 들어갔다. 교회 건축으로 인한 빛 때문에 부담이 되어 많은 교인들이 떠났다. 현 담임목사의 퇴임은 이제 약 3-4 년 정도 남았는데 그래도 1 년 사례비가 무려 1 억 원이 넘는다.

원래

담임목사는

막내

아들에게

교회를

세습하려고

했는데

부목사가 안 된다고 반대했다. 다행히 그 아들이 신학대학원에 안 간다고 결심해서 이 일은 일단 마무리가 되었다. 그런데 작년에 담임목사는 40 대 후반의 부목사에게 갑자기 나가라고 했다. 그리고 교회 규정에 따라 퇴직금을 안 주겠다고 했다. 그러자 부목사가 담임목사에게 따지고 대들었다. 결국엔 장로 한 분이 나서서 퇴직금 반절만 주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94

그런데 그게 끝은 아니었다. 퇴직한 부목사는 손바닥만한 그 읍 내에서 자기를 따르는 교인 30 여 명과 다시 개척교회를 시작했다. 말이 개척교회이지, 교인 나눠먹기 식이나 마찬가지다. 아무튼 본교회 담임목사는 나간 부목사가 이단이라고 설교하고 저주했다.

'빈 지게'를 진 머슴들

우리는 그동안 주로 대도시 대형 교회들의 문제점을 많이 지적했다. 일례로 몇 년 전 안양의 한 대형 교회 담임목사는 20 대 교인과 불륜에 빠져 사임했다. 외국에서 받은 거룩한 목회학 박사 학위도 목사의 성추행만은 결코 막지 못 한 것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럼에도 교회가 퇴직금과 위로금 명목으로 그 성범죄 목사에게 무려 6 억 이상의 돈을 주기로 했다는 점이다. 정말 대단한 목사에 더 대단한 교인들이다.

오랜 기간 동안 비교적 체계가 잘 잡혀있다는 대형 교회조차 이 모양이니, 소규모의 작은 교회들은 또 오죽할까. 여건이 열악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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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교회라고 해서 무조건 면죄부를 갖는 것은 아니다. 교회는 그 크기에 관계없이 '성결'과 '정의'를 추구해야 옳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 순간에도 어려운 현실 속에서 묵묵히 사역하고 있는 순수한 목회자들이 많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건강한 교회도 많고, 교인을 가족처럼 아끼며 사랑하는 진짜 목사도 적지 않다. 따라서 그들의 눈물어린 사역을 진심으로 존경한다.

반면에 그리스도의 교회가 흠집 나면 성도들은 마음이 아프다. 어떤 목사들은 '비판'을 하지 말라고 집요하게 요구하지만, 막상 '비리'를 보면 성도들은 속이 탄다. 그리고 그럴수록 일부 변절한 목사들에게 더욱 화가 난다.

교회는 봉이 아니고, 목사의 진정한 신분은 '교회의 머슴'이다. 그러니 머슴들은 더욱 성실하고 겸손해져야 옳다. 삶의 열매는 별로 없이 매주 펼치는 중세적 '종교 쇼'를 거룩한 사역으로 착각하지 말고, 진정한 '주의 일'을 제대로 하자는 거다. 그리고 괜히 엉뚱하게 빈 지게를 지고 육갑 떨지 말고, 차라리 해마다 교회 장부나 솔직하게 공개하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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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사유화'와 '맹신도'

<톰소여의

모험>

작가인

'마크

트웨인'은

일찍이

"정직한

정치인이란 말은 모순이다"고 비꼬았다. 또한 그는 "인간에 대해 알면 알수록 우리집 개가 더 좋아진다"고 풍자했다. 아마 그래서 "정치인과 기저귀는 자주 갈아주어야 한다"는 말이 나온 걸까. 아무튼 요즘엔 "정직한 목사란 말은 모순이다"는 듣기 거북한 빈정거림까지 들려온다.

우린 그동안 일부 기득권 목회자들의 거짓된 행실과 불의한 권력 추구를 너무나 많이 보아왔다. 그래서 그 썩어 죽을 '성직주의' 때문에 "한국교회의 정상적인 회복은 아예 불가능하다"는 자조론이 갈수록 확산하고 있다.

단지 '가르치는 직분'의 일개 목사가 '다스리는 장로'들의 고유 직무를 침범하며 교회의 사업, 재정, 인사, 관리, 그리고 행정까지 깊숙히 간여하여 온갖 월권을 자행하는 것은 분명히 반기독교적인 작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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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교권을 사유화하는 목회는 종교를 빙자한 사기일 뿐이다. 마치 하인이 주인의 자리를 차지한 것과 같다. 그리고 상당수 개혁 교회에서 이런 배도적 행위가 계속 용납되는 건 순전히 무지한 '맹신의 결과'임을 각성해야 한다.

왜 오늘날 어떤 교회엔 소위 막장 정치판에서나 볼 수 있는 허위, 조작, 왜곡, 기만, 꼼수, 편법, 공갈, 외식, 그리고 위선이 가득한가. 왜 그 많은 목회자들이 '기저귀 정치인'처럼 무더기로 비난을 받고 있을까. 이젠 '기저귀 종교인'들도 정말 수시로 갈아주어야 하나.

'교권'을 든 목사에게는 모든 것이 '봉'으로 보이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래도 별로 할 말은 없다. '거짓 복음'으로 포장된 알량한 '기복 설교'에 아멘을 열창하며, 주일마다 돈 싸들고 예배당을 채우는 맹신도들이 봉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망치'를 든 인간에게는 모든 것이 '못'으로 보인다" - 마크 트웨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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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가 교인에게 나가라고 한다" 교인을 제명하는 목사들

세상이 말세가 되니 목사가 교인에게 "교회에서 나가라"고 난리다. 이게 과연 공교회의 목사가 할 말인가. 이는 아무리 온건한 성도라 해도 분통이 터질 일이다.

온갖 비리는 스스로 다 저질러 놓고 교회의 단물을 빨던 목사들이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양들을 핍박하고 있다. 담임목사의 비리에 반대하는

성도들을

'해교행위'나

'불법단체'로

매도하며

타락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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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권을

마구

휘두른다.

병신년

초두부터

정치,

경제,

그리고

종교계에 이르기까지 정말 다양한 군상들이 육갑을 떨고 있다.

예전에는 날짜나 시간을 계산하려면 손가락으로 "갑자, 을축..."하며 짚었는데 이에 익숙하지 않으면 틀릴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이러한 어설픈 행동에 대해 흔히 "육갑을 떤다"고 풍자했다. 특히 시키지도 않은 엉뚱한 짓을 할 때 이 말이 자주 사용되었다.

타고난 사기꾼들

그런데 일찍이 이 분야에서 가장 크게 두각을 나타낸 위인들이 있었다. 바로 정치권의 일부 국회의원들이다. 하지만 요즘은 그 선두 자리를 종교계로 넘겨주어야 할 것 같다. 잡배도 이런 잡배들이 없기 때문이다.

돈으로 부패한 교권주의 목사들은 분명히 알아야 한다. 앞으로도 계속 이런 식으로 그 알량한 교권을 제멋대로 휘두른다면, 이제 성도들이 택할 결정은 오직 하나 뿐임을 엄중히 경고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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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자에 얼굴 두껍기로 아주 유명한 어느 대형 교회 목사에 관련된 부정 의혹들을 잠시 살펴 보았다. 대충 훑어보아도 학력 사칭, 강도사 사칭, 불법 목사안수, 표절, 공석 거짓말, 말바꾸기, 교회 장부 은익, 불법 건축 추진, 공금 횡령, 성추행, 교단 패거리 정치, 교인 무더기 고소 등 그 죄질이 아주 탁월하게 나쁘다.

사실상 목사가 되서는 안 될 작자가 담임목사가 된 것이다. 물론 저 정도면 장로나 집사나 교사가 되어서도 곤란하다. 더구나 그의 약력을 보면 더욱 한심하다. 교인들의 수준보다도 훨씬 부족한 학력과 지적 능력을 보여준다.

사회에서라면 단순직 업무조차 버거워 할 수준의 인물이 어수룩한 교회에선 마치 불세출의 지도자라도 된 것처럼 우쭐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소위 영문과를 졸업했다고 하면서 그렇게 영어를 지지리도 못 하는 인간은 또 처음 보았다. 그러니 대학교 이상의 학력은 사실상 돈으로 때웠다는 소문이 자자하다. 게다가 거짓말과 말돌리는 데에는 귀신이다. 평생 제 실력대로 정직하게 산 적은 별로 없다. 항상 서류 허위 조작과 표절과 잔머리와 속임수와 꼼수로 살아왔다. 그러니 아주 타고난 사기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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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 저 목사 뿐만이 아니다. 성경은 세상에 '악인'이 있다고 분명히 증거한다. 상당수 교단에 저런 종교 잡상인들이 차고 넘친다. 그래서 한국교회의 타락이 갈수록 일반화하고 있다.

새해에 한 성도가 하도 답답해서 문의를 한다. 자기 교회 담임목사 사례비가 전체 예산 중에 40%, 협동목사 25%, 은행 대출이자 25%, 그런 후에 각부서 활동비가 0.3%, 선교비 0.6%, 그리고 나머지는 공과금으로 되어있다고 한다. 구제비는 아예 없는 것과 같다. 오직 목사들을 구제할 뿐이다. 기가 막힌다. 대체 이게 누구를 위한 교회인가.

그러나 어찌보면 이는 당연한 결과이다. 그동안 한국의 많은 교단들이 경쟁적으로 저질 신학교들을 방만하게 확장하고 저질 목사들을

양산했기

때문이다.

물론

저질

목사들은

다시

신도들을 사병화하여 저질 맹신도들을 대량 생산했다. 결국 심은 대로 거두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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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의 탈을 쓴 타락한 교단들

따라서 툭하면 대안을 요구하는 분들이 많지만, 여기에 무슨 대안이 있겠는가. "목사는 등신, 교인은 맹신"인데 뭘 더 어쩌자는 건가. 헌금 도둑, 성도착자, 협잡꾼, 이중인격자, 기회주의자, 위선자 등 그런 못된 작자들 이름 뒤에 '목사'란 직함만 붙이면 마냥 '할렐루야'와 '아멘'으로 화답하며 목돈을 바치는 맹신도들은 도대체 어느 별에서 온 족속들인지 모르겠다.

그 덕분에 부패한 목사들이 사유화한 '주식회사 한국교회'는 그냥 수리 불능 상태다. 만날 정의가 어쩌고 교단법이 저쩌고 따져 봐야 저런 도배와 소경들에게는 단지 시간 낭비일 뿐이다. 그러니 저런 '사이비 정통 교단'들은 차라리 속히 망하는 것이 좋다. 시정잡배 목사교가 빨리 망해야 예수교가 부활한다.

가장 심각한 점은 계속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대부분의 중대형 교회들은 사이비 목사들이 장악하고, 진짜 성도들은 제도권 밖으로 내몰릴 수 밖에 없다는 우려에 기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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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와 교인이 싸우면 거의 다 목사가 이긴다. 많은 경우 노회, 연회, 그리고 총회가 하나님의 공의를 상실하고 목사들의 밥상을 위한 직업적 협동조합이 된지 이미 오래이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40 년 전에도 "교인들은 노회에 참석하지 말라, 가면 크게 상처 받는다"고 서로 조언을 했을까. 심지어 중부 도시에 있는 한 보수 교단의 유명한 교권주의 목사는 자신의 비리가 드러나자 강단에 이불과 요강까지 싸들고 올라가 밤샘을 하며 한동안 버틴 적도 있다. 이런 자들은 교인들이 상처 받는 것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그래서 한국 개신교에서는 횡령 목사도 이기고, 성추행 목사도 이기고, 표절 목사도 이기고, 그리고 무슨 개막장 목사도 무조건 이긴다. 반면에 불의한 목사에게 저항하는 무고한 장로와 집사와 교사들은 줄줄이 제명을 당하고 있다.

결국 오늘날 교인들의 '교회 탈출'을 강요하고 있는 주범은 더러운 사욕에 영혼을 팔아 교권을 남용하고 있는 '기득권 목사'들임을 잘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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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튼 지난 10 여 년간의 '교회개혁 운동'이 보여주는 아픈 결론은 "일단

한번

타락한

교회는

결코

회복되지

않는다"는

냉엄한

사실이다. 유명한 횡령 목사들과 간통 목사들은 아직도 대형 교회의 강단에 서서 자식들까지 동원하며 여전히

'교회 날로

먹기'에 몰두하고 있다. 해도해도 너무 한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최근

어느

목회자들의

중견

목회자가

외침이

"교단

순진하게만

하나

새로

만들자는

느껴졌는데...

이제

젊은 도저히

안되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한 말이 이런 절박한 상황을 잘 대변해주고 있다.

'교단 탈출'과 '교회 회복'

개혁자 루터와 칼뱅이 처음부터 제도권 교회를 탈출하려고 한 것은 아니다. 성직으로 위장한 종교 장사꾼들이 장악한 제도권 속에서의 교회 회복은 도저히 불가능했기에 떠난 것이다. 마찬가지 이유로 사도들도

바리새인들이

장악했던

'유대교'를

개혁하려고

않았다. 대신에 신약 교회인 '그리스도의 교회'를 새로 세웠다.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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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제도권 탈출'이 곧 '교회 탈출'은 아니다. 오히려 새로운 교회의 시작이다. 지금은 새 술을 새 부대에 담아야 할 때다. 부패한 교단 속에서 바른 교회 회복이란 없다. 이제 성도들은 타락한 교단을 떠나 새로운 그리스도 공동체를 세워야 한다.

오늘날 '개혁'이 외롭게 표류하고 있다. 그래서 이젠 '혁명'을 말해야 한다. 그동안 성도들은 충분히 지치도록 참았다. 최근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만 보아도 질릴 정도이다. 하루가 멀다하고 툭하면 터지는 목회 비리들이 그 명백한 증거다. 신학교 재산 수십 억을 횡령한 목사, 자식을 살해한 목사, 고소를 남발하는 목사, 어린 교인을 성추행한 목사, 아내를 구타한 목사, 선거철만 되면 나서는 꼴뚜기 목사, 그리고 수시로 교회 재정으로 장난질하는 목사 등 성도들도 진정 지겹다.

아니면 이게 아직도 극히 일부의 이야기라고 주장하고 싶은 건가. 지금 솔직한 심정으론 중대형 교회들에서는 교권적 담임목사들만 꺼져도

한국교회

회복의

90%는 저절로

이루어질

느껴진다. 그러나 그런 기적은 아직 요원하기만 하다.

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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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그 이름과 형태는 아무래도 좋다. 가정 교회, 평신도 교회, 원형 교회, 지하 교회, 벙커 교회, 열린 교회, 독립교회 연합, 그리고 가나안 공동체 등 모두 좋을 것이다.

새로운

공동체는

교권을

지나치게

독과점하는

기형적인

'담임목사제'를 폐지하고 모든 직분자들이 동역하는 '공동 사역제'로 가면 좋겠다. 아울러 중세적 십일조와 잡다한 헌금을 모두 없애고 사도들의 정신을 따르는 자발적 '무기명 연보'로 단일화하기 바란다. 그래서 교회에 출석하는 누구라도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가식적 억압이 없게 해야 한다.

그리고 교회는 신분과 재산과 여건에 관계 없이 모든 성도들이 진리 안에서 평등하게 쉴만한 물가가 되기를 소원한다. 그리하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겸허히 실천하는 진정한 그리스도의 공동체가 이 땅 위에 다시 아름답게 소생할 것이다.

'성경적인 교회'란 벙어리 개같은 목자들이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다. 바른 교회는 성도들이 깨어나야만 비로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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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파수꾼들은 맹인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들이라.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들이요 누워 있는 자들이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들이니, 이 개들은 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요 그들은 몰지각한 목자들이라(사 56: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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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는 '하나님 말씀' 아니다" '하나님 말씀'과 '목사님 말씀'

설교가 하나님 말씀이 아니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말이다. 좋은 설교가 있는 반면에 나쁜 설교도 있다. 세습 목사의 설교도 있고, 횡령 목사의 설교도 있다. 게다가 표절 목사, 학력 사칭 목사, 성직 매매 목사, 뇌물 수수 목사, 불법 안수 목사, 성추행 목사, 그리고 사이비 목사까지 별의별 잡다한 인생들의 설교가 도처에 널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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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말하자면 설교 속에 인용된 성경만이 하나님 말씀이다. 그래서 그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순간 설교는 '하나님의 가르침'이 아니라 '사람의 가르침'이 되거나, 심지어 '사탄의 가르침'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실제 교회 역사를 보면 이러한 배도 행위를 한 설교자들이 결코 적지 않았다.

이런 아픈 사실을 굳이 언급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오늘날 일부 설교자들 또한 자신이 신적 권위를 지닌 대리인이라도 된 듯 착각하며 설교를 남용하고, 마치 신접한 무당처럼 신도들 위에 군림하려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대리자가 아니다

현대 예배에서 설교가 차지하는 비중은 정말 막중하다. 대부분의 예배가 거의 설교 중심이라는 것을 누구도 부인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다 보니 설교자의 위상 역시 강단의 높이 만큼이나 높아질 수 밖에 없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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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설교를

'설교무오설'이나

지나치게

중시하며

'교황무오설'만큼이나

과신하는 위험한

'설교지상주의'는 사상이다.

만일

누구라도 '설교=하나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다시 중세 가톨릭으로 돌아가는 게 좋을 것이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대리자가 아니다. 그는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풀이하여 전하고 가르치는 전달자일 뿐이다. 이는

마치 어떤

교수가 논어를 가르친다고 해서 그가 곧 공자를 대신하는 대리자가 아닌 것과 같은 이치이다. 설교 또한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 세상 누구에게도 '대리자'나 '중보자'의 권한을 주신 적이 없다. 심지어 사도들조차 하나님의 대리자는 아니다.

그런데 중세 교황이나 사제들은 자신을 그런 신성한 대리자로 격상시켜 '하나님의 뜻'을 오도하고 종교적 월권을 행사했을 뿐만이 아니라, 그를 이용하여 세속적 권력까지 장악했다. 그래서 교황의 말이 성경적 권위를 대신할 정도였다.

그 결과 공교회는 무지한 오류에 빠져 영적 암흑기를 겪어야 했고, 세상 나라들은 소위 성직자란 자들이 군림하는 '기독교 제국주의'의 식민지가 되어 영육으로 극심한 고통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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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교권의 끝이 없던 타락은 설교자에 대한 바른 인식 부족에도 크게 기인한다. 그래서 교황이 성경의 가르침에 반하는 무슨 무지한 말을 해도, 신도들이 그것을 반박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대언처럼 간주했다.

루터 시대의 '면죄부'가 전형적인 사례다. 당시 교황이 면죄부 판매를 발표했을 때 그것을 성경적으로 제대로 해석하고 반박한 사람은 아주 극소수였다. 많은 신도들은 오히려 서로 그것을 사기 위해 돈 싸 들고 달려갔다고 한다. 교회가 잘못 가르치면 어떤 황당한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잘 보여 준다.

설교를 악용하는 목회자들

바른 설교의 유익에 대해 부인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설교 또한 매우 많다는 사실도 심각하게 인정하고 이를 고치기 위해 진지하게 노력해야 한다. 현재 기독교 이단만 해도 무려 200 만 명이 넘는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니 과연 그들의 설교는 또 오죽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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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

이단들

설교만

문제일까.

그건

아니다.

대단히

죄송한

말이지만, 정통이란 교회들의 설교 속에도 이단을 뺨치는 오류가 비일비재하다. 오늘날 여러 교단에서 우민화한 맹신도를 대량으로 생산하고, 무지몽매한 교권주의가 판치게 된 결정적인 배후가 바로 이 '설교 타락'임을 알아야 한다.

달콤한 말로 치장한 저질 설교는 저질 신도를 양산하고, 저질 신도는 결국 저질 목사를 옹호한다. 그리고 그 저질 목사가 또다시 기고만장한 저질 설교를 재생산하는 악순환이 고착화되는 것이다. 결국 교회는 과거처럼 중세적 타락의 늪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이게 바로

요즘

성도들이

날마다

보고

있는

'한국교회

잔혹사'의

근원이다.

혹자는 말할 것이다. "아니 우리 목사님은 매주 성경적으로 바른 말씀만 가르치시는데요!" 물론 그럴 수 있다. 필자도 그런 설교자를 많이 보았다. 그러나 바른 설교의 경우도 조심해야 한다. 일방적인 '편식 설교'를 늘상 애용하는 목회자들이 의외로 많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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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표적인 경우가 '기복 설교'이다. 설교 한 편만 놓고 보면 크게 틀린 이야기가 별로 없는 것 같은데, 자세히 살펴 보면 매주 "복 받으라"는 논리만 되풀이한다. '복'이라는 단어를 빼면 아예 설교도 안 되고, 기도도 안 될 정도로 심하다.

'축복'과 '성공'과 '감사'는 크게 노래하지만, 그리스도인의 '고난'과 '희생'과 '책임'이 누락되어 있다. 신도들의 '교회적 책임'은 항상 강조하여 헌금을 알뜰이 챙기지만, '가정적 책임'과 '사회적 책임'의 중요성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다. 만날 "전도 열심히 하자"고 하며 교세를 늘릴 궁리는 하지만, 그 속셈은 따로 있다.

그리고 교인들에게 십일조는 철저히 강조하지만, 목사 자신조차 성경의 가르침 그대로 "힘에 지나도록"(고후 8:3) 바치지는 않는다. 무조건 '십분의 일'만 바치면 만사형통이고, 나머지로는 신나게 잘 먹고 잘살고 있다. 한국교회 내에 고액 연봉과 큰 재산을 자랑하는 '귀족 목사'들의 존재 자체가 이를 실증한다.

더구나 성경은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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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것이라"(딤후 6:8-9)고 엄중히 경고하는데, 기복 목사들은 이 구절을 절대로 가르치지 않는다. 도리어 하나님의 말씀에 정면으로 도전하며 "부자가 되라"고 한다.

'설교 맹종'은 무당 신앙

가장 한심한 부류는 마치 설교자 자신의 말이 곧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오도하거나,

또는

오직

목사에게만

설교권이

있다고

착각하는 자들이다. 똑같이 허탄한 인생이 성경의 권위를 빙자하여, 자신은 남보다 더 특별히 거룩한 존재라도 되는 것처럼 개인의 권위를 성스럽게 포장한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권위를 도둑질하는 사특한 행위이다. 아무리 크고 멋진 강단이라도 그것이 설교자를 저절로 거룩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니다. 강단은 구약의 제단이 아니다. 그건 단순히 설교의 편의를 위한 통나무 조각일 뿐이다.

어떤

도적이나

잘한다고

해도,

거짓

목사가

도적이

강단에서 순간

제법

갑자기

근엄하게

'거룩한

설교를

제사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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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갑하는 것은 아니다. 제아무리 설교를 잘해도 도적은 그냥 도적이고, 가짜는 계속 가짜일 뿐이다.

특히 "설교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다"는 표현은 매우 조심해서 사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굳이 틀린 표현은 아니지만, 많은 목회자들이 남용하는 이 말은 "설교에는 오류가 있을 수 없다"거나 오직 "목사에게만 선포권이 있다"는 것처럼 오도할 때가 많다. 또한 교권주의적으로 크게 악용되어 목사에게 부당한 권력을 주고 있다.

그러나 본래 설교자의 권위로 말씀을 선포하는 것은 아니다. 말씀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권위로

스스로

자증하고

선포하시기

때문이다.

설교자는

하나님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대리하는 말씀을

제사장이나 선포하는

무당이

유일한

아니다.

권위는

오직

하나님뿐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는 군대에서 명령을 전달하는 일개 연락병이 명령권자인 장군 행세를 해서는 안 되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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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어느 경우이든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는 겸손해야 한다.

특히

한심하기

강단에서

그지

없다.

악쓰며

호통치는

자기가

뭔데

감히

일부

목사들을

하나님의

보면

자녀들인

성도들에게 야단을 치며 소리를 지르나. 오만불손한 자들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 예배 오염의 주범이 바로 이런

권위주의적

설교라고 생각한다.

말씀에 권위가 있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인 성경에 권위가 있다는 것이지, 그것을 전하는 설교자가 그렇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설교자 역시 설교에 합당한 어느 정도의 자격과 권위가 있어야 하지만,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과 동격인 것처럼 위세를 부리는 것은 매우 잘못된 행위이다. 설교자의 권위 또한 스스로 자신이 주장해서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설교를 듣는 회중이 부여해 주는 것이어야 옳다.

'말씀 선포'는 목사의 전유물이 아니다

중세 교회는 '하나님 말씀' 대신에 '교황님 말씀'과 '신부님 말씀'을 따르다 망했다. 따라서 성도들은 목사의 설교를 잘 분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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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모르는 교인은 언제나 위선적인 설교자들에게 이용당하게 되어 있다.

아울러 설교란 '목사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그러니 일부 귀족 목사들이나 부실 목사들처럼 강단에서 사사로이 '사설'과 '잡론'을 펼치면 안 된다. 특히 설교를 사람 많이 모으고 감동 주어 헌금 많이 걷기 위한 인위적 수단으로 오용하는 자들도 적지 않은데, 그건 예배와 회중을 모독하는 반기독교적 행위이다.

설교자 역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교인들과 마찬가지로 반드시 용서를 받아야 할 초라한 죄인이고, 다른 형제들을 섬겨야 할 종이며, 날마다 주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 연약한 성도일 뿐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공교회는 모든 설교자들의 임기를 정하고, 그들이 행여라도 바른 설교에서 벗어날 경우 필요한 조치를 취해야 옳은 것이다. 그런데 무능한 장로와 집사들이 이런 중요한 책임을 제대로 잘 감당하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아 한국교회가 갈수록 부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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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말씀 선포'는 목사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성도의 특권이라는 점이다. 대부분의 교단에서 신학을 전공한 목사를 설교자로 세우는 것은 단지 교회의 일반적인 질서를 위한 것이지, 그게 결코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필요한 경우 회중이 동의한다면 장로나 집사나 교사도 얼마든지 설교할 수 있다.

그래서 단지 직업 목사의 설교만 허용하는 현행 설교 제도는 어린아이가 장성한 후에도 오로지 '이유식'만 먹겠다는 것만큼이나 불균형하고 어리석은 독선임을 알아야 한다.

설교는 양날의 검

한국교회 일부 설교자들이 가장 많이 하는 착각은 단지 목사만이 하나님과 교인 사이에서 성경을 바르게 해석할 수 있는 무슨 특별한 권한을 별도로 지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대단히 잘못된 중세적 성경관이다.

더구나 필자가 본 바로는 오로지 성경만 해석해 주는 정상적인 설교는 매우 드물다. 도리어 고작 성경 몇 구절 읽어 놓고는 줄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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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 말씀'만 잡다하게 늘어놓는 설교가 비일비재하다. 지금 그릇된 설교로 공교회를 온통 '맹신 집단'이나 '사교 집단'으로 변질시킨 목회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성경의 진리를 모르는 설교자는 평생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기 치고, 성경의 진리를 모르는 교인은 평생 사람의 말에 사기당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성경에 무지한 목사는 평생 외식하며 살고, 성경에 무지한 신도는 평생 엉뚱한 자들에게 돈 바치며 산다.

귀중한 설교 시간에 성경의 가르침 이외에 회중의 흥미를 끌 만한 다른 잡된 '무속 신앙'이나 '기복 신앙'을 혼합하여 주장하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배도하는

자들이다.

그것은

'설교'가

아니라 '배교'다.

따라서 설교는 하나님 앞에서 늘 두려운 마음으로 해야 한다. 뛰어난 말솜씨와 기발한 예화로 청중을 웃기거나 울리며 감동을 준다고 해서 그것이 곧 좋은 설교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건 그냥 인간의 잔재주에 의한 웅변이나 무당 굿거리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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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으로 좋은 설교란 인간의 잡설을 최대한 배제하고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가장 쉽게 잘 풀이해 주는 설교이다. 초대교회 사도들과 집사들의 설교가 언제나 그랬다. 사실 진짜 하나님 말씀은 스스로 성경을 펴면 성도 누구나 어디에서든 직접 들을 수 있다.

아무쪼록 앞으로 한국교회의 설교자들은 동네 강아지도 안 물어 갈 그 쓸데없는 '특권 의식'을 철저히 버리고, 겸허히 복음을 전하는 진정한 사역자가 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설교는 양날의 검과 같다. 바르게 쓰면 '보배'이고, 잘못 쓰면 '독배'이다.

"사도들의 교회에서는 설교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이 어떤 특정한 계급의 사람들에게 한정되지 않았다. 개종한 모든 성도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할 수 있었고, 모든 은사가 있는 성도가 회중에서 기도하고 가르치고 권면할 수 있었다.

신약성경은

어떠한

영적

계급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또한

신약성경은 하나님과 일반 성도 사이를 매개하는 특별한 신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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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장을 알지 못한다." - 필립 샤프 (Phillip Schaff, History of Christian Church Vol 2, p.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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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이는 '정치', 더 속이는 '종교' "정치꾼 뺨치는 종교인들"

병신년 벽두부터 중국 증시가 심하게 폭락을 했다. 그 바람에 한국은 물론 세계 경제가 연동하여 침체하고 있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소비력이 너무 급감하여 내수 경기가 거의 고사 직전이다.

그동안

부자들이

돈을

너무

박박

긁어가서

전세계

서민들은

주머니가 거덜나 도무지 소비를 더 하고 싶어도 더 할 여력이 없다. 속된 말로 "먹고 죽을 약"도 못 살 형편이다. 그래서 돈이 안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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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는 돈을 굴릴 만한 마땅한 곳이 없어 안 쓰고, 서민은 쓸 돈이 없어 못 쓴다. 따라서 물건이 잘 팔리고, 공장이 잘 돌아갈 리가 없다. 당연히 일자리는 더욱 감소한다.

경제 위기의 근원은 '부자의 욕심'

많은 경제 전문가들이 툭하면 금리가 어쩌고, 환율이 어쩌고, 주가가 어쩌고, 부채가 어쩌고, 그리고 원유값이 저쩌고 장황하게 떠들고 있지만 그거 다 문제의 핵심은 아니다. 현재의 경제 구조에서는 성장률을 제 아무리 높혀 봐야 크고 탐실한 열매의 대부분은 소수의 부자들이 챙겨가고, 다수의 서민들은 여전히 손가락이나 빨 정도가 되는 것이 빤하다. 그저 언 발에 오줌 누기란 얘기다.

서민들이 게을러서 못 사는 것은 결코 아니다. 아무리 뼈 빠지게 일해도 고물가 저임금 구조하에서는 최소한의 생계에도 벅차다. 그나마 빚을 안 지면 다행이다. 게다가 임시직이 너무 많아 장래 또한 불투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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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는

부자가

돈을 버는

데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경제

구조이다. 돈이 돈을 번다. 그래서 부자는 블랙홀과 같다. 하지만 거기에 빨려 들어간 돈은 대부분 자기들 덩치만 키우지 경제 활성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특히

경제가

나빠질수록

부자들은 돈을 움켜쥐고 투자하지 않는다. 불경기에 열심히 투자를 해 봐야 본전도 뽑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더구나 소수의 부자들이 소비를 하면 얼마나 하겠는가.

반면에 서민들에게 들어간 돈은 그 즉시 모두 소비에 직결된다. 그들에게는 써도써도 부족한 게 돈이다. 그래서 마침내 돈이 돌고, 물건이 팔리고, 기업이 살고, 그리고 시장이 활기를 찾게 되는 것이다.

최근 경제 위기의 근본적 원인은 '부익부 빈익빈'의 자본주의적 양극화가

세계

경제를

초토화한

것이다.

게다가

한국은

분야에서 선두 그룹에 있다. 대충 상위 20%의 부자들이 전체 소득의 70% 이상을 가져간다. 그러니 중산층이 제대로 남아날 리가 없다. 결국 인간 욕심의 문제라는 거다. 그래서 이런 태생적 분배 구조는 단순히 기술적 처방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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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제는 부자들이 스스로 국가에 거액의 세금을 더 부담하며 파격적으로 '부의 재분배'에 앞장 서지 않는 한 영원히 해결되지 않는다.

그래서

정부가

구국적

각오로

직접

나서야

하는데,

부자들의 후원을 받고 있는 많은 정치인들이 이를 선듯 지지할 리가 없다. 북유럽의 일부 복지 국가들을 제외한다면 이런 과업에 성공한 나라가 극히 드문 이유이다.

물론 한국교회도 양국화 해소에 별로 앞장서지 않는다. 아니 교회는 사회보다 도리어 더 심하게 양극화된 상태이다. 상위 20%의 대형 교회가 전체 교인의 80%를 장악하고 있다. 아울러 귀족 목사들은 오히려 틈만 나면 신도들에게 "부자가 되라"고 한다. 그리고 그게 복받은 인생의 증표라고 떠벌인다.

'사드'의 실효성

이런 절박한 시점에 북한은 전격적으로 핵실험을 강행하여 동북아 전체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러자 일부 인사들은 발빠르게 아직 그 성능조차 충분히 확인되지 않은 천문학적 액수의 '미국 고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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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격 체계 사드(THAAD)' 방공시스템을 배치하겠다고 난리를 쳐 중국과의 마찰을 심화시켰다.

그러나 그거 몇 포대 설치했다고 해도 유사시 적의 탄도탄을 몇 퍼센트나 요격할 수 있을지 기술적으로 지극히 의심스럽다. 사드는 제법 훌륭하지만, 그것이 그다지 완벽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드는 북한 미사일 방어보다는 오히려 미국의 대중국 감시 레이더로서의 기능이 더 크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뿐만이

아니라,

북한은

사드의

방어

고도

아래로

공격하는

중장거리 미사일들을 많이 준비하고 있다. 그러니 자칫하면 괜히 중국에게 원거리 공격의 빌미만 주고 미국의 동북아 전략에 따른 굿거리 장단에 맞추어 병신춤을 춘 것 밖에 안 된다는 이야기이다.

그래도 정치판은 별로 반성의 기미가 없다. 일제강점기인 아비 때부터 대대로 기득권의 단맛을 누리던 친일 세력과 그 추종자들은 도리어 툭하면 적반하장식 '종북 몰이'를 하며 자신들의 부끄러운 치부와 부른 배를 시대착오적 이념 논쟁으로 감추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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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들의 패악을 볼 때마다 다음의 말씀이 떠오른다. "그들의 아비들은 내 양을 지키는 개만큼도 못한 자들이다(욥 30:1)."

도대체 "사드 배치를 반대한다"거나,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라"거나, 또는 "정치 좀 바르게 해서 고생하는 서민들 좀 잘 섬기라"고 요구하면 그게 왜 종북 발언인가. 그게 북한하고 무슨 상관인가. 자기들 입맛에 조금이라도 틀린 말을 하면 일단 무조건 종북으로 매도한다.

이자들이 원하는 것은 국민이 아니라 노예다. 자신들은 '영주'이고 백성들은 '농노'나 하라는 것이다. 오죽하면 과거에 "독립운동을 하면 3 대가 망하고, 친일 매국을 하면 3 대가 떵떵거린다"는 더러운 말이

나왔을까.

백성은

눈물이

마를

없이

울고

있는데

무책임하고 무기력한 정치는 수시로 표류하고 있다.

'국민 기만'과 '교인 기만'

최근의 정치 행태를 가만히 보면 국민은 안중에 없고 그저 정권을 잡기 위한 닭싸움으로 보인다. 사실상 헌법 정신에 위배되는 '대국민 사찰'을 가능케 하는 '테러방지법'이 그 중에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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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법안에 따르면 필요시 국정원은 핸드폰과 메일과 사생활을 직접 감시하고

사찰할

있다는

말인데,

과연

그동안

국정원이

국민에게 깊은 신뢰를 주었는지 먼저 묻고 싶다. 도청, 댓글 조작, 서류 조작, 여론 조작, 간첩 조작, 그리고 불법 선거운동 등이 누구의 작품이었나. 국정원을'걱정원'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테러방지법은 국가기관이 국민의 기본권을 크게 제한할 수 있는 무서운 흉기가 될 수 있고, 때로는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로 무고한 시민을 해치며 특정 집단의 이익을 위해 정치적으로 악용될 가능성이 매우 높은 법이다. 한 야당 의원이 "테러방지법이면 대선 총선 다 조작 가능하다"고 한 말은 결코 빈말이 아니다.

아니면

이참에

'국민기만방지법', '고독방지법',

이왕이면

'경제위기방지법',

'소화불량방지법',

'자살방지법',

그리고

'민생파탄방지법',

'가난방지법', '불행방지법'도

'실연방지법', 함께

만들지

그러나. 법이면 다 되는가. 엉큼한 속셈으로 법 핑계대지 말라는 얘기이다. 국민들은 결코 감시 받으며 살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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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북한군을 전방에서 밀어내 후진 배치시켰던 개성공단은 심지어 서해해전 당시 교전 중에도 건재했던 공단이다. 그런데 북한의 핵실험을 이유로 한 성급한 폐쇄 결정은 미국 군산복합체의 입맛에

맞게

남북관계를

본격적인

대결구도로

가자는

서투른

자충수일 뿐이다. 아마 그 근시안적인 무모성에 대해서는 후일 역사가 분명히 심판해 줄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시국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 모르는 일부 대형 교회의 '귀족 목사'들은 금년에도 여전히 밥그릇 챙기기와 교권 남용에 몰두하고 있다.

자신을 반대하는 당회원들과 제직들을 무더기로 제명한 한 대형 교회의 표절 목사는 당회 장악을 위해 잽싸게 신규 당회원을 임명하려고 하다가 법원의 제지로 죽을 쓰고 있고, 유명한 성추행 목사는 과거사 지우기 작업에 열을 내고 있다. 게다가 한국교회 우민화에 지대한 공로가 있는 어느 복타령 목사는 교회 돈을 무려 800 억 원이나 삼킨 혐의로 뒤늦게 수사를 받고 있다.

세상 정치판에서도 결단코 용납되지 않을 엄청난 비리들이 교회 안에서는 '거룩한 성직'으로 은폐되거나 보호 받으며 수시로 무마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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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이다. 그 결과 요즘은 종교인이 정치인보다 훨씬 더 교활하다. 도대체 양심이라고는 개뿔만큼도 없는 작자들이 많다.

그럼에도 직업 목사들의 권익을 위한 노동조합으로 타락한 교단의 노회들은 패거리로 작당하고 비리 목사들의 거수기가 되어 세상의 비웃음을 사고 있다. 그러니 이런 목사들을 누가 신뢰하겠는가. 장바닥 잡배도 이런 밥배들은 드물 것이다. 이들이 전하는 것은 '복음'이 아니라, '볶음'일 뿐이다. 따라서 교인이 우연히 줄고 있는 게 아니다.

"무지, 무능, 그리고 무책임"

작금의 세상살이를 대충 훑어 보았다. 지금 서민들이 너무 힘들다. 하루하루가 고통이다. 특히 저소득층 1000 만 명은 이젠 단순히 '생계'가 아니라, '생존'을 심각하게 염려해야 할 형편이다.

그런데

나라를

말아먹거나

교회를

더럽히는

데에

앞장

'연놈'들이 너무 많다. 정치계, 경제계, 법조계, 교육계, 문화계, 그리고 종교계에 이르기까지 시원한 구석이 별로 없다.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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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무능하고 맹랑한 군상들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마음은 속이 터질 지경이다.

정치를 정치인에게만 맡기는 사회와 교회를 성직자에게만 맡기는 종교는 희망이 없다. 그러느니 차라리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것이 낫다. 국민이 방관하는 정치와 교인이 방관하는 종교는 반드시 부패하게 되어 있다. 더구나 참된 기독교인이라면 단순히 교회 속에서만 거룩하게 사는 '종교인'이 아니라, 먼저 세상 속에서 소금이 되는 '신앙인'이어야 옳다.

근자에 한 젊은 코미디언에게 "당신은 코미디나 하지 왜 자꾸 정치 발언을 하느냐?"고 누가 물었다. 그러자 그는 매우 분개하며 이렇게 답했다. "정치가 하도 코미디를 하니, 코미디가 정치에 나서는 것 아니냐"고. 교회도 마찬가지다. 종교가 하도 개판을 치니, 동네 바둑이라도 나서야 할 판인 것이다.

세상이 말세가 되니 목회로 개판치고, 설교로 개판치고, 표절로 개판치고,

학력으로

개판치고,

안수로

개판치고,

성추행으로

개판치고, 교권으로 개판치고, 돈으로 개판치고, 권력으로 개판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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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으로 개판치고, 그리고 정치로 개판치는 자들이 갈수록 더 위세를 부리고 있다.

그러나 사실 교회 부패는 불가피한 것이 아니다. 그건 매우 인위적인 문제다. 인간이 의도적으로 장난을 쳐서 구조적으로 만든 문제다. 그들은 한국교회 '비리의 창고'에 자동문을 달았다. 그래서 목사만 접근하면 저절로 열어 준다. 그러니 이제라도 그 문짝을 고치면 되는 것이다.

아무튼 우리가 너무 낙심할 필요는 없다. 저들 또한 그저 덧없이 흘러가는

불쌍한

인생일

뿐이다.

성경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잠 21:31)"고 했다. 결국에는 진리가 이긴다. 때가 되면 '악인의 빛'은 반드시 꺼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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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로 영업하는 교회 성전주의 신앙과 예배의 상업화

근자에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에 빠진 여동생이 찾아와 간절히 도움을 구했건만 이를 냉정하게 외면했던 한 교인이 그 다음달엔 가족 동반 해외여행을 떠났다는 말을 듣고 하루 종일 마음이 울적했던 기억이 있다.

또한 장사가 잘돼서 부자가 된 어느 집사가 거액의 십일조는 꼬박꼬박 바치면서 막상 너무 궁핍하여 생계를 걱정하는 동생 가족은 별로 돌보지 않아 동네에서 '공공의 적'이 되었다는 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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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었다. 왜 우리는 이 지경까지 망가졌을까. 도대체 우린 교회에서 무엇을 배웠기에 이 모양이 되었을까.

그런데 일부 교회에서 잘못 가르치는 것이 비단 이것뿐만은 아니다. 그

대표적인

중에

하나가

교회당

건물을

신성시하여

'성전'이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무지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알고도 고의로 그러는 건지 그 깊은 속내를 알 수 없지만, 왜 어떤 목회자들은 틈만 나면 교인들을 오도하는지 모르겠다.

오늘날 어떤 교회들은 수백 억 또는 수천 억의 돈을 걷어 화려한 예배당을

높히

세우고

마치

바벨탑이나

성황당처럼

신도들을

유혹하고 있다. 그래서 초신자들은 미처 성숙한 신앙을 알기도 전에 성전주의, 예배주의, 성장주의와 함께 기복 신앙부터 먼저 배우기도 한다. 더구나 그 육식 공룡같은 건물은 대형 마트 하나가 동네 시장 전체를 죽이는 것처럼 동네 작은 교회들을 줄줄이 도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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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가 성전이다

그러나 아직도 그 벽돌 덩어리를 성전이라고 주장하는 목사가 있다면, 그건 그의 머리가 돌이라는 말과 같다. 그런 거짓말이 나오는 이유는 목사가 뛰어나게 무식하거나, 아니면 양심이 지극히 결여된 경우이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9)"고 하셨다. 물론 여기서 다시 일으킬 성전은 부활하실 예수의 몸, 즉 그리스도의 지체인 '신약 교회'를 의미한다.

성전을 허물라고 하신 이유는 어린 양 예수님께서 온전한 제물이 되시어 앞으로는 더 이상 구약 율법에 따른 성전 제사가 필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십자가 사역 이후 구약의 성전, 제물, 그리고 제사장이 폐지되었다. 아울러 반드시 성전에서 바쳐야 했던 율법의 십일조도 함께 사라졌다. 사도들의 초대 교회에 제사와 십일조가 시행된 기록이 전혀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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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시대의 성전과 제사장은 성도들 자신이다. 사도바울이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고 설파하신 것 그대로다.

따라서 오늘날 적지 않은 교회에서 '성전 건축'이라는 용어를 쓰거나, 교회당 건물을 무슨 성전이라고 호칭하는

것은 사실

대단히 용감하고 무지한 행동이다. 이제 해 아래에 그리스도의 지체인 성도들 자신 외에 다른 건물 성전이란 결코 없기 때문이다. 예배당은 그저 모임의 편리를 위한 처소일 뿐이다.

초대 교회가 '솔로몬 행각', '다락방', '회당', 그리고 '가정집' 등에서 모인 이유도 건물 자체에는 아무런 특별한 영적 의미가 없었기에 그런 것이다.

그러면

과연

한국교회의

많은

목회자들이나

신학자들이

이런

초보적 사실을 정말 몰라서 만날 그 얼어죽을 '성전 타령'을 할까. 그건 아니라고 본다. 적어도 교회학교 교사 정도면 모두 알 만한 이런 기본적 지식을 신학을 전공하신 목사들이 모를 리가 없다. 아마 십중팔구는 자신의 양심을 속이며 신도들을 기만하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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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한다. 반면에 정말 몰랐다면 그는 목사로서 자질이 매우 부적격한 사람이다.

만일 예배를 드리는 특별한 장소이기에 그 건물이 거룩한 성전이 된다고 주장한다면, 그럼 예식장이나 식당에서 예배를 드리면 그 예식장과 식당이 갑자기 성전으로 둔갑하나. 그리고 그런 식이라면 예배당 화장실은 무슨 '거룩한 뒷간'이라도 되는가.

더구나

이미

술집이나

유흥업소로

간판을

바꾼

유럽의

많은

교회당들은 거룩한 성전이 변신한 것이란 말인가. 아니면 그들은 감히 하나님의 성전을 돈 받고 팔아 먹었다는 말인가. 그래서 그들이 천벌을 받아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라도 맞았는지 묻고 싶다. 특히 박사학위까지 소지한 대형 교회의 멀쩡한 목사들이 수시로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기만할 때면 구토가 날 지경이다.

반면에 "불의에 침묵하는 종교는 필요 없다"고 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일갈이 이들의 거짓말과는 너무나 대조가 되서 가슴이 아릴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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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 우상화'는 '목사 우상화'의 아류

아무튼 그들은 왜 '성전 신앙'이나 '건물 신앙'을 그토록 집요하게 강조할까.

마디로

교회당

중심의

신앙

생활을

유도하기

위함이다. 그래야 신도들을 눈에 보이는 종교적 미신으로 이끌어 더욱 효율적으로 교세 안정을 추구하고, 사람을 모으고, 돈을 모으고, 결국 교회가 빨리 성장할 수 있으므로 이는 아주 약발이 좋은 명분이 될 수 있다.

더구나 구약의 성전은 본래 제사하는 곳이다. 성전과 제사장은 불가분의 관계다. 따라서 성전에는 당연히 제사장이 있었으니 오늘날

자신들이

역활을

가로채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전주의'는 태생적으로 '성직주의'와 이란성 쌍둥이다.

우리는 작금의 성직주의를 현대판 '교황주의'라고 비판한다. '건물 우상화'를 추구하는 성전주의자들의 궁극적 속셈은 '직분 우상화'에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결국 목사직을 교인들이 감히 손 댈 수 없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만들고자 예배당을 우상화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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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어찌 하든 예배당을 성스럽게 포장해서, 마치 구약의 지성소처럼

그곳을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신성한

장소로

각인시키려 애쓴다. 거기서 예배하면 더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가깝게 만날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고 세뇌하는 것이다. 이른바 예배의 상품화를 추구한다.

그들은 공예배를 '인생 최고의 신앙 행위'로 중시하며 강조한다. 그 결과 많은 신도들은 '예배지상주의'에 깊히 중독된 상태다. 예배만 잘하면 복은 따 놓은 당상이라 믿는다. 그래서 주마다 예배는 넘치지만, 삶이 부실하다. 믿음은 있는데 행함이 없다. 열심은 있는데 열매가 없다.

물론 이런 종교적 기만에 십자가 장식이 아주 긴요하게 쓰여지고 있다. 요즘 강단을 '제단'으로, 목사를 '제사장'으로, 그리고 목사님 말씀을 '하나님 말씀'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자들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신약 교회에는 더 이상의 성스러운 단이나, 성스러운 물이나, 성스러운 건물이나, 성스러운 땅이나, 또는 특별히 더 성스러운 인간 따위가 별도로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게

바로

우리가

개신교에서

날뛰며

예배당을

서낭당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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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질시키고 있는 중세적 '기독교 무당'들을 엄중히 축출해야 하는 이유이다.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말하는 것은 본래 이단들이 쓰던 수법이었다. 그런데 수십 년전부터 여의도의 한 대형 교회가 이런 기만적 호칭에 앞장을 서더니, 근자에는 정통 교단의 교회들마저 너도나도 이 몰상식한 대열에 합류하고 있다.

물론 매주 교회당에 모여 예배하는 것은 지극히 귀하고 아름다운 일이다. 그게 잘못이라고 말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건물을 우상화해서라도 어찌 하든 교인들의 생활을 교회당 안으로

유도하여

이용하려는

인위적

행위와

심보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성전이라는 고상한 명분으로 가능한 자주 모이게

하고, 많이

바치게 하고, 그리고 제사장처럼 군림하기가 좋기 때문이다. 이들은 목적을 위해서라면 거짓된 수단도 가리지 않는 변절자들이다. 따라서 이단이나 사이비 교회에서처럼 목사의 독선적 '토크쇼'로 공연되는 '관람형 예배'에 대해 매우 조심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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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성전은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는 신성한 장소였다. 하지만 유대 백성들은 성전 제사와 절기만 잘 지키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여기며 하나님의 임재를 성전 속에 가두고, 정작 사생활에서는 제멋대로 방종하거나 우상을 섬기며 산 경우가 많았다. 엄숙한 제사는 있었는데, 바른 삶이 없었다. 화려한 성전은 있었지만, 진리가 없었다.

이스라엘에 최초의 성전을 세운 위대한 왕 '솔로몬'조차 이방의 처첩들과 우상들 속에서 살았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이는 눈에 보이는 화려한 건물을 세웠다고 능사는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의 이웃이 성전이다

오늘날 예배당 건물을 신성시하는 그릇된 성전 신앙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따르는 바른 신앙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의 부귀에 탐익했던 노쇠한 왕 솔로몬처럼 '삶이 없는 제사'를 바치는 맹신과 방종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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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옷을 입은 이리들에게 속지 말아야 한다. '성전주의자'들은 예배당 벽돌로 영업한다. 그러나 건물로 사람을 모으고, 돈을 모으고, 세력을 모으고, 그리고 허세를 떠는 것은 십자가 정신이 아니라

바벨탑

정신이다.

그런

배역한

행위는

변절한

종교

업자들이나 하는 짓이다.

'성경'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야말로 '성전'된 신자가 할 일이다. 따라서 교회당 건물과 교회당 조직과 교회당 모임에만 돈과 시간을 퍼붇지 말고, 자신의 가정과 친인척과 이웃을 균형있게 도우며 살아야 옳다.

본래 구약의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 것이다. 예수를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우리에게 오셨던 예수님 자신이

바로

계시된

말씀(로고스)이시다.

따라서

진정한

성전

신앙은 참성전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인 성경대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겸허히 실천하며 사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구약이 '성전중심 신앙' 시대였다면, 신약은 '성경중심 신앙' 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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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택하셔서 세상 나라들을 향한 '제사장 국가'로 세우셨으나 그들은 이 거룩한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실패했다. 성전마저 타락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2000 년 전 예수님께서 영원한 대제사장으로서 손수 이 땅에 오신 이유이다.

그리고

구약의

'성전

사역'을

완성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으로 인해 신약 교회에서는 성도 자신이 성전이다. 뿐만이 아니라 함께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의 형제와 이웃이 성전이다.

하나님은 예배당 벽돌 속에 갇힌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세상 어디에나 계신다. 우리 인생의 모든 영역에 함께 계신다. 특히 소외당하고 있는 우리 이웃의 눈물 속에 계신다. 가난한 자 속에 계시고, 애통하는 자 속에 계시고, 화평케 하는 자 속에 계시고, 그리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속에 계신다.

오늘날 교회마다 예배는 풍년인데 삶이 빈약하다. 예배는 요란한데 삶이 천박하다. 예배는 고상한데 욕심을 못 이긴다. 수십 년을 예배해도 목사와 교인의 삶이 별로 변하지 않는다. 직위와 감투는 좋아하는데 사람이 달라지지 않는다. 직분자들마저 그저 '잘 먹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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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사는 것'이 시대정신이 되었다. 오죽하면 어떤 이들은 '개신교'를 '개독교'라고 성토할까.

그동안 고가의 대형 예배당을 건축한 교회들 중에 담임목사의 재벌급 초호화 생활이나 세습이나 재정 비리가 없었던 교회가 과연 몇이나 있었나. 이들 대부분은 세인들로부터 혹독한 비판이나 욕설을

듣고

금란교회,

있다.

광림교회,

여의도순복음교회, 명성교회,

사랑의교회,

왕성교회,

소망교회,

경향교회,

그리고

충현교회가 그 좋은 예이다. 이 외에도 삼천리강산 방방곡곡 도시마다 일일이 다 셀 수 없이 아주 많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들의 '예배 영업'은 매우 성업중이다. 예배가 넘치는 곳엔 돈도 넘치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교적 건물로 허풍떨고 극장식 예배로 쇼하지 말라. 그건 기독교가 아니다. 공예배 역시 단지 삶의 일부분이고, 예배당은 그저

돌조각일

뿐이다.

성도가

교회이고,

성도가

제사장이다.

그러므로 바른 '삶이 없는 예배'란 '제물이 없는 제사'와 같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매주 주일예배를 드리지 않으셨다. 성도는 예배를 위해 사는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그들에겐 삶이 예배이다.


145

"내가 바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랑이지, 제사가 아니다. 불살라 바치는 제사보다는 너희가 나 하나님을 알기를 더 바란다(호 6:6, 새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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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재미 없으면 지는 거다 성도들도 좀 놀자

교회 밖 세상에서는 깔깔대며 아주 즐겁고 재미있게 잘 놀다가도, 이상하게 교회에만 오면 갑자기 거룩해지는 교인들이 있다. 어깨가 굳어지고, 표정이 경건해지고, 그리고 행동이 무거워진다. 무슨 이유인지는 정확히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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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었던 교회

중학생 시절 필자가 친구의 손에 이끌려 처음 출석한 교회는 동네 길거리의 상가 3 층에 있던 한 작은 교회였다. 당시 그 교회는 성인은 물론 어린 아이와 고양이까지 모두 합쳐도 60 명이 채 안 되었다.

그러니

중고등부라고

해봐야

아무리

털어봐도

겨우

8~9 명이었다.

그런데 지금 다시 생각해도, 그 교회는 정말 재미있었다. 신학교 교수였던 목사님은 얼마나 설교를 알기 쉽게 잘 하시던지, 그 어린 마음에도 하나님 말씀이 가슴 속에 쏙쏙 들어왔다. 그러니 예배가 즐거웠다.

게다가

찬양도

은혜롭고,

뒤늦게

합류한

성가대도

재미있었다. 지휘자 집사님이 재치가 있으셔서 제법 긴 연습시간도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게다가 예배 후에는 여러 사람이 난로가에 둘러 앉아 사담을 많이 나누었는데, 그 시간이 또한 꿀맛이었다. 거기서 나누는 소소한 대화 속에서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 그 덕분에 본래 쑥맥이었던 필자가 늦게나마 철이 드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후일 전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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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하고 직업을 선택하는 일에 있어서도 교회 친구들과 나눈 대화가 큰 역활을 하였다. 진로를 2 번이나 바꾸었으니까 말이다.

필자는 그 첫 교회를 근 15 년 동안 행복하게 다녔다. 교회의 다른 친구들도

비슷했다.

매주

주일이

기다려졌고

교회가

생활의

활력소였다. 필자의 성장기는 교회를 빼고는 도저히 설명이 되지 않을 정도다. 그래서 당시는 세상의 모든 교회들이 모두 다 그렇게 즐겁고 재미있는 것으로 알았다.

우리가 지고 있다는 증거

그런데 그런 아름다운 환상이 깨진 것은 직장 때문에 지방으로 이사하여 다른 여러 교회들을 알게 된 후부터다. 물론 처음 출석하여 낯설어서 그런 면도 크겠지만, 그럼에도 좋은 교회와 그렇지 못 한 교회는 벌써 첫날부터 다르다.

건강한 교회는 처음부터 분위기가 편하고 따뜻하고 부드럽다. 심지어 광고 시간까지도 훈훈하고 재미있다. 게다가 예배가 끝난 후 교인들 표정을 보면 대부분 싱글벙글이다. 그리고 사방에서


149

다가와 먼저 손을 내민다. 마치 모처럼 고향 방문이라도 온 느낌이 든다.

반면에 어떤 교회들은 예배당에 들어가 자리에 앉아도 옆으로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설교는

성경적인데도

웬지

딱딱하고

권위적이다. 또는 설교자 혼자 뜨겁다. 아니면 예배가 무겁고 지루하다. 예배 후에는 대부분의 교인들이 불과 몇마디를 나눌 틈도 없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그도 아니면 친한 사람들끼리만 몇이 몰려다닌다.

사실 교회처럼 끈끈한 공동체는 드물다. 성인이 되면 부모나 친형제도 매주 보기 힘든 경우가 많다. 하지만 교우들은 매주 만날 수 있으니 얼마나 가까운 사이인가.

교회가 재미없으면 그건 지는 거다. 사탄이 제일 좋아하는 교회 중에 하나가 '재미없는 교회'다. 그래서 주일이 부담되고, 예배가 의무적이 되고, 성가대 연습이 지루하고, 헌금이 아깝고, 그리고 교회 봉사도 귀찮아지게 되면 그건 분명히 우리가 지고 있다는 증거이다.


150

그래도 남의 탓은 하지 말자. 아주 한참 나중에야 깨닳은 게 있다. 사랑이 없으니 재미가 없는 것이다. 다른 교인들의 잘못도 더러 있겠지만, 사실 진짜 문제는 나 자신이었다. 내게 사랑이 있으면, 예배당 복도에서 아장아장 걸어다니는 어린 아이만 보아도 미소가 나고 재미있다. 환한 얼굴의 교우들을 보면 저절로 기쁘고, 같은 구역 가난한 교우가 궁금해지고, 그리고 시시콜콜한 대화도 모두 즐겁다.

그 흔한 마을 계모임도 10 명만 모이면 왁자지껄 요란을 떨며 엄청 재미있다. 그런데 어떤 교회에 가보면 30 명이나 모였는데도 별로 재미가 없을 때가 많다. 조폭들도 모이면 의리가 있고 신나게 사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인 곳에 사랑이 없고 재미가 없다면 말이 되는가. 재미가 사라진 가정은 문제가 있는 가정이고, 재미가 없는 교회는 병든 교회이다.

성도들도 좀 놀자

며칠

가나안공동체

운영위원들이

모였을

위와

비슷한

이야기를 서로 나누었다. 우리는 꼭 재미있게 가자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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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까칠하게 굴지 말자고 했다. 필요하면 가끔 춤도 추고, 연극도 하고, 그리고 팝이나 가요도 좀 부르자고 했다. 그러나 이게 그냥 막가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세상에서는 잘 놀다가도 왜 교회만 오면 달라지나. 너무 고상한 척 애쓸 필요는 없다고 본다. 교회는 쉼을 얻고, 힘을 얻는 곳이 되어야 옳다. 공적 예배 시간만 아니라면 긴장을 풀고 실수도 좀 하고, 수다도 좀 떨고, 그리고 때로는 화평을 위해 내가 다소 망가지면 또 어떤가.

교회는 아버지 집이다. 교회는 자녀들의 쉼터이지, 무슨 수도원이 아니다.

교회는

세상의

죄인들이

모인

곳이지,

무슨

거룩한

천사들이 모여 무게 잡는 곳이 아니다.

청년부 시절 매주 조모임을 했었는데 어떤 조는 매주 도를 닦고 있는가 하면, 다른 조는 그 방에서 웃음 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아예 깨가 쏟아진다. 그것도 모자라서 토요일이면 자기들끼리 따로 모여 산을 가고, 딸기밭을 가고, 그리고 기도원도 가고 아주 신바람이 났다.


152

물론 재미있는 교회가 무조건 바른 교회라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재미없는 교회는 그건 분명히 잘못된 교회이다.

작은 교회가 큰 교회보다 불리하면서도 동시에 유리한 점이 한가지 있는데 그게 바로 교인수다. 오래 전 필자가 호주에 유학했을 때 출석했던 한 교회가 그랬다. 불과 30 명 정도의 작은 공동체인데도 모이면 너무 재미가 있었다. 목회자와 교인들이 모두 헌신적이고 자발적이었다.

아이들도 몇 명 없었는데 우리 딸아이는 교회만 가면 언니들 손잡고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하루 종일 몸 바쳐서 놀았다. 그러니 주일 아침이면 아이들이 먼저 부모를 재촉해서 교회에 일찍 온다. 우리 어른들도 그 아이들에게 좀 배워야 한다. 결국 그 교회는 잘 성장해서 불과 몇 년만에 자립 교회가 되었다.

물론 작은 교회는 매우 불리하고 성장하기가 너무 힘든 것이 사실이다. 그래도 아직 희망은 있다. 작으면 더 뭉치기 쉽다. 서로를 더 잘 알 수 있다. 더 사랑할 수 있다. 더 재미있을 수 있다. 그리고 진짜로 재미가 있으면 일단 반은 성공하고 있는 셈이다.


153

그러므로 특히 작은 교회의 목회자와 교우들에게 더욱 힘찬 격려를 보내고 싶다.

"의인은

기뻐하여

즐거워할지어다(시 68:3)."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기뻐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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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의 호위무사 장로들이 무능하다

"나는 교회 장로지만 절대 교회가 하는 일에 대해, 목사님이 하는 일에 대해, 전혀 시비를 걸고 싶지 않다. 하나님이 세우신 분들을 세상 잣대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그러니까 함부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 큰 징계를 받는다. 자신의 목숨을 앗아가는 병을 내린다든가, 자녀를 데려간다든가, 아내를 데려간다든가. 모든 것을 뺏어 버리고, 반신불수를 만들 수 있다."

이는 최근 한 대형 교회의 어느 장로가 담임목사의 비리에 대하여 답변한 말을 그대로 요약한 것이다. 한국 개신교는 어찌 하다가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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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경까지 되었는지 모르겠다. 목사 직분이 무슨 구약의 모세나 대제사장, 또는 신약의 사도라도 되는 줄 아는 것인지. 도대체 누가 장로들을 이 모양으로 가르쳐 놓았을까. 그 무지의 심오한 깊이에 열린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목사만 하나님이 세우셨나

그래서 왜 목사를 함부로 평가해서는 안 되는지 그 기구한 사연을 물어보니 "하나님이 세우신 분들을 세상 잣대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정말 웃기는 논리다. 그러면 목사만 특별히 하나님이 세우셨나. 만일 그런 논리가 옳다면, 교회의 장로도 하나님이 세우셨고, 집사도 하나님이 세우셨음을 알아야 한다.

더구나 성경엔 오늘날처럼 제멋대로 날조한 '무소불위의 교권'을 독점한 이런 요상한 목사직이란 없다. 개신교에서의 목사는 사도도 아니고, 제사장도 아니고, 그리고 선지자도 아니다. 그저 '가르치는 장로'의 한 사람일 뿐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불과 수백 년 전까지만 해도 제도권 기독교에는 현재 우리가 당연시하고 있는 '목사'라는 제도 자체가 아예 없었다.


156

그런데 왜 대부분의 교회에서 다른 장로나 집사가 비리를 저지르면 총알 같이 징계 처리를 하면서, 유독 목사의 비리에 대해서는 수시로 딴청을 부리는 것인지 그 이유를 진정 모르겠다.

그리고

진정

목사는

하나님이

세우신

직분자이기에

비판이나

치리를 못 한다는 논리가 옳다면, 개신교는 오늘이라도 모두 다 짐을 싸서 다시 가톨릭으로 돌아가야 마땅할 것이다. 현재의 개신교는 과거 종교개혁 시대에 당시의 교회법으로 '하나님이 세우신 직분자'들인 교황, 추기경, 주교, 그리고 사제들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대적하면서 중세 교회를 이탈했기 때문이다.

아니면 여러 직분 중에서 오로지 목사만 하나님이 직접 세우신 직분자라는 주장인가. 어찌된 영문인지 요즘의 개신교 목사직은 과거

중세

사제보다

교권을

독점하고 과도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래서 "목사가 교주다"라는 말이 이젠 낯설지 않을 정도다.

그나마 사제들은 독신 서약을 하고 대개는 다른 신도들보다 훨씬 더 검소하게 산다. 반면에 상당수 중대형 교회의 목사들은 누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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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누리고 가질 것 다 가지고 산다. 게다가 그것도 부족해서 교회 돈을 남용하고 신도들을 농락하는 자들이 하나둘이 아니다.

최근 어느 교회의 한 원로 목사가 축도 한번 하고 무려 50 만 원이나 받았는데, 도리어 그게 적다며 투정부려서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이 그 좋은 예다. 게다가 단지 설교 한번 하고 300 만 원을 받아간 목사도 있다. 이처럼 축도비, 설교비, 그리고 강사비 등의 잡다한 명목으로 교회 돈을 공돈처럼 아는 목사들이 너무 많다. 최근 간통 혐의로 유명해진 어느 목사도 조사해 보니 실제적으로 무려 3 억 원의 연봉을 챙겨 갔다.

설상가상으로 더욱 한심한 부류들은 그런 파렴치한 목회자들을 끼고돌면서 지극정성으로 수발을 들고 있는 우매한 장로들이다.

'부패한 목회'의 수호자들

늘상 하는 말이지만, 건강한 교회와 신실한 목회자가 결코 적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또한

적은

연봉을

받으며


158

미자립교회에서 수고하고 있는 목회자들의 어려움도 우리는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고생하는 목사가 많으니, 교권을 오용하며 사치하는 일부 목사를 그대로 두자는 것은 지극히 몰상식한 이야기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아간

단 한

가정

때문에

아이성

전투에서

처참하게

패배했다. '승리'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성결'이었기 때문이다.

작금의 한국교회 부패 문제는 장로들에게 큰 책임이 있다. 장로가 바로 선 교회가 부패하는 경우는 본 적이 없다. 그런데 교인들이 거룩한 교회를 수호하며 주의 일을 성실하게 잘 하라고 기껏 장로로 세웠더니, 상당수 장로들은 엉뚱하게 담임목사의 시녀 노릇이나 하며 교회를 병들게 하고 있다. 그럴거면 차라리 거기서 직분을 더럽히며 시간 낭비하지 말고 오늘이라도 당장 장로직을 내놓고 물러나는 것이 좋다.

모세는 여호와의 제사장인 아론을 책망했다. 나단은 하나님이 세우신 왕인 다윗을 책망했다. 바울은 예수님이 세우신 사도인 베드로를 책망했다. 개혁자 위클리프와 후스는 당시 공 교회의 수반인 로마 교황과 부패한 성직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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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가진 프로테스탄트 신앙의 원조 선배인 루터와 칼뱅은 아예 교황과 목숨 걸고 맞짱떴다.

그런데 요즘 어떤 장로들은 "목사가 무슨 짓을 하든지 비판하지 말라"고 한다. 정말 무식이 넘치는 말이다. 목사가 무슨 무오한 천사나 성인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그러니 과거 중세 사제직을 개혁하겠다던 목사직이 사제보다 더 타락하여 사이비적 교주가 되고, 무당이 되고, 또한 우상이 되어 500 년 종교개혁사가 오늘날 한국교회에 와서 막장을 치고 있다. 무능한 장로와 무심한 집사와 무지한 맹신도들이 한국 개신교의 앞날을 더욱 어둡게 하고 있는 것이다.

요즘 청년들 중에서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비율은 고작 4% 미만이라고 한다. 그들이 괜히 교회를 떠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교회가 단지 시대에 뒤져서 교회를 떠나는 것이 아니다. 교회당이 허름하고 목사의 설교가 과거보다 유창하지 못 해 떠나는 것도 아니다.


160

진짜 문제는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인 복음을 배신하고 정의를 버렸기에

떠나는

것이다.

청년들이

주시하고

있는

'하나님의

공의'를 유독 교회 내의 노땅들은 경시하고 있다.

세상에 어느 바보가 매주 꼬박꼬박 교회당에 돈을 바치며 교권적 목사의 종노릇하길 원할까. 세상은 변하는데 아직도 어떤 교회들은 요지부동으로 돈과 권력을 추구한다. 그리고 결국 그런 몰상식이 체질화한 교회가 젊은이들을 질식시키며 그들을 떠나게 하고 있다. 한국교회에

바리새적

'경건의

모습'은

넘치지만,

실제

'경건의

능력'은 갈수록 사라지고 있다는 증거다.

장로의 직무는 "잘못을 시정하는 것"

장로들이 정신을 차려야 한다. 장로는 목사의 수하가 아니다. 그러니 괜히 엉뚱한 인생들에게 종노릇하지 말라는 이야기이다. 오히려 장로들의 조직인 당회가 목사들이 바른 목회를 하도록 잘 인도하고 관리해야 옳다. 수십 년의 오랜 신앙생활을 거쳐 공 교회의

중직인

장로가

되었으면

그래도

연하의

목사들보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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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이라도 더 성숙한 지혜를 지녀야 정상이 아닐까. 만일 그게 아니라면 뭐 하려고 장로가 되었나.

신약성경을 보면 심지어 사도인 베드로조차 자신을 단지 장로의 한 사람으로 자처했음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벧전 5:1)"

반면에

상당수

'교권주의자'들이

교단들의 얼마나

헌법을

꾸준히

보면

장난을

그동안

쳐서

장로

부패한 직분을

격하시키고, 목사를 다른 장로들보다 얼마나 특별하게 우월하고 신성한 존재로 둔갑시켰는지 아주 쉽게 알 수 있다. 영적으로 개뿔도 없는 똑같이 허탄한 인생들이 순진한 신도들을 속여 온갖 위선을 떨며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도 되는 양 긴 옷을 입고 종교적 상술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심지어 "장로의 최고 미덕이 담임목사를 보좌하며 순종하는 것이다"라고 노골적으로 세뇌하고 가르친다. 물론 그것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점이 있다. 목사 역시 똑같이

하나님이

세우신

'장로의

신분'이면서,

목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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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들에게 별로 순종하지 않고 만날 장로들의 순종만 일방적으로 요구하는가.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다. 그러니 앞으로는 목사부터 먼저

겸손하게

윗어른이신

장로들을

보좌하며

전심으로

순종하기 바란다. 바른 신자라면 순종은 피차에 서로서로 해야 옳은 것 아닌가.

게다가 요즘은 교회의 예배는 물론이고 입법, 사법, 그리고 행정에 이르기까지 목사가 거의 다 좌지우지한다. 그래서 어떤 교회의 조직과 운영은 동네 조폭들보다도 더 사이비화하여 경직되어 있다. 장로나 집사들은 고작 담임목사의 애완견이 되었고, 부목사들은 거의 군견 수준으로 혹사당하기도 한다. 그 결과 일부 중대형 교회들은 사실상 '강도의 소굴'이 되었다. 그들은 담임목사직을 마치 유대교의 제사장이나 중세교회의 교황처럼 특권화했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보면 목사, 장로, 그리고 집사 등 교회의 모든 직분은 다 대등함을 알아야 한다. 목사는 결코 교회의 우두머리가 아니다. 그럼에도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목사들이 스스로 영구직 당회장이 되어 중세적 교권 남용을 자행하고 있다.


163

하지만 교회를 다스리는 일은 본래 장로들의 고유 직무이다. 따라서 목사는 매사에 굿판의 선무당처럼 아무데나 나대며 홀로 작두 타지 말고, '가르치는 장로'로서 자기 직분 본연의 분수를 겸허히 지켜야 마땅하다.

거룩한 저항자들

솔직히 말해보자. 요즘 웬만한 중대형 교회에서 담임목사가 왕이 아닌 교회가 얼마나 있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지 말라. 어떤 목사들은 수시로 구약만 가르치며 제물을 챙기는 제사장 행세를 하려 한다.

대다수 교인들은 일부 목사들이 얼마나 교만한지 그 실정을 잘 모른다. 근자에 보면 목사의 권위와 품위가 떨어지니 "평교인에게는 인사조차 먼저 건네지 마라"고 다른 목회자들에게 가르치는 자도 있다.

그리고는 입만 열면 "예수를 잘 믿어야 복을 받고 부자가 된다"고 강변한다. 아니 평생을 그토록 가난하게 사신 예수를 보고서도


164

어떻게 그런 거짓말이 그리 술술 잘 나오는지 참으로 그 지능이 의심스러울 정도다.

이제 정말 한국 개신교에 파선한 양심의 부스러기라도 조금 남아 있다면, 지금이라도 담임목사의 일개 호위무사로 전락한 장로들을 양산하고 있는 그런 불의한 관행과 교단법은 즉시 고쳐야 할 것이다.

역으로 말하자면, 이는 장로들이 자기가 서야 할 자리를 제대로 지키지 못 해 생긴 문제이기도 하다. 심할 경우 어떤 장로들은 회중이 아니라, 담임목사가 자신을 선택하여 임명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스스로 목사의 하인처럼 자처하기도 한다. 정말 한심할 일이다.

오늘도 성도들은 주야장천 부정을 일삼다가 멸망한 성직자 중심의 예루살렘 성전처럼 '목사 중심 교회'가 속히 무너지고, 이 땅에 새로이 '성도 중심 교회'가 바르게 세워지기를 진심으로 갈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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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바로 500 년 전 부패한 교황주의와 성직주의에 맞서 "오직 성경!"을 외치며 맨몸으로 싸웠던 우리 믿음의 선배들인 '거룩한 저항자들(프로테스탄트)'의 정신이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각 교회에는 경건하고 근엄하고 거룩한 사람들 가운데서 선택된 장로회가 있어서 잘못을 시정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직분이 한 시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님은 경험상 분명하다. 그러므로 이 다스리는 직분은 모든 시대에 필요하다." - 장 칼뱅(Jean Calv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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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상화'와 개신교의 변질 설교, '하나님 말씀'으로 받아야 하나

언젠가 원로 신학자인 어느 목사님의 쓴 경험담을 들은 적이 있다. 그 분이 신학대학 교수 시절 한 교회의 초청을 받아 설교한 후 밖으로 나오다가 본의 아니게 뒤에서 걸어오시던 할머니 두 분의 대화를 들었다고 한다.

한 분이 "오늘 목사님 설교 알아듣겠어요?"라고 하니, 다른 분이 "우리같이

무식한

노인이

어떻게

박사이신

목사님의

설교를


167

알아들을 수 있겠어요. 당연히 못 알아들을 수밖에요." 이런 대화를 듣게 된 그 목사께서는 뒤통수를 얻어맞는 듯한 큰 충격을 느끼고, 그 후로는 아주 쉬운 설교 즉 모든 청중이 알아들을 수 있는 설교를 하기로 굳게 맘 먹었다고 한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대리자'가 아니라 '전달자'

하나님의 특별계시인 성경은 일부 난해한 부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나, 사실 나머지 대부분은 중고등학생 정도의 독해력만 있어도 잘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다.

그래서 과거 선교 초기에 중국에서 만든 한글 성경을 번역하던 사람들이나,

또는

그것을

조선으로

운반하던

사람들

중에는

호기심으로 성경을 읽다가 회심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비록 본격적인 설교나 강해의 도움이 없었지만 그저 하나님 말씀에 스치기만 해도 변화가 일어났던 것이다. 이는 성경이 스스로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하고 자증하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168

그러나 필자는 어떤 경우이든 '설교무용론'에는 찬성하지 않는다. 바른

설교는

매우

유익하며

공적

예배의

중요한

부분이다.

초신자에게는 물론 성숙한 신자에게도 설교는 신앙 생활에 큰 도움을 준다. 설교에 오류가 완전히 없을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건강한 설교는 거의 대부분 성경적인 것 또한 틀림없는 사실이다.

다만 특정인의 설교를 지나치게 의존하거나 맹신하는 것은 다소 경계해야 한다고 본다. 흔히 "설교를 하나님 말씀으로 받으라"고 주장할 때 자주 인용하는 구절이 있다. "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살전 2:13)."

즉 초대교회 성도들이 사도들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으니, 현시대의

성도들도

목사의

설교를

하나님

말씀으로

받으라는

주문이다.

그러나 이런 논리에는 대단한 착각이 있다. 목사는 '사도'가 아니다. 우리는 목사와 사도의 차이를 명확히 구별해야 한다. 예수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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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선택한 사도들은 구약의 선지자들처럼 특별 계시를 전하던 아주 특수한 사역자들이었다. 사도들의 설교나 가르침은 나중에 정경화하여 신약 성경이 되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그들의 증언을 끝으로 유일한 하나님 말씀인 성경이 '완료'되었다.

바로 이 점이 오늘날 우리가 사람의 설교를 함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따라서 만일 누구라도 자신의 설교가 하나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목사가 있다면, 그것은 곧 자기가 새로운 사도나 선지자라는 주장과 크게 다름이 없다. 이는

마치

자신의

설교집이

새로운

성경이라는

주장만큼이나

광오한 억지이다.

'사람의 말'도 들어있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사역이고, 거기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있다. 정상적인 설교라면 그 내용 대부분이 하나님 말씀이라는 것 또한 옳은 표현이다. 그러나 설교에는 사람의 말과 논리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된다.


170

그래서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전달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지, 설교 자체가 하나님 말씀은 아니다. "설교 속에 하나님 말씀이 들어있다"는 말과 "설교가 하나님 말씀이다"라는 말은 아주 크게 다르다.

더구나 요즘 오로지 하나님 말씀만 풀이하며 전해 주는 설교가 얼마나 있나. 설사 있더라도, 그 전달 과정에서 견해 차이와 잡설과 오류의 가능성이 늘 상존하고 있지 않은가. 다시 말해서 '배달 사고'가 수시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설교무오설'은 '목사무오설'과 같은 연장선에 있다.

물론 일반적으로 설교를 하나님 말씀처럼 중시하며 듣는 태도는 바람직한 것이다. 바른 설교라면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설교자가 아무리 경건하고 탁월하다고 해도 그는 결코 완벽할 수 없다. 하나님 말씀은 무오하고 완전하지만 인간의 설교는 그렇지 못하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우리는 '설교=하나님 말씀'이라는 도식에는 궁극적으로 동의할 수가 없고, 어떤 경우이든 설교는 그 내용을 문장마다 반드시 검증해서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171

심지어 같은 사안에 대해서도 설교는 시대에 따라 변한 경우가 많다.

전통적으로

기독교는

"여성은

교회에서

말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설교했다. 그러나 요즘은 여성 목사가 설교하는 경우가 흔하다. 그러면 과거의 설교는 잘못이고 현재의 설교는 맞는 것인가. 도대체 어느 것이 하나님 말씀인가. 설교자에 따라 하나님 말씀이 바뀐다는 말인가.

잘 살펴보면 이런 문제가 하나둘이 아니다. 노예제도, 사제제도, 유아세례, 성찬의식, 정치참여, 청부론, 동성애, 교회론, 은사론, 방언, 십일조, 주일성수, 성전주의, 성공주의, 성직주의, 그리고 기복신앙 등이 그 좋은 예이다. 이런 사안들에 대해 많은 설교자들은 다양한 견해를 갖고 서로 다른 설교를 하고 있다. 따라서 세상에 완전히 무오류로 설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의문이다. 결국 설교를

무조건

하나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비상식적인 말인지 잘 알 수 있다.

최근

국가조찬기도회에서

"세계의

있잖아요.

대부분은

육중한

몸매를

자랑하는

분들이지

않습니까.

몇몇

유명

자랑하고

그러나

우리

여성 튼튼한

정치인들 거구를

대통령님께서는


172

여성으로서의

미와

그리고

모성애적인

따뜻한

미소까지

갖고

계십니다. 이럴 때 박수를 안 치시는 분들은 좀 사상이 불순하지 않나 싶다."라고 발언한 어느 대형 교회 목사의 조잡한 설교까지 우리가 하나님 말씀으로 받을 수는 없다. 아니면 이런 저급한 설교도 성령의 감화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여전히 주장하고 싶나.

설교는 분별해서 들어야

그래서 설교는 분별해서 들어야 한다. 무슨 조건이나 단서를 추가하든 설교가 하나님 말씀이라는 주장은 지극히 무모하다. 그것은 설교를 우상화하는 행위이다. '하나님 말씀'은 반드시 믿어야 하나,

'목사님

말씀'을

모두

믿어선

곤란하다. 아무리

훌륭한

설교라도 성경을 풀이하는 인간의 말과 논리와 이해는 온전할 수 없다.

초기 교회의 뛰어난 교부들의 가르침에도 신학적 오류는 있었다. 사실 후일 중세 교회의 신학적 변질과 타락에 여러 교부들의 책임이 적지 않다. 또한 개혁자 루터의 주장에도 오류가 있었다. 심지어

사도들의

말과

처신에도

오류가

있었다.

예수님은


173

사도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막 8:33)"고 하셨다. 그런데 어찌 목사가 무오하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따라서

마치

성경의

'축자영감설'처럼

오늘날

설교할

때에

목회자들이 모두 무슨 특별한 영감을 받아 구약의 선지자나 신약의 사도처럼

신의

계시를

직접

대언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오해이다. 보통의 인간은 무오한 존재가 아니며, 제 아무리 객관적 해석을 위한 노력을 해도 결국 설교는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목사 개인의 주관적인 해석'과 결코 무관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신앙의

성경적으로

자유가

바른지

보장된

아닌지를

현대

사회에서

판정한다는

것은

어떤

설교가

지극히

복잡한

문제이다. 일반 교인들 중에 그것을 정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아울러 지상의 그 어떤 교단이나 신학자가 객관적으로 설교를 무오하게 평가할 수 있는 절대적 권한을 갖고 있을까.

그럼에도 설교의 정의를 일반화하여 "설교를 하나님 말씀으로 받으라"고 요구한다면 그게 과연 타당한 일인가. 만약에 그런


174

논리가 옳다면 이단과 사이비의 설교에도 무조건 "아멘"하라는 말이나 별로 다르지 않다.

더구나 매우 유감스럽게도 그동안 설교는 오용되는 경우가 너무나 많았다. 그리고 실제로 멀쩡한 대형 교회에서조차 정말 같잖은 설교가 결코 적지 않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사과를 배라고 하면 거짓말쟁이가 되지만, 교회에서는 사과를 배라고 하면 믿음이 큰 자가 된다"는 세인들의 조소까지 나오고 있다.

잘못된 설교가 신도들을 얼마나 큰 맹신으로 이끌고 있는지를 시사해주는 말이다. 기복신앙으로 병든 한국 개신교의 실상 또한 설교 남용의 전형적인 예이다.

'설교 우상화'는 종교적 끼워팔기

물론 설교는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귀한 사역이다. 따라서 설교를 존중하며 경청하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설교 내용 전체가 '통채로' 모두 하나님 말씀과 동격이라는 식의 주장은 정말


175

터무니 없는 것이다. 설교자는 진리의 '전달자'이지 결코 하나님의 '대리자'는 아니다.

오히려

예수께서는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막 4:24)"고 말씀하셨다.

어떤 신학자들은 일보후퇴하여 '바른 설교라면 하나님 말씀으로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런 조건적 표현조차 매우 위험한 논리이다. 어떤 경우이든, 설사 인간의 판단으로 볼 때 제 아무리 옳고 바른 설교라고 확신해도, 그것이 절대로 성경의 권위를 대신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설교를 하나님 말씀으로 받을 수 없는 결정적인 이유는 설교자가 아무리 신학적으로 또는 인격적으로 훌륭해도 결국 그가 성경을 쓴 사도나 선지자가 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설교자의 위치는 일반 교인과 특별히 다른 자리가 아니다.

신약의

성도들은

사도나

선지자의

정신과

사역을

물려받아

감당해야 할 사명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스스로 사도나 선지자의 지위에

올라서라는

의미는

아니다.

성도들은

그들의

사역을


176

승계하는 것이지, 그들의 신분과 지위를 승계하는 것이 아니다. 사도와 선지자는 목사나 장로처럼 회중이 세운 자리가 아니다. 예수님이 직접 택하신 사도나 하나님이 직접 세우신 선지자는 선출직도 아니고 세습직도 아니다.

따라서 "설교를 하나님 말씀으로 받으라"는 요구는 사실상 '설교 우상화'이다. 그것은 '목사님 말씀'을 '하나님 말씀'에 끼워파는 상업적 행위이다.

저들은 굳이 '하나님의 말씀'에 '목사님의 해석'을 양념으로 얹어서 이를 모두 신의 뜻으로 함께 받으라고 한다. 설교 속에는 성경의 내용이 많이 들어있으니, 나머지 부분인 인간의 해석과 군더더기도 안심하고 믿고 하나님 말씀으로 받으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게 과연 중세 교황적 설교관과 무엇이 다른가. "성경 해석의 최종 권한을 교황이 갖고 있다"는 중세교회 논리와 바로 직결된다. 단지 교황 대신에 목사가 그 자리를 대체했을 뿐이다.

그러니 순진한 신도들을 홀리기에는 이보다 더 좋은 상술이 없다. 설교를

우상화하려는

속셈은

결국

'목사

우상화'에

있기

때문이다. 설교가 통채로 하나님 말씀과 동격으로 인정되는 그


177

순간 목사는 자연히 하나님의 대언자나 대리자로 승격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마땅히 그리스도 교회의 종이어야 할 목사가 상전이 되고, 거꾸로 주의 자녀인 신도들이 앵벌이 종노릇하고 있는 작금의 일부 교회 현실 역시 이 설교 우상화 작업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우리는 이미 특별 계시인 성경을 '온전한 하나님 말씀'으로 받았다. 거기에는 더할 것도 없고, 감할 것도 없다. 헌데 성경 외에 무엇을 또 추가하여 하나님 말씀으로 더 받아야 한다는 것인지 도무지 모르겠다. 아니면 요즘 설교자들은 주일마다 무슨 새로운 계시라도 더 알려주고 있다는 말인가.

성도에게 신구약 성경 외에 더 받아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란 결단코 단 한 줄도 없다.

"현대 교역자가 의식적으로 혹은 부주의하여 사도나 선지자의 위치에 서는 과오를 결코 범해서는 안 된다. 목사 자신이 일반 신자들과 다른 위치에 있는 듯이 자처하게 되면 그는 그런 과오를


178

범하고 있는 것이다. 교역자는 평교인과 함께 일반 제사장의 신분일 뿐(벧전 2:9) 전혀 차별이 없다. 그는 평교인과 마찬가지로 은사대로

봉사하는

자이다.

교회에는

봉사자가

있을

뿐이고

지배자는 없다." - 박윤선, 개혁주의 교리학, 영음사 2003, p.374


179

십일조 꼭 교회에 내야 하나 "함께 먹고 즐거워할" 십일조

근자에 "십일조를 꼭 교회에 내야만 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교계의 원로인 K 목사가 한 답변이 큰 주목을 받고 있다.

그는 "나는 십일조를 교회에 낸다. 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선교나 구제를 십일조로 하지는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십일조는 내 돈이 아니기 때문이다. 십일조는 내 돈이 아니라 하나님의 돈이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180

K 목사는 이어 "십일조로 나는 빵을 사지 않는다. 내 돈이 아니기 때문이다. 빵은 십일조를 뗀 나머지 돈, 하나님이 내게 허락해 주신 내 몫의 돈으로 산다. 그와 같은 동일한 이유로 나는 십일조로 선교나 구제나 후원을 하지 않는다"고 부연했다.

"십일조로 나는 빵을 사지 않는다", 과연 옳은 말일까

물론 그렇게 발언한 그 의도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으나, 그럼에도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과는 상당 부분 다른 점이 있기에 부득이 여기서 간단히 논하고자 한다.

많은 교인들은 '십일조'라고 하면 대개 구약의 제사장 지파인 레위인과 성전 관리를 위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추가로 성 안에 거류하는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들을 위한 것으로 흔히 알고 있다. 그리고 그런 일반적 상식 자체는 그다지 틀린 것이 없다.

그래서 많은 교회들은 지금도 과거 구약의 율법을 명분으로 한 십일조를 걷어 교역자 생활비, 교회당 관리비, 그리고 가난한


181

이웃의 구제에 쓰고 있다. 다만 어떤 경우는 그 중에서 구제에 쓰이는 비중이 너무 적어 따가운 지적을 받기도 한다.

반면에 일부 목회자들은 십일조가 다른 용도로 쓰이는 것에 대해서 매우 예민한 반응을 보인다. 전술한 대로 "십일조는 내 돈이 아니라 하나님의 돈"이라는 논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성경은 이런 단순한 해석에 대해 쉽게 동의하기 힘든 명령을 다음과 같이 명백히 기록하고 있다. "네 마음에 원하는 모든 것을 그 돈(십일조)으로 사되 소나 양이나 포도주나 독주 등 네 마음에 원하는 모든 것을 구하고 거기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너와 네 권속이 함께 먹고 즐거워할 것이며(신 14:26)."

성경은 심지어 십일조로 '독주'까지도 사서 권속들과 함께 먹고 즐거워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권속이란 가족이나 가솔을 의미한다. 그뿐만이 아니라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신 14:29)"도 와서 함께 먹고 배부르게 하라는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십일조가 '하나님의 돈'이니 감히 손대지 말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반대로 다른 특별한 제한 없이 그 돈으로 "네 마음에


182

원하는 모든 것"을 구해서 먹으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매우 유감스럽게도 K 목사의 일부 발언은 성경의 가르침과는 아주 크게 다름을 알 수 있다.

구약 십일조의 다른 중요한 의미는 단순히 '바치고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족과 이웃이 함께 '먹고 즐거워하는 것'이란 사실을 결코 잊어선 안 된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굳이 독한 술까지 권하시며 이런 신나는(?) 명령을 내리셨을까. 그 해답 역시 성경에 있다.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곧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먹으며 또 네 소와 양의 처음 난 것을 먹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울 것이니라(신 14:23)."

즉 ‘그의 이름을 두려고 택하신 곳(성막)’에 모여 십일조를 함께 먹으며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라는 것이다. 이게 바로 십일조의 진정한 목적이다.


183

그래서 결국 십일조의 정신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손수 전하신 복음의 핵심과 그대로 직결된다.

십일조를 왜곡하는 종교인들

이제 신약 시대의 성전은 교회당 건물이 아니라 성도들 자신이다. 따라서 구약 십일조의 본래 정신에 따르자면, 필요시 십일조를 자신의 가족과 이웃을 위해 즐겁게 쓰는 것도 지극히 성경적인 것임을 알아야 한다.

헌데 어떤 목회자들은 왜 이런 중요한 사실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을까. 같은 성경을 들고 왜 딴소리를 하고 있을까. 말라기는 열심히 가르치면서 왜 신명기는 대충 넘어가는지 그 이유를 정말 모르겠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성도들이 직접 "함께 먹고 즐거워할 십일조"의 중요성을 간과한 경우가 많았다. 그 결과 "십일조를 모두 교회당에 바치지

않으면

이는

하나님의

것을

떼어

먹는

것이다"라고


184

교인들에게

호통치는

위인들이

아주

많았다.

성경은

분명히

성도들에게 자신의 십일조를 직접 먹고 즐거워하라고 명령했건만 전혀 엉뚱한 소리를 늘어놓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십일조를 잘 바쳐야 복을 받는다"고 하며 기복적인 '바침'을 수시로 강조했다. 그리고 그런 시대착오적인 설교 덕분에 중대형 교회의 일부 목사들은 불의한 재산을 크게 축적하고 호사를 누리며 즐겁게 잘 먹고 잘살고 있다.

하지만

이는

그들이

얼마나

성경에

무지하거나,

또는

그게

아니라면, 십일조를 의도적으로 왜곡하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들은 십일조의 정신을 온전히 가르치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말

1:10)."고

말씀하셨다. 당시 종교 지도자인 제사장들에 의해 변질된 제물을 거부하신 원하셨을까.

것이다.

오죽하면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기를


185

또한 하나님은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사

1:11)."고

말씀하셨지만, 저들은 여전히 하나님께서는 오로지 제물을 매우 기뻐하시는 것처럼 "돈을 열심히 바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진정 원하시는 제물은 그런 게 아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물질이

부족해서

피조물인

인간의

제물을

그리

원하실까. 그건 아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성결과 선행과 정의를 원하신다.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사 1:16-17)."

따라서 이제부터라도 성도들은 바르게 알고 실천해야 옳다. 구약의 십일조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것이다. 역사적으로 완료되었다.

성전

제사

제도의

종결과

함께

율법의

십일조는


186

그래서 사도들의 초기 교회에 구약 율법에 따른 성전 십일조란 결단코 없었다. 신약 교회에 유일한 헌금은 오직 '자원적 연보'만이 있었을 뿐임을 자각해야 한다. 그리고 이게 본래 개혁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이었다. 오늘날 영국이나 독일 등 유럽의 교회들 대부분이 십일조를 하지 않는 이유는 당연한 것이다.

십일조는 사람을 위한 것

십일조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십일조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이다.

그럼에도 한국교회의 율법주의자들과 교권주의자들은 마치 사이비 무속 종교처럼 헌금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어찌 하든 신도들을 교회당 안에 속박하며 교회의 단물을 빨려고 한다.

결과

순진한

교인들은

부모가

빈궁해도

바치고,

형제가

배고파도 바치고, 자식이 아파도 바치고, 그리고 가난한 이웃이 울어도 먼저 교회당에 십일조부터 통째로 바쳤다. 그리고 그게


187

좋은 믿음인 줄로 착각했다. 또한 교회가 앞장서서 그런 교조적 바침을 대단히 숭고한 신앙적 헌신으로 칭찬하고 격려했다.

그러나

그건

바른

십일조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율법'을

오도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왜곡하는 배도한 행위다. 차라리 그 돈으로 먼저 빈궁한 부모를 돌보고, 배고픈 형제와 나누고, 아픈 자식을 고치고, 그리고 우는 이웃의 눈물을 씻어주어야 옳다.

나는 지금 교회에 헌금하지 말자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할 수만 있다면 많이 헌금하기 바란다. 교회의 바른 사역을 위해 적절한 재정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자신의 가족과 친인척과 이웃을 먼저 돌보지 않는 교회당 헌금은 성경의 십일조 정신을 크게 곡해하는 것이다.

현대판 바리새인들은 지금도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를 삼키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사랑'보다 더 위대한 계명을 주신 적은 결단코 단 한 순간도 없었다.

그러니 앞으로 개혁 교회는 더 이상 헌금이니 십일조니 하는 따위로 기만적 구실을 만들고, 어줍지 않은 교권으로 가난한


188

성도를

억압하거나

속박하지

말기

바란다.

그런

종교

업자들이나 하는 짓이다.

성경이 명시한 진정한 십일조의 정신은 성도들과 이웃들이 함께 먹고

즐거워하며

여호와를

항상

경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십일조로 나의 가족이 먹을 빵을 사는 것은 매우 옳은 일이다. 그리고 배고픈 형제와 가난한 이웃이 먹을 빵을 사면 그것은 더더욱 거룩한 일이다.

신약 교회에서는 성도가 바로 성전이고, 또한 성도가 제사장이기 때문이다.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곧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먹으며 또 네 소와 양의 처음 난 것을 먹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울 것이니라(신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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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주의'를 극복해야 한다 예배보다 중요한 것은 예배자의 삶

나는 예배와 설교를 생각할 때마다 예수님과 사도들의 삶을 자주 묵상한다. 그런데 예수님이 제자들과 매주 모여서 별도로 주일 예배를 드렸다는 기록을 본 적이 없다.

요즘 한국교회 '예배주의자'들의 뜨거운 주장처럼 예배가 그토록 엄중하게

우리

삶의

받으셨던

예수님이

중심이 왜

매주

되어야 정기적인

옳다면

할례와

세례까지

예배를 부지런히

하지


190

않으셨을까. 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능력의 주님께서 계속 큰 이적을 행하시며 더 많은 사람을 모으고 도처에 큰 건물을 세워서 더욱 열심히 예배를 드리지 않으셨을까.

그 이유는 사실 단순하다. 예수님과 제자들에게는 삶이 예배고, 삶이 기도고, 삶이 선교고, 삶이 봉헌이고, 그리고 일상의 삶이 제사였다. 나사렛 목수 예수는 주일마다 제자들과 회당에 모여 공적 예배에 힘쓰신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하루하루를 세리와 창기와 병자와 가난한 민초와 세상 속에서 함께 사셨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예배 중에만 임재하시는 것일까. 당연히 그건 아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예배의 유무나 교회당 안과 밖으로 구분하는 건 참으로 유치하기 짝이 없는 중세식 이원론적 발상이다. 도리어 하나님은 매순간 우리 인생의 모든 영역 속에 임재하시기 때문이다.

성도에게는 교회도 세상의 사역지이고, 세상도 교회의 사역지이다. 따라서 공적 예배가 매우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예배는 단지 성도들 신앙 생할의 극히 일부분일 뿐이란 점을 직시해야 한다.


191

특히 성도들은 예배를 무속화하고 이벤트화하여 이를 목회 야망과 교회 성장의 불의한 도구로 악용하려는 일부 직업 종교인들을 극도로 경계해야 한다고 본다.

흔히 교회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잘 드려야 복을 받는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우선 순서부터가 잘못된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이미 큰 복이니 마땅히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따라서 무조건적인 예배 우선 주의는 마치 "조상에게 제사를 잘 지내야 복을 받는다"는 미신적 신앙만큼이나 위험하고 단순한 기복 사상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진솔한 '삶'이지 예배로 표현되는 '종교 의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배보다 중요한 것은 예배자의

삶이다.

다시

말해서

성도의

삶이

영적

예배의

중심이어야 옳은 것이지, 공적 예배가 반드시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192

예수의 제자들은 삶으로 예배했다. 수고함으로 예배하고, 옥에 갇힘으로 예배하고, 매 맞음으로 예배하고, 자지 못함으로 예배하고, 굶주림으로 예배하고, 또한 헐벗음으로 예배했다(고후 11:23-27).

물론 나는 우리 모두 바울처럼 고난 받고 죽을 고생을 하자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예수님이 직접 세우신 자신을

낮추며

'만물의

찌꺼기'처럼

살았으니,

사도들조차

적어도

'주의

종'이라는 소명을 받았으면 최소한의 분수와 양심이라도 지키며 살아달라고 부탁을 하고픈 것이다.

목사는 종의 직분이다. 그리고 종의 모습은 본래

그리스도의

제자들처럼 찌꺼기 같이 되는 것이다. 종은 노예나 다름 없는 신분이다. 주인이 시키면 싫어도 해야 한다. 주의 제자들 중에 편하고 풍족하게 살다가 죽은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는 이유이다. 그들은 복음을 위해 기꺼이 고난을 감수한 진정한 종이었다.

그런데 요즘 어떤 종들은 정말 하고 싶은 짓 다 한다. 누릴 것 다 누린다. 무슨 핑계와 명분을 대서라도 기필코 잘 먹고 잘산다. 그리고 스스로 다 잘났다. 그들은 결코 교인을 섬기지 않는다.


193

오히려 교인들이 열심히 돈 바치고 몸 바쳐서 그들을 섬기고 있다. 그게 모두 삶을 속이고 예배를 잘 치장한 덕분이다.

화려한

건물,

많은

청중,

유창한 설교,

우아한

기도,

그리고

아름다운 찬양이 저절로 신령한 예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때로는

가짜들이

진짜보다

능숙하다.

근엄하고

종교적이다. 더 뜨겁고 더 열심이다. 더 친절하고 더 인간적이다. 더 박식하고 더 유능하다. 더 잘 웃기고 더 잘 울린다. 하지만 성도들은 그런 겉모습에 속지 말아야 한다.

지금은 예배를 분별해야 하는 슬픈 시대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되었도다(고전 4:13)."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194

축도, 목사만 할 수 있나 '축도권'의 허상

요즘 '축도'에 대해 다양한 논의가 있다. 그것을 '축복의 기도'로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단순히 기도가 아니고 '축복의 선포'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전통적으로 유럽의 개혁 교회들은 예배의 마지막 순서로 민수기 6 장 24-26 절 제사장 아론의 축도를 주로 사용하였고, 영국 성공회에서는 빌립보서 4 장 7 절을 사용했다. 그리고 한국교회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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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개혁 교회들에서는 고린도후서 13 장 13 절을 많이 사용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가장 널리

사용된 축도는

아론의

축도라고 한다.

아무튼 '기도'와 '선포'가 그럼 어떻게 다른가 물으니, 축도를 단지 기도의 일종으로 분류한다면 장로나 집사 등 누구나 축도할 수 있는

반면에

만일

선포로

볼 경우는

말씀의 설교권을

지닌

목사만이 축도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즉 축도는 단순히 기도가 아니라 '성경 말씀을 선포하고 선언하는 것'이기 때문에 목사만이 할 수 있다는 논리이다. 그래서 결국 이 문제는 다시 설교권의 문제로 연결되고 있다.

'말씀 선포'는 목사의 전유물인가

그러면 과연 설교는 목사만의 전유물일까. 물론 교회가 일반적인 질서를 위해 일정한 자격과 조건을 지닌 목사에게 공예배의 설교를 하도록 한 것에 대해 나는 별다른 이의가 없다. 오히려 그것은


196

매우 적절한 조치라고 본다. 무질서하게 아무나 나서서 설교하면 분명히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누가 "반드시 목사만 설교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나는 결코 동의할 수 없다. 설교가 무엇인가.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고 전하는 사역이다. 원칙적으로 전도에 별다른 제한이 없는 것처럼 설교에도 특별한 제한이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설교가 주로 믿는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데 비해, 전도는 단지 그 대상이 다를 뿐이다. 전도 역시 하나님 말씀을 전하고 선포하는 일이다. 그런데 여러분은 전도할 때에 꼭 '전도권'을 받아야만 할 수 있나. 물론 아니다. 같은 원리로 일반 성도들도 이미 기록된 하나님 말씀을 기쁘게 선포하면 왜 안 되는지 그 이유를 진정 모르겠다.

아니면 신학교에 가서 성경과 신학을 몇 년 배우고 안수 한번 받고 교단의

자격증을

받으면

갑자기

영적

신분이 상승하여

다른

성도들에게는 없는 무슨 특별한 선포권이 저절로 생기는 것일까. 만약에 그렇다면 개신교 목사가 가톨릭 신부와 무엇이 다른가.


197

이는 마치 안전 운행을 위해 "오직 영업용 전문 기사만이 승용차를 운전하게 해야 한다"는 주장만큼 무리한 논리다. 오히려 나는 소속 공동체가 인정할 정도로 은사를 지닌 성도는 필요시 설교해도 좋다고 본다. 신학교 졸업장이나 목사 자격증이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보다 우선이라고 생각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 좋은 예가 정규 교육을 거의 받지 못 했던 세계적인 설교자 '무디(Dwight L. Moody)' 선생이다. 그는 목사 자격증이 없었다.

사실 '축도권'이란 말은 그저 신학적 미사여구로 포장된 또 하나의 교권주의적 신조어일 뿐이다. 성경 어디에도 목사가 하나님의 대리자라거나, 또는 오직 목사만이 축도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명시되어 있지 않다. 심지어 한글 성경엔 '축도'라는 용어조차 아예 없다. 이는 영어 성경도 마찬가지다. 어학적으로도 축도란 그냥 '축복 기도'를 줄여서 부르는 말일 뿐이다.

본래 중세 교회 축도의 기원은 미사 시간에 사제들이 행하던 '기복 의식'이다. 그래서 이는 소위 성직자 그룹의 교권을 강화하기 위해 이방 종교의 무당이나 주술사들이 행하던 제사 의식을 복제하여 교회

안으로

들여온

것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축도를 '강복'이라고도 하는데 '복을 내린다'는 뜻이다.


198

만약 축도가 진정 성경적 기원을 가진 것이라면 차라리 성경에 나오는

용어를

사용하여

'blessing(축복)'이라고

했어야

옳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굳이 'benediction(축도)'이라고 하는 이유는 로마 가톨릭의 사제 '베네딕토'가 성직자와 평신도를 구분하기 위해 축도라는 의식을 만들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유감스럽게도 과거 종교 개혁을 한 개혁자들은 중세 교회의 잘못된 교리와 계급적 성직 제도와 종교 의식 등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고 그 일부를 그대로 가지고 나왔다. 그래서 로마 교회에서 임명한 사제들만이 축도권을 갖는 것처럼, 아직도 상당수

교회에서는

목사만이 축도권을 행사하고 있다.

개신교의 강단은 성도를 차별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정규 신학교는 커녕 아무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던 갈리리의 어부들도 설교했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된다. 신약 교회에서는 모든 성도가 다 '제사장'이다. 개신교에 성도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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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영적 계급이나 신분은 따로 없다. 따라서 성도들도

필요하면 당연히 설교하고 축도할 수 있는 것이다.

본래 이 '설교'라는 용어 역시 한글 성경에 없던 단어이다. 다만 나중에 나온 번역본들에서만 일부 등장하고 있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들이 이고니온의 회당에서 전도(설교)했는데 '개역개정역'에서는

사실을

단순히

"말하니"라고

기록하고

있다(행 14:1). 회당의 전통과 관례에 따라 사도들이 말할 때 무슨 설교 자격증이 필요하지 않은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사도들에게 설교란 그저 말로 가르치고 전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설교를 너무 신학적으로 포장하거나 과장할 필요가 없다. 설교는 목사에게만 주어진 초월적 특권이 아니다. 다만 공교회는 예배의 보편적인 질서를 위해 신학적으로 잘 준비된 목사에게 우선적으로 설교와 축도를 위임하고 있을 뿐이다.

특히 농어촌 지역의 작은 교회나 특수 지역의 지하교회에서는 전임 목회자가

없을

경우

장로나

권사나

교사나

집사가

설교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본래 개혁 교회의 강단은 성도를 차별하는


200

곳이

아니다.

그리고

그게

바로

개신교

프로테스탄트의

'만인제사장' 정신이다.

유대인의 회당에서는 회당장만이 성경을 읽고 가르치고 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거기서 제사 의식처럼 예배를 드리지 않았다. 성전은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는

엄숙한

'제사의

장소'였으나,

회당은 사람들이 가르치고 배우고 기도하고 친교하는 '소통의 장소'였다. 필요하면 어린 아이가 성경을 읽기도 했고, 아울러 집회에 참석한 누구나 낭독된 성경에 대해 자유롭게 묻고 답하며 토론할 수 있었다. 회당에서는 제단을 세우고 제물이나 헌물을 바치지 않았다.

물론 이런 회당 집회의 소통 정신을 모체로 하여 후일 신약 교회의 예배가 발전되었다. 즉 하나님과 소통하고, 또한 사람과 소통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아름다운

소통이

바로

'화평'인

것이며,

하나님과 수직적으로 화평하고 이웃과 수평적으로 화평을 이루는 것이 진정한 예배의 정신이며 또한 십자가 복음의 정신인 것이다.

사도들은 제사를 드리지 않았다. 교회당 예배는 제사가 아니다. 예배를 이방 종교처럼 제사화하지 말아야 한다. 성전 제사는 이미


201

예수님께서 직접 온전한 제물이 되어 '단번에' 다 이루신 것이다. "그는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그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라(히 7:27)." 그런데 오늘날의 어떤 예배는 왜 또 다시 '날마다' 바치는 제사처럼 헌물(헌금)을 강조하는지 모르겠다.

여하튼 우리는 민수기 6 장에 기록된 제사장 아론의 축도를 다시 읽어 볼 필요가 있다. 그게 분명히 축원의 기도이지 무슨 선포라고 억지를 부리는가. 하나님께서는 성전 제사 제도를 수립하신 후에 제사장들이 백성들을 어떻게 축복해야 하는지 직접 가르쳐 주셨다.

고린도후서 13 장에 번역된 사도바울의 축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역시 편지에 흔히 사용하는 마지막 인사말이지, 그것을 무리하게 확대 해석하여 무슨 선언이나 선포로 보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예를 들어 그 앞 절의 "평안할지어다"도 평안하기 원한다는 기원이지, 평안하라고 명령하거나 선언하는 것이 아니다.


202

설사 백 보 양보하여 그게 선포라고 인정한다고 해도, "오직 목사만이 선포할 수 있다"는 신학적 근거는 성경 어디에도 없다. 성경에는 신약 교회의 예배 순서에 사도들이 교인들에게 축도를 했다는 기록이 없으며, 장로나 감독이나 목사에게만 축도권을 부여했다는 기록은 더욱 없다.

교회는 성도를 '제사장'으로 대우하라

사실 한국교회 일각에서 축도권과 설교권을 마치 목사 특유의 전유물로 둔갑시키려는 의도는 명백하다. 일부 성직주의자들은 예배를 빙자하여 어찌하든 개신교 목사를 일반 성도와 차별화하고, 다른 '특별한 신분의 존재'로 인식시켜 교회 내에서 부당한 특권을 추구하려는 것이다.

지금도 실제로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하지 않은가. 심지어 어떤 부흥강사는 "오늘 내가 지닌 축복권을 모두 쏟아놓고 가겠으니 헌금 많이 바치라"고 큰소리친다. 정말 목불인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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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가 중요하고, 축도가 복되고, 그리고 설교 또한 매우 귀한 사역이다. 그러나 개신교에서는 설령 목사나 장로나 다른 직분자가 없더라도 예배가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가정에서도 누구나 얼마든지 예배할 수 있다. 개신교의 목사직은 구약 제사장이나 신약 사도의 직무를 그대로 승계한 직분이 아니며, 다만 다른 장로나 집사와 마찬가지로 함께 교회를 섬기는 '은사의 일부분'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교회 내에 오직 목사만이 가진 특권이란 결단코 없다. 목사는 다만 가르치는 사역을 담당하는 장로의 직분일 뿐이다. 일부 목회자들이 주장하는 '축도권', '축복권', '선포권', '설교권', '예배권', '목회권' 그리고 '성직권'이니 하는 요상한 용어들은 모두 교권적으로 터무니 없이 과장된 것들이다.

개혁 교회에서는 목사만이 홀로 목회하거나, 목사만이 홀로 성직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직분이 함께 협력하여 목회하는 것이며, 모든 직분이 다 성직이다. 가르치고 설교하는 것만이 목회가 아니라, 다스리고 구제하고 봉사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목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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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고, 그리고 축복하는 기본 자격으로는 '성도'라는 아름다운 신분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차고 넘치는 것이다. 모든 성도가 부르심을 받고 기름 부음을 받은 '왕 같은 제사장(벧전 2:9)'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그런

당당하고

존귀한

제사장에게 "당신은 목사가 아니니 설교하거나 축도할 권한이 없다"고 주장하는 게 말이 된다고 보는가. 아니면 요즘 목사직은 제사장보다 높은 직분이라는 것인지.

심지어 어떤 교회에서는 목사가 설교하는 예배는 '축도'로 끝내고, 전도사가 설교한 예배는 '주기도문'으로 끝내고 있다. 그럼 목사의 축복 기도가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보다 더 중요하다는 말인가. 굳이 둘 중에 양자택일을 따지자면, 차라리 목사도 주기도문으로 마쳐야 옳지 않을까. 왜 똑같이 하나님 말씀을 선포한 전도사는 축도를 못 하게 하는지 그 이유를 정말 납득하기 힘들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성도들의 '설교 사역'을 지나치게 제한하는 것은 마치 중세 교회가 신도들에게 성경을 읽지 못 하게 한 것과 마찬가지로 매우 심각한 오류임을 알아야 한다. 이는 교인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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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오로지 듣고 배우기만 하고, 반대로 전하거나 가르치지는 말라는 말과 무엇이 다른가.

과거 믿음의 선배들이 '만인제사장'을 외치며 종교개혁의 역사가 시작된지 어느덧 500 년이나 되었건만, 아직도 이 땅의 순박한 성도들은 교회 내에서 정당한 제사장의 대우를 제대로 못 받고 있다. 도대체 누가 그 거룩한 직무를 새치기하고 있는 것일까.

죄인들이 쓰는 교회사는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민 6: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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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장로님의 탄식 제사장이 타락하면 백정이다

근자에 광주 지역에 있는 한 보수 교단 소속의 S 교회에 시무하는 장로께서 아주 안타까운 사연을 들려주셨다. 그 교회는 한때 출석 교인이 천 명이 훨씬 넘었던 중형 교회였지만 현재는 그 수가 크게 줄었다. 그래도 매년 어려운 학생들에게 수십만 원을 지원하고, 또한 신학생들에게도 백만 원 정도를 지원한다고 한다.

그런데 그에 비해 담임목사의 아들에게는 수천만 원을 지원하고 그것도 부족해서 교회 돈을 주머니에 있는 돈 갖다 쓰듯 추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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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출하고, 정작 자기 교인 병문안은 달랑 음료수 1 박스 들고 간다고 한다.

게다가 자식에게 교회 세습을 시도하다가 명분상 그게 그리 쉽지 않자 갑자기 거액을 지출하여 미국에 무슨 선교센터인지를 세우고 목사 아들을 선교사로 보내겠다고 난리를 쳤다.

아니 지금 미국이 정말 한국인 선교사가 절실하게 필요한 나라일까. 만일 이런 사실을 미국의 기독교인들이 알면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하다.

물론 우리는 이 순간에도 수 많은 선교사들이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오직 복음을 위해 주야로 수고하며 헌신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어떤 경우이든 그 분들의 귀한 사역을 함부로 폄하해선 결코 안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실제 선교 현장의 실상은 그리 간단치 않아 보인다.

30 년 전 나는 가톨릭 국가인 필리핀의 마닐라에서 한국의 장로교 교단이 파송한 한 선교사 가정을 만났었는데 그들은 가정부를 2 명이나 두며 살고 있었다. 물론 생활이 어려운 현지인을 고용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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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적 도움을 주려는 선한 의도로 좋게 이해하고 싶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마음이 불편했다.

오늘날 전 세계에서 활동하는 개신교 선교사 수는 대략 20 만 명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중에 약 91%는 이미 복음이 들어간 기독교권에서 일하고 있고, 단지 8%가 비기독교권에서 일하고 있다. 더구나 우리가 늘 강조하던 미전도 지역에서 제대로 활동하는 선교사는 겨우 1% 미만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러니 여러 나라에 파송된 선교사들 중에 상당수는 그들이 진정 '해외 선교'를 하고 있는지, 아니면 외국에서 그냥 '해외 친교'를 하고 있는 건지 영 신뢰가 안 간다는 다소 가혹한 비판마저 나오고 있다.

아무튼 요즘 일부 중대형 교회들의 종교적 삽질은 자주 이런 식이다. 그래서 나는 그 장로께서 "이런 교회는 누구를 위한 교회이며 공동체인가요!"라고 탄식하는 게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는 교회에서 '담임목사의 연봉 공개'를 촉구하는 등 주요 비리 의혹들에 대해 바른 말을 여러 번 했다. 하지만 교회는 "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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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역자들과 비교가 되는 게 바람직하지 않다"는 등 궁색한 핑계를 대며 제직들조차 담임목사의 연봉을 모르게 숨겼다.

나중에는 소속 교단의 노회에 정식으로 제소까지 했지만 끝내 별 소용이 없었다. 노회도 담임목사와 별반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리어 그 장로는 담임목사의 미움만 받고 수시로 예배 도중에 원색적인 공격을 당하고 따돌림을 받았다.

그 설교 발언 중 일부를 여기에 그대로 공개하자면 대충 이렇다.

-

베드로

사도는

거꾸로

십자가에서

순교하고

바울

사도는

감옥에서 순교했는데 왜 사랑하지 않느냐. - 까칠하게 군다. - 성령충만한 사람은 뒷말하지 않는다. - 설득하지 마라, A 장로의 교회냐? - 교회에서 말하지 말라. -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면 어린아이 같이 유치찬란하다. 포장해서 말해야 한다. - 왜 아멘하지 않느냐 아멘하지 않는 것은 비난하는 것이다. - 아멘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것이다.


210

- 나는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고장 나 때려 부순 사람이다. 나를 건들지 마라.

소위

개혁

교회의

목회자란

위인이

예배당

강단에서

참으로

안하무인이다. 더구나 이건 극히 일부의 이야기가 아니다. 교인들을 바지저고리로 보고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너무 많다.

과연 이런 설교도 우리는 '하나님 말씀'으로 받고 순종해야 할까. 맹신을 강요하는 교회는 더 이상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다. 그건 단지 교회의 간판을 도용하고 있는 사교집단이다. 그 장로는 결국 시무장로직을 사임했다.

언제부터인가 한국 개신교 일부는 심한 종교적 자폐증을 앓고 있다. 소통이 잘 안 된다. 누가 조금이라도 자신들의 비리에 대해 비판적인 말을 하면 먼저 겸허히 듣고 잘못을 고칠 생각은 하지 않고, 도리어 격하게 반응하며 즉각 '교회 분열자'나 '예배 방해자'로 몰아 버린다. 툭하면 무고한 성도들에게 '이단'이란 말을 남발하며 그 하는 작태가 진짜 사이비와 이단들 뺨을 칠 정도다.


211

구약의 제사장은 성전에서 제사를 담당하던 신성한 직분이다. 그런데 그 제사장이 타락하면 제사와 성직은 형식적 위선과 기만이 되고

그들은

먹기를

탐하며

애매히

짐승만

죽이는

도살자로

전락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거룩한 소명을 유기하고 교회의 돈과 교권을 사유화하는

목회는

'도둑질'이며

'신성모독'이다.

그리고

그런

탐욕으로 타락한 직분자는 단지 무고한 양을 잡는 백정이 될 뿐이다.

그래서인지 일찍이 독일의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가 한 말이 우리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한다.

"정의가 없는 교회는 우상과 같다!"

"성직자들이

자기의

배당금을

어떻게

처리하고

어떻게

써야

하는가를 나는 말하지 않는다. 교회와 건물 등에 배당된 나머지도 필요한 때에는 빈민을 위해서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나는 이미 충분히 설명했다.


212

그들의

가슴속에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

조금이라도

그들이 먹고 입는 것이 모두 도둑질한 것, 아니

있다면

신성 모독

행위에서 온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도 그들은 태연할 수 있느냐고 나는 묻고자 한다." - 장 칼뱅(Jean Calvin), 기독교강요(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


213

'여성 사역자' 울리는 교회 '여성 목사' 차단은 중세적 교권 만행

"여자들이 기저귀 차고 강단에 올라가? 안 돼!" 2003 년 어느 보수 교단의 총회장이란 인사가 예배 중에 뱉은 여성비하 발언 내용이다. 이는 아직도 유교적 권위주의 사고에 사로잡힌 일부 지도자들의 천박한 수준을 그대로 노출한 전형적인 사건이었다.

또한 어느 신학교 교수가 여성 목사 안수를 위한 기도를 했다고 해서 그의 강의까지 폐강한 사건 역시 한국 교권주의의 저급한


214

만행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이다. 이들은 스스로 정통이니 보수니 하며 교세를 자랑하지만, 사실 그런 무지한 행위는 정통도 아니고 보수도 아니다. 오히려 툭하면 여성 대통령에게 아부를 일삼던 자들이 여성 목사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을 보면 차라리 밥통이란 생각이 들 뿐이다.

간혹 보면 현행 목사직에 대한 오해가 크다. 일부에서는 목사를 마치 구약의 제사장이나 가톨릭의 사제와 같은 성직자로 인식하는 것이다. 물론 이는 잘못된 시각이다. 개신교의 목사 제도는 이제 단지 500 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을 뿐이다. 이는 유럽에 있는 웬만한 유명 대학교의 역사보다 짧다.

그럼 왜 목사 제도가 생겼을까. 그 이유는 종교개혁자들이 중세 교회의 사제 제도를 매우 비성경적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특히 사제가 하나님과 신도들 사이에서 마치 무당처럼 중간자나 대리자 역활을 하였기에 이를 거부했다.

그 대표적인 것 중에 하나가 '고해성사'이다. 성도 누구나 죄를 하나님께 직접 회개하면 되는데 굳이 사제에게 가서 고백하라고 한 것이다. 사제 자신도 우리와 똑같은 죄인인데 이게 뭐하는 건지


215

아무튼 중세 1000 년 이상을 기독교는 그런 엉뚱한 사역에 열심히 몰두했다.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왜 서두부터 이런 사실을 언급하냐면 지금도 일부 교단들은 과거의 잘못된 관습이나 제도를 무슨 만고의 진리라도 되는 양 고집스럽게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의 목사 안수를 교단법으로 막고 있는 것 역시 바로 그런 경우다.

목사는 사제나 제사장 직분이 결코 아니다. 굳이 성경적 근거를 대라면 목사직은

'가르치는

장로'나 '교사'의 직분이다. 그러니

목사가 매우 중요한 직분이기는 하지만, 다른 성도들보다 특별히 더 신성한 존재는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데 혹자는 성경에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전 14:34)"라는 말씀을 근거로 여성에게 목사 안수를 줄 수 없다고 한다. 이 구절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설교도 하지 말라'로 이해하는 것이다.


216

하지만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들이 "여자가 머리를 가리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마땅하냐(고전 11:13)"고 한 말씀은 왜 글자 그대로 안 지키고 있는지 먼저 묻고 싶다.

또한

그런

문자주의적

해석

논리를

엄격히

적용하면

여성은

교회에서 정말 말을 하면 안 된다. 성경 본문은 '예배 중에 잠잠하라'가 아니라, 그냥 '교회에서(in the churches) 잠잠하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를

글자

그대로

지키려면

교회당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말을 하지 말고 잠잠해야 한다.

그런데 다행히 나는 여성들이 그렇게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잠잠한 교회를 아직까지 본 적이 없다. 특히 교회 주방에 가면 온갖 즐거운 대화로 도리어 활기가 넘친다.

그러므로 성경을 해석하고 적용할 때는 무조건 문자적으로만 볼 게 아니라 때로는 기록 당시의 고유한 시대적 배경과 사회적 여건과 지역적 특성을 반드시 종합적으로 고려해서 이해해야 옳은 것이다.


217

거기에 추가로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고전 11:3)" 또는 창조 질서에 따른 "돕는 배필(창 2:18)" 등의 구구한 사유로 여성 목사 안수를 반대하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이 역시 억지로 쥐어짠 어설프기 짝이 없는 논리일 뿐 결코 여성 안수를 거부해야 할 필연적이고 결정적인 이유가 될 수는 없다고 본다.

여성들도 제사장이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여자도 개신교 교리의 핵심인 '만인제사장'에서 예외일

없다는

점이다.

신약

교회에서는

모든

성도가

제사장이다. 헌데 여자 성도들만은 제사장이 아니란 말인가. 그게 아니라면

이미

하나님께서

제사장의

신분으로

인정한

여자

성도들에게 목사가 될 자격이 없다고 주장하는 논리가 정말 모기 눈꼽만큼이라도 설득력이 있다고 보는가.

그리고 사사 '드보라'와 선지자 '안나'도 여성이었다. 당시 사사는 사실상 이스라엘 민족의 최고 지도자였고, 선지자는 온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여 전달하던 말씀 사역자였다. 그러니 여성이라고 해서 목사 안수를 못 받을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218

과연 이처럼 상식적이며 명백한 진실도 고도의 신학적 토론이나 잡다한 논쟁이 필요한 것일까.

현행 목사직이 대관절 무엇이기에 선지자나 사사보다 더 특별한 조건을 다는 것인가. 아니면 오늘날 신학교 몇 년 공부하고 안수 한번 받으면 성경의 선지자나 사사보다 더 대단한 신분이 된다는 것인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다.

성경은 "그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행 2:18)"라고 증언한다. 즉 하나님의 은사는 남녀를

차별하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성경에

위대한

신앙의

여성들이 얼마나 많은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게다가 본래 성경에 기록된 '가르치는 장로'직은 신분이나 직업이나 계급이 아니다. 목사직은 다른 장로나 집사처럼 단지 '은사의 일부분'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언도 허용한 여종들에게 유독 설교나 목회는 하지 말라고 금지하는 주장이 과연 타당한 것인지 스스로 냉정하게 반성하기를 촉구한다.


219

요즘은 여성 대통령, 여성 총리, 여성 장관, 여성 국회위원, 여성 총장, 여성 경영인, 여성 판사, 여성 언론인, 여성 의사, 그리고 여성 장성까지 사회의 거의 모든 전문 영역에서 여성들이 다양하게 활약하고 있다. 그런데 세상과 소통이 부족한 일부 교단들은 아직도 중세적 성경 해석을 명분으로 여성 목사만은 안 된다고 고집한다.

반면에 예장통합, 기감, 기장, 성공회, 기하성, 예성 등의 교단과 독립교회연합(KAICAM)이 여성 목사 안수를 적극 수용하고 이 일에 앞장 서고 있는 것은 크게 다행한 일이다. 당연히 이는 아주 바람직한 현상으로 뜨거운 격려를 보내고 싶다.

안수는 기도에 불과하다

아울러 이 기회에 우리는 안수를 바르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일찍이 루터나 칼뱅 이전에 개신교 신학의 토대를 제공한 위대한 신학자

어거스틴은

"안수는

기도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안수

자체가 구약의 '기름 부음'처럼 갑자기 사람의 신분을 바꾸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220

더구나 신약 교회의 모든 성도들은 이미 기름 부음을 받은 "왕 같은 제사장(벧전 2:9)"들이다. 오직 목사만 기름 부음을 받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모두 기름 부음을 받았다.

이제

교단과

교권이란

이름으로

여성의

목회 사역을

함부로

제한하는 행위는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의 '말씀 사역'을 방해하고 대적하는 매우 심각한 범죄임을 알아야 한다. 남자만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다. 그러니 주님으로부터 거룩한 소명을 받은 여종들을 제발 더 이상 울리지 말자.

이는 단지 여성 안수만의 문제가 아니다. 여성 전도사에 대한 일반적인 예우는 더욱 심각하다. 오죽하면 교계 일각에서 현행 여전도사 제도에 대해 '여성 착취의 온상'이니 '전순이'니 하는 자조적 표현들조차 나올까. 그들이 겪는 슬픔과 아픔은 오직 주님만이 아실 것이다.

그나마 남자 전도사들은 나중에 강도사를 거쳐 목사가 될 기회라도 있지만,

여자

전도사에게는

같은

신학교를

졸업하고도

"한번

전도사면 영원히 전도사"라는 부당한 굴레를 씌우고 있다. 그래서


221

나중에 보면 목사와 전도사의 사례비가 무려 5 배 이상 차이가 나는 경우도 그리 드물지 않다. 이래도 우리는 마냥 침묵해야 옳을까.

결론은

그리

복잡한

아니다.

만일

진정

말하지

말고

"잠잠하라"는 말씀을 문자 그대로 철저히 지키려 한다면, 차라리 교회에서 여성은 입을 걸어 잠그고 제직회 발언이나 교회학교 교사나 찬양 인도나 조모임 인도나 그리고 아예 대표 기도까지도 모두 하지 못 하게 금지할 것이지 왜 하필 설교만 못 하게 하나.

지도자들이 무지하면 교회가 고통을 받는다.

"나는 이 안수에 어떤 깊은 신비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 장 칼뱅(Jean Calvin), 기독교강요(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


222

가나안 현상은 '교회'가 탈출하는 거다 교회 밖으로 "안 나가"

요즘 '가나안 성도'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이에 대해 교회가 싫어 고의로 출석하지 않거나 교회 변방에서 은근히 비난하고 공격하는 사람들에게 더 이상 '가나안'이라는 아름다운 수사를 덧붙여서 안티적 현상을 확산시켜선 안 된다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지 심각하게 반성을 해야 한다는 자성론도 있다.


223

'반기독교적 세력'이란 말은 적반하장

물론 교회를 안 나가는 이유가 모두 같을 수는 없다. 기독교 신앙에 진지한 관심이 없거나 교회 출석에 그다지 흥미가 없어 떠나는 경우가 적지 않고, 또한 교회가 정말 정 떨어질 정도로 싫어서 안티가 되어 떠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런 경우, 매우 안타까운 일이기는 하지만, 그들을 굳이 '성도'라고 표현하지는 않는다.

지금 정작 문제의 초점이 되고 있는 경우는 '교회를 사랑하지만'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형제와

자매들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구태여

'성도'라는 이름을 접속하여 호칭하지도 않을 것이다.

정재영 교수(실천신대)가 2013 년 글로벌리서치와 함께 설문조사한 결과(316 명)에 따르면 가나안 성도는 결코 '날라리 신자'가 아님을 잘 알 수 있다. 그들이 과거에 교회를 다닌 기간은 평균적으로 무려 14 년이나 되었고, 교회 활동 참여도 역시 90%의 긍정율을 보일 정도로 매우 적극적이었다. 결국 그들 대부분은 교회 내에서


224

지지고 볶고, 볼 것 못 볼 것 다 보고, 그리고 산전수전 다 겪은 중견 교인들인 것이다.

따라서 가나안 성도에 대해 "이렇게 귀하고 복된 언어(가나안)를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이들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용해야

되겠습니까? 오히려 이러한 표현은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행위를 정당화시키거나 미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고 한 어느 대형 목사의 주장은 대단히 적반하장이다. 그는 성도들을 떠나게 한 제도권 교회들의 고질적인 잘못에 대한 최소한의 반성이나 사과조차 없이 도리어 그들을 마치 집나간 불효자식처럼 비하하고 있다.

더욱 가관인 것은 "서로 연합해서 교회를 공격해 오는 반기독교적 정서와 세력을 막아야 한다."는 발언이다. 과연 누가 진정으로 반기독교 세력인지 어이가 없다. 교회의 반복적인 불법과 비리와 무능에 상처받고 떠나는 성도들이 반기독교 세력이라는 그 안목은 너무 뻔뻔하다. 이는 가해자가 피해자를 도리어 비난하고 있는 형국이다.


225

나는 오히려 직분을 이용하여 교회의 기업화, 십일조 강요, 헌금 유용, 고액 연봉, 재정 분산 처리, 장부 은닉, 기복신앙, 설교 표절, 패거리 정치, 성직 매매, 부정 선거, 교인 차별, 성추행, 고소 남발, 성직주의, 성장주의, 율법주의, 교회 세습, 그리고 사치한 삶을 추구하는

일부

목회자들이야말로

정말

반기독교적인

세력이며

교회를 약탈하는 무리들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나는 안 나간다"

그러므로 가나안 성도 대부분은 교회당을 떠난 것이지 결코 교회를 떠난 것이 아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건물 교회'만이 교회가 아니다. 모든 성도는 예수를 믿는 그 순간부터 하나님나라에 속해 있는 그리스도의 지체, 즉 '무형 교회'의 교인인 것이다.

근자에 내가 출석하는 공동체 동료인 임성만 집사는 '가나안 성도'란 용어에 대해 매우 흥미로운 해석을 제시하여 많은 공감을 자아냈다. 아니라,

자신에게는 오히려

'교회

가나안이란 밖으로

의미가

안 나가'란

'교회를 것이다.

나가'가

요즘

매주


226

설레임으로 주일을 기다린다는 그는 그룹 모임 중에 "왜 나가냐, 나는 안 나간다!"고 발언을 해서 모두 한바탕 박장대소했다.

우리는 왜 웃었을까. 그렇다. '교회론'이 다르다. 이제는 기존의 인식과

사고의

틀을

조금

바꿀

필요가

있다고

본다.

비록

물리적으로는 특정 교회당이나 교단에 소속이 안 되어 있을지라도 그것이 꼭 교회 밖에 있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반대로 생각하는

대부분의 경향이

절대적이어야

목회자는 크다.

했다면,

오직

그러나 중세

제도권 만일

교회만이

제도권

가톨릭교회를

교회라고

교회가

그토록

뛰쳐나온

현재의

개신교는 아예 애초부터 탄생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과거 개신교가 중세 교회에서 이탈한 것은 정당했다고 주장하면서, 지금 다른 개인이나 공동체가 특정 교단에서 이탈하는 것을 안티적 행위로 비난한다면 그건 전혀 설득력이 없는 종교적 만행일 뿐이다.

사실 건강한 교회를 고의로 떠나는 성도는 거의 없다. 구태여 떠날 이유가 없다. 반면에 어떤 성도가 굳이 교회를 떠날 때는 반드시


227

이유가 있는 법이다. 교회가 더 이상 교회가 아니니 떠난다. 특히 교회가 맹신적 사교 집단처럼 타락하면 많이 떠난다. 예수님이 책망하신 것처럼 '강도의 소굴'이 되면 떠난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평생 거기에서 주일마다 제왕적 종교인의 종노릇하며 도적질에 동조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작금의 가나안 현상을 구약시대의 '출애굽 사건'이나 중세 시대의 '종교 개혁'에 버금가는 역사적 '교회 탈출' 현상의 연장선에서 이해해야 옳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혹시라도 이 말을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여기서 말하는 교회 탈출이란 '교회를 탈출'한다는 뜻이 아니라, '교회가 탈출'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가나안 현상이란 단순히 특정 개인이 교회가 싫어서 떠나는 안티적 현상이 아니라, 오히려 진정한 교회의 지체들이

부패한

종교

집단에서

탈출하는

신앙적

현상으로

해석해야 더 옳다고 보는 것이다.

이는 마치 과거 성직자의 권위를 배격했던 영국의 청교도들이 당시 불의한 교권과 압제에 저항하여 참된 신앙의 자유를 찾아 정든 고향을 버리고 신대륙에 가서 새로운 교회를 시작한 것과 매우


228

비슷한 상황이다. 아울러 모세가 애굽의 왕궁을 떠나서 자기 백성과 고난을 함께 나누기 위해 광야로 탈출한 것과 유사하다. 이스라엘

민족의

애굽

탈출기는

사실상

모세의

개인적

탈출

시점에서 이미 시작된 것이다.

'교회당'은 많은데 '교회'가 적다

그러므로 누가 뭐라고 해도 작금의 가나안 현상은 그 일차적 책임이 제도권 교회에 있다. 건강한 교회들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자신이 거주하는 동네 근처에서 바른 교회를 찾기가 매우 힘들어진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미 많은 성도는 예수의 이름을 팔아 상업화하고 계급화한 교회에 아주 질리고 질린 상태다. 그래서 참된 기독교 신앙에서 벗어난 일부

중대형

교회들을

다소

심하게

극평하자면,

깨어

있는

성도들은 거의 다 탈출했고 단지 순진한 맹신도들만 남아서 무당 목사와 연합하여 종교적 기복 놀음에 몰두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229

담임목사가 바리새적 제사장이 되고, 동역자인 부목사와 전도사가 부하처럼 취급받고, 장로와 집사가 '평신도'라는 중세적 오명으로 격하되고, 그리고 교인들을 현금인출기로 만드는 교회를 과연 제 정신을 지닌 사람이라면 그 누가 기뻐하겠는가.

가나안 성도는 무교회주의자가 아니다. 그들 대부분은 진정 '바른 교회'를 회복하고 싶어한다. 교회는 단순히 교회당 건물에 모인 '종교 집단'이 아니란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역으로 예수의 십자가 정신을 상실한 공동체는 제 아무리 많은 사람이 모여 무슨 거룩한 간판을 걸고 어떤 유창한 설교를 해도 그건 더 이상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다.

우리는 가나안 현상을 두려운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 한국교회는 지금 촛대가 통째로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배하는 건물 자체가 신성하거나 반복적 예배 행위만으로 무조건 거룩한 교회가 되는 게 아니다.

한국교회는 이 거대한 변화의 물결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깨달고 겸허히 귀를 기울여야 한다. 어느 성도의 따끔한 지적처럼 여전히 "교회 안이네, 밖이네" 하는 땅 따먹기 수준의 인식으로 이


230

문제를 다룬다면 그건 크게 실수하는 것이다. 가나안 물결은 교회의 본질이 진정 무엇인지 우리에게 다시 물으며 새로운 도전과 시련과 기회를 동시에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헌물과 제단은 넘치는데 제사가 공허하다. 예배는 성업인데 진리가

절규한다.

성장은

좋아하는데

성숙이

없다.

성공은

좋아하는데 성실이 없다. 십일조는 강조하는데 십자가를 기피한다. 설교는 홍수인데 말씀이 기근이다. 교인은 많은데 제자가 적다. 업자는 많은데 목자가 적다. 교회당은 많은데 교회가 적다. 그리고 목사는 많은데 양들이 울고 있다.

그러니 이제는 매순간 성도들이 서 있는 그곳이 바로 교회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나님의 성전은 교회 건물 자체가 아니고 우리 자신이다." - 장 칼뱅(Jean Calvin), 기독교강요(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


231

목사만 말하는 교회 개신교 부패의 비밀

"돈만 밝히는 교회를 떠나겠다"는 가나안 성도가 계속 증가하고 있다.

최근

종교인들은

현각

스님의

"사찰에는

작심한

부처가

일갈에

화들짝

없고, 교회에는

놀란

예수가

일부

없다"며

분노하는 세인들의 따가운 비판에 그게 아니란 소리도 차마 못 하고 그저 전전긍긍하고 있다.

"백인 선교사들이 처음 아프리카에 왔을 때 그들은 성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저희들은

땅밖에

없었지요.

'기도합시다'라는

말에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눈을 감았습니다.그리고 기도가 끝난 뒤


232

눈을 떠보니 우리 손에는 성경이 들려 있었고 선교사들이 우리 땅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흑인지도자 데스몬드 투투(Desmond Mpilo Tutu) 주교가 한 말이다.

그런데 이는 요즘 일부 교회의 행태와 아주 닮은꼴이다. 교인들 손에는 성경을 들려 주고 목사는 돈을 차지하고 있다.

역사를 보면 모든 종교의 타락은 반드시 '돈과 권력'으로 나타난다. 대부분의 인간은 그 마약을 못 이긴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걸 쉽게 극복하지는 못 한다. 특히 교회에 출석하고는 있지만, 아직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라면 그런 유혹에 더욱 약하다.

아무나 장로의 반열에

더구나 교권주의자들이 주도하여 변질한 어떤 교회에서 중요한 직분으로 진출하는 방법은 그리 어려운 게 아니다. 이미 잘 아는 내용이다.

일단

사회에서

소위

'상위

계층'으로

분류되는

사람들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근자에는 교회도 은근히 사람 차별을 제법 잘 하기 때문이다. 거기에 추가로 새벽기도 자주


233

나가고, 십일조 잘 내고, 목사에게 맹종하고, 그리고 모든 예배 다 참석해 앞자리에 앉아 아멘 열창 뜨겁게 잘 하면 된다.

그러면 결국 좋은 신앙인으로 인정받아 시무 장로나 권사 직분을 초고속으로 받는다. 그 다음 담임목사의 거룩한 총애를 받고 충실한 애완견이 되면 더욱 중요한 요직을 맡을 수 있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는 이런 걸 출세로 여기는 유능한(?)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이런 교회들은 그 사람이 가정에서 얼마나 짜증 잘 내고, 직장에서 남의 험담 잘 하고, 거짓말 잘 하고, 성품이 치졸하고, 욕심이 많고, 사생활이 복잡하고, 이기적이고, 무례하고, 인색하고, 그리고 가난한 형제와 친척에게 매정한 것 따위는 아예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게다가

교권을

독점하려는

목회자들이

자주

애용하는

수법이

있는데 바로 '충성 유도'다. 마치 독재자들이 그 체제를 견고히 유지하기 위해 쓰던 고전적 방법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는 사람은 수시로 칭찬하며 요직에 중용하고, 반대로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순응하지 않으면 점차 홀대하다가 가차 없이 밀어낸다.


234

특히 순진한 교회에서는 이게 아주 잘 먹힌다. 그래서 일부 교인들은 서로 앞다투어 목회자에게 열심히 음식을 대접하거나 양복을 선물한다. 그리고 이런 습성이 차차 몸에

배게 되면

명절마다 백화점 상품권은 기본이고 나중엔 고액 수표까지 들고 가는 교인도 있다. 결국 개신교 목사직이 적당히 요령만 발휘하면 제법 짭잘한 명품 직업으로 재탄생하는 것이다.

아무튼 그 덕분에 별 오사리 잡배들이 다 장로의 반열에 들게 되었다. 누가 봐도 분명한 사기꾼 정치인이 장로이고, 탈세를 일삼는 기업인이 장로고, 처첩을 여러 명 둔 경영주가 장로고, 공금을 횡령하는 공무원이 장로고, 돈으로 재판을 농락하는 판사도 장로고, 표절 목사의 교인 고소를 열심히 돕는 법조인도 장로고, 그리고 교단 선거에 패거리 작당하여 돈봉투 돌리는 작자들까지도 모두 장로 감투를 자랑하게 되었다.

목사만 모르는 '직분 남용'

더욱 한심스런 일은 이렇게 무늬만 장로인 가짜들 대부분은 매우 권력지향적이기 때문에, 제대로 자질을 갖추고 정상적으로 장로가


235

된 진짜들보다 더 나서기 좋아하고 불의에 쉽게 타협한다. 그래서 세속적인 논리와 수단이 신중한 제한 없이 그대로 교회에 유입되어 교묘하게 사용된다. 교회 정의가 갈수록 흐려지고 있는 이유이다.

집사의 경우는 더 말 할 나위도 없다. 특히 서리 집사직은 왜 그리 마구 남발하는지 개나 소나 다 집사다. 그래서 교회에 몇 년 출석했는데도 서리 집사를 못 받으면 도리어 그걸 불명예로 여길 정도다. 이는 물론 성경의 직분 정신과 기준에 매우 크게 어긋나는 사이비적 행태다.

목사가 되는 과정 역시 크게 다를 바 없다. 일단 신학교에 가서 공부 열심히 해서 학점 잘 따고, 목사 안수 받기 전까지 크게 사고치지 않고 교회 봉사만 잘 하면 된다. 게다가 신학교의 과도한 난립으로 인해 그냥 줄만 서면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군소 신학교들이 널리고 널린 상태다. 그래서 저학력자가 학력을 세탁하기에 가장 좋은 곳 중에 하나가 신학교다.

반면에 그 사람의 신앙과 인품과 성품이 정말 목회자로서 얼마나 자질과

소명이

있는지

소속

공동체의

인정을 받기에

충분한

장기적이며 객관적인 검증 절차는 아주 취약하다. 그래서 요즘


236

성도들의 놀란 새가슴을 덜컹하게 만드는 대형 사고와 교회 비리에 도대체 목사가 끼지 않는 곳이 거의 없다.

이는 한국교회의 직분 운용 제도가 겉으로는 거룩하게 치장하나 속으로 뿌리까지 부패하게 된 슬픈 과정을 잘 설명한다. 아울러 왜 개신교가 지역 사회로부터 외면을 받고 있는지 그 사역적 한계를 잘 보여준다. 교회에서 직분자가 되는 과정과 그 이후의 관리가 너무 외면화, 형식화, 교권화, 상업화, 특권화, 그리고 사유화되었다.

그러면 과연 대다수 목회자들은 이런 사실을 잘 몰라서 여전히 침묵하거나 방치하고 있을까. 나는 결코 그리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 중 상당수는 제도적 약점와 치명적 결점를 잘 알면서도 안 고친다. 적극적으로 고칠 의사가 없다. 오히려 교회가 적당히 부패한

종교적

기득권을

누리며

속주머니를

즐겁게

하기

때문이다. 웬만한 초신자들도 다 아는 사실을 교회 생활 수십 년이나 한 중견 목회자들이 정말 모를 리가 있겠는가. 그래서 "한국교회의 부패는 오직 목사만 모른다"는 역설적이며 자조적인 풍자가 나오는 것이다.


237

'목사주의'는 '교황주의'의 변신

게다가 서울 어느 대형 교회의 S 목사는 "목사는 주의 말씀을 가르치는

성직자이기

때문에

아버지보다

모셔야

한다"는

주장까지 늘어놓고 있다. 이젠 종이란 자들이 그냥 상전도 아니고 아예 아버지 자리마저 넘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마 23:9)"고 하신 예수의 가르침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설교다.

이처럼 겉으로는 장로교요 침례교요 감리교이지만 실제는 거의 다 '목사교'가 되었다. 외견상 교권이 제법 균형있게 분산된 듯 하지만, 사실 장로와 집사는 대부분 어용화되어 거수기 수준이 많고 상당수 담임목사가 무당 행세하며 홀로 교회의 삼권을 흔들고 있다.

교단 또한 겉으로는 그럴 듯 한 헌법이 있어 보이지만, 중요한 순간에 재판국원이나 기소위원의 구성 대부분을 목사들이 독점해서 운영하기에 교단법은 그저 유명무실한 경우가 많다. 그래서 비리 목사들이 제대로 처벌받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


238

그러므로 담임목사를 어버이 수령처럼 받들며 목사 중심의 교회를 지향하는 작금의 '목사주의'는 중세의 '교황주의'와 무엇이 크게 다른가.

단지

겉포장만

세련되게

바꾼

셈이다.

그러니

이건

쓰레기차를 겨우 피했더니 도리어 똥차를 만난 꼴이다.

어떤 목사들은 툭하면 자기가 '주의 종'임을 내세우지만, 이는 사실 매우 웃기는 말이다. 세상에 주의 종이 아닌 성도가 어디 있나. 그들은 우선 그 시대착오적인 특권 의식부터 철저히 뿌리 뽑아야 마땅하다.

한국 개신교가 만성적으로 부패하는 비밀은 '직분 남용'에 있다. 직분을 맡아서는 안 될 사람들이 대거 직분자가 되었고, 직분자가 결코

해서는

일들이

거룩한

사역이라는

위장

속에

방임되었고, 그리고 그런 만성적 비리에 교인들은 마냥 침묵했다. 시무 목사가 헌금 횡령이나 성추행이나 거짓말을 해도 덮으려 했고, 장로와 집사가 무능해도 방관했고, 그리고 교회가 배도한 세습을 자행해도

따뜻하게

동조했다.

이러니

맹신적인 집단이 과연 어디에 있을까.

하늘

아래

이보다


239

"침묵하는 거룩은 의심을 해야 한다"

결과

방자해진

종이

상전이

되었고,

당회나

담임목사를 섬기는 어용 기관이 되었고, 교회에서

제직회는 여자뿐만이

아니라 남자도 잠잠해졌고, 그리고 그렇게 조용한 교회가 은혜로운 교회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결국은 오로지 목사만이 자기 주장을 말할 수 있는 이상한 교회로 변질되고 사유화된 것이다.

R 집사의 제보에 따르면 세습으로 유명한 M 교회 2012 년 신임 장로 교육 지침에는 "당회장 목사에게 절대 복종해야 한다", "설사 내 생각과 다르더라도 어떤 의견이라도 개진하면 안 된다", 그리고 "수시로 당회장 목사 사모님께 안부를 여쭤라"는 등의 내용이 있었다고 한다. 이 정도면 그게 교주지 무슨 목사인가.

이런 면에서 보자면 한국 개신교의 '성직주의'는 중세의 계급적 사제 제도를 그대로 복제한 불법 모조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로마교회에서는

사제들만이

교회에서

말할

있었다.

'평신도'라는 수치스런 이름으로 격하된 나머지 일반 성도들은 만날 헌금이나 바쳤지 다른 발언권이 전혀 없었다. 심지어 발언은 커녕 성경을 몰래 읽기만 해도 이단으로 몰려 처형 당했다. 소위


240

성직자란 자들이 사람을 가축처럼 마구 죽였다. 그러니 그게 얼마나 무지막지한 교회였나.

사실 이제라도 직분자들이 바로 선다면 교회는 다시 바로 설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단순하고 당연한 상식이 왜 이 바닥에선 늘 겉돌고 있는 것일까.

17

세기

스코틀랜드

장로교의

목사

사무엘

러더포드(Samuel

Rutherford,1600-1661)는 "사탄과의 전쟁이 사탄과의 평화보다 낫다. 침묵하는

거룩은

의심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극히

옳은

지적이다. 침묵은 교회 부패의 자양분이다. 부패에 침묵하는 것은 부패를 후원하며 도와주는 행위다.

실제로 지금도 부패한 교권주의자들은 성도들에게 늘 침묵하자고 설득한다. 날선 비판보다는 '주의 일'이 먼저라고 목소리 높힌다. 하지만 그건 상투적인 속임수이다.

그리스도의 교회에 하나님의 공의를 거역하면서까지 수행해야 할 주님의 일이란 결단코 없다. 오히려 교회의 제직들은 구조적이며


241

제도적인 불의와 부정에 맞서 반드시 할 말을 해야 옳다. 만일 계속 침묵한다면 그건 거룩한 직분에 대한 배교적 '직무유기'다.

종이 왕 노릇하는 교회는 사교 집단이기 때문이다.

"교회 속에는 아무런 지배도 없고 지배체제도 없으며 아무런 지도의 요구도 없고 특권을 가진 직분도 없다. 그것은 계급 없는 사귐이다. 이 공동체 안에는 기능상의 차이는 있으나 신분상의 차이는 없다. 모든 사람이 한 형제요 한 자매인 것이다." - 김균진, 조직신학 교회론


242

"욕심대로 살다 천국 가겠다" 개신교 침체와 기복 신학

일찍이 독일의 개혁자 루터는 로마서를 근거로 교황이나 사제의 중간적

역활이

없어도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종교개혁의 새시대를 활짝 열었다. 즉 구원은 선행이나 미사 행위 따위로 얻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만일 인간 스스로 자력 구원이 가능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도 굳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243

그래서

칼뱅은

"인간의

모든

의를

모아

하나의

덩어리를

만들더라도 단 하나의 죄도 보상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를 강조한 신조로써 오늘날 많은 보수 교단들이 적극 수용하고 있다.

이신칭의를 오용하는 기복 교회

"인간의 노력이나 공적이 하나님의 구원에 기여하지 않는다"는 이신칭의는 신자들에게 구원에 대한 절대적 확신을 주는 장점이 있다. 반면에 신자들이 이미 확보된 구원에 대해 자족하면서 더 이상 적극적인 선행이나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 약점이 있다.

이와 관련하여 이 글에서 간단히 논하고 싶은 점은 한국 개신교의 외적 성장과 함께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현상 중에 하나가 '기복주의'인데, 이게 전통적인 이신칭의의 교리와 혼합이 되어 지속적으로 심각한 증상을 확대하며 재생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당장은 욕심대로 즐기며 살다가, 나중에 회개하고 천국 가겠다"는 매우 기회주의적인 신앙 행태다. 꿩도


244

먹고 알도 먹겠다는 매우 영리하고 지극히 인간적(?)인 심보인 것이다.

헌데 따지고 보면, 이런 알량한 배포도 신앙 지식이 전혀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들은 성경을 근거로 천국 구원에 대한 보장을 어느 정도 확보한 후 죄를 저지른다. 이제는 예수를 입으로 시인하고 영접했기에 구원 염려는 안 해도 좋으니, 수도사처럼 피곤하게 살 게 아니라, 앞으로 하고 싶은 짓도 좀 하고 즐기며 살겠다는 거다.

사실 요즘 교회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배교적 비리들은 신앙과 무관한 비신자들에게서 일어나고 있는 게 아니다. 주로 교회 생활을 오래한 목사, 장로, 그리고 집사들에게서 발생하고 있다. 어찌 보면 초신자들은 뭘 잘 모르는데다가 천벌이 두려워서라도 감히 저지르지 못 할 범죄도 교회의 중견 직분자들은 용감하게 잘 저지른다. 잘못된 지식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뭔가 아는 게 있기에 탈이 난 것이다.

그들은 교회 돈을 상습적으로 도적질해도 차후에 회개하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들이 신학교나 교회에서 배운 신학에 의하면 '회개만 하면 용서 못 받을 죄가 없다'는 것을 잘 알기


245

때문이다. 그러니 같은 논리로 목회 독재, 신도 우민화, 헌금 유용, 성추행, 패거리 교단 정치, 사치 생활, 그리고 교회 세습 등도 크게 장애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못 하면 바보다. 회개라는 아주 편리한 면죄부가 있는 것이다.

나중에 회개하면 된다?

사실 세인들은 "어떻게 성경을 믿는 공교회의 직분자들이 저런 파렴치한 범죄를 저지르는가" 하며 깊히 탄식하지만, 역설적으로 일부 종교인들은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사 1:18)"는 성경 구절을 잘 알기 때문에 도리어 저런 범죄를 저지른다.

조 목사, 오 목사, 전 목사가 성경 지식이 없어서 교회 돈을 유용하거나,

표절하거나,

또는

성추행하는

아니다.

대형

교회에서 수십 년 동안 목회한 그들은 성경을 달달 외울 정도로 잘 안다.


246

일부

변절한

목회자들에겐

세상에

이신칭의

신학처럼

신나는

교리가 없다. 겉으로 적당히 경건한 척하면서 뒤로 몰래 나쁜 짓을 해도 '천국 보험'만은 안전하니 얼마나 좋은가. 그저 순진무구한 교인들에게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 아니 설사 들키더라도 끝까지 잡아떼거나,

또는

노회나

총회의

여러

동업자들을

동원하여

무마하면 된다. 물론 돈이 좀 들기는 한다.

그런데

이는

비단

직분자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교인들도

사회에서 해선 안 될 일을 종종 저지른다. 욕심 때문에 하기도 하고 현실적 이익에 약해서 하기도 한다. 그리고는 마음 한 구석으로

이신칭의

교리에

기댄다.

그리고

이게

습관화하고

만성화하면 나중에는 아예 '회개를 전제로' 불의한 행위를 과감하게 감행하기도 한다.

기업인의 탈세가 정당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일단 돈부터 챙기고 본다. 회개는 그 다음 일이다. 필요하면 뇌물도 바친다. 성공이 먼저다. 급하면 거짓말도 가끔 한다. 거래가 우선이다. 나중에 회개하면 된다.


247

이런 흐름에 대해 원종천 교수는 "기복신앙으로 물든 한국교회는 거룩한 삶과 윤리에는 관심이 없고, 세상적 외형이 하나님의 축복인양 빌미로

착각하며 자신의

이기적으로

신앙을

복만을

정당화하며

추구하고,

자신을

이신칭의를

위로하고

있다"고

따끔하게 지적하기도 했다.

아무튼 이 바람에 이제 개신교 일각에서는 "천국에 들어갈 수만 있다면 의의 면류관(딤후 4:8) 대신에 개털모자를 써도 괜찮다"는 말세적 풍조까지 퍼지고 있다. 그리고 그 덕분에 교회 윤리와 교회 정의가 바닥을 치고 있다. 교회가 이웃에게 빛과 소금이 되지 못 하고 도리어 세상의 비난을 받고 있다.

개신교의 윤리적 실패가 칼뱅과 아르미니우스가 제 멋대로 혼합된 기복적 '짬뽕 신학'의 결과라는 분석이 가능하게 된 이유다. 그리고 물론 윤리적으로 실패한 교회가 필연적으로 그 사역에서도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다.


248

행함이 없는 신학

오늘날 교회에서 믿음에 대한 강조는 뜨거운데 비하여 상대적으로 '행함'이 너무 부실하다. 강단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유창하게 설교하고 내려와서는 교회 돈을 도적질한다. 주일에는 예배를 드리고

평일에는

퇴폐업소를

드나든다.

교회에서는

고상하고

사회에서는 저속하다. 믿음과 행함이 수시로 충돌하여 교인들 상당수가 자신도 모르게 위선적 이중인격자로 전락하고 있다.

그래서 아직도 건강한 교회와 신실한 직분자가 결코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총체적으로 개신교가 개판이란 소리를 듣고 있다. 이건 마치 거대한 방주의 하부에 구멍이 뚫려 조용히 침수하고 있는 것과 유사한 위기다. 외양은 제법 준수하고 멀쩡하게 보이는데 밑바닥 기초가 부실한 것이다.

그러나 "무조건 믿기만 하면 무슨 짓을 해도 구원을 받는다"는 생각은 그 자체로 논리적 모순이며 언어의 유희에 불과함을 알아야 한다. 성경은 물론이고 루터나 칼뱅이나 웨슬리 등 그 어떤 개혁자들의 가르침에도 이렇게 단순하고 무식하고 잡스러운 사상은 없다.


249

만일 "거룩한 삶이 누락된 기독교 신앙이 실제로 존재할 수 있다"고 정말로 믿는다면 그건 단지 '거짓 믿음'일 뿐이다. 뿌리가 콩나무인데 팥이 나올 수는 없는 법이다.

우리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는 말씀을 오해해선 안 된다. 이것은 믿음만 있으면 상습적으로 죄를 지으며 살아도 좋다는 값싼 면죄부가 아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며 삶의 과정이 다소 불의해도 무조건 구원만 받으면 된다는 기만적 사상은 뿌리까지 타락한 사이비 신앙일 뿐이다.

오히려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단순히 믿고 구원만 받으면 되는 게 아니라, 그 믿음대로 바르게 실천하며 살아야 마땅하다. 죄를 즐기며 거룩한 행함이 없는 사람은 영적으로 죽은 자이며 그에게는 결코 구원이 없다. 왜냐하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야 2:26)"이기 때문이다.


250

어떻게 주를 따르고 있나

지금은 은혜의 시대다. 예수 그리스도는 믿는 자에게 값없이 구원을 주셨다. 따라서 칭의는 복음이다. 성도가 주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지 고작 개털모자식 구원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레샴

메이첸(J.

Gresham

Machen)은

"그리스도인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이다"고 말했다.

성도의 구원은 '믿음+행함'의 협력으로 이루워지는 게 아니다. 도리어

성경은

'믿음=행함'이

일치되어야

참된

믿음이라고

가르친다. 따라서 내 멋대로 살아도 되는 구원이란 결단코 없다. 그건 거짓 신앙이며 스스로 속는 것이다.

비록 우리가 너무 연약해서 항상 성결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바른 믿음은 반드시 '거룩한 삶'을 이끌고, 거짓 믿음은 '타락한 삶'을 이끌어 결국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한다는 사실을 두려워해야 한다.


251

마지막 날에 하나님은 당신이 보수인지 진보인지를 묻지 않으신다. 어느 교단 소속이었는지도 묻지 않으신다. 목사인지 집사인지도 묻지 않으신다. 얼마나 예배에 많이 참석했는지도 묻지 않으신다. 얼마나 헌금을 많이 했는지도 묻지 않으신다. 얼마나 부유하게 살았는지도 묻지 않으신다. 또한 얼마나 높은 자리에 올랐는지도 묻지 않으신다. 그분은 다만 당신이 누구를 진리로 믿었으며 어떻게 그를 따랐는지를 물으실 것이다.

기복 신앙은 정당한 행함이 별로 없이 세속적 복을 추구하는 원시적 주술 신앙에 기인한다. 복을 받기 위해서라면 하나님의 말씀조차도 무속적으로 도구화하며 탈선하는 매우 그릇된 신앙이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두려운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고, 떨리는 마음으로 주님을 찬양하여라(시 2:11)"고 말씀한다. 그리고 이게 바로

공교회의

직분자들이

툭하면

몰상식한

죄를

범하고는

"비판하지 말라"거나 "죄 없는 자가 어디 있냐"는 등 간교한 변명만 늘어놓을

아니라,

항상

두려운

마음으로

피흘리기까지(히 12:4) 죄와 싸워야 하는 이유다.

공의에

힘쓰며


252

"우리가 행위로 칭의되는 것은 아니지만, 행위 없이 칭의되는 것도 아니다." - 장 칼뱅(Jean Calvin)


253

"돈 때문에 교회 못 간다" '사업'을 넘어 '산업'이 된 종교

근자에 어느 목사가 "주일성수와 십일조를 비판하는 사람들 중에 주일을 소중히 여기거나 헌금하는 일에 신실한 사람들이 별로 없더군요"라고 지적하는 글을 읽었다. 아울러 그는 "그 이면에는 하기

싫은

마음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도구로서

주일성수와

십일조를 내세우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고 말했다.


254

물론 개인에 따라 자신의 느낌을 주장하는 거야 자유겠지만, 그 글은 정말 실망스러웠다. 만일 내가 거꾸로 "주일성수와 십일조를 옹호하는 사람들 중에 대부분은 교권주의자들이고 신실한 사람들이 별로 없더군요"라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선뜻 동의할 수 있겠는가. 물론 아닐 것이다. 그런 편협한 언사는 논리도 크게 부족한데다가 견해가 다른 상대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마저 개차반이기 때문이다.

신실한 헌금이란 뭔가

오히려 나는 과연 어떻게 헌금해야 그게 신실한 건지 묻고 싶다. 헌금을 아주 많이 해야 신실하다는 건지, 또는 봉투에 이름 크게 써서 내야 신실한 건지, 아니면 모이는 모든 예배마다 꼬박꼬박 헌금해야 신실한 건지 그걸 무슨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는지 그게 더 신기하다. 반대로 말하자면 가난한 성도가 헌금을 적게 하거나 자주 못 하면 그게 신실하지 않다는 말인가.

사실 가난한 성도들은 헌금을 하기 싫어 못 하는 게 아니라, 돈이 너무 없어서 못 한다. 도리어 빚을 안 지고 살면 기적일 정도다. 부모에게

용돈을

충분히

드리고,

형제들이

고생해도


255

도와주고, 자식에게도 원하는 거 다 못 해주고, 사고 싶은 게 있어도 맘대로 못 사고, 그리고 친척과 이웃에게도 제대로 베풀지 못 하고 산다. 그래서 늘 마음이 아리다.

그래도 그들 대부분은 교회에 갈 때면 빈손으로 안 가고 반드시 헌금을 챙겨서 간다. 교회의 바른 운영과 교역자의 생활비를 지원하기 위해 적절한 재정이 필요함을 잘 알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럼에도 수입 '십분의 일'을 안 바치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거라고 협박하거나, 그도 아니면 마치 믿음이 부족해서 덜 바치는 것처럼 폄하하는 목회자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나도 묻고 싶다. 목회자들은 정말 성경의 가르침 그대로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고후 8:3)" 구제하며 헌금하고 있나. 말로만 "헌금이

복되고

귀하다"고

설교하지

말고, 아무도

말리니

이제라도 교인들에 대한 '헌금 사찰'을 그만 멈추고 자신들부터 먼저 헌금통이 터지도록 실컷 해서 복을 곱배기로 더 받으라는 거다.


256

아울러 애초에 교회에 헌금 제도가 아예 없었고 또한 목사에게 생활비를 주는 제도가 원천적으로 없었다면, 그래도 2-3 세기의 초기 교회들처럼 자비량으로 힘들게 일하며 돈을 벌어 목회할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지도

궁금하다.

한국의

가톨릭

사제는

급성장하는 교세에 비해 절대수가 부족해서 난리인데 왜 개신교 목사는 이토록 많을까. 이게 과연 가톨릭 신자들의 신앙심이 부족해서 그럴까.

헌금 강요는 인간의 잡술

나는 유급 목회 자체가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역으로 지금처럼 대다수 목회자가 유급 사역인 관행에는 결코 찬성하지 않는다. 왜 그들은 사도바울의 말씀을 그리도 잘 설교하면서 유독 그의 자비량 사역만은 열심히 안 따르는지 그 깊은 사유를 정녕 모르겠다.

예수님은 단 한번도 돈을 걷으신 적이 없다. 그런데 도대체 개신교의 목사라는 직분이 뭐길래 만날 교인들을 보기만 하면 "돈 바치라"고 하냐는 거다. 본래 교회의 헌금이란 성경책을 들이대며


257

의무적으로 요구하는 게 아니다. 헌금 강요는 결단코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다. 그건 인간의 잡술일 뿐이다. 헌금은 성도들 각자 스스로 자원해서 내야 정상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건 헌금이 아니라, 차라리 의무적 세금이나 요금이라고 불러야 옳을 것이다.

예배당이 무슨 돈이나 제물을 바쳐 제사드리는 이방 신당인가. 교회들이 하도 돈 타령을 해대니 "돈 때문에 교회 못 간다"는 교인들이 계속 늘고 있다. 특히 먹고 살기 힘든 젊은 세대들은 구태여 그 얼어죽을 '십일조 강요' 때문에 은근하고도 집요한 차별과 눈총까지 받으며 교회에 출석할 만큼 그리 우둔하지 않다. 그들은

나이깨나

먹은

어른들이

주보에

헌금자

명단

빽빽히

올려놓고 서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자뻑하는 꼴을 차마 유치해서 못 본다. 요즘 교회에 젊은 층이 갈수록 사라지고 있는 이유다.

더구나 어느 대형 교회 담임목사는 심방 한번 갈 때마다 천만 원씩 요구하는 경우도 있었다. 아마 전세계에서 교인 집을 심방하면서 개인적으로 심방사례비를 태연히 받는 나라는 한국교회가 유일할 것이다. 심지어 수도권의 한 귀족 목사는 "교인으로부터 개인적으로 10 억 원을 받아 봤다"고 부흥회에 돌아다니며 자랑하기도 한다.


258

이제는 종교가 사업을 넘어 산업이 되었다. 담임목사, 협동목사, 부목사, 교육목사, 강도사, 그리고 전도사에 이르기까지 줄줄이 직분을 수직화하고 계급화하여 여기에 유급으로 고용된 사람만 해도 적어도 수십 만에 이른다. 그리고 교회 돈을 방만하게 투자하여 만든 각종 사업도 만만치 않다. 선교, 교육, 의료, 구제, 복지

등을

명분으로

만든

재단과

그 고용원들

또한

거대한

산업이다.

그러니 목회가 엄청난 이권이 된 게 당연하다. 부패한 인간의 특성상 돈과 권력이 있는 곳이 무사할 리가 없는 것이다. 이는 비단

개신교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대단히

미안한

말이지만

타종교들도 마찬가지로 도토리 키재기다. 근자에 현각 스님이 괜히 일갈한 게 아니다.

그러므로 결코 잊지 말자. 교회에서 제일 조심해야 할 사람은 "하나님께 무엇을 바치라"는 사람이고, 교회에서 제일 의심해야 할 사람은 "하나님께 무엇을 받았다"는 사람이다.


259

종교 산업 끝짱내야

일찍이 장로교 창시자인 칼뱅은 "교회 수입의 '적어도 절반'은 가난한 자의 몫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요즘 난 그런 신선한 교회를

씻고

찾아도

별로

기억이

없다.

개신교가

변질되었다는 명백한 증거다.

상당수 교회는 우선 헌금을 걷는 방법에서 옳지 않고, 또한 그렇게 부당하게 걷은 헌금을 사용하는 방법에서도 크게 잘못되어 있다. 교회 재정이 선교니 구제니 교육이니 하는 것에는 고작 생색만 낼 뿐이고 많은 부분이 외적 거품과 내적 비만에 낭비되며 귀족 목사들 손에서 놀아나고 있다.

그럼에도 진솔한 변화는 아직도 난감하다. 주일마다 구름같이 모여 온갖

매끄러운

헛소리에

아멘

연발하고,

심방비니

접견비니

기도비니 하며 수백만 원씩 뜯어도 그저 아무런 생각 없이 돈을 갖다 바치는 맹신도들이 도처에 넘치는데 삯꾼 목사들이 뭐가 답답해서 스스로 달라질까.


260

목사교

신도들은

성추행하고,

담임목사가

표절하고,

헌금을

고소하고,

유용하고,

세습하고,

장부

숨기고,

거짓말하고,

황제

식사하고, 일등 항공석 애용하고, 그리고 무슨 사치를 떨어도 전혀 꿈쩍 안 한다. 자칭 주의 종이란 위인들이 무슨 짓을 하든 관심 없고 오로지 개인적 복만 기원하며 돈을 갖다 바친다. 그리고 이런 무속적 맹신에는 그 어떤 고상한 신학도 무효하고 그 무슨 신성한 교리도 무력하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사이비 저질 목사라도 정통이라는 탈을 쓰고 기복 장사만 제대로 잘하면 곧잘 흥행해서 순식간에 번듯한 대형 교회의 교주가 된다. 마치 신흥 종교나 이단 집단들이 부흥하는 과정과 지극히 닮은꼴이다. 그럼에도 거기에 적극 동참해서 망국적 목사왕국

건설에

앞장서고

있는

맹꽁이들은

정말

정상적인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불가능한 족속들이다.

결국 진정한 교회 회복은 이런 가짜들이 장악한 종교 산업을 완전히 끝짱낸 후에야 비로소 가능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게 바로 성도들이 더욱 각성해야 하는 이유다.


261

칼뱅은 세습을 혐오했다 담임목사 세습은 종교적 '주체사상'

한국의

개신교

중에서도

특히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여러

교단들을 볼 때마다 나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의문이 몇 가지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교회 세습이다.

신학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성도라면 대부분 장로교 창시자인 칼뱅의

<기독교강요>나

기타

그의

성경

주석들을

더러

읽어보았으리라 생각된다. 특히 <기독교강요>는 사실상 개신교


262

신학의 초석을 세운 뛰어난 걸작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런데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교회가 세습을 해도 무방하다고 가르친 내용은 단 한 줄도 없다.

한국교회 세습에는 신학이 없다

반대로 칼뱅은 세습을 극도로 혐오했다. 그는 교회에서 세습 제도가 사라져야 한다고 했다. 칼뱅은 교회의 성직에 대해 "사람이 잠자는 동안에 받을 수 있는 세습적인 작위가 아니다"고 분명하게 말했고

성직자들의

저질적인

세습

행태를

신랄하게

공격하고

비판했다. 물론 한국의 세습 목사들은 이런 특급 비밀을 자기 교인들에게 절대로 말하지 않는다.

더구나 예수님의 직계 제자인 사도들 중 아무도 사도의 직분을 자식에게 물려준 제자가 없다. 단지 엉뚱한 중세의 교황들이 스스로 사도직을 계승했다고 주장하며 남몰래 숨겨두었던 자식에게 교황직을

세습한

교단들이

교회

적이

세습을

있었을 방지하는

뿐이다. 강력한

단호하게 대처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최근

일부

규정을

지각있는

만들고

이에


263

반면에 상당수 몰지각한 교회들은 여전히 담임목사직을 자식에게 세습하거나 또는 그것을 못 본 척 방관하고 있다. 세습을 반대하는 교단보다 그것을 옹호하거나 방조하는 교단이 훨씬 더 많다. 그렇지만 족제비도 낯짝이 있다고 차마 개신교 신학의 원조인 칼뱅의 발언까지 왜곡하여 세습을 합리화하지는 못 하고 그저 눈가리고 아웅하고 있다.

그래서 "한국교회의 세습에는 신학이 전혀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오직 탐욕만이 있을 뿐이다. 성경적으로 세습을 정당화할 근거가 전무하다. 기껏해야 "구약의 레위 제사장이 세습직이었으니 신약의 목사도 세습할 수 있다"는 턱도 없는 궤변과 기만을 늘어놓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혹시라도 "목사가 현대판 제사장이다"고 주장하는 목회자를 주변에서 본다면 가급적 상종도 하지 말기 바란다. 그는 십중팔구 사이비다. 신약 교회에서는 모든 성도가

다 평등한

제사장이다.

내가

고등학생이었던

시절만

해도

교회

세습이란

말은

아예

용어조차 없었다. 결국 개신교가 한때 급격히 성장하면서 신도들이 늘어나고 기득권이 커지니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말이 된다.


264

그리고 중세 교회 역시 그 타락이 절정에 달했을 때에 비로소 성직 세습이 극심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세습 정당화는 '주체사상'식 꼼수

그럼에도 어떤 목사들은 '합법적으로' 이루어진 교회 세습은 아주 정당하다고 주장한다. 참으로 자기 얼굴에 분칠을 하고 양심에 회칠을

하는

헛소리다.

그러면

북한의

3 대

세습도

지극히

합법적으로 된 것이니 축복이라도 해주어야 한다는 말인가.

과거 북한이 전통적인 공산주의 이론을 상당 부분 포기하고 북한식 '주체사상'을 들고 나온 가장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일인지배 수령 체제와 족벌 세습이었다. 소련식 수정주의에 대한 비판은 그저 명분일 뿐이다. 그 진짜 속셈은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일은 설사 원칙에 벗어나도 그냥 자기식대로 하겠다는 거다.

이런

면에서

보자면

작금의

한국형

교회

세습은

'개신교식

주체사상'이라고 말해도 전혀 과언이 아니다. 담임목사가 십자가 정신을 포기하고, 교인을 맹신화하고, 그리고 봉건적 수령이 될


265

경우만 비로소 가능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교회의 족벌 세습은 독재국가의 수령처럼 교회를 목사 맘대로 사유화하겠다는 신호탄이다.

그러므로 특히 칼뱅 신학을 지지하는 '합동', '고신', 그리고 '합신' 교단의 지도자들에게 먼저 묻고 싶다. 그대들 양심엔 교회 세습이 정말 타당하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세습만 좀 봐주면 나머지 다른 것은 성경적으로 아주 잘하겠다는 건가. 바른 신학과 바른 교회를 하겠다고 교단을 만들었으면 최소한의 보편적 상식이라도 지켜야 하지 않냐는 물음이다.

비록 제네바의 목회자 칼뱅처럼 평생 가난하고 검소하게 살지는 못 하더라도 적어도 교회 세습이란 반기독교적 범죄는 거부해야 옳지 않냐는 말이다. 대체 전세계의 어느 나라 교회가 한국처럼 이렇게 무더기로 세습하고 있는지 부끄럽지 않은가.

개신교 금수저 모두 퇴출시켜야

심지어 어느 목사는 "전체 교회에서 세습 교회가 얼마나 된다고 이 난리냐"고 따지며 적반하장으로 큰소리친다. 갈수록 태산이다. 이는


266

마치 전체 국민에 비해 강도범의 수가 그리 많지 않으니 그냥 두자는 말과 같다.

기독교인으로서 교회 세습이 큰 죄악임을 알면 즉시 고쳐야 마땅한 도리이지 고작 이게 할 소리인가. 아니면 한국의 대다수 교회가 모두

세습을

완료할

때까지

충분히

기다리다가

그때

가서

비판하자는 말인가. 당연히 아니다. 세습 목사들은 당장 교계에서 모두 퇴출시켜야 옳다.

지금 한국 개신교가 쇠퇴하고 있는 진정한 이유는 예배나 기도회나 신도나 건물이나 헌금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정신을 상실해서다. 상당수 개혁 교회들은 상식만 잃은 게 아니다. 이들은 무속적 무당이 되었고, 종교적 마피아가 되었고, 그리고 세속적 금수저가 되었다.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유명한 대형 교회들 중에 마치 개인 사업처럼 자식에게 담임직을 세습한 교회가 결코 하나 둘이 아니다.

'교회세습반대연대' 방인성 목사가 "대형 교회가 불을 지핀 세습이 한국교회 전체로 번지고 있다"며 "아버지 목사의 권력과 부를 아들에게

대물림하는

교회

세습은

교회법뿐

아니라

사회윤리


267

측면에서 볼 때도 범죄 행위나 마찬가지다"라고 강하게 비판한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다.

한국 개신교는 비밀이 많다. 믿음의 비밀이 아니다. 툭하면 연봉을 숨기고, 강사비를 숨기고, 심방비를 숨기고, 장부를 숨기고, 표절을 숨기고, 건축도면을 숨기고, 그리고 진실을 숨긴다. 재정 장로가 자살해도 숨기고, 성추행이 발각되도 숨기고, 헌금 횡령이 드러나도 끝까지 숨긴다. 그러니 세습을 정면으로 반대한 칼뱅의 가르침도 그냥 숨기면 된다고 생각한다. 하기야 예수도 배신한 자들이 칼뱅인들 배신 못 할까.

사실상 아버지 목사의 알량한 후광을 빼고 나면 별로 자랑할 게 없는 위인들이 금수저 세습 목사들이다. 그런데 아버지의 가업을 날로 삼킨 이 애송이 무당들은 시작부터 사기인 종교 영업권을 신나게 흔들며 주마다 높은 강단에서 예수의 이름을 팔아 복과 성공을 노래한다. 그리고는 열심히 돈을 걷는다. 아마 이런 게 진짜 신성모독이 아닐까. 게다가 거기에 아멘을 복창하며 환호하는 맹신 집단은 차마 제 정신이라고 보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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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요즘 "혼자 미치면 정신병이고, 단체로 미치면 종교다"는 말이 계속 나오는 거다.

"사제직은

마치

다름없다고

적에게서

개들에게 수

빼앗은

있다.

던져서 그들이

전리품에

사냥하게 '목자'라고

덤벼들

듯이

하는

사냥감과

부르는

사람들은

교회의

재산에

덤벼들었으며, 또는 소송을 해서 교회를 얻었고, 또한 돈으로 샀다. 어떤 자들은 추악한 아첨으로 얻기도 하고, 또 어떤 자들은 말도 할 줄 모르는 어린아이 때에 이미 아저씨나 친척에게서 유산으로 받기도 했다. 사생아가 아버지에게서 유산으로 받은 교회도 있다. 이런 자들을 그들은 '목자'라고 부르니 차마 이것을 들을 수 있는가!" - 장 칼뱅(Jean Calvin), 기독교강요(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


269

'무당 예배'와 '종교 영업 방해죄' 복음은 종교가 아니다

교회의 변질는 언제나 성직자의 부패로 시작된다. 그 다음은 가짜가 득세하고 진짜가 밀려난다. 그리하여 일단 교회가 자정 능력을 시대처럼

잃으면

교회법을

시점부터는 가짜들이

가짜들의 주도하여

세상이 제

된다.

맘대로

중세

제정하고

운영한다. 그나마 법이 있기는 하나 이름뿐이고 법의 정신은 제대로 지키지 않는다.


270

거룩한 모습의 가짜들

그런데 조용한 교회를 좋아하는 가짜들이 도저히 못 참는 게 하나 있다. 그건 누가 자기 밥상을 건드리는 거다. 담임목사의 연봉을 밝히라거나, 교회 장부를 공개하라거나, 십일조 강요를 반대하면 갑자기 얼굴을 바꾸고 난리가 난다. 이를 노골적인 영업 방해로 간주하며 발끈한다.

심하면 점잖던 목사도 본색을 드러내며 자기 교인을 세상 법정에 고소한다. 표절 목사, 성추행 목사, 그리고 헌금 횡령 목사에게 그 무슨 대단한 명예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하여튼 툭하면 '명예 훼손'이라며 펄펄 뛴다.

한 가지 더 웃지 못 할 사실은 이런 가짜들 대부분은 정통 신학을 아주 선호한다는 점이다. 믿음이 대단히 견실해서가 아니다. 그 이유는 신도들을 더 많이 모으고 교인들의 신뢰를 얻는 데에 크게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룩하게 정통 행세를 한다.

가짜가

오히려

진짜보다


271

따라서 일반 교인들은 자기 목사의 진정한 정체를 잘 모를 경우가 많다. 수십 년 동안이나 대형 교회에서 마치 성자처럼 잘 나가던 유명 목사들의 목회 비리가 하루 아침에 들통나서 추태를 보이는 것이 바로 그 전형적인 예이다.

"물건을 사고파는 장사는 10 배가 남고, 권력을 잡으면 100 배 남는 장사이고, 종교는 1000 배가 남는 장사이다." 오래 전 계룡산 국사봉에 살았던 어느 방외지사가 했다는 말이다. 물건 장사는 수시로 경기를 타서 순식간에 망할 수 있고, 권력 또한 잡았다 해도 10 년을 넘기기 힘들지만, 종교 장사는 한번 뿌리를 내리면 대를 이어 50 년도 가고 100 년도 가기에 나온 말이다. 그리고 이게 바로 유독 종교계에 가짜가 많은 실제 이유다.

사실 진짜 사역자를 존경하지 않는 성도는 없다. 진짜 목사는 비신자들도 인정하고 존중한다. 그러나 진짜가 적지 않다고 해서 가짜를 그냥 허용하자는 말은 그거야말로 가짜들의 기만적 전술일 뿐이다. 교회는 사도 시대로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진짜와 가짜의 영적 싸움터였다. 그리고 가짜가 교회를 장악한 경우도 아주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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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속에 찌든 나라

가짜들이

득세한

교회에선

하나님을

경배하는

예배가

세속적

강복을 위한 굿판으로 자주 둔갑한다. 십자가를 높히 내걸고 성경을 손에 들고 있지만 실제로는 기도로 무당질하고, 설교로 무당질하고, 간증으로 무당질하고, 찬양으로 무당질하고, 축도로 무당질하고, 그리고 봉헌으로 무당질한다.

겉모습은 예수교이지만 십자가 정신은 어디에도 없다. 단지 맘몬의 제사장들이 극장식 예배쇼를 연출하며 교인들의 영혼을 훔치고 있을 뿐이다. 이러니 그건 사실 예배가 아니라 그냥 기독교 무늬로 채색한 무당 굿거리다. 그리고 이처럼 기복화한 무당 예배에 질리고 질린 일부 성도들은 '종교 놀음'에 지쳐 끝내 예배당을 떠난다. 현대판 출애굽 현상이다.

바른 교회라면 당장 직면한 반기독교적 부패와 부정을 부지런히 고치고 개선해야 미래가 있는 법인데, 도리어 많은 교회들은 비리는 숨기고 오로지 격려만 하라고 요구한다. 같은 지적도 목사가 말하면 권면이고 장로나 집사가 말하면 비방이라고 한다.


273

그래서 무분별한 비판이 교회를 망치는 게 아니라, 무비판이 교회를 망치고 있다.

게다가 요즘은 일부 목회자들만 무당질을 하는 게 아니다. 정치 지도자들과 경제인들도 무당질에 적극 동참하고 있다. 평소에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 노력은 별로 안 하고 틈만 나면 기복과 점괘를 구하며 점쟁이를 찾거나 산 속에 들어가 굿판을 벌린다.

그 덕분에 이 밝고 밝은 첨단 문명 시대에 무당과 점쟁이가 무려 수십 만이나 되는 시대착오적인 무속 사회가 되었다. 오죽하면 "한국만큼 종교 장사하기 좋은 나라가 없다"는 수치스러운 말까지 나올까. 정말 '알파고'가 배꼽잡고 비웃을 일이다.

한국 개신교가 다시 사는 길은 관습적으로 체질화한 종교 영업을 단호히 근절하는 것이다. '성직'이라는 이름으로 특권을 누리고 배를 불리는 사악한 관행과 제도가 조속히 제거되어야 새로운 기회와 희망이 있다. 그러나 다수의 신도들은 이미 교묘히 왜곡된 정보와 맹신으로 세뇌되고 우민화되어 마치 병든 성황당 장승처럼 눈 먼 벙어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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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이 많은 장사

유대교의 제사장들은 예수가 그들의 기득권에 너무나 큰 지장을 주었기에 십자가에 죽게 했다. 신성모독이나 반역죄란 누명은 단지 표면상의

명분일

뿐이다.

실제

죄목은

'종교

영업

방해죄'다.

예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시고, 성전의 잡상인들을 내쫓고, 또한 그 성전을 헐라고 하실 때 저들은 자신들의 철밥통에 금이 가는 소리를 들었다.

유감스럽지만 지금도 상황은 매우 비슷하다. 성도들이 각성해야 한다. 하여튼 입으로 그 무슨 신성한 교리를 말하더라도 교회를 이용하여 사사로이 돈을 챙기는 자들은 조금도 믿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무조건 삯꾼이다.

기독교 진리는 열심히 믿어서 돈벼락을 맞거나 많이 바쳐서 복을 받는 그런 저급한 종교가 아니다. 예수께서 선포하신 고귀한 복음은 결코 종교가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고작 종교라는 진부한 틀에 가둘 수 있는 그런 무속적 이상향이 아니다. 복음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나 종교는 사람이 만든 것이다. 복음은 사람을 자유케 하지만 종교는 사람을 속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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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복음은 무당 목사의 사변적 설교처럼 그리 잡다한 게 아니다. 예수가 복음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가르침은 단순하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사는 것이다. 이것만 겸손히 실천해도 이미 충분히 벅차고 또한 넘치는 일이다.

그러니 중세의 부패한 성직자들처럼 온갖 상술을 동원하여 구원을 이익이 많은 장사의 대상으로 만들며 종교로 영업하는 자들에게 결코 속지 말아야 한다. '영혼의 구원'은 돈으로 거래하는 게 아니다.

예배도 귀하고, 직분도 귀하고, 그리고 헌신도 매우 귀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양복입은 무당들의 영업에 이용되는 순간 모두 거짓된 우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종교가 돈이 되는 시대는 부끄러운 시대다.

"사람들은 우롱하는

교황과 것,

자기들의

전달자들이 영혼의

아주

구원을

노골적으로 이익이

많은

자기들을 장사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 구원의 값을 돈 몇 푼으로 계산하는 것,


276

그리고 값없이 주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보았다." - 장 칼뱅, 기독교강요.


277

목사 아무나 한다 개신교 간판이 흔들린다

"요즘은 어디 가서 자신을 목사라고 밝히기가 부끄러워진다." 어느 중견 목회자의 가슴 아픈 고백이다. 저급한 목회가 판을 치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더욱

우려스러운

정상적인

목회자들보다도 저질 목사들이 더 다수가 되는 상황이다.

이에 대해 비인가 신학교나 불량 신학교 탓이라는 목소리가 크다. 교회 수와 교인 수에 비해 신학교와 목회자가 너무 많다. 심지어 수백만 원만 내면 신학교 학위와 목사 자격까지 단기간에 부여하는 곳이 있다.


278

고장난 정화 장치

하지만 그게 문제의 전부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제대로 인가된 정규 신학교 출신 목회자들도 저질이 아주 많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반 대학에 비해 워낙 실력이 떨어져서 학문적 저질이 많기도 하나, 사실 어찌보면 학력과 경력이 높을수록 더욱 고도로 지능화한 악성 저질이 더 큰 문제다.

근자에 일부 대형 교회나 교단 총회에서 발생하는 일련의 사건들이 그 좋은 예이다. 정규 신학교 출신의 석사 박사 목사들도 얼마든지 무당

설교하고,

헌금

횡령하고,

뇌물

거래하고,

성추행하고,

표절하고, 그리고 교회를 자식에게 세습한다.

이들이 섬기는 신은 자기 배다(빌 3:19). 종교 영업에 심각한 지장을 주는 교회의 위신 실추와 교인 수 감소는 크게

신경쓰지만,

하나님의 공의 실추와 복음이 막히는 건 별로 관심 없다. 이들은 "교인과

땅콩은

달달

볶을수록

맛이

난다"고

이죽거린다.

양심이라고는 쥐뿔만큼도 없고 정의감은 터진 만두보다도 부실한 위선자들이 맹신적 사교집단을 가꾸며 교주처럼 거들먹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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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적으로만

본다면

한국에서는

도적이나

사기꾼이나

인격

결함자들도 얼마든지 목사가 될 수 있다. 현행 신학교 과정이나 목사 제도 아래에서는 누구도 그걸 막기 힘들다. 교단마다 제도가 서로 다르고 장로교 교단만 해도 무려 100 개가 넘는다. 전국의 대학교를 다 합한 것보다 신학교 수가 훨씬 더 많다. 게다가 사이비와 이단들도 여기에 합세하고 있다.

그러나 목회 저질화 문제는 단순히 신학교 수와 목회 지원자 수를 줄여서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신학교를 다구쳐서 아무리 그 과정을 소수 정예화하더라도 가짜들의 목회 진출을 막기는 힘들다. 목회로

사기쳐서

출세하려는

가짜들은

진짜들

이상으로

매우

필사적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건 문제의 본질을 과소평가하는 거다.

문제의 핵심은 목회자로서의 인성과 자질이 가장 중요한 것인데 한국교회에서는 그것을 제대로 검증하고 걸러내는 정화 장치가 고장난지 아주 오래다. 목사 청빙시 그저 신학교 학력과 목회 약력과 몇 개의 추천장과 직접 설교를 몇 번 들어보는 정도가 대부분이다. 사실 그런 정도의 검증은 현실적으로 완벽할 수 없고 또한 한계가 있다는 것을 누구나 잘 안다.


280

목사 임기제가 필수

그래서 가장 필요한 것은 목회 사역 중에 지속적으로 목사를 관리해 주는 강력한 제도다. 특정인의 목회가 정상적인 사역에서 벗어나면 이를 즉시 교정하거나 또는 교체할 수 있어야 마땅하다.

이런 면에서 보자면, 우선 '목사 임기제'가 반드시 필요하다. 일단 영구직으로 청빙된 담임목사를 해임하기란 아주 어렵다. 오히려 교인들의 분열만 조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목사 임기제(5-7 년, 연임은 1-2 회로 제한)를 시행할 경우 부적격한 목사를 별 잡음이 없이 자연스럽게 퇴출할 수 있다. 그리고 고질적인 교회 세습 문제도 저절로 해결된다.

특히 중대형 교회의 경우 계급적 부목사 제도를 폐지하고 복수의 설교 사역자를 세우는 '공동목회제'로 가는 게 바람직하다. 목사면 다 동등한 목사지 무슨 정목사 부목사가 따로 있나. 당회의 관활 아래 모두 실무적인 '시무 목사'로 동역하면 된다. 돈 삼키는 하마로 변신한 담임목사직을 폐지하면, 교권 독재와 목회 부패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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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 예방할 수 있으며 예산도 절감하고 교인들은 더 다양한 설교를 들을 수 있다.

아울러 가톨릭처럼 목회자가 한 교회에서 너무 오래 사역하지 않고 '순환 사역'을 하도록 제도적으로 적극 유도하는 게 바람직하다. 물론 현실적인 어려움이 가벼운 것은 아니지만, 사제나 군인이나 일부 직장인들도 하는 순환 사역을 목사라고 해서 굳이 못 할 이유는 없다. 공교회가 특정 목사나 그 자손들의 평생 직장이 될 이유는 결단코 없는 것이다.

추가로 목회자가 교회 재정에 전혀 간섭할 수 없도록 제어하는 장치가 있어야 한다. 목회 부패는 대부분 재정 비리를 동반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매년 세부적인 결산 내역과 교회 장부를 제직들에게 공개하는 게 필수적이다. 하여튼 재정 장부의 공개를 반대하거나 방해하는 목회자는 무조건 삯꾼으로 보면 틀림없다.

개신교 실패는 '목사 관리'의 실패

개신교 사역의 실패는 목사를 아무나 할 수 있다는 데에 있다. 웬만한 동네 학원의 강사가 되기보다도 목사되기가 더 쉽다. 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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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장이 없어도 가능하다. 문턱이 낮은 신학교를 하나 골라서 교인들을 상대하는 목회 기술만 몇 년 배우면 개나 소나 다 할 수 있다. 전직 고문 경찰, 아내를 상습적으로 구타한 연예인, 성추행범, 그리고 백수 건달도 목사를 한다. 따라서 목회 비리가 그치지 않는다.

어떤 경우 소위 개신교 목사란 명함의 위인들이 무당질, 도적질, 사기질, 그리고 난봉질까지 도대체 시정잡배보다도 더 저질이다. 교회 직분자의 향기와 고상함이란 약에 쓸려고 찾아도 없다. 계속 이런 식으로 간다면 과거 중세의 배도한 사제들에게 교권을 통째로 바친 것처럼 '개신교'란 간판을 아예 이 저질 목사들에게 내어 줄 상황이다. 한때는 교황이 동시에 3 명이나 있었던 막장 시대도 있었다. 적그리스도는 언제나 인간 역사의 승자들 속에 숨어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지금 "개신교가 왜 개판이 되었나"고 다시 묻는 건 시간 낭비다. 사역자 관리에 실패한 공동체는 반드시 실패하게 되어있다. 저질 목회자가 저질 신도를 양산하는 건 극히 당연하다. 2000 년 교회사가 그 명백한 증거다. 중세 교회는 성직자 관리에 실패해서 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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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일차적인 책임은 개교회에 있다. 당회와 제직회가 중요하다. 교인들이 자각해서 지역 교회를 정의롭고 지혜롭게 운영해야 한다. 오직 소명을 받은 사람만이 목회를 하도록 해야 한다. 신실한 목사들이 결코 적지 않지만 그럼에도 목회자 그룹 스스로는 이미 자정 능력을 상실했다는 게 정설이다. '신자들의 각성'만이 개신교 역사상 가장 부패했다는 한국교회의 마지막 희망이 된 절박한 이유다.

그러니 이제라도 목사를 위해 교회가 있는 건지 교회를 위해 목사가 있는 건지 생각 좀 하고 살자는 거다. 요즘 어떤 교회들을 보노라면 정말 목사가 '종의 직분'이 맞기나 한 건지 그마저 의문이 간다. 종의

모습이

없다. 그저

교인들

100 명만

모아놓으면

그때부터는 종이 아니라 상전이다. 세상 어디를 살펴보아도 저렇게 느끼하고 질펀하게 사는 종놈들이 없다.

진짜 종다운 종, 그런 귀한 종들이 하도 그리워서 하는 말이다.

"말썽을 일으켜 떠드는 사람들이 가르치는 일이나 다스리는 일을 경솔하게 맡지 못하게 하려고 소명을 받지 않은 사람은 교회의


284

공적

직분을

<기독교강요>

맡지

못하도록

특별히

주의했다."

-

칼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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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속의 꼭두각시 '국정 농단'과 '목회 농단'

우린 지금 국정의 수반인 대통령에 대해 '꼭두각시'라는 수치스런 빈정거림을 듣고 있다. 대통령을 보좌하던 비서관들이 줄줄이 경질되고 많은 시민들은 거리로 나서 밤 이슬을 맞으며 대통령 하야를 외친다. 여기에 중고등학생까지 분노하며 동참하고 있다. 심지어 일찌감치 어린 손자들을 양손에 잡고 나온 할머니도 있다. 다시는 그 아이들에게 지금같이 부끄러운 세상을 물려주어선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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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신은 앞 다투어 이 낯 뜨거운 막장드라마를 신나게 퍼 나르고 있고 이웃 나라 사람들은 심심풀이 땅콩처럼 우리의 치부를 안주 삼아 즐기니 나라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다.

그럼에도 이런 난국을 강 건너 불보듯 아주 태평한 족속들이 있다. 아니 하던 목회나 똑바로 할 일이지 갑자기 나서서 개헌 논의를 하자고 한다. 국민들은 열 받아 탄핵을 외치고 있는데 이들은 엉뚱한 노래를 한다. 논의 자체가 나쁘다는 게 아니라 박자가 영 틀렸다는 거다. 더구나 나라의 백성이 물대포를 맞아 죽어갈 땐 얌전히 입 다물고 구경하다가 돌연 "대통령에게 돌 던지지 말라"고 열 내는 목사도 있다.

아무튼 국정 운영의 핵심이 되어야 할 사람들이 강남 아줌마의 애완견이 되어 꼬리를 말고 설설 기니 나라꼴이 제대로 될 리가 없다. 국가 기밀급의 고급 정보를 밤마다 가져다 바치고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해서 불법과 편법을 자행했다. "선무당이 나라를 잡는다"는 탄식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게다가 이들의 행태는 어쩌면 그 애비 세대의 악습에서 조금도 발전이 없이 그리 똑같은지 정말 감탄할 정도다. 그 유전자가 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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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하다. 비리 의혹이 발생하면 무조건 아니라고 딱 잡아뗀다. 내일 아침 당장 들통날 거짓말도 일단은 하늘이 무너져도 오늘은 아닌 것처럼 우긴다. 단 한 인간도 솔직하게 인정하는 걸 못 봤다. 많은 경우 국회에 나온 장관들의 답변도 거짓말 또는 속임수 투성이다.

만날

지겹게

하는

소리가

검토중,

조사중,

또는

수사중이란다. 그러니 매사가 오리무중이다. 국민을 아예 속도 없는 빈 밥통으로 안다.

그러다 나중에 거짓과 비리가 발각되면 그 드러난 부분만 일부 축소해서 변명하며 겨우 인정한다. 그리고는 가장 불쌍한 얼굴로 국민의 선량한 인정과 감성에 호소한다. 이게 너무 영악해선지 또는 미련해서인지 범인으로서는 도저히 감이 안

온다. 설사

바보라도 한두 번은 속아주겠지만 건마다 저 수순이니 누가 또 계속 속겠는가.

일부

개신교

지도자란

사람들은

어떤가.

과거

자신들의

기득권인 사학재단에 철퇴가 내려질 때는 머리 깎고 촛불 들고 별 난리를 다 치던 자들이 지금은 기껏 한다는 소리가 촛불 내리고 오로지 "자신을 살피며 나라를 위해 기도하자"는 말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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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비 교주 최태민이 권력을 배경으로 나라를 호령할 때는 갖은 아양을 떨며 설치던 목사들이 막상 그의 딸 비행이 드러나고 국정이 개판 되니 이제는 기도나 하자고 한다. 아직도 기도가 부족해서인가. "무엇이든지

기도하면

이루어진다"고

그토록

확신하며 설교하고 새벽기도 철야기도 쉬지 않고 기도했는데 왜 나라는 더 개차반이 되었나.

행동하지 않는 신앙은 허구며 침묵하는 양심은 기만이다. 어떤 목사들은 말만 한다. 교인들은 침묵하게 하고 자기만 말한다. 게다가 그 말 대부분은 기만이고 어쩌다 나오는 바른 말조차도 대체로 위선이다.

그들은 설교로 사기치고, 기도로 사기치고, 그리고 삶으로 사기친다. 특히 소위 기독교 연합 단체라는 곳에 가보면 이런 무리가 아주 널렸다. 신실한 목회자를 덤으로 욕되게 하는 자들도 바로 저런 자들이다.

민초들은 지금 '국정 농단'에 분개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그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목회 농단'이다. 이 땅 방방곡곡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해 악이 행해지고 있다. 하나님 나라를 팔아 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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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두고 예수의 이름을 팔아 배를 채우는 사특한 자들이 많다. 그 결과 교회가 커질수록 헌금 횡령액이 커지고 교회가 늘어날수록 무속적 맹신이 확산하고 있다. 하지만 교회 수와 종교 귀족이 늘어난다고 그걸 부흥으로 착각하면 큰 오해다. 그건 사실 복음이 확산되는 게 아니라 죄악이 관영하는 거다.

세상이 부패하고 교회가 썩어가도 분노하지 않는

교회, 이게

교권주의에 잠식된 한국 개신교의 자화상이다. 어찌된 교회가 건국 이래 단 한 번도 부당한 권력에 대항해서 제대로 정의와 약자의 편에 선 적이 드물다.

일제

강점기에는

'친일',

미군정

시대에는

'친미',

군사

정권

시대에는 '친독재', 권위주의 시대에는 '친정권', 그리고 민주화 시대에는 '친재벌'이 이들의 성스러운 교리였다. 한마디로 말해 태생적으로 변신과 변절의 천재다.

그래서 국민을 개 돼지로 보는 정치인과 교인을 현금인출기로 보는 종교인은 서로 완벽한 닮은꼴이다. 한국 개신교는 정치판을 흉볼 자격이 별로 없다. 종교판이 훨씬 더 개판이다.


290

국민이 각성하면 나라가 살고, 교인이 각성하면 교회가 산다. 그러니 밥만 먹지 말고 생각을 좀 하며 살아야 옳다. 사실 정치판 꼭두각시보다 세상에 더 해악한 존재는 종교판 꼭두각시다. 이게 무슨 조화인지 사회에서 멀쩡하던 인간도 교회만 가면 이상해진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맹종한다.

오늘날 교회 속에 꼭두각시가 너무 많다. 맘몬의 종이 된 목사, 목사의 종이 된 장로, 그리고 기복의 종이 된 집사가 차고 넘친다. 본래

꼭두각시는

영혼이

없다.

그래서

박수치라면

박수치고,

아멘하라면 아멘하고, 돈 바치라면 돈 바치고, 그리고 몸 바치라면 몸 바친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잘 바친다. 이제 어떤 교회는 맹신과 미신과 광신과 등신을 넘어 아예 실신 상태다.

최순실 모녀가 교회에 다녔다는 말을 들었다. 수시로 감사헌금을 했다고 한다. 혹자는 그녀 역시 기복과 번영을 구하며 이 교회 저 교회를 오가던 꼭두각시였다고 말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어찌보면 세상의 진실에 눈을 감고 교회의 불의에 침묵하던 우리야말로 국정 농단과

목회

농단을

꼭두각시였는지도 모른다.

적극

보좌하던

하나의

진짜


291

이건

우연히

지나가는

일회성

사건이

결코

아니다.

선무당

최순실은 앞으로 언제든 우리 곁에 다시 올 수 있고 심지어 우리 속에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누가 너희를 종으로 삼거나 잡아먹거나 빼앗거나 스스로 높이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고후 11:20)."


292

'목사 연봉' 얼마가 정당할까 목회자 '연봉 자율 신청제'를 제안한다

한국 가톨릭 대부분의 사제와 수녀 연봉은 천만 원도 채 안된다. 사역지가 큰 성당이든 작은 성당이든 차별이 없다. 주임신부라 해도 천오백만 원 정도다. 심지어 주교나 추기경조차 그 흔한 동네의 아담한 교회 담임목사보다 적게 받는다. 시작부터 그 사역에 임하는 기초적 토양이 개신교와 많이 다르다.


293

그들이 독신임을 감안한다고 해도 이런 심한 차이는 자조감마저 들게 한다. 신부를 해서 부자가 된 사제는 별로 없지만, 목사로 부자가 된 사람은 제법 널렸기 때문이다. 이건 분명히 제도에 책임이 있다.

고액 연봉은 헌금 남용

몇 해 전 가까운 지인이 한 세계적인 구호 단체에 지원서를 낸 적이 있다. 그런데 그 신청 서류에는 매우 특이한 조항이 하나 있었다. "당신이 원하는 연봉액을 제시하라"는 것이다. 연봉을 미리 정해 놓고 적임자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지원자가 필요한 적정 수준의 연봉을 먼저 말하라고 한다.

추가 설명을 들어보니 이는 매우 합리적인 방법이라고 느꼈다. 후원자들의 성금을 최대한 성실하게 구호지에 전달하려면 관리와 행정에 사용하는 기본 경비를 최적화해서 사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원자들 역시 그 단체의 기본 정신을 잘 이해하고 자신이 꼭 필요로 하는 만큼의 연봉만 스스로 산정하여 신청하는 것이다.


294

이건

결코

'열정페이'를

유도하려는

아니다.

구호

단체의

입장에서는 지원자의 자질과 경력 등 적합성을 먼저 심사하여 복수의 후보자를 선정하고 그 중에서 합리적인 연봉을 제시하는 사람을 선정하면 된다. 과도한 연봉을 요구하는 지원자는 당연히 탈락된다. 물론 저액의 연봉을 제시한 사람이 무조건 선택되는 건 아니다.

현재 대부분의 교회들은 목회자 청빙시 교회의 형편에 따라 미리 연봉을 정해 놓고 지원자를 심사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어떤 지원자에게는 그 연봉이 다소 부족할 수 있고, 반대로 다른 지원자에게는 필요 이상으로 많을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의 연봉이 너무 많으니 그걸 삭감해 달라고 요구하는 목회자는 거의 보기 힘들다. 특히 대형 교회의 경우 대다수 담임목사들은 그저 교회에서 주는 대로 고액의 연봉을 넙죽넙죽 잘 받아가고 있다. 부양 가족이 달랑 한두 명밖에 없어도 교회 규정에 따라 무려 1-2 억이나 받는 목회자들이 있고 심지어 그 이상 받아가는 목사도 있다. 이는 분명히 헌금 남용이다.


295

현재 전체 근로자의 과반수 이상이 연봉 삼천만 원 이하다. 따라서 대략 육천만 원 정도의 연봉이면 충분할 것 같은 어떤 목회자들이 1 억 이상 받는 것을 보면 그게 그리 아름답게 보이지 않는다. 이 점이 대형 교회인 '거룩한빛광성교회'의 정성진 목사가 월 450 만 원의 생활비로 사역하는 것에 우리가 큰 격려와 응원을 보내는 이유다.

'연봉 분산'은 반기독교적 수법

그동안 목사 연봉에 대한 많은 논의가 있었다. 목사 역시 교사의 직분이니 일반 교사 수준에서 조정하면 좋겠다는 의견이 있다. 또는 교인의 '평균이나 조금 웃도는 수준'을 말하기도 한다. 반대로 일부에서는 목회자를 무슨 제사장이나 교주로 착각해서 최고의 예우를 하며 기업의 사장처럼 많이 주자고 한다.

이런 면에서 보자면 '연봉 자율 신청제'는 매우 바람직한 제도라고 생각한다. 교회가 특정 사역자 개인의 경제적 사정을 정확히 알기란 그리 쉽지 않다. 너무 적게 주어도 부당하고, 너무 많이


296

주어도 잘못이다. 공교회는 신도들의 헌금을 정의롭고 투명하게 집행해야 마땅하다.

대부분의 작은 교회들은 부족한 연봉을 조금이라도 더 올려주고 싶어도 재정 형편때문에 제대로 못 올려준다. '한국목회자협의회'의 2012 년 통계에 따르면 한국교회의 2/3 이상이 교인 수 50 명 미만으로 1 년 예산이 5 천만 원 이하의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럼에도 상대적으로 재정이 풍부한 중대형 교회들이 사활적으로 돕지 않기 때문에 이를 해결할 특별한 묘책이 없다.

반면에 한국 전체 교인의 무려 80%가 출석하고 있는 중대형 교회들은 목회 지원비, 사택 관리비, 차량 유지비, 의료비, 도서비, 자녀 유학비, 그리고 교육비 등의 명목으로 연봉을 분산 처리하여 실제로는 너무 많이 주어서 헌금을 낭비하고 있다는 비판을 면하기 힘들다. 주변의 미자립교회는 제대로 못 돕지만 그래도 자기 먹을 건 아주 성실하게 잘 챙기고 있다. 모든 지출을 통합하여 지급하는 '총액 연봉제'가 반드시 필요한 이유다.

경기도

P

교회가

2014

의료비로

집행한

금액은

34,444,490 원이었다. 이 금액은 전 교역자와 교회 직원을 모두 다


297

포함한 지출액이다. 이 중 심방권사를 포함 28 명의 직원이 사용한 의료비는 고작 2 건으로 326,620 원(1%)에 불과했다. 반면에 담임 목사 부부가 사용한 의료비는 34,117,830 원(99%)을 사용했다. 그 내역은 더욱 가관이다. 진료비, 황토방비, 황토방 식대, 방문자 접대, 마데카솔같은 사소한 의약품비, 간병인 비용, 의료진 및 간호사 사례비 등을 모두 교회 돈으로 처리했다.

게다가 같은 해 목사 아들 결혼식 비용으로 교회는 식사비 3,360 만 원, 꽃 장식비 410 만 원, 본당 바닥 공사비에 110 만 원을 지출했고 청첩장 발송비와 답례품 배달도 모두 다 교회 재정으로 집행했다. 그 외에도 여행비, 차량비, 도서비, 출판비, 그리고 관리비 등을 다 논하자면 입이 아플 정도다. 억대의 연봉을 받는 목사가 추가로 교회 돈을 저렇게 물쓰듯 한다. 담임목사가 황제다.

연봉 양극화와 목회 윤리

요즘 유독 중대형 교회 목회자들 자녀의 유학이 많은 이유도 연봉 분산 처리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출국에서부터 귀국까지 일체의 경비를 모두 교회 돈으로 충당한다. 전술한 P 교회 목사 아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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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에서 인천까지 유학길을 일등석으로 왕래했다. 이러니 자녀 유학 안 보낸 목사가 기특할 정도다.

일부 교인들은 반찬값과 아이들 학원비까지 줄이며 힘들게 헌금을 바치지만,

어떤

목사의

자녀들은

명품으로

휘감으며

기본이다. 이런 교회 공동체의 경제 정의는 동네

유학은

반상회만도

못하다.

결국 바람직한 대안 중에 하나는 목사 청빙시 지원자들 자신이 필요한 연봉 총액을 스스로 판단하여 신청하는 방법이다. 그러면 누구라도 나중에 연봉이 너무 적거나 또는 지나치게 많다고 반발할 이유가 없다. 무리한 연봉을 요구하는 지원자는 심사 과정에서 탈락시키면

된다.

그러면

적어도

지금보다는

연봉으로

인한

양극화와 윤리적 논란을 크게 줄일 수 있다고 확신한다.

한국의 목사직만큼 임금격차가 큰 전문직이 드물다. 동일한 직분의 사역자에게 연봉 6 백만 원과 연봉 6 억 원을 공존케 하는 교회는 분명히 성경적 상식을 벗어난 교회다. 무려 100 배 차이다. 이는 사실상 교회가 공공연히 '삯꾼 목사'를 양성하고 있는 셈이다.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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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정통이란 간판에 열심히 금칠을 해도 진짜 사이비는 바로 이런 사람들이다.

목사로서 매년 억대 이상의 교회 돈을 태연히 받는 사람들은 일단 삯꾼의 반열에 설 자질이 매우 뛰어난 위인들이다. 그리고 그렇게 돈 밝히는 목회자들을 사육하고 있는 집단은 결코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다. 그것은 '강도의 소굴(마 21:13)'이다.

오늘날 적그리스도는 화려한 정치판이나 소란한 시장판에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배도한 바리새인의 성전처럼 거룩함으로 위장한 정통 교회 안에서 승승장구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건 무슨 복잡한 신학이 아니다. 성경의 상식을 대적하는 가르침은 모두 거짓된 교리다.


300

교부

폴리갑(Polycarpus)은

"거짓된

교리로

교회에서

설교하는

무리가 적그리스도다"고 말했다.

"교회는

섬기는

프란치스코 교황

곳이지

돈을

벌기

위한

장소가

아니다"

-


301

교회는 '벙어리 개'가 아니다 교회는 정치에 관여하지 말라?

구약의

이스라엘은

신정국가였다.

교회가

국가였고,

국가가

교회였다. 선지자들은 언제나 세상을 향해 말했다. 왕에게 말했고, 제사장에게 말했고, 관헌들에게 말했고, 방백들에게 말했고, 그리고 백성에게 말했다. 따라서 오늘날 일부에서 "교회는 정치와 무관하니 침묵하라"는 가르침은 대단한 기만이다.


302

민주 국가에서 '정교 분리'란 정치 행위와 종교 행위의 보편적 분리 원칙을

의미하는

것이지

근본적으로

정치와

종교가

서로

무관하다는 뜻은 아니다.

선지자 요한은 왕을 비판했다

혹자는 예수가 당시 로마의 식민 정권에 저항하지 않고 정치에 직접

개입하지

주장한다.

않았으니

그러나

그것은

교회도

정치에

마치

예수께서

관여하면 할례를

된다고

받으셨으니

현대인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만큼이나 허술한 논리다.

우리는 성경을 그렇게 단순하게 해석하면 곤란하다. 도리어 예수는 헤롯왕의 비윤리적 사생활을 통렬하게 공격한 세례요한의 발언을 자제시키거나 금하신 적이 없다.

어떤

사람들은

복종하라(롬

13:1)"고

"각 하신

사람은 성경을

위에 인용하며

있는 무조건

권세들에게 공권력에

복종하라고 역설한다. 하지만 이 역시 문자적 해석의 함정에 빠지면 곤란하다. 이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일반적인 통치 질서에


303

복종하라는 뜻이다. 정상적인 권세를 존중하라는 의미다. 결코 비정상적인 부정이나 폭정에 대해서도 마냥 묵인하거나 동조하라는 뜻이 아니다.

실제로 성경의 선지자들은 무조건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하지 않았다. 필요하면 오히려 세상 권력을 강하게 규탄했다. 모세는 애굽왕 바로와 맞짱떴고, 나단은 다윗왕의 범죄를 꾸짖었고, 미가는 백성들을 약탈하는 지도자들의 잔혹성을 통렬히 책망했고, 그리고 예수는 제도권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유대 지도자들에게 화가 있다고 경고했다.

따라서 대통령의 비리를 무작정 감싸며 감히 비판하지 말라는 일부 귀족 목사들의 주장은 아주 지고한 무식의 소치일 뿐이다. 이들은 성경을 조각내어 그저 자기 입맛대로 해석하고 가르친다.

과거에도 교회는 그런 심각한 신학적 오류로 인해 큰 만행을 자주 저질렀다. 교회는 공권력을 이용해 이단을 학살했고, 흑인 노예를 매매해도 침묵했고, 유대인을 처형해도 침묵했고, 그리고 북미 토착민을 살해할 때도 마냥 침묵했다. 심지어 호주 교회의 일부 교인들은 주일 예배를 마치고 나가 토착 원주민들을 마치 짐승처럼


304

무참히 사냥했다. 이는 교회가 무지하면 언제든 악마로 변신할 수 있다는 걸 잘 보여준 뼈아픈 사례다.

교회는 중세 수도원이 아니다

교회는 세상과 격리된 지성소가 아니다. 교회는 언제나 세상과 소통해야 하며 세상을 향하여 바른 처신과 언행을 해야 한다. 예배당 속에 갇힌 교회는 그저 자기 수양을 위한 수도원이 될 뿐이다.

물론 교회가 세상에 대해 말할 때는 매우 신중해야 한다. 교회는 국회도 아니고, 법원도 아니고, 그리고 언론사도 아니다. 그래서 특정

정치

세력을

일방적으로

지지한다거나

배척하는

행위는

교회가 할 본분은 아니다. 그런 면에서 정권의 시녀가 되어 아부를 일삼는 일부 대형 교회 목회자들의 행태는 저질 중에 극저질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호국'이니 '구국'이니 포장하며 나서서 설치는 인간들 중에 제대로 된 목사는 아예 없다고 보면 된다.


305

이 세상에 정치와 무관한 인생은 단 한 명도 없다. 사실 인간사 자체가

정치다.

정치를

벗어난

인간사란

없다.

이건

신자들

개인사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신자 개인과 교회 공동체를 분리하는 건 논리적으로 불합리하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다. 교인 자신이 곧 교회다.

그러니

"교회가

정치와

격리되어야

한다"는

말은

부분적으로만 맞는 말이다. 도리어 교회는 필요시 세상에 할 말을 해야 옳다. 그게 세상에 선지자들을 계속 보내신 성경 역사의 진실이다.

우리는 지상의 유형 교회를 마치 아무런 흠이 없는 천사같은 존재로 너무 신성시할 필요는 없다. 죄인들의 공동체가 교회다. 그래서 때로는 목사가 틀릴 수 있고, 장로가 틀릴 수 있고, 총회장이 틀릴 수 있고, 그리고 교단의 판단도 틀릴 수 있다.

그럼에도 "교회가 틀릴 수 있으니 말하지 말라"는 건 정말 웃기는 논리다. 역으로 말하자면 아마 오늘날 교회처럼 틀리는 말을 많이 남발하는 곳도 별로 없을 것이다. 수백 개의 교단에 소속된 수많은 목사들이 주마다 강단에서 온갖 헛소리를 연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 모두가 항상 맞는 말만 하는 게 아니다. 게다가 완벽하게


306

무오한 인간이나 집단이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만약 그런 우스운 논리가 옳다면 세상 사람들은 모두 입 다물고 살아야 할 것이다.

교회는 광야에 서야

비록 온전히 무오할 수는 없겠으나 그래도 교회는 하나님의 공의를 세상에 분명히 말해야 한다. 성경에서 오직 구속사만 읽고 보는 것은 색맹과 같다. 교회는 사회 정의에 큰 책임이 있다. 성경은 언제나 고아와 과부를 돌보라고 했다. 가난한 이웃을 외면하거나, 약한

자의

억눌림을

방관하거나,

고통받는

자의

억울함을

방치하거나, 권력자의 불의에 침묵하는 건 하나님의 계명을 크게 오해하는 거다.

교회가 굳이 정당을 만들어 권력이나 이권을 추구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만일 종교나 종파마다 모두 정당을 만들어 직접 정치 행위에 나선다면 얼마나 꼴불견이겠는가. 아울러 매사에 교회가 정치 개입을 할 이유도 없다. 하지만 교회가 필요시 매우 중요한 국민적 정치 사안에 대해 하나님의 공의에 근거하여 "예" 또는 "아니오"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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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명하는 건 절대로 잘못된 게 아니다. 아니 오히려 그건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기 위해 오셨다. 성경은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사 58:6)"고 했다. 하나님의 복음은 단지 개인의 구원에서 끝나는 게 아니다.

백성의 회개를 촉구했던 선지자 요한은 동시에 권력자의 불의에 저항하며 공의를 촉구하다 순교했다. 교회는 개인 구원과 동시에 사회 정의의 구현에도 책임을 져야 한다.

교회를 짖지 못하는 '벙어리 개'로 만들지 말라. 그건 개신교가 개독교로 망하는 길이다. 진정한 교회라면 광야에서 외치던 선지자 요한의 심정으로 세상에 서야 한다.

"이스라엘의 파수꾼들은 맹인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들이라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들이요 누워 있는 자들이요 잠자기를


308

좋아하는 자들이니 이 개들은 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요 그들은 몰지각한 목자들이라(사 56:10-11)."


309

'명성교회' 세습 본격화하나? 김삼환 부자 세습은 없어야 한다

최근

나는

통합

교단의

목회자로부터

"이제

명성교회는

본격적인 세습 작업에 들어갔다"는 다소 황당한 소문을 들었다. 물론

그걸

소문

그대로

믿고

싶지는

않다.

실제로

세습을

실행하려면 교단법까지 어겨야 가능하다.

그런데 반대로 다시 차분히 생각해보니 굳이 못 믿을 필연적 이유도

없었다.

대형교회의

배도적

헛발질이

결코

한두번은


310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한국의 대표적인 대형교회 중 하나인 명성교회는 계속 세습 의혹에 시달려 왔으나 그런 의혹이 전혀 근거가 없는 건 아니다.

과거 김삼환 목사는 입버릇처럼 "목회세습은 없고, 새 예배당 증축은 않겠다"고 공언해 왔다. 그리고 아들 목사 역시 "세습 안 한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그들은 나중에 이 약속을 노골적으로 파기했다. 김하나 목사는 명성교회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새 교회를 창립하고 분가하여 사실상 '변칙 세습'이란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그리고 명성교회는 처음 호언과는 달리 새 예배당도 화려하게 증축했다.

신자들이 아주 싫어하는 작자들 중에 하나가 '말 바꾸는 목사'인데 이미 그들 부자는 나란히 그 줄에 섰다. 목회자의 기본 도리인 신뢰에 매우 치명적인 금을 냈다는 소리다.

그러니 아버지 목사가 "후임 후보서 내 아들 빼달라"고 아무리 연막을 쳐도 그걸 신뢰하는 사람이 별로 많지는 않은 듯 하다. 옛말에 ""남아일언은 중천금"이라고 했으나 요즘 일부 목회자들의


311

변태적

신의와

안면몰수

목회는

기름장어

정치인들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다.

명성교회는 "후임 선정은 순리대로" 한다는 말을 자주 했으니 나는 사실 그 말에 깊은 공감이 가지 않는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지난해 김삼환 목사의 은퇴 과정이 아주 요상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는 후임 목사의 선정 없이 매우 어설프게 은퇴했다. 극히 이례적인 방법이다.

동네 구멍가게도 아닌 거대한 대형교회가 뭐가 부족해서 그런 졸속한 과정으로 은퇴를 하는지 도통 이해가 안 간다. 시간이 없었나, 돈이 없었나, 그도 아니면 조직이 없었나. 게다가 은퇴 목사가 설교도 계속하고 사례비도 동일하다는 말이 들려온다. 그게 사실이라면 참으로 웃기다 못 해 소름이 끼치는 엽기적 은퇴다.

일부에서는 그 과정을 김하나 목사를 데려오기 위한 또 하나의 조잡한 전술로 예측하기도 했다. 후임자 선정을 아버지 목사의 은퇴

시점

조금이라도

후로

잡아서

희석시키려는

북한식 의도라고

부자

세습에

간파했다.

대한

명분상

책임을 "인민이


312

원해서" 한 세습이나 "교인이 원해서" 한 세습이나 그 종북적 수법은 지극히 동일한 것이다.

사실 적어도 세습 문제에 있어선 성도들은 이미 질릴 만큼 질린 상태다. 이제는 어떤 위대한 놈이 세습을 해도 그다지 놀라지 않는다. 아마 저들은 예수께서 다시 오셔서 간곡히 부탁해도 결코 듣지 않을 거라고 본다. 고양이가 상한 생선을 포기할 리가 없다.

그러나 나는 그 세습 추진 소문이 사실이 아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리고 이 글은 그냥 삼류 자작소설로 끝나면 좋겠다. 그럼에도 만에 하나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한국교회는 차라리 이제부터 조용히 자신의 장례 절차를 준비하는 게 좋다.

그 파장은 결코 명성교회 한 교회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물꼬를 크게 터서 나머지 다른 교회들도 너도 나도 세습의 벽을 허물어 결국 개신교 전체가 나락의 길로 내달릴 게 뻔하다. 만일 대형교회의 2 대 세습을 지금 못 막으면 나머지 교회의 3 대 세습은 또

누가

막겠는가.

순식간에

들어선

맘몬적

'목사왕조'들이

한국교회를 주도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결국 개신교는 이 세대가 가기 전에 지리멸렬하다 개잡교로 전락할 것이다.


313

오래 전 선각자 이계선 목사가 "대형교회가 죽어야 한국교회가 산다!"고

소리쳤던

주요한

이유

중에

하나도

바로

교회

세습이었다. 남들이 모두 대형 교회 꽁무니 따라다니며 신나게 놀아날 때 그는 외롭게 외쳤다.

아무튼 이젠 교인들도 세습 목사 탄핵을 위해 촛불을 들어야 하나.

"사제직은

마치

다름없다고

개들에게 수

있다.

던져서 그들이

사냥하게 '목자'라고

하는

사냥감과

부르는

사람들은

적에게서 빼앗은 전리품에 덤벼들듯이 교회의 재산에 덤벼들었으며, 또는 소송을 해서 교회를 얻었고, 또한 돈으로 샀다. 어떤 자들은 추악한 아첨으로 얻기도 하고, 또 어떤 자들은 말도 할 줄 모르는 어린아이 때에 이미 아저씨나 친척에게서 유산으로 받기도 했다. 사생아가 아버지에게서 유산으로 받은 교회도 있다. 이런 자들을 그들은 '목자'라고 부르니 차마 이것을 들을 수 있는가!" - 장 칼뱅(Jean Calvin), <기독교강요>(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


314

설교에 속지 말라 '설교 평가 제도'가 필요하다

설교는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귀한 사역이다. 하지만 강단에서 목사가 설교한다고 해서 그 말이 모두 하나님 말씀이 되는 건 아니다. 설교자 자신이 하고 싶은 말 제 멋대로 다 하고 그게 '하나님 말씀'이라고 주장하면 곤란하다. 설교에는 반드시 원칙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315

설교 비평이 필요하다

나도 한때는 목사님이 설교하면 그걸 다 하나님 말씀으로 여긴 적이 있었다. 그러나 아무런 조건 없이 "설교가 하나님 말씀이다"는 주장은 반드시 검증이 필요한 지극히 위험한 논리다.

설교는 목사 개인의 생각이나 사상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사역이다. 그러니 불필요한 말을 함부로 추가하면 그 때부터는 사설과 잡설이 된다. 그래서 바른 설교는 약이 되나 잘못된 설교는 독이다.

사실 순전한 하나님 말씀을 듣기 원한다면 누구나 그냥 성경을 펴서 읽으면 된다. 성경보다 더 위대한 설교는 없다. 성경은 개인이 직접 읽어도 성령께서 함께 동행하시며 역사하신다. 그럼에도 교회는 전통적으로 매주 모일 때마다 설교를 듣는 제도를 간직해 왔다. 그 이유는 과거엔 개인마다 성경을 소장하기 어려웠고 또한 바른 설교는 회중에게 매우 유익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하면 오히려 부족한 것만도 못 하다"는 말이 있다. 차라리

소식해서

죽는

법은

별로

없는데

반대로

과식하면


316

성인병으로

죽는다.

요즘은

설교

홍수

시대다.

설교가

워낙

넘치다보니 이게 '하나님 말씀'인지 '목사님 말씀'인지 영 구분이 안 될 경우가 많다. 더 이상 설교가 신성불가침의 성역이 될 수 없고 객관적인 설교 비평이 꼭 필요한 이유다. 달리 말하자면 어설픈 설교자나 사이비 설교자가 매우 많아졌다는 이야기다.

자신이 마치 무슨 예언자라도 되는 양 한때는 대통령을 군주처럼 찬양하다가 근자에 상황이 크게 바뀌니 갑자기 돌변하여 "진작에 물러나야 했다!"는 어느 유명 목사의 설교 역시 잘못된 설교의 대표적인 예다. 만일 그걸 아직도 하나님 말씀으로 받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분명히 맹신도 아니면 병신도다.

오염된 설교

어찌 보면 오늘날 교회에서 헛소리와 잡소리를 가장 많이 하는 사람이 목사다. 종교개혁을 시작한지 벌써 500 년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개신교는 오로지 목사만 말하는 변태적 교회가 되었다. 즉 '회당 정신'이 사라졌다는 거다. 그 결과 주야장천 수직적 예배는 열심인데 그만 수평적 소통이 부실해졌다. 본래 유대 회당에서는


317

누구나 성경에 대해 자유롭게 말하고 토론했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

개신교에 맹신이 급증하는 가장 큰 이유도 설교의 변질과 남용에 있다. 목회자도 먹고 살아야 하니 어떤 교회는 성장을 우선적으로 챙기게 된다. 그러다 보니 결국 교회의 외적 성장 장애에 특효 영약인 '기복 신앙'과 '은사 신앙'을 부추기게 된다. 설교가 탈선하게 되는 과정이다.

아울러 예배 참석을 신도 최고의 의무와 사역으로 강조하다 보니 어느덧 주일이 안식일을 대체하고 있다. 대부분 교회는 평일에 교인들이 세상에서 어떻게 사는지는 그다지 묻지 않는다. 누구나 예배 잘 참석하고 헌금 잘 바치면 기꺼이 직분을 준다. 국회 청문회에 나와서 거짓말과 모르쇠를 남발하는 기독교 정치인들을 보면 그 수준을 잘 알 수 있다.

게다가 개신교는

사도들은 사도들이

오로지

자원적

폐지했던

연보만을

의무적

가르쳤건만

십일조까지

그리고 많이 바치면 복을 받는다고 열을 낸다.

한국

부활시켰다.


318

하지만 설교자가 진정 하나님 말씀을 대언하려면 성경에 있는 가르침만 전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건 오히려 교인들의 삶에 치명적인 마약이 될 수 있다. 99%의 영양식에 1%의 독약을 넣어 함께 먹으면 어떻게 될까? 그 결국은 사망이다. 그래서 음식을 선별해서 먹어야 하듯 설교도 골라서 들어야 한다. 그게 아니면 차라리

'알파고'에게

성경을

가르쳐

설교시키는

훨씬

정확하고 좋다. 적어도 무속적 헛소리는 안 할 거다.

특히 극장식 웅변 설교에 감동을 받았다고 해서 그게 꼭 성령이 역사하신 증거가 되는 건 아니다. 히틀러의 웅변도 때론 감동을 주었다.

목사는 삶으로 설교해야

설교에 속지 말아야 한다. 강단에서는 눈물로 호소하고 내려와서는 뒤로 교회 돈을 듬뿍 챙기는 설교자를 우린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자신의 신앙과 신학을 역행하는 설교자는 종교 사기꾼이다.


319

설교자는 삶으로 설교해야 옳다. 한국교회 목회자들 대부분은 설교를 잘 한다. 그런데 어떤 목회자의 삶은 영 딴 판이다. 이런 현상은 특히 중대형 교회로 갈수록 더 심각하다. 목사가 고액 연봉에

사치한

고급차를

타면서

가난한

이웃을

구제하자고

설교한다면 그게 설득력이 있나.

교회는 성경의 진리만 전하는 설교를 수용해야 옳다. 성경을 벗어난

설교는

무당굿이나

인간의

토크쇼로

잡술일

뿐이다.

근자에

많은

예배가

변질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따라서

개교회의 당회나 제직회는 '설교 평가'를 제도화하여 객관적이며 주기적인

점검을

수행할

의무가

있다고

본다.

만일

그걸

회피한다면 그건 직무유기다.

그리고 설교자는 성경을 믿으라고 말하기 전에 먼저 성경을 행함이 있어야 한다. 말로 하는 설교는 단지 귀로 듣지만 삶으로 하는 설교는 가슴으로 듣게 되기 때문이다.

최근 한 대형 교회 목사가 "헌금 내지 않는 사람은 교회에서 말도 하지 말라"고 했다 한다. 교인을 아주 우습게 안다. 설교가 목회 농단과 맹신도 관리를 위한 반기독교적 흉기가 되었다. 그러나


320

이런 건 설교도 아니고 하나님 말씀도 아니다. 그건 그냥 종교로 포장된 선무당의 '개수작'일 뿐이다.

거짓된 설교에 속지 말자.

"설교자들이 얻으려고 노력한 것은 한 가지 뿐이었다. 자기들의 죄를 알고 당황하며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에 가슴을 찔린 사람들이, 자기들이 노엽게 한 분 앞에 꿇어 엎드려 겸손한 태도를 가지며, 진정한 회개로 바른 길에 다시 들어서는 것이었다." -

칼뱅(Jean

Religionis).

Calvin),

<기독교강요>(Institutio

Christianae


321

예수는 돈 받고 설교하지 않았다 '설교 직업화'와 개신교의 변질

주의 제자들은 예수를 '랍비(rabbi)'라고 불렀다. 유대인들은 이 호칭을 율법 학자나 종교적 스승 등에 대해 존경하는 뜻으로 썼다. 유대 회당의 율법 교사인 랍비는 다른 직업을 갖는 게 통례였다. 그래서 랍비는 전통적으로 자비량 사역자다. 어떤 경우든 랍비라는 명분으로 돈을 받는 일은 없었다.


322

그들은 결혼을 하고 가족과 함께 생활을 한다. 랍비는 사제나 승려처럼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포기하고 수도원이나 사찰에서 일생을 성직에 바치지 않는다. 그 이유는 하나님 율법의 적용은 자연의 산 속에 있는 게 아니라 인간의 삶 속에 있기 때문이다.

자비량 정신을 역행한 종교 개혁

일반적으로 랍비는 15 년 이상을 공부해야 그 자격이 주어진다. 그러니 오늘날 목사보다 결코 더 적게 공부하는 건 아니다. 그들은 성경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전문가였지만 그럼에도 모두 각자의 생업을 가지고 사역했다.

랍비들은 육체 노동에 종사하는 것을 신성한 것으로 보고 심지어 긍지로

여기기까지

했다.

유명한

랍비

'힐렐(Hillel)'은

목재

절단사였고 그의 라이벌인 랍비 샴마이(Shammai)'는 목수였다. 그 외에도 명망이 높은 랍비들이 석재 절단업, 신발 만들기, 재봉사, 대장장이, 그릇 만들기, 건축 등 전문 기술을 지니고 숙련직에 종사했다.


323

명망 높은 랍비들은 목수 등 숙련직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노동이 없는 율법은 결국 실패한다"고 보았다. 2 세기의 유명한 랍비 '탈폰(Tarfon)'은 "하나님의 능력은 노동하는 사람에게 머문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랍비들은 하나님 말씀을 섬기는 사역에 대해 금전적 댓가를 받는 걸 부당하게 생각했다. 이는 사도바울이 "여러분이 아는 대로, 나는 나와 내 일행에게 필요한 것을 내 손으로 일해서 마련하였습니다(행 20:34)"고 말한 자비량 정신과 서로 부합한다.

나는 오늘날 루터와 칼뱅의 종교 개혁이 그 한계점에 도달했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다. 그리고 그 가장 큰 이유로는 초대 교회의 자비량 사역 정신이 크게 쇠퇴한 데에 있다고 본다. 생업으로 땀 흘려 수고하지 않고 오로지 먹고 자고 경전만 연구하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직업 목사가 되어 종교적 일과에만 몰입하다보니 교회가 그만 영적 비만에 걸린 것이다.

물론 나는 유급 사역이 모두 부당하다고 매도하는 건 아니다. 부분적으로 유급 사역도 필요하다. 특히 순회 사역의 경우 지역 성도의

지원이

요긴하다.

2

세기로

추정되는

초기

문서

디다케(Didache)를 보면 "순회 사도가 방문하면 주께 하듯 그를


324

맞아라. 그는 하루쯤 머물것이다. 만약 필요하면 다음날도 머물 수 있다. 하지만 만약 그가 3 일째 머문다면 그는 가짜 선지자다. 사도가 떠날 때는 다음 여정지에 도달할 때 까지 먹을 음식 이외에는 아무 것도 가지고 가게 하지 말라. 만약 그가 돈을 원하다면 그는 가짜 선지자다(디다케 11 장)."고 서술되어 있다.

그러나 '순회 목회'가 아닌 '상주 목회'까지 지금처럼 거의 다 일률적으로 유급 사역을 원칙으로 하는 건 아주 잘못된 관행이라고 생각한다. 현재의 유급 전임 목사 제도는 사실상 중세 사제 제도와 크게 다른 게 없다. 그 교권 독점과 남용은 오히려 중세보다 더 과한 면이 있다. 신학의 개혁은 어느 정도 이루어졌으나, 그 사역에 있어서는 더욱 지능적으로 세속화되었다.

'직업 설교 제도'가 변질의 뿌리

하나님 말씀을 전한다는 명분 아래 설교자가 반드시 전임 유급 사역자가

되어야

한다는

발상은

성경

어디에도

없다.

초대

교회에서는 랍비와 비슷한 사도, 선지자, 교사 등이 서로 권면하고 가르칠 수 있었다. 개신교 목사는 제사장도 아니고, 선지자도


325

아니고, 예언자도 아니고, 사도도 아니고, 그리고 사제도 아니다. 오히려 현재의 목사는 회당의 랍비와 가장 유사한 직분이다.

물론 유급 목회도 장점은 있다. 사역 전문화에 유리하다. 또한 집중적인 목회로 빠른 성과를 내게 한다. 그러나 반대로 그게 곧 치명적인 단점이 되기도 한다. 교인들 앞에 가시적 성과를 내려니 수시로 무리하게 되고 기복 신앙과 외적 성장을 강조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자연히 목회가 본질에서 벗어나기 일쑤다.

게다가 현실적으로 작은 교회는 사실상 유급 사역에 역부족이다. 한국교회의

80%를 차지하고

있는

교인수

50 명

이하의

교회들은 실제로 재정적 자립 자체가 매우 어렵다. 대부분의 작은 교회는

담임목사

생활비와

건물

운영비

지불하고

나면

거의

손가락만 빨아야 한다. 그러니 구제니 선교니 교육이니 무슨 사역을 제대로 할 수 있겠는가. 다소 심하게 표현하자면 그저 헌금 나오는 대로 먹고 버티기에 바쁜 '식물 교회'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이는 결코 작은 교회를 비하하려는 게 아니다. 교회 헌금 대부분을 목회자 인건비와 건물 관리비에 사용하는 교회는 정상적인 사역이 힘든 교회라는 걸 솔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326

더구나 일부 중대형 교회들의 행태는 더욱 가관이다. 그동안 그 많은 헌금을 도대체 어디에 다 썼는지 별로 흔적이 없다. 수려한 건물 짓고 고액 연봉 나누고 여기저기 흥청거린 거 빼면 자랑할 게 그다지 없다. 구제 예산은 고작 5%도 안 된다니 이건 교회가 아니라 무슨 맹신 집단같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

이런 결과를 교인들이 스스로 주도했다고 구차하게 변명하지 말기 바란다. 목사직을 성직화하고 특권화하고 직업화한 게 개신교 사역 실패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설교직이 직업화하면서부터 교회가 특정 직분자의 이권을 위한 종교 영업소로 변질되기 시작했다.

구약의 제사장은 그게 신분이었다. 그러나 나는 모든 성도가 제사장인 신약 교회의 각 직분은 원칙적으로 직업이나 신분이 결코 아니라고 확신한다.

목사는 삯을 받아야 마땅한가

많은 사람들은 성경을 읽으며 다소 혼란이 올 때가 있다. 어떤 구절은 "사역자는 당연히 돈을 받으라"는 느낌을 주고, 또 다른


327

구절은 "돈을 받지 말라"는 것으로 들린다. 두 경우 모두 다 사도바울이 한 말인데 그러면 그가 한 입으로 서로 상반되는 두 가지 말을 한 것일까.

우선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할 것이니라.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 하였느니라(딤전 5:17)"는 말씀을 오해해선 안 된다. 문맥상 이 구절은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게

마땅한 것처럼 가르치는 자(일꾼) 역시 존경(삯)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비유적으로 해석해야 옳다.

그리고 누가복음에 "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눅 10:7)"는 말씀도 자세히 보면 그건 오직 '순회 사역자'에게만 해당되는 명령임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우리가 먹고 마실 권리가 없겠느냐.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믿음의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고전 9:4-5)"는 말씀에서 그 '먹고 마실 권리' 역시 순회 사도의 권리를 말한 것이다.


328

하지만 설사 백보 양보하여 다른 모든 상주 사역자에게도 동일하게 먹고 마실 권리가 있는 것으로 해석하더라도 그 구절이 결코 "사역자는 그 권리를 사용해야 마땅하다"는 최종 지침은 절대로 아니다. 도리어 사도바울은 그 권리를 다 쓰지 않는 것이 상이라고 말하며 그 권리 행사를 거부했다.

그래서 사실 사도바울의 결론적 가르침은 "우리는 아무에게서도 양식을 거저 얻어먹은 일이 없고, 도리어 여러분 가운데서 어느 누구에게도 짐이 되지 않으려고, 수고하고 고생하면서 밤낮으로 일하였습니다(살후 3:8)."는 구절에 정확히 나타나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말씀 사역에 임하는 모든 설교자들이 지녀야 할 바른 지침이다.

이기영 교수(Owens Community College)는 목사의 자비량 사역과 관련하여 "유대인의 관습대로 제사장과 레위인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자기 양식을 자기가 벌어서 먹어야 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도 이러한 관습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제사장들과 제사를 위한 레위인이 건재했던 당시에 나에게 헌금을 해서 나를 먹여살려라고 주장한다면 그건 사이비 사기꾼이라고 여겨지는 상황이죠."라고 역설했다.


329

추가로 그가 "오해의 발단은 성경에 나오는 순회 사역자와 상주 사역자를 구분없이 동일시 하는 것과 순회 사역자의 먹고 마실 권리가

무소유의

삶을

살며

순회

복음

전도의

여정을

위한

최소한의 의식주의 제공임을 파악하지 못하고 그것을 현대 교회 목사의 월급 개념으로 오해하는 데 있습니다."고 한 지적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본다.

예수는 '랍비'였다

주로 가정에서 모였던 초기 교회가 자비량 사역 위주였다는 가장 중요한 근거는 신약 성경에 당시 구제를 위한 자원적 '연보' 외에 일체의 다른 헌금을 걷은 기록이나 가르침이 없기 때문이다. 덕분에

그들의

교회는

교인

10 명만 모여도 함께

구제하고

선교하고 봉사할 수 있었다. 건물이 없어도 되고 전임 사역자가 없어도 가능했다.

아울러 자비량 사역이 가는 곳에는 교회 부패가 자라나기 힘들다. 기복을 부추겨 돈 걷기 위한 무당 목회도 소멸된다. 게다가 교회


330

세습이 저절로 해결된다. 얼마든지 세습해도 좋다. 그 고생길을 자비 부담으로 간다면 누가 말리겠는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만이 가능한 길이다.

시대가 바뀌고 있다. 자비량 정신을 경시한 루터와 칼뱅의 제도적 실수를 다시 반복해선 안 된다. 나사렛의 가난한 목수 예수께서 회당에서 자유롭게 설교하신 것은 그가 백성이 존경하는 랍비로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돈을

받고

설교하지

않으셨다.

백성에게 그 어떤 헌금도 요구하신 적이 없다. 유대의 다른 랍비들도 마찬가지였다. 만일 예수와 제자들이 공생애 3 년 동안 헌금을

걷어서

생활했다면

당시

사회의

관습상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그걸 그대로 묵과했을 리가 없다.

이제 교회가 새로워지기를 원한다면 사도와 랍비의 자비량 정신을 따르는 공동체를 확장해야 한다. 이건 "교회의 설교자는 돈 받을 자격이나 권리가 없다"는 식의 무모한 주장을 하려는 게 아니다. 나는 오히려 "그 권리가 충분히 있더라도 사용하지 않는 게 사도의 바른 가르침이다"는 거다. 그리고 이런 인식의 전환이 바로 지난 500 년 종교개혁사의 반복적 실패를 종식시키는 첫 걸음이 될 것이다.


331

다행히 요즘처럼 신학 공부하기 좋은 시대가 없다. 정말 소명을 받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주간 과정이 아니어도 좋다. 야간 과정, 온라인 과정, 그리고 통신 과정 등 다양한 기회가 있다. 앞으로 새로운 교회는 다양한 생업에 종사하는 전문 직업인들이 과거 회당에서 설교했던 사도와 랍비의 정신을 이어서 스스로 신학을 공부하고 훌륭한 설교자로 자원 봉사하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

지금 "목사는 직업이다"는 논리를 펼치며 유급 사역을 당연시하는 주장이 많지만 나는 그 말에 별로 동의하지 않는다. 신구약 성경 역사

어디에도

'돈

받고

설교하는

직업'이란

결단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이것이로다(고전 9:18)."

내게

있는

권리를

쓰지

아니하는


332

평신도가 꿈꾸는 교회 은사대로 동역하는 자비량 공동체

일부 교인에게는 다소 충격적인 사실일 수 있겠지만, 레위인은 늘 제사 업무만 한 게 아니라 대부분의 일상을 주로 생업에 종사했다. 우리는 흔히 구약의 레위인들은 생업에 종사하지 않고 오로지 제사 업무만 관장한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성경을 보면 레위인에게는 모두 48 개의 성읍과 가축을 위한 초장이 주어졌다(민 35:1-8). 거기에는 그들이 받은 성읍의 크기까지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333

'레위 제사장'도 생업에 종사했다

그들은

24

반(역대상

23-24)으로

편성되어

제사

업무를

담당했는데 각 반은 매년 단지 약 2 주 동안만 제사를 수행했다. 그러니 나머지 대부분의 시간을 생업에 종사한 건 극히 당연한 일이다. 레위 제사장은 파트타임 사역자였다.

48 개

성읍의

인근에는

초장이

있었는데 이들은

거기서

노동해서 먹고 살았다. 그들은 다른 성읍과 마찬가지로 농사를 하고, 유목을 하고, 도기를 굽고, 그리고 옷을 만들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나중에 레위인 중 상당수는 교사, 의사, 사서, 악사, 가수, 판사, 그리고 행정가로 일하기도 했다(Ernest L Martin, The Tithing Dilemma, 1997).

아울러 유대 회당의 율법 교사였던 랍비(rabbi)도 각자 자기 전문 직업을 가지고 말씀 사역을 했다는 것은 이미 모두가 잘 아는 사실이다. 물론 사도들의 초기 교회도 자비량 사역을 했다.

따라서 특정 직분자를 특권화하여 유급 제사장으로 만든 중세 교회의 '사제 제도'는 근본적으로 성경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매우


334

멀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그리고 당연히 현재 개신교에 보편화된 '유급 전임 목사 제도' 역시 이런 지적에서 그다지 자유롭지 못하다고 본다.

그래서 최근 이기영 교수(Owens Community College)가 이에 대해 "유대교-기독교 역사상 가톨릭 사제와 개신교 목사처럼 이렇게 세속의 일을 안하고 오직 말씀만 파는 계층은 없었던 것이죠. 초대 교회는 그러지 않았는데요. 뭔가 이상하죠?"라고 언급한 게 충분히 이해가 간다.

개혁은 현실이다

그러나 나는 현행 목사직 자체를 부정하는 게 아니다. 목사는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소중한 직분이다. 교회는 시대적 상황에 따라 필요한 직분을 얼마든지 세울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유급 전임

목회가

무조건

부적절하다거나

열등하다고

주장하는

아니다. 그 필요의 특수성도 인정한다. 목회자들이 연봉을 받고 생계에서 벗어나 사역에 집중할 수 있는 구조 자체가 나쁜 것은 결코 아니다.


335

정작

심각한

부작용은

그런

전임

목회

구조가

일반화하고

고착화할수록 그걸 지능적으로 이용하여 더욱 교권화하는 사악한 무리들이 반드시 득세하는 게 문제다. 그리고 지나간 개신교 역사는 이 증상엔 어떤 특효약도 무기력했다는 걸 잘 보여준다. 그 어떤 처방도 통하지 않는다. 백약이 무효다. 중세적 교권주의에 쩔은 현재 한국 개신교의 모습이 그 증거다. 교회는 수 세기 동안 그런 반복적인 악순환에 지속적으로 고통받았다.

비록 나는 새로운 교회를 위한 하나의 대안으로 '자비량 공동 목회'를 확장해야 옳다고 확신하고 있지만, 일단 현재의 유급 목회 현실도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관습화하고 화석화한 전임 목회 구조는 하루 아침에 간단히 해소할 수 있는 문제가 결코 아니다.

특히 작은 교회에서 사역하는 목회자들의 희생적 수고는 그 어떤 이유로든 함부로 폄훼해선 안 된다. 적은 연봉으로 검소하고 청빈하게 사는 목회자가 적지 않다는 건 우리 모두가 잘 알고있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자비량

사역을

현재의

목회자들에게

모두


336

동일하게 적용해선 곤란하다. 단지 그것은 앞으로 나아갈 방향이다. 혁명은 이상이고 개혁은 현실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내가 지난 글에서 앞으로 "자비량 사역을 확장하자"고 제안했더니 혹자는 "그걸 강요해선 안 된다"고 한다. 또는 예수와 사도들이 약간의 접대와 후원을 받은 것조차 마치 생활비 전체라도 받은 것처럼 곡해한다. 게다가 일부 목회자들은 다양한 논리를 동원하여 자비량 사역을 공격한다. 매우 흥미로운 현상이다.

전임 목회의 덧

나는 지금 상당수 목회자들의 사고가 스스로 전임 목회의 덧에 갇혀 있다고 생각한다. 교회는 내 개인의 것이 아니다. 왜 공동 목회를 하면 안 될까. 담임목사가 오로지 '내 목회'를 하려니 유급 전임 목사 제도가 필요한 건 아닌가.

대부분의 교회 교사나 찬양 인도자나 주방 봉사자나 안내자들이 자기 생업을 가지고 교회를 섬기는 것처럼 목회나 설교 역시


337

'은사의 한 부분'으로 보고 교회 공동체를 꾸려간다는 동역 정신이 있으면 얼마든지 자비량 사역이 가능하다.

도대체 누가 '유급 전임 목사'가 목회해야 한다는 규칙을 세웠나. 목사도 장로나 집사처럼 교회의 한 구성원일 뿐이다. 굳이 온갖 교회 일에 목사가 너무 간여하려니 스스로 분주해지고 힘들어지는 것이다. 어찌 보면 장로와 집사가 해야 할 영역까지 목회자가 새치기한 측면도 많다. 이는 교인들의 역량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교회의 직분은 원칙적으로 직업이 아니고 은사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각자의 은사에 따라 목사는 설교하고, 장로는 총괄하고, 집사는 관리하고, 교사는 가르치고, 안내자는 안내하고, 심방자는 심방하고, 그리고 봉사자는 봉사하면 전임 사역자 별로 필요 없다.

유급 담임목사 없어도 교회 운영을 당회와 제직회가 주도하면 된다. 설교자도 더 필요하면 주변에 재능 기부할 자원자 제법 많다. 이렇게 못 할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많은 교회는 공동 목회를 못 하는 게 아니라 아예 안 하는 것이다.


338

문제는 어찌하든 교회를 마치 영업 이익을 추구하는 기업처럼 치밀하게 채우고

조직화하여 가시적

일주일

내내

예배와

내려

하니

전임 사역자인

성과를

프로그램으로

가득

담임목사가

필요하고 부목사와 전도사가 필요하고 줄줄이 수직적 관리 구조가 요구되는 것이다. 결국 '전임 목회'와 '공동 목회'는 선택의 문제이지 교리의 문제는 아니라는 거다.

예수의 사역을 따르는 길

유급 목회와 자비량 목회의 차이 또한 단지 돈을 받느냐 아니냐의 차이다. 그래서 이건 마치 유료 진료와 무료 진료의 경우와 매우 비슷하다. 병을 고치는 건 어떤 어떤 경우든 귀한 일이다. 따라서 나는 돈을 받고 병을 치료하는 걸 비판할 마음은 전혀 없다. 특히 그게

바가지

진료비가

아니라

매우

적정한

최소한의

실비로

의사들도

무료로

받는다면 더욱 그렇다. 그건 잘하는 것이다.

나는

예수가

무료로

병을

고쳤으니

오늘날

진료하라고 억지를 부리는 게 아니다. 누구든지 설교하고 돈 받아야 마땅하다면 얼마든지 받기 바란다. 유급 목회 아무도


339

비난하지 않는다. 내가 정작 하고 싶은 이야기는 자비량 목회도 충분히 가능하고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예수는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 그리고 예수와 제자들은 병든 자를 고쳤다. 베드로도 고쳤고 바울도 고쳤다. 제자들은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행 3:6)."고 했다.

그들은 돈이 없어도 고쳤고, 돈을 주지 않아도 고쳤고, 그리고 돈을 요구하지 않고 고쳤다.

자비량 목회는 예수와 사도의 사역을 따르는 길이다. 그 길은 누구를 탓할 이유가 없다. 또한 아무도 강요 안 한다. 제자들은 강요받고 그 길을 따른 게 아니다. 그들은 스스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죽기까지 그 길을 따랐다. 그러다 목 잘려 죽고, 맞아 죽고, 그리고 매달려 죽었다.

한국 개신교는 새로운 은혜, 새로운 이해, 그리고 새로운 회복이 필요하다. 예수께서 주신 진리의 복음은 결코 진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우리를 새롭게 하는 가르침이다. 이제 때가 찼다.


340

루터와

칼뱅의

종교

개혁

500 년을 넘어

'새로운

공동체'가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그를 붙들어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네가 말하는 이 새로운 가르침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 있겠느냐(행 17:19)."


341

월급 주면 목회 누군 못 하나 설교는 '은사'다

최근 어느 목회자께서 "성경에 있고 없고로 따지면 자비량 목사도 없어요. 목사

자체가

성경에

없으니까요."라고 하셨다. 아울러

"예수님이 돈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고 하시며 시대와 상황에 따르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342

물론 전체적인 맥락에서 그리 말씀하신 의도는 충분히 이해하며 균형 있는 노력을 보여주신 점에 깊히 감사를 드린다. 다만 그 논리에 모두 동의할 수는 없기에 다소 안타까움이 있다.

성경의 정신

그동안 대부분의 교회는 "십일조가 성경에 있으니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일 예배 참석도 성경을 있는 대로 다 동원해서 열심히 강조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유급 전임 목사 제도는 성경에 없지만 해도 된다"고 한다. 대체 이게 무슨 논리일까? 성경에 있어도 하고 없어도 하고, 결국은 그냥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도 된다는 거 아닌가.

사실 개신교 일각에 이런 논리가 처음은 아니다. 어떤 교회는 "성경에 세습하지 말라"는 구절이 없으니 세습해도 된다고 한다. 이는 마치 성경에 "주일 헌금 횡령하지 말라"는 직접적인 구절이 없으니 "헌금 횡령해도 좋다"는 궤변적 논리와 유사하다. '성경의 정신'을 지킬 생각은 안 하고 문자적 말장난으로 궁색한 논리를 펼친다.


343

과연 성경에 있고 없고 따지는 게 불필요한 것일까. 성경의 정신이 시대에

따라

변하는

걸까.

언제부터인가

온라인

공간에서

'성경적'이란 말을 삼가하자는 게 대세인 모양이다. 물론 그 말이 의도하는

바는

나도

어느

정도

공감한다.

성경을

함부로

적용하거나 남발하지 말라는 뜻이다. 나도 상식으로 해도 될 문제까지 성경적 운운하는 건 반대한다.

그럼에도

간단한

판단이

어려운

사안에

대해서는

결국

그게

성경적인지 검토해야 옳다고 본다. 성경이 유일한 기준이니 하는 말이다. 우리가 불경적이나 코란적으로 해석하고 판단할 수는 없지 않은가. 더구나 성경에 있는 것조차 제대로 안 하면서, 도리어 성경에 없는 걸 더 열심히 하고 있다면 그걸 정상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래서 다시 강조하는데 '유급 전임 목회'의 근거가 성경 어디에 있는지 난 잘 모른다. 그러나 '자비량 목회'는 분명히 성경에 있다. 바로 신약성경의 거의 절반을 쓴 사도바울의 사역이다.


344

그런데 중대형 교회들에서 사도의 정신으로 자비량 목회를 하는 담임목사를 별로 본 기억이 없다. 절반은 커녕 거의 다 '한결같이' 유급 전임 사역이다. 도대체 요즘 목회자들이 사도바울보다 얼마나 더 바쁘고 중요한 사역을 하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나는 그런 일방적인 현상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교회는 은사 영업장이 아니다

아무튼 자비량 사역과 관련하여 내가 꼭 논하고 싶은 것 중에 하나가 설교다. 설교는 은사다. 예언과 방언과 병고침과 가르치는 것도 은사다. 병원에서 병 고치면 돈 받아도 된다. 그건 영업이다. 학원에서 공부 가르치면 돈 받아도 된다. 그것도 영업이다.

그런데

교회에서

고치고

받으면

욕먹는다.

교회에서

예언하고 돈 받아도 욕 먹는다. 교회에서 전도하고 돈 받아도 욕 먹는다. 교회에서 하나님 말씀 가르치고 돈 받아도 욕먹는다. 왜냐하면 교회는 영업을 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의 설교는 은사지 생업이 아니다.


345

같은 의사라도 병원에서 치료하면 돈 받아도 되지만 그 의사가 교회에서

치료하고

받으면

먹는다.

가수가

무대에서

노래하면 돈 받아도 되지만 그 가수가 성가대에서 찬양하고 돈 받으면 욕 먹는다. 교수가 신학대학에서 성경 가르치면 돈 받아도 된다. 하지만 그 교수가 교회에서 성경 가르치고 돈 받으면 욕 먹는다. 왜 그럴까.

설사 같은 은사라도 사회에서는 돈 받아도 되지만 교회에서 돈 받으면 욕 먹는다. 그 이유는 교회가 무슨 은사 영업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에서 단순한 접대나 간소한 사례까지 해선 안 된다는 의미는 아니니 달리 오해가 없으시기 바란다.

일부에서는

목회도

성속 구분

없이

정당한

노동이기에

다른

직종처럼 임금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주장이 있다. 좋은 발상이기는 하다. 하지만 만일 그런 논리가 옳다면 그럼 왜 함께 동역하고 노동하는 다른 시무 장로, 재정 집사, 교회학교 교사, 안내자, 주방봉사자,

성가대원,

부서장,

구역장에게는

지불하지 않나. 교회가 무슨 노동 차별하는가.

정당한

임금을


346

나는 지금 유급 목회자 개인을 비판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나는 적은 연봉으로 수고하고 있는 목회자들을 진심으로 존경한다. 현재의 유급 목회 현실도 충분히 이해하며 인정한다. 일꾼이 품삯을 받을 권리도 존중한다. 따라서 기존 목회자들에게 자비량 사역을 하자고 제안하는 게 아니다. 자비량 사역의 주체는 직업과 소명을 지닌 평신도다.

시대가 변하고 있다. 교회에 30 대 이하의 젊은 층이 급격히 사라지고 있다. 그들에게는 기복 목회와 무속 목회가 통하지 않는다. 그들은 예배당의 작은 모순도 결코 참지 않는다. 또한 그들은 굳이 수입 십분의 일까지 바치며 교회에 충성하지 않는다. 목회자가 특권 의식을 갖거나 고정 관념에 안주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바울로 살아내는 목회자

사실 요즘 같이 힘든 세상에 월급 제대로 주면 목회 못 할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목회해서 처자식 모두 먹여살리고 자녀를 대학이나 대학원까지

공부시킬

있다면

아마

개나

소나

설교를


347

'표절'해서라도 기어이 목회할 것이다. 게다가 은퇴 후에는 원로 목사가

되어

노후까지

든든히

보장

받고,

추가로

자식이나

사위에게 교회 세습하면 대대로 평생 가업이 된다. 이보다 더 좋은 꿈의 직장이 어디 있나.

현재도 전국에 널린 수많은 신학교들이 목회 지원자들을 반기고 있다. 게다가 이들을 적절히 검증할 정화장치가 고장난지는 아주 오래되었다. 요즘 줄줄이 터지는 대형 교회 목회자들의 파렴치한 목회 비리들이 그 생생한 증거다.

물론 대다수 목회자는 순수한 소명을 받고 목회한다. 하지만 대부분 교단에서는 시간이 갈수록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고 있다. 가짜가 진짜를 밀어내고 주도권을 장악한다. 이게 그동안 유급 전임 목회제가 한국교회의 부패로 연결된 은밀한 메커니즘이다. 즉 제도적 악이 되었다는 거다. 반면에 파트타임 사역자는 교권을 흔들 수 없다. 그러므로 특정 직분자에게 과도하게 집중된 이 '목회 독점'과 '설교 독점'의 낡은 틀을 깨지 못 한다면 교회 회복은 단지 헛된 망상이 될 뿐이다.


348

원칙적으로 '자비량 공동 목회'는 현재 생업에 종사하는 평신도를 위한 파트타임 사역이다. 설교는 은사이기에 반드시 목사 안수를 받아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앞으로 소명을 받은 교인들

중에

신학을

공부하고

자원

봉사로

목회하는

평신도

설교자가 크게 늘어나기를 소원한다. 평신도가 깨어있는 교회는 언제나 희망이 있다.

개혁 교회는 평신도 동역이라는 미명 아래 교인들에게 만날 주방 설거지나 주차안내만 시키지 말고, 이제 새로운 시대에는 '평신도 제사장(벧전 2:9)'들에게도 목회와 설교의 기회를 균등하게 주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근자에 어느 성도가 "바울을 설교하는 목회자는 많은데 바울로 살아내는 목회자는 드문 듯 하다"고 지적한 것에 마음 아프게 공감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349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고전 12:8-11)."


350

자비량 사역과 '삯꾼 목회' 목사가 없으면 안 되는 교회

초대교회 약 300 년간 교회는 자비량 목회자들에 의해 인도되었다. '폴 600

스티븐스' 명의

교수에

성도들이

따르면

모였는데

은장색(Silversmith)이었다. 크리소스톰(Chrysostom,

2 세기

4

알렉산드리아 교회

세기

AD.347–407)은

"시골

교회에는

설교자의 유명한 목회자들이

직업은 설교자 소를

가지고 밭을 가는 일을 한다"고 했다. 또한 가자(Gaza) 지역의 주교 제노(Zeno, AD.400)는 직물을 짜는 일을 했다.


351

초기 교회의 이런 자비량 목회 구조를 점차 유급 전임 제도로 변질시킨 것은 성직주의에 빠진 중세 가톨릭 교회였다. 그리고 16 세기 종교 개혁도 결국 그 틀을 크게 벗어나지는 못 했다. 다만 사제의 자리를 목사가 대신했을 뿐이다.

왜 자비량 사역인가

사도바울은 자신에게 '복음으로 말미암아 있는 권리'가 있다고 했다. 바로 유급 목회의 권리다. 그런데 그는 그 권리를 다 쓰지 않은 것이 상이라고 하며 굳이 고생길인 자비량 목회를 택했다.

그 절박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일반적으로 유급 전임 사역이 복음 전도에 더 집중할 수 있어 효과가 큰 것이 사실임에도 그는 자비량 사역을 했다. 단지 상을 더 받기 위함이었을까. 그건 아니다.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고전 9:12)."


352

바울이 자비량 사역을 택한 것은 그게 도덕적으로 더 우월해서도 아니고 목회에 더 충실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도리어 시간의 분산으로 인해 더 피곤하고 효율성도 훨씬 더 떨어진다. 자비량을 택한

진정한

기준은

오직

복음에

장애가

되는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동안 개신교는 극심한 교권주의에 의해 지속적으로 고통받았다. 유급 전임 제도는 언제나 교권 집중과 교회 부패를 동반했기 때문이다. 돈과 권력이 있은 곳에 반드시 구더기가 생기는 원리와 같다.

그리고

그런

구조가

일반화하고

고착화할수록

그걸

지능적으로 악용하여 더욱 교회를 이권화하고 사유화하려는 사악한 무리들이 반드시 득세했다. 소위 말하는 삯꾼 목사들이다.

중세적 교권주의에 쩔은 현재 한국 개신교의 모습이 그 명백한 증거다. 설교 한 번 하고 백만 원 이상을 주고 받는 교회, 세습이 나쁜 건 알지만 어쩔 수 없다는 장로, 툭하면 터져 나오는 성추행 목사, 그리고 먹었다 하면 보통 수억 원이 넘는 횡령 목사들이 그 자화상이다. 사회에서 그런 짓 하면 바로 끝짱인데 어찌 된 일인지 이 거룩한 교회에선 모두 아주 안녕하시다. 한국 개신교는 그런 부패를 응징할 자정 능력조차 상실했다는 얘기다.


353

한 세대 전부터 나는 언젠가 개신교 목사 제도가 그 사역적 정당성에도 불구하고 매서운 눈총과 공격을 받게 될 날이 반드시 올 거라고 우려했다. 그리고 그 시기는 많은 직업 목회자들이 맘몬적 성직주의에 빠져 무당 목사 또는 귀족 목사처럼 교회에 발암적 존재가 되는 때로 보았다. 그런데 요즘 교회 비리는 대부분 담임목사다. 이제 거의 때가 찬 것 같다.

'삯꾼 목사' 동반한 개혁은 시간 낭비

개신교의 극심한 변질은 마피아적 성직주의에 기인한다. 교회 비리의

모든

틈새마다

삯꾼들이

똬리를

틀고

있다.

이들은

자신에게 어떤 종교적 특권이 있다고 착각하는 무리로서 교회 회복의 결정적인 순간마다 방해하고 왜곡했다. 개신교를 망친 주범이다. 결국 중세적 성직주의를 동반한 체 추진하는 개혁은 그냥 시간 낭비이며 심력 낭비일 뿐이다. 그 덕분에 지난 수십 년 동안 우린 이미 충분히 실패했다.


354

그래서 이제 사도바울에게서 그 해법을 찾아야 한다고 본다. 복음을

정면에서

가로막고

있는 고질적

불치병인

성직주의와

교권주의를 극복하려면 기존의 유급 전임 제도로는 역부족이다. 사도들의 자비량 정신이 필요하다. 자비량 사역은 교회 부패에 천적이다. 무급으로 자원 봉사할 삯꾼 목회자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기존 목회자들은 자비량 사역을 설사 하고 싶다 하더라도 그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 대부분은 장기간의 정규 직업 교육이나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 했기 때문에 다른 전문직을 갖기란 더욱 어렵다. 물론 단순 노동도 아무나 쉽게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러므로 가장 좋은 방법은 이미 탄탄한 직업을 갖고 있는 교인들 중에 소명과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 자비량 사역에 나서는 것이다. 필요한 신학 공부는 야간 과정, 온라인 과정, 통신 과정 등 다양한 방법으로 할 수 있다. 그리고 자비량 사역은 구태여 목사 안수에 연연하지 않아도 된다. 목사 직분을 받아도 좋고, 받지 않아도 별로 지장 없다. 목회나 설교는 신분이 아니라 은사다.


355

사실 기능면에서만 보자면 유급 전임 목회 자체가 나쁜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전임 목회가 더 효과적이다. 신실하고 유능한 전임 목사도 많다. 그러니 자비량 목회라고 해서 특별히 더 우쭐할 이유는 없다. 어느 경우든 자신이 받은 소명대로 하면 된다. 따라서 자비량 사역자들이 목회하는 교회는 목사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상관 없다. 목사만 목회하는 시대는 이제 끝내야 한다.

물론 자비량 목회를 한다고 해서 더욱 바른 교회가 된다는 보장은 없다. 그러나 적어도 그동안 개신교를 지긋지긋하게 따라다니며 골수를 갉아먹은 삯꾼 목회는 현저하게 벗어날 수 있다. 좋은 교회를 정말 이루고 싶다면 먼저 만성적 부패부터 제거해야 옳은 순서다. 사회의 기본적 상식과 윤리마저 못 따라가는 교회는 절대로 바른 교회가 될 수 없다.

더 좋은 교회

앞으로 한국교회는 "평신도의 동역 없이 새 시대를 열 수 없다"는 사실을 깊히 자각해야 한다. 나는 유급 전임 목회 제도가 그 사역의 효율성과 장점에도 불구하고 '성직주의의 발원지' 역활을 한


356

책임이 있다고 본다. 그리고 평신도의 주도적인 동역만이

앞으로 그 실패의 틀을 깰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단순히 목사와 평신도를 중세적 이분법으로 구분하자는 게 아니다. 오히려 목사 자신도 평신도 중의 하나라는 깊은 자각이 있어야 하며 스스로 특권 의식을 버리고 분수를 지켜야 옳다는 거다. 목사 또한 장로나 집사처럼 교회의 한 직분일 뿐이다.

그런 면에서 자비량 공동 사역은 목사를 포함한 모든 교인이 교회 운영의 주체로 등장하는 신호탄이다. 교인이 관리하고, 교인이 설교하고, 교인이 가르치고, 그리고 교인이 섬긴다. 그래서 초기 교회 이후에 상실했던 교인의 주권을 다시 회복하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모든 성도는 '왕 같은 제사장(벧전 2:9)'이다. 그런데 그들은 그동안 교회에서 제사장 대우을 제대로 받아본 적이 별로 없다. 오직 목사만 제사장 대접을 받았다. 개혁 교회는 말로만 "평신도와 동역한다"고 하며 하인처럼 이용하지 말고, 이제부터라도 평신도를 제사장으로 대우해야 마땅하다.


357

루터와 칼뱅의 종교 개혁은 중세 성직자에 맞서 싸워 평신도에게 '성경'을 돌려주었다. 하지만 늘 하나가 부족했다. 목사에게 종속된 교회가 너무 많다. 어떤 교인들은 자신들의 소중한 헌금으로 고용한 일개 목사를 도리어 상전으로 모신다. 종이 주인의 안방을 차지한 꼴이다. 이제 다가오는 제 2 의 개혁은 현대 성직주의에 맞서 평신도에게 '교회'도 돌려주어야 옳다.

물론 목사가 성실하게 사역하는 교회는 좋은 교회다. 그러나 목사가 없어도 되는 교회는 더 좋은 교회다. 반면에 목사가 없으면 안 되는 교회는 한심한 교회다. 특히 유급 목사가 마치 굿판의 무당처럼 필수적인 교회는 분명히 잘못된 교회다. 그런데 지금 개신교는 그런 한심한 교회를 잔뜩 만들어 놓고 태평하기 그지 없다.

종교 개혁 500 년의 개신교 역사가 계속 실패하고 있는 이유다.


358

"초대교회 공의회의 토론거리는 목사가 세상에서 돈을 벌 것인가, 아니면 교회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을 것이냐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대부분의

목사들이

세상에서

일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 폴 스티븐스(Paul Stevens), 리전트대학 명예교수.


359

"교회에서는 계급장 떼자" 개신교는 '성직자 계급'이 없는 공동체

일부 목회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종'이라 하면서 '하나님의 백성'인 교인들 위에 특별한 신분의 지배 계급으로 군림하려 든다. 이건 사실상 중세 사제주의의 부활이다.

개신교의 위기를 여러 관점에서 표현할 수 있겠지만 나는 그 가장 근본적인 뿌리는 '성직주의'라고 본다. "목회자는 다른 교인보다 조금이라도 더 거룩하거나 특별하다"는 직분 우월 사상이 교회를


360

망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생각에

오염된

사람들이

사이비

종교처럼 신도를 맹신화하며 교회를 자신들의 밥상으로 만들고 있다.

'성직주의' 이제 신물 난다

이런 말을 하면 "모두가 그런 건 아니다" 또는 "그런 목사는 극히 일부분이다"고 반발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물론 나도 그게 일부라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신실하고 올곧은 목회자도 아주 많다.

하지만 지금 그걸 누가 몰라서 비판하고 있는 건 아니다. 만일 부패한 성직주의자들이 일부분이기에 계속 침묵해야 옳다면, 그럼 도대체 얼마나 더 많이 타락해야 비판할 수 있다는 건지 역으로 묻고 싶다.

사실 성도들이 더욱 분개하는 건 외견상 비교적 온건해 보이는 상당수 목회자들의 행태 때문이다. 이들 대부분은 평상시 달콤한 기득권을 조용히 함께 누린다. 그리고 늘 좌로나 우로나 크게


361

치우치지 않고 제법 건전한 듯 처신한다. 그러나 교회 비리와 사회 불의에 그다지 분노하지 않는다.

예배 참석 강조하고 십일조 찬양하고 교회 사역엔 충성하나, 거액 연봉 침묵하고 고액 강사비 사양 않고 권력에 순응하고 목회 독재 방관하고 교회 세습 묵인하고 그리고 주로 듣기 좋은 온건한 말만 늘어놓는다. 평소에는 대부분 경건하고 성실하며 심지어 매우 개혁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사실 어찌 보면 노골적인 교권주의자들보다 더 질이 안 좋은 사람들일 수도 있다. 그들은 교회가 조금이라도 비판 받는 걸 극도로

싫어한다.

자신들의

종교

영업에

크게

지장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교회의 허물을 덮고 칭찬하고 격려하자고 주장한다.

이들의

본색이

제대로

드러나는

누군가

감히

자신들의 밥상을 건드릴 경우 뿐이다.

내가 성직주의를 계속 지적하는 이유는 이런 종교적 회색분자들이 성직으로 위장하여 교회 속에 아주 깊히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겉모습은 양이지만 그 속에는 돈과 권력을 사랑하는 이리가 들어있다. 이들은 반드시 자기 욕심을 거룩한 사역으로


362

포장하며 직분을 이용하여 뒤로 사익을 챙긴다. 한국교회가 개신교 역사상 가장 부패한 교회가 된 사유다.

교회의 직분은 종교적 특권이 아니다

500 년 전 장로교 창시자인 칼뱅이 만든 목사직과 장로직은 본래 무슨 종교적 특권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심지어 원어 성경에는 '목사'라는 용어의 직분 자체가 아예 없다. 따라서 교회의 직분이 매우 소중하고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걸 너무 신성시하거나 절대시할 이유는 별로 없다. 목사와 장로는 신약 성경에 명시된 집사나 교사와 마찬가지로 특별한 선지자나 제사장이 아니라 단지 '보편적 은사직'일 뿐이다.

기독교에 그 어떤 종교적 계급이나 신분 차별이란 결단코 없다. 모두가 평등하다. 목사, 장로, 그리고 집사는 계급이 아니다. 안수 역시 단지 기도일 뿐이다. 직분 안수가 인간의 신분이나 등급을 바꾸는 건 결코 아니다. 만일 안수를 받았다고 해서 특정 인간이 갑자기 더 성스러운 존재로 변신할 수 있다면 아마 이 땅의 모든 교회들은 벌써 천국이 되었을 거다.


363

그런데 어떤 교회의 직분은 수시로 중세 가톨릭적 계급장으로 둔갑한다. 그리고 그 계급장이 돈과 권력을 추구하는데 악용되고 있다. 그 결과 교회가 비윤리적 독재 정권처럼 맥없이 부패하고 타락한다.

덕분에 대형 교회 담임목사들 중에 제대로 사회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 매우 드물다. 오히려 상당수는 헌금 유용과 교회 세습으로 시정 잡배만도 못한 욕을 먹고 있다. 젊은 교역자나 교회 직원에게 은근히 갑질하는 일부 장로들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제 딴에 아무리 잘난 그 어떤 위인도 공교회를 함부로 지배하며

사유화하지

하도록

막으려면

우선

계급장부터 떼야 옳다. 아울러 교회의 직분자들은

알량한

사회에서의

개인적 위상과 직위를 교회에서도 덤으로 누릴 생각을 버려야 한다. 주 안에서 형제와 자매가 된 공동체에서 무슨 계급이 필요한가.

목사, 장로, 그리고 집사는 종의 직분이다. 그리고 세상에 종보다 더 낮은 신분은 없다. 그러니 종은 늘 겸손하고 온유하고 정직해야 한다. 그런데 어떤 종놈들은 방자하게 높은 계급장을 좋아한다.


364

게다가 자기 교회 교인수를 무슨 대단한 계급장으로 여기며 작은 교회의 목회자를 얕잡아보거나 무시하는 목사도 있다. 정말 한심한 일이다.

반면에

사도들은

자신들이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다(고전 4:13)"고 했다.

모든 구성원이 평등한 공동체

심지어

아직도

프란치스코

제도상

교황조차

사제를

"평신도는

성직자로 교회와

인정하는 세상의

가톨릭의

주인공으로서,

성직자는 그런 평신도에게 봉사하라고 불림 받은 것이지 그들 덕을 보라고

불림

받은

아니다"라며

현대

성직주의를

강하게

질타했다.

특히 중대형 교회들이 크게 반성해야 한다. 거룩한 교회를 종교 귀족들의

삼류

잡교

영업장으로

만들며

예수의

이름을

팔아

장사하지 말기 바란다. 그건 신성모독이다.

목사는 예배와 교육에 집중하고, 장로는 조직과 인사와 사업과 재정을 관리하고, 그리고 집사는 집행하고 봉사하면 된다. 모두가


365

대등한 사역자들이다. 주제넘게 다른 직분의 사역에 월권하지 말고 각자 자기 일이나 겸손히 잘 하자는 거다.

그런 면에서 나는 우선 교회의 영구직 당회장부터 즉시 임기직으로 바꾸고 장로들에게 돌려줄 필요가 있다고 본다. 한국 개신교는 이 당연하고도 간단한 것조차 왜 실천 못 하는지 그 이유를 진정 알 수 없다.

"계급장을 떼자"는 말은 직분이나 직책이나 조직을 없애자는 뜻이 아니다. 성경의 가르침대로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 2:3)" 사역하자는 것이다. 거룩한 직분을 알량한 계급으로 착각하며 직권을 남용하지 말라는 거다. 십자가 복음의 진리를 따르는 길엔 그 어떤 계급장도 필요 없다. 오직 서로 뜨거운 섬김만이 있을 뿐이다. 초기 교회의 제자들이 그랬다.

만일 아직도 이걸 제대로 이해하지 못 하겠다면 개신교는 차라리 오늘이라도 예배당 문에 대못을 박고 다시 1 세기 사도들의 '가정 교회'로 되돌아가는 게 훨씬 더 좋을 것이다.


366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성직자 계급'이 없이 모든 구성원이 온전하게 평등한 최초의 신앙 공동체였다.

"사도들의 교회에서는 설교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이 어떤 특정한 계급의 사람들에게 한정되지 않았다. 개종한 모든 성도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할 수 있었고, 모든 은사가 있는 성도가 회중에서 기도하고 가르치고 권면할 수 있었다. 신약성경은 어떠한 영적 계급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신약성경은 비록 많은 이가 소명의식이 매우 부족했지만 모든 신자를 성도라 불렀다. 또한 신약성경은 하나님과 일반 성도 사이를 매개하는 특별한 신분의 제사장을 알지 못한다." - 필립 샤프(Phillip Schaff, History of Christian Church Vol 2, p.118)


367

예수는 종교가 아니다 돈 삼키는 종교는 사교 집단

만일 하나님께 물질을 많이 바쳐야 복을 받는다고 믿는다면 그건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무엇이 부족해서 피조물의 돈을 필요로 하시겠는가. 돈이 꼭 필요한 건 인간이다.

초대 교회 사도들의 예배 순서에도 하나님께 돈을 바치는 헌금 행위란

결단코

없었다.

단지

가난한

형제를

구제하기

위한

모금(연보)이 있었을 뿐이다. 하나님께서 진정 기뻐하시는 예배는 물질을 바치는 게 아니라 형제나 이웃과 함께 서로 나누며 사는 것이다.


368

널리고 널린 게 종교

물론 다른 오해도 있다. 만 원 헌금보다 십만 원 헌금이 더 복 받는다고 믿는 것, 5 분 기도보다 5 시간 기도가 더 효험이 있다고 믿는 것, 교회 봉사가 사회 봉사보다 더 고상하다고 믿는 것, 그리고 일요일이 평일보다 더 성스러운 날이라고 믿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신자에게는 안식 후 첫날만이 아니라 매일 매일이 다 '주의 날'이다.

현대 사회에는 온갖 미신과 사상이 범람한다. 그리고 세상에 널리고 널린 게 종교다. 다양한 신들이 있고 다양한 신앙이 있다. 덕분에 기복이 넘치고, 무당이 넘치고, 우상이 넘치고, 잡신이 넘치고, 그리고 어리석음이 넘친다. 나는 타종교를 비하하고픈 의도는 전혀 없다. 그러나 진리와 상관 없는 맹신적 종교 행위에 대해서는 부득이 한마디 안 할 수가 없다.

나는 아무리 열심히 제물을 바치고, 주문을 외우고, 종이를 태우고, 돌탑을 돌고, 종틀을 돌리고, 물을 뿌리고, 그리고 천조각을 건다고


369

하더라도 그런 주술적 행위가 인간을 변화시켜서 바른 진리에 이르도록 인도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본래 참된 진리가 있는 곳에 빛이 있고, 정의가 있고, 헌신이 있고, 화평이 있고, 그리고 사랑이 있는 건 매우 당연한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교회에 신실한 목사, 경건한 장로, 충직한 집사, 그리고 선량한 신도가 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거다. 그건 굳이 나서서 자랑하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개신교는 요즘 남의 말을 할 형편이 못 된다. 발등에 불이 떨어져 있다. 다른 기도보다 새벽 기도가 더 영발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

교회당에서

생각하는

사람,

목사나

기도해야

장로가

능력있는

기도라고

자기보다

영적으로

높은

신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그리고 교회 생활이 가정 생활이나 사회 생활보다 더 거룩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등 그들은 모두 종교의 틀에 빠진 무속적 신도다.


370

종교는 아주 값비싼 마약

오늘날 종교라는 덫이 개신교를 망치고 있다. 어느 대형 교회의 목사는 "십일조는 선택이 아닌 필수"라고

하며 "오늘이 아닌

다음에 헌금을 내야겠다는 생각은 성령의 음성이 아닌 마귀의 소리"라고 열변한다. 툭하면 마귀를 동원하며 함부로 말한다. 저 정도면 정말 "염병하네!"라는 폭탄이 절로 터질 만하다.

많은 교회의 강단에서 '하나님의 진리'와 별로 관계 없는 '목사님의 잡설'이 수시로 하나님 말씀을 대신하고 있다. 그리고 진리를 제대로 구분 못 하는 목사교의 맹신도들은 그런 설교에 세뇌되어 주야장천 무속적 아멘을 열창하고 있다.

그리고 일단 교회로 한번 흘러들어간 돈은 세상에 별로 도움을 주지 못 하고 있다. 구제비는 생색내기일 뿐이고 대부분 교회당 건물 운영비나 교역자 인건비나 자체 사업비로 소비한다. 예수의 복음이 기복적 종교로 전락하여 아주 값비싼 마약으로 변질되었다. 평생 허리띠를 조르며 십일조를 바쳐도 그 약은 환각제나 진통제보다 더 독한 게 맹신이다.

못 끊는다.


371

사탄은

성경을

인용하며

예수를

시험했다.

오늘날도

사탄의

하수인은 성경을 인용하는 자들 속에 숨어 있다. 그래서 가장 경건해 보이고 가장 인자해 보이고 가장 종교적으로 보이는 자들을 통해 사탄이 역사한다. 그건 예수님 당시나 중세 시대나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아무튼 온갖 구실을 들이대며 신도들을 돈과 교단법과 인간의 유전으로

속박하는

자들은

모두

삯꾼으로

보면

된다.

사실

종교라는 간판을 건 집단들 중에 신도들을 미혹하여 앵벌이 시키지 않는 집단은 매우 드물다. 종교판의 삯꾼들은 어찌 하든 신도들 주머니를 털 궁리만 한다. 이들에게 맹신도보다 더 좋은 먹이감은 없다. 이는 한국 개신교의 약 사분의 일이 이단이라는 심각한 관측이 나오고 있는 이유와 맥을 같이 한다.

'예수 살기'가 본질이다

한국교회는 각성해야 한다. 돈을 삼키는 종교가 아니라 돈을 나누어 주는 교회가 되기 바란다. 복을 탐하는 종교가 아니라 복을 전해주는 교회가 되기 바란다. 목사를 섬기는 교회가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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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가 섬기는 교회가 되기 바란다. 세상의 지탄을 받는 종교가 아니라 세상에 소망을 주는 교회가 되기 바란다. 그리고 엉뚱한 계시를 구하는 종교가 아니라 이미 주신 성경으로 돌아가는 교회가 되기 바란다.

진리는 사람을 자유케 하나 종교는 사람을 속박한다. 따라서 제 아무리 거룩함과 신성함으로 겉치장을 한다고 하더라도 종교의 이름으로 사람을 속박하는 무리들은 절대로 믿지 말아야 한다. 그건 십중팔구 사교 집단이다.

종교에 속지 말자. 종교는 인간의 억지와 억압을 정당화하는 매우 무서운 장치다. 화려한 예배당, 많은 교인수, 웅장한 예배, 유창한 설교, 그리고 넘치는 헌금에 속지 말자. 그 자체가 결코 나쁜 것은 아니지만 어떤 무리들은 그것들을 악용하고 포장하여 종교라는 치명적 마약을 제조한다. 그리고 일단 그 마약에 한번 중독되면 백약이 무효하다. 종교 개혁 500 년의 개신교 실패도 결국은 '진리의 종교화'에 기인한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예수를 종교의 틀에 가두지 말라. 예수의 복음은 종교가 아니다. 예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예수는 나의 친구이며 형제이며


373

하나님이시다.

그러니

예수가

땅에서

어떻게

사셨는지를

생각해야 옳다. 가난한 목수 예수는 언제나 값없이 고쳐주고 값없이 나누어 주며 살다 가셨다.

성도는 '예수 믿기'를 넘어 '예수 살기'의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사 1:13-14)."


374

예수를 파는 사람들 목사의 재산

유명한 설교자 빌리 그래함 목사와 릭 워렌 목사의 재산은 각각 약 287 억 원이란다. 게다가 조엘 오스틴 목사는 460 억, 베니 힌 목사는 483 억, 그리고 케네스 코프랜드 목사는 무려 8,750 억이다.

도대체 전임직 목사가 무슨 재주로 그런 부자가 되었을까. 물론 나중에 종자돈을 잘 굴려 부를 더 확대한 측면도 어느 정도 있지만 기본적으론 그게 모두 교인들에게서 나온 돈이다. 목사는 목회를 통해 얻어진 자기 재산의 근원이 '신도들의 주머니'라는 사실을 결코 망각해선 안 된다.


375

땅에 보물을 쌓는 목사들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하나님 말씀을 행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목사들은 평소 교인들에게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마 6:20)"고 설교하더니 정작 자신들은 땅에다 재산을 열심히 쌓고 있다. 그들은 말씀을 전하는 건 아주 잘 하는데 말씀을 잘 행하지는 않는다.

사실 한국 대형 교회 목회자들의 재산도 만만치는 않다. 수년 전 시사프로 '뉴스후'는 대형 교회 목사들의 호화판 생활에 대한 폭로 기사로 세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교회 재산을 수천 억이나 빼돌린 혐의를 받았던 C 목사 일가를 제외하더라도 이들 중에는 수백 억 재산가도 더러 있고 수십 억 부자는 아주 많다.

매년 대부분의 대형 교회 담임목사는 적게는 1 억에서 많게는 20 억까지 교회 돈을 가져간다. 인천의 J 교회는 담임목사가 1 년 동안 무려 10 억 원 이상을 가져가도 대부분의 교인들이 이를 잘 몰랐다. 그러다 나중에 들통나 크게 물의를 빚은 적이 있다.


376

그럼에도

목사는

퇴임

후 원로목사가

되어

계속

막강한

물론이고

추가로

영향력을 행사한다.

목사에게

지출하는

경비에는

기본

연봉은

목회지원비, 판공비, 교육비, 자녀 유학비, 주택 관리비, 차량 유지비, 의료비, 정보통신비, 그리고 도서비 등 갖은 명목을 붙여서 심지어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경우도 있다.

더구나 많은 교회에서는 재정 보고에 이를 모두 분산 처리하여 일반 교인들은 물론 다른 시무 장로들조차 자세한 지출 내역을 모르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한국 개신교의 상당수 목사들은 교회 돈을 빼가는 수법에 있어서는 이미 지고한 경지에 이르렀다는 아주 생생한 증거다.

목사가 부자인 시대는 없었다

교회의 재산을 목사의 재산으로 착각하는 무리들이 적지 않다. 그들은 겉으로 좋은 명분을 내세우며 교회 돈을 투입하여 신학교, 유치원, 언론사, 출판사, 장학재단, 선교단체, 그리고 구호단체 등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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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인체를 만든다. 그런 후 나중에 슬그머니 친인척들을 동원하여 사유화한다. 물론 그런 법인체를 자식에게 세습하는 건 아주 당연한 기본 절차가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복을 많이 받아 부자가 되었다"고 자랑하는 목사는 무조건 조심하기 바란다. 그는 십중팔구 삯꾼 목사다. 목수 예수와 제자들은 복이 없거나 십일조를 안 바쳐서 그처럼 평생 가난하게 살며 고생한 게 아니다.

본래 개신교 역사에 목사가 부자인 시대는 거의 없었다. 그런데 그런 아름다운 전통을 깨고 '귀족 목회'라는 새로운 장을 연 원조 교회는 천박한 자본주의에 잠식된 현대 미국 교회다. 교회를 대형화했고

기업화했다.

거기에

추가로

무분별한

오순절

은사주의에 고무 받은 '성장 신학'과 '성공 신학'이 이를 더욱 부추겼다.

목회자는 무조건 빈곤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목회가 정상적인 모습을 벗어나 빈부 양극화로 가는 게 문제다. 자녀 교육은 물론 기본 생계마저 염려하며 고통받는 목회자가 많은 반면에 일부 목사들은 수억 원의 벤틀리 승용차를 타고 돌아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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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자는 "목사도 사람이니 여유도 좀 부리고 사람답게 살면 안 되냐"고 반발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역시 다소 웃기는 논리다. 반드시 부자가 되어야만 사람답게 사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교회 재산의 낭비는 '빈민 살인죄'

최근 한 신학교 교수가 <종교개혁은 왜 일어났는가?>라는 글을 쓰면서 그 근본 이유를 "당대의 교회가 참된 교회가 아니기에 종교 개혁이 일어난 것이다."고 요약했다. 이는 당연히 옳은 지적이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의 문제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어떤 교회는 참된 교회가 아니고, 어떤 목사는 참된 목사가 아니다. 예수님의 통렬한 지적처럼 '강도의 소굴'이 된 교회도 있고, 양들을 약탈하는 강도가 된 목사도 있다.

하여튼 하나님과 성도 사이에 중간 대리인처럼 제사장 행세하며 가로선 자들은 예외없이 다 강도로 보면 된다. 그 사이에서 성경의 가르침을

왜곡하며

교권을

가로채고,

신학을

가로채고,

돈을


379

가로채고,

헌신을

가로채고,

영광을

가로채고,

그리고

상식을

가로채는 자들은 모두 강도다.

제 아무리 거룩한 긴 옷을 입고, 큰 건물을 세우고, 장엄한 예배를 드리고, 그리고 멋진 설교를 하더라도 목사가 부자라면 그는 분명히 강도다. 땅에 보물을 쌓는 목사는 무조건 강도다. 그건 목회가 아니라 목회질이다. 종교적 강도질 외에는 누구도 교회의 정상적인 목회 사역만으로 결코 부자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있는 재산을 팔아 나누어 주며 예수를 따른다. 반면에 예수를 팔아서 없던 재산도 크게 늘려가는 사람이 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목회자가 있다. 예수를 따르는 자가 있고 예수를 파는 자가 있다.

"교회가 소유한 토지나 돈은 전부 빈민을 위한 재산이라고 하는 생각을 우리는 교회 회의의 결정과 고대 저술에서 자주 읽을 수 있다. 그래서 감독들과 집사들을 향해서, 그들은 자기 소유를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빈민을 돕기 위해서 임명되었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말이 반복된다.


380

그리고 만일 그들이 교회 재산을 감추거나 낭비하는 배신 행위를 한다면 그들은 살인죄를 범한 것이라고 했다." - 장 칼뱅(Jean Calvin), <기독교강요>(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


381

"교회는 목사님이 독재하는 곳이야!" 개신교와 맹신교

"교회는 하나님이 독재하는 곳이야. 중직들, 장로, 집사, 권사 때문에 목사들은 속이 썩어. 목회를 잘 못 하게 방해하고, 왜 목사님 마음대로 하냐고 따진다. 어떻게 그런 사람들이 자기 자신이 대단할 줄 알고 교회 운영권을 쥐고 마음대로 하려고 하냐는 말이야. 교회 운영권은 주님이 갖고 있다. 주의 종을 통해 역사하신다. 헌법, 교리가 어떻든 상관없다. 성경이 우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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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최근 한 대형 교회의 담임목사인 Y 목사가 설교 중에 한 말이다. 이게 소위 개신교에서 제법 유명하다는 지도자급 목사의 의식 수준이라니 절로 한숨이 나온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교인들의 돈

그런데

교회는

담임목사가

하나님이

독재하는가.

독재하는 목사가

곳이라면서 하나님인가.

엉뚱하게

요즘

어떤

종들에게서는 도대체 종의 모습을 보기가 힘들다. 차라리 솔직하게 "교회는 목사님이 독재하는 곳이야"라고 자백하는 게 더 나을 것이다.

목회

독재는

대부분

목사들이

자행하고서

도리어

동역하는

제직들을 탓한다. 지금도 이미 충분히 독재를 하고 있건만 뭘 더 못 먹어서 그런지 모르겠다. 요즘 교회에서 담임목사의 의견에 맞서서 되는 일이 얼마나 있나.

'주의 종'을 통해 역사하신다는 말은 더 웃긴다. 세상에 주의 종이 아닌 기독교인이 어디 있나. 어떤 사람들은 목사만 주의 종인 줄로


383

오해한다. 하지만 장로도 집사도 교사도 교회학교 어린이도 모두 다

주의 종이다. 하여튼 교권주의 목사들의 시대착오적 특권

의식은 아주 알아주어야 한다.

게다가 갑자기 뜬금없이 성경이 우선이란다. 그럼 헌법이나 교리는 뭐 하러 만들었나. 되지도 않는 논리를 들이대다 말이 막히면 꼭 성경을 들먹인다. 워낙 논리력이 없다보니 억지와 꼼수만 늘었다. 사실 일반 교인들은 신학을 잘 모르고 성경 지식도 목사보다 부족하다. 그래서 그저 만만한 게 순진한 교인들이다.

이들의 어이없는 일탈을 보노라면 난 아무리 생각해도 종교개혁 500 년 역사가 너무 허망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직도 중세 교회보다 크게 나아진 게 별로 없으니 하는 말이다. 그저 신학이 조금 나아지기는 했으나 오히려 그 사역은 더 지능적으로 부패해졌다는 느낌이 든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두 교인들 돈으로 도배한 자들의 욕심이 끝도 없기 때문이다.


384

직분자가 독재하는 교회는 맹신교

더욱 한심한 무리들은 꼼수 목사의 무지하고 알량한 설교에 아멘을 열창하며 열심히 돈을 갖다 바치는 족속들이다. 아마 그들은 세속적 복만 준다면 박수무당이 와서 설교해도 아멘할 것이다. 그들에게 복음이란 고난이 없는 영광이어야 한다.

그래서 어떤 교회들은 건물에 십자가를 걸어놓은 것 외에는 사실상 기독교와 그다지 관계없는 이질적 사교 집단이 되었다. 같은 성경을 들고도 영 딴소리를 한다. 목사도 참된 목사가 아니고, 교인도 참된 기독교인이 아니다. 그저 교회란 이름을 빌려서 자기들끼리 돈을 주고 받으며 지지고 볶고 무당질만 반복하고 있다. 이래서 맹신이란 무서운 것이다.

물론 어쩌다가 장로가 독재하는 교회도 더러 있다. 그러나 절대 다수의 목회 독재는 목사들이 자행하고 있다. 우길 것을 우겨야 믿는 척이라도 하지 이건 너무 적반하장이다.

삯꾼 목사들이 목회 독재를 선호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교회를 사유화하여 제 맘대로 영업하기 위해서다. 그들에게 설교니, 예배니,


385

십일조니 하는 것들은 단지 사람을 더 품위있게 모으고 돈을 더 고상하게 챙기기 위한 종교적 명분일 뿐이다.

변칙 세습으로 유명한 한 대형 교회의 K 목사는 "구약을 보면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 중에 여자 문제가 없는 사람은 없다. 여자 문제가 있어도 하나님이 내친 사람은 없다. 성경을 똑바로 보라"고 큰소리친다. 성경의 진리는 쥐뿔도 이해 못 하는 목사가 목회자의 성범죄를 아주 당당하게 정당화한다.

평신도 사역이 마지막 희망

그래도 그 교인들은 마냥 태평하다. 또한 그걸 함께 분개하며 따지고 항의하는 교단 목사들도 보기 힘들다. 거의 다 한통속이란 증거다. 따라서 누가 개신교를 싸잡아 비난해도 크게 변명할 말이 별로 없다. 정말 하늘 아래 한국 개신교처럼 막가는 교회가 또 있을까 의문이다.

목사직의 변절이 갈수록 개신교의 부패와 방종을 이끌고 있다. 목회권, 설교권, 그리고 축도권이 중세적 교권으로 둔갑하여 다시


386

자칭 성직자란 자들의 독재적 전유물이 되었다. 종교개혁 시대의 만인제사장 정신은 실종된지 이미 오래다.

게다가 많은 교단에서는 삯꾼 목사들이 신실한 목사들을 오히려 크게 압도하고 있다. 세습방지법을 하나 결의해도 뒤로는 허술한 빈틈을 만들어 진짜 삯꾼들은 이리저리 편법으로 다 뻐져나간다. 교단법을 지키는 건 고작 말뿐이고 실제로 그 법의 정신은 결코 지키지 않는다. 그래서 이제 교황급 목사들의 독재를 막는 마지막 희망은 평신도 사역뿐이라고 생각한다.

근자에 내가 유급 목회제의 태생적 한계와 폐해를 지적하며 자비량 사역을 확대하자고 했더니 일부 목회자들의 반응이 아주 가관이다. "목사를 거저 부려먹으려 한다"고 성낸다. 도무지 말이 안 통한다. 착각하지 마시라. 새로운 교회가 다가오고 있다. 앞으로 자비량 목회는 평신도들이 할 거다.

교회는 목사가 독재하는 곳이 아니다.

"한국 개신교의 대표적인 사제주의적 경향은 담임목사의 독재다. 한국 개신교는 담임목사의 독재를 확보하기 위해 독특한 각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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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한을 개발해 왔다. 당회장권, 강단권, 설교권, 목양권, 축도권, 세례권, 안수권 등이 바로 그것이다. 교회에서 발생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신앙적

행위를

목사들이

선포하고 있다." - 백종국 교수

배타적으로

보유하는

권리로


388

같잖은 설교가 너무 많다 설교에 중독된 교회

설교는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귀한 사역이다. 설교의 유익에 대해서는 두 말할 필요가 없다. 바른 설교는 사람을 변화시키고 삶을 바꾼다.

그러나 설교를 오해해선 안 된다. 설교 자체가 하나님의 음성은 아니다. 설교자의 말이 저절로 하나님 말씀이 되는 건 아니다.


389

설교자는 다만 성경의 가르침을 겸손히 전할 뿐이다. 말씀의 권위는 '성경'에 있는 것이지 '설교'에 있는 게 아니다.

'신앙'과 '맹신'이 역전된 이유

언제부터인지 개신교는 설교에 깊히 중독된 상태다. 많은 신도들이 독립적 신앙 인격을 갖추어 스스로 하나님 말씀인 성경을 읽으며 삶에 적용하지 못 하고 주로 목사의 설교에 의존하여 신앙 생활을 한다. 교회 생활을 수십 년이나 하고 장로나 집사가 되어서도 여전히 목사의 지침만 기다리거나 또는 그가 주는 모유만 찾는 영적 미숙아가 적지 않다.

그 결과 설교가 예배의 중심이 되었고, 설교자가 교회의 중심이 되었다. 설교를 듣기 위해 교회에 가고, 설교자의 지도에 따라 교회 생활을 한다. 한국 개신교는 오직 목사만 말한다. 그리고 툭하면 신정통치

운운하며

불필요한

것으로

오히려

교인들의

신앙적

소통과

폄하한다.

그바람에

개신교

목사직이

참여를 종의

자리에서 왕의 자리로 점차 변질되었다. 교회마다 중세 교황이 한 명씩 들어선 셈이다.


390

게다가 매주 목사의 일방적인 설교와 논리만 듣다보니 그 정당성을 제대로 판단할 수 있는 기능이 마비되거나 퇴화되었다. 예수께서 보여주신 대화식 '양방 소통'이 아닌 그리스나 로마의 웅변식 '일방 소통'이 현대 설교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다. 여기서부터 신앙과 맹신의 역전이 서서히 시작된다.

일찍이 독일 나치 선동의 천재 괴벨스는 "거짓말은 처음에는 부정되고, 그 다음에는 의심받지만, 되풀이하면 결국 모든 사람이 믿게 된다"고 말했다. 아울러 그는 "거짓과 진실의 적절한 배합이 100%의 거짓보다 더 큰 효과를 낸다"고 했다. 그런데 오늘날 이걸 가장 잘 활용하는 사람들이 바로 삯꾼 목사들이다.

그래서 어떤 교회 생활은 사회 생활에 그다지 강력한 영향력을 주지 못 하고 있다. 멋진 설교를 아무리 많이 들어도 신도의 삶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보다는 주로 자기 성공과 자기 성장과 자기 치장에 분주했기 때문이다.


391

"종교는 구라다"

요즘

화려하고

웅장하고

요란한

교회는

제법

많으나,

세인들의 마음을 진솔하게 움직이는 교회는 많지

정작

않다. 지역

교회에서 아름다운 헌신과 훈훈한 사랑을 보며 가슴이 따뜻해지는 일을 보기가 쉽지 않다. 그저 교인들끼리 지지고 볶고 즐기기에 바쁜 교회들 투성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교회 설교자의 품성과 자질에 큰 하자가 있을 때 발생한다. 좋은 설교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교회를 바르게 섬기며 처신한다. 따라서 건강한 공동체가 가능하다. 반면에 삯꾼 설교자는 자신을 속이고 또한 교회를 속인다. 마치 구약의 선지자나 제사장처럼 행세한다.

후안무치란 '얼굴이 두꺼워서 부끄러움이 없다'는 뜻이다. 요즘 일부 설교자들에게 해당되는 최적의 말이다. 평생 하나님 중심으로 살자고

유창하게

설교하던

목사가

갑자기

자식이나

사위에게

교회를 세습한다. 매주 특별새벽기도회 열심히 인도하던 목사가 틈만 나면 교회 돈을 뭉치로 가져간다. 온갖 고상한 척 기도하던


392

목사가 설교나 논문을 표절한다. 그리고 뜨겁게 찬양하던 목사가 교인을 성추행한다.

그러나 사실 이들보다 더 약삭빠른 위인들은 이런 불의에 조용히 침묵하며 기득권을 알뜰하게 챙기는 절대 다수의 '자칭 중도파' 목사들이다. 그들은 늘 넓은 문으로 간다. 적당히 경건하고, 적당히 성실하고,

적당히

개혁하려고

한다.

그리고

교회를

싸잡아서

비판하지 말라고 한다. 항상 긍정의 힘을 강조하며 기복 신앙을 부추긴다.

덕분에

속주머니가

넉넉하다.

오죽하면

"종교는

구라다"는 비아냥까지 나오고 있을까.

그럼에도

교회

비리에

대해

눈감는

사람들이

많다.

목사는

하나님이 세우셨으니 사람이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된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황당한 주장이다. 만일 그런 식의 단순한 논리라면 이 세상에 하나님께서 세우지 않은 게 어디 있나. 그러면 스탈린이나 히틀러나 이완용도 하나님이 세우셨으니 저항하지 말고 그들에게 순종해야 하나.


393

'명성'을 추구하는 목사는 사기꾼

어느 날 세계적 전위예술가 백남준 선생에게 한 기자가 "예술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 그 때 그는 즉시 "예술은 사기다"는 충격적 답변을 했다. 물론 그는 예술이 진짜 사기라고 생각한 건 아니다. 다만 그는 예술을 역설적 반어법으로 표현한 것이다.

평소엔

그리도

당당하게

논리를

세우며

청산유수로

설교하던

목사들이 막상 자신의 세습과 횡령과 성추행에 대한 변명은 참으로 한심할 정도로 저질스럽고 뻔뻔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설교는 사기다" 또는 "설교는 구라다"라는 반어법이 자꾸 떠오른다.

"교인은 결정할 때 목사 말 따라야 한다", "부자 세습이 한국교회의 고질적 병폐로 자리잡은 원로와 후임 간의 갈등을 해결하는 데 하나의 방안이 될 수 있다", "세계적 대교회 목사가 10 억 못 만들어 교회 돈 횡령하겠나", "교인들은 교회 장부 볼 필요 없다", "법정에서 불륜 인정한 건 변호사의 잘못된 코치 때문이다", "여자 문제, 돈 문제? 천주교, 불교는 훨씬 더 심하다", 그리고 "회개하라고 자꾸 나한테 말하는데 회개는 나와 하나님하고 하는거다"는 등 어떤


394

목사들의 막장 드라마같이 유치한 설교와 말장난을 듣고 있노라면 정상적인 어법으로는 도저히 대꾸할 염두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 개신교의 고질적 문제 중 하나는 목회란 명분이 웬만한 불의와 부정에 아주 값싼 면죄부를 마구 남발한다는 거다. 어떤 교인들은 자신들의 손으로 고용한 일개 목사를 마치 하나님의 대리자로 안다. 평소에 그렇게 세뇌 당했다. 그래서 목사니까 믿어주고, 목사니까 바치고, 목사니까 묵인하고, 목사니까 속아주고, 목사니까

참고,

그리고

목사니까

용서한다.

심지어

속으론

욕하면서도 겉으론 순종한다.

이러니 일부 분수를 모르는 목회자들의 같잖은 설교는 갈수록 태산이다. 쥐뿔도 아닌 인생들이 갈수록 안하무인이다. 온라인에 널려있는 여러 유명한 목사들의 설교를 듣다보면 절로 한숨이 나온다. 목소리 깔고 무게 잡는 자, 은근히 훈계조로 반말하는 자,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자, 그리고 아예 처음부터 끝까지 원고지를 그대로 낭독하는 자도 있다. 아는 척 잘난 척 여기저기 온갖 잡무당들의 굿거리가 난무한다.


395

결국 상당수 목사들은 예수의 이름을 팔아 돈을 챙기고 세상의 명리와 명성만 추구하는 독사가 되었다. 물론 이런 자들을 우린 사기꾼이라고 부른다.

이제 한국 개신교는 이 강단 저 강단에 똬리를 틀고 교회의 단물을 핥고 있는 '담임독사'들을 탄핵할 차례다.

"사기꾼들은 하나같이 대중들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아 '명성'을 얻으려고

열심히

속임수를

쓴다."

-

<기독교강요>(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

칼뱅(Jean

Calvin),


396

"종교는 장사다" 숨 쉬는 거 빼고는 다 구라

'구라'란 말하는 이가 이미 거짓임을 스스로 알고 있는 상태에서 듣는 이로 하여금 사실로 믿게 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속어다. 이 단어는

일본어에서

말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근거가

확실하지는 않다. 이런 속어는 가급적 삼가야 하지만 개신교 현실에 매우 적합한 표현이기에 부득이 사용한다.

구라를 잘 치는 사람을 보면 주로 평소에 말이 많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런 면에서 기독교인 중에 구라가 제일 심한 직분은 목사다. 교회에서 목사보다 더 많이 말하는 사람은 없다.


397

구라의 진화

교회에 처음 출석하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겪는 첫 번째 구라는 "목사는 하나님의 종이다"란 말이다. 물론 그 말이 전혀 틀린 말은 아니지만 거기에는 분명히 구라가 들어있다. 왜냐하면 기독교인 중에 하나님의 종이 아닌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시골

약장수가

진통제를

속여

만병통치약처럼

구라치는

것과

비슷한 행태다.

그런데 많은 교인들은 이 구라에 속아서 아예 처음부터 목사에게는 미리 한수 접어주고 들어간다. 그리고 그게 관습화한다. 그러니 늘 평등한 소통이 제한되고 매사에 목사에게 종속적인 존재가 된다. 더구나

상당수

무당

목사들은

내심으로

그런 상태를

즐기고

부추긴다. 그래서 마치 자기가 신의 대리자라도 된 양 스스로 종교적 자뻑 상태에 빠진다. 그리고 간이 더 커지면 마침내 복음을 종교화하여 무허가 장사판에 진열한다.

그 다음부터 그런 종교적 구라는 더욱 과감하게 진화한다. 그 증상이 심한 경우 사회에서는 동네 학원 강사조차 하기 힘든


398

자질의 위인들이 교회에서는 아주 고고한 영적 대스승이라도 되는 양

기고만장한다.

그리고

그게

만성화하고

양심이

마비되면

도덕불감증에 빠진다. 대부분의 순진한 교인들이 아무 말을 않고 있으니 그저 만만한 바지저고리로 안다. 결국 그런 목회는 구라가 기본적 필살기가 되고 종교라는 고상한 허울로 상식을 초토화한다.

요즘 개신교를 기초부터 파괴하고 있는 목회 독재, 헌금 횡령, 성직 매매, 성추행, 그리고 교회 세습 등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작은 구라가 용인되니 점차 큰 구라로 발전하고 바늘 도둑이 서서히 소도둑으로 성장한다. 게다가 누가 이를 좀 고치자고 반대하면 도리어 교회의 분열과 불신을 조장한다고 거꾸로 뒤집어씌우기 일쑤다.

무슨

중세

시대도

아니건만

툭하면

자기

교인들을

왕따시키거나 이단으로 몰거나 또는 마녀사냥으로 제명한다.

그 결과 웬만한 대형 교회 목사들 치고 경제적으로 검소하거나 청빈한 사람을 보기가 힘들다. 만날 교인들에게 하늘에 바치라고 뜨겁게 호소하지만 정작 자신들은 그다지 열심히 바치지 않는다. 체면상 십일조만 달랑 내거나 추가로 생색만 조금 더하고 나머지 재물은 열심히 땅에다 쌓는다. 따라서 성경의 눈치를 보며 마음은 가난하다고 하면서 몸이 부자인 목사들이야말로 초특급 구라쟁이다.


399

종교 장사가 흥행하는 이유

구라 목사의 가장 큰 특징은 돈 문제에 깨끗하지 못 하다는 데 있다. 무슨 핑계와 명분을 대서라도 기여코 교회 돈을 가져간다. 합법, 편법, 그리고 불법 등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한다. 그래서 자립 교회

중에

목사 지출비를

분산 처리하지

않고

연봉만

곱게

받아가는 목사가 매우 드물다.

무엇보다 심각한 사실은 목사의 구라에 공적 설교가 동원되고 있다는 점이다. 굳이 특정인을 지적하지 않더라도 한국 개신교엔 구라 설교가 넘친다. 거짓 선지자는 교회에 위기가 있어도 항상 평안을 노래한다. 그래야 영업이 잘 된다. "예수 믿으면 복 받아서 부자 되고 성공한다"고 구라쳐야 사람이 몰린다. 반대로 "예수 믿고 변화되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자"고 설교하면 장사 망친다. 구라 목회가 흥행하는 이유다.

특히 "목사는 영적 아버지다", "목사에게 맞서면 천벌 받는다". "목사만 축복권 있다", "목사는 하나님이 직접 치리한다", "십일조 잘하면

부자

된다", "교회당이

성전이다", "교회

출석

잘하면


400

성공한다", "모든 권력에 복종하라", "교회 비판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거다", 그리고 "돈이 축복이다" 등의 설교는 모두 다 진리를 교묘히 오도하거나 왜곡하는 헛소리며 개구라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삯꾼 목사들에게 선교나 전도는 단지 자기 영업을 위해 '구라 시장'를 확장하는 것 이상의 의미는 없다. 선교하자 하고 선교비 떼먹고, 십일조하자 하고 헌금 떼먹고, 성전 짓자 하고 건축비 떼먹고, 교육하자 하고 기금 떼먹고, 재단 만들자 하고

사유화하고, 그리고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자"고

설교하는데 실제 자기 돈은 절대로 안 맡긴다. 이러니 요즘은 목사들이 뭘 좀 하자고 하면 지레 겁부터 날 정도다.

최근 목사의 직업 만족도가 3 위로 나타났다는 보도가 있었다. 법관이나 교수보다 높았다. 그런데 우린 그 결과를 마냥 좋게만 해석해도 될런지 큰 의문이다. 전국에 신학교가 난립해서 자질 미달의 목회자가 과잉 방출되고 매년 수 천의 미자립교회가 문을 닫고 있는 현실에서 직업 만족도가 그처럼 높다는 게 정말 무슨 의미인지 진지한 고민이 있어야 할 것이다.


401

과연 개신교의 목회자들은 십자가를 지는 목회 여정의 고난에 그토록 깊히 만족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먼저 세인들이 개신교와 목사를 실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부터 냉엄하게 반성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길을 막고 한번 물어 보기 바란다. 욕이 안 나오면 다행이다. 거리 민심과 소통하지 않는 교회는 미래가 없다.

대대로 팔자 고친다

물론 진실하고 충직한 진짜 목회자들도 적지 않다. 이 순간에도 많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묵묵히 헌신하고 있다. 어찌보면 그들 때문에 개신교가 아직까지 건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누군가의

지적처럼

일부

목회자들이

자주

애용하는

3 가지 '단골 구라'는 항상 조심해야 한다. "바쁘다", "피곤하다", 그리고 "사랑한다"는 말이 그것이다. 진짜 목사는 그런 말을 함부로 안

한다.

오히려

그건

목사의

본격적인

구라가

시작되는

전주곡으로 보면 된다. 많은 경우 목회 태만이나 목회 비리는 "바쁘다"나

"시간

없다"로

무마되고,

"피곤하다"나 "사랑한다"로 시작된다.

헌금

남용이나

성추행은


402

무엇보다 예배로 구라치고, 설교로 구라치고, 기도로 구라치고, 찬양으로

구라치고,

신학으로

구라치고,

교권으로

구라치고,

선행으로 구라치고, 그리고 삶으로 구라치는 자들을 더욱 경계해야 한다. 그들은 언제나 좋은 도구나 아름다운 포장을 이용해서 구라친다. 그러나 구라쳐서 흥행하거나 구라쳐야 대박나는 종교는 사교(邪敎) 집단일 뿐이다.

오죽하면 목사에 대해 '열정의 구라메이커'라는 말까지 나올까. 그 위선이 하도 가증스러워 "숨 쉬는 거 빼고는 다 구라"라고 보면 된다. 종교 장사꾼들은 회개할 마음도 없고 고칠 생각도 별로 없다. 오히려

그들은

교회

하나

잘 잡으면

대대로 팔자

고친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세습 안 한다"고 계속 연막치다가 갑자기 얼굴을 바꾸어 세습을 강행하고 있는 한 대형 교회의 저질 목사가 그 좋은 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한통속이 되어 씨알도 안 먹힐 생구라를 치고 있다. 그래서 아마 오늘날 상당수 목사들의 가장 큰 구라는 아직도 자기가 '예수를 믿고 있다'는 위선일 거다.


403

종교라는 이름의 약장수에 속지 말자. 신약 팔고, 구약 팔고, 그리고 이제는 유다처럼 예수까지 팔아 배를 불린다. 교회라는 거룩한 간판을 걸고 멸망한 예루살렘성보다 더 큰 죄악을 우리가 쌓고 있다. 오늘날 예수가 또 다시 우시는 이유다.

"종교는 인간을 가장 자유롭게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마음과 영혼을 묶고서 종살이를 하도록 만드는 게 또한 종교다. 왜 그럴까. 종교는 덩치가 커질수록 권력화되고, 부패하고, 타락하는 속성이 있다. 세상의 권력 중에서도 가장 권력이 아닌 것처럼 위장하는 게 바로 종교다." - 길희성 교수


404

돈 바쳐야 복 받는 건 무당 종교 십일조 장사에 속지 말자

수학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복권을 많이 사지 않는다. 그 당첨 가능성이 교통사고로 죽을 확률보다도 훨씬 작기 때문이다. 설사 한번에 10 장을 사더라도 수치적으로 보면 아예 비교조차 안 된다. 그럼에도 그냥 재미로 한두 장 사는 거야 크게 탓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만일 누가 투자 목적으로 꼭 1 등에 당첨되기 위해 매주 거액을 들여 복권을 산다면 그건 대단히 멍청한 바보짓이다.


405

왜냐하면 매주 특정 복권을 판매할 때마다 전체 판매액의 약 30%50%는 복권 회사의 수익이나 세금으로 지불되기 때문이다. 대개의 경우 환수율이 고작 70%도 안 된다.

'슬롯머신'은 카지노에서 가장 인기있는 게임 중 하나다. 딜러의 도움 없이 간단히 조작할 수 있어 특히 초보자들에게 인기다. 슬롯머신의 환수율은 대략 80%-95% 정도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100 만 원을 가지고 게임을 했다면 80 만 원에서 95 만 원을 다시 돌려 받는다. 일반적으로 90% 정도의 환수율이라고 보면 나머지 10%는 카지노회사에게 돌아간다.

그래서 슬롯머신을 10 회 반복했다고 가정하면 최종 환수율은 0.9 의 10 승이 되어 평균적으로 약 35%의 돈만 남는다. 그리고 20 회를 반복하면 단지 12%의 원금만 남게 된다. 즉 100 만 원을 모두 걸고 슬롯머신을 20 회 정도 한다면 결국은 12 만 원으로 줄게 된다는 이야기다. 그러므로 수익을 목적으로 복권이나 도박을 하는 건 매우 어리석은 행위다. 열심히 하면 할수록 더 빨리 망하게 된다.


406

흔히 어떤 목회자들은 구약 성경을 인용하며 "십일조 잘하면 현세에서도 복을 받는다"는 주장을 많이 한다. 신대원 원장까지 지낸 교수마저 그런 설교를 하며 돌아다닌다. 그러나 나는 이미 그 주장이 얼마나 허구인지 다른 글에서 많이 언급했기에 여기서는 그런 시대착오적인 중세 교회의 신학 논쟁은 일단 생략하고 다만 보다 실제적인 논의를 조금 더 해보고자 한다.

십일조를

내는

목적이

순수하게

이웃과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에서라면 굳이 그건 말릴 이유가 없다. 오히려 그것은 매우 아름다운 일이다. 나는 그 고상한 사랑을 조금도 폄훼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거짓된 가르침에 속아서 부와 만수무강을 누리기 위해 '무속적으로' 십일조를 바친다면 그건 정말 어리석은 짓이다. 이건 마치 도박에서 매번 자기 수입의 10%를 투자해서 목돈을 노리는 것과 유사한 행태다. 큰 수익을 기대하며 매달 전체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치는 건 마치 환수율 90%의 슬롯머신을 매달 돌리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407

물론 목사님의 말씀을 따라 십일조를 잘 바쳐서 큰 부자가 된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 그러나 십일조를 전혀 안 바쳐도 거부가 된 더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설명하려고

하나.

나는

교회에서

"십일조를 많이 바쳤어도 망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왜 안 하는지

모르겠다.

십일조를

열심히

바친

교인

중에도

쫄딱

망하거나 아프거나 가난한 사람이 아주 많다. 십일조 선수인 대형 교회의 유명 목사님들 중에도 암으로 돌아가신 분들이 많다.

만일 일부 목사들의 주장처럼 구약의 십일조 공식이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면 이럴 수가 없지 않나.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십일조 교인은 거의 다 부자가 되어야 정상이다. 허나 현실은 크게 다르다. 부자가 못 된 십일조 교인이 훨씬 더 많다. 더구나 십일조는 커녕 온갖 잡신을 두루두루 섬기는 일본인들이 우리보다 더 잘사는 건 또 어찌 설명할 것인가.

이건 비단 십일조 뿐만이 아니다. 모 백화점에서 입점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주일성수' 못 한다고 퇴짜를 놓을 만큼 철저히 주일을 지키며 장사하여 엄청나게 복을 받았다는 망원동 떡집 5 부자의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성공 사례만 널리 선전한다.


408

주일성수를 하는 마음과 자세 그 자체가 복이지 주일성수로 복을 받는 게 아님을 알아야 한다. 주일성수 열심히 해도 망하거나 실패한 사람이 많고 오히려 주일성수 안 한 사람들 중에 부자가 더 많다.

그러므로 십일조를 하는 마음과 삶 그 자체가 복이지 십일조의 댓가로 육신적 복이 주어지는 건 아니다. 십일조는 현세적 복을 받게 해주는 도깨비 방망이같은 도구가 결코 아니다. 도리어 십일조를 바치면 경제적으론 반드시 그만큼 손실이다. 반드시 그만큼 희생이 따른다. 그건 10%를 투자하면 그냥 국물도 못 건지고 10%를 몽땅 다 주는 거다. 그리고 사실은 그렇게 자신의 소유 일부를 '이웃에게 거저 주는 게' 성경이 가르치는 진정한 복이다.

기독교 진리는 무엇을 바쳐서 그 대가로 복을 받는 무속 신앙이 아니다. 돈 놓고 돈 먹는 식으로 하나를 걸고 대박을 노리는 도박이 아니다. 뭘 바치고 정성이나 공덕을 쌓아 받으라는

무당

종교의

가르침이다.

맹신도들의 주머니나 긁을 때 쓰는 잡술이다.

그런

복을 많이 무속적인


409

병고침은 물론 생명의 구원도 값없이 주신 예수가 무슨 물질을 우리에게 더 원하실까. 예수는 이 땅에 계실 때 단 한번도 돈을 걷으신 적이 없다. 예수의 사역은 오직 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어떤 교회들은 받는 일에 너무 열심을 내고 있다. 왜 틈만 나면 부패한 세리처럼 만날 바치라고 목청 높이며 극성을 부리는지 모르겠다. 기독교의 연보 정신은 "하나를 바치고 열이나 백을 얻겠다"는 기복적 미신 따위가 아니다. 한국 개신교는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을 너무 탐하다가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다는 걸 왜 모르는가.

예수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행 20:35)"고 하셨다.


410

"난 교회를 떠나본 적이 없다" '떼강도'가 든 교회

떼를 지어 범행하는 무리를 우린 흔히 떼강도라 한다. 그리고 그런 어의적 정의가 별로 틀리지 않다면 한국교회엔 분명히 떼강도가 들었다. 대개의 경우 담임목사가 그 무리의 두목이고 부목사, 장로, 그리고 집사가 줄줄이 공범자들이다.

갖은 수단을 다 동원하여 교회 돈을 수십억 원이나 가져가는 목사, 설교 한번하고 수천만 원을 챙기는 목사, 유부녀와 간통하고


411

돈으로 막은 목사, 표절이 들통나도 끝까지 우기는 목사, 십일조 바치라고 호통치고 외제차 몰고 다니는 목사, 교회 돈으로 재단 만들어 처자식에게 넘기는 목사, 그리고 세습 안 한다고 연막치다 갑자기 안면몰수한 목사 등 이런 자들이 여전히 당당하게 목회질을 하고 있다. 그 드높은 기상과 뻔뻔함은 가히 태산을 찌르고도 남는다.

개신교는 자체 정화장치가 고장난 지 아주 오래다. 그러니 갈수록 더 노골적이다. 소위 성직을 맡았다는 목사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해마다 교회 돈을 뭉치로 가져가고 있건만 개신교는 아직도 이걸 그대로 방치하며 오히려 확대하고 있다.

이럴 거면 차라리 중세 가톨릭에 그대로 남아서 곱게 썩어 없어질 것이지 대체 뭘 더 개혁하겠다고 나왔는지 모르겠다. 그나마 신학은 멋지게 치장했지만 사역은 그다지 나아진 게 없다.

강단에서는 위장된 경건으로 온갖 달콤한 말을 쏟아놓지만 뒤로는 늘 양들을 등치고 있다. 이게 진짜 강도가 아니면 누가 강도인가. 그것도 단독범이 아니라 교단마다 담임독사들이 군거하며 떼거지로


412

똬리를 틀고 있다. 이들에게 교회는 그저 대를 이어 해먹을 만만한 약탈의 대상일 뿐이다.

게다가 어쩌다 한두 교회가 부패한 게 아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동네마다 합법으로 가장한 돈장난을 안 치는 목사가 드물고 교단마다 문제를 안 일으키는 목사가 드물다. 도대체 지구상에 헌금 종류가 무려 70 가지나 되는 교회가 또 어디에 있을까. 교회가 돈을 긁을려고 아예 안달이 났다.

쓰레기는 완전히 썩어 없어져야 비로서 거기에 다시 꽃이 필 수 있다. 부패한 교회가 진정 종교개혁 500 주년을 뜻있게 기념하려면 어서 빨리 망해서 조속히 사라져주기 바란다. 그게 마지막으로 교회와 세상을 돕는 유일한 길이다. 그래야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공동체가 이 땅에 다시 부활할 것이다.

양심의

찌꺼기가

조금이라도

남아있다면

싸잡아

비판한다고

불평하지 말기 바란다. 마을의 공동 우물에 떠있는 개똥을 보고도 단지 몇 조각 뿐이니 그냥 두자는 사람과 무엇이 다른가. 자기 교회나

자기

교단의

불의를

보고도

사람들은 그 책임을 결코 면할 수 없다.

저항하지 않고

침묵하는


413

더욱 한심한 일은 강도들이 교조적 신앙을 이용하여 교회를 망치고 있어도 그걸 인지하지 못 하는 사람들이 많다. 매주 기독교 무당에게 종살이를 하면서도 스스로 종이 된 줄 모른다. 그저 돈 바치라면 돈 바치고, 시간 바치라면 시간 바치고, 심지어 몸과 마음까지 바친다.

맹신도 이런 맹신이 없고 등신도 이런 등신이 없다. 아마 그 열심과

노력의

절반

정도만이라도

주변의

친척과

이웃을

섬겼더라면 한국은 벌써 복음화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비상한 시기다. 이 시대에 평안하다고 축복하는 자는 거짓 선지자다. 소위 교회의 지도자란 위인들이 하는 행태를 보라. 돈과 권력에 취해 세상의 비난에도 부끄러움을 전혀 모른다. 교단 정치가 이처럼 부패했는데 목회라고 온전할 리가 없다. 그 손에 성경을 들고 설교하지만 입만 열면 위선적 구라와 악취가 온누리에 진동한다.

집안에 강도가 들면 방법은 오직 두 가지뿐이다. 하나는 그 강도를 즉시 쫓아내는 거고, 그게 정 안 되면 주인이 나가는 거다. 그런데


414

어떤 교회들은 떼강도가 들었는데도 희희낙낙하며 그들과 동거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 교회는 빨리 안 망하는 게 더 기적이다. 아마 그래도 더 이상 안 망하고 버티는 이유가 있다면 그건 거기가 교회가 아니라 이미 '강도의 소굴'이 되었기 때문일 거다.

한국 개신교의 위기는 사실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매우 오래전에

시작되었다.

일제강점기에

교단의

지도급

목사들이

떼거지로 신사에 몰려가 잡신에게 참배할 때부터 이미 그 떡잎을 충분히 보여준 거다. 그때부터 열심히 콩을 심었는데 이제 와서 갑자기 팥이 날 리가 없다.

칼뱅은 뛰어난 신학자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주권'을 잘못 적용하여 '인간의 자유의지'를 훼손하는 오류를 범했다. 그는 교인 사찰, 신앙 강요, 폭력 처벌, 그리고 이단 처형 등의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다. 오늘날 개신교도 무엇을 실수하고 있는지 깊히 반성해야 한다.

한국교회는 교회의 교권을 교인들의 손에 제대로 돌려준 적이 거의 없다. 목사가 왕이다. 심지어 대형 교회의 담임목사를 접견하고 기도 받기 위해 은행 대출 받는 교인도 있다고 한다. 개신교


415

일부가 박수무당식 교황교로 변질하고 있다는 증거다. 그러니 요즘 이름만 프로테스탄트이지 동네 교회에서 개혁자 루터의

저항

정신은 그 흔적조차 보기 힘들다. 그들은 저항 대신에 투항을 택했다. 결국 어떤 교회들은 또 다시 구약의 포로 시대로 돌아갔다.

그러므로 단순히 교회에 다니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신자 자신이 교회가 되는 것이다. 가나안 성도들은 결코 교회를 떠난 게 아니다. 그들은 다만 참교회를 추구하며 교회가 아닌 것을 떠난 거다.

"난 교회를 떠나본 적이 없다. 교회가 아닌 걸 떠났을 뿐이다." 김길한


416

목사는 교회의 지배자가 아니다 개신교에 특권 직분이란 없다

근자에 미국 ANC 온누리교회는 그 교회를 개척하고 대형 교회로 성장시킨 유진소 목사를 떠나 보냈다. 그리고 그 자리에 2 명의 목사를

새로운

담임으로

세웠다.

팀사역

또는

공동

목회의

시작이다.

100 주년기념교회 또한 공동 목회를 추진한다. 이재철 목사는 지난 5 월 14 일 주일예배 시간에 "청빙위는 후임 담임목사의 업무를


417

4 개의 전문 분야로 나누어, 4 명의 목사로 하여금 공동 담임 목회를 하도록 했다"고 말했다. 분야는 영성, 교회학교, 목회, 그리고 대외 업무 총괄로 나눈다.

종교인들의 놀이터

여기서 무엇보다 주목할 점은 이재철 목사의 설명이다. 그는 이같은

결론이

나오게

배경을

'제왕적

목회의

폐해'라고

지적했다. 이는 매우 정확하고 분별력이 있는 상황 인식이다.

그런데 다른 목회자들은 왜 이런 생각을 못 할까. 이처럼 명확하고 심각한 문제점을 보면서도 대다수의 목회자들은 딴청을 부린다. 그들은 현재의 담임목사 제도를 매우 당연시한다. 그건 교회의 오랜 전통이니 아예 비판조차 필요없다는 태도다. 불과 수백 년 전 제네바의

개혁자

칼뱅이

만든

담임목사

제도를

마치

신성불가침의 영역이라도 되는 양 절대시한다.

하지만 이런 무비판적인 맹종이야말로 가장 칼뱅주의자답지 않은 행동임을

알아야

한다.

칼뱅은

일찍이

"개혁된

교회는

항상


418

개혁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개혁은 단지 교회의 유전이나 전통을 수호함으로 성취되는 게 아니라 끈임없이 자기 성찰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선배 개혁자들의 제도를 무조건 고수하는

게 개혁은

아니다.

그럼에도

상당수

목회자들이

여전히

제왕적

담임목사

제도를

선호하거나 지지하는 진정한 이유는 교회의 세속화에 있다. 가장 거룩하고

순결해야

교회가

일부

기득권

종교인들을

위한

그들만의 놀이터나 밥상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개신교 역사에 지금처럼 목회자들이 양극화하여 빈자와 부자로 분리된 적이 없다. 지금처럼 목사 위에 목사가 자리하여 성직을 계급화한 적이 없다. 지금처럼 교인을 맹신화하여

돈 바치는

자판기로 만든 적도 없다.

작금의 정치와 문화는 봉건적 권위주의를 탈피하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하고 있건만 교회는 아직도 시대착오적 성직주의의 단꿈에서 헤어나오지 못 하고 있다. 교회가 시대의 변화를 전혀 못 따라간다.


419

모든 신자가 동역자

나는 앞으로 모든 중대형 교회들이 100 주년기념교회처럼 공동 목회로 개인기에

가면

좋겠다고

의존하던

생각한다.

권위주의적

새시대의

카리스마

교회는

목회가

특정인의

아니라

동역

시스템에 의해 사역하는 목회가 바람직하다.

요즘 멀쩡하던 교회도 담임목사 하나 잘못 세우고 고생하는 교회가 얼마나 많은가. 강남과 분당의 일부 대형 교회들이 그 대표적인 예다. 수십 년 동안 존중을 받던 교회들이 졸지에 회칠한 무덤같은 강도의 소굴이 되었다.

만일 그래도 굳이 담임목사제를 선호한다면 차라리 '담임목사'도 56 년마다 투표해서 번갈아 선출하면 좋겠다. 물론 한번 쉬면 나중에 다시 담임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교회 내의 모든 부목사가 후보자다. 나이와 경력을 다 내려놓고 이를 한번 좋겠다.

대통령도

나이가

많아야

잘하는

실천해보면 거

아니다.

담임목사보다 설교 잘하는 부목사는 곧 쫓겨나야 하는 그런 더러운 목회 구조는 반드시 바꾸어야 마땅하다.


420

공교회가 특정 개인의 소유가 아닐진데 이렇게 못 할 이유가 뭔가. 담임직이

수직적

계급이

아니라면

동료

목회자들이

서로

돌아가면서 담당하는 게 더 옳다고 본다. 생활비도 극심한 격차를 줄이고 균형있게 재조정해야 한다. 사실 나이가 적어도 설교와 목회를 잘하는 부목사들이 많다. 더구나 교회의 사역에는 귀천이 없다. 미래에는 한국교회에서 젊은 설교 목사와 나이드신 교육 목사를 더 많이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공동 목회는 비단 목사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장로와 집사 등 다른 직분자들도 모두 함께 사역하는 목회자다. 예배와 설교만 목회가 아니다. 교회 안과 밖의 모든 사역이 다 목회다. 그리고 그런 면에서 보자면 사실상 모든 신자가 다 동역자라는 깊은 자각이 있어야 한다.

아주 값비싼 우상

우리는 단지 500 년 역사의 목사라는 직분에 대하여 너무 과도하게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 목사도 장로나 집사처럼 교회를 섬기는 여러 은사의 한 부분일 뿐이다. 개신교 목사는 무슨 특권을


421

지닌 유별난 직분이 아니다. 교회의 예배는 제사가 아니고, 목사는 제사장이

아니다.

본질상

목사는

'가르치는

장로'의

직분이다.

따라서 교사가 지배자가 아닌 것처럼 목사도 지배자가 아니다. 중세적 무당 목사나 종교 귀족은 이방 신당에서나 필요한 것이다.

교회

사유화의

원흉

역활을

해온

제왕적

담임

목회는

이제

개선되어야 한다. 지금은 칼뱅의 시대가 아니다. 종교 개혁 당시의 개혁자들은

중세

교회의

위협에

칼날을

들고

싸워야

했다.

스위스의 개혁자 쯔빙글리도 전쟁터에서 죽었다. 그래서 그때는 강력한 교권력의 담임목사 제도가 필요했다. 그러나 그게 만고의 진리는 아니다.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다.

많은 교회에서 담임목사가 아주 값비싼 우상이 되었다. 교회 돈을 터무니없이 많이 가져간다. 개인에게 과도하게 집중된 불의한 교권으로 교회를 뒤흔든다. 겸비해야 할 종들이 자기 본분을 넘어 교황의 자리에 앉았다. 성상이나 성물만이 우상이 아니다. 건물이나 사람도 우상이 된다. 가장 사악한 우상은 언제나 가장 거룩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422

개혁 교회는 건물 우상화와 성직 우상화를 타파해야 한다. 세계적 기독교 미래학자인 레너드 스윗 교수는 "한국 개신교에는 악마가 서식한다"고 경고했다. 한국교회가 개신교 역사상 가장 부패한 교회가 된 이유를 빤히 알고서도 이걸 그대로 방치한다면 그건 중대한 범죄다.

그동안 개신교는 만날 잡초만 잘랐다. 그러나 그건 시간 낭비다. 이제는 그 뿌리를 뽑아야 할 때다.

"지금 성전에는 화상과 우상들이 놓여져 있습니다. 불결하고 더러운 것들을

세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쯔빙글리(Ulrich Zwingli, 1484-1531)

돈을

쏟아부었습니까?"

-


423

설교 남용과 교회의 변질 인간의 메시지가 흥행하는 시대

나는 지난 글을 통해서 "설교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은 아니다"는 점을 지적한 바가 있다. 그 이유는 오직 성경만이 우리에게 특별히 계시된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설교집이나 성경주석이 하나님 말씀을 대신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아울러 현실적으로 설교자는 무오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그 오류의 가능성이 늘 상존한다. 이 세상에 무오한 사람은 없다. 설사


424

평생 신학에 매진한 전문 신학자라 하더라도 그가 무오한 존재는 아니다. "설교를 하나님 말씀으로 인정하자"는 주장은 마치 중세 교황의

교령이나

강론을

하나님

말씀으로

간주하자는

것만큼

몰상식한 말이다.

설교가 필요한 이유

그럼에도 우리는 설교의 중요성을 오해해선 안 된다. 나는 결코 설교 무용론을 지지하지 않는다. 설교는 반드시 필요하고 유익하다. 여기서는 우선 두 가지 이유만 강조해서 논하고자 한다.

첫 번째는 성경 본문에 대한 '문자적 이해의 문제'다. 성경은 선지자나

사도들에

의해

인간의

언어로

기록되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같은 성경을 읽고서도 서로 딴소리를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른바 문자 해석상에 이견이 발생한다.

설교가 꼭 필요한 이유는 '문자(Text)'만 읽지 말고 '내용(Context)'을 바르게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예를 하나 들자면 예수께서

"내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425

가졌고(요 6:54)"라 하셨는데 이는 우리에게 실제로 피를 마시라는 뜻은 아니다.

성경에는 직유나 은유 등 다양한 표현법이 존재한다. 그런데 이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매우 곤란하다. 특히 이런 문자적 해석을 가장 잘 악용하는 무리들이 이단이나 사이비 종교 집단들이다.

두 번째는 '시대적 적용의 문제'다. 가장 마지막에 쓰여진 성경조차 무려 2000 년 전의 이야기다. 시대적 배경뿐만 아니라 사회적 관습도 현재와는 아주 크게 다르다. 그래서 단순히 성경을 열심히 읽고 달달 외운다고 해서 그게 성경을 바르게 이해한 거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이는 마치 예수께서 할례를 받으셨으니 "오늘날 우리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논리와 유사한 경우다.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상황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유대적 관습의 사회가 아니다. 여자 성도 또한 '왕같은 제사장'의 신분이다. 성경에는 여자 사사와 여자 선지자도 있다. 그러니 여자가 목사를 못 할 이유가 전혀 없다. 더구나 개신교 목사는 제사장 직분이 아니라 오히려 교사의 직분에 가깝다.


426

따라서 성경의 특정 구절 몇 개를 곡해해서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니 지금도 문자 그대로 따라야 한다는 것은 대단한 무지의 소치다. 유감스럽게도 소위 정통이란 교단 속에도 여성 목사를 결사 반대하는 무식한 지도자들이 아주 많은 게 작금의 한심한 현실이다.

설교는 내용(Context)을 전달하는 사역

아울러 성경은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니라 역사 속에서 서서히 점진적으로 주어졌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된다. 그래서 구약의 성도보다 신약의 성도들이 훨씬 더 명료하게 복음의 진리를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현대의 성도들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 세례요한보다도 더 복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나는 현대 설교에 많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설교가 꼭 필요한 이유는 성경을 보다 바르게 이해하고 바르게 전하기 위해서다.


427

사실 문자만 전하는 건 그리 어려운 게 아니다. 부지런히 책만 나누어

주면

된다.

하지만

그걸로는

충분하지

않다.

예수와

제자들이 여러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성경을 풀어서 열심히 가르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반면에 당시 유대의 바리새 제사장들은 같은 성경을 들고서도 진리를 크게 오해했다.

요즘 십일조를 강요하는 목회자들 또한 같은 실수를 범하고 있다. 이는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지켰으니

우리도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는 논리적 오류와 별로 다르지 않다. 의무적 십일조는 구약 신정국가의 율법일 뿐이다. 그리고 그 율법의 정신은 신약에서 자원적 연보로 완성되었다.

예수의 직전 제자이며 신약 교회의 창시자인 사도들 중 단 한 명도 십일조나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가르친 사람이 없다. 당연히 사도들의 초대교회에서 십일조나 안식일을 시행한 사례도 전혀 없다. 그런데 한국 개신교가 안식일은 안 지키면서 유독 십일조에 집착하는 그 깊은 사연은 과연 무엇일까.


428

그러므로

가장

좋은

설교는

성경이

조명하는 내용을

바르고

정확하게 전하는 설교다. 이를 역으로 말하자면 성경의 진의를 바르게 전하지 못 하는 설교는 그저 인간의 사설이나 잡설이다. 그것은 명백히 변조나 위조다.

따라서 설교자는 항상 두렵고 겸손한 마음으로 강단에 서야 한다. 설교는 자신의 생각이나 지식이나 언변이나 인품을 과시하는 게 아니다.

설교는

자기

메시지를

전하는

아니다.

설교자는

하나님을 대리하거나 대신하는 게 아니다. 설교자는 메시지를 창작하는 사람이 아니라 단지 그것을 전달하는 메신저(전달자)다.

인간의 메시지가 변질의 근원

그런데 어떤 설교자는 자신이 '전달자'가 아니라 마치 메시지의 '생산자'라도 되는 양 처신한다. 남들이 모르는 계시나 비밀을 깨달은 무슨 불세출의 선각자나 대스승이라도 되는 양 권위적 태도를 취한다. 거의 목불인견 수준이다. 이른바 설교 남용의 시작이다.


429

흔히 유명 목사라는 위인들 중에 이런 부류가 많다. 자기가 메시지를 잘 생산해서 대형 교회가 된 줄로 착각한다. 그러니 그런 교회에선 하나님의 메시지는 단지 장식일 뿐이고 오히려 인간의 메시지가 흥행한다. 예수의 정신을 잊은지는 아주 오래다. 십자가 사역 대신에 십일조 장사에 몰두한다. 교회의 단물을 빨며 몸집 부풀리기에만

분주하다.

동네에선

만사형통이

진리고

만수무강이 복음이다.

그러나

진정한

전령이나

설교자는

연락병의

자신이

역활이라는

하나님의

사실을

계명을

알고

전달하는

분수를

지키는

사람이다. 설교는 나의 말이 아니라 주의 말씀을 전하는 사역이다. 메시지의 손상 없이 원형 그대로 전하는 게 설교자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다. 내 사상, 내 취향, 내 목표, 내 욕심, 내 권위 따위는 본문 메시지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건 도리어 설교가 오염되어 교회를 변질시키는 주요 원인이다.

만일

연락병이

중간에

제멋대로

명령서를

조작하면

영창감이고 전시에는 총살감이다. 게다가 연락병이

평시에는 무게 잡고

호통친다면 얼마나 우스운 작태인가. 강단에서 회중에게 훈계조로 말하거나,

반말하거나,

핀잔주거나,

겁박하거나,

성질내거나,


430

휘두르거나, 또는 우쭐하는 자는 설교자의 함량에 크게 미달하는 사람이다.

좋은 설교는 양들의 배를 부르게 하고 나쁜 설교는 목자의 배를 불린다. 좋은 설교는 교회를 세우고 나쁜 설교는 종교를 세운다. 좋은 설교는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고 나쁜 설교는 목사님 나라를 확장한다.

무엇보다 가장 나쁜 설교는 소경이 소경을 가르치는 경우다. 그러면 교회는 맹신과 광신과 등신을 넘어 아예 실신한다. 특히 강남에

이런

우글거린다.

교회가 그러니

제법

하나님의

많다.

초대형

마음을

건물에

모르는

맹신도가

인간들은

제발

계시를

통해

설교하지 말기 바란다. 그건 신성모독이다.

"설교자는

선지자가

아니다.

독보적인

직통

하나님으로부터 메시지를 받는 사람이 아니다." - 존 스토트(John Stott)


431

'목사교'는 변하지 않는다 내부 개혁의 한계

목사교라고 하면 불편해 하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 개신교는

사실상

장로나

집사는

허울뿐이고

목사가

주도하는

교회라는 데에 대해 큰 이견이 없다고 본다. 개교회의 당회장, 제직회장, 공동의회장을 대부분 담임목사가 홀로 독점하고 있다. 게다가

대부분

영구

집권이다.

들러리고 목사들이 주도한다.

교단

정치도

장로나

집사는


432

교회가 목사교가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소위 말하는 '삯꾼 목사'들 때문이다. 그들은 속이는 자다. 교회를 속이고 자신을 속인다. 이들의 도의는 위선이고 이들의 정의는 탐욕이다.

그럼에도 교회의 개혁과 회복은 쉽지 않다. 삯꾼 목사와 그의 제자인 맹신도들이 연합하여 동거하면 가히 천하무적이다. 그 둘이 작심하고 악을 행하면 누구도 막기 힘들다. 이단이 따로 없다. 교회법도

무효하고

사회법도

무기력하다.

교단에

고발해도

소용없고 법정에 고소해도 다시 나온다.

자신들의 비리를 막기 위해 교회 돈을 마구 가져다 쓴다. 결국 많은 경우 개혁적 성도만 지쳐서 상처를 입고 교회를 떠난다. 그러니 바른 말이 사라진 교회에서 삯꾼들은 더욱 기고만장하고 안하무인이다.

더구나 인간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만일 약간의 변화라도 있다면 그거야말로

정말

하나님의

은혜다.

그나마

하나님말씀에

순종하려는 노력이 인간의 죄성을 다소 개선하고 있는 것이다. 신학에선 그걸 흔히 성화의 과정이라고 말한다.


433

아무튼 교회에서 가장 잘 안 변하는 족속이 하나 있는데 그게 바로 삯꾼 목사들이다. 이들은 손에 성경을 들고 사기치는 자들이다. 바리새인이 안 변하고 중세 종교 귀족들이 잘 안 변한 것처럼 삯꾼은 변하지 않는다. 그리 쉽게 변할 인품이었다면 애초에 삯꾼이 되지도 않았을 거다.

근자에 나는 자비량 목회를 확대하자고 주장한 바가 있다. 자비량 사역은 삯꾼을 척결하는 가장 좋은 대안 중에 하나다. 구태여 자기 돈을

들여가며

열심히

사역할

삯꾼은

없기

때문이다.

근데

사방에서 "목사를 거저 부려먹으려고 한다"며 성토한다.

하지만 참으로 이상하다. 목사는 왜 자비량 사역을 하면 안 되는가. 성경엔 사실 영구직 유급 사역이 거의 없다. 제사장 지파인 레위인조차 24 개의 성읍에 주어진 초장에서 평생 농업에 종사했다. 각 반차에 따라 극히 제한된 숫자만이 매년 2 번 정도 제사를 담당했다. 그래서 어떤 레위인은 일생 동안 기껏 해야 단지 한두 주 정도 제사장직을 수행할 수 있었다.

게다가 유대교의 스승인 랍비들도 생업에 종사하며 사역했다. 예수님

당시의

유명한

랍비

힐렐(Hillel)은

목재

절단사였고


434

샴마이(Shammai)는

목수였다.

사도바울을

가르친

가말리엘(Gamaliel)도 힐렐의 제자다. 그러니 당시 유대 전통에 따라 랍비 가말리엘과 랍비 예수의 제자였던 사도바울이 자비량 사역을 한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초기 교회의 자비량 사역 전통을 유급 사역으로 변질시킨 주범은 중세

교회다.

그들은

교회의

직분을

제사장적

'사제직'으로

직업화하여 교권과 이권을 동시에 찬탈했다. 그 결과 교회가 얼마나 심각하게 부패했었는지는 이미 주지의 사실이다.

가나안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 밖으로 '안 나가'는 성도다. 그런데 삯꾼 목사의 교회당엔 예수가 없다. 성경은 설교를 멋지게 펼치기 위한 포장용일 뿐이고 인간의 잡술이 난무한다. 그러니 가나안 성도는 교회를 떠난 게 아니라 교회당을 떠난 거다.

나는 교회의 내부 개혁을 적극 지지한다. 그것은 가장 바람직한 개혁이다. 그러나 그게 도저히 안 될 경우가 있다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 목사교는 결코 변하지 않는다. 인간 역사에 스스로 욕심을 버리고 변화한 삯꾼은 거의 없다. 부패한 중세 교회도 무려 천 년이나 변치 않고 버텼다. 1 세기 예수와 제자들이 바리새인의


435

유대교를 떠나고 16 세기 종교개혁자들이 교황의 로마교를 떠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지금은 새로운 교회 공동체를 꿈꾸어야 할 때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막 2:22)."


436

칼뱅의 신정통치와 '사역적 이단' "중세 악마는 정통이란 괴물 속에 있었다"

"칼뱅은 잔인하고 절대적인 독재자였다." 이는 1974 년에 간행된 <옥스포드

교회사

볼테르(Voltaire)는

사전>에

"우리가

서술된

제네바의

내용이다.[1]

사도로

간주하는

그리고 칼뱅은

자신을 '프로테스탄트의 교황 반열'에 올렸다"고 혹평했다.[2]

사실 장로교의 창시자인 칼뱅은 매우 뛰어난 신학자이며 열정적인 사역자다. 그는 병약한 몸에도 불구하고 보통 하루 12-18 시간을


437

일했고 매주 약 5 번의 설교를 했다. 그리고 54 세의 나이로 죽기까지 성경 거의 전체에 대한 주석을 썼다. 특히 그가 27 세에 저술한 <기독교강요>는 개신교 신학의 초석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신학적 기여와 업적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시대착오적인 신정 통치

그럼에도

그의

사역에는

중대한

오류가

있었다.

흔히

일부

신학자들은 칼뱅이 세르베투스(Servertus)의 화형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고 따라서 그는 이단 처형에 큰 책임이 없다는 식의 주장을 편다. 하지만 그건 역사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없는 매우 심각한 오도이며 궁색한 변명이다.

칼뱅은 1546 년 2 월 그의 친구 파렐(William Farel)에게 쓴 편지에서 "만일 그가 제네바에 온다면 나는 그를 결코 살려서 돌려보내지 않을

것이다"고

분명히

말한

바가

있다.[3]

게다가

칼뱅은

세르베투스의 사형 9 년 후에 "그는 이단으로 처형당했고 그건 나의 의사에 따른 거다"라고 스스로 고백했다.[4]


438

당시 제네바는 시의회가 선출한 5 명의 목사와 12 명의 장로로 구성된 장로원에 의해 통치되었는데 그들은 극심한 폭압 정치를 행했다. 제네바의 모든 가정은 강제적으로 주일예배에 참석해야 했다. 이를 어기면 엄격한 처벌이 있었다. 또한 주중에 3 회 정도 설교가 있었는데 그 때도 가능한 참석이 의무다. 그리고 사냥, 도박, 축제, 오락 등을 금했다. 아이들의 이름은 반드시 성경에 있는 이름으로

지어야

했고

이를

어긴

어떤

아버지는

4

구금되기도 했다.

1545 년 제네바 시의회의 기록에 의하면 최소한 20 명 이상이 사탄의 사주로 역병을 돌게 한 마녀라는 죄목 아래 산채로 화형을 당했다.[5] 그 기록엔 다른 내용도 많다. 어떤 이는 세례식에서 웃었다고 3 일간 구금을 당했다. 한 농부 부부는 예배 후 귀가 길에 사업

이야기를

했다고

감옥에

갔다. 그리고

그루엔트(Jacques

Gruent)란 사람은 칼뱅이 위선자라고 비판했다가 처형당했다.

1542 년부터 1546 년까지 단지 4 년간 불과 인구 2 만 명의 소도시에서

무려

58

명이

처형당했고

76

명이

추방당했다.

원칙적으로 마녀, 동성애, 간통은 사형이었다.[6] 한 소녀는 부모를 구타한 죄로 참수형을 당했다.[7]


439

칼뱅은 이런 신정통치가 하나님의 율법을 충실히 지키는 거라고 생각했다. 오죽하면 제네바 학교의 교장이었던 카스텔로(Sabastian Castellio)는 "만일 그리스도가 제네바에 오셨다면 그분도 거기서 십자가형을 받았을 것이다"고 말했다.[8]

반기독교적 신앙 강요

카스텔로는

익명으로

그의

책(Should

Heretics

be

Persecuted)에서 제네바의 참상을 더욱 상세하게 기록했다.[9] 이 글에서는 그 내용을 모두 생략했지만 차마 말로 형언하기 힘들 정도다. 교계 일각에서는 그의 글이 너무 악의적이라 신빙성이 없다고 주장하며 묵살한다. 물론 그건 개인의 자유다.

하지만 나는 생각이 다르다. 한때 칼뱅의 동료였던 카스텔로는 결코 뜨내기 학자가 아니다. 그는 적어도 7 권의 저서를 쓴 당대의 유명한 신학자다. "그의 증언이 100% 거짓이다"는 주장은 "그의 증언이 100% 진실이다"는 논리보다 훨씬 설득력이 없다. 더구나


440

그의 글은 매우 구체적이다. 피해자의 이름과 정황까지 자세히 서술한다.

어찌보면

익명으로 책을 낸 자체가 당시 제네바의 강압적 신정

통치를 역으로 반증한다. 표현의 자유가 심하게 제한되고 그 처벌이 너무 중하였기에 그리 한 것이다. 종교의 자유가 있었다면 굳이

익명으로

이유가

없다.

실제로

칼뱅의

제네바는

반대자들의 의사 표시가 자유로운 도시가 아니었다. 그저 툭하면 이단이나 마녀로 몰아 처형했다.

그리고 이는 단지 제네바 뿐만 아니라 유럽의 다른 도시에서도 흔히 있던 일이다. 그 가장 큰 피해자는 유아세례를 거부했던 재세례파

신도들이었다.

중세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양쪽의

박해자들은 고작 세례에 대한 교리 차이를 이유로 무고한 사람들을 마구 죽였다. 종교가 눈이 멀면 이처럼 인간의 손에서 비정한 살인 병기가 되기도 한다.

만일 당신이라면 책 한 권의 내용을 허위적 사실로 가득 채울 수 있나. 나는 카스텔로의 책을 허구 소설이라고 단정하는 사람들이


441

더 무모하다고 본다. 칼뱅의 이단 처단에 대한 정체성은 이미 세르베투스 화형 사건에서 명백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유대교의 이단으로 몰려 처형당했다.

그런데

예수를

따른다는

칼뱅이

다른

사람들을

이단으로 판정하여 처형하는 모순을 행했다. 그래서 선배 개혁자인 루터(Martin Luther)조차 제네바에 대해 "그들은 사형 집행으로 모든 논쟁을 해결했다"고 평했을 정도다.[10]

가톨릭의 이단 사냥으로 인해 친동생을 잃었던 아픔을 지닌 칼뱅이 스스로 다른 사람들을 같은 죄명으로 처형했다는 사실은 정말 이해하기 힘들다. 그의 과오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신앙 강요'라고 할 수 있다.

칼뱅은 중세 교회의 이단심문식 실수를 그대로 다시 반복했다. 시대착오적인 신정통치를 꿈꾸며 이단과 불신앙을 처형과 강압으로 해결하려

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목적이라도

방법이

불의하면 그건 결국 심각한 범죄다. 우리가 역사와 신학을 바르게 알아야 하는 이유다.


442

사역적 이단, 교회 부패의 원흉

지금 한국 개신교의 사역은 과연 어떠한가. 신학만 정통이면 그 사역도 저절로 정통일까. 오늘날 많은 교단에서 수시로 발생하고 있는 그 불의하고 부당한 수많은 판결들을 우린 무엇으로 설명해야 할까. 세상 법정에서 유죄 판결 받은 목사들도 유독 교단과 교회에선 무죄라고 우긴다.

더구나 이는 단순히 장로교만의 문제가 아니다. 다른 개신교 교단들도 마찬가지다. 간혹 어쩌다 처벌이 있어도 그저 솜방망이다. 덕분에 감옥에 있어야 마땅할 잡상인들이 긴옷을 입고 여전히 강단에서 큰소리로 설교하고 있다. 교회의 정화 기능이 이미 충분히 썩었기 때문이다.

개신교 신학의 토대를 세운 칼뱅마저 그 사역에 큰 오류가 있었다. 신학은

정통인데

사역은

밥통이었다.

마치

구약의

많은

유대인들이 이방인을 '지옥의 땔감' 정도로 생각했던 것처럼 그는 이단과 불신앙을 진멸과 강압의 대상으로 여겼다.


443

교회는

두려운

마음으로

사역해야

한다.

신앙은

분위기

조작이나 강압으로 되는 게 아니다. 중세 시대의 진정한 악마는 당시 이단으로 몰렸던 집단이 아니라 오히려 소위 정통이란 괴물 속에 있었다.

정통이

실족하면

이단보다

무섭다.

교회가

힘이

생기면

신정통치의 유혹을 강하게 받는다. 자기만 홀로 진리인 줄 안다. 그래서 때로는 이단보다 더 잔혹하고 사이비보다 더 철면피하다. 이단도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는 않는다. 그런데 중세 가톨릭과 개혁

교회는

미국으로

가차없이 청교도들도

사람을

죽였다.

저질렀다.

이와

신앙의

유사한 자유를

실수는

찾아

사람들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자 오히려 다른 교파를 박해했다.

따라서 다수가 모인다고 저절로 훌륭한 정통이 되는 건 아니다. 제네바 인구 전체가 다 모여도 틀릴 수 있다. 잡다하게 많이 안다고 정통도 아니다. 교회당이 크다고 정통도 아니다. 목소리가 크다고 정통도 아니다. 힘이 있다고 정통도 아니다. 바르게 알고 바르게 살아야 비로소 참된 정통이다.


444

아울러

'신학적

이단'만이

이단이

아니다.

차라리

공개적으로

분류된 이단은 그리 무섭지 않다. 진짜 사악한 이단은 정통을 표방하면서

교회

속에

천사처럼

위장하고

서식하는

'사역적

이단'이다. 이들은 자기 신학을 역행하며 돈과 권력을 따르는 반기독교적 삯꾼 집단이다.

이들은 교회에 충성하며 돈만 잘 바치면 나머지는 그다지 상관하지 않는다. 자기 교인들이 실제로 세상에서 얼마나 힘들게 살고 있는지도 별로 관심 없다. 신학과 예배는 그저 돈을 더 멋지게 걷기 위한 장식이며 극장쇼일 뿐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더러운

이단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상습적으로 헌금 강요, 헌금 남용, 거짓말, 설교 표절, 뇌물 수수, 성추행, 재단 사유화, 목회 독재, 그리고 교회 세습을 일삼는 자들이다.

"그는 사람이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분이십니다(욥기 34:11)." 현대인의성경


445

<참고 자료>

[1] The Oxford Dictionary of the Christian Church, edited by FL Cross and EA Livingstone, (OUP: New York, 1974, 2nd ed.), p. 223. [2] Philip Schaff,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vol. 8, chap. 8. [3] Bonnet and Gilchrist, Letters of John Calvin: Compiled From the Original Manuscripts and Edited With Historical Notes, 2:19. [4]

Responsio

ad

Balduini

Convicia,

Opera,

IX.

575

(ccel.org/a/schaff/history/8_ch16.htm) [5] The Minutes Book of the Geneva City Council, 1541-59 (translated by Stefan Zweig, Erasmus: The Right to Heresy) [6] E. William Monter, "Crime and Punishment in Calvin's Geneva, 1562," in Articles on Calvin and Calvinism: Volume 3: Calvin's Work in Geneva, ed., Richard C. Gamble (New York: Garland Publishing, Inc., 1992), 272. [7] Fear of the Word by Eli Oboler, pp. 60-62. [8] How the Idea of Religious Toleration Came to the West by Perez Zagorin. [9] Stefan Zweig (1951). Erasmus; The Right to Heresy: Castellio against Calvin. London: Cassell.


446

[10] Juergan L. Neve, A History of Christian Thought, vol. I, p. 285.


447

준삯꾼 목사가 많다 개신교가 싸잡아 비판받는 이유

좋은 목사가 많다는 건 누구나 잘 안다. 크게 감사한 일이다. 만일 나쁜 목사만 있다면 개신교는 진작에 망했을 것이다. 그리고 일부 목회자가

비리를

저지른다고

해서

모든

목사나

모든

교회를

비난하면 안 되는 것 또한 지극히 옳은 말이다.

어떤 이는 목사가 홀로 교회를 주관하지 않고 장로나 집사 등 다른 제직들과 협의하여 함께 사역하도록 제도적 장치가 잘 되어 있다고 주장하며 목사 비판에 대해 강하게 반발한다. 물론 얼듯 들으면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건 눈 가리고 아웅하는 소리다. 장치만


448

있으면 뭐 하나. 그게 고장나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지 이미 아주 오래다.

이론대로 하자면 횡령 목사, 표절 목사, 성추행 목사, 그리고 세습 목사는 모두 즉시 척결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실제로 그게 제대로 처리된 적이 별로 없다. 겉으로만 하는 척 우물쭈물 시간 떼우다가 솜방망이 처벌이나 유야무야한 게 대부분이다.

한국 굴지의 대형 교회를 담임한 C 목사, J 목사, O 목사, K 목사 등의 화려한 범죄 행각이 그 좋은 증거다. 그래서 이제 어떤 교회에선 표절, 헌금 횡령, 성추행 따위는 아예 관심거리조차 안 되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무엇이 문제일까. 왜 이런 악순환이 그치지 않을까.

어느 동네 경찰서에 부패한 경관이 한 명 있다고 하자. 헌데 그 경관이 나가서 횡령, 뇌물, 금품수수, 협박, 사기 등 온갖 악행을 저지른다. 물론 신고가 들어왔을 때 그를 조사하여 바로 해임하면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범죄 사실을 빤히 알면서도 동료 경관들이 침묵하거나 보호한다면 과연 그 경찰서는 통째로 함께 욕을 먹을까 안 먹을까. 이건 어린 아이라도 알 수 있는 상식이다.


449

일제강점기에 모든 일본인들이 다 악행을 저지른

건 아니다.

그런데 안 그런 일본인도 많았으니 일본이 나빴다고 비판하면 부당한 건가. 요즘 일부 목회자들의 논리가 딱 이 정도 수준이다. 모든 목사가 부정을 저지르지 않았으니 교회를 함부로 비판하지 말라고 한다. '비판자'에 대해서는 날을 세우며 뜨겁게 반발하는 자들이 정작 그런 비판의 원인이 된 '비리자'에 대해서는 얌전히 침묵한다. 작금의 개신교가 싸잡아 욕 먹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프로테스탄트는 거룩한 저항자였다. 중세 교회의 불의에 저항하고, 불평등에 저항하고, 그리고 죄에 저항했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요즘 많은 직분자들은 불의를 못 본 척 하며 그에 대해 저항하지 않는다. 굳이 사회의 불의까지 갈 것도 없다. 교회 내의 갖은 비리마저 너무 관대하고 동조적이다.

불의한 십일조 강요, 부정한 헌금 유용, 불행한 교회 세습, 그리고 부당한 교권 독점에 대해 침묵하는 목사들이 너무 많다. 그나마 사석에서는 몇 마디 하나 공석에서는 대부분 꿀 먹은 벙어리다. 그나마 차라리 벙어리는 낫다. 도리어 돈과 권력에 적극적으로 아첨하는 위인들도 많다.


450

나는 이들을 '준삯꾼 목사'라고 정의하고 싶다. 도적질하는 자만이 범죄가 아니라 그런 도적질을 방임하거나 방조하며 기득권을 함께 누리는

역시

중대한

범죄이기

때문이다.

개신교가

모두

한통속이라고 싸잡아 욕을 먹고 있는 건 당연한 것이다. 만약 목회자들 스스로 자체 정화할 능력이 있었다면 교회가 현재처럼 심하게 망가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교회 개혁이 늘 겉도는 이유 역시 유사하다. 흔히 좋은 목사가 많다는 주장이 강하지만 막상 교회 내에 만연하는 반복음적 불의에 직면할 때 자신의 안위를 무릅쓰고 저항하는 목사가 매우 드물다. 아주 극소수다.

이는 장로나 집사도 마찬가지다. 웬만하면 못 본 척 외면하거나 침묵한다.

심지어

어떤

제직들은

목사의

시녀로

자처한다.

이들에게는 복음의 안위보다 자신의 안위가 중요하다. 자신의 영혼을 도와주는 참된 목사는 경시하고 오히려 자신의 재산을 탐하는 삯꾼 목사에게 충성을 바치는 게 바로 기독교 환자인 맹신도들의 특기다. 아울러 이런 교회는 '복음'보다 '복' 그 자체에 더 몰두한다. 복만 준다면 예수도 팔아먹는다.


451

그런 면에서 보면 2000 년 교회 역사에 거대한 이정표를 세우고 있는 한국 특유의 '목사교'는 삯꾼, 준삯꾼, 그리고 맹신도의 완벽한 합작품이다.

그리고 사실 참된 목사와 삯꾼 목사를 구별하는 법은 그리 어렵지 않다. 진실은 단순한 것이다. 목사의 속주머니가 진정으로 회개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부유한 목사'란 '가난한 부자'라는 말만큼이나 모순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요즘은 옛신앙의 거룩한 저항자들이 더욱 그립다.


452

“교회는 창녀다” 맹신은 돈이 된다

"교회에선 생각이 필요 없다." 어느 유명 목사가 하신 말씀이다. 교회에선 무조건 '아멘'이면 되고 단지 "성령의 생각에 따라 순종만 하면 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이런 논리에 동조하는 목회자들이 의외로 아주 많다.

그러나

성령을

구실로

다소

포장하기는

했지만

이는

매우

비논리적인 발언이다. 그럼 성령의 생각을 따르려면 진정 내 생각은 필요 없다는 말인가. 도대체 아무 생각 없이 어떻게 성령의 생각을 구별할 수 있다는 말인지 그 자체가 모순이다.


453

더구나 어떻게 하는 것이 성령의 생각을 따르는 것일까. 이 주장 또한 매우 애매모호하다. 기도나 묵상을 하면 성령께서 직통 계시나 특별 지침이라도 주신다는 걸까. 그건 아닐 것이다. 아마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리고 교회에서 그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은

목사다.

그러니

결국

목사의

말에

순종하라는 결론이 저절로 연상된다.

물론

신자가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생각하며

사는

매우

당연하고 중요한 일이다. 정작 심각한 문제는 과연 교회의 결정은 항상 옳고 설교자의 가르침은 언제나 성경적으로 바른가 하는 점이다.

이건 굳이 지루한 논쟁을 하지 않더라도 잘 알 수 있다. 우선 지나간 교회 역사를 잠시 살펴 보면 된다. 유감스럽게도 지상의 유형 교회는 항상 옳지는 못했다. 초대 교회 이후로 무수한 오류를 범했고 현재도 그런 비판에서 별로 자유롭지 않다.

로마교회의 교황 제도, 사제 제도, 고해 성사, 평신도 성경 금지, 설교권 독점, 중세 십일조, 십자군 전쟁, 이단 처형, 성직 매매,


454

면죄부 판매, 개신교의 제네바 신정 통치, 식민지 지배, 인종 차별, 그리고 노예 제도 및 원주민 학살 묵인 등이 대표적인 교회의 오류다.

현대 교회의 오류 역시 만만치 않다. 교권 독재, 헌금 유용, 헌금자 공개, 십일조 강요, 설교 표절, 뇌물 수수, 고액 강사비, 성추행, 직분 계급화, 여성 직분 차별, 그리고 교회 세습이 그치지 않고 있다. 게다가 설교자들은 강단마다 서로 다른 소리를 하고 있다. 교인들을

동원하여

불의한

적폐 세력을

노골적으로

비호하는

설교자도 많다. 이게 한국교회의 적나라한 현실이다.

우리는

교회를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눈에

보이는

교회는

죄인들의 공동체일 뿐이다. 하나님나라에 속한 무형 교회는 당연히 순결하고

거룩하지만

지상의

유형

교회에는

알곡과

가라지가

상존하고 성도와 강도가 공존한다. 오히려 진짜 인간 망종들은 감옥보다 교회에 더 많다. 그들은 인간의 영혼을 약탈한다. 그래서 교회가 방심하면 언제든지 순식간에 강도의 소굴로 변할 수 있다.

이는 예수께서 지적하신 그대로다. 당시 제도권 교회를 보면 차라리 세리와 창녀는 회개하고 돌이켰지만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


455

등 소위 종교 지도자라는 자들은 도리어 끝까지 하나님의 도를 배신하고 자신의 배를 채웠다.

그러니 성령의 생각을 진정 잘 따르려면 지도자들에 의한 맹신을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 생각이 필요 없거나 아예 생각을 안 해야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욱 신중히 생각을 해야 옳다. 특히 교회의

제직들은

지금

자신의

교회

공동체가 하는

사역이나

가르침이 참으로 성경의 정신을 따르는 것인지 진지하게 생각하고 또 다시 생각해야 마땅하다.

하나님께서는 머리를 생각하라고 주신 것이지 모자나 쓰라고 주신 게 아니다. 참된 신앙은 아무 생각 없이 비상식이나 무식에 아멘을 남발하며 맹종하는 게 아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이 백성이 지식이 없어 망한다고 했다.

아무리

조심하고

고심해도

틈만

나면

실수하는

인간인데

교회에선 생각이 필요 없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그러니 많은 신도들이 늘 순종과 맹종을 착각하고 신앙과 맹신을 구별 못 하게 되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생각이 너무 많아서 문제가 아니라


456

반대로 생각이 너무 없어서 문제다. 어떤 교회에선 맹신과 맹종이 오히려 거룩한 미덕이 되었다.

요즘 "멀쩡하던 사람도 교회만 오면 바보가 된다"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맹신은 믿고 싶은 것만 믿고 맹종은 하고 싶은 짓만 한다. 그래서 사회에서 교수, 법관, 외교관, 장성, 사장, 장관이어도 교회만 오면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돈 바치는 복쟁이 멍청이가 된다. 게다가 일부 교회들은 도리어 그런 맹신을 독실한 신앙으로 포장하며 적극적으로 조장하고 추구한다. 이처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니 개신교가 고작 돈 바치고 복 받는 무당 잡교 수준이 된 것이다.

특히 삯꾼 목사들에겐 맹신처럼 좋은 밥상이 없다. 그들에겐 가장 만만한 게 순진한 교회다. 삯꾼들은 한국교회가 개신교 역사상 가장 부패한 교회가 된 원인이 그런 맹신에 있다는 걸 잘 알면서도 열심히 맹신을 부추긴다. 맹신은 언제나 돈이 되기 때문이다.

일찍이 초기 교회의 위대한 교부 어거스틴은 매우 충격적인 말을 했다. 그때는 중세 교회가 본격적으로 타락하기 훨씬 전이다. 그럼에도 그는 이미 당시 교회의 정체성을 깊히 간파하고 제도권


457

교회를 창녀에 비유했다. 그나마 창녀는 단순히 몸을 팔아 돈을 벌지만 중세 교회의 성직자들은 영혼까지 팔아 돈을 챙겼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교회는

항상

두려운

마음으로

자성하고

겸손해야 마땅하다.

한국교회는 너무 거룩한 척 할 필요 없다. 도리어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성도들은 보기 괴롭다. 누가 보아도 분명히 최저질 삯꾼인 어느 초대형 교회의 유죄 판결 목사조차 두꺼운 얼굴에 기름칠을 하고 여전히 불세출의 지도자 행세를 하니 세상이 교회를 비웃지 않을 리가 없는 거다.

"교회는 창녀다. 하지만 그 여인이 내 어머니다(The church is a whore, but she is my mother)," - 교부 어거스틴(Augustine, AD354430)


458

'목회자'와 '목회업자' 성도보다 높은 교권이란 없다

국가의 주권은 누구에게 있을까. 당연히 국민에게 있다. 대통령이나 수상에게 있다고 답하는 사람은 무식하다는 소리를 들어도 싸다. 그럼 교회의 교권은 누구에게 있을까. 이 역시 당연히 교인에게 있다. 담임목사나 장로에게 있다고 답하는 사람은 무식을 넘어 아예 무뇌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지만 현실적인 교회 정치나 운영의 차원에서 본다면 최종 의사 결정권은 회중에게 있다. 당회나 제직회 등 여러 기관들은 단지 교인 총회(공동의회)의


459

선출이나 위임을 받아 제한된 직무와 권한을 수행할 뿐이다. 목사직도 마찬가지다.

설교직 직업화가 부패의 촉매

그래서 본래 개신교에는 성도보다 높은 교권이란 없다. 만일 이를 부인하는 목사가 있다면 그는 차라리 개신교를 떠나 다시 중세 교회로 돌아가는 게 좋다.

그런데 이렇게 당연한 사실이 왜 어떤 교회에선 잘 안 지켜질까. 많은

경우

담임목사가

당회나

제직회를

어용화하여

사실상

독재한다. 또는 반대로 당회 내의 영향력이 큰 특정 장로가 갑질하며 목회자와 교인을 오도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독재 국가의 정치 지도자가 군부와 언론을 장악하고 국민의 주권을 우롱하듯 교회 안에도 강단과 교권을 장악하고 교인의 주권을 우롱하는

자들이

자주

있다.

그리고

집사보다는 소위 직업 목회자란 사람들이다.

대부분은

장로나


460

교회 역사를 보면 전문적인 직업 성직자들이 부패하지 않은 시대가 극히 드물다. 그 이름이 무엇이든 교회의 직분이 금전적 댓가를 당연시하며 받는 '직업'이 되는 경우 부패는 시간 문제다. 물론 개별적으로 보면 신실한 목회자가 적지 않으나, 전체적으로 보면 목회 시스템이 점차 변질하여 결국엔 총체적인 부패를 막기 어렵다. 직분의 직업화는 결과적으로 이권이나 생업에 직결되기 때문이다.

내가 설교직의 직업화에 그다지 감동받지 못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모두 같은 장로인데 왜 '다스리는 장로'는 직분이고 '가르치는 장로'는 직업이 되었을까. 서당개도 3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했는데 왜 그 많은 장로나 집사들은 50 년이나 교회 생활을 해도 짧은 설교 하나 못 하고 만날 목사만 의존하고 있을까. 모든 성도는 왕 같은 제사장이다. 진정한 제사장이라면 설교를 못 할 이유가 없다.

요즘 주요 교단들 역시 직업 목사 제도의 그 태생적 한계를 매우 잘 보여준다. 어떤 교단은 아예 목회업자들의 권익을 보호하는 노동조합처럼 변질했다. 누가 보아도 죄질이 나쁜 횡령 목사, 성추행 목사, 표절 목사, 그리고 세습 목사를 교단은 방관 또는 방조하고 있다. 교단의 자정 능력이란 그저 겉치장일 뿐이다.


461

겉으로는

공의를

말하지만

뒤로는

개인의

사욕에

굴종하는

직분자들이 너무 많다.

교회 부패는 고의적인 구조악

박해

시대에

교회가

부패한

적은

없다.

교회가

성장하거나

흥행하여 세력이 커지고 부가 쌓일 때 항상 타락했다. 돈과 권력은 변절한 교회의 영원한 올무다.

그래서 사실 논리적으로만 본다면 교회의 부패를 막는 방법은 그리 어려운 게 아니다. 돈을 쌓지 않고 부당한 권력을 제거하면 된다. 제 아무리 헌금이 넘쳐 흘러도 해마다 그걸 모두 정당한 사역에 바르게 털어 쓰면 된다. 재정 관리를 엄격히 해서 감히 구더기가 넘보지 않게 하면 된다.

넘치는 헌금으로 자기 세력 확장을 위한 반복적 예배당 증축, 재단 설립 및 사유화, 담임목사의 영향력 확대를 위한 부적절한 지출, 고액 연봉 등에 사용되니 교회가 부패한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462

구제비는 고작 전체 헌금의 4%도 안 된다. 교회가 해마다 자기 배만 채우고 있는 셈이다.

만일 대다수 목회자가 귀족처럼 부유하게 살 수 있다면 목사 안 할 삯꾼이 어디 있겠는가. 따라서 삯꾼을 조장하며 키워주는 건 전적으로 교회의 고의적이며 고질적인 구조악 때문이다. 그리고 신도들의 맹신과 맹종이 이런 제도적 악의 토양이다.

작은 교회에는 무슨 대단한 권력이 있을 리가 없다. 세상의 권력을 추구하는 목회자들은 반드시 교회 대형화를 추구한다. 삯꾼들은 교회가 커져도 분립 안 한다. 그들에게 교회 성장, 성전 건축, 전도, 선교는 그냥 겉으로 내세우는 명분일 뿐이다. 그들의 애타는 마음은 언제나 돈과 권력에 있다.

한국교회에는 '목회자'가 있고 '목회업자'가 있다. 목회자는 양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나, 목회업자는 자신을 위해 양을 희생시킨다. 목회자는 자신을 바쳐 산 제사를 드리고, 목회업자는 양을 바쳐 죽은 제사를 드린다. 주인의 양을 알고 사랑하는 것은 목회고, 자기 양의 양털만 깎는 것은 목축이다.


463

그나마 세상의 목축 업자는 자기 양을 거의 다 구분하여 잘 안다. 심지어 어떤 유목민은 양이 아프면 방으로 데려와 함께 자면서 돌본다. 그런데 대형 교회의 담임목사란 위인들은 자기 교인의 이름은 커녕 얼굴조차 모른다. 그러니 대형 교회 목회는 목축만도 못 하다는 비난을 받고 있는 건 극히 당연하다.

돈을 사랑하는 목사

미국 초대형 교회의 오스틴 목사는 정말 돈을 사랑하는 목사다. 그는 무려 천오십만불(약 120 억 원)에 구입한 호화 저택에 살고 있다. 그의 재산은 4 천만불(약 480 억 원) 이상이라고 한다. 그 돈이 모두 어디서 나왔을까. 연봉이든 책이든 그건 사실상 예수 이름을 팔아서 챙긴 돈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평생 가난하게 사셨는데 그는 그런 설교 결코 안 한다. 기껏 한다는 말이 "당신이 위대한 일을 하기 위해, 사람들을

돕기

위해,

그들을

축복하기

위해

돈을

모은다면,

하나님께는 아무 문제가 안 될 것이다!"고 떠벌인다. 하지만 그건 기만이며 말장난이다.


464

저런 부류의 목사들이 자기 재산을 털어 다른 사람들을 전심으로 돕는 걸 본 적이 별로 없다. 어쩌다 남을 돕는다 해도 그들은 주로 교회 돈으로 생색을 낸다. 후배 선교사들이 찾아와도 자기 개인 돈으로 후원하는 목사는 극소수다. 대부분 교회 돈을 내주고 무게 잡는다.

한국 중대형 교회의 귀족 목사들 형편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사람들은 늘상 말로는 성경대로 살자고 하면서 '부자가 되려는 생각마저 버리라'고 하신 하나님 말씀은 절대로 가르치지 않는다. 또한 스스로 따르지도 않는다. 그런 면에서 '부자 목사'는 성직으로 위장한 최저질 종교 사기꾼이다.

하여튼 너절한 핑계를 대며 교회 장부의 공개를 복잡하게 하거나 또는 무슨 명목이든 영수증 없이 교회 돈을 쓰는 목사는 결단코 상종도 하지 마시기 바란다. 어느 교회든 종교 영업의 신호탄은 언제나 돈으로 시작된다. 그런 자에게는 구태여 신학이나 교리를 따질 가치도 없다. 그는 무조건 목회업자다.


465

"부자가

되려고

공동번역)."

애쓰지

말고

그런

생각마저

버려라(잠

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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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병에 걸린 기독교인들 '교회 놀이'와 '예배 장사'

예수를 믿는다는 건 고작 '교회 놀이'에 몰두하라는 게 아니다. 나는 어떤 목회자들이 왜 만날 교회와 예배만 노래하는지 그 속내가 진정 의심스럽다. 도대체 하나님은 오직 교회당 안에만 계시거나 또는 예배 중에만 임재하신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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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주의의 허구

최근 어느 대형 교회 담임목사의 설교를 들었다. 여러 잡다한 말을 많이 했지만 그 결론은 단순했다. 하나님의 은혜를 듬뿍 받으려면 교회에 더 열심히 나오라고 한다. 주일예배만 딸랑 한 시간 채우고 가지 말란다. 그는 수요예배와 금요예배와 새벽예배까지 꾸준히 참석하면 아주 큰 은혜를 체험하게 된다고 장담했다.

일부 목회자들은 평생 직장 생활을 제대로 안 해봐서 그런지 생계로 인한 교인들의 아픔과 고통을 잘 모르는 것 같다. 평일 내내 직장이나 생업으로 시달리다가 그나마 주말에야 조금 쉬는 게 가능한데 교회는 저녁 예배나 새벽 집회까지 더 나오라고 난리다.

그냥 먹고 사는 것만도 힘들어 쓰러질 지경인데 교회마저 피곤한 삶을

더욱

쥐어짠다.

그러다

이에

순종하지

않으면

믿음이

시원찮은 사람으로 간주한다. 그러니 형제나 친구나 친인척이나 이웃까지 제대로 돌볼 여유가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주변의 소문을 들어보니 그 목사는 기득권의 단맛을 상당히 즐기고 있는 듯 했다. 물론 평소에 십일조를 엄청 강조해서 고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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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봉에 아주 잘 먹고 잘산다. 게다가 교인들에게 설교하는 말투도 다분히 권위적이고 버릇이 없다. 신자로서 겸손한 구석이라곤 눈 씻고 찾아도 보기 힘들다. 이런 시대착오적 설교자 때문에 다른 신실한 목회자들까지 덤으로 매도 당하는 건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아무튼 나도 예배에 열심히 참석하는 게 무조건 나쁘다는 건 아니다. 정작 문제는 그동안 한국교회에 예배가 부족해서 이 모양 이 꼴이라고 생각하는지 먼저 묻고 싶다. 아마 전세계에서 가장 예배와 집회가 많은 교회가 한국교회일 거다.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거의 이단 수준이다. 한국교회보다 더 집회가 많고 극성스런 교회는 이단이나 사교 집단 외에는 거의 없다.

그럼에도 요즘 온갖 부정과 비리를 주도하거나 동조하며 교회를 가장 크게 망친 자들이 누군지 한번 따져보자. 수십 년이나 시계추처럼 교회를 왕복하며 예배와 집회를 가장 많이 참석한 목사와 장로들이 그 주범이 아닌가. 과연 그들이 예배와 설교가 부족해서 그처럼 추잡하게 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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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을 더럽힌 제사장들

예수님 당시에도 성전을 가장 더럽힌 자들은 오히려 성전에서 주야장천 살다시피 하던 제사장들이었다. 그런 종교 지도자들이 성전

마당을

장사판으로

만들었고

가난한

과부의

가산까지도

삼켰다.

교회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교회 놀이를 신앙 생활로 착각해선 안 된다. 소금은 세상에 흩어져야 비로소 제 기능을 다 하는 것이다. 소금이 예배당 속에서만 북적거리면 소금 기둥이나 소금 창고가 될 뿐이다. 교회가 번창해서 돈과 세력과 건물과 창고를 높히 쌓아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라는

생각은

단지

삯꾼들의

달콤한

기만이다.

삯꾼은 언제나 우리에게 광명의 천사로 다가온다. 그들은 누구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는 척 위장한다. 그 위선이 얼마나 깊숙히 습관화하고 생활화했는지 심지어 자기 자신조차 속을 정도다. 그래서 자신들이 정말 대단한 특권과 능력을 지닌 하나님의 특별한 종이라고 수시로 착각한다.


470

하지만 그들이 정말 사랑하는 건 교인이 아니라 교인의 돈이다. 목사니 장로니 그리고 교수니 하는 직함은 그냥 허울 좋은 사업용 간판이다.

나는 많은 목사들이 예배를 찬미하며 뜨겁게 강조할 때마다 걱정이 앞설 때가 많다. 오늘날 예배의 정의와 절차와 내용을 누구 마음대로

정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예배는

근본적으로

제사가

아니다. 그건 '의식'이라기보다는 '경배'라는 의미에 핵심이 있다. 사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매주 '예배 의식'을 행하셨다는 기록은 단 한 줄도 없다. 요즘처럼 예배가 그토록 중요했다면 왜 성경은 그것을 특별히 강조하지 않았을까.

랍비 예수는 다만 안식일에 회당에서 읽고 가르치셨을 뿐이다. 그건 제사적 의식이 아니라 그냥 일상의 생활이었다. 때로는 청중에게 질문도 하시고 답변도 하셨다. 나중에 사도들도 여러 회당에서 같은 방법으로 가르쳤다. 본래 회당은 발언자와 청중이 양방향으로 자유롭게 토론하고 상호 교류하던 공간이었다. 물론 그래도 그걸 굳이 예배 의식이라고 주장한다면 나도 할 말은 없다. 그러나

적어도

현재

우리가

시행하고

달랐다는 점을 분명히 인정해야 한다.

있는

공예배와는

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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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 랍비들이 회당에서 성경을 배우고 가르친 것 역시 예배 의식이라기보다는 공부나 교육이나 생활이었다. 개인의 집에서 가르치기에는 협소하고 불편하니 회당을 세우고 모인 것이다. 회당은 제사 의식을 행하던 성전이 아니다. 그곳은 모임과 배움과 소통의 장소였다. 그런 면에서 일방적으로 목사만 말하는 주입식 설교 중심의 개신교 예배는 중세의 사제 중심 미사보다도 더 큰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이는 회중이 관객이 된 다분히 기형적인 예배다.

교회주의로 무장한 삯꾼들

그러나 사실 신자에게는 더 중요한 예배가 있다. 성도가 있는 곳이 성전이고 그 성도의 삶이 예배다. 기도하고, 회개하고, 찬양하고, 감사하고, 나누고, 봉사하고, 그리고 서로 사랑하는 삶이야말로 진정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다. 성경은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6)."고 말한다. 따라서 교회에서의 공예배와 봉사 역시 단지 그런 '예배적 삶'의 극히 일부분임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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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학을 연구한 신학자 깁스(Gibbs)는 예배를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감사한 마음이 넘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영혼이 쉼을 누리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구태여 그런 정의가 아니더라도 예배는 근본적으로 삶 속에 있는 것이지 결코 중세 교회의 미사처럼 예식이나 형식 속에만 제한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신약 성경 어디에도 예수와 사도들은 오늘날 우리가 열심히 드리는 의식으로서의 예배 행위를 강조한 경우는 보기 힘들다. 만일 그런 명령이 있었다면 아마 삯꾼들은 그런 예배 의식을 더욱 심화하고 종교화하여 두고두고 뼛속까지 우려먹었을 거다. 허나 사도들의 교회는 단지 예수의 부활을 기념하며 주일에 모였을 뿐이다.

아울러 초대교회에서는 집회에 매주 참석 못 했다고 마치 무슨 큰 죄라도 지은 양 함부로 교인을 정죄하는 그런 맹신적 행태도 없었다.

적어도

그들은

'주일

성수'를

율법화하여

가르치지는

않았다. 특히 초기 200 년 동안의 박해 시대엔 무슨 수로 매주 집회가 항상 가능했겠는가. 미국의 아미쉬공동체는 과거 종교개혁 당시 혹독한 박해를 받아 피하던 시대적 관습에 따라 지금도 2 주마다 예배를 드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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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공예배가 불필요하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그러나 마치 예배 시간에만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것처럼 호들갑떨지는 마시기 바란다. 하나님은 결코 예배당 속에 갇힌 분이 아니다. 예배로 사람을 유혹하고, 예배로 사람을 가두고, 예배로 사람을 오도하고, 그리고 예배로 장사하는 자들은 예외 없이 모두 삯꾼이다.

그들은 항상 예배라는 좋은 이미지로 영업을 하고 설교라는 이름의 개인기로 사람을 기만한다. 하지만 그런 꼼수들은 본래 이단들이 즐겨 쓰는 수법이다. 지금은 '교회 놀이'와 '예배 장사'를 신중히 구별하고 척결해야 할 때다.

교회를 사랑하고 섬기는 것은 매우 귀한 일이다. 그러나 가정을 사랑한다고 해서 집만 지키면 그건 백수다. 군인의 근무지는 배우고 익히는 훈련소가 아니라 최전선이다. 아무리 훈련소가 좋더라도 수십 년이 지나도록 오로지 훈련만 받겠다는 병사는 없다. 마찬가지로 십자가 군병의 최종 사역지는 예배당 속이 아니라 세상 속이라는 사실을 언제나 잊어선 안 된다.


474

"사람이

만들어

모든

예배

형식을

성령이

속된

것으로

거절한다고 해도 조금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 - 장 칼뱅(Jean Calvin), 기독교강요(Christianae Religionis Institutio).


475

돈을 사랑한 교회 "돈 삼키는 종교는 꺼져라"

주변의 교회를 한번 살펴보시라. 40대 이하의 젊은 교인이 몇이나

있는지.

갈수록

주일학교는

공동화하고

있다.

부모조차 교회에 안 나오는데 자녀들이 많이 나올 리가 없다. 돈을 사랑한 교회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다는 신호다. 개신교 역사상 이처럼 돈을 열애한 교회는 없다. 한국에서는 돈 없으면 교회 못 간다. 한국교회는 돈에 대해서는 결코 물러섬이 없다. 얼마나 돈을 걷는 수법이 뛰어난지 헌금 종류만 무려 85종이 넘는다.


476

설교 한번 하고 수백만 원 생일 헌금, 차량 헌금, 직분 헌금, 일자리 헌금, 승진 헌금, 사업 축복 헌금, 안전한 여행 헌금, 출장 보호 헌금, 이사 헌금, 새집 헌금, 가족 건강 헌금, 목사 자녀 등록금 헌금, 기도 응답 헌금, 그리고 심지어 일천번제 헌금(천일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내는 헌금)까지 매사에 돈이다. 어떤 이들은 헌금을 무슨 보험처럼 여긴다. 아마 헌금 없이는 하나님의 축복과 보호를 충분히 못 받을까 도저히 불안해서 살 수 없는 모양이다. 게다가 상당수 목회자들은 구약의 '일천 마리의 번제'를 '일천 번의 제사'로 오해하여 천 번의 바침을 강조한다. 그리고 순진한 교인들을 천 일의 새벽 기도나 천 번의 헌금 등으로 오도한다. 그저 돈 걷는 일이라면 있는 무식 없는 무식 다 짜내어 아주 애쓰고 있다. 자신이 드린 번제가 나중에 이렇게 황당하게 둔갑할지는 아마 그 번제를 드린 솔로몬왕조차 미쳐 몰랐을 거다. 아무튼 교회에서 돈 바침을 가장 열심히 강조하는 사람들이 목회자다. 그리고 그 돈을 가장 많이 가져다 쓰는 사람들도 목회자다. 개신교에 목사 외에 교회 돈을 가져 가는 직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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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다. 참으로

이상하다.

구약의

제사장

지파인

레위인도

며칠

동안의 성전 봉사 외에는 평생 자신의 초장에서 일을 했다. 유대의 율법 선생이었던 랍비들도 평생 생업에 종사하며 가르쳤다. 목수 예수님도 급여를 받으며 사역하신 적이 없다. 예배를 인도하며 헌금을 걷으신 적도 없다. 사도바울도 '상주 사역'을 할 때면 자비량 목회를 했다. 다른 사도들도 단지 '순회 사역' 중에만 일시적인 재정 후원을 받았다. 그러니 "성경을 가르치는 직분이기에 또는 주의 종이기에 마땅히 금전적 보수를 받아야 한다"는 원리는 도대체 어느 머리에서

나온

기이한

사상인지

모르겠다. 신구약

성경

어디에도 설교를 하거나 성경을 가르친 댓가로 돈을 받은 직업이란 없다. 따라서 고작 설교 한번 하고 수십만 원 또는 수백만 원을 주고 받는 악습은 대체 어느 얼어죽을 종교에서 나온 발상인지 알 수가 없다.

설교의 변질 나는 신실한 목회자가 매우 많다는 것을 잘 안다. 또한 유급


478

사역이 무조건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것을 절대시하거나 당연시하는 건 분명히 큰 오류라고 생각한다. 성경의 가르침은 오히려 자원 봉사적 사역에 중심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다른 장로나 집사들은 모두 자원 봉사자다. 본래 개신교엔 중세 사제처럼 성직자가 되는 직분이란 없다. 성경의 선언대로 이미 모든 신자가 다 제사장이며 성직자다. 그럼에도 특정 직분이 설교권과 목회권을 독점하며 급료를 당연시하는 건 중세적 오류일 뿐이다. 모든 성도는 성경을 가르치거나 설교할 권리가 있다. 다만 교회가 목사에게 그 사역을 더욱 전문화하여 더 많이 위임했을 뿐이다. 그리고 초기 교회 사도들의 설교는 자신의 사견이나 잡설이 절제된 매우 담백한 설교였다. 사도바울이나 스데반의 설교가 그 좋은 예다. 그 당시는 성경이 매우 희귀했기에 설교자는 회중에게 직접 읽어주거나 설명해주는 게 꼭 필요했다. 헌데 그런 건강한 설교를 변질시킨 주범은 중세 교회다. 그들은 본문 해석 중심의 초기 설교를 그리스나 로마식 웅변으로 점차 변절시켰다. 이른바 사람의 감성을 자극하고, 사람의 흥미를 유발하고, 그리고 사람을 더 모으기 위한 잔재주가 가미된 것이다.


479

설교의 웅변화는 결국 인간의 잡술에서 나온 셈이다. 물론 그 잡술은

종교

장사를

위한

영업

기술로

더욱

개발되고

발전되었다. 희대의 웅변 사기꾼 히틀러도 청중을 들었다 놨다 했는데 하물며 하나님 말씀까지 동원한 웅변이 어찌 그에 뒤지겠는가. 우리가 아는 상당수의 초대 교부들과 중세 설교자들은 그들의 많은 신학적 오류에도 불구하고 이런 재주에 매우 뛰어난 사람들이었다. 아무튼 무슨 수법을 썼든 교회에 사람이 모이고, 돈이 모이고, 권력이 모이면 반드시 일어나는 일이 있다. 교권이 부패하고 성직자가 타락한다. 이른바 돈을 사랑하는 교회가 된다. 결국 모일 때마다 무슨 명분과 핑계를 대서라도 기필코 돈을 열심히 걷는다.

돈 걷는 종교는 꺼져라 그들은

루터를

배신하고,

칼뱅을

배신하고,

웨슬리를

배신하고, 주기철을 배신하고, 김교신을 배신하고, 그리고 예수를 배신한 자들이다. 하여간 인간 역사에 돈을 열심히 걷어서

치부하고

부패하지

않았던

종교가

하나라도


480

있었다면 어디 한번 나와보라. 나는 이제 돈 삼키는 종교는 모두 꺼지라고 말하고 싶다. 만일 돈이 없어서 망할 교회라면 어서 속히 모두 망하기 바란다. 정말 의무적 헌금이나 십일조 따위가 없어서 망할 교회라면 지금 당장 망하는 게 이 세상을 크게 돕는 일이다. 반면에 진정한 개혁 교회라면 그딴 거 전혀 필요 없다. 교회는 돈으로 모이는 곳이 아니다. 집회 처소 한 구석에 허름한 종이상자 연보함 하나 달랑 두고서도 얼마든지 잘 운영되는

신앙

공동체가

점차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 거룩한 불길은 누구도 막지 못할 것이다. 앞으로는 작은 사무실이나 가정집에 단지 신자 열 명만 모여도 충분히 자립과 사역이 가능한 새로운 교회 공동체가 다가오고 있다. 성도가 봉사하고, 성도가 설교하고, 성도가 축도하고, 성도가 심방하고, 성도가 연보하고, 성도가 구제하고, 성도가 떡을 나누고, 성도가 운영하고, 그리고 성도가 섬긴다. 우린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가

그윽한

그런

아름다운

공동체들을 이 세대가 가기 전에 무수히 보게 될 것이다.


481

"사람들은 교황과 그 교사 전달자들이 아주 노골적으로 자기들을 우롱하는 것과 자기들의 영혼의 구원을 이익이 많은 장사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과 구원의 값을 돈 몇 푼으로 계산하는 것과 값없이 주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보았다. 이런

협잡으로

매춘부들과 그들은

그들은

포주들과

예물을

난취

면죄부의

최대

빼앗기며,

난무에

빼앗긴

허비되는것을

선전가들이

것은

보았다.

자기들을

가장

경멸하는 것을 보았다. 이 괴물은 날이 갈수록 더욱 더 소란하고

음탕하게

돌아다니며

그칠

줄을

몰랐고

매일

새로운 납을 내놓고, 새로운 돈을 가져갔다." - 장 칼뱅(Jean Calvin), 기독교강요(Christianae Religionis Institutio).


482

<돈을 사랑한 교회> 지은이: 신성남 (canavillage@yahoo.com) 초판: 2017 년 8 월 26 일 수정판: 2018 년 3 월 27 일

본 문서는 누구나 자유롭게 공유하여 재배포할 수 있습니다. 다만 내용의 무단 변경을 금합니다. Copyright © 2013 바른사역연구소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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