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받는 목사 왕국 v1 4 개정판 - 신성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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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본질을 생각하는 글

도전받는 목사 왕국 양들이 웁니다

신성남 바른사역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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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라는 거룩한 울타리 속에서 양들이 오늘도 울고 있습니다. 목동들의 털깎기에 추워서 떨며 웁니다. 이리들에게 찢기고 아파서 웁니다. 상처 입은 형제들을 보며 분통해서

웁니다. 배가 고파 울고, 삶에 지쳐 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의에 주리고 목말라서 웁니다. 언제부터인지 착한 목동들은 구석으로 밀려나고, 배부른 목동들이 웃고 있습니다.

오늘날 주님의 교회가 '강도의 굴혈'이 되어버렸습니다. 의와 인과 신은 사라지고, 돈과 세력과 교권이 판을 칩니다. 스스로 '종'이라던 목동들이 목자를 배신하고 양들을 약탈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양들만 우는 것이 아닙니다. 목자이신 예수님도 함께 우십니다. 돌 위에 돌 하나 남기지 않고 멸망한 예루살렘보다 더 큰 죄악을 우리가 쌓고 있기 때문입니다.


목 차 한국교회의 무법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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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 건축으로 무너지는 한국교회 18 병신도를 깨운다

23

한 주일학교 교사가 시작한 일

32

목사도 제자가 되자

38

거룩한 땅 밝기라니

50

자비량 공동 목회

52

자비량 목회, 유급 목회, 그리고 공동 목회

62

한국교회의 변절과 십일조 강요

70

세습 목사와 신도들

85

헌금 채, 세상보다 더 세속적인 악습 94 말씀을 전하고 돈을 받는 목회자들

104

목사님들의 변절과 교권주의

112

교회는 이 땅의 마지막 선지자

120

목사의 월권 중앙선을 넘었다

128

돈을 바치면 복 받는다는 목사님들

136

한국교회 십일조의 비밀

142

목사를 동역자로 세우는 교회

149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다

156

부흥회의 변질과 돈 잔치

165

한국교회의 타락과 담임목사 제도

173

교회밖에 모르는 예수쟁이들

180

개혁을 거부하는 개혁 교회들

186

십자가 없이는 살아도, 십일조 없이 못 산다

190

빼앗긴 교회

200

도전 받는 목사 왕국

205

한국 교권주의의 밑뿌리, 담임목사 종신제

213

2


십일조 떼어먹는 교회

220

목사도 평신도다

227

밥 놔두고 죽 퍼먹는 교회

233

장로 당회장 제도가 더 성경적이다

238

양들의 분노와 방탄 목회

244

부패한 교회도 흥해야 하나

248

십자가 대신 십일조를 지고 가는 교회

255

목사의 눈물

262

건물이 목회하는 교회

265

연봉을 숨기는 목사님들

273

세상을 속이는 교회

278

목사와 박사

282

목양견과 잡견

287

교회 장부를 숨기는 목사님들

293

유사 교회와 종교 상인들

297

부유한 목사와 가난한 목수

303

편집 후기

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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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무법자들 '주의 종'이 '교회의 왕'인가

저 오래 전 호주 어느 현지 교회에서 들은 이야기를 하나 소개하고 싶습니다. 한 젊은 목사님이 수 년 동안 목회하던 교회의 임기가 끝나서 사임을 하고, 새로운

임지를 향해 아주 멀리 떨어진 다른 주로 이사하게 되었습니다. 이사 당일 그 분과 가족들은 허름한 승용차 뒤에 작은 트레일러 하나를 끌고 나타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거기에 실은 것이 그 목사님과 가족들의 이삿짐 전부였다는 것입니다. 트레일러라고 해봐야 손수레보다 서너 배 큰 정도이니 얼마나 들어 가겠습니까.

더욱 놀란 것은 교인들 아무도 이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요란한 이임식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 목사님은 교인들과 일일이 다정하게 포옹하며 작별 인사를 나누셨고, 교인들은 떠나는 차를 향해 손을 크게 흔들어 준 것이 송별회의 전부였습니다. 새로운 임지까지는 차로 3 일 정도 걸린다고 합니다.

이야기가 한국교회의 여러 목사님들에 익숙해 있던 필자에게는 신선한 충격이 었습니다. 당시에는 그 목사님과 가족들을 생각하며 크게 측은한 마음이 들었고,

국내선 비행기표 몇 장 제대로 안 챙겨준 인정머리 없는 교인들에 대해 많이 서운해 한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조금 생각을 달리 하고 있습니다. 그 목사님은 당연히 '주의 종'다운 검소한 모습을 실천하며 정상적으로 살고 계실 뿐입니다. 오히려 비정상적인 데에 익숙하게 살다가 보니, 순간적으로 정상이 비정상으로 보인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들으니 호주 교회 대부분의 목사님들이 그처럼 검소하게 사신다고 합니다. 실제로 필자도 한 백인 목사님 일가족이 여름 여행 중에 모텔이나 호텔을 구하지 않고, 친구 목사님댁에 들려 거실 쇼파와 바닥에 슬리핑백을 깔고 자는 것을 직접 본 적이 있습니다.

목회자가 부유해도 되나

사가 너무 가난해서 생활이 어려울 정도가 되는 것도 잘못된 일이겠으나, 반대로 중산층을 넘어 부유층으로 산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자연스럽지 않은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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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교인 중에 굶는 사람이 한명이라도 있으면 목사도 숟가락을 내려 놓으라"고 말씀 하셨던 어느 원로 목사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어느 교회나 교우들 중에는 가난한 교인들이 분명히 있을 터이고, 나아가 교회 주변의 지역사회에도 틀림없이 끼니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을 터인데 정상적인 목사라면 어떻게 부유해질 틈이 있겠는가 하는 의문이 생기는 것입니다. 한경직 목사님처럼 입고 있던 양복마저도 있는 대로 남에게 자주 나누어 주다 보면 저절로 검소하게 살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면에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보기 드물게 유난히 사치를 떠는 한국교회의 일부 귀족 목사님들께서는 양을 돌보는 목사라면서, 고급차를 타고 다니시며 식사 때마다

입으로 비싼 음식들이 잘 넘어 가는지 정말 궁금합니다. '고아와 과부를' 돌보라는 말씀은 가난한 자를 잊지 말라는 뜻이며 성경 여러 부분에서 반복해서 강조되어 나오는 하나님의 중요한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혹시 요즘 귀족 목사님들은 성경을 필요한 부분만 오려서 들고 다니시는지요. 점입가경으로 심지어 어떤 귀족님들은 돌보라는 고아는 돌보지 않고 엉뚱하게 시키지도 않은 교회 여비서나 여신도 돌보기에만 몰두해 사고를 치고 있으니 보는 사람들의 속이 다 터질 지경입니다.

교회 내의 무법자들

즘 교계 뉴스를 잠시만 들여다 보아도, 지금 한국교회는 이 귀족님들로 인해 얼마나 큰 고통을 받고 있는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교계 소식만 보면 너무

속이 상하고 우울해져서 아예 안 보기로 했다고 합니다. 하여튼 이들이 그동안 뉴스를 오르내리며 얼마나 크게 사고를 쳐놓았는지, 믿지 않는 분들까지도 누구나 한국 개신교는 너무

썩었다고

주저없이

말합니다.

요즘

흔히

듣는

'개독교'니

'먹사'니

이런

불명예스러운 용어들은 세인들이 우리에게 손수 붙여준 부끄러운 이름입니다.

현재 한국교회 안에서 담임목사의 권한과 영향력은 거의 압도적이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그런 이유로 담임목사만 바로 서 있다면, 적어도 고질적인 교회 문제의 80%는 긍정적으로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거꾸로 말하면, 교회 문제 대부분이 담임목사가 바르게 처신하지 못해 생기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한다면, 일반 교인들이 교회에 무슨 직접적인 이권이나 사심이 있다고 목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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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들에게 저항하고 분란을 만들겠습니까. 대부분의 문제들은 이 귀족님들이 자기 욕심을 챙기다가 발생하는 불협화음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이렇게 무법자처럼 '교권'과 '위선'이라는 쌍권총을 차고 좌충우돌 설 치게 된 데에는, 이들을 가르친 신학교는 물론 신도들의 책임도 매우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치 목사가 하나님의 대리자라도 되는 것처럼 무조건 그에게 순종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는 잘못된 인식이 넓게 퍼져 있기 때문입니다.

러나 성경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유일한 중보자는 오직 예수님 한 분뿐이라고 증거합니다. 그러므로 그 어떤 직분자는 물론, 설사 바울이나 베드로 그리고

하늘에서 온 천사라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설 수 있는 대리자가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제라도 우리는 이런 근거 없는 신앙적 무지로부터 벗어나야 할 것 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야 절대적인 것이지만, 사람들 사이의 순종은 옳을 때만 해야 합니다. 극단적인 예를 하나 들면, 목사가 어떤 사실에 대하여 거짓 증언을 하라고 요구할 경우, 신자는 순종이 아닌 거절을 해야 하는 것이 정당합니다.

그러므로 앞으로는 이 귀족님들이 교회내에서 입법, 사법 그리고 행정에 이르기까지 삼권을 손에 쥐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교회에 큰 상처를 줄 경우, 잘못된 점들을 정확히 파악하고 지적하여 지혜롭게 대처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경이 언제 목사들에게 탐욕, 축재, 횡령, 교회 세습, 치부, 성추행, 외식, 파당 짓기, 사기, 명예 추구, 월권, 교회 사유화, 성직매매, 교만, 사치, 거짓말 등을

해도 좋다고 가르친 적이 있습니까. 그리고 교회법 어디에 목사에게 교회 재정, 행정, 인사, 관리 등의 모든 업무에 직접 관여하여 왕같은 권력을 행사하라고 되어 있나요.

더구나 교인들과 다른 교역자들이 담임목사와 함께 사역하는 대등한 동역자들이지, 목사를 떠받드는 무슨 부하 직원이나 들러리인가요. 교회 안의 모든 직분자는 평등하며 직무의 구분은 있으나 계급 차별이란 없다는 것이 개혁교회의 정신이 아닙니까. 이 귀족님들의 상당수는 성경의 가르침을 명백히 거역하고 교회법도 거스리는 자들이 분명하기 때문에 필자는 주저없이 그들을 '무법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근자에 이르러서는 이들의 행태가 더욱 극에 달하여, 스스로 자신들이 한국교회의 공적 1 호라고 자임하는 듯 한 모습을 갈수록 노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중세 교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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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락과 쇠퇴에서 보았듯이 교회는 핍박을 받고 고난을 받을 때보다, 오히려 평안하고 흥청거릴 때에 더 심각한 위기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들은 그리스도, 십자가, 회개, 구원, 실패, 지옥, 고난, 희생, 겸손, 경건, 헌신, 나눔 그리고 섬김을 제대로 강조하지 않습니다. 즉 복음을 제대로 전달하지

않습니다. 거꾸로 이들은 귀에 듣기 좋은 성공, 희망, 축복, 평안, 희락, 천국, 선교 등을 즐겨 노래부릅니다. 주님께서는 빛과 소금이 되라고 하셨으나, 반대로 설탕을 뿌리고 있습니다. 그 결과 교회는 세상의 빛이 아닌 세상의 천더기로 전락하고, 교인들은 이런 단맛에 깊히 길들여져 이제는 회복하기 어려운 영적 당뇨병에 신음하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입니다.

교회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중요한 교훈 중에 하나는 영적으로 무지한 성직자는 영적으로 무지한 신도들을 양산하고, 다시 그 무지한 신도들이 모인 교회는 부패한 성직자들의 놀이터로 바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지금은 비상한 시기이고, 성도들이 깨어 있어야 할 때입니다.

이제 이 글에서 논하는 '귀족 목사'란 단순히 큰 교회의 목사나 부유한 목사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교회 목사라도 스스로 신앙 양심을 버리고 사리사욕을 쫓으며 부와 명예를 추구하는 목사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큰 교회나 부자들이 무조건 다 잘못했다거나 나쁘다는 식의 단세포적인 주장을 하는 것은 이 글의 의도와 크게 다르다는 것을 미리 이해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주의 종'이 '교회의 왕'인가

선 많은 목사님들이 자신을 '주의 종'이라고 부르시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경우에 스스로 자신을 낮추는 좋은 의미에서 그리 말씀하시는

목사님들도 많이 계시지만, 반대로 은근히 권위를 내세우시기 위해 그렇게 부르시는 분들도 적지 않습니다. 심지어 어떤 때는 자신들이나 다른 교역자들을 '목자'라고 부르기도 하시는데, 이 대목에서 말씀을 좀 구별해서 하시면 좋겠습니다. '주의 종'이라는 말은 틀리지 않으나, 양들의 주인인 '진정한 목자'는 예수님 한 분뿐이시기에 함부로 쓸 말이 아닙니다.

구태여 말하면 목사는 '보조 목동'이나 '양치기 개' 정도로 보면 될 것이라 생각합니 다. 예수님께서는 '내 양을 치라'고 하셨지, 언제 '네 양을 치라'고 하셨는지 직접 성 경을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신도들은 목사의 소유가 아닙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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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히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칭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예수님과 동등한 목자가 여러명 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목사님들께서 목자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 신중을 기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간혹 목자라는 명칭을 악용하여 신도들의 주인 행세하려는 사람들이 더러 있기 때문입니다.

한가지 더 지적할 것은 하나님이 목사님들에게 '주의 종' 노릇을 하라고 하셨지, 언제 '교회의 왕'이 되라고 하셨는가 하는 점입니다. 목사가 '주의 종'이라면, 교인들은 오히려 '주의 자녀'입니다. 종이면 종답게 주인의 자녀인 교인들을 잘 섬겨야지 무슨 근거로 군림하려 드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습니다.

신약성경에

따르면

목사직은

'가르치는

장로'나

'교사'의

직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녀 교육'을 잘 시키라고 귀한 자식들을 기껏 맡겨 놓았더니, 오히려 이들은 교인들의 상전 노릇을 하며 '자녀 학대'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귀족님들께서는 목사만 주의 종이 아니라, 일반 교인들도 모두 주의 종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 주셨으면 합니다. 동시에 성도 모두가 동등한 ' 왕같은 제사장'입니다.

라서 교회를 다스리고 관리하는 일은 다른 장로님들이나 집사님들에게 맡겨진 고유의 책무이니, 아무일이나 나서서 월권을 하지 말고 오늘부터라도 제발 가르치는

일에만 전념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래도 교인들보다 성경을 몇 자라도 더 배웠으면 좀 똑바로 처신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특히 어떤 귀족님들께서는 입만 열면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을 함부러 하시며 교인들 을 쥐고 흔드는데, 이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뜻이라는게 하나같이 자기 욕심을 채우는 내용들이 대부분입니다.

이 분들은 화려한 예배당을 짓는 것도, 전과 장로가 대통령이 되는 것도, 교회 세습을 하는 것도, 교회 돈을 빼돌려 개인사업하는 것도, 호의호식하는 것도, 심지어는 간통하다 들켜도 모두 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둘러대는 황당한 사람들입니다.

경건이라고는 눈꼽 만큼도 없는 인생들이, 마치 구약의 선지자나 예언자 행세를 하며 외식하고 있습니다. 입으로는 주님의 뜻이라고 말하면서, 실상은 늘 자기 뜻대로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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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들이 무슨 철학을

한 근자에 들어 '목회철학'이니 '목회비전'이니 하는 말을 흔히 듣게 되는데, 비록 좋은 의도로 쓰더라도 적지 않은 거부감을 주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됩니다.

좀 심하게 말을 하자면, 아니 종이 건방지게 무슨 철학이 필요하고 비전이 필요한지 정말 궁금합니다. 종이란 주인이 시키면 죽는 시늉이라도 내야 하는 신분인데, 종이면 종답 게 주인께서 성경에 시킨 일이나 빠뜨리지 말고 열심히 실천할 것이지, 무슨 소크라테 스나 플라톤이라도 되는 듯 구태여 철학 타령을 할 필요가 있을까요.

이 '목회철학'이란 용어 역시 과거에는 전혀 못 듣던 말인데 언제부터인가 한국교회에 슬그머니 나타난 다소 시건방진 단어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종들은 분수를 모 르고 주인의 자녀이신 교인들에게 자기의 철학과 비전을 내세우며 따르라니, 이 종이 '종님'인지 '종놈'인지 영 헷갈리는 판입니다. 목사가 목회를 할 때, 성경대로 가르치고 그대로 살면 되었지 무슨 철학이 따로 필요한가요. 바울이나 아볼로 그리고 다른 제자들이 언제 각자 만든 철학을 가지고 목회했습니까. 오히려 자신들이 예수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지는 않나 늘 염려하며 경계하였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리고 기껏 그 목회비전이라는 것도 가끔은 좋은 내용이 더러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몇 년도까지 교인 몇 명에 선교사가 몇 명이고 건물이 어쩌고 저쩌고 등

돈을 부지런히 긁어 모아 비지니스 확대에 열중하겠다는 이야기들이던데, 이런 얘기는 다른 분들이 하도 많이 지적하셔서 이 정도로 생략하기로 합니다. 하여튼 순진하고 충성된 교인들은 그 개똥 철학인지 비전인지를 따라서 총력 동원되느라 아예 등골이 빠지고 있습니다. 차라리 차분히 앉아 성경 공부와 구제만이라도 제대로 하면 좋겠습니다.

특히 큰 교회로 갈수록 일년 내내 각종 화려한 프로그램으로 교인들을 혹사시키는데, 이는 보는 사람이 다 안쓰러울 정도입니다. 평일에는 직장이나 사업체 또는 학교에서 돌림빵을 당하고 주일이라도 예배를 마치고 가정에 돌아와서 좀 쉬어야 하는데, 오히려 주일날이 더 바쁘고 더 피곤할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월요일이면 쌍코피가 정기적으로 터지는 교우도 여러 명 보았습니다. 귀족님들께서야 잡다한 일들은 부목사들에게 맡기고, 평일에 편안한 웰빙책상에 앉아 멋진 설교를 준비하신 후, 주일날 목소리 높여 화끈한 설교 몇 번 하시면 되는지는 잘 몰라도, 그 알량한 목회 비전을 따르기 위해서 많은 교인들은 일주일 내내 하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혹사 당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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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침은 '서로 사랑하라!'는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을 정도로 단순 명료한 예수님의 것인데, 이 분들은 오히려 여기에 군살을 더덕 더덕 발라서 내용을 더욱 복잡하고 어렵게 만들어 실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진지한 성찰이 있어야 합니다.

얼마 전에 미국의 대표적인 대형 교회 중의 하나인 윌로우크릭교회의 빌 하이벨스 목사가 "우리는 실패했다"고 고백하면서, "교회에 수많은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교인들로 하여금 영적인 활동을 하도록 이끌었지만, 그것이 영적인 성숙함을 보장해 주지 않더라"는 결론을 인정했었던 일도 잊어선 안 됩니다.

지금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주일에만 우리끼리 모여 분주히 활동하는 '선데이 크 리스천'이 아니라, 오히려 평일에 사회 속에서 소금이 되는 '에브리데이 크리스천'이 아닌가요. 과연 초대 교회 기록에서 우리가 요즘 바쁘게 하고 있는 다양한 교회 행사나 프로그램들을 한두 가지라도 찾아 볼 수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혹시 이런 것 역시 교 회의 몸집을 키우기 위한 비지니스 마인드로 추진되는 것은 아닌가요. 마치 예수님은 한 가지만 해도 좋다고 하시는데 저 혼자 바쁘게 고생하는 마르다의 모습이 아닌지 반성해야 합니다.

리고 귀족 목사님들께서는 평소에 매우 경건한 척 하시며 목에 기브스하고 무게 잡기 좋아하시는데, 제발 교만 좀 떨지 마시고 진정으로 겸손해질 순 없는지 묻고

싶습니다. 설사 목사가 아니라고 해도 신자라면 누구나 온유하고 겸손하며 관대해야 하는 것이 옳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실 사람들 앞에서 천사처럼 경건한 척 열연하는 이 분들 뚜껑을 살짝 열어 보면, 거룩이라고는 개벼룩만큼도 찾기 힘들 경우가 많다는 것이 그동안의 아픈 경험에서 얻어진 개인적인 소견입니다.

그리고 귀족 목사님들은 거의 한결같이 눈부신 고급차를 타고 다니는 것을 즐기시는데 중소형차로 좀 바꾸실 생각은 없으신지요. 스스로 종이라면서, 귀족같은 차를 타고 다녀서야 되겠습니까. 자신의 인품이 모자라는 것은 참아도, 품위없는 차를 타고 다니는 것은 절대 못 참으시는지요. 남들이 이를 비판하면 대부분 교인중에서 누가 선물했다고 핑계를 대는데 목사가 정직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런데 진짜로 고급차를 사주는 통 큰 교인도 더러는 있다니 다른 것은 몰라도 정말 돈 복은 많은 분들인 것 같습니다. 그래도 누가 선물로 고급차를 누가 반드시 받아야 하는지 아직도 의문이 남습니다. 거절하거나 팔아서 다른 좋은 일에 쓰시면 안 되는지 묻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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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사욕을 채우는 귀족 목회 해도, 귀족님들의 가장 큰 약점은 바로 돈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이 분들은 뭐니뭐니 거의 예외없이 어떤 요상한 명분과 이유를 붙여서라도 기필코 돈을 챙기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점만 유심히 잘 관찰해 보아도 귀족 목사이신지 아닌지가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숙명과 비슷하다고 보면 됩니다. 흔히 잘 알려진대로, '돈, 명예, 그리고 여자' 이 세 가지야말로 이 귀족님들에게는 뿌리칠 수 없는 업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교인들의 영혼보다는 교인들의 돈을 더 사랑하는 것이 기본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문제는 교회를 사유화하는 문제입니다. 특히 교회 재정을 직접 관리하며 예산과 결산을 불투명하게 하는 목사님들이 적지 않은데, 이런 행태는 한국교회가 반드시 뿌리 뽑아야 할 악행 중의 하나입니다.

최근 어느 형제님에게 받은 메일에 의하면, 자신의 교회는 출석 교인이 7000 명이 넘는 큰 교회인데 지난 15 년간 단 한번도 수 백억 원의 교회 재정에 대해 결산보고를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도 안되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 곳이 바로 한국교회입니다. 심지어 어느 대형 교회는 교회 건물 등기를 아예 담임목사의 이름으로 등록했다니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그 외에도 목사의 친인척들로 교회 직원들을 도배하거나, 교회 재정 집행시에 각종 이권에 관여하고, 기타 이 분들의 범죄적 행실을 구체적으로 다 서술하려면 '귀족행전'을 한 권 추가로 써도 모자랄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이 분들의 눈에 띄는 행태들 위주로 몇 가지만 간략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목돈 버는 재미에 외부 강사로 일년 내내 꾸준히 돌아다니시는 것이 이 분들의 우선공통적인 생활 방식입니다. 이렇게 하면 교회 본봉은 그대로 굳고 추가로 부수입이 더 짭짤하다니, 이들의 눈에는 세상이 참 평안하고 즐겁게 보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런 강사 교류 인맥을 넓히기 위해 반대로 막대한 교회 예산을 들여 외부 강사들을 수시 로 청빙하는 것은 너무 비열한 행동이 아닌가 합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서로 짜고 상 대 교회 돈을 나눠 먹는 셈이니 정말 두려움이라고는 전혀 모르는 분들입니다.

어떤 능력있는 고참 귀족님은 몇 년만에 월급 외에도 5 억이상 벌었다고 들었는데, 뭔지 모르는 순진한 교인들은 우리 목사님께서 안밖으로 말씀 사역에 너무나 수고를 하신다고 때로는 보약을 갖다 바친다고 하니 정말 '세상은 요지경'이란 가요가 히트친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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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십일조와 건축헌금을 해야 복받는다고 수시로 강조하시며 부추기신다고 하던데, 그렇게 열심히 긁어 모아 정말 자신들의 일이 아닌 주의 일을 하려는지 묻고 싶습니다. '인자는 머리둘 곳도 없다'하시던 예수님이 따르는 무리들에게 언제 헌금 요청하시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오천명이나 사람들이 몰려 와도 대형 천막 하나 없는 빈 들에 서 한 아이의 오병이어를 함께 나누어 먹었다는 이야기는 못 들으셨는지요. 제자들도 옷 한벌만 가지고 돌아 다녔다고 하는데, 이 분들도 자발적으로 들어오는 헌금 만큼만 사업을 벌리시면 안되는지 따져보고 싶습니다.

또한 헌금을 조금 내거나 못 내는 교인은 결국 기죽어서 떨어져 나가거나 아니면 교회 모임에서 늘 구석 자리에 찌그러져 있게 되고, 헌금을 많이 낸 부자들이나 유명 인사가 장로나 권사가 되어 나서는 경우가 많은 것이 이들 교회의 현실입니다. 이는 마치 중세교회 성직매매와 무엇이 크게 다른가요. 이것도 확실히 해명이 필요한 문제입니다. 아울러 왜 교회 내에 가난한 이들이 설 자리가 갈수록 무너지는지 그 이유를 반성해야 합니다.

또한 귀족님들께서는 목회를 비지니스로 여겨 교인수를 중요시하며 교회당을 크게 짓 는 것을 성장 목표로 삼는다고 합니다. 사실 이 문제는 이들의 체질상 웬만해선 고치 기 힘듭니다. 그리고 원래 잔 머리가 잘 돌기 때문에 설교를 미끈하게 잘하시고, 심지 어 어떤 때는 하도 잘한 자신의 설교에 스스로 감동받아 강단에서 눈물을 짜기도 합니다. 이 분들은 정말 순진한 교인들 홀리기에는 아주 탁월난 재능을 지닌 듯 합니다. 아마 안방드라마 연기자로 나갔어도 크게 대성했을 것으로 확신합니다. 설교 내용은 주로 교인들 귀에 듣기 좋은 웰빙 설교만 즐겨 하니, 이것이 매우 그런데 심각한 문제입니다. 항상 복받고 잘되고 평안하고 성공한다는 설교는 잘하시는데, 함께 십자가를 지고 고난을 받자는 내용은 잘 말하지 않는다니 우선 순위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해보신 적이 없는지요.

게다가 요즘은 평일에는 골프에 낚시에 신나게 놀러 다니시다가, 주일이 되면 상습적으로 남의 설교를 표절하시는 저질 얌체분들도 있다던 데 정말 양심에 방탄조끼를 채우신 분들입니다. 그래도 어쩌다 가끔은 교인들에게 함께 회개하자고 설교할 때도 있으시다면서, 어느 분의 말씀대로 어째서 자신의 묵직한 돈주머니는 평생 회개하지 않는 것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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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감투를 너무 좋아하셔서 너저분한 명함 한 다섯 개 정도는 기본이고, 떼로 몰려 다니며 이름만 들어도 역겨운 허접 단체에도 많이 가입하신다던데, 쓸데없이 돌아다니 지 마시고 그 시간에 자신의 교인들이나 잘 돌보시면 좋겠다고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아울러 이 분들은 수구정권이나 수구언론, 재벌기업, 대형교회 등을 비판하면 바로 종 북이나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로 매도합니다. 그동안 챙겨둔 재산과 인맥을 지키고 늘리는 데에 이들 수구세력의 강력한 보호와 지원이 필요해서 그러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그래도 가끔은 하늘도 한번 쳐다보거나 '정의'라는 단어도 좀 찾아보시고 자숙하시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봅니다.

더구나 이들은 각종 교단 선거에서 금품을 살포하고 패거리를 만들고 자기 사람을 챙 기는 등 각종 추태 보여 주기를 서슴치 않고 있습니다. 이는 막가는 정치판에서조차 부끄럽게 여기는 일이 아닌가요. 이로 인해 교단이 너무 시끄럽고 혼란하여 국민들의 지탄을 받고 있는 것은 물론 전도에 큰 지장을 주고 있다는 것을 아시기는 하는 건지 답답합니다. 누가 이 분들 앞에서 감히 목사 임기제니 무슨 회장 단임제니 이런 말을 꺼내면 난리가 난다는데, 차라리 지나가는 개 귀를 잡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또한 이들은 언론의 자유 이딴 거 무지 싫어하신다고 합니다. 자신들이 과식하는 것이 자꾸 노출되서 괴롭다고 하니, 그나마 약간의 양심이라도 남아 있다는 것이 신기합니다. 특히 말이 많은 놈들은 무조건 싫어합니다. 또한 자기들은 뒤로 할 짓 안할 짓 고루고루 못된 짓을 다 저질러 놓고 나중에 결정적으로 들통나면, 언제나 주님의 사랑 운운하며 사랑으로 모두 다 덮자고 얼버므리는 것이 이 분들의 상투적인 수법입니다.

장 한심스럽고 우려스러운 것은, 많은 목사님들이 이 귀족님들과 귀족교회를 하나의 성공모델로 삼아 프로그램이나 조직을 흉내내며 불철주야 달리고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압도적으로 유리한 여건을 두루 갖춘 한 대형교회가 교인들의 수평이동을 통해 근처에 있는 다수의 소형교회들을 무너뜨리는 현상 못지 않게 더 심각한 문제는, 전국의 많은 교회들이 그 대형교회를 모델로 너도 나도 모두 열을 받아 자기들도 저렇게 대형화하겠다고 몸부림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런 이유로 많은 비판자들의 입에서 "대형교회가 죽어야, 한국교회가 산다"는 말이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아울러 대형교회의 좋은 장점들은 거의 희석되고, 다른 이유도 물론 있지만 단순히 크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무거운 족쇄가 되어 따거운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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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 안의 장사꾼들

기까지 이들 귀족목사님들의 개인기와 문제점들을 간단하게 검토해 보았습니다. 현재 전국의 지역 교회들은 물론 주요 교단의 총회나 노회 지도부의 상당수가

이들의 절대적인 입김 아래 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모양이 된 것입니다. 어찌보면, 이들이 저질 정치꾼들처럼 돈봉투까지 뿌리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리 챙기기에 몰두해 온 당연한 결과입니다. 이렇게 해서 과거 예루살렘 성전에 장사꾼들이 북적거렸던 것처럼, 지금 한국교회 내에도 온갖 잡상인들이 기생충처럼 서식하게 된 것입니다.

어쨌든 간이 아주 크신 이 분들은 대부분 자신의 안위에만 몰두하고, 교인들이 영육으 로 말라가도 크게 신경쓰지 않습니다. 또한 사회 여론이 그들의 부정과 탐욕을 비난할 때는 적당히 연막을 쳐서 빠져나가거나, 그것도 잘 안되면 교인들을 동원하여 전면에 세우고 자신은 교회라는 성역의 울타리 뒤로 깊숙히 숨어 버리는 것이 일상적인 수법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 귀족님들의 개인기가 너무 탁월해 한국교회가 거의 거덜나게 생겼습니 다. 심지어는 "한국교회는 이미 스스로 정화할 능력을 잃었다"라거나 "한국교회는 예 수를 버렸다"고 까지 단정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더구나 이들 상당수는 무슨 기연이라도 있었는지, 맨손으로도 바리새인 몇 명쯤은 순식간에 뺨을 치고 초상비로 날아 오를 정도로 엄청난 절정고수입니다. 양심에 철판을 삼겹으로 깔고 천사처럼 가장하여, 교인들을 속이며 등치고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심장이 약하고 내공이 약해 정말 그런 경지에 이르지 못 합니다.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종교 지도자인 동시에 막강한 권력을 손에 예수님 쥔 정치 지도자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런 큰 힘을 이용하여 백성을 억압하고 착취하여 자신들의 배만 채우는 늑대와 같은 자들입니다. 굶주리고 지친 백성들의 눈물과 탄식은 외면하면서, 자신들이 만든 유전과 규례는 철저히 지키라고 강압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백성들이 자기들보다 예수를 따르는 것을 매우 두려워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 장사꾼들을 내어 쫓는 것도 보았습니다. 자신들의 밥그릇에 금가는 소리가 들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더 이상 예수를 따 르지 못 하도록 그 분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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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주위를 살펴보면 한국교회의 부패와 탐욕이 그때보다 못 하다고 감히 말할 수 없 습니다. 한국교회의 무법자, 귀족 목사님들이 그래도 바리새인들보다는 더 의롭다고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오히려 바리새인을 뺨치는 내공으로 한국교회를 거덜내고 계신 것이 아닌가요.

이들은 예수를 따르고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유다처럼 예수를 팔고 있는

것일까요. 이들의 귀에도 영육으로 메말라버린 저 양들의 처절한 울음소리가 들릴까요. 이들의 눈에도 저 양들의 목이 꺾여 늑대에게 찟겨지고 있는 모습이 보일까요. 그리고 이들의 양심에도 저 양들의 슬픈 눈망울에서 나오는 분노와 절규가 느껴질까요.

하도 답답해서 묻고 있지만, 결코 긍정적인 대답을 기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역사책 어디에도 바리새인들이 회개하고 돌아 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예수님과 세례 요한이 외쳤어도 듣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세리와 창기들은 돌아왔으나, 그들은 성경을 손에 들고도 끝까지 거역하였습니다. 차라리 개 귀에 명심 보감을 들려주는 것이 나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오죽해야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향해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하셨겠습니까.

그러다가 결국에는 불과 몇 십년 뒤인 AD 70 년에 후일 황제가 된 티투스 장군의 강력한 로마 군단에 의해 처절하게 짓밣히고 찟겨져 예루살렘의 멸망과 함께 역사의 뒤안 길로 영원히 사라졌습니다. 물론 그들이 자랑하던 큰 건물, 헤롯성전도 예수님이 예언하신 그대로 완전히 파괴되어 이때 함께 무너졌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성읍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의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근 100 만명 정도의 사람들이 비참하게 몰살당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토록 슬프게 무너진 거대한 헤롯성전을 생각하며, 오늘날 오로지 큰 건물, 큰 무리, 그리고 큰 사업을 추구하며 교회 대형화에 눈이 먼 한국교회의 많은 목회자들을 바라보니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제 결론을 맺기 전에, 존경하는 신현우 교수의 짧은글을 먼저 인용하고자 합니다.

<개는 없고 양반들만 있으니>

아직 잠들지 않은 그리고 결코 잠들 수 없는 깨어 있는 목회자들에게 이 글을바칩니다.

나는 차라리 개같은 목사가 되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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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건을 보수의 울타리에 가두고 학문을 교리의 울타리에 가두고 실천을 교회의 울타리에 가두고 그리고 나면 우리는 감옥에 갇힐 겁니다.

역사의 암울한 시기에 한 번도 목소리를 내지 못한 교단에서 한 발작 벗어나는 것이 이리도 힘드는 일까요?

성경을 교리로 난도질하는 인본주의적 인습에서 혁명적인 하나님의 말씀에 무릎꿇는 길로 가는 것이 이리도 어려운 일일까요?

목사님들은 모를겁니다. 그래서 저도 모를겁니다. 교회를 보며 갑갑해 하는 일반 성도들의 마음을, 이리를 보고도 짖지 못하는 개와 같은 목사들을 보며 물려죽으며 분통이 터져가는 양들의 마음을 ...

예수님을 잃은 중세카톨릭이 부패하였듯이 개혁정신을 잃은 개혁교회가 썪고 있는 것을 보며 혹시 우리가 양들을 지키는 개가 아니고 이리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사나운 개가 몇 마리만 더 있어도 좀 덜 할 터인데 개는 없고 양반들만 있으니 양들이 죽는 것이 아닌지요. 소금은 없고 설탕만 있으니 썩는 것이 아닌지요.

그래서 결심해 봅니다. 나는 개같은 목사가 되어야겠다고 설탕보다는 소금을 뿌리는 목사가 되어야겠다고. 거룩한 목사님들은 모르실 겁니다. 왜 제가 이런 말을 하고 있는지... 왜 차라리 개같은 목사가 되려고 하는지 ...

양들 가운데 있다보면 우리는 양같은 목사가 되어 양을 바로 인도하지 못하는 거룩한 양같은 목사가 되거나, 이리 같은 목사가 되어 양을 잡아먹게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개같은 목사가 되어야 할 겁니다.

점잖은 목사님들은 못 들으실 것입니다. 이리를 만난 저 성도들의 아우성을 ... 천사들의 찬양 소리만 들리실 터이니 ... 저는 이리를 물어뜯는 개같은 목사가 되렵니다. - 신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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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로 돌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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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읽을 때마다 '점잖은 목사'와 '개같은 목사'를 생각해 봅니다. 한국교회에는 이지금 '점잖은 목사'만 너무 많은 것이 아닌지요. 양들을 해치는 저 이리를 막을 '개같은 목사'는 없는지요. 그리고 이 일이 어찌 목회자들만의 책임일까요. 스스로 동역자 라고 자처하던 모든 평신도들도 분연히 일어서야 하지 않습니까. 생각해보십시요! 우리가 언제 나 하나 잘먹고 잘살자고 예수를 따라 나섰던가요. 그렇지 않다면, 과연 예수를 따르겠다면서 가난한 이웃들과 배불러

죽어가는 부자들을 그냥 외면하고

이렇게

우리끼리만 건물 짓고, 흥청거리고, 재미있고, 즐거우면 되는 것인지요.

산에서, 빈 들에서, 강가에서, 그리고 어두운 예배당 한 구석에서 감동과 기쁨의 눈 물을 흘리며 예수를 따르기로 결심했던 그 처음 사랑은 지금 다 어디에 있는지요. 먼 저 믿은 우리라도 소금을 좀 뿌려야 하지 않을까요. 아니면, 우리마저도 세상의 단맛 에 빠져 다시 세리와 창기로 돌아가야 하는지요.

주님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를 거덜내고 계신 귀족 목사님들 대부분은 바리새인들처럼 이미 예수 따르기를 거부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우 리가 대답할 차례입니다.

눈을 감고 조용히 들어 보십시요. 이천년 전 목수의 아들로 유대땅에 오셔서, 가난한 어부들의 마을 갈릴리 바닷가를 걸으시던 그 예수님은 오늘도 변치않고 우리에게 말씀 하고 계시지 않은가요? "나를 따르라!"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 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마 23:27).”

2009 년 12 월


성전 건축으로 무너지는 한국교회 교회당 건물은 성전이 아니다

선 '성전 건축'이란 말부터가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 건물은 성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참된 성전은 예수님의 몸을 뜻하며 또한 그의

지체된 성도들을 의미합니다. 교회당은 그저 예배를 드리고 모이는 장소일 뿐입니다. 구약의 지성소처럼 무슨 하나님이 직접

임재하셔서 제사를 받고 기도를 들으시는 그런

특별한 장소가 아니라, 단순히 신도들의 편리를 위한 모임 장소입니다.

일부 목회자들이 헌금 독려를 위해 이를 과대 포장하고 '성전'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지 극히 비성경적인 발상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 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이, 여기서 '성전'이란 예수님 자신 의 부활하실 몸을 의미합니다.

신약시대에 사는 우리는 이미 오신 예수님의 지체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그러므로 성전이라는 말 대신에 '교회당'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합한 표현입니다.

리가 조금만 주위를 둘러보면 한국교회가 예배당 건축에 얼마나 몰두하고 있는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100 명이 모이면 500 명이 모일 수 있게 지으려 하고, 그 뒤에

500 명이 모이고 나면 다시 수 천명을 위한 건물을 지으려 합니다. 이런 식으로 한국교회는 평생 건물만 짓다가 볼장 다 보게 생겼습니다. 과연 이게 정상인가요. 교회가 무슨 건설 회사입니까. 어느 분은 이를 지적하여 "한국교회는 딱 세 마디를 한다. 모여라, 돈내라, 집짓자!"라고 풍자하셨는 데, 틀린 말이라고 반박을 할 자신이 없습니다.

더욱 한숨이 나오는 것은 크게 지을수록 더 많이 채워진다는 말이 어느 정도는 사실 이기 때문입니다. 이 맛에 일부 목회자들은 빚을 내서라도 건물을 증축합니다.

어찌 되었든 이렇게 교회들이 개미처럼 집짓기에 몸바쳐 열을 올리니 헌금에 이골 난 일반 교인들은 건축 헌금을 자주해야 하는 작은 교회를 기피하여 큰 교회로 몰리고, 큰 자가 이기는 자본주의 경제 원리처럼 대형 교회가 소형 교회 수 십개를 잡아 먹는 참상마저 생기게 됩니다. 즉 한 대형 교회가 교회당을 더 크게 지을수록 주변의 다른 여러 작은 교회들이 무너지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 악영향은 논외로 하더라도, 도대체 끝도 없이 건물만 짓다가 언제 제대로 일을 할 것인지 답답합니다. 보통 크기의 교회가 주요 예산을 건물에 투입하고, 또 교역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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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를 하고 나면 얼마나 남게 될까요. 이러니 구제비, 교육비, 선교비 등이 항상 축소될 수 밖에 없는 것이고 교회는 본연의 일보다는 몸집 부풀리기에 매달려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무한증식하기 좋아하는 괴물이 또 하나가 있는데, 바로 인체내의 암세 포입니다.

이 놈은 브레이크가 고장난 트럭처럼 스톱을 모릅니다. 주위의 다른 세포

를 좌충우돌 가리지 않고 공격하여 자신의 몸집만 키우는데, 결국은 환자가 죽어야 증 식을 멈춥니다. 마치 한국교회의 슬픈 현실과 미래를 보여주는 듯 하지 않은지요. 분들은 '교회가 더욱 커져야 세계에 영향을 줄 수 있고, 또 세계 교회를 움직일 어떤수 있다'는 그럴 듯한 말로 대형 교회당 건축을 정당화하는 모양인데, 이는 순진한 교인들의 간을 키우는

데에는 다소 도움이 될지 모르나 역사가 보여준 진실과는 전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 분들에게

정중히 말해주고 싶습니다. 큰 건물, 막강한 재력,

풍부한 인력 등 그딴 것 믿고 헛바람 든 소리하지 마시고, 교회 본연의 기본에 충실하시라고. 그런 것들은 다 모래성이고 아침 안개이며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것입니다.

세계와 세계 교회는 당신들보다 간은 작아도 머리는 훨씬 더 크니 아무 걱정마시고, 그 대들 교회나 똑바로 섬기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다른 교회들도 세계 최대 교회이니, 장자 교단이니 이 따위 소리 좀 하지 마시면 좋겠습니다. 이는 소녀시대 앞에서 율동 자랑하는 것 만큼이나 보기 민망합니다.

필자는 자신 하나도 제대로 못 뒤집어 엎어 날마다 죽겠는데, 그대들은 무슨 여유가 있어 세계까지 움직이겠다고 난리인지 정말 대단하십니다. 세계가 그렇게 블도저를 몰고 삽질하며 밀어부친다고 움직이는 그런 만만한 상대로 보이시는지요.

그리고 근자에 릭워렌 목사가 "대형화한 교회가 신도 개개인의 요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다"는 말을 했다고 요란을 떠시는데, 강아지 풀 뜯어 먹는 소리 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회가 무슨 개인 비지니스인가요, 고객들의 요구를 충족시키게. 바울이 고 객들의 요구에 따라 선교하고 목회했나요. 오히려 필요하면 가슴이 아플 정도로 신도 들을 꾸짖으며 목회했습니다. 그러면 교회에서 동성애 파티를 하자고 해도 그 요구에 맞 춰줘야 하나요. 교회의 우선적 임무는 무슨 복지 사업이 아니고 성경을 바르게 가르치 는 것입니다.

목회는 '내 양을 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지, 양들의 요구를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가 하나님의 종이지, 신도들의 종인가요? 이 분들은 근본적인 생각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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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가 인본주의이니 목회를 주님의 일이 아닌 인간 비지니스로 수시로 착각합니다. 세계에 영향을 주겠다더니, 오히려 미국 교회의 한 미끌미끌한 목사에게 영향을 받고 있는 느낌입니다. 릭워렌이 아니라 그 친구 할아버지나 사도 베드로가 말했어도 성경 원리에 맞지 않으면 틀린 겁니다.

신을 차려야 합니다. 교회가 커져야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손에 쓰임을 받는 참된 의인 몇 사람이 있어야 세상이 바뀝니다. 떼로 몰려 다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세상을 바꾼 것이 아니라, 바울과 베드로 같은 소수의 헌신된 사람들을 통하여 세상이 바뀌는 법입니다. 지금에야 위대한 사도들로 세상에 모르는 이가 없으나, 예수님 당시의 12 제자들은 출신도 배경도 그리고 학문도 초라한 가난한 어 부들이 대부분이었고 아무런 권력도 없고 세상이 알아 주지 않는 무명의 민초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후원하고 파송해줄 막강한 대형 교회는 커녕 대형 천막이나 하나 제대로 있었는지

의문입니다. 그러나 이름없이 빛도 없이 고난을 받은 그들을 통해 하나님은

역사하셨고, 결국 후일에 로마제국의 황제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죄인으로 몰아 처형시켰던 나사렛 목수의 아들 예수를 나의 왕, 나의 주님으로 받아 들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요점을 정리하자면 건물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일을 한다는 뜻입니다. 정치판 을 보십시요. 부실한 사람들일수록 겉을 치장하고 세력을 키우고 몰려 다니며 위세를 떠는 법이다. 건물을 키워 사람을 더 모으고 사람수로 영향역을 확대해보겠다는 그런 시도는 조잡한 세속의 방법입니다. 반면에 역사를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방법은 다 릅니다. 아무리 고급 레스토랑이 화려하고 시설이 좋아도, 요리사가 엉망이면 게임은 끝난 겁니다. 따라서 건물 타령하지 말고, 사람에 집중하자는 의미입니다.

감리교의 스승이라 할 수 있는 요한 웨슬리는 대형 교회의 도움없이도 영국은 물론 미국까지

변화시키고 크게 영향을 끼친 존경할 만한 분입니다. 당시 큰 교회들은 오히

려 그를 비난하거나 내어 쫓았습니다. 지지 세력도 별로 없던 그가 가진 것이라고는 낡은 성경과 말 한필 정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기존의 대형 교회도 하지 못 한 큰 일을

해냈습니다. 무디를 비롯한 수많은 신앙의 인물들은 큰 교회나 세력을 의지해서 일을 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이

의지한

것은

교회도

사람도

물질도

아니었고

오직

하나님뿐이었습니다.

반면에 거대한 성당을 세우고 화려한 예배를 드리던 중세 교황과 주교들이 무슨 일을 했는지는 요즘 고등학생들도 잘 압니다. 그 타락과 부패가 오죽 심했으면 세계사에 중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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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시대라는 용어를 사용하겠습니까. 과거 찬란한 기독교문화가 있었던 유럽교회들의 그 웅장한 건물들을 한번 쳐다 보십시요. 건물이 없어 오늘날처럼 허망하게 망했는지요. 수 천명이 모이던 그 곳에 그들이 지금은 노인들만 십여명 달랑 모여 예배하는 장면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큰 건물이 없어서가 아니라, 가르치고 구제하고 그리고 선교하는 일에 실패했기 때문에 망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고 교회를 무조건 짓지 말자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교회 건축은 처음 한번만 하자고 제안하고 싶습니다. 교인수가 증가하여 건물이 비좁게 되면 2 부 3 부예배로 운 영하고 그래도 터지게 비좁으면, 차라리 다른 교역자를 분가시켜 중소형 교회들을 확 산시키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한 교회가 끝도 없이 비대해져서 얻어지는 비리는 기존 대형 교회들이 이미 충분히 잘 보여 주었습니다. 교회가 커지다보니 명예와 이권이 생기고, 이권이 생기면 욕심이 생기고, 욕심이 생기 니 세습도 하고, 공금횡령도 하고, 교권 싸움도 하고, 그런 과정에서 귀족 목사님들 주머니가 두둑해지니 슬며시 딴 생각이 나서 성추행도 하시고... 하여간 세상보다 더 썩은 곳이 교회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론적으로 한국교회는 더 이상 무슨 삽질 회사처럼 건물 확장에 열내지 말고, 지역 사회를 섬기며 예배와 구제, 선교 그리고 교육 등 교회 본연의 임무에 보다

충실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목사가 더 이상 먹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목사가 되면 잘 먹고 잘산다는 말이 나오니 사명감도 자질도 안되는 사람들이 목사가 되려고 하고, 또 그런 불순한 목적으로 목사가 되니 교회가 부패합니다.

반대로,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중에도 목회가 너무 힘들어 낙심이 되시는 분들이 계 시리라 생각됩니다. 그런 분들께 "힘내세요, 목사님! 지금 바른 길을 가고 계십니다!" 라는 위로의 말씀을 꼭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다윗이 아비의 양을 지키는 목동이었을 때, 때로는 사나운 사자나 곰과도 싸워야 했습니다. 사자나 곰은 애완 동물이 아니라 생명을 걸고 비장하게 싸워야 하는 맹수입니다. 마찬가지로 주의 양을 돌보는 목회도 때로는 생명을 걸고 싸워야 하는 영적 전투이기 때문에 결코 쉬울 리가 없습니다.

특히 작은 미자립교회에서의 목회는 평범한 사람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정말 힘든 사역 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매우 편안하고 쉬운 목회가 있다면 그것은 병든 목회일 것입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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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오히려

힘들고 고생스러운 것이 목회의 중요한 본질 중에 하나입니다. 그런 면에

서 큰 교회의 귀족 목회를 부러워 하지 않고, 작은 교회에서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 한 영혼의 이름을 부르며 함께 기도해 줄 수 있는 목회는 진정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복 받은 목회입니다 .

으로는 목사가 되면 호의호식하는 것이 아니라 고생길이라는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순수하게 헌신된 사람들이 사역자가 되고, 그런 바른 사역자들이

합심 해서 일을 할 때 한국교회는 더 이상 무한 증식 집짓기를 멈추고 교회 본연의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건물을 키우는 대신에 사람을 키워야 합니다. 나서서 설치기 좋아하는 얼뜨기들이 아니라, 이름없이 빛도 없이 헌신할 그리스도의 참된 일군들을...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 뇨(고전 3:16)."

2009 년 11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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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신도(病信徒)를 깨운다 허상, 허수, 허세가 만든 최고의 작품

근 필자는 몇 분의 형제님들로부터 자신들이 섬기는 교회에서 겪고 있는 절박한 어 려움을 호소하는 메일들을 받았습니다. 실명을 밝히신 그 분들의 이야기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내용은 담임목사님들의 탐욕적인 행태에 대한 신랄한 고발이었고, 그 다 음으로는 그런 목사님들에게 무조건 맹종하고 순응하는 장로님들과 제직들에 대한 절망감과 탄식이 공통적으로 많았습니다.

그 형제님들이 장로님들이나 주요 어른들을 만나 "교회를 이렇게 개인 회사처럼 운영하는 것이 옳지 않으니, 담임목사님께 건의하여 이를 시정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을 꺼내면, 거의 다 완고하게 거절하거나 직접 가서 말해보라는 식이었다고 합니다. 마치 꽉 막힌 절벽처럼 교회의 중직을 맡은 이 분들은 요지부동이었습니다. 물론 담임목사님에게 가서 직접 건의를 하면, 순종을 강요하거나 아니면 "내 교회이니, 싫으면 네가 떠나라"는 식의 답변이 거의 공식이었다고 합니다.

목사에게 맹종하는 교인들

지어 교인수가 350 여 명 정도인 어느 지방 소읍에 있는 교회에서는 목사가 연봉을 1 억 원이나 받고 있으며, 게다가 일반 교인들은 타기 어려운 최고급차를 타고

부흥강사까지 하며 수시로 돌아 다니고 있다고 합니다. 과연 소읍에서 연봉 1 억이 중류 가정의 수입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교회 운영면에서도 마치 목사 개인 사업체처럼 왕같은 권력 체제가 견고하게 구축되어 있었습니다. 이 모두가 그 교회 제직들과 교인들의 순응적인 협력과 지원이 없이는 가능하지 못 했을 것입니다.

비단 이 교회 뿐만이 아니라, 전국에 있는 수많은 다른 교회에서도 부패한 목사님들이 개인기를 마음껏 발휘하며 부정을 행하고, 활개칠 수 있도록 화려한 멍석을 깔아 주고 있는 충성된 일꾼들이 바로 이런 우직한 분들이 아닐까요. 이렇게 담임목사님께 무비 판적으로 맹종하는 제직들과 교인들이 바로 이 글의 주제라는 것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지난 수 십년 간 한국교회는 세계 교회사에 보기 드믄 가시적인 성과를 이루어 냈습니다. 이제는 서울을 비롯한 주요 도시에 교회가 줄줄히 늘어서고, 아울러 지방의 농어촌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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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이나 섬마을에 이르기까지 어디를 가도 교회가 없는 곳을 찾기가 힘들 정도로 교회와 교인수가 크게 늘어났습니다.

런데 누구나 심각하게 우려하는 문제는 이런 양적 성장에 비해 질적인 성장이 제대로 뒷받침이 되지 못한 데에 있습니다. 그동안의 고속성장 과정에서 한국

개신교는 비판자들로부터 세가지의 명예스럽지 못한 별명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이름이 '개독교'이며, 다음은 목사님들에게 주어진 '먹사'라는 이름이고, 다른 하나는 신도들에게 선사된 '병신도'라는 이름입니다. 이것 또한 세계 교회사에 보기 드믄 수치스러운 이름들이라고 할 수 있으니, 하여튼 한국 사람들은 평범한 것은 절대 못 참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왜 개독교와 먹사로 불리게 되었는지는 이미 널리 잘 알려진 사실이기에 생략 하고, 이 글에서는 이 병신도라는 말에 관심을 가지고 몇가지 내용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우선 이 '병신도'라는 말은 사실 잘 아시는 대로 우리가 함부러 사용해서는 안되는 비속한 단어입니다. 그 말을 쓰는 자체로 다른 분들에게 큰 상처를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비판자들이 이를 사용한 것은 '평신도'와 발음이 매우 비슷한데 다가, 나름대로 '병이 들어 잘못된 신도의 상태'를 잘 표현한다고 생각해서 채용한 속 어로 이해됩니다. 어떤 분들은 빈병같이 속이 비었다는 의미로 한자어 '甁信徒'로 쓰 기도 하는 데, 그것도 역시 일리가 있는 표현으로 보입니다.

아울러 필자도 이 글에서 불가피하게 '병신도'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지만 이는 결코 어떤 특정인을 비하하거나 무시하는 의미에서 쓰는 것이 아니라, 이미 어느 정도 일반화되어 알려지고 있는 용어이기에 부득이 쓰고 있음을 양지해 주시기 바랍니다.

병신도를 키운 사람들

러면 어떻게 평신도가 병신도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을까요. 구태여 왜 이런 오명을 갖게 되었을까요. 필자는 그 답을 필연적으로 먹사님들에게서 찾을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들을 키운 사람들이 먹사님들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먹사'란 보통의 건전한 목사님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철밥통으로 생각하고 사리사욕을 채우는 목사님들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귀족 목사와 비슷한 개념으로 보아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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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기본적으로 평신도들이 깨어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평신도들이 성경을 많이 알고 제대로 깨달을수록, 자신들의 비지니스에 더 큰 장애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중세 교회 성직자들이 신도들로부터 성경을 빼앗아 못 읽게 만든 것과 비슷한 상황입니다. 어떤 시대에는 단순히 성경을 몰래 읽었다는 이유만으로도 이단으로 몰려 처형을 당했다니, 정말 인간의 간악함과 그 무지의 끝이 어디까지인지 절망감마저 듭니다.

하여튼 먹사님들이 바라는 최고의 교인이란 자신들의 말에 잘 따르고 적당히 똑똑한 병신도입니다. 고려대학교 김인수 교수는 이를 잘 지적하여 "목회자에게 의존하도록 성도를 양육하는 것은 목회자에게는 안정적이고 좋을지 모르지만, 성도는 병신도가 되 고 하나님의 교회는 병들어 갈 것이다"라고 이미 한국교회에 단호하게 경고한 바가 있 습니다. 하지만 보통의 먹사님들은 기본적으로 교회를 자신의 멋진 비지니스로 알기 때문에, 교회의 운영이나 목회의 초점이 항상 양떼의 양적 성장과 털깍기에 맞추어져 있다고 보면 됩니다. 그래서 양들의 영혼에는 사실 크게 관심이 없습니다. 오로지 양들의 숫자와 몸집만 크게 키워 철따라 털을 깍아 수입을 올리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설교와 교회 프로그램의 내용이 매우 다양한 것같고 제법 신앙적인 것처럼 보 이나, 결국은 '모여라, 돈 내라, 집 짓자!'로 귀결되는 것이 보통입니다. 이들의 교회 에서는 선교도 구제도 봉사도 다 결국은 비지니스 확대를 위한 멋진 명분이며 도구일 뿐입니다.

일 어느 교회가 도둑질이나 악행을 가르친다면, 바보가 아닌 이상 누가 그 교회에 출석을 하겠습니까. 우리의 영리한 먹사님들도 이 사실을 누구보다 더 잘 압니다.

그래서 자신들을 경건하며 능력있는 성직자처럼 가장하고, 교인들에게 다양한 신앙 프로 그램과 그들을 크게 감동시킬만한 그럴 듯한 사업들을 제시합니다.

그 대표적인 것들이 거창한 해외선교, 예배당 건축, 총동원 전도, 미자립 교회 돕기, 불우이웃 돕기, 그리고 기타 봉사 활동들입니다. 어찌보면 그 자체로는 비난받을 일이 없는 정상적인 사업들입니다. 그리고는 현란하고 멋진 화술로 때로는 눈물까지 글썽이 며 교인들의 순수한 신앙심에 호소합니다, "저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 주님을 향한 사 랑과 열정으로 우리 한번 해보자! 순교적 각오로 나가자!". 그런 후에 양념으로 세계가 어쩌고 민족이 저쩌고 하며 헛바람을 조금만 더 넣어주면, 대부분의 순진한 교인들은 가슴이 뜨거워지며 거기서 게임이 끝나버리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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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유치하고 속이 빤히 보이는 수법같지만, 소위 믿음이 좋다는 교인들일수록 더 잘 넘어 갑니다. 그 마음이 순수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교회에서 오래 생활하다 보면 매우 지각있는 극히 일부 교인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신도들은 자연스레 목사에게 맹종하는 병신도의 수준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얼핏 들어도 크게 틀린 것 같지 않은 말인데다가 집단적으로 하도 자주 최면을 거니, 나중에는 거의 무비판적으로 담임목사의 말을 따르게 됩니다.

실제로 많은 먹사님들은 인기 연기자처럼 다양한 모습으로 설교도 매끄럽게 잘 하시기 때문에, 일반 신도들이 그를 참된 목사인지 아닌지 구별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심지어 처음에는 순수하게 잘하다가, 배가 부르고 명예를 조금 얻더니 변절하는 목사들도 적지 않습니다. 아니 근자에 들어서는 적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아주 상당수인 것으로 보입니다. 지난 수 십년 간 편안히 호의호식을 즐기시더니 아예 단체로 동맥경화라도 걸린 듯, 양심이 뻣뻣하게 굳어져서 진리마저 버린 변절자들을 우리는 한국교회내에서 날마다 보고 있습니다.

목사에 의존해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들 병신도를 한마디로 정의하라면, 믿음이 있기는 있는데 스스로 독립적인 신앙 하여튼 인격이 되지 못하고, 자신도 모르게 목사에 의존해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라고 정의해도 큰 오류가 없습니다. 아니 그 보다 더 좋은 표현은, 목사를 열심히 따르는 것이 바로 예수를 따르는 것으로 착각하는 답답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병신도들에게는 몇가지 비슷한 공통점이 있는데, 첫째는 유형 교회 그 자체 를 매우 신성시합니다. 따라서 교회당을 성전이라고 부르거나, 목사를 '주의 사자'처럼 믿고 높게 대접하며 맹종합니다. 당연히 교회의 모든 행사나 프로그램에 무비판적으로 적극 참여하며 헌신적으로 활동합니다. 둘째로, 십일조나 기타 헌금을 철저하고 성실하게 잘합니다. 남들이 적게 내면 믿음이 부족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셋째로, 일반적으로 성격이 착실하며, 자신들이 다른 교회 교인들보다 매우 건전하고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누가 자신들의 교회를 조금이라도 비판하면 정색을 하고 변호합니다. 마지막으로, 자신들의 목사 수준에 걸맞게 세속적인 복과 성취를 매우 중요시하며 그것을 즐긴다는 것입니다. 이 외에도 더 있겠지만, 이 정도만 해도 아쉬운 대로 병신도 명단에 준회원으로 등록할 수 있는 기본 자격은 충분히 됩니다.

그런데 이 분들에게 가장 큰 문제점은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되지 못하고, 자신도 모르게 '목사의 제자'로 길들여진다는 점입니다. 목사에게 배운 내용대로 따라 하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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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하는데 자기 스스로 독립적으로 성경을 읽고, 연구하고, 고민하고, 판단해서, 실천하는 성숙한 신앙인격이 되기에는 많이 부족합니다. 물론 예외는 있겠지만, 이 분들 대다수는 성경 지식이 적지 않으나 심한 편식으로 인하여 영양 불균형 상태의 환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상태입니다. 성경을 배워도 헌신과 헌금을 통하여 복받고 잘된다는 부분을 주로 배우고 또한 그 깊이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성경 전체에서 보여 주시는 하나님의 안타까운 마음을 스스로 이해하고 판단하기에는 역부족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러다보니, 이 병신도와 먹사가 완벽한 조화를 이룬 교회들의 모습은 정말 가관이 아 닐 수 없습니다. 먹사들은 갖은 명분과 핑계를 만들어 욕심을 채우고, 신도들은 이를 아주 좋게 여기며 따라가는 그야말로 속 터지는 일들이 빈발하고 있습니다. 즉 먹사는 병신도들을 양산하고, 그런 병신도들은 먹사의 악행을 지원하는 악순환의 고리가 형성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흔히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병든 교회들의 실체입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평신도를 깨운다!'고 신바람이 나서 열심히 제자훈련도 하고 바쁘게 보냈는데, 요즘은 깨울 평신도들마저도 별로 없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허전한 생각마저 듭니다. 다 스스로 제법 잘 믿는다고 생각하는 병신도들이 주변에 널렸기 때 문입니다. 그래도 예전의 평신도들은 순박했던 편입니다. 요즘의 병신도들은 스스로 독실한 신앙인인데다가 설탕만 주로 먹고 자라서 단소리가 아니면 잘 듣지를 않습니다. 어쩌다 쓴소리를 좀 하면, 대부분은 성경까지 잘 인용하시며 오히려 매우 거친 반격을 거침없이 되돌려 주는 것이 보통입니다.

하여튼 과거에는 조용히 자던 평신도를 깨우는 것이 큰 일이었다면, 지금은 마치 몽유 병에 취한 듯 스스로 부지런히 움직이는 병신도를 깨워야만 하는 암담한 기분마저 듭니다. 물론 이는 훨씬 더 어렵고 힘드는 일입니다. 요즘의 병신도들은 매우 완고한 데다 스스로 똑똑하며 나름대로 정연한 논리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영화에서 깊은 매트릭스에 빠진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해보면 크게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삼허를 모아 놓은 종합예술품

리 알려진대로, 사랑의교회 전임 옥한흠 목사님은 지난 30 여 년 동안 제자훈련을 하는 과정에서, 한국교회의 삼허현상(三虛現像)을 예리하고 아프게 지적하셨습니다.

그 삼허란 바로 허상(虛像), 허수(虛數), 허세(虛勢)라는 세가지 환상과 신기루입니다. 어떤 분은 그 유명한 '평신도를 깨운다'는 책을 통해 한국교회를 각성시켰던 대표적 논리가 바로 "이 삼허에 속지 말라, 삼허를 추구하지 말라, 삼허의 악마성에 붙잡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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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라고 할 수도 있다고 요약했습니다. 필자도 이런 논리는 문제의 핵심을 꿰뚤어 보신 매우 날카로운 지적이었으며 올바른 방향 제시였다고 크게 공감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제자훈련을 매우 잘 했다고 모두가 제자가 되는 것도 아니고, 반 대로 제자훈련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도 제자가 될 수 있는 것도 사실이란 점입니다. 그러나 이 점이 제자훈련 프로그램을 폄하할 이유가 될 수는 없다고 봅니다. 사실 아무리 좋은 프로그램이나 시스템도 결국은 사람이 하는 것이고, 그러다보면 완벽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팀에 따라 좋은 제자가 많이 나올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부분적인 실패가 두려워, 아무 것도 안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이런 면에서, 제자훈련 자체는 매우 훌륭한 시도이며 그런 시도는 충분히 위로와 격려를 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고 봅니다.

럼에도, 사랑의 교회 여러 형제님들에게 매우 서운한 마음을 숨기고 싶지는 않습니다. 특히 새 교회당 건축 추진과 관련하여 어떻게 그리 조용할 수 있는지

그저 놀라울 뿐입니다. 두세 사람만 모여도 시끄러운 것이 우리네 사는 모습인데, 과거 어느 공산국가 전당대회도 아니면서, 수 만명이 모인 교회에서 어떻게 이런 중요한 문제에 그토록 반대가 없을 수가 있는지 정말 경이롭기까지 합니다.

현 예배당이 협소하다는 점에는 이의가 없습니다. 하지만 다른 해결 방법을 추진했어야 한다고 봅니다. 공청회 등을 통하여 교회 분립이나, 이미 훈련된 타 지역 제자들을 해당 지역 교회로 돌려 보낸다거나, 근처 학교나 다른 건물 임대 등 다양한 방법을 공개적으로 연구하고 의견을 모았다면 분명히 제 3 의 해결책이 가능했었을 것이고, 설사 최악의 경우에도 지금처럼 일방적인 비판과 비난을 받지는 않을 것입니다.

교회가 웰빙센터가 아닌 한, 훈련을 마친 참된 제자들이라면 구태여 흩어지기를 두려워 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좁아 터져 죽겠다면서, 훈련이 끝나고도 왜 그렇게 똘똘 뭉쳐 있어야 하나요. 아니면 벌써 30 년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덜 커서 목사님 모유가 더 필요하다는 것인지요. 그리고 제자훈련은 꼭 사랑의교회에서만 해야 하는가요. 더군다나 그동안의 제자훈련을 통한 가르침이 옳았다면, 그 고가의 교회당이야말로 삼허가 추구하는 대형화의 신기루 그 자체가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백기사' 운운하며 반대를 허용치 않는 지도부의 치졸함에는 깊은 실망과 좌절감마저 듭니다. 필자를 포함한 많은 믿는 형제들이 새 교회당에서 '허욕'과 '허구'와 '허망'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그대들은 아시는지요

이야기가 약간 옆으로 흘렀지만, 하여튼 지난 한 세대에 걸쳐 사랑의교회를 비롯한 여 러 교회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이렇게 평신도를 깨우는 일에 몰두하고 있는 동안에,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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른 한편에서는 탐욕과 명예를 추구하시는 수많은 먹사님들이 거대한 양산체제를 갖추 고 자기 교회의 신도들을 아예 단체로 병신도로 업그레이드하고 있는 비극이 병행되 었습니다. 그리고 이제와서 보니, 놀랍게도 이들이 대량생산한 병신도들이야말로 앞에 서 언급했던 삼허를 다 모아 놓은 종합예술품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이 병신도들은 앞으로 한국교회의 큰 짐이 될 것이 확실합니다. 만약 이 문제를 적절히 해소시키지 못한다면, 한국교회는 앞으로도 계속적으로 사회의 큰 지탄 을 받고 전도의 문이 더욱 좁아지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하여튼 한국교회는 이렇게 깨어난 평신도들과 시한폭탄같은 병신도들의 혼재 속에서 지난 30 여 년을 숨차게 달려온 결과, 이제 심은 대로 결실을 맺기 시작해서 그 열매들을 다양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요즘 전국 여러 교회에 나타나는 크고 작은 사건들이 바로 그 열매들입니다. 그런데 크게 우려스러운 것은 그런 열매들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니, 비교적 견실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교회들마저 매우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니 나머지 다른 교회들은 오죽하겠습니까. 아예 나머지 뚜껑을 열어 볼 용기조차 나지 않는 것이 필자의 솔직한 심정입니다.

루터와 칼뱅이 그랬 듯이 병신도의 형성 과정과 문제점들을 간략히 검토해 보았습니다. 이제 한국교회 여기까지 는 과거와는 또 다른 새로운 분기점에 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예전의 순박했던 평신도를 깨워야 하는 시대는 점차 지나가고, 앞으로는 고도의 매트릭스에 빠진 완고한 병신도를 깨워야 하는 더욱 어려운 시대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누가 보아도 이 문제는 마치 뜨거운 감자처럼 다루기 쉽지 않습니다. 만일 자신의 교회나 이웃 교회에 가서, "당신들 성경을 제대로 읽고, 좀 똑바로 하시오!" 라고 소리친다면, 입구에서부터 쫓겨나게 될 것이 거의 확실합니다. 아마 그들에게는 사도 베드로에게 예수 믿으라고 전도하는 사람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몸으로 때워서 해결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러니 누가 방법론을 좀 시원하게 말해보라면 정말 뾰족한 수가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역사를 돌이켜 보면, 사실 그 문제를 해결하는 원칙은 이미 우리가 잘 알고 있 는 것입니다. 종교개혁 시대의 평신도들은 지금보다 더 무지하고 완고하였습니다. 중세 천년 이상을 어두운 매트릭스에 갇혀 살아왔으니 오죽했겠습니까. 따라서 과거 루터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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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뱅이 그랬 듯이, 우리 모두 성경으로 돌아가서 그 가르침을 겸허하게 따르며 부지런히 가르치고 전하는 것이 가장 정석적인 방법입니다. 우리 자신부터 삼허의 헛된 욕심을 버리고,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좁은 길로 묵묵히 걸어가면 됩니다.

그렇게 할 때에 눈에 보기에는 복잡하고 어려운 병신도 문제도 마치 거대한 빙산같이 서서히 녹아 질 것입니다. 먼저 믿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스스로 사회와 교회 안에서 소금이 되고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할 수 있다면, 비록 시간은 걸리겠지만, 병신도들도 자연히 함께 동화되고 변화되어 참된 주의 제자로 돌아올 수 있을 것입니다.

론은 우리 모두가 합심하여 바르게 배우고, 바르게 살고, 바르게 가르치고, 꾸준히 전도하는 일이 문제를 푸는 당연하고도 유일한 해법입니다. 우리가 전심으로

기도하고 노력을 한다면 이러한 삶은 교회 내에서는 물론,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그리고 이웃에서도 구체적으로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면 오히려 이런 과정을 통하여 그 동안의 외적 성장에 자만해 있던 개혁교회들이 다시 한번 스스로 각성하고 새롭게 변화되는 전화위복의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한가지 더 첨언하고 싶은 것은, 필자 자신을 포함해서 우리 중에 그 누구도 이 '병신 도'란 이름에서 쉽게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병신도란 이름은 태어날 때부터 주어지는 고유명사가 아닙니다. 우리가 원치 않아도, 건강을 잃으면 자연히 병이 들어 환자가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의 가르침을 늘 마음에 담고 자신을 부지런히 살피지 않는다면, 우리 자신도 언제든지 병든 신도가 되어 교회와 사 회에 누를 끼치고 다른 사람들에게 큰 아픔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이런 이유로 병신도를 깨우는 일은 남이 아니라, 언제나 우리 자신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병신도는 우리의 형제들

한 잊지 말아야 할 점은 병신도들은 우리의 형제들이며 자매들이라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이 분들을 깨우고 도와서 참된 동역자로 세우고 진정한 예배, 선교, 구제, 교육, 그리고 지역 사회를 섬기는 일에 동참시키는 일은 개혁교회가 마땅히

감당해야 할 책무이며 소홀히 해선 안될 중요한 사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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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비록 이 일이 어려울지라도, 너무 낙심해서도 안될 것입니다. 아직도 우리에게는 바알에게 무릅을 꿇지 않은 여러 믿음의 동역자들이 있고, 또한 무엇보다도 우리 신자들의 가슴마다 심겨진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랑과 하늘의 소망은 그 누구도 앗아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기괴하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그 결국에는 너희가 어찌 하려느냐 (렘 5:30~31).”

2009 년 12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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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주일학교 교사가 시작한 일 약하고 부족했던 사람들의 이야기 킴벌(E. Kimbal)은 보스턴에 있는 한 작은 교회 '마운트버농 회중교회'의 주일학교 교 사였습니다. 1858 년 어느 날 구두방에서 일하는 자기 반 학생을 직접 방문하여 성경을 가르치고 함께 기도하는 중에, 결국 그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했습니다. 그 가난한 학 생의 이름이 바로 후일 세계적인 전도자가 되어 미국을 감동시킨 무디(D. L. Moody)였 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계속됩니다.

결신자는 겨우 소년 한 명 회심한 후에 전도자가 된 무디는 21 년 후 런던을 방문하여 큰 전도 집회를 열 이렇게 었고, 거기에 참석했던 메이어(F. Meyer)가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그 뒤 목사가 된 메이어는 미국에 가서 설교하였고, 그 모임에서 채프만(J, Chapman)이 회심하였습니다. 그리고 YMCA 에서 일했던 채프만은 야구 선수였던 썬데이(B. Sunday)에게 성경을 가르 쳤습니다.

나중에 전도자가 된 썬데이는 함(M. Ham)을 강사로 초빙하여, 노스캐롤라이나 샬로트 에서 3 주간 집회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너무나 실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신자는 겨우 십대의 소년 한 명뿐이었습니다. 그러니 거의 실패한 집회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소년의 이름이 훗날 전세계 수 천만 군중에게 복음을 전하게 될 바로‘빌리 그레이엄’이었습니다. 이 모든 일이 한 주일학교 교사로부터 시작된 일입니다.

위의 내용은 수 년 전 필자가 어느 인터넷 사이트에 올렸던 짧은 글을 일부 수정하여 다시 정리한 것입니다. 당시 어느 외국 잡지를 무심코 뒤적이다가 이런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는데, "하나님은 이렇게도 역사하시는구나" 하며 한동안 잔잔한 감동에 잠기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사실 킴벌 선생은 잘 알려지거나 크게 영향력 있는 인물이 아니었고, 오히려 성격이 소심하고 신경이 예민한 분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처음 무디를 만났을 때의 심경을 다 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습니다. "무디가 나의 주일학교 반에 입학하였을 때에 나는 그 처럼 영적으로 어두운 사람을 처음 보았다. 더구나 어떤 일에 유용하게 쓰일 사람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그리고 무디 역시 한 동안 교회 생활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지낸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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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킴벌 선생은 가난한 무디가 실의에 젖어 살아가는 모습을 안타까 이 여겨 어느 날 무디의 구두 가게를 방문하였습니다. 그리고 가게 뒷방에서 둘은 함 께 무릎을 꿇고 무디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실 수 있게 되기 를 간절히 기도하였고, 그 자리에서 무디는 깊은 감동 중에 드디어 주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변화되어 나중에 세계적인 전도자가 된 무디는 평생 정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는데도 3 개의 학교를 세웠고, 미국과 영국에서 기독교를 크게 부흥시켰으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 영향력이 결코 작지 않은 훌륭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1888 년 게일이라는 선교사가 한국을 향해 떠나기 바로 전날, 51 세의 무디는 게일의 어 깨를 두드리며 미지의 나라로 향하는 한 젊은이를 이렇게 격려했다고 합니다. "자네가 조선으로 간다지. 내 자네를 위해 기도할 걸세!" 또한 1907 년 평양 대부흥 운동의 주 역들 가운데 하나인 마포삼열, 윌리엄 블레어, 그레이엄 리, 스왈른, 찰스 번하이젤, 그리고 윌리엄 헌트 역시 무디의 부흥 운동을 경험하고 복음의 열정에 불타 조선으로 달려왔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킴벌 선생이 실천한 작은 사랑이 무디에 영향을 주었고, 무디에 자극받은 여러 따라서 젊은이들이 선교사가 되어 조선에까지 달려왔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이는 한국교회도 킴벌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다는 말이 됩니다. 어쩌면 우리 중에 상당수가 믿음의 스 승들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결국에는 이 킴벌 선생으로 연결될지도 모릅니다.

빌리 그레이엄 역시 1952 년 12 월 전쟁 중인 한국을 찾아와 부산에서 집회를 하였으며, 그 뒤 1973 년 5 월에는 여의도 광장에 모인 100 만 군중 앞에서 복음을 전하였는데, 이 는 그의 생애에서 경험한 최대의 인파였던 탓에 세계적으로도 큰 관심을 끌었습니다. 단순히 군중의 숫자로 이 집회의 성격을 미화하고픈 마음은 전혀 없지만, 하여튼 당시 한국교회 교인 수가 불과 300 만 정도였음을 고려해 볼 때 정말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물론 교회사적으로 보아도 사상 최대의 집회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어쨌든 이 집회에 초청되었던 많은 사람들이 즉석에서 결신을 하였고, 전국적으로도 전도 운동의 열기가 크게 확산되는 계기가 된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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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킴벌 선생 스스로도 자신이 이렇게 무디나 빌리 그레이엄같이 역사적인 인물들을 회심시키는 데 기여하게 될 줄은 전혀 몰랐을 것입니다. 그저 가난한 자기 반 학생 하 나가 딱해 보여서, 그를 찾아갔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작은 사랑이 큰 일의 시작점이 되었습니다. 바로 작은 불꽃 하나가 큰 불을 일으킨 셈이 된 것입니다.

약하고 부족했던 사람들의 이야기 사람을 통해서 일을 하십니다. 그것도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 부족하고, 하나님은 결점이 많고, 약한 사람들을 일으켜 세워서 일을 하신다는 사실이 우리에게는 큰 위로가 됩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힘이 없으셔서 강한 자를 찾으실까요. 아니면 돈이 없으셔서 부자를 찾으실까요. 또한 지식이 없으셔서 똑똑한 사람을 필요로 하실까요. 그러실 이유가 없습니다.

요한 웨슬리도 처음에는 설교가 하도 신통치 않아, 그의 설교 시간이면 꾸벅꾸벅 조는 사람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나중에 그가 옥스포드대학교의 모임에서 설교할 때는 "우리 대학교에 불이 붙었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뜨거운 설교를 했다고 합니다. 변 화된 그의 설교를 들은 많은 사람들은 가슴을 움켜잡고 데굴데굴 구르며 회개하였다고 합니다.

당시의 교회들이 요한 웨슬리를 크게 비방하였는데, 그 이유는 그가 교회의 사치와 성직자들의 타락을 사정없이 비판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더니, 아마 오늘날의 한국 귀족 교회들과 사정이 매우 비슷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많은 영국 교회들에서 요한 웨슬리의 설교를 일체 허용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더 큰 성령의 역사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친구인 화이트 필드 의 도움으로 킹스우드 지방 광부들에게 교회 대신에 야외의 넓은 언덕에서 즉석 설교 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설교는 설교가 아니라 그대로 불덩어리였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청중이 200 명 정도밖에 안 되었는데, 다섯 번째 설교할 때는 그 곳에 1 만 명 이 훨씬 넘었고, 그 다음엔 1 만 8,000 명이 몰려왔다고 합니다. 그 때부터 말씀에 굶주 린 사람들이 사방에서 그를 불렀습니다. 어느 지방에서는 2 만 명이 넘는 숫자가 집회 장을 가득 메우기도 하였고,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홍수처럼 밀려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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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설교가 신통치 않았던 웨슬리를 통해 이렇게 크게 역사하셨습니다. 나중 에 웨슬리가 89 세의 나이로 숨질 때 그에게는 두 개의 숟가락과 하나의 찻 주전자, 그 리고 다 낡아 빠진 코트 한 벌밖에 없었다는 것은 아직도 우리에게 감동적인 이야기로 남아 있습니다.

성경도 약하고 부족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40 년 동안 광야에서 쩌들어 말주변조차 제대로 없던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으로 이끄는 중책을 맡기셨고, 보잘 것 없는 시골 양치기 소년이었던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시기도 하셨습니다.

또한 베드로는 겁약하여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사실이 너무 한탄스럽고 가슴 아파 크게 통곡을 하였는데, 예수님께서는 그런 상한 마음을 멸시치 않으시고 그에게 양들을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변화된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하루에 3,000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주께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이런 예를 다 들자면 끝도 없을 것입니다.

리 중에 어떤 분들은 자신이 너무 부족하고 약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 고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또한 다른 이유들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너무

가난하다거나, 너무 삶의 짐이 무겁다거나, 너무 배우지 못 했다거나, 너무 나이가 많다거나, 너무 겁약하다는 등 충분히 이해가 갈 만한 이유들이 물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너무 약하고 힘들고 낙심해서 좌절 할 그 때에도, 결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포기하지 않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끝이라고 생각할 그 때에 하나님은 일을 시작하시기도 합니다.

이 세상에 누가 주님 앞에 완벽하게 설 수 있을까요. 물론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 모 두 다 죄인이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살펴보아도 게으르고, 소심하고, 욕심이 많고, 잘 난 척하기 좋아하고, 시기하고, 영육으로 무지하고, 그리고 매우 이기적인 것이 우리 의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 또한 늘 바쁘다는 핑계로 아주 작은 사랑조차 제대로 실 천하지 못하고 살고 있는 것이 우리의 적나라한 모습이 아닌지요.

돌이켜 보면, 우리들에게는 거창한 일만을 좋아하고 큰 일만을 성취하려는 좋지 않은 습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큰 것에 너무 몰두해서 작은 일을 소홀히 하고 산다는 것이 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작은 것에 충성하는 자에게 많은 것을 맡기신다고 하셨습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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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다 잘나고, 우쭐대고, 허영에 들뜨고, 허세를 부리고, 헛된 꿈을 꾸는 이 시대 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전심으로 추구해야 할 일은 작은 일에 충성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지금 우리의 주변을 한번 살펴보면, 분명히 해야 할 작은 일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킴벌 선생처럼 한 주일학교 학생을 사랑으로 돌본다거나, 소외된 사람을 찾아 위로해 준다거나, 따돌림을 받는 형제의 친구가 되어 준다거나, 아니면 끼니를 걱정하는 이를 찾아 내 밥을 조금이라도 나누어 먹을 수 있는 그런 기회들이 반드시 있으리라 생각됩 니다. 이런 작은 일을 한 가지라도 꾸준히 실천하며 살아갈 수 있다면 주님께서는 얼 마나 기뻐하실까요.

예수를 따른다는 우리라도 조금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라도 한국교회와 성도들은 강함과 교만의 모습을 버리고, 약함과 겸손을 추구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돈이 부족해서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오셨고, 힘이 없으셔서 십자가를 지셨을까요. 세상이 어지러운 지금이야말로 겸손, 온유, 절제, 경건, 나눔, 섬김 등 우리가 잃어 가고 있는 이런 소중한 가치들을 제자리로 돌려놓아야 할 때라고 생각 합니다.

작은 불꽃 하나가

리처럼 아주 평범했던 한 주일학교 교사의 작은 사랑과 열정이 소년 무디를 변화시 켰고, 후일 전 세계 수 천만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할 소년 빌리 그레이엄을

회심시키는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아직도 끝나지 않고 여전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무디나 빌리 그레이엄의 전도로 회심한 수많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다시 스 스로 새로운 제자들을 만들어 가며,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도처에서 사도행전 후편을 계속해서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킴벌 선생이 시작했던 이 작은 일이 이제는 큰불이 되어, 아마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온 누리로 계속 번져 나갈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이라 확신합니다. 안드레가 베드로를 예수님께 데려왔고, 베드로가 수많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질그릇 같은 우리들에게도 아직 기회가 있다는 명백한 증거가 될 수 있으며, 큰 격려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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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가 다 무디나 빌리 그레함이엄같이 되지는 못할지라도, 킴벌이 될 결론은 수 는 있다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헛된 꿈을 꾸며 큰 불꽃이 되려고 무리할 필요도 없습니다. 작은 불꽃이 타오르면 자연히 큰불이 일어나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교인은 많은데, 제자가 적다"라는 안타까운 탄식을 자주 듣고 있습 니다. 이제부터라도 킴벌처럼 작은 사랑을 실천하며,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자신을 불 태울 참된 주님의 제자들이 구름같이 일어나게 되기를 꿈꾸어 봅니다.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마 25:23)."

2009 년 12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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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도 제자가 되자 목사를 위한, 목사에 의한, 목사의 교회

즘 주변에서, "주객이 바뀌었다"라는 안타까운 말을 자주 듣습니다. 우선 정치권을 보면 그 말이 이해가 갑니다. 국민이 주인이고 정치인이 하인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 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교회가 또한 그렇습니다. 많은 교회에서 목사가 교회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목사를 섬기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이시고 교인들은 주의 자녀들인데, 스스로 '주의 종'이라는 목사 들이 위치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왕 같은 권력을 휘두르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 로 비판자들의 입에서 '예수교'가 아니라, '목사교'라는 조롱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입 니다.

일부 목회자들의 이런 무법적인 행위는 이제 극에 달해서, 교회를 사유화하고 세습하는 악습이 아예 노골적으로 정착화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이렇게 목사가 교회의 우상이 될 정도로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오히려 많은 귀 족 교회들은 비대한 몸집으로 평안과 축복만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귀족 교회들의 영향력 아래 있는 많은 기독교 언론들도 이들의 충실한 나팔수가 되어 그 빛을 잃은 지 이미 오래입니다.

교회의 양극화 이런 담임목사의 독주가 대형 교회에서 더 심하고, 중소형 교회에서는 덜한 그런데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작은 교회에서의 독선과 부조리가 더욱 쉽게 눈에 띠기 때문에, 그 부작용이 더 직접적으로 피부에 와 닿습니다. 최근 어떤 분의 지적대로, 작은 교회에 지치고 실망하여 대형 교회로 옮기시는 분들도 적지 않다는 사실이 이를 잘 증명해 줍니다.

사실 크기에 관계없이 많은 교회들이 병들어 신음하고 있으나, 그나마 대형 교회를 가 면 다양한 프로그램은 물론 풍부한 인적자원으로 인해 개인적인 부담감도 훨씬 적게 느낍니다. 또한 상대적으로 담임목사의 독선적이며 직접적인 간섭으로부터 보다 자유 스러운 신앙생활이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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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들의 결정이 옳고 그름을 떠나서, 현재 한국 교인의 80%나 되는 사람들이 소수의 중대형 교회에 출석하고 있으며, 겨우 20%의 교인들만이 전체 교회의 80%나 되는 작은 교회에 출석하고 있다는 이유가 부분적으로나마 설명이 됩니다. 물론 작은 교회의 영 세하고 열악한 환경 때문이라는 다른 이유도 있기는 합니다. 사실은 한국 교인의 거의 과반수가 아주 극소수의 대형 교회에 다니고 있 특히다는놀라운 점입니다. 더구나 '한국교회살리기운동본부'에 따르면 현재 전체 교회들 가운데 60% 이상이 교인 50 명 미만의 미자립 개척 교회입니다. 이런 극심한 양극화 현상은 대형 교회가 잘해서 생긴 것이라기보다는, 작은 교회가 가지고 있는 구조적인 약점이 더 큰 원인이라 생각됩니다.

더우기 담임목사의 주도로 건축 헌금이나 십일조를 강요하는 분위기 역시 교회의 양 극화를 더욱 가속시키는 데 크게 일조하고 있습니다. 작은 교회에서는 이를 충분히 못 낼 경우 쉽게 노출이 되고, 목사나 다른 교인들 보기에 거북스러워지기 때문입니다. 특히 초신자들은 이로 인해 더욱 큰 상처를 입고 교회를 떠나기도 합니다.

이렇게 담임목사들의 독주와 잘못된 지도력은 교회의 크기 분포에 지대한 영향을 줄 정도로 중요한 변수가 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작은 교회는 항상 사람이 너무 부족하고, 큰 교회는 건물이 매우 모자라는 정말 웃지 못할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수동적인 당회와 제직회 크기에 관계없이, 거의 모든 교회에 당회니 제직회니 하며 제법 교인들의 어쨌든 주도적 참여가 가능한 조직들이 구성되어 있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그 내용을 들여다 보면, 기존의 정규적인 사업이나 행사 그리고 사소한 일 처리는 잘하는지 몰라도 신규 사업, 해외 선교, 예배당 건축, 교역자 인사, 예산 책정, 외부 강사 섭외 등 기타 중요한 사안에 대해서는 능동적이며 창의적인 의사 결정 능력이 매우 취약합니다.

물론 예외는 있겠지만, 그들 대부분은 그저 담임목사가 결정하고 제시하는 정책을 수 동적으로 승인하고 추종하는 거수기 역활을 성실히 하고 있다고 보면 지나친 비하일까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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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안타까운 일 중 하나는, 대부분의 교인들은 그저 별로 반대 의견 없이 항상 '조 용한 교회'가 매우 '은혜로운 교회'라고 생각한다는 점입니다. 그런 안일하고 무지한 인식 덕분에, 많은 교회들이 담임목사의 독주 속에서 날마다 조용히 썩어 가고 있습니 다.

현실적으로 한국교회 내에서, 담임목사의 잘못된 정책에 반대하는 의견을 정당하게 밝 히고 이를 추진하여 당회나 제직회를 설득할 수 있는 풍토가 갖추어진 교회가 몇 교회 나 있을까 심히 궁금합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요. 아마 일부 극소수의 교회를 제외하고는, 거의 드믈 것입니다.

국교회 안에서 이제 담임목사의 자리는 거의 성역화한 듯 합니다. 목사 의견에 조금 이라도 반대를 표명하면 대부분의 목사들은 마치 영권에라도 도전을 받은 듯

자존심이 상해 펄펄 뛰고, 교인들 역시 감히 귀한 목사님에게 대든다고 난리가 납니다. 광신도들을 거느리는 이단이나 사이비 종교 교주들만 흉을 볼 일이 아닙니다.

물론 바른 길을 의연하게 걷고 계시는 존경할 만한 목사님들도 적지 않지만, 도대체 무슨 근거로 많은 목사님들은 이렇게 왕이 되어 안하무인으로 군림할까요.

그들은 정말 마음으로 예수를 믿고 거듭나서, 참된 제자가 되어 예수를 따르고 있는 것일까요. 이런 깊은 회의마저 듭니다. 하여튼 왜 미국이나 유럽의 교회보다 더 심하게, 유독 한국교회는 이렇게 '목사의 교회'가 되어 가고 있을까요.

다른 이유들도 여러 가지 있겠지만, 그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상당수의 목사들이 '주 의 제자'를 키우는 데에 힘을 쓰기보다는, 자신들에게 순응하는 '목사의 제자'를 키우 는 데 힘을 써 왔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순종과 헌신'을 잘 가르쳐 비지니스 확대에는 성공을 했으나, '예수님의 제자된 길'은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보다 더 정확한 표현은, 그 들 자신조차 아직 제자가 되지 못 했다는 사실 때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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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와 무속인

친 비유를 들어 매우 유감스럽지만, 오늘날의 많은 목사와 병든 교회들을 보면 자꾸 무당과 굿판이 연상되는 것이 필자의 솔직한 심정입니다. 무당들은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춤추고 신명나게 한판 벌이다가, 나중에 굿이 다 끝나면 조용히 거기에 바쳐진 돈을 싹 쓸어 갑니다.

돈을 더 많이 바치면 큰 굿을 차려 주고, 적게 바치면 지성이 부족하다고 박대하기도 합니다. 이는 병든 교회에서 담임목사가 자주 보여 주는 일인극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 다.

'천신굿'은 사업의 번창에 감사하고 지속적인 발전과 평안을 위하여 푸짐한 재물과 정 성을 바치고 벌이는 큰 굿을 말하고, '성주굿'은 집안의 무사태평과 대주의 안녕을 빌 고 부와 번영을 위하여 행해지는 것이라 합니다.

또한 '진적굿'은 무당이 자신의 신령들에게 바치는 감사제의 의미를 갖는다고 합니다. 이는 무당으로써의 역할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무당 자신의 지속적인 발복을 기원하 고자 하는 굿입니다. 그리고 '내림굿'은 한 무당을 선생으로 모시고 무업을 배우고 익혀 다음 제자가 태어날 때 행해진다고 합니다.

어째 기분이 좀 으시시하지 않으신지요. 혹시 무속인들도 '제자 훈련' 비슷한 것을 하 고 있는 느낌마저 든다고 생각을 하시는 분들도 있으실런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사 실은 그들이 제자 훈련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목사들이 이들 무속인들을 따라 늘 '복 타령'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야 합니다.

그리고 일부 목사님들께서 제사장적 목사 가운을 입고 설교하는 모습을 보면, 마치 무 당이 오색 찬란한 무복을 입고 열 올리는 모습과 어찌 그리 비슷한지. 이는 필자만의 착시일지 궁금합니다.

권위주의에 회칠한 목사 가운 나온 김에, 이 목사 가운 이야기를 조금 하고 싶습니다. 물론 예배시 복장이 말이정갈하다고 생각해서 별 다른 생각이 없이 입고 계신 분들도 더러 계시겠지만, 그 가운이란 것이 구약의 제사장들이 제사를 드릴 때 입던 복장을 연상시킵니다.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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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목사직은 제사직이 아니라 '가르치는 장로'로서 오히려 교사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목사는 예배 시간에 제사장 역활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어떤 분들은 목사는 성직자이니 그런 성스러운 가운을 입는 것이 좋겠다고도 하시는데, 이는 목사님들이 강단에서 폼 잡고 무게를 잡으시는 데 크게 도움이 되는 말인지는 몰 라도, 성경의 원리에는 맞지 않는 말입니다. 넓은 의미에서는 목사만이 성직자가 아니 라, 소명을 받은 모든 신자들이 다 성직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무슨 근거로 그런 요상하고 유치한 가운을 입어야 하는지 우습지 않습니까. 이 는 마치 어느 교회 학교 반사가 아이들 앞에서 홀로 유치한 가운을 입고 가르치는 모 습만큼 어색한 일입니다. 결국은 인위적으로 예배 분위기를 성스럽게 보이도록 하고, 자신들의 모자라는 권위를 조금이라도 더 치장해보려는 알량한 수단이 아닌지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이런 목사 가운도 과거 한국 개혁 교회에는 거의 없었던 일입니다. 미국 어느 대형 교회의 폼 잡기 좋아하시는 세습 목사님이 화려한 박사 가운을 입고 설교하는 것을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아 따라 하시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유감스럽게도 예술적인 안목이 전혀 없는 필자의 눈에는 그렇게 애쓰시는 모습이 그저 안쓰럽고 민망하게 보일 뿐입니다.

이는 개혁 교회가 중세 가톨릭으로부터 나올 때 저런 겉치장은 좀 하지 말자고 하여 버린 관습인데, 신부들이 사제복을 입는 듯이 과거로 되돌아 가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 분들은 부지런히 개혁과 개선을 해도 시원치 않을 판에, 개악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니 다음 주일부터라도 그 긴 옷을 좀 벗어 버리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성경에 시키지도 않은 엉뚱한 일을 구태여 고집스럽게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요. 만약 그냥 버리기가 정 아까우시면, 물걸레로라도 만들어서 교회 청소를 하실 때 요긴하게 사용해 주시면 좋을 것입니다.

모든 신자가 다 성직자

회 내 여러 미신 중 하나는, 마치 무당이 굿판의 주재자인 것처럼 많은 교인들이 목사를 교회의 주재자로 오해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무당의 비위를 건드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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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워하듯, 목사를 은근히 어려워하고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왜 그리 두려워하는지 그 근거가 모호합니다.

오히려 목회자 중 일부 거짓 목사들은 하나님조차 두려워 하지 않는데, 신도들이 주 안에서 같은 형제인 그들을 두려워 하니 정말 답답한 일입니다. 성경에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 들을 더할 것이니라"는 말씀이 있듯이 목사님과 장로님들을 존경하는 것은 좋지만, 두 려워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목사나 장로들은 교회 안에서 더 높은 직책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모두 대등한 직분의 형제이며 자매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목사직은 구약의 제사직이 아닙니다. 개혁 교회 안에서는 목사와 장로만이 성직자가 아니라 집사, 권사, 교사, 반사, 성가대원, 봉사 위원 그리 고 모든 성도가 다 거룩한 소명을 받은 성직자입니다.

러므로 교회 안에서 목사직이 다른 직분 위에 군림하는 특별하게 우월한 높은 자리가 절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울러 교역자는 물론 모든 교인이 다 대등한 동역자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목사 홀로 중앙집권적으로 독주하고 독재하는 일인 체제가 더 이상 허용되어서 는 안 됩니다. 목사는 가능하면 설교와 교육 사역에 집중하고, 다른 일들은 동역자들에게 적절히 분담시키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특히 담임목사가 마치 재벌 기업처럼 수직적이며 계급화한 조직으로 교회를 운영하는 것은 다시금 권력화한 중세 교회로 돌아가겠다는 불의한 행위입니다.

아울러 다른 교역자나 제직들을 담임목사를 돕는 들러리나 도우미 정도로 생각하는 고질 적인 악습도 당장 버려야 할 시급한 과제입니다. 당연히 동역하는 부목사님이나 전도 사님들에 대한 업무 분담이 보다 정당하게 배분되어야 하고, 처우도 담임목사에 비해 너무 차이가 나지 않게 적절히 개선되어야 합니다.

다행히 극소수의 교회에서나마 이를 이미 잘 실천하여 다른 교회의 좋은 모범이 되고 있다니 매우 기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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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튼 많은 교회들이 말로만 '평신도를 깨워, 동역자로 세우는 교회'라고 요란하게 선전하지 말고, 정말로 모든 기득권을 사심없이 버리고 제대로 다른 교역자들, 제직들, 그리고 모든 교인들과 평등하게 동역을 해 주시기를 거듭 부탁드립니다. 땅 위에서 고작 백년도 못 사는 짧은 인생들이, 홀로 욕심을 부리고 주의 영광을 가리며 살기에는 너무 억울하지 않습니까. 아울러 아무리 유명하고 베드로보다 설교를 더 잘하는 대형 교회 담임목사라도, 괜히 무게 잡고 거리를 두며 사치스럽고 교만을 떨고 잘난 척하는 사람은 아직 제자가 되지 못한 목사로 보아도 무방합니다. 참된 주의 제자라면, 언제나 겸손하고 온유하며 절제 하며 형제들을 거리감 없이 사랑으로 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조금만 유명해지면 자신이 무슨 대단한 인물이라도 된 듯 문턱을 바벨탑처럼 높 히고 우쭐하는 목사들을 자주 보게 되는데, 한마디로 말해서 그 영혼이 정말 불쌍하고 안쓰럽습니다. 이런 행태야말로 자신들이 아직 진정한 주의 제자가 되지 못 했다는 간 접적인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목사의 시녀들 교회 내에서 마음껏 독주할 수 있도록 허용한 일차 책임은 장로들에 사실게 담임목사가 있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당회가 일차적으로 제구실을 못하고 목사의 시녀 노릇이나 하고 있으니, 목사가 교회와 회중을 만만하게 보고 교주처럼 행세하는 것입니다.

앞으로는 목사를 청빙할 때부터 노회법이나 교회 정관 등을 통하여 그 권한과 의무를 명확히 하고 약정서를 받아야 할 것이며, 교회 운영의 주체는 전교인이 모이는 공동의 회와 여기서 권한을 위임받은 당회 및 제직회가 되어야 합니다. 당회장도 모든 장로님 들이 임기를 두고 돌아가면서 분담하면 더욱 좋습니다. 이렇게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 가요.

목사와 장로는 대등한 직분입니다. 그런데 장로들이 이를 망각하고 필요 이상으로 목 사를 떠받들고 맹종하니 교회가 사기업화하는 것이 아닌지요. 만일 장로직을 제대로 못 하겠으면 차라리 오늘이라도 당장 물러나는 것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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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교회가 부패하는 책임을 목사들에게 묻고 있으나, 오히려 이를 방조한 장로들의 책임이 더 클지도 모릅니다. 목사가 잘못하거나 실수하면, 오랜 신앙생활을 한 장로답게 지혜롭게 대처하여 이를 잘 시정해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목사의 말이라면 무조건 분별 없이 맹종하는 그 단순함은 절대 참된 신앙도 아니고 미 덕도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장로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한 큰 죄악이라고도 할 수 있 습니다. 장로들이 뜨뜻미지근하여 늘 우물쭈물하니 목사가 월권을 하며 흔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이유로 장로들이 성경의 가르침을 잘 이해하고 든든히 서 있는 교 회야말로 건강한 교회입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대부분의 병든 교회에서는 이마저 기대하기 힘듭니다. 담임목사가 장로의 대다수를 장악하여 손에 쥐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 상당수는 참된 '주의 제 자'가 아닌 '목사의 제자'가 된 지 이미 오래입니다. 그러니 이런 목사와 그의 제자가 주도하는 병든 교회들은 모두 '목사의 교회'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바보 목사가 그립다 주변에서 흔히 보는 대로, 요즘 많은 목사님들은 정말 박학하시고 유능합니다. 우리가 머리가 나쁘다면 그렇게 교회를 쥐고 흔드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물론 대부분 젊잖은 목소리로 설교도 그럴 듯 하게 잘하시고, 처신도 품위 있고 유연하게 잘합니다. 그런데 그런 미끈한 설교만 오래 듣고 살다 보면, 영혼은 메말라 가고 뱃살만 불어나는 것이 문제입니다.

지방에서 교회를 섬기시는 한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이 목사님이 하루는 신문에서 '안 구 기증을 바란다'는 광고를 보셨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무심코 지나갔는데, 계속해서 이 광고가 마음에서 지워지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분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게 두 눈을 주셨는데, 하나를 나누어 주어 한 생명이 광명을 찾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그것은 물론 쉬운 일 이 아니었습니다.

오랜 생각과 기도 끝에, 결국 눈 하나를 기증하기로 굳게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내가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아내에게 진지하게 설명하면서 동의해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사모님은 그 앞에서 아무 말도 못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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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발' 떨고만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남편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아내는 그 결심이 그냥 한번 해 보는 것이 아님을 알고, 결국은 동의하게 되었습니다.

아내의 동의를 받고 난 이 목사는 부모님이 또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아 버님을 모시고 좋은 식당에 가서 음식을 잘 대접한 후, 집에 모시고 와서 무릎을 꿇고 자기의 결심을 차분히 말씀드렸습니다. 아버님도 은퇴하신 목사님이셨는데, 그 말을 들으시고 충격을 받으셨는지 아무 말씀도 안 하시다가, "네가 신앙적으로 그렇게 결심 했다니, 내가 어떻게 반대하겠느냐?"고 하시며 마침내 동의를 하셨습니다.

이 목사님은 드디어 신문에서 오려 놓았던 연락처에 전화를 걸었다. "제 이름은 아무 개입니다. 제가 오래 전에 눈이 필요하다는 광고를 보았는데, 아직도 눈이 필요하신지 요? 필요하시다면, 제 눈을 하나 기증하고 싶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랬더니 전화를 받은 사람이 깜짝 놀라서 소리쳤습니다. "아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저희가 원하는 것은 세상을 떠나실 때 각막(角膜)을 기증을 해 달라는 것이지, 생사람의 눈을 빼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습니다." 결국 이 바보 같은 목사는 안구 기증이 불가능한 것을 알고 조용히 전화를 끊었다고 합니다.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는 정말 목이 메어 한동안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요즘 이세상에도 저런 분이 있다니, 정말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저런 바보 같은 목사님이야 말로 진짜 목사님이 아닐까요. 이 분 외에도, 자신의 교인을 위해 신장을 떼어 기증하신 목사님도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분은 가난한 시골 교회 목사였던 자신의 부친을 회고하며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고 합니다. "우리 아버지는 한번도 제대로 사례비를 받은 적이 없다. 백만 원? 평생 만져 보지도 못한 숫자였을 뿐이었다. 그래서 하늘만 보고 사셨다. 그래도 시골이니까 돈 쓸 일이 별로 없어서 굶지는 않았고, 또 돈 때문에 죽겠다고 악을 쓰지도 않았다. 비록 간장에 밥을 비벼 먹으면서도, 그 위에 참깨를 뿌려 먹으면 좋은 날이었고 거기에 어쩌다 날계란까지 있어서 비벼 먹으면 정말 행복한 날이었다."

이 분은 부친으로 인해 그렇게 고생스럽게 살았는데도, "다들 돈이 최고라고 사니까, 목사라도 돈 없이도 산다고 보여 줘야지. 다들 자기 살기 바쁘니까, 목사라도 남들 챙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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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빠야지. 다들 땅만 보며 사니까, 목사라도 서서 하늘을 보며 바보짓을 해야지"라고 하시며, 그런 아버지를 자랑스러워 하셨습니다.

이런 분들 외에도 알려지지 않은 훌륭한 목사님들이 주변에 얼마든지 많이 계실 것입 니다. 꼭 사람들의 눈에 띠는 무슨 특별한 일은 하지 않더라도, 허탄한 세류에 휩쓸리 지 않고 겸허한 마음으로 묵묵히 교회를 섬기시는 여러 목사님들이야말로 정말 한국교 회에 보물 같은 귀한 분들이 아니겠습니까.

다들 영악하고 이기적인 이 시대에 이런 뚝배기 같은 목사님들만 계신다면 얼마나 마 음이 든든하고 좋을까요. 이 분들이라면 과연 '예수의 교회'가 아닌, '목사의 교회'를 만들어 자신의 사욕을 채우고 세상을 어지럽히겠습니까.

처음 사랑으로 다시 시작하자

은 분들이 교회 개혁에 공감하고 이를 위해 힘쓰고 계시지만, 기존 교회의 개혁에는 많은 한계를 느끼신다고 합니다. 병든 교회 내에서 누군가 듣기 싫은 쓴소리를

조금이라도 하면, 목사는 대개 뒤로 살짝 빠지고 자신을 추종하는 다른 교인들을 동원하여 그 사람을 매도하거나 몰아세웁니다.

그런 일을 자주 겪다 보면, 교회 갱신은 실종되고 순진한 교인들끼리 막장 싸움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러다 결국은 서로에게 상처만 주고, 마음이 성숙한 개혁 성향의 교 인이 물러설 수 밖에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느 개혁 모임에 오랫 동안 몸 담고 수고하셨던 한 목사님은 "그동안 얻은 최고의 소득은 기존 병든 교회 내에서 개혁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뿐이다"라고 탄식한 바 있습니다. 이는 전혀 과장된 고백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그 만큼 기존 교회의 동맥경화가 심각하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경직된 독재정권처럼 '소통' 이 안 됩니다.

그래서 기존 교회 내에서의 개혁은 가능한 범위 내에서 추진함과 동시에, 이제는 별도 로 새로운 대안을 추가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역사 속에서 익히 경험 한 것처럼, 교회의 지나친 대형화 추구는 언제나 교회의 세속화와 사유화를 이끌어 왔 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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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새로운 대안은 제도적으로 대형화를 막고, 부정과 부패를 최소화할 수 있는 모델을 가지고 시도되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그런 모델은 바울과 베드로 그리고 초기 교부들의 사역을 자세히 연구하고 지혜를 모으면 반드시 얻어질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다행히 일부에서 이미 공동 목회, 자비량 목회, 가정 교회, 평신도 교회 등 다양한 방 법으로 이런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이는 매우 바람직한 현상입니다.

불과 100 여 년 만에 한국교회는 큰 양적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이제라도 다음 100 년을 내다보며, 내실 있는 질적 성장을 위해 새로운 시도를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 땅의 참된 복음화를 위하여, 초대교회의 제자들처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보자고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도 바울, 베드로, 누가, 요한, 바나바 그리고 디모데처럼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복음을 가지고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참된 제자가 되자

론을 말씀드립니다. 목사가 제자답지 못함을 염려해야 할 정도로 매우 혼란한 세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목사만이 잘못하고 있을까요. 오늘날 목사가

목사답지 못하고, 장로가 장로답지 못하고, 그리고 신자가 신자답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슬픈 현상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비판에서 과연 누가 자유스러울 수 있을까요. 우리 모두가 허물 많은 죄인이라는 탄식이 저절로 터져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오죽하면 사도 바울조차 자신이 '죄인의 괴 수'라고까지 말했을까요. 하지만 여기서 그냥 좌절해서는 안 되니, 서로 일으켜 주고 붙잡아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단순히 일부 목사님들을 비판하자고 주제넘게 이 글을 쓰는 것은 아닙니다. 목사님도 참된 제자가 되어야 하겠지만, 우리도 제자의 길을 바르게 가야 한다는 깊은 자성을 하자는 것입니다. 잘못된 교회를 바라보며 개혁을 논하기에 앞서, 그 전에 먼저 자신을 고치고 개혁하자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교인들의 참된 변화가 없는 교회 개혁이란 언제나 실패할 수 밖에 없기 때문 이며, 나 자신이야말로 언제나 가장 골치 아픈 개혁의 장애물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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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를 위한, 목사에 의한, 목사의 교회'는 단연코 잘못된 교회입니다. 따라서 이는 반드시 개혁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개혁이란 언제라도 성경으로 돌아가는 일이요, 주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순종하는 작업입니다.

경이 가르치라 하시니 가르칠 것이고, 성령이 흩어지라면 흩어져야 할 것입니다. 또한 성경이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하셨으니 이 세대의 허상을 거부할 것이요,

성경이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하시니 부족하지만 이에 순종할 뿐입니다.

마지막으로, 개혁이란 자신의 잘못을 알았을 때 언제라도 바로 돌이키는 사역입니다. 이것이 참된 용기이며, 참된 순종이며, 참된 경건이고, 그리고 참된 제자의 길입니다.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 라(사 1:13).”

2010 년 1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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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땅 밟기'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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른 사람도 아니고 제자훈련의 원조격인, 사랑의교회 담임목사의 입에서 나온 믿기 어려운 발언입니다. 공동의회에서 교회당 신축 추진 절차에 이의를 제기한 한

용기있는 청년에게 "(건축 예정지에) 가서 거룩한 땅 밟기 한번 하셨습니까?"라고 공개적으로 면박을 주면서 하신 거룩한 말씀입니다.

사실 필자가 2100 억 호화 교회당, 그 자체보다도 더욱 염려했던 것이 위와 같이 잘못 된 교회관 때문이었습니다. 교회 지도부가 저런 정도의 인식으로 교회 신축을 추진해왔 으니, 많은 이들에게 큰 실망과 분노를 가져다 준 것입니다. 하기는 얼마 전 그 땅에 마치 성황당처럼 빨간 리본을 단 십자가들을 널어 치장할 때부터 그 수준이 의심스 러웠었습니다.

우선 교회당 부지가 '거룩한 땅'이라는 성경적 근거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설명을 좀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예배를 드리는 장소라서 거룩하다는 말인가요. 아니면 앞으로 새로 운 '성지'로 등록이라도 할 예정인지요. 그리고 그런 논리라면 교회당 화장실은 '거룩한 x 통'이라도 됩니까. 무엇이 그리 거룩한가요? 설마 교회당이 구약의 '성전'이나 '지성소 '라도 된다는 사이비한 주장을 하시고 싶은 것은 아니겠지요.

러면 새로운 부지만 거룩하고, 기존의 교회당 땅은 '거룩한 땅'이 아니라는 말인가요. 기존의 땅도 그렇게 거룩하다면 포기해서는 안되는 것이 아닌가요. 만일

그렇다면, 그렇게 좁다고 불평하며 이사할 것이 아니라, 그 거룩하신 땅을 순교자적인 각오로 지켜야 하는 것이 옳지 않습니까.

더구나 "정의는 독점하면 안돼요"라니, 누가 할 소리를 하는 것인지 적반하장이 아닌가요? 무슨 정의가 공동의회의 승인조차 없이 기존 예배당을 저당잡히고 고액의 대출을 받아 땅을 살 수 있게 합니까. 새로 나온 정의는 그런 것인가요. 거기에 이의를 거는 것이 불의이고 자신들이 정의란 말인가요.

우리 모두 좀 솔직해져야 합니다. 교회당은 그저 모임을 위한 처소일 뿐입니다. 예배란 필요하면 빈들에서도, 광야에서도, 지하굴에서도, 골프장에서도, 예식장에서도 어디에서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요즘 왠만한 동네 교회 학교 반사라도 이런 단순한 말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거룩한 땅이면, 차라리 모세처럼 신발이라도 벗고 밟으시는 것이 어떤가요? 아니면, 아예 무속인들처럼 정한수라도 한 사발 떠놓고 탑을 돌 듯이 더욱 정성껏 밟으시던지요. 이제는 개혁교회들마저도 '교회당'을 '성황당'으로 만들고 싶으신 것인가요.

은 교회들이 뚝하면 복 타령만 하더니, 결국은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사실, 하도 상식을 벗어난 발언인지라 복잡하게 따지고 비판할 건덕지도 별로

없습니다. 다만 앞으로 그 거룩하다는 땅에서 어떤 거룩하지 못한 일들이 다양하게 일어날지 그것이 염려될 뿐입니다.

더 이상 길게 쓰다가는 학문이 천박하고 인품이 부족한 필자의 입에서 또 무슨 거룩하지 못한 말이 나오게 될 지 부담되어서, 이쯤에서 줄이려고 합니다. 아울러 최대한 참고 절제해서 줄이고 또 줄여 쓴 짧은 글이니, 비록 언어가 별로 아름답지 못하고 내용이 너무 빈약하더라도 크게 흉보지 마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래도 속이 울렁거려 한마디만 더 추가하자면, 있지도 않은 '거룩한 땅’을 밟겠다고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며 강남을 헤메는 것보다는, 가난한 예수님을 따라 십자가를 지는 '거룩한 삶’을 밟기 위하여 진지한 노력을 하는 것이 더욱 가치있는 일이 아닌가 묻고 싶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 뇨(고전 3:16)."

2010 년 2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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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량 공동 목회 교회 부패를 쪼개는 '날선 검' 한국에는 약 10 만 명의 목회자와 크고 작은 5 만여 개의 교회가 있으며, 한 현재교회당 평균 교인 수는 약 170 명 정도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계산에 지나지 않고, 실제 이들 교회 가운데 60% 이상이 교인 50 명 미만의 미자립 개척 교회라고 합니다. 이런 통계는 얼마나 많은 목회자들이 열악한 목회 환경 속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지를 잘 보여 주는 직접적인 증거입니다.

그런데 이런 어려운 미자립 개척 교회들에 대하여, 그동안 대부분의 교단들에서 보여 준 대책들은 그야말로 '언 발에 오줌 누기'식의 미봉책 정도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사실상 이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고 쉽게 해결될 문제는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장단기 해외 선교 운운하며 물심양면으로 쏟아붓는 거창한 노력보다 우선순위에 있어서 뒤로 밀릴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해외 선교도 물론 중요하고, 반드시 동시에 추진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가 까운 마을들'도 다 제대로 복음화하지 못 했습니다. 복음은 처음부터 로마나 아테네로 향한 것이 아니었고, 예수님은 로마 근처에도 못 가 보셨습니다. 선교도 가까운 데서부터 먼 데로 가는 일반적인 순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가까운 마을들을 복음화하는 최전선에 서있는 교회들이 바로 미자립 개척 교회들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이들 교회가 도시 변두리와 농어촌, 그리고 외딴 섬 등 소외된 지역이나 기타 복음의 사각지대에 들어서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들 미자립 개척 교회들의 자립을 돕고 지원하는 일은 한국교회가 최우선적으 로 노력해야 할 사역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우선적으로 고려해 볼 수 있는 대책 중의 하나는 기존처럼 각 교단의 노회나 총회 차 원에서, 중대형 교회들과 미자립 교회들을 서로 자매결연하여 재정이 허락되는 범위에 서라도 일정 부분 목회자 생활비를 꾸준히 지원해 주는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물론 각 교단의 적극적인 노력이 계속적으로 필요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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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량 공동 목회'가 필요한 이유

하지만 교단의 어떠한 지원보다도 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목회자들 자신의 문제입니다. 수시로 급변하는 목회 환경 속에서, 구태여 과거의 방법만을 고수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무려 3 만여 교회가 미자립 개척 교회라는 현실을 감안하고, 또 현재도 많은 신학교들에서 새로운 목회자들이 끊임없이 배출되고 있는 상황을 고려하면, 이제는 과거와는 다른 비상한 대안을 심각하게 연구하고 실천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교인이 50 명 미만이 되면, 우선 당장 경제적인 문제가 발등에 떨어진 불이 됩니다. 교회 가 수도원처럼 산속에 들어가 농사를 지으며 자급자족을 하는 것이 아니니, 이는 현실 적으로 가장 시급한 어려움입니다. 이쯤 되면 목회자 생활비는 커녕 교회당 임대료도 감당하지 못해 숨이 찰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개척 초기에는 사람이 적다 보니, 헌신된 일꾼이 항상 모자람은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런 절박함을 크게 개선하는 적극적인 대안 중 하나로 '자비량 공동 목회'를 그래서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지역에 따라서 조건이 달라지겠지만, 초기에는 서로 뜻이 맞는 대략 2-5 명의 목회자들이 한 팀을 이루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혹시 가능하다면 가까운 지역의 기존 개척 교회들이 서로 연합을 해도 좋습니다. 이런 방법은 기존에 난립한 교회들에 대한 자연스러운 구조 조정의 효과도 가져올 것입니다. 지금 현재로는 한국에 교회 수가 적어서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새로 개척을 하는 경우에도 공동 목회는 여러모로 좋은 장점이 있습니다. 우선, 교 역자가 여러 명이 있으니 짐을 서로 나누어 질 수 있습니다. 이럴 경우에 거의 자비량 목회도 가능해집니다. 서로 효율적으로 시간을 조정하여 사역을 지혜롭게 분담한다면, 충분히 자신의 생활비를 벌 시간적 여유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단독으로 하는 자비량 목회는 시간 관리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어려운 점이 너무 많습니다. 하지만 '자비량 공동 목회'는 이런 단점을 크게 개선해 줄 수 있습니다. 따라서 목회자가 반드시 교회에서 주는 사례비에만 의지해서 목회하겠다는 사고방식을 이제는 좀 바꾸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교인이 몇 명 되지도 않는 미자립 교회에서, 교회 재정 때문에 신도들의 주머니만을 바라보는 목회는 모두에게 아픔이 될 뿐입니다.

앞으로 자비량 공동 목회를 새로 시작하실 분들에게는 적어도 한 가지의 기술을 배우거나 또는 전문 자격증을 가지고 스스로 밥벌이 할 각오를 하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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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준비된 목회자들이 세 가정 정도로 한 팀을 이룬다면, 그 즉시 가정 교회 형식으로라도 공동 목회가 당장 가능해질 것입니다.

이 때부터는 예배당 건물이나 교역자 사례비에도 크게 신경을 쓸 필요 없이, 형편에 따 라 작은 예배 처소를 임대하거나 아니면 가정에서라도 교회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전도, 교육, 구제 및 지역 사회를 위한 봉사 활동들도 작은 일부터 나름대로 가능합니다.

여기에 일반 신도 가정이 두어 가정이라도 더 추가될 수 있다면 금상첨화가 됩니다. 처음부터 무슨 큰일을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지역 내에 소외되고 힘든 이들을 찾아 힘이 닿는 대로 도우며 전도에 힘쓰다 보면 교회는 서서히 자라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설사 성장이 더디더라도 처음부터 잘 준비된 정예팀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교회는 흔들림 없이 잡초처럼 강인하게 뿌리를 내릴 것이라 믿습니다.

리가 익히 아는 대로 해외에 나가서 의사나 배관공 또는 택시 기사로 일을 하시며 자비량 선교를 하시는 목사님들도 많이 계시고, 오히려 어떤 평신도 선교 단체들은

전문 직업을 가지고 현지에서 취업하여 사역하는 자비량 선교를 더욱 선호하고 권고하기 도 합니다.

대학생성경읽기선교회 UBF 는 개척 초기부터 지금까지 근 40 년 이상 자비량 선교를 고 집하며 전 세계 83 개국에 1,350 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여 수많은 제자들을 성공적으로 양육하여 오고 있습니다. 물론 본부로부터의 재정적 지원은 전혀 없습니다. 이렇게 자비량 선교도 하는데 자비량 목회라고 못 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캐나다에서 30 여 년 동안 목수 일을 하시면서 자비량 목회를 하신 폴 스티븐스 목사님 은 한국에도 잘 알려지신 분입니다. 그 밖에도 동산침례교회 배제창 목사님, 달라스베델 교회 최태근 목사님 등 많은 목사님들이 자비량 목회를 하셨고, 국내에도 적지 않은 목사님들이 자비량 목회를 하고 계신 것으로 파악됩니다. 탤런트 출신 임동진 목사님은 신학교를 다니면서 자비량으로 3-4 가정이 모이는 가정 교회를 시작해 나중에는 거의 100 여 명이 모이는 교회로 성장시켰다고 들었습니다.

또한 2003 년에 박상철 목사님 등 4 명의 은퇴 목회자들이 시작한 미국 워싱턴 지역의 예수사랑교회는 근자에는 9 명이 공동 목회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담임목사를 포함해 사 역자들이 일체 사례금을 받지 않기 때문에 예산의 70%를 외부에 쓸 만큼 나눔에 큰 힘 을 쏟고 있어 주위 교회에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비록 출석 교인은 불과 30 명 내외로 그리 많지 않지만 예배 때마다 기쁨이 넘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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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997 년에 서울 자양동에서 7 명의 신도들이 모여 시작한 강동교회는 유급 목회 자를 두지 않고도 건강하게 성장한 전형적인 '평신도 교회'입니다. 설교는 준비된 형제들 이 돌아가면서 교대로 합니다. 헌금도 성경적 원리(고후 9:7)에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교회 봉사로 아무도 봉급을 받는 자가 없고, 모든 헌금은 최소한의 경비를 제외하고는 모두 선교비와 구제비로 사용됩니다. 현재는 6 명의 선교사들을 후원하고 있습니다.

목사직은 '직업'이 아니라 '직분'이다 분들은 "목사는 성직자이기 때문에 다른 직업을 갖지 않고, 교인들의 헌금으로 어떤생활하는 거룩한 직분자이어야 한다"라고 주장하면서 자비량 목회를 반대하시고, 특히 '주의 종'이라는 말을 강조하는데 이는 잘못된 인식에 기인한 것입니다. 목사직은 구약의 성직자라 할 수 있는 레위 지파의 제사장직과는 크게 다른 '가르치는 장로의 직분' 입니다. 더 이상 구약적인 의미에서 제사를 담당하는 성직자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만일 넓은 의미에서의 성직자를 의미한다면, 목사뿐만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도 다 성직자이고 주의 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제물이 되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성도들은 다 '왕 같은 제사장'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목사가 다른 직업을 갖는 것 자체가 비성경적인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교인들의 사례비를 받지 않고, 손수 장막을 만들며 선교와 목회를 한 것이 잘못된 일이라고 말하겠습니까. 초대 교회도 로마 황제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되기까지, 처음 근 300 년 동안은 자비량 사역자들에 의해 인도되었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2 세기 알렉산드리아교회에는 약 600 명의 성도들이 모였는데 이 교회의 교 역자는 직업이 은을 조각하는 '은장색'이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흥미를 끄는 것은 중세 교회의 본격적인 타락은 자비량 사역이 사라진 이 후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입니다. 즉 후대에 정치 세력화한 중세 가톨릭 교회가 마치 대리인처럼 하나님과 신도들 사이에 직업적인 사제들을 세우고, 이들을 구별된 성직자로 대우하며 신도들 위에 군림토록 허용하면서 급격한 교권화가 이루어졌고, 그 결과로 교회의 부패도 심화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목사를 사제같은 성직자로 대우하려는 것은 다시 중세 가톨릭으로 돌아가겠 다는 말 만큼 위험한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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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목사도 다른 장로나 집사와 마찬가지로, 그저 가르치는 직분을 가진 성도의 한 사람일 뿐임을 명확히 해야 합니다. 신약 시대에 사는 모든 신자는 다 성직자이고 주의 종이며 예수님의 친구이며 형제입니다. 따라서 그들 사이에는 직분과 사역의 차이는 있으나, 어떠한 계급 차별도 없다는 것이 개혁 교회의 신조입니다.

성경적으로 볼 때, '가르치고 목양하는' 직분을 맡은 목사가 사례비를 받는 것이 잘못 된 것은 아닙니다. 바울 사도도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복음에 장애가 되지 않기 위해' 바울은 스스로 이 권한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장로나 집사 등 다른 직분자들은 모두 헌금을 하며 교회를 섬기는데, 유독 목사만이 거꾸로 사례비를 받으며 교회를 섬겨 야 한다는 고정 관념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 내에서 장로직이나 집사직이 '직업'이 아니라 '직분'이듯, 원칙적으로 목사직 역시 하나의 직업이 되기보다는 직분이 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구약의 제사장직도 아닌 목사직이 정기적인 사례비를 받는 '유급 직업'이 될 때 이권이 생기기 쉬운 법이고, 이권이 있는 곳은 반드시 부패한다는 것이 교회 역사가 가르쳐 준 뼈저린 교훈이기 때 문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 내의 극심한 세습도 이권이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추태가 아니겠습니까. 자비량 목회라면 세습을 해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비량 사역은 희생과 헌 신은 요구하지만, 재물과 이권을 보장해 주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자비량 공동 사역은 앞으로 교회의 부패를 골수까지 쪼개는 날선 검이 될 것입니다.

공동 목회의 장점

기서 공동 목회의 장점들을 조금 더 살펴보고자 합니다. 전 연세대학교 신과대학장 김중기 목사님께서는 "건강한 목회는 바로 팀 목회이며, 오늘날 한국교회의

대안이다" 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다음과 같습니다.

"의사도 외과, 내과, 산부인과 등 전문 분야로 분류되어 있지 않습니까? 목회도 전문 분야가 있어야 합니다. 목사라고 다 설교 잘하는 것 아니고, 다 선교를 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래서 설교, 교육, 선교, 목양 등 4 개 분야의 전문가들이 공동 목 회를 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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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교회에서는 담임목사를 제외한 다른 교역자들 즉 부목사, 교육 목사, 음악 목사 들을 단순히 담임목사의 목회를 돕는 보조 도우미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는 크게 잘못 된 생각입니다. 담임목사가 만능 선수가 아니건만 교회의 모든 일을 직접 관여하여, 자신이 재능이 없는 부분까지도 사역한다면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는 힘듭니다. 공동 목회를 하면 이런 단점을 크게 해소합니다.

필자가 항상 이해할 수 없는 일 중에 하나는, 도대체 무슨 근거로 대부분의 한국교회 담임목사들은 과도한 교권력을 쥐고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이시고 신자들 자신이 주님의 몸 된 교회인데, 왜 담임목사가 마치 개인 회사 사장처럼 행세 하려 하는지 정말 허무맹랑합니다. 목사직도 다른 장로직이나 집사직과 마찬가지로, 교회의 '가르치는 사역'을 위해 구별된 대등한 직분일 뿐입니다.

이런 면에서 자비량 공동 목회의 또 다른 장점은 교회가 성장한 후에도, 교회를 부패 하게 만드는 위험 인자들을 제도적으로 크게 줄여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선 사례비 도 안 준다는데 어떤 귀족 목사께서 이런 고생을 사서 하려고 하겠습니까. 즉 헌신된 목회자들만이 교회를 섬길 수 있는 도덕적으로 청정한 여건이 됩니다.

아울러 공동 목회에서는 당회장을 목사나 장로들이 돌아가면서 임기제로 할 수 있기 때문에 교권에 의한 독재도 막을 수 있고, 부정이나 부패를 강력하게 견제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교회 사유화의 핵심이 되고 있는 '담임목사직' 자체가 없어도 전혀 지장이 없습니다. 따라서 사실상 고약한 교권주의의 머리가 되는 담임목사 제도를 완전히 폐지할 수 있는 바람직한 환경이 마련됩니다. 특정 직분의 한 사람에게 과도한 교권을 몰아준 담임목사 제도는 득보다는 실 실제로 이 훨씬 더 많은 제도임을 갈수록 적나라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담임목사는 원래 직분대로 '당회장'의 자리에서 '설교자'의 위치로 돌아가는 것이 옳습니다.

특히 일부 귀족 목사들께서는 마치 자신이 신자들 위에 군림하는 무슨 대단한 사도나 선지자라도 된 것처럼 착각하고, 틈만 나면 '영적 지도력'이니 '목회 철학'이니 하며 알량한 언사들을 자주하시는데, 좀 자제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아울러 담임목사 제도가 폐지되면 교회가 무슨 이단에라도 넘어갈 것처럼 너무 허풍 떨지 마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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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란 한두 사람의 독선적인 영향력으로 운영되기보다는, 공동 의회에서 권한을 위임 받은 당회나 제직회가 주체가 되어 객관성이 있는 교회 정관에 따라 서로 상의하며 운 영되는 것이 옳습니다. 초대 교회 사도들이 말씀 사역에 주력하고, 교회의 운영을 위해 '다수'의 집사와 장로들을 세운 사실을 참고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비량 공동 목회는 목회자들이 손수 직업을 가지고 생활 현장을 느끼며 사역 하기 때문에, 다른 교인들의 어려움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고 아울러 그들과의 사 고의 간격도 크게 줄일 수 있습니다. 물론 교인들도 목회자들에 대해 단순히 설교자 이상의 강한 동료 의식을 마음으로 느끼게 될 것입니다. 즉 목회자들과 교인들이 서로 마음으로 소통하는 풀뿌리 사역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장점들을 잘 살려 나간다면, 한국교회의 상당수는 '목사의 교회'로 비판을 받는 자리에서 '예수의 교회'로 환원되고, 목회자와 교인들이 더욱 일체가 되어 긴밀하게 협력하며 동역하는 건강한 교회로 발전할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물론 이 글은 '자비량 공동 목회'만이 가장 좋고 유일한 목회 방법이라고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그에 대한 아주 단순하고도 기본적인 제안에 불과합니 다. 하지만 앞으로 많은 실무 전문가들이 이를 더욱 연구하고 문제점들을 보완하여 나 간다면, 기존 유급 목회 제도에 비해 크게 불리할 것도 없고 오히려 장점이 더 많아 보인다는 것입니다.

특히 현재 한국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극심한 부정부패와 미자립 교회들에 대한 실제적인 대안으로 충분히 검토해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직업이 다 고상하다

기서 한 가지 더 첨언하고 싶은 것은, 도덕적으로 문제가 없는 한 어떤 생업을 갖더라도 자비량 목회는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특히 단순 노동에

종사하는 경우 이에 대한 부담이 매우 클 수 있으나, 목회만이 가치 있는 일이 아니라 모든 직업이 다 소중하다는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직장사역연구소 방선기 목사께서 미국에 유학할 때 커다란 빌딩에서 청소를 한 적이 있었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힘들고 짜증이 나서 청소기를 집어던지고 하나님께 하소연 을 했다고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마음속에 목사가 성경 공부나 설교를 주께 하듯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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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처럼, 청소하는 일도 주님께 하듯 해야 한다는 골로새서의 말씀을 들려 주셔서 일하는 자세를 바꾸었다고 합니다. 직업에 대한 선입견이 심한 사람들에게 좋은 교훈이 되는 이야기입니다.

또한 방선기 목사님은 몇 해 전에 '잉크 천국'이라는 기업을 경영하는 분이 사무기기에 잉크 충전을 하는 일을 목회자들에게 알선해서 아주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는 이야기를 소개하시기도 했습니다. 전문적인 기술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일로 땀 흘려 수고한 만큼 경제적으로 보상을 받을 수 있고, 그 일을 하는 과정에서 사무실에 있는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복음을 전할 수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종류의 다양한 사업들이 생겨나고 목회자들에게 지원된다면 자비량 목회가 새로운 목회의 대안적인 패러다임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약 성경을 보면, 바울의 자비량 사역은 고린도에서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를 만나 장막을 함께 만들며 시작된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은 안식일이 되면 고린도의 회당에서 복음을 강론하고, 평일에는 힘써 생업에 종사했을 것입니다. 물론 바나바, 실라, 디모데 등 함께 동거동락했던 동역자들의 일부도 바울의 생업에 동참했으리라는 추측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이렇게 사도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도 자비량 사역을 했는데, 스스로 제자라는 우리라고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거룩한 소명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할 정도로 가난하게 사신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 누구도 인자는 따르는 무리나 다른 교인들로부터 정기적인 급료을 받으며 사역을 하였다는 소리는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왜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데 꼭 생활비를 받아야 합니까. 내 손으로 벌어 쓰면, 무슨 심각한 문제라도 생기나요. 이는 목사들께서 자신들만이 성직자라 는 잘못된 인식에서 나온 것은 아닌지 냉정하게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많은 목사님들이 목회는 정말 힘들다고 하소연하시는 것을 자주 듣습니다. 필자도 물론 주저 없이 이 말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1 년 내내 하루 종일 일을 하고 있는 평신도들은 쉽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오히려 교역자들 못지않게 평일에는 직장에서, 주일 에는 교회에서 쉴 틈이 없이 수고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자비량 사역자를 외국에서는 '텐트 메이커'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이 손수 장 막을 만들며 거룩하게 사역했던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상 교회 내의 모든 신도들은 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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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자비량 사역을 하며 교회를 섬기고 있는 셈이다. 다만 많은 직분자들 중에서 유독 목사들만이 예외적으로 '유급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자비량 공동 사역으로 새로운 교회를 일구는 일은 목회자들뿐만이 아니라 훈련된 평신도들도 할 수 있습니다. 약간의 준비만 한다면 오히려 기존 목회자들보다 더욱 유리한 여건에서 시작을 할 수 있습니다. 이미 대부분은 각자의 직업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공산 국가나 회교권 국가 내의 지하 교회들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요. 교회란 무슨 거창한 신학을 논하는 신학교가 아닙니다. 복음을 너무 복잡하게 만들지 말자는 것입니다.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성경대로 따르며 실천하는 순수한 공동체가 된 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뜻이 맞는 몇몇 형제들끼리 팀을 만들어 건강한 가정 교회나 평신도 교회를 따라서 세워 동역하며 섬기지 못 할 이유가 없습니다. 혹시 평신도들의 잠재력을 가볍게 보시는 분들이 있다면, 스데반의 설교가 결코 사도 베드로의 설교보다 못하지 않았슴을 기억해야 합니다.

비록 대형 교회들처럼 화려한 프로그램이 없을지는 몰라도, 나름대로 탄탄한 유대감 속에서 내실이 있고 생동력 있는 교회가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봅니다. 또한 이런 견실한 노력들을 통하여 교회란 세속적인 복을 받기 위해 모이는 곳이 아니라, 이미 주께 받은 신령한 복을 이웃들과 함께 나누고 서로 섬기는 사랑의 공동체임을 보여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아울러 자비량 공동 사역은 구조적으로 교회를 보다 순수하게 만들어 준다고 할 수 있 습니다. 우선 누구도 교회에서 세속적인 단물을 빼어 먹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어떤 직분자에게도 아무런 경제적 이권을 주지 않습니다. 또한 모든 교인들이 대등하게 동 역을 할 수 있는 토양을 제공합니다. 교권이 어떤 특정인에게 집중될 여지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많은 분들이 "한국교회는 희망이 없다"는 극언을 서슴지 않고 하십니다. 큰 교회, 작은 교회 따질 것 없이 많은 제도권 교회들이 고루고루 썩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에게는 아직도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수많은 주의 제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헌신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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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앞으로 이 땅에 새로운 모습의 자비량 '가정 교회', '평신도 교회' 그리고 '공동 목회 교회'가 많이 세워지기를 기대합니다.

그래서 복 타령과 돈 맛에 절어 '짝퉁 복음'을 전하는 기존 병든 교회들의 탐욕을 극복 하고, 초대 교회 가난한 제자들의 가슴으로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복음을 전해야 할 것입니다. 소위 귀족 목사님들이 즐겨 노래하는 '기복적인' 복음이나 '멋지게 왜곡된' 복음이 아니라, 세상이 미련하게 여기는 '십자가의 도' 그 자체를 바르게 전하자는 것 입니다.

자비량 사역은 물론 매우 힘들고 어려운 길입니다. 이는 누구도 강요해서는 안 되고, 또 한 아무에게나 허락되는 길도 아닙니다. 오직 주님의 소명을 받은 제자들만이 갈 수 있 는 '좁은 길'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에 대한 최종적인 결정 역시, 제자들 자신만이 스스로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미국 남가주 세리토스장로교회에서 목회하시는 김한요 목사님의 간절한 절규를 인용하며 결론을 대신하고자 합니다.

"영혼을 얻는 일과 관계되지 않으면, 우리의 직업은 결코 소명이 아닙니다. 하지만 영 혼을 얻는 일과 관계되면, 세탁소를 하든지 파출부를 하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다 거 룩한 소명입니다!"

샬롬!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 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라.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고전 9:18)

2010 년 2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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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량 목회, 유급 목회 그리고 공동 목회 전에 쓴 부족한 글 '자비량 공동 목회, 교회 부패 쪼개는 날선 검'에서 자비량 필자가 사역의 필요성을 논하다 보니, 이에 대한 몇 가지 장단점과 쟁점들이 자연스럽게 표출되는 것 같습니다. 이는 바람직한 일이며 이러한 문제점과 의문점을 토의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의견들이 수렴되고, 보다 건강한 대안이 제시되기를 진심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특히 댓글을 통하여 소중한 의견들을 정성껏 올려 주신 모든 분들께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물론 이 분들의 적극적인 참여는 모두가 교회를 사랑하는 따뜻한 마음에서부터 나온 것이어서, 언제 다시 읽어 보아도 주 안에서 한 형제 됨이 절로 느껴집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좋은 의견들이 나올 것이나, 이 글에서는 우선 그동안 나타난 몇 가지 반론과 쟁점들을 중간에 점검하는 의미에서 간략히 검토해 보고자 합니다.

'자비량 공동 목회'는 현실적인가 공동 목회가 이상적이기는 하나, 현실적이지는 못하다'는 일부의 지적에 우선대해'자비량 논하고 싶습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자비량 사역자들에게 지나친 짐을 지우는 것에 대한 우려입니다. 그리고 자비량 사역자가 다른 직업에 투입하는 시간적 제한성으로 인해, 설교 준비나 심방 등 교인의 기대에 충분히 부응하지 못하는 사역을 할 여지가 크다는 내용입니다. 이런 지적은 물론 그 이유가 타당하고 적절한 것이라 봅니다.

그러나 사실 이 두 가지 지적 사항은 처음부터 제기된 근원적이며 핵심적인 쟁점입니다. 만일 이 두 가지 약점을 극복할 수 없다면 자비량 목회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필자는 '자비량 목회'에 '공동 사역'을 조합하여야 한다는 해 법을 추가토록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자비량으로 동역을 하는 어느 '평신도 교회'의 이야기를 들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설교를 맡은 사역자는 원칙적으로 심방이나 기타 사역은 다른 동역자들에게 맡깁니다. 아울러 교인들에게 "본인도 직장이 있으니, 설교 외에 지나친 기대를 자제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리고 이런 공백을 보완하기 위해 다른 동역자들이 나머지 사역들을 골고루 분배하여 짐을 나누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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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교인들 중에 누구라도 당장 도와주어야 할 위급한 일이 생기면, 이 교회는 새벽 2 시에라도 바로 출동할 수 있는 인도자가 별도로 준비되어 있습니다. 나머지 교회 운영이나 교육, 선교, 봉사 등의 사역도 이런 식으로 합심해서 처리한다고 합니다. 이런 유기적인 협력과 동역을 통해, 이 교회는 지금까지 건강하게 잘 성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혜로운 자비량 사역자라면 직업 선택에서부터 신중하게 준비할 것입니다. 새벽 부터 밤늦게까지 일을 해야 하는 고된 직업이나, 또는 수시로 출장을 가거나 비상 대 기해야 하는 직업 등은 곤란할 것입니다. 하지만 정규 근무 시간이 예측 가능한 교사나 공무원, 또는 영업 시간이 정해진 자영업 등에서는 충분히 가능할 것으로 봅니다.

단독으로 하는 자비량 사역의 경우는 분명히 위에 지적한 두 가지 쟁점에서 크게 자유 로울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자비량 공동 목회'는 이를 '현실적으로도 가능케' 해 준다고 거듭 확신합니다. 기타 다른 지엽적인 문제들도 교인들이 함께 상의하고 힘을 합친다면 얼마든지 효율적으로 조정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즉 작은 교회에서는 사역의 양이 그리 많지 않아서 가능하고, 교회가 커지면 상대적으로 일꾼이 늘어나니 역시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필자는 사실 이 '평신도'라는 용어에 거부감이 매우 큽니다. 그냥 일반적으로 널리 사 용되기에 부득이 쓸 뿐입니다. 교회 내에 평범한 신도가 따로 있고, 평범하지 않은 신도가 별도로 있겠습니까. 무슨 성경적 근거로 목사는 '성직자'이고, 장로나 집사나 교사는 '평신도'인가요. 모든 신자는 평등하며, 동시에 모든 신자는 평범하지 않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미 교회가 포화 상태이다?

떤 분은 이미 목회자와 교회가 넘치게 많은데, 이제는 자기 돈까지 동원하여 교회를 더욱 난립시키려 하느냐는 의견을 주셨습니다. 이런 지적 역시 물론 일리가 있고,

외견상 맞는 말입니다. 필자도 신학교가 난립하고, 충분한 목회 자질이 없는 사람들까지 무분별하게 대량으로 배출시키는 것은 반드시 시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한국교회 부패와 타락의 간접적인 책임은 이들을 가르치고 졸업시킨 신학교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는 매우 조심스러운 면이 있습니다. 교회가 많은 것은 사실이나, 필자가 그동안 서울과 지방 그리고 해외의 한인 교회 등 여러 교회들을 출석하며 경험 한 바로는 오히려 '교회다운 교회'는 극소수로 정말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이는 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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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분들도 공감하고 동의하는 사실입니다. 즉 '교인은 많은데, 제자가 적다'는 지적처럼, 교회는 많은데, 교회다운 교회는 매우 적습니다.

'교회답지 못한 교회'는 이미 교회의 기능과 역할을 크게 상실한 교회입니다. 이런 교회가 아무리 많으면 뭐하나요. 오히려 주의 영광을 가리며, 전도의 문을 막고 있을 뿐입니다. 마치 바리새인들처럼 자신도 들어가지 않고, 다른 사람도 못 들어가게 천국문을 막고 있는 셈이지요. 이는 차라리 없는 것만도 못한 교회가 아닐까요.

대로, '교회다운 교회'라면 아무리 많은들 무엇이 문제입니까. 우리는 아직도 국민의 오분의 일도 제대로 복음화하지 못 했습니다. 그리고 눈을 조금만 돌려 우리

주변 가까이에 있는 다른 이웃 국가들을 보십시요. 제대로 복음화한 나라가 하나라도 있는지요. 먼저 믿는 우리의 도움을 기다리는 무수한 영혼들이 그 곳에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필자의 소견으로는 아직도 방치되어 일꾼을 기다리는 추수할 곡식이 들판에 널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예배와 성례를 경건히 시행하고, 목회자가 검소하게 살며, 후진들을 바르게 교육 시키고, 이웃과 사랑을 나누고, 선교사를 파송하여 복음을 전하고, 그리고 지역 사회 의 어려운 이들을 힘을 다해 돕는 건강한 교회라면 많다고 해서 무엇이 문제가 되겠습니까. 결국은 근본적으로 교회의 질이 문제이지, 양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자비량 공동 목회'는 바로 이 '교회의 질'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으로 제안된 것으로 보셔도 좋습니다. 우선 제도적인 면에서라도, 보다 순수하고 튼튼한 교회가 보다 ' 교회다운 교회'를 회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다양한 의견들이 토의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자비량 목회가 약방의 감초는 아니다

음으로 논하고 싶은 것은 자비량 목회가 필요에 따라 가치 있고 좋은 일이기는 하나, 이런 사역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거나 또는 모두가 가야 할 길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개인의 은사와 여건에 따라 유급 목회를 할 수도 있고, 자비량 목회를 할 수도 있고, 또한 목회가 아닌 다른 직분으로 교회를 섬길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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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량 사역은 목회자이든 평신도이든 모두에게 힘들고 어려운 길입니다. 때로는 적대적 인 선교지에 들어가는 선교사처럼, 반드시 확고한 소명과 잘 훈련된 준비가 필요합니다. 따라서 모든 목회자나 교인들에게 보편적으로 주어지는 길이 아니라는 점을 다시 강조 하고 싶습니다.

필자가 '자비량 공동 목회'를 언급한 이유는 그 장점과 필요성을 절감하여 이를 소명 으로 생각하시는 분들을 위해 제안을 하는 것이지, 모든 신자들이나 목회자들이 가능 하면 이 길로 가는 것이 좋다는 뜻은 아닙니다. 즉 자신도 지기 힘든 무거운 짐을 소명 과 여건이 맞지 않는 다른 분들께 함부로 권하거나, 분위기를 조장하는 의도를 지닌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

자비량 사역은 필요와 소명에 따라 선택될 수 있는 하나의 대안이지, 모두가 가야 할 길은 아니닙다. 오히려 필자는 어떤 분이 마음으로 이를 결심하고 실천하려고 할 때, 한번 더 기도하고 심사숙고하라고 말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다만 필자의 사견으로는 적어도 '자비량 선교사'가 될 정도의 각오와 준비가 되신 분 들이라면, 다른 자비량 사역도 가능할 것으로 봅니다. 사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한국교 회이지만, 필자는 그래도 그동안에 축적된 한국교회의 역량을 고려해 볼 때, 이런 자 원자들이 결코 적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자비량 목회와 유급 목회는 서로 보완적이다

한 '자비량 공동 사역'의 장점을 설명하고 이를 제안하다 보니, 본의 아니게 유급 목회는 소명감이 부족한 목사님들이 하는 것으로 비하한 듯 한 오해의 여지도 있는

것 같습니다. 이는 필자가 전혀 의도하지 않는 바로, 자비량 목회와 유급 목회는 동전의 양면 처럼 서로 보완적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말하고 싶습니다.

자비량 사역이 성경적으로 문제가 없듯이, 유급 목회 역시 성경적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역의 전문성만을 고려해 본다면, 자비량 사역에 비해 전임 사역이 가능한 유급 목회가 더 유리함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특히 재정적 능력이 충분한 중대형 교회의 경우, 자비량 목회만을 지나치게 고집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미자립 교회나 작은 교회의 경우, 교인 수가 많지도 않고 사역의 부담도 중대형 교회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으니, 우선적으로 '자비량 공동 목회'가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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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특히 100 명 미만의 작은 교회는 교회 예산의 거의 50-80% 정도를 유급 목회자 사례비로 충당해야 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나머지 예산으로 예배당 관리 및 유지와 각 교육 기관 지원 등을 하고 나면 선교나 구제 등 다른 일은 말도 꺼내기 힘듭니다. 현실적으로 도대체 목사를 위해 교회가 있는지, 교회를 위해 목사가 있는지 정말 헷갈릴 정도가 됩니다.

이 대목에서 달리 오해가 없기를 바랍니다. 이는 작은 교회를 폄하하거나 또는 필요없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다만 그 사역의 재정적 효율성에서 큰 취약점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하여튼 나중에 교회가 성장하여 중형 교회가 된 이 후에는, 자비량 사역만으로 계속할 것인가 또는 유급 목회자를 추가로 청빙하여 공동 목회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개교 회가 처한 지역적 여건에 따라 지혜롭게 결정하면 될 것이고, 또한 사역자들도 스스로 각자의 소명을 따라 자비량 유무를 결정하면 될 것입니다. '자비량'은 선택으로, '공동'은 필수로

래서 자비량 목회는 필요에 따라 융통성이 있게, 선택 사항으로 하자는 뜻입니다. 그러나 가능하다면 공동 목회만은 어떤 경우든 필수로 하자고 제안하고 싶습니다.

더 이상 교회 내에서 한두 사람이 교회를 계급화하여 독선적으로 운영하거나, 교권을 쥐고 흔드는 일만은 필히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공동 사역자들을 확보할 여건만 된다면, '공동 목회'가 '단독 목회'보다 심각하게 단 점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특히 중대형 교회에서는 더욱 공동 목회가 중요하고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유능한 설교자들이라고 해도 그 받은 바 달란트가 서로 다릅니다. 즉 수 년 동안 내내 한 사람의 설교로 편식을 하는 것보다, 여러 설교자들의 다양한 관점을 보다 입체적으로 보며 설교를 듣는 것이 훨씬 바람직한 일입니다.

비단 이는 설교만의 문제가 아니다. 목회자 한 사람의 재능과 은사에도 한계가 있는 법입니다. 이미 다른 분들이 지적하였듯이, 목회는 크게 설교, 교육, 선교, 목양 등의 여러 전문 영역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대형 교회에서 이를 홀로 주관하려는 생각은 지극히 어리석은 발상입니다. 여러 사역자가 은사에 따라 이를 분담해서 공동 목회를 하면 이런 문제가 자연히 해소됩니다.


더군다나 담임목사가 과도한 교권을 가짐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심각한 문제점들은 이미 기존의 여러 교회들에서 우리가 지겨울 정도로 매일 보고 있습니다. 교회가 커지고 교 권이 커지면 목회자들은 소위 말하는 '돈과 명예와 여자'의 시험을 받게 됩니다. 우리 모두가 사역자이기 이 전에 연약한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꼭 제도적인 제어 장치가 필요합니다. 고양이에게 홀로 생선을 맡겨 놓고, 나중에 고양이만을 탓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국교회의 부패와 타락은 제도적인 결함에도 큰 책임이 있다는 점을 직시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강력한 제어 장치의 일환으로 장기적인 관점에서, 적어도 '공동 목회'만은 꼭 우리가 가야 할 길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요약해서 정리하자면, 미자립 교회나 작은 교회는 '자비량 공동 목회'를 우선적으로 채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중대형 교회에서는 교회 여건에 따라 '자비 량 목회'와 '유급 목회'를 선택적으로 또는 혼합해서 하되, '공동 목회'만은 필수로 하자는 것입니다.

교회 개혁은 화합과 동역으로

견상으로 자비량 사역자는 유급 사역자에 비해 더 큰 주목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참된 제자'가 아니라면 자원하기 힘든 일이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유급 목회 자라고 해서 '덜 참된 제자'로 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유급 목회자들도 역시 자신의 삶을 오로지 목회에 헌신하시는 귀한 분들입니다. 따라서 자비량 사역자는 더욱 화합에 노력하고 겸손하게 처신을 해야 합니다.

또한 자비량 사역의 의도는 유급 사역자들을 무시하거나 부끄럽게 하고, 직업 전선으 로 내 몰자는 것이 절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합니다. 만일 누구라도 이런 생각을 한다면 이는 성경을 크게 오해하는 것이며, 스스로 형제들의 헌신적인 목회를 밥그릇 챙기기로 비하하는 행위가 될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중대형 교회에서는 이 두 종류의 사역자들이 자연스럽게 화합하고 조화 를 이루어 동역함으로써 더욱 건강하고 전문화한 목회가 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아름다운 공동 목회는 교회의 부패를 크게 억제할 수 있을 뿐만이 아니라, 다른 긍정적인 효과도 기대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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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급 사역자는 전문화에 장점이 있고, 자비량 사역자는 교회의 재정 부담을 줄이며 부 패를 제어하는 장점이 있습니다. 반면에 유급 사역자는 이권에 시험을 받을 수 있고, 자비량 사역자는 시간 관리의 제약성으로 인해 전문성에서 뒤질 수가 있습니다. 이들이 힘을 합쳐 공동 사역을 한다면, 단점들은 최소화하고 장점들을 극대화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점은 교회 내에서 한두 사람에게 지나치게 과도한 짐을 지우는 것은 늘 경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사람을 지치게 하고 결국에는 시험에 빠트리게 하기 때문입니다. 성도들 각 사람에게 그 받은 은사에 따라 적절한 책무를 고루 나누고 동역하는 것이야말로, 공동 사역의 핵심이 되는 정신입니다.

'공동 목회'는 교회가 새로워지는 길

제나 교회 개혁을 억누르고 반발하는 세력들은 사회 일반인들이 아니고, 교회 내에 세속적인 기득권을 막강하게 지닌 교권주의자들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종교

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었으며, 중세 시대에는 주교와 사제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이들 상당수가 거의 중대형 교회의 담임목사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들은 겉으로는 겸손하고 경건한 척 미소를 보여 주며,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주를 향한 헌신을 호소하기도 하지만, 뒤로는 항상 자신들의 사욕을 채우는 현대판 바리새 인들입니다. 예배당을 크게 짓든지, 선교에 열을 내든지, 전도에 총력을 다하든지, 힘들 게 구제를 하든지, 결국 그러한 노력들은 모두 교인들을 동원하기 위한 하나의 전술적 인 눈가림에 불과하고, 최종 목표는 언제나 교세를 확장하여 자신들의 교권과 이권을 키우고 신도들 위에 군림코자 합니다. 그래서 지금 한국교회는 내전 중입니다. 이는 순수와 비순수의 싸움입니다. 교회 개혁이 영적 전투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싸움에서 자비량 목회와 공동 목회는 이들의 탐욕을 골수까지 쪼개는 '좌우에 날선 검'이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특히 건강한 공동 목회는 '허수, 허세, 그리고 허상'을 추구하며 이권을 챙기는 교권주의자들의 문전옥답을 초토화시킬 것입니다.

교회 부패의 심장은 인간의 타락한 마음속에 있고, 한국교회 부패의 머리는 '담임목사 제'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런 문제점을 명확히 알고도, 이리저리 돌아서 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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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로 가는 것은 지혜가 아닙니다. 필요하면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했듯이, 목회자들 사이에도 강력한 견제와 조정을 가능케 할 제도적 장치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물론 모든 목사님들이 다 교권화하고 사욕을 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 나라 구석구석 크고 작은 교회들에는,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제자의 길을 묵묵히 걷고 계신 충성된 '주의 종'들이 셀 수 없이 많습니다. 그리고 이 분들의 순수한 기도와 헌신은 하나도 헛됨이 없이 아름답게 열매를 맺어, 이 땅의 참된 복음화에 진한 밑거름이 될 것임을 의심치 않습니다.

하지만 제도적인 안전장치가 무력화한 교회는 언제라도 교권주의자들의 온상이 되기 쉽습니다. 공동 목회에서라면, 감히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사유화하여 욕심을 채우거나 세습을 시킨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 될 것입니다. 또한 다른 여러 교역자들이 대등한 동역자들임에도 불구하고 부당한 차별을 받고, 단순히 담임목사의 도우미로 전락하는 일도 사라질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공동 목회제'를 확산시키는 일이야말로 의심할 여지없이 한국교회의 체질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것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회의 길이란 하나님 말씀을 손에 들고,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교회와 지역 사회를 섬기는 숭고한 길입니다. 하지만 사탄은 늘 교묘한 방법으로 사람을 속이고,

편리와 안락함으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수 천년 교회 역사 속에 항상 존재해 온 이 영적 싸움은 '십자가의 도'와 '세속주의'의 싸움입니다.

그런데 이 싸움은 단거리 달리기가 아니라, 사도 바울처럼 평생을 걸고 달려야 할 '좁은 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때로는 신자들을 지치게 하고 낙심하게 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늘 비둘기처럼 순결하고, 뱀처럼 지혜롭게 처신을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제는 우리에게 점점 잊혀져 가는 어느 개혁가의 거룩한 소원을 인용하며 이 글을 마치고자 합니다.

"역사와 인생의 어두운 부분에, 하나님 말씀의 빛을 비추이게 하자!"

2010 년 2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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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변절과 십일조 강요 '십일조 의무화'는 사도들이 전한 바 없는 '다른 복음'

"여호와께서 다시는 너희의 헌물을 돌아보지도 아니하시며, 그것을 너희 손에서 기꺼이 받지도 아니하시거늘, 너희는 이르기를 어찜이니까 하는도다(말 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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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 년 '한국교회 미래를 준비하는 모임'인 '한미준'에서 조사한 십일조에 대한 통계 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 개신교도 중 매월 정기적으로 수입의 십분의 일을 헌금하는

교인은 전체의 약 30%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이를 거꾸로 말하면, 교인의 절대 다수인 70%가 십일조를 하지 못 하거나 안 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은 물론 현재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봅니다.

교회 내에서 교역자들이 이 십일조 제도에 대하여 부정적 발언을 하는 것은 거의 터부 시 되어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교단 내에서 스스로 왕따를 자초하는 일이 됩니다. 그럼에도, 일찍이 손봉호 교수님처럼 "십일조는 의무가 아니다. 신약 성경이나 초대 교회에는 십일조 사례가 없다"라고 소신을 가지고 명확히 입장을 밝히신 분들도 적지 않습니다. 점은 툭하면 별 시덥지 않은 이유로도 서로 쉽게 갈라서며 교단 분열을 정말밥 희한한 먹듯이 하던 한국의 교회들이 성경적 근거가 매우 취약한 이 십일조는 거의 만장일치로 지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전 세계 대다수 신자들이 현실적으로 감당하기 힘든 율법의 무거운 짐을 오직 한국교 회만이 일심동체가 되어 반강제적으로 강요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한국의 귀족 목사들은 교인들의 등골이 빠지든 말든 이 십일조라는 '황금 알을 낳는 거위'를 결코 포기할 수 가 없는 모양입니다. 아마 한국처럼 이런저런 요상한 명목으로 많은 돈을 챙겨 가는 교 회는 세계 어디에도 없을 것입니다.

특히 이 십일조 강요가 초신자나 가난한 교인들에게 미치는 악영향은 지대합니다. 다른 무슨 특별한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교회 내에서 괜히 위축되고 믿음이 약한 자로 손 가락질을 받는 느낌으로 지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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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친척들이나 다른 분들에게 전도를 하면서 교회에 나오기를 권면하면, 제일 먼저 튀어 나오는 말이 "나도 교회에 나가게 되면, 십일조를 해야 하는 것 아니냐"라는 부 담스러운 질문입니다. 이보다 더욱 심하게 감정적으로 반발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목사들이 십일조 장사를 해서, 자식들 유학 보내거나 고급차를 타고 다닌다"는 식입니다. 이런 반응들은 십일조 강요가 전도의 문을 얼마나 크게 막고 있는지를 잘 보여 줍니다.

척 교회가 크지 못하는 데에도 십일조가 큰 장애가 되고 있습니다. 상당수의 교인들이 작은 교회에서 십일조를 못 내면 너무 표가 나서 불편하기 때문에, 크게

표가 나지 않는 대형 교회로 이동하여 스스로 작정한 만큼의 헌금 생활을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대형 교회로의 수평 이동 현상에는 이 십일조와 기타 잡다한 헌금 강요도 크게 일조를 하고 있습니다.

더욱 우려되는 것은 한국교회 내에는 기복적인 토속 신앙의 영향이 원래 강한데다가, 일부 목사들이 이를 악용하여 이 십일조를 축복의 수단으로 미신화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글에서는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이 율법적인 십일조 제도에 대한 반론을 간략히 검 토하고, '십일조를 하면, 복 받는다'는 허구적인 미신과 십일조 강요의 부당함에 대하 여 주로 논하고자 합니다.

아울러 십일조의 쟁점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기존에 다른 분들이 이미 지적하였던 주장 이나 논리가 다소 반복되더라도, 이는 처음으로 이런 문제를 접하시는 분들의 체계적 인 이해를 돕기 위함이니 너그럽게 양해하여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또한 일부 목사님들은 십일조가 교회의 중요한 재정 수입원이기 때문에 이에 대하여 다른 반론을 내면 마치 이단처럼 취급하며 몰매를 주시기도 하는데, 신앙 양심을 걸고 다시 한 번 진지하게 검토해 주시기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구약 신정 국가의 십일조는 사실상 세금이었다

래 구약에 언급된 십일조는 아브라함이 바친 십일조처럼 일회성인 경우도 있었으나, 일반적으로는 대부분 신정 국가 체제에서 제사직을 전문으로 맡은 레위 지파를

위한 몫이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용도로는 절기 행사 비용으로 또는 고아와 과부, 나그네 등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거의 세금에 가까웠습니다. 출애굽 이 후 땅을 분배받은 나머지 지파들과는 달리, 제사직을 맡은 레위인들에게는 다른 수입원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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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당시에는 백성들이 십일조를 온전하게 내지 않으면, 당장 제사직을 맡은 레위 인들과 가난한 자들을 굶게 만드는 아주 심각한 일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 유로 말라기서에서 하나님은 십일조를 백성들과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잘 따르 는지 확인할 수 있는 하나의 중요한 시금석으로 간주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자신이 제물이 되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이제는 모든 신자가 다 ' 왕 같은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제사직이 더 이상 별도로 필요 없는 신약 교회에서는 십일조를 누구의 몫으로 드려야 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기게 됩니다.

어떤 분들은 목사가 '성직자'이니 목사의 몫이라고 하는데, 그럴듯하기는 하지만 유감 스럽게도 이는 근거가 전혀 없는 이야기입니다. 오늘날의 목사직은 구약의 성직자인 제 사장직이 아니고 신약 성경에 언급된 '가르치는 장로'나 '교사'의 직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넓은 의미에서는 모든 신자가 다 스스로 제사장의 신분으로 주 앞에 직접 설 수 있는

성직자라

있습니다.

심지어

교리적으로

신분상

성직자를

인정하는

가톨릭조차도 현재 율법적인 십일조 헌금을 걷고 있지 않습니다.

십일조의 변절과 부활

리새인과 랍비들에 의해 변질되기 시작한 십일조는 로마 제국 시대와 중세 시대를 거치면서 더욱 변절되었습니다. 특히 바리새인들이 십일조의 대상에 '토지의

소산'만이 아닌, '모든 소득'에 대해 십일조를 적용하게 된 것이 가장 큰 변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십일조를 잘 내면, 악한 자가 지옥에서 받는 열두 달 동안의 형벌에서 면제된 다"고까지 황당하게 부추겼다고 합니다. 이런 엽기적인 선동은 "십일조 안 내는 자는 절대로 천국에 갈 수 없다"고 큰 소리 치는 한국의 어느 목사님을 연상케 합니다.

반면에 바리새인들이 멸망한 후인 신약 초대교회 시기에는 십일조를 잘해야 한다거나, 또는 잘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기독교가 박해 시대를 거쳐 황제에 의해 공인되기 전인 4 세기 초가 될 때까지도 십일조가 헌금의 일종으로 바쳐지지 않았습니다. 이는 사도들이 십일조를 안 가르쳤다는 실제적 증거입니다. 특히 교부 에피파니우스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십일조라는 것은 할례보다도 구속력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 교세가 확장되고 교권력이 강화되면서 십일조 복원이 시도되었습니다. 이 때부터 암브로스를 비롯한 많은 교부들이 십일조를 거두어야 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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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해를 밝혔습니다. 하지만 동방 교회들은 이를 정면으로 거부하였고, 서방 교회 내에서도 반발이 심하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밀고 당기다가 결국 한참 후대인 AD 585 년에 가서야 마콘(Macon) 교부회의에서 십일조가 채택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십일조는 점차로 강제성을 지니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다른 교부 회의들 도 십일조들을 속속 채택하였고, 결국은 AD 800 년 경 샤를레망(Charlemagne) 대제 때 비로소 십일조가 정식 법령으로 공포되었습니다.

그런데 13 세기에 이르기 전까지는 십일조의 대상이 구약의 가르침 그대로 주로 '토지 소산물'이었음을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마다 십일조를 보관하는 '십일조 창고'를 따로 만들어 둘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13 세기에 이를 즈음, 십일조의 대상이 '토지 소산'에서 '모든 소득'에까지 확대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바리새인과 랍비들의 십일조에 대한 자의적 해석을 1,000 년 이상 지난 후에 다시 부활시켜 적용한 셈입니다.

사를 돌이켜 보면, 언제나 교세가 커지고 교권과 이권이 거대해질 때 십일조가 머리 를 들고 나타났습니다. 즉 십일조가 하나의 엄청난 기득권이나 치부의 수단으로

자리 잡는 곳에서는, 반드시 종교 지도자들이 십일조를 강요하여 교묘하게 가로채는 일들이 벌어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말라기 시대, 신구약 중간 시대, 중세 시대, 그리고 오늘날에도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1 세기 초대교회에서 사도들에 의해 폐지되었던 십일조 제도는 한참 후대의 중세 가톨릭 시대에 슬며시 나타났다가, 종교개혁 이 후 교회가 국가와 분리되면서 다시 대부분의 유럽 교회에서 폐지되었습니다. 어떤 분은 이런 과정을 "십일조는 종교개혁의 몽둥이를 맞고 비실거리다가 19 세기를 지나면서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20 세기에 들어서 교회 부흥이 일어나, 교세가 커지기 시작하면서 다시 머리를 들게 된 것이다"고 평했습니다.

한 가지 지적할 점은 로마 시대와 중세 시대 동안 막대한 십일조 수입으로 온갖 비리를 저질렀던 가톨릭조차도 이제는 그 십일조 제도를 버리고 자율적인 헌금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가톨릭을 개혁한 루터와 칼뱅을 지지한다는 한국의 개신교가 이제 와서 오히려 십일조를 강조하고 있으니,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일입니다.

이런 역사적인 배경을 간단히 살펴보더라도, 전 세계적으로 오직 한국교회와 미국의 극히 일부 교단 교회들을 제외하면 십일조 제도를 채택하고 있는 나라들이 별로 없는 이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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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확히 설명이 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처음 복음을 전하여 준 외국 여러 나라의 교회들도 거의 하지 않는 십일조를 한국교회가 목소리 높여 홀로 주장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용감한 모습인지를 잘 보여 줍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마치 십일조 강요가 바리새인들이나 중세 가톨릭 주교 등 교권주 의자들에 의해서 시도된 것처럼 오늘날 한국교회의 변절 역시 교회 내의 막강한 교권과 기득권을 지닌 귀족 목사들에 의하여 자행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십일조 강요와 한국교회의 변절은 모두 교권 남용으로 인하여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점에서 서로 닮은 꼴입니다.

런 사실은 역사적으로 교회가 변절된 시대에는 반드시 십일조 강요가 왜 나타나는지 그 이유를 논리적으로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또한 전 세계에서 왜 유독

한국교회만이

십일조를 강조하고 있는지 그 원인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즉 동서양을 합쳐서 아무리 살펴보아도 한국교회만큼 단기간에 교세가 급격히 성장한 곳도 매우 드물고, 동시에 이처럼 빠르게 예수 따르는 길을 벗어나 변절된 교회도 아주 드물기 때문입니다.

만일 필자의 말에 동의를 못하시겠다면, 지금이라도 한국의 귀족 목사들만큼 사치스러 운 목회자들이 다른 나라에도 있는지 직접 확인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한국처럼 대부분의 교단 선거에서 돈을 주고받는, 더럽고 타락한 목회자들이 많은 나라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보십시요. 아울러 한국교회처럼 세습이 일반화한 나라가 있는지도 살펴보 시기 바랍니다. 또한 한국처럼 교회가 세력과 이권을 키우기 위해 서로 큰 교회당을 짓 겠다고 단체로 몸부림치는 나라도 있는지 둘러보십시요. 이들은 천사의 얼굴로 양들을 속이고, 그저 먹기를 탐하는 자들일 뿐입니다.

율법적인 십일조가 지금도 유효한가 목사님들이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많은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며 십일조를 만고의 진리처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때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이었으므로, 그 시점에서는 구약의 십일조가 아직 유효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울러 당시 예수님께서는 십일조뿐만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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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율법인 할례와 안식일도 지키셨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또한 문둥병자를 고치신 후 율법에 따라 제사장에게 가서 보이라고 명령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즉 율법의 마침이 되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까지는 예수님도 다른 율법들을 지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의하여 십일조가 폐지될 것임을 증거하는 결정적인 구절이 있습니다. 반면에 그것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라는 말씀에서 나타납니다. 십일조는 성전에서 드려져야 하는데, 성전을 헐라는 말씀은 십일조를 드릴 방법을 하 나님이 스스로 제거하신다는 뜻입니다. 또한 성전이 제거되면 레위 지파의 임무도 종결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여기서 사흘 동안에 다시 일으킬 성전이란 부활하신 주님의 몸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성전도, 안식일도, 할례도, 제물도, 제사장도, 레위인도, 따라서 율법에 의한 십일조도 더 이상 필요 없게 됩니다.

또한 신약성경 속의 초대교회를 보면, 일반 헌금에 대한 언급은 있지만 십일조를 했다 는 기록은 없습니다. 즉 '십일조의 정신'인 '사랑'으로 가난한 교인들을 돕기 위해 '자발적인 연보'는 했지만, '율법적이며 강제적인 십일조'를 한 기록은 전혀 없습니다.

심지어 당시에 할례를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할례당'은 있었으나, '십일조당'은 결코 없었다는 점도 주시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모든 의식과 제도 및 관례는 전적으로 폐지하면서, 오로지 돈줄이 되는 십일조만은 예외로 적용시켜 강요함은 상식에 어긋나는 논리입니다.

바울 사도도 '연보'에 대하여는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라고 하였으나, 단 한 번도 십일조를 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만일 당시에 십일조 제도가 존재하고 있 었다면, 구태여 구제를 위한 연보를 그토록 강조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십일조의 본래 목적이 가난한 사람을 돕거나 성직자의 생활비를 지급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느 분의 지적처럼, 기타 다른 신약성경 어디에도 십일조를 내지 않았다고 꾸 지람을 받은 교회가 없고, 반대로 십일조를 잘 했다고 칭찬을 받은 교회도 없습니다. 요즘 한국교회의 완고한 주장을 고려해 볼 때 십일조가 그렇게 중요했다면 바울의 서신들 속에서 한두 번이라도 꼭 언급이 되었을 것이며, 또한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를 책망 하는 부분에서도 십일조를 도적질했다는 책망이 반드시 나왔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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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요한을 제외한 다른 모든 제자들은 마지막까지 흩어져 복음을 전하다가 모두 순교를 당했습니다. 이들이 목숨을 걸고 우리에게 전하여 준 가르침에는 이 십일조란 단어조차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사도들은 십일조가 유대교의 다른 율법들과 함께 폐지된 것을 당연시했기 때문입니다. 십일조가 그토록 중요했다면, 사도 바울을 비롯한 다른 사도들이 이를 경시했을 리가 절대로 없었을 것입니다. 개인적인 견해를 구태여 밝히자면, 앞서 언급한 '십일조의 정신'은 살아 있으나 필자의 '율법의 십일조'의 시효는 다른 율법에 명시된 성전, 제사, 안식일, 할례 등과 함께 동시에 종료된 것으로 봅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라고 기록된 말씀에 근거합니다.

예수님의 지상 명령에 따라 사도들에 의해 전파된 기독교는 결코 유대교가 아닙니다. 따라서 교회가 유대교 율법의 하나였던 십일조를 다시 강요하는 행위는, 십자가를 거스르고 다시 구약으로 돌아가서 무너진 헤롯 성전을 다시 세우려 하는 것 만큼 어리석은 일이라 확신합니다. 또한 안식일도 지키고, 성전도 새로 지어 제사를 지내고, 할례도 하 자는 억지와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더구나 신정 국가 시대가 아닌 현대를 사는 신도들은 이미 국가에 상당 수준의 세금을 내며 살고 있습니다. 여기에 추가로 획일적인 십일조를 강요하는 것은 이중과세나 다름이 없습니다. 한국교회는 거기에 별도로 주일헌금, 감사헌금, 건축헌금, 그리고 선교헌금 등 일일이 다 외우기도 힘든 수십 종의 헌금 명목을 만들어 자의반 타의반으로 강요하며 전세계에 유래가 없을 정도로 온통 돈 타령만 하고 있습니다.

이는 결국 신도들을 대상으로 교묘하게 경제적인 착취를 하는 행위이며, 비판자들로부 터 '현대판 농노 제도'라는 비난을 들어도 떳떳하게 반박하기 어려운 실정입니다.

십일조의 정신

러나 사실 원칙을 따지자면, 십분의 일만 하나님의 것이겠습니까. 우리의 생명, 가족, 친구, 재산 등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따라서 구약의

단순한 '십분의 일'이 아닌, 우리 자신 전부를 '산제사'로 주님께 드리는 '경건한 삶'이 신약 시대의 '온전한 십일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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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하신 말씀이 참조가 될 것입니다.

즉 신약 시대에 이르러 구약의 '문자적인 율법'은 폐지되었으나, 그 '율법의 정신'은 오히려 더욱 완성된 의미로 지켜져야 한다고 봅니다. 따라서 모든 교회는 '강요적인 십일조'를 폐지하고, 율법의 정신에 따른 자발적인 '사랑의 헌금'을 강조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그 율법의 정신이란 요약을 하면, 바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십일조가 없으면 교회 재정 수입이 줄어 교회 운영에 막대한 지장을 주기 일부에서는 때문에 곤란하다는 변명을 하시는데, 진리가 아니라면 그 어떤 인위적인 방법도 거부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교인들의 '강요적인 십일조'가 꼭 있어야 하고 '자발적인 헌금'만으로는 운영을 못할 교회라면, 그런 교회는 그냥 문을 닫는 것이 좋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건강한 교회의 교인들이라면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난한 이들을 돕고, 주님의 사업을 위해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헌금을 할 것입니다.

주 안에서 율법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은 우리에게 이 '십분의 일'이라는 숫자가 또 다시 율법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수입이 너무 적어 생활이 매우 어려운 분들은 백분의 일을 헌금해도 상관이 없고, 때로는 헌금을 못 하셔도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오히려 필 요하면 교회가 이 분들을 경제적으로 도와드려야 합니다. 반면 1 년에 10 억 원이나 벌면서 1 억을 떼어 헌금하고, 내 할 일을 다 했다고 안주해서는 곤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은사이든 많이 맡긴 자에게는 많은 열매를 기대하시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회는 십일조를 포함하여 어떤 헌금도 강요해서는 안 되며, 헌금은 자발적으로 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이를 보더라도 성경을 왜곡하며 십일조와 수 십 종류의 헌금을 강요하는 한국의 개신교는 간판만 개혁 교회이지, 실제로 하는 행동은 루터와 칼뱅을 벗어나 중세 가톨릭만도 못한 행태를 보 여 주고 있습니다. 요즘 많은 귀족 목사들이 마치 제사장이라도 된 듯 자신들의 권위를 치장하며, 스스로 중세 성직자 행세를 하는 것만 보아도 이를 잘 알 수 있습니다.

헌금은 흰 봉투 하나면 족하다

울러 교인들의 주머니는 한정되어 있는데, 이런 저런 잡다한 이유와 이름을 붙인 수 십 가지나 되는 헌금 항목들도 모조리 정리를 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매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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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능력과 여건에 따라 정성껏 주일헌금을 하면 되는 것이지, 도대체 왜 이런 복잡한 분류가 필요한지요. 들어 생일 감사는 꼭 감사 헌금 봉투에 자신의 이름을 적고 따로 구별해서 헌금 예를해야만 하나님께서 알아보신다는 말인가요. 그냥 무기명으로 주일헌금에 합쳐 넣으면, 무슨 복잡한 문제라도 생깁니까. 헌금을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이지, 사람들 앞에서 하는가요.

신약 초대교회에서도 이렇게 세분화한 헌금 분류를 사용했다는 말은 들어본 바가 없습니다. 또한 이런저런 구실로 헌금자 명단을 주보에 공개한다거나, 예배시 감사 헌금자를 호 명하며 별도로 기도를 해 준다거나 하는 행동은 지극히 세속적인 처사라고 분명히 경 고하고 싶습니다.

그 어떤 핑계를 대더라도 이런 행위는 개혁 교회답지 못한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제대로 상식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아무 성경적 근거가 없는 이런 행태들은 그저 돈을 더 뜯 어내려는 극히 인위적이며 세속적인 잔수로밖에 보지 않을 것입니다. 하여튼 한국교회 귀족 목사님들은 잔머리를 굴리며 쓸데없이 시키지도 않은 일을 열심히 하는 데는 올 림픽 금메달감입니다.

한마디로 요약해서, 헌금은 자발적이어야 합니다. 또한 모든 헌금을 무기명으로 하여 앞 으로 순결해야 할 주님의 교회에서 헌금을 많이 냈다고 어깨에 힘주거나, 반대로 헌금 을 많이 못해서 위축되는 일이 없어져야 합니다. 목회자가 헌금자를 은근히 공개하여, 돈 많이 낸 사람들이 득세한다거나 더 좋은 대접을 받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은 사이비 종교에서나 있을 수 있는 저질적인 행태입니다.

이상으로 한국교회가 강조하고 있는 '율법적 십일조'에 대한 반론을 간단히 요약해 보았습니다. 만일 십일조에 대한 필자의 이해가 명백히 오류라는 것을 다른 분들이 구체적으로 잘 지적해 주시고 설명해 주신다면, 이 후에 언제라도 열린 마음으로 받아 들일 준비가 되어 있음도 아울러 밝혀 두고자 합니다.

십일조를 하면, 복을 받는다?

찌 되었든 어떤 분이 자발적으로 십일조를 열심히 하는 것을, 구태여 도시락 들고 따라다니며 말리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목적이 매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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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신적이라는 데에 있습니다. 즉 세속적인 출세와 복을 위하여 십일조를 바치는 분들이 많습니다. 마치 무속인이 천신굿을 할 때 돈을 바치듯, 매우 기복적이라는 것입니다.

필자가 최근에 만난 어떤 분은 "십일조를 하면, 큰 복을 받는다"는 친척 목사님의 말을 굳게 믿고 십의 이조까지 바쳤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정말 놀랍게도 사업에 대박이 터져 수 년 전에 아주 큰돈을 버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맛에 신바람이 나서 나중에도 열심히 십의 이조를 해 오셨는데, 실망스럽게도 근자에는 사업도 잘 안 되고 거의 약발이 떨어진 모습으로 한숨 속에 지내시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한국교회 일부 교인들의 의식 수준을 잘 보여 주고 있는 하나의 삽화입니다. 즉 '십일조의 정신'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세속적인 복만을 기원하고 있습니다. 설마 라고 하시며 웃어넘기실 분들도 계시겠지만, 주위를 살펴보면 의외로 십일조를 복 받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시는 순진한 분들이 제법 많습니다. 모두 귀족 목사들의 거짓된 가르침에 감염된 탓이지요.

이는 '돈 놓고, 돈 먹기'인 투기꾼의 심보이며, 성황당에 물을 떠 놓고 손바닥에 불이 나게 비비고 있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요. 여기서 필자는 이런 분들께 분명히 알려 드리 고 싶습니다. 십일조를 바쳐서 어쩌다 부자가 될 수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반대로 십일 조가 아니라 십의 구조를 다 바쳐도 깡통을 찰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십일조를 언급한 말라기서의 핵심 주제는 단순히 '돈을 내면, 복을 받는다' 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나님을 떠난 종교 지도자들과 백성들에 대한 무서운 경고 이며 탄식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들이 가증한 일에서 돌이키지 않기 때문에, " 여호와께서 다시는 너희의 헌물을 돌아보지도 아니하신다"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즉 십일조를 아무리 잘해도, 행실이 올바르지 못하면 오히려 화를 입습니다.

리고 "신앙생활을 잘하면, 부자가 된다거나 출세하고 성공한다"는 일부 목사들의 달콤하고도 무지한 설교는 성경을 크게 오해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마음으로 믿고

성경대로 충실하게 살아도, 지지리 고생하고 평생 가난하게 살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히려 세상에서 큰 상을 받은 자에게는 하늘에서 상이 작아질 수도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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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마음이 가난하거나 애통하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부자에게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 적은 있으나, '나를 따르면 부자가 될 것이다'라고 하신 적은 결코 없으셨습니다.

거짓 목사들이 이런 사실은 제대로 전달하지 않고, 성경의 앞뒤를 다 잘라 낸 후 단 순하게 "십일조를 하면, 부자가 된다!"는 식으로 잘못된 가르침을 전하고 있습니다. 십일조를 철저히 잘하기로 따지자면, 아마 바리새인들보다 더 잘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그들이 복을 받았나요. 오히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독사의 새끼들'이 라고 책망하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요즘 많은 목사들이 시대적 상황이 전혀 다른 신정 국가 시대의 말라기서를 따라서 자세한 배경 설명이 없이 단순히 인용하며, "십일조를 하면, 복을 받는다"거나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지 말라"라고 강조하는 것은 십일조의 참된 정신을 왜곡하는 날조이며 기만입니다.

말라기서의 주제는 '십일조와 세속적인 복'이 아니라, 구약의 결론이라 할 수 있는 '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십일조 관련 내용 역시 백성들보다는 오히려 지도자들인 제사장들에게 하신 말씀으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제사장들이 도적처럼 십일조를 떼어먹고, 가난한 백성들에게 제대로 나누어 주지 않았다는 해석입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이든, 말라기서에서 강조하는 것은 신정 국가 백성으로서의 '책임'과 '특권'을 강조한 '온전한 십일조'인 것이지, 세속적 축복을 받기 위한 '도깨비 방망이 ' 같은 그런 십일조가 아닙니다. 즉 "복 나와라! 뚝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서 백성들이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고, 백성 된 책무인 온전한 십일조를 잘 바치면 비 로소 참된 복을 받는다는 뜻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섬김과 책임'은 제대로 가르치지 않고, 거짓 목사들이 단순히 "돈 내면, 복 받는다" 는 식의 미신적이며 주술적인 기복 신앙만을 상습적으로 떠벌리니 교회가 굿 판처럼 매일 복 타령이나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인들이 사업 번영, 자식 출세, 무병장수, 호의호식만을 꿈꾸게 되고, 이에 안주하는 복쟁이들이 되어 교회가 병들게 됩니다.

제대로 양심을 가진 목사라면, 이웃을 섬기는 것이 복이고, 약하고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이 복이고,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는 것이 복이고,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것이 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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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고, 억울한 자와 함께 우는 것이 복이고, 낮아지는 것이 복이고, 가슴을 치며 회개 하는 것이 복이라고 증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울러 형제를 용서하는 것이 복이고, 남을 위해 기꺼이 손해 보고 사는 것이 복이고, 사회의 소금이 되어 녹아지는 것이 복이고, 그리고 예수를 따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좁은 길을 가다가 때로는 눈물 나는 고생을 하는 것도 참된 복이라고 가르쳐야 할 것이 아닌지요.

사람이 만든 올무

일조 강요는 결코 성경적이 아니며, 현실적으로도 새신자들이 교회에 들어오는 전도의 문을 크게 막고 있습니다. 또한 많은 교회에서 은근히 조직적이며 지능적인

십일조 강요로 인하여, 초신자들이나 가난한 교인들이 마음에 큰 상처를 받고 있습니다. 이는 복음을 위한 고난이 아니라, 사람이 만든 올무입니다. 말라기서에는 "제사장은 만군의 여호와의 사자가 됨이어늘, 너희는 정도에서 떠나 많은 사람으로 율법에 거치게 하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탐욕스런 교회 지도자들은 '정도에서 떠나 많은 사람으로 율법에 거 치게' 하는 행위를 재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가 신자들에게 다시 율법적인 십일조를 강요하는 행위는, '율법의 마침'이 되신 그리스도 십자가를 역행하는 처사임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교회가 마치 국세청을 대신해서 추가로 세금을 더 받겠다는 것과 비슷한 월권입니다. 말라기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끝까지 죄를 회개하지 않고, 위선적인 십일조로 하 나님을 거역하다가 결국에는 큰 재앙을 만나게 됩니다. 정복자 알렉산더의 후계자들이 세운 왕조인 북쪽의 셀류쿠스 왕국과 남쪽 프톨레미 왕국 사이의 그 유명한 '150 년 전 쟁'이 바로 그것입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을 가운데에 두고, 양측 군대가 오르내리며 지긋지긋하게 벌린 이 전 쟁으로 인해 이스라엘은 완전히 초토화하고 처참한 고통을 겪게 됩니다. 당시에 얼마나 이들 군대의 겁탈과 약탈이 심했으면 귀중품을 밭에 감출 수밖에 없었을까요. 예수님의 비유 '밭에 감추인 보화'는 이런 역사적 배경과 관습을 근거로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왜곡하고 가식적인 제사와 십일조를 바친 결과를 이스라엘의 역사가 생생히 보 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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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 교회는 이제라도 현재 가톨릭에서조차 시행하지 않는 이 십일조 제도를 공식적으 로 폐지하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특별한 경우를 제외한, 나머지 잡다한 명목의 헌금들도 자발적인 '무기명 주일헌금'으로 단순화하기를 부탁드립니다.

어떤 이유로든, 교회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모아 큰일을 하겠다는 생각은 결단코 버리는 것이 옳습니다. 이는 주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부당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자발적으로 바쳐진 온전한 '사랑의 헌금'만을 가지고, 그에 상응하는 일을 하는 것이 정당합니다.

소모적인 논쟁 이젠 끝장내자

렇게 십일조 폐지를 교회와 교단에 강력히 건의하지만, 사실 이 분들의 답변에 큰 기대는 안 하고 있습니다. 십일조 강요는 한국교회의 변절에 기인한 것이고, 교회의

변절은 교단을 장악한 교권주의자들이 만든 최고의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마음을 열고 들을 리가 없습니다. 또한 진리 문제를 단순히 다수결로 해결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찬반이 팽팽하여 결론이 나지 않는, 필요 이상으로 소모적인 논쟁은 아무도 원치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해결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더 이상 끝도 없이 연구만 하고 논쟁을 할 것이 아니라, 이제는 실천을 하자는 것입니다. 누구나 스스로 신앙 양심에 따라 이번 주일부터라도 자신의 교회에서 율법적인 십일조를 공개적으로 거부하고, '십일조의 정 신'에 따른 사랑이 담긴 주일헌금을 하면 됩니다. 구태여 교회에서 우물쭈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집사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나 소개하고자 합니다. 보수 교단 소속의 어느 중형 교회에 출석하는 이 친구는 대학 시절부터 늘 무기명 주일헌금만을 고집하여 왔습니다. 하루는 나이 드신 교회 여전도사님이 다가오셔서, "아무개 집사님도, 앞으로 십일조를 좀 하시지요" 하고 부드러운 충고를 주셨습니다. 그 때 이 집사는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답변을 드렸다고 합니다. "저는 원칙적으로 십일조뿐만 아니라 그 어떤 기명 헌금에도 반대하는 사람입니다. 제 신앙양심에 따라 무기명 주일헌금을 하고 있으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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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뒤에는 담임목사님이 같은 권고를 주셨습니다. 물론 동일한 답변을 드렸다고 합니다. 다행히 그런 일이 있은 이 후로는 누구도 이 친구의 십일조에 대해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직 장로가 되지 못 한 것 외에는 교회 생활에 별 다른 불이익이 없었다고 합니다.

혹시 십일조나 감사헌금 실적을 높여서 담임목사의 인정을 받고 장로나 권사 등의 직 분을 서둘러 받고 싶으신 분들이 아니라면, 이 집사의 소신 있는 처신도 약간의 참고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는 때로는 힘에 벅찰 정도로 많은 헌금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 추가로 알려 드리고 싶습니다.

하고 싶은 사람만 하라

섯 번에 걸쳐 20 년 이상 추방을 당하면서도 정통 '삼위일체론'을 끝까지 고수했던, 4 세기 교회의 위대한 신학자 아타나시우스는 일찍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온

세상이 나를 반대하는가, 그러면 나도 온 세상을 반대하노라."

마찬가지로, 우리도 필요하다면 담임목사나 교권주의자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대들이 나의 신앙 양심을 반대하는가, 그러면 나도 그대들을 반대하노라." 또한 이 말도 추가하고 싶습니다. "나는 율법적인 십일조 강요가 진리가 아니라고 확신합니다. 따라서 이를 단호히 거부합니다. 그렇게 하고 싶으면, 그대와 그대의 후손들이나 열심히 해서 그토록 좋아하시는 복을 대대로 받으십시오!"

한국교회의 십일조 강요는 명백하게 '바리새인의 누룩'을 퍼트리는 일이며, 사도들이 결코 전하여 준 바가 없는 '다른 복음'을 받아들이는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면에서, "한국교회 개혁은 십일조 폐지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주장은 충분히 일리가 있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우리는 이미 복을 넘치게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무슨 복이 그렇게 더 필요해서 허구한 날 복 타령만 하며 십일조를 노래하나요.

마지막으로 보수와 진보를 따지지 말고 여러 교단의 뜻있는 신학자들도 중립적인 침묵 으로 세월만 보낼 것이 아니라, 진리의 파숫군답게 명철한 지혜를 가지고 이 율법적인 십일조 의무화에 대하여 분명한 나팔소리를 들려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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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 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 희가 잘 용납하는구나(고후 11:4 )." 2010 년 3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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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습 목회자와 신도들, 그 나물에 그 밥 한국교회 세습은 중세 성직 매매의 아류

"이제는 말리기도 지쳤다! 해도 너무 한다!" 탄식들은 오늘날 한국교회의 세습을 바라보는 세인들의 공통된 인식을 단적으로 이런잘 보여 주고 있는 말입니다. 하지만 교회 외부의 이런 비판적 시각에 매우 무감각한 한국의 많은 교회들은 소통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 이제 재벌들의 세습을 흉내내며 2 세대 경영에 본격적으로 진입하고 있는 느낌입니다.

경제인이나 정치인들의 부의 세습과 권력의 세습도 그 도덕적 결함으로 인하여 사회적 인 비판을 따갑게 받고 있는데, 하물며 가장 순결해야 할 교회마저 지극히 세속적인 세습을 무리하게 감행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하여 세상을 밝히고, 지역 사회를 섬겨야 할 교회가 오히려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고 비난의 화살을 자초하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 실입니다.

교회사 책들을 아무리 뒤져 보아도, 지구본을 이리저리 몇 바퀴 돌리고 아무리 찾아보 아도, 사상 유례가 없는 교회 세습이 오늘날 오직 한국 땅에서만 무더기로 당당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는 현재 한국의 교회들이 정도를 벗어나 얼마나 심하게 변 절되었는지를 잘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처음에는 눈치라도 좀 보는 듯하더니, 요즘은 아예 노골적입니다. 그런데 외부의 비판에 대해 이들이 항변하는 공통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당신들에게 직접 피해를 주는 것이 없으니 밥을 먹든 죽을 먹든 참견하지 말라고 합니다.

게다가 세습 기법도 갈수록 발전하여, '부자 세습'은 기본이고 서로 교회를 맞바꾸는 '교차 세습'이 있는가 하면, 아예 미리 교회나 법인체를 하나 따로 떼어 주는 '증여 세습'도 추가로 개발되었습니다.

물론 꼭 아들에게만 세습하는 것은 아닙니다. 딸이나 사위 그리고 기타 혈족에게 적당한 명분을 만들어 합법적으로 세습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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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기업화와 경영권 세습

쨌든 이런 분위기에 편승하여, 오랫동안 '개혁 교회'라는 그럴 듯한 간판을 애용해 오던 한국교회(주)가 드디어 허울을 벗고 자신의 본 모습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동안 십일조 장사를 아주 잘해서 영업 실적도 눈이 부실 정도이고, 건물을 크게 지어 사업이 잘 확장되어서 직원들도 많이 늘어났고, 그 덕분에 회사 재산이나 자금 사정 역시 매우 탄탄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자식에게 적당히 모양을 갖추어 합법적으로 경영권만 슬쩍 넘겨주면 된 다고 속으로 웃고 있습니다. 이렇게 교회를 기업에 비교하니 반발하실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는 필자만의 시각이 아닙니다. 아래에 인용된 글처럼 이미 다른 많은 분들도 한국교회의 기업화에 큰 우려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대형 교회는 이미 기업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목회에 경영적 개념과 기술을 도 입하고 있습니다. 주체할 수 없이 모아진 헌금으로 투자를 하는 경우조차 생겨나고 있 습니다. 그러니 이로 인해 성취된 재물과 권력의 기득권을 대주주의 혈통으로 보존하 려는 욕망이 그 안에 자라나지 않을 까닭이 없습니다."

즉 교회가 성장하고 이권이 너무 커지다 보니, 보통 사람으로서는 그 유혹을 이기기가 매우 힘든 상황이 되었다는 실제적인 지적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보통 사람의 욕심을 극복하지 못하는 미자격 목회자들은 세습의 유혹을 이기기가 아주 어렵다는 분석입니다.

이는 결국 많은 신도들로부터 큰 존경과 사랑을 받던 상당수 유명 목회자들의 뚜껑을 열어 보니, 유감스럽게도 그들 역시 그저 그렇고 그런 보통 사람의 수준에 있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이러니 여기서 목회자의 자질 문제가 또 다시 거론이 안 될 수가 없습니다. 말이나 말지. 언제나 입만 열면 주를 위해 헌신하자고 소리를 높이고, 가난한 차라리 이웃들을 돕자고 호소하고, 그리고 해외 선교를 하자고 열을 내시던 분들 중의 상당수가 이들 세습 목회자들입니다.

그런데 이권이 걸려 있는 결정적인 순간이 다가오니 얼굴을 바꾸고 자기 욕심을 챙기 고 있습니다. 결국 과거의 위선된 행동들은 그저 교회의 크기를 키우고 세력을 확장하기 위한 하나의 눈속임에 불과했슴을 스스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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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기가 막힌 것은 "(교회) 세습은 세습이 아니다. 세습은 어려운 길을 가는 것이므 로 위로해 줘야 한다"라고 오히려 한 술 더 뜨는 대단하신 목사님도 있습니다. 과연 이리저리 둘러대는 데는 거의 예술적인 경지입니다.

그렇다면 만일 그들에게 이 '충성된 세습의 길'을 '자비량 목회'로 가라고 하면, 과연 몇 명이나 갈 것인지 정말 궁금합니다. 아마 거의 다 도망을 칠 것입니다. 그들은 늘 말로써 교인들을 기만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이 돈과 이권에 눈이 멀어 강행하는 교회 세습을 말 몇 마디로 치장하며 미화하려 하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이런 행태를 "세습이 남들이 다 가지 않으려는 곳에 가는 것이라면, 그 아 들이 계승하는 것은 정말 훌륭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그 교회 목사의 아 들이 그 교회에 다시 부임한다는 것은 손봉호 장로님의 지적처럼 '욕심의 대물림'일 뿐입니다"라고 강하게 비판합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한국의 내로라 하는 몇몇 대형 교회들이 앞장서서 세습을 선도하더니, 현재는 중소형 교회에까지 일반화해 아예 정착 단계입니다. 이제는 그 도가 너무 지나쳐서 자세한 통계마저 공개하기가 부끄러울 지경입니다. 이로 인해서 연줄이 없고 인맥이 없는 신참 목회자들이 담임목사가 되기란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워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은퇴 예정 목사님들에게 돈을 한 보따리 미리 건네주면 한자리 가능하다는 말 이 공공연히 나돕니다. 목사라는 직함의 거룩하신 분들이 성직 매매를 서슴지 않고 자행 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한국교회 상당수는 지구상에서 가장 썩은 교회가 되어 버렸습니다.

교회의 사유화와 계급화

많 이는

은 세습 교회들의 특징 중 하나는 이들 교회가 담임목사를 중심으로 거의 사유화되어 있고, 또한 교회의 직제와 운영이 매우 계급화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최대한의

위해서입니다.

교권과

이권을

누리기에

가장

적합한

시스템을

구축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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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자기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되면 적당한 명분을 만들어 한직으로 보내고, 말을 잘 듣는 사람들로 인의 장막을 치고 자신의 왕조를 구축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담임목사는 교회 내에서 사실상 거의 왕 같은 권력을 장악하게 됩니다.

이와 같은 교회들은 대부분 재정의 불투명한 처리가 교회 사유화의 가장 두드러진 증 거가 될 경우가 많습니다. 예산과 결산을 자세하게 공개하지 않거나, 두루뭉술하게 처리합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신도들은 자신들의 담임목사가 이 핑계 저 핑계로 얼마나 많은 교회 돈을 챙겨 가는지를 잘 모르게 됩니다.

아울러 동역이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말뿐이고, 교역자들 간에도 담임목사를 총수로 하여 수직적으로 계급화해 있습니다. 감히 부교역자가 담임목사에게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는 그날로 옷을 벗어야 합니다. 조직의 경직성이 어느 족벌 주식회사보다 결코 못하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평신도를 동역자로 세우는 교회'라고 멋진 선전을 하면서, 실제로는 평신도 는 커녕 교역자들 간에서조차 대등한 동역이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이며 자매인 개혁 교회의 정신은 슬그머니 사라지고, 기만이 가득 찬 독재 정권처럼 위선으로 치장된 경건을 보여 줍니다. 그 나물에 그 밥

런데 이렇게 교회 세습이 현실적으로 가능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요. 물론 담임목사가 대를 이어 교회를 사유화하려는 욕심이 그 뿌리입니다. 이만열

교수님에 의하면, 한국 개신교 목회자 대상의 어느 한 설문 조사에서 무려 65%가 목사직 세습이 가능하다는 한심한 결과가 나왔다고 합니다. 현재 한국교회 목사들 수준이 이 정도입니다.

기회만 있으면 자기도 세습을 하겠다는 이야기나 다름없습니다. 이 모두가 전국의 수많은 신학교들에서 자격 미달의 목회자들을 무분별하게 양산해 준 덕분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또 다른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교회 세습을 단지 목회자들의 책임만으로 돌리는 것은 아직 전체를 다 이해하지 못한 단견이 되기 때문입니 다. 즉 목회자들의 잘못 못지않게, 오히려 이들 목사들에게 무조건 동조하거나 방관하 는 절대 다수의 신도들에게 큰 책임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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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신도들의 특징은 목사가 무슨 말을 해도 맹종합니다. 목사를 '주의 종'으로 모시고, 목사의 말이 구약 선지자의 말이라도 되는 것처럼 순종합니다. 목사에게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같은 맹신의 문제점은 모두가 잘 아실 것입니다. 즉 올바른 목회자가 사역할 때는 별 일이 없겠지만, 조금이라도 사심을 가진 목회자가 이들을 이용할 때는 심각한

문제가 일어나게 됩니다. 지나간 교회 역사가 잘 보여 주듯이 맹신도들은 담임목사가 무슨 일을 해도, 무조건 믿고 따르며 좋게 보기만 합니다.

그러므로 심지어는 목사가 교회 공금을 수 억 단위로 횡령해서 유죄 판결을 받아도, 이들 은 '주의 종이 뭐 선한 일에 급히 쓰셨겠지' 하며 좋게 생각합니다. 또한 목사가 간통하다 걸려도, "또 이단들이 모함을 하는군" 하고 넘어갑니다. 담임목사가 교단 선거에서 더러운 돈을 물 쓰듯이 뿌린다는 소문 정도는 "설마" 하고 아예 믿지를 않습니다. 이러니 교회 세습 정도야 간단하게 "대를 이어 헌신하시는 귀한 분들이시다" 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보통입니다.

사실 교회 공동의회에서 대다수의 신도들이 적극적으로 반대를 한다면, 어찌 교회 세습이 가능하겠습니까. 마치 예레미야 시대가 오늘날 또다시 재연되고 있는 착각마저 듭니다. 이는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그 결국에는 너희가 어찌 하려느냐"라고 기록된 말씀 그대로입니다.

물론 이런 맹신도들을 키운 사람들은 귀족 목사들입니다. 이들은 '예수의 제자'가 되기 보다는 먼저 '목사의 제자'로 길들여져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그럼 세습 교회들은 모두 다 병든 교회인가?" 하며 항변하실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필자 역시 단 몇 교회들이라도 예외가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필자의 눈에 비친 대부분의 세습 교회들은 '개혁 교회'라는 간판을 내려야 할 교회들입니다.

개혁을 거부하는 한국의 개혁 교회들

당수의 교회들은 개혁 교회라는 명함은 가지고 있으나, 실상은 개혁을 늘 거부하 고 있는 교회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편에 서서 교회 개혁에 반대하고 저항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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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들이 언제나 상투적으로 말하는 궤변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거나, 서로 헐뜯지 말자는 것입니다. 또한 일부의 잘못을 가지고, 전체 목사나 전체 교회들의 잘못으로 확대하여 비방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는 거룩한 교회를 무너뜨리는 이적 행위라는 것입니다.

1415 년 프라하 대학 총장이자 가톨릭 사제였던 개혁자 요한 후스는 당시 고위 성직자 들의 '성직 매매'를 신랄하게 비판하다가, 결국은 당시 교회 지도자들에 의해 이단으로 몰려 화형을 당했습니다. 간단히 줄여 말하면, 괘심 죄에 걸린 것입니다. 이처럼 부패한 종교 지도자들은 언제나 바른 말을 하는 신자들을 교권으로 누르고 핍박합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변한 것 없이 교회 역사는 반복되고 있습니다. 인간의 탐욕과 죄성 이 전혀 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권주의자들도 방법만 다를 뿐이지 교활한 명분과 변명을 늘어놓으며, 비슷한 비행을 계속 저지르고 있습니다.

사욕에 눈이 어두워져 온갖 잘못은 자신들이 다 저질러 놓고서, 오히려 상대에게 뒤집 어 씌우는 적반하장식 수법을 구사하고 있습니다. 우선 이들은 교회론 그 자체부터 잘 못되어 있습니다. 참된 교회는 눈에 보이는 조직이나 교회당 건물이 아니고, 우리 신자들 자신입니다.

따라서 목사나 신자들 자신이 상습적으로 잘못을 반복하고 있다면 이는 교회가 잘못되 어 가고 있는 것이 확실한 것이고, 당연히 이를 지적하고 시정하여 바른길로 가도록 서로 권면해야 함이 마땅합니다.

들의 배부른 논리를 따르자면 루터와 칼뱅이 교황을 반대하고, 나단이 다윗의 범죄 를 지적하고,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하고, 그리고 예수님이 당시 교회 지도자들인

바리새인을 향해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말씀하신 것도 해서는 안 될 비판이 될 것입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중세 가톨릭에 그대로 남아 있지, 왜 뛰쳐나와서 개혁 교회에 참여 하고 있는 것인지 그들에게 거꾸로 묻고 싶은 심정입니다.

이런 면에서, "끊임없이 세속화와 변질의 유혹을 받는 교회는, 계속적으로 복음을 수 호하고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 반복적인 자체 개혁과 원상회복을 필요로 한다"고 정 확하게 개혁의 핵심을 지적한 이정석 교수님의 발언을 결코 가볍게 들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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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세습과 부정부패

회 세습은 교회 부패와 직결됩니다. 절대 권력은 절대로 부패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대를 이어 유지되는 교권이 과연 얼마나 청렴할 수 있을까요. 이런

사실은 구태여 큰 노력이 없이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변의 대부분 중대형 교회들에서 그동안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는지 잠시만 둘러보면 됩니다.

구태여 세습까지 거론할 필요도 없습니다. 한 교회에서 수 십년 간 사역한 담임목사들 중에 과연 부정과 부패 문제를 안 일으킨 중대형 교회 목사가 몇 명이나 되는지 거꾸로 묻고 싶습니다. 오죽 그 도가 지나쳤으면, 세상의 법정에까지 서서 심판을 받고 있을까요. 교회가 세상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심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 세습은 유형 교회가 몰락으로 가는 넓은 길입니다. 과거에 면죄부를 팔아서 이권을 챙기던 중세 가톨릭이 크게 몰락했듯이, 교회 사유화에 앞장선 교회들은 그 스 스로 몰락을 자초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 세습이 부정적으로 다뤄지는 또 하나의 이유는 '불로 소득'이란 점에 있습니다. 특별 한 노력 없이 단지 혈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다른 후보자들에게 불이익을 주고 직책과 기득권을 계승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상식적인 공평성의 원리마저 거스르는 일입니다.

따라서 교회 세습은 결코 면죄부를 줄 수가 없습니다. 이는 성경의 가르침은 물론, 보편적인 상식과 도덕에도 어긋나는 몰염치한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비루한 명분과 핑계를 대더라도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교회 세습이 한 번이라도 용인된다면

일 아직도 교회 세습의 심각성을 이해하지 못하시는 분들이 있다면, 반대로 세습이 정당시 되고 일반화했을 경우를 상상해 보면 쉽게 이해가 될 것입니다. 이 경우

아마 대 부분의 목회자들은 아무런 간섭 없이 자식이나 혈족에게 교회를 쉽게 물려주게 될 것 입니다.

그렇게 되면, 특히 교회 재산과 이권이 큰 중대형 교회들은 이단과 사이비 교회들처럼 특정인의 자식들이 뿌리를 박고 자자손손 대를 이어 왕족같이 군림하게 될 것이 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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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큰 교회마다 왕조가 하나씩 생겨나게 될 것입니다. 일단 한번 세습이 허용되면 계속해서 막을 명분도 없어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으로 중세 교황도 부럽지 않는 막강한 세습 왕조들이 대형 교회마다 하나씩 들어 선다고 상상을 해 보십시요. 현재도 목회자들의 부정과 부패로 한국교회가 고통을 받고 신음하고 있는데, 더욱 강력한 교권을 지닌 세습 왕조가 들어서면 오죽하겠습니까. 생각 만 해도 끔찍한 일이지요. 아마 이들은 일부 부패한 사학 재단들의 교직 매매처럼, 성직 매매도 서슴지 않을 것입니다.

무리 좋은 목적이 있더라도, 보편적으로 지켜야 할 원칙이 있고 상식이 있는 법입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가 무슨 주식회사인가요, 대를 이어 경영하겠다니.

한국교회 세습은 그저 중세 성직 매매의 또 다른 아류일 뿐입니다. 돈으로 직분을 사는 것과 혈연으로 직 분을 물려주는 것이 무엇이 다른가요. 일부 목회자들은 혈연으로 안 되니, 할 수 없이 돈을 주고라도 부당하게 직분을 사려는 것이 아닌지요.

그러니 누구라도 이런 세습 교회에 출석하여, 세습을 묵인하거나 동조하는 것이 과연 신자다운 일인지 스스로 진지하게 반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계선 목사님이 "대형 교회 가 망해야 한국교회가 산다"는 주장을 하셨습니다. 필자도 역시 이를 적극 지지하며, 여기에 다음의 한마디를 더 추가하고 싶습니다. "세습 교회가 망해야 한국교회가 산다."

그러나 다행히 모든 목회자들이 교회 세습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동광교회 김인호 목사 님처럼 20 여 년 동안 사역한 교회를 떠나며, 퇴직금마저 헌납하고 자비량 농어촌 사역 에 나서시는 훌륭한 분들도 우리 주변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수많은 귀족 목사님 들이 과소유의 욕심을 부리며 교회를 어지럽혀도, 이 나라 구석구석에서 전심으로 수 고하시는 이런 귀한 목사님들 때문에 한국교회가 이나마 건재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 다.

세습 목사와 '주의 종'

일 교회 세습이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일이 아니라고 당당하게 생각하는 세습 목사가 단 한 분이라도 있으시다면, 말로만 떳떳하다고 주장하지 말고 지금이라도

현재의 교회를 사임하고 즉시 농어촌의 미자립 교회로 가서 그 교회를 자식과 함께 대를 이어

섬겨

보십시요.

그리하면 필자는 그대의

마음으로부터 깊이 존경할 것입니다.

진심을

믿어

줄 것이며,

그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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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울러 이미 부끄러운 세습을 받은 목회자들께 묻고 싶습니다. 한국교회를 바로 세우기 위해 자신이 물러설 수는 없는 것인지요. 주일마다 입술에 꿀을 발라 설교만 달콤하게 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성경의 가르침을 직접 손과 발로 실천할 수는 없습니까.

몇 마디 위선적인 말로 세습을 미화만 할 것이 아니라, 이제라도 마음을 비우고 이 땅의 더러운 우상이 된 '목사교'를 무너뜨리고, 함께 손을 잡고 온전한 '예수교'를 세워 나갈 수는 없는 것인지요.

론은 명확합니다. 교회 세습, 어떤 이유로든 앞으로 더 이상 묵과해서는 안 됩니다. 낙심하여 포기하고 침묵해서도 안 됩니다. 그리고 말리다 지쳐서도 안 됩니다.

만일 우리가 계속 침묵한다면, 그때는 하나님께서 직접 나서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이 처음 오신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고 증거하는 사역을 하였다면, 오늘날의 목회자들은 앞으로 다시 오실 주님의 재림을 예비하고 증거하는 직분을 맡은 사람들입니 다. 그런데 세례 요한의 삶과 현재 한국 목회자들의 삶을 한번 비교해 보십시요. 단순히 부유한가 가난한가를 따지자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의 사역자로서 주님을 향한 삶의 자 세를 묻고 싶은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세습에 이미 안주하고 있거나 세습을 꿈꾸는 목회자들은 물론 나머지 모 든 목회자들에게도 부탁드립니다. 적어도 광야에서 외치던 세례 요한처럼 복음을 위하여 자신을 비우고 살 마음의 자세가 없다면, 함부로 자신이 '주의 종'이라는 말을 입에 담지 마십시요.

아울러 그가 스스로 메뚜기와 석청으로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며 순교당하기까지, 예수 님에 대하여 증거한 이 단순한 가르침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

2010 년 3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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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금 채, 세상보다도 더 세속적인 악습 예배 속에 위장된 헌금 강요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 리우고 바다에 던지움이 나으리라(막 9:42)."

인들이 주일마다 교회에 가면 은혜로운 찬송가와 복음 성가 등 많은 아름다운 노래 들을 쉽게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새 신자가 처음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면 딱

두가지 노래만이 귀에 들린다고 합니다. 바로 '복 타령'과 '돈 타령'입니다. 담임목사께서 모처럼 좋은 설교를 잘하시는 듯 하다가도, 틈만 나면 이야기가 '복과 돈'으로 빠져 버린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에 대한 새 신자들의 거부감은 대단히 큽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헌금 채에 대한 비난이 매우 신랄합니다.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아직도 나이 꽤나 먹은 사람들이 기껏 모여서, 유치하고 속 보이게 왜 ‘잠자리채’를 돌리며 헌금을 강요하냐는 것입니다.

이런 반발이 교회를 구약의 성전처럼 신성시하고, 담임목사를 제사장처럼 모시는 분들 에게는 다소 충격적인 반응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분들은 교회가 관습적으로 하는 일은 무조건 옳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거룩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을 조금이라도 바르게 이해하시는 분들이 본다면, 이는 중학생이라도 쉽게 판단할 수 있는 극히 상식적인 비판이므로 마땅한 반론이 떠오를 리가 없습니다. 예전부터 이 헌금 채를 볼 때마다 항상 신기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언제부터 필자는 누가 주도하여 슬그머니 사용하기 시작했는지 그 기원도 정확히 잘 알려지지 않지만, 이토록 비성경적이고 세속적인 관습이 그토록 오랜 동안 교회 내에서 계속 채용되어 오고 있다는 것이 정말 기적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거룩하고 순결해야 할 교회에서 왜 구태여 이런 졸렬한 방법으로 반강제적인 헌금을 거두어야 하는지 전혀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이는 사실상 가장 경건해야 할 예배 속에 위장된 매우 저급한 헌금 강요가 아닌지요. 세상의 그 어느 모임에서도 모일 때마다 눈 앞에서 채를 돌려 가며 돈을 거두는 곳은 없습니다. 이러니 '교회가 세상보다 더 세속적이 다'라는 비난을 받아도 할 말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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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좋게 보아 주려 해도, 헌금 채 고수는 새 신자들에게 상처를 주고 교회의 문을 막는 졸렬한 행위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습니다. 누구나 보편적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헌금 채가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해서 더 많은 헌금을 내도록 유도하기 위한 매우 인 위적이며 통속적인 수단이라는 데에 다른 이의를 제기하기가 힘들 것입니다.

교회 문을 막고 있는 헌금 채

은 분들이 교회 개혁을 논의하고 이를 위하여 큰 노력을 하고 있으나, 사실 우리는 아직도 지극히 비성경적인 이 헌금 채 하나도 제대로 바꾸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어느 분의 지적처럼, 그동안 얼마나 많은 영혼들이 물질에 시험 들어 교회를 떠났는지 정말 안타깝고 두려운 일입니다. 이러니 새 신자를 전도해도 자신 있게 추천할 만한 교 회가 선뜻 떠오르지 않을 정도입니다.

아마 초신자들은 믿음이 부족해서 그런 것만 눈에 들어온다고 타박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필자는 오히려 그런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분들이야말로 시력에 맞지 않는 안경을 쓰고 계신 분들이 아닌지 거꾸로 묻고 싶은 심정입니다.

현재 헌금 채를 그저 하나의 관습으로 여기고 무심코 사용하는 개혁 교회들도 많이 있 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믿는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느니, 차라리 연자 맷 돌을 자신의 목에 달고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형제를 실족케 하는 죄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경고하신 것입니다.

혹시 이 헌금 채가 과연 성경적이냐 아니냐를 신학적으로 따져 보자는 분이 계실지 모 르겠으나, 필자는 그럴 가치조차 느끼지 못 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헌금 채 사용의 성경적 근거가 아예 전무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헌금 채라는 단어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반면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칭찬하신 어느 가난한 과부가 헌금 채가 아닌 '연보 궤'에 돈을 넣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구태여 이렇게 비성경적이며 전도의 문을 심각하게 가로막는 헌금 채를 꼭 사용해야 할 필요가 있는지 정말 이해하기 힘듭니다. 이는 마치 바리새인의 누룩처럼 그저 사람이 만든 또 다른 올무입니다. 따라서 그런 옹색한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신도들의 돈을 긁어모아야 하겠다는 뜻이 아니라면 오늘 당장이라도 폐지하자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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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들이 교회에서 열심히 헌금을 하는 것은 물론 아름답고 귀한 일입니다. 그리고 믿음 의 분량과 능력에 따라 더 많이 할 수 있으면, 더욱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이런 헌금이 자발적이 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의식해서 더 내게 만드는 반강제적인 것이라면 문제가 심각해집니다.

인위적인 헌금 강요는 성경의 가르침에도 어긋나며, 전도의 문을 크게 막고, 그리고 믿음이 연약한 이들을 시험에 빠트리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 "돈 없으면 교회에 다니기 힘들다!"라는 말이 나온 지는 이미 오래입니다. 어떤 분의 분류에 따르면 헌금의 명목만 해도 70 가지가 넘는다고 합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아마 전 세계에서 한국교회처럼 돈 을 밝히는 교회는 결코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한국인의 체면과 헌금 채

외 여러 나라 교회들의 예배를 참석해 보면, 그 중에도 아직 헌금 채를 사용하는 교회들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헌금자들은 아무런 스스럼 없이 당당하게

동전을 헌금합니다. 처음에는 동전 소리가 너무 자주 나길래 아이들이 그렇게 헌금하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호기심이 나서 자세히 보니 어른들 상당수도 아주 태연하게 동전 헌금을 합니다.

아마 체면을 중시하는 한국 교인들은 이렇게 하기가 매우 힘들 것입니다. 하지만 이 동 전 헌금자들의 신앙을 가볍게 보아서는 곤란합니다. 이들 중에는 자신의 유언장에 자기 재산의 상당 부분을 나중에 교회에 기부하도록 이미 작성해 놓으신 분들이 많습니다.

또한 일부 교인들은 예배 시 아예 헌금을 하지 않고 별도로 은행 입금이나 온라인으 로 헌금을 하기도 합니다. 그들의 표정에서 헌금을 많이 하거나 적게 하는 데에 대한 차 별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것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물론 필자와는 다른 경험을 하신 분들도 많이 계시겠지만, 분명한 것은 적어도 외견상으로라도 외국 교회에서는 헌금으 로 교인들을 차별하는 일은 보기 힘들다는 사실입니다.

더구나 주보에 매주일 헌금자 명단을 공개하는 일은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우선 주일 헌금 외에 다른 잡다한 헌금 명목 자체가 거의 없습니다. 목회자 역시 교인들이 예배에 참석해 준 것만 해도 즐겁다는 표정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의 헌금 생활이 무조건 좋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적어도 헌금 액수가 많고 적음이 교회 생활에서 전혀 장애가 되고 있지 않음을 직시하자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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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같은 헌금 채를 사용해도, 한국에서는 그 의미와 효과가 서양과는 크게 다릅니다. 체면과 겉치레와 자존심을 매우 중시하는 사회 풍토 때문에, 남보다 적게 하거나 못하면 스스로 크게 부끄러움을 느끼기 쉽습니다. 물론 이런 행위가 옳다고 두둔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현실을 정확히 보자는 뜻입니다. 이런 이유로, 헌금 채가 한국에서는 다른 어느 나라에서보다 더 큰 강압감을 야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헌금 채 앞에서 이를 못 본 척한다거나, 동전이나 저액권을 꺼낼 만큼 얼굴 두 껍고 간 큰 신도들은 현실적으로 매우 드뭅니다. 이런 특수한 문화적 환경 때문에, 한국 에서는 헌금 채가 충분히 신도들을 실족케 할 수 있고, 또한 새 신자들에게 상처를 주 며 전도의 문을 가로막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잘 알면서도, 왜 예배 때마다 헌금 채를 돌려 가며 사람들 앞에서 이런헌금부작용을 을 해야 하는지요. 본당 입구의 헌금함에 미리 넣으면 재정 관리에 무슨 큰 문제라도 발생하는가요. 일부 목사들은 입으로는 늘 경건을 말하지만, 행위로는 부인하는 사람들입니다. 올바른 헌금이라면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는 바리새인들이 큰 길에서 기도로 외식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요.

따라서 헌금 생활도 가능하면 골방에서 하는 기도처럼, 하나님 앞에서 은밀히 하는 것 이 마땅합니다. 아울러 이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주님의 가르침에도 합당한 자세가 아닌지요.

그런데 헌금 채 사용도 모자라서, 구구한 변명을 늘어놓으며 주보에 헌금자 명단을 공 개하거나 심지어 액수까지 알려 주는 교회도 많습니다. 물론 이렇게 주보에 이름 올리는 것은 헌금 경쟁을 유도하려는 아주 저급한 술수라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또한 예배 시 헌금 기도를 통하여 십일조나 감사헌금을 한 사람들 이름을 일일이 불러 주며 별도로 축복 기도를 해 주기도 하는데, 이런 헌금 독려 행위는 마치 헌금을 많이 못한 사람은 별로 축복해 주고 싶지 않다는 의미인지 거꾸로 묻고 싶습니다.

특히 일부 부흥 강사 목사님들은 마치 목회자들만 무슨 특별한 영적 축복권을 갖고 있 는 것처럼 오도하며 이를 남발하고 있는데, 이런 사이비한 행동들은 정말 도시락을 들 고 따라 다니면서라도 말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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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지 않은 목회자들이 이렇게 스스로 기만을 하며 신도들을 세상적인 복만 추구하는 복쟁이들로 만들고 있고, 이러니 멀쩡하던 사람들도 교회에만 나가면 '영적 저능아'로 변질된다는 탄식이 나오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입니다. 교회에 돈이 쌓이면 반드시 썩는다

떤 분은 한국교회의 지나친 금전 추구와 방만한 재정 운용을 이렇게 꼬집었습니다. "목사님들 월급 두둑히 넣어 주고, 교회 운영, 행사비로 지출하고, 선교 지원

명목으로 동료 목사님들과 나누고, 대외 선전용으로 구제비 생색 좀 내고, 남는 것은 적금을 들어 잠실운동장만한 새 교회를 짓는 것에 써야죠. 그럴려고 돈 걷는 것 아닌가요?"

요즘 주변을 둘러보면 작은 교회들은 돈이 너무 부족해서 문제이고, 반대로 큰 교회들 은 넘치는 돈으로 딴 짓을 너무 해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물론 교회가 정상적인 사역을 하기 위해서는 돈이 여러모로 꼭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런 이유로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재정이 튼튼한 교회를 원합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 속에 목회를 망치는 큰 함정이 숨어 있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교회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 소중한 교훈은 비만으로 배부른 교회는 부패하고 타 락한다는 사실입니다. 즉 교회에 큰 돈이 쌓이면 반드시 썩는다는 것이지요. 처음에는 그 돈의 부스러기라도 좀 빼어 먹고 싶은 작은 유혹에 넘어 갑니다. 그런 후에는 점차 '바늘 도둑'이 '소도둑'으로 변합니다.

돈이란 꼭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반대로 넘치게 될 때는 도리어 화를 부릅니다. 그런 면에서 오히려 좀 부족하고 모자라는 것을 복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따라서 일시적 으로라도 교회에 돈이 넘칠 때는, 과감하게 가난한 이들을 구제하거나 선교사와 미자립 교회를 후원하는 등 해마다 교회 재정 잔고가 바닥이 보일 정도로 처리하는 것이 좋습니다.

교회는 이처럼 늘 자신을 비울 때에만 비로소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지혜로운 목회자라면 항상 교회의 군살을 빼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검소한 마음을 유지해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가 돈이 많아야 큰일을 할 수 있고 크게 헌신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은 복음을 크게 오해하는 지극히 세속적인 발상입니다. 하나님께서 돈이 너무 부족하셔서 재정적으로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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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운 교회들을 방치하시는 줄로 생각하십니까. 절대로 아닙니다. 돈이나 세력을 의지하여 일하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늘날 돈이 넘치는 많은 중대형 교회들이 하는 행태를 한번 살펴보십시요. 담임목사는 억 대 연봉으로 고급차를 타고 호의호식하고, 교회는 부동산이나 기타

다른 사업에 투자를 하기도 하며, 다른 한편에서는 더 큰 교회당을 짓는다고 은행 빚을 얻어 일 년에 수 억 원이나 되는 돈을 단지 이자를 갚는 데에 쓰고 있습니다. 과연 이런 것이 정상입니까. 그런 돈이 그렇게 부러우시다면 지금이라도 즉시 직업을 바꾸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과소유로 멍든 한국의 중대형 교회들과 많은 목회자들은 첫 단추부터가 잘못되어 있습니다. 목회의 길이 가난을 추구하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를 추구해도 좋다 는 뜻은 더욱 아닙니다. 오히려 검소한 생활이나 가난을 각오하지 않고 목회를 하려는 그 생각은 처음부터 잘못된 것입니다.

목회자들 중에 누구라도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성공한 목회라고 생각한다면, 더 이상 교회를 병들게 하지 마시고 이제라도 제발 다른 사업을 알아보시기 바랍니다. 이계선 목 사님께서는 "미국 교회는 300 명 교회 목사도 우체국에서 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30 명 교인 데리고도 목사가 넉넉하게 살아요"라고 지적하셨는 데 물론 모든 목회자가 그런 것은 아닐지라도 결코 가볍게 들을 수가 없습니다.

교회가 제대로 서려면 담임목사부터 의식이 바뀌어야 합니다. 또한 교인들의 의식 수준도 동시에 달라져야 합니다. 교인들 자신이 변하지 않는다면 교회 개혁은 항상 실패할 수 밖에 없는 것이고, 실제로 오늘날 한국교회 개혁이 자꾸 겉도는 진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보다도 더 세속적인 악습 채를 버리고 헌금함으로 전환하자고 하면, 다른 여러 구구한 이유를 붙이기도 헌금하 지만 가장 두드러진 반대가 그러면 당장 헌금이 줄어들어 곤란하다는 현실적인 이유를 말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말은 실제로 일시적이나마 크게 틀림이 없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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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이유를 역으로 분석해 보면, 헌금 채 사용은 자발적이지 않은 헌금도 추가 하여 반강제적으로 걷고 있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반증해 주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왜 헌금함을 사용하면 헌금이 줄어들고, 헌금 채를 사용하면 헌금이 늘어날까요. 헌금함이 보다 자발적인 헌금을 거두기 때문입니다. 이런 현상만 보아도 헌금 채는 헌금을 반강제적으로 강요하는 악습이 분명합니다.

나님께서는 우리가 돈이 부족하고 사람이 부족한 가운데서도, 주님만을 의지하며 주 님의 방법으로 일하기를 원하십니다. 돈과 사람과 세력이 우상이 된 이 시대에

주님이 일하시는 방법은 다릅니다. 중세 교회처럼 돈으로 일한 교회는 돈으로 무너질 것이며, 사람과 세력을 의지하여 일을 한 교회들도 바로 그런 사람들로 인하여 타락할 것입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챙기는 것은 신도들을 기만하며 착취하는 악한 행위 이고 또한 교회를 망치는 일입니다. 그런 면에서 헌금 채는 교회 역사상 가장 부끄러운 악습 중에 하나임이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한국의 그 많은 거룩하신 목회 자들께서 이를 묵과하고 구습을 따르고 있다는 것은 정말 이해하기가 힘든 미스터리입니다.

한국교회에는 유능한 목사님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분들 상당수는 희안하게도 돈 문제 로만 가면 영 맥을 못 춥니다. 성경을 날카롭게 분석하시던 그 뛰어난 명철력이 갑자기 어디로 다 사라지는지, 돈이 안 되는 일에는 언제나 마음을 슬쩍 걸어 잠그십니다.

왜 평소에는 성자처럼 경건한 모습을 보여 주시던 그 많은 유명 목사님들께서 유독 이 저속한 헌금 채에 대해서는 대부분 침묵을 하시는지, 정말 희안한 일입니다. 아니면 헌 금 채 사용이 신앙 양심에 전혀 거리낌이 없고 극히 자연스럽다는 말인지요. 필자는 마 치 이 분들이 교회 세습에 대하여 침묵하거나 동조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을 받곤 합니다.

헌금함으로 자발적인 헌금을

국 장로교의 좋은 스승이신 정암 박윤선 목사님은 일찍이 이 헌금 채 사용에 대하여 매우 부정적인 입장을 분명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미 60 년대 서울

상도동의 어느 허름한 임대 건물 이층에서 한성교회를 개척하시면서 처음부터 헌금 채를 없애고, 예배실 입구에 헌금함을 마련하여 누구나 자발적인 헌금을 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박 목사님 스스로 헌금함 사용을 몸소 실천하시며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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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다행히 필자는 아직까지 어느 교회도 헌금 채 대신에 헌금함을 채택해서 망했 다는 소리를 들어 본 기억이 없습니다. 오히려 지난 수 십년 간 헌금함을 채택하여 현재도 견실하게 사역을 잘하고 있는 교회들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교회들은 인위적인 수단을 저속하게 쓰지 않아도, 정상적인 목회는 언제나 통한다는 교훈을 우리에게 실 례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고로, 헌금함을 사용하고 있는 어느 교인의 실제적인 이야기를 한번 들어 보십시요.

"저희 교회는 입구에 헌금함이 있으며 예배에 들어가기 전 내고 들어갑니다. 예배 순 서에는 대표 기도 후에 헌금함을 들고 들어가시는 여집사, 권사님들이 순서상으로 헌 금에 대한 축복 기도를 합니다. 예배 시에도 없지만 주보에도 헌금자 명단은 없습니다. 그리고 감사헌금, 십일조, 주정헌금 이런 헌금 종류도 없습니다. 헌금 봉투는 한 가지 이며 그 위에는 교회 이름 외에는 아무 표시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보에는 전체 금액만 나오고 있지만 제가 보기에 출석 인원에 비해서는 훨씬 많은 헌금이 매주 나오며, 이런 것을 느낄 때마다 무엇이 올바른 신앙생활인지 깨닫습니다."

그러나 위의 교회와는 달리, 만에 하나 설사 헌금함을 사용한 이유로 교회 재정이 적 자가 되었다고 칩시다. 그래서 부득이 교회 문을 닫아야 한다면, 필자는 차라리 문을 닫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봅니다. 목회자에게 마음에 거리낌이 있는 불의한 사역보다는 의로운 안식이 오히려 복된 결정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강요적으로 헌금을 거두어 큰일을 하는 것보다는, 자발적인 헌금으로 작 은 일에 충성하는 것을 더 기뻐하실 것이라 확신합니다. 미네소타 주님의교회는 2008 년 기존의 헌금 접시를 버리고 헌금함으로 전환하였습니다. 이때 김성은 목사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헌금함을 설치하면 헌금이 줄어들 것이라 예상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헌금 시간에는 접시가 돌기에 헌금하던 분들이 헌금함을 설치하면, 헌금을 잊거나 하지 않을 것이기 에 헌금이 줄어들 것이라는 말입니다. 실제로 제가 섬기던 교회도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잘된 일입니다. 헌금은 부담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헌금 정신이 제대로 훈련되리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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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자세야말로 진정으로 우리 모두가 본받아야 할 아름다운 목회 태도가 아닐까 생 각합니다.

선 오늘날 스스로 박윤선 목사님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생각하시는 장로교 신학교들 인 고신, 총신, 그리고 합신 출신의 그 많은 목회자들만이라도 지금 당장 헌금

채를 던져 버린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을 해 봅니다. 감리교 역시 웨슬리 목사님이 얼마나 당시 영국 교회들의 부정을 따겁게 지적하며 청빈한 삶을 보여 주셨는지 잊었는지요. 물론 다른 교단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한국의 많은 목회자들은 믿음의 스승들이 잘 가르쳐 준 것은 제대로 따라가지 않고, 쓸데없이 무게 잡는 목사 가운 착용 등 시키지 않은 일에는 열심을 낼까요. 정말 연구 대상입니다.

의심할 여지가 없이 헌금 채는 개혁 교회가 반드시 고쳐야 할 고질적인 악습 중의 하 나입니다. 이를 그토록 오랫동안 유지시킨 원인은 목회자들의 무관심이나 사심에 기인하 고, 또한 교인들의 맹종이 도와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개혁을 너무 거창하게 생각 할 필요가 없습니다. 작은 것이라도 잘못된 일이라 판단되면 바로 바꾸는 것이 중요합니다.

'헌금함을 설치하면 헌금이 덜 들어올 것이다'라는 고루한 사고방식은 아직도 오늘날 순수한 성도들의 믿음을 과소평가하고 우습게 여기는 행위입니다. 오히려 이로 인해 참 된 성도들은 더욱 열심히 헌금을 할 것이며 더욱 순수하게 헌신을 할 것입니다.

교회는 '돈 타령' 아닌 '신령한 노래'를 들려주어야

울러 이런 참된 헌신을 통하여 새신자들은 교회 내에서 복 타령과 돈 타령이 아닌, 다른 신령한 노래, 즉 '그리스도의 복음'을 비로소 듣게 될 것으로 확신합니다.

그리고 이런 새로운 신자들이 믿음 안에서 건강하게 잘 성장하면 건전한 헌금은 오히려 더 늘어나게 될 것이 당연합니다.

현재 한국의 많은 교회들은 독사 같던 바리새인들조차도 사용하지 않은 헌금 채를 돌 리고, 헌금자 명단을 떠벌려 가며 신도들의 돈을 거두고 있습니다. 게다가 한편에서는 '돈 을 많이 바쳐야, 복을 받는다'는 사이비적 기복 신앙으로 신도들을 수시로 세뇌시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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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새인 시대나 그로부터 이천 년이 지난 지금이나, 재물을 챙기는 위선적 종교 상인들의 행태는 크게 변하지 않고 오히려 그 수법이 더욱 고도화한 느낌이 듭니다.

그런 면에서 헌금 채는 과거 십자군 전쟁이나 면죄부 판매처럼, 교회의 이름으로 저질 러지고 있는 또 하나의 오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예배 시 이를 계속해서 돌리는 행위는 교회의 본질을 크게 훼손하는 중대한 잘못이므로 반드시 폐지되어야 합니다.

아울러 헌금 채를 폐지하는 것은 교회를 해롭게 하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를 바로 세우는 일이라고 확신합니다. 어떤 거리낌이라도 시초에 이것이 방치되어 깊히 곪게 되면, 나중에는 치료가 더욱 어려운 심각한 중병으로 커질 수 있다는 것을 '교회 세습 '에서 이미 많이 보고 있습니다. 비록 늦었지만 이제라도 우리가 헌금 채를 과감히 던져 버려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늘날 예배는 구약의 제사가 아닙니다. 그런데 예배 시 헌금 채를 돌리며 헌금을 바치 는 것이 마치 제사할 때 제물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과 같은 의미인 줄로

오해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의 제물은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 장차 오실 어린 양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이런 오해는 예배를 제사로 착각하는 잘못이며, 스스로 제물 되신 그리스도 십자가의 사역을 거스르는 행위가 되므로 조심해야 합니다.

일부 신도들은 유형 교회가 하는 일은 모두 옳은 줄로 여기며, 무비판적으로 순종을 하고 이를 미덕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하는 일이 무조건 옳은 것이 아니라, 반대로 무조건 옳은 일을 해야만 비로소 교회인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이제부터라도 궁색한 변명으로 헌금 채를 미화하거나 정당화하지 말고 헌 금함 사용에 적극 동참하기를 간곡히 촉구합니다. 그 어느 교회에서든 이 헌금 채로 인 하여 한 교인이라도 실족케 되면, 주님께서는 반드시 그 책임을 물으실 것이기 때문입니 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마 23:15)."

2010 년 4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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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전하고 돈을 받는 목회자들 담임목사님의 외부 집회 수입, 이대로 좋은가 대형 교회인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께서 20 년 간 60 억 원을 모아 장학 재단을 근자에 설립 했다는 소식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물론 이에 대해 아주 좋은 일을 하셨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있고, 반면에 주변의 어려운 이들을 돌보아야 할 목회자가 20 년 동안이나 이런 엄청난 돈을 쓰지 않고 모으며 지키시느라 수고가 매우 크셨겠다는 다소 냉소적인 반응도 있습니다.

이 돈은 외부 집회 때 받은 사례비와 세 자녀 결혼 축의금, 부친상 부의금 등을 적립 해서 모은 것이라고 합니다. 물론 다른 유명 목사님들 중에도 외부 집회로 몇 년만에 수 억 원 정도를 모으실 수 있는 분들이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중대형 교회에서는 전임 사역자들인 담임목사님들을 위해 기본 사례 비는 물론이고 승용차를 제공하거나, 유류비를 포함한 차량 유지비를 모두 교회에서 부담합니다. 또한 사택을 제공하며, 각종 공과금도 교회가 납부합니다. 거기에다가 자녀 학자금과 심하면 해외 유학비도 교육비 명목으로 교회가 부담합니다.

그러니 실제로는 교회 결산서에 명시된 기본 사례비보다도 훨씬 더 많은 봉급을 받고 있는 셈입니다. 아울러 근로자의 소득에서 원천 징수되는 세금도 대부분 목사는 면세를 받으므로, 국가나 지방 자치 단체에 내는 세금도 거의 내지 않습니다.

즉 작은 교회의 많은 목회자들이 경제적으로 매우 열악한 여건에서 사역하고 있는데 비해, 대부분의 중대형 교회 담임목사들은 한국 사회 중류 계층에 견주어도 이미 충분한 사례를 받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오히려 일부에서는 사례비가 너무 지나쳐서 목사님들을 물질적으로 타락시키는 데에 크게 일조하고 있다는 비난도 만만치 않습니다.

말씀을 전하고 돈을 받는 목사님들

리 주위를 둘러보면, 상당수의 담임목사님들께서는 틈만 나면 주중에 교회를 비우고 외부 집회 강사로 나서시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일부 교인들은 이런

목사님을 크게 자랑스럽게 여기기도 합니다. 즉 자신들의 교회 담임목사님의 말씀이 매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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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우셔서 여기저기에서 집회 요청이 오고, 그러다 보니 부득이 교회를 자주 비우고 바뻐지실 수밖에 없는 것으로 이해하며 당연시합니다.

그런데 왜 많은 담임목사님들은 이렇게 외부 집회에 열심을 내실까요. 이 분들 중에 순수하게 헌신을 하시는 분들도 적지 않겠으나, 만일 강사 사례비를 전혀 안 드려도 모두들 그리 열심히 다니실까 하는 의구심마저 크게 드는 것이 숨길 수 없는 작금의 실정입니다. 여기서 어두운 부분을 조금 들여다보면, 이 분들 중에 일부는 외부 집회 유감스럽지만 인맥을 늘이기 위해 교단 선후배나 친구 등을 부지런히 접촉하고 필요하면 서로 직접 '교차 초빙'을 하거나, 이것도 너무 표가 나면 친한 목회자들끼리 옆으로 돌아가면서 '순환 초빙'을 한다고 합니다. 즉 A 목사님은 B 교회로, B 목사님은 C 교회로... 이런 식이지요.

이를 다시 쉽게 정리하면, 다수의 목회자들이 끈끈한 그룹을 형성한 후에 서로 상대 교회들의 재정을 돌아가면서 사이좋게 나누어 쓰는 셈입니다. 물론 목회 경력이 높아질 수록 이런 인맥은 더욱 유기적으로 확장되며 다양하게 업그레이드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런 외부 강사 초빙은 무명 목회자들이 교단에 이름을 알릴 수 있는 아주 유용한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집회 기간 내내 '거물' 목사님과 깊이 사귈 수 있는 사적인 자리가 마련되기 때문입니다. 교회 재정을 효과적으로 이용하여 자신의 고급 인맥을 폭넓게 가 꿀 수 있으니 가히 일석이조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많은 유명 목회자들의 외부 집회가 연중 내내 줄줄이 예약되어 있는 이유가 이런 현실과 전혀 무관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런 실상에도 불구하고, 명철하신 목사님들답게 그 방법이 아주 매끄러워 일반 교인들이 이를 눈치채기란 그리 쉽지 않음이 당연합니다. 그래서 이런 공식적인 과정을 통하여, 교인들의 피와 땀이 어린 헌금이 은혜로운 집회 분위기 속에서 강사 목사님들의 주머니 속으로 조용히 들어가게 되는 것이 보통의 수순이 됩니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요즘 중대형 교회마다 철따라 집회가 자주 있고 외부 강사들이 수시로 들락거리는 현상을 결코 무심히 볼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분들이 목사 안수를 받고 처음 목사가 되었을 때는 말씀의 부르심이 있는 곳 에는 어디든지 달려가겠다는 좋은 결심이 있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그 소명에 순응하여 어디든지 가서 진이 빠지도록 말씀을 잘 전하면 그것으로 감사하고 족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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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 왜 거액의 강사 사례비를 받아야 할까요. 이는 지각 있는 신자들이 아직까지도 쉽 게 이해하기 힘든 부분입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3-5 일간 집회를 하고 본 교회에서 주는 한 달 봉급에 준하는 사례 비를 받는 경우도 있다고 하는데, 본인들이 비자금처럼 그 액수를 잘 밝히지 않기에 확실한 내역은 자세히 알 수가 없습니다. 전임 목회자의 외부 집회 수입, 과연 정당한가

찌 되었든, 강사 사례비로 얼마나 주고받는지를 따지자는 것이 이 글의 주제는 아 닙니다. 다만 문제의 핵심은 이 사례비가 과연 개인이 챙길 수 있는 돈인지

아닌지를 확실히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한 교회의 담임목사라고 하면 분명히 그 교회의 목회를 우선적으로 책임진 전임 사역 자입니다. 즉 시간제 근무자가 아니라 전일제로 근무하는 사역자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근무지인 본 교회를 비우고 여러 날을 다른 곳에 가서 일을 했습니다. 이를 기업에 비교하면, 다른 기관이나 업체의 필요에 의해 일시적으로 파견되거나 출장 근무하는 것과 비슷한 상황입니다. 물론 이 경우 해당 직원은 모기업에서 사전에 허가를 받아야 하고, 이를 근거로 하여 합법적으로 기존 근무지를 이탈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공식적인 업무 과정을 통하여 상대 기관이나 기업에서 얻어진 수입은 해 당 직원이 사유화할 수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입니다. 이는 일종의 유료 용역을 맡 은 것과 비슷한 상황으로 볼 수 있으며, 비록 모기업을 떠나서 일을 하고 있지만 사적 인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모기업의 승인과 위임하에 공적으로 일을 하는 것이 기 때문입니다.

같은 이유로, 심지어 대통령이 공식 업무 출장 중에 외국에서 개인적으로 받은 지나친 선물이나 부수입도 국고로 환수되는 것이 정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구태여 이런 복잡한 사회법을 논하지 않더라도 이는 도덕적으로도 명확한 일입니다. 더 욱 쉬운 예를 하나 들자면, 어떤 주인이 가게에 점원을 하나 고용했는데 그 점원이 매 달 월급을 꼬박꼬박 잘 받아 챙기고도 수시로 며칠 동안이나 자기 가게를 비우고, 다 른 가게에 가서 이중으로 부수입을 올린다면 이것이 정당한 일이라 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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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아닙니다. 따라서 이런 이유로 일부 비판자들이 상당수 담임목회자들을 위선된 모습으로 교회의 단물을 빼어 먹는 바리새인과 같은 종교 지도자들로 취급하며 극 단적으로 비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액 본 교회 재정으로 반납해야 은밀한 돈주머니가 일부라도 공개될 때면, 자금 출처로 거의 예외 없이 이 목회자들의 외부 집회 사례비가 거론이 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세금도 없고, 대개 는 교회에 공식적으로 자세한 명세서를 보고하지 않습니다. 마치 재벌들의 비자금을 연상케 합니다. 그냥 눈먼 돈처럼 담임목사의 주머니로 슬그머니 들어가 버리는 것이 보통입니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십일조 명목으로 일부를 떼어 교회에 헌금을 하면 만사가 끝난 것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신실하신 목회자들 중에 그저 교통비 수준의 사례를 받고 외부 집회에서 전심으 로 수고하시는 분들까지 폄하해서는 절대 안 될 것입니다. 이런 목사님들이야말로 순수 하게 말씀 사역을 위해 헌신하시는 귀한 분들입니다.

단지 이 글에서 필히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이미 본 교회에서 충분한 사례를 받으시면 서도 오히려 부수입에 더 열중하시는 일부 중대형 교회 귀족 목사님들의 잘못된 행태 입니다.

자는 개인적으로 뉴라이트와 김진홍 목사님의 행보에 전혀 공감을 하지 못하고, 오 히려 크게 반대하는 입장입니다. 그런데 비록 서로 큰 견해 차이는 있으나, 오래

전에 이 분이 보여 주신 한 훌륭한 처신만은 아직도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당시 필자는 해외에 체류 중이었는데 한번은 출석하던 한인 교회에서 김 목사님을 강사로 초빙하여 며칠 동안 집회를 가진 적이 있었습니다. 김 목사님은 집회 기간 내내 한 교우의 집에서 숙박하시며 좋은 설교를 들려 주셨고, 모든 교인들이 매우 유익한 시간을 보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집회가 모두 끝나고 이 분이 귀국하신 뒤에, 어느 사석에서 담임목사님께로부터 들은 소식은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김 목사님이 강사 사례비를 끝까지 거절하시고 귀국 비행기를 타셨다는 것입니다. "집회 기간 동안에 강사 목사를 먹여 주고 재워 주었으면 충분하지, 뭐가 더 필요하냐"고 오히려 반문을 하셨다고 합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자세인데도 세태가 워낙 별나다 보니 필자에게는 그것이 매우 아름답고 신선하게 느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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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것이지요. 그래서 당시 교회에서는 할 수 없이 그 분의 본 교회로 사례비를 송금해 드렸습니다.

결론을 미리 밝히자면, 담임목사의 외부 집회 수입은 전액 본 교회에 반납해야 옳을 것으로 봅니다. 전임 목회자로서 말씀을 전하는 사역은 당연한 것이고, 또한 이는 본 교 회의 승인과 위임하에서 이루어진 공적 사역이므로 이를 통해서 개인적인 이득을 절대 로 취해서는 안 될 것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담임목사가 외부 집회에 나갈 때는 사전에 당회의 승인을 받아야 하고, 집회 뒤에 돌아와서는 실제 지출 경비를 제외한 사례비 전액을 명세서와 함께 본 교회에 반납함이 마땅합니다. 이렇게 투명한 절차를 거친다면 누구도 담임목사의 처신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모습이야말로 개혁 교회의 목회자가 보여 주어야 할 바른 자세라고 확신합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항상 말로는 자신들이 '주의 종'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근무 시간 에 밖에 나가서 돈을 벌어 사익을 취한다면 그것이 자영업자의 처신이지, 무슨 종의 모습인가요. 그런 종은 스스로 청지기가 되어야 하는 종의 본분을 망각하고 주인의 것을 도적질하는 자로 비난을 받아도 정당한 변명을 하기가 힘들 것입니다.

"부족한 것이 있더냐!"

동안 외부 강사 사례비는 중대형 교회 목회자들을 필요 이상으로 치부케 하여, 목사 직의 귀족화에 크게 기여를 해 왔고 고급차와 호화 주택을 포함한 그 분들의 지나친

사치로 인해 사회의 지탄을 받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또한 배부른 목회자들을 전국적 으로 양산하여 교회 세속화에 결정적인 일조를 해 온 것도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입니다.

한국 가톨릭의 지도자이신 김수환 추기경께서는 불과 3-4 백만 원도 안 되는 급료를 받 으시며 검소하게 사셨다고 들었습니다. 다른 사제들의 급료가 얼마인지는 언급할 필요조 차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톨릭을 개혁하자고 나선 많은 개신교 목사님들의 사치와 방종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역사적으로 보아도 부패한 종교 지도자들은 언제나 교묘한 명분으로 돈을 탐하였습니다. 요즘 지방에 교인 2-3 백 명만 모아 놓아도 억대의 연봉을 받으며, 고급차를 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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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의호식하는 목회자들을 우리는 많이 보고 있습니다. 아니면 또 극히 일부의 이야기라고 축소하며, 구구한 변명을 해야 하나요.

자신들의 사치스러운 주머니 하나조차 제대로 개혁하지 못한 목회자들이 두꺼운 얼굴로 스스로 영적 지도자라고 나서서 행세하는 곳이 현재 밑창부터 침몰하고 있는 한국 개혁 교회들의 현주소이고, 이를 그저 바라만 보며 기도마저 지쳐 가는 신자들의 마음은 이래서 오늘도 슬픈 것입니다.

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왜 큰 주머니가 필요할까요. 예수님이 언제 돈주머니 챙겨서 제 자들을 파송하셨는지요. 또는 세례 요한이나 다른 사도들이 부지런히 자신들의

주머니를 치장했나요. 언제나 돈주머니를 먼저 챙긴 자는 가룟 유다가 아니었던가요.

마지막으로, 앞으로 어떤 목회자들이라도 큰돈을 모아서 좋은 사업에 쓰겠다고 구상을 하는 것은 매우 경계할 일입니다. 사적으로 돈을 모아 공익사업을 하는 것은 말씀 사역을 담당하는 목회자의 본업이 아니고, 교회나 다른 기관에서 할 일입니다. 또한 구제나 장학금을 명분으로 공익 재단이나 비영리 법인체를 만드는 것 역시 매우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방법은 일부 재벌들의 수법처럼 '부의 세습'을 위한 하나의 위장된 도구로 큰 의 심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재단을 설립한 후에는 자신의 가족들이나 지인들을 재단 이사로 세우고, 재단의 실제적인 자금 운영을 좌지우지하며 나중에 자산을 더욱 불리거나 필요시 적당한 편법으로 얼마든지 경제적인 이득을 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가난했어도 온 세상에 흩어져 복음을 잘 전하고 죽도록 충성을 했건만, 요즘 한국에는 왜 이렇게 부자 목사님들이 많은가요. 도대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의 길을 따라야 할 목회자들이 거룩한 교회 내에서 어떤 명분으로, 무슨 비지니스를 그리 잘해서 그토록 부유해졌는지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날 목회자들이 진정으로 마음을 쏟아야 할 곳은 '의와 인과 신'이지 돈주머니가 아닙니다. 그리고 목사님들의 두둑한 주머니가 진심으로 회개하지 않는 한, 한국교회의 건강한 개혁을 기대하기 매우 힘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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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로 한 가지 문제가 더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일방적으로 일부 목사님들만 나무라고 해도 되는가 하는 점입니다. 교회의 장로님들, 집사님들, 그리고 성도들 누구라도 이 돈 이라는 매혹적인 우상 앞에서 그리 쉽게 자유롭지 못한 것이 냉엄한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늘 두려운 마음으로 항상 자신을 더욱 살피며 주님의 음성에 귀를 따라서 기울여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아울러 목사님들뿐만 아니라 진정으로 세상에 복음을 전하려는 모든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친히 주시는 다음의 물음에 늘 겸허한 답변을 준비해야 옳을 것입니다.

"부족한 것이 있더냐!"

샬롬!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전대와 주머니와 신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 이 있더냐! 가로되 없었나이다(눅 22:35)."

2010 년 4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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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들의 변절과 교권주의 교회가 변질되는 이유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 6:3)." 제자교회, 갈보리교회, 사랑의교회, 그리고 증가성결교회뿐만이 아니라 과거 충 최근현교회, 소망교회, 금란교회, 개봉감리교회, 한국대학생선교회, 각 교단 총회 등 한국 교회 일각에서 발생한 여러 사건들을 돌아보면서 '바른 교회'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일단 이 사건들이 크게 우려스러운 이유는 목회자들이 문제의 중심에 우뚝 서 있다는 점이며, 아울러 수천년 교회 역사의 그늘에서 끈질기게 기생하여 온 '교권 주의'라는 독버섯을 또다시 연상시키기 때문입니다. 교권주의란 부패한 교회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지위를 일반 신자들과는 다른 특별한 성 직이라고 강조하면서 권력을 세력화하고 제도화하여, 부와 명예 그리고 세속적 성공을 추구하며 진리를 왜곡하고 교인들 위에 군림하려는 사상을 의미합니다. 신약 성경은 교회 내에 공존하는 이런 잘못된 종교 지도자들이나 불순한 세력들을 '바리새인', '자칭 선지자라 하는 이세벨',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 또는 '사단의 회'라고 묘사 하고 있습니다. 보면,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어느 나라에서든 교회가 외형적으로 역사적으로 성장하고 부흥할 때는 거의 예외 없이 이 교권주의가 기승을 부려 왔습니다. 중세 유럽 교회와 17-19 세기 영국의 교회, 그리고 오늘날 미국의 일부 대형 교회들이 그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커진 그만큼 더 큰 이권과 부수익이 많기 때문입니다.

지금 한국교회가 수백 개의 크고 작은 교단들로 사분오열된 것도 실제로 진리 문제로 갈라선 경우는 매우 드물고, 거의 다 이들 교권주의자들이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거나 또는 교권 세력 사이의 밥그릇 싸움으로 기득권에 따라 이합집산한 결과라고 생각합니 다.

교권주의의 뿌리 속에는 인간의 탐심과 죄성이 깊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교권주의자 들은 입으로는 언제나 하나님과 교회를 말하고 있으나, 뒷전으로는 자신들의 사익 추 구를 최우선으로 합니다. 그리고 이런 악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 석하며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왜곡시켜 적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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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한국교회 교권주의의 뿌리와 그 실태를 간략히 살피고, 이에 대한 기본적 인 대처 방안도 일부 논의해 보고자 합니다. 아울러 여기서 말하는 '한국교회'란 일반 적인 의미로, 한국의 많은 교회들을 뜻합니다. 즉 한국의 모든 교회를 의미하는 것은 아님을 미리 알려 드립니다.

한국교회의 친권력 전통과 교권주의 교권주의의 뿌리를 정확히 이해하려면, 멀리 일제 식민지 시대까지 거 먼저슬러한국교회 올라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복음이 본격적으로 전파된 시점이 바로 구한말로부터 연결되는 일제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일제의 집요한 속박과 탄압 속에서 한국교회는 기초적인 성장을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시 조선의 교회가 직면한 가장 크고 현실적인 난제는 바로 신사 참배 문제이었습니 다. 물론 이에 저항하여 주기철 목사님처럼 순교를 당하시거나 투옥을 당하신 많은 목 회자들도 있었으나, 유감스럽게도 거의 대부분의 교회 지도자들은 적당한 핑계를 구실 로 하여 신사 참배에 굴복했습니다. 나중에는 아예 단체로 떼를 지어 일본 본토 신궁 에까지 찾아가서 참배를 하기도 했습니다. 더구나 교단 총회장과 지도급 인사였던 목사님들이 자진하여 전투기와 기관총 대금을 헌납하고, 심지어 교회 종까지 떼어다 바쳤으며, 성경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황국 신민 사상을 전파하고, 기독 청년들을 전쟁터에 내모는 정치 선동을 하는 등 적극적인 친일 행위를 하였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즉 이 분들은 필요하면 파렴치하 게 예수님뿐만이 아니라, 덤으로 민족까지도 팔아넘길 수 있음을 일찍이 손수 보여 주었습니다.

초기 한국교회 교권주의의 문제는 여기서부터 증폭되고 확산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상당수의 순수한 지도자들은 투옥을 당하거나 국외로 망명을 하거나 순교를 당하게 된 반면에, 일제에 협력하고 변절한 목회자들이 교회 내에서 승승장구하며 주도권을 잡게 된 것입니다. 물론 일반 신도들이야 일제의 칼날 아래서 숨도 제대로 못 쉬며 그저 하 루하루를 연명하던 암울한 시절이었으니, 교단 정치 따위에 신경을 쓸 여유가 있었을 리가 만무합니다.

이렇게 일제의 비호 속에서 교회 내의 권력을 유지한 친일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기득 권을 지키기 위해 더욱 일제에 협력하였음은 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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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성장기에서부터 매우 건강하지 못한 취약 체질을 갖게 된 것입니다. 즉 대부분의 교회들이 변절된 지도자들의 그늘 아래서 성장했다는 사실입니다.

1938 년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총회장 홍택기 목사의 주도로 열린 제 27 차 조선장로교 총회는 신사 참배 반대자들을 회의장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으며, "신사 참배는 국민의 례이다"라고 가결시켰습니다. 그리고 부총회장 김길창 목사는 23 명의 노회장들을 데리고 평양 신사에 가서 시범적으로 신사 참배를 하였습니다. 일부 목사들은 부산 송도 앞바다에서 일본 우상 천조 대신의 이름으로 세례까지 받았습니다. 이런 와중에 신사 참배를 끝까지 반대한 약 200 여 교회가 파손되었고, 2,000 여 명이 투옥되었으며, 그 중에 50 여 명은 옥중에서 순교하였습니다.

물론 이 시기에도 음양으로 믿음의 순수성을 지키려고 고군분투하신 목사님들도 적지 않게 계셨습니다. 그리고 비록 신사 참배가 큰 죄이기는 하지만, 그것 하나로 신앙을 버리고 완전히 배교하였다고 정죄해서도 안 될지 모르겠습니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존경하는 한경직 목사님같은 분도 당시에는 신사 참배를 하였다고 고백하셨기 때문입 니다.

그러나 분명한 점은 이 신사 참배를 계기로 성장기 한국교회의 지도부가 신앙적으로 순수하지 못한 세력에게 넘어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제에 협력하던 이런 변절된 목회자들이 모인 노회나 총회 등이 갈수록 정치화하고 세력화한 것이 한국형 교권주의의 뿌리가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울러 이런 한국교회의 친일파 전통과 토양이 초기 교권주의를 고착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것은 부인하기가 힘든 역사적 사실입니다. 변신 그리고 또 변신

기에 추가하여 심각한 문제가 하나 더 있습니다. 당시 한국 사회의 정치권, 경제계, 언론계, 군부 등과 마찬가지로 이들 친일 교권주의자들은 해방 후에도 철저한 친일

청산과 회개 없이 계속적으로 기득권을 유지하였다는 점입니다. 이들은 세상이 바뀌자 태생적 변신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과거 일본 제국 대신에 이번에는 미국과 자유당 독재 정권에 유착하여 세력을 견고하게 확장했습니다.

마침 공산주의에 대한 대처가 최우선적으로 시급한 어수선한 시절이었기에, '반공'이 라는 매우 훌륭한 명분을 이용하여 과거 '친일'이라는 수치스런 행적을 적당히 얼버무 리고 감출 수 있어서 변신의 기회도 아주 좋았습니다. 그 덕분에 고사 직전의 매국 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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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파들이 어느 날 아침 갑자기 모두 열렬한 '애국 반공 투사'들로 새롭게 부활하는 놀 라운 이적이 일어난 성지가 바로 지금의 한국 땅입니다.

이런 역사적 토양 속에서 아직도 선거 때가 되면 일부 목사님들이 설교 중에 특정 정 치 세력을 지원하는 못된 버릇을 가끔 보여 주시는데, 아마 권력에 아부하던 옛 습성 을 미처 버리지 못한 생생한 증거일 것입니다. 이 분들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 라'는 구약 성경의 깊은 의미를 다시 새겨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여튼 다시 권력을 유지한 대다수 친일 교권주의자들은 제대로 진심을 담은 공식적 회개조차 없이 오히려 순수 세력인 출옥 성도들과 목회자들을 압박하고 내몰며

교권의 칼을 휘둘렀습니다.

그래서 해방 뒤 출옥 성도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회개 운동이 친일 파 인사들의 반발로 큰 성과 없이 무산되기도 했습니다. 당시 경남 지역 고신 교단의 설립도 이런 일련의 사건들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은 모두가 잘 아시는 내용일 것입니다.

더구나 장로교 총회는 신사 참배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제명하고 추방시켰던 한부선 선 교사를 해벌(解罰)한다는 결정을 했습니다. 하지만 범법자이며 가해자였던 한국교회가 자신의 잘못을 사과하거나 참회하지 않고, 오히려 무고한 피해자에게 해벌을 통보한 것은 적반하장입니다. 이 역시 참된 반성과 회개를 모르는 친일파 지도자들의 철면피한 역사 인식과 교권주의적 발상이 낳은 기막힌 사건입니다.

런데 필자는 이런 저급한 교권주의자들을 단순히 '친일파'라고 규정하기에는 다소 부족한

감이

있다고

느낍니다.

적어도

이들에

대한

보다

정확한

표현은

'기회주의자' 라고 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필요시 언제든지 예수는 물론이고 민족과 영혼까지 팔아 가며 친일뿐만이 아니라 친미, 친독재, 친군부, 그리고 친재벌 등 어떤 변신도 불사해 왔기 때문입니다.

이런 불행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일제 시대 이후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극심한 교 권주의에 의하여 휘둘린 한국교회는 정의를 추구하며 약하고 억눌린 자들의 편에는 한 번도 제대로 서지 못하고, 언제나 부와 권력을 가진 강자의 편에 서 왔다는 신랄한 비 판에 마땅히 변명을 하기 힘들게 된 것입니다. 단지 개혁 교회 내의 일부 양심 세력들 만이 교권주의를 거부하고 저항해 왔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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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적 교권주의의 악습

렇게 세상이 바뀌고 정권이 여러 번 교체된 이후에도 한국교회의 교권주의자들은 혈연, 학연 그리고 지연 등의 인맥을 이어 가며 교묘한 줄타기를 하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매우 성공적으로 잘 지켜 왔습니다. 물론 이들 모두가 자신들의 권력을 자식들이나 친인척에게 물려준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문제가 매우 심각한 것은 이들 교권주의자들이 세계 교회사에 보기 드문 한국적 악습들을 교회 내에 뿌리 깊게 심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몇 가지 예를 들자면, 우선 목회자를 위한 과도한 권력 집중이 한국교회 특유의 나쁜 관습입니다. 담임목사가 '주의 종'이라는 명분으로 교회 내에서 사실상 입법, 사법, 행정 등 삼권을 모두 쥐고 마치 '중세 교황'처럼 행세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개혁 교회 안에서 어떤 직분자도 신도들 위에 군림할 권한은 없습니다.

또한 세계적으로 매우 희귀한 일로써, 한국교회의 거의 모든 교단들이 합창이라도 하 듯 십일조를 율법처럼 수치적으로 강요하여 중대형 교회마다 돈이 쌓이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자국에서는 십일조를 의무화하지 않는 건전한 외국 교단들도 유독 한국에 들어와서는 십일조를 챙깁니다. 이렇게 넘치는 돈으로 성장주의와 물량주의를 추구하며 영업을 크게 확장하여, 전세계 50 대 초대형 교회 중에서 가장 큰 교회를 포함한 무려 27 개 교회가 한국 땅에 좌판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의 교권주의자들은 교회 공금을 자기 주머닛돈으로 쉽게 착각합니다. 그래 서 툭하면 교회 공금을 횡령하거나, 아니면 적당한 구실을 만들어 자기 주머니를 만족 시킵니다. 자신이 시무하는 교회 집회에서 몇 번 설교를 하고서 강사료 명목으로 1,000 만 원이나 챙겼다고 소문이 난 어느 목사님 이야기는 그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즘은 외부에서 하도 시끄럽게 떠든 덕분에 그래도 다소 개선되고 있지만, 교회 재정 처리 역시 담임목사의 입김이 너무 강하고 아직도 불투명한 부분들이 많습니다.

심지어 어떤 목사님은 은퇴를 위한 교회를 짓겠다는 명분으로, 교회 돈을 무려 200 억 원이나 빼 가고 교회 장부를 아예 불살라 버렸다는 소식도 들려 옵니다. 이렇게 법과 절차를 무시하고 교회를 개인 회사처럼 운영하는 것 역시 한국형 교권주의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입니다. 거기에 추가하여, 선거 부정이 상습화해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교단 선거에서 자신들이 당선되기 위해 돈으로 표를 매수하는 악한 행위가 그것입니다. 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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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목회자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전혀 믿지를 못할 것입니다. 그들에게 다른 목회자들을 매수한다는 것은 차마 상상도 못할 엄청난 일이기 때문입니다. 아마 그 리스도인이기를 포기한다면 가능하겠지요. 그런데 이런 부끄러운 현상이 한국교회 내 에서는 비일비재합니다.

음으로는, 당연히 담임목회자들의 교회 세습을 거론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지구촌 어디를 둘러보아도 한국교회처럼 광범위하게 세습을 자행하는 교회들은 없을

것입니다. 자신의 친족들에게 특혜를 준다는 면에서, 이 역시 사실상의 성직 매매와 크게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또한 교회가 이미 기업화했음을 잘 보여 주는 증거입니다.

물론 이외에도 더 많겠지만, 거짓된 교권주의자들이 교묘한 말로 신도들을 속이며 자 신들의 배를 불리며 부와 이권을 축적하고, 교회 내에 기생하며 교인들을 착취하여 오 고 있는 것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어두운 실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여튼 다른 나라에서는 쉽게 찾기 힘든 이런 악습들이 교권주의의 그림자 속에서 거의 관습화하고 제도화한 것이 기형적인 한국교회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이들은 거룩한 교회를 섬기는 목회자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의 세속적 가치관을 그대로 추구하며 이를 성취하기 위해 불의한 수단들을 거침없이 쓰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필자가 한국교회를 루터의 종교 개혁 이후 지구촌에서 가장 부패한 교회라고 서슴지 않고 지명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없고 세상과 짝하여 목사와 건물만이 위세를 부리는 바람난 교회, 이것이 바로 고멜의 모습입니다. 또한 오늘날 교권주의에 짓밟히고 세속적 거품으로 가득 찬 한국교회의 슬픈 한 단면을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교권주의의 동역자들

럼에도, 교권주의에 적극 협조하고 지원하는 강력한 동역자들이 있습니다. 바로 이 교권주의자들의 충실한 제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 맹신도들입니다. 이들은 목사를

따르는 일이 바로 예수를 따르는 일과 동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분들의 안목은 매우 특이합니다. 그래서 목사가 교회 공금을 횡령하고, 교단 선거에 돈을 뿌리고, 여신도와 간통하고, 자식에게 교회 세습을 하는 등 하여간에 무슨 짓을 해도 별로 흔들리지 않습니다. 옆에서 보는 사람들도 분통이 터질 정도인데, 이들만은 그렇게 충직할 수 있다는 것이 그저 신기하고 놀라울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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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군다나 한국의 교권주의자들은 대부분 위선적인 인사들이고, 그들 스스로 내세우는 세탁된 학력이나 경력 역시 알량하기 그지없습니다. 세속적인 기준으로 보아도 교인들 의 평균 수준에도 훨씬 못 미치는 조잡한 인물들이 목사직이라는 겉옷으로 성직자처럼 위장하고, 유명인으로 행세하며 거짓된 입술로 경건을 말하고, 순진한 신도들 위에 군림하며 기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권주의에 잘 길들여진 맹신도들은 겸허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참된 주의 종들은 외면하고, 오히려 자기들이 드린 헌금으로 호의호식하면서 도 자신들을 힘으로 억누르는 이런 거짓된 종교 업자들을 더 좋아하고 그들에게 충성을 바칩니다. 하지만 이렇게 이해하기 힘든 일이 비단 한국교회에서만 일어난 일은 아닙니다. 이미 오래 전에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깊이 한탄한 바와 매우 유사하기 때문입니다. "누가 너희로 종을 삼거나, 잡아먹거나, 사로잡거나, 자고하다 하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고후 11:20)."

이런 일만 보더라도, 허탄한 인생들이란 정말 어쩔 수가 없는가 봅니다. 겉모습만 보면 모두 똑똑해 보이는데, 희안하게도 영적인 문제로만 가면 갑자기 이상하게 변합니다. 여기에는 대학 교수도, 국회 의원도, 장관도, 판사도, 장성도, 언론인도 거의 상관이 없습니다. 우선 주변의 이단 종파들을 한번 살펴보십시요. 얼마나 많은 멀쩡한 분들이 그 줄에 서서 애쓰고 있는지, 정말 한심한 일입니다.

그래서 참된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의미를 더욱 확신케 되기도 합니다. 영적 으로 지혜로운 자는 태산이라도 기필코 넘어가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그저 작은 지푸라기 하나에도 이를 핑계삼아 쉽게 걸려 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한국교 회가 직면하고 있는 맹신도들의 안쓰러운 모습입니다. 하여튼 앞으로 이 맹신의 문제는 교권주의를 해소하는 일에 가장 큰 장애가 될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됩니다.

교권주의를 끝내려면

실 교회가 정화되려면, 제도의 개혁만으로는 불가능함을 누구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먼저 목회자와 신도들 자신이 우선적으로 변화되어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물론 이는 옳은 말이고 우리가 마땅히 추구해야 할 목표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고칠 수 있는 제도적인 악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이는 매우 지혜롭지 못한 일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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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최근에 자주 언급된 것처럼 모든 교회는 개혁 교회다운 정관을 만들고 이를 통 하여 모든 직분자의 권한과 의무의 한계를 명확히 설정하고 지켜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럴 경우에, 목회자나 장로들의 독주와 교권 남용을 크게 해소할 수 있으리라고 봅니 다. 담임목사나 시무 장로의 임기도 물론 여기에 포함되면 좋을 듯합니다.

또한 담임목사의 시녀로 전락되기 쉬운 당회를 늘 감시하고 견제할 필요가 있다고 봅 니다. 상대적으로 소수 모임인 당회를 이용하여, 전체 교인의 권리를 짓밟고 월권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일반 교인들이 참여하는 제직회나 공동의 회의 감사 기능과 권한을 크게 강화해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각 교단의 노회나 연회, 그리고 총회 등의 핵심 임원들은 원칙적으로 평생 다음으로, 단임제로 하면 좋을 듯합니다. 그래서 한 번 임원을 했던 분들은 다시는 교단 정치에 나서서 계속 세력화하는 일이 없으면 좋겠습니다. 즉 한 번 봉사한 것으로 만족하시고 깨끗히 물러서시라는 뜻입니다.

이럴 경우 어느 특정인들이 파벌을 이루며 지속적으로 교단 정치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교회를 개혁하기 매우 힘 든 이유 중 하나는, 개혁의 대상인 정치 목사들이 교단의 지도급 자리에 눌러앉아 돈과 인맥으로 세력을 구축하고 평생 교권을 흔들며 개혁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교회 내 부정과 부패에 대한 단호한 치리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교단 선거 에 돈을 뿌리거나, 교회 공금을 유용하거나, 또는 도덕적으로 치명적인 잘못을 범한 직분자들은 반드시 해임 처리하여 다시는 교회 정치나 직분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조치 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이에 저항하거나 회피하는 교권주의자들이 있다면, 기독교 언 론이나 인터넷 매체 등을 통하여서라도 끝까지 추적하고 감시하며 고발을 해야 할 것 입니다.

마지막으로, 소명에 따라 순수하게 헌신할 준비가 된 분들만이 목회하시기를 권고하고 싶습니다. 비록 주님을 위해 죽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주님을 위해 한 번 바르게 살 아 보겠다는 결연한 각오조차 없이 함부러 목회에 나서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할 것입니 다. 아울러 생계나 치부의 수단으로 목회를 하는 불행한 일도 반드시 사라지기를 진심 으로 바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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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재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사람은 단순하고 무식한 대중들이고, 교권주의자들이 제일 좋아하는 교인은 영적으로 무지한 신도들입니다. 사실 지각 있는 신자들이 모인

교회 라면, 누구도 교권을 함부러 휘두르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언제나 교권주의자들에 게 힘을 실어 주는 사람들은 외부인들이 아니라 바로 개교회의 맹신도들이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신자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 안에서 깨어 있어야만 비로소 교권주의를 막을 수 있습니다.

성경을 깊이 모르는 목회자는 평생 외식을 할 수밖에 없고, 성경을 제대로 모르는 신 도들은 평생 맹신을 벗어나기 힘듭니다. 따라서 우리가 늘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그 가르치심을 성실하게 실천하는 신자들이 되어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그 말씀 한 구절 때문에 고민하기도 하고, 때로는 가슴을 치고, 때로는 고난도 불사하고, 그러나 결국은 그 말씀의 능력과 위로 가운데 하늘의 소망과 기쁨을 이웃에 전하는 참된 제자의 길을 겸허히 걸어가야 합니다.

거짓된 선지자들은 백성들이 영육으로 죽어 가도 언제나 평안하다고 외칩니다. 그러나 정말 지금 한국교회가 평안한지요. 과연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이 정의롭고 순결하며, 또한 교회들이 그리스도의 향기를 어려운 이웃들과 잘 나누고 있습니까. 아니면, 일부 목사님들과 신도들이 잘 먹고 잘사니 평안하다는 뜻입니까.

한국교회가 진정으로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고 다시는 저속한 교권에 흔들리지 않는 건 강한 모습을 보여 주려면, 일찍이 하나님께서 호세아 선지자를 통하여 보여 주신 애타 는 마음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호 4:6)!"

2010 년 5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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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이 땅의 마지막 선지자 백성의 눈물에 책임을 져야

마다 봄이 되면 우리나라 방방곡곡에 많이 피는 꽃들 중에 하나가 개나리인데, 이 꽃은 바위 사이나 길거리 아무곳에나 틈만 좀 있으면 여기저기 흔하게 피기 때문에

'나리' 꽃에 흔하고 천박하다는 의미에서 '개' 자가 붙여진 것이라 합니다. 또는 나리보 다 작고 좋지 않은 꽃이라고 해서 개나리라고 부른다는 설도 있습니다. 아마 개살구에 붙여진 '개'자도 비슷한 의미일 것입니다.

그런데 일제 시대에는 개나리꽃이 일본인 순사를 뜻하는 은어로 쓰인 적이 있다고 합 니다. 일본 관리들과 그들의 개 노릇하는 친일 인사들을 뒤에서는 '개(犬)'라고 불렀 고, 앞에서는 할 수 없이 존칭으로 '나리'라고 불렀는데 그 두 단어를 합치면 '개나리 '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한번은 월남 이상재 선생께서 YMCA 강연을 할 때 자신을 감시하기 위한 일본 사복 형 사들이 청중 속에 여기저기 섞여 있는 것을 아시고, 먼 산을 바라보시면서 "허! 개나 리가 만발하였구나!"라고 말씀하시어 청중들의 폭소가 크게 터져 나왔다는 일화는 이 미 잘 알려진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백성의 눈물과 양극화

지만 과연 이 친일 인사들만 개나리들이었을까요. 가깝게는 조선 왕조 시대에도 백성들의 피와 눈물을 짜던 탐관오리들과 간신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일일이 셀 수

없을 정도입니다. 자신들은 처첩에다가 관기까지 거느리고, 사치와 향락으로 살면서 굶주린 백성들을 안중에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많은 가난한 백성들은 삶과 굶주림에 지쳐 어쩔 수 없이 노비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조선시대 노비의 수는 적어도 전체 인구의 삼분의 일, 많게는 절반을 넘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부모 중에 한 명만 노비가 되어도 사실상 나머지 가족 전원이 노비가 된 것 과 다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도처에서 크고 작은 민란이 계속 일어난 이유가 충분히 설명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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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충무공이 남해에서 분전하고 있을 때도, 선조 임금과 그 주변의 개나리들은 무 슨 짓을 했었던가요. 백의종군시킨 것은 그나마 약과이고 나중에는 시기하여 죽이려고 까지 하였습니다. 나라가 풍전등화인 상태에서도 자신들의 이익과 욕심을 위해서는 어 떤 짓도 할 수 있다는 것이 이 개나리들의 본성임을 잘 보여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구한말에 나라가 괜히 망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런데 과거에만 개나리가 설쳤다고 할 수 있을까요.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못한 것이 오늘 우리 사회의 아픈 현실입니다. 국민의 지탄을 단골로 받는 정치권을 선두로 해서, 경제계, 교육계, 법조계, 언론계, 문화계, 그리고 종교계까지 사회 구석구석에서 개나 리들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이들은 조선 시대와 일제 시대를 넘어서 혈연, 지연 그리 고 학연을 이어 가며 약하고 힘없는 백성들을 계속 울리고 있습니다.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도자들의 무관심과 무자비 속에서 지구촌 이는11 억비단명의한국만의 사람들이 하루에 불과 1 달러 이하의 생활비로 비참하게 살아가고, 매일 2 만 5,000 명의 사람들이 더러운 식수로 인해 발생되는 질병으로 죽어 가고 있습니다. 세계 인구의 1/3 에 해당하는 20 억 정도는 날마다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살고 있으며, 특히 아프리카 인구 과반수가 하루에 겨우 한 끼를 먹는 절대 빈곤 속에서 굶주린 배를 채 우지 못한 채 밤에 잠자리로 들고 있다고 합니다.

지난 2000 년 헬싱키에 있는 유엔 대학교 부설 세계개발경제연구소가 발표한 한 연구 보고서에 의하면 놀랍게도 전 세계 성인들 중 가장 부자인 1%는 무려 전 세계 부의 40 % 나 소유하고 있고, 또한 가장 부유한 10%는 세계 전체 부의 85%를 점하고 있다는 사실 이 드러났습니다.

이를 대충 쉽게 정리하면 빵이 10 개가 있는데 한사람이 9 개를 혼자 먹고, 나머지 한 개를 다른 9 사람이 나누어 먹는 셈이 됩니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한국 사회의 분배 구조 역시 이런 통계 수치에서 별로 큰 차이가 없다고 합니다. 과연 현실이 이런 지경 인데도 양극화 문제를 그저 일부의 문제라고 경시하거나, 극단적인 예만 들었다고 회 피해도 될런지요.

이 순간에도 부유한 이들은 너무 먹어서 탈인 반면에, 가난한 백성들은 단순히 먹고 사는 문제가 삶의 비극적인 족쇄가 되어 하루 하루를 고통스럽게 살고 있습니다. 지구촌 도처에 영육으로 지쳐 쓰러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단순히 끼니를 잇기 위 해서 매일 목숨을 걸고 거대한 폐선에 올라 해체 작업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게다가 하루 평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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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명이 자살한다는 불행한 '자살 왕국'이 바로 대한민국입니다. 여기에는 정신적인 문제는 물론 경제적인 원인도 매우 크다고 합니다.

그런데 기독교인으로서 이런 '극단적 불균형'을 단순히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문제로만 인식하고 외면한다면, 이는 정직하지 못한 일입니다. 이는 '정의에 관한 문제'이며, 동시에 '신앙적인 문제'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하나님께서는 어려운 고 아와 과부를 돌보는 것이 십일조 목적의 하나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즉 교회는 가난 한 이들의 '영적 문제'뿐만이 아니라, '육적인 문제'에도 책임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반적으로 한국의 보수 교단들은 영적 구원의 우선적 책무를 핑계로 하여, 사회 정의 와 경제 정의를 소홀히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아울러 한국교회는 상대적 소수에게

과도하게 편중된 경제적 불평등에 대해 사실상 매우 관대한 태도를 보이며 침묵하고 있습니다. 또한 교회 예산의 극히 일부분만을 구제비에 배정하고, 그저 큰 건물을 지어 몸집 부풀리기에만 몰두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십일조 명목으로 걷은 헌금조차도 대부분 구제비가 아닌 다른 곳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보면, 말라기서에 언급된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자들은 바로 교회들 자신일런지도 모르겠습니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십일조 '강요'를 절대 반 대하고 있는 입장이지만, 만일 교회들이 십일조 전부를 온전히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 에 전심으로 사용한다면 누가 자발적인 십일조를 반대할까요.

교회가 가난한 사람들과 억압 받는 백성의 눈물을 닦아 주어야 하는 이유는 세상의 칭 찬을 받기 위함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즘 소위 귀족 목사님들의 행태를 한번 보십시요. 이 나라에는 웬 '억'소리 나는 부자 목 회자들이 이리도 많습니까. 제대로 양심적인 목사라면 어찌 이런 비상한 시대에 고급 차나 고가의 주택으로 사치를 부리며 부자로 살 수가 있습니까. 주변에 나눠 주고 도와 주어야 할 사람들이 그리도 없다는 말인가요.

이 분들은 예수님께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고 하셨건만, 엉뚱하게도 자신들이 무 슨 대단한 제사장이라도 되는 듯 권위적인 가운을 걸치고 외식하며 돈이나 챙기는 '졸 부'들로 변절된 듯합니다.

거짓된 목사들은 입술로는 영적인 것을 말하며 육적인 복을 추구하고, 잘못된 교회는 영적인 책임을 핑계로 가난한 이들에 대한 육적인 책임을 회피합니다. 이는 교회의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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른 모습이 아닐 것입니다. 물론 교회가 영적 책무를 뒤로 미루고 직접 최일선에 나서 서 구제 전문 기관처럼 행동할 필요까지는 없겠지만, 원칙적으로 교회는 '영육으로' 백성을 돌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당연한 사랑의 실천이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지나친 부'와 마찬가지로 '지나친 빈곤' 역시 사단이 악용할 수 있는 좋은 무 기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빈부 차이나 양극화를 언급하면, 무조건 '좌 파 척결' 운운하며 몰아붙이시는 황당하고 무지하신 나리들이 적지 않은데 이는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요즘 시대에 이미 역사적으로 실패하고 망해 버린 공산주의를 마 음으로 따르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지금은 오히려 소수의 거대 자본 세력들이 추구하는 끝없는 탐욕이 더 문제가 아닌지요.

이 글의 의도는 계층 사이에 편을 가르고 가난을 미화한다거나 부를 미워하자는 것이 아니라, 왜곡되고 잘못된 현실을 바로 보고 공의를 함께 세우자는 것에 있습니다. 오 늘날 부의 분배가 적절한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양극화가 이토록 심화된 책임은 가난 한 이들에게도 일부 있겠지만, 보다 큰 구조적 원인은 일부 부자들의 과도한 욕심과 뇌물을 먹고 이들의 로비에 동조하는 부패한 정치인들과 관료들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백성과 고난을 함께해야

도가 무려 400 년 동안의 긴 영국 식민 통치를 당하고 독립을 했지만, 극심한 혼란과 분열을 겪고 있었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간디는 길거리에서 울고 있는 한 노파를

보고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 주면서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울먹이면서 말했습니다. " 이 땅에 눈물을 닦아 줄 사람들이 너무 많아 내 작은 손수건으로는 도저히 안 되겠습 니다." 간디의 이 한마디가 인도인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고, 그들의 자주 의지를 일깨 우는 힘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전에 어떤 분이 세례 요한 말고, 다른 세 명의 '요한'을 소개해 주신 것이 생 각납니다. 너무 절제된 생활을 하다가 위를 버렸다던 요한 크리소스톰, 그토록 많은 부흥 집회를 인도하고도 별세할 당시 거의 재산이 없었다는 요한 웨슬리,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결코 한 그릇 이상의 음식을 먹지 않았다는 요한 스토트, 이런 분들이야말로 백성과 함께 고난을 나누시는 분들이 아니겠습니까.

과거 우리에게도 훌륭한 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평양 산정현교회의 정일선 목사님, 남산현교회 송정훈 목사님, 김철훈 목사님 등은 "어떻게 목사가 자기만 살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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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버리고 남으로 탈출할 수 있겠느냐"라고 하면서 탈출을 거부하다 끝내 북한에서 순교당하셨습니다. 조만식 장로님 역시 "이 가엾은 백성을 남겨두고 나만 살겠다고 월남할 수는 없다. 나는 살아도 북한 동포들과 같이 살고 죽어도 북한 동포들과 같이 죽을 것이다"라고 하시면서 월남 권유를 거절하고 결국은 그땅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러일 전쟁 당시 비록 일본이 겨우 이기기는 하였지만, 너무나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해 서 일본 내의 분위기가 매우 험악했다고 합니다. 1905 년 마침내 총사령관이었던 노기 마레스케가 함대를 이끌고 시모노세키항으로 들어올 때, 수많은 전사자 어머니들이 노 기에게 피눈물로 항의하기 위해 부두로 몰려갔습니다. 그런데 이 어머니들은 전사한 아들 셋의 유골을 품에 안고 내리는 노기 사령관의 모습을 보고는 그만 모두가 함께 대성통곡했다고 합니다.

반면에 소위 우리 사회의 지도자들은 어떻습니까. 전시도 아닌데 병역을 기피하려고 갖은 비열한 편법을 다 동원하고 온갖 개인기를 다 부려서, 어찌 된 노릇인지 지도층 나리들과 그 자식들은 정상적으로 병역을 마친 사람들을 보기 드물 정도입니다. 지도자들부터 모범을 보이고 솔선수범을 해야 되는데 한때는 대통령, 국무총리, 국정원장, 비서실장, 집권당 원내 대표, 정책위 의장, 청와대 특별 보좌관, 장관, 재벌 등 고위층이 줄줄이 병역 미필자들인 나라가 바로 슬픈 대한민국입니다.

그러니 이들에게서 얼마나 대단한 애국심과 정의와 화합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이번 천안함 사건에서도 볼 수 있듯이, 공직자들이 수시로 말을 바꾸며 서류 조작이나 허위 보고를 서슴지 않고 저지르는 일이 결코 우연히 일어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군함이 침몰한 것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장로 출신 대통령을 수반으로 하는 정부 나리들에 대 한 신뢰가 침몰하고 국가 도덕이 무너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교회는 이땅의 마지막 선지자

스라엘 왕국은 하나님의 경고를 듣지 않고 끝까지 거역하다가 기원전 6 세기에 바벨 론에 의해 멸망하고, 왕과 지도자들은 개처럼 눈이 뽑히고 죽임을 당하고, 또 포로로

잡혀가서 비참한 종살이를 하게 됐습니다. 이후 70 여 년의 끔찍한 포로 생활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오지만, 그들이 다시 본 나라는 이전의 자신들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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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강대국에 빌붇은 자들이 권력을 잡고, 민족의 신앙과 문화는 헌신처럼 버려질 위 기에 처해져 있었습니다. 마치 일제 식민 통치 이래로 기득권을 지닌 친일 개나리들이 계속 득세하여 온 우리 역사와 기가 막힌 닮은 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 나타난 선지자 이사야는 "내 백성을 위로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외칩니다. 이 제 상한 심령을 다시 싸매고, 낮은 곳부터 보살펴야 했습니다. 새로운 삶과 역사를 세 우는 일은 백성들을 '위로'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했습니다. 백성들의 속을 뒤집 어 놓고 이룰 수 있는 위업이란 절대로 있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간디의 말을 하나 더 인용하고자 합니다. 영국이 항복하고 인도를 떠날 때입니다. 간 디는 철수하는 영국인들에게 말했습니다. "당신들이 만든 예수는 가져가고, 성경 속에 있는 예수는 두고 가시오. 내가 볼 때 당신들이 떠드는 예수는 당신들이 만든 예수지, 성경 속의 예수가 아니요. 성경 속에 있는 예수는 두고 가시오."

이는 지금 한국교회에도 해당되는 말이 아닐까요. 예수를 버리고, 백성과 소통하지 않 는 한국교회는 회개해야 합니다. 이리들에게 찟기고 삶에 지쳐 우는 저 양들이 보이지 않는지요. 자칭 교회의 지도자들이라면서 인생의 곤고한 자리에서 울고 있는 백성의 눈물을 닦아 주기는커녕, 오히려 자신들의 기득권을 악용하며 마치 식민지 지배자들처 럼 백성을 착취하는 개나리들과 야합하고 신도들 위에 군림한다면 너무 부끄럽지 않습 니까.

회가 전심으로 추구해야 할 일은 큰 건물을 짓고 사람을 모아 주머니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허욕을 버리고 헌금 궤를 열어 백성의 고난에 몸과 마음으로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저 어떻게 하든 교회를 키워 부흥을 시키겠다고 헛된 욕심 부리기 전에, 먼저 마음을 비우고 이웃의 아픔을 돌보는 참된 위로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사님들께서는 시키지도 않은 큰 목회를 하려고 헛되이 애쓰지 마시고, 먼 저 백성을 사랑하는 작은 위로자가 되어 주시기 바라는 것입니다. 이런 자세야말로 자 신을 비워 종의 형체까지 낮아지셨던 그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다운 모습이 아닐까요.

근래에 와서 한국의 가톨릭은 크게 성장한 반면에, 개신교는 증가세가 멈추었다는 말 을 많이 듣습니다. 그런데 이는 개혁 교회 스스로가 자초한 당연한 결과입니다. 교회 들이 성장과 부흥에만 몰두하여 분주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은 자신들의 금고에 채우고, 외형을 키우는 일에만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예배, 선교, 집회, 교육, 심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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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제도 모두 본래의 목적을 잃은 채 그저 몸집을 키우기 위한 치졸한 수단으로 전락해 버린 듯합니다. 가진 사람이라면, 주일마다 돈 타령 아니면 복 타령이나 하며 진리를 기만하는 상식을 교회에 누가 출석을 하고 싶겠습니까. 더구나 자신들의 땀이 어린 소중한 헌금이 가난 한 이웃들이나 선교지 원주민들에게 제대로 가지 못하고, 귀족 목사님들의 주머니나 채우거나 아니면 '성전'이라는 우상적 이름을 지닌 콘크리트 덩어리로 변한다면 헌금 할 맛이 나겠습니까. 백성들은 진리에 목이 말라 굶주리고 있건만, 귀족 목사님들은 그저 돈과 명예로 배를 채우기에 바쁘시니 교회가 소화 불량을 넘어 그만 급체에 걸린 것입니다.

교회가 마땅히 가야 할 길은 재벌 기업처럼 돈을 부지런히 긁어 모아 세력을 키우고 교회마다 담임목사가 중세 교황이 되어 종교 왕국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테레 사 수녀처럼 돈을 있는 대로 흩어 구제하고 두 손이 부르트도록 마음을 쏟아 이웃과 사랑을 나누는 일입니다. 어느 교회이든 오늘부터라도 한번 이를 전심으로 실천해 보 십시요. 누가 억지로 교회 문을 막더라도 저절로 성장할 것입니다.

최근 한국 가톨릭의 급성장 역시 절대 우연이 아닙니다. 그 성장의 이면에는 공의를 위해 앞장서시는 사제들의 용기와 정의감이 있었고, 사회의 그늘진 곳에 소외된 이웃들을 돌보시는 수녀님들의 희생과 헌신과 기도가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돈과 명예욕으로 깊히 썩지 않은 지도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를 지지하는 수많은 가톨릭 신도들의 적극적인 참여도 빼 놓을 수 없는 요인일 것입니다.

예수님이 언제 부자 청년에게 "네 돈을 잘 챙겨 들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는지요. 그 런데 귀족 목사님들은 늘 돈과 세속적인 명예를 실속 있게 잘 챙기십니다. 과연 이 나 리님들에게서 십자가의 길과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순례자적 모습이 조금이라도 보이십니까. 이러니 한국교회는 돈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돈의 흐름이 왜곡되어 넘치고 고이다가 썩어 병이 난 것이 아닌지요.

내 백성을 위로하라 아픔을 외면하거나 백성과 소통하지 않는 교회는 병든 교회입니다. 백범 김구 시대의 선생님은 일찍이 "경찰서 열 개를 세우는 것보다 교회 하나를 세우는 것이 사회에 더 유익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요즘 이런 유익한 교회를 보기가 매우 힘들어졌습니 다. 교회가 백성을 섬기려 하지 않고, 목회자들이 사이비 교주처럼 군림하려 들기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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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입니다. 이러니 오히려 어디 가서 저런 말을 하면 돌팔매를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참으로 비통한 현실입니다.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을 외면해서는 결코 안 되고, 신자들은 비록 전부는 아니지만 작 은 것이라도 이웃과 나누는 적극적인 마음으로 살아야 옳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변을 보면 계층 간의 양극화는커녕, 한 집안 형제들 간의 양극화도 극복을 하지 못한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너무 복잡하고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우선 먼저 믿는 신자들이라도 자신의 형제자매들이나 어려운 친척들과 지인들을 전심으로 돕고 나눈다면,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달라질 것입니다. 땅에 계실 때 소외된 인생들의 삶 속에 직접 들어가 눈물을 닦아 주며 함께 예수님은 지내셨습니다. 그들 중에는 가난한 어부들은 물론, 멸시를 받던 세리와 창기도 있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 분께서 몸소 가난한 나병 환자인 나사로의 집에서 유 하시던 그 모습은 언제나 가슴을 뭉쿨하게 합니다.

교회는 이 땅의 마지막 선지자입니다. 그리고 선지자는 백성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 로 가슴이 녹아져야 하며, 그들과 고난을 함께할 때 비로소 참된 위로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행히 모든 교회가 부패하고 변질된 것은 아닙니다. 이 순간에도 적지 않은 교회들이 그루터기처럼 버티며 성결을 지키고, 주님께서 주신 마지막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제자 된 좁은 길을 견실히 걷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 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하나님께서는 이땅 의 백성을 향한 애타는 사랑을 이렇게 보여 주셨습니다. 교회가 백성의 눈물에 더 이 상 침묵하고 방관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모든 인생들은 하나님 앞에서 마치 '젖 먹는 자식'처럼 영과 육으로 거룩 한 사랑과 위로가 필요한 연약한 존재임을 철저히 인정하고, 스스로 겸손하고 낮아져 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우리는 그분께서 오늘도 자신의 교회에게 이렇게 명령하고 계 심을 또한 잊어서도 안 될 것입니다.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사 40:1)!" 2010 년 6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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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의 월권 중앙선을 넘었다 목사의 직무를 제한해야 하는 이유 목사가 '교주'가 되고, 교회는 '목사 왕국'이라는 가슴 아픈 말을 자주 날이듣게갈수록 됩니다. 물론 결코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교회 내에서 담임목사가 반대하는데 이를 거스려 제대로 되는 일이 거의 없고, 반대로 담임목사가 열심으로 추진하는 일이 부결되는 경우도 매우 드믄 것이 냉엄한 현실입니다.

물론 당회니 제직회니 하는 주요 의사 결정 기관들도 맥없이 어용화해 그 본연의 기능 을 망각하고 목사의 시녀처럼 거수기로 전락해서 오히려 목사의 독주와 월권을 돕는 경우도 흔히 있는 일입니다.

여기에는 다른 여러 가지 이유도 있겠지만, 가장 큰 원인은 담임목사에게 집중된 유형, 무형의 과도한 권한이 문제가 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따라서 이처럼 개혁 교회 내에 서 상식을 넘어서는 지나친 '교권력 집중'이 앞으로도 이대로 계속 허용되어야 하는지 큰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중세 교회를 빰치는 일부 목사들

러 교단들 중에서 특히 장로교단의 경우, 이 교권 집중의 문제는 더욱 심각합니다. 초기 개혁자들이 처음 장로 중심의 교회 정치 체제를 세울 때, 가장 경계한 것이

중세 교황 제도와 성직자 제도이었습니다. 이 가톨릭 성직자 제도는 하나님과 신자 사이에 사제가 나서서 중간자 역활을 하는 것으로, 신자들 모두가 다 '왕같은 제사장'이라는 성경과 개혁의 정신에 크게 어긋남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장로제는 근본적으로 모든 신자는 '직분에 관계없이'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며 따라서 신도들 사이, 교회들 사이의 평등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교회 내의 계층적 또는 계급적 구조도 반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어느 특정한 직분자에게 절대적 권위를 두지 않고, 회중이 선출한 장로들이 교회의 치리를 담당하는 제도입니다. 하지만 장로제 자체도 '목사 직분을 매우 중시하는 전통' 때문에 중세적인 계급화로 빠져들 수 있는 위험성을 언제나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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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여기에서 언급하는 '장로'나 '감독'은 사도 시대부터 있던 성경적 근거가 분명한 직분들입니다. 다만 감독 역시 장로이며, 단지 장로의 주요 기능 중의 하나가 감독이 라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하여튼 역사적으로 보면 개신교의 장로제나 회중제가 교 황제나 감독제 이후에 나온 제도임을 알 수 있고, 전자는 후자의 문제점인 교권적, 계 급적 제도에 대한 거부감과 이를 보완하려는 의도에서 채택된 제도임을 추측케 해 줍 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시대착오적인 한국 개신교의 교권주의자들은 중세 주교들처럼 신 도들 위에 군림하며 상전처럼 행세를 하고, 권위주의적인 목회를 고집하려 합니다. 특 히 중대형 교회로 갈수록 그 행태가 더욱 가관입니다.

교권과 기득권의 단맛에 길들여진 이 분들에게서 갈수록 사치, 위선, 오만, 탐욕 등은 쉽게 볼 수 있으나, 겸손과 온유와 절제를 찾아보기란 점점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예수를 따라 십자가의 길을 걷는 제자된 모습은 더더욱 보기 어렵습니다. 이들은 그저 높아지고 대우받고 누리려고만 하지, 스스로 낮아지고 나누고 섬기려 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적지 않은 목사님들의 연속적인 추태로 인하여, 목사의 권위가 진창에 떨어지 고 세인들의 비웃음과 조롱도 이미 차고 넘치도록 받고 있건만,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분수를 모르는 처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터넷을 잠시만 들여다보아도 각 지역 교회의 목사님들이 얼마나 원색적인 비난을 다양하게 받고 있는지 생생히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런데도 스스로 거룩하신 이들 목사님들께서는 백성과의 소통을 거부하고 세인들의 이유 있는 비판마저 못 들은 척 무시하며, 교회라는 거룩한 울타리 속에서 충직한

신도들을 거느리며 이미 넉넉히 챙겨 놓으신 재물과 함께 독야청청 풍족한 삶을 누리고 계십니다. 물론 이 분들의 이런 철면피한 행동들은 지각 있는 신자들의 주름살을 늘리는 데에도 큰 기여를 하고 있습니다. 아마 요즘 세상에 한국교회만큼 어처구니 없게 억지로 웃겨 주는 곳도 아주 드믈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에게 잘 길들여진 많은 신도들은 목사의 독주를 별로 개의치 않고 당연시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도리어 매사에 담임목사님을 찾으며 끌어들입니다. 그래서 교회 내에서 예배, 교육, 선교, 구제, 각종 행사, 사업 계획, 행정, 관리 등 도대체 약방의 감초처럼 목사가 간여하지 않는 일이 거의 없을 정도입니다. 이런 현상 역시 목사직에 더욱 큰 힘을 실어 주게 하고, 동시에 목사가 다른 사심을 가질 수 있는 좋은 여건을 제공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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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 '담임목사제' 폐지도 고려해야

런데 목사가 초인도 아니고 또한 만능 연기자도 아닐진대 어찌 이런 다재다능한 역 활이 가능할까요. 그래서 때로는 점차 능력에 넘치는 무리수를 자주 두게 되고,

그러 다가 자꾸 반발이 생기면 결국 자신에게 맹종하는 사람들만 곁에 두고 교회가 서서히 독재화해 가는 것입니다. 드디어 중앙선을 넘어서는 것이지요. 이때부터 목사는 황색 선을 무시하고 월선하는 매우 위험한 재미에 빠지게 됩니다.

더구나 변변한 제동 장치 하나 제대로 없이 월권하고 독주하는 담임목사를 따라 마냥 달리다 보니, 한국교회는 내실 있게 제대로 되는 일도 별로 없고 반대로 외견상 안 되 는 일도 별로 없는 이상한 교회로 변질하게 된 것입니다. 이를 달리 표현하자면, 그만 십 리도 못 가서 발병이 난 형국입니다. 예로부터 머리가 이상해지면, 발도 고생하는 법입니다. 그리고 이제 발에 병이 생겼으니 더 이상 과거처럼 마구 달리기도 어려워진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런 면에서, 무당 굿하듯 안하무인으로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는 목회는 이제 부끄 러운 일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오히려 모든 신자들이 지체가 되어 각자의 은사와 믿음의 분량대로 사역을 나누고 함께 '동등하게' 동역하는 목회 풍토가 되어야 할 것 입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 내에서 직분 간의 계급이나 우열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입 니다.

라서 말씀을 전하는 목사만 목회자가 아니라, 교회 학교 교사도 목회자이고 구제하고 심방하시는 집사님과 다른 봉사를 하는 여러 신도들도 모두 목회자라는 인식이 필 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앞으로의 목회는 신자들 모두가 '작은

예수'가 되어, 모두가 참여하고 합심하여 동역하는 '공동 목회'를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장기적으로는 현재의 '담임목사직'을 폐지하고, '전임설교자'나 '시무목사' 또 는 '교육목사' 등의 직제로 바꾸는 방안도 시간을 가지고 충분히 연구해 볼 필요가 있 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이 '담임'이라는 용어가 '담임교사'나 '담임교수'처럼 다분히 수직적이며 권위주의적인데다가, 또한 전문적으로 설교하고 가르치는 것이 주요 책무인 목사직이 구태여 교회나 당회를 대표하는 직분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담임목사직의 월권으로 인한 심각한 부작용을 고려해 볼 때, 이를 폐지하거나 대체하 는 것은 교회를 무너뜨리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를 세우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 다. 이는 구더기가 더럽다고 장독을 깨는 일이 결코 아닙니다. 설교나 교육이 주업무 인 목사직이 구태여 교회의 수장이 되거나, '담임'이라는 명판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 문입니다. 우선 교회에 왜 이 '담임'이라는 역활이 필요한지도 큰 의문이 가지만, 설 사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이는 도리어 시무장로들에게 적합한 직책이 될 것이라고 봅니 다.

필자의 부족한 소견을 감히 추가하자면, 특히 교회 공금 횡령, 치부, 간통, 세습, 교권 남용 등 그 도덕적 결함으로 인하여, 언론에 자주 오르내리며 '종교 귀족'이라고 국민의 지탄을 받는 일부 대형 교회들의 담임목사직부터 시범적으로 폐지하면 더욱 바람직할 것입니다.

설교권은 큰 권력

기서 '설교권'에 대해 또한 언급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좋은 설교는 축복이며 보약이 되지만, 나쁜 설교는 저주이며 동시에 독약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유로 가장 우려스러운 문제 중의 하나는 매주일 강단에서 일방적으로 발언할 수 있는 설교권을 가진 담임목사가 신도들을 맹신화하며 독주하려고 할 때 발생합니다.

1960 년대 한창 학생 운동이 미국 대학가를 휩쓸고 있을 때였습니다. 하버드 법대의 한 학생이 졸업식에서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혼란의 도가니에 빠져 있습니다. 대학가는 반란과 난동을 부리는 학생들로 가득 차 있으며, 공산주의자 들은 이 나라를 파괴하기 위해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위험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내부의 적과 외부의 적이 들끓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 법과 질서'가 필요합니다. 법과 질서가 없다면 이 나라는 생존할 수 없습니다."

우뢰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고 그것은 한참이나 그칠 줄 몰랐습니다. 마침 시국이 어수선하던 차에 하버드 법대 졸업생의 소신에 찬 뜨거운 졸업사라는 반응이었습니다. 그런데 박수가 가라앉을 무렵, 이 학생은 조용한 어조로 다시 말을 이어 나갔습니다. "방금 한 말은 1932 년 아돌프 히틀러가 한 연설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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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권이 악용될 때의 상황은 마치 과거에 독일 국민들이 무더기로 독재자 히틀러의 화려하고 달콤한 말에 세뇌당하고 기만당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는 또한 오 늘날의 간교한 정치 독재자들이 흔히 쓰는 수법이기도 합니다.

비록 이미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지만, 작금의 한국 사회와 결코 무관하지 않은 절실한 내용이며, 동시에 '일 방적인 발언권'이 얼마나 크고 위험한 권력인지를 잘 보여 주는 일화이기에 여기에서 다시 인용하였습니다.

많은 독재자들은 히틀러처럼 자신의 욕망과 치부를 가리기 위해 '법과 질서'를 강조하 며 경찰력으로 반발하는 국민을 누르고, 뒤에서는 스스로 초법적인 부정을 은밀히 자 행합니다. 자신들은 정작 더욱 중요한 '법의 정신'을 지키지 않으면서, 상대방에게만 문자적 '법규'를 강요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이들은 한국의 교권주 의자들과 매우 닮은꼴입니다.

패한 목사들도 마찬가지로 설교시 교묘한 말로써 신도들을 오도하거나 미혹하고 협 박하여 순종을 요구하며, 스스로는 비성경적인 악행을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일방적인 말의 힘이 주는 부작용을 우리는 이미 세속 언론에서조차 너무 많이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위험하고 큰 권력도 부족해서 추가로 교회의 입법권, 사법권 그리고 행 정권까지 담임목사의 영향력 아래에 둔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요. 목사라는 직함으로 위장한 종교업자들이 교권을 흔들며 교회를 사유화할 수 있게 된 이면에는 이런 제도적 결함도 매우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절대 권력은 절대로 부패하게 되어 있다'는 말이 거룩한 교회에서만은 예외가 될 것 이라고 믿는다면 이는 매우 순진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교회 역시 어쩔 수 없는 '죄 인들의 모임'이기 때문입니다. 목사들 뿐만이 아니라 교수나 기업인 또는 정치인 등 하여튼 모든 허탄한 인생들은 체질상 틈만 나면 끝없이 권력을 탐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권력 추구 습성은 역사가 가르쳐 준 진실이며, 부패한 인간의 죄성에 기인합니다. 오죽해야 '권력은 부자 간에도 서로 나눌 수 없다'라는 말이 나오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언제든지 이 점을 경계하고 교권력을 분산시키고 견제하고 관리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교회가 직임자들의 권한과 직무와 임기를 명확히 분배하고 제 한해야 하는 절박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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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치는 직분'으로 전문화해야 극심한 부패는 우선적으로 현행 목사 제도의 약점에 큰 책임이 있다고 한국교회의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제는 시계추처럼 분주하고, 만능 탤런트처럼 잘나야 하는 기존 목사의 역활을 깊히 생각해 보고 본연의 자리로 돌려 놓아야 할 때라고 생각 합니다. 아울러 저급한 권위주의적 목회도 제거해야 합니다. 목사가 교회를 섬겨야지, 교회가 목사를 섬겨서야 되겠습니까.

또한 목사는 물론 장로나 감독 그 누구라도 교회 내에서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독선 적인 태도도 반드시 버려야 할 것입니다. 초기 교회에는 베드로나 바울은 물론 마지막 으로 의지했던 지도자 사도 요한마저 죽고 없었지만, 여러 신도들이 합심하여 무려 3 세기에 걸친 10 여 차례의 혹독한 박해를 받고도 믿음의 순결을 잘 지켰던 것을 우리는 언제나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 각 교단의 노회나 연회, 그리고 총회에서 소란을 피우는 정치 목사님들은 깊은 자성이 필요합니다. 목사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가르치는 것이지, 다스리고 정치 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몰려다니며 패싸움이나 하는 것일까요. 더구나 왜 자신이 아니면 절대 안 되는 것처럼 교만을 떠시는지요. 정말 자세한 설명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목사만이 성직자라거나, 목사직만이 다른 직분에 비해 특별히 높은 자리는 절대 아닙니다. 목사직도 당연히 권사직이나 집사직처럼 그저 교회의 여러 소중한 직분들 중에 하나일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직면한 문제가 매우 복잡해 보이 지만, 사실 그 해법과 진실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이제 자신의 직분이 아닌 '다스리는 위치'에서 내려와 성경의 원리에 걸맞 목사님들은 는 설교자의 위치로, 전도자의 위치로, 교사의 위치로, 그리고 '가르치는 장로의 위치 '로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물론 다른 직분들이 해야 할 여러 직무들과 함께 당회장직 도 내려놓아야 합니다. 회중을 다스리고 관리하고 봉사하는 일은 시무장로들과 제직들의 책무이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이렇게 못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칼뱅은 일찍이 "교회의 행정 체계나 제도가 영원히 우리의 양심을 묶어 둘 필요가 없다"라고 말한 바가 있습니다. 과연 무슨 근거 로 목사가 삼권을 흔들며 교회 위에 군림하는 것인가요. 교회가 목사의 개인 기업입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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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 그리고 교회 개혁이 자꾸 겉도는 진짜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목사 자신들이 사 욕을 못 이겨 개혁을 거부하고 이권을 챙기며, 맹신도들이 이를 추종하기 때문이 아닌 지요.

앞으로 목사직은 본분을 벗어나 월권하며 교회 정치나 행정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당회 의 관리를 받게 하고, 주로 설교하고 전도하고 가르치는 고유의 직분으로 전문화해야 합니다. 그래서 교권주의자들이 월권하고 독주할 수 있는 악순환의 고리를 단호하게 끊어 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출발점이 바로 목사의 방만한 직무와 권한을 철저하게 제한하고 명확히 규정하는 일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으로 봅니다.

'목사직 전문화'는 모두에게 유익한 길 목사님들의 책임만 지적하자고 이 글을 쓰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측면에서 보 그런데 면, 교회의 잘못이 더 크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회나 제직들이 목사가 온전히 말씀을 연구하고, 설교를 준비하고, 교육에 집중할 수 있도록 충분히 배려해 주지 못 했기 때문입니다.

온갖 교회 일에 목사를 찾고 개입시키니 무슨 여유가 있어 전문화가 가능하겠습니까. 몸이 두 개라도 감당하기 힘들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보더라도 '목사직의 전문화'는 교회의 유익은 물론이고 목사님들 자신의 은사를 극대화하고, 또한 깊이 있고 효과적 인 목회를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고 믿습니다.

아울러 이는 사도들이 전도와 교육에 전념하기 위하여 구제와 관리 및 행정을 집사들 에게 맡겼던 것처럼, 초대 교회 정신을 계승하는 것이 되는 동시에 오늘날 한국교회가 심각하게 직면하고 있는 목사직 월권을 해소하는 좋은 대안이 될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동안 민심을 외면하고 소통을 거부하고 있는 한국교회 결론을 교권주의자들은 과도한 교권력을 쥐고 독주하며, 차라리 담임목사직이 없는 것보다도 못한 역기능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었습니다. 만일 이를 시급히 시정하지 않는다면, 앞 으로는 담임목사직이 없는 '가정 교회'나 '평신도 교회'가 일반화할지도 모를 지경입 니다. 이제는 평신도들의 인내도 한계에 이르러 금이 가는 소리가 서서히 들려오기 때 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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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 예배당만 크고 화려하게 지어 놓고, 몰락한 유럽의 교회들이 보여 주는 역사적 교훈을 다시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때입니다. 한국교회도 처음 사랑 을 회복하고 '새로워지지 않는다면', 이 세대가 가기 전에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습 니다. 이미 많은 젊은이들이 실망하고 분노하며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안타까운 현실이 개혁 교회가 지금이라도 교권주의의 오류를 겸허히 인정하고, 바른 목사직의 정립을 위한 노력을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할 이유입니다.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 가겠사오니, 우 리의 날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애 5:21)!"

2010 년 8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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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바치면 복 받는다는 목사님들 세속적 복에 명운을 건 한국교회

든 부패한 종교의 공통적이며 상습적인 거짓말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돈을 바치면 복을 받는다'라는 말입니다. 이는 물론 기독교 역사의 그늘 속에서도 가장 오래된

거 짓말 중의 하나입니다. 심지어 중세 교회 사제들은 여기에 한 술 더 떠서 돈을 바치면, 이미 죽어 연옥에서 고생하고 있는 다른 가족들의 영혼도 즉시 천국으로 직행할 수 있 다고 기만을 하였습니다.

사실 '마음을 다해 자발적으로' 하는 헌금은 매우 소중하며, 건강한 교회 운영을 위해 서 꼭 필요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아울러 적은 사례비에 연연하지 않고, 검소하게 사시며 묵묵히 교회를 섬기시는 존경할 만한 목사님들도 이 나라 구석구석에 결코 적지 않을 것입니다.

반면에 틈만 나면 성경을 왜곡하며 돈을 바치라고 신도들을 압박하는 극히 세속적인 목사님들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제자 된 도리를 망각하고 한 여름 상한 고등어보다도 더 심하게 변질된 이 분들은,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는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속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돈을 거두고 있습니다.

맘몬을 따르는 목사들

런 목사님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재물에 눈이 어두워져 성경을 객관적이며 종합적으 로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울러 자신이 설교하는 내용과 실제 처신이 서로

크게 다릅니다. 예를 들면 많은 목사님들이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는 구절을 자주 인용하며 신도들에게 재물을 하늘에 쌓으라고 헌금을 강조합 니다. 그런데 정작 자신들은 왜 재물을 땅에다 쌓고 있는지요. 전혀 공감이 안 되는 부분입니다.

자신들의 설교가 옳다면, 스스로 과소유한 재물을 털어서 교회에 바치거나 가난한 이 들을 돕거나 하여 하늘에 쌓아야 할 것이 아닌가요. 왜 자신들은 은행이나 부동산에 돈을 쌓아 두고 고가의 주택과 고급차를 즐기며, 교인들의 평균 수준보다 더 사치스럽게 사시는지 속 시원하게 해명을 좀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어느 분의 지적처럼, 입으로 하는 설교와 삶으로 보여 주는 설교가 너무 딴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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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는 "십일조 안 하면 구원 못 받는다"고 거침없이 말하는 인사도 있습니다. 이에 대한 성경적 근거는 아예 논할 가치마저 못 느껴서 생략하고자 합니다. 다만 현재 세계에서 십일조를 실제 제대로 하고 있는 신도는, 가톨릭을 포함하여 아무리 크게 보아도 전체 기독교인의 5%도 안 될 것입니다. 그러니 이는 루터의 종교 개혁 이 후 유일한 '십일조 왕국'인 한국교회와 미국의 극히 일부 교단 교인들에게만 구원이 있다는 매우 사이비한 주장처럼 들리는 것입니다.

아울러 자신의 체험을 소개하며 "제일 복 받는 믿음이 무언지 아는가. 바로 헌금이다. 뭐니 뭐니 해도 헌금이다"라는 말도 하더군요. 성경 어디에 이런 선동적인 내용이 들어 있는지 필자는 도저히 못 찾겠습니다. 게다가 '제일'이라는 단어도 함부로 사용하면 안 되지요. 그런데도 이런 진부한 속수가 복을 좋아하는 순진한 신도들에게는 의외로 잘 통한다는 것이 심각한 문제입니다.

래서 한국교회에서는 반찬 값을 절약하거나 아이들 학원비를 줄여서 어렵게 바친 교 인들의 가슴 어린 헌금이, 거룩한 예배를 통하여 담임목사님 자녀의 해외

유학비나 고 급 승용차 관리비 등으로 새롭게 변화하는 이적도 그리 보기 드문 일이 아닙니다. 어 쨌든 이런 인위적인 헌금 유도를 통하여 신도들이 실제로 복 받을 일은 별로 없겠지만, 대신에 상당수 목사님이 돈 복을 크게 받으시고 지나치게 잘 먹고 잘살게 된 것만은 틀림이 없는 사실로 보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매우 궁금한 점은 그렇게 '헌금을 잘 바쳐서' 제일 좋은 복을 많이 받 으셨다면, 십일조뿐만이 아니라 아예 나머지 재산도 다 바쳐서 그렇게 좋아하시는 복을 몇 배로 더 확실하게 받으실 것이지, 왜 남은 십 분의 구는 자신의 주머니 속에 꼭 쥐고 계시냐 하는 것입니다. 계산이 단순한 필자에게는 그 점이 언제나 큰 의문입니다.

반면에 감리교의 스승 웨슬리 목사님은 수입의 십 분의 구까지도 선교와 구제에 사용 했고, 마지막에는 거의 빈손으로 생을 마치셨다고 합니다. 물론 모든 목사님들이 꼭 그렇게까지 따라 해야 할 필요는 없겠지만, 적어도 요즘 가식적인 귀족 목사님들의 분 수를 모르는 처신과는 하도 수준 차이가 나서 저절로 한숨이 나옵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돈이나 받고 복을 주시는 분이 절 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재물이 너무 부족하셔서 할 수 없이 미천한 인생 들과 돈으로 거래하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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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바쳐야 사업이 잘되고 부자로 만들어 준다는 저속한 사상은 '맘몬의 가르침'입니다. 동시에 그것은 성황당 미신이기도 합니다. 이는 예수를 따라 나누고 돕고 고난 받는 '제자 된 삶'이 아니라, 편함과 안일만을 따르는 '이교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같은 이유로 우리는 타락한 솔로몬 왕이 천명의 처첩들을 거느리고 이방신을 좇으며 호의호식한 것을 복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겸손히 주님을 따르는 삶이 중요합니다. 돈이나 재물 그 자체는 축복의 조건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돈을 많이 바치고도 죽임을 당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 기도 이런 사실을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바리새인들보다 십일조와 기타 율법들을 더 잘 지킨 무리를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복을 받기는 커녕 오히려 큰 화를 입어 멸망하였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는 '독사의 새끼들'이라는 참혹한 오명을 얻었을 뿐입니다.

세속적 복에 명운을 건 한국교회 보수 교단의 대표적 개혁 신학자이신 박윤선 목사님은 '교회는 십 분의 일이라는 한국숫자의 법령적 제재를 받지 않으며, 헌금의 수량 문제는 신자들 개인이 각기 정할 일 이다'라고 하시며, 일찍이 '자발적'인 헌금의 중요성에 대하여 명확하게 지적해 주셨 습니다. 또한 국제신대 이승구 교수님도 '십일조는 교회가 교인들에게 강요하거나 표 준을 세워 지령할 것은 아니다'라고 강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목사들은 교인들에게 '십일조와 연보의 참된 정신'은 제대로 가르 치지 않고, 그저 '복'이라는 사탕으로 유혹하며 돈만 거두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십일조의 정신을 따라 나누고 섬기고 절제하라고 가르치기보다는, 모으고 쌓고 누리고 흥청대는 것이 복인 것처럼 오도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세계 교회사 어디에 헌금 종류가 무려 85 가지나 되는 이상한 교회가 있었던가요.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런 '복' 비즈니스 덕분에 영세한 미자립 교회들은 급격히 위축되 고, 중대형 교회들로 갈수록 돈과 사람이 넘칩니다. 이와 함께 목사들의 교만과 탐욕도 태산을 찌릅니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들이 몸소 져야 할 십자가는 단지 장식으로 만들고, 그저 '사람의 일'로 북적거리며 분주할 뿐입니다.

거룩함과 순수함으로 위장한 대부분의 교회 프로그램들이나 행사들 역시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갈급함은 희미해지고 있습니다. 그저 돈과 사람과 세력을 모으기 위한 삼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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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벤트로 전락하고 있으며, 겉으로 요란한 눈가림만이 난무할 뿐입니다. 아마 지구촌 어디에서도 한국교회보다 더 행사를 좋아하고 여기저기에 떠벌이는 교회를 찾아보기란 그리 쉽지 않습니다.

더구나 이들은 남들만 속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도 스스로 속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내에서 약하고, 실패하고, 가난하고, 낙심하고 그리고 병에 지친 사람들은 점차 구석으로 밀려나 조용히 소외를 당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복을 많이 받았다는 착각 속에서 잘나고, 부유하고, 그리고 힘 있는 사람들이 득세하고 있습니다. 물론 교회의 중요한 직분들도 이들이 대부분 다 차지합니다.

그런 이유로 중대형 교회로 갈수록 가난한 장로들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설사 오늘날 세례 요한이 다시 와서 저들 교회에 출석한다고 해도, 아마 그 허름한 '약대 털' 옷 때문에 평생 서리집사 이상의 직분은 받기 어려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런 교회들은 그 초라한 옷이야말로 세례 요한에게 매우 소중한 큰 복이었음을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

인들은 누구나 복을 좋아합니다. 가난해서 지지리 고생하거나, 몸이 아파서 고통받는 삶은 모두가 싫어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말하는 복이란 일반적으로

물질적이며 현세적인 복을 의미합니다. 물론 여기서 세속적인 복이 무조건 필요가 없다거나 나쁘다고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문제가 되는 것은 복을 추구하는 목적과 우선 순위가 매우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껍데기가 본질을 잃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계실 때 우리에게 분명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것이 복이고, 애통하는 것이 복이고, 온유한 것이 복이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이 복이고, 긍휼히 여기는 것이 복이고, 마음이 청결한 것이 복이고, 화평케 하는 것이 복이고, 그리고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이 복이라고 하셨습니다.

과연 예수를 따른다는 신자들에게 이것보다도 더욱 크고 귀한 '다른 복'이 있다고 생 각하십니까. 여기 어디에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제일 좋은 복'이라는 저속한 논리가 끼어들 틈이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부자 청년에게 네 소유를 다 팔아 가 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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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 한국교회 목사님들은 복채에 눈먼 무당처럼 더 이상 '복'이라는 말을 함부로 남용하지 않으시면 좋겠습니다. 목사님들이 전심으로 전하여야 할 복음은 '돈을 바쳐서, 복을 받아라'가 아니고, '마음을 다해서, 서로 사랑하라'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런 사랑의 길은 결코 푼돈으로 산 복권이 대박 난 것처럼 편리하고 안락한 길이 아니라,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는 결코 걸을 수 없는 '무거운 길'임을 직시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십자가의 길을 따르기로 결심한 우리 신자들은 이미 '신령한 복'을 넘치게 받은 구별된 사람들입니다. 여기에 추가로 무슨 대단한 복이 더 필요해서, 허구한 날 '세속적인 복'을 노래하며 허탄한 일에 인생을 지나치게 소모해야 하는지요. 잘 먹 던지 못 먹던지 또는 잘살든지 못살든지, 그에 관계없이 신자들은 이미 '충분히' 복된 길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헌금은 자발적이어야

떤 경우든 헌금은 반드시 자발적이어야 합니다. 분위기를 조장하여 인위적으로 압박 하거나 강요하는 헌금은 비성경적이며 부끄러운 것입니다. 그리고 돈을 바쳐야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제자 된 삶 그 자체가 바로 복입니다. 이제 옛 사람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기로 작정하였다면, 돈과 허세로 어두워진 세상과는 그래도 무언가 달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회는 사랑으로 모여야지, 돈으로 모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이제 돈이라는 음란한 우상을 내려놓고, '돈이 없어도 다닐 수 있는 교회' 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리고 교회 운영을 위해서는 약간의 헌금 강요가 불가 피하다거나, 또는 교회 재정 현실을 너무 모르는 소리라고 구차한 변명을 하지 마십시오.

만일 헌금 강요나 다른 불의한 수단으로 돈을 걷어야만 운영할 수 있는 교회라면, 오히려 간판을 내리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도 꼭 목회가 소명이라면, 차라리 자비량 사역을 각오하시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또한 주님의 몸 된 교회는 믿음이 크거나 가진 자들만이 나서서 설치는 쇼 무대가 되 기보다는, 믿음이 부족하거나 가난한 형제들도 편안하게 동참하고 나눌 수 있는 '쉴만 한 물가'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지체들이 서로의 부족함을 감싸 주며 아무런 선입관과 차별이 없이, 진리 안에서 참된 자유와 사랑을 마음껏 공유하며 누릴 수 있는 '복된 믿음의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는 용서받아야 하는 죄인들의 모임이지, 의인들만을 모으는 수도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들은 더 이상 거짓된 가르침에 미혹을 당하고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어찌 돈이나 재물이나 세속적인 출세 따위가 감히 우리가 간직한 '하늘의 소망'과 '신령한 복'을

대신할 수 있겠습니까. 어찌 '여호와의 말씀이 아닌 것'을 복이라 하며 삶을 허비할 수 있을까요.

"너희가 말하기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하여도 내가 말한 것이 아닌즉, 어찌 허탄한 묵 시를 보며 거짓된 점괘를 말한 것이 아니냐(겔 13:7)!"

2010 년 8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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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십일조의 비밀 십일조 의무화는 부패한 중세 제도의 토착화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히 10:9)."

즘 한국교회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식들 중에는 상식을 넘어서는 이야기가 너무 많습 니다. 까마귀가 "형님" 하며 달려들 정도로 속이 시꺼먼 인사들이 알량한 가운을

입고 교권력을 휘두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는 교회가 변질되고 있는 주요한 원인 중에 하나입니다.

"돈 때문에 교회가 불편하다" 또는 "교회가 돈밖에 모른다"는 탄식도 어제오늘의 이야 기가 아닙니다. 하지만 많은 목사님들은 "교회 내에 헌금 강요란 없다"고 정색을 하십 니다. 오히려 "신실한 교인들이 스스로 헌금을 잘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교 회 안팎에는 '예배당' 소리만 들어도 진저리를 치는 분들이 수두룩합니다. 거룩한 '성 전' 속에 계신 목사님들만 이런 사실을 모르는 것일까요.

간접적이며 우회적인 헌금 강요 대놓고 노골적으로 강요하는 교회는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문제 사실는 헌금을 여전히 증폭되고 있습니다. 교회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겠지만, 실제로는 간접적이며 우회적인 헌금 강요가 더욱 집요하게 '고도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의 금전적 부패가 매우 치명적인 이유는 '구조적인 헌금 강요'가 은밀하게 뿌 리를 내리고 '토착화'하고 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인위적이며 암묵적인 헌금 강요가 예배 속에 위장하거나, 조직 속에 숨어서 은근하게 작동하고 있습니다.

우선 교회 입구에 늘어놓은 '기명 헌금 봉투'가 그것입니다. 헌금자 이름을 적어서 내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르실까 염려하여 이름을 적는 것은 아닙니다. 이름을 알 리거나 알아주어 헌금을 부추기자는 의도입니다. 극소수의 신자들만이 무기명 헌금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입구(入口)에서부터 구취가 진동하건만 자신만 모르고 있 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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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이유로 주보에 헌금자 명단을 공개하기도 합니다. 이는 다른 나라에서는 보기 힘 든 매우 부끄러운 악습입니다. 연보의 본래 목적이 구제임을 감안할 때,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습니다.

거에는 주일 예배 시간에만 있던 헌금 순서도 부흥회, 구역 예배, 헌신 예배, 그리고 기도회 등 모일 때마다 하는 것으로 점차 확대하고 있습니다. 신도들의 주머니를

마른행주보다 더 쥐어짜고 있습니다. 물론 헌금 때마다 '애절한 헌금 기도'를 통하여 감사와 헌신과 '바침'을 강조합니다. 기도 중에는 특정 헌금자들을 호명하기도 합니다. 매주일 실속 있게 헌금 독려를 하고 있는 셈입니다.

'헌금 채' 역시 신도들의 체면을 자극하는 데에 큰 기여를 하고 있습니다. 은밀히 하는 헌금은 도저히 체질에 안 맞는 모양입니다. 결국 적은 돈이라도 반드시 넣게 만듭니다. 오늘날 예배는 구약의 '제사'가 아니건만, 예배 중에 헌금 채를 돌리는 '바침'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물론 초대 교회 사도들의 '무공해 예배' 중에는 이런 번잡한 순서가 없었습니다.

이 외에도 교회 내에는 은근하게 헌금을 유도하거나 압박하는 유형무형의 그림자들이 존재합니다. 아마 건축 헌금을 '무기명'으로 하자고 제안하면, 목사들은 무슨 명분을 대서라도 반대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기명 헌금을 해야 돈이 더 많이 나오기 때문입 니다. 한국교회는 헌금을 하나님 앞에서 은밀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의식하며' 하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

'기복 설교' 역시 간접적인 헌금 강요입니다. '복 받으려면 돈을 바쳐라'가 그런 설교 의 주요 요지입니다. 목회자가 무당처럼 세속적인 복을 지나치게 추구하며 변질하고 있음을 잘 보여 줍니다. 그러나 그런 심보로 아무리 헌금을 많이 해도, 복과는 전혀 상 관이 없습니다.

중세적 헌금 강요의 토착화 사실 위의 내용들은 서론의 일부에 불과합니다. '십일조 의무화'야말로 한국교 그런데 회 헌금 강요의 본체이며 핵심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십일조가 구약의 율법이 었으며 신약 교회에서 폐지된 제도라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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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교회 내에는 유대인뿐만이 아니라 헬라인이나 기타 이방 민족 출신의 신도들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이들에게 유대인 고유의 율법이었던 '할례'나 '십일조'를 억지로 강요하지 않은 것은 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특히 멀리 고린도, 안디옥, 그리고 에베소 등의 이방 교인들이 '유대 지역의 세금'인 십일조를 추가로 낼 이유는 더더욱 없는 것입니 다.

이 유대의 십일조를 최초로 부활시킨 것은 교권주의에 잠식된 중세 교회였습니다. 그 러나 '중세 십일조' 역시 교회의 타락과 함께 한동안 극성을 부리며 추태를 보이다가, 결국은 종교 개혁의 철퇴를 맞고 다시 사라졌습니다. 그런 이유로 오늘날에는 현대 가톨릭 조차도 십일조를 의무화하고 있지 않습니다.

약 신정 국가의 세금이었던 율법적 십일조를 오늘날에도 강제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신학자들은 별로 없습니다. 일찍이 개혁 신학자인 박윤선 목사님도 '신약 시대에

십일조는 의무가 아니다'라고 분명한 선을 그으셨고, 손봉호 교수님 역시 같은 견해를 밝히셨습니다. 그런데 미국 일부 근본주의 교단과 오순절 계열 교단을 제외한다면, 세계에서 유일하게 한국의 목사들만이 교파를 초월하여 '거국적으로' 단결해 이 십일조를 강조 하고 있습니다.

사실 구약 말라기서에는 십일조를 하면 복을 주시겠다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시기 전까지는, 예수님도 할례와 다른 율법들을 몸소 지키시며 십 일조 역시 바르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를 부분적으로만 해석하여, 지금도 십일조를 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은 명백한 오류입니다. 이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니, 지금도 유대인처럼 '할례'를 해야만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억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 구약 율법의 '의식법'들은 물리적으로 폐지되었습니다. 아니 예수님을 통해 그 율법들이 완성되었다고 표현함이 더 옳을 것입니다. 그래서 신 약 시대 신자들은 더 이상 구약의 제사나 제물이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이 스스로 제 물이 되셔서 제사의 목적을 다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구약의 제사직을 감당한 레위인도, 성전도 더 이상 필요가 없고, '레위인들을 위한 십일조'도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즉 십일조는 예수님에 의하여 이미 2,000 년 전에 시효가 말소된 제도입니다. 역사적으로도 AD 70 년 로마군의 침공으로 예루살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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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이 무너진 후, '성전에서 현물 을 바치던' 율법의 십일조는 유대 신정 국가와 함께 영원히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한국교회 십일조에는 무슨 복잡한 사연이 숨어 있는지, 신학을 제대로 잘 배운 목사들마저도 이 문제로만 넘어오면 그 명석하던 머리가 갑자기 전기 나간 밥통처럼 이상해집니다. 전 세계 기독교인의 불과 5% 미만이 하고 있는 십일조를, 한국 목사들은 무려 95% 이상이 열성적으로 지지한다는 어느 희한한 통계 결과가 이를 잘 증명해 줍니다. 또한 '목사 공화국'인 한국에서 십일조를 반대하는 목회자들이 왜 왕따를 당하는지도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도 거리낌이 있는지, 십일조가 '신자의 강제적인 의무'라고 직설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습니다.

국교회 '헌금 강요'의 비밀은 여기에 있습니다. 대부분의 목사들이 신학적 논쟁을 피하기 위해 우회적으로 돌려서 말을 합니다. 그리고 십일조가 '성숙한 신자'라면

마 땅히 해야 할 의무인 것처럼 분위기를 조장합니다. 이들의 말 돌림은 아주 다양합니다.

"십일조를 하면 복을 받는다"는 주장은 기본이고, "십일조를 하는 신도들은 하나님이 보호하신다", "십일조를 안 하면, 그만큼 하나님이 다시 거두어 가신다", 그리고 가끔 증상이 아주 심하신 분은 "십일조를 안 하면 구원 못 받는다"고 합니다. 또는 "하나님 의 것을 도적질하지 말라"고 겁을 주기도 합니다. 이처럼 한국적 헌금 강요의 특징은 직접적이며 노골적인 강요가 아니라, 은근한 기만 속에서 '간접적이며 우회적인 강요' 입니다. 그럼에도 실상은 매우 치밀하고 조직적입니다.

어떤 분들은 율법의 십일조는 거부하지만, '십일조의 정신'을 따라서 대략 '수입의 십 분의 일' 정도를 헌금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그리 생각하는 것은 아름답지만, 이런 '획일적' 수치화도 교회가 공식적으로 권장해서 는 안 되는 매우 위험한 생각입니다. '바리새인의 유전' 역시 같은 방식으로 형성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율법 시대'인 구약의 신정 국가에서는 싫어도 무조건 십 분의 일을 내야만 했습니다. 십일조의 '조세적 특성' 때문에 개인의 사정과는 관계없이 누구나 '일률적으로' 십분의 일을 바치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복음 시대'인 신약 성경에서는 '각자 마음에 정한 대로 하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더 이상 신정 국가가 아닙니다. 신도들은 이미 정부에 필요한 세금을 충분히 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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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와 연보의 변질

기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은 구약의 십일조는 토지의 소산인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 등 '현물'로 반드시 성전에서 바쳤고, 연보는 '현금'으로 연보 궤에 넣었다는

것입니다. 그 용도와 내용이 서로 분명하게 구분이 있었습니다. 십일조와 연보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연보가 '자발적인 헌금'인 반면에, 십일조는 '강제적 세금'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교권주의자들이 이미 시대적으로 용도가 끝난 '현물 십일조'를 연보처럼 '현금화'하여 강요하는 것은 큰 오류입니다.

본래 한글 성경에 '헌금'이라는 용어는 단 두 번 나옵니다. 하지만 그 과부의 헌금도 '연보 궤'에 넣었으니, 결국은 연보라고 보아도 무리가 없습니다. 반면에 '연보'라는 용어는 14 번이나 나옵니다. 원어에는 몇 가지 다른 표현으로 표기되었지만, 우리가 연 보를 바르게 이해하는 데에 별 어려움을 주지는 않습니다. 아마 '모금(collection)'이 라는 뜻이 가장 적합할 것입니다.

요한 사실은 사도들이 주도한 초대 교회에 모일 때마다 '하나님께 돈이나 재물을 바 치는 행위'는 전혀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단지 '가난한 다른 교인들의 구제를

위한 연보'만이 있었을 뿐입니다. 그것도 처음에는 '비정기적인 모금'이었습니다. 즉 본래 연보는 제물처럼 직접적으로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과 나누기 위한 모금 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웃과 나누는 것을 예수님께 행한 것으로 간주하 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연보'가 언제부터인지, '바친다'는 의미가 강한 '헌금'이란 용어로 슬쩍 바뀌 었습니다. 연보의 참된 의미를 약화시키는 행위입니다. 이는 마치 오늘날 '예배당'이란 명칭이 슬그머니 '성전'으로 둔갑한 것이 연상됩니다. '성전'이라는 기만적 용어를 통하여 이미 건축 헌금 모금에 큰 재미를 보신 거룩한 목사님들께서는, 돈을 더 거두기 위해 '모금'보다는 '바침'을 강조하고 싶은 모양입니다. 이런 면에서 어느 분의 지적처럼, '헌금을 바친다'는 표현보다는 '연보를 한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변질의 명수입니다. 연보는 헌금으로, 연보 궤는 헌금 채로, 예배당은 성 전으로, 목사는 제사장으로, 주의 종은 교회의 왕으로, 그리고 '중세적 십일조'를 복 제하여 '한국적 십일조'로 변질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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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본래 레위인들과 가난한 이들을 위해 제정된, 십일조나 연보가 한국에서는 도리어 가난한 교인들을 억압하고 있습니다. 거꾸로 십일조나 연보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가난한 신도들에게도

'무차별적으로'

헌금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방앗간에만

마음을

교권주의자들이 하는 일이란 늘 이런 식입니다.

사도들의 가르침

국교회는 더 이상 말을 돌리며 신자들을 기만해서는 안 됩니다. 십일조이든 다른 어떤 헌금이든, '헌금 강요'는 성경적 가르침이 절대 아닙니다. 오히려 '종교적

범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어떤 이유로든 신도들에게 헌금을 '수치화하여'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수입의 십 분의 일을 무조건 강요하는 것은 사도들이 전하지 않은 '다른 복음'입니다.

만일 아직도 '한국의 십일조'가 성경 원리에 근거한 '바른 복음'을 따르는 것이라고 확신한다면, 우회적으로 변죽을 울리며 말을 돌리지 말고, 차라리 '십일조는 모든 신 자의 의무'라고 공개적으로 선언을 하십시오. 하면 좋고 안 해도 그만인 그런 십일조란 없습니다. 따라서 어설픈 말로 신도들을 속이지 말고, 분명한 나팔을 불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모든 신도들에게 '세금처럼' 철저하게 강요하십시오. 새 신자들에게도 처음부터 솔직하게 알려 주십시오. 믿음이 연약한 신도들도 고집스럽게 설득하십시오. 또한 가난한 이들에게도 지금처럼 세속적인 복으로 유혹하며 계속 강요하십시오. 그리고 그동안 해 온 것처럼, 십일조를 열심히 했는데도 망하고, 병들고, 실패한 신도들의 실상은 깊숙이 숨기십시오. 반대로 부자 되고 성공한 신도들의 간증만을 잘 추려서 널리 떠벌이십시오.

하지만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십일조가 얼마나 심각하게 기복적으로, 미신적으로, 그리 고 교권적으로 악용되고 있는지를 결코 잊지 마십시오. 중세 교회도 그 길을 가다가 몰락했습니다. 십일조가 아무리 교회의 살림에 긍정적 역할을 하더라도 성경적으로 정 당치 못하다면, 점차 우리의 신앙을 해치고 결국은 교회 자체를 허물게 될 것입니다. 아니 한국교회는 이미 속에서부터 무너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라는 거룩한 울타리 속에서 양들은 오늘도 울고 있습니다. 목동들의 털깎 기에 추워서 떨며 웁니다. 이리들에게 찢기고 아파서 웁니다. 상처 입은 형제들을 보 며 분통해서 웁니다. 배가 고파 울고 삶에 지쳐 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의에 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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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목말라서 웁니다. 언제부터인지 착한 목동들은 구석으로 밀려나고, 배부른 목동들 만이 웃고 있습니다.

오늘날 주님의 교회가 '강도의 굴혈'이 되어 버렸습니다. 의와 인과 신은 사라지고, 돈과 세력과 교권이 판을 칩니다. 스스로 '종'이라던 목동들이 목자를 배신하고 양들을 약탈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양들만 우는 것이 아닙니다. 목자이신 예수님도 함께 우십니다. 돌 위에 돌 하나 남기지 않고 멸망한 예루살렘보다도 더 큰 죄악을 우리가 쌓고 있기 때문입니다.

론을 말씀드립니다. 십일조 개혁은 목사님들께만 미룰 수가 없습니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격이 됩니다. 그래서 신자들이 나서야 합니다. 목사들은 '의무적

십일 조'가 필요한지 몰라도, 신도들은 결코 아닙니다. 정 하고 싶으면, 면세 혜택을 듬뿍 받고 계신 귀족 목사님들만 하면 됩니다. 신자들까지 무속적인 장단에 맞춰 기복과 권력 탐구에 동참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한국의 교권주의자들은 사도들과 개혁자들에 의해 고사된 십일조를 부활시켜 부와 권 력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쌓인 부정한 돈은 다시 교회 대형화, 목사의 귀족화, 그리고 신도들의 맹신화를 촉진하며 교회를 변질시키는 밑거름이 되고 있습니다. 이는 백성들에게 율법의 무거운 짐을 강요하다 멸망한 '바리새인의 길'을 따르는 것입니다.

반면에 자발적으로 하는 연보는 소중한 것입니다. 많이 할 수 있다면 더욱 좋은 일입 니다. 이웃을 위하여 즐겨 내는 자를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십니다. 이것이 '사도들이 전하여 준' 바른 가르침입니다. 아울러 이 나라 도처에서 적지 않은 목사님들이 이를 손수 실천하고 계신 것은 크게 감사한 일입니다.

한국교회는 중세 교회를 세습하는 십일조를 공식적으로 폐지하고, 사도들의 전통을 따 라 '마음에 정한 대로' 하는 자발적인 연보를 힘써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진 지한 노력은 앞으로 개혁 교회들이 크기에 관계없이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고 '착한 일 '을 넘치게 하는 좋은 시작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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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를 동역자로 세우는 교회 '직분'이 우상화되면 '계급'이 된다

러 교회 주보나 홈페이지에서 '평신도를 동역자로 세우는 교회'라는 구호를 자주 봅니다. 이 '평신도'란 용어 자체는 중세 교회처럼 계급적인 표현이기에 문제가

있지만, 어쨌든 신도들을 동역자로 세운다는 면에서 일단은 그 구호의 의도를 매우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부 교회에서 일어나는 실상은 이런 취지를 아주 무색하게 하고 있습니다. 목 사님들이 신도들을 동역자로 세운다며 적당한 직분을 맡긴 후에, 실제로는 그들 위에 군림하며 동역자라기보다는 그저 '도우미'처럼 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인들을 길들이는 그 비법은 의외로 그리 복잡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말을 잘 듣는 사람들은 계속 가까이 중용하고, 까다로운 사람들은 멀리하거나 한직으로 보내면 됩니다. 결국 나중에는 목사에게 쉽게 순종하는 사람들이 주로 중요한 요직에 남게 됩니다. 일부 목사님들이 애용하는 이런 수법은 한마디로 말하면 '잔수'이고, 두 마디로 말하자면 '잔머리 굴리기'입니다.

하여튼 이런 속된 방법으로 목사 주변의 제직들은 말로만 동역자이지, 사실상 명령에 잘 순종하는 시녀처럼 '어용화'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물론 이들 중에는 순수한 마음으로 열심히 봉사를 하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순수함이 맹신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바른 지식보 다는 '감성에 치우친' 신앙생활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맹신으로 위장된 동역

즘 여러 교회에서 자주 들려오는 목사님들의 비양심적이며 무법적인 행태는 이런 구조적 취약점과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 많은 경우에 순진한 신도들은 목사에

대한 무비판적 맹종을 순종으로 착각하며 매우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름만 동역자이지 사실은 거의 '맹신' 수준으로 전락할 위험성이 매우 큽니다. 달리 표현하면, 여러 교회에서 추구하는 '평신도 동역'은 언제든지 '맹신도 동역'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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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여기에서 발생합니다. 다행히 담임목사가 사심이 없는 목회자일 때는 별 탈이 없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는 심각한 일이 벌어집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목사의 독주와 월권이 시작되며, 결국은 '교회의 사유화' 현상으로 귀결되는 경우가 보통입니 다.

이처럼 목사들이 자신에게 맹종하는 교인들을 천거하여 직분자로 세우고, 실제로는 권 위주의적 독재를 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과 교회법을 명백하게 역행하는 간악한 행위 입니다. 그럼에도 이는 교권주의자들이 매우 즐기는 고전적이며 상투적인 수법입니다. 겉으로는 여러 신도들과 동역하는 것처럼 구색을 갖추고 있으나 이는 눈가림을 위한 모양새일 뿐이며, 내부적으로는 언제나 목사 마음대로 맹신화된 직분자들을 조종하며 교권을 흔들 수 있는 것입니다.

국교회가 현재 직면하고 있는 총체적 난국은 이런 '위장된 동역'에 큰 원인이 있습 니다. 맹신도들이 동역을 빙자하여 목사의 월권과 독재에 합법적인 명분을 제공하고,

심지어는 목사의 비리까지도 눈감아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불가사의한 머릿속 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지, 담임목사가 교회 공금을 횡령하거나 간통을 해도 그저 좋게 만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조직이 비대해지는 중대형 교회로 갈수록 더욱 극 심합니다.

대부분의 맹신도들은 자신들의 교회가 '외견상' 말씀을 잘 전하고, 장엄한 예배를 드 리고, 새벽 기도회에 열심을 내고, 교육에 투자하고, 선교에 힘쓰고, 그리고 구제와 봉사도 하고 있으니 스스로 매우 좋은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그러한 열 심과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사람과 세력과 돈을 모으기 위한 '고도의 겉치장' 수법이며 눈가림이 될 수 있음을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만일 어떤 교회가 노골적으로 거짓을 가르치고 부도덕한 일을 한다면, 누가 그런 교회 에 출석을 하겠습니까. 귀족 목사님들도 이런 사실을 매우 잘 압니다. 그래서 자신들 을 최대한 순수하고 경건한 목회자로 위장을 합니다. 당연히 설교도 멋지게 잘하고, 기도도 뜨겁게 하고, 그리고 남을 돕는 일도 앞장서서 합니다.

따라서 일반 신도들은 진실을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단지 이 종교 귀족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어김없이 자신들의 이권을 조용히 챙기고 있을 뿐입니다. 교회 세습이나 고액 의 집회 강사료 그리고 공금 유용 등이 그러한 예입니다. 맹신이 무서운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신도들 대부분은 순수한 열정으로 사역을 하지만, 부패한 목사들은 이를 악용하여 언제든지 빈틈만 보이면 자신의 사욕을 실속 있게 채우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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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는 '부유한 목사'란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어떻습니까. 절대 다수인 작은 교회 목회자들의 경제적 고통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고가의 주택과 고급차를 즐기는 사치스러운 중대형 교회 목사들이 주변에 널렸습니다. 몇 년 만에 수 억 원을 가볍게 모으는 목사들도 있습니다. 도대체 무슨 방법으로 거룩한 교회 내에서 거룩하신 목사들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요. 정말 한심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런 위선적인 목사님들은 신도들과의 동역에서만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아닙 니다. 동료 교역자들 사이의 동역도 바르게 하고 있지 못합니다. 즉 부목사나 전도사 등 다른 교역자들을 대등한 동역자로 예우해 주고 있지 않습니다. 마치 상전이라도 된 듯, 부하 직원처럼 함부로 대하며 교만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일반 신자로서도 해서는 안 될 부끄러운 행동입니다.

회가 꾸준히 변질되고 온갖 악습들이 일반화되다 보니, 일부 목사들은 정말 안하무 인입니다. 이런 나쁜 관습을 개선하려면, 교회 정관에 교역자들 사이의 업무 구분을

명확히 하고 서로 존중하며 월권을 못하게 해야 합니다. 또한 가능하면 교역자 청빙 시 담임목사의 추천을 배제하고, 당회가 직접 주관하여 공채로 적임자를 선택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여튼 위와 같은 일련의 사태들은 목회자들의 변절에 일차적인 책임이 있습니다. 그 러나 신도들의 책임 역시 작다고 할 수 없습니다. 왜 교인들은 목사님 앞에만 서면 그 렇게 작아지는지 그 이유를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 목사직을 지나치게 존 대하는 개신교 고유의 전통과 아울러 목사를 선지자나 제사장 또는 사도로 오해하는 잘못된 인식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목사직은 '가르치는 장로'나 '교사'로서 존중을 받을 뿐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즉 다스리는 장로나 집사 등 다른 직분과 대등합니다. 따라서 일부 목사들이 스스로 '주의 종' 또는 '주의 사자'라고 하며 자신을 높이고, 마치 '하나님의 대리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방자하게 행동하는 것은 분수를 모르는 무지한 처신입니다.

개혁 교회는 하나님과 신자들 사이에 어떠한 대리자나 중보자도 인정하고 있지 않습니 다. 목사직은 교회의 대표직도 아니며, 특별히 높은 자리도 결코 아닙니다. 목사도 다 른 직분과 마찬가지로 당회의 관리와 치리를 받아야 하는 하나의 지체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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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부패의 쌍축

미 한국교회는 신뢰를 잃고 세인들의 비웃음거리가 된 지 오래입니다. 한국교회를 부패시키는 쌍축이라 할 수 있는 '변절한 목사들'과 '맹신화한 신도들'이 사이좋게

나란히 과속으로 질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변변한 제동 장치 하나 제대로 없이 ' 돈과 복'이라는 우상을 향해 마냥 달리고 있습니다.

반복되는 경고도 별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배반하고 변절한 교권주의자들은 맹신 도들을 방패 삼아 소통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부정과 부패를 제거하라는 교회 안팎의 요구도 소귀에 경 읽기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 도를 넘어 물욕과 권력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자폐 증상마저 보이고 있습니다. 작금의 사태가 더욱 심각한 이유는 상당수의 중대형 교회들이 이들의 손아귀에 잡혀 있다는 현실에 있습니다. 교회의 단물을 빠는 이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교 회를 사유화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여론의 눈치라도 조금 보는 듯 했으나, 요즘은 아 예 노골적입니다. 탐욕에 눈이 먼 데다가, 신도들의 맹신화와 교권 장악이 사실상 거의 마무리되었다는 자신감 때문입니다.

유감스럽게도 한국교회는 지금 지난 30 년간 뿌린 '변질된 복음'의 열매를 고스란히 심 은 대로 거두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를 제대로 전한 것이 아니라, 저급한 '기복 신앙'을 열심히 퍼트린 결과입니다. 목회자들의 급격한 부정과 부패 역시 물질적인 복 을 추구하여 교회에 돈이 쌓이기 시작하면서부터 가속되었습니다.

런 과정에서 맹신으로 길들여진 신도들은 '비나이다 신앙'으로 오로지 세속적인 복에 명운을 걸고 있고, 타락한 목사들은 메뚜기가 제철을 만난 듯 날뛰며 맘몬적

부에 탐닉하고 있습니다. 뿐만이 아니라 소위 노회니 연회니 총회니 하는 곳도 교권에 중독 된 종교업자들이 기생충처럼 서식하며 불법을 행하고, 오히려 양심적인 신자들을 핍박 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이미 자정 능력을 잃었다고 말을 합니다. 따라서 이제는 비상하고도 특별 한 자구책이 별도로 없는 한, 극심한 물질 숭배 속에서 탈선과 부패와 타락의 내리막 길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오죽하면 일각에서 부패 척결을 위한 '종교 특별법' 이라도 만들어야 한다는 말이 나올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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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도 어떤 형제님이 탄식을 하시더군요. 어렵게 새 신자를 전도해도 주변에 안심 하고 추천할 만한 교회가 드물다고 합니다. 많은 교회들이 제자의 길을 버리고, 목사를 사장으로 하는 사기업처럼 변질되었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이처럼 교회가 도리어 전도의 문을 막고 있습니다.

러나 우리는 너무 실망하거나 낙심해선 안 됩니다. 부패로 썩어 망해야 할 교회는 당연히 망할 것이며, 반면에 그루터기처럼 끝까지 믿음의 순결을 지킨 교회는 다시

일 어설 것입니다. 이것이 역사가 보여준 진실이며 교훈입니다. 교회의 외형적 크기나 숫 자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단지 우리가 얼마나 제자된 도리를 바르게 실천하며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웃과 잘 나눌 수 있는지가 큰 과제로 남아 있을 뿐입니다.

어쨌든 한국교회는 목사님들에게 필요 이상으로 기대다가 이 모양 이 꼴이 되어 버렸 습니다. 그래서 어쩌다가 어느 목회자가 실족이라도 하면, 마치 모세가 홍해 바다에라 도 빠진 듯 호들갑을 떱니다. 특정 직분을 지나치게 높이거나 신성시하면, 결국에는 우리 스스로 맹신의 함정에 빠지게 됨을 알아야 합니다. 신도들의 잘못이 매우 큽니다. 그리고 신도들의 깊은 자성이 필요합니다. 중세적 특권 의식을 버려야

으로의 시대는 '성속의 구분'이 더욱 없어질 것입니다. 신약 시대에 무슨 평범한 신 도가 별도로 있고, 반대로 성스러운 신도가 따로 있겠습니까. 직분에 관계없이

모든 신자가 다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이런 면에서 모든 신자가 다 '성직자'라 할 수 있습 니다. 따라서 개혁 교회 내에서는 목사와 일반 신도들을 '계급적으로' 구별하고 차별할 근거가 전혀 없습니다.

그러므로 목사라고 해서 과거처럼 특별한 대접을 받을 것이라는 기대는 아예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또한 자신이 무슨 특별한 '영적 우월권'이라도 지닌 것처럼 신도들을 기만하며 허풍을 떠는 것도 삼가해야 합니다. 따라서 교회 내에서 다른 직분들과 '평 등하게' 동역할 자세가 되어 있지 않다면, 차라리 목회할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 이런 결연한 각오 없이 하는 목회는 개인에게 불행이 되고, 동시에 교회에도 독이 됩니다.

이제 목사님들은 정말 개도 안 물어 갈 그 '특권 의식'을 철저히 버려야 합니다. 특히 중대형 교회 목사들이 마치 재벌 기업처럼 교회 내 직분을 수직화하고 계급화하는 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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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 경계해야 할 일입니다. 기이하게도, 한국교회는 중세 교회가 하던 악습들은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기가 막히게 잘 챙겨서 답습하고 있습니다. 정말 연구 대상입니다.

목사직도 교회 내 다양한 기능을 가진 여러 직분들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 직분 자체가 사람을 높이거나 거룩하게 해 주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우리 신자들은 모두 다 주님 앞에서 평등한 형제자매이며, 직업이나 직분에 관계없이 세상 속에서 경건하게 살아야 하는 '성직자'들입니다. 따라서 목사만이 성직이라는 생각도 버리는 것이 좋습니다. 목수나 세탁소도 다 고상한 성직입니다.

신도들을 동역자로 세우는 일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욱 시급한 일은 목사님 들이 먼저 새로워져야 합니다. 자신들의 말대로 종이라면 종답게 처신을 해야지, '목사 왕국'을 만들어 군림하는 목회는 지양되어야 합니다. 더구나 종이 주제넘게 그 어줍지 않은 '목회 철학'을 내세우며, '주인의 자녀들'에게 이를 강요하는 시건방진 버릇도 아울러 고쳐야 합니다. 시키지도 않은 일에 한눈팔지 마시고, 가르치는 사역에만 전념을 하시라는 뜻입니다.

든 신자들이 함께 평등하게 동역하는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목사 홀로 성직자라 는 '중세적 착각' 속에서 혼자 기획하고, 혼자 독주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항상 말로 는 신도들을 동역자로 세운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십일조나 꼬박꼬박 바치게 하고 교 회 내 온갖 궂은 일과 주방 설거지나 시키며 노역자로 부리면 되겠습니까.

신도들은 동역자이지, 노역자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목사님들이 서야 할 바른 자리는 권력을 휘두르는 높은 자리가 아니라, 신도들의 호흡을 함께 느낄 수 있는 그들의 '옆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비로소 목사직은 외롭고 힘들기만 한 자리가 아니라, 따뜻하게 위로받고 격려받는 '소중한 직분'으로 거듭날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이미 '목사교'라는 부끄러운 오명을 듣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더 이상 물러설 자리가 없습니다. 목사님들이 제자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개혁 교회는 다른 신도들뿐 만이 아니라 목사도 진정한 동역자로 세우는 제자다운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부르심에 합당한 올바른 사역입니다.

마지막으로 모든 담임목사님들께 묻고 싶습니다. '직분'이 우상화되면 결국은 '계급' 이 됩니다. 그런데 한국교회 일부에서는 그 '담임'라는 직분이 언제부터인가 오만한 계급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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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런 중세적 계급화가 오늘날 교회를 깊이 병들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이라도 당장 성경 어디에도 없는 그 담임이라는 '변질된 계급'을 스스로 내려놓고, 가르치는 장로나 교사 본연의 직분으로 돌아올 수는 없는지요.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 말라 반 포하는 네가 도적질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 기는 네가 신사 물건을 도적질 하느냐.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 을 욕되게 하느냐(롬 2:21~23)."

2010 년 9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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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인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다 교회는 '쉴 만한 물가’가 되어야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5)." 한 세대 전에는 수백 명이 북적거리던 마을 교회가 지금은 주일에 10 여 명의 노 불과인들만 둘러앉아 조용히 예배하고 있습니다. 이는 현재 서구의 많은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반적인 풍경입니다. 대도시의 교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에 수많은 사람이 모이던 중·대형 교회들이 이제는 관리 유지조차 힘들어 다른 용도로 개조되거나 팔려 나가고 있습니다.

1995 년 당시 65%의 영국인이 기독교인이라고 응답을 했으나, 단지 전 국민의 8% 미만이 주일 예배에 참석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의 조사에서는, 1979 년과 2005 년 사이 단지 26 년 만에 영국 교회 출석 교인 수가 반 토막으로 줄어들었습니다. 교인들이 교회를 떠난 것입니다.

전에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안타까워하면서도 그저 남의 나라 이야기로 치부했었습 니다. 그런데 더 이상 그런 사치를 누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한국의 교인들도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지난 30 년간 건물만 지어 놓으면 차고 넘치던 성장 신화가 이제는 거품이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징조들이 여기저기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장과 증식에 힘을 쏟아 비만해진 한국의 중대형 교회들이 점차 고질적인 성인병으로 활력을 잃어 가고 있습니다. 세속적 복과 외적 성장만을 추구하며 변질된 복음을

전한 교회들에 대하여 매서운 응징이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는 우연한 일이 아니라, 심은 대로 거두고 있습니다. 내실 있는 일은 제대로 하지 않고, 계속 먹고 몸집 키우기에만 몰두를 했으니 병이 난 것입니다. 자신들의 교회를 키우기 위해서라면, 이웃의 작은 교회들이 죽든 말든 크게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배당 신축을 위해서라면, 가난한 교인들을 압박하여 그들의 속 주머니까지 넘보는 행위도 결코 사양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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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울러 건축 헌금을 더 걷기 위해, 단순히 예배와 모임을 위한 처소를 '성전'이나 '거 룩한 땅'이라고 우기며 순진한 신도들을 기만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바람마저 피하기 힘든 '솔로몬 행각'에서 모이던 사도행전 성도들의 그 가난한 마음과 검소한 정신은 모두 사라지고, 세속적 성취와 안일한 편리주의가 순수한 옛 신앙을 몰아내고 있습니다.

또한 목적이 수단과 방법을 모두 정당화하고 합리화하고 있습니다. 교회 공금을 유용 하여 치부하는 목사나, 성추행을 한 목사들도 설교를 잘하고 교회를 키우는 능력만 있 으면 그냥 적당히 넘어가자고 합니다. 그래서 '진리가 이끄는 삶'이 옳은 것이 아니라, '목적이 이끄는 삶'이 옳은 것이고 복인 것처럼 선전하며 외형적 성장에 명운을 걸어 왔습니다.

목사, 장로 그리고 집사들

느 통계에 의하면, 한국의 비교인들 반수 이상이 과거 교회 출석 경험이 있다고 합 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이 교회를 떠났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해 주는 반증

자료입니다. 반면에 최근 가톨릭 신도의 수는 급격히 증가하였습니다. 개신교에 실망하여 개종한 교인들도 여기에 적지 않은 기여를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를 여기서 또 다시 중복하여 일일이 나열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또한 세상이 너무 좋아서 교회를 떠나는 분들도 일단은 논외로 하고자 합니 다. 오히려 교회의 부정적인 모습에 상심하여 교회를 떠나는 분들이 더욱 시급한 문제 이기 때문입니다.

심할 경우는 교회를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떠나는 분들이 있습니다. 아니 때로는 더 머물고 싶어도, 사욕으로 눈이 먼 교권에 의해 강제로 내몰리기도 합니다. 최근 제자교회나 경신교회 사태도 이런 현실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세상이 말세가 되니 목 사가 교인들에게 교회에서 나가라고 합니다. 공금 횡령이나 성추행 의혹에 항의하며, 교회법을 지키자는 교인들의 지극히 상식적인 요구가 그리도 부당한가요.

교인 이탈 문제의 핵심은 대량 생산으로 불량화된 목회자들의 자질에 가장 큰 원인이 있습니다. 크게 결여된 경건과 어설픈 실력에도 불구하고, 어쩌다가 호황기에 기회를 잡아 갑자기 교회 지도자라는 신분으로 급상승한 일부 인사들이 자기 분수를 까맣게 잊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낮아지고 섬기고 희생하고 인내하는 성경의 가르침은 모두 탐욕에 저당 잡히고, 대접받고 누리고 군림하는 교만한 독재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 분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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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에서는 광채가 나지만 경건의 능력은 별로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자신에게 반대하는 이들을 선한 논리와 마음으로 설득시키지 못 합니다. 온갖 부끄러운 부정과 비리는 자신들이 다 저질러 놓고, 오히려 이에 저항하는 교인들을 위선과 교권이라는 양날의 칼로 가차 없이 잘라내고 있을 뿐입니다.

많은 경우, 노회도 총회도 모두 한통속이니 거칠 것이 없습니다. 더구나 입만 열면 " 아멘"하고 화답하는 맹신도들이 뒤에서 든든히 후원을 해 주고 있습니다. 과거 군부 독재자들에게도 추종자들이 많았는데, 성직자로 포장된 이들에게 어찌 맹신도들이 없 겠습니까.

그런데 이들 목회자에게만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소위 교회 생활을 오래 하였다 는 주요 직분자들에게도 답답한 문제가 적지 않습니다. 개인적으로 필자는 어린 시절 부터 교회 내에서 좋은 목사님, 전도사님, 장로님, 집사님 들을 너무 많이 보아 왔고 그 분들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그 분들이 주신 사랑의 빚을 마 음속에 소중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교회가 그렇지는 못한 듯 합니다.

저 가까운 지인이 경험한 일을 하나 소개하고자 합니다. 어느 도시로 이사를 하여 근처의 한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습니다. 별로 크지도 않은 교회인데, 근 3 개월이

지나도록 장로라는 분이 한 번도 다가와서 인사를 나누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원래 성격이 저런 분인가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먼저 고개를 숙이며 가벼운 눈인 사를 자주 드렸다고 합니다. 물론 반응은 아주 시큰둥했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좀 부유해 보이는 사람들이 새로 오면 이 장로님이 아는 척도 하고 잘 어울리더랍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분이 장성 출신이었습니다. 아마 자신의 수준 에 맞는 사람들만 골라서 상대하겠다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여튼 생업 때문에 그 교회를 떠날 때까지 계속해서 서먹하게 지냈다고 합니다.

비단 이런 장로님뿐만이 아닙니다. 다른 집사님들도 예배가 끝나면 자기들끼리만 즐겁 게 몰려다닙니다. 그 구분은 거의 한가지입니다. 재산이 있거나 사회적 신분이 좀 좋아 보여야 거기에 낄 수가 있습니다. 그 순간 아파트 단지에서도 아이들이 평수대로 어울려 논다는 말이 생각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서운한 마음을 누르고 이 친구는 가능하면 구석에서 소외받는 다른 교인들을 살피고, 가깝게 지내려고 더욱 노력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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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런 노력도 결국은 큰 효과가 없었습니다. 담임목사님 역시 차별적 분위기를 조장하는 데에 은근히 앞장서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유한 교인들과는 친밀하게 지내 시고, 그렇지 못한 교인들은 그저 의례적으로만 대했습니다. 설교도 너무 기복적이고 비성경적이며, 헌금만 지나치게 강조해서 교회 생활이 매우 불편했다고 합니다.

더구나 후일에 들으니 교회 수련원 부지를 구입하면서, 일반 교인들이 모르게 부인 명 의로 등기를 하였다고 합니다. 세월이 한참 지나면 이런 수법으로 교회 재산이 슬그머 니 목사의 사유 재산으로 둔갑하게 될 것입니다. 그도 아니라면, 교회를 세습하여 대를 이어 죽도록 충성을 하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런 경험은 단지 하나의 삽화에 불과합니다.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한국교회 에서는 드문 일이 아닙니다. 필자는 과거 지방 근무나 출장 중에 여러 교회들 주일

예 배에 참석할 기회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설교 시간 내내 지역 목사님들이 단체 관광을 다녀오신 지루한 체험담만 듣다가 예배를 마친 기막힌 경우도 있었습니다.

같은 지역의 또 다른 교회에서는, 담임목사님이 예배 중에 성령을 받으라고 바람 소리 를 내며 기도하는 것을 보기도 했습니다. 그 외에도 부부가 각자 십일조를 따로 내라 거나, 일 년치 헌금을 미리 작정하라는 등 정말 보기 민망한 일들이 많았습니다. 이처 럼 한국교회는 극소수가 비정상인 것이 아니라, 아주 상당수가 비정상이라는 데에 큰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날 저급한 목회자들, 오만한 장로들 그리고 방자한 집사들이 한국교회 전도의 문을 정면에서 막고 있습니다. 아니 가만히 있는 교인들마저도 교회 밖으로 내치고 있습니다. 많은 여집사님들의 부드러운 입방아 또한 큰 재난입니다. 그리하여 교회 내에서 배고픈 것은 참아도, 기죽고는 도저히 못살게 만듭니다.

과도한 돈 자랑, 자식 자랑, 그리고 남편 자랑이나, 반대로 무책임한 험담들이 교회를 병들게 하고 믿음이 연약한 교인들의 마음을 멍들게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진리에 목 말라 교회를 찾아왔으나, 가슴에 상처만 가득 담고 떠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수 년 전에 어느 노부모님을 겨우 설득하여 집 근처 교회에 출석하시도록 한 적이 있습 니다. 그런데 이 분들이 거기서 얼마나 상처를 많이 받으셨는지, 지금은 목사나 예배당 소리만 들어도 진저리를 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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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에 이른 교회 부패 잘 알려진 대로, 거룩한 교회가 깊숙이 세속화되어 세상이 추구하는 속된 가치관 이미을 그대로 따르며 수용하고 있습니다. 사회에서 사장, 교수, 판사, 장관, 장성, 기타 부유층이면 교회에서도 금방 장로나 권사 그리고 집사가 됩니다. 반면에 서민들은 교 회에서도 차별을 받고 있습니다.

귀족들이 대접을 받던 중세 교회만 흉을 볼 일이 결코 아닙니다.

또한 중세적 성직 차별이 현재 한국 개혁 교회 내에 폭넓게 퍼져 있습니다. 중대형 교회 목사는 교황이나 주교처럼 고위 성직자로 군림하고, 장로나 집사나 신도들은 평민으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이는 마치 하인이 주인을 부리며 행세하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입니다. 이런 한심한 모습을 더 이상 안 보려면, 우선 중대형 교회 목사들의 권한을 가르치는 직무에 맞도록 전문화하고, 크게 제한해야 합니다. 그래서 목사를 최고 경영자( CEO ) 로 보는 잘못된 관념부터 철저히 뜯어고쳐야 합니다.

리고 진정으로 중대형 교회의 갱신과 개혁을 원한다면, 우선 부유한 목회자들에게 유입되고 있는 지나친 돈줄을 먼저 제거해야 합니다. 무슨 명분이든, 목사가 사역

기간 중에 수 십억 원을 모을 수 있는 사회는 불행한 사회입니다.

과도한 목회 사례비와 외부 강사비 역시 과감하게 축소하거나 삭감하여 다시 조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여튼 목사의 주변에 흐르는 돈이 넘치게 되면, 항상 부패가 시작 된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유감스럽게도, 회칠을 한 무덤처럼 한국교회 속에는 은밀한 불의와 부정이 일반화하고 있습니다. 많은 목회자들은 교회 공금 횡령, 과도한 집회 사례비, 교회 세습, 성추행, 사기, 월권, 학위 세탁, 헌금 강요, 재단 운영, 정치 참여 등 온갖 속된 방법을 다 동 원하여 부와 쾌락과 명예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속은 구토가 나도록 썩었는데, 겉으로만 치장하고 눈가림을 하고 있습니다. 그 래서 초신자들만 상처를 받고 교회를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내부 사정을 깊이 알게 될수록 더 큰 좌절을 느끼며 떠나는 중견 교인들도 많아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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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시대의 암울한 역사가 다시 반복되고 있습니다. 당시에도 소위 고위 성직자들은 사치스러운 부를 누린 반면에, 지방의 말단 사제들은 끼니를 잇기가 어려울 정도로 혹 독한 가난에 시달리는 일이 많았다고 합니다. 오늘날 대형 교회와 미자립 교회 간의 극단적인 양극화가 이를 잘 재현하고 있습니다.

극히 일부 목사들만의 이야기라고 주장하는 것은 이제 구차한 변명이 될 뿐입니다. 한 국교회에는 총회, 노회, 연회 그리고 각 교회에 기생하며 거룩한 직분을 모독하고 사 욕을 채우는 인사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불의한 돈이나 뇌물을 하나도 안 뿌리고 당선 된 교단 총회장이나 노회장, 그리고 기독교 단체 대표회장이 과연 몇 명이나 있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러니 사회에서도 교회를 '공공의 적'으로 보는 혐오감이 급 속히 퍼지고 있는 것입니다.

국민의 지탄을 단골로 받는 정치권보다 더 부패한 사람들이 한국교회의 정치 목사들입 니다. 이스라엘 하스몬 왕조의 사악한 왕 아리스토불루스가 죽었을 때, 백성 중에 아 무도 울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혼자서 실소한 적이 있습니다.

오늘날 소위 한국교 회 지도자라는 인사들의 표리부동한 행태를 보면서, 그 백성들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 가 갑니다. 그런데 우리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자들입니다. 진리가 아니 면 계속 목마를 수밖에 없는 그런 영적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두세 번 정도는 속더라 도, 계속해서 속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는 신도들도 점차 그 진실을 알기 시작했 습니다.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느냐고 묻습니까? 물론 세상의 유혹이 너무 커서 떠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더 큰 이유는 교회가 준 상처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더

이상 속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더 이상 변절한 목사님들의 욕심에 이용을 당하기 싫어서 떠납니다.

교회를 떠나는 것이 물론 좋은 일도 아니고, 결코 권할 일도 아닙니다. 또한 이를 정 당화하거나 미화하자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 원인이 무엇인지를 냉철히 직시하고, 문제의 본질을 바르게 이해하자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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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교회의 한계와 새로운 시도들

은 분들이 개혁을 논하다가, 이제는 교회 현실에 너무 실망하여 탄식할 힘마저 없다고 말하십니다. 실제로 교회 정의가 개선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갈수록 그

교묘한 수법이 지능화, 고도화, 조직화, 그리고 일반화하며 악화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침내는 한국 대부분의 제도권 교회들은 자정 능력을 상실했다는 절망적 결론에 도달 하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문제 해결을 위한 적극적 의욕도 점차 약해지고, 냉소적 이며 비판적인 방관자로 변하기 쉽습니다.

반면에 이런 냉소주의를 극복하고, 바른 교회를 이루기 위하여 새로이 구체적인 노력 을 하는 분들도 적지 않습니다. 예배당 건물이 없는 교회, 담임목사가 없는 교회, 십 일조가 없는 교회, 계급적 직분이 없는 교회, 유급 사역자가 없는 교회, 헌금 채가 없 는 교회, 그리고 무기명 헌금만 받는 교회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대부분은 순기능 보다는 역기능이 더욱 크게 부각된 현실에 대한 반발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물론 이런 시도들이 모두 옳고, 기존의 교회 제도가 무조건 잘못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기성 교회들이 스스로 바르게 개혁할 수 있으면 더욱 바람직합니다. 또한 새로운 형태로 이룬 교회들 역시 언젠가는 또 다른 문제점으로 인하여 다시 개혁 을 요구받게 될 수도 있습니다.

지만 구더기가 무서워 장을 못 담그겠습니까. 교회 역사는 언제나 '순수'와 '비순수 '의 싸움이었으며, 그 속에서 끊임없이 자기 성찰과 개혁이 필요함을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세속의 한가운데에 존재하는 유형 교회들은 그 제도에 관계없이 계속해서 문 제가 발생할 것입니다. 그 이름이 유대교든, 가톨릭이든, 개신교든, 또한 앞으로 그 무슨 이름이 새로 붙게 되든지, 근본적으로 그들의 구성원인 부패한 인생들이 쉽게 변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냉소적으로 방관하거나 좌절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만일 기존 교회에 정 희 망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차라리 다시 시작하면 될 것입니다. 교회 개혁이 루터나 칼 뱅의 전유물은 아니지 않습니까. 두세 명이 모이면 어떻습니까. 열 명이나 백 명이 모 이면 더욱 좋습니다. 작은 공동체도 지역 사회에서 그 능력에 맞게 얼마든지 유익한 사역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박해 시대의 지하 교회들보다는 훨씬 좋은 여건이 아 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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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신도들의 인내에도 금이 가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옵니다. 어느 해외 도시 에서는 십여 가정이 전임 목회자도 없이 별도로 모여 예배를 하고 있는 곳도 보았습니다. 대부분이 지역 한인 교회들에서 크게 실망했거나 상처를 받은 분들이었습니다. 이 교회 저 교회를 기웃거리다가 그것도 지쳐서 아예 가까운 지인들끼리 따로 모이게 된 것입니다.

또한 필자가 존경하는 어느 선배 부부는 작은 '가정 교회'를 이루기 위해 기도하고 있 습니다. 현직 회계사로서 자비량 사역을 위해 탄탄한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다양한 형태의 신앙 공동체들이 시도되고 있습니다. 어떤 공동체는 마치 과 거 청교도의 모체이었던 '회중 교회'를 연상하게 하기도 합니다. 필자의 좁은 소견으 로는 한국적 여건에서는 이 회중 교회의 장단점을 자세히 연구해 볼 가치가 충분히 있 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자신의 밥그릇을 크게 염려하는 일부 기득권 목회자들은 적극 반대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먼저 '쉴 만한 물가’가 되어야

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유럽의 교회들은 거의 텅 비어 가고 있고, 한참 흥행하던 미국의 교회들마저 급격히 쇠퇴하고 있습니다.

미국적 성공주의 로 위장된 잘못된 복음의 약발이 거의 떨어져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년마다 수백만 명이 교회를 이탈하고 있습니다. 오죽해야 그 기세가 등등하던 수정교회마저 파산 지경에 이르게 되었을까요. 그리고 이제는 한국교회를 주시해야 할 때입니다.

옳든 그르든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다만, 교회가 이들에게 '쉴 만한 물가'를 충분히 제공해 주지 못했기 때문임은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이렇게 교회를 떠나는 분들을 함부로 판단하거나 폄하할 권한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그래도 한 가지는 있습니다.

비록 사정에 의해 '유형 교회'를 일시적으로 떠나더라도, 그리스도의 몸인 '무형 교회 '는 절대로 떠나지 말자고 격려해 주고 위로해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분들이 다시 함께 참여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야 합니다. 또한 이를 위해 우리 자신들도 모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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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힘써야 합니다. 우리가 함께해야 할 일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고, 또한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주님이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간판이나 종탑이나 십자가가 없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목사 나 장로나 감독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반드시 그들이 있어야 교회가 되는 것도 아닙니 다. 성경을 믿고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모였다면 그것으로 일단 족합니다.

당장 무슨 대단한 일을 하기 이전에, 우선 교인들이 영육으로 '쉴 만한 물가'가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교인들 사이의 화평과 사랑의 교제가 먼저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현대 교회는 무엇이 그리 복잡하고, 화려하고, 요란하고, 분주하고, 이리도 번잡합니까. 오히려 이런 껍데기들을 열심히 챙기다가 속 알맹이를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요.

론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우리는 교회들이 타락하고 무너지고 있는 어두운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때로는 짐이 너무 무겁고, 실망과 낙심이 우리를 매우 힘들게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바울 사도처럼 이미 복음에 빚진 자들이며, 하늘의 소망과 믿 음의 비밀을 함께 나누는 참된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교회를 떠나는 것보다 더욱 어려운 일은 교회에 남는 것입니다. 날 선 비판과 이유 있 는 변명의 혼재 속에서, 제자들마저 교회를 떠날 수는 없습니다. 교회의 크기나 형태는 문제의 핵심이 아닙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바른 교회'를 이루는 것이 중요하며, 마지막까지 남아 믿음의 순결을 지키는 그루터기가 되는 것이 더더욱 중요합니다. 신 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나그네 된 삶을 사는 동안, 부족하지만 주님 안에서 더욱 용기를 내어 형제들 을 서로 붙잡아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바른 교회를 이루는 일이라면, 언제든지 감연 히 나서겠다는 각오를 새로이 할 때입니다. 그래서 이런 작은 다짐들이 모아지고 열매 를 맺어, 그리스도의 향기를 우리의 이웃들과 더욱 풍성하게 나눌 수 있게 되면 좋겠 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변함없이 당신의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묻고 계십니다. "너희도 가려느냐(요 6:67)." 2010 년 11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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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흥회의 변질과 목회자들의 돈 잔치 은혜받고, 돈 바치고, 그리고 복 받으라

금으로부터 114 년 전인, 1897 년 한국침례교의 창시자인 펜윅(M.C. Fenwick) 선교사 님이 주도한 소래교회 사경회는 한국교회 최초의 부흥회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당시 약 300 명이 모여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였고, 뜨거운 회개의 역사도 일어났다고 합니다. 이는 평양대부흥운동의 시발점인 1907 년 평양 장대현교회 사경회보다 약 10 년 전의 일이었습니다.

한국교회 초기의 부흥강사 목사들은 농어촌과 산간 지역의 작은 교회들을 찾아 나서서 열정적으로 부흥회를 인도하였습니다. 강사 사례비 따위는 아예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물론 요즘처럼 편리한 교통수단도 거의 전무했습니다. 버스를 못 타면 트럭을 타고 가 기도 했습니다. 또한 교파나 교회의 크기도 차별하지 않고 가능한 모든 교회를 방문하 였습니다.

기복 설교와 헌금 강요

흥회의 본래 취지는 안일해지기 쉬운 신앙생활에 성경 말씀으로 새로운 격려와 활력 을 주어, 보다 성숙한 신자와 교회가 되기 위함입니다. 또는 전도를 목적으로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적으로 이런 의도가 좋은 열매를 맺어 교회에 큰 유익을 주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한국교회의 부흥회가 초기 부흥회처럼 순수한 '말씀 잔치'가 되지 못하고, 부끄러운 '돈 잔치'로 점차 변질되었습니다. 그래서 큰 교회 부흥회를 한 번 잘하면 목돈을 챙기는 이른바 '부자 목사'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심한 경우는 집회 중에 걷은 헌금을 사전 약속에 의하여 부흥 강사와 교회가 일정 비율로 나누어 가지기도 합니다.

이러다 보니 신도들에게 헌금을 많이 내도록 유도하는 강사가 일류 강사로 대접을 받 기도 합니다. 또한 이런 부흥강사들은 담임목사들의 가려운 곳을 잘 알기 때문에, 담 임목사 처우 개선이나 십일조 강요 등 평소 교인들에게 직접 요구하기 힘든 사안들을 대신해서 처리해 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부흥회가 끝나고 나면, 많은 신도들이 시험에 들거나 마음에 큰 상처를 받는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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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 부흥강사들이 자주 애용하는 수법들을 몇 가지만 열거해 보면, 우선 주요 직분자들인 장로나 권사들에게 노골적인 헌금 강요를 합니다. 이는 매우 상투적인 수순입니다. 웬 만큼 억지를 부려도 그들이 쉽게 교회를 떠나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해마다 부흥회 때가 되면 헌금 걱정으로 잔뜩 긴장하는 직분자들도 많습니다.

교회에 피아노나 비품을 새로 헌납하라거나, 담임목사 양복이나 승용차를 사 드리라고 강권하는 일 등도 흔히 있는 일입니다. 물론 교회 건축 헌금 독려도 빠지지 않는 단골 메뉴입니다. 하여튼 돈을 요구하는 이유는 하도 많아서, 여기에 일일이 다 열거하지 못할 정도입니다.

문제는

목적과

수단이

너무

비성경적이고,

인위적이며,

그리고

저질적이라는 데에 있습니다.

흥회의 건전성과 분위기는 교단이나 교파에 따라 다양하게 다릅니다. 사경회 형식으 로 성경 말씀을 진지하게 나누는 건강한 부흥회도 적지 않게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변질된 부흥회는 주로 '복과 성공'을 노래합니다. 한국교회 초기 부흥회와는 달리 죄, 회개, 고난, 그리고 인내 등 신도들이 부담스러워 하는 말은 가능한 생략하고, 달콤하고 흥미 있는 이야기들을 주로 늘어놓습니다. 그래서 참된 은혜를 받기보다는, 헛 바람만 잔뜩 드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여튼 많은 부흥강사들은 마치 복 받는 비법에 대한 전매특허라도 지닌 듯 전국을 누 비며, '기복 신앙'을 아주 비싸게 팔아서 짭짤하게 재미를 보고 있습니다. 이 분들의 설교를 듣다 보면, '세속적인 복'을 못 받는 사람들은 모두 바보처럼 보일 지경입니다. 또한 어떤 부흥회는 웬만한 코미디보다도 훨씬 더 웃깁니다. '웃기는 짜장면'으로 소 문난 어느 유명 목사님이 그 좋은 예입니다.

사실 사람들은 누구나 세속적 복을 매우 좋아합니다. 그러나 한국교회 부흥강사들과는 달리, 예수님은 세속적인 복을 전혀 강조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부자가 천국에 가 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게다가 부자 청 년에게는 "네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세속적인 관점으로만 본다면, 제자 된 삶은 고생길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평생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부흥강사들은 이런 이야기들을 모두 피하고, 주로 구약성경을 즐겨 인용합니다. 구약에서는 '세속적인 복'을 자주 긍정적으로 언급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분들은 구약에 표현된 '세속적인 복'이 장차 신약시대에 받을 '영적인 복'을 예 표한다는 사실을 크게 간과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부흥강사들 중에는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오로지 '잘 먹고 잘살자'는 기 복 신앙을 부추기는 데에 도가 트신 분들이 아주 많습니다. 아울러 이런 복을 받기 위 한 '헌금'을 매우 강조합니다. 따라서 입에 꿀을 바르고, "많이 바치면 큰 복을 받는 다"고 무당처럼 열창을 하십니다. 물론 이런 무속적 논리는 성경을 크게 왜곡하는 허 구적인 주장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헌금을 많이 하고도 죽임을 당했습니다. 하 나님께서는 헌금보다 먼저 그 사람의 마음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목회자들의 돈 잔치

전한 부흥회는 교회에 많은 유익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기복 전도 사'들은

오직

마디만을

말합니다.

'은혜받고,

바치고,

그리고

받으라'입니다. 그 중에서도 핵심은 '돈'입니다. 오늘날 많은 부흥회는 기복 신앙을 이용하는 목회자들의 '돈 잔치'로 변질되었습니다.

중대형 교회의 경우, 부흥회를 한번 할 때마다 거액의 돈이 들어오고 나갑니다. 물론 들어오는 돈은 모두 교인들의 주머니에서 나온 헌금이고, 나가는 돈의 상당 부분은 강 사 목사의 주머니로 들어갑니다. 언제나 놀라운 일들이 끊이지 않는 한국교회에서는 교인들만 작은 교회에서 큰 교회로 '수평 이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거액의 헌 금도 교인들의 주머니에서 목회자의 주머니로 은혜롭게 수평 이동합니다.

물론 예수님은 계속 교회 종탑 위의 높은 십자가에 홀로 계시게 하고, 자기들끼리만 돈을 주고받고 매우 분주합니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돈 잔치가 화려하게 잘 끝나면, 아주 은혜로운 부흥회였다고 서로 자화자찬합니다. 해마다 이런 일들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슬픈 모습입니다.

특히 유명 강사 목사들 중에는 이를 주수입으로 하여 대단한 축재를 하기도 합니다. 수 십 억 부자들도 많습니다. 물론 중대형 교회 담임목사들이 서로 두터운 강사 인맥을 형성하여, 상호 '교차 초청' 또는 '순환 초청' 등의 수법으로 상대방 교회의 두둑한 부흥회 예산을 사이좋게 나눠 먹는 것도 이제는 더 이상 큰 비밀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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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기복 전도사들은 부흥회를 크게 두 가지 목적으로 사용합니다. 우선은 신 자들을 자극하여 교회의 외적 성장을 추구하는데 이용합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복 음을 포장하여 기복화하고 돈을 챙기는 것입니다. 이런 태생적이고도 숙명적인 이유로, "십일조를 해야 복을 받는다"는 상습적인 주장은 이들이 몸 바쳐 반복할 수밖에 없는 필수 구호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수하지 못한 목회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부흥회는 그야말로 '일석이조'가 되 는 신바람 나는 장사입니다. 이 분들은 신도들의 마음이 진정 뜨거워졌는지, 아니면 단 지 찬송하며 박수치던 손바닥만 잠시 뜨거워진 것인지를 별로 상관하지 않습니다. 일단 아무 데나 뜨거워지면 교세를 확장하는 데에 당장 큰 도움이 되며, 또한 헌금도 더 많이 거둘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유혹은 많은 교회들이 왜 부흥회에 그토록 열을 올리는지를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크게 경계해야 할 '성령 체험'

런데 여기서 한 가지 더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일부 부흥회 강사들은 성령 체험을 지나치게 강조한다는 점입니다. 그 목적은 물론 신도들을 더욱 신비적 신앙에

몰 두시켜, 자신들의 추종자로 만들기 위함입니다. 이 성령 체험 역시 '한국교회 사이비 화와 미신화'에 큰 기여를 한 주범 중에 하나입니다. 이들이 주장하는 성령 체험은 대개 신약 성경에 기록된 '성령의 은사'를 의미할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방언, 예언, 병 고침이나 기타 신비적 체험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이 부분은 신학적인 논쟁이 적지 않은 매우 조심스러운 사안입니다. 특히 방언 이나 예언의 경우, '특별 계시'인 신약성경의 완성과 함께 이미 중지되었다는 견해가 보다 설득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 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전 13:8)."

더구나 방언을 한다는 사람들은 많은데, 왜 방언을 통역하는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보 기 힘든지요. 또한 어쩌다가 통역한다는 이들 중에도 왜 서로 통역이 일치하지 않는지 요. 이를 보더라도, '거짓된 은사'가 만연하고 있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기타 은사 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은 '특별 계시'인 신약성경의 완결 이후 '더 이상의 계 시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19 세기까지는 '은사 중지론'이 교회의 전통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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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이었습니다. 초대 교부들인 크리소스톰과 어거스틴은 물론 종교개혁가 루터와 칼뱅 그리고 청교도들이 이런 견해를 지지했습니다. 반면에 역사적으로 주로 이단이나 신비주의자들이 간헐적으로 '은사 지속론'을 지지했습니다. 따라서 19 세기 이후로 특히 이단 종파나 사이비 교단에서 이런 성령 체험을 크게 강조하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오늘날 거짓된 목회자들로 인해, 성령 체험이란 용어가 너무 남용되고 있습니다. 더구 나 부흥회를 빌미로 신도들을 불건전한 신비주의나 고난주의 또는 미신적 신앙으로 미 혹케 하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미 성령께서 함께하고 계십니다.

신자들은 거짓된 은사에 한눈을 팔지 말고, 오직 기록된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며 '하 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차분하게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성령 체험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초기 부흥회처럼 헌금을 없애자

국교회 부흥회의 가장 큰 문제점은 신도들을 기만하여 기복 신앙에 빠지게 하고, 간교한 방법으로 돈을 거두려 하는 데에 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라도 좋으니

확실하게 해명을 좀 해 보십시오. 한국교회는 왜 모이기만 하면 돈을 걷으려고 합니까. 세인들이 아무런 이유 없이 '개신교는 돈에 환장한 교회'라고 감정적인 비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목사들은 자신의 목회 성취를 위해 큰일을 벌이기 좋아합니다. 하지만 불의하게 돈을 많이 거두어 큰일을 하는 것보다, 신도들 믿음의 분량대로 걷어 작은 일이라도 정의롭게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그 어떤 일도 교회의 성결과 공의보다 우선하지 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돈을 걷는 방법이 너무 치졸하고 무속적입니다. '복받으려면 돈 내라'는 헛소리 좀 그만 멈추고, 교인들에게 헌금의 필요성을 떳떳하고 당당하게 가르치고 '자발적인 헌금'만을 받으면 안 됩니까. 또한 그렇게 무리하게 걷은 돈을 다 어디에 쓰고 있습니까. 어느 통계에 의하면, 한국교회는 전체 헌금 중에 겨우 3~4%만을 사회에 환원 한다고 합니다. 작은 교회들은 어쩔 수 없으니 예외로 하더라도, 중대형 교회들마저도 거의 다 자기들끼리 먹고 마시고 흥청거린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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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는 돈을 삼키려고만 하지 베풀지를 않습니다. 그저 베푸는 흉내만 냅니다. 특 히 미자립 교회들을 쳐다보는 대형 교회들의 욕심은 흥부 형님이신 놀부보다 더 심합 니다. 그냥 마지못해 언 발에 오줌 누기 정도로 돕는 척만 합니다. 실제로는 소가 닭 보듯이 합니다. 이게 과연 정상적인 주님의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까.

앞으로 '부흥회 헌금'만은 꼭 폐지하자고 제안하고 싶습니다. 부흥회를 변질시키는 근 본 원인은 결국 돈에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예배는 구약의 제사가 아닙니다. 따 라서 반드시 제물을 바치거나 헌금을 하며 집회를 해야 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사 도들의 초대 교회에서도 그런 '율법적 바침'은 전혀 없었습니다.

계선 목사님에 의하면, 60 년대까지만 해도 한국교회 부흥회에는 별도의 헌금 순서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것이 교회가 점차 대형화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모일

때마다 알량한 잠자리채를 돌리며 돈을 걷는 못된 습성을 몸에 익히게 된 것입니다. 한국교회 는 과거의 좋은 전통을 버리고, 오히려 갈수록 개악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라도 과거처럼 단순히 은혜만 받는 담백한 부흥회로 돌아가면 안 될까요. 하나님 의 은혜를 감히 돈으로 갚아야만 하는지요. 하나님께서 거저 주신 은혜를 거저 나누면 안 됩니까. 그리고 헌금은 평시처럼 주일예배에 하면 무슨 심각한 문제라도 생깁니까.

아울러 한국교회는 모일 때마다 틈만 나면 돈을 거두는 '고약한 전통'도 함께 폐지하면 좋겠습니다. 도대체 이렇게 못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경 어디에 무슨 근거로, 모일 때마다 헌금을 요구합니까. 참으로 염치를 모르는 종교업자들이 교권을 쥐고 흔드는 것이 아닙니까. 부흥회뿐만이 아니라 구역예배, 송년 예배, 헌신 예배, 그리고 대형 교회들은 수요 예배와 금요 집회까지도 온통 돈으로 모든 집회를 도배하고 있습 니다.

한국의 어설픈 개혁 교회들은 입술로는 개혁신학을 자랑스럽게 떠벌이지만, 하는 행동 은 사이비 교단이나 이단 종파들의 간교한 돈 챙기기 수법들을 열심히 배워서 그대로 답습하고 있습니다.

직분자들의 책임이 크다

래도 우리 교회만은 건전한 부흥회를 하고 있다고 함부로 자만하지 마십시오. 요즘 은 신도들을 기만하는 수법도 더욱 고도화하여, 집회 기간 중에는 성경적으로

올바르고 유익한 설교를 매우 건전하고 은혜롭게 잘하시는 고수님들도 많습니다. 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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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들은 집회 후에 조용히 거액의 목돈을 챙겨 가실 뿐입니다. 이처럼 앞모습은 경건하나, 뒷모습은 추잡한 현대판 바리새인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또한 은혜를 많이 받아서 감사함으로 하는 헌금이 왜 나쁘냐고 구차한 변명도 하지 마 십시오. 그런 감사 헌금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헌금을 더 걷기 위해 잔수를 부리 고 간교한 방법으로 강요하는 것이 나쁘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스스로 건강하다고 주장하는 대부분의 교회에서조차 부흥회는 이미 크게 사이 비화하고 있습니다. 많은 교인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세속화에 깊이 중독되어 있기 때 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은 부흥강사들이 신도들의 죄책감을 자극하여 교권으로 억 압하는 것과 기복 설교를 통한 우회적인 헌금 강요를 당연시하고, 오히려 이를 '은혜 스러운 부흥회'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신자들이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에 기생하는 이런 거짓 목사들을 모두 몰 아내면 좋겠습니다. 이런 저런 교활한 핑계로 헌금을 강요하고, 그러다가 결국은 사례 비를 듬뿍 챙겨 가는 그런 잡상인들을 우리는 거부해야 합니다. 저들은 그저 목사 가 운을 걸치고 있는 이리들일 뿐입니다. 따라서 이들을 잘 구별하여 초빙해야 할 장로나 집사 등 교회 직분자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런 중요한 책임을 더 이상 담임목사에게만 미루어서도 안 됩니다.

진심으로 건강한 부흥 집회를 원한다면, 먼저 부흥회 강사 사례비부터 실경비 수준으 로 조정해야 합니다. 만일 사례비가 너무 적어서 나서는 강사가 없다면 뜻이 맞는 목 회자들끼리 서로 강단을 교류하거나, 그것도 어려우면 차라리 담임목사를 모시고 자체 부흥회를 하면 됩니다. 그러면 돈만 밝히는 파렴치한 강사들도 점차 사라질 것이고, 적어도 지금보다는 훨씬 복되고 아름다운 집회 문화가 형성될 것입니다.

론을 말씀드립니다. 부흥회가 한국교회 성장에 긍정적 기여를 한 것은 부인할 수 없 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여건만 허락된다면, 말씀에 집중하는 건전한 부흥회는

얼마 든지 바람직합니다. 참된 회개, 격려, 감사, 그리고 헌신을 강조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리고 성숙한 신도들의 자발적인 헌금도 많을수록 좋습니다.

하지만 교인들을 겁 주고, 억누르고, 속 뒤집고, 울리고, 웃기고, 기만하고, 그러다가 결국에는 거액의 돈을 슬그머니 챙기는 그런 사이비 부흥회는 앞으로 반드시 없어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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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니다. 이는 거룩한 교회를 장사꾼들이 설치는 '강도의 굴혈'로 만드는 매우 부끄러운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시며,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 은

기도하는

집이

하시니라(눅 19:45~46)."

2011 년 1 월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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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타락과 담임목사 제도 회중이 주체가 되는 교회

국교회 부정과 부패의 중심에는 언제나 담임목사들이 우뚝 서 있습니다. 6 억 원의 연봉을 챙긴 이도, 상습적으로 신도들을 성추행한 이도, 자식에게 담임직을 세습한

이도, 거액의 교회 공금을 횡령한 이도, 그리고 법원 명령까지 불응하며 재정 장부 공개 를 버티는 이도 모두 다 소위 '담임목사'라는 분들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비행으로 인하여 교인들의 억장이 무너져도 별로 개의치 않는 듯 합니다.

그래서 많은 목회자들은 예배당을 우상화하여 '성전'이라고 열심히 주장하지만, 오히려 다른 비판자들은 성전이 아니라 '복마전'이라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악의 소굴로, 사람들에게 해를 입히는 부패와 비리의 온상지를 우리는 흔히 복마전이라고 합니다.

그동안 한국의 여러 대형 교회들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사태들을 보며, 이들의 '공동의 회'는 과연 무엇을 하는 곳인가 하는 큰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 세습 승 인, 성추행 감싸기, 공금 횡령 은폐, 예·결산 날치기 통과, 그리고 초대형 예배당 신 축 등이 모두 이들 공동의회의 자랑스러운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일방적인 설교권과 무제한 발언권

러므로 한국교회의 가장 큰 취약점 중에 하나가 회중을 대표하는 공동의회에 있다는 점을 먼저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현실적으로 공동의회가 담임목사의 '거수기'

노릇하는 것을 막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특히 대형 교회에서 공동의회는 담임목사의 입김대로 의사 진행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중요한 안건에 대해 보통 90% 미 만의 지지를 받으면, 오히려 그것이 이변이라고 할 정도입니다.

그 이유는 담임목사가 막강한 설교권을 갖고 있어, 평상시 특정 사안에 대한 신도들의 선입관과 여론을 거의 좌지우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집단에서든 일방적인 발 언권이 무서운 이유는 모두 잘 아실 것입니다. 특히 맹신적인 목사 숭배가 폭 넓게 일 반화한 한국교회에서는 특정 개인이나 소수파가 담임목사를 견제하기란 현실적으로 매 우 어렵습니다. 오히려 잘못하면 이단이나 사단의 앞잡이라는 누명을 쓰고 쫓겨나기 일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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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수천 명이 참석한 회의에서 개인들에게 발언권을 골고루 주고, 충분히 토론할 시간을 얼마나 줄 수 있을까요. 기술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따라서 대형 교 회는 강단에서 '무제한 발언권'을 지닌 담임목사가 자연스럽게 '수령'이 될 수밖에 없 는 '허약 체질'이 되는 것입니다. 도대체 한국교회 역사상 대형 교회 공동의회에서 담 임목사가 추진하는 중요 안건이 부결된 사례가 얼마나 있었을까요.

그 덕분에 한국교회에는 대를 이어 충성하시는 세습 목회자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 습니다. 본인들은 이런 세습에 대하여 얼마나 긍지를 느끼며 자랑스러워할는지 잘 모 르겠지만, 이는 전 세계 어느 나라 교회사에서도 보기 힘든 대단히 수치스러운 행위입 니다. 유감스럽게도, 무려 한국 대형 교회의 약 70%가 공동의회의 합법적인 승인을 받 아 세습을 한다고 합니다.

어용화한 공동의회, 당회, 그리고 제직회

실 모든 신도들이 교권주의자들의 간교함을 정확히 이해하고 불의한 안건에 대해서 소신껏 거부할 수만 있다면, 교회의 크기 자체가 문제가 될 리는 없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많은 신도들은 담임목사를 나머지 직분자들이나 일반 신도들과 는 달리 다소 '성스러운 신분'으로 크게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목사들은 그나마 조금이라도 '聖'스러워지지는 못하고, 도리어 갈수록 '性'스러워져서 큰 탈입 니다.

하여튼 고용 측면에서만 본다면, 목사는 교회가 임명하고 고용한 '유급 직원'의 하나 일 뿐입니다. 그런데 '고용주'인 회중이 '피고용인'인 목사를 상전처럼 떠받들고 오히 려 그에게 휘둘리고 있으니, 정말 한심한 일입니다. 게다가 이제는 이 못된 하인이 주 인의 자녀들을 상습적으로 성추행까지 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힘겹게 돈을 잘 바쳤더 니, 이제는 몸까지 바치라고 합니다.

문제는 신도들이 목사의 월권과 독재에 지나치게 관대하다는 데에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하루아침에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권주의에 깊이 중독된 신도들의 의식이 변하려면, 아직도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개신교는 전통적으로 목사직을 다른 직분에 비해 지나치게 존중하는 관습이 있어 왔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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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대형 교회에서는, 당회나 제직회 역시 담임목사의 독주를 막기에는 역부족입니다. 당회원만 해도 수 백명이 되는데, 목사가 홀로 독주할 때에 무슨 수로 서로 의견을 모 으고 견제를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교회의 부서장과 기관장 등 중요한 요직에는 대부분 담임목사에 순응하는 사람들을 기용하기 때문에, 당회나 제직회 역시 '목사의 시녀'로 전락하는 경우가 흔합니다. 회중이 주체가 되는 교회 독재를 막을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대안은 담임목사직을 다스리는 기능과 이런함께목회폐지하고, 설교하며 가르치는 사역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전문화하는 것입니다. 명칭도 '전임 설교자'나 '시무 목사' 등으로 바꾸면 좋을 것입니다. 당회장은 다른 장 로들이 임기에 따라 돌아가면서 교대로 수행하면 됩니다. 교회의 주요 사업 관리나 행 정 등은 모두 공동의회에서 선출된 시무 장로들이 구성한 당회의 주관 아래서 이루어 집니다. 이런 '집단 지도 체제'는 담임목사제보다 훨씬 투명하고 민주적인 교회 운영 을 가능하게 합니다.

영국의 청교도들에 의해 시작된 '회중 교회(Congregational Church)'가 이와 유사한 제도를 지니고 있습니다. 다만 그들은 장로제를 두지 않고 집사제만을 운용하며, 전체 교인 중에서 선출된 대표들로 '평의회'를 구성합니다. 그 안에는 필요에 따라 여러 ' 위원회'를 두어 예배, 교육, 재정, 전도 등을 맡아 봉사하게 합니다. 각 위원회 의장 의 임기는 대개 일 년으로 하며 순수하게 봉사하는 직분입니다.

회중 교회에서 시무 목사의 주요 직무는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고, 가르치고, 그리고 성례전을 집례하는 것으로 제한됩니다. 목사는 오직 말씀 사역을 담당할 뿐, 제반 교 회의 모든 사업과 행정은 전적으로 일반 신도들이 중심이 되어 결정하고 집행합니다. 그래서 목사직을 포함한 모든 직분들 간의 평등이 잘 실천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교회의 부정과 부패를 막기 위한 제도적 장치가 매우 잘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 는 세계적 전도자 무디 선생도 바로 이 회중 교회 출신입니다.

그런데 만일 현실적으로 담임목사직 폐지가 당장은 어렵다면, 차선책으로 중대형 교회 담임목사와 시무 장로들의 연임을 적절히 제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목사 독재나 장로 독재를 제도적으로 사전에 예방하기 위함입니다. 한 교회에서 10 ~ 40 년 이상 하는 장기 사역은 비교적 순수한 목회자들마저도 부정과 독재의 유혹에 빠지 게 만듭니다. 가톨릭의 경우, 주기적으로 여러 사제들이 각 지역을 순환하며 동역합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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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런 연유로 지역 교회에서 '구조적인 부패'가 발생하기 매우 힘듭니다. 흐르는 물은 썩지 않기 때문입니다.

임을 제한해야 하는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그동안 담임목사 재신임 투표시에 너무나 많은 부작용이 표출되어서입니다. 부도덕한 담임목회자들은 재임 기간 중에

부지런히 자기 사람을 늘리고 세력을 확장하여, 재신임 투표 때마다 교회가 분쟁에 휩싸이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하여튼 한번 잡은 밥그릇은 절대로 놓지 않는 것이 한국교회 교권주의 목사들의 본능적 전통입니다. 이를 잘 알고도 그들에게 제도적인 허점을 제 공한다면, 이는 매우 어리석은 일이 될 것입니다.

직분자 임기제 역시 중대형 교회에서는 꼭 필요한 제도입니다. 담임목사를 위시하여 시무하는 당회원 전체의 임기를 개교회의 여건에 따라 약 2~7 년으로 정하여, 특정 개 인이나 집단이 교회 내에 세력을 형성하고 교권을 남용하는 일을 예방하도록 하면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현재보다 모든 교회의 감사 기능을 크게 강화하여야 합니다. 감사 위원회는 장 로나 집사들로 구성하면 좋을 것입니다. 아울러 감사 결과는 회중을 대표하는 공동의 회에 매년 문서로 보고토록 합니다. 여기에는 교회의 사업, 재정, 인사, 행정, 그리고 기타 관리에 대한 중요 내용이 포함됩니다. 특히 재정 감사의 경우는 필요시 외부 전 문가도 참여할 수 있게 하여 그 투명성과 전문성을 보장하면 더욱 좋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위와 같은 내용들을 구체적으로 교회 정관에 문서화하여, 사전에 불필요한 논쟁의 소지를 최대한 줄이고 늘 체계적이며 투명성이 있는 교회 운영에 힘써야 할 것 입니다.

런데 만일 위에 전술한 대안처럼 교회를 개혁한다면, 아마 신학교 지원자가 급감할 것입니다. 목사가 부유해질 수 없는 것은 물론, 그나마 철밥통도 보장이 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안정한 직업 중에 하나가 될 수도 있습니다. 어느 교회도 평생 고용을 보장해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그럼 누가 그런 피곤하고 배고픈 목회를 하겠느냐"고 따지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제발 목회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편안하고 안정된 삶을 살고 싶으면, 절대로 목회하지 마시고 부디 다른 직업을 찾아보십시오. 지원자가 너무 적어서 경쟁력이 없는 신학교들이 줄줄이 문을 닫고, 교회들이 시무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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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워져도 좋습니다. 또한 목사직이 너무 고생길이어 서, 신랑감으로 기피하는 첫 번째 직업이 되어도 좋습니다. 오히려 필자는 그런 신선한 세상에서 한번 살아 보면 좋겠습니다.

매우 안타깝고 가슴이 아프지만, 담임목사직이 철밥통이 되는 한 한국교회의 갱신은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이런 가혹한 개혁만이 '목회자 저질화'와 '신학교 난립'을 해결 하고, 동시에 세습을 뿌리 뽑고 거룩한 교회가 다시 새로워지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 합니다. 앞으로는 '밥그릇'이 아니라, '소명'에 자신의 삶을 바친 목회자들만이 한국 사회에서 참된 존경과 신뢰를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한국식 담임목사 제도는 바리새인의 누룩 종교개혁 전까지는 교회 내에 '목사'라는 직분이 없었습니다. 단지 '사제'만이 사실있었습니다. 그러나 루터, 칼뱅, 그리고 츠빙글리 등의 종교 개혁자들은 이 사제라는 직제를 극도로 싫어했습니다. 마치 구약의 제사장처럼 일반 신도들과는 다른 계급적 역할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회자에 대해 처음에는 '설교자'나 '사역자' 등의 명칭을 쓰다가, 결국에는 신약성경에 단 한 번 언급된 '목사'라는 용어를 쓰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의 한국교회 담임목사들은 과거 종교 개혁자들이 극히 싫어했던 중세 교회 사제들의 역할을 추구하며 도리어 그 흉내를 내고 있습니다. 목사 직의 성직화, 귀족화, 그리고 교권화가 바로 그것입니다. 오히려 일부 중대형 교회 담 임목사들은 과거 중세 교회의 사제들보다 더 큰 부와 권력을 누리고 있습니다. 이러니 한국교회는 개혁 교회가 아니라, 차라리 '개악 교회'라고 불러야 할 판입니다.

물론 시무 목사가 당회장이 되는 담임목사직에도 장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특 히 교회 성장 초기에는 일원화한 지도력으로 인하여 효율적인 면이 많습니다. 또한 모 든 교인들의 직접 의사소통이 손쉬운 작은 교회에서는 담임목사의 독주도 한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더구나 개척 교회에 무슨 대단한 이권이 있겠습니까. 다만 교회가 어느 정도 성장한 후부터는, 담임목사에게 집중된 지나친 교권으로 인해 득보다는 실이 훨 씬 크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르치는 장로'로서의 목사직 자체는 신약성경에 근거한 중요한 직분입니다. 다만 이 '담임'이라는 명칭은 성경에 전혀 언급되지 않은 직제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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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확히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도대체 한국교회에서 언제부터 누가 이런 명칭을 목 사직 앞에 붙였는지 확실치도 않습니다. 담임목사가 자동적으로 당회장이 되어 교회 모든 일을 주관하고 관여하는 더욱이 이유 를 설득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교회를 대표하고 다스리고 돌보는 일은 목사의 업무 가 아니라, 본래 장로나 감독들의 주요 직무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보더라도, 이 담임 목사라는 직책은 '바리새인의 누룩'처럼 사람이 임의로 만든 지극히 교권주의적 '유전 '임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게다가 요즘 당회장들은 아예 '왕회장' 행세까지 하여 문제 를 더욱 심화시키고 있습니다.

혹자는 사도 바울이나 베드로가 초대교회에서 지녔던 특별한 지위를 이유로, 목사직의 우월성을 주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신약 교회에서 목사직은 사도직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직분보다 우월할 성경적 근거가 전혀 없습니다. 심지어 사도들조차도 말 씀 사역에 몰두하기 위해, 다른 사역들은 집사들에게 위임하였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 입니다.

결론은 사실 단순합니다. 성경의 원리대로 장로는 다스리고, 목사는 가르치고, 그리고 집사는 구제하고 봉사하는 일에 충실하면 됩니다. 각자 제 자리를 지키면 된다는 뜻입 니다. 대부분의 교회 문제는 목사들이 자기 분수를 넘어 다스리려고 월권하며 사욕을 부려서 생깁니다. 한국교회에서 가장 교회 개혁에 저항하는 세력이 누구일까요. 바로 이들 담임목사들입니다.

모든 교권은 회중으로부터 많은 교회에서 회중을 대표하는 공동의회가 변질된 담임목사들에 의해 기만을 오늘날 당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로 신학은 교권의 시녀가 되고, 개혁 신앙은 기복 신앙의 시녀가 되고, 십일조는 맘몬의 시녀가 되고, 그리고 직분자들은 담임목사의 시녀가 되어 버렸습니다. 오직 극소수의 교회만이 예외입니다.

도대체 한국교회에 더 이상 보여 줄 순수한 그 무엇이 얼마나 남아 있습니까. 입으로 는 늘 복음을 말하지만, 행동은 크게 사이비한 교회가 한국교회입니다. 겉과 속이 극 단적으로 다른 가증된 교회가 된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이 지경이 이르게 된 데에는 ' 담임목사 제도'라는 비성경적인 교권 남용에 큰 책임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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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 개인이나 직분이 회중 위에 군림하며 교권을 행사하도록 허용한 성경바가어디에도, 없습니다.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시며, 모든 성도들은 교회의 지체입니다. 또한 각 지체들 간에 계급적 우열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증거하는 진리 이며, 아울러 개혁 교회의 신조입니다.

따라서 과도한 교권을 독점한 한국식 담임목사직은 개혁 교회에 합당한 직분이 결코 아닙니다. 교회 내에서는 그 어떤 직분도 다른 직분보다 우월하지 않고, 그 어떤 직분 도 다른 직분을 지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가 바로 서려면, 먼저 담임목사가 과소유한 교권을 회중에게 다시 돌려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교권은 회중을 대표하는 공동의회로부터 위임을 받아 정당하게 시행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비로소 한국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인 회중이 교회 운영의 주체가 되는 건강한 교회가 될 것입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 12:27)."

2011 년 1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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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밖에 모르는 예수쟁이들 반성이 필요한 교회 중심 생활

일 아침이 되면, 먼저 9 시 교회 학교 예배에 참석합니다. 중고등부 교사이기 때문입 니다. 교회 학교 다음은 11 시 대예배입니다. 예배 후에는 바로 성가대 연습이

있습니다. 그 뒤 점심 식사를 마치고 오후 2 시 청년부 집회에 참석합니다. 조별 모임까지 다 끝나면 4 시 30 분 정도가 됩니다. 그러다 보니 7 시 저녁 예배 시간이 다소 어중간합니다. 그래서 대개는 교회에서 나머지 오후 시간을 보내다가 저녁 예배에 참석합니다. 이렇게 집에 돌아오면 밤 10 시가 되는 것이 보통입니다. 주일 하루 온종일을 교회에서 보낸 셈입니다. 그 외에도 틈이 나는 대로 수요 예배, 금요 기도회, 토요 모임, 새벽 기도회, 구역 예배 등에 참석합니다. 물론 평일에는 직장에 나가서 토요일 오전까지 근무를 해야 합니다.

필자가 잘 아는 어느 청년의 실제 교회 생활을 잠시 열거해 보았습니다.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교회 내에 이런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주일 아침 교회 학교부터 시작해서 대예배, 성가대 연습, 부서별 오후 집회, 그리고 저녁 예배까지 교회 내의 여러 모임에 참석하고 밤에 집으로 돌아오면 몸이 거의 녹초 가 됩니다. 식사 준비나 설거지 등 교회 허드렛일도 모두 교인들의 몫입니다. 게다가 장로나 권사 등 주요 직분자들은 목사님의 눈총을 의식해 주일 새벽 기도회를 거르기 도 불편합니다.

히 목회가 힘들다는 말을 많이 듣지만, 신도들도 결코 쉽게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 다. 평일에는 직장이나 가사일로 시달리고, 주일마저 제대로 쉬지 못할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니 교인들이 평일에 사회에서 제대로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 것이 도리어 기적 입니다. 아마 전 세계 어디에서도 한국교회 신도들보다 더 심하게 한 주일 내내 돌림방을 당하는 교인들은 보기 힘들 것입니다.

그래서 비신자들 중에는 '교회에 나가고 싶어도, 너무 피곤하게 해서 겁난다'고 말을 하는 분도 있습니다. 더구나 교회 내의 집회나 프로그램이 더욱 다양해지고 있어 갈수 록 더 분주해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어느 대형 교회는 매일 새벽 기도회에 모이는 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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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까지 한다니 문제가 더욱 복잡합니다. 하여튼 한국교회의 열심은 정말 알아주어야 합니다.

절제가 필요한 교회 중심 생활 한때는 '교회 중심 생활'을 매우 사랑했습니다. 교회에 가면 편안하고 행복했 필자도 습니다. 성경을 배우는 것이 너무 기뻤고, 믿음의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이 즐거웠습니다. 또한 존경할 만한 목회자들과 친절한 성도들이 마냥 좋았습니다. 친구의 인도로 처음 출석한 교회에서 예수님을 만났고, 사랑을 배웠고, 그리고 성경 이야기 속에서 꿈을 키웠습니다.

하지만 이런 교회 중심 생활에도 큰 절제가 필요함을 깨달은 것은 한참 후의 일입니다. 그 이유는 신자들 삶의 중심이 예배당뿐만이 아니라 오히려 가정, 직장, 학교, 지역 사회 등 '인생의 전 영역'에 균형이 있게 자리해야 옳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신도들은 매우 성공적인 '선데이 크리스천'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 감스럽게도 '에브리데이 크리스천'이 되는 데에는 크게 실패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매우 경건하고, 가정에서는 약간 경건하나, 정작 사회에서는 별로 경건하지 않은 이중생활을 합니다. 주일날 교회에서는 모두 다 독실하신 장로, 권사, 집사 그리고 교 사이신데, 평일에 직장이나 학교나 지역사회에서는 이분들이 다 어디에 숨어 계시는지 그 향기를 느끼기 힘듭니다.

오히려 평소에 참으로 야박하고 까다롭기로 소문난 어떤 직장 상사가 한참 나중에 알고 보니 교회 장로라는 말을 듣기도 합니다. 부패와 탐욕으로 큰 비난을 받는 어느 유명 인사 역시 장로라는 말을 듣고 크게 놀란 적도 있습니다. 더구나 직장에서 점심때 마다 꼬박꼬박 기도를 잘하는 동료 집사가 매우 이기적이며 인색한 사람이라는 주위의 평을 들으면 마음이 많이 아픕니다. 또한 교회에서는 제사장처럼 경건하신 목사님이 막상 가정에서는 진정한 사랑과 존경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실 교회 내에서 경건한 신자 노릇을 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마치 온실에 서 화초를 키우는 일과 비슷합니다. 믿음 좋은 모습으로 교회 일을 열심히 하겠다는데 누가 말리겠습니까. 정작 큰 문제는 사람과 사람이 부딪치고, 생각과 생각이 부딪치고, 그리고 이익과 이익이 부딪치는 세상 속에서 신자다운 삶을 사는 것이 정말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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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한국교회 '대형화 추구' 현상의 이면에도 바로 이 '교회 중심 생활'을 잘못 오 용한 측면이 있습니다. 목회자들의 깊은 자성이 있어야 합니다. 이분들은 신도들이 세 상 속에서 구별된 삶을 실천하는 한 알의 밀알이 되기보다는, 우선적으로 교회에 '죽 도록 충성하는 일군'이 되기를 바라고 또한 그렇게 유도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외형적 성장에 당장 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우선일까요, 아니면 가정이 우선입니까. 어떤 목회자들은 쉬운 이야기 도 매우 어렵게 돌려서 말하는 특별한 재능을 지니고 있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적절한 균형이 있는 것이고, 양자택일의 극단적인 경우라면 가정을 돌보는 것이 우선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가정보다 교회에 열성인 신앙생활을 강조하는 것은 본래 이단과 사이비 교단의 주요 특징 중에 하나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소위 보수 교단에 속하는 교 회들에서조차 이런 생활을 은근히 따라 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한국교회는 평생 교회 일에만 매달려 매주 세월을 보내게 하고, 실제 가정과 사회에는 별 유익과 영향을 주지 못하는 미성숙한 기독교인을 양산하고 있습니다. 그 래서 기독교인의 수가 거의 천만 명에 이르렀지만,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는커녕 오 히려 사회의 손가락질을 받고 있습니다.

한 신도들의 교회 경력은 계속 높아지지만, 속사람이 별로 새로워지지 못하고 있습 니다. 과거 새신자일 때나 집사나 장로가 된 지금이나, 신앙적 미자립 상태로

변함없이 그저 담임목사의 모유만을 찾는 발육 부진의 신앙생활에 머무르는 경우를 흔히 봅 니다. 그리고 상당수의 이런 사람들이 직분자라고 양복 입고 무게를 잡으며 목사의 시녀 노릇이나 하고 있으니, 오늘날 한국교회가 이 모양 이 모습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는 성장하더라도, 교인은 별로 성장하지 못한 곳이 바로 지금의 한국교회 입니다. 많은 목회자들은 교회의 이름으로 모이고, 돈 내고, 건물 짓고, 선교하고, 구 제하고, 그리고 봉사하는 일을 목이 터져라 강조하여 교회 성장에 큰 재미를 보고 좋 아합니다.

하지만 이분들은 같은 순간에 가정과 직장과 사회 속에서 신자들의 삶이 서서히 망가 지며 고통 받고 있음을 크게 간과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일부 귀족 목사님들의 배부르 고 오만한 행태를 보면, 도대체 신도들의 그런 고통에 제대로 관심이나 가지고 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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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숙한 신자로 사는 일 모이는 일에는 성공하고 있으나, 흩어지는 일에서 크게 실패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끼리끼리 모여 지지고 볶는 일에는 이미 경지에 이르렀으나, 지역사회에 소망을 주고 유익을 주는 일에서는 큰 낭패를 보고 있습니다. 각자 삶의 영역에 흩어져 신자답게 사는 일에서 그만 쓴잔을 마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 탈세한 장로 사장이 욕을 먹고, 직장에서 이기적인 집사가 따돌림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권사 시어머니와 집사 며느리가 서로 반목하고 있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누구도 그리 쉽게 자유롭지 못합니다. 필자 역시 과거 신자답지 못 하게 처신한 행동이 문득 떠오를 때면, 밤에 이불 속에서도 혼자 얼굴이 뜨거워질 때 가 있습니다. 틈만 나면 잘난 척하고, 남을 가르치려만 들고, 부동산 투기에 동조하고, 사치 풍조에 어울리고, 불의한 이익에 관대하고, 가난한 친척과 이웃에 무심하고, 직장에서 적당히 시간을 때우고, 부하 직원에게 거칠고, 그리고 가정에서 완고한 것이 우리들의 한심한 모습입니다.

즘 교회와 교인들은 넘치는데, 참된 제자들을 보기 힘들다고 합니다. 교인들이 '신자다운 삶'을 사는 데에 실패한 결과입니다. 수십 년 동안 시계추처럼 교회만

왕래하 면 뭐합니까. 사람이 좀 달라져야지요. 허구한 날 성경을 배우고 연구만 하면 뭐합니 까. 나가서 실천을 해야지요. 신도들의 생활을 진정으로 변화시키지 못하는 신앙은 잘 못된 신앙입니다.

따라서 이제라도 우리는 구태의연한 교회 중심 생활을 깊이 반성해야 합니다. 아울러 가정과 직장과 사회 속에서 신자다운 삶을 먼저 회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특히 목회 자들부터 근본적으로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교인 수에 집착하고 교회 성장에 촉각을 세우기 전에, 먼저 교인들이 어디에서든 독립적인 신앙 인격을 갖추고 신자답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모두들 자기 권리를 철저히 챙기는 이 영악한 시대에, 우리 신자들만이라도 조 금 손해를 보고 살면 좋겠습니다. 가정의 화평을 위해서라면, 내 권리와 편리를 크게 양보해야 합니다. 나 자신의 희생이 없는 화평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또한 진정으로 변화된 그리스도인이라면 따뜻한 시어머니와 착한 며느리가 되어야 합니다. 부모, 남편, 아내, 형제, 그리고 자녀도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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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에서도 전도에 욕심부리기 전에, 우선 남들을 세워 주고 도와주는 마음이 선행되 어야 합니다. 진급이 좀 늦어지면 어떻습니까. 가능하면 남보다 조금 더 나누어 주고, 조금 덜 가져야 합니다. 시장에서도 너무 깎지 말고 제값을 주고 사면 좋겠습니다. 남 들은 일부러 구제도 하는데, 영세한 상인들에게 박절해서야 되겠습니까.

이런 면에서 신자들은 세상에서 다소 어수룩해 보이고, 바보가 되어도 좋을 것입니다. 모두들 자신의 이익을 철저히 챙기는 빡빡한 세상에서 신자들만이라도 좀 윤활유가 되 고 향유가 되면 좋지 않을까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모아 헌금을 많이 한 들 무슨 영적 유익이 있겠습니까. 오히려 예수님을 만나고 변화된 삭개오처럼 자기 것 을 비우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세상과 소통하는 신자가 되어야

국교회의 참된 성공은 큰 건물을 짓거나 많은 예배당을 늘이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설교를 잘하는 유명 목사들이 많아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계속해서 장로 대통령이

나오고, 장로 기업인들이 많이 늘어나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진정으로 시급히 필요한 것은 교회는 물론, 가정과 사회 속에서 제자 된 삶을 구체적으로 성실히 실천하는 '경건한 신자'들이 늘어나는 일입니다.

목회자들이 먼저 전심으로 힘써야 할 일은 '교회의 성장'이 아니라, '교인의 성장'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제라도 우리는 교회밖에 모르는 예수쟁이, 복만 밝히는 예수 쟁이, 겉과 속이 다른 예수쟁이, 강자들 편에만 서는 예수쟁이, 부와 권력을 탐하는 예수쟁이, 타 종교에 무례한 예수쟁이, 이웃에 냉담한 예수쟁이, 그리고 사회 정의를 외면하는 예수쟁이 생활을 필히 청산해야 합니다.

아울러 '헤롯 성전'을 폐하신 예수님처럼, 필요하다면 우리도 '예배당'이라는 높은 울 타리를 허물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속에서만 거룩한 척 위선하지 말고, 세상에 실제 적인 도움을 주며 소통하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이 욕을 하든 말 든 예배당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유아독존하는 신자가 되어서는 곤란합니다. 갈수록 어두워지는 이 세대에 예배당 속에 안주하는 신도들은 단지 빛을 잃은 등불이며, 맛을 잃은 소금이 될 뿐입니다.

리는 이미 신자다운 삶을 사는 데 무수한 실패를 했고, 또한 앞으로도 계속해서 실망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결코 좌절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손해보고 사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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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워해서도 안 됩니다. 오히려 용기를 내어, 기필코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따르겠다 는 거룩한 다짐이 필요할 때입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주어진 삶 속에서 어찌하든 제자답게 한번 바르게 살아 보자고, 때로 는 잠을 설쳐 가며 기도하고 고심하는 진정한 예수쟁이들이 더욱 많아지기를 기대해봅 니다.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 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 5:42)."

2011 년 2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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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을 거부하는 개혁 교회들 부패한 중세 교회의 사생아

국교회를 보노라면, 중세 교회의 유전자를 매우 성공적으로 복제한 느낌이 듭니다. 어쩌면 그렇게 나쁜 점만 골라서 잘 따라 하는지 경이로울 정도입니다. 16 세기

종교개혁의 철퇴를 맞고 역사에서 사라진 중세 가톨릭이 오늘날 이 땅에서 다시 개신교로 둔갑하여 기승을 부리고 있으니 이는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또한 작금의 한국교회는 제대로 한번 견실한 성장을 해 보기도 전에, 그만 정신 나간 솔로몬처럼 늙어 버린 기분이 듭니다. 조로증에 걸린 것입니다. 그리고는 노쇠한 중세 교회처럼 '교권 독재' 아래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많은 교회에서 담임목사가 구약의 제사장이 되고, 중세 교황과 주교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현실이 이를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일부 대형 교회 목회자들을 한번 보십시오. 교주도 이런 교주가 없습니다. 재벌이 부 럽지 않은 부와 권력을 누리고 있습니다. 검소하게 살아야 할 목사들이 무슨 염치로 수 억의 연봉을 받는 것입니까. 목사가 왜 고급차를 타야 합니까.

더구나 이들의 말 한마디에 정치권이 휘청거리기도 합니다. 자신들의 교회 내에는 숨겨진 불의와 편법이 가득하건만, 오히려 주제 파악을 못하고 도리어 세속적 영향력까지 넘보고 있습니다.

경을 무시하는 일부 목회자들은 언제나 동역자인 장로나 다른 직분자들에게 자신을 보좌하라고 요구합니다. 그리고 입술로는 '주의 종'이라면서, 사실상 '교회의

왕'으로 변절하여 버렸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겉으로 빛나는 성과들을 내세우고 우쭐하고 있지만, 실제 하나님나라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이미 적지 않은 교회에서 예배, 교육, 구제, 선교, 그리고 사회사업이 단지 교회 성장 을 위한 비즈니스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그럴 듯한 눈가림으로 순진한 양들을 유혹하여 교세를 확장한 후에는, 수시로 '양털 깎기'를 즐기고 있습니다.

아울러 이들은 언제나 경건으로 위장하고, 고도의 잔수를 부리며 교회를 사유화해 나 갑니다. 교회가 조금만 커지고 유명해지면, 목사가 이상해집니다. 젊어서는 열정이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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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순수해 보이던 작은 교회 목사님들도 신도들이 늘고 허리에 뱃살이 좀 붙으면, 슬슬 느끼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유유상종 몰려다니며 서로 배우고 익히는 것이 양들의 육신과 영혼을 희롱하 며 은밀하게 돈을 챙기는 모리배 수법들뿐입니다. 단지 개교회들만 부패한 것이 아니 라, 노회, 연회, 총회 줄줄이 올라가면서 더욱 극심합니다. 개교회의 부정을 노회나 총회가 방패가 되어 눈감아 주기도 합니다. 최근에 연속되는 교회 공금 횡령이나 성추행 사건들은 그런 빙산의 일각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나마 앞으로는 작은 교회들이 성장하기가 더욱 어렵게 되었습니다. 큰 교회들이 시장을 모두 다 선점하였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양극화로 이제 남은 곳이라고는

이권은 커녕, 고생길만 남은 미자립 교회들뿐입니다.

한국교회가 역사적 개혁 교회의 이단아가 되어 중세 교회의 사생아로 변질된 증거들은 이미 충분합니다. 우리 주변에 일반화된 사실상의 성직 매매와 세습, 세속적 명리와 부를 탐하는 맘몬주의, 돈을 주고받는 교단 선거, 신도들의 우민화와 맹신화, 그리고 무엇보다도 오만한 교권 독재와 교회 사유화가 대부분 이들 담임목사들의 작품이기 때 문입니다.

그 결과 순수하게 사역하시는 존경할 만한 목회자들은 거의 다 그늘에 가려지고, 제사 장처럼 권위적인 목사 가운을 걸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려 하는 인사들이 더욱 득세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장기간에 걸쳐 잘 조련된 다수의 맹신도들이 순종과 맹종을 구분 못 하고, 이들의 뒤를 든든하게 밀어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가르치는 자나 배우는 자가 모두 한 덩어리가 되어 변질되었으니, 이제 무엇을 더 기대할까요. 매주 모여서 적당히 경건한 척하고, 적당히 헌신하고, 복 타령으로 열 심히 돈을 걷어, 끼리끼리 자족하며 잘 먹고 잘사는 일만이 남았을 뿐입니다.

그런데 어느 분이라도 이런 것을 진정한 복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복음을 크게 오해 하는 것입니다. 사랑과 고난을 나누는 십자가의 도는 잃어버리고 사람과 건물만이 허 세를 부리는 교회, 이것이 바로 지금 한국교회의 헐벗은 모습입니다. 시작된 중동 지역 민중 봉기를 우리는 '재스민 혁명'이라고 합니다. 그 튀니지에서 두드러진 특징은 아래에서 위로 향한 자발적인 시민혁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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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혁명이 이런 모습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언제나 기득권자들이 스스로 권력을 내려놓는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수 천명의 사람들이 죽어 넘어지더라도 독재자 들은 끝까지 버티려고 합니다.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각 교회와 교단의 교권을 장악하고 있는 기득권 목회자들 은 누가 끌어내리기 전까지는 결코 스스로 내려오려고 하지 않습니다.

최근의 한기총 사태 역시 이를 잘 설명해 준다고 봅니다. 수십 년 동안 자주 보던 얼굴들이 별로 바 뀌지 않고 계속 서로 충성을 다하겠다고 몸부림을 치고 계십니다. 가장 비개혁적이고, 오히려 개혁 대상 일순위인 인물들이 개혁 교회 연합 단체의 대표가 되겠다고 나서니 참으로 우스운 일입니다.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까요. 스스로는 결코 변화하지 않겠다는 교회! 이것이 현재 한 국교회의 슬픈 모습입니다. 그래서 결론은 언제나 또 다시 반복됩니다. 일반 신도들이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신도들의 거룩한 혁명이 시작되어야 합니다.

프랑스 혁명처럼 총를 들거나 무기를 든 물리적 혁명이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을 바르 게 따르고 나아가려는 신앙적 혁명입니다. 성경 어디에 목사가 '교회의 왕'이 되어 군 림하도록 적혀 있습니까. 오히려 다스리고 관리하는 일은 장로나 집사들에게 맡기고, 가르치는 일에만 전념하라고 하시지 않습니까. 이게 그리도 이해하기 힘든 내용인지요.

목회자들은 항상 말씀에 순종하라고 설교하면서, 왜 자신들은 말씀을 따르지 않습니까. 그래도 교인들보다 한 줄이라도 더 배웠으면, 더 좋은 모범을 보여야 할 것이 아닙니 까. 아니면, '신앙 따로, 생활 따로'인 따로국밥에 양심을 말아드셨습니까.

국교회는 스스로 개혁을 거부하는 변질된 개혁 교회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거짓과 기만을 몰아내고, 또한 미신과 우상을 타파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 역시

과거 이방의 처첩들 속에서 잡신들과 동거했던 또 하나의 노쇠한 솔로몬 왕이 될 것입니 다.

오늘날 부패한 교권주의자들은 솔로몬 당시 이방의 처첩들과 다를 바가 별로 없습니다. 이들은 '왕 같은 제사장'인 신도들을 '세속적 복'이라는 우상의 노예로 만들고, 속이고 미혹케 하는 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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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한국교회는 이 음란한 동거녀를 단호히 배척해야 합니다. 그리고 첫사랑을 회복하고 성전에서 기뻐하던 솔로몬의 옛 신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재스민 혁명보다 더욱 강한 것은 '평신도 혁명'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진정으로 변 화되기만 한다면, 결코 '세상이 감당치 못할' 사람들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히 11:38)."

2011 년 2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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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없이는 살아도, 십일조 없이는 못 산다 십일조 강요로 무너지는 한국교회

기 한국교회는 가난했습니다. 나라 전체가 궁핍했던 시기였기에 목회의 길은 경제적 으로 무거운 십자가를 지지 않고는 갈 수 없는 길이었으며, 예수교인이 된다는 것은

이런 고난에 동참을 각오해야 하는 비장한 길이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언제부터인가 달라졌습니다. 한때는 외국 원조 식량을 배급받기 위해 줄을 서던 사람들이, 이제는 여윳돈을 굴리기 위해 증권사를 기웃거리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드디어 어떤 이들에게는 때가 찬 것입니다. 일제강점기부터 신사참배마저 수용하며 교 권에 집착하고 기생하던 세력들에게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자고 나면 불어나는 양들의 뽀얀 속살이 더 이상 참기 어려운 유혹이 된 것입니다.

하지만 십일조를 일방적으로 의무화하기에는 신학적으로 장애가 너무 크다는 점을 알 았습니다. 그래서 '강제적 십일조가 아닌, 자발적 십일조를 해야 한다'는 희한한 논리 를 개발했습니다. 구약 율법에 따른 십일조가 아니라, 십일조의 정신에 따라 주신 은 혜에 감사하여 자원하는 마음으로 십분의 일을 바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십 일조를 바치면, '구약의 말씀에 따라 큰 복을 받는다'고 무당 굿거리 같은 소리를 단 체로 합창하고 있습니다. 논리입니다. 십일조 자체가 강제적인 것인데, '자발적인 십일조'라니 이 정말무슨이상한 말장난인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국세청에 '자발적인 세금'을 추가로 내는 기업인을 보신 적이 있던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궤변적 논리가 순진한 신도들에게 잘 통해서 한국교회는 세계에서 유일한 '십일조 왕국'이 되어 수십 개의 초대형 교회들을 거느리며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한국교회는 가히 '십일조를 위한, 십일조에 의한, 십일조의 교회'라 할 수 있습니다. 목사는 십일조를 위해 목회하고 신도들은 무리하게 바치느라 허리가 휘 고 그리고 교회는 십일조에 의해 운영됩니다. 아울러 십일조가 동력이 되어 교회를 공 룡화시키고 있습니다. 교회 사업 역시 십일조 영업 실적에 따라 새로 수립되고 추진됩 니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십자가 없이는 살아도, 십일조 없이는 못 사는 엽기적인 교 회가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십일조가 우상이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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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여기서 모든 교회들이 다 이렇다는 주장은 아닙니다. 상당수의 교회가 그렇다는 의미입니다. 어느 분의 비판처럼 교회 개혁의 문제는 밥그릇 속의 돌같이 주의해야 한 다고 봅니다. 밥 속에 하얀 돌이 한두 개만 있어도 이가 부러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릇 속에 돌보다 쌀이 더 많으니 괜찮다고 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따라서 앞으로 정 당한 지적에 대해 교권주의자들의 상투적인 변명처럼 '일부의 이야기'라는 말은 가능 한 피하면 좋겠습니다.

'자발적인 십일조'는 하나님의 명령이 아니다 알려진 대로, 본래 율법의 십일조는 유대 신정 국가에서 의무적으로 내야 이미하던잘'종교적 세금'이었습니다. 모세의 출애굽 이 후 초기 가나안 정착 당시, 다른 지파들과는 달리 제사직을 담당한 레위 지파만이 땅을 분배받지 못했습니다. 제사 업무로 인해 농사를 지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당시 십일조는 내기 싫어도 무조건 강제적으로 내야만 했습니다. 이처럼 강제로 내야만 하는 재물은 '헌금'이 아닙니다. 헌금이란 반드시 '자발적'이어야 하니까요.

그러므로 율법의 십일조는 처음부터 헌금이 아니라 세금이었습니다. 따라서 많은 교회 에서 '십일조 헌금'이라는 용어를 무분별하게 사용하거나, 또는 십일조를 감사 헌금이 나 건축 헌금처럼 그저 여러 헌금의 한 종류로 취급하는 것은 원천적으로 오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일부에서는 한국교회 십일조의 근거를 '율법의 십일조'가 아닌, '아브라함이나 야곱이 한 십일조'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십일조는 비록 이름은 같지만, 율법에 명령된 십일조와는 크게 다른 '비정기적'이며 '자율적'인 것입니다. 즉 이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십일조가 아닌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실제적으로 강요하고 있는 십일조는 일시적인 '아브라함의 문제는 십일조'가 아니라, 정기적으로 소득의 1/10 을 내는 '율법의 십일조'를 계승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율법의 십일조는 신학적으로 예수님 십자가 사건으로 제사와 함께 폐지된 제도이며, 역사적으로는 주후 70 년 예루살렘 성전의 붕괴와 함께 끝이 난 ' 구약의 제도'입니다.

율법의 강제적 십일조를 역사상 최초로 부활시킨 교회는 부패한 중세 교회입니다. 그 런데 유럽의 개혁자들에 의해 폐지되어 오늘날 가톨릭교회조차도 시행하지 않는 이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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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십일조를 한국의 개혁 교회가 근래에 다시 부활시켰습니다. 이는 '무식하면 용감하 다'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상황입니다.

이 중세적 십일조의 2 차 부활을 결정적으로 크게 주도한 사람들은 부패한 중세 교회와 영적으로 야합한 한국교회의 교권주의자들입니다. 이들이 '교회 사유화'와 '성직 매매 ' 등 중세 교회의 나쁜 점을 기가 막히게 잘 답습하고 있다는 면에서, 한국의 십일조는 중세 교권주의의 사생아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 십일조의 역기능 볼 때 십일조를 하는 기독교인은 절대적으로 소수입니다. 그런데 한국교회 세계적으로 는 유독 십일조를 강조하여 큰 재미를 보고 있습니다. 우선 전체적으로 교회의 재정이 풍족해졌습니다. 그래서 큰 예배당 건축이 가능해졌고 목회자에 대한 처우가 경쟁적으 로 개선되었습니다. 이는 장기적으로 교회의 대형화를 초래했고 아울러 목회자의 귀족 화를 부추겼습니다. 또한 교회 내에서 순수한 믿음과 경건보다 돈의 논리가 우선하는 물질적 세속화를 가져왔습니다.

그 결과 많은 교회에서 목회는 더 이상 십자가를 지는 자리가 아니라, 최고 경영자로 행세하는 자리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사실상 목사가 교회의 삼권을 쥐고 흔드는 기형적인 공동체를 만들어 놓고 스스로 우쭐하고 있습니다. 목사직이 더 이상 종의 자리가 아니라, 교회의 단물을 빨며 중세 영주처럼 군림하는 교권주의자들의 맘몬적 서식처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개교회만 부패한 것이 아닙니다. 각 교단의 노회, 연회, 그리고 총회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더욱 심하게 썩었습니다. 더구나 최근에는 한국교회의 대표 단체 라고 자처하는 '한기총'마저 목회자들답지 못한 극심한 부정과 타락으로 그 교회사적 악명을 온 세상에 과시하고 있습니다. 종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셔서 양들을 섬기며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은 마찬가지입니다. 잘 먹고 잘살다가 장수하고 죽은 제자가 몇이나 있었나요. 거의 대부분이 지지리 고생하다가 제명에 못 살고 순교를 했습니다.

그런데 스스로 '주의 종'이라는 많은 귀족 목사들은 '주의 자녀'들도 타기 힘든 수억 원의 고급 승용차를 태연스럽게 즐기고 있습니다. 목회가 비즈니스입니까? 도대체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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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자가 무슨 영업을 하기에 저렇게 큰돈을 모으고, 비싼 차를 굴리고 있는지요. "거리 에서 미친 사람이 운전을 한다면, 이를 중단시키는 것이 나의 과제이다." 이는 히틀러 의 광란에 저항하던 독일의 신학자 본회퍼가 한 말입니다. 낮아지고 섬겨야 할 목사들 이 억대의 승용차로 거리를 달리는 것 역시 히틀러의 질주와 비슷한 미친 행동입니다. 이는 가난한 이들을 멸시하는 행위이고 동시에 교회를 욕되게 하는 일입니다.

도들은 목회자들에게 성인이나 수도사처럼 청빈하게 살라고 주문하는 것이 결코 아 닙니다. 그저 교인들 평균 수준만큼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아마 루터가 오늘날

한국의 메가처치들을 본다면, 또다시 망치를 들고 교회 현관문에 95 개조 반박문을 못질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지극히 상식적인 것을 한국교회는 왜 못 고칠까요? 이는 목회자들 중에 상당수가 얼굴이 두껍고 파렴치한 '종교 업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아직까지 정신 이 나도록 제대로 맞아 본 적이 없어서이기도 합니다. 그동안 언론에서 나름대로 팼는 데도 자신을 추종하는 신도들 뒤에 숨어 끄떡도 하지 않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부패한 종교치고 기복으로 신도들을 기만하고 그들의 돈을 삼키지 않은 적이 결코 없습니다. 이는 모든 타락한 종교의 공통적인 특성입니다. 유감스럽게 도 한국교회는 선지자적 사명과 종의 모습을 상실한 채 점차 상전의 모습으로 변절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소금이 되어야 할 교회가 자기들끼리 설탕만 뿌리며 희희 낙락하고 있습니다. 정말 그들의 모습 그대로 '웃기는 교회'가 된 것입니다.

십일조의 정신은 교회 확장이 아니다 1/10 을 강조하여 십일조를 강요하고 있지만, 십일조의 참된 정신은 '1/10' 한국교회는 이라는 수치적 용량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난한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사랑'이 그 핵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 자비입니다. 형제를 제대로 돌보지 않으면서, 먼저 교회에 바치는 것을 우선시키는 가르침은 교권 주의자들의 기만적인 술책일 뿐입니다. 이들은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는 것으로 자신들의 탐욕을 위장하는 자들입니다.

인천 지역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하나 소개합니다. 각자 야채 노점을 하는 가난한 두 형제가 있었습니다. 나중에 다행히 형은 좋은 자리를 차지하여 장사가 매우 잘되고 큰 돈을 벌었습니다. 그러자 형은 목사님의 설교대로 십일조를 해서 복을 많이 받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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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나서 버는 대로 교회에 더욱 열심히 바쳤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동생의 가정은 장사가 시원치 않아 너무 어렵게 지냈습니다. 그런데도 교회에 거액의 십일조를 하는 형은 가난한 동생의 가정을 거의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오죽하면 이런 사실이 온 동네 에 소문날 정도가 되었을까요. 덕분에 그 형과 그가 출석하는 교회는 그 동네의 공적이 되어 버렸습니다.

유감스럽게도 한국교회에는 이런 불균형적인 바침이 만연하고 있습니다. 이는 일부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웃은커녕 자신의 친족들마저 제대로 돌보지 않는 인색한 기독교 인들이 우리 주변에 의외로 많습니다. 그런 신자들의 예배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까요. 한국교회는 1/10 을 강조하여 거액의 십일조를 걷는 데에 몰두할 것이 아니라, 십일조의 본래 정신에 따라 형제와 이웃을 돌보는 나눔을 먼저 가르치고 실천해야 합 니다.

한 신자들은 직장이나 사회에서도 바르게 나누며 살아야 합니다. 직장 동료들과 회 식을 한 후에 계산할 때가 되면 번번이 식당 화장실로 슬며시 도망가는 신자가

되어서는 곤란합니다. 그들이 한 번 속지, 두 번 세 번 계속해서 속아 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독실한 집사인데, 사회에서는 인색한 기독교인들이 결코 적지 않습니다.

더구나 요즘은 경제 사정이 어려워져서 서민들이 스스로 자립해서 살기도 힘든 판에 매달 수입의 1/10 을 무조건 교회에 바쳐야 옳을까요. 교회가 무슨 중세의 봉건영주라도 되는가요? 누가 신약 교회에서 빈부의 구분이 없이 의무적으로 1/10 을 내라고 하던가요. 이는 거짓된 가르침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명령이 절대로 아닙니다. 인간이 만든 또 다른 바리새인의 누룩이며 올무일 뿐입니다.

매달 많지 않은 수입에서 무리하게 십일조를 바친 후에 직장에서는 동료들에게 점심 한번 제대로 못 사서 인색한 사람으로 낙인찍히고 친척들에게는 매정한 사람으로 원망 듣고 아이들에게는 즐거운 외식도 변변히 못 해 주는 부모가 되는 것이 정상적인 기독 교인의 삶일까요.

차라리 그 돈으로 자신의 가정을 먼저 돌보고 못 사는 형제들을 돕는 것이 바른 순서 입니다. 그리고 생존을 걱정하는 이웃을 도와주십시오. 독거노인이나 소년 가장이나 노숙자들을 도와주십시오. 지역 내의 어려운 미자립 교회를 도와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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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자신은 '죽어도 십일조를 하다가 죽겠다'고 결심하신 분이 있다면, 1/10 이 아니 라 2/10 라도 좋으니 꼭 이런 곳에 먼저 바치시기를 권고 드립니다. 왜냐하면 내가 교회에 십일조를 아무리 잘 바쳐도, 한국교회는 이들을 제대로 돌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출석하시는 중대형 교회에는 정상적인 운영에 필요한 만큼만 헌금하면 됩니다.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며 사는 길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입니다. 왜 한국교 회의 성장이 멈추었을까요? 그동안 우리는 말만 너무 잘해서, 세상이 더 이상 우리 말 을 들어주지 않습니다. 이제는 행동과 실천만이 그들을 설득할 수 있고 그들에게 감동 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 비로소 전도의 문도 함께 열리게 될 것입니다.

십일조 폐지는 교권주의를 거세하는 일

제 십일조가 폐지될 경우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우선 교회 재정 수입이 현재보다 는 일단 줄어들 것입니다. 교회가 부를 축적하기가 지금보다 힘들어집니다. 따라서

목 회직에 대한 세속적인 매력이 줄어들게 됩니다. 또한 교회 살림이 빡빡해 져서 교회 대 형화가 어려워집니다. 오히려 기존의 대형 교회들마저 관리 운영에 부담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물론 안타깝게도, 중소형 교회는 이보다 더욱 어려워질 것이 분명합니다. 결국 문을 닫는 교회도 증가하고 심지어 목회를 떠나는 분들도 늘 것입니다.

일시적으로는 분명히 슬픈 일입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본다면, 이는 결코 나쁜 일만 은 아닙니다. 모든 부패한 종교의 문제가 복잡해 보이나, 사실 그 원인은 단순합니다. 교회 내에 이권이 있기 때문에 교회가 부패합니다. 박해 시대에 교회가 부패하는 경우 는 없습니다. 교회는 언제나 외적으로 성장하고 승승장구할 때에 타락했습니다. 먹을 곳이 많은 곳에 벌레가 많이 생기는 이치와 같습니다.

한국교회의 십일조 제도는 이런 이권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교회 수입의 절대 액수가 이 십일조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이는 십일조가 없는 외국의 교회들과 비교해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외국 목사님들이 한국교회 주보를 보면 크게 충격을 받습니다. 십일조 액수가 엄청나기 때문입니다. 혀를 내두를 정도입니다. 100 명 교인만 모여도 보통의 외국 교회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액수가 나옵니다.

유럽이나 미국의 개혁 교회들이 상대적으로 덜 부패한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이 의무 적 십일조가 없기 때문입니다. 일부 미국의 대형 교회들을 제외하면, 목회를 해서 부 유하게 살 수가 없습니다. 교회를 대형화하기는커녕 유지하기도 바쁜 교회가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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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척박한 목회 환경은 오직 소명을 받은 분들만이 바른 목회의 길로 갈 수 있는 여 건을 자연스럽게 제공합니다. 적어도 화려한 목회 성공을 꿈꾸며, 개나 소나 다 신학 교로 몰리는 일은 막아 주고 있는 것입니다.

행 한국교회의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제도가 아닙니다. 사도들이 전하여 준 제도도 아닙니다. 단지 교권주의자들이 교회의 외적 성장을 위해 수제 가공한

제도입니다. 아울러 풍부한 자금으로 교회 사유화를 실현시키는 데에 크게 악용되어 왔을 뿐 입니다. 이처럼 지도자들이나 그 구성원들이 돈과 명예를 추구하는 종교는 예외 없이 사이비입니다.

한국교회가 진심으로 거듭나려면, 먼저 교권과 금권의 고리를 끊어야 합니다. 교회가 가난해져야 하고 목회자가 검소해져야 합니다. 흩어 구제해도 모자를 판에 교회나 목 사가 무슨 돈을 쌓을 틈이 있는지요. 예수님은 머리 둘 곳도 없이 살다가 가셨는데, 지금 우리는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요. 교인들이 자녀의 간식비와 학원비를 아끼고 장 바구니를 비워서 어렵게 바친 돈으로 중세 귀족 행세를 하고 있는 자들은 도대체 누구 입니까.

한국교회에 과도한 부를 쌓고 있는 십일조는 이미 교권주의자들의 개인 금고로 전락한 지 오래입니다. 이들은 교인들이 바친 돈으로 비싼 집을 사고 땅을 사고 차를 사고 유 학 보내고 그리고 교회 사업에 개입하여 족벌화하기도 합니다. 그러니 이들은 영혼까지 팔아서라도 교회를 세습시키며 기득권을 지키려 하는 것입니다.

십일조 폐지가 교권주의를 거세하는 일이 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가 매년 창고를 바닥까지 털어 흩어 구제하고 스스로 가난해지면, 교권주의란 독버섯은 더 이상 생존하지 못합니다. 더 이상 빨아 먹을 단물이 없어 저절로 죽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 운영의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회가 풍족해야 한다거나 교인들이 부자가 되어 잘살아야 한다는 말은 그럴듯하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교권주의자들의 달콤한 속임수일 뿐입니다. 또한 '교회가 돈이

있어야 잘 운영할 수 있다'는 가르침도 거짓입니다. 언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큰 교회나 큰 사업을 하라고 명령하신 적이 있었던가요. 오히려 작은 일에 충성하라고 하셨습니 다. 큰 교회나 큰 사업을 추구하는 것은 모두 다 인간의 알량한 욕심일 뿐입니다. 그 리고 꼭 필요한 큰 사업은 개교회가 아니라 교단에서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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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지도자들은 교회가 더 커지고 풍족해져야 선교와 구제를 더 많이 하고, 더욱 많은 다른 사역을 힘 있게 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 지난 30 년 동안 보여 준 한국교회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들은 십일조로 모아진 재정으로 끝도 없이 예배당 확장에 몰두하여 교회 대형화만 추구했습니다. 선교도 돈으로 해결하려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실컷 쓰고 남은

푼돈으로 구제를 합니다. 본래 가난한 이들을 위한 십일조가 이렇게 거의 다 엉뚱한 곳에 사 용되고 이런 행태가 대부분의 교회에서 해마다 반복되고 있습니다. 과연 누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자일까요. 누가 진실로 고아와 과부를 울리고 있습니까.

그러면 이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시게 될 것입니다. 아니 교회가 그토록 가난해지면 무슨 일을 제대로 할 수 있겠는가?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거기에도 해법은 있습니다. 우리는 총체적으로 교회 운영에 대한 선입관을 바꾸어야 합니다. 교회는 돈이 일하는 곳이 아니라, 사람이 일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미자립 교회에서 큰 부담이 되는 교역자 사례비 문제도 각 교단 중대형 교회들이 몸집 키우기를 포기하고 전력으로 합심한다면, 노회나 연회 주도하의 교역자 파송 제도로 크게 개선을 할 수가 있습니다. 노회나 연회 차원에서 순환 목회 등을 통해 미자립 교회를 적극 관리하자는 것입니다. 또한 필요하다면 자비량 사역이나 공동 목회 등의 방법도 추가적인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국내외 선교 역시 반드시 돈이 있어야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유급 선교사를 파 송해야만 선교가 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은 온 지구촌이 좁아지고 있고, 한국교회는 의사, 간호사, 교사, 기술자, 사업가 등 전문직을 가지고 선교 현지에서 자비량 사역을 할 수 있는 충분한 인적자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을 잘 준비시켜서 필요한 곳에 파송하면 됩니다. 이미 일부 선교 단체들에서는 이를 성공적으로 잘 실천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도들이 세운 초대교회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하루에 5,000 명이나 되는 회심 자들이 있었으나, 그들이 언제 큰 건물을 지어 메가처치를 이루었던가요. 오히려 바람 마저 피하기 힘든 '솔로몬 행각'에 모였다는 소박한 기록만을 볼 수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기독교가 본격적으로 세속화되기 전 교부 시대의 교회를 연구해야 합니다. 그 시대의 교회는 지금처럼 고비용을 소모하는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앞으로 교회가 몸집 을 키우는 데에 몰두하지만 않는다면, 도리어 교회 관리에 쓰고 남은 재정을 구제나 교육에 적절히 충당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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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 강요는 한국 개신교의 무덤이 될 것

국교회는 중세 이후로 세계에서 가장 헌금을 강요하고 있는 교회입니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교회에서 자신들은 십일조를 강요하지 않고, 자율적으로 걷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 말은 지독한 기만입니다. 지나가던 동네 강아지도 비웃을 거짓말입니다. 한국교회에 상식은 없고 외식만 난무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십일조를 안 하면 당장 교회 내에서 믿음이 적은 자로 낙인되어 여러 가지로 직간접적 인 차별을 받는데도 이런 위선적 답변을 합니다. 더구나 장로나 권사 등 주요 직분은 아예 꿈도 꾸지 말아야 합니다. 말로는 '자발적 십일조'로 위장해 놓고, 뒤로는 이렇게 구조적인 차별을 하여 실제로는 '의무적 십일조'로 둔갑시키고 있습니다.

아울러 이런 차별적 분위기는 교회 안에서 십일조를 하는 사람들과 하지 못하는 사람 들 사이에 큰 마음의 벽을 만들고 있으며, 실제로 이들은 거의 따로 어울리고 있습니다. 십일조는 사실상 전도에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새신자들이나 초신 자들마저도 상처를 주고 교회 밖으로 내치고 있습니다. 십일조 소리 듣기 싫어서 교회 출석을 그만두었다는 사람들을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이 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러분은 교회에서 어떤 사유이든 십일조를 못 내시는 분들의 그 암울한 심정 을 이해하실 수 있습니까. 교회 모임에서 늘 위축되고 뒷자리로 밀려야 하는 그 서럽고 부끄러운 마음을 이해하십니까. 십일조가 무슨 근거로 믿음의 척도로 사용됩니까. 십일조 강요로 인한 이런 가증된 차별이 바른 교회가 신명을 다하여 추구해야 할 진리라고 보십니까.

'십일조를 해서 복을 받으라'는 말은 영적 사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십일조와 관계없 이 이미 우리에게 독생자 예수님을 주셨습니다. 아들까지 주신 하나님께서 나머지 무슨 복을 아끼실까요. 하나님을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돈을 많이 바쳤다고 복을 주시고, 못 바치면 멸시하시는 그런 분이 절대로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돈이 부족하셔서 우리의 재물을 원하실까요. 그런 속된 가르침은 이방 종교의 무속적 신앙일 뿐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 중에서 '세속적 복'을 구하라고 가르친 사도가 한 분이라도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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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만일 세속적 복으로 복음을 평가해야 한다면, 사도들은 물론 예수님까지도 모두 실패한 인생이 될 것입니다.

십일조가 겉보기에는 한국교회를 세워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교회를 안에서부 터 무너트리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교회의 주인을 돈과 사람으로 변질시키고, 이에 낙 심한 신도들을 내치고 있습니다. 결국 십일조 강요는 텅 빈 예배당 건물만 남겨 놓고 몰락한 과거 유럽의 화려한 교회들처럼, 다음 세대에는 우리의 자녀들에게 회칠한 무 덤만을 남겨 줄 것입니다. '사람의 십일조' 대신에 '사랑의 십자가'를 져야

국교회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제도가 아닙니다. 사람이 임의로 만든 제도입니다. 이런 인위적 십일조가 교인들을 속박하고, 동시에 교회를 돈으로

타락시키고 있 습니다. 실제 이런 강요적 십일조로 이득을 얻는 자들은 교회 내의 사악한 종교 업자들 뿐입니다. 이들은 주의 종이 되기를 거부하고 돈의 종이 된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십자가 지기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거부해야 할 것 은 십일조이지 십자가가 아닙니다. 부족함이 없으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우선적으로 원하시는 것은 제사나 예배나 헌물이 아니라 '자비'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신약시 대를 사는 우리는 구약의 십일조 대신에 사랑의 십자가를 지고, 주변의 어려운 이들을 도우며 자비를 실천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겸허한 삶이야말로 주님께서 기뻐 받으 시는 거룩한 '산제사'가 될 것입니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마 12:7).

2011 년 8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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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교회 극에 이른 교회 사유화

회란 "내 양을 먹이라"는 예수님의 지상 명령을 수행하는 거룩한 사역입니다. 그리고 현재 대부분의 개혁 교회 내에서는 목사에게 우선으로 맡긴 주요 직무이기도 합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목사'라는 직분이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은 루터와 칼뱅의 종교개혁 이 후부터입니다. 당시 개혁자들은 중세 교회의 계급적 사제직을 폐하고 대신에 이 목사직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한글 성경에 '목사'라고 번역된 이 직분은 신약성경 속에 단 한 번, 그것도 아 주 간략하게 언급이 되어 있습니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 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엡 4:11)." 여기서 성경 원문인 헬라어 단어 는 '포이멘(ποιμ?ν)'으로 목자 또는 양치기라는 의미이며, 이 단어의 라틴어 번 역 '파스토르(pastor)'에서 목사를 의미하는 영어 단어 'pastor'가 유래했습니다.

그리고 초대교회의 상황을 보여 주는 신약성경에는 구체적으로 누가 그 목사직을 받았 고 또한 어떤 사역을 했다는 자세한 설명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다만 '사도'나 '복음 전하는 자' 그리고 '교사'와는 별도로 분류한 것으로 미루어 추측할 때, 일단 전도나 선교나 교육은 포이멘의 일차적인 직무가 아니었다고 보입니다. 따라서 단어 그대로 ' 양치기' 또는 '양을 돌보는 자'로 해석함이 무난할 듯합니다. 면에서 보면 현재의 목사직은 포이멘의 역할보다는 도리어 신약성경 다른 부분에 이런언급된 '가르치는 장로'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양들을 돌보는 장로나 집사직이 오히려 원어 그대로의 포이멘에 더 가까운 역할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드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점입니다.

하지만 빌립과 스데반이 전도하거나, '다스리는 장로'가 구제를 한다고 해서 그것이 크게 잘못된 일은 아닐 것입니다. 직분은 신분이 아니므로 필요하면 중복적인 역할이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여튼 오늘날 목사직의 기능에 대하여 교단별로 다소 혼선이 있는 것도 이 포이멘에 대한 다양한 해석에 연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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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는 종합적인 사역 우리는 먼저 목회에 대한 정의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적지 않은 여기서 분들이 목회를 목사나 전도사 등 교역자들의 전문 분야로만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는 오해의 여지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구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는지를 우선 고려해야 합니다. 이미 잘 아시는 대로 이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한 사도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 러면 혹자는 베드로나 다른 사도들만이 목회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가지실 것입니다. 물론 아닙니다. 만일 그런 식으로 해석해야 한다면 사도 시대 이후에는 아무도 목회를 할 자격이 없을 것입니다. 결국, 가장 합리적인 해석은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모든 제자에게 하신 명령으로 보는 것입니다.

더구나 오늘날의 목사는 사도가 아닙니다. 또한, 다른 직분보다 우월한 특수 직분도 아닙니다. 단지 장로나 집사처럼 신약성경에 언급된 교회 내 여러 중요한 직분 중의 하나입니다. 집사가 장로보다 낮은 직분도 결코 아니고, 목사 역시 '가르치는 장로'의 직임을 맡은 사람일 뿐입니다. 그 누구도 스데반의 사역이나 설교가 사도 베드로보다 못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라서 목회는 목사만이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인식입니다. 목회는 단순히 가르치는 일만이 아니라 ‘종합적인 사역’입니다. 양들을 말씀으로 먹이고

가르치는 일이 목사나 교사의 주요 사역이라면, 양들을 치고 돌보는 일은 장로나 집사의 사역입 니다. 그러므로 일부 교회에서 가끔 보는 것처럼, 목사가 홀로 독주하며 가르치고 다 스리고 관리하고 돌보는 모든 일에 깊이 관여하여 월권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일입니다. 그 직분이 목사이든 또는 장로나 집사이든 결국 목회는 모든 주의 제자들에게 맡긴 공 동의 사역입니다. 즉 가르치고 다스리고 섬기고 돌보고 관리하고 봉사하는 이 모든 일 이 서로 다른 일이 아니라, 사실은 모두 같은 목회의 영역에 속해 있다고 말할 수 있 습니다.

바른 인식은 바른 실천에 필수적이며, 바른 실천만이 바른 열매를 맺게 해 줍니다. 왜 지금 한국교회에 엉뚱하고도 기형적인 열매들이 이리도 많을까요. 여러 이유 중의 하 나가 현행 목사직에 대한 우리의 잘못된 인식과 절대 무관하지 않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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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직의 변질과 세속화

교개혁 이 후 목사직은 많은 도전을 받아 왔습니다. 종교개혁 초기 시대에는 목사직 이 헌신적이며 강력한 지도력으로 교회의 진리와 순결을 지키며 긍정적인 역할을

한 바가 매우 큽니다. 반면에 개혁 교회가 점차 성장하면서 비대해지자 그 역기능도 많이 표출되었습니다. 특히 근세에 이르러 미국 교회와 한국교회 상당수 유명 목사들의 타 락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런 결과 때문에 목사직이 과거처럼 지역사회에서 각별한 존중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선 한국의 대형 교회들을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 중에서 사회의 존경을 받는 목회자가 과연 몇이나 있는지요. 도리어 듣기에도 거북한 욕을 먹고 있습니다. 게다가 일부 교회들은 목회 독재를 넘어 아예 목사 왕국을 만들고 있습니다. 어떤 목사는 당 회의 승인을 통한 정당한 절차나 영수증조차 없이 교회 공금을 수십억이나 유용하고도 계속 설교를 합니다. 또한, 이대 세습은 기본이고 이제는 삼대 세습까지 넘보는 목사도 있습니다. 성추행한 목사도 당당히 목회합니다.

더구나 교단 상층부를 장악한 교권 주의 목사들은 이권에 따라 몰려 다니며 뇌물을 주고받고 매우 분주하지만 그 어떤 치리도 없습니다. 이 분들은 과연 신도들의 심정이 어떤지를 알고나 있을까요. 마치 어물전에 그럴듯한 생선은 별로 없고 꼴뚜기만 잔뜩 늘어놓은 기분입니다.

런데 거의 예외 없이 이들의 공통점은 대부분이 부자라는 사실입니다. 사이비나 이 단의 교주 중에 부자가 아닌 사람을 보셨는지요. 마찬가지로 이들 변질한

목회자들은 겉으로는 성직자라고 위선을 떨지만, 뒤로는 언제나 돈을 챙기고 있습니다. 이단의 교 주들이나 하던 부끄러운 일들을 요즘은 소위 건전한 정통 교단의 목사라는 분들이 밝은 대낮에 자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더욱 심각한 것입니다.

양들을 먹여야 할 목회자가 오히려 양들을 약탈하고 있습니다. 양들을 먹이는 것이 아 니라, 도리어 양들을 먹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들이 무조건 교회 덩치만 키우려 는 이유가 잘 설명이 됩니다. 한국교회가 영적 비만에 걸린 가장 큰 이유도 대형 축사 들을 지어 육류용 목축에 몰두하는 이런 거짓된 목동들 때문입니다. 결국, 문제의 핵심은 먹이기 위한 목회가 아니라 먹기 위한 목회를 하는 데에 있습니 다. 이런 '밥벌이 목회'가 자신을 망치고 동시에 교회를 망치고 있습니다. 그래도 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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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히 밥벌이 정도에서 그치는 목회는 순진한 편에 속합니다. 이보다 더 심한 목회는 ' 돈벌이 목회'입니다. 대형 교회들은 그 덩치에 걸맞게 부정도 대형으로 저지르고 있습니다. 한번 터졌다 하 면 수십억 수백억입니다. 터지지 않은 비리는 또 얼마나 많을까요. 그래서 웬만한 귀 족 목사들은 재벌이 부럽지 않은 호사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축복으 로 이렇게 잘 산다는 식으로 자신들을 합리화하고 오도합니다.

도들에게 헌금을 강조할 때는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다"고 청빈한 선지 자처럼 열변을 토하지만, 정작 자신들은 이 땅에 부를 쌓고 있는 배도한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왜 중대형 교회의 그 많은 귀족 목사들은 자신의 땅을 팔아 그 일부를 가져온 아나니아와 삽비라만도 못한 바침을 하고 있는가요.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고 하신 그런 말씀들은 왜 자신에게 적용하지 않습니까. 아니면 바리새인들처럼 십일조만 하면 끝나는 것입니까? 수입의 십 분의 일만 바치면 나머지로 부를 쌓으며 탐욕해도 된다고 자위하는 일부 목사들, 결국 이들은 땅에 계신 동안 스스로 가난을 택하신 예수님의 삶을 전혀 이해 못 하는 사람들입니다.

특히 중대형 교회에서 목사직으로 사역하시는 여러 형제들에게 부탁합니다. 우리는 이미 맘몬적 적당주의에 너무 타협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요. 남들보다 적당히 경건한 척하고 적당히 설교를 잘해서, 적당히 명예를 누리고 적당히 부를 즐기며 안주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우리의 삶 속에 과연 주님 십자가 고난의 흔적이 있기는 한 것인가요.

이웃 미자립 교회 목회자가 가족들의 생계마저 걱정하며 눈물로 기도할 때에도 그저 적당히 도와주고 생색만 내거나 자족한 것은 아닌지요. 또는 그나마도 못 본 척 외면한 것은 아닌가요. 아니면 큰 교회 목사만 주의 종이고, 작은 교회 목사는 신도들의 종인가요. 자신의 밥그릇은 소중하게 생각하면서 배고픈 형제의 밥그릇에 무심한 목회는 이미 십자가 정신을 상실한 목회입니다.

하지만 밥그릇이 이 글의 주제는 결코 아닙니다. 성경적으로 바른 목회는 예수님의 가 르침을 따르며 주님만 의지하는 목회입니다. 밥그릇에 연연하는 목회는 바른 목회가 아닙니다. 사도바울이 유급 목회의 권리가 있지만 이를 사양하고, 천막을 만들며 자비 량 사역을 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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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신자는 목회에 책임이 있다 초대교회 사도바울의 자비량 목회 정신이 갈수록 퇴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처음에는 정당했던 유급 사역이 그 도를 넘어 밥벌이 사역이나 돈벌이 사역으로 변질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빙자하여 자신의 세속적 사욕을 채우려는 가라지들이 교회 내에 너무 많습니다. 그 결과 기도하는 집이어야 할 교회에 잡초가 판을 치고 있 습니다. 이런 잡초를 효과적으로 제어하려면 바른 목회가 세워져야 합니다. 목회나 목양은 목 사님들만의 사역이 아닙니다. 성도들의 책임이 매우 큽니다. 적어도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임을 부인하지 않는 한, 모든 신자는 다 목회에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목회는 양을 치는 일입니다. 그런데 목동이 양을 낳는 것이 아니라, 양이 양을 낳습니다. 교회가 바르게 성장하려면 양들이 바르게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목사직은 양들이 바르게 살도록 잘 가르치는 직분입니다. 그러므로 가르치는 장로인 목사를 교회 사업이나 관리 그리고 행정 등 다른 업무로 바쁘게 한다면 이는 매우 지혜롭지 못한 일입니다.

다스리고 돌보고 봉사하는 목회는 장로나 집사직의 몫입니다. 따라서 특정 직분이 홀 로 독주하는 목회는 병든 목회입니다. 모든 직분자들이 함께 합심하여 대등하게 동역 하는 목회가 건강한 목회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현행 목사직을 지나치게 특권화한 일부 교단들의 헌법이나 교회 정관도 바르게 개정되어야 옳을 것입니다. 아울러 현재 시무하고 있는 목사의 직무도 적절히 전문화하고 차별화하여, 목회에서 가장 중요한 가르치는 사역에 전념할 수 있도록 최 적의 여건을 제공해야 할 것입니다. 말씀드립니다. 목사직만이 목회직이 아닙니다. 유·초등부 교사도 목회자이고, 결론을 심방하시는 집사님도 목회자입니다. 물론 교회 주방에서 열심히 봉사하시는 분들도 존 경할 만한 목회자이십니다. 개혁 교회에서는 모든 신자가 다 성직자이고, 동시에 모든 신자가 다 목회자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

2011 년 9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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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받는 목사 왕국 양들의 반격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마 25:32~33)."

회 공금 32 억 원을 횡령한 혐의로 기소된 제자교회 정삼지 목사가 징역 4 년을 선고 받고 법정에서 구속됐습니다. 분당중앙교회 최종천 목사는 재정 문제와 여신도와의

소문 등으로 교인들과 크게 대립하고 있습니다. 강북제일교회 당회는 황형택 목사가 경 력을 위조했다며 총회 재판국에 소송을 제기하여 목사 안수 무효 판결을 받았습니다. 또한, 충현교회 유지재단 김규석 이사는 김성관 담임목사를 교회 재산 횡령 혐의로 검 찰에 고발했습니다. 이 모두가 소위 보수 정통 교단이라고 자랑하던 수도권 대형 교회 들에서 근자에 일어난 일입니다.

서두부터 이렇게 거룩한 목사님들 명단을 장황하게 나열한 데에는 물론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습니다. 그동안 개혁 교회의 수장이 되어 신도들 위에 군림하던 담임목사의 위상이 크게 흔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이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결국, 올 것이 온 느낌입니다. 만일 요즘 한국교회에 아무 일도 안 일어난다면 그것이 오히려 기적입니다.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이 성경의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교권 독재가 있는 곳에서는 반드시 목회 비리가 발생합니다. 그래서 죄인들이 쓰는 부끄러운 교회 사는 오늘도 또다시 반복됩니다. 인간의 죄성은 중세 교회 이후에도 별로 변하지 않았 습니다.

상식을 조롱하는 목회 비리 비리로 말미암은 갈등은 대개 목사의 독주와 이를 저지하려는 일부 신도들 간의 목회내분으로 시작됩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거의 예외 없이 교인과 교인 간의 내전으로 확전되는 것이 보통입니다. 교권을 과도하게 독점한 담임목사들은 교회 자산이나 재정만 사유화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추종하는 신도들까지도 사병화하여 끝까지 버리지 않 고 재활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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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교인들 간의 싸움은 확실히 뭐가 달라도 좀 다릅니다. 싸워도 그냥 싸우는 것 이 아니라 단체로 합심하여 기도하며 싸웁니다. 그리고 서로 하나님이 자신들의 편이 라고 주장합니다.

문제는 이 싸움이 매우 아름답지 못한 모습을 보여 준다는 데에 있습니다. 좁은 통로 에서 집사님이 멱살을 잡고, 권사님은 욕을 합니다. 장로님은 밀고 목사님은 당깁니다. 정말 아이들 보기에 민망한 풍경입니다. 그러나 누구도 이들을 함부로 비웃기 어렵습 니다. 쌍방이 서로 '거룩한 교회를 지키기 위한 싸움'이라는 비장한 각오로 임하기 때 문에 일단 이 판에 한번 말려들면 아무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주변에서 '저런 파렴치한 사람들이 어떻게 목사일 수가 있는가' 하는 탄식을 많이 듣습니다. 아주 당연한 상식의 부재에 모두가 깊이 좌절하는 것입니다. 아마 단일 직종으로 한국에서 부정과 성추행이 가장 심한 직업 중의 하나가 목사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는 중대형 교회의 세습 비율만 보아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분명히 말세가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상식이 무시당하고 있는 세대에 살고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지금은 다수 목사가 무조건 다 경건한 시대가 아니라, 소수의 경건한 사람만이 참된 목사인 시대입니다.

기복 신앙에 침수된 한국교회 이 지경까지 오게 되었을까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대부분 교회 분쟁의 일차적 왜원인 제공자는 담임목사입니다. 실제로 교회 내에서 장로나 집사 등 다른 직분자들의 부정에는 한계가 있고, 그런 문제가 교회 내분으로까지 번지는 경우는 드뭅니다.

하지만 목사는 크게 다릅니다. 담임목사가 변절한 교회는 필연적으로 대형 사고를 치게 되어 있습니다. 다만, 시간의 문제일 뿐입니다. 외형적으로는 수 십년 동안 목회를 잘한 것처럼 보이다가도 어느 날 하루아침에 공든 탑이 무너집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미 오래전부터 내부에 깊은 균열이 있었던 것이 나중에 드러난 것일 뿐입니다.

더욱 큰 문제는 이 분들이 곱게 물러서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목사가 윤리적 책임 을 지거나 교회법에 승복하여 스스로 아름답게 퇴장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아주 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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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한 행위들이 들통 나도 대부분은 일시적으로 물러서는 척하다가 맹신도들 뒤에 숨어 다시 분쟁을 일으킵니다.

물론 여기에는 교인들의 책임이 매우 큽니다. 한국인의 여러 장점 중의 하나가 '머리가 뛰어나게 좋다'는 것이고, 반면에 단점 중의 하나는 '지나치게 기복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가 잘못 결합하면 극히 우려되는 증상이 생깁니다. 이를 구태여 정의하자면 일종의 '종교적 말단비대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국에서는 비교적 흔한 새벽 기도회, 철야 기도회, 금식 기도원, 십일조 강요, 헌금 자 공개, 땅 밟기, 구역예배, 총동원 주일 노방전도 등 다양한 활동들이 사실 여러

외국 교회들에서는 일반적으로 자주 보기 어려운 것들입니다.

한국교회의 열심은 세계 다른 어느 교회도 못 따라옵니다. 여기에는 물론 긍정적인 면도 많지만, 유감스럽게도 부정적인 면 역시 심각합니다. 많은 목회자가 그 좋은 머리를 가지고 신도들의 기복적 욕구를 교묘하게 악용하기 때문입니다. 신도 중에는 여러 예배나 다양한 교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헌금을 잘 바치면 그 결과로 반드시 병을 고치거나 세속적 복을 받게 된다고 기대하시는 분들이 뜻밖에 많습니다. 하지만 철저한 성경적 검증을 거치지 않은 이런 기복적 사고는 매우 위험합 니다.

이런 신앙은 관심과 초점이 주로 세속적 복에 있기 때문에 정작 더욱 중요한 성경의 핵심적 가르침을 경시하거나 간과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신앙적 가치관이 기초부터 변 질한 경우가 많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조차도 무속적이며 미신적으로 숭배할 수 있습 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목사를 더욱 의식하 게 되고 마치 신접한 무당처럼 그를 의지하게 됩니다. 이른바 맹신에 이르게 됩니다.

더구나 변절한 목사들은 신도들의 이런 기복적인 약점을 복음으로 바르게 교정하지 않 고, 반대로 이를 부추기고 이용합니다. 따라서 그들의 설교는 도리어 신도들의 기복적 입맛을 자극하는 데에 집중합니다. 당연히 이런 목사와 신도들은 서로 아주 찰떡궁합이 됩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영적 불륜 관계가 구원의 방주가 되어야 할 한국교회를 세속의 혼탁한 물속으로 더욱 침수시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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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복 설교의 가장 큰 문제점은 성경에서 말하는 복이 근본적으로는 '신령한 복'을 의 미하는데, 이들은 이를 '세속적인 복'으로 격하시키거나 혼합하여 강조하는 데에 있습 니다. 만일 세속적인 복이 신자들에게 그리도 중요하고 필수적이라면 왜 예수님과 제 자들이 그토록 가난하게 사셨을까요. 오병이어의 능력을 지니신 예수님은 이 땅에서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가정과 직장과 교회 생활이 적절한 균형을 가져야 하는데, 사심이 있는 목사는 신도들의 열정을 오도하여 교회 활동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우선시킵니다. 물론 이런 불균형한 생활은 신도들이 세상에 나가 소금과 빛이 되는 일에서 점점 멀어지게 합니다.

그럼에도 교회 중심적 생활은 일단 목사의 사역을 직접적으로 도와 교세를 확장시키고 헌금을 더 많이 거둘 수 있게 해 줍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신도들은 목사의 지도를 받고 순응하는 타성이 생겨 자연히 목회 독재의 길을 넓혀 줍니다. 결국, 신도들의 기 복적 신앙이 한국교회를 밑뿌리부터 망가트리고 있는 주범임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당회장직은 다스리는 장로의 직무 대로 담임목사를 독주할 수 있게 해 준 일등공신은 역시 기복 신앙입니다. 그 전술한 리고 그 덕분에 신약성경에서는 장로나 집사 그리고 교사와 대등하게 언급된 목사가 홀로 당연직 당회장이 되는 기형적 모순이 오랫동안 방치됐습니다. 이는 교사나 집사가 영구직 당회장이 되는 것만큼 부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과연 목사직이 하나님의 대리인이라도 되는 걸까요. 과거 개혁자들은 그 황당한 대리 인 행세 좀 집어치우라고 구약의 제사장적 사제직을 폐하고 목사직을 세웠습니다. 그 런데 개신교는 왜 또다시 캄캄한 중세 교회로 돌아가려 할까요.

이왕 목회하려면 좀 제대로 해야 합니다. 목사는 군림하는 직분이 아니라 단지 가르치 고 설교하는 직분입니다. 어떤 근거로 '가르치는 장로'의 직분인 목사가 자동으로 교 회의 당회장이 되어 교권을 장악하고 교회 사업, 행정, 관리, 재정, 그리고 인사 등 온갖 일에 깊이 관여하여 월권을 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재벌이나 사기업을 제외한다면, 세상 어느 단체에 이리 심하게 권력을 독점한 직책이 있을까요. 심지어 대통령도 오직 행정부의 수반일 뿐이건만, 한국교회 목사들은 실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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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으로 교회 내에서 입법권, 사법권, 그리고 행정권까지 모두 독식하고 있습니다. 이 러니 목사 왕국이라는 한탄이 절로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왜 목사를 중세 교황이나 사이비 교주처럼 수장의 자리에 올려야 합니까. 신약성경을 거꾸로 들고 읽지 않는다면 당회장직은 분명히 '다스리는 장로'의 직무입니다. 당회가 다스리고 관리하는 기관이지 무슨 교육 기관이 아니지 않습니까.

늘날 가톨릭 사제보다도 더 과도한 교권을 지닌 직분이 개신교의 담임목사직이 아닌 가 합니다. 적어도 어느 사제가 성당을 사유화했다는 말은 별로 들어 본

기억이 없으 니까요. 가톨릭의 사제직을 거부하고 만든 개신교의 목사직이 그보다 더욱 극심하게 타락한 이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우선 신학교에서부터 '목회 기술'보다는 '목회 원칙'을 철저히 가르쳐 주시기를 간곡 히 부탁드립니다. 목회를 위한 기본적 자질이나 가치관이 바르게 정리되지 않은 사람 들에게 무슨 잡다한 개론들과 기술만 잔뜩 가르쳐 준다면 결국 지금보다 더 교회를 어 지럽히는 종교 업자들로 전락할 것입니다.

아울러 언제부터 교회 직분이 현재처럼 철밥통으로 변질하였는지 잘 이해가 안 됩니다. 왜 임기가 끝나면 훌훌 털고 떠나는 멋진 목사를 갈수록 보기 어려울까요. 아니 그 임 기라는 것이 실제 있기는 한지요.

자기가 좋을 때는 한 교회에 만고강산 눌러앉아 선한 목동 행세를 하고, 그러다가 어느 큰 교회에서라도 부르면 기존에 위임받은 양들을 헌 고무신같이 버리고 뱁새처럼 냉큼 떠나는 기회주의적 목사들을 우리는 너무 많이 보고 있습니다.

담임목사들은 청빙을 받을 때 대부분 '기도해 보고 답변을 주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기도 응답이란 것이 참으로 신통방통합니다. 수 만명이 넘는 한국교회의 그 많은 충성 되고 신실하신 주의 종들은 '한결같이' 더 큰 교회로만 이동하시기 때문입니다. 정말 절묘한 기도 응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과연 기존 교회보다 더 작은 교회로 부임하는 담임목회자를 몇이나 보셨습니까. 한국 교회가 비즈니스 논리로 기업화하고 있는 것이 진정 누구의 잘못일까요. 아니면 큰 교 회 목회만 사역이고 작은 교회 목회는 노역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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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들의 반격 글의 목적은 교회의 내분을 정당화하거나 또는 비난하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이현실을 직시하여 바르게 고치고 주님 앞에서 한번 바르게 살아보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교회의 갱신을 언급하는 글들에 대해 그 중심은 보지 않고 지엽적인 표현이나 말 꼬리를 물고 늘어지시는 분들이 가끔 있습니다. 아울러 어떤 분들은 "극히 일부를 가 지고 전체 교회를 매도하지 마라"고 꾸준히 항변하십니다.

그래서 필자도 작심하고 한마디 드리고 싶습니다. 무슨 근거로 극히 일부라고 하십니까. 화성에서 살다가 오셨습니까. 그리고 도대체 얼마나 더 썩어야 합니까. 발가락이 썩으면 발목마저 다 썩어 절단할 때까지 침묵하고 기다려야 하나요. 아니면 간암에 걸리면 단지 간뿐이니 괜찮다는 것인가요.

이제 양들의 인내가 극한에 도달했습니다. 염소들은 아무나 따르지만, 양들은 다릅니 다. 양들은 오직 목자의 음성만을 듣고 따릅니다. 그래서 목자를 배신한 거짓 목동들 이 아무리 잔수를 부려도 결국 양들을 속이는 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동안 한국교회 일부 목사들은 그 명석한 머리를 잘 활용하여 변질과 기만에서 매우 탁월한 능력을 보여 주었습니다. 교회당을 성전이라고 우상화하여 세력 키우기에 몰두 하고, 복을 받는다고 기만하여 십일조를 챙기고, 또한 모든 신자가 다 '주의 종'이건 만 유독 자신들만을 스스로 '교회의 왕'으로 추대하였습니다. 그러나 걸레는 아무리 빨고 헹구고 치장을 해도 행주가 되지는 못하는 법입니다.

리 사회에서 가톨릭 신부를 비난하는 일은 보기 드뭅니다. 반면에 개신교 목사를 보 면 손사래를 치는 분들이 많습니다. 2010 년 '기윤실'이 발표한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개신교(20.0%)는 가톨릭(41.4%)과 불교(33.5%)에 밀려 이들 중의 최하위에 머물렀습니다. 목사를 교주나 무당처럼 모시며 복을 구하고 예수님의 진정한 가르침에는 무지한 맹신 도들이 사라지지 않는 한 이런 여론은 앞으로도 크게 개선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의 내분도 절대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은 비상한 시기입니다. 배도한 목동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팔며 양들을 속이고 있 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교인들이 둘로 갈라져 싸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싸움은 단 순히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닙니다. 예배당 출입문을 차지하는 무리가 이기는 그런 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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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 싸움이 아닙니다. 신자들이 세상에서 십자가의 도를 따르며 마땅히 치러야 할 '영적 전투'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혜롭고 순결하게 이겨야 합니다.

지금은 검을 잡아야 할 때 어떻게 싸워야 할까요. 에이브러햄 링컨은 남과 북이 서로 하나님이 자신들의 편 이제이라고 주장하며 싸울 때에,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자'라고 했다지요.

정말 옳은 말입니다. 양들의 반격은 거짓 목동을 거부하고 선한 목자의 편에 서는 일 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세속적 복이 아니라 예수님이 가르치신 '가난한 마음과 의에 주리고 목마른 복'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제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실천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개혁 교회 들은 먼저 영구직 당회장을 임기제로 전환하여 장로들에게 돌려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당회는 목사를 청빙할 때 그 임기를 개교회의 여건에 따라 약 3~6 년 정도로 정하고, 그 연임 횟수 역시 1~2 회 정도로 엄격히 제한하면 좋겠습니다. 아울러 부도덕한 직분자는 교회법에 따라 엄중히 치리를 하기 바랍니다.

반면에 자신이 출석하는 교회가 이미 목사 왕국이 되어 소통이 안 되고 합법적인 치리 조차 불가능한 교회라면 더는 몸싸움을 할 것이 아니라 바로 떠나시는 것이 좋습니다. 그까짓 콘크리트 덩어리는 그냥 넘겨주십시오. 서구의 많은 교회처럼 한 세대 뒤에는 어차피 그 곳에서 텅 빈 공간과 거미줄만 보게 될 것입니다. 비록 지하방에서 소수가 모이더라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바르게 실천하고 따르는 교회만이 참된 교회입니다. 길은 염소들이 좋아하는 길입니다. 하지만 주님이 양들에게 명령하신 길 넓고은 평탄한 오직 '좁은 문'으로 향하는 길뿐입니다. 성경과 교회 역사가 이를 증거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전시입니다. 불의한 화평에 안주할 때가 아니라, 앞서 간 믿음의 선진들 처럼 주님이 주시는 검을 잡아야 할 때입니다. 이제 어느 길을 택할지 그 선택은 우리 들의 몫입니다.

2,000 년 전 유대 땅 작은 고을 베들레헴의 허름한 말구유에 오셔서 몸소 가난한 삶을 사시고, 마침내는 양들을 위하여 고난의 십자가를 지셨던 예수님은 오늘도 당신의 사 랑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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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 10:34)." 2011 년 12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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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권주의의 밑뿌리 '담임목사 종신제' 직분은 감투가 아니다 자주 언급하지 않는 거북한 주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목회자의 한국교회가 임기를 별도로 규제하지 않는 '담임목사 종신제'입니다. 현재 대부분 교회가 종신제입니다. 또는 형식적으로는 임기제이더라도 연임을 별도로 제한하지 않아 사실상 종신제나 마찬가지로 운영합니다.

그래서 한번 담임은 은퇴할 때까지 담임입니다. 심지어는 은퇴 후에도 원로목사가 되어 그 영향력을 계속해서 행사하려는 분이 적지 않습니다. 게다가 그것도 부족해서 상당수 목사는 아예 자식에게 교회를 넘겨주는 세습까지 시도하고 있습니다. 결국, 종신제를 방치하니 이제는 세습제까지 넘보고 있는 것입니다. 본래 염치를 아는 도적이란 극히 드문 법입니다.

더욱 기이한 점은 똑같은 목사인데도 부목사나 교육목사 등의 교역자는 흔히 임기제로 하고 있습니다. 심할 경우는 이 교역자들의 임기를 연임 보장이 없이 1 년으로 하여 마치 파리 목숨처럼 만든 비정한 교회도 있습니다.

직분과 직책의 차이 논란이 신도들에게 다소 혼선을 주는 이유는 담임직을 '직책'이 아닌 '직 종신제 분'으로 오해하는 데에 크게 기인합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일반적으로 호칭하는 목사, 장로, 그리고 집사 등은 분명히 신약성경에 언급된 직분입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한번 목사는 영원히 목사이고, 한번 장로는 영원히 장로입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 '담임목사'라는 직분은 없습니다. 협동목사라는 직분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당회장, 부목사, 교육전도사, 시무장로, 협동장로, 서리집사, 성가대장, 그리고 각 기관장 등의 직분도 성경에 없습니다. 따라서 이들 직위는 직분이라기보다는 직책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입니다. 예를 들어, 어느 집사가 한번 성가대장을 했다고 해서 그를 평생 성가대장으로 부르지는 않습니다. 즉 직책이란 교회가 필요에 의 해 특정 직분자들에게 임기를 정하여 맡긴 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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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직책은 성경에 명시된 직위가 아니라, 개교회가 여러 직분자들의 사역을 보다 능률 적이고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임의로 만든 것입니다. 교회는 필요하면 시대적 여 건에 따라 새로운 직책을 만들거나 또는 기존 직책을 폐지할 수 있습니다. 직분은 특정 교회나 단체에서의 시무 여부와 직접 관련이 없습니다. 시무하는 교회가 없어도 목사는 여전히 목사입니다. 반면에 직책은 시무와 함께 시작되고 시무를 마치면 자동으로 종료됩니다. 비록 일부에서는 직분 자체도 임기제로 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기는 하지만, 일단은 현재 개신교에서 '직분은 종신제이나, 직책은 종신제가 아니다'라고 일반적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보통의 경우 직분이 직책의 의미로 또는 직책이 직분의 의미로 사용하여도 특별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근본적 적용 원칙은 명확히 해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이 직분과 직책을 적당히 혼합하여 얼버무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인들에게도 무의식중에 그렇게 인식하도록 합니다. 그래서 마치 목사 직분이 종신제이니, 담임목사 직책도 당연히 종신제인 것처럼 오도합니다.

그러나 담임목사직은 단지 회중이 청빙하고 교회가 임명한 직책일 뿐입니다. 따라서 담임 목사직이 회중보다 우위에 있을 수 없고, 오히려 필요하면 회중은 그 직위를 언제든지 해임할 수 있습니다.

뱅은 일찍이 "안수는 직분자를 하나님께 맡기고 바치는 일을 상징하는 예식일 뿐 그 외에 다른 심오한 신비가 깃들여 있지 않다"고 했습니다. 즉 안수 자체가

직분자들에게 특별한 '신적 권위'를 부여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안수를 받았다고 해서 마치 하나님의 대리자라도 되는 양 크게 착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특히 미국 장로교와는 달리 유럽의 개혁 교회와 스코틀랜드 장로교는 전통적으로 장로 와 집사 임직시에 안수하지 않습니다. 목사 역시 가르치는 장로의 직분이므로 목사 안수가 목사직을 다른 직분보다 더 우월하게 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가장 결정적인 사실은 한 교회에서 거의 70 세까지 담임목사 직위를 보장해 주는 현행 '담임목사 종신제'는 오직 한국에서만 아주 광범위하게 운용하고 있는 문화유산적인 제도라는 점입니다. 일부 예외는 있겠지만, 대부분의 외국 교회에서는 3~7 년간 임기를 두고 연임을 적절히 제한하여 특정 목사가 지나치게 오랫 동안 한 교회에 머물러 사역 하는 것을 제도적으로 방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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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이나 구세군 역시 임기에 따라 정기적으로 순환하는 사역을 성공적으로 잘 시행 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순환 목회 제도는 교회 부패를 막고 사역자의 질을 높히는 데에 매우 효과적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왜 유독 한국교회가 개신교 역사상 가장 부패한 교회가 되었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권주의는 한국교회 악의 축

부분의 목회자가 교회에서 예배, 구원, 헌금, 주일, 그리고 교회 봉사 등에 큰 관심 을 두고 열심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진리의 핵심인 십자가의 도를

따르는 일은 제대로 강조하고 있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는 설교로는 바른 진리를 말하 지만, 실제 행위로는 이를 부인하기도 합니다.

아울러 '예수 믿으면 복을 받는다'고 습관적으로 말하지만, 실제로는 그리스도의 고난 에 동참하는 삶을 누락하여 복음을 크게 왜곡하고 있습니다. 과연 예수님이 언제 잘 먹고 잘사는 것이 참된 복이라고 하셨던가요. 만일 그러한 것이 핵심적 복이라면 돌에 맞아 죽은 스데반, 광야에서 고생하다가 목이 잘린 세례요한, 그리고 톱에 잘려 죽은 이사야 선지자는 저주를 받은 것인가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복은 분명히 다른 복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것이 복이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이 복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길을 따르다 의를 위해 박해를 받고, 교회와 이웃을 위해 고난을 나누는 것이 진정한 복입니다. 비록 우리가 늘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지 못하는 부족한 죄인들이지만, 그래도 우선 말이라도 바르게 해야 하지 않습니까.

왜 한국의 일부 목사들은 바른 복음을 따르지 않고 돈과 권력을 추구하며 교회를 사유 화하고 신도들을 기복화할까요. 왜 부자를 우대하고 가난한 사람을 경시할까요. 과연 이들의 행위가 목사 가운을 걸친 것 외에 실제로 무신론자보다 더 나은 것이 무엇입니 까.

이들은 목자의 마음을 배신한 변절자들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바로 한국 '교권주의'의 본체이며, 동시에 종신제라는 음흉한 뿌리를 개 교회에 깊숙이 박고 무한정 교회의 단 물을 빠는 한국교회 악의 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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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가 선한 길을 걷다가 연약하고 부족해서 실수할 때는 성도들이 서로 감싸 주고 기 도해 주어야 합니다. 목사가 다소 무능해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더욱 힘써 도와주고 세워 주면 됩니다. 우리도 많이 무능하니까요. 하지만 어느 목사가 십자가의 도를 버 리고 자의로 세상과 짝한다면 이야기는 전혀 달라집니다.

교회 공금 횡령, 성추행, 교권 남용, 그리고 교회 사유화 등을 고의적으로 반복하는 행위는 세상과 야합하는 일입니다. 이는 우발적이며 일회적인 실수와는 전혀 다른 죄 악입니다. 이런 경우는 더는 교회가 인내하고 관용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담임목사 임기제가 대안이다

회 갱신에 대한 글에 대해 "비판만 하지 말고 대안을 제시하라"는 댓글을 주변에서 자주 봅니다. 그러나 이는 비판이 바로 대안의 시작이라는 것을 모르는 답답한

주장입니다.

또한, 근본적으로 사람이 변하지 않는데 "제도의 개혁만으로는 교회 개혁을 이룰 수 없다"고 하는 변명을 자주 듣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 부분적으로만 맞는 말입니다. 기 본적 제도 개혁이 때로는 교권주의와 교회 부패를 제거하는 매우 치명적 무기가 될 수 있습니다.

담임목사 임기제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이는 사실 중대형 교회 귀족 목사들이 내 심으로 제일 두려워하는 제도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임기제라는 말만 나오면 기겁을 하고 온갖 궁색한 논리와 핑계를 만들기에 급급합니다.

게다가 이런 증상이 아주 심한 분은 임기제가 비성경적이라고까지 공격합니다. 제사장 이나 사도직이 임기제가 아니었다는 것이 그 알량한 이유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아직도 신약 교회에서 단지 가르치는 장로의 하나인 목사를 제사장, 선지자, 또는 사도의 반열에 올리는 어리석은 우를 범하고 있을 뿐입니다.

제사장이나 선지자나 12 사도는 하나님 또는 예수님께서 직접 세우신 특별한 직분입니다. 회중에게 허락을 받아 선지자나 사도가 되는 것을 보셨는지요. 제사장 역시 하나님께서 레위 지파로 정하셨습니다. 반면에 목사, 교사, 장로, 그리고 집사는 크게 다릅니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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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분들은 회중이 선택하거나 교회가 임명합니다. 따라서 사람이 세운 목사는 원천적으로 하나님께서 직접 세우신 선지자나 사도와 결코 동급이 될 수 없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단 하나의 예외가 있는데, 그것은 초대교회가 가롯 유다의 자리에 맛디아를 선출하여 임명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일부 신학자들은 매우 성급한 선택로 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이미 그 자리의 적임자로 사도바울을 예비하셨기 때문입니다.

하여튼 교권주의자들이 목사 임기제에 대하여 예민하게 반응하는 이유는 모처럼 쌓아 놓은 기득권이 한 번에 날아가 버리기 때문입니다. 담임목사 임기제는 목회 부정과 교 회 사유화는 물론 망국적인 교회 세습도 잔뿌리까지 철저히 응징할 수 있는 좌우에 날 선 검입니다. 동시에 각 교단 지도층에 서식하는 교권주의자들을 정기적으로 살충할 수 있습니다. 차면 교회법에 따라 물러나야 하는데 무슨 더 이상의 독재나 사유화가 가능할 임기가 까요. 오히려 잘못하면 평판이 나빠져서 다음 임지를 구하는 데에 장애가 됩니다. 따라서 목사와 장로 등 시무 직분자들의 종신제 이것 하나만 바르게 고쳐 임기제로 바꾸 어도, 현재 한국교회가 직면한 고통의 반 이상을 당장에 경감시킬 수 있습니다. 물론 목사 임기제에도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가장 가슴 아픈 문제는 목회자의 경제적 자립을 보장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매우 안타까운 문제이고 실제로 간단히 해 결하기 어려운 난제입니다. 그래서 필자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누구도 쉽게 목회에 나 서지 마시라는 것입니다. 거룩한 사명을 위해 자신의 품성과 자질이 과연 얼마나 목회 에 적합한지 반드시 치열한 검증을 거쳐야 합니다.

반면에 목사 임기제는 평생 특정 목사의 목회 취향에만 의존하지 않고 여러 목회자의 설교를 다양하게 경험할 수 있게 하여, 교인들이 영적 편식을 하지 않고 성경의 진리 를 골고루 배울 수 있게 해 주는 장점이 있습니다.

또한, 목회자들이 정기적으로 순환 이동을 해야 하므로 자연스럽게 지역 교회에 새로 운 피를 수혈할 수 있게 해 줍니다. 기존처럼 중견 목회자들이 평생 한자리에 눌러앉 아 과도한 기득권을 누린다면 젊은 목사들은 교회 개척 외에는 대안이 없어지고, 그러 다 보니 지금처럼 미자립 교회가 난립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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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목회인 경우 필자는 처음 청빙시 임기는 2 년으로 재신임을 묻고, 그 후에는 6 년 연임 임기를 2-3 회까지 허용하여 한 교회에서 최대 14-20 년 정도로 제한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이상은 설사 베드로가 와서 목회한다고 해도 말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시무장로도 연임을 제한하여 당회의 터줏대감이 되어 교회를 좌지우지하는 현상을 막아야 합니다.

하여튼 한 교회에서 20 년 이상 장기 집권을 하다 보니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자기 사람 을 키우게 되고, 그러다 결국 교권의 단맛을 본 후에는 스스로 욕심을 못 이겨 부정을 자행하고 사회의 지탄을 받는 목회자들이 너무 많습니다. 또한, 이렇게 권력의 단맛에 중독된 자들이 세력을 형성하여 떼로 몰려다니며 여러 교단의 상층부를 장악하고 있는 것이 한국교회의 암울한 현실입니다.

직분은 감투가 아니다

히 대형 교회 목회자들이 한국교회 타락에 앞장을 서고 있습니다. 요즘 이 분들 중에 사회의 존경을 받는 분이 몇이나 있습니까. 이들이 진정 종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까. 오히려 상당수는 시정잡배나 사기꾼 수준의 부정을 저지르며 세인의 혹독한 지 탄을 받고 있습니다. 예배 중에는 그리도 경건하고 명철하고 거룩하신 분들이 왜 강단 에서 내려오면 기초적인 교회 정의마저 지키지 않습니까. 성경은 그저 설교용이고 자 신의 실제 삶과는 무관한지요.

더욱 심각한 문제는 한국교회가 이들 종교 업자들을 일거에 몰아내고 치리할 만한 자체 정화 능력을 크게 상실하였다는 점입니다. 사실 상식을 조금이라도 가진 신자라면 어떤 인물이 문제아인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 도적인지 뻔히 알면서도 그 도적을 합법적으로 치리하기가 어렵습니다. 심지어는 도적이 오히려 파수꾼을 해치려 더 날뜁니다. 왜냐하면, 이 도배들이 교권의 칼자루를 쥐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찌하여 이런 기막힌 일이 발생했을까요. 이는 한국교회가 고인 물은 반드시 썩는다 는 교회 역사의 냉엄한 교훈을 '감히' 무시한 결과입니다. 아울러 목사나 장로도 그 근본이 죄인임을 망각한 대가입니다.

정작 현실이 이 지경인데도 우리는 세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담임목사 종신제를 끝까지 고집해야 할까요. 중세 교회라면 모를까 개혁 교회에 이 무슨 시대착오적인 제도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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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드시 종신제이어야만 주의 종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철밥통을 위한 종신제인가요.

직분자들이 죽어야 교회가 삽니다. 그러나 거짓된 직분자들은 자신들이 잘살기 위해 거꾸로 교회를 죽이고 있습니다. 이제 양심이 있는 목사님들이라면 스스로 종신제 폐 지에 앞장서 주시기를 촉구합니다. 담임목사는 사도나 선지자가 아니고, 제사장이나 왕은 더더욱 아니지 않습니까.

제부터인지 한국교회에 감동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대신 그 자리에 양들의 탄식과 눈물이 넘치고 있습니다. 이처럼 양들을 울리는 목회는 불의한 목회입니다. 차라리

목사가 울어야 합니다. 목사가 먼저 자복하고 바로 서야 합니다. 목사마저 바로 서지 못 한다면 양들은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하나요.

사도행전의 바울은 결코 한자리에 안주하며 사역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움직이는 불 덩어리'였습니다. 동으로 서로 바울이 가는 곳마다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가 가는 곳에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지고 성령의 뜨거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시는 제자들에게 진실로 원하시는 것은 직분을 감투 삼아 한 동네에 눌러앉고 기득권의 바벨탑을 쌓는 것이 아니라, 전도자의 마음으로 부지런히 ' 다른 동네'로 가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눅 4:43)."

2012 월 1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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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 떼어먹는 교회 겉모습은 정통이나 속은 사이비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 이라(말 3:8)."

수님 시대의 유대교는 스스로 정통을 자랑하던 교회이었습니다. 자신들이 아브라함 의 자손임을 자부하였고 누구도 감히 교권에 대항하지 못했습니다. 사실상 온

백성이 모두 신도이었으니 교세 역시 막강하였습니다.

그들은 거대한 건물 헤롯성전을 자랑했고 적어도 겉으로는 율법도 잘 지켰습니다. 안 식일을 철저히 지키고, 제사를 드리고, 십일조와 연보도 잘하였습니다. 아마 겉모습으 로만 본다면, 당시 유대교는 정통성을 매우 잘 갖춘 교회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과 세례요한은 유대교 지도자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독사의 새 끼들'이라는 극언을 퍼부으셨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겉과 속이 매우 달랐기 때문입니다. 백성은 로마제국과 헤롯 왕가의 압제 아래 고통을 받고 있었으나,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사욕을 따르며 도리어 백성을 수탈하였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바와 같이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라는 표현이 이들의 배도한 행위를 구체적으로 시사하고 있습니다. 또한,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 역시 당시 유대교 부패의 한 단면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건물 신앙'은 교회 사이비화의 전조 무지하고 무관심하였으나 건축에 몰두하며 교세 확장에만 열심이던 교회가 진리에는 또 하나 있습니다. 바로 중세 교회입니다. 특히 1625 년 11 월, 교황 우르바누스 8 세에 의해 완공되기까지 무려 120 년이 걸린 성베드로대성당의 증축은 교회사적인 사 건입니다. 엄청난 헌금과 수고가 이 건물에 소모되었습니다.

교황 레오 10 세가 성베드로대성당의 증축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면죄부를 팔면서 "면 죄부를 산 돈이 금고에 떨어지는 순간 본인은 물론 그의 가족과 친족의 영혼까지도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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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에서 구제받아 천국으로 간다"는 거짓말을 하여 루터가 '95 개 조 반박문'을 통해 이 를 비판하게 되었고 그 결과 종교개혁이 시작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교회가 타락하면 이 정도로 유치한 거짓말에도 신도들이 쉽게 잘 속아 줍니다. 오늘날 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속화한 많은 교회에서는 지도자들이나 신도들이 모두 '그 나물 에 그 밥'이 되어 '성전 건축'이니 '정당한 세습'이니 하며 불의한 거짓을 교묘히 합 리화하고 있습니다.

사적으로 보면 교회가 부패할 때는 희한하게도 꼭 '헌금 독려'나 십일조 강요로 그 자폐적 증상이 시작되고, '건물 신앙'으로 그 타락의 꽃이 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단순한 건물을 '성전'이라고 오도하거나 그 부지를 '땅 밟기'하며 신성시하 는 행위가 교세 확장에 매우 효과적인 수단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 별도의 성전이나 거룩한 땅이란 결코 없습니다. 신자들 자신이 성 전이기 때문입니다. 성지, 성인, 그리고 성물을 따로 구분하고 신성시하는 행위는 중 세 교회의 미신적 악습일 뿐입니다. 바른 교회는 진리의 전파에 힘을 쏟는 반면에, 사 이비나 이단은 언제나 기만적 잔수를 부리며 외형적 교세 확장에 애를 씁니다.

그런데 과거 유대교나 중세 교회가 그토록 큰 건물을 짓고 아름답게 치장하였으나 그 결과는 과연 무엇이었습니까. 교세가 확장된 것이 바로 진리의 확장을 의미하지는 않 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준 유대교는 오히려 불과 한 세대 만에 로마군에 의해 그들이 자랑하던 헤롯성전과 함께 처참하게 멸망했습니다.

한국 개신교를 제외한다면 역사상 가장 부패한 교회가 중세 교회입니다. 진리는 왜곡 되고 직분자들은 부패했습니다.

신도들의 맹신과 무지 속에서 일부 사제들이 처자식까지 두고 교회 재산을 횡령하고 사유화하였습니다. 많은 수도원의 지하에서 유아들의 시신이 나왔습니다. 수녀원의 화장실에 아이들이 버려지고 갓난아기의 사체가 벽 속에 숨겨졌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독선적 교리에 항거하는 사람들을 모두 이단으로 몰아 처형하였습니다.

우리는 역사가 증거하는 이런 아픈 교훈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됩니다. 천사가 타락하 면 사단이 되는 것이고, 정통이 타락하면 바로 사이비나 이단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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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 떼어먹는 교회

늘날 한국교회가 지탄을 받는 가장 큰 이유는 스스로 교회의 본질을 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예수님의 삶과 그

가르침을 따라야 마땅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리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공의를 지키며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을 돌보는 것입니다.

복음의 핵심은 주일예배에 잘 참석하고, 헌금 잘하고, 심방 잘하고, 그리고 봉사를 잘 해 그 결과 세속적 복을 듬뿍 받으라는 그런 수준의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그저 신자들이라면 당연히 해야 할 지엽적인 것들입니다. 복음의 핵심은 예수님이시고, 교회의 본질은 예수님의 제자 된 삶을 가르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런 고귀한 삶이 어찌 단순히 잘 먹고 잘사는 정도에서 충족될 수 있을까요.

일부 귀족 목사들의 상투적 선전처럼 '예수를 잘 믿으면 잘 먹고 잘산다'는 것이 진실 이라면, 예수를 믿지 않는데도 잘사는 나라들을 어찌 해석해야 합니까. 또한, 많은 대 형 교회 목회자들이 병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데 이는 저주를 받은 것인가요.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잘 먹고 잘사는 길이 아니라 도리어 고난을 각오하고 십자가를 지는 길임 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의 제자 중에서 부귀와 영화를 누리다 간 사람이 단 한 사람이 라도 있었던가요. 백성과 함께 고난을 나누는 것이야말로 교회의 바른 모습입니다.

참된 선교 역시 백성의 마음속에 진리가 확장되고 정의를 흐르게 하는 것이지, 단순히 외형적 교세를 확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한국에 선교사나 목회자가 부족하여 전 도가 잘 안 되고 교회 성장이 둔화하였다고 보십니까. 요즘 길에서 행인들에게 예수 믿으라고 한번 말해 보십시오. 아마 욕을 안 먹으면 크게 다행일 것입니다. 주님의 교 회가 교회답지 못하고, 신도들이 신자답지 못한데 누가 예수를 믿으려 하겠습니까. 거대하고 화려한 성베드로대성당에서 그리스도 십자가 고난의 모습이 과연느껴지십니까. 또한, 한국의 수 백억 또는 수 천억짜리 대형 교회당에서 병든 나사로의 집을 방문 하시던 가난한 목수의 마음이 느껴지십니까. 분수에 맞지 않는 제사장적 가운을 걸치고 화려한 대형 교회 높은 강단에 선 자들이 정말 종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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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에 대한 투자는 적정선에서 반드시 절제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언제나 가 난한 이들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부자는 가난한 자를 결코 돕지 않는다"는 다소 풍자적인 말이 있습니다. 가난한 이를 전심으로 계속 도우면 결코 부자가 될 틈이 없기 때문입니다. 같은 이유로, 한국 중대형 교회들이 부동산 부자가 된 것은 결국 교회가 가난한 이들을 경시하고 열심히 돕지 않았다는 강한 반증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재산을 최소화하고 주머니를 비우며 스스로 가난해져야 합니다. 건물은 절박해 하면서 사람은 경시하는 교회, 이는 병든 교회입니다. 이웃 작은 교회들이 셋방살이 좁은 예배당조차 다 채우지 못해 노심초사하건만, 한국의 중대형 교회들은 여전히 확장에만 몰두하고 있습니다. 미자립 교회들을 돕는 것 자체가 매우 좋은 선교이건만, 그들이 죽든 말든 자신만 키우겠다는 그 심보가 매우 비신앙적입니다. 하여튼 대형 교회 하나가 증축되면 근처의 작은 교회 수 십 개 또는 수 백 개가 줄줄이 문을 닫고 있습니다.

더구나 오늘날 많은 교회는 가난한 이들을 부끄럽게 하고 있습니다. 등록한 첫날부터 헌금 채를 내밀거나, 십일조를 제대로 못 하면 차별하는 교회가 적지 않습니다. 돈이 없으면 정상적인 교회 생활이 아예 불가능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거둔 돈이 과연 어디에 쓰이고 있습니까.

경 어디에 십일조를 선교나 건축에 사용하라고 가르쳤던가요. 왜 걷을 때는 성경대로 한다고 호들갑 떨면서 막상 쓸 때는 성경대로 가난한 이들에게 사용하지

않습니까. 본래 가난한 이들의 몫인 십일조를 도대체 어떤 종놈이 감히 함부로 가로채는 것입니까. 목사들 연봉은 제때에 꼬박꼬박 잘 챙겨 가면서, 왜 십일조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즉시 나누어 주지 않습니까.

가끔 보면 십일조를 안 하면 주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라고 신도들에게 호통치는 목 사들이 있는데, 이런 말은 먼저 목사나 장로들에게 해야 적합하지 않습니까. 구약 말 라기 시대에 제사장들이 십일조를 도적질한 것과 무엇이 다른가요.

한국교회 수입의 절대 액수가 이 십일조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이렇게 '단체로 합심하 여' 가난한 이들의 것을 도적질하는 교회가 하늘 아래 또 어디 있습니까. 그동안 한국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피처럼 소중할 엄청난 액수의 십일조를 거의 통째로 다 떼어먹고 이처럼 땅 부자가 된 것이 아닌가요. 그리고 사실은 십일조 뿐만이 아니라 연보 역시 본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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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교회당 건물이 필요가 없다거나 또는 외적 성장을 무조건 부정적으로 매도하 자는 것이 아닙니다. 적당한 건물도 필요하고 건강한 성장도 소중합니다. 다만 교회가 내면적 본질과 우선적 사역을 잃고 지나치게 겉을 치장하는 오류를 깊이 반성하자는 것입니다.

정통 교회의 사이비화

수록 한국의 중대형 교회에서 그리스도 고난의 모습을 보기가 어렵습니다. 자기들끼 리 모여 오직 '기복'과 '확장'이라는 맘몬적 물레방아만을 열심히 돌리고 있을

뿐입니다. 헌금을 많이 거두어 교회당을 증축하고, 신도들을 더 모으고, 선교사를 더 많이 보내고, 신학교를 지원하여 목회자를 양산하고, 그리하여 교세가 확장되면 결국 다시 더 많은 헌금을 걷을 수 있게 될 것이라는 극히 기업적 성장 논리가 한국교회에 만연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진리를 상실한 단순한 외적 성장은 복음의 확장이 아니라 단지 또 다른 중세 교회를 확장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사이비'란 겉으로는 정통과 같아 보이나 실제로는 그것과 전혀 다르거나 아닌 것을 말합니다.

중세 교회는 정통을 가장한 사이비 교회이었습니다. 아름다운 교회당, 장엄한 예배, 잘 조직된 성직자들, 그리고 구름같이 많은 신도 등 거의 모든 것을 정통처럼 잘 갖추 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결정적으로 성경 진리에 따른 바른 신학, 바른 목회, 그리 고 바른 생활이 결여된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지금 한국의 일부 정통 교회들이 이처럼 사이비화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교단 상층부까지 매우 폭넓게 진행하고 있습니다. 목사들이 부정한 뇌물을 주 고받고, 공금을 횡령하고, 성추행을 감추고, 그리고 교회를 세습하며 사유화하는 일을 아주 당당하게 자행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맹신화 또는 어용화한 장로와 집사들이 이를 방관하거나 동조하고 있습니다. 그나마 교리는 비교적 정통인데 목회와 생활은 내 부로부터 매우 지능적으로 사이비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이처럼 겉과 속이 많이 다른 교회입니다. 소수 교회만이 예외입니다. 어느 분의 신랄한 지적처럼 무슨 대단한 신학적 경륜이나 특별한 계시 또는 학문적 통찰력 이 별로 없어도 단지 파산한 '양심의 찌꺼기'만이라도 조금 남아 있다면 이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더는 정통이니 보수니 하며 허세 부리지 말고, 진정으로 속 모습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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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본질을 회복하여 주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하고 이웃에 복음을 전하는 바른 교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차라리 건물은 좀 미흡해도 오히려 신실한 믿음의 일꾼이 넘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 니다. 그래서 성경의 진리를 정통이라는 틀에 가두고, 기득권을 포장하여 보수라고 주 장하는 억지를 더는 부리지 말기 바랍니다. 부패한 영혼까지 팔아 사욕을 채워 속이 시꺼먼 정치 목사들이나 귀족 목사들이 정통이니 보수니 하며 썩은 무덤에 알량한 회 칠을 하는 것을 보면 정말 구토가 납니다.

그리고 교회 비리에 대한 비판이 교회에 상처를 내는 일이니 최대한 자제하자는 안일 한 주장을 가끔 봅니다. 그러나 교회에 진정으로 상처를 주는 것은 비리이지 비판이 아닙니다. 한국교회는 이미 극심한 비리로 때문에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를 품고 있습 니다. 은밀하게 숨기고 덮는다고 그 상처가 아물거나 없어질까요. 이제는 그 상처를 공개하고 수술하지 않으면 죽느냐 사느냐 하는 갈림길에 서 있는 것입니다. 아울러 교 회 비리에 대해 침묵하자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에 대적하는 일임을 엄중히 경고하고 싶습니다.

교회는 건물보다 사람을 키워야

들은 오늘도 목이 마릅니다. 고개만 돌리면 쉴 만한 물가가 있는데 결코 생수로 마셔서는 안 되는 욕망의 바닷물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거짓 종교 지도자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목회자들이 대형 콘크리트 덩어리를 우상으로 모시고 저리 삽질만 하고 있으니 기복과 맹신으로 기만당하는 양들은 언제쯤 시원한 물을 마음껏 마실 수 있을까요.

진리는 결코 건물에 있지 않습니다. 교회당 건물은 성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건 물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임재하십니다. 서구의 많은 교회당이 술집이나 카지노 또는 모텔로 팔려 나갔습니다. 중세 교회가 그토록 자랑하던 성소피아대성당이 오히려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되었고 지금은 관광객의 눈요깃감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한국의 교회당도 타 종교에 팔려나가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육식 공룡처럼 커진 대형 교회가 작은 교회들을 포식한 결과입니다.

그동안 건물이나 목회자가 부족해서 이 모양이 되었을까요. 이는 교회가 본질은 외면 하고 껍데기만 치장하여 순진한 교인들마저 교권주의자들의 배를 채우는 종교업에 이 용한 결과가 아닐까요. 백 명이 모이는 교회는 천 명이 모일 수 있는 교회를 지으려 하고, 천 명 교회는 만 명 교회를, 그리고 만 명 교회는 다시 오만 명 교회를 지으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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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면 도대체 일은 언제 제대로 할 예정인가요. 해마다 무리하게 증축을 위한 재정을 모으다 세월 다 보내고, 과도한 은행 이자까지 갚으며 남은 쥐꼬리만한 예산으로 교육하고 선교하고 구제하는 데에 생색을 내려 하니 세계 개신교 역사에 보기 어려운 이런 기형적인 교회가 된 것이 아닌가요.

그렇게까지 치졸하게 덩치를 키워 비만해진 교회에 수만 명 또는 수십만 명이 모여 정 통이라고 자부하며 분주하건만 도리어 목회 비리가 진동하고 담임목사의 시녀가 된 장 로들은 교회 돈이 어디에 쓰이는지도 제대로 모르는 것이 과연 정상이고 그게 자랑거 리입니까. 차라리 복부비만을 자랑하십시오.

국교회는 허세 부리는 겉치장에 너무 분주합니다. 마르다처럼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건물과 시설은 크게 좋아졌는데도 참된 주의 종은 오히려 보기

어렵습니다. 집요하게 십일조를 강요하여 재정은 풍부해졌지만 이를 가난한 이웃을 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을 교회 내부에서 자기들끼리 먹고 마시고 겉치장하는 데에 소비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일부에서는 여전히 망국적인 기복 설교로 기독교 신자가 아닌 '기독교 환자'를 더욱 양산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교회가 좀 더 차분해져야 합니다. 거창한 사업과 행사를 좋아하고 요란하게 떠 벌일 것이 아니라 마리아처럼 조용히 주님의 말씀을 열망하면 좋겠습니다. 분명히 물 가에 앉았건만 아직도 한국교회의 많은 신도는 너무나 의에 주리고 목이 마릅니다. 그 래서 이분들에게도 우물가의 그 여인처럼 예수님을 직접 만나는 놀라운 복음의 역사가 속히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교회는 건물보다 사람을 키워야 합니다. 헌금을 잘 걷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헌 금을 바르게 잘 사용하는 것입니다. 초기 한국교회는 비록 다양한 프로그램이나 반듯 한 교육관도 없는 허름한 예배당이었지만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신실한 일꾼들이 많이 성장했습니다. 분명히 지금보다 훨씬 좁고 불편했던 건물이었건만, 요즘 그런 소박한 옛 모습과 옛 신앙이 더욱 그리워지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마 23:15)."

2012 년 3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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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도 평신도다 개신교에 '성직자'란 직분은 없다

젠가 어느 대형 교회 원로 목사님의 발언 가운데 '장로를 평신도로 지칭'한 기사를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평소에 관심을 두고 존경하던 목사님의 발언인지라 당시

필자는 순간적으로 다소 충격을 받았습니다. 사실 딱히 틀린 말은 아닌데 왠지 불편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목사 역시 '가르치는 장로'로서 본질상 장로의 한 사람이기 때문입니 다. 같은 장로인데 과연 무슨 근거로 '다스리는 장로'는 평신도이고, '가르치는 장로' 인 목사는 평신도가 아닐까요. 또는 신도 중에 오직 목사만이 주의 종일까요.

개신교 직분에 '성직자'는 없다

사는 별도로 신학 과정을 이수하고 안수를 받은 특별한 종이기에 성직자라고 생각하 는 분이 있습니다. 많은 목회자 역시 자신을 그리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직임

시에 목사만 안수 받는 것이 아니라, 장로와 안수집사도 안수를 받습니다. 그런즉 안수 자체가 직분자를 성직자가 되게 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단지 신학을 전공하였다고 해서 그를 성직자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 신약 성경의 '교사'에 해당되는 신학교 교수는 성직자가 아니라 그냥 교수일 뿐입니다. 결국 신학 전공이나 안수가 목사를 평신도가 아닌 성직자로 분류할 근거가 되기는 어렵습니다.

가장 결정적인 사실은 본래 개신교에 '성직자' 직분이란 없다는 점입니다. 이는 종교 개혁자들이 중세 성직자인 사제직을 폐지한 이유와 맥락을 같이합니다. 개신교의 목사 는 구약의 제사장이 아니며, 신약의 사도도 아니고 그리고 중세 교회의 사제는 더욱 아닙니다.

신약 교회에서 목사, 장로, 교사, 또는 집사 등의 직분은 마치 귀족과 평민을 구별하 듯 신분을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사역의 구분'을 의미합니다. 신분상으로는 직 분에 관계없이 모든 신도가 다 동등합니다. 이것이 성경의 바른 가르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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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오늘날 어느 목사라도 자신이 특별한 성직자이며 사도나 제사장이나 사제와 동 급이라고 주장한다면, 그는 이미 사이비의 문턱을 크게 넘어서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 합니다. 이단이나 사이비는 거의 예외 없이 목사나 교주를 지나치게 과장하고 신성시 하여 기필코 '성스로운 존재'로 둔갑시킵니다. 그래야만 추종자들을 제 마음대로 주무 르며 그 사특한 목적을 쉽게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대속의 제물이 되어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과 백성 사 이에 중간자 역할을 하던 구약의 성직자인 제사장을 폐하셨고, 그 결과 모든 신자가 다 직접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왕 같은 제사장'의 신분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신약 교회에는 모든 신자가 신분상 이미 다 성직자가 되었으니, 별도로 '성직자' 역할의 직분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은 이유로 신약시대에는 교회 내의 직분만이 성직이 아니라, 교회 밖에서 신자들이 담당하고 있는 모든 직업이 다 거룩한 소명을 지닌 성직입니다.

도의적인 문제만 없다면 신자에게 천하거나 속된 직업이란 없습니다. 세탁업도 성직이며, 국밥집도 성직이고, 그리고 막노동도 성직입니다. 열심히 일해서 가족을 돌보는 것도 성스러운 사역이고, 남은 여력으로 이웃과 사회를 돕는 것 또한 매우 성스러운 사역입니다. 따라서 더는 성속을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폴 스티븐스 교수 역시 "성경에 기록된 헬라어 '라오스'라는 단어는 평신도나 성직자의 구분이 없이 하나님의 백성을 뜻한다. 여러분들이 예수님의 제자라면 여러분들은 안수를 받은 것이다. 하나님에게서 보냄을 받은 사람들이다"라며 목사와 평신도가 서로 다른 계급의 신분이 아니라 같은 신도임을 강조한 바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평신도'라는 용어가 중세 교회의 계급적 표현이라서 적절치 않다는 일부의 지적은 매우 타당합니다.

물론 세인들이나 언론에서는 목회자를 가톨릭의 사제나 불교의 승려에 준하는 신분으로 생각해서 성직자로 예우할 수는 있다고 봅니다. 그것을 굳이 도시락 들고 따라다니며 시정하고 싶은 마음은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교회 내에서는 이를 분명히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잘못된 인식이 관습을 바꾸며, 잘못된 관습은 제도와 사상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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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분 우월 의식은 비기독교적 사상

금의 한국교회가 바로 그런 형국입니다. 목사를 특별한 성직자로 생각하여 장로나 교사 그리고 집사보다 크게 성스러운 직분으로 대우하거나, 또는 비록 일부이겠지만

목사 스스로 자신을 신도보다 우월한 신분으로 자처하는 경우가 흔히 있습니다.

최근 한기총의 홍 아무개 목사님은 한기총 사태 해결을 위해 법원에서 파견된 변호사에 대해 "일개 집사가 목사를 오라 가라 하느냐"는 식의 발언을 하여 큰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습니다. 이를 '일개 목사'의 발언이라고 무시하기에는 그 파장이 너무 컸습니다. 아무튼, 이 사건은 일부 목회자들 속에 돌처럼 경직된 직분 우월 의식이 크게 들통 난 실례로 오래 기억될 것입니다. 신약 교회에서 회중이 선출한 특정 직분자를 마치 타 종교의 사제, 승려, 교주 또는 무당처럼 대우하여 다른 직분자나 신도보다 우월한 신분에 두는 것은 매우 교권주의적 이며 반기독교적인 발상입니다. 성경은 목사, 교사, 장로, 그리고 집사 등을 서로 보 완적이며 협력적인 대등한 직분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다만 가르치는 직무를 중시하 여 '가르치는 장로'를 배나 존경할 자로 여기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스승을 존경한다고 해서 스승에게 모든 것을 위임하지는 않습니다. 가르치는 일에 관련된 권한과 책임을 위임합니다. 마찬가지로 목사를 존경한다고 해서 교회가 그에게 과도한 교권과 함께 지나친 책임을 지우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자가 한국교회를 전반적으로 매우 '기형적인 교회'라고 혹평하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점 때문입니다. 요즘 예수교가 '목사교'라고 지탄을 받을 정도로

목사 직이 심하게 교주화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진정한 가르침은 잘 몰라도, 목사의 가르침이라면 별다른 검증이 없이 무조건 따르는 맹신도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물론 신실하신 목사님들만 계신다면 당장 큰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 무인가 신학교만 해도 무려 200 개가 넘으며, 전국의 신학교들에서 매년 만명 가까운 목회자가 양산되고 있습니다. 더구나 수백만 원만 내면 정규 신학교 학위는 물론 목사 자격까지 만들어 주는 중개업자들이 있고, 보다 심한 경우로는 돈만 내면 며칠 만에 목사로 신분 세탁을 해 주는 곳까지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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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니 오늘날 왜 한국교회가 이렇게 상처투성이로 만신창이 된 것인지 쉽게 설명이 됩니다. 여러 교단의 교세 확장 우선 정책과 이에 따른 신학교의 난립으로 목사의 저 급화가 난무하는 현실에서 보면 직분 우월 사상이 교회를 얼마나 심각하게 해치고, 목 사직의 특권화가 한국교회 부패와 타락에 얼마나 안락한 온상이 되고 있는지를 실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비단 목사직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장로나 집사직 역시 만성적인 직분 우월 사 상에서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직분자는 근본적으로 '섬기는 자'인데, 어찌 된 일인지 예수를 따른다고 하면서 아직도 교인들을 차별하며 목이 뻣뻣한 장로들이 있습니다.

자가의 도는 사랑과 섬김입니다. 그런데 교회 개척 초기에는 주인의 밥상 아래 개처럼 낮아져 하찮은 일도 마다 않던 직분자들이 중형 교회 정도가 되면 정승처럼

행세하 려 하고, 나중에 대형 교회가 되면 아예 왕처럼 회중을 휘두르며 군림하려 합니다. 그 래서 교회의 최고 의결 기관인 공동의회를 아예 동네 반상회만도 못한 '날치기 의회' 로 만들고 있습니다. 특히 교회 재정, 증축, 또는 세습 등 예민한 문제들을 처리할 때 보면 정말 가관입니다.

일부에서는 이제 그것도 배부르고 싫증이 났는지 정치권마저 넘보며 그 허망한 영향력 을 확대하려 애쓰고 있습니다. 그동안 순진한 신도들을 기만하고 우민화하며 교단 정 치에서 잔재미를 톡톡히 보시더니 요즘은 세속 정치마저 아주 만만하게 보이는 모양입 니다. 하여튼 선거철이 될 때마다 빠짐없이 혼탁한 먹물을 뿌리며 나서는 꼴뚜기들 중 에 제대로 된 생선은 하나도 없다고 단정해도 큰 실수는 아닐 것입니다.

성속 구분은 중세적 악습 우월 의식은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목회자 납세 문제와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직분한기총 대표회장은 "원칙적으로 목회자 납세에 반대한다. 목회자는 근로자가 아니라 봉사하는 사람이므로 과세 대상이 아니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기본적으로 목사가 교 회에서 하는 사역은 성스러운 일이고, 생업에 수고하는 교인들의 사역은 세속의 일이 라는 이원적 사고에 기인합니다.

아울러 그 봉사 논리가 참으로 이상합니다. 교회에서 목사만 봉사하나요. 오히려 진정 한 봉사자는 무보수로 헌금과 세금을 내며 수고하는 장로와 집사들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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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에 있어 성속을 따로 구분하는 것은 극히 중세적인 구습입니다. 목회자 납세 논란 은 목사가 성직자라는 중세적 특권 의식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공식적 으로 성직자를 인정하는 가톨릭의 사제도 세금을 내고 있으며, 미국을 비롯한 많은 외 국 교회 목사들도 소득세를 내는데 유독 한국교회 목회자들만이 면세가 되어야 한다는 그 논리는 매우 궁색하기만 합니다.

반면에 성속을 구분하지 않고 사역하셨던 허병섭 목사님의 삶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줍니다. 하월곡동 달동네로 들어가 '동월교회'를 열었고, 국내 최초로 교회에 탁아방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다 나중에는 아예 목회자의 직분을 버리고 직접 공사판 미장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월곡동 일꾼두레'를 만들어 가난한 노동자들을 위한 협 동조합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이후에는 시골로 내려가 손수 농사를 지으며 자연을 중 심으로 하는 생태 공동체 사역에 여생을 헌신했습니다.

이 분의 향기로운 삶 앞에서 성속 구분이 무슨 의미가 있고, 누가 감히 '목사는 성직 자이다'라고 잡론을 펴며 구취를 풍길 수 있겠습니까. 우리 신자들에게 더는 구분된 성스러운 땅, 성스러운 건물, 성스러운 강단, 성스러운 가운, 또는 별도의 성직자직 따위란 결코 없습니다. 오직 성스러운 소명을 향한 거룩한 사역만이 있을 뿐입니다.

목사는 성직자가 아니라 사역자

론을 말씀드립니다. 이교적 직분 우월 사상이 한국교회를 잠식하고 있습니다. 특정 직분이 성직자가 되고, 나머지는 평신도가 되는 것은 이방 종교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복음 진리에 세워진 신약 교회에서는 직분에 따른 사역의 구분은 있으나 신분의 구분 이란 없습니다.

거룩한 교회 내에서 직분을 계급화하는 것은 진리를 대적하는 일이며, 종교 업자들의 밥그릇을 치장하는 기만적 잔수를 따르는 일입니다. 기독교 진리는 단순히 종교의 틀에 가둘 수 있는 그런 유치한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교회는 진리를 포장하여 종교화하거나 상업화하는 일을 막아야 합니다.

땀 흘려 일하는 모든 직업이 다 고상한 성직이며, 모든 신자가 다 거룩한 소명을 지닌 성직자입니다. 그럼에도 어떤 전제 아래에서든 장로와 집사가 평신도라는 논리가 옳다 면, 목사도 당연히 평신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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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모든 평신도가 사실상 성직자인 개혁 교회에 별도의 특별한 신도나 성직자란 결 단코 없습니다. 다만, 사랑과 섬김으로 가슴이 불타는 '사역자'들만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성경에 세 부류의 사역자들이 있다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고대 교회의 사역 자들도 세 부류로 나뉘었다. 장로 계열에서 일부는 목사와 교사로 선택되고, 나머지 장로들에게는 도덕적인 문제들을 책망하고 지도하는 일을 맡겼으며, 빈민을 돌보고 구 제 물자를 분배하는 일은 집사들에게 위임했다." - 칼뱅(Jean Calvin)

2012 년 4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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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놔두고 죽 퍼먹는 교회 구약으로 역주행하는 한국교회 자세히 살펴보면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수고하시는 진실한 목회자들이 사실아주우리많이주변을 계십니다. 그럼에도 한국교회가 지금 크게 고통받고 있는 이유는 별로 순수하지 못한 인사들이 속된 수단을 동원하여 부끄러운 인맥을 형성하고 여러 교단의 교권을 뿌리 깊게 장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동안 이 교권주의자들이 심한 월권으로 중앙선을 넘나들며 가슴을 졸이게 하 더니, 요즘은 아예 한국교회를 구약 시대로 역주행시키고 있다는 자괴심마저 듭니다. 그 증거는 자명합니다. 시대착오적인 율법 중심, 성전 중심, 그리고 제사장 중심 사상 이 한국교회에 전방위적으로 확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교리상 스스로 율법 중심이라고 자인하는 교단은 하나도 없습니다. 겉으로는 복음, 십자가, 은혜, 그리고 만인 제사장을 노래하며 진리 안에서 자유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겉과 속이 많이 다릅니다. 적지 않은 교회들이 구약 율법의 참된 정신과 제도를 왜곡하여 백성을 억압하며 사욕을 취하던 바리새인의 길을 따르고 있습니다.

율법 중심 유일의 한국형 십일조가 그런 율법주의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는 명백히 복음 세계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율법의 무거운 짐입니다. 만일 어떤 특정 개인이 자율적으로 십 일조를 한다면 이를 구태여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신도들 에게 일률적으로 '신약시대에도 십일조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분명히 큰 오 류입니다.

하여튼 많은 교회에서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하거나 '받은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 로' 십일조를 하라고 강조합니다만, 사실은 하나님께 '거저 받은 은혜'를 율법의 십일 조로 보암직하게 포장하여 순진한 신도들에게 아주 비싸게 팔고 있는 셈입니다.

율법의 중심축이었던 제사, 안식일, 그리고 할례를 모두 폐기한 한국교회가 왜 유독 십일조만은 이리 집착할까요. 그래도 마지막 남은 양심의 찌꺼기와 좁쌀만 한 체면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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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에 '돈이 된다'라는 솔직한 고백은 차마 못 하고 있습니다. 이는 십일조 없이 교회를 건강하게 잘 운영하고 있는 전 세계 교회들에게 너무나 부끄러운 일입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무엇이 부족하셔서 우리 피조물들로부터 돈을 원하실까요. 하 나님께서는 다만 성도들이 물질을 서로 나누며 이웃 사랑을 직접 실천하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께서 집이 부족하신가요, 아니면 재물이 부족하실까요. 돈을 간절히 원하는 자들은 오직 교회 내에서 사익을 추구하는 종교 업자들뿐입니다.

선교나 건축을 위해 십일조가 필요하다는 변명 또한 매우 부적절합니다. 구약에 제정된 십일조의 본래 용도는 결코 선교나 건축이 아닙니다. 십일조는 우선적으로 가난한 이들의 몫입니다.

아울러 마치 이방 종교처럼 무엇을 '바치라'는 말 또한 자제할 필요가 있습니다. 희생 물을 바치듯 바침을 강조하는 것은 구약 제사 시대의 율법적 사고입니다. 신약시대에 는 성도의 삶 전체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거룩한 '산제사'입니다. 따라서 이미 포도나 무이신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 한몸이 된 상태인데, 무엇을 따로 더 바치라는 것인지 요.

국교회 지도자들이 진정으로 그렇게 바치는 것을 좋아하신다면, 차라리 필요 이상으 로 사치스러운 중대형 교회 목사들의 고급차와 두둑한 재산부터 먼저 바치시기를

권면합니다. 자신들은 호의호식하면서 생활고에 지친 교인들에게 열심히 바치라고 설 교하는 것은 지독한 기만이며 위선입니다.

은혜 시대인 신약의 가르침은 '바침'이 아니라 '나눔'입니다. 하나님은 연보나 십일조 가 필요 없으신 분입니다. 연보는 하나님이 쓰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서 나 누어 쓰는 것입니다. 십일조의 참된 정신 역시 바침이 아니라 나눔입니다. 어려움을 당한 이들에게 주고 가난한 이들과 나누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십일조의 정신'은 죽이고, 그 껍데기인 '십 분의 일'만 살려 열심히 바치라고 강요하고 있습니다. 제대로 나누지는 않으면서 계속 바치라고만 합니다. 그래서 이 돈의 대부분은 교회의 거품 성장과 교회 사유화에 악용 이 될 뿐 가난한 이웃의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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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 중심

제부터인지 한국에서는 교회당이 슬그머니 성전으로 둔갑했습니다. 처음에는 다분히 사이비성이 있던 어느 교단에서 애용하던 이 기만적 호칭에 요즘은 소위 정통

보수라는 교단들마저 노골적으로 가세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교회당 건물을 성전이라 하며 신성시하는 신앙 역시 극히 구약적인 사고에서 비롯됩니다. 신약 성경은 그리스도의 몸인 신자들 자신이 성전이라고 명백하게 가르치 고 있습니다. 그런데 배울 만큼 배웠다는 목회자들이 단체로 합심하여 단지 콘크리트 덩어리일 뿐인 교회당 건물을 거룩한 성전이라고 오도하고 있으니 참으로 기이한 일입 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느 장소 어느 건물에서 예배를 하던 그것은 단지 모임을 위한 처소일 뿐 성전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가 장식된 건물 속에 임재 하시는 것이 아니라, 신자들 마음속에 직접 임재하십니다. 강단 역시 그저 설교의 편 리상 세운 단이지 구약의 성스러운 제단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라서 빈말이라도 교회당이나 강단을 성전이니 제단이니 하며 함부로 호칭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런 무분별한 언사는 기독교의 무속화 또는 미신화를 촉진하고

다만 교권주의자들을 즐겁게 할 뿐입니다. 게다가 근자에는 교회당 부지를 '거룩한 땅'이라고 하며 십자가에 붉은 리본을 줄줄이 달아 마치 성황당처럼 차려 놓고 무속적 '땅 밟기'까지 하고 있으니 이는 지나가던 선 무당이 다 비웃을 일입니다. 하여튼 한국의 일부 교회들은 성경에 시키지 않은 희한하 고 기발한 일을 연구하고 개발하는 데에 아주 도가 텄습니다.

'건물 신앙'은 근본적으로 구약의 성전이라는 '거룩하고 신성한 이미지'를 기복 신앙 에 접합하여 신도들을 일단 감동시키고 이를 인위적인 교세 확장에 이용하려는 잔수에서 출발합니다. 성장과 전도를 명분으로 내세운 이런 통속적 수법의 배후에는 단지 '교회 사유화'라는 음흉한 욕망이 자라고 있을 뿐입니다.

강남의 어느 대형 교회가 성전이라는 미명으로 수 천억 원의 초대형 건물을 지으며 당 당하게 준비한 핑계가 '협소'해서라고 합니다. 또한 이미 충분히 큰 다른 대형 교회들 도 같은 이유로 틈만 나면 계속 초대형 증축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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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훈련된 제자들을 다른 지역에 흩어 파송하지 않고 암탉이 병아리 품 듯 끼고 있으니 그렇게 비정상적으로 비만한 모양이 된 것이 아닙니까. 들어오는 물길만이 있고 나가는 물길이 없으니 소금 덩어리 사해 바다처럼 그렇게 기형적인 모습이 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세상으로 흩어져야 할 소금이 대형 창고에 재고품처럼 쌓여 있는 형국이 되었습니다.

작은 교회들은 일꾼이 너무 없어 날마다 울고 있는데, 훈련된 제자가 넘치는 대형 교 회들은 이를 외면하고 고작 하는 말이 교회당이 협소해서 불편하다고 합니다.

예수님과 세례요한은 변변한 초막 하나 없는 야산이나 광야에서도 사역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변의 작은 교회들을 수도 없이 도살하며 키운 그 육식 공룡 같은 건물이 그 리도 자랑스럽습니까. 유럽의 교회들이 과연 대형 건물이 없어서 그처럼 몰락했을까요. 우리는 큰 건물 헤롯 성전을 자랑하던 바리새인들의 종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제사장 중심

사의 제사장화 또한 한국교회의 부끄러운 전통이 되고 있습니다. 중세 교회 사제직 을 폐하고 신설한 목사직이 교회의 삼권을 흔들며 사제보다 더욱 강력한 제사장적

특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결국 한국 개신교만은 종교개혁을 거꾸로 한 느낌입니다.

중세 사제는 그나마 로마 추기경이나 교황의 통제라도 받았지만, 한국 중대형 교회 목 사들의 월권은 누구도 쉽게 못 말립니다. 당회는 어용화되기 일쑤이고 많은 경우 노회, 연회, 그리고 총회 역시 교권주의자들에 의해 좌지우지되어 오히려 개 교회 목사의 부 정을 비호해 주고 있는 실정입니다. 가재와 게는 한 통속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목사 제사장화의 절정은 '교회 세습'입니다. 마치 구약의 제사장처럼 대를 이어 담임목사직을 이어가는 것입니다. 문제의 핵심은 제사장 직분과 전혀 다른 목사 들이 제사장의 권위를 새치기하여 다른 직분보다 더 특별한 특한을 누리려 하는 데에 있습니다.

구약 율법은 귀하고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의 완성인 '그리스도의 복음'은 율 법보다 더욱 위대합니다. 구약의 십일조 또한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들이 가르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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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 자발적 연보는 그 보다 더더욱 좋은 것입니다. 즉 성경의 진리는 역사 속에서 '점 진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에게 계시되었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구약시대보다 더 귀한 것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왜 구태여 그보다 못한 것에 집착해야 하는지요. 하나님께서는 장성한 성도들에게 밥을 주셨는데, 한국 교회는 왜 구태여 계속 죽을 먹겠다고 하는지 정말 답답한 일입니다. 어린아이에게 죽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장성한 후에도 여전히 죽만 먹는다면 이는 심각한 문제가 됩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떡'입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성장한 신도들에게 죽을 먹이고 있습 니다. 그리고 목회자들이 제자 훈련은 열심히 하는데 훈련된 제자를 품에 안고 쉽게 놓아 주지를 않습니다. 이제 성장을 했으면 나가서 일을 하도록 해야 하는데 예배당 바닥에 모여 앉아 어리광 부리며 해마다 돌잔치만 반복하고 있습니다.

시대착오적 역주행을 멈추어야

세상에 우리 신자들 외에 감히 성전이라 불릴 수 있는 존재란 절대로 없습니다. 한국교회는 구약의 율법과 관습으로 신도들을 얽매어서는 안 됩니다. 큰 건물을

짓고 세 속적 복을 구하던 것은 구약의 일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은혜의 시대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우리는 이미 넘치는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보다 더 큰 복이 어디 있다고 설교 때마다 복을 노래하며 남은 인생을 기복에 몰입해야 할까요. 이는 밥 놔두고 죽 퍼먹는 격입니다. 만일 육신을 위한 복이 그리도 중요했다면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 아닌 로마 황제의 아들로 오셨을 것입니다.

이제 직분자들은 더 이상의 거짓말과 역주행을 멈추어야 합니다. 목회자들이 구약 제 사장 행세를 하거나 율법의 무거운 짐을 또다시 성도들에게 강요하는 것은 바리새인을 따르는 일입니다. 그 같은 행위는 죽통에 머리를 박는 어리석은 짓이며, 동시에 그리 스도의 복음과 십자가 사역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렘 7:4)."

2012 년 5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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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 당회장 제도'가 더 성경적 변화가 필요한 목사 우월 사상 일부 교회들은 지금 내전 중입니다. 목회자가 욕설을 듣고, 장로가 밀려 넘어 한국의 지고, 집사가 고함을 칩니다. 그 와중에 양들은 떨며 슬피 울고 있지만, 막상 위로받을 곳이 마땅치 않습니다. 주변을 살펴보면 언론에 자주 노출되는 일부 대형 교회들에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커진 중소형 교회들에도 분규가 점증하고 있습니다.

17 년 동안 한 교회에서 충성하시던 어느 권사님은 자신이 섬기던 교회에서 이런 기막힌 일이 발생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허탈해하십니다. 교인들은 담임목사를 지지하는 세력과 반대파로 갈려 주먹질을 하고 서로 경찰에 고소까지 한 상태입니다.

내분의 일차적 원인은 목회 비리

제의 발단은 개척 초기에 선한 목동이던 담임 목회자가 교회가 조금 성장하고 나면 사심이 생겨 발생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물론 거의 예외 없이 공금 횡령이나

성추행은 공통적인 단골 메뉴입니다. 그 수법과 핑계는 매우 다양합니다. 교회당 증축, 기도원, 수양관, 학교, 체육관, 교회 묘지, 언론 매체, 사회단체 그리고 기타 선교 지원 등을 빌미로 적당한 사업을 만들고 이 과정에서 은밀하게 공금을 횡령합니다.

그러다가 수 십년 간이나 멀쩡히 사역하던 목회자들이 어느 날 갑자기 하루아침에 망신 을 당합니다. 더욱 심각한 점은 그래도 크게 개의치 않는 인사들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이미 큰돈을 챙겼기 때문인지 교회가 갈라지든 말든 양들이 상처를 받든 말든 끝까지 교권을 움켜쥐고 그 자리를 고수하거나, 그도 아니면 적당한 명분을 만들어 자식에게 교회를 세습합니다.

필자가 잠시 출석했던 한 교회는 개척한 지 20 년이 된 중형 교회인데 목회 비리 때문에 거의 5 년 정도를 주기로 하여 신도들이 수차례 갈라져 나가 한때는 출석 교인이 900 여 명에 달하던 교회가 지금은 불과 150 여 명만이 남았습니다.

세상에 한국교회처럼 목회 비리가 많은 나라가 하늘 아래 또 어디에 있을까요. 신도들 도 이젠 웬만한 비리에는 아예 면역이 된 느낌입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교회 공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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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횡령한 목사는 감옥에 가서도 별로 자숙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고, 성추행한 목사는 피해자에 대한 철저한 사과나 보상조차 없이 어느 서부영화의 돌아온 무법자처럼 오히 려 강단에서 당당합니다.

더욱 실망스러운 행태는 비리 목회자들을 엄정하게 치리하여야 할 노회나 연회의 무책 임한 태도에서 잘 나타납니다. 그래서 일부 비판자들은 노회가 아니라 목회자 친목회, 신학교 동문회, 또는 심한 경우 종교 업자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노동조합이라고 혹평을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다 보니 개교회 주의가 극에 달해 일부 교회들은 정당한 지적에 귀를 막고 자신들 이 돼지를 삶든 개를 잡든 제발 상관하지 말라고 도리어 항변합니다. 그러나 발가락만 조금 다쳐도 온몸이 함께 아프고 고통을 받는 법입니다. 모든 교회가 한몸인 그리스도 의 지체 의식이 갈수록 희미해지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아울러 분쟁이 발생한 많은 교회에서는 교인들에게 목사가 싫으면 스스로 나가라고 합 니다. 그러다 그것이 잘 안되면 난데없이 웬 이단이라고 뒤집어씌우기가 일쑤입니다. 정통의 가면을 쓰고 실제로는 이단만큼 사이비한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과 정에서 신도들 간에 물리적 충돌이 일어나고 예배당 문을 잠그거나 경찰이 출동하는 일 등은 이제 거의 공식화하고 있습니다.

엇보다 신도들을 분노하게 하는 것은 교회법이 바르게 적용되지 않는 무기력한 현실 때문입니다. 장로나 집사가 횡령과 성추행을 하면 즉시 치리되어 해임되지만, 같은

비행을 저질러도 담임목사는 추종하는 맹신도들 뒤에 숨어 끄덕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 다. 그리고 세인들이 손가락질해도 자신은 의로운 척 아주 태연합니다. 소위 목사 가운을 걸치고 거룩한 직분을 맡았다는 일부 인사들이 오히려 타락한 세속 정치인들보다 더욱 철면피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게다가 요즘은 교회에서 드시는 것으론 많이 부족한지 그 영업 영역을 널리 확장하여 신학교나 선교 단체 그리고 교단 총회의 공금까지 횡령하며 그 쓸데없이 뛰어난 부끄 러운 재능을 마음껏 발휘하고 있습니다.

이런 비상식적인 현실 앞에서 우리는 무슨 복잡한 신학이라도 논해야만 대안이 나올까 요. 그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 부패를 척결하기 위해 당장 필요한 것은 거 창한 신학이 아니라, 매우 기초적인 상식의 회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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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성경대로 하고 있나

국의 보수 교단들이 즐겨 쓰는 말 중에 하나가 "성경대로 하자"는 것입니다. 물론 이는 올바른 태도이며 좋은 전통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말과는 달리 일부

교회들은 상식 수준의 성경 원리마저 따르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십일조 강요, 건물 중시 신앙, 기복주의 설교, 직분 계급화, 물질 숭배, 그리고 무분별한 은사주의 등이 그런 대표적인 예입니다. 거기에 추가하여 한 가지 더 주목하고 싶은 것은 바로 목사가 교회의 당연직 당회장이 되는 불편한 관습입니다.

잘 아시는 대로 공동의회가 교회의 최고 의결 기관이라고 한다면, 당회는 교회의 사역 과 행정을 총괄적으로 관장하는 최고 집행 기관입니다. 즉 당회는 다스리는 기관이지 결코 가르치는 교육기관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배와 교육을 담당하는 목사가 다스리 는 장로들을 제쳐 놓고 당회의 수장이 된다는 것은 매우 부당하고 엉뚱한 일입니다. 이는 마치 교육감이 지역 행정을 관할하는 시장의 업무를 수행하는 격입니다.

본래 장로는 구약시대부터 있었고 신약성경을 보면 '가르치는 장로'에 해당하는 목사의 주요 직무는 예배와 교육이고, 교회를 다스리고 관리하는 일은 '다스리는 장로'들의 직무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마 만일 어느 사역자가 이 두 가지 직무를 모두 독점해도 좋았다면, 구태여 성경이 이 두 장로의 직분을 별도로 구분하여 서술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히 역사적으로 장로교회는 다스리는 장로의 직분을 중시한 교회 정치 제도입니다. 회중이 선택한 장로들을 중심으로 하여 교회 운영이 이루어지도록 한 가장 큰

이유는 중세 교회 부패를 이끈 수직적 직분 제도 때문입니다. 중세 교회는 그 계급적 경직성 때문에 심지어 명백히 드러난 고위 직분자들의 부정과 부패조차 막을 수 없었고 어떤 항명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교권에 조금이라도 대항하는 사람이 있다면 파문은 보통이고 심하면 그 악명 높던 '이단 심문'에 넘겨져 처형을 당했습니다.

그런 이유로 초기 종교 개혁자들이 가장 우려했던 사항 중의 하나가 중세 교회의 '제 왕적 성직자 제도'이었기에 교권의 적절한 분배와 균형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즉 현행 장로 제도의 기원은 역사적으로 '교권 독재 배제'와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오늘날 한국교회가 목사 왕국이 되어 가고 부패가 만연하게 된 주요 원인 중의 하나가 바로 이 '목사 당회장 제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목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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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답게 소명에 따라 설교하고 가르치고 전도하면 충분한 것이 아닌가요. 그런데 말 로는 늘 목회가 너무 바쁘고 힘들다고 하면서 그 외에 다른 직분의 사역에 월권을 하고 한눈을 파는 것은 정말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어느 교단 헌법을 보니 "장로교란 교인들이 장로를 선출하여 당회를 조직하고 당회로 정치하는 민주적 제도"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당회로 정치하는 민주적 제도가 지 금처럼 목회 독재에 적합한 비민주적 제도로 변질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과연 무슨 근 거로 가르치는 직분의 목사가 교회를 다스리는 기관인 당회의 수장이 되어야 하는지 성경적으로나 논리적으로 명확히 검증된 바가 없이 관습적으로 시행되고 있습니다.

특히 많은 신도 사이에 퍼져 있는 '목사가 장로보다 영적으로 우위에 있는 직분'이라고 생각하는 '직분 우월주의'는 매우 비성경적인 사상입니다. 신약 교회 내의 모든 직분은 대등하며 상하의 계급이 없이 단지 직무의 구분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 목사 당회장 제도'는 목사에게 지나친 권한을 주어 교권 독재와 부패에 큰 도움을 줄지는 몰라도, 그 외에는 교회의 유익을 위해 별다른 당위성이나 장점이 별로 없는 제도임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장로 당회장 제도'는 교회 민주화의 초석

회의 사역은 예배와 교육만이 아닙니다. 전도와 구제 또한 매우 중요하고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사회봉사나 기타 문화 활동도 필요합니다. 이 모든 사역은 전체

직분자들이 효과적으로 역할 분담을 하여 합심하고 협력할 때 비로소 가능합니다. 그리고 당회는 이런 사역을 적절히 총괄하고 관리하는 중추적 기관입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은 직무에 따라 '장로는 다스리고, 집사는 구제하고, 그리고 목사는 가르치는 직분'으로 규정한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 그대로 시행하면 무슨 특별한 문제 라도 생기는지요. 왜 많은 교회에서 목사가 함부로 다스리는 장로의 직무를 날치기하여 월권하고 독주하는지 정말 자세한 해명을 좀 들어 보고 싶습니다.

단지 가르치는 직분의 목사가 무슨 근거로 교회의 사업, 운영, 관리, 행정, 재정, 그 리고 인사 등에 깊숙이 관여하며 분수에 넘는 월권을 하는 것일까요. 특히 설교를 담 당하는 목사가 마치 개인 회사 사장처럼 교회 재정에 직접 영향력을 행사하는 현실은 너무나 터무니없고 무지하게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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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울러 여러 교단에서 장로가 노회장이나 총회장이 되는 것은 허용하면서 유독 당회장 은 안 된다는 것은 정말 이상한 논리입니다. 더구나 필요할 때 목사의 비리를 직접 치 리해야 할 당회의 수장이 담임목사이다 보니 치리가 제대로 될 리가 없습니다.

필자는 단순히 개혁 교회의 발생지인 스코틀랜드 교회나 기타 유럽의 교회에서 장로가 당회장이 되는 사례가 있으니 우리도 이 '장로 당회장 제도'를 따라 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 어떤 역사적 사례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성경의 가르침이고, 예수님의 제자들에 의해 전해진 신약성경은 과도하게 교권이 집중된 현행 '목사 당회장 제도'를 결코 지지하지 않는다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장로 당회장 제도'는 교회 정치에 있어 풀뿌리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좋은 시 작이 될 것이며,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앞으로 장로들이 임기에 따라 당회장이 되는 교회들이 많이 늘어나기를 기대합니다. 그리고 지역 노회나 연회는 이런 선한 결단을 내리는 교회들에 대해 과거처럼 또다시 부당한 간섭이나 방해를 하지 말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다만, 특수한 여건에 있는 일부 미자립 교회는 목사가 일시적으로 임시당회장을 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직분자는 당회의 관리를 받아야

러나 이런 꿈이 구체적으로 실현되려면 무엇보다도 신도들은 직분자들을 신중히 세 워야 합니다. 그래서 다시는 거짓된 직분자들이 교회에 기생하여 성직자 행세를

하며 주의 영광을 가리고, 기복 신앙으로 신도들을 오도하며 금전을 수탈하는 악순환을 일거에 종식해야 합니다.

결론을 요약하면 가르치는 직무의 목사직은 다스리는 직무인 당회장을 독점해야 하는 직분이 결코 아니며, 개혁 교회에서는 목사가 당회를 주관하는 관습이 옳은 것이 아니 라 당회가 목사를 관리하는 것이 정상이라는 것입니다.

다행히 역사적으로 청교도의 정신을 이은 '회중 교회'는 이미 이런 일을 모범적으로 잘 실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목사는 예배와 교육에만 집중하고, 교회 운영과 관리는 교인들이 선출한 임기직 대표자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노골적인 부정 이나 부패는 눈을 씻고 찾으려 해도 찾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니 왜 우리라고 이렇게 할 수 없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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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꿈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또한, 작은 불꽃 하나가 큰불을 일으키는 법입니다. 그래서 필자는 앞으로 '직분자 임기제'와 '장로 당회장 제도'가 한국교회 갱신을 이끄 는 소중한 불씨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비록 제도 자체가 만능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제도 개혁은 매우 중요합니다. '제도 무용론'으로 제도 개혁을 반대하는 것은 단지 반개혁 세력의 상투적인 전술일 뿐입니다. 만일 제도를 경시하려면 차라리 중세 가톨릭교회에 그대로 남을 것이지 무엇 때문에 구태여 개혁 교회를 만들었습니까.

이 세상에는 존재하는 그 자체만으로도 감동을 주는 것이 있습니다. 어느 시골 교회 장로님의 낡은 성경책, 은퇴하신 목사님의 허름한 양복, 양화진에 있는 무명인 선교사 의 묘비, 그리고 테레사 수녀의 거친 손이 그러한 것들입니다. 우리가 출석하는 교회들 또한 바르게 세워져서 지역사회에 따뜻한 위로와 소망을 주는 그런 아름다운 존재 가 되면 좋겠습니다.

"말썽을 일으켜 떠드는 사람들이 '가르치는 일'이나 '다스리는 일'을 경솔하게 맡지 못하게 하려고 소명을 받지 않은 사람은 교회의 공적 직분을 맡지 못하도록 특별히 주 의했다." - 칼뱅

2012 년 7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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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들의 분노와 방탄 목회 한국교회의 오적(五賊) 1905 년 나라를 일본에게 넘겨주는 을사조약의 체결을 주도했던 을사오적(乙巳五賊)은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그리고 농상 공부대신 권중현 다섯 사람을 말합니다. 이 도적들은 나라를 팔아먹은 댓가로 일제 강점기에 큰 부귀를 누렸음은 물론, 사후에 작위와 재산을 물려주어 그 후손들이 지금까 지 아주 잘먹고 잘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이런 매국노들 못지 않게 거룩한 교회를 사유화하고 부와 명예를 탐하는 도적들이 있습니다. 아마 어떤 분은 늘 이마에 기름이 반질거리는 어느 대형 교회 목사, 장로교단에서 악명 높은 교권주의 목사, 입만 열면 성도들 복장 터지게 하는 감리교단의 수구 꼴통 목사, 또는 거액의 교회 공금 횡령이나 파렴치한 성추행을 자행하고도 여전히 강단에서 당당하신 몇 분의 중견 목회자들을 그 강력한 후보로 떠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그들의 행위가 매우 파렴치하고 반기독교적이기는 하나 특정 개인을 따로 지정하여 망신을 주거나 비판하는 것은 이 글의 의도가 아닙니다. 또한 신학교들의 경 쟁적 난립으로 인해 일부 무자격한 잡배들이 목회자가 되어 한국교회를 어지럽히고 있 는 현실을 모르는 것도 아닙니다. 아울러 목회자들도 연약한 인간이다보니 얼마든지 실족할 수 있다는 사실 역시 양들은 잘 이해합니다. 정작 양들을 가장 분노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가 많은 제도권 교회 그럼에도 들에서 외면 당하고 있다는 현실에 있습니다. 많은 직분자들이 백주에 파렴치한 범죄를 되풀이하고 있는 것보다 더 크게 성도들을 낙심시키는 것은 공교회가 '바른 권징'과 '자정 능력'을 상실하였다는 점입니다. 개신교 역사상 이렇게 몰상식이 상식이 된 교회는 없었습니다.

더구나 영적 치매에 걸린 교권은 진리를 수호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사악한 목회를 지키는 데에 오용되고 있습니다. 어떻게 소위 정통이라고 자임하는 교단에서 사교 집 단보다 더 부끄러운 일들이 공공연히 일어나고 있는데 이에 대해 정당한 치리가 없을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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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가르침을 화석화한 다수의 교회들은 이런 명백한 악에 대해서 도무지 분노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구촌에서 '신앙과 맹신' 그리고 '비판과 비난'을 가장 구분 못 하 고 우민화한 교회가 바로 한국교회라는 지적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취약한 환경을 기회로 과거 일부 직분자들이 안면을 몰수하고 사욕을 추 구하던 '철면피 목회'가 근자에는 더욱 악하게 진화하여 추종하는 맹신도들을 앞세우 고 무작정 돌진하는 이른바 '방탄 목회'의 경지에 들어선 느낌입니다.

교단 총회에 가스총까지 들고 나서는 상황에서 이런 뻔뻔한 목회는 도저히 말로도 못 말리고 교회법으로도 못 말리는 실정이 되었습니다. 지각 있는 성도들이 아무리 아우 성을 쳐도 외관상 합법적 교권으로 방호한 이들의 목회는 허약한 소총 부대에 맞선 독 일군 전차보다 더 강하고 견고합니다.

요즘 웬만한 중대형 교회들의 담임목사직은 이제 거의 종신직 교주급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일단 한번 강단에 서면 무슨 못된 짓을 해도 끌어내리기가 힘듭니다. 횡령을 해도 끄떡 없고, 성추행을 한 후에도 멀쩡하게 다시 돌아오고, 그리고 세습은 아예 ' 못하면 등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의 자녀들을 잘 돌보라고 부탁하셨건만 세습 목사들은 이를 경시하고 오히려 자기 자식까지 덤으로 망치고 있는 것입니다.

리가 식상한 비판을 거두고 항상 아름다운 덕담만 나누며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공교회는 부득이 악에 대하여 인내와 관용보다 치리를 실천해야

할 경우가 있습니다. 성경은 교회의 순결을 위해 아간이나 아나니아 같은 자들에게 용서와 포용만이 능사가 아니라 두려운 권징도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지금 한국교회야말로 그런 바른 권징을 회복해야 할 때라고 확신합니다.

필자가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한국교회의 오적은 아래와 같습니다.

1. 교회 자산을 횡령하거나 과도한 사례비를 받는 자 2. 성직을 거래하거나 교회를 세습하는 자 3. 교회 재정을 비공개하고 선교와 구제보다 교회당 증축에만 몰두하는 자 4. 기복주의를 진리로 포장하여 십일조를 강요하고 신도들을 우민화하는 자 5. 직분을 계급화하고 상습적으로 교단 정치에 몰려 다니며 교권 장악을 추구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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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개인의 관점에 따라서 이 목록이 다소 다를 수 있으나, 큰 틀에서는 별로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하여튼 성도들은 앞으로 이런 도적들을 보면 공개적으로 경고하고 교 회 내에 설 자리가 없게 해야 옳다고 생각합니다. 회개한 죄인은 사랑으로 용서하되, 공적인 죄는 끝까지 추적하고 치리하는 교회가 바른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리가 터질 때마다 간교한 교권주의자들이 자주 사용하는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해도 모두 뒤로 빠지라는 것입니다. 사실 하늘 아래에 죄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따라서 누구도 그들을 돌로 치지 못함은 극히 당연합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 내의 범죄는 대부분 은익되거나 크게 축소되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그리고 이런 관습을 악용하여 성직을 가장한 도적들은 간덩이가 더 크게 부풀어 계속 동일 범죄를 상습적으로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후안무치'란 '두꺼운 얼굴에 부끄럼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오늘날 한국 교권주의자들의 시대정신이 되었습 니다. 따끔한 치리가 없으니 아예 부끄러움마저 상실한 것입니다.

십자가를 따르는 선한 목회는 따뜻한 격려와 사랑을 받아야 옳지만, 사욕을 따르는 방 탄 목회는 반드시 추방되어야 마땅합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자신들은 죄가 전혀 없 어서 이스라엘의 죄를 지적하고 경고했을까요.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하고 순종해야 할 것은 사탄의 기만적 정죄보다 예수님의 제자 된 도리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언제나 '예'만 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동안 너무 '예' 에만 길들여져 '아니오'를 잊은 것은 아닌지요. 하지만 구약의 여러 선지자들, 세례 요한, 그리고 예수님은 불의에 대해 감연히 '아니요'를 말한 분들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실상은 진리를 종교화하고 상품화해서 배를 채우는 종 교 업자들을 따른다면 정말 답답하고 어리석은 일이 될 것입니다. 아울러 그들의 기만 적 설교에 세뇌되어 매주 주일예배, 저녁 예배, 새벽 예배, 수요 예배, 그리고 금요 예배 등 예배만 열심히 반복하고 세속적 복을 구한다면, 과연 무당 굿거리보다 크게 나은 것이 무엇일가요.

배와 집회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먼저 신자의 삶이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따르지 않는 삶은 결코 예배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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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순간에도 바리새인보다 더 위선적인 잡상인들이 교회당에 좌판을 깔고 공교회를 통 채로 사교 집단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이래도 어줍지 않은 자신의 품위와 안위만 지키 면 되는 것일까요. 나 자신만 깨끗하면 된다는 종교적 이기심이 한국교회를 내부에서 부터 조용히 무너트리고 있습니다. 과연 이 시대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거짓된 가르침에 분노하지 않는 자는 진리를 모르는 자입니다.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시며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눅 19:45~46)."

2012 년 10 월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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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패한 교회도 흥해야 하나 역사상 가장 흥한 교회는 중세 교회

국교회가 많이 혼탁하다 보니 과거에는 신도들이 '교회 밖에 구원이 있는가'를 진지 하게 토론했는데, 요즘에는 반대로 '교회 내에 구원이 있는가'를 염려해야 할

지경이라고 합니다.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런데 교회 부패와 관련하여 일부에서 흔히 오해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한국 개신교가 최근에 와서 갑자기 타락했다는 인식입니다. 하나 이는 정확한 사실이 아닙니다. 선교 초기에는 매우 순수했던 한국교 회가 그 이후 점차 세속화하여 60 년 전만 해도 이미 불순한 교권주의가 심각했었고, 30 년 전 또한 현재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한국 최대의 장로교 교단이 신도들의 의사와는 아무런 관계없이 교권을 탐하는 목사들 의 물욕적 세력 다툼으로 인해 수 십 개의 교단으로 분열하여 만신창이 되었고, 룸살롱 에 출입하거나 교회 여신도와 불륜을 저지른 유명 목사들이 백주에 활보하였습니다. 교회 사유화나 공금 횡령 역시 은밀하고 폭넓게 진행되었습니다. 이 모두가 한 세대 전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마음에 상처받기 십상이니 노회나 교단 총회에 가급적 참석하지 말라는 말이 그 시대에도 공공연히 나돌았습니다. 다만 대다수 순진한 교인들이 자세한 내막을 잘 모르고 있었을 뿐입니다. 교회 세습 역시 그때 뿌린 쭉정이 씨앗을 지금 심은 대로 거두고 있습니다.

1950 년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일제강점기 동안 신사참배를 하며 일본에 협력하던 교 권주의 세력들이 공적인 회개나 친일 청산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한국교회의 기득권 과 인맥을 그대로 유지하며 교권을 상속했습니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현재처럼 상층부 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더욱 부패한 구조가 체질화되었습니다.

거짓 목사들과 맹신도 한국교회에는 아직도 순수하고 충성된 직분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전 다행히 체적으로 보면 개신교가 이미 자정 능력을 상실했다는 극평이 있을 정도로 현실은 위기 상황입니다. 직장이나 사업 등 개인적 사정으로 타지방에 이사를 해 보신 분들은 실감하실 것입니다. 새로 교회를 선택하기가 겁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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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설교의 결론은 헌금 많이 하면 복 받는다는 무속적 교회, 돈이 없으면 부끄러워 갈 수 없는 교회, 십일조를 강요하여 미자립 교회나 가난한 교인들은 대충 돕고 나머지 목돈으로 교회 증축이나 목사 자녀 유학 보내는 교회, 선교는 허울일 뿐이고 국내나 외국에 법인을 세워 돈을 빼돌리거나 부동산 장사하는 교회, 등록 교인 350 명에 목사 연봉이 1 억이 넘는 교회, 재정을 공개하지 않고 영수증 없이 마음대로 사용하는 교회, 겉으로는 진실한 척 성경적 설교를 구사하나 뒤로는 교회 소유 부동산을 부인 앞으로 등기한 교회, 그리고 추잡한 교회 세습을 끝까지 목회 승계라고 우기는 이런 여러 교회가 양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며 큰 상처를 주고 있습니다.

들 세습 목사들의 논리대로 말하자면 북한의 정권 세습도 정치 안정을 위한 탁월한 승계가 되고, 재벌들의 족벌 세습도 경영 안정을 위한 뛰어난 선택이 됩니다.

그래서인지 한국의 수구 기득권 교회들은 불과 11 세의 재벌가 어린아이가 453 억 원의 주식을 소유하고, 5 세의 대통령 외손자가 9 억 원의 주식을 가진 불편한 사실을 결코 비판하지 않습니다.

최근 어느 기사에 따르면 한국인은 일본인보다 위증이 약 430 배 이상 많고, 무고는 무 려 540 배 이상 많이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거짓말을 하고 살기가 힘들고, 한국에서는 거짓말을 안 하고 살기가 힘들다’는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것이 진실이 라면 정말 큰 충격이며 시급히 고쳐야 할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설사 그런 통계를 글자 그대로 믿지는 않더라도 한국에 유난히 거짓 목사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힘듭니다.

한국교회 부패의 배후에는 항상 거짓된 지도자들과 무지한 맹신도들이 있습니다. 복음 은 고귀한 것이며 예수님은 생명이신데 종교 업자들은 유다처럼 자신의 영혼을 팔아 금과 은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교회에서 단순한 수치적 부흥이 복음을 대체하고, 물질적 번영이 진리를 대신하는 악순환이 빈발하고 있습니다.

역사상 가장 흥한 교회는 중세 교회 우리는 역사상 가장 흥한 교회가 중세 교회이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됩니다. 그러나 황제가 교회에 출석하고 권력자들과 재력가들이 줄줄이 그 뒷자리를 채웠습니다. 교회에 힘과 돈이 넘치게 되니 큰 건물을 짓고 사람들을 모았습니다. 예수를 진심으로 믿든 안 믿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교회에 출석하지 않으면 사람 행세를 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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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성경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교회를 가득 채웠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가 결정해서 안 되는 일이 별로 없었습니다. 교회는 심지어 세력 확 장이나 경제적 필요에 의해 대규모 전쟁도 교사했습니다. 거룩한 전쟁이라는 미명 아래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이국땅에서 헛되이 죽거나 비참한 노예가 되었습니다.

러나 그것은 단지 비극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근 천 년의 기나긴 세월 동안 중세 교회는 성스러움으로 포장한 교회당 건물 속에 안주하던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무수한 영혼을 어두운 지옥으로 조용히 인도했기 때문입니다.

이래도 아무 교회나 무조건 흥해야 할까요. 수많은 중세 교인들이 천국 문으로 알고 들어간 교회당이 사실은 지옥으로 안내하는 문이었습니다. 과연 성경조차 허용되지 않 았던 중세 신도들 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천국에 갔을까요. 큰 건물에 십자가를 높이 세우고 간판만 달면 모두 교회일까요.

중세 교회는 외부의 침공을 받아 무너진 것이 아니라, 내부의 극심한 부패와 타락으로 침몰했습니다. 성직자들은 돈과 명예를 탐하였고, 신도들은 진리에 무지하였고, 그리고 가장 순수해야 할 수도원마저 탈선하여 지하에 수많은 영아들의 사체를 버렸습니다.

이렇듯 교회가 일단 본격적으로 타락하면 수도원도 소용없고, 기도원도 못 막습니다. 새벽 기도회나 철야 기도회가 무색하고, 부흥회도 무당 굿판이 됩니다. 과연 한국교회 에 예배와 기도회가 부족해서 이 모양이 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한 주일 내내 각종 예배와 기도회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교회가 한국교회입니다. 오히려 너무 자주 모 여 균형 있는 사회생활이나 가정생활에 지장을 줄 정도입니다. 아마 '모이기를 힘쓰라 '는 말씀을 단순히 '자주 모이라'는 뜻으로 오해하는 듯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자주 모이고 분주하여도 진리를 떠나 자정 능력을 상실한 교회는 그냥 완전히 무너질 때까지 계속 썩어 갈 뿐입니다. 위선적 바리새인들은 결코 참된 회개를 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역사가 가르쳐 준 교회 부패의 생생한 교훈입니다.

거짓 목사들은 언제나 교회가 평안하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모두 조용히 하라고 합니다. 하지만 본래 종교 업자들과 정치 독재자들이 조용한 것을 좋아하는 법입니다. 조용히 포식하는 것이 최적의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이들에게 기만당한 우매한 백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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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독재자에게 표를 몰아주고, 무지한 신도들은 거짓된 지도자를 지지합니다. 그리고 그런 거짓 선지자는 세상에서 호사를 누리고, 참 선지자는 고난을 받습니다.

신도들을 약탈하며 속이 텅 빌 정도로 심하게 썩었어도 겉으로는 평안하고 조용했던 교회가 중세 교회입니다. 그리고 그런 타락한 교회가 무려 천 년이나 유지된 것은 바로 '그 조용함' 때문입니다. 물론 중간에 간간이 개혁의 목소리가 더러 있었지만, 대부분 이단으로 몰려 무자비한 박해를 받고 처형당했습니다. 서슬 퍼런 교권의 칼날이 워낙 무서운 점도 있었지만, 가장 큰 문제점은 절대다수의 신도들이 너무 무지하였기에 내부에서의 조직적 저항이나 자체 개혁이 아예 불가능했습니다.

거짓으로 위장된 평안 중세 교회의 아픈 교훈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위장된 평안 속에 거짓과 위선 우리는 이 난무하는 교회당은 더 이상 '예배당'이 아니라 '니골라당'입니다. 자정 능력을 상실한 교회는 부패한 교회이고, 부패한 교회는 더는 그리스도가 주인이 아니라 사람이 주인인 교회입니다.

그런 면에서 세습 교회는 목사가 교회의 주인 행세하는 전형적인 표본입니다. 만일 세 습 목사들이 정말 충성심이 불타서 그토록 대를 이어 목회를 간절히 원한다면 좋습니 다. 그렇다면 자식들을 배부른 중대형 교회가 아니라, 일꾼이 너무 부족한 농어촌 미 자립 교회에 보내 거기서 평생 충성하도록 하기 바랍니다. 하지만 필자의 견식이 부족 한 탓인지 몰라도 그런 멋진 세습을 하는 목사님을 본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결국 이들은 복음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비만한 배를 위하고 있을 뿐입니다. 지금 동네마다 너무 많아서 차고 넘치는 것이 교회당인데 하필이면 그런 고약한 세습 교회가 흥해서 무슨 유익이 있을까요. 부패한 교회가 부흥하면 결국 중세 교회처럼 됩 니다. 그런데 현재 한국의 여러 대형 교회들이 서로 경쟁적으로 이런 중세적 부패와 흥행에 앞장을 서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 교회의 문제가 매우 복잡한 것 같지만 그 결론과 대안은 언제나 동일합니다. 신자들이 깨어나야 합니다. 무지한 신도는 거짓된 지도자를 보위하여 결국 부패한 교회를 만듭니다. 한국교회의 문제가 외견상 직분자들의 부패인 것처럼 보이나, 정작 문제의 진짜 핵심은 신도들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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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우리가 복음은 값없이 거저 받았지만, 제자 된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안일한 자세로 십자가의 길을 따를 수는 없습니다. 신 자들은 바르게 알고, 바르게 가르치고, 그리고 바르게 실천해야 합니다.

한 세기 만에 놀라운 성장을 이룬 한국교회는 이제 성숙의 문턱에서 크게 좌절하고 있 습니다. 그동안 덩치가 커져 매우 기뻐했는데 어느 순간에 조로증을 거쳐 그만 치매에 든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약도 이 치매에는 별 효과가 없습니다. 신약과 구약 모두 들이대도 환자는 다 뱉어내고 엉뚱한 오물만 집어 먹습니다.

리가 바른 교회를 다시 가꾸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만일 자신의 교회가 치매에 들어 소통이 전혀 안 되는 교회라면 거기서 헛되이 다투지 말고 이제라도 과감하게

나오시는 것이 낫습니다. 거기서 중세적 부패와 약탈에 동참하는 것보다는 바른 교회를 찾는 것이 옳습니다. 만일 주변에 바른 교회가 없다면 소수라도 뜻을 같이하는 분들과 합심하여 따로 모이는 것도 좋습니다. 형편에 따라 유급 사역자가 없어도 무방하고, 있으면 더욱 좋습니다.

초기 교회나 지하교회는 유급 사역자가 없어도 잘 견디어 냈습니다. 반드시 신학 전공 사역자가 있어야 교회가 된다는 생각은 크게 잘못된 오해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에 신학 전공자가 몇이나 있었나요. 또한,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그냥 둘러앉아 성경을 함께 읽고 기도하는 단순한 공동체도 성령께서 함께하시면 아주 좋은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공동체가 점차 성숙해지면 지역사회를 위한 적절한 사역을 얼마든지 잘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사명보다 우선해야 할 것은 교회의 순결입니다. 따라서 부패한 교회보 다는 차라리 가정 교회나 지하방 교회가 훨씬 낫습니다. 직분자들이 주인이 아니라 예 수님이 주인이신 교회, 그리하여 복음이 바르게 증거되고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선 한 공동체를 다시 세워야 합니다.

'십자가의 도'를 따르는 공동체 위해 우선 당장 몇 가지라도 구체적으로 변해야 합니다. 사람의 눈을 의식하는 이를강요적 헌금 대신에 자발적인 무기명 연보를 격려하고, 군림하는 계급적 직분 대신에 함께 대등하게 섬기고 동역하는 직분자들을 세우고, 유급 직분자는 최대한 검소하게 살고, 노회나 연회는 목회 파송제와 순환제를 적극 실천하고, 봉건영주적 담임 목회제보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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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 목회와 공동 사역을 추구하고, 강한 자를 대접하기보다는 약한 자를 섬기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기독교는 단순히 자기 구원이나 자기 수양의 종교가 아닙니다. 또한 교양 있고 품위 있는 사람들만의 공동체도 아닙니다. 우리의 공예배가 어느 서부 영화에 나오는 장면처럼 반드시 멋있게 정장을 하고 엄숙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진정 기 뻐하시는 예배는 제물을 바치고 숭배하는 구약의 수직적 예배가 아니라, 진리 안에서 친구 되신 주님과 사랑으로 교제하는 수평적 예배입니다. 신약의 예배에 '바침'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삯꾼 목사들은 차라리 구약 유대교 따라서 로 돌아가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희생 제물이 되시었고 신도들은 이미 그 지체가 되어 신자의 삶 자체가 바침이 되었는데, 매주일 예배마다 무엇을 그리 더 바치라는 것입니까. 연보는 본래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어려운 형제와 함께 나누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돈이 필요 없으신 분입니다.

이제 교회는 신분의 차별이나 빈부의 구별 없이 모두 사랑으로 하나 되는 담백한 공동 체가 되어야 합니다. 주 중에 열심히 일하다 지친 몸으로 다소 간편한 옷을 입고 교회 에 나온들 좀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이신데 아버지 앞에 자녀들이 항상 정 장을 입어야 하나요. 아버지께서는 자녀들과 따뜻한 대화를 원하시는 것이지, 거창한 회담을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가능한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쉽게 참여할 수 있도록 그 쓸데없이 높은 문턱을 제거해야 옳을 것입니다. 사정에 따라 허름한 작업복을 입고 오는 사람에게도 앉을 자 리를 주어야 합니다. 그러니 소박한 예배보다 엄격하게 격식을 갖춘 장중한 예배가 좋 은 예배라고 너무 허풍 떨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론을 말씀드립니다. 한국교회의 위기는 십자가 정신의 상실에 있습니다. 많은 신도가 달콤한 성장과 번영에 취해 그보다 더욱 소중한 가치들을 잃어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단순한 세속적 성취가 순결, 겸손, 섬김, 절제, 희생, 배려, 검소, 그리고 나눔을 대신하고 교회 내에서 잘나고 많이 가진 자가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흥해야 할 새로운 교회는 권력자와 지식인이 겸손해지고, 부자가 마음을 비우며, 가난한 자가 당당하고, 삶에 지친 사람들이 위로를 나누는 진솔한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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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바리새인의 교회와 중세 교회는 그 큰 건물과 함께 무너져야 마땅할 교회이었 습니다. 성경의 참된 가르침을 대적하고 사욕에 따라 제도와 관습을 악용한 상업적 종 교인이 넘치던 교회입니다. 주님은 없고 제사장, 서기관, 교황, 주교, 사제, 그리고 귀족들이 실질적인 상전 노릇을 하던 교회입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많은 교회가 그 허망하기 그지없는 세속적 복을 탐하여 거짓된 지도자들을 따르며 또 다시 그런 배도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지금 이 시간이 매우 중요합니다. 바로 이 순간이 그냥 덧없이 살 다가 죽을 수밖에 없었던 초라한 한 죄인이 하나님 말씀으로 변화하여 기필코 주님 십 자가의 도를 따라 한번 바르게 살아 보겠다는 놀라운 결단을 하는 '진리의 순간'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 너뜨려 지리라 하시니라(막 13:2)."

2012 년 10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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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대신 십일조를 지고 가는 교회 헌금은 각자 그 마음에 정한 대로

성도들은 가톨릭과 유대교는 물론 전 세계 대부분의 교회에서 하지 않는 현대 십 많은일조를 왜 미국의 일부 교회와 한국교회만이 유독 강조하고 있는지 큰 의문을 갖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율법의 십일조는 그 임무를 완료하여 종결되었고, 중세 십일 조는 그 어처구니없는 부당성으로 인해 스스로 폐지되어 강물처럼 멀리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지금 한국의 많은 교회는 그 흘러간 강물을 한 줌 떠다가 부패한 역사의 물레방 아를 다시 돌려보겠다고 안간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아직도 십일조 존속을 주장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 것인지 그 정당성에 대해 간략히 재론하고자 합니 다.

율법의 십일조와 중세 십일조 구약 율법의 십일조가 왜 생겼는지 그 목적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먼저생각합니다. 누가 무슨 말을 하든 구약 의무적 십일조의 우선적 역할은 '성전 제사 제도'에 기인합니다. 가나안 정복 당시 농사일이 아닌 제사직을 수행해야 할 레위 지파만 이 토지 분배를 받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나머지 지파들은 '토지소산'의 십 분의 일을 성전에 가서 레위 제사장들에게 현물로 바쳤습니다.

이는 제사 업무가 국가 행정의 최우선 순위에 있던 공적 직무이었으며 오직 '신정국가 '에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십일조의 다른 부가적 기능을 보아도 이를 잘 알 수 있습니 다. 제사장들을 주고 남은 재원으로 가난한 과부나 나그네를 돌보고 또한, 일부는 성전 관리비로 충당했습니다. 이 모두가 국가적 복지나 관리 차원에서 한 것입니다. 따라서 십일조를 구약 유대 지역의 특수한 종교적 세금으로 보는 것은 매우 타당합니다. 실제 십일조와 유사한 형태의 세금이 이스라엘 주변의 다른 고대 근동 국가에도 있었습니다.

물론 율법 이 전에도 아브라함이나 야곱의 십일조가 성경에 언급되고 있지만, 이는 일 회적인 것이었으며 의무적 십일조가 아니므로 현대 십일조와는 그 적용에 있어 크게 다른 별개의 사안입니다. 즉 아브라함의 십일조, 야곱의 십일조, 그리고 율법의 십일조 모두 그 정신은 동일하나, 그것을 적용하는 방법과 조건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다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바로 그 '적용의 문제'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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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울러 신약 초기 교회에서 일부 교부들에 의해 간헐적으로 어떤 종류의 십일조가 제 기되었다고 주장하더라도 그것은 율법에 규정한 본래의 십일조가 아니라 마치 후대의 중세 십일조처럼 임의로 '변형된 십일조'임을 밝힙니다.

대 십일조 논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사도들의 교회와 신약 교회에 율법에 따른 십일조는 결코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걸 어떻게 단정하냐고 반문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대답은 사실 초등학생이라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아는 대로 주후 70 년 헤롯 성전은 로마군에 의해 포위되어 처참하게 파괴되었고 당시 수 십만의 거주민들이 몰살했습니다.

신정국가 자체가 사라졌습니다. 따라서 더는 성전과 제사장이 없는데 어떻게 십일조를 바칠 수가 있겠습니까. 설사 누가 일부러 먼 예루살렘까지 가서 꼭 바치고 싶더라도 기술적으로 불가능했습니다. 율법의 십일조는 그렇게 역사 속으로 영원히 사라졌습니 다.

그런데 이렇게 수세기 동안 잠잠하다가 한참 나중에 교회가 점차 비만해지자 마치 몸 속의 종양처럼 새로운 '변종 십일조'가 등장했습니다. 구약 십일조를 제멋대로 변형하 여 예루살렘이 아니라 그냥 각 지역 교회에 와서 바치라는 것입니다. 이미 성전과 제 사가 사라진지 아주 오래인데 과거처럼 다시 현물 십일조를 내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법령으로 강제성을 지니게 된 것은 겨우 주후 800 년경 샤를레망(Charlemagne) 대제 때 의 일입니다. 어째 그 모양새와 하는 행동이 요즘 한국 교권주의자들의 주장만큼 억지 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지만 이런 십일조를 정당화할 만한 성경적 근거는 전혀 없었습니다. 다만 배부른 종교 지도자들의 자의적 해석과 탐심이 있었을 뿐입니다. 그 결과 중세 교회

십일조는 종교개혁의 강력한 철퇴를 맞고 안개처럼 사라졌습니다. 심지어 현대 가톨릭조차 그런 억지 십일조의 부당성을 인정하고 스스로 폐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소위 가톨릭을 개혁한다고 나온 한국의 개신교가 이런 중세적 십일조에 다시 몰입하고 있으니 정말 한심스러운 일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교회가 외적으로 성장하면 직분자들의 부패와 타락을 동반하고, 그 악한 열매는 항상 헌금을 많이 걷어 자신들의 배를 채우는 모습으로 표출되었습니다. 말라기 시대, 바리새인 시대, 중세 시대, 19 세기 영국 교회, 그리고 작금의 한국교회가 바로 그런 시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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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사역을 역행하는 십일조 부활

리는 예수님께서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하신 말씀에 크게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전을 헐라는 것은 구약 제사 제도의 종결과

완성을 의미합니다. 성전이 없으면 제사도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 십일조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성전 제사 제도를 유지하는 것이고, 그 제사는 십 자가 사역을 예표하였다는 점에서 십일조의 역할 역시 십자가 사역으로 완결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신약성경에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로는 더는 십일조가 전혀 언급되지 않고 단지 연보만이 강조되고 있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구약 십일조의 정신은 사랑입니다. 그 외형적 이유가 제사이든 구제이든 결국 그 근본 정신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그 이웃 사랑의 정신이 신약에서는 연보로 계승되었습니다.

어떤 분은 예수님이 십일조를 하라고 하셨으니 우리도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는 예수님이 할례를 받았으니 우리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논리만큼 용감 무식한 주장입니다. 십자가 사역 이전까지는 예수님 역시 십일조는 물론 할례와 안식일과 절기 등 구약의 율법을 모두 지키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아직도 율법의 십일조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지금도 중보적인 구약 제사 제도가 필요하다는 억지 논리가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을 정면으로 대적하는 일이 됩니다. 그래서인지 한국의 교권주의자들도 율법의 원칙에 따른 십일조를 해야 한다고는 감히 직설적으로 주장하지 못 하고 있습니다. 수 십년 동안 고심해서 겨우 만든 논리가 '자원하는 마음으로 십일조를 하자 그러다가 '는 것입니다. 참으로 살다 살다 이렇게 미끌미끌하고 요상한 논리는 처음 봅니다. 구약 율법의 십일조 자체가 의무적이며 강제적인 것인데 무슨 '자원하는 십일조'가 다 있을까요. 자원하는 십일조란 더는 십일조가 아닙니다. '자원하는 세금'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는 마치 붕어가 없는 붕어빵처럼 모조품일 뿐입니다. 더구나 성전과 제사 장이 필요 없는 신약 교회에 무얼 하겠다고 그런 쓸데없는 자원을 해야 합니까. 이는 언어의 조잡한 유희에 지나지 않으며 중세 십일조보다 더 질이 나쁘고 그 의도가 더 간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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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근거로 사도들조차 하지 않은 '현금 십일조'를 자원하는 마음으로 성전도 아닌 교회에 바쳐야 합니까. 중세 십일조가 그나마 '변형적 십일조'라면, 한국교회 십일조 는 아예 '기형적 십일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세교회는 일말의 양심이라도 남아 있었는지 그래도 율법대로 '토지소산'인 '현물 십일조'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여기에 한술 더 떠서 '모든 소득'에 대한 '현금 십일조'를 강요하고 있습니다.

원래 율법에 따르면 목수나 이발사처럼 서비스업의 소득에는 십일조가 부가되지 않았 습니다. 토지를 배당받은 것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소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오해 해서는 안 될 중요한 사실이 여기에 있습니다. 율법의 십일조는 무조건 '소득이 있기 에 내는 것'이 아니라, 가나안 정복 시 '토지를 배당받았기에 내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그 십일조는 '토지소산'의 십분의 일로 명확히 제한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약 교회에서 누가 무조건 '소득의 십일조'를 내라고 주장한다면 이는 아무 런 성경적 또는 논리적 근거가 전혀 없는 종교적 사기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상당수 교회들은 여기에 '자원하는'이라는 바리새적 누룩을 슬쩍 발라 놓고 신 도들을 오도하고 있습니다. 목회자부터 '힘에 지나도록' 하는 헌금을 실천해야

래서 필자는 한번 역으로 묻고 싶습니다. 그런 유치한 논리라면, 귀족 목사들에게 자원하는 마음으로 그 넘치는 재산의 반을 거룩한 교회에 바치라고 권한다면 그들은

뭐라고 대답할지 정말 궁금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데 왜 더 안 바칩니까. 그러면 아마 그들은 성경 어디에 재산의 반을 바치라는 말이 있느냐고 얼굴을 붉히며 반발할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 '자원하는 십일조'를 하라는 가르침은 절대로 없습니다. 신구 약 어디에도 아브라함과 야곱의 일회성 십일조를 본 받아 그 후대에서도 그런 '자원적 십일조'를 했다는 그 어떤 유사한 기록도 없습니다.

반면에 사도들은 그 어떤 형태의 십일조 대신 단지 '힘에 지나도록, 기쁘게, 그리고 자원하는 연보'를 가르쳤습니다. "내가 증언합니다. 그들은 힘이 닿는 대로 구제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힘에 지나도록 자원해서 하였습니다(고후 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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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데 참 희한합니다. 요즘 귀족 목사들은 십일조는 죽기 살기로 강조하면서 정작 그 십일조의 중요한 용도인 구제는 별로 언급을 안 합니다. 웬만해서는 '힘에

지나도록' 구제(연보)하라고 설교를 하지 않습니다. 그런 설교를 자주 들어 보셨나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십일조는 얼마든지 강조해도 자신들에게 별로 무탈하지만, 이 '힘에 지나도록' 하는 구제 설교는 자승자박이 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정말 글자 그대로 힘에 지나도록 구제하려면 자신들은 모두 마치 중세 수도사처럼 소박하게 절제하며 살아야 합니다. 과연 힘에 지나도록 구제하고 난 후에도 고급차를 탈 수 있을까요. 수 십억대의 재산, 고가 주택, 해외 나들이, 자녀 유학, 그리고 호의호식 등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온갖 부와 권력이 정당화될 수가 없습니다. 모두가 다 위선이 되고 기만이 됩니다. 그러니 그런 설교를 감히 할 수가 없습니다. 이 종교 상인들은 체질상 성경의 가르침에 따른 구제 생활을 할 능력도 없고 또한 그리 할 의사도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교회는 더욱 철저하게 가르쳐야 합니다. 허구한 날 이미 유효 기간이 끝난 십일조를 가지고 잔수 부리지 말고, 사도들의 권면대로 '힘에 지나도록' 하는 구제를 직분자들부터 성실하게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귀족 목사들도 저절로 사라질 것이고, 대형 교회를 만들겠다고 무리하지도 않을 것이고, 아울러 고생길이 뻔한 교회 세습도 굳이 안 할 것입니다.

여튼 주변에 혹시 필요 이상으로 부유한 목사를 보시면 일단 '힘에 지나도록' 하는 구제를 지극히 소홀히 하는 삯꾼 목사로 의심해도 무방함을 분명히 알려드립니다.

특별한 예외는 다소 있겠지만,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히 따르자면 사실 신도들은 직분에 관계없이 결코 큰 부자로 살 수가 없습니다. 힘에 지나도록 주고 나누기 바쁜데 언제 부를 쌓을 여유가 있겠습니까.

신자의 개인적 구제가 중요하다

다른 중요한 문제는 과연 교회가 열심히 십일조를 걷어 신도들이 궁핍할 때에 정말 열심히 도와주는가 하는 점입니다. 실직한 내 동생, 파산한 처남, 학비가

없는 조카, 비정규직에 힘든 외삼촌, 셋방살이 하는 고모, 은행 빚에 허덕이는 시동생, 그리고 홀로 사시는 이웃의 독거노인을 얼마나 도와주던가요. 그런데 이들을 외면하고 교회에 십일조만 잘 바치면 고르반(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 되었다고 만족하십니까. 그것은 대단한 착각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신도들이 먼저 자신의 형제와 가까운 이웃을 손수 돌보기 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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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구제를 교회에서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가 내 형제나 친척까지 그 사정 을 알아 일일이 직접 돕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교회가 구제에 힘쓰는 것은 옳 지만, 그렇다고 해서 교회가 구제 전문 기관은 아닙니다. 따라서 신도들은 개인적으로 도 열심히 구제에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무 비대해진 중대형 교회라면 이미 이천 년 전에 시효가 말소된 십일조 대신에 그저 교회 운영에 필요한 약간의 연보만 하시기를 권면합니다. 반대로 미자립

교회나 작은 교회에는 가능한 많은 연보를 하십시오. 그리고 내 주변의 친인척과 친구들과 이웃을 살피시기 바랍니다.

생계를 걱정하는 사촌 동생에게 우선 쌀 한 가마니라도 보내 주십시오. 절약하며 고생하시 는 형수님께 반찬값이라도 자주 쥐어 드리십시오. 이번 휴가 때는 장모님을 모시고 꼭 치과로 가십시오. 해산한 직장 동료에게 아기 옷을 들고 찾아 가십시오. 월세를 못 내 한숨 쉬는 후배에게 작은 봉투를 전해 주십시오. 가난한 이웃을 정기적으로 방문하십 시오. 그리고 끼니를 거르는 기아 국가 어린이를 후원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가정이 변하고, 친인척이 변하고, 직장이 변하고, 그리고 이웃이 달 라집니다. 이것이 세상과 소통하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진정한 십일조의 정신이며 동 시에 신자가 기쁘게 져야 할 십자가의 짐입니다. 왜 요즘 전도의 문이 잘 안 열릴까요. 신도들의 피땀 어린 헌금으로 고작 직분자들이 호사를 누리고 툭하면 건물이나 삽질할 궁리만 한다면 그런 교회를 누가 기뻐하겠습니까.

모든 헌금은 각자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

도들은 이미 충분한 세금을 국가에 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중세적 십일조로 이중과 세하는 것은 매우 부당합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자기 십자가를 잘 지고 가라고

했더니 시킨 일은 제대로 안 하고 엉뚱하게도 철 지난 십일조를 무겁게 지고 가고 있습니 다. 교회의 사업 방향과 예산과 관심과 설교가 온통 이 십일조에 쏠려 있습니다. 과연 요즘 중대형 교회 직분자들의 기름진 모습에서 정말 십자가의 정신이 보이십니까.

국교회 초기에는 십일조란 매우 드물었고 이는 믿음이 좋은 극소수의 직분자들이 자 발적으로 내는 아주 특별한 헌금으로 생각했습니다. 십일조를 몰라도 교회

생활에 아 무런 불편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어떤가요. 십일조 안 내면 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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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적인

신자가

아닌

것처럼

교회

분위기를

몰아가고

있습니다.

모두가

교권주의자들의 꼼수입니다.

따라서 십일조 개혁 없는 교회 개혁은 공허합니다. 한국교회는 온통 돈으로 부패하였고 그 안에서 기생하는 종교 업자들의 비대한 밥줄이 바로 이 중세적 십일조 입니다.

이제 그 썩은 줄을 끊어야 합니다. 신약 교회에 십일조란 결코 없습니다. 개혁 교회는 흘러간 저질 유행가보다도 더 천박한 그 십일조 복 타령을 그만 멈추고 바울의 가르침 을 성실히 실천해야 합니다. "각자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 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 : 7)."

한국교회는 이렇게 명쾌하고 훌륭한 사도들의 가르침을 외면하고 왜 딴청을 부리는지 정말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십일조 논쟁은 단순한 신학 토론이 아닙니다. 이는 진실과 거짓이 겨루는 비장한 영적 싸움입니다.

여기서 양측이 모두 함께 옳을 수는 없습 니다. 따라서 양의 탈을 썼으나 속은 늑대인 거짓 목동들에게 절대로 속지 마십시오. 십일조를 복의 근원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십일조는 단지 예수님 십자가 사역의 그림자인 성전 제사 제도를 밑받침하던 '한시적 도구'였을 뿐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에게 진정한 복은 십일조가 아니라 십자가입니다.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 라(사 1:13)."

2012 년 10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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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의 눈물 목사가 우는 이유

"오늘도 나는 또 웁니다. 무능해서 울고 부족해서 웁니다.

성도의 삶을 보면 가슴을 치며 또 웁니다. 아무것도 도움이 될 수 없는 내가 싫고 내가 못나서 그래서 나는 오늘 또 웁니다. 교회를 보면서 그저 웁니다. 주님을 보고 교회를 보면 송구스러워서 웁니다.

감사해서 웁니다. 구원받은 것이 감사요, 목사가 된 것이 감사요, 아빠가 된 것이 감사해서 웁니다. 성도가 있어서 감사하고, 교회가 있어서 감사하고, 주님이 있어서 그래서 목 놓아 웁 니다. 한없이 감사해서 무작정 울고 또 웁니다. 나는 울보, 울보 목사입니다."

느 목사님의 뜨거운 고백을 서두에 이렇게 소개한 이유는 눈물 없이는 갈 수 없는 것이 목회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세습을 후회한 김창인 목사님도 울고,

재정 비리를 반성한 조용기 목사님도 울고, 그리고 교회 부패를 슬퍼한 옥한흠 목사님도 울었습니다. 이유는 서로 다르지만 목사를 자주 울게 만드는 시대인 것은 분명합니다.

반면에, 통곡을 해도 시원치 않은데 울지 않는 목사도 있습니다. 교회 공금 횡령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어느 대형 교회 목사님은 별로 울지 않습니다. 여신도들을 상습적으 로 성추행하고 오히려 당당한 목사님도 있습니다.

필자의 가족 중에도 목사님이 한 분 계십니다. 북미 지역의 한 작은 한인 교회를 20 년 동안 섬기셨습니다. 아직 은퇴는 다소 이르지만, 그만 심장에 이상이 생겨 조기에 사 임을 하였습니다. 후임자 선정은 모두 교회에 일임하고 전혀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퇴 임시에는 교회가 조금 성장하여 출석 교인이 약 600 명 정도 되었는데 교회의 규정에 따라 받은 퇴직금은 5 개월 분의 급료가 전부입니다.

본래 교회 사례비가 그리 많지 않았기에 집은 물론 미리 모아 놓은 목돈 역시 없습니다. 몸은 많이 망가져서 전임 목회를 다시 하기는 힘듭니다. 퇴임 후 어느 날인가는 집에서 두 시간이나 왕복해야 하는 어느 농촌 교회의 초청을 받아 설교를 하시고 선물로 계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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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판을 받아 오셨습니다. 연료비조차 안 되는 적은 답례이지만 안쓰러워하는 아내 앞에서 그냥 웃으십니다.

찌 이 목사님뿐이겠습니까. 이 땅의 많은 목사님이 장래에 대한 변변한 대책이 없이 목회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도 그 길을 묵묵히 가고 있습니다.

비록 자신의 노후 준비는 제대로 못 하지만 눈물 젖은 십자가를 지고 갑니다.

그래도 사역으로 인한 어려움은 기꺼이 감내할 수 있습니다. 목사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동료 목회자들의 부끄러운 비리입니다. 그 부정과 부패가 하도 심해 거룩한 직분 의 정당한 권위가 길바닥까지 떨어지고 요즘은 동네 강아지마저 흘겨 볼 지경이 되었 습니다. 변명도 한두 번이지 이제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그래서 새벽 강단에 엎드려 또 울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 교단의 무분별한 성장 의욕으로 신학교가 너무 난립하였습니다. 자격 논란에 관 계없이 해마다 수천 명의 목회자가 새로 쏟아져 나옵니다. 영국 교회 전체 목사 수보다 두세 배나 많은 목회자가 한국에서는 매년 배출되고 있습니다. 결국 '성장' 욕망이 '성숙'을 삼켜 버렸습니다. 그러니 쭉정이는 없고 알곡만 있기를 바라는 것이 도리어 망상입니다. 그 결과 양들이 피부로 느끼는 현실은 이미 '먹사'가 '목사'를 크게 압도 하고 있습니다.

노회, 연회, 총회, 그리고 기독교 연합 단체 그 어디를 보아도 근엄한 가운을 입고 위 선 떠는 패거리 잡배들이 없는 곳이 드물고 각종 비리로 악취가 진동합니다. 지역 교 회들 또한 변질된 교권에 눌려 우민화하고 저질화하여 소통이 불통이 된 곳이 적지 않 습니다. 소위 종이란 자들이 변절하여 상전이 되고 교주가 되었습니다.

어떤 목사는 40 일 특별새벽기도 했다고 별도의 사례비를 받아 갑니다. 또한 부흥회 마 치고 강사 목사와 동일한 금액의 사례비를 받는 것이 '교회의 아름다운 관례'라고 하 며 돈을 가져가는 목사도 있습니다. 심지어 안식년을 여섯 조각으로 분할하여 매년 유 급으로 두 달씩 푹 쉬겠다는 기상천외한 목사도 있습니다.

물론 아름다운 교회와 순수한 목회자들도 도처에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비록 일부의 이야기이겠지만,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습니다. 저런 비상식을 요구할 수 있을 정 도로 목회 풍토가 갈수록 저급화하고 있다는 것이 심각한 문제입니다. 하여튼 목사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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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회인지 종교 상인 노동조합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정기적으로 비싼 밥 먹고 모여 앉 아 그런 잔머리만 굴리고 있는 무리들이 따로 있습니다. 진정으로 교회의 순결을 훼손하고 양들을 울리는 자들은 누구입니까. 과연지금오늘날 나라 경제가 어렵다고 모두 염려가 크지만, 이들만은 배부른 잔치에 신이 났습니다. 철 따라 양털을 깎아 재물을 땅에 쌓고, 출출하면 양을 잡아 포식하고, 양들을 담보로 빚내어 축사를 확장하고, 그리고 그렇게 세운 목장을 통째로 새끼 이리에게 물려줘도 염소들이 앞장서서 마냥 좋다고 화답합니다. 도적이 주인 행세를 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이러니 목사는 울 수밖에 없습니다. 성전으로 위장한 대형 축사 속에 날마다 찢기는 양들이 불쌍하고, 이리를 따라 무저갱으로 향하는 염소가 불쌍하고, 그리고 말씀 기근 으로 누렇게 메말라 가는 저 초장을 보며 안타까워 웁니다. 울어야 할 때입니다. 공교회마저 하나님의 공의를 상실하고 죄로 어두워진 이 지금은 시대에 울지 않는 목사는 거짓 목사입니다. 가난한 자들이 고통 받는 것을 보면서 평안을 노래하는 선지자는 거짓 선지자입니다. 따라서 악인이 웃는 세상에서는 의인이 울어야 합니다. 구약의 선지자들과 사도들은 울었습니다. 호세아도 울고, 예레미야도 울고, 그리고 바 울도 울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죄 때문에 울었습니다. 백성도 울었습니다. 포로 된 땅 바벨론의 강가에 앉아 예루살렘 시온 성을 생각하며 울었습니다. 예수님도 우셨습니다. 무너질 성전과 삶에 지친 민초들을 보며 우셨습니다. 그리고 신약의 거룩한 교회는 그 눈물로 지신 십자가 아래 세워졌습니다. 눈물은 사랑입니다.

목사는 참목자 되신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직분입니다. 착한 목사는 양들을 위해 울며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 눈물은 성도들의 상처를 씻겨 주고 교회를 새롭게 정화할 수 있습니다. 이리는 양들을 위해 결코 울지 않습니다.

그래서 '목사의 눈물'이 한국교회의 마지막 희망입니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시 137:1)."

2013 년 1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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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이 목회하는 교회 한국교회 대형화의 그늘

학생 시절 친구의 손에 이끌려 처음 출석한 교회는 서울 변두리 주택가의 한 허름한 상가 건물 꼭대기에 세 들어 있던 작은 개척 교회였습니다. 이 교회는 겨우 두 명이

동시에 오를 수 있을 정도로 비좁고 높은 계단을 통해서만 출입이 가능했고 교육관은 꿈도 못 꾸고 그저 예배실 하나만 달랑 있던 교회입니다.

십자가만 세우면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들던 70 년대 초였건만 그건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다른 교회에나 해당되는 이야기였습니다. 신실하고 충성된 목회자와 제직들이 다수 있었지만, 이 작고 불편한 예배당에서는 근 10 년 동안 장년 교인 수가 별로 늘지 않았습니다. 일년에 평균 8 명도 못 늘었습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이 '개척 교회'라는 명판을 떼기란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건물이 목회하나

런데 이런 상황을 순식간에 바꾼 것은 '교회 건축'이었습니다. 온 교우들이 힘에 지나도록 헌금을 하여 교육관과 식당까지 갖춘 약 350 명이 예배할 수 있는 3 층짜리

예쁜 교회당을 신축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교인들이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제직들은 ' 믿음대로 채워 주신다'고 좋아하셨지만, 필자는 너무 허탈했습니다. 신도들과 목회자 가 오랜 기간 노력해도 쉽게 풀지 못한 난제를 건물 하나가 간단하게 해결한 것입니다. 전도와 관계없이 매달 새로운 가정들이 늘어났습니다.

이런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인근 지역의 한 젊은 목사님은 용감하게 자신의 집을 팔아 건축 헌금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교인들에게 건축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니 그 약발이 기가 막히게 좋았습니다. 이런 통 큰 건축 결과 교세가 급성장하여 지역에서 주도적인 대형 교회가 되었습니다. 덕분에 그 무명의 목사님은 꾸준히 신분 상승을 얻으셨고 나 중에는 언론에 뇌물 시비까지 일으키며 교단과 기독교 단체의 요직을 여러 번 차지해 거물급 인사가 되었습니다.

물론 평소 행적으로 볼 때 이 분이 아들 목사에게 담임직을 세습한 것은 극히 자연스러 운 일입니다. 교단이나 신학교 그리고 기독교 단체 등 이 목사님이 가는 곳마다 부정 논란과 말썽이 없는 곳이 거의 없었습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본래 집을 팔아 한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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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금이 진정 교회에 바친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가업에 장기 투자를 한 것인지 혼동을 줄 정도입니다.

대전 지역의 어느 교회 또한 교인 수에 비해 너무 거대한 교회당을 지어 처음에 많이 염려했는데 후일 오히려 큰 득을 보았습니다. 서울 구로구의 한 개척 교회는 아예 목 회자가 자비로 자금을 조달하여 아담한 교회당을 짓고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역시 교인이 빠르게 증가하였습니다. 하여튼 이런 상황은 멋진 건물만 있다면 누구나 한 번쯤 화려한 목회 성공을 꿈꿀 수 있는 모험적 토양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국에서

교회당

건물의

힘은

정말

막강합니다.

정통인지

이단인지도

별로

관계없습니 다. 수완이 좋든 믿음이 좋든 하여튼 건물만 잘 세우면 이단은 물론

사이비도 쉽게 번창합니다. 담임목사가 누구인지도 크게 상관이 없습니다. 일단 건물이 번듯하고 적당히 설교를 잘하면 순진한 신도들이 알아서 자리를 채워 줍니다. 예수님 십자가의 도보다 우선 당장 먹고 사는 것이 급한 민초들에게는 무당처럼 무조건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라고 노래하는 목사가 최고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입학 경쟁이 없는 군소 신학교나 무인가 신학교 그런 것도 별로 문제가 아닙니다. 돈 으로 적당히 학력과 경력을 새로 세탁하면 박사 학위까지 가능하여 나중에 보면 외견 상 거의 다 엘리트 목사로 둔갑합니다. 그러다 보니 개천의 미꾸라지가 용으로 변신하 고, 동네 촌닭이 봉황 행세를 하는 놀라운 이적이 그치지 않는 곳이 바로 작금의 한국 교회입니다.

교회 건축 자체가 딱히 나쁜 일도 아니고 또한 현실이 이렇다 보니 보통 목회자들은 교회 건축이나 증축의 유혹을 뿌리치기가 매우 힘듭니다. 그래서 무리해서 빚을 지더라도 일단 짓고 보자는 함정에 빠지게 됩니다. 결국 거액의 교회 재정이 선교나 구제 에 제대로 쓰이지 못하고 은행 대출금과 이자에 소모되는 악순환이 발생합니다. 그러 다가 과도한 비용 부담으로 말미암아 파산하거나 교회당을 파는 일마저 점차 증가하고 있습니다.

작년에 경매로 나온 종교 건물만 해도 거의 300 개에 달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구매자가 별로 없어 낙찰률은 겨우 15%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한국교회가 금융권에서 대출한 금액만 따져도 9 조 원이 넘고 매달 약 450 억 원의 헌금이 이자로 지급되었습니다. 교인들의 피땀 어린 헌금이 고작 이런 소모적인 땜질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성경에 "이자를 받지 말라"는 말씀을 엉뚱하게 거꾸로 적용해서 열심히 이자를 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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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돈이면 해마다 수 천 명의 선교사를 지원할 수 있고 또는 미자립 교회 수 천개를 즉시 자립시킬 수 있습니다.

지난해 왕성교회 부채는 217 억 원이었으며 각종 대출 이자와 수수료 지불이 18 억 원에 달했습니다. 2000 억 원이 넘는 신축으로 천문학적인 빚을 진 사랑의교회는 이보다 더욱 심각하여 건축에 들어가는 돈이 모자라 사역에 써야 할 헌금까지 공사 대금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은행 이자는 날로 불어 가는 형편이라고 합니다. 그 외에도 새문안교회 208 억, 지구촌교회 188 억, 주안장로교회 130 억, 그리고 인천숭의교회는 107 억의 근저당 설정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반면에 교회 분립을 통하여 목회 본연에 충실하려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충무제일교회, 영동교회, 향린교회, 두레교회, 잠실중앙교회, 향상교회, 샘물교회, 산울교회, 만나교 회, 소양교회, 호천장로교회, 소양제일교회, 일산은혜교회, 그리고 예음교회 등 이 외 에도 더 많습니다. 이들 중에는 교회가 그다지 크지 않은데도 교회 대형화에 반대하며 분립 개척을 결정한 강직한 교회들이 있습니다. 바로 이런 교회들이야말로 건물이 아 니라 신도들이 목회하는 건강하고 아름다운 교회입니다.

건물 신앙의 그늘 교인들과 목회자의 뜨거운 헌신이 없이 교회가 건물만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생 물론각하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한국교회 성장의 이면에는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수고한 수많은 신도와 직분자의 희생적 사역이 있습니다. 또한 경제 성장에 따른 사회적 환경 변화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나 비슷한 조건이라면, 교회당 건물이 교인을 모으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부인하기 힘든 사실입니다. 건축 능력으로 목회 능력 을 평가할 정도로 건물이 교세 성장에 큰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특히 이사가 잦은 한국 사회에서 대부분의 새로 이주하는 신도들은 피곤한 개척 교회 나 평범한 중소형 교회를 기피하고 이왕이면 시설이 좋고 프로그램이 다양한 대형 교 회를 선호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문제는 그런 편향성이 너무 지나쳐서 현재 한국 기독 교인의 무려 과반 수 이상이 불과 1%도 안 되는 극소수의 대형 교회에 출석하고 있다 는 점입니다. 이들은 집 앞에 있는 작은 교회들을 외면하고 굳이 멀리 있는 중대형 교 회를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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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종합적인 경쟁력에 있어서 작은 교회는 큰 교회를 상대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 서 대형 교회들이 암세포 같은 무한 증식을 스스로 자제하지 않으면, 원하든 원치 않 든 저절로 구조적인 양 도둑질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 현실적인 여건입니다. 그러나 교 권의 단맛에 깊이 중독된 귀족 목회자들은 이를 규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들 대부 분은 한번 잡은 권력은 절대로 놓지 않고 더욱 확장하려 합니다.

아울러 많은 교회에서 교회당 건축을 독려하기 위해 흔히 애용하는 '성전'이라는 말도 큰 문제입니다. 차라리 무식해서 그런 용어를 사용한다면 동정심이라도 들 것입니다. 이는 성경의 기본 상식을 알거나 신학교 문턱만 넘어도 잘 알 수 있는 내용인데 소위 제법 배웠다는 중견 목회자들이 이런 사이비 수준의 용어를 의도적으로 사용하며 억지 를 부립니다.

신약 교회에서는 신도들 자신이 성전입니다. 예배는 제사가 아니고, 목사는 제사장이 아니고, 설교 강단은 제단이 아니고, 그리고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복은 돈이나 부귀 영화가 결코 아닙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신도들의 신앙적 열정을 자극하고 또한 교회 당을 '복 받는 장소'로 각인시키기 위해 단순한 벽돌 덩어리를 성전이라고 미화하고 있습니다. 마치 과거 이방 출신의 극히 불신앙적인 왕 헤롯이 유대인들의 환심을 얻기 위한 불순한 목적으로 화려한 성전을 지었던 것처럼 한국의 많은 교회 역시 같은 수법 으로 신도들의 마음을 훔치려 하고 있습니다.

늘날 이단이나 사이비가 기승을 부리는 것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소위 정통이라는 교회들의 변질입니다. 이들은 진리를 왜곡하여 교회를 기복화, 종교화, 그리고

상업화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단 하나의 건물도 짓지 않으셨습니다. 단 하나의 종교 기관도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더구나 따르는 양들에게 돈을 요구하신 적은 더욱 없습니다. 그냥 그 분의 삶 자체가 진리이고 사랑이고 또한 복음이었습니다. 우리가 진리를 관습적인 종교의 틀에 가두지 말고 초심으로 돌 아가야 할 이유입니다.

요즘 일부 부패한 종교 지도자들은 어떤가요. 그들은 입만 경건하지 실제 신도들에게 주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도리어 만날 뭘 달라고 요구합니다. 세계를 한번 둘러보십 시오. 동서양을 가릴 것 없이 무슨 종교라는 간판을 걸어 놓고 도대체 돈을 안 챙기는 곳이 몇 군데나 있는지요. 소위 성직자라는 이들 상당수는 별난 잔 수를 다 동원하여 무속적이며 기복적인 명분을 만들고 신도들에게 집요하게 돈을 요구하거나 바침을 강 조합니다. 그러나 그 어떤 성스러운 간판을 걸고 있든 신도들을 '앵벌이'시키는 종교는 모두 예외 없이 사이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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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안타까운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른다는 일부 개혁 교회들마저 그런 망령된 줄에 서지 못해 안달이라는 것입니다. 가르치는 자나 배우는 자들이 함께 눈이 멀어 서로 복을 받겠다고 지지고 볶고 분주하지만 정작 이들은 '참된 복'인 십자가의 도에 서 점점 멀어져 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 운영에 돈이 필요 없다거나 건물이 필요 없다는 식의 무지한 말을 하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헌금을 걷는 목적과 수단, 그리고 헌금을 쓰는 용도 와 방법이 정도에서 벗어나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한국교회 내의 돈 흐름이 심 하게 왜곡되다 보니 작은 교회는 사람과 돈이 너무 없어서 울고 있는데, 대형 교회들은 사람이 넘쳐 장소가 협소하다고 불평하며 증축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갈수록 양극화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일부 목회자들은 부와 권력을 사랑하고 신도들은 편리와 안락에 타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배부른 목사들은 기복으로 선창하 고 복장이 교인들은 바침으로 복창합니다. 한국교회의 흥행은 국민들의 오랜 무속적 기복 전통에 힘 입은 바가 적지 않습니다. 성경에 대한 바른 이해가 부족한 상태에서 마치 성황당에서 복을 구하 듯 예배당에서 복을 구합니다. 복채를 바치듯 헌금을 바칩니다. 무당을 의지하듯 목사를 의지합니다. 건물에 십자가를 세운 것 외에는 이교도들이 하는 행위를 그대로 따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변질된 목회자들은 그런 기복 심리를 이용하여 사람들을 교회에 유치하고 속박합니다.

여튼 이처럼 목사와 신도가 서로 그 밥에 그 나물이니 누가 말릴 수 있겠습니까. 목사는 무리해서라도 큰 건물을 지어 신도들을 유혹하고, 교인들은 좋은 조건을

찾아 큰 교회로 수평 이동합니다. 그렇게 해서 사람이 더 모이면 목사는 사이비 교주 같은 '긴 옷'을 입고 모자라는 권위를 보충하며 순종 잘하고 헌금 잘하는 신도들을 양산하기 위 해 일 년 내내 쉴 틈을 주지 않고 현란한 프로그램들을 분주하게 돌립니다. 그리하여 교세가 더욱 증가하면, 다시 비좁다고 불평하며 증축을 되풀이합니다. 그럼에도 이런 알량한 수법이 의외로 잘 먹혀 한국의 많은 중대형 교회들은 흥행에 큰 재미를 보고 세계 교회사에 드문 고속 확장을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수많은 교인들이 비정규직에 있거나 셋방살이 생활고에 신음하고 있는 데 교회당만 아방궁처럼 세우고 우쭐하며 흥청거리면 그게 바른 성장이고 부흥일까요. 유럽의 교회들이 큰 건물이 부족해서 몰락했을까요. 아무리 교회당 간판에 금칠을 하 고 요란하게 앰프 틀고 기타 쳐도 흥행은 결코 성장이 아닙니다. 그것은 곧 사라질 거 품입니다. 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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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교회들은 초대형 건물 짓겠다고 최소한의 신앙 양심마저 봉인한 채 면죄부 팔아먹다 망한 중세 교회의 무허가 짝퉁 불법 복제판일 뿐입니다.

연 여러분은 한국의 귀족 교회에서 거들먹거리는 소위 '주의 종'이라는 분들 삶 속 에서 정말 십자가를 따르는 모습을 보십니까. 고액 연봉, 터무니없는 강사비, 각종

부수 지원비, 과도한 판공비, 고급 승용차, 잦은 해외 나들이, 자녀 유학, 공금 횡령, 뇌물 수수, 부정 선거, 성추행, 재단 비리, 성직 매매, 패거리 작당, 그리고 교회 세 습 등 이런 것이 진정 종의 모습입니까. 최근 어느 목회자가 강남의 한 대형 교회 예배에서 다른 순서 없이 그저 몇 초 동안 축도만 한번 하고 300 만 원을 받았다고 합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교단 총회장급 목사들은 기도, 축도, 그리고 설교 등 예배 순서에 참여하는 것만으로 100~1000 만 원 정도의 황당한 사례비를 받는다고 합니다. 상당 경우는 담임목사들의 인맥 관리나 교 단 정치에 관련하여 교회 돈을 서로 나누어 먹는 뇌물성 사례입니다. 이번에 내가 주 었으니 다음엔 너도 나에게 주라는 것입니다. 이러니 정식 집회를 하고 나면 도대체 얼마나 큰돈을 주고받을까요.

목회직이 언제부터 이렇게 고액의 서비스업이 되었습니까. 심지어 한 해 접대비로만 3 억 7000 만 원을 사용한 교회도 있습니다. 교회 공금을 가지고 목사들 돈 잔치를 하고 있다는 비판이 당연합니다. 과연 이게 종들이 할 일입니까. 틈만 나면 신도들에게 "하 늘에 보물을 쌓으라"고 설레발치더니 정작 자신들은 뒤에서 썩은 호박씨를 까고 있습 니다.

더구나 무슨 종이 감투가 그리 많고 재산이 그렇게 많습니까. 무슨 종이 사업과 업무 가 그리 많습니까. 사도들이 이들처럼 비서실까지 거느리고 위세 부리며 목회를 했던 가요. 세상 어느 나라에서 장관보다 더 많은 연봉을 받아먹는 이상한 '종놈'들을 보셨 습니까. 심지어 어떤 '종님'은 대통령 연봉보다 더 많이 교회의 돈을 가져가고 있습니 다. 이들이 교회를 대형화하는 의도가 결국은 돈과 권력임을 잘 보여 줍니다. 그런데 도 우민화한 일부 신도들은 이런 위선적 종교 상인들을 하나님의 대리인처럼 추종하는 맹신을 아직도 극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광야로 가야 대형화와 외적 성장의 그늘에는 기복과 편리 추구 그리고 부끄러운 양 도둑 한국교회 질이 있습니다. 아울러 성공주의, 성장주의, 그리고 성직주의가 이를 후원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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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습니다. 극심한 개교회 이기주의는 마치 자기 교회만이 홀로 진리인 양 교회 버스까지 동원하며 타 지역 교인들을 흡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형화, 귀족화, 그리고 사유화 는 모든 부패한 종교의 공통적인 몰락 과정임을 알아야 합니다. 거대한 궁전을 세우고 안 망한 제국이 없고, 화려한 성전을 짓고 타락하지 않은 종교가 없습니다.

으로 더 이상의 흥행은 없습니다. 미국 수정교회의 파산은 건물로 치장한 거품 신앙 이 붕괴하는 첫 신호탄일 뿐입니다. 십자가 정신을 상실한 교회에는 단지 약육강식

정글의 법칙만이 남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도시에 이미 너무 많아 차고 넘치는 것이 교 회당입니다. 그런데 그 거룩하다는 건물들은 더는 진지하게 선교를 못 합니다. 다만 이웃집 양을 서로 탐할 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믿는 자가 하루에 5000 명이나 늘어나는 상황에서도 결코 건물을 세 우지 않았습니다. 또한 지교회와 같은 문어발식 세력 확장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겉치장이나 대형화보다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을 돕는 데에 힘썼습니다. 루터나 웨슬리 또한 '성전'이라는 기만적 명분으로 그 어떤 대형 건축물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 들의 관심은 오로지 양들의 영혼뿐이었습니다.

대형화 추구는 기독교 정신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본격적인 타락은 로마 교회 대형화 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반면에 참목자 예수님은 먹을 제물이 넘치던 큰 건물 헤롯 성전이 아니라 마을의 소박한 회당이나 메마른 광야로 가셨습니다. 광야는 편리함이 아니라 굶주림과 목마름이 있는 곳입니다. 그래도 주의 제자들은 묵묵히 그 길을 따라 나섰습니다. 거기서 양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오병이어의 놀라운 기적을 보았습니다.

이 순간에도 삶에 지친 양들이 거친 광야에서 방황하고 유리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부 드러운 옷을 벗어 던지고 속히 광야로 가야 하는 이유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오실 것 이고 교회는 이 땅의 마지막 선지자입니다. 한국교회는 비록 약대 옷을 걸치고 메뚜기 를 먹는 어려움이 있더라도 광야에서 주의 길을 예비하던 그 선지자 세례요한의 귀한 사역을 기필코 다시 계승해야 합니다.

오늘날 광야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양들의 탄식 속에 있습니다. 또한 소외받고 있는 우리 이웃의 눈물 속에 있습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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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성전은 교회 건물이 아니고 우리 자신이다. 우리는 교회가 하나님이 거하시 는 정식 장소라든지, 교회 건물에 어떤 비밀한 신성성이 있다든지 하는 생각을 경계해 야 한다." - 칼뱅

2013 년 2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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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봉을 숨기는 목사님들 연봉 은익은 교권주의의 잔재 조사에 따르면 한국 목회자의 90% 이상이 연봉 3000 만 원 이하의 사례비를 받고 어느있다고 합니다. 특히 하위 20%는 불과 1000 만 원 이하의 낮은 연봉을 받고 있습니다. 반면에 상위 10% 중에는 터무니없이 높은 연봉을 받아 가는 목사들이 적지 않습니다. 한 대형 교회 담임목사는 무려 6 억 원이나 받았고, 지방 소도시 교회 목사가 2 억 원의 연봉을 받은 곳도 있었습니다. 거룩한 공교회 역시 세속화에 밀려 사회 양극화의 악영 향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이런 연봉 빈부 격차에 대해 약 90%의 목회자들은 상황이 심각하다고 응답했습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목회자가 가난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목사의 85%는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가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목사는 겨우 5%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면 목사 연봉은 어느 정도가 적절한 것일까요. 그에 대해서는 다양하게 논의되고 있습니다만, 대부분의 신도들은 너무 적어도 안 되고 또는 너무 많아도 문제인 것을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개 교회의 지역적 여건에 따라 최저 교사 수준에서 최고 신학대학 교수 수준 그 사이에서 결정하는 것이 어떨까 생각해 봅니다.

뿌리 깊은 교권주의 적정 수준 못지않게 중요한 문제는 많은 교회에서 목사 연봉을 공개하지 않거 연봉의 나, 이를 분산 처리하여 실제로는 상당 부분을 은닉하고 있다는 점에 있습니다. 과거 한 언론 매체가 어느 지역 교회 세입 세출 예산서를 입수하여 공개했습니다. 아래 내용은 거기에 나타난 담임 목사의 지출 항목입니다.

생활비 5400 만 원, 자녀 학비 보조(해외 유학) 4920 만 원, 목회비 600 만 원, 교역자 연구비 600 만 원, 교역자 도서비 480 만 원, 교통비 360 만 원, 그리고 교역자 수양비 60 만 원 등으로 외견상 담임목사의 연봉은 모두 합쳐 1 억 2420 만 원입니다. 그러나 실 제로는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추가로 접대비 1000 만 원, 축·조위비 700 만 원, 도 서 및 정보통신비 500 만 원을 비롯해 교회가 제공한 차량인 그랜저 XG 와 기름 값, 30 평 아파트와 각종 공과금 등을 모두 합치면 담임목사에게 준 비용은 거의 2 억 원가량 됩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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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0 명 정도의 교인이 출석하는 이 교회의 총예산 10 억 원 5000 만 원 중 약 20%를 매 년 담임목사가 혼자 가져가고 있습니다. 이 교회보다 규모가 크게 작은 교회로 가면 그 비율은 50% 이상을 넘어서 더욱 심각해집니다. 그래서 목사가 교회를 섬기는 것인지, 교회가 목사를 섬기고 있는 것인지 가히 헷갈릴 정도가 됩니다. 물론 정도의 차이가 다소 있겠지만, 이런 회계 분산 처리 방법은 여타 다른 교회들 또 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공개된 연봉과 실제 수령하는 연봉은 30~50%까지 차이가 나 는 경우가 있습니다. 공교회가 소위 말하는 장부 처리상의 꼼수를 부리고 있는 것입니 다.

문제는 이런 부끄러운 수법이 이미 너무 오랫동안 폭 넓게 관습화하고 정 더욱례화큰하여 장로나 집사 등 다른 직분자들 누구도 강하게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필자의 기억으로는 40 년 전에도 그런 꼼수 예산 결산서를 보았습니다. 한국 교회가 일제강점기 이후 영리한 교권주의자들에 의해 얼마나 꾸준히 오염되어 왔는지 를 잘 보여 주는 대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부 귀족 목회자들은 겉으로 경건한 척 돈 문제에 초연한 듯하지만, 사실 목사 연봉 공개 문제는 이들이 매우 두려워하는 아킬레스건입니다. 돈은 많이 챙기고 싶은데 이 왕이면 표 나지 않게 가져가기를 원합니다. 왜 연봉 총액을 이처럼 숨기려 할까요. 자 신들도 교회 돈을 너무 많이 가져가는 것이 매우 염치가 없는 행동임을 스스로 잘 알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참목사와 거짓 목사는 돈 문제에서 확연히 드러납니다. 최근 교회 공금 횡령이나 오용으로 평생의 목회 경력을 먹칠하고 있는 유명 목사님들을 많이 보실 것 입니다. 이들에게 사실 돈 문제만 있을까요. 아닙니다. 그동안 언론에 잘 드러나지 않 았을 뿐이지 조금만 자세히 관찰해 보면 그들의 무속적 기복 설교나 언행 그리고 사역 전체가 위선적 기만으로 가득함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이 교회 몸집을 열심히 부풀리는 이유는 결국은 돈을 많이 가져가거나 교회를 자식에게 물려주기 위해서입니다.

개선이 절실한 부교역자 제도 다른 중요한 문제는 소위 ‘부교역자’란 부당한 명칭으로 대우 받고 있는 다른 또교역자들의 처우입니다. 전술한 교회의 교육목사는 연봉이 1320 만 원, 교육전도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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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0 만 원, 운전사는 1780 만 원, 청소원 1000 만 원 정도의 연봉을 받고 있었습니다. 어림잡아 담임목사와 약 15 배 이상 차이가 납니다. 이런 결과는 불필요한 권위주의와 설교 만능주의 덕분입니다. 이게 무슨 중세 시대의 영주와 농노 관계도 아니고 도대체 말이 안 됩니다. 역으로 말하자면, 같은 조건에서 담임목사 한 명을 해고하면 부목사급 교역자 15 명 정도를 고용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심한 양극화를 보며 필자 같으면 차라리 그리하고 싶습니다. 주일예배 설 교자로서 부목사의 역량이 부족할 거라는 궁색한 변명은 아예 하지 마십시오. 초대교 회에 무슨 정교역자 부교역자가 따로 있었던가요. 우리 주변에 신실하고 유능한 부목 사님들 아주 많습니다. 그 교회 정도의 크기라면 담임목사직을 과감히 폐지하고 그냥 시무 목사 3~5 명 정도를 추가로 청빙하여 매년 각 예배 별로 주임 설교자를 임명하고 공동 목회로 사역하면, 고용을 늘려 미자립 교회 문제를 해소하고 부교역자 처우도 개 선하고 과도한 인건비를 줄여 다른 선교나 구제에 더욱 힘을 쓸 수 있습니다. 교회는 모든 사역자들이 대등하게 동역하는 곳입니다. 담임목사가 홀로 독주하며 나머 지 교역자들이 부하 직원이 되는 '기업형 목회'는 결코 좋은 목회가 아니라고 확신 합니다. 공동목회의 경우 교회 부패나 목회 독재를 효과적으로 예방할 수 있음은 물론, 교인들도 다양한 설교를 듣고 더욱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고 교회 각 교육 기관이나 봉사 모임도 더욱 전문화할 수 있습니다. 또한 모든 사역자가 굳이 담임 목회를 하겠 다고 서로 몸부림치지 않아도 됩니다.

당회장은 당회원들이 임기에 따라 교대로 봉사하면 될 것입니다. 그래서 미자립 교회 나 작은 교회는 현실적인 여건에 따라 담임 목회제를, 중대형 교회는 공동 목회제를 추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한국교회는 목회자의 돈 문제를 엄격하게 다루어야 한 비록다고많이생각합니다. 교회 문제의 대부분은 담임목사직과 관련되어 있고, 아무나 쉽게 목 사가 되려 하는 이유에는 장년 교인 80 명만 모아도 큰 고생 없이 어느 정도 먹고 살 수 있다는 퇴폐적 목회 풍토가 만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다가 다소 체면을 몰수 하고 세습까지 감행하면 가족 기업처럼 대대로 고상한 생업을 보장해 줍니다. 그러니 이 문제는 결코 가벼운 내용이 아니라 교회의 바른 갱신에 관련된 핵심 사항으로 보아 야 할 것입니다.

필자 역시 목사가 꼭 가난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너무 가난한 것을 막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목사가 중산층 이상으로 부유해서는 더더욱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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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다고 생각합니다. 정상적인 목회를 하자면 목사는 부유해질 틈이 없습니다. 주변에 널리고 널린 게 가난한 이웃이고, 또한 가까운 동료 선교사나 미자립 교회 목회자들을 보며 어찌 돕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제 아무리 경건한 척 무게를 잡아도 교회 돈으로 치부하는 목사는 바른 목사가 아닐 것입니다. 배부른 종교 지도자가 사역하는 교회는 반드시 부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사야 시대, 말라기 시대, 바리새인 시대, 중세 교회, 그리고 오늘날 한국과 미국의 일부 중대형 교회들이 그런 사실을 명백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여튼 연봉의 크기 자체는 개 교회가 알아서 신중하게 결정할 사항입니다. 하지만 어 느 경우이든 회계 처리에서 편법을 쓰며 연봉을 분산하여 숨기지 말고 그 총액을 정확 히 공개하고 해마다 공동의회의 엄정한 심판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에는 가족 들의 생계마저 보장되지 않는 적은 연봉에도 묵묵히 교회를 섬기시는 성실한 목회자가 많습니다. 그런 반면에 교인들 몰래 과도한 고액 연봉을 받으며 숨기고 가리기에 급급 한 목사들은 누구일까요. 우선 자신의 교회부터 냉정하게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종이면 종답게 살아야 더 이상 '주의 종'이라는 분들이 교회 돈을 가지고 다른 생각을 못 하게 한국교회는 해야 합니다. 종이면 종답게 살아야 옳지요. 누가 억지로 종이 되라고 시켰던가요. 종처럼 살기 싫으면 취업을 하든 그냥 돈벌이 사업을 할 것이지 왜 엉뚱하게 거룩한 교 회에 와서 신도들이 땀과 눈물로 바친 돈을 탐합니까. 소위 소명을 받았으니 긴 옷을 입고 종이라 주장하며 뒤로는 왕이나 귀족처럼 살려고 하는 자들은 모두 다 거짓 목사 들입니다.

어느 날 토마스 아퀴나스가 교황을 찾아갔습니다. 교황은 아퀴나스에게 "이제 교회는 금과 은이 풍성하다"고 자랑했습니다. 그러자 아퀴나스는 그러면 이제 "교회는 금과 은은 내게 없거니와 일어나 걸으라는 능력은 나타낼 수 없습니다"고 했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한국의 중대형 교회들도 그런 중세 교회를 따라 영적 능력을 상실하고 돈과 건물만 과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초대교회처럼 교회는 스스로 주머니를 비워야 하고 아울러 목회자는 검소해야 합니다. 돈으로 하나님 사업을 하고 건물로 목회하겠다는 생각은 이제 버려야 합니다. 한국교 회에 돈이 없어 성장이 멈추었을까요. 대형 교회들이 아무리 돈으로 외형을 키웠어도 그것은 단지 주변의 작은 교회들을 도살하며 교인들의 수평 이동만 부추겼지 결코 한 국교회 전체의 성장을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진정으로 건강한 성장을 원한다면, 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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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를 넘어선 건물 확장과 목사 숭배를 멈추고 매년 바닥이 날 정도로 장부를 털어서 구제와 선교에 힘써야 옳습니다.

늘날 현대 목회의 가장 고질적인 문제 중에 하나는 목사가 되어서도 자기 하고 싶은 것을 다하고 살려는 데에 있습니다. 목사는 이 시대의 영적 파수꾼이며 스스로 종의

길을 서원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종은 자유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떤 종들은 너무 방자합니다. 종이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갖고 싶은 것 다 갖고, 그리고 즐기고 싶은 것 다 즐기려 합니다. 그렇다면 그게 상전이지 종입니까. 주의 일도 많이 하고 동시에 자신의 자유와

안락도

적당히

누릴 수

있다는 타협적

사고방식은

적어도 소명을

받은

목회자에게는 매우 위험한 생각입니다.

직분이 저절로 사람을 거룩하게 하거나 능력 있게 만드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거룩한 직분을 맡았으면 적어도 일반인보다는 자신에게 더욱 엄격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신도 들에게는 돈을 사랑한다고 엄히 꾸짖고 보물을 하늘에 쌓으라고 호통 치면서, 정작 자 신들은 온갖 핑계와 명분을 만들어 그 돈을 더욱 챙겨 가는 이런 가증된 행태를 어찌 설명해야 할까요. 게다가 성추행이나 세습이나 논문 표절이라니요. 과연 요즘 순교적 각오로 치열하고 경건한 삶의 예배를 드리는 구도적 목회자를 얼마나 보십니까.

목사가 연봉을 숨기는 행위는 단순히 돈을 숨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탐욕을 숨기 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지자 이사야는 그런 탐욕스런 목자들을 서슴지 않고 '개'라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충성된 파수꾼이 절실한 이 비상한 시대에 한국의 개혁교회는 제 대로 짖지 못하는 저런 벙어리 개 같은 목동들에게 더는 속지 말고 주님께서 기뻐하시 는 참된 제자의 길을 겸손히 가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파수꾼들은 맹인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들이라. 짖지 못하며 다 꿈꾸 는 자들이요 누워 있는 자들이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들이니, 이 개들은 탐욕이 심하 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요 그들은 몰지각한 목자들이라. 다 제 길로 돌아가 며 사람마다 자기 이익만 추구하며, 오라 내가 포도주를 가져오리라 우리가 독주를 잔 뜩 마시자 내일도 오늘 같이 크게 넘치리라 하느니라(사 56:10~12)."

2013 년 3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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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속이는 교회 예수님이 복이다 가장 많이 듣는 말 중에 하나가 '복'이라는 단어입니다. 그것이 세속적 요즘인 교회에서 복이든 영적인 복이든 아마 복을 싫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복이 빠진 설교가 드물고, 복이 빠진 기도가 드뭅니다. 어느 목사님은 아예 복을 입에 달고 삽니다. 입만 여시면 복입니다. 그러다 보니 예수를 믿는 것이 복인지, 복을 받기 위해 예수를 믿는 것인지 주객이 바뀌는 경우를 흔히 봅니다.

기독교 진리에 대한 오해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알게 된 그 자체가 가장 크고 중요한 복인데, 그것을 경시하고 더 큰 복을 받겠다고 엉뚱한 일에 분주한 분들이 많습니다. 이는 진리의 우물가에 앉아서 목이 마르다고 엉뚱한 포도주 를 찾는 격입니다. 마치 우물가의 그 여인처럼 영원한 생수를 옆에 두고도 못 알아보 고 계속 목말라 하는 것입니다.

더욱 큰 문제는 일부 목회자들이 신도들의 이런 기복적 욕구를 이용하여 거룩한 교회 를 마치 복채를 나누어 주는 저급한 종교 장터로 만들고 있다는 심각한 우려 때문입니 다. 그들은 순진한 교인들을 오도하여 무속적인 성황당 신도로 만들고 있습니다.

만일 세속적인 복이 그리 중요했다면 왜 예수님이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오셨을까요. 이왕이면 로마 황제의 아들로 오셔서 요즘 일부 귀족 목사님들이 애용하시는 표현 그 대로 '더 크고, 더 멋지게, 더 많이' 사역을 하실 것이지 겨우 보잘것없는 어부들 몇 명으로 세상을 바꾸려 하셨을까요.

차라리 왕자로 오셨으면 병이 든 사람들을 일일이 손수 치료할 필요 없이 전문 의원들 을 대량으로 동원하여 더 많이 고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왕자라면 막강한 재 물을 동원하여 더 많은 사람들을 구제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큰 권력을 이용하 여 거대한 회당들을 짓고 더 많은 사람들이 쉽게 진리에 접근하도록 유리한 여건을 만 들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리하지 않으셨습니다. 만왕의 왕이신 분이 지만 실제로는 말구유로 오셔서 유대인의 종처럼 섬기며 살다가 마침내는 십자가를 지 고 죽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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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날 "예수 믿고 세속적 복을 많이 받으라"고 설교하는 목사가 있다면 그는 예수님 십자가 사역의 진정한 의미를 하나도 이해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성경 어디에

'예수를 믿으면 잘 먹고 잘산다'는 말이 한 구절이라도 있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에 헌금을 잘하면 무병장수하고 부자가 되고 자손이 잘된다는 말이 있습니까. 요즘 만연하는 소위 성공주의나 성장주의는 바른 복음이 아닙니다.

그러면 신앙생활을 잘해도 못 살고 병들고 파산하신 분들은 어찌 해석해야 하나요. 십 일조를 아주 열심히 했는데도 쫄딱 망한 이야기들은 왜 거론하지 않으십니까. 또한 신 앙 좋은 목사님들은 절대로 중병에 걸리면 안 되겠지요. 아울러 일본 같은 나라는 예 수님을 믿는 사람이 별로 없어도 왜 우리보다 훨씬 더 잘살고 있습니까. 이제 정직해져야 합니다. 기독교 진리를 가장 왜곡하고 오도하는 곳이 바로 공 교회는 교회라면 기가 막힌 일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방법은 사람과 다릅니다. 예수님의 광야 시험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단은 권력과 명예로 일을 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세상의 좋은 것을 다 주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를 단호히 거부하셨습니다.

그런데 많은 현대 교회들은 이런 사단의 방법을 그대로 수용하고 따르고 있습니다. 예수를 잘 믿으면 만사형통할 것이며, 오직 부흥과 성장만이 있는 것처럼 큰소리칩니다. 교회 에 돈을 바치면 큰 복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는 매우 달콤한 거짓말입니다.

왜 그런 목회자들은 자신의 재산을 전부 다 교회에 바치지 않습니까. 열심히 바쳐서 복을 받는 것이 확실하다면 아예 전부 바쳐서 복을 곱빼기로 받으셔야지요. 왜 자신들 은 뒤로 부동산을 사고 법인을 만들고 돈을 은닉합니까. 구약 십일조의 참된 정신은 ' 십분의 일'이란 수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눔'에 있건만, 일부 약삭빠른 목회자들은 더도 덜도 아닌 딱 십분의 일만 바치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괜히 그 이상을 더 강조했 다가는 자신도 모두 다 바쳐야 하니까요. 한마디로 이들 중 상당수는 밤중에 몰래 들어와 주인 행세를 하는 고약한 도적들입니다.

우리는 교회 역사가 주는 생생한 교훈을 잊어선 안 됩니다. 교회의 권력이 비대해져 세속을 향하자 로마의 황제도 감히 대항하지 못 했습니다. 신의 이름을 빌어 호령하니 감히 가로 막을 자가 없었습니다. 신도들은 무지하여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로 장식된 미사에 참여하거나 경문을 반복하여 외우는 것이 신앙생활의 거의 전부였습니다. 삶의 지침이 되어야 할 성경은 오직 사제들에게만 주어졌습니다. 신도들이 성경을 직접 읽 거나 해석하면 바로 이단으로 몰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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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렇게 절대적 교권을 구축한 후 성직자들은 거의 집단적으로 부와 권력에 탐 닉했습니다. 교황이 세속화하여 타락하고 추기경, 신부, 수도사, 그리고 수녀들이 줄 줄이 그 뒤를 따랐습니다. 무자격한 자들이 거룩한 직분을 사유화하거나 돈으로 매매 한 결과입니다. 수도원과 수녀원에서 영아들이 버려지고, 대부분의 신도들이 가난한 농노로 신음할 때 사제들은 화려한 저택에서 호의호식했습니다. 그 시대에 수많은 사람들이 매주 교회당 문턱이 닳도록 들락거렸지만 그들 중에 과연 몇이나 천국에 도착 했을까요. 이것이 과거 중세 교회의 비극적 실체입니다.

지금 우리가 읽는 똑같은 성경을 들고서 어찌 교회가 저 모양이 될 수 있었을까요. 그 러나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종교임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의 사기 중에 가장 쉬운 것이 '종교적 사기'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종교가 왜곡되면 흉기가 됩니다. 신앙이라는 미명으로 무장된 종교적 신념은 매우 위험한 무기입니다. 중동 지역을 한번 보십시오. 종교 지도자들의 '성전(거룩한 전쟁)'이라는 한마디에 수많은 젊은이들이 서슴지 않고 폭탄을 매고 자살 공격을 감행합니다. 교회는 세상을 속이고 또한 자신을 속인 교회입니다. 세상에 복음의 바른 진리를 중세전하지 않고 사리사욕을 따르던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그때처럼 지금도 적지 않은 교회들이 또 다시 세상을 속이며 '다른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와 간판만 달면 교회가 아닙니다. 목사와 장로와 신도가 있다고 모두 바른 교회 가 아닙니다. 어찌된 일인지 '병 고친다, 은사 준다, 또한 복 준다'고 하면 수천수만 이 환호하며 모입니다. 반면에 바른 교회를 위한 개혁 모임에는 고작 칠팔십 명이 모입니다. 강단에서 진리가 바르게 선포되면 강 건너 불 보듯이 무심하고, 오히려 요란한 종교 쇼를 하면 쉽게 통하는 안타까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정직한 목회를 하는 교회는 십년 동안 100 명이 되기도 힘든데, 같은 지역 사기꾼 목사가 목회하는 교회는 수 천 명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점차 바른 교회들이 소수가 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시기처럼 참으로 슬픈 시대입니다.

신도들이 각성해야 합니다. 이젠 목사의 말을 듣지 말고, 목사의 삶을 들어야 합니다. '공금 횡령 안 했다, 성추행 안 했다, 세습 안 했다, 그리고 표절 안 했다' 이런 거짓 말을 믿지 말고 그들의 삶을 보아야 합니다. 수천수만 모아 놓고 설교는 청산유수인데, 뒤로는 교회 돈을 곶감처럼 빼먹으며 사치를 누리거나 간통하고 세습하는 목사들이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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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명이 아니지 않습니까. 과연 그들의 그런 위선과 거짓이 진정으로 복 된 삶의 모습 입니까.

이들은 교인들을 만만하게 보고 두려워하지 않음은 물론,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누가 그들의 간덩이를 그리 겁 없이 키워 주었습니까. 바로 그 교회에 출석하는 신도들이 아닌가요. 그래서 그런 답답한 공동체에서는 귀한 복음의 진리가 돼지우리에 던져진 진주가 되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천사의 모습을 갖추었으나 속이 사악했던 중세 교회가 시대를 넘어 부활하여 오늘날 한국 땅에서 다시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과거나 지금이나 부패한 인생들의 무지와 탐욕은 별로 크게 변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 다.

교회는 세상을 속이지 말고 바른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가난하게 사 셨습니다. 그것도 머리 둘 곳도 없으실 정도로 불편하게 사셨습니다. 잘 먹고 잘사는 것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나, 그것이 신도의 삶에 우선적 목적이 되거나 교회의 상습적 가르침이 된다면 이는 분명히 잘못입니다. 복은 성실하게 열심히 일하면 받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일반 은총의 영역입니 세속적 다. 그러니 부자로 장수하며 살기 위해 굳이 교회를 열심히 찾을 필요는 없습니다. 교회는 그보다 더욱 귀하고 소중한 가치를 추구하는 곳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화평케 하는 자, 애통하는 자, 마음이 가난한 자, 그리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에게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이야말로 바로 사도들이 목숨을 걸고 우리에게 전달 해 주려고 한 바른 복음입니다.

'잘 먹고 잘사는 것'을 추구하는 것은 복지이지 결코 복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몸소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오신 이유는 부나 권력 따위가 감히 신령한 복이 아님을 분명히 말해 줍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예수님과의 만남이 가장 큰 복임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8)."

2013 년 5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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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와 박사 자폐 수준의 목회 윤리 박사가 유난히 많다는 것은 사실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웬만한 한국교회에 중대형 교회 담임목사들은 나중에 보면 대부분 다 박사입니다. 안식년이니 뭐니 하며 잠시 안 보이더니 어느 날 갑자기 박사라고 합니다.

그러나 과연 목회를 위해 이런 박사 학위가 꼭 필요한 것인가 하는 의문은 물론이고, 이들 학위의 상당수가 거의 가짜 수준의 허접한 학위이며 그 취득 목적과 과정 역시 한심하기 짝이 없다는 점이 문제의 심각성을 더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와 관련하여 최 근 강남의 대형 교회인 사랑의교회 담임목사의 논문 표절 사건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을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놀라운 점이 매우 많으나 우선 몇 가지 사항만 주목하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1.

남의 논문을 무더기로 표절해도 심사 교수단이 쉽게 적발하지 못한다.

2.

표절이 들통 났는데도 학위는 취소되지 않았다. 고등학생 과제도 표절이면 무효인 데, 하물며 표절한 박사 논문을 유효로 하는 거룩한 대학이 있다.

3.

표절한 사람보다 표절을 무마하고 적당히 수정하여 용인하는 그 대학이 더 저질이 다.

4.

풀타임으로 유학할 필요 없이 틈틈이 들러 수업을 듣고 논문만 작성하면 학위를 주 는 대학교가 있다.

5.

그나마 저 학교는 약과다. 더 형편없이 학위를 남발하는 신학교도 많다.

6.

당연히 위의 방법은 수업료, 항공료, 그리고 체류비 등 돈이 아주 많이 든다. 저연 봉의 목회자는 꿈도 꾸지 못한다.

7.

저런 가짜성 박사 매매 때문에 진짜 박사까지 매도당한다.

8.

교회에서 표절 사실이 공론화되어도 목사의 신분으로 끝까지 아니라고 잡아뗀다.

9.

표절을 두둔하거나, 또는 오히려 의혹을 제기한 사람들을 몰아세우는 기득권 세력 이 있다.

10. 표절이면 담임직을 사임하겠다고 일단 큰소리친 후, 나중에 사실이 드러나자 슬쩍 이를 번복하여 당회에 떠넘긴다. 11. 표절보다 거짓말이 더 나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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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목사의 말 바꾸기가 부패 정치인보다 더 몰염치하다. 13. 공교회의 당회가 공석에서 거짓말을 한 목사를 즉시 파면하여 퇴출시키지 않고, 고작 유급 휴가 수준의 솜방망이 처벌을 한다( 참고로, 미국 닉슨은 거짓말 한마디 때 문에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14. 거짓말하는 목사의 설교를 즐기며 그래도 계속 충성하는 신도가 차고 넘쳐 초대형 교회당을 증축하고 있다. 신학은 가장 어렵고 힘든 공부 중의 하나입니다. 하지만 최근 교회 세속화의 가 본래속으로 인해 극소수의 신학 대학들을 제외한다면 갈수록 그 질이 저하하고 있는 것이 부인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특히 외국의 경우 신학 지원자가 급감하여 많은 신학교들이 극심한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심지어 상당수 명문 신학 대학들마저 이런 어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 대학들이 돈을 싸들고 오는 한국 유학생을 반기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일부 신학 대학에서는 개가 오든 소가 오든 별로 크게 개의치 않습니다. 최소 한의 입학 요건만 요구하며 웬만하면 다 받아 주고, 또 웬만하면 학위를 줘서 돌려보 냅니다. 만일 학위 취득을 까다롭게 한다면 나중에 소문이 나서 다른 유학생들이 추가로 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요즘은 신학교도 돈벌이 장사를 한다는 부끄러운 말이 됩니다. 그런데 왜 유독 한국 목회자들이 이렇게 박사 학위에 연연할까요. 보통의 경우 신학교 정규 과정을 정상적으로 이수하고 열린 가슴으로 성경을 한 100 번 정도만 읽으면 저절 로 눈과 마음이 밝아져서 충분히 좋은 설교와 목회를 할 수 있을 것인데… 아마 전 세 계에서 박사가 가장 많은 교회가 한국교회일 것입니다. 만일 신학교 교수가 되려 한다 면 학위가 긴요하겠지만, 도대체 왜 목사가 이렇게 큰돈과 시간을 바쳐 무리를 해야 할까요. 바른 목회가 목사 안수만으로는 부족한 것일까요.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우선은 목회 자세에 가장 큰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하나님 말 씀의 권위에 의지하여 설교하고 목회해야 하는데, 자신을 치장하고 학문적 권위를 세 워 설교하려는 작은 욕심이 그 출발점입니다. 자신을 낮추고 전적으로 말씀에 의지하 는 것보다는 학위에 기대어 목회를 품위 있게 해보자는 심리이지요. 그러다 보니 복음 의 빛을 제대로 발하지는 못하고 오히려 자신을 빛나게 하는 엉뚱한 목사들이 적지 않 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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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교회는 결국 교인들을 성숙한 '예수님의 제자'로 키우지 못하고 기껏해야 어줍잖 은 '목사의 제자'로 만들기 십상입니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맹신도'나 '병신도'의 탄생 과정입니다. 유감스럽게도 한국 중대형 교회 목회자들의 상당수가 겉만 반질한 ' 쭉정이'이다 보니 이런 고질적인 현상을 쉽게 해결하기 힘든 것이 안타까운 현실입니 다. 신자들은 정말 날마다 울고 싶습니다. 누가 일부러 뺨을 쳐 주지 않아도 절로 요즘눈물이 납니다. 진짜 순수한 주의 종들은 생활고에 시달리며 목회하는 경우가 많은데 비해 배부른 쭉정이들이 정통 행세를 하니 하루도 한국교회가 조용한 날이 드뭅니다.

교회 세습은 이제 아예 기본 메뉴입니다. 그제는 어떤 자가 대담하게 거액의 교회 공금 을 횡령해서 감옥에 가더니, 어제는 다른 잡상인이 성추행하고 큰소리치고, 오늘은 늘 멋진 설교를 늘어놓던 또 다른 분이 표절과 거짓말로 망신을 당하고 있습니다. 내일은 다시 무슨 일이 있을지 가뜩이나 콩알만 해진 성도들의 속 타는 가슴은 조마조마합니다.

중대형 교회를 장악한 일부 귀족 목사들의 그 가상하고도 철면피한 의기가 아주 태산을 찌릅니다. 부패한 정치인의 습성이 쥐와 같다더니 딱 그 모양입니다. 쥐가 체면 차리는 것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창고가 바닥 날 때까지 터는 것이 쥐입니다. 몰염치한 세습의 비난을 받아도 태연하고, 교회 돈을 유용하다 들켜도 의연하고, 그리고 여신도들을 농락하다 들켜도 뻔뻔하게 설교를 잘합니다. 세인들이 원색적인 언어로 욕을 하여도 못 들은 척하니 하여튼 대단한 강심장들입니다. 교인들은 수시로 이런 욕설을 듣 고 있는데, 정작 목사 본인만 못 듣고 있는 것인지요.

게다가 스스로 소위 성직자라는 자들이 자신을 조금만 비판하면 명예훼손이니 뭐니 하 며 무조건 세상 법정으로 끌고 갑니다. 자신들이 땀 흘려 키워 놓은 맹신도들과 기득 권자들의 기피처가 된 '명예훼손법'만이 이들의 유일한 구세주가 된지 이미 오래입니다.

과거 군부 독재자들과 그 추종자들의 모습이 그랬었지요. 말 한마디만 까닥하면 경찰 구인장이나 법원 소환장이 날아왔습니다. 권력욕으로 감행한 파렴치한 쿠데타를 '구국 의 결단'으로 미화한 인간들이니 오죽하겠습니까. 하여튼 그런 코걸이귀걸이 법 덕분에 일부 대형 교회 목사들 역시 별 더러운 범죄를 백주에 저지르고도 공공연히 목회를 계속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법정 싸움을 좋아하는 분들이 많지 않으니까요.

작금의 한국교회 헌금통에는 저런 들쥐 같은 교권주의자들이 서식하고 있기에 비극이 더욱 확산하고 있습니다. 하여튼 이들은 무슨 핑계와 명목을 만들어서라도 기어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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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들의 주머니를 행주처럼 쥐어 짠 후, 마침내는 그 돈을 자신의 주머니에 채웁니다. 그렇게 배를 불리면 그 다음 수순은 거의 예외 없이 여자, 명예, 또는 권력 추구입니다. 그리고 한국 목회자들의 지나친 박사 학위 선호는 그런 불의한 연장선상에 위치해 있습니다. 물론 그 선의 종착역은 언제나 '교회 사유화'입니다.

이처럼 부패한 교회는 달리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독사의 소굴이 됨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시 종교 지도자들에게 괜히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책망하신 것이 아닙니다. 목회 윤리가 밑바닥까지 떨어졌습니다. 오늘날 기독교 정신을 가장 훼손하 한국교회의 는 사람들이 바로 목회자임을 알고 계십니까. 감히 거룩한 교회의 헌금을 횡령하는 자가 목사 외에 누가 또 있나요. 교인들이 평생 호사스런 밥상이 될 교회를 자식에게 물려주던가요. 아니면 어떤 집사들이 여신도를 그리 뻔뻔하게 성추행하던가요.

그런데도 일부 담임목사들은 동네 강아지도 안 물어 갈 그 이상한 특권 의식에 빠져 교인들을 휘두르려 합니다. 소통이 전혀 안 되고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이렇게 심각 한 영적 자폐증에 감염된 독사들은 주일마다 강단에서 달콤한 독을 열심히 품어 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순진한 신도들이 바른 복음을 얻지는 못하고 지옥으로 향하는 단맛에 빠져 세속적 복과 성공에 심취해 있습니다.

이 옛 뱀의 제자들은 결국 자신들 도 천국에 들어가지 않고 다른 사람들도 못 가게 교회당 문턱을 막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그동안 저들의 위선과 탐욕에 상처 받은 교인들이 얼마나 많이 교회를 떠난 줄 알고 계십니까. 최근 한국 가톨릭의 급성장은 이런 사태와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

누가 무슨 변명을 해도 교회 문제의 80% 이상이 목회자에 기인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일반 신도들이 교회에 무슨 대단한 이권이 있다고 거기서 소동을 일으킬까요. 설사 문제가 있더라도 그런 문제가 교회에 치명적인 상처를 주지는 않습니다. 항상 심각한 문제가 되는 것은 지도자 위치에 있는 목사의 사욕과 변질이 야기하는 사안들입니다. 그래서 목사가 바로 서야만 교회가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보면 지금 한국교회에 정말 시급히 필요한 것은 진정한 '목사'이지 알 이런량한맥락에서 '박사'가 아닙니다. 한국교회에 신학 박사, 목회학 박사, 선교학 박사 그리고 교육학 박사가 모자라서 이 모양이 되었을까요. 또한 그 어떠한 박사 학위든 결국은 세 상의 일개 초등 학문에 불과하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목회 현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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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적 권위를 무시하는 것도 잘못이지만, 반대로 학위를 너무 과대평가하는 것은 더욱 큰 잘못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박사 학위 목사를 과선호하는 교회가 많이 있는 한 앞으로도 박사 목회자 문제 는 지속될 것입니다. 늘 불필요한 헛발질에 명수인 여러 대형 교회들이 이런 박사 청 빙에도 역시 빠짐없이 앞장을 서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먼저 신도들이 정신을 차 려야 합니다.

갈릴리 어부 출신 사도 베드로가 박사 학위를 가지고 목회를 했나요. 아니면 구약의 선지자들이 박사 학위 이수자들인가요. 교회마저 세상을 따라 학벌 위주로 가면 슬픈 일입니다. 바르고 건강한 목회를 위해 적정선의 기본 자격은 반드시 필요하겠지만, 그 것이 과하면 오히려 매우 어리석은 사역이 될 것입니다.

나사렛 마을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오셨던 예수님의 겸손하신 사역이 언제 세상의 학 문적 성취에 연연하셨던가요.

"거짓 행하는 자가 내 집안에 거하지 못하며, 거짓말하는 자가 내 목전에 서지 못하리 로다(시 101:7)."

2013 년 6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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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양견과 잡견 목회는 '양치기 개'의 직분 성경을 보면 '목자'라는 단어가 여러 상황에서 자주 등장합니다. 물론 그 어느 신구약 경우이든 '양을 돌보고 키우는 사람'이라는 기본적 의미는 같습니다. 특히 구약에서는 백성의 지도자를 목자로 표현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신약시대인 오늘날 성도들은 과연 누가 다스리는 것일까요. 간혹 목사를 단순히 '양을 돌보는 목동'이라는 의미에서 '목자'로 불러도 어의상 잘못 된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을 '목자장'으로 호칭한 경우도 있습니다. 다만, 목회자를 목자로 부를 경우 신도들에게 불필요한 오해를 줄 여지가 크기에 그 점이 문 제가 됩니다. 양무리의 주인이신 유일한 '선한 목자'는 오직 예수님 한 분이기 때문입 니다.

목사도 물론 목자의 역할을 부분적으로 수행하고는 있지만 결코 양들의 주인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구태여 의미의 혼선을 주면서까지 우리가 '목자'라는 명칭을 함부로 사용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교회를 보면 성경 공부를 인도하는 구역장이 나 소모임의 리더를 '목자'라는 직책으로 임명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 의도는 충분히 이해하지만 이 역시 마찬가지로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 베드로에게 "내 양을 치라"고 명하셨지, '네 양을 치라'고 하신 적이 결코 없습니다.

사도들은 '만물의 찌꺼기'처럼 사역했다 보면 '개'가 간간히 등장하는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사람을 개에 빗대어 표현 성경을 한 경우입니다. 열왕기서에 하사엘이 자신을 낮추어 '개 같은 종'이라고 표현한 것이 그 좋은 예입니다. 이사야서에는 부패한 종교 지도자를 개로 서술했습니다. 그리고 귀 신 들린 딸을 위해 예수님께 나아왔던 가나안 여인 또한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 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하며 자신을 개로 묘사했습니다.

사실 모든 사역자들은 "누가 크냐" 하며 양들 위에 군림하려 하지 말고 이 여인의 겸 비한 자세를 가져야 마땅합니다. 우리가 주기도문으로 일용할 양식을 구하듯, 매일 주 인의 상에서 바닥에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구하는 그 마음을 지켜야 옳습니다.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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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는 굳이 자신을 '목자'라고 하기보다는 '양치기 개'의 직분으로 자처하는 것이 더 적절한 처신입니다.

그런데 가끔 어떤 개는 자신을 하나님의 대리자나 대사로 자임하며 성도들 위에 서려는 것을 봅니다. 하지만 그런 행위는 대단한 기만입니다. 바울은 스스로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직접 세우신 사도마저 그럴진대 하물며 오늘날 회중이 세운 담임목사직이 그 무슨 초법적 직분이라고 다른 성도보다 더 특별히 우월한 신분으로 높이어야 할까요.

따라서 성도들이 목회자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하고 옳은 일이나, 일부 교회에서 보 듯, 이에 도를 넘어 목사를 마치 천국의 열쇠라도 쥐고 흔드는 교주나 구약 제사장처럼 대접하며 맹종하는 것은 극히 어리석고 한심스러운 일입니다. 세상에 그 어떤 목사도 임의로 성도들에게 복권을 나누어 주듯 복을 줄 능력을 지닌 사람은 없습니다. 만일

그래도

그런

특권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틀림없이

막장

사이비입니다. 바울은 고백했습니다.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같이 되었도다." 이것이 바로 양을 돌보던 사도의 진정한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요즘 목회 자의 자리는 어떻습니까. 과연 만물의 찌꺼기처럼 낮은 자리에서 사역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한국교회 목사만은 특별히 사도보다 높은 직분인가요.

지금 한국 개신교가 극복해야 할 난제 중 하나는 일부 목사들이 자신이 서야 할 바른 자리를 모르고 자꾸 높아지려 하는 데에 있습니다. 양치기 개가 목자의 자리를 넘보고 이를 새치기하려 합니다. 그래서 주인에게 돌려야 할 영광을 가로채며 자신의 욕심을 채우고 있습니다.

목양견과 잡견 양치기 개란 목장에서 양을 돌보기 위해 훈련한 특수견으로 매우 영리하고 충성 본래스러운 것이 그 특징입니다. 이미 구약 욥기에 '양 떼를 지키는 개'라는 표현이 나오는 것을 보면 이 양치기 개의 역사가 매우 오래됨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대략 20 여 종이 있는데 그중에 유명한 것으로는 이미 잘 알려진 셰퍼드와 콜리, 보더콜리, 웰시 코기, 올드잉글리시쉽독, 그리고 세틀랜드쉽독 등이 있습니다. 이런 양치기 개를 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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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양견'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그 충성심에 걸맞게 아주 적절하게 붙여진 이름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도처에서 수많은 목회자가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목양견의 책무를 헌신적으로 잘 수행하고 있는데 반해, 어떤 목사는 하필이면 하늘나라 족보에도 없는 잡견 노릇을 열 심히 하고 있습니다. 목양견과 잡견의 가장 큰 차이점은 외모나 크기보다는 그 '품성' 에 있습니다. 목양견은 자기의 책임과 의무를 정확히 알고 이를 성실하게 수행합니다. 도적을 감시하고, 이리와 싸우고, 그리고 양들을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합니다. 잡견은 책임과 의무 그 자체를 아예 모릅니다. 신학교에서 조직신학과 실천신 반면에 학을 달달 외우고 나오지만 그런 것들은 그저 겉치장일 뿐입니다. 막상 실제 목회 현장에서는 배운 지식과 상관없이 그냥 자기 욕심대로 삽니다. 그래서 도적을 보면 꼬리 치거나 도리어 이리와 합세하여 양을 덮치기 일쑤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일부 잡견들은 크게 변이하여 아예 이리로 거듭나기도 합니다. 그리고 틈만 나면 아무데서나 먹고 싸고 더럽힙니다. 그러다 함부로 먹어서는 안 될 것을 삼 키기도 합니다. 소위 말하는 '삯꾼 목사'가 바로 이들입니다. 심지어 어떤 잡견은 노 망이 들었는지 나이가 들수록 더욱 방종하더니 근자에는 새끼까지 동원하여 교회 공금 을 나누어 삼키며 부자가 나란히 개망신을 자초하고 있습니다.

더욱 가증한 일은 이 잡견들이 겉으로 위선을 떨며 명견 행세를 하려고 아주 애를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두툼한 속주머니에 향수를 뿌리고, 돈으로 사치를 떨고, 그리고 알량한 박사 학위로 두꺼운 얼굴에 금칠을 합니다. 하지만 그 런다고 잡견이 명견으로 둔갑할 리가 없습니다. 도리어 가는 곳마다 사고를 쳐서 온 누리에 악취와 노린내만 진동할 뿐입니다. 그 덕분에 지금 한국교회는 아주 순조롭게 개판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근자에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에서 목회자들을 상대로 설문 조사를 했었는데, "당 신이 가장 존경하는 목회자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답변에서 현재 생존 목회자 중에 1 위가 조 아무개 목사님이랍니다. 그 뒤로 줄줄이 오 씨, 김 씨 등 대형 교회의 목사님들이었습니다. 대부분 공금 횡령, 논문 표절, 거짓말, 교회 세습, 성추행, 그리고 축재 논란으로 세상에 위명을 날린 분들입니다. 이게 지금 한국 교회 보통 목회자들의 의식 수준입니다. 아무리 개가 색상 구분을 못 한다고 하지만, 그래도 흑백만이라도 제대로 구별해야 옳지요. 이러니 단일 직종 중에 사기꾼이 가장 많은 직업이 목사라는 비아냥거림이 나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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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교회 목회자들이 먼저 달라져야 합니다. 이들이 지금 정말 개처럼 낮은 자세로 헌신하며 사역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정승처럼 호사하고 있을까요. 교회 직분이

무슨 벼슬입니까. 주의 종이라면서 왜 그리 푼수처럼 사치와 위세를 부리며 사는지 정말 한 심합니다. 어떻게 종이라는 분이 교인들은 아이들 간식비까지 줄이고 택시 대신 버스 를 타며 힘들게 모아서 건축 헌금을 하고 있는 시기에 한 번에 천만 원이나 하는 1 등석 비행기를 타고 다닐까요. 보통의 상식으로는 그 거룩한 심보를 이해하기가 매우 어 렵습니다.

하여튼 이런저런 이유로 요즘은 옆집 강아지 보기가 미안할 정도입니다. 한국교회의 귀족 목사들을 양치기 개라고 호칭하는 것은 도리어 '동물 학대'가 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대형화하여 연봉 몇 억은 기본으로 챙기고 거기서 단물을 빨고 권력을 누린 것 외에 무슨 대단한 사역을 하였는지 스스로 반성을 좀 해야지요. 어느 분이 오죽 답답하면 이들을 향해 '양복 입은 무당'이라고 하겠습니까.

예수님도 단지 12 명의 제자를 두셨을 뿐인데, 어떤 귀족님들은 자기가 무슨 대단한 초 능력자라고 수천의 제자를 키우겠다며 피라미드 다단계 사업처럼 저리 욕심을 부리는 지 정말 가소롭습니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그깟 대형 건물 하나를 건축할 능력 이 없어 빈들이나 소박한 회당에서 사역을 하셨다고 보십니까. 아니면 요즘 유명 목사 들보다 가르치시는 역량이 부족하셔서 고작 12 명의 제자를 키우셨을까요. 결코 아니지 요. 한 영혼 그리고 또 영혼을 소중히 돌보아야 하는 진정한 목회는 그런 양계장식 대 량 사축이 절대로 아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대형 교회 담임목사 대부분은 자기 양의 이름은 물론 그 아픈 속사정을 거의 모르고 있습니다. 이러니 결국 참된 제자는 별로 못 키우고 만날 복 타령이나 하는 맹 신도를 무더기 날림으로 양산하여 돈을 갈취하고 교단 정치에 몰려다니며 자기 권력과 세력 키우기에 몰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분들이 진정 '신성한 목사님들'인지 아니면 '실성한 목사님들'인지 성도들은 마냥 헷갈립니다.

러니 무슨 파수꾼의 역할을 잘 감당하겠습니까. 입으로는 늘 칼뱅과 웨슬리의 신학을 자랑스럽게 노래하지만, 실제로 그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검소하고

청빈하게 살았는지 그런 중요한 사실은 제대로 가르치거나 실천하지 않고 있습니다. 기껏 해야 은밀한 밀실에서 교회 장부나 뼈다귀처럼 움켜 물고 침을 흘릴 뿐입니다. 누가 이들에게 그 냄새 나는 장부 좀 잠깐 보자고 하면 아예 난리가 납니다. 그래서인지 요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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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잡견들이 아무리 무게 잡고 유창하게 달콤한 설교를 늘어놓아도 수시로 '개소리'처럼 들리는 것은 필자만의 환청일까요.

성경에 제자를 키우라고 했지, 언제 화려한 건물을 키우라 했습니까. 과연 건물 삽질에 몰두한 선지자나 사도가 단 한 사람이라도 있었나요. 다 대형화한 귀족 교회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가난한 자와 고아와 과부를 긍휼히 여기며 '전심으로' 돌보고 있습니까. 그리고 정말 한 영혼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며 양육하고 있습니까. 턱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이들 상당수는 그저 성도들의 주머니를 털기 위해 매주 느끼한 화술과 잡다한 프로그램으로 '종교 쇼'를 열연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런 잡견과 목양견을 구별하는 방법이 그리 어려운 것만은 아닙니다. 우선 목 회자 신분으로 사치를 떠는 자는 일단 잡견일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제 주제를 모르는 것이 잡견의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가 아무리 천사의 입술로 설교를 잘하거나 은사를 듬뿍 퍼 준다고 해도 쉽게 믿지 마십시오. 또한 당회나 제직회를 어용화하여 목회 독재를 하고, 교회 재정 장부를 숨기고, 툭 하면 선교나 사업을 핑계로 해 외여행을 하고, 고액 강사료를 주고받으며 외부 집회에 분주하고, 고급 승용차를 즐기 고, 그리고 시치미 떼며 고연봉을 챙기는 자들은 거의 틀림없이 이리로 변절하고 있는 '변이 잡견'이라고 의심하셔도 무방합니다.

목양견은 '바닥'에 앉는다 없고 도적과 이리가 설치는 교회를 향해 성경은 이렇게 탄식합니다. "너 참된희가목자는 살진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 그 털을 입되 양떼는 먹이지 아니하는도다. 너희가 그 연약한 자를 강하게 아니하며 병든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싸매 주 지 아니하며 쫒기는 자를 돌아오게 하지 아니하며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아니하고 다만 포악으로 그것들을 다스렸도다. 목자가 없으므로 그것들이 흩어지고 흩어져서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되었도다(겔 34:3~5)."

한국교회에 양의 탈을 쓰고 제사장 가운을 걸친 간교한 이리들이 설치고 있습니다. 교 회의 많은 '지도자'들이 목자의 마음을 배신하고 '지배자'로 변절하였습니다. 그 결과 교회가 사랑과 공의를 잃고 자정 능력을 상실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이야말로 정말 강직하고 헌신적인 목양견이 매우 절실한 때입니다. 어느 여론 조사를 보니 세인들이 교회를 기피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목사들 때문이 라고 합니다. 매우 슬픈 사실입니다. 혹시 높은 자리를 선망하여 목사가 된 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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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제발 다른 직업을 찾기 바랍니다. 또한 확실한 소명 없이 아무나 신학교로 달려가지 말기 바랍니다. 신학교는 양들의 영혼을 위해서라면 목숨까 지 걸고 이리와 싸우는 목양견을 훈련하는 곳이지, 복날에 때려잡을 잡견을 사육하는 곳이 아닙니다.

아울러 일부 목회자들은 말로만 겸손한 척하지 마시고 실제 삶으로 종의 모습을 보여 주십시오. 종은 종다워야 하고, 개는 개다워야 합니다. 개가 바닥에 떨어진 부스러기를 먹지 않고 함부로 주인의 밥상에 오르면 그 상은 당연히 개판이 됩니다.

그러므로 목사가 종의 자리를 망각하고 상전이 된 교회는 비록 간판은 정통일지 모르나 저절로 사이비화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게 바로 한국 귀족 교회들의 적나라한 현주소입니다. 개가 상석에 앉은 교회는 결국 개 같은 공동체가 된다는 것을 지금 우리 모두가 날마다 보고 있지 않습니까. 이제 특정 직분을 우상화하는 몰지각한 성직주의를 버려야 합니다. 목사가 한국교회는 실질적으로 교회의 거의 모든 일을 간섭하고 관리하는 '목회자 중심주의'는 반기독교 적인 그릇된 사상입니다. 모든 성도가 다 제사장이고 또한 모든 직분자가 다 대등한 동역자입니다.

교회 내의 여러 직분 중에 목사는 진리를 가르치고 지키는 파수꾼의 사명으로 동역하는 아주 소중한 직분입니다. 한국의 개혁 교회가 바로 서려면 이 목사직이 탈선하지 말고 바른 자리를 견실하게 지켜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목자 예수님을 사랑하는 충성된 목양견은 '밥상'이 아니라 '바닥'에 앉는 법입 니다.

"이스라엘의 파수꾼들은 맹인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들이라. 짖지 못하며 다 꿈꾸 는 자들이요 누워 있는 자들이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들이니, 이 개들은 탐욕이 심하 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요 그들은 몰지각한 목자들이라(사 56:10~11)."

2013 년 7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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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장부를 숨기는 목사님들 헌금은 비자금이 아니다 처음 출석한 교회는 주택가 인근 허름한 건물 3 층에 셋방살이를 어린하던시절작은필자가 개척 교회였습니다. 교회에 번듯한 행정 사무실이나 교육관 등 기타 다른 부속 시설이 전혀 없다 보니 모든 면에서 제약이 많았습니다. 그런 형편 속에서 매주 주일예배가 끝나면 재정 담당 집사님 두 분이 예배실 한 구석에 있는 낡은 책상에서 교회 장부 업무를 처리하셨습니다. 다른 쪽 구석에서는 성가대원들이 찬양 연습을 하였 지요. 비록 매우 협소하고 불편했던 예배당이었지만 지금도 그 정겹던 풍경이 눈에 선 합니다.

요즘 여러 교회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재정 장부' 공개 논란을 보면 정말 한숨밖에 안 나옵니다. 이게 과연 개혁 교회가 맞습니까. 거룩한 공교회가 뭘 그리 숨기고 감출 것이 많습니까. 당시 우리 교인들은 예배실 구석으로 가기만 하면 누구나 교회 장부를 쉽게 볼 수 있었습니다. 뭘 숨기거나 감출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더구나 매월 제직회에서 유인물로 재정 보고를 자세히 했기 때문에 제직들은 굳이 장부를 볼 필요도 없었습니다.

작은 교회였지만 교회 재정을 교인들에게 투명하게 공개하고 매우 철저히 관리하였습 니다. 그래서 목사님의 급여는 물론, 가정까지 있는 교육전도사님이 얼마나 적은 사례비를 받으며 수고하시는지 그 자세한 내역을 알고 한동안 마음 아파한 기억이 있습니다. 물론 사랑이 넘치던 일부 교우들이 남몰래 교역자들 집에 음식을 가져다 드리는 경우도 아주 흔히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일부 교회들이 배가 부르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간까지 덩달아 부었나 봅니다. 교회 헌금과 재정의 주역인 성도들이 장부를 보겠다는데, 감히 종이란 자들이 나서서 이를 거부합니다. 종을 너무 풀어 놓았더니 그 방자함과 오만함이 하늘을 찌릅니다.

무슨 거창한 교회법이나 사회법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이건 그냥 상식의 문제이지요. 참고로 한국 법원은 민법 제 683 조를 근거로 "수임인은 위임인의 청구가 있는 때에는 위임 사무의 처리 상황을 보고하도록 규정하고 있으므로, 단체의 구성원은 단체의 재산 상황을 파악하고 임원의 업무 집행 상황 등을 감시하기 위해 필요한 경우 단체 구성원의 당연한 권리로서 단체를 상대로 회계장부 등의 열람, 등사를 청구할 수 있다" 고 판시한 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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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교회 운영의 주체는 교인들이 청빙한 목사나 다른 교역자들이 아닙니다. 바로 교 인들 자신입니다. 따라서 회중이 세운 직분자들이 역으로 회중 위에 군림하여 위세를 부리는 것은 명백히 반기독교적인 행위입니다. 하지만 말로는 '종'이라고 하면서 실제 행위로는 악덕 재벌 기업 '왕회장' 노릇을 하려는 자들이 너무 많습니다. 일부 대형 교회 담임목사들은 단체로 작심하고 노망이라도 났는지, 제대로 교회 요즘재정을 투명하게 운영하며 자세히 공개하는 곳이 드뭅니다. 많은 경우 담임목사와 재정 담당 장로 한두 명만이 밀실에서 교회 돈을 제멋대로 주무르고 있습니다. 영수증이 없는 경우가 많고 있어도 두루뭉술 그 내역을 자세히 알 수가 없습니다. 선교비라는 명목으로 지출된 돈이 실제로는 해외 부동산 투자, 개인 판공비, 또는 여행 경비로 쓰 이고, 심한 경우는 지인들에게 막 퍼 주기도 합니다.

필자가 아는 보수 교단 소속의 한 교회에서는 목사 자녀 둘의 방학 기간 중 이용한 항 공료조차 교회 공금으로 은밀히 처리한 사실이 드러나 교인들의 큰 반발을 사고 있습 니다. 또한 그 인근 지역의 다른 중형 교회는 재정 비리 문제로 교회가 아예 둘로 쪼 개졌습니다. 근 20 년간 담임목사가 평온하게 목회를 잘해 온 듯 보였는데 어느 날 교회 장부상에서 하자가 발견된 것입니다. 결국은 거액의 공금 횡령으로 밝혀졌고, 이에 배신감을 느끼고 실망한 일부 장로와 권사들이 분가를 결정하였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대부분의 비리 목회자들은 그 어떤 목회 부정을 저질러도 결코 스 스로 쉽게 물러나는 법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경우이든 자신들을 주종하는 맹신 도들을 동원하여 끝까지 이권을 삼키고 심지어 교회가 절단 나는 한이 있더라도 기필 코 자기 몫을 챙깁니다.

하여튼 필자는 현재 한국의 많은 중대형 교회들이 초대형 폭탄을 하나씩 품고 있다고 보는데, 그것이 바로 교회의 '재정 장부'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이들 장부를 자세히 공개하면 감옥으로 직행해야 할 분들이 제법 많을 것입니다. 상당수의 교회들이 목회자의 비성경적 권위를 핑계로 하여, 재정 관리에 있어 불의한 편법을 용인하고 비리를 관습처럼 묵인하여 왔습니다. 그리고 그런 풍토는 진리보다는 재물에 관심이 있은 교회 내의 교권주의자들에게 아주 수익성 좋은 영업장소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도대체 진리가 무엇이고 종교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언제 한번제자들에게 너희들은 장로교니 감리교니 또는 침례교니 하는 신성한 조직체들을 만들고, 돈을 열심히 바쳐 건물을 크게 짓고, 그리고 소위 '성직자'라는 자들을 세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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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구약의 제사장처럼 모시라고 했던가요. 초대교회에는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이 없었습니다. 그런 용어조차 없었습니다. 그저 모두 주 안에서 형제요 자매였습니다. 단지 사역에 따른 직분의 구별만이 있었을 뿐입니다. 성직자를 별도로 대우하고 구별한 것은 중세교회의 교권주의적인 작품입니다. 성직자들이 신도들을 우민화하고 그들 위에 앉아 특권을 누리고 재물을 취하는 것은 이방 종교들의 모습이 아닙니까.

기독교 진리의 십자가 정신은 나누고, 주고, 그리고 섬기는 것이거늘, 다 똑같이 허탄 한 인생들이 그 무슨 어줍지 않은 성직자 행세를 하며 신도들 위에 특권을 주장하고 군림하려 한답니까. 무슨 근거로 장로나 집사 그리고 교사 등 교회의 많은 직분자들 중에 유독 목사만이 유일하게 성직자나 당연직 유급 사역자가 되어 특별한 신분이 되어야 할까요. 초기 교회에 그런 유급 사역자가 얼마나 있었던가요. 사도들조차 자비량 사역을 했는데 오늘날 목사가 사도보다 더 큰 사역을 하고 있습니까. 또한 한글 성경에 단 한 번 간단하게 언급된 '목사'라는 직분이 과연 현행 목사직과 정말 글자 그대로 동일한 직분인가요. 턱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개혁 교회는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필자는 무교회주의나 무직분주의나 또는 무급 사역제를 주장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개혁 교회는 교회무오설이나 교황무오설처럼 어리석은 중세적 아집과 위선을 버리고, 잘못을 고치는 데에 인색해서는 안 된다는 것 입니다. 성도들은 유형 교회가 잘못할 수 있다는 그 오류의 가능성과 한계를 겸허히 인정하고 앞서간 개혁자들처럼 공교회 내의 거짓된 세력과 악한 유혹에 대하여 단호히 대처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필습니다. 한국 개혁 교회의 좋은 모델로서 존중을 받던 교회가 근자에 담임목사 한

자는 최근 '사랑의교회'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사태들을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

명 바뀐 이후로 거의 만신창이 되고 있는 것을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일부 교 인들은 담임목사를 지지하는 측의 집요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현재 매주 금요일 저녁 교회 마당에 모여 바른 회복을 위한 기도 모임을 갖고 있습니다.

그들의 요구는 지극히 상식적인 것입니다. 교회가 진정 교회 되게 하자는 것입니다. 그중에 한 가지만 예를 들자면, 교회 장부를 공개하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아니 이 게 뭐 그리 어렵다고 숨기고 감추고 까다롭게 난리입니까. 교회 공금을 가지고 도대체 무슨 일을 하고 있기에 거룩한 공교회의 장부를 극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사기업의 비자금처럼 관리해야 하는지요. 교회가 동네 구멍가게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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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에도 담임목사의 학력, 건축 추진 과정, 해외 투자, 공금 유용, 그리고 유부녀와 의 사생활 문제 등 여러 의혹들이 자꾸 거론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대답할 말이 궁 색하면 이단이니 신천지이니 그 씨도 안 먹히는 모략과 핑계를 대지 말고 정말 제대로 된 해명을 좀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자신의 잘못을 진심으로 회개하고 고치라는 성도 들을 먼저 만나 진지하게 대화하실 용의는 없는 것인지요.

필자는 작년에 과연 정삼지 목회의 끝은 무엇일까 그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이 번에는 초대형 교회 건축과 논문 표절 사건으로 한국교회에 이미 큰 충격을 준 오정현 목회의 끝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또다시 드는군요. 하여튼 앞으로 사랑의교회 회복 과정을 지켜보면 비록 예언의 은사가 전혀 없는 성도라고 할지라도 한국교회의 현실과 미래를 적나라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스스로 성직자라고 주장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입술에 꿀을 바르고 천사의 말을 지금하지만, 실제는 독사의 혀처럼 허다한 영혼들을 죽이고 있습니다. 이런 슬픈 일이 구약시대부터 시작하여 말라기 시대, 예수님 시대, 중세 시대, 그리고 현대에 이르기까 지 계속 반복되고 있습니다. 양들은 목이 말라 죽어 가며 생수를 찾고 있는데, 어떤 목사들은 보물찾기처럼 교회 장부 속에 돈을 은익하고 달콤한 음료수만 퍼 먹이고 있 습니다. 그 결과 영적 당뇨병으로 인해 양들이 광야에서 속절없이 쓰러지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직분자들의 부패와 교회의 타락은 언제나 돈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돈이 맘 몬이 되고 돈을 숭배한 결과 이제는 한국 '개신교'가 '개악교'가 된 지경에 이르렀습 니다. "주교들은 자신의 양떼들을 살펴야 하며 성직자를 떠받치는 성직 문화는 종식돼 야 합니다. 성직자들을 높이고 존귀하게 받드는 가톨릭 평신도들은 범죄 공모자들입니 다." 가톨릭 지도자인 프란체스코 교황의 용기 있는 발언입니다.

중세 교회를 바르게 개혁하자고 뛰쳐나온 개신교가 스스로 개혁에 힘쓴 현대 가톨릭보 다 더 크게 부패하고, 국민들의 따뜻한 지지를 받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교회 장부를 숨기는 것은 교회를 노략질하는 행위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 라(마 7:15)."

2013 년 8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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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 교회'와 종교 상인들 주류 교회의 변절 '유사 교회(Pseudo Church)'란 겉모양은 보편적인 교회의 모습인데 그 내용에 있어서 '교회의 본질'을 크게 벗어난 교회를 의미합니다. 대부분의 경우 교회의 머리가 그리 스도라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특정 직분자들이 예수의 이름을 팔아 신도들을 모으고 이들을 우민화하거나 기복화하여 교회를 사유화한 경우를 말합니다. 이처럼 종교라는 신성한 이미지를 이용하여 성직자란 허울을 쓰고 자신 어느의 시대이건 배를 채우는 사람들이 항상 있었습니다. 우선은 흔히 말하는 이단이나 사이비 교회가 일차적으로 이에 해당됩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소위 정통이라고 하는 교단에 소속된 일부 교회들도 이런 사악한 대열에 점차 합류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유사 교회 역시 잘 알려진 대형 교단에 속해 있을 수 있고, 번듯한 교회당이 있고, 목사와 장로가 있고, 당회와 제직회 등 그 직분과 조직에 있어 외형상 흠을 잡을 수 없는 정상적인 모습을 갖추고 있습니다. 적어도 겉으로는 있을 것이 다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일반인들은 진짜 교회와 가짜 교회를 구분하기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유사 교회일수록 더욱 정통인 양 위장하기 때문에 보통의 교회들보다 더 겉치장에 열 을 올립니다. 그래서 선교나 사회봉사 그리고 구제 등에도 좋은 모습을 보이려고 더욱 애씁니다.

교회론 왜곡 담임목사의 설교도 유창합니다. 그리고 그 상당 부분은 나름 성경적이고 옳은 당연히 내용입니다. 문제는 결정적인 부분에 있어서 진실을 숨기거나 왜곡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단이 아닌 경우라면 그래도 비교적 구원론은 잘 가르칩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해야 천국 백성이 된다고 가르칩니다. 일단 구원론을 확실히 해야 종교 상인들이 성직자 행세를 하며 신도들을 휘어잡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성경 공부나 제자 훈련도 열심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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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니다. '종교라는 틀' 속에 신도들을 잘 가둘수록 자신들의 힘과 이익 이 확대됨을 잘 알고 있습니다.

면에 유사 교회가 가장 엉터리로 가르치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교회론'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자신들의 '세속적 이권'이 크게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암묵적으로 직분을 수직화하고 계급화합니다. 즉 '성직자'와 '평신도'라는 차별적 구분입니다. 자신들은 구약 제사장 같은 성직자이고 나머지 교인들은 모두 이들의 지시에 순종해야 하는 평신도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론을 왜곡하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일 단 교회를 권위주의적인 수직 구조로 체계화한 후 거기에서 사익을 최대로 취하기 위 함입니다.

그러나 이런 이분법은 감히 예수님의 제자들조차 시도하지 않은 매우 반기독교적인 작 태입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처럼 모든 신자들은 다 '왕 같은 제사장'의 대등한 신분입 니다. 그 직분이 목사이든 장로이든 집사이든 또는 교회학교 교사이든 그것은 단지 사 역의 구분을 의미할 뿐입니다. 따라서 어느 목사라도 자신이 다른 교인들보다 특별히 우월하거나 높은 직분처럼 처신한다면, 그는 이미 사이비의 문지방을 넘고 있다고 보 셔도 무방합니다.

교회의 세력화, 권력화, 그리고 사유화가 종교 상인들의 궁극적인 목표임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성전 건축'이라는 기만적 명분으로 신도들에게 가시적인 '건물 신 앙'을 부추깁니다. 일단 무리해서라도 교회당을 크게 지으면 신도가 늘고 교세가 크게 확장되는 것이 일반적인 추세이기 때문입니다. 목사 개인의 야망과 탐심을 '성전 건축 '이라는 미명하에 숨기고 아주 당당히 강력하게 추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많은 유사 교회들은 이런 수법으로 세계 교회사에 보기 드문 외적 성장을 단기간에 이루어 냈습 니다.

거짓 목사와 우민화한 신도 이처럼 유사 교회가 증식될 수 있는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요. 다른 요인들도 그런데 있겠으나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고 봅니다. 첫째는 많은 신도가 세속적 복을 갈망하며 마치 미신이나 무당을 의지하듯 교회당을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를 진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의지하고 믿을 만한 종교로 보는 것이지요. 그 래서 많은 경우 스스로 땀 흘려 일해서 보답을 받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덤으로 종교적인 힘에 기대어 세상에서 좀 더 부요하고 평탄하게 살기를 기원합니다. 그 동기 가 전통적인 원시 무속 신앙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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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는 복음을 크게 오해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목숨을 걸고 전해 준 복음은 그런 수준의 것이 결코 아니지요. '예수님을 믿으면 잘 먹고 잘산다'는 그런 어린애 사탕발림 같은 유치한 보장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 역시 대부 분 가난하게 고생하며 살다가 순교를 했습니다.

둘째 원인은 바로 이런 기복적 욕구를 악용하는 종교 상인들에게 있습니다. 이들은 목 사 가운을 입고 성경을 입에 달고 설교하고 있지만 실상은 바리새인들보다 더 가증한 사람들입니다. 진실한 목회자는 성경 한 구절이라도 더 잘 지키기 위해 모든 수고와 희생을 감수합니다. 때로는 생명까지 바칩니다. 반면에 이 종교 상인들은 입에 가시가 돋을 정도로 늘 성경을 노래하지만 실제로는 결코 성경대로 살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십자가의 도'를 진실하게 따르지 않는 자들입니다.

결국 유사 교회의 두 축은 '거짓 목사'와 '우민화한 신도'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즉 가르치는 자나 배우는 자 모두가 함께 합심하여 예수님과는 상관없는 엉뚱한 종교 놀 음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 갈수록 가관이 됩니다. 일단 이 둘이 적당히 조합하 게 되면 저절로 유사 교회로 변질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교회에서는 필연적 으로 경건을 가장한 종교적 압제와 착취가 은밀하게 작동하게 됩니다.

종교 상인들은 십일조와 수십 종의 헌금을 강요하여 부를 축적하고 나중에 갖은 명분 을 만들어 결국 이 돈을 자신들의 주머니에 채웁니다. 겉으로는 성전 건축과 전도나 선교와 구제를 부르짖지만 이는 신도들의 신앙심을 자극하여 헌금을 더 짜내기 위한 기만적 전술일 뿐입니다.

유사 교회를 판별하려면 유사 교회가 아무리 진짜 교회처럼 위장하고 연기해도 이를 판별하는 방법이 그런데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종교 상인들의 본래 목적을 조금 생각해 보면 그 실마리가 보입니다. 이들은 기독교 진리를 '종교화'하여 신도들을 종교라는 초법적 울타리에 가 두고 이를 이용하여 돈을 갈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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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많은 경우 '헌금을 어떻게 걷고 또한 어떻게 쓰는가' 하는 것만 잘 관찰해도 유사 교회 여부를 어렵지 않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진짜 목사인지 짝퉁 목사 인지 알 수 있습니다.

어떤 목회자가 아무리 설교를 잘하고, 은사가 뛰어나고, 병을 잘 고치고, 선교를 잘하 고, 그리고 교회를 크게 성장시키더라도 결단코 그것만으로 그를 섣불리 판단하지 마 시기 바랍니다. 그 정도는 뛰어난 종교 상인들의 기본적인 필수 스펙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사항은 그 목사가 정말 제자 된 삶을 실천하고 십자가의 길을 따르고 있 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 점은 사실 종교 상인들 스스로도 매우 고민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그들도 자신들이 호의호식하며 사는 것이 떳떳하지 못함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겨우 둘러대는 궁색한 변명이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잘사는 것처럼 말하거나, 아니면 재산을 가족 이나 친인척 명의로 부지런히 숨깁니다.

하여튼 이런 불순한 의도로 교회 재정을 공개 안 하거나 교회 장부를 숨기는 교회가 있다면 유사 교회로의 가능성을 우선적으로 의심하셔도 좋을 것입니다. 돈에 깨끗하지 못한 목회자치고 바른 목회자를 본 기억이 없으니까요. 따라서 돈주머니를 회개하지 않는 목회자는 절대로 믿지 마십시오. 변절한 목회자들 대부분의 업보는 '돈'이 아니 면 '이성 문제'입니다.

성전을 헐라 교회는 진리를 떠난 교회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가 그러했습니다. 율법의 유사정신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외면한 채, 백성들에게 율법의 짐만을 무자비하 게 강요하던 교회였습니다. 오죽하면 예수님께서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자'라 고 하셨을까요.

그런데 지금 한국교회는 어떻습니까. 교회가 가난한 이들을 제대로 돕던가요. 교회가 압제받는 사람들과 함께 고난을 받습니까. 교회가 공의를 실천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교회가 도리어 사회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권력자와 부자의 편에 서서 함께 성찬을 나 누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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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교회는 주류 교회가 통째로 부패하여 유사 교회의 수준에 이른 경우입니다. 극히 일부의 교회나 사제가 예외일 수는 있겠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그 견고한 부패 구조 속에서 진리에 도달한 이들이 과연 몇이나 있었을까요. 그런데 그런 어두운 시대가 앞 으로 다시는 없을 것이라고 누가 장담하겠습니까.

지금은 영적으로 어려운 시기입니다. 성도들이 각성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다시 중세 시대처럼 유사 교회가 주류가 되어 그들이 노회나 연회의 수장이 되고, 기독교 연합 단체의 요직을 차지하고, 또한 그들이 '대통령 조찬 기도회'를 주관하는 불행한 시대가 올 수 있습니다. 아니 우리는 이미 그런 전조를 충분히 맛보고 있습니다. 최근 기독교대한감리회 감독회장 선거를 보십시오. 성직을 돈으로 사고파는 일이 중세 시대 만의 전유물이 아님을 아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 교단은 그래도 좀 낫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마 지각이 있는 분이라면 그것도 결국 도토리 키 재기라는 것을 본인도 잘 아실 것입니다. 아직도 주변에 신실하신 목회자들이 많고 또한 제자도를 따르려는 바른 교회가 분명히 많이 있습니다만, 그것이 갈수록 천연기념물 보기만큼이나 어려워지고 있는 것을 인정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그토록 자랑하던 "이 성전을 헐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율법 의 정신은 따르지 않고 율법 조항만을 문자적으로 따르는 '율법 신앙'과 '건물 신앙' 에 빠져 잘못된 길을 가고 있던 유대 교회에 대한 선전포고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서 다시 일으키시려던 성전은 결코 요즘 흔히 보는 그런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따위 가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지체인 교인들이 모인 신약 교회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한국교회도 이제는 그릇된 성전 신앙을 헐어야 합니다. 왜곡된 교회론을 허물고 바른 교회론을 정립해야 합니다.

성도 중심 교회 직분이 교회 운영을 과도하게 주도하는 '목사 중심' 교회를 극복하고, 그리스도 특정의 지체인 모든 직분자들이 대등하게 동역하는 '성도 중심'의 바른 교회를 이루어야 합니다. 지역 교회들은 큰 교회당으로 위세 부리려 하지 말고 유대교적 의미의 건물 성전을 헐어야 합니다. 참된 성전은 부활하신 주님의 몸이며, 또한 그분의 지체가 된 성도들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성도들이 교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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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앞으로 이 땅에 다시는 유사 기독교, 유사 복음, 그리고 유사 기독교인이 없도 록 노력해야 합니다. 종교 상인이 독주하고 맹신도가 화답하는 교회는 참된 교회가 아 니라, 거짓과 짝퉁이 좌판을 깔고 설치는 유사 교회입니다.

어느 분의 지적처럼 "이스라엘은 웅장한 석조 성전보다 천막에서 더 신실했다. 이스라 엘은 몇 십 년씩 걸려서 건설한 거대한 예루살렘 석조 성전보다 광야의 보잘것없는 먼 지투성이 천막 앞에 엎드렸을 때 훨씬 더 하나님을 전심전력으로 섬기고 예배했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될 것입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교회가 있습니다. 진짜 교회가 있고, 이를 불법 복사한 유사 교회 가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출석하시는 교회는 과연 어떤 모습의 교회입니까?

"예수께서 성전 뜰 안으로 들어가 상인들을 쫓아내시며(눅 19:45)"

2013 년 10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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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유한 목사와 가난한 목수 귀족 목회가 말하지 않는 것 가난을 미화하거나 찬양하지 않습니다. 또한 부 자체를 죄악시하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그럼에도 성경을 통해 본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자세히 살펴 보면, '부가 축복'이라 거나 또는 '부를 추구하라'는 식의 내용은 전혀 없슴을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따르고자 하는 부자 청년에게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고 하셨습니다. 더구나 예수님 자신은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하실 정도로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이 정도면 거의 무소유로 사셨다고 보아야 하는데, 아무런 이유 없이 그렇게 고생하시며 사신 것은 아닙니다. 만일 성도에게 물질적인 복이 그리 중요하고 필수적인 것이라면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능력의 예수님께서 풍족하게 부자로 사셨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따른다고 서원한 목회자들 중에 상당수가 구약의 물질 적 축복을 강조하면서 정작 '예수님의 가난한 삶'만은 결코 따르지 않으려 하는 것을 보면 정말 이상한 일입니다.

십일조는 좋으나 십자가는 싫다 복잡한 문제 중심에는 바로 이런 일부 귀족 목회자들의 배도적이며 한국교회의 물욕적인 행실을 그냥 방치하거나 적당히 눈감아 주는 무분별한 관용이 있습니다. 도덕적으로 가장 엄격해야 할 직분자들에 대한 윤리 잣대가 썪은 옥수수 자루보다 더 허약하다는 것입니다. 그 덕분에 이 시대에 누구보다도 모범적으로 예수님의 삶을 실천해야 할 직분의 사람들이 신도들의 눈을 속이며 은밀하게 부를 채우고 있습니다.

목회의 길은 주님 십자가의 도를 따르는 길이 분명하건만 이들은 그런 고난을 기피합니다. 천국도 좋고, 명예도 좋고, 그리고 돈도 좋지만, 고난만은 싫다는 것입니다. 돈이 되는 십일조는 좋은 데, 고생스러운 십자가는 싫다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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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렇게 돈이 좋으면 사업을 할 것이지 왜 교회에 와서 순진한 신도들을 속일까 요. 결국 이들이 목사가 된 동기가 매우 불순했거나, 아니면 중도에 가롯 유다처럼 크 게 변절했다는 것입니다. 목사의 사역이 한 주일 내내 매우 힘든 것은 필자도 잘 인지하고 있습니다. 반 진실한 면에 성직을 이용하여 적당히 위선을 부리고 요령을 피운다면 짝퉁 목사처럼 편하고 탄탄한 직업이 세상에 또 얼마나 더 있을까요. 귀찮은 잡일은 부목사나 다른 교역자들 에게 대충 떠맡기고, 평일에는 성경 연구하는 척 유유자적 게으름 피우다가, 설교는 여기저기에서 짜깁기 표절해서 합성하고, 그 다음은 주일날 목소리 깔고 적당히 무게를 잡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더구나 요즘은 공예배 시간에 하는 기도마저 미리 적어서 읽는 목회자도 있다고 하니 참 목사하기 편한 세상입니다. 교인들이 사전에 작성된 기도문을 읽으며 기도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또한 오히려 좋은 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 연구와 기도를 생활화하고 설교를 전문으로 하는 유급 목회자가 그리 하는 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자질 부족'이라고 볼 수 밖에 없습니다. 만일 직업 가수가 무대에서 가사를 들고 노래한다면 사람들이 뭐라고 할까요. 아마 그 무대가 고별 무대가 될 지도 모릅니다. 하여튼 어떤 목사님들은 왜 이리도 소통이 안 되는지 정말 귀를 막고 사는 사람들처럼 보입니다.

혹시 이런 지적들이 지나친 혹평으로 들리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목회자들의 사역 이 힘들다고 말이 많지만, 사실 세상에 만만하고 쉬운 직업이 어디 있습니까. 대부분 의 교인들은 물론, 비정규직 근로자들이나 시장 구석의 노점상 할머니들도 웬만한 목 사들보다는 더욱 진하고 고단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에 비해 주변에 있는 중대형 교회 담임목사들의 사는 모양을 한번 보십시요. 그들에 게서 거룩한 직분자다운 검소함과 경건을 느끼십니까. 모두가 그렇지는 않지만 억 대의 연봉, 고가의 부동산, 고급차, 자녀 해외 유학, 집회를 핑계로 한 잦은 해외 여행, 과도한 유흥비, 그리고 사치한 소비 생활 등은 이제 아주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 아닌지요.

최근 언론에 보도된 일부 목사들과 그 가족들의 기만적인 호화 생활을 구태여 거론하 지 않더라도, 이런 현실은 목회자들도 스스로 인정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미자 립 교회와 중대형 교회 목회자들 사이의 빈부 차이가 매우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습니 다. 작은 교회의 많은 목회자들은 가족들 생계마저 염려할 정도인데, 평생 목회만 했 다는 다른 목회자는 수 십억 원의 재산을 지니고 있다면 이것이 정상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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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바른 목회자라면 고액의 연봉을 받으면 안 되지요. 목사님들이 걸핏하면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하신 성경을 인용하여 헌금 독려를

하시며 성도들의 주머니는 수시로 털면서, 막상 자신들의 주머니에는 왜 그리 재물을 채우려 애쓰십니까.

물론 가난하게 산다고 해서 그 자체가 '의'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부유하게 사는 것은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현실적으로 정당한 방법으로 부자가 되는 것이 그리 녹녹치 않고, 설사 그렇게 부를 이루었다고 해도 그 재물의 주인이 자신이 아니라는 ' 청지기 정신'을 잊어서는 안 되지요.

많은 목사님들이 십일조를 강조할 때 자주 쓰는 말처럼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귀족 목사님들은 유독 자기 재산만은 예외로 하고 있습니다. 이 분들이 교회 공금이 아닌 자신의 사재를 털어 전심으로 이웃을 돕는 것을 자주 보십니까. 만일 그랬다면 결코 현재처럼 부유하게 살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들 대부 분은 언제나 교회 돈이나 성도들의 것으로 생색을 낼 뿐입니다.

성직자가 부유하면 불행한 사회 진정으로 교인들과 이웃을 사랑하며 돕는다면 어떻게 돈을 많이 모을 어느틈이목회자가 있겠습니까? 자신의 친인척이나 교회 주변에 도와주어야 할 가난한 사람들이 그렇게도 없을까요. 이런 면에서 필자는 한 가지 사실을 단언할 수 있습니다. 부유한 목 사는 십중팔구 사이비이거나 목회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교회를 섬기는 목사가 누릴 것 다 누리고 즐길 것 다 즐긴다면 그게 종의 모습입니까. 만일 그런 것이 목회라면 개나 소나 다 할 수 있습니다. 목사직이 귀하고 소중한 이유 는 아무나 쉽게 할 수 없는 '종의 직분'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이 세상의 좋은 것을 다 누리며 사는 것을 보셨습니까. 아니지요. 성경의 기록대로 그들은 '만물의 찌꺼기' 같이 살았습니다.

중세 교회 형편이 요즘 일부 중대형 교회와 아주 비슷했습니다. 교인들 대부분은 가난 했는데 소위 성직자라는 사람들과 교회는 돈이 넘쳤습니다. 합동신학원 초대 원장이셨던 박윤선 목사님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탄식하셨습니다. "감독들의 사택은 궁전과 같이 우뚝 솟아 있는데 동리에 가득 찬 것은 학고방 집들이었습니다. 이런 것이 중세 시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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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입니다. 그들은 평민들이요 교인들이었습니다. 교회가 이렇게 부패해서 주의 일하는 거룩한 자들이라고 성직자라 불리며 높은 자리에 앉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교회가 그런 중세 교회를 비웃을 자격이 있을까요. 많은 목회자들이 성경을 크게 왜곡하고 있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이 부의 문제입니다. 특히 교회 직분 을 사실상 계급화하여 부당한 교권과 금권의 단맛에 빠져 있는 귀족 목사님들은 이런 왜곡에 있어서 아주 프로 선수입니다. '한국교회는 자정 능력을 잃었다'는 말이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오고 있습니 그다.덕분에 전 세계에 지금 한국교회처럼 헌금 종류가 많고, 공금 횡령이 많고, 뇌물 수수가 많고, 무더기 세습이 많고, 성추행이 많고, 그리고 목회자가 많은 교회가 있습니까. 영국 교회 전체 목사의 수보다 훨씬 더 많은 목회자들이 한국에서는 해마다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소위 성직자라는 사람들이 급증하는 사회는 매우 불행한 사회입니다. 거룩한 성직이 타락하여 먹고 살만한 ‘인기 직업’이 된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비슷한 사례로 아시아 어느 나라에서는 한 때 장성한 남자의 반 이상이 라마교 승려인 황당한 시대도 있었다고 합니다.

물론 교회가 부패하는 책임은 모든 신자들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원인은 교회 의 지도자 위치에 있는 목회자들 때문입니다. 중세 시대처럼 자격 없는 사람들이 지도 자가 되어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지도자에서 배도자로 변절하여 예수님의 삶을 따르지 않고 십자가의 도를 대적하는데, 교회가 제대로 될 리가 없습니 다.

생활고로 힘든 교인들의 주머니를 짜서 걷은 헌금으로 목사가 부를 누린다면 누가 그런 목사를 존중하겠습니까. 수 십년 간 목회해서 대형 교회를 만들어 놓고 결국은 거액의 교회 돈을 횡령하거나 자식에게 교회를 세습한다면 누가 그를 거룩한 직분자로 보겠습니까.

하여튼 목사로서 고액 연봉을 받거나 자기 재산을 숨기는 자는 무조건 경계하십시요. 또한 목사만이 안수 기도할 수 있다거나 목사만이 축복권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이비 뚜쟁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목사는 하나님의 대리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각별히 조심하십시요. 예수님 외에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신 대리인이란 절대로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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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 목회가 말하지 않는 것 귀족 목사들이 결코 말하지 않거나 실천하지 않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가난 한국교회 한 삶'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그 많은 신분 중에서 하필이면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오셨는지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이왕이면 요즘 귀족 목사들처럼 편하게 살지 않으시고 도리어 가난하고 불편하게 사셨는 지를 결코 가르치지 않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부가 복음인가요. 돈이 복음 입니까. 출세가 복음입니까. 아니면 무병장수가 복음입니까.

예수님께서 언제 따르는 무리들에게 부지런히 돈을 바치라고 한 적이 있던가요. 예수 님이 신도들의 헌금으로 거액의 연봉을 받으셨습니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급여를 나누어 주시던가요. 예수님이 백성들에게 큰 교회당 건물을 많이 세우라고 하셨던가요. 또는 사역을 핑계로 교회 돈을 가지고 해외 여행 자주하며 흥청망청 돌아 다니라고 했나요. 아니면 부지런히 외부 집회에 다니며 본봉 외에 추가로 강사비를 듬뿍 챙겨 먹으라고 하셨던가요. 그리고 대를 이어 그 철밥통 담임목사직을 자식에게 물려주라고 하셨나요.

금 우리는 무슨 짓을 하고 있습니까. 뱃살이 부풀 정도로 '부유한 목사'들이 정색을 하고 자신은 '가난한 목수'의 제자라고 합니다. 너무 웃기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실제로는 가난한 이들을 거의 돌보지 않는 이 철면피한 현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게다가 어떤 정신 나간 교인 중에는 이런 부자 목사에 대해 "우리 목사님은 큰 인물이 되실 주의 종이니 더욱 떠 받들어 모셔야 된다"고 하니 참으로 통탄할 노릇입니다. 아 니 종이면 다 그냥 종이지, 큰 종님이 따로 계십니까. 그리고 저게 정말 '종의 모습' 입니까. 세상에 어느 간 큰 종놈이 감히 주인의 자녀들인 교인들 앞에서 저토록 사치와 교만을 떨며 삽니까.

성경 어디에서 요즘처럼 방자하고 배부른 직분자들을 보셨는지요. 거룩한 공교회를 통 채로 맹신 집단으로 만드는 사람들이 도대체 누구입니까. 예수님은 자신을 비워 '종의 형체'로 오셨는데 스스로 그 분의 제자라는 자들이 교인들의 상전 노릇을 하며 너무나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저들은 목회는 커녕 교인 자격도 없는 사람들이 아닙니 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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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거룩한 교회를 이 모양으로 만들고 있습니까. 만일 귀족 목사들의 주장처럼 정말 '헌금이 진정으로 복 받는 비결'이라면 아마 예수님께서는 헌금을 많이 하라고

여러 번 강조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예수님이 그런 비슷한 말씀이라도 하신 적이 있습니까. 그리고 사도들이 자원하는 연보를 강조한 것은 어려운 형제들을 구제하기 위함이었지 결코 직분자들의 치부를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일부 목사들은 '마음이 가난한 자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다'고 하신 예수 님의 중요한 가르침을 크게 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엉뚱하게 '십일조나 헌금을 많이 바치면 복이 있다'고 헛소리를 합니다. 기독교인으로서 '공의'를 위해 애쓰는 모 습은 강아지 턱수염 만큼이나 보기 힘들고, 오로지 돈에만 눈독을 들입니다.

가난한 목수의 아들

재 한국교회가 당면한 시급한 문제 중 하나는 유능한 목사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 입술만 유능하고 변절한 목사'가 너무 많은 데에 있습니다. 교회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건물만 크고 변질된 교회'가 너무 많습니다. 귀족 목사들은 작당하여 배운 알량한 '목회 기술'을 펼치며 부와 성공을 미끼로 많은 신도들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들은 이천년 전 이 땅에 섬기러 오셨던 그 가난한 목수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 습니다. 그저 그 분의 이름을 팔아 장사할 뿐입니다. 물론 가난한 교인들에 대해서도 그다지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오직 돈이 나올 만한 부유한 교인들만 크게 보입니다.

이들은 경건과 위선을 동일시하는 영적 사기꾼들입니다. 이런 종교 상인들이 무서운 이유는 적어도 겉 보기에는 진짜보다 더 진짜인 척 위선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그 리고 그런 위장술에 일반 신도들이 쉽게 넘어가는 것이 큰 비극입니다. 중대형 교회에 이런 사기꾼들이 적지 않지만 그 교회 교인들은 오히려 그런 목사를 천사처럼 생각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실제 삶에서는 전혀 경건하지 않은 군상들이 강단에 서는 아주 거룩하고 고상한 척 생쇼를 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욕을 먹고 있는 이유는 사실 순수한 목회자들 때문이 결코 아닙니다. 바로 이런 잡상인들 때문입니다. 학력을 속이고, 논문을 속이고, 경력을 속이고, 재산을 속이고, 추행을 속이고, 사역을 속이고, 인격마저 속이고, 그리고 아예 인생 전체가 사기인 자들이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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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종이란 자들이 상전이 되고, 성직을 맡은 자들이 부자가 되는 교회는 슬픈 교 회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오신 사실이 시사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은혜 시대를 사는 우리 신자들에게는 사회적 신분이나 세속적 성취 따위가 성도의 삶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지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처럼 억울한 종이 되든, 무고한 죄수가 되든, 또는 권세있는 총리가 되든 세류와 풍파에 흔들리지 말고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성결을 지키며 겸손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목적을 위해 수단을 정당화하는 ’목적이 이끄는 삶’에 현혹되지 말고, 늘‘진리가 이끄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말씀드립니다. 정상적인 목회자 역시 사람이니 간혹 실수할 수 있습니다. 결론을 그래서 성도들은 언제든지 너그럽게 용서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관용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이런 선의를 오용해서 그 부실함의 정도가 너무 지나치면 곤란합니다.

지금 성도들이 목사님들에게 바라는 것은 예수님처럼 무소유로 살거나 또는 무슨 수도 자같이 고결하게 살아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공금 횡령, 뇌물, 사치, 성추행, 그리고 교회 세습처럼 남 부끄러운 사고나 치지 마시고 그저 보편적으로 성실한 '보통 교인' 수준 만큼이라도 되어 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샬롬!

"참된 경건은 열심히 목욕을 하는 것입니까? 불결한 음식을 먹지 않는 것입니까? 술을 마시지 않는 것입니까? 8 자 걸음을 걸으면 되는 것입니까? 상스러운 말을 하지 않는 것입니까? 예배에 열심히 참석하는 것입니까? 목소리를 저음으로 깔고 느릿느릿 거룩하게 말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참된 경건은 자신의 잘못을 정당화하는 전통을 만들지 않는 것입니다. 잘못을 언제든지 시인하고 고치려는 열린 마음 자세입니다. 인간의 전통보다 하나님의 법도를 높이는 겸손한 마음 자세입니다. 내 뜻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순종하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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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나단 선지자의 경고를 듣고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다윗의 마음입니다. 이것은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하고 고난의 잔을 마신 예수님 의 마음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간의 전통을 과감히 개혁한 칼빈과 루터의 용기입니다.

참된 경건은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이기는 능력입니다. 그것은 구습을 타파하는 용기입니다. 그것은 돈을 사랑하지 않는 능력입니다. 그것은 성장이데올로기나 출세욕에 물들지 않는 순수함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참으로 사모하는 열정입니다. 그것은 무시당하는 천민들과 운명을 같이하기 위해 왕궁을 떠난 모세의 용기입니다. 그것은 죄인들과 과감히 식탁교제를 시도한 예수님과 제자들의 사랑의 마음입니다.

이러한 용기와 사랑이 없는 경건은 거짓 경건이요, 그것은 경건의 모양에 불과합니다. 혹시 우리가 지금 바리새적인 외식가운데 빠져 있지는 않습니까? 경건을 위장하고 무언가 이기적인 일을 하고 있지는 않는가요? 주께서 우리에게 참된 경건의 영과 회개하고 애통하는 마음을 부어주시기를 간절히 축 원합니다."

- 신현우 <예수님의 종교개혁>에서

2013 년 10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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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후기

금 이 순간에도 예수님의 제자된 삶을 실천하고 바른 교회를 이루기 위해 도처에서 수많은 사역자들이 겸허히 수고하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제 2 의 종교개혁이 필요하다는 안타까운 말이 여기저기에서 터져나오고 있습니다. 이는 한국교회가 가시적인 외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그 선지적 사명을 감당하는 데에 있어 큰 실망을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절박한 시기일수록 우리는 과연 성숙한 신자의 삶과 교회의 본질이 무엇이지 더욱 진지한 성찰이 필요함을 느낍니다. 여기 수록된 글들은 필자가 지난 몇 년 동안 <뉴스앤조이>와 <당당뉴스>에 기고했던 칼럼들을 약간의 수정과 재편집을 하여 정리한 것입니다. 비록 많이 거칠고 미흡한 글이지만, 교회의 본질에 대해 함께 생각하고 고심하는 과정에서 우리들이 섬기고 있는 교회가 지금보다는 더욱 아름답고 건강한 교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성도님들 모두 항상 주님 안에서 강건하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샬롬!

2013 년 10 월

신성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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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 받는 목사 왕국> 지은이: 신성남 (canavillage@yahoo.com) 발행일: 2013 년 10 월 28 일 개정판: 2017 년 8 월 26 일 본 문서에 실린 내용의 무단 변경을 금합니다. Copyright © 2013 바른사역연구소 All rights Reserved.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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