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주석 강해 성 경: [롬1:1] 예수 그리스도의 종. - 헬라 원어에서 “종”이란 말은 둘로스인데, 바울 당시, 로마 세계에 있어서 종이라고 하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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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0. 21.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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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주석 강해
 
성 경: [1:1]
 
예수 그리스도의 종. - 헬라 원어에서 이란 말은 둘로스인데, 바울 당시, 로마 세계에 있어서 종이라고 하면 그 주인에게 일개의 가구(家具)와 같았던 것이다. 예컨대 어떤 역사가(歷史家)의 증거한 바와 같이, 가구 가운데 세 종류가 있었다. 그 하나는 말할 줄 모르는 것(낫이나 호미 같은 것)이요, 또 하나는 반벙어리(개와 같은 것)이요, 또 다른 하나는 말하는 노예(奴隸)라는 것이다. 바울은 자기를 가리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이 책의 첫 머리에 있어서 자기는 오직 예수님을 절대 복종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복종은 은혜로 되는 것이다. ,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무서운 죽음의 세력에서 그의 피로 바울을 구원하셔서 그의 것으로 삼으신 은혜로 되어진 것이다.
사도. - 이것은 헬라 원어로 클레로스라고 한다. 하나님의 모든 참된 종들이 이 클레로스의, 경험을 가졌던 것이다. 예컨데, 아브라함(12:1-3), 모세(3:10-12), 기타 모든 선지자들(6:8-10 ; 1:4-5), 모세(3:10-12). 바울은 특히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 이것을 받았다(9:3-5).
복음 - 이 말의 헬라 원어 앙겔리온좋은 소식을 의미 한다. 메시야를 보내셔서 그 백성을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 성취는 참으로 좋은 소식이다. 이 약속 성취의 방식은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사람의 형상(다윗의 자손)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셔서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그것이다.
택정함을 입었으니. - 이 말의 헬라 원어는 아포리메노스갈라 놓음이 되었다는 뜻이다(20:26). 이것은, 그의 나기 전에 사도로 거룩히 구별함이 된 것을 가리킨다(1:15). 이렇게 세움이 된 것은, 자기의 힘이나 혹은 자기의 뜻으로 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세움이 되어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종은, 교만할 수 없고, 하나님의 대리자니 만큼 자행 자지(字行自止)할 수 없고, 오직 보내신 자의 뜻을 성취하려고 노력할 뿐이며, 두려워 할 것도 없고 염려할 것도 없이 보내신 자의 권능을 의뢰할 것이며, 조심하여 그가 대리한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지 않도록 의롭게 살아야 한다.
 
성 경: [1:2]
 
자는 그것이 하나님께 속한 것음을 알려 준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미리 약속하신 것. - “약속하셨다는 말은, 허락하였다는 말과 달라서 인간 의 청구가 있기 전에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솔선하여 구원 주시기를 약속하심이다. 약속은 구약 성도들에게도 하셨던 것인 만큼, 그들도 위한 것이다. 그들은, 오실 메시야를 바라보는 믿음으로 구원함을 받았다. 이 약속이, 우리도 위한 것임은 물론이다(15:4). “미리 약속하셨다는 말씀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생각게 한다. , 하나님의 사랑이 그 택한 백성에게 대하여 어떻게 큼을 보여 준다. 하나님은 현재에 복을 주심 보다 미래에 더 많은 축복을 간직하여 주신다(31:19). 복음은, 아무런 예비나 계획한 바 없이 우연적으로 겨()와 같이 날아 왔다가 가라져 버릴 것이 아니고, 오래 전부터 하나님께서 예정하시고 약속해 오신 영원한 진리이다. 하나님께서 미리 말씀하셨다가 그대로 이루어 주심은 그것이 성취될 때에 우리로 하여금 그 약속자이신 하나님을 더욱 믿게 하려 하심이다(13:19).
 
성 경: [1:3]
 
육신. - 이것은 헬라 원어로 쌀크스니 보통으로는 이란 말 쏘마와 달라서 인간의 부패성(腐敗性), 혹은 순전히 이성(몸과 영혼)을 가리키는데, 예수님께 대하여 이 말이 사용될 때에는 부패성을 의미하지 않을 뿐더러(고후 5:21), 도덕적 연약성도 가리지 않고, 오직 자연적 연약성을 띤 인성을 가리킬 뿐이다. 4:15 ,16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헤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고 하였다.
성자(聖子)께서 육신이 되심은, 우리의 죄짐을 지시기 위하여 대신 욕을 보심이요, 우리와 같이 되심이다(2:17). 복음은 그리스도에게 관한 좋은 소식으로 두 가지 요소를 가진 것이니, , 인성(人性)과 신성(神性)이다. 성경은 그의 중보자격(仲保者格)을 말함에 있어서, 그의 인성을 역설(力說)하였다(딤전 2:5). 그 이유는, 그의 신성이 그의 인성을 통하여 우리에게 계시(啓示)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인격의 주체(主體)는 신성(神性)이다.
다윗의 혈통.- 사도는 여기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에게 관한 구약의 예언을 생각한 것이 분명하다. 구약에는,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후손으로 나시리라고 한 예언이 많다. 그 가운데 두 가지만 들면 이렇다. , 53:1-3에는,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라고 하였다. 이 예언과 같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줄기(왕손)면서도 왕궁에서 나시지 않고 베들레헴의 외양간 한지(마른 땅과 같이 적막한 곳)에 나셨다. 그리고 사 11:1에는,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라고 하였다. 이것은, 그루터기에서 싹이 나서 열매를 맺으리라는 말쓰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 포로된 후, 다윗의 왕통이 오랫동안 끊어지고 그루터기로 있었다. 거기서 다시 왕손(王孫) 예수님이 나셨다. 위의 가지란 말은 히브리 원어로 네체르, “결실이라는 말은 이프레이다. 네체르는 마태 복음에 있는 나사렛을 생각게 하고(2:23), 이프레는 베들레헴 곧 에브라다를 생각게 한다(2:5-6 ; 5:2). 이것은 왕손 예수님의 생장하신 곳이 나사렛(네체르)과 베들레헴(이프레)이 될 것을 예언한 것이다(4:2 ; 32:2 ; 34:1-24 ; 33:14-26 ; 22:42 ; 7:42 ; 13:22-23 ; 딤후 2:8).
 
성 경: [1:4]
 
성결의 영. - 이것은 헬라 원어 프뉴마 하기오쉬네스, “성령이란 말 프뉴마 하기온과 구별된다. “성결의 영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학계(學界)의 견해는 여러 가지가 있다. 예수님의 영혼을 가리킨다는 학설, 이 학설은 합당치 않다. 그 이유는 이 의미를 취한다면, 이 구절에 말한 예수님의 부활이 예수님의 영혼으로 말미암아 되었다는 의미가 되는데, 이것은 롬 8:11과 맞지 않는가.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가리킨다는 학설, 이 학설도 합당치 않으니, 그 이유는, 다음에 말한 제 5 학설이 정당하기 때문이다. 그저 성령, , “프뉴마 하기온과 같은 뜻으로 사용되었다는 학설, 그러나 프뉴마 하기오쉬네스란 말은 여기에 한 번만 사용되었다. 그런데 이것이 그 많은 다른 명칭과 같은 의미를 가졌다고 할 수 있을까? 창조 또는 개조의 능력 있는 신성(神性)을 가진 성령에 대한 칭호라고 하는 학설(H. N . Ridderbos). 프뉴마 하기 오쉬네스, 예수님이 받으시고 그와 함께 계시는 성령을 가리킨다. 이 견해가 정당하다(Greijdanus). 그리스도의 부활은 예수님 밖에서 새로 들어오시는 성령의 역사로 된 것이 아니요 이미 그에게 내재(內在)하시는 성령님의 활동 결과였다.
죽은 가운데 부활하여. - 이 말의 헬라 원어는 죽은 자들의 부활로서란 의미를 가진다. 이 말씀에 죽은 자들이라고 복수(複數)를 사용한 이유에 대하여, 어떤 학자들은 말하기를 여기 이 말이 나사로의 부활과 같은 부활도 포함시킨 것이라고 하나, 이것은 자연스럽지 않다. 여기 복수가 쓰인 이유는 예수님의 부활이 모든 신자들의 부활을 성립시키신 부활의 새 시대를 가리키기 때문이다(Nygren, H.N. Ridderbos).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 “하나님의 아들이란 성호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아들은 삼중 의미(三重意味)의 성호니,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적 하나님의 아들. 화육(化肉) 관계의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 세 가지는, 서로 나뉠 수 없는 관계를 가지는 것이다. 영원하신 아들이 아니고는 아버지 하나님을 계시(啓示)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실 메시야가 되실 수 없으며(1:18), 아버지 하나님을 계시하시는 메시야는 화육을 필요로 한다. 화육이 없이 어떻게 계시와 구속(救贖)의 메시야 사역을 행하실 수 있을까? “인정되셨다는 말은 헬라 원어로 호리스텐토스인데, 그 의미에 대하여 바르트(Barth)는 말하기를 인정함, 역사적 행동이 이니고 원역사적(原歷史的)행동이라고 하였다. 이 견해는 계시(啓示)의 역사적 의미를 거의 무시한데 가까운 위기 신학(危機神學)의 사상이다. 우리는 이와 반대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역사 그것은 계시를 유효하게 파악할 수 없으나, 하나님의 능력에게 복속된 그 역사는 그리할 수 있다고 한다(16:14). 인정되셨으니란 뜻은, 예수님께서 부활 이전에도 하나님의 아들이셨으나 부활이 후에야 인간의 인식에 완전히 인정되셨다는 뜻이라고도 하고, 이것은, 예수님께서 인간의 인식에서 인정된신 사실을 말함이 아니고, 부활하신 후 하나님 앞에서 영광(人性)을 취하신 후 없었던 영광)을 얻으신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는 뜻이라고 한다(2:36).
 
 
성 경: [1:5]
 
우리가. - 여기 사용된 인칭(人稱)이 복수(複數)로 된 이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학설들이 있다. 리츠만(Lietzmann)과 바이스(B. Weiss), 이것이 저작 권위(著作權威)의 복수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하나 옳은 것 같지 않고, 산데이(Sanday), 이것이 바울의 동역자들, 예컨대 바나바, 혹은 디모데와 같은 이들을 포함시켜 말한 복수라고 한다. 그러나 디모데나 바나바는 엄밀한 의미레서 사도가 아니었으니, 이 학설도 믿을 수 없다. 그러므로 데오도레 즈안(Zajn)의 말한 것과 같이, 이 복수가 모든 다른 사도들까지 의미하였다는 의견이 정당해 보인다(Greijdanus).
은혜와 사도의 직분. - “은혜란 말은 헬라 원어로 카리스인데 받을 만한 공덕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도움을 받는데 쓰이는 말이다. 멸망 받아 마땅한 죄인이 영생을 받은 것은 큰 은혜이다. 은혜는 사도직(使徒職)의 기초이다. 은혜 받은 일 없이 사도가 되지 못할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하셨다(10:20). , 사도들이, 그 사도직 실행에 나타난 권능을 보고 기뻐함보다 차라리 그들의 구원 받은 일에 대하여 기뻐할 만하다는 뜻이다. 사도직도 귀하지만, 영원히 멸망 받을 죄인이 구원의 은혜에 참여한 것이 더욱 귀하다. 혹설에, 여기 은혜는 멸망에서 영생으로 들어오게 하신 하나님의 기본 은총을 말함이 아니고, 사도의 직능적(職能的)은혜를 가리킨다고 한다.
그 이름을 위하여.- “그 이름”(예수님의 이름), 예수님에게 대한 계시(啓示)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사도의 일을 한다고 함은 그가 예수님의 이름을 전하는 자가 되었다는 뜻이다.
믿어 순종케 하나니. - “믿어 순종이란 말은, 신앙과 순종을 별립시켜서 말함이 아니고, 믿음이 곧 순종이라는 의미이다. 불신앙은 언제나 하나님에게 대한 반역이다. 믿음 곧 인간에게 무거운 짐이요 수고가 되나, 신앙 순종은 모든 무거운 짐을 그리스도에게로 옮겨 놓는 행동이니, 이는 고역이 아니라 도리어 안식(安息)이다.
 
 
성 경: [1:6]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 여기 그리스도의 것이란 말은, 택하심을 받은 성도를 가리킨다. 신자들이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속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관계이다(고전 3:23). 그리스도는 신자들을 자기의 보물, 곧 피 흘려 사신 보물로 사랑하신다. 이것을 아는 신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생각해야 된다. 자기를 그리스도의 큰 사랑의 대상인 줄 알아 절망하지 말고 언제나 자기 존재의 가치를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느껴야 됨. 모든 절망자와 자살자들은, 자기들의 중요성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으려는 자들이다. 자기는 그리스도의 것인 만큼 겸손해야 됨. 고전 4:6-7에 말하기를,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라고 하였다. 자기를,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하였다.
 
 
성 경: [1:7]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 이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고로 우리를 불렀고 우리를 부르신고로 성도(聖徒)가 되었다는 의미를 가진다. “부르심, 하나님께서 복음을 전하시어 그 백성을 세상에서 불러내심이다. 우리가 성도된 원인은,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하나님의 사랑과 선택에만 있다. 인간은, 구원 소망을 자기 자신의 의()에 근거하여 생각할 수 없다. 인간에게는 의가 전연 없다(3:10). 만일 누가 자기의 의에 대한 보상으로 구원을 기대하며 지낸다면, 그것은 불붙는 집에 앉아서 잘 살기를 꿈꾸는 것과 어리석음이다. 인간의 구원은, 그 자신 밖에서 오는 것이니, 곧 하나님에게서이다.
우리 아버지, - 구약에도 하나님의 부격(父格)에 대한 말이 없지 않으나 그것은 신약의 그것과 다르다. 구약의 것은 이스라엘의 국부(國父)라는 뜻으로 씌어 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공로를 보시고 우리를 양자(養子)로 받아들인 고로 하나님을 우리 신자들의 아버지라고 한다. 하나님은, 우리 죄인에게 대하여 아바 아버지”(8:15)가 되셨다.
은혜와 평강. - 이것은, 사도가 교회를 축도하는 특별한 복이니, 헬라식 축도(23:26)와 히브리식 축도(6:23 ; 삼상 25:6 ; 10:5)를 겸한 것이다. 사도의 축복은 옛날 이스라엘의 족장의 그것과 같이 권세 있는 것이다(27:1-42) ; 10:12-13). 은혜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무조건적으로 호의(好意)를 가지시고 사랑을 베푸심이다. 하나님의 호의를 얻음은, 온 인류에게 호의를 얻음보다 귀하고 요긴하다. 온 인류가 다 반대해도 하나님만이 를 지지하신다면, 그것이 오히려 기쁜 일이다.
 
 
성 경: [1:8]
 
첫째는. - 헬라 원어로 프로톤 멘이다. 이 어투는, 논리적으로 둘째는이란 말이 아래 있을 것이라고 예상케 한다. 그러나 그것이 없다. 이 말에 대하여 해석이 세 가지가 있다. 바울이 감사에 넘침으로 인하여 둘째로란 말을 잊었다고 함(B. Weis). 이 점에 있어서 바울이 논리적 어투는 차리지 않았으나 문맥은 그대로 나타내었다고 함(Yodet). , 첫째는 감사요, 둘째는 다음절부터 나온 기도라고 하였다. 첫째로란 말은 그저 무엇보다도 먼저는이란 의미니, 그 아래 둘째는이란 말이 나오리라고 개대할 필요가 없다고 함(Theodore Zahn). 바울은, 그의 저서 살전 5:18에 말하기를 범사에 감사하라고 한 것 같이, 언제나 어쨌든지 먼저 감사의 조건을 찾았다. 감사 제일주의가 있어야 범사에 감사할 수 있다. 바울의 감사 제일주의는 그의 서신마다 나타났다(고전 1:4 ; 고후 1:3 ; 1:3 ; 1:3 ; 1:3 ; 살전 1:2 ; 살후 1:3 ; 딤후 1:3 ; 4).
그리스도로 말미암아.....감사함. - 우리가 하나님과 교통하는 일은, 그 무슨 일이든지 그리스도의 중보역(仲保役)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감사하는 일도 그리스도를 힘입어서만 가능하거든, 하물며 다른 일들에 있어서야 더 말할 것이 무엇이랴. 그리스도를 힘입은 길은 그리스도 신앙이다. 이것이 있는 때엔 죄인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지만 이것이 없는 때엔 소위 의인(義人)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 바이스(B. Weiss), 이 문구가 다만 그들이 믿어 그리스도인 된 사실에만 국한된 것이고, 그들의 무슨특별한 선행을 가리킨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와 반면에 고데(F. Godet), 이것이 그들의 모범적 덕행을 가리킨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 너희 믿음이란 말이 그들의 믿음 생활(믿음과 덕)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바울은, 감사 제목으로서 그들의 신앙 생활 전체를 염두에 둔 것이다.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그 때 로마는 큰 도시였고 교통의 중심지였으니 만큼, 교회의 일이 각처에 퍼졌을 듯하다. 일설에 의하면, 당시 세계의 모든 사람이 다 같이 로마에 있는 교회의 소문을 듣게 되었다는 말이 아니라고 한다. 그것은, 당시 신자들에게 그 소문이 들린 일을 매우 귀중히 여겨서 그렇게 평가한 표현이다. , 여기 저기서 참 신자들이 그들을 알아주어도, 그것은 온 세상이 알아주는 것과 같은 큰 영예(榮譽)라는 것이다(Calvin).
 
 
성 경: [1:9]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 - 바울이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은, 복음을 전하는 그것이었다. 이를 보면, 그가 복음 전파를 자기의 출세나 생계나 취미를 위한 것이 아니고 그 소명감(召命感)에 끌려 행하여지는 것이었다. 그의 모든 전도 행위에 있어서, 하나님을 위하는 의식이 그 지배 의식이었다. 여기 심령이란 말은 렐라 원어로 프뉴마이니, 곧 영을 의미한다. 그러면 내 영()으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함은 무슨 말인가? 이것은, 인격의 중심으로 하나님께 봉사함을 말함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정신력과 체력(體力)의 전부를 다하여 봉사함을 가리킨다. 크레다너스(Greijdanus).는 말하기를, “이 봉사는, 마음을 드리지 않는 외형적인 것이 아니고 자기 존재의 가장 깊은 부분을 다하여 하는 것이다. , 진실하게 온 인격을 기울여 하는 봉사이다라고 하였다.
 
 
성 경: [1:10]
 
하나님의 뜻 안에서. - 이 말에 대하여 어떤 학자는 말하기를, 여기 하나님의 뜻이란 말은 종교 윤리적인 하나님의 뜻이라고 한다. , 바울이 로마에 가고자 하되 남이 세운 교회에 간섭하는 잘못이 되지 않는 한, 거기 가기를 원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종교 윤리적인 하나님 뜻을 가리키는 헬라 원어는, 여기 본문처럼 엔 토 델레마티 투 데우가 아니고 카타 토 델레마 투 데우일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 하나미의 뜻이란 것은 섭리적 의지(攝理的意志)를 말함이다. 그가 로마에 가려고 해도 교통 사정으로 길이 막혀서 갈 수 없이 되어 있는데, 앞으로는 그 사정이 섭리적으로 해결되기를 바라는 의미로 이 말을 사용했다.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 여기 좋은 길 얻기를 구한다는 말은 헬라 원어로 유오도데소마이인데 보통으로 성황(盛況), 혹은 이득(利得)을 의미한다(고전 2:16). 바울의 이 기도는 성취되어, 후에 그가 로마에 가게 되었다.(27:1-28:29). 그러나 그로 하여금 거기 가게 한 길은, 얼른 보면 좋은 길이 아니고 이상하게도 소송건에 끌려 가게 됨이었다. 그 길은 대단히 위태하여 그가 여러번 파선 당해 죽을 뻔한 것이다(26:32-27:44). 곧 그의 로마행은 육신적으로 괴로운 길이었다. 이것이, 이익을 얻는 길에 대한 바울의 기도 응답이었다. 경건신자에게 있어서 이익을 얻는 길은 반드시 평안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육신상으로 불행스러운 것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 충성하다가 혹시 고생길에 설 때에도 낙심치 말고 도리어 그것이 유익 있는 오묘한 길인줄 믿고 기뻐할 것이다.
 

성 경: [1:11]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주어. - 여기 무슨이란 말은 헬라 원어로 , 그것은 아직 받지 않은(그러나 장차 받을) 어떤 신령한 은혜를 염두에 둔 말이다. 바울은 로마에 가는 도상에 오를 때에 반드시 로마의 신자들에게 풍성한 영적 축복이 임할 것을 확신한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나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 그는 말하였다(15:29). 주의 종이 주님의 기키시는 일에만 순종하며, 언제나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영력(靈力)을 받게 되는 것이다. “신령한 은사란 것은, 초자연적(超自然的)인 것인데 그것이 물질적 혹은 정신적인 것일 수도 있다. “나눠주어란 말은 헬라 원어로 메타도, 은혜를 나눠 주는 자 자신도 남들과 함께 그 은혜에 참여함을 가리킨다(Theodore Zahn). 만일 주님의 종을 통하여 교회 중에 하나님의 교훈이 임한다면, 주님의 종 자신도 그 교훈의 심판 아래 서야 된다.
너희를 견고케 함. - 이 말의 헬라 원어를 직역하면 너희로 견고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바울이 자기 힘으로 그들의 신앙을 굳게 할 수 있다 함이 아니라, 그들의 신앙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굳게 될 것이라고 한다. 신앙을 장성케 하는 이는 오직 하나님 뿐이시니(고전 3:5-7), 여기서도 바울은 자기의 할 수 있는 일과 하나님의 하실 일을 구분한다.
 
 
성 경: [1:12]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 - 이것은 신앙상 위안을 말함이다. 우리의 신앙은 세상에 부딧쳐 끊임 없이 피곤해진다. 그러므로 이런 안위는, 우리에게 매일 음식과 같이 계속 공급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 안위는, 염세주의(厭世主義)에서 찾아 만나지는 것이 아니고 오직 주 안에서 성도들의 교통에서 얻을 수 있다. 내 신앙이 피곤해졌을 때에 남의 열심 있는 신앙을 보아서 용기를 얻게 되며, 또 본래 튼튼한 신앙도 다른 사람의 모본을 보고 더욱 힘을 얻는다.
 
 
성 경: [1:13]
 
열매를 맺게 하려 함. - 15:16 참조, 하나님께서 신자들을 세상에 두시는 목적은, 그들이 영적(靈的)으로 결실하게 되기 위함이다. 그들의 처음이 좋지 못했어도 나중에는 좋을 수도 있다. 신약의 사울은, 처음에 비록 패역했으나 한 번 회개한 후에는 주님을 충성되이 섬겼다. 마가도 처음에는 바울과 바나바를 따라 가다가 낙심하고 돌아섰으므로 바울에게 불신임을 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도 후에 회개하고 귀한 종이 되었으므로, 바울이 그를 자기에게 유익한 종으로 여겨 모든 교회에 추천하였다(4:10). 이와 반대로, 어떤 신자들의 처음이 좋았다 할지라도 그 나중이 좋지 못한 것은, 그들의 실패를 의미한다(18:21-24). 구약의 사울은, 처음엔 하나님의 총애를 받았으나 후에 패역한 길로 갔으므로 그 말년에는 저주를 받았다. “열매는 주로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신자 자신의 성결의 열매요, 둘째는 다른 사람을 복음으로 인도하는 전도의 열매이다. 15:1-6 ; 13:6-9 ; 11:11-14, 20-21 참조.
길이 막혔도다. - 하나님께서는, 그 사랑하시는 신자들의 길을 언제나 열어 주시지 않고 때로는 막으신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듣지 아니 하심이 아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려는 그의 오묘한 섭리이다.
 
 
성 경: [1:14]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 복음은 야만이에게도 가야 하며, 문명인에게도 전파되어야 한다. 문명(文明)이란 무엇인가? 지혜와 지식은 무엇인가? 혹은 과학이란 것이, 만물의 성질은 알 수 있으나 그것의 근원을 알 수는 없다. 다시 말하면, 과학 연구로써 만물의 용법은 알 수 있으나, 그 만물이 어디서 왔으며 어떻게 존재하며 어디로 가는 바를 알 수는 없다(고전 1:20). 이 세상의 지식층은 무식(어리석은 자들)과 마찬가지로 진리 앞에서는 소경이니, 진리 곧 복음이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러므로 전도자는, 지식 있는 사람들 앞에 역시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복음에 빚진 자의 명심할 것이 두 가지니, 이 빚을 갚지 않으면 화를 당하는 것(고전 9:16), 복음 전한다는 자세를 하지 말 것이다(고전 9:18-23).
 
 
성 경: [1:15]
 
할 수 있는대로.... 원하노라. - 이 구절은 헬라 원어로 토 캇 에메 프로뒤몬이니, 그것을 개역하면, “내게 달린 것은 뜨거운 소원이니이다. , 자기로서는 뜨겁게 원하나,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기다려 한 후에야 그 소원대로 행동하리라는 말씀이다. 사람이 어떤 선한 사업 계획을 세울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도를 기다려 행하지 않고 조급하게 행함은, 도리어 무익할 수 있다.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 이것은 이미 믿은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리라는 말씀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벌써 믿는 자들에게 복음의 지식을 가르쳐 줌도 일종의 전도이다.
 
성 경: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 하노니. - “부끄러움이란 것은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곧 사람이 자기의 소유가 무가치하여 부끄러워함과 자기의 성질이 겁약하여 부끄러워함이다(딤후 1:8, 12-18 ; 2:11 ; 고후 10:8 ; 1:20 ; 16:3 ; 요일 2:28). 그러나 바울은 자기의 소유한 복음 전파의 사명을 무쌍한 영관으로 알았다. 그러므로 그는 그런 귀중한 것에 대하여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 뿐 아니라, 그는 복음 운동과 및 자기를 위하여 염려할(염려는 겁에 이르고 겁은 부끄러움에 이름) 처지에 있지 않았다. 그가 본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던 사울이었으나, 다메섹으로 가던 도상에서 그리스도에게 붙들이었다. 그러므로 이제는 그의 안에 사시는 이가 그리스도였다. 그에게는 죽는 것도 유익함이 되는 줄로 느껴졌다(1:21).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이 순서는 민족 차별(民族差別)의 순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경륜의 순서를 가리킬 뿐이다(3:1-2.9 ; 1-13, 11:1-6, 15:9 ; 15:24 ; 4:22 ; 1:8 , 13:46 참조). 구원의 복음이 왜 이스라엘 사람을 먼저 찾았는가? 그것은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 복음이 이스라엘을 먼저 찾은 것은, 이스라엘 자신을 위하는 동시에 꼭 같이 이방인들도 위한 것이다. , 그것이 이스라엘 자신에게 구원을 베푸는 행동인 동시에, 이방인들에게는 구원을 전하는 제사장(이스라엘은 이방인에게 제사장이 됨)으로 세우는 행사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의 사역을 통하여 많은 이방인들을 구원하시려 하셨다(12:3 ; 19:5-6). 그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시간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다. 그는 나중 된 자로 먼저 되게 하시고 먼저 된 자로 나중 되게 할 수 있는 전능자시오 또 공의로우신 심판자이시다(19:30).
 
 
성 경: [1:17]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가? 이 의는, 그리스도가 우리를 의로 제공되셨음을 말함이다(고전 1:30). 사람이 하나님 하나님 앞에 의를 얻는 문제에 대하여 신학적 의견을 대표적으로 든다면, 세 가지로를 말할 수 있다. 펠라기안 학파의 의견, 이 학파에서는 말하기를, 사람은 유대인의 의식적 율법을 순종함으로 의를 얻는 것이 아니고, 다만 도덕적 율법을 행함으로 말미암아 의를 얻는다고 한다. 로마교의 의견, 여기서는 율법적 행위로 말미암아 의를 얻는다고 한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의견은 성경적이 아니라. 푸로테스탄트 교회의 의견. 여기서는 성경이 말하는데로 바로 주장하였다. , 우리는 우리로 말미암아 행하여진 무엇으로 의를 얻는 것잉 아니고, 우리를 위하여 행하여진 다른 이(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을 말함이다. 그러므로 이 의는 본래 우리의 것이 아니고 다만 그리스도의 것을 우리의 것으로 인정하여 주는 것 뿐이다. 이 의는 복음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인데, 그 의로 말미암아 신자가 의롭다 함을 받는다. 그 의는 완전한 것이다.
나타나서란 뜻은 무엇인가? 이 말에 대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몇가지 사실을 생각하게 된다. 하나님의 정하신 구원의 때가 이르었다는 뜻(4:4). 그러므로 그리스도로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신자들에게는 바로 종말을 현재화(現在化)시켰다는 의미도 되어진다. 이 의를 받는 자는, 세상 끝날에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벌써 심판을 받았다. 인자(人子)가 땅 위에서 사죄(赦罪)하는 권세가 있다고 한 대로(9:6), 신자들은 벌써 그리스도 안에서 사죄와 칭의(稱義)를 받는다. 이 세상에서 사죄와 칭의를 못받은 자는 내세(세상 끝날 심판 때)에도 그것을 받지 못한다(3:18).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는 말은 그것이 영원 전 하나님의 작정에 감취엇던 것이라는 뜻을 내포함(3:11),이 감취었던 것이 나타난 것을 보는 신약 시대의 사람들은 감사히 그것을 받아야 된다. 3:5 참조. 나타나서란 말이 현재사로 되었으니, 그것은, 사람이 복음을 믿는 그 현재에 하나님의 의와 접촉되고 또 받아지는 상칙(常則)을 말함이다. 이와 달리 3:21에는 나타났으니라는 현재 완료 동사가 사용되었다. 그것은 그리스도 사건의 역사적 실현(歷史的實現)의 완료를 보여 준다.
믿음으로 믿음에. - 칼빈은 말하기를 이것은 불완전한 믿음으로부터 완전한 믿음에 이르는 신앙적 장성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 해석은 옳지 않다. 하찌(Hodge), 이것이 역설체(力說體)로서 오직 믿음으로만 의를 받는다는 의미라고 한다.
 
 
성 경: [1:18]
 
하나님의 진노. - 7:11-12,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사람이 회개치 아니하면 저가 그 칼을 갈으심이여 그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분명히 상선벌악(賞善罰惡)의 심문을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우리는 욱안으로써 하나님의 심판 행위를 일목요연(一目瞭然)하게 깨달을 수 없다. 그 이유는 그 진노의 나타날 때가 인간의 범죄한 즉석이 아니기 때문이며, 그 진노의 방식이 초자연적(超自然的) 간섭보다 자연 법칙을 통하는 간접적인 것이 많기 때문이며(3:18-19, 4:12), 그 분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얼굴을 가리우심이기 때문이다. 거듭나지 못한 자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깨닫지 못하고 다만 그 진노 아래서 그들의 심령이 늘 불안한 중에 있다.
불의로 진리를 막는. - 이것은, 불의 곧 부도덕한 일들을 행하노라고 진리(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지배를 받지 않고 도리어 그것을 눌러 둔다는 의미라고 함. 불의를 행하면서 진리를 소유한다는 의미라고 함(이런 경우에는, “막는다는 말 카테콘톤을 소유한다는 뜻으로 해석 함). 이것은 종교적 의식을 말함이다. 불의하게 진리를 막는다는 의미라고 함. , 하나님을 알게 하는 진리를 믿지 아니함이 부당하다는 뜻이다. 이 아래 문맥으로 보아서 이 해석이 적합해 보인다. 위의 세 가지 해석이, 모두 다 하나님을 알고도 신종(信從)치 않은 사람을 가리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경건치 않음과 불의 - “경건치 않음은 하나님에게 대하여 바르지 못한 태도(21-25)이고, “불의는 인간에게 대해 바르지 못한 태도이다(26-32). 후자(後者)는 전자(前者)의 결과이다. 먼저 하나님을 바로 공경한 뒤에 사람에게도 덕을 세울 수 있다.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 이 어귀에 대한 해석으로, 하늘이란 말은 자연의 하늘로 간취되고 거기서 나타난 진노는 천연계(天然界)의 재앙(예컨대, 지진, 흉년)이라는 것으로 해석이 있고, 하늘을 하나님의 성결성(聖潔性)을 표상(表象)하는 으로 보고, 거기에서 나타나는 진노는 인간의 죄에 대한 그 성결성의 반항을 의미한다고 한다. 칼빈은, 여기, “하늘이란 것에서 그것의 광대 무비성(廣大無比性)을 취하여 인간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편만성(遍滿性), 곧 인류 중 한 사람도 이 진노 아래 있지 않는 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성 경: [1:19]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란 말은 알려진 것이라는 뜻이다. 그것이 저희 속에 보인다함은, 곧 양심에 느껴져야 할 자연계의 놀라움을 가리킨다. 칼빈은 자연계가 하나님을 보게 하는 거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인간은, 너무 죄가 많기 때문에 어두워져서 자연계를 앞에 놓고도 성령을 받기 전에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 다시 말하면, 그는, 특수 계시(特殊啓示) , 성경과 성령의 도우심을 받지 못하면 하나님을 알 수 없다.
 
 
성 경: [1:20]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 - 33:20 ; 1:18 ; 딤전 1:16 참조.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본질을 말함이다. 이 보이지 않는 분이 만물을 창조하셨다. 11:3에 말하기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됭 것이 아니니라고 한다. 신앙은, 나타나지 않는 참된 신()을 대상으로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의 육적 시각(視覺)을 만족시키지 않으심이 오히려 정당하다.
능력. - 능력은 하나님의 만물 창조의 능(), 그 유지(維持)의 능, 그 심판의 능을 기리킨 것으로서 우리로서 측량하기 어려운 것이다.
신성. - 이는 하나님 자신 곧 그의 본질인데, 우리는 만물을 보아서 그것을 안다. , 만물은 법리(法理)의 지배를 받아 성립되어 있다. 누가 만물을 무법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랴? 무법하고 우연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도, 두고 보면 그런 것이 아니다. 객관계의 이법성(理法性)을 인정하지 않고 그것을 우연시(偶然視)하며, 기계시(機械視)하는 극단의 회의주의자도 자기 자신의 이법성을 회의(懷疑)할 수는 없다. 그런데 이법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고 인격(人格)의 작품이다. 그러므로 이 법의 주재자 곧, 인격적신(人格的神)이 계심을 누가 부인하랴? 그 이유는 어떤 법이든지 그것이 실시되려면, 그것의 실시자가 있어야만 되는 까닭이다. 인간은, 법죄하여 암매해졌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게 하는 천연 계시(天然啓示) 앞에서도 하나님을 모른다. 그러므로 인간은 특수 계시 곧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모른다.
 
 
성 경: [1: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 인생은, 하나님을 아는 혹종의 의식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는 의식 그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로 알고 찾는 자는 드물다. 그들은 참 하나님 아닌 자 곧 피조물을 하나님으로 잘못 알고 섬기니, 이는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일이요 영화롭게 함이 아니다. 이는 마치 귀머거리 소경된 어린 아이가 그의 친아버지를 바로 알지 못하고 어떤 악한(惡漢)을 가리켜 자기 아버지라고 할 때에 그 아버지에게 무쌍한 욕이 됨과 같다.
 
 
성 경: [1: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 그것은 피조물계를 넘어갈 수 없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 지식은 피조물의 하나로 피조물 권내(被造物圈內)에 있어서 그 권외에 나가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뿐 아니라, 그 지식은 죄로 인하여 어두워졌다. 그러므로 그것이 스스로 참 하나님을 알 수 없다. 그것이 스스로 종교적 지혜를 낸다면, 거짓 종교, 곧 자율주의(自律主義)의 종교를 제조할 뿐이다.
우준하게. - 누가 진실되이 셋을 가리켜 다섯이라고 주장하고, 일곱을 가리켜 아홉이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어리석다. LLRM와 같이 피조물(被造物)을 가리켜 창조자요, 심판자요, 또 구원자라고 주장하는 자는 무한히 어리석은 자이다.
 
 
성 경: [1: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 이 말씀은 시 106:20의 말씀과 흡사하니, 자기 영광을 풀 먹는 소의 형상으로 바꾸었도다라고 함이다. 이 말씀을 보면 인간이 얼마나 거짓된 종교를 만들어 하나님을 괴롭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이 썩을 것으로 하나님의 썩지 않는 것을 대치하고, 피조물의 형상으로 창조자를 대치한다. 슐라테르(A. Schlatter)는 말하기를, “저희의 종교 행위는 진리를 거스리는 전앵 행위요 또한 하나님을 대적하는 전투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면 이제 위에 소개된 두 가지 정반대의 대조를 자세히 생각해 보자.
썩지 아니하는 영광과 썩어질 것. 하나님의 영광은 썩지 않으시는 영광이다. 영광이란 말은 구약에 모두 280번이나 나온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啓示)와 구원 능력의 나타남을 가리킨다(16:9-12, 24:15-18, 29:43, 40:34-35 ; 9:6, 23 ; 14:10, 16:19-20 ; 72:19, 96:3, 102:15-16, 138:4-5). 하나님의 영광은 인간의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깨닫게 하시는 영적 지각으로야 보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다. 그러나 우상은 거짓 것이고 그 속에 있는 것들이다. 하나님을 육안(肉眼)으로 보고저 하는 것은, 하나님을 우상 취급(偶像取扱)하려는 죄악이다.
인간을 자기 형상대로 만드신 창조자 하나님을 인간 편에서 자기 형상대로 만드는 악해, 하나님이 인간을 자기 형상대로 만드신 목적은, 인간이 하나님을 섬기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면 이제 인간이 자기 형상(피조물의 형상)으로 신()을 만드니, 이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사람을 섬기는 자 되게 하려는 망동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과 정반대되는 인간의 뜻으로 하나님을 취급하는 망동이다. 우상 숭배자들은 성결과 도덕을 지키지 않고 신을 불러서 복리(福利)를 얻으려고 한다. 그것은 진정한 경견이 아니다. 진정한 경건은 윤리적 종교 행위이다. 1:27에 말하기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란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고 하였다.
 
 
성 경: [1:24]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 두사. -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죄인을 인하여 노를 발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하나님의 노()는 인간의 악행을 그대로 버려 두심이다.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고로, 내버림이 되어 모든 부도덕한 일을 행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크로 솨이데”(F,W. Grosheide)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죄악이 죄악을 낳았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내버리셨기 때문이다. 그것은, 신앙 없는 세계에 나타난 하나님의 공의의 결과이다. 그것이 이교(異敎)의 가져오는 표본이니, 곧 우상주의가 무서운 죄악들을 동반함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심판은 자연 심판으로 시작된다라고 하였다. 종교를 바로 가지지 못한 것이 모든 죄악의 근원이 된다. 하나님에게 버림 받은 때부터 이렇게 인간은 죄를 범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리델보스(Ridderbos)는 말하기를, “죄악은 세력인데, 그 세력 앞에서 인간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서만 보호를 받는다라고 하였다. 하나니미에게 버림 받은 자들은 음행으로 떨어진다. 그것은, 다음 구절에도 재설된다. 몸은 하나님의 전(殿)인데(고전 6:19), 하나님이 계신 동안은 그 몸이 깨끗할 수 있으나 하나님이 떠나시는 그때부터는 불결해질 수밖에 없다.
 
 
성 경: [1:25]
 
이 귀절은 하나님의 진리와 우상의 거짓을 대조시킨다.
하나님의 진리란 것은 하나님 자신의 진실성을 가리킨다. , 하나님은 참()이란 뜻이다. 크레다너스(Greijdanus)도 이렇게 생가하였다. 하나님은 자기의 여러 가지 성질을 계시하시는 중에도 특별히 그의 진실성을 힘있게 계시하셨다. 23:19에 말하기를,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성경에 의하면, 신자들이 하나님의 진실성 때문에 모든 영적 행복을 누릴 것이라고, 많이 말한다. 우리를 부르신 것이 그의 신실하신 성품으로 인한 것임, 고전 1:9,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라고 하였다. 신자 성화(聖化)의 확실성이 하나님의 진실성에 근거 한다고 하였음. 우리의 믿음이 그의 신실에 근거하고 있는 것임.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줄 앎이라고 하였다(11:11). 하나님의 진실은 약한 신자들에게 위로가 됨.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고 하였다(딤후 2:13). 하나님은 그의 진실성 때문에 신자들을 무모한 시험에 인도하시지 않으심.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간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고 하였다. 하나님은 신실하시기 때문에 죄를 고하는 자들의 죄를 용서하심.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했다(요일 1:9).
우상은 거짓것임. 우상을 거짓 것이라고 할 이유는 우상 숭배는 감각주의(感覺主義)에 의하여 영혼의 요구를 만족시키려 하는 까닭이다. 우상 숭배는 감각주의를 만족시킬 예배 대상(禮拜對象)을 찾는다. 감각주의는, 영혼의 요구와는 정반대되는 것을 즐기나니, 곧 유한한 물질 세계에서 살 수 없다. 영혼을 물질로 만족시키려는 종교는 모순된 것이다.
 
 
성 경: [1:26,27]
 
내어 버려 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 몸은 하나님의 성전인데(고전 6:19)., 그것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니, 하나님은 떠나시고 죄는 그 몸에서부터 세력을 얻게 되어 먼저 음행이 나타난다(고전 6:18).
성경은, 성적 죄악(性的罪惡)이 몸에게 대한 것이라고 한다. ,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고 하였다(고전 6:18). 이 말씀의 의미는 그 성적 죄악이 주님의 성전 된 몸의 거룩을 범한다는 것이다. 다른 죄악은 남들에게 손해를 주는 것이다. 그러나 선적 죄악은,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게 손해를 주는 것이다. 특히 그 손해 중에 종교적인 것이 더욱 크다. 이 죄악은 도덕 방면에 속한다고 할 것이나 역시 종교적 죄악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창기와 합하는 자는 저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고전 6:15-17)고 하였다. 그러므로 인간이 그 몸을 가지고 음행을 범하면 그것은 주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범성죄(犯聖罪)이며, 주 앞에 정절을 지키지 않는 훼절(毁節)의 죄도 된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상 숭배자들을 가리켜서도 음란한 자들이라고 한 것이다(50:18 ; 3:8 , 5:7, 7:9, 9:2, 13:27, 23:14, 29:23 ; 23:43 ; 7:4 ; 3:5). 이렇게 성적 죄악은 이중 죄악이다. 곧 도덕상으로 인륜을 어지럽게 하는 죄악이고 종교상으로도 하나님 앞에 범성(犯聖) 훼절(毁節)하는 죄악이다.
안셈(Anselm)은 말하기를, “다른 죄들은 대항하여 싸우므로 이길 수 있으나 성적 죄악은 피하므로야 이긴다고 하였다. 곤전 6:18 ; 딤후 2:22 참조. 요셉이 이 죄를 이긴 방법도 이러하였다(39:1-18). 위에 인용한 안셈(Anselm)의 말은 물론음행을 피하라는 성경의 말씀에 의거한 것이다. 죄악의 많은 종류들 가운데 매력을 가지고 유인하는 것들이 있는데, 선적 죄악이 거기 속한다. 성적 죄악은, 외모의 미를 가지고 사람을 꾀어 넘기는 독한 것이다. 그것은 마치 족사의 이빨에서 나오는 살인독과 같다. 독사의 살인독을 현미경으로 검사하면, 말할 수 없이 아름답다고 한다. 또 그것은, 마치 알프스산의 아름다운 잔디 언덕과도 같다. 많은 여행자들은, 그런 아름다운 잔디가 있는 땅을 든든히 믿고 발을 붙이려다가 떨어져 죽은 일이 많다고 한다. 성경은 이 죄에 끌려 가는 것이 마치 소가 포주로 가는 것 같고 미련한 자가 벌을 받으려고 쇠사슬에 매이러 가는 것과 일반이라 필경은 살이 그 간을 뚫기까지에 이를 것이라 새가 빨리 그물로 들어가되 그 생명을 잃어버릴 줄을 알지 못함과 일반이니라”(7:22-23).하였고, 그런 죄를 범하는 집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 집은 음부의 길이라 사망의 방으로 내려가느니라고 하였다(7:27).
 
 
성 경: [1:28]
 
죄는, 인간에게 대하여 병균과 같이 신속한 번식성을 가지고 인간을 아주 점령해 버리고 또 살해한다. 몸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 죄(21-13), 번식하여 무서운 죄의 수렁에 이르렀으니 그것을 29-32에서 볼 수 있다.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 이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을 실용적 지식으로 가질 가치가 없다고 생각함을 의미한다.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 이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불필요하다는, 그들의 잘못된 나음 그대로 내버려둠을 의미한다.
합당치 못한 일. - , 인간의 본분과 책임에 부합하지 않는 행동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인간의 요점일 뿐 아니라, 그것에 있어서 전 가치(全價値)를 의미하는 것이다(12:13). 여기 기록된 죄악의 목록을 분류하면 다섯 가지니 불의, 추악, 탐욕, 악의는, 사람이 자기에게 대한 취급을 잘못하는 범죄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은, 사람이 남들과 경쟁하는 관계로 생기는 범죄요, 수군수군하는 것과 비방은, 사람이 남을 언론(言論)으로 해하는 범죄요, 하나님을 미워함과 능욕, 교만, 자랑, 악을 도모함은, 사람이 자기를 높이는 범죄요, 부모를 거역함과 우매, 배약, 무정, 부자비는, 의리(義理)를 반역하는 범죄이다.
 
 
성 경: [1:29]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 - “불의는 헬라어로 아디키아니 그 아랫말에 기록된 모든 부도덕한 일들을 개괄적으로 지명하는 듯하다. 그러나 이 명사는 하난의 죄명(罪名)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불법적으로 취하는 이기적 행위를 가리킨다고 보아진다. 불의를 행하는 자가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하겠지만, 실상은, 그것이 자기를 유익하게 못하고 도링어 해롭게 한다. 21:7에 말하기를 악인의 강포는 자기를 소멸하나니 이는 공의 행하기를 싫어함이니라고 하였고, 10:2불의의 재물은 무익하여도 의리는 죽음에서 건지느니라고 하엿다. “추악은 포네리아인데, 도덕적 부패의 해독을 의미한다. 이것은, 내부적 패역성을 의미하는 악의란 말과 달라서 악한 결과와 해독을 가리킨다. 어떤 사본에는 이 말 다음에 포르네이나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정당한 결혼 생활 아닌 모든 불결한 남녀 교제를 말한이다. 어떤 중요한 사본들에는 이 말이 없으므로 마이어(Meyer)는 이 말을 제외하였다. ”탐욕이란 말은 플레온이란 말(더한다는 뜻)에코란 말(취한다는 뜻)과의 합성어(合成語)인데, 더 가진다는 뜻이다. 그러면 탐심은 다른 것이 아니고 불의한 일을 해서라도 물욕을 채우고 또 채우고자 하는 심사를 가리킨다. 탐심은 사람으로 하여금 물질에 채우고 또 채우고자 하는 심사를 가리킨다. 탐심은 사람으로 하여금 물질에 매어서 하나님의 말씀과 천국에 착심할 수 없게 하므로(119:36), 우상 숭배와 같은 죄이다(3:5). 탐심을 품는 자는 성공하려 하지만, 결국은 실패로 돌아간다. 10:2에 말하기를 불의의 재물은 무익하다고 하였고, 또 잠 21:6속이는 말로 재물을 모으는 것은 죽음을 구하는 것이라 곧불려 다니는 안개니라하였고, 20:21처음에 속히 잡은 산업은 마침내 복이 되지 못하느니라하였고, 23:5에는, ”내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날개를 내어 하늘에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고 하였다. ”악의란 말은 헬라 원어로 카키아인데, 이것은 마음이 구부러진 패역성을 가리키는 바, 선한 권면이나 교훈에 대하여도 까닭 없이 반역하며, 남의 자선 행위까지도 방해하는(자기 자신도 하지 않으면서) 잔인성 같은 것이다. 요컨대 이것은 선()에 대한 까닭 없는 반역이라 할 수 있다. 이 반역은 실로 극악한 심사인데, 그것을 고집하는 자는 더욱 현저하게 벌을 받는다. 그 이유는 이런 악한 마음은 무식, 혹은 연약에서 생긴 것이 아니고, 고의적으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기, 살인, 분쟁, 사가, 악독이 가득한 자요. - “시기는 헬라 원어로 프도노스인데, 남의 잘 되는 것을 보고 스스로 통감(痛感)을 가지고 해할 수만 있으면 해하려는 악한 마음이다. 14:30에 말하기를 마음의 화평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의 썩음이니라고 하였고, 27:4에는 투기 앞에서 누가 서리요라고 하였다. 클락(Clarke), 이 잠언 말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예화를 소개했다. ,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탐심 있는 자요, 다른 한 사람은 시기가 있는 사람이었다. 이 두 사람에게 누가 말하기를, 너희는 무엇이든지 내게 청구하여라, 그런데 먼저 청구하는 자에게 그 청구한 것을 주고, 다음에 청구하는 자에게는 그 갑절을 주겠다고 하였다. 그 때에 그 탐심 있는 자는 많이 받을 야심으로 먼저 청구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그 시기 있는 자는 그 탐심 있는 자의 많이 가지게 되는 것을 싫어하여 역시 잠잠하고 있다가 하는 말이, “내 눈을 하나 뽑아 주시요라고 하였다. “시기는 이와 같이 남과 나를 해하는 악독한 마음이니, 결국 자기도 망하고 남도 망하는 것이다. 사기를 없애는 방법은, 상대편을 시기하는 대신에 그를 모본 또는 사표(師表)로 알고 그를 기뻐함이다. 그 이유는 나보다 우수한 자는 나의 선생이니 그를 나의 선생으로 알 때에 기쁘지 않으랴. 선생이 없는 사람은 인도자 없는 소경이다. 이 세상에는 할 일이 어무도 많다. 그것을 다하기 위해서는 나자신보다 우수한 선생들이 많이 있어야 한다.
교회 역사를 보면, “시기의 죄가 교회에 큰 손해를 끼친 사실이 있다. 크리소스톰(Chrysostom)은 교권자 데오빌로 감독의 시기로 말미암아 마침내 억울하게 파면을 당했으며, 사막에 망명하여 거기서 종신하였고, 사무엘 루더포드(Samule Rutherford)도 교권자 사이드센프의 시기로 인하여 투옥되어 수난했던 것이다. 예수님은 대제사장들의 시기로 말미암아 잡혀서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다.
살인은 헬라 원어로 포노스인데 아주 무서운 범죄이므로, 그것에 대하여는 모든 자연까지 노할 정도이다(4:10,23,24). 살인이 그렇게 극악시(極惡視)되는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임)을 범하기 때문이다(9:6). 요일 3:15에 의하면, 남을 미워함이 벌써 살인이라고 하였다. 증오는 살인과 같은고로, 증오가 있는 곳에는 생()의 의의(意義)가 없어진다. 그러므로 잠 15:17에 말하기를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하였다.
분쟁은 헬라 원어로 에리도스인데 이것은, 단체 생활의 생명을 끊어 버리는 죄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잠 17:1에 말하기를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신에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언제나 미연에 방지함이 지혜롭다. 그 이유는, 그것은 확대될 위험성이 있고, 확대되면 수습하기 곤란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잠 25:8에는 말하기를 너는 급거히 나가서 다투지 말라고 하였고, 17:14에는 다투는 시작은 방축에서 물이 새는 것 같은즉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시비를 그칠 것이니라고 하였고, 18:19에는, “노엽게 한 형제와 화목하기가 견고한 성을 취하기보다 어려운즉 이러한 다툼은 산성 문빗장 같으니라고 하였다.
그런데 다툼이란 어떻게 일어나게 되는가? 서로 시비를 지혜 없이 말하다가 일어남. 범죄를 좋아하는 자들 측에서 일어남. “다툼을 좋아하는 자는 죄과를 좋아하는 자요라고 하였다(17:19). 과격한 말로 인하여 일어남.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고 하였다(15:1). 미련함으로 인하여 일어남. “다툼을 멀리하는 것이 사람에게 영광이어늘 미련한 자마다 다툼을 일으키느니라고 하였다(20:3). 교만함으로 인하여 일어남. “거만한 자를 쫓아내면 다툼이 쉬고 싸움과 수욕이 그치느니라고 하였다(22:10). 말장이로 인하여 일어남. “나무가 다하면 불이 꺼지고 말장이가 없어지면 다툼이 쉬느니라고 하였다(26:20). 탐심으로 인하여 일어남. “마음이 탐하는 자는 다툼을 일으키나라고 하였다(28:25).
사기란 말은 헬라 원어로 돌로스인데, 거짓은 모든 죄악의 인도자요, 또 엄호자(掩護者)의 역할을 한다. 마귀가 아담 하와를 죄로 인도할 적에도 거짓을 사용했다(3:1-7). 죄는 거짓을 쓰고야 활동할 수 있다. 누가 악을 행하면서 그것을 악이라고 광고하면서 행하는 자 있으랴? 언필칭 선을 행하노라고 하면서 악을 행한다(12:20). “사기, 우리 마음에 깊이 뿌리 박고 있어서 많이 속인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남을 속여 가면서 죄를 범하게 하고, 또 자신을 속여 자멸의 길을 밟게 한다. 그러므로 렘 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니라고 하였다. 남도 속이고 자기도 속이는 것은 사람의 마음이니 거짓되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기 제 마음을 잘 지켜서 남을 속이지 말고 또 자기 스스로도 속지 말아야 한다. 남을 속이는 그것도 벌써 자기를 속임이니, 그 이유는 남을 속여 유익을 도모함은 결국 자기를 해함이 되기 때문이다.
악독은 헬라 원어로 카코에데이아인데 그 뜻은 간악을 가리킨다. 퀴일(Kuhl)은 해석하기를, 이는 간책(奸策)과 궤계를 가지고 남을 해하려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이런 사람은, 구밀복검식(口密腹劒式)으로 외모로는 최선을 다하여 남을 도와주는체 하지만, 이면과 실제에 있어서는 남을 해하는데 최선을 다한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은 노골적으로 직접 남을 해하는 자 이상의 중벌을 받을 것이다.
수군수군하는 자. - 이런 자들은 공중이 모르게 은밀히 남을 훼방하는 자니, 이는 독사보다 악독한 자이다. 독사는 접근하는 사람만을 물어서 해할 수 있지만, 이런 사람(수군수군하는 자)은 몇 만리밖에 있는 자들을 해할 수 있다.
 
 
성 경: [1:30,31]
 
비방하는 자. - 이것은 공적으로 남을 악평하는 자이다. 19:16에 말하기를, “너는 네 백성 중으로 돌아다니며 사람을 논단하지 말며 네 이웃을 대적하여 죽을 지경에 이르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고 하였으니, 남을 말로 매장함은 잔인한 일 가운데 하나이다. 이런 죄를 범하는 자는 벌을 받나니 그것은 그 자신이 역시 악평을 받음이다. 예수님은 말쓰하시기를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고 하셨다(7:1).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 - 이 죄들은, 사람이 자기를 과중시(過重視)하여 남들을 무시함이다.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는 헬라 원어로 데오스튀게이스인데,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라고 번역할 수 있는 것이다. “능욕하는 자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멸시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교만한 자.” 이 말은 헬라 원어로 훼페레파노스인데 높이 나타나는 자란 뜻이다. 실제적 내용은 없이 높은 사람인체 하고 자기를 나타내는 자도 있고, 혹은 실제적 내용이 있고서 그리하는 자도 있다. 실 내용이 없이 그리하는 자는 외식하는 죄까지 범하는 자이다. 16:18에 말하기를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고 하였다. 개인이나 단체나 교만하면 반드시 하나님의 벌을 받는 법이다. 19:29에 말하기를, “심판은 거만한 자를 위하여 예비된 것이요 채찍은 어리석은 자의 등을 위하여 예비된 것이니라고 하였으니, 오만한 자(거만한 자)의 죄가 어떻게 큰 줄을 우리가 알 수 있다. “자랑하는 자는 자기 자신을 자랑하는 자니, 예수님으로 자랑하는 자와 반대되는 자이다. 진실로 주 예수로 자랑하는 자는 전적으로 자기를 분토와 같이 천히 보아야 할 것이다(3:7-9). 그 이유는, 자기를 의뢰하는 것은, 예수님을 믿음에 대한 적성 요소(敵性要素)이기 때문이다.
악을 도모하는 자. - 이것은, “악한 일을 지어내는 자를 말함이다. 이런 사람은, 자기 한 사람난이 악을 행하지 않고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악행의 길을 개척하여 주는 셈이다. 이 얼마나 악한가? 수리아의 안디오코 에피파네스는 유대인을 괴롭게 한 자니, 그는 모든 악을 도모하는 자라는 칭호를 받았다.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 - 이 죄목들은 애정과 의리(義理)를 배반하는 종류에 속한다. 애정은 사람이 가장 좋아하는 것인데, 그것을 배반하는 자야말로 극도로 악한 자이다. 그러므로 부모를 거역하는 자는 큰 죄인이다. 구약 시대에는, 불효자는 재판을 받게 하고 돌로 쳐 죽이도록 한 것이다(21:18-21). 신약 시대에는 그렇게 하지 않지만, 불효가 여전히 큰 죄악인 것은 틀림 없다(딤전 5:8). “우매한 자.” 이것은 사람이 자기가 받은 사랑이나 등휼에 대하여 지가(知覺)이 없고 그것을 감사하지도 않으며 기억지도 않음을 말함이다(1:2-3). 도탄 중에 빠진 자가 남의 동정을 구하다가 배척을 당할 때 그 마음이 아프다. 그러나 남에게 은혜를 베푼 자가, 그 은혜를 입은 자의 배은 망덕의 태도를 볼 때에 느끼는 비통(悲痛)은 그 이상이다. “배약하는 자성경은,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아니해야 한다고 한다(15:4). “무정한 자.” 어떤 학자는 말하기를, 여기 무정하다 함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대하여 무정함을 가리킨다고 하나, 그렇게 제한을 두어 생각할 필요는 없다. 인정이란 것은 인간에게 위로와 용기와 소망을 주는 것이다. 인정이 활동하면 눈물의 골짜기도 변하여 회열의 낙원이 되는 것이다. “무자비한 자.” 어떤 사람이 불쌍하게 된 원인이 그 자신의 저지른 죄악이었다고 해서 그 사람을 졸보지 않는다면, 그것도 혹시 무자비일 수 있다. 크리스챤의 자비는, 조난자(遭難者)의 육신 정형 뿐 아니라, 정황까지 불쌍히 여김이다.
 
 
성 경: [1:32]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 죄를 범하고 그것을 부끄러워하는 자는, 고침 받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죄를 옳게 여기는 자는 고칠 소망이 없다.
 
 
성 경: [2:1]
주제1: [유대인에 대한 심판]
주제2: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
그러므로 - 전후 문맥으로 보아 이 접속사가 어떤 부분과 직접적으로 연관되는지 분명하지 않다. 혹자는 이 접속사가 앞에서 설명된 이방인들의 부도덕한 행위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Hendriksen). 또한 어떤 학자는 본절 전체를 1:20과 같이 삼단 논법식으로 재구성하여 다음과 같은 사상적 전개로 이해하고자 했다(J. Murray). (1) 다른 사람의 행동을 너는 판단한다. (2) 너도 똑같이 그 행동을 한다. (3) '그러므로' 너는 너의 행동을 정죄하는 것이고, 너도 핑계치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유대인들은 종종 어떤 문장을 다른 주제로 전환하고자 할 때 별 의미 없이 접속사를 사용하여 주의를 환기시키는 문법 구조를 사용한다(삼하 8:1;10:1;13:1;4:14). 바울도 이와 같이 이방인의 죄악상을 폭로하는 주제로 전환하는 시점에서 별 의미없이 이 접속사를 사용하였다.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 '판단하는'의 헬라어 '크리논'(*)은 하나님의 '판단'(*, 크리마)과는 구분되는 것으로서 '의심한다'(24:38), '헤아린다'(7:2), '구별하다'(13:30)라는 뜻으로 사용되며 본절에서는 인간이 그 이웃에 대하여 편견을 가졌다는 의미로 쓰여졌다(8:15;4:12). 한편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을 지시하는지의 문제는 의견이 분분하다. (1) 혹자는 이 부류의 사람을 스스로 남을 규탄하고 지도하며 판단하는 입장에 있다고 생각하는 '많은 선생'(3:1)이라고 주장한다(Matthew Henry). (2) 또 혹자는 '판단하는 사람아'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스 호 크리논'(*) 가운데 '파스' (*, '모든')를 강조하여 '남을 판단하는 모든 사람'이란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를 포함하며 판단하는 일을 습관적으로 반복하는 자들이라고 한다(J. Barmby). 그러나 본장 전체의 흐름으로 보아 본절의 이 말은 율법을 받고 자랑하면서 율법에 따라 살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을 칭하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보다 바람직할 것 같다. 물론 유대인이라는 구체적 표현이 나타나지는 않지만 당시 유대인들의 삶이 이웃을 판단하는 교만한 삶이었음은 사실이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가장 적합한 대상이라는 견해를 마치 이방인은 이 부류에서 제외된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은 또 다른 오해를 발생하게 할 것이다.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 바르트(Barth)는 하나님께 핑계할 수 없는 부류에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사람도 포함시킨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 비록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더라도 유한한 인간이며 시간에 속한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인간은 제한되고 연약한 존재로 항상 죄악 가운데 그 영향권 아래 살아가므로 누구든지 하나님께 핑계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바르트의 주장대로라면 핑계치 못할 자의 범주에 바울 자신도 포함되므로 바울 역시 또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있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따라서 본 절은 신앙에서 떠난 유대인들을 향한 바울의 책망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Luther, Calving, Hendriksen). 유대인이 하나님의 율법을 받아 이방인보다 더욱 밝은 계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며 살았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께 핑계할 수 없는 것이다.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은 판단력이 무능해졌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의를 이룰 능력도 무력해졌다. 그렇기에 남을 판단하는 자는 자신이 자신을 정죄하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정죄함이니'로 번역된 헬라어 '카타크리네이스'(*)'카타'(*, '...에 반대하여')'크리노'(*, '구별하다, 판단하다')가 합쳐진 '카타크리노'(*)의 현재 직설법 2인칭 단수 동사로서 '세아우톤'(*, '너 자신을')과 함께 쓰여 스스로를 죄있다고 판단하는 것을 의미한다. 혹자에 의하면 이 '정죄'는 남을 저주했을 때 분만 아니라 용서했을 때도 받게 되는데 그것은 자기 자신이 판단의 기준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Lenski).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 이 표현은 유대인들이 범하는 잘못이 이중적인 성격을 띠고 있음을 보여준다(Calvin). 즉 그들은 이방인과 똑같은 잘못을 범하고 있으면서도 뻔뻔스럽게 다른 사람의 잘못을 신랄하게 정죄하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좀더 간략하게 나타내자면 '어두움과 위선'(Murray)이 될 수 있겠다. 이와 같은 바울의 논리는 예수의 가르침에 근거한다(7:1-5;6:41, 42).
 
성 경: [2:2]
주제1: [유대인에 대한 심판]
주제2: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
하나님의 판단 - 여기서의 '판단'(*, 크리마)은 공의의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심판 또는 정죄를 의미한다(3:1). 사람이 스스로 하는 판단은 항상 한계가 있고 상대적이지만 하나님의 판단은 절대적인 표준이므로 모든 범죄자에 대해 심판과 정죄를 내리심이 당연하다. 이러한 하나님의 판단(심판)은 종말에 궁극적으로 이루어지는데, 어느 누구도 그의 심판에서 제외되거나 특권을 부여받지 못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진리이시므로 그의 절대적인 공의 성취하시기 때문이다(Murray).
진리대로 - 이 말에는 심판의 순결성과 외모를 취하지 않으시고 인간의 내면을 감찰하시어 판단하시는(삼상 16:7) 하나님의 절대적인 공의(Calvin, Harrison, Barmby)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우리가 아노라 - 본절에서 바울이 사용한 1인칭 복수 '우리'1:5에서의 '우리'는 그 지시하는 바가 각기 다르다. 즉 본절에서는 수신자와 바울 자신을 같은 공동체로 여기고 '우리'라고 하고 있고, 1:5에서는 복음을 전하는 바울 일행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에, 거기서는 송신자들을 의미하고 있다.
 
성 경: [2:3]
주제1: [유대인에 대한 심판]
주제2: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행하는 사람아 - 바르트(Barth)는 본절을 매우 실존주의적으로 해석한다. 즉 그는 판단하는 일이 어떤 체계나 사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하며, 그러한 체계나 사상에서 나오는 선행은 인간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그에게 있어서 체계적인 사상은 복음의 생동력을 잃게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이성을 통해 체계적인 사상을 통합하고자 했던 헤겔(Hegel)에 정면 도전한 키에르 케고르(Kierkegaard)의 실존주의적 신앙 노선에 서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체계적인 사상을 고집하면 복음의 생명력을 상실하게 되는 것은 교회사를 통해서 입증될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는 논리와 사상의 체계에만 집착해서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극단적으로 사상의 체계를 부정해서도 안 된다. 전자의 경우는 기독교를 논리의 체계 속에 질식(窒息)시키게 하며, 후자는 신비 주의에로 흐르게 하기 때문이다. 오직 기독교는 복음의 진리를 왜곡시키지 않는 범위에서 체계를 지님과 동시에 복음의 생명력을 지녀야 참 종교로서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 예수의 가르침 중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재물 바치는 것을 빙자하여 자기 부모를 부양하고 공궤(供饋)할 책임을 회피했다(7:11). 이러한 그들의 행위는 종교라는 허울 아래 '하니님'을 이용하여 자신의 명예나 이익을 추구하고 자신의 잘못을 합리화한 행위인 것이다. 이 같은 이들은 겉모습과 말을 그럴 듯 하지만 속마음은 이미 부패해서 회칠한 무덤(23:27, 28)과도 같이 양면성을 갖고 있었다. 이와 같은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의 공의로운 심판을 결코 피할 수 없다(고후 5:10). 설령 그 사람이 유대인 중에 유대인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정죄적 선언을 피할 수 없다. '피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크프세'(*)'사라지다' 또는 '도망가 안전한 곳을 찾다'(19:6)라는 뜻이 있고, '에크퓨고'(*)의 미래중간태이다. 죄인이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숨을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139:8;벧전 3:12).
 
성 경: [2:4]
주제1: [유대인에 대한 심판]
주제2: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멸시하느뇨 - '인도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게이'(*)는 현재 직설법 3인칭 동사로서, 하나님의 지속적이고 적극적인 행동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 이방의 우상숭배와 부도덕, 그리고 남을 판단하는 어떤 자들의 교만을 지켜보심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방향을 전환하여 마음과 태도를 바꾸기를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속성, '인자하심' 때문이다. 본절에서 '인자하심'은 거듭 사용되어 중요한 사상임을 보여 준다. 본 구절의 '인자하심' (*, 크레스토테토스)은 하반절의 '인자하심'(*, 크레스톤)과 의미상 별차이는 없지만 특히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미하며(11:22), 보다 포괄적이고 근본적인 뜻을 갖는다. 이는 또한 부모가 자녀를 대하는 것과 같은 성품을 시사한다(7:9-11). 그러나 유대인들을 포함한 모든 죄인들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이용하여 오히려 자기의 의를 자랑할 뿐더러 그의 오래 참으심을 자신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수단으로 생각했다. 더 나아가 인생들은 악한 일을 행함에도 속히 징벌을 행하시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너그러움을 이용하여 악을 행하기에 담대하였다(8:11). 본절에서 이와 같은 죄인의 태도는 '하나님을 멸시하는'(*, 카타프로네이스) 것이라고 지적된다. 유대인의 교만과 이방인의 부도덕은 같은 죄악으로서 하나님을 깔보거나 업신여기는 방자한 행동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풍성함을 멸시하는 죄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죄인들 가운데 나타나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켰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며 동시에 복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이 복음이 바로 죄인들에게 주어졌다(1:16).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기에 죄를 범할지라도 그 죄에 따라 공의의 심판을 받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든지, 아니면 자기들이 죄를 범해도 하나님께서 즉각적으로 심판을 내리시지 않기에 자기들의 행위가 하나님의 뜻에 별로 어긋나지 않는 것으로 착각했을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잘못에 대해 하나님께서 심판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 하나님의 '인자하심''용납하심''길이 참으심'을 무시해 버렸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해서도 소홀히 여겼다는 말이 된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완악한 심령에 대하여 바울은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5)이라고 표현했다. 한편 본절의 '용납하심'(*, 아노케)은 잠시 쉬는 것을 의미하며 '자제'(self-restrain)의 개념을 지닌다. 본절에서는 '너그러움'을 뜻하며 구체적으로 '징벌의 지연'을 뜻한다. 또한 '길이 참으심'(*, 마크로뒤미아)'어떤 충격에도 곧바로 반응하지 않음'을 뜻한다. 이 두 단어는 '인자하심'(*, 크레스톤)과 합해져서 심판을 연기하여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벧후 3:15) 하나님의 성품을 시사한다(Harrison).
 
성 경: [2:5]
주제1: [유대인에 대한 심판]
주제2: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 - 인간이 갖고 있는 완고함이나 회개치 않는 마음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상반된 대조를 보인다. '회개치 아니한'의 헬라어 '아메타노에톤'(*)은 하나님의 권고적인 회개를 뜻하는 '메타노이안'(*)과 부정접두사 ''(*)의 합성어이다. 이는 하나님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개조되거나 변화되지 않는 마음을 뜻하며, 동시에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거부하는 반항적인 의미를 내포한다. 이러한 반항은 빛에 대한 거부로서 온순하고 순종적인 마음을 잊어 버린 완고한 행동이다. 또한 '고집'에 해당되는 헬라어 '스클레로테타'(*)'완악', '완고' 또는 '잔인'을 뜻하는 '스클레로테스'(*)의 목적격으로서 영적으로 경화(硬化)되거나 딱딱하게 굳어버린 상태를 의미한다. 이들 두 단어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경고와 함께 자주 사용되었으며(9:27) 본절에서는 서로 연결되어 서로의 의미를 보다 선명하게 밝혀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죄인은 자기의 고집과 회개치 아니하는 마음으로 인하여 스스로 하나님의 진노를 쌓고 있는 것이다.
그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 '진노의 날'A.D. 70년 예루살렘이 로마의 티투스(Titus) 장군에 의해 포위되어 함락되던 것과 반드시 연관지을 필요는 없다. 1절에서 본절까지의 내용이 하나님을 거역한 유대 민족 전체에 대한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으나, 6절부터는 개인의 행위에 따른 심판이 분명하게 언급되고 있다. 따라서 본절은 민족적인 심판에 대한 언급이라기보다는 개인의 행위에 대하여 보응하는 마지막 심판으로 이해해야 한다(Luther, Calvin, Hendriksen, Harrison). 한편 '그 날'(*, 헤 헤메라)은 종말론적인 용어로서 '주의 날'(*, 헤 헤메라 퀴리우). 곧 심판의 날을 가리킨다(고전 3:13;살전 5:4). 16절에 언급 된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은 구체적으로 마지막 심판 날을 가리키므로 본절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성 경: [2:6]
주제1: [유대인에 대한 심판]
주제2: [행위에 따른 심판]
그 행한대로 - 심판의 기준이 되는 '행함'은 단순히 겉으로 드러난 행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생각하는 바까지도 포함한다(139:1-4). 본절에서의 '행함'은 특히 인간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었으며 또한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어떤 사람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지 않은 상태에서 많은 선을 베풀었을지라도 그의 선행이 아무 쓸모없는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이 하나님과 관련을 맺었으나 그 믿음에 따른 행위가 없으면 그는 구원을 얻을지라도 상급은 없다. 그러므로 본절은 인간이 하나님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서부터 시작하여 모든 행위에 그 보응을 받게 된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보응하시되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포도세이'(*)'아포디도미'(*) 의 미래 직설법으로 좋거나 나쁜 의미의 모든 보상을 뜻한다. 따라서 본 구절에 의하면 믿는 자에게는 선한 상급이 주어지겠지만, 불신자는 그 형편에 따라 형벌을 받게 될 것이다(고후 5:10). 그리고 그러한 심판은 누구도 예외가 있을 수 없는 공정한 것이다.
 
성 경: [2:7]
주제1: [유대인에 대한 심판]
주제2: [행위에 따른 심판]
참고 선을 행하여 - 본문을 보면 바울이 6절에서 언급했던 '행위'가 단순히 율법적인 차원의 것만을 의미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참고 선을 행한다'는 것은 성도가 영광의 면류관을 향해 끊임없이 달음박질 해나가는 것(3:12-14)으로 이해되는데 이는 이신 칭의의 가르침과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24:13;1:23;3:14;2:10). 성경에서 말하는 ''은 율법이 요구하는 것 이상이며 오직 하나님을 믿는 성도만 그 믿음에 따라 하나님과 이웃에게 ''을 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예수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와(10:25-37), 포도나무 비유(15;1-14)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성도의 선행이란 예수를 떠나서는 있을 수 없으며 오직 그와 연합된 가운데서 비롯될 수 있다. 즉 그리스도와 연합한 삶이 성령을 따라 사는 것이며(5:16-18;6:8), 그렇게 될 때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 가운데 선이 나온다(5:22, 23). 그리고 이 열매는 낙심하지 않고 참고 인내하며 행할 때 거두게 된다(6:9).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 - 이것들의 본질은 영생이며, 그것들이 나타나는 장소는 하나님의 나라이다. 즉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생을 누리며 사는 성도에게 주어지는 특권을 이 세 가지로 표현했다. 따라서 여기서 언급된 '영광'은 하나님의 속성과 관련되어 나타나는 '영광'과는 다른 것으로서(1:23 주석 참조) 성도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하게 될 때에 나타나게 될 변화를 가리킨다(J. Murray). 그리고 성도가 얻게 될 그 '영광''존귀한 것'이며 결코 '썩지 아니하는 것'이다.
영생으로 하시고 - 영생(*, 조엔 아이오니온)은 항상 궁극적인 구원으로 표현되었다. 유대교도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을 준다는 것을 가르쳤으나 그들은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고 율법을 행함으로 생명얻기를 원했다. 그러나 율법을 행하면서 썩어질 육체의 증표(證標)를 구하는 자들에게는 영생이 허락되지 않았다(8:6). 영생은 언제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만 찾을 수 있으며(6:23) 또한 그를 믿는 자들에게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1:12;3:15). 한편 본절에서 영생은 6절에 기록된 '하나님의 보응'의 목적격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8절의 '노와 분'이라는 말과 대조를 이룬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에게는 심판이라는 개념보다 생명이라는 개념이 더 중요하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부터 승리하시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후 그를 따르는 모든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과 영생을 소망하며 다시 오실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는 삶을 보장받고 있기 때문이다.
 
성 경: [2:8]
주제1: [유대인에 대한 심판]
주제2: [행위에 따른 심판]
당을 지어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토이스 여스 에리데이아스'(*)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구절이다. 왜냐하면 '에리데이아'(*)'보수(報酬)에 얽매인 고용인'이라는 뜻을 가진 헬라어 '에리도스'(*)에서 파생되었다면, 본절은 '이기적인 욕망이나 야망을 가진 자들에게'라고 번역될 수 있고, '다툼'이나 '논쟁'의 의미를 가진 헬라어 '에리스'(*)에서 나왔다면, '논쟁하는 자들에게'로 번역될 수 있기 때문이다. 1:16에서의 '에리데이아'(*)는 분명히 '에리스'(*)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빌 2:3에서는 '다툼'이라는 의미보다는 오히려 '이기적인 욕망'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외 갈 5:20이나 약 3:14 등에서는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내포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본절은 단순히 '당을 지어'로 번역되면 바울이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가 분명히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것은 두 가지 의미를 모두 합쳐서 '이기적인 욕망을 따라 논쟁에 가담하는 자들'로 이해하는 편이 좋다. 즉 진리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없어 어떤 분쟁이 일어나면 항상 쉽게 발뺌할 수 있거나 이익이 되는 편에서는 자들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은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 민중들 사이에서 나타나던 공통된 특징이었다.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 - 진리와 의는 상호 보충적인 관계로 쓰여진(4;24) 반면 진리와 불의는 상반적인 관계로 쓰여졌다(1:18;고전 13:6;살후 2:12). 진리로 자기들의 생활을 다스리지 않고(1:21) 강퍅하게 회개치 않는 마음으로 자기의 의를 좇는 자는 결국 불의에 순종하는 자로 나타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진리와 불의의 두 주인을 섬길 수 없기 때문이다. 진리에 대한 불순종은 불의에 순종하는 것이며 또한 붕의에 순종하는 것은 궁극적인 영원한 의를 포기하는 행위이기에 그들에게 주어질 것이라고는 하나님의 분노 외에 아무것도 없다. 그들에게 주어지는 분노는 불신앙에 따른 적극적인 불순종에 대하여 발생하는 것이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하시려는 궁극적인 구원을 거부하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보응은 더욱 가증될 것이다. 바울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라고 같은 말을 반복한 것도 그들에게 임할 진노의 강도를 보다 명백하게 나타내고자 한 것이라고 할수 있다.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 ''에 해당하는 헬라어 '뒤모스'(*)는 보통 '분노'로 번역되지만 '진노'(*, 오르게)와 특별한 구별 없이 사용될 수 있다. 바울이 유사한 의미를 가진 두 단어를 같이 사용한 것은 일종의 중복어법으로 하나님께서 불순종하는 자들에 대하여 무시무시한 진노로 보응하시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성 경: [2:9]
주제1: [유대인에 대한 심판]
주제2: [행위에 따른 심판]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 '각 사람의 영'(*, 파산 프쉬켄 안드로푸)이라는 표현은 사람의 영혼과 육체 중 '영혼'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바울은 ''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쉬케'(*)'사람'을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하기 때문이다(13:1;2:41, 43). 또한 전후 문맥상 '사람'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 고데(Godet)의 견해에 따르면 9절과 10절의 구성은 7절과 8절의 대조적 구성을 거꾸로 재배열 시킨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볼 때 '각 사람'이라는 말과 '각 사람의 영'이라는 말은 동일한 의미로서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 따라서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이라는 표현 역시 악의 계획을 추진하는 사람들에게 임할 보응의 보편성(6)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은 선을 행하는 각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 행한대로 하나님의 판단을 받게 된다.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 8절에 언급된 '노와 분'이 심판자이신 하나님 편에 속한 것이라면 본절의 '환난과 곤고'는 하나님이 발하신 '노와 분'으로 인하여 약한 자에게 내려지는 결과이다. 그리고 이 두 단어는 선을 행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상급인 '영광과 존귀와 평강'과 반대되는 것이기도 하다. 혹자는 '환난'은 외적인 것으로 '곤고'는 내적인 것으로 설명한다(Hendriksen).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 - 본 구절은 다음 10절에서도 반복된다. 구원이나 은혜와 마찬가지로 심판과 형벌에 있어서도 유대인이 우선적이다. 언약과 약속에 따른 복이 유대인들에게 먼저 주어졌듯이 그 복을 거절한 데에 대한 형벌도 유대인들에게 우선적으로 적용된다. 왜냐하면 우선적인 특권을 부여한 자에게 거기에 상응하는 책임을 묻는 것이 하나님의 법칙이기 때문이다(50:3-6;12:47, 48;벧전 4:17). 한편 본절에 언급된 '헬라인'은 모든 이방인을 대표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성 경: [2:10]
주제1: [유대인에 대한 심판]
주제2: [행위에 따른 심판]
영광과 존귀와 평강 - 7절에서도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이 나왔으나 본절에서는 '썩지 아니함' 대신 '평강'이 언급되었다 혹자는 이것을 '하나님과의 화목'(5:1)으로 이해하기도 하며(Black, Murray), 또다른 학자는 보다 넓은 의미로 해석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의 모든 축복 속에서 새롭게 변화된 영혼과 육체로 영원히 즐거워하며 충만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구원'이라고 설명한다(Hendriksen). 어떤 의미이든 바울은 악한 자에게 형벌로 내리시는 '환난과 곤고'(9)에 대조를 이루는 용어로서 '평강'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그 결과가 상반되는 것을 보여준다
 
성 경: [2:11]
주제1: [유대인에 대한 심판]
주제2: [행위에 따른 심판]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 - 본절은 앞 부분(1-10)과 그 다음에 이어지는 부분(12-29)을 이어주는 다리의 역할을 하는데, 문자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불공평도 없으시다', 또는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편애도 없으시다'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심판은 편파적(偏頗的)인 것이 될 수 없다. 이 사실은 '하나님의의로우신 판단'이라는 (5) 구절이 이미 증명한 바 있다. 하나님의 판단 기준은 특권이나 지위가 아니라 사람이 행한 일들의 성격이 어떠한 것이냐의 문제이다. '사람을 외모로 취한다'(*, 프로소폴렘프시아)는 개념을 히브리적 사고에서 온 것으로서 재판관의 편견이나 편애를 지시하는 의미로 쓰여졌다(삼상 16:7;대하 19:7;34:19). 하나님은 편견이나 편애가 없어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외형상 유대인에게 우선권을 부여한 사실과 모순을 이루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유대인 역시 그의 행한대로 판단받으며, 오히려 그들에게 있어서는 우선권이 부여된만큼 악행에 대하여 더 큰 환난과 곤고를 당해야 한다. 유대인이기 때문에 편견과 편애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또한 특권을 주장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라도 그분의 선하신 뜻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다(20:15). 오직 공의로우신 그분만이 판단받는 자들의 다양한 입장을 고려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로 있다.
 
성 경: [2:12]
주제1: [유대인에 대한 심판]
주제2: [행위에 따른 심판]
본절에서 바울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요지는 율법을 받지 못한 이방인이든지 율법을 받은 유대인이든지 누구나 자신들의 죄로 인해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에 순복했느냐 하지 않았느냐 하는 문제이다.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 '율법 없이'(*, 아노모스)라는 말은 부사로서 신약성경에서는 여기서만 사용되었다. '율법 없이'(*, 아노모스)의 명사형 '아노미아'(*)나 형용사형 '아노모스'(*)는 대개 '불법'이나 '범법'을 의미한다. 그러나 본절의 경우에는 '율법을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고전 9:21). '아노모스'14절의 '타 메노몬 에콘타'(*, '율법을 갖지 아니한')와 같은 의미로 해석되어야 하는 바, 계약을 맺어 율법의 기준에 따라 살기로 약속한 일이 없는 자들, 곧 씌어진 율법을 받지 않은 이방인들로 이해되어야 한다(2:23).
율법 없이 망하고...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 바울은 율법 없이 범죄한 자들은 '망한다'(*, 아폴룬타이)라고 서술하고 율법 아래서 범죄한 자들은 '심판을 받으리라'(*, 크리데손타이)고 서술한다. 이 두 단어는 모두 수동태로서 하나님의 능동적인 보응이 있을 것을 시사한다. 율법을 받지 아니한 이방인들은 우주 만물과 양심에 나타내신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파멸된 것이며(1:20), 율법을 받은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잘 알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순종하지 않았으므로 율법의 기준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특별히 유대인들이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게 된다는 주장은 매우 중요한 사상이다. 바울은 율법을 자랑거리로 여기지 아니하고 죄인들을 정죄하거나 규제하는 수단에 불과한 것으로 정의하였다. 그러나 율법은 심판의 기준이 되는 것이고, 율법 자체가 멸망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율법 아래서 범죄한 자들은 이 율법을 기준으로 심판받아 멸망에 이르게 될 것이다(J. Murray)
 
성 경: [2:13]
주제1: [유대인에 대한 심판]
주제2: [행위에 따른 심판]
율법을 - 12절에서와 마찬가지로 '율법'(*, 노모스)은 관사가 없이 사용되었다. 공인 본문(Textus Receptus, Majority Text)에는 정관사 ''(*)'노무'(*, '율법의')앞에 있는데, 대부분의 고대 사본(*, A. B)에는 이 관사가 생략되어 있다. 그런데 '노모스'(*, '율법')에 관사가 붙고 안 붙고에 따라 약간의 의미상 차이가 있다. (1) '노모스' 앞에 정관사 ''(*)가 붙으면, 거의 대부분 모세 율법을 의미한다. (2) '노모스' 앞에 관사가 붙어 있지 않으면 대부분의 경우 모세의 율법이나 율법의 특정한 조문(條文)을 의미하기 보다는 보다 포괄적인 의미로서 추상적인 법 개념을 의미한다. 즉 인간의 양심 속에 주어진 법이나, 자연적 계시 속에 나타난 법이나 어떤 순종을 요구하는 일반적인 개념의 법을 가리킨다. (3) 특수한 경우로서 관사가 생략되어 있으나 모세 율법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하는 경우이다. 이는 헬라어 문법상 이미 알려진 어떤 확실한 개념을 보다 선명하게 나타내거나 그 단어의 본래적 개념을 강조하고나 할 때 관사를 생략하는 용법으로서 율법의 특수한 의미를 강조하고자 하는 의도로 쓰인 경우가 있다. 만약 본절을 관사없는 사본을 따라 해석한다 하더라도 '율법'12절의 '율법'과 같은 것으로서 모세의 율법을 뜻하는 특수한 경우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J. Murray).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 유대인들은 율법을 받았을 뿐 아니라 익히 배우고 들어서 잘 알게 되었다. 이것은 그들의 자랑거리다. 그렇지만 이 지식은 그들을 심판에서 제외시킬 수 있는 힘이 될 수 없다. 율법을 들었으면 행해야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율법이 의의 법칙일지라도 그것을 행하는 사람만이 그것으로 인해 살리라고 가르친다(18:5;4:1). 그러나 본절은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 원리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범죄할 수밖에 없는 죄인(3:23)이라는 사실을 부각시키기 위해 이 논리를 전개하고 있을 뿐이다.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 본서에서 '의롭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카이오데손타이'(*)가 처음으로 등장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단지 자신들이 율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의롭게 되리라고 생각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문제가 달랐다(J. Murray). 글자 그대로 보면 '의롭게 된다'는 것이 율법을 행하는 자에게 해당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보다 근본적인 기준과 목적은 '하나님 앞에서'라는 말 속에서 찾을 수 있다. 바울은 행함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보시는 판단에 의하여 칭의가 결정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성 경: [2:14]
주제1: [유대인에 대한 심판]
주제2: [행위에 따른 심판]
이방인이 본성으로 -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본성(nature)을 따라 부분적으로 행할 수 있을지 모르나 완전히 행할 수는 없으므로 이방인 역시 죄인일 수밖에 없다. 간혹 이방인도 율법의 행위를 수행하면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논리를 펴는 자들이 있으니 이들은 바울이 전개하는 논리의 흐름을 전혀 파악하지 못한 자들이다. 비록 본절이나 앞절(13)에서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을 만족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표현하였지만 계속되는 바울의 논리는 어느 누구도 율법의 요구대로 완전히 순종할 수 없기에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3:9, 19). 무엇보다도 본절은 율법을 받았다고 자랑하는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받은 것 자체가 아무런 의미도 없음을 보여 주고 있으며, 이방인들도 양심의 법칙을 따라 율법이 요구하는 바 행위를 할 때가 있음을 가르침으로써 유대인들이 저지르는 어리석음을 경고하고 있다.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 인간은 그 본성에 심어진 양심과 생각 때문에 스스로 하나님의 율법에 직면하게 된다(J. Murray). 즉 인간들의 본성 속에 존재하는 도덕적 성향은 하나님의 일반적 계시에 의하여 생긴 것으로서 명령하거나 금지하는 양심의 소리를 수반한다(Murray). 이방인들은 유대인의 율법과 동일하지는 않지만, 그들은 본래적인 양심의 법을 따라 일반 계시의 도움을 받아서 하나님의 계시를 유비적(類比的)으로 받는다. 그러나 그들의 율법은 궁극적인 구원을 보장하지 않는다. 이방인이 갖는 양심의 법은 간혹 모세 율법과 비슷한 법과 규례를 가질 수 있으나, 율법의 궁극적인 의미에는 전혀 도달할 수 없다.
 
성 경: [2:15]
주제1: [유대인에 대한 심판]
주제2: [행위에 따른 심판]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 '양심'에 해당하는 헬라어 '쉬네이데시스'(*)는 문자적으로 '함께 안다'라는 의미로서 본절에서는 '함께 증거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쉼마르튀루세스'(*)와 함께 쓰여 사람의 마음속에서 연대적으로 증거하므로 율법처럼 증인으로서 그 역할을 감당한다는 뜻으로 쓰여졌다. 양심은 인간이 마음속에서 자신의 행동을 살피면서 때로는 자신을 정죄하기도 하며, 율법과 일치한 행동에 대하여는 스스로 선한 증거로 인정하기도 하는 인간의 '바른 인식의 주체'인 것이다(고전 8:7-12). 칼빈(Calvin)은 양심을 정의하면서 '합리적인 행위에 대하여서는 변호하며 악한 행실에 대하여서는 고발하고 유죄 선고를 내리기도 하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이러한 양심은 타락한 인간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도덕적 성품을 보여준다(고호 4:2). 그러나 양심에 화인 맞은 자들은 계속해서 죄 가운데 자신을 방치하여 스스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는 거짓 속에서 멸망으로 나아간다(6:3;딤전 4:2;1:15).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 이것은 인간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여러가지 생각이 갈등 상태에 놓여 있음을 보여 준다. 즉 사람이 어떤 잘못을 범했을 때 그 행위가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 한쪽에서는 그것을 합리화시키려는 생각이 일어난다. 이러한 갈등이 반복되는 상태가 모든 사람의 내부에 존재한다. 이것이 곧 인간의 양심에 새겨져 있는 율법적인 요소인 것이다.
율법의 행위 - 율법에 따르는 행위로 해석되기 보다는 율법적인 요소가 인간의 양심 가운데 활동하며 그것이 행위로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이 어떤 행위를 통해 양심의 갈등을 느낀 후에 이전보다 나은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 '율법의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성 경: [2:16]
주제1: [유대인에 대한 심판]
주제2: [행위에 따른 심판]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 본 구절은 문자적으로 '내 복음을 따라'(*, 카타 토 유앙겔리온 무)로 번역될 수 있다. 이 말은 바울 자신이 전파한 복음을 근거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이야기한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바울은 '내 복음'이란 표현을 취했는데, 이것은 협소한 의미로 사용되어 '이신 칭의'의 교리에 대한 것이 아니라 바울이 전파한 모든 내용을 가리킨다. 초대 교육 교부들은 이것을 '누가복음'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으나(Origen, Jerome)여기서는 바울의 전파 내용 중 종말론적인 설교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편이 타당하다. 왜냐하면 바울이 본절에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바울은 '내 복음'이란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복음'의 출처가 자기 자신인 것처럼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이는 바울의 사도적 권위와 깊이 연관되는 표현으로 바울 자신이 예수께로부터 사도로 세우심을 받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다는 인식을 드러내 주며 자기가 그 복음을 위해 택정함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부르심에 대해 전인격적으로 반응한다는 뜻에서 복음을 자신의 것으로 소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 이 용어가 원문에서는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라는 구절 뒤에 따라 나오지만, 굳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진 복음과 연결지을 핑요는 없다(Calvin). 오히려 본 구절은 하나님의 심판이 하나님의 단독 사역이 아니라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음을 나타내고자(5:27;17:31)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복음이 성취되어 인간들에게 주어졌듯이 그 복음으로 인한 심판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실행되는 것이 정당한 절차일 것이다. 예수께서도 심판날 왕권을 가지고 오실 것을 말슴하셨다(16:28).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 심판날에는 감추인 것이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드러나게 된다(고전 4:5). 예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외식을 신랄하게 비판하신 것도 어떤면에서는 마지막 날에 있을 심판에 대한 본보기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 앞에서는 선하게 행동하고 선한 말을 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중심을 보시기에외식하는 자들의 마음과 생각을 심판날에 남김없이 드러내실 것이다(12:36, 37).
그 날이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헤메라'(*)는 문장 맨 앞에 위치하여 강조적으로 사용되었다. 바티칸 사본(B;codex Vaticanus)에서는 정관사 ''(*)가 표기되어 있는데 문법상으로는 맞는 듯하다. 그러나 이처럼 정관사를 생략하는 것은 바울의 서술 방법 중 하나이다(12). 더욱이 5절에서 '그날'에 대해 언급하면서 정관사를 사용했기 때문에 굳이 이를 사용하지 않아도 의미가 통하고 본절에서는 내용 자체가 마지막 심판 날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으므로 생략한 것 같다.
 
성 경: [2:17]
주제1: [유대인에 대한 심판]
주제2: [형식적 율법주의]
개역 성경에는 번역되어 있지 않으나 본절 첫머리에 '이데'(*, '보라'), 혹은 '에이 데'(*, '그러나 만약')가 있다. 흠정역(KJV)이 번역한 공인 본문(Textus Receptus)은 전자를 취하지만, 대부분의 사본들과 비교적 오래된 사본들(*, A, B, D, K, )은 후자를 취하였다. '에이 데'는 직설법과 함께 사용되어 실제로 발생될 수 있는 상태를 가정하는 조건절을 갖는다. 따라서 본절의 '에이'(*, '만약')20절까지 조건문으로 취한다.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 '칭하는'의 헬라어 '에포노마제'(*)'이름을 붙이다' 또는 '칭함을 받다'라는 뜻을 가진 '에포노마조'(*)의 현재 조건문으로 그 의미는 '유대인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이다. 여기서 '유대인'(*, 유다이오스)'히브리인'(*, 헤브라이오스)이나 '이스라엘인'(*, 이스라엘리터스)이라는 용어와 구별된다. 히브리인이라는 호칭은 언어 군()의 개념을 강조하고 있고, 이스라엘인이라는 호칭은 구속사적인 개념을 강조하는데, 유대인이라는 호칭은 헬라인이나 이방인들과 상대되는 개념으로서 모세 율법을 중심으로 형성된 종교 공동체로서의 특성을 반영한다.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 유대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부여받은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 특권을 자랑할 뿐 아니라 그 특권을 받지 못한 이방인들을 경멸하기도 했다. 이러한 우월감이 하나님께 감사하며 순종함으로 나타났으면 하나님께 칭찬을 받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나, 그들은 특권만을 중요하게 여기며 그에 따르는 책임을 무시했다. 그들은 제사장 나라에 걸맞는 거룩한 백성으로서의(19:6) 특권을 유지하려면 '언약을 지켜야 할'(19:5) 책임이 있음을 무시했다. 그들은 율법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자랑한다고 내세웠으나 실상은 율법의 요구에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못하면서 그들이 부여받은 특권만을 자랑스럽게 여겼던 것이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모습은 세례 요한의 책망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3:9).
 
성 경: [2:18]
주제1: [유대인에 대한 심판]
주제2: [형식적 율법주의]
본절에서는 유대인들이 율법을 통해서 얻게 된 유익이 언급되어 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길은 하나님께서 친히 계시해 주셔야만 가능하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해서 여러 모양으로 계시하셨기에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 달리 하나님의 뜻을 아는 백성이 되었다. '하나님의 뜻'은 구체적으로 '구원 계시'를 가리키지만 좀더 폭넓게 하나님의 섭리까지도 포괄할 수 있는 용어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구원 계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를 통한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계시된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생활이 요청된다.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 본 구절에 대해서는 해석자들마다 약간씩 견해가 다르다. 예를 들어 틴델(Tyndale)'선악에 대한 경험을 가지는 것'으로 해석하며, 모펫(Moffat)'종교에 있어서 생동력있는 것에 대한 의식을 가지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또한 영역 성경중에서 이 구절을 '도덕적인 구분에 대한 지식을 가지는 것'으로 번역하기도 한다(NEB). 이러한 해석상의 어려움을 피하기 위해 칼빈(Calvin)은 선한 것을 받아들이는 것과 선악을 구별하는 것을 동시에 인정한다. 이러한 해석은 메튜 헨리(Mattew Henry)같은 주석가도 동의한다. 그렇지만 본문이 뜻하는 바는 칼빈의 첫번째 견해에 더 접근해 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본절은 유대인들이 단순히 선악간에 판단한다기 보다는 율법의 선한 교훈을 인정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율법을 통해 선한 것을 인정한다는 사실은 그 선을 옳은 원리로 받아들였다는 의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믿음으로 율법에 따르는 선한 삶을 살지 않은 어리석음을 저질렀다. 이러한 어리석음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한'(1:21) 이방인들의 어리석음과 동일하다.
 
성 경: [2:19]
주제1: [유대인에 대한 심판]
주제2: [형식적 율법주의]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 본절에 해당하는 헬라어 본문을 부산 구문의 형식으로, 직역하면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양을 가지고서'가 된다. 이에 대해 칼빈(Calvin)은 이유를 나타내는 분사 구문으로 이해하여 '지식과 진리의 모양을 가지고 있으므로'라고 해석했다. 그리고 영역 성경 중에서도 이 구절을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because)를 사용하여 번역했다(NIV). 이러한 해석은 본문의 흐름상 적합하다고 본다. 한편 '지식''진리'는 특별한 의미상의 구별 없이 중복어법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한다(Black). 그리고 '규모'에 해당하는 헬라어 '모르포시스'(*)'모양'이나 '외모'를 뜻하지만 외적인 모양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참된 표현'을 의미하기도 한다(Barmby). 그래서 혹자는 '모르포시스''본질'(*, 휘포스타시스)과 같은 의미로 해석하기도 했다(Black). 간혹 학자들 중에는 '모르포시스'를 유대인들의 '외식'과 같이 '과장된 외형'(Calvin)이나 '경건이 없는 겉 모양'(Matthew Henry)으로 이해하기도 하나 이러한 해석은 본문의 성격상 적합하지 않다. 본문에서는 유대인이 율법을 통해 가진 지식이나 진리가 거짓되다든지 알맹이가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유대인들이 율법을 통한 참된 지식의 본질을 소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Murray, Barmby) 그 지식을 좇지 않고 자기 임의대로 행하는 것을 책망하는데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 - 성경에서 소경과 어두움에 있는 자는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눈이 먼 상태에 있다는 것은 어둠 가운데서 헤매이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42:19;56:10;6:23;1:5;고후 4:4;요일 2:11). 여기서도 바울은 역시 중복어법을 사용하여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내용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어두움에 있는 자들의 빛'이라는 표현은 이방인을 향한 유대인들의 사명을 시사한다. 유대인들은 토라를 자기의 등불이라고 생각한 것처럼 토라를 소유한 자신들이 이방인들에게 등불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사명마저도 자신들의 특권을 자랑하는 도구로 삼고 말았다. 오늘날 성도들도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라고(169:105) 고백하면서 빛된 삶을 살지 못한다면 유대인들처럼 말씀을 가졌다는 것만으로 자랑하려 하는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성 경: [2:20]
주제1: [유대인에 대한 심판]
주제2: [형식적 율법주의]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아이의 선생 - 영적으로 '이리석은 자''어린아이'는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어린아이'가 영적인 의미에서 상징하는 바가 '연약한 존재'(고전 14:20;4:14) 또는 '어리석은 존재'(22:15)로 나타난 점으로 미루어 보아 본 구절도 앞절과 마찬가지로 중복어법에 의한 강조적인 형식을 취하고 있다. 한편 '훈도'란 용어는 헬라어 '파이듀테스'(*)로 보통 '선생'으로 번역되는 헬라어 '디다스칼로스'(*)와 동일한 의미를 지니지만, 좁은 의미에서 '파이듀테스'는 잘못을 범할 때 채찍질도 가하는 '엄한 선생'을 가리킨다.
스스로 믿으니 -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결정적인 잘못은 특권을 부여받은 자들이라는 자기 만족에 빠져 있었다는 사실이다. 부울은 갈라디아서에서도 유사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6:3, 4) 본절과 같이 행함 없는 자랑을 위선이라고 폭로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갖지 못한 특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 특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 특권으로 말미암아 더 큰 행악에 빠지게 된 것이다. 그들은 자기의 신념을 신뢰하였을 뿐만 아니라 부패한 인간의 도덕적 무능력에 지나친 기대를 가짐으로 인하여 아무것도 아닌 초라한 가운데서 자신을 속이는 잘못을 범하였다. 또한 율법주의자들은 그 이웃들에게 자신도 질 수 없는 무거운 짐들을 지우는 반율법적인 잘못을 범하였으며 더 나아가 그들의 신념은 자신을 속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결과를 초래함으로 인하여 스스로 하나님의 징계를 초래하고 말았다.
 
성 경: [2:21]
주제1: [유대인에 대한 심판]
주제2: [형식적 율법주의]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 이 질문은 유대인들의 형식적인 삶에 대하여 다음에 계속되는 네 가지 질문을 유도하기 위한 대표적인 의문문이다. 그리고 이 질문은 유대 랍비들의 문헌에서 자주 발견되고 있다(Hendriksen). 유대교 지도자들은 자신들만이 율법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진리를 알고 있다고 자부했고(9:34), 이 점은 주님께서도 인정해 주신 바 있다(23:3). 그들에게 있어서 문제는 자기들이 가르치는 바를 자신들은 지키지 않으면서 의로운 체 하는 그들의 외식이었다(23:23-28). 이러한 의미에서 유대교 지도자들은 여호와 신앙을 형식적인 종교로 전락시킨 책임을 면할 수 없다. 그들은 입술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행동으로는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처럼 나타내 보이지만, 실상 그들의 심령은 전혀 하나님과 무관하며 단순히 형식적이고 외면적인 종교 지도자에 불과했다.
 
성 경: [2:22]
주제1: [유대인에 대한 심판]
주제2: [형식적 율법주의]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 '간음'에 해당하는 헬라어 '모이큐오'(*)는 히브리적 표현에서 '영적 간음'이나 '우상 숭배'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나(2:22) 본절에서는 우상 숭배를 따로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영적 간음'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바울은 의도적이며 구체적인 사실을 선명하게 표현하면서 그들 가운데서 실제로 행해지고 있는 온갖 음행과 간통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율법주의자들은 가장 엄격한 율법을 종교의 원리로 삼고 있었지만, 그들의 도덕적 기준은 여전히 부패한 인간 본성의 심연에 머물러 있었다.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 물건을 도적질하느냐 - 앞에서 언급된 '도적질''간음'이란 용어를 비추어 볼 때 바울은 십계명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유대인은 십계명에 따라 우상을 가증스럽게 여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이나 우상을 위해 만들어진 것을 탐내어 도적질했다. 신사(神社) 물건을 도적질 한 것이 악행인가에 대해서 성경이 명백히 가르치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따지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본절에서 바울은 그러한 행위가 죄인지 죄가 아닌지에 대해서 논하고자 이 질문을 내놓은 것이 아니라 가증스러이 여기는 우상 제물을 탐낸, 우상 숭배 이상의 죄악을 폭로하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신명기에서는 이 문제를 암시적으로보여주면서 그 행위가 죄가 된다고 교훈하고 있다. 즉 신명기는 우상들에 입힌 은이나 금을 탐내어 취하지 말라는 말씀과 함께 그 금지의 이유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일로 인해 올무에 빠질 것이 염려되기 때문인 것을 들고 있다(7:25).
 
성 경: [2:23]
주제1: [유대인에 대한 심판]
주제2: [형식적 율법주의]
학자들 사이에는 본절을 의문문으로 해석하느냐 평서문으로 해석하느냐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평서문을 주장하는 학자들(Cranfield)24절에서 헬라어 원문상 24절에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가르'(*)가 사용되고 있으므로 본절은 그 접속사를 유도할 만한 이유를 묻는 의문문이 되든지 아니면 그 이유를 유도해 내는 평서문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본절은 이유를 묻는 의문문의 성격을 띠지 않았으므로 이유를 유도해 내거나 확정을 나타내는 평서문이 되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게 생각할 근거는 본문 가운데서 발견할 수 없다. 오히려 24절의 접속사 '가르'(*)21절에서 23절까지에 언급된 다섯 가지 질문을 하게 된 근거를 설명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본절은 내용상 앞에서 언급된 네 가지 질문의 형식과 잘 부합될 뿐 아니라 특히 21절에 언급된 첫번째 질문을 보다 구체화시켜 대비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면서 그 나머지 세 가지 질문을 요약한 질문도 된다. 따라서 본절은 의문문으로 해석하는 편이 본문 이해에 더욱 도움이 된다.
율법을 범함으로 - 이말은 유대인들이 범한 잘못들(22, 23)이 곧 율법을 범한 행위임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21절에서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는 질문의 내용이 율법을 범하고 있는 사실에 대한 것임도 본절에 잘 나타나고 있다.
 
성 경: [2:24]
주제1: [유대인에 대한 심판]
주제2: [형식적 율법주의]
기록된 바와 같이 - 이 표현은 본절이 사 52:5의 인용구임을 시사해 준다. 이렇게 함으로써 바울은 이사야 선지자의 권위를 내세우는 동시에 자신의 논리를 더욱 확고히 정당화시킬 수 있게 되었다. 비록 바울이 이사야 선지자의 직접적인 선포를 간접적인 내용으로 변형시켰으나 내용상으로는 동일한 의미를 유지하고 있다.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 당시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을 마치 하나님과 동일한 인격을 소유한 거룩한 백성인 양 취급했다. 그것은 실제로 그들의 삶이 고상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들의 지나친 자랑에 이방인들이 속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방인들이 바울이 고발한 것과 같은 유대인의 범죄함을 발견한다면 유대인들은 스스로 하나님을 모독하는 도구가 되고 말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자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하는 자들임을 바울은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J. Murray).
 
성 경: [2:25]
주제1: [유대인에 대한 심판]
주제2: [형식적 율법주의]
네가 율법을 행한즉 할례가 유익하나 - 바울은 유대인들의 가장 큰 자랑거리인 율법과 함께 또 다른 자랑거리인 할례의 문제로 주의를 환기시키면서 자신이 의도한 복음의 본질에 한 걸음 더 접근하고 있다. 유대인을 이방인과 구별시키는 유일한 기준은 율법이지만 표식은 할례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지금까지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들어 논리를 전개해 왔지만, 이제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의 자랑거리요 표식인 할례 문제를 거론함으로써 더욱더 유대인들이 변명할 수 없도록 만들고 있다. 여기서 '율법을 행한다'는 것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을 좇는 것으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하나님의 편에 서 있을 때 유대인들의 할례가 그진가를 발휘할 수 있는 것이지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형식적인 할례 의식에 그치며 이는 그들을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계속 유지시킬 수 있는 신적인 힘을 상실케 하고 만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에게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3:9)고 경고했던 것이다.
네 할례가 무할례가 되었느니라 - 유대인들은 할례 자체가 의의 조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조건, 구원의 조건이 되는 것으로 오해했다. 실제로 유대교의 전승에 따르면 '게헨나(지옥) 문 옆에 앉았을지라도 할례받은 사람은 아무도 지옥에 떨어지지 않도록 아브라함이 책임을 져 준다'는 내용의 교훈이 있다(Harrison). 이와 같이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할례가 다른 어떤 의식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형식적인 유대인들의 할례는 무할례와 같다고 선포한 것은 혁명적인 선언이었다. 이러한 바울의 선포로 인해 유대인의 자랑은 쓸모없는 것으로 변하게 되며 형식적인 신앙에서 실제적인 신앙으로의 결단이 요구되고 있다.
 
성 경: [3:1]
주제1: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
주제2: [유대인의 특권]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 지금까지 할례의 무효성과 표면적인 유대인에 대해 공격하던 것을 잠시 멈추고 바울은 이제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 비록 불법과 불신앙으로 인해 하나님의 축복에 동참하지 못한 유대인이라 할 지라도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바 축복은 일단 인정해 줄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바울은 그 자신이 유대인이면서 이방인의 사도가 될 수 있었던 사실에 비추어 유대인의 우선 순위 내지 우월성에 대해서 언급한다. 즉 바울 자신이 말씀을 먼저 받은 유대인이기 때문에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을 고백적으로 본절과 2절에서 진술하고 있다. 한편 '나음'에 해당하는 헬라어 '토 페릿손'(*)'넘치는', '남아도는', '두드러진', '필요없는' 등의 의미를 가진 형용사가 정관사 ''(*)와 함께 명사형으로 사용되었다. 이 말은 '쓸모없이 남아도는 여분'을 의미할 때도 사용되었고(고후 9:1), 부사적 용법으로서 '과도하게 풍부하다'는 의미로도(고후 10:8) 쓰였다. 본절에서는 의문대명사 ''(*)와 함께 사용되어 유대인이 가진 '탁월성' 또는 '우월성'(superiority)을 의미한다.
 
성 경: [3:2]
주제1: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
주제2: [유대인의 특권]
범사에 많으니 - '많다'(*, 폴뤼)라는 말은 1절의 '토 페릿손'(*)을 의미한다. 유대인들에게 유익이 많았다는 의미는 바울이 밝힌 바와 같이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9:4)이 주어졌다는 표면적인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실제로 그들은 하나님의 정하신 제도와 규례 아래서 많은 유익을 얻을 수 있었다(2:25). 바울이 이와 같이 유익을 인정하는 것은 지금까지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서 섭리하신 하나님의 경륜(經綸)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며, 또한 인간의 불신앙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폐할 수 없기 때문이다(31).
첫째는 - '첫째는'으로 번역된 '프로톤 멘'(*) 뒤에는 당연히 '둘째', '셋째' 등의 서수가 기대되지만 바울은 '첫째는' 외에 더 이상의 논리를 전개시키지 않는다(1:8). 본절에서는 문맥상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1) 순서상 앞선다는 의미로서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느 민족보다도 '먼저' 받았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고(Robertson), (2) 그 중요도나 비중에 있어서 첫째라는 의미로서 유대인에게 가장 첫째되는 유익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Bruce). 문맥상 (2)의 견해가 타당하다.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 9:4, 5에서 바울은 보다 자세하게 유대인이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특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 중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된 것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언약들과 율법', '예배와 약속들'이 그것이다. 칼빈은 '하나님의 말씀'을 좁은 의미로 해석하여 율법과 선지자들을 통해서 증명되고 해석된 '언약'이라고 지칭하였다. 그러나 블랙(Black)'말씀'에 해당하는 헬라어 '로기아'(*)'예언적인 말씀'(oracles)으로 번역하여 주로 '구약의 약속''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것으로 이해한다. 또한 구약성경을 포함하고 있다는 생각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대부분의 주석가들도 9:4, 5를 근거로 '말씀''구약성경'이라는 포괄적인 의미로 해석한다(Matthew Henry, Greijdanus, Hendriksen, Murray, Lenski, Barmby). 왜냐하면 바울은 유대인들이 구약성경 전체를 통해 하나님의 특별 계시를 받음으로써 이방인과 달리 하나님의 뜻을 더욱 잘 아는 백성이 되는 축복을 받게 된 점에 대해 진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맡았음이니라'는 용어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것뿐 아니라 그것을 전승시키고 가르치며 전파하는 등, '말씀'과 관련된 사역 전체를 함축하고 있다.
 
성 경: [3:3]
주제1: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
주제2: [유대인의 특권]
어떤 자들이 - 유대인들 가운데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도 있으므로 바울은 '유대인'이라 총칭하지 않고 부분적인 의미의 부정 대명사를 사용했다. 어찌하리요(*, 티 가르에이). 1:18에 기록된 '그러면 무엇이뇨'(*, 티 가르)와 같은 감탄조의 어투이기도 하지만 본장에서는 이어지는 두 가지의 질문 형식과(5, 8) 같이 부정의 대답을 원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바울은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특권을 완전히 무사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그 특권 속에서 무한한 것을 기대하며 착각하는 자들을 깨우치기 위해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강한 부정을 유도하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용법은 바울이 흔히 사용하는 논쟁적인 문체 속에서 자주 발견되는 것으로서 유대교 랍비들의 논쟁법을 인용한 수사법(修辭法)이라고 할 수 있다(E. Kasemann).
믿지 아니하였으며...그 믿지 아니함이 - 본 구절은 해석상 여러 견해가 있다. 본절에 사용된 동사 '에피스테산'(*)과 명사 '에피스티아' (*)가 개역성경처럼 '불신앙'의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성실함이나 믿음의 부족'을 의미한다는 견해도 있다. 혹자는 이 두 가지 의미를 다 포함한다고 주장하지만(Greijdanus) 본질적으로 두 가지 의미를 합쳐질 수 없다. 영역본의 견해는 다음과 같이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1) '불신앙', 이 의미에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배척했다는 어감이 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을 대적할 정도로 신앙이라고는 조금도 없고 오히려 적이 되었다는 의미이다(Alford, Bultmann, Hodge, Lenski, Hendriksen, Ridderbos, Harrison, Bruce, RSV, NEB, Moffat, JB). (2) '믿음의 결여'. 이 해석은 하나님을 배척했다는 의미보다 '적은 믿음'이라는 의미로 '믿음'에 있어서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이고, 믿음의 강도(强度)가 어느 정도 약하다는 의미가 강하다(Cranfield, Greijdanus, Sanday, KJV, NASB, NIV). 따라서 이 해석은 믿음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해석이 된다. 그러나 히 3:12에서 언급된 '아피스티아'(*)는 분명히 '불신앙'을 나타내며, 딤후 2:13에서도 하나님의 '미쁘심'과 인간의 '미쁨 없음'을 대조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본절도 그러한 형식을 취해 '불신앙'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4:20의 경우와 같이 해석하기 애매한 구절이 있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성경 전체에서 이 단어들은 '믿음의 결여'라기 보다는 '불신앙'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또한 히브리서 저자가 '그 들은 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4;2)고 언급한 것은 유대인들의 '불신앙'에 대한 것이지 '믿음의 결여'에 대한 것이 아니다. 이는 히 4:3에서 '불신앙'으로 인해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유대인들에 대하여 설명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본절도 약속에서 제외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졌던 '불신앙'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뇨 -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백성에서 제외된 것은 그들의 불신앙에 기인한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약속에 신실하지 못했다는 논리는 있을 수 없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말씀에 불성실하거나 불신앙의 삶을 살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신 약속을 취소(取消)하실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 적은있다(8:18-20;2:19-21). 그렇지만 그들의 불신앙으로 인해 하나님의 약속에 포함된 것들 특히 메시야 예언 등이 무효화될 수는 없다.
 
성 경: [3:4]
주제1: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
주제2: [유대인의 특권]
그럴 수 없느니라 - 이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 게노이토'(*)는 히브리어 '할릴라'(*)와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70인역(LXX)'할릴라''메게노이토'로 번역하고 있다(44:7;24:16;왕상 21:3). 이 말은 강한 부정을 나타내는데 사용된다.
사람은 다 거짓되되 - '모든 사람이 거짓되다'는 것은 시 116:11의 인용구로서 인간의 불의함, 신실치 못함 등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더 나아가서 23절의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는 내용과도 부합된다.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 3절의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보다 강력하게 하나님의 미쁘심을 설득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 알레데스)되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알레데스'는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 로기아), '미쁘심'(*, 피스티스), ''(*, 디카이오스)와 함께 연결되어 서로 보충적으로 하나님의 속성을 보여준다. 인간이 가진 불신앙과 거짓과 불의는 참되신 하나님을 자기의 소욕에 따라 마음대로 판단하려는 죄악된 생각으로 나타난다. 반면에 ''(*, 알레데스)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목적과 약속은 일관성이 있으므로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J. Murray). 이처럼 변하지 않는 참되신 하나님의 속성 때문에, 사람의 믿음이나 진실여부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영원히 동일하다(100:5).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 본 구절은 시 51:4(LXX 50:6)의 인용으로, 천상(天上)의 법정을 연상시키는 동시에 시편 저자 자신의 죄와 무법을 생생하게 표현한다. 그는 죄에 대한 고백을 반복적으로 하는데(LXX 50:4, 5, 7, 11), 이러한 표현은 시편에 그리 흔하지 않은 독특한 용법이다. 아마 유대적 관점에서 무법(lawlessness)과 불신앙(faithlessness)을 동일하게 보기 때문에 바울이 이 구절을 인용한 것 같다(Dunn). 바울은 시편 기자의 표현과 같이 천상 법정의 공의로움이 사람의 죄악을 드러내기에 충분하고, 그 판단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이처럼 사람의 상대적인 믿음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미쁘심을 어떻게 하지 못한다는 것(3)을 설득력있게 말한다. 요컨대 이 인용은 인간의 불의함과 거짓됨을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참되심에 대조시키기 위한 것이다.
판단받으실 때에 - '판단받으실 때'에 해당하는 시 51:4의 히브리 본문이 개역성경에는 능동형인 '판단하실 때'로 번역되어 있으나 70인역(LXX)에는 바울의 인용대로 수동태로 번역되었다. 개역성경은 하나님께서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판단받을 수 없다는 입장에서 번역하고 있지만, 우리는 수동형이든 능동형이든 하나님께서 그 어떤 것으로부터 판단받는다는 의미로 다윗이 고백하거나 바울이 인용한 것이 아님을 주목해야 한다. 즉 시편에 나타난 다윗의 의도는 비록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를 범했으나 그 죄에 대해 책망하시는 하나님은 의로우심을 나타내는 데 있다. 죄인된 인간은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에 대해서 아무리 판단해 보아도 하나님의 순전(純全)하심에는 손상을 가할 수 없다. 따라서 죄인된 인간이 하나님의 판단에 대해 논하든지 하나님께서 그 죄인된 인간을 판단하시든지 그 어느 것도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순전하심에 한치의 도전도 되지 못한다. 하나님의 판단이 어떠한 일에 있어서도 결코 왜곡되지 않고 의롭기 때문에 '이기려 하심이라'는 표현이나 '순전하시다 하리이다'(51:4)란 표현은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이기려 하심이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니케세이스'(*)를 제외한 본절 전체가 70인역의 번역과 똑같다. '이기다'에 해당하는 이 단어는 비교적 오래된 사본들(*, A, D)에서는 미래형 '니케세이스'(*)로 되어 있고 70인역(50:6)과 몇몇 사본들(B, G, L, )에서는 단순과거 가정법 동사인 '니케세스'(*)로 되어 있다. 바울이 자신의 의도대로 시편의 내용을 인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바울은 종말의 심판과 사람의 죄를 연관지어 생생하게 표현하려고 미래형으로 쓴 것 같다.
 
성 경: [3:5]
주제1: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
주제2: [유대인의 특권]
본절에서 바울은 앞절(4)에서 인용한 시 51:4에 대해 유대인들이 오해할 것을 염려하여 부가적인 설명을 덧붙여야 할 필요성을 느낀 것 같다. 혹자는 이러한 견해와는 달리 바울은 단지 자기 교훈에 대한 유대인의 반대에 답변하고 있는 것이지, 오해나 잘못된 추론(推論)에 답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Hodge). 그러나 바울은 8절에서 단순한 유대인의 반대가 아니라 앞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은 바울의 진술에 대한 오해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약속을 어기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신실하게 언약을 맺어 오셨던 유대인들을 버리신 것은 공정한 처사가 될 수 없다는 유대인들의 반론이 나올 수 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시거나 약속을 저버리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저지른 죄악에 대하여 공의의 판단으로 징계(懲戒)하시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유대인으로서 바울은 자신의 체험을 통해서도 이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하리요 - 지금 바울은 5;20에서와 같이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라는 의미로 진술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불의는 결코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빛나게 할 수 없다. 오히려 인간의 불의를 의로우신 판단으로 징계하심으로써 상대적으로 하나님의 의가 더욱더 드러나게 된다.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 유대인들에게 할례와 언약들과 율법을 주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진노를 내리셨다고 해서 하나님이 불의하신 분은 아니다(3). 문제는 유대인의 불신앙과 불의며, 하나님은 그에 대해 공의로운 판단을 내리셨을 따름이다.
 
성 경: [3:6]
주제1: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
주제2: [유대인의 특권]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 본 구절의 헬라어 본문은 4절과 마찬가지로 '메 게노이토'(*)이다(4절 주석 참조).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 -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들의 불신앙과 불의에 대해 진노를 내리신 하나님이 불의하시다면, 하나님은 심판주로서 자격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는 절대적이므로 이러한 '절대 의'로 인하여 발생하는 진노는 정당성을 갖는다. 구약에서는 심판자의 개념을 사사들에게서 찾을 수 있는데 이들은 법률에 적용되는 소송을 심리(審理)함으로써 공정하게 권위를 사용하는 공직자로서 법정 안에서만 정당한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족장 시대에는 가장이 가정의 재판관이었으며(21), 왕정 시대에는 왕이 최고의 재판관이었다(삼하 15:2, 3). 때로 제사장들도 재판관 노릇을 하였으므로 성소가 재판 장소가 되기도 하였다(33:8;17:12). 그 외에 성읍의 장로들도 재판관의 임무를 감당했으나(8:6;4;2)사람에 관한 판결을 선언하는 데 있어서 최고의 심판자 개념은 언제나 하나님에게 있었다(18:25;33:22;4:12). 하나님은 '모든 세계를 판단하시는 분'(94:2),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는 분'이다(2:4). 그러나 죄인은 언제나 공평한 하나님의 심판을 회피하려고 하였다(7:8;50:4, 5;10:30). 신약에서는 '심판''크리노'(*), '크리마'(*), '크리시스'(*)등의 단어로 나타나는데, '조사한 후 판결하다' 또는 '분별'이나 '결정' 등의 의미로 쓰였다. 구약의 심판이 하나님의 모든 율법과 규례에 대한 도덕적 판단의 의미로 사용되었다면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새로운 권위에 의하여 판단하는(8:16;5:9;벧전 4:5) 종말적인 의미로 더 많이 쓰여졌다(고전 6:2, 3;딤후 4:1). 따라서 본절에 쓰인 '심판'(*, 크리네이)의 개념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이룩된 신성한 도덕적 질서, 다시 말해서 율법적인 기준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았느냐 하는 것에 의하여 판단받는 것을 의미한다(24-26). 후자의 조건을 갖춘 자는 전자의 조건과 관계없이 그의 영원한 운명이 결정될 것이지만(8:1)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은 전자의 판단 기준 곧 심은대로 거두게 되는(6:7) 육체의 법을 따라 정죄받으며 육체로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없는 종의 자리에서 율법에 의하여 정죄와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2:12;2:16).
 
성 경: [3:7]
주제1: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
주제2: [유대인의 특권]
그러나 - 이 접속사에 대해 몇몇 헬라어 사본들(B, D, G, K, P)은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가르'(*, '왜냐하면...때문이다')를 사용하고 있다. 개역성경과 같이 역접 '그러나(*, )를 취할 경우(*, A), 형식상으로는 앞 구절(6)에서 언급한 것을 반대하는 구문이 된다. 그러나 본절은 6절과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내용상으로나 문장 구조상 5절과 연결된다. 5절과 본절의 관계를 보다 명확히 파악하기 위해 6절은 삽입구로 볼 수 있다. 그럴 경우에 본절은 5절과 연결되어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에 대한 진술로 서로의 내용을 보충한다. 이와 반대로 '가르'(*)라는 이유 접속사를 사용할 경우 본절과 8절은 의미상 5절이나 6절 그 어느 절에도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않는다. '가르'는 어떤 판단의 진술 후 그 진술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는 절을 이끄는 데 적합한 접속사이다. 따라서 '가르'가 본절에 사용될 경우에는 앞 구절과 연결되어, 5절의 의문에 대한 답변으로서의 절을 이끌지 못한다. 그러므로 ''(*)가 더 적합한 접속사로 보인다.
나의 거짓말로...그의 영광이 되었으면...심판을 받으리요 - 이 말은 '나의 거짓과 불의가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그의 영광을 드러내고 선포하는 것이라면 나 자신은 죄인 취급되어 심판을 받을 이유가 없지 않느냐'는 의미를 지닌 궤변(詭辯)이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8절 후반부에서 '저희가 정죄받는 것이 옳으니라'고 선포하고 있다. 한편 본문만을 따로 떼어내어 '심판을 받으리요'라는 반문을 '심판을 받을 수 없다'는 의미로 해석하여, 우리의 거짓말과 불의가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결론짓는 것은 불경건한 자들의 입장에서나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상황 윤리가 설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성 경: [3:8]
주제1: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
주제2: [유대인의 특권]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 나의 거짓말과 불의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나는 결코 죄인 취급을 받지 않는다고 자신의 잘못을 합리화한 결과는 본절과 같이 보다 적극적인 궤변에 빠지게 된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부모님에 대한 공양(供養)의 책임을 하나님을 섬긴다는 이유로 무시해 버린바 있다(7:11). 바울도 예전에 하나님을 위한다는 종교적인 열심으로 선을 이루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께 대해 악을 행한 적이 있다(8:3;9:4). 비록 바울이 그때에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명목으로 사람들을 핍박하였으나 이제는 태도가 변하여, 오히려 유대인이 바울의 과거에 범했던 똑같은 잘못을 범하고 있음을 바울은 간파하고 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잘못 이해한 자들의 시각에는 바울의 주장이 도덕 폐기론(Antinomianism)과 같이 여겨질 수도 있으나 그들의 소행은 자기 눈의 들보를 보지 못하는 치명적인 잘못을 범하고 있다는 것이다. 율법 아래 매여 율법의 종된 자들은 그들의 울타리 속에서 믿음을 판단하려 하지만, 거짓 판단으로 선을 이루려는 그들의 시도는 오히려 더 큰 악을 만들려는 노력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저희가 정죄받는 것이 옳으니라 - 이 판단의 근거는 7절과 8절의 반문식 부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의와 불법이 공존할 수 없고 빛과 어두움이 사귈 수 없으며 그리스도와 벧리알이 도무지 조화될 수 없음에도(고후 6:14, 15) 그것이 가능한 것처럼 합리화하려는 자들이나 또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바울은 본 구절로써 최종적인 결론을 내리고 있다. 사실 바울 당시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도 바울의 교훈을 곡해(曲解)하여 도덕 폐기론을 주장하는 자들이 있었으므로 이러한 바울의 논술은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아줄 수 있었다.
 
성 경: [3:9]
주제1: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
주제2: [전인류의 죄]
우리는 나으뇨 - 본 구절을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지칭하는 바가 누구인지 규명해야 한다. (1) 유대인을 통칭했다고 볼 수 있는데, 바울 자신도 유대인이기에 '우리'라는 표현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지만 다음 근거를 볼 때 이 견해는 옳지 않다. 본절 하반절에서 바울은 역시 '우리'라는 1인칭 복수를 사용하고 있는데 여기서 '우리'가 유대인을 지칭할 만한 근거는 없다. 그리고 바울은 유대인을 가리킬 때 보통 3인칭으로 나타냈으며(1;1:16;2:9;9:4;10:1;11:20), 2:1-29에서는 유대인이 조금도 나은 것이 없다는 사실을 증명했었다. (2)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 8절에서 사용된 '우리'는 바울과 그의 추종자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본절부터 18절까지는 죄의 보편성에 대한 설명이므로 그리스도인도 그 죄의 보편성에서 제외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란 바울 자신과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 또는 더 넓게 모든 그리스도인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편이 더욱 타당하다. 한편 '나으뇨'에 대한 해석도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일치되지 않고 있다. 이 말은 헬라어 '프로에코메다'(*)의 번역인데, 이 동사가 수동태와 중간태의 형태가 같고 신약성경의 다른 곳에서 한번도 사용된 적이 없기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수동태를 취할 경우 이 말은 '우리는 나아지는가'로 해석되어 '우리는 나은 자로 판단받을 수 있는가 ?라는 의미를 지닌다(Meyer). 그리고 중간태를 취할 경우, 이 말은 개역성경과 같이 번역될 수 있다. 그러나 능동의 의미이든 수동의 의미이든 간에 '우리는 나은 것이 없다'는 결론을 유도하기 위한 질문이라는 점에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굳이 구분하자면 수동태를 취하면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의 현 실존이 죄의 보편성 문제에 있어서 보다 우월한 위치에 놓여 있느냐에 대한 물음이 강조되지만, 중간태를 취하면 유대인과 비교해서 우월한 위치에 있는지의 여부에 관한 물음이 강조된다.
결코 아니라 - '우 판토스'(*)는 고전 5:10에서도 사용되었으나 그 의미는 단순한 부정 이상의 '결단쿄 그럴 수 없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혹자들은 1, 2절에 기록된 유대인의 유익이 범사에 많다는 진술(陳述)과 조화를 이루기 위하여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라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1, 2절에서는 하나님의 경륜 속에서 유대인이 갖는 특이한 지위와 역할을 다루었고, 여기서는 유대인의 도덕적, 영적 상태를 언급하여,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역할을 어떻게 수행하였는지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Harrison, 泉田昭). 더욱이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영적 윤리적 상태에 있어서는 별차이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앞 구절의 질문에 대한 본 구절의 대답은 매우 부정적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비추어 볼 때, 본 구절에 해당하는 헬라어 '우 판토스'는 보다 강한 부정을 나타낼 수 있도록 부정어 ''(*)의 위치를 바꾸어서 '판토스 우크'(*, 고전 16:12)를 취해야 한다(Murray). 따라서 '어느 모로 봐도 아니다', '터럭 만큼도 아니다'라는 강한 부정의 의미이다.
 
성 경: [3:10]
주제1: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
주제2: [전인류의 죄]
기록한 바 - 바울은 이제까지의 논증을 '기록'에 의존하여 결론짓고 있는데, 이는 기록된 말씀에 대한 신적이고 절대적인 권위를 인정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혹자는 이를 구전된 전승들(oral traditions)이라고 한정짓기도 하지만 본절에서 언급하는 '기록한 바'는 선교상의 변증과 논증을 목적으로 확실하게 제시되었던 자료들로 보여진다. 시가서를 비롯한 구약성경들이 초대 기독교에 수납되었다는 사실은 쿰란 문서들(DSS)을 통해 입증되었다(Kasemann). 바울은 여기서 시편을 주로 인용하였는데, 12절은 70인역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고(14;3;53:3), 10절과 11절은 약간씩 변형하여 바울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을 강조해서 말한 것이다. 그러면 바울이 인용한 시편들과 본문을 대조하여 보기로 하자
 
시편 인용구와의 비교표(14:1-3= LXX13:1-3, 53:1-3= LXX 52:2-4)


마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본 우크 에스틴 디카이오스 우데 헤이스


14:1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10절 인 (53:1)
LXX
13:1 우크 에스틴 포이온 크레스토레타 우크 에스틴 헤오스 헤노스
(선을 행하는 자가 없되, 하나도 없다)

LXX
52:2 우크 에스틴 포이온 아가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다)

7:20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

문 우크 에스틴 디카이오스 엔 테 게
(의인은 세상에 없다)


마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본 우크 에스틴 호 쉬니온 우크 에스틴 호 에크제톤 톤 데온


11절 인 시 14:2 여호와께서(하나님이)...지각이 있어(지각이 있는자라)
(53:2)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LXX
13:2 퀴리오스(호 데오스)...에이 에스틴 쉬니온 에 에크제통 톤
(52:3) 데온
(<하나님>께서...깨닫는 자가 있는지 하나님을 찾는 자가
문 있는지...)

로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마 없도다

판테스 여세클리난 하마 에크레오데산

문 우크 에스틴 호 포이온 크레스토테타 우크 에스틴 헤오스 헤노스

12절 인 시 14:3 다 치우쳤으며(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53:2)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LXX
13:3 판테스 여세클리난 하마 에크레오데산
(52:4)
본 우크 에스틴 포이온 크레스토테타 (아가돈) 우크 에스틴
 
헤오스 헤노스
(모두 돌이켜 한꺼번에 무가치해졌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되, 하나도 없다)

의인은 없나니 - 문자적으로는 시 14:1보다 전 7:20(LXX)에 더 가까운데, '세상에 아주'(엔테게) 없다는 것을 '하나도'(*, 우데 헤이스) 없다고 표현한 점만 다르다. 시편과 비교해 보면, '선을 행하는 자'(*, 포이온 크레스토테타, 13:1<LXX>, ', 포이온 아가돈, 52:2<LXX>)라는 표현 대신에 '의인'(*, 디카이오스)이라고 변형시켰고, 시편에 언급되지 않은 '하나도' 없다는 표현을 첨가하여 강조하고 있다. 어쨌든 바울은 이러한 표현 방식으로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인간관을 강조하여 표현하였다. 한편 '의인'에 대해 혹자는 '올바른 도덕관을 갖고 그 원리에 따르는 자'도 포함시키고 있으나(Matthew Henry), 타당하지 않다. 인간은 본래 도덕적으로 불완전할 뿐 아니라, 구약에서의 의인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이기 때문이다(5:24, 6:8). 결국 죄에 오염된 인류는 본질적으로 ''이나 ''라는 개념과 거리가 멀다.
하나도 없으며 - 헬라어 '우데 헤이스'(*)는 예외는 아무도 없다는 죄의 보편성을 강조한다. 바울이 죄의 보편성을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유대인들이 율법을 통하여 의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할 뿐 아니라 그 시대의 몇몇 경건한 자들을 의로운 자들이라고 부렀기 때문이다(3:6). 유대인들은 율법에 대한 잘못된 생각으로 인하여 ''의 개념 조차도 하나님의 본성에서 떠난 도덕적 규범 속에서 찾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유대 묵시 문학 속에서도 죄의 보편성(普遍性)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하느님의 판단에 의하면 의로운 자가 없다'라는 표현이나 '하나님만이 의로우시다'라는 구절은 신약에 기록된 바울의 견해와 일치한다(Kasemann). 그렇다고 해서 바울의 주장이 묵시 문학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바울은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에 그전에 알던 모든 것을 배설물과 같은 것으로 버렸고(3:8) 앞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초대 교회 속에서 사용된 보다 권위 있는 구약의 문서들을 인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 경: [3:11]
주제1: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
주제2: [전인류의 죄]
깨닫는 자도 없고 - 53:2에 대한 70인역(LXX)의 번역에 의하면 '깨닫는'(*, 쉬니온)의 목적어로 '하나님'(*, 톤 데온)을 최할 수 잇다. 따라서 본절은 '하나님을 깨닫는 자도 없다'는 의미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바울이 강조하고 싶은 바는 피상적인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과 영적인 교통을 하여 체득한 직접적인 지시과 체험이다. 즉 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간접적인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직접적인 지시이며 깨닫음이다.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 바울은 지적인 면에서 인간의 무능력을 진술한 후 곧이어 인간의 의지적 무능력에 대하여 진술한다. 하나님과 영적인 교통이 없는 인간은 하나님을 찾아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좀더 적극적인 의미로는 인간이 마음속에 하나님께 대하여 전혀 관심조차 두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1:28 a).
 
성 경: [3:12]
주제1: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
주제2: [전인류의 죄]
본절은 70인역(LXX)의 번역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14:3<LXX 13:3>;53:3<LXX 52:4>).
다 치우쳐 - 히브리어 본문(MT)에서는 본 구절이 시 14:3에서는 '사르'(*), 53:4에서는 '사그'(*)로 약간 다르게 표기되어 있으나 '가버리다', '떠나다'라는 의미를 비슷하게 갖는다. 70인역(LXX)은 본 구절과 동일하게 '여세클리난'(*)으로 번역하고 있다. 헬라어 '여세클리난''돌아서다', '피하다', '멀리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인간의 타락상은 하나님에게로 향하지 않는 데서부터 비롯되었다. 인간은 올바르게 걸어가야 할 길을 돌이켜서 그 길을 떠났으며 그 결과 끊임없이 하나님을 반역하는 입장에 서게 되었다.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 이 말은 무익한 것을 추구하여 마음의 생각조차 부패해진 인간의 상태(1:21)를 의미한다. 이러한 상태에 있는 인간이 추구하는 바 그 자체도 악하고 무익하며 무의미할 뿐이다. 한편 '무익하게'의 헬라어 '에크레오데산'(*)'유용한'의 의미를 가진 헬라어 '크레이오스'(*)와 부정 접두어 ''(*)의 합성어 '아크레이오스'(*, '쓸모없는')에서 온 동사 '아크레이오오'(*, '쓸모없게 하다')의 단순 과거형이다. 이는 쓸모없게 되어버린 인간의 무가치한 상태를 지적하는 표현이다. 특히 함께 쓰여진 부사 '하마'(*)'모든', ''(*, 판타)의 의미와 더불어 '동시에', '즉시로' 등의 의미도 갖는다(24:26). '모든' 인간들이 '동시에' 무익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어느 누구에게도 예외가 적용되지 않고 인류 전체가 전적인 타락 상태에 있다는 것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 혹자는 본 구절을 '인간이 애정에 대한 모든 생각을 버렸다'는 의미로 해석한다(Calvin). ''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레스토테타'(*)가 하나님과 인간 모두에 대한 ''을 의미하는 '아가도스'(*)와는 달리 인간에 대한 선행에 더 가깝기 때문에, '애정'으로 해석해도 무방하다. 그리고 이러한 '' 또는 '애정'을 버린 자를 가리켜 바울은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1:31)라고 이미 선포한 적이 있다.
 
성 경: [3:13]
주제1: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
주제2: [전인류의 죄]
본절은 시 5:9;14:3에서 인용된 것이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 팔레스틴에 있는 무덤은 사람이 서서 드나들 수 있을 만큼 큰 굴로 되어 있으며 그 입구는 돌로 막게 되어 있다(11:38, 41). 따라서 바울이 사람의 목구멍을 열려 있는 무덤에 비유한 것은 그 목구멍이 어떠한 것도 삼킬 만큼 넓다는 의미이다. 이와 유사하게 예수께서 외식(外飾)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23:24)고 비유적으로 책망하신 적이 있다. 인간은 입을 통해서 온갖 더러운 것을 토해내며,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다. 불이 수많은 나무를 태울 수 있듯이 인간의 혀도 자신의 영혼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영혼조차 죽일 수 있는 지옥 불과 같다(3:5, 6).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 5:9의 인용으로 히브리어 사본에서는 '혀로 아첨했다'는 의미로 쓰였는데, 70인역(LXX)은 이를 '혀를 유창하게 만든다'고 의역하였고, 본문의 원어도 이와 똑같이 인용되어 있다(Lenski). '속임을 베풀며'의 헬라어 '에돌리우산'(*)'속이다', '사기하다' 등의 뜻을 가진 동사 '돌리오오'(*)의 미완료형 '에돌리운'(*)에서 ''(*)대신에 '오산'(*)이 붙어 반복적인 의미의 미완료형이 되었다. 즉 계속해서 속이고 사람을 죽이는 혀의 특성을 보여준다.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 말에 실수가 없는 자는 곧 온전한 사람이다(3:2). 그렇지만 타락한 인간의 입에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타인을 살리는 말이 나올 수 없고 오히려 죽이는 독이 가득할 뿐이다(3:8). 이것은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 열매를 맺지 못함과 같고 짠물이 단물을 내지 못하는 것과 같다(3:12).
 
성 경: [3:14]
주제1: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
주제2: [전인류의 죄]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 본절은 시 10:7의 의미를 요약하여 인용한 것이다. 저주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그 저주가 자기에게 임한다는 사실을(109:17-19) 깨달아야 한다. 몇몇 주석가들은 저주와 악독을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로 설명하고자 한다. 즉 저주하는 주체인 가해자와 악독을 당하는 피해자로 구분한다(Hendriksen). 그러나 본절에서 바울은 인간의 입에서 나오는 온갖 더러운 것을 대표적으로 '저주와 악독'이라고 표현했을 뿐이다. 왜냐하면, 본 구절이 인간의 전적 타락을 뒷바침해주는 시구이고(Harrison), 문맥상 강조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 경: [3:15]
주제1: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
주제2: [전인류의 죄]
그 발은 - 본문은 잠 1:16의 앞 부분과 동일하지만 다음 구절(16, 17)이 사 59:7, 8의 인용인 것으로 미루어 보아 사 59:7 상반절을 요약하여 인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바울은 12절에서 '선을 행하는 자가 없다'고 선포한 후에 13절과 14절에서는 ''에서 비롯되는 악행을 설명했으며, 본절에서는 직접적인 행동을 통한 악행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입의 말과 악행은 악한 마음에서 비롯된다. 이와 같이 타락하여 부패해진 자연인의 마음에서는 어떠한 ''도 나올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마음의 할례를 받아야만 선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갈 수 있다(벧전 3:21).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 피를 흘린다는 것은 악행에 대한 결과를 의미한다. '' (*, 하이마)는 성경에서 '생명의 원천'(1:13) 또는 '생명의 좌소'(고전 15:50;2:14)를 의미하는데, 본절에서는 '쏟아버리다', '피를 쏟아내다' 등의 의미를 가진 동사 '에크케오'(*)의 단순 과거 부정사 '에크케아이'(*)와 함께 쓰여 '생명에 대한 위협이나 도발'의 의미로 쓰여졌다. 한편 '빠른지라'로 번역된 분사 '와세이스'(*)는 신약성경에서 '날카로운', '예리한'(1:16;2:12;19:15) 등의 의미로 쓰였으며 본절에서만 '빠르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70인역에서는 '빠르다'를 뜻하는 헬라어 '타키노스'(*)를 사용하고 있다. 바울은 보다 적극적인 의미를 표현하기 위해 다른 단어 '와세이스'를 쓴 것 같다.
 
성 경: [3:16]
주제1: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
주제2: [전인류의 죄]
파멸과 고생 - 직접적으로 영혼과 관련된 것이다. 혹자는 이 표현을 인간의 지독한 잔인성에 대한 것으로 설명하기도 하지만(Calvin), 이미 2:9에서 바울은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라고 선포한 적이 있다. '환난과 곤고''파멸과 고생'은 모두 영혼이 지옥의 형벌 가운데 있을 때 나타날 상황에 대한 표현이다.
그 길에 있어 - 원문을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그들의 길에 파멸과 고생이 있다'라는 뜻이 된다. 본절은 앞절의 결론으로서 피흘리는데 빠른 발을 가진 '그들의 길에' (*, 엔 타이스 호도이스 아우톤) 파멸과 고생이 결과로 남게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공동번역은 '간 데 마다 남겨진 흔적'으로 파멸과 고생을 이해하였으나 그 보다는 앞에서 언급한대로 미래에 주어질 형벌의 결과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 같다. 인류의 잔혹한 피흘림은 그들의 행위로 인하여 결국 그 보다 더 비참하고 고통스런 파멸(破滅)을 초래하게 된다.
 
성 경: [3:17]
주제1: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
주제2: [전인류의 죄]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 혹자는 '평강의 길'을 현실적인 평화 내지 이웃과의 화목으로 해석한다(Matthew Henry). 어떤 면에서는 인간의 내적인 평강이라 해석될 수도 있다. 예수께서 평강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셔서(9:6, 7) 인간들에게 평강을 주시리라는 약속(2:9)이 성취되었다(5:1). 이 평강은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됨으로 말미암아 현재 성도들에게도 주어질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나라에서 주어진다. 이 길은 (1) 예수 그리스도의 길이며(14:6) 동시에 (2) 모든 사람들과 함께 화평을 원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가야 할 길이다(5:9;딤후 2:22). 또한 (3) 피흘리기를 즐기는 자들이 가야 할 길과는 대조를 이루는 길로서 성도들의 종말론적인 구원을 동시에 나타내는 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떠난 인간은 결코 이 길을 찾을 수도 없으며 또한 평화의 왕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평안을 얻을 수도 없다.
 
성 경: [3:18]
주제1: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
주제2: [전인류의 죄]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 본절은 시 36:1 하반절의 직접적인 인용이다. 마음으로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자(14:1a)가 하나님을 경외할 수 없는 것은 필연적인 사실이다. 11절에서 17절까지의 인용 구절들에 언급된 부패상은 바로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어리석은 인간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머레이(Murray)는 본절을 보다 자세히 해석하기를,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각과 평가의 중심부에서 제외되었을 뿐 아니라 우리의 계산 속에서도 사라지고 말았음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칼빈(Calvin)"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은 우리의 사악함을 견제하는 굴레이므로 그 경외심이 사라질 때 온갖 종류의 방탕한 생활에 거침없이 탐닉하게 된다"고 설파했다. 아무튼 성경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하나님을 진실로 섬기며 사랑하는 것과 강하게 결부되어 있음을 가르치고 있으며(10:12;4:24;24:14;50:10), 그러한 자가 받을 축복에 대해서도 가르치고 있다(31:19;103:13;147:11;1:7).
 
성 경: [3:19]
주제1: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
주제2: [율법의 역할]
율법이 말하는 바 - 10절에서 18절까지 인용 구절들의 출처는 시편과 이사야서였다. 이 책들은 엄격한 의미에서 '율법서'에 포함되지 않으나 통상적으로 바울은 구약성경 전체를 '율법'이라고 표현하였다.
율법 아래 있는 자들 - 헨드릭슨(Hendriksen)은 이 용어가 누구를 지칭하는지에 대한 다양한 견해를 네 가지로 분류했다. (1) 유대인. 랑게(Lange)와 리델보스(Ridderbos)가 이 견해를 따른다. (2) 로마에 있는 신자들. 렌스키(Lenski)가 주장하는 견해이다. 그런데 본문에서나 본서 어디에서도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이 로마에 거주하는 신자들에게 국한되었다는 암시가 없다. (3) 모든 사람이 해당되나 특별히 유대인들. 어드만(C.R. Erdmann)에 따르면, 본 구절은 자기들의 순수함을 선언하려고 애쓰는 유대인들과, 그밖에 자신의 허물에 대한 징계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야만 하는 입장에 처해진 전체 인간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4) 모든 사람, 세상 전체. 머레이(Murray)6:14'법 아래'(은혜에서 제외된 것을 의미함)와 본 구절을 구분하여 본 구절은 율법이 적용되는 영역, 즉 온 세상을 가리킨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블랙(M. Black)역시, 정죄되어 하나님의 몽둥이 앞에 서 있는 '모든 사람'(온 세상)이라고 주장한다. 그레이다너스(Greijdanus)도 이러한 입장에 서 있다. 이 주장은 본절 하반절에서 모든 입, 온 세상, 하나님의 심판과 같은 용어들과 관련지어 볼 때 가장 타당하다 하겠다. 하나님의 심판에서는 그 어느 누구도 제외될 수 없기 때문에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이란 보다 포괄적인 의미로 하나님의 통치 영역하에 있는 모든 사람, 곧 온 세상을 지칭한다.
모든 입을 막고 - '히나'(*, '')가 이끄는 본 구절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의 결과와 하나님의 계획을 설명한다. 이 절속에서 반복된 '모든'(*, )이라는 단어는 죄의 보편성을 강조하며 특히 20절에 기록된 '모든 육체'(개역성경은 '모든'이라는 말을 번역하지 않았음)가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동시에 강조한다. '막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라게'(*)'잠잠케 하다', '멈추게 하다' 등의 뜻을 가진 '프랏소'(*)의 제 2단순 과거 가정법 수동태형으로서 하나님의 법정적 선언 앞에서 최소한의 변호마저 내세울 수 없는 죄인의 상태를 묘사한다. 여기서 (1) 단수형을 사용하여 ''(*, 스토마)'프라게'를 연결시킨 것은 '온 세상'을 하나의 집단적인 개념으로 이해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심판대 앞에 선 피고인들 각자의 침묵을 강조하기 위함이며 (2) 또한 단순 과거 가정법을 사용한 것은 현재 가정법이 반복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과 대조적으로 동작의 단회적 성격, 즉 심판대 앞에서는 심판의 단회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 - 율법의 기능은 심판대 앞에 있는 피고들을 변호하거나 또는 죄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율법은 죄를 죄되게 하고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심판대 앞에 기소하는 일을 감당한다. 그 대상에는 예외가 없으며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를 동일한 심판대 앞에 서게 한다. 그러나 바울이 '우리가 알거니와'라고 말하면서 심판을 논했을 때 이방인들조차도 이 심판에 대하여 알고 있었느냐 하는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사실 복음이나 율법을 접하지 못한 자들이 하니님의 심판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판단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창조물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이방인들이 일반 계시를 통하여 알 수 있었듯이 심판에 대한 계시를 인식할 수 있었을 것이다(1:20, 32). 따라서 '온 세상'(*, 파스 호 코스모스)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으면서도 스스로 심판의 형벌을 해결할 수없는 전적으로 무능력한 상태에 처해 있는 것이다. 이것이 곧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의 무능력이다.
 
성 경: [3:20]
주제1: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
주제2: [율법의 역할]
그러므로 - 모든 사람이 율법의 세력권 아래 있으며, 어떠한 사람도 그 율법을 지킬 수 없으므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이게 되었다. 여기서 바울은 또다른 주제로 전환하기 전에 최종적인 결론을 내리고자 이 단어를 사용했다. 혹자는 '그러므로'라는 접속사가 적절하지 못한 번역이기에 '그러한 이유로'라고 번역해야 된다고 주장한다(Murray). 그 이유로는 본절이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정죄 아래 있게 된 사실을 설명함으로써 계속해서 이어지는 사실을 알리는데 바울의 의도(意圖)가 있다는 것을 든다. 내용의 흐름으로 비추어 볼 때 본절은 지금까지 전개해 온 논리에 대한 결론이 되면서, 21절 이하의 내용을 준비하는 단계라는 점에서 '그러한 이유로'라고 번역해도 되지만, 내용상으로는 '그러므로'와 별 차이가 없다.
율법의 행위로 - 이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다. 혹자는 이를 할례와 같은 의식에 관한 율법을 수행하며 복종하는 것으로 한정짓는다(Jerome, Pelagius). 또한 로마 카톨릭 교회는 자연적(혹은 본성적)인 양심에 따라 수행되어지는 행위라고 한다. 이외에 혹자는 순전한 양심에 의한 율법의 행위, 고도로 개선된 자연적인 율법 행위, 의식 율법의 행위, 도덕 율법의 행위 이 모두를 포함하는 것으로 설명한다(Matthew Henry).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율법의 행위'(2:16;3:2, 5, 10)라는 용어를 사용했을 때 이 용어는 의식 율법 특히 할례와 관련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본서에서도 바울은 이 용어를 '할례'에 대한 진술후에 언급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1:18-2:22와 본장 10-18절의 내용은 모두 도덕 율법과 관련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4:2에서 '율법의 행위'란 용어 대신에 단순히 '행위'란 단어를 사용하기도 했다. 또한 바울 서신 중 본서와 갈라디아서의 공통 주제인 '이신 칭의'의 원리는 인간의 마음과 행위 그 자체에서 나오는 어떠한 것으로도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고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펠라기우스(Pelagius), 알미니우스(Arminius), 그리고 로마 카톨릭 교회가 주장하듯이 인간의 도덕적 행위를 통해서 구원 받을 수 있다면 바울은 굳이 행위와 믿음을 대조하면서까지 강변할 필요도 없으며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죽음도 헛된 것이 된다(2:21).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는 구약성경의 율법, 나아가서는 양심의 법, 이 모든 것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정의(定義)되어야 한다.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 바울은 이 구절을 통하여 10절에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선포했던 사실을 재확인시키고 있다. 특히 그는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라는 시 143:2'인생'을 의도적으로 '육체'(*, 사르크스)란 용어로 바꾸어 인용했다. '사르크스'는 단순히 인간의 몸을 의미하는 헬라어 '소마'(*)와는 달리 죄와 대항하기에는 무능력하고 연약한 인간의 실존을 의미한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 바울은 율법의 기능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율법은 행하여 의롭게 되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얻으며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다. 그 누구도 결코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기 때문이다(7:9;6:13). 그러면 제대로 지킬 수 없는 율법은 무엇 때문에 주어졌는가 ?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3:19). 율법은 인간의 죄를 낱낱이 고발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율법 앞에서 자신의 죄를 깨닫고 두려워 탄식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이 죄인임을 깊이 깨달아야 하며, 그 깨달음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의 의를 옷입어야 한다. 본 구절을 통해서 바울은 율법이 죄로부터 구원하는 능력이 없음을(13:39;딤전 1:9, 10) 강하게 시사해 주고 있다.
 
성 경: [3:21]
주제1: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
주제2: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이제는 - 한글 개역성경에는 없으나 헬라어 본문에는 '그러나'를 의미하는 접속사 ''(*)가 첨가되어 있다. 그래서 본절 전체가 지금까지의 논리와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 로이드 존스(M. Lloyd-Jones)'그러나 이제는'(*, 뉘니 데)이란 용어를 '대전환점'(The great turning point)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와 관련해서 그는 본절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논리의 시작이라는 점과 아울러 본 서신 전체의 주된 주제 중 하나의 시작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혹자는 '이제는'이란 단어가 시간상의 대조, '율법 아래 있을 때''율법에서 자유로울 때'를 대조시키기 위해 사용되었다고 주장한다(Sanday, Headlam). 그러나 이 단어는 로이드 존스(Lloyd-Jones)의 견해와 같이 인간 상태의 전환(轉換)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율법에 의존된 관계''율법에서 벗어난 관계'간의 대조를 나타낸다.
율법 외에 - 이 표현속에는 율법에도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있으나 그것을 통해서 인간이 그 의를 옷입을 수 없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그리고 율법의 의 이외에 하나님의 의가 계시된 것을 대조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이 표현이 사용되었다.
하나님의 한 의 - 어거스틴(Augustine)은 이 의가 '중생의 은혜이며, 아무 자격이 없는 우리를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새롭게 하시고자 값없이 주신 은혜이고, 율법의 행위를 배제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칼빈(Calvin)은 어거스틴의 말에 동의하면서 좀더 부가적으로 시 32:1'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는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을 인용하여 하나님의 의는 인간의 타고난 도덕적 본능에 의해서 행하는 선행이나 심지어 신자들이 행할 수 있는 선행으로도 결코 얻을 수 없는 것으로 이해했다. 아무튼 '하나님의 의'는 이미 구약성경의 율법에 나타났던 '절대적(絶對的)이고 객관적인 의'로서 이제는 율법과 관계없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 칼빈(Calvin)은 본 구절을 '복음이 값없이 의를 주는 점에 있어서 율법과 배치되는 것으로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하여 부가된 것'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혹자는 전반부에 언급된 '율법'과 본 구절의 '율법'과의 의미상 차이를 설명하면서 전자는 '칭의와 정반대되는 사실을 선언하는 것'이며, 후자는 '칭의를 전하는 것'이라고 진술한다(Murray). 그러나 본 구절에서는 전반부에 언급된 '율법'의 의미와는 달리 '선지자들'이라는 단어와 함께 단순히 구약성경 전체를 나타내 주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 예수께서 구약성경에 대하여 어떤 때에는 단순히 '성경'이라고만 말씀하시기도 했으며(21:42;5:39), 또다른 곳에서는 '율법과 선지자'(5:17;7:12;11:13;22:40;16:16) 혹은 '모세와 선지자들'(16:29, 31)등으로 언급하셨다. 본 구절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의'가 구약성경과 상관없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나왔다는 사실이다.
 
성 경: [3:22]
주제1: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
주제2: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 바울은 1:17에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라고 암시적으로 말한 바 있다. 그는 이 '믿음'의 구체적인 내용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한정시킨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편에서 시작한 믿음의 역사는 그리스도를 신뢰하며 영접하는 주관적인 고백에 의하여 믿는 자들의 실제적인 삶에 적용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의롭다'라고 선언하는 법정적 판결은 '믿음을 통하여'(*, 디아 피스테오스)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이는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선물이며, 또한 신앙은 하나님의 사역에 의하여 수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지만, 믿는 자들의 삶 속에서는 능동적인 순종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우리에게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는 새로운 삶의 운동력이 되며 또한 새로운 삶을 주관하는 원리(原理)가 된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피스테오스 예수 크리스투)으로 소유격이 사용되고 있다. 혹자는 이를 가리켜 예수를 믿음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아니하고 믿음을 가졌던 자로 해석하려 한다. 다시 말해서 여기 기록된 믿음은 예수 자신의 믿음으로써 주께서 사역을 완수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가졌던 믿음을 바울이 의도적으로 기록한 것이라는 주장이다(G. Howard). 그러나 성도들이 가져야 할 믿음의 성격이 예수께서 지상 사역에서 보여주신 믿음을 흉내내는 것이라고 이해하거나 또는 의롭게 되는 것이 예수 자신이 소유한 믿음에 의하여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견해이다(J. Murray). 왜냐하면 본절에서는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의''예수 그리스도'와 동격으로 취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로서 인류를 구속하시는 하나님이시며 신앙의 대상이시다. 바울이 1:3, 4에서 설명한 예수를 본절에 와서 구체적인 신앙의 대상으로 명백하게 설명한 것은 그분이 가졌던 믿음 때문이 아니라 그분이 구속자로서 화목 제물이 되시고 인류의 구원을 성취하셨기 때문이다.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 본절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의가 미친다'라고 진술하지 않고 '믿는 자'(*, 투스 피스튜온타스)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이와 유사한 구절이 갈 2:16에도 나타나는데 그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다. 본서에서는 이를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라고 표현하였다(1:17).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전적으로 부패한 인류는 스스로 믿음을 가질 만한 능력도 가지지 못했고 스스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도 없었다. 죄인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철저하게 먼저 부르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의존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지하여 비로소 믿음을 얻게 된다. 인간은 믿음 때문에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믿음조차도 인간의 공로나 업적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본절에서 시사하고자 하는 바울의 의도이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일 뿐이며 그 주시는 것 외에 그 어떠한 것도 더할 수 없다. 특히 '믿는 자'를 현재 분사형으로 기록한 것은 현재적인 믿음의 구체적인 것들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믿음은 과거의 것으로 유효한 것도 아니며 미래의 예정으로 유효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현재 속에서 계속 믿고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차별이 없느니라 - 율법이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심판 아래 두고 죄있다고 기소(起訴)하는데 차별을 두지 않듯이, 새로 나타난 한 의도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는데 어느 누구에게도 차별을 두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듯이, 모든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할 수 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을 받는 '마음의 손'이다(Harrison, Godet). 따라서 그 손을 내미는 모든 자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동일한 것이며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다(24).
 
성 경: [3:23]
주제1: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
주제2: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의에 대한 가치를 더욱 부각시키고 그 의로 옷입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20)는 말씀과 동일한 의미로 다시 반복하고 있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 머레이(Murray)는 이에 대한 견해를 네가지로 구분하여 설명하였다. (1)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한 것. 칼빈(Calvin).이 이 견해를 취한다. 그리고 밤비(Barmby)가 이를 지지하고 있다. 17:18;12:23;고전 10:31;고후 4:15;8:19;1:11;2:11;살전 2:6;4:9, 11;11:13;14:7;16:9 등을 근거 구절로 들고 있다. (2)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영광, 존귀, 또는 칭찬을 받지 못한 것. 렌스키(Lenski)가 이 견해를 주장한다. 5:41, 44;8:50;12:43;3:3;벧전 1:7;벧후 1:17 등을 근거 구절로 들고 있다. (3)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지 못한 것. 헨드릭슨(Hendriksen)이 이견해를 지지한다. 하나님의 형상에 일치된 삶을 살지 못한 것으로 이해한다. 그 근거 구절로는 고전 11:7;고후 3:18;8:23 등이 있다. (4)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나눠질 완성된 영광을 지니지 못한 것. 리델보스(Ridderbos)가 이 견해에 동의한다. 5:2;8:18, 21;고전 2:7;15:43;고후 4:17;1:27;3:4;살후 2:14;딤후 2:10;2:10;벧전 5:1, 4등을 근거 구절로 들고 있다. 그런데 본절은 ''와 매우 밀접한 구절이므로, 죄로 인해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부여해 주신 영광스러운 지위를 상실한 것과 관계가 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형상도 포함될 수 있고(Black), 만물에 대한 지배권(1:28)도 포함될 수 있다.
 
성 경: [3:24]
주제1: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
주제2: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 여기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라는 표현을 바울이 엡 1장에서 주로 사용한 의미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1장에서는 성도가 그리스도와 영적 연합을 이루는 것을 의미하며, 본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사실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 '하나님의 은혜'란 말이나 '값 없이'란 말을 내용상 차이점이 없다. 다만 '값 없이'란 말이 부가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드러나며, 또한 '구속'이란 말이 '속전을 지불하고 노예를 사는 것'과 관계되어 있기에 강조적으로 그리스도의 구속이 하나님의 은혜스러운 행위임이 부각된다. 따라서 '값 없이'란 말은 엡 2:8에 언급된 '하나님의 선물'이란 의미와도 일맥 상통한다. 한편 23절과 본절을 합치면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로 결국 구원받게 된다는 보편 구원론적인 주장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분명히 22절에서 '하나님의 의''믿는 자'에게 효력(效力)이 있다고 한 바울의 선포가 본절에 이미 포함되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 헬라어 '디카이우메노이'(*)는 현재 분사 수동태로 기록되었는데 이는 의롭게 되는 것의 수동적 의미를 강조하기 위함이다. '의롭게 된다'는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지만, 그것은 '값 없이'(*, 도레안)라는 단어에 의하여 제한을 받고 있는 바, 율법의 행위와는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그렇게 인정해 주시는 것이다. 한편 본절의 분사적 의미는 22절에 기록된 현재 분사 '투스 피스튜온타스'(*, '믿는 자들을')와 연결되어 있다. 후자는 '믿는 자'라는 능동적 의미를 시사한 반면 전자는 '이롭다 함을 받은 자'라는 수동적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이렇듯 바울은 수동형과 능동형을 사용하여 우리 자신이나 우리 자신의 어떠한 행위로도 영향을 미칠 수 없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은혜와, 그에 대한 인간의 제한적 의지를 대조시킴으로써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한(1:7) 구원의 영광을 부각시키고 있다.
 
성 경: [3:25]
주제1: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
주제2: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
그의 피 - '''생명'을 상징한다(17:11).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위해 피를 흘리심은 자기 생명을 속전으로 바쳐 희생시키셨음을 의미한다.
화목 제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힐라스테리온'(*)인데, 이 단어의 번역에 따라 견해 차이가 생긴다. (1) 속죄 제물(expiation)을 의미한다는 견해. '힐라스테리온'(*)이 히 9:5에서는 지성소에 있는 '속죄소' 혹은 '시은좌'(mercy seat)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힐라스테리온'은 지성소에서 행해지는 '온 백성을 위한 속죄' 행위를 강조한다. 그리고 본절에서 희생의 ''가 언급되어 있으므로 '속죄 제물'로 번역되어야 한다(Lenski, Barmby). 공동번역과 TEV, NASB, RSV가 이 견해에 따라 번역했다. (2) 화목 제물(Propitiation). 바울은 이미 앞에서(5;1:18;2:5)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언급을 했으며 본절에서도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언급을 했으며 본절에서도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라는 말을 한다. 그리고 '힐라스테리온'은 지성소에서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속죄뿐 아니라 백성과 하나님과의 화목을 위해 제사를 드린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또한 24절에서 이미 '구속'에 대한 언급을 했으므로 속죄에 대한 것을 계속 반복할 필요는 없다. 그러므로 '본절은 '속죄'보다는 '화목'이 더욱 강조되고 있다(Calvin, Murray, Lloyd-Jones, Matthew Henry, Leon Morris, Deissmann, Harrison). 벌게이트(vulgate) 역본, KJV등이 이 견해를 따라 번역했다. 이 두 가지의 견해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으나 우리는 다음과 같이 해결점을 찾을 수 있다. 우선 문자적으로 '힐라스테리온'의 의미를 밝혀야 겠지만, 신약성경 가운데 이 용어가 거의 사용되지 않았으므로 해결될 가능성은 없다. 다만 좀더 포괄적인 의미로 받아들여 '힐라스테리온''구속'과 함께 '화목'의 의미를 동시에 지니는 것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의 피는 일차적으로 '속죄'와 관련되어 있지만, 그 속죄의 결과는 인간과 하나님간의 '화목'의 의미를 동시에 지니는 것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의 피는 일차적으로 '속죄'와 관련되어 있지만, 그 속죄의 결과는 인간과 하나님간의 '화목'으로 나아간다. 그런 이유로 '힐라스테리온''속죄 제물''화목 제물'의 의미를 동시에 함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영역 성경 중 NIV는 이 두가지 번역의 시도를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헨드릭슨(Hendriksen)이나 어드만(Erdmann) 같은 학자도 이 두 가지 의미를 모두 인정한다.
세우셨으니 - 이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티데미'(*)'계획을 도모하다', '제출하다', '앞에 두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본절에서는 '의도하다'란 의미가 적절하다(1:13;1:9).
길이 참으시는 중에...간과하심으로 -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신 것'(*, 아노케)은 결코 하나님의 불의하심을 나타내지 않는다. 오히려 '알지 못하던 시대에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신 것'(17:30)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시기 위함이다. 이런 의미에서 '간과'(看過)는 죄인된 인간이 하나님의 인내로 말미암아 죄의 가리움을 받았다는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32:1).
 
성 경: [3:26]
주제1: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
주제2: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
곧 이 때에 - '카이로'(*)는 정해진 때를 의미하는데 이 때는 종말론적인 시기, 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속을 실현하시는 시기라고 말할 수 있다. 본절에서는 하나님의 관용으로 인간의 죄를 간과하셨던 시기와 대조를 이루는 때로서 지금 믿는 자들에게 현재적인 칭의를 제공하는 때를 의미한다.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 바울은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변호를 하고 있다. 인간의 죄를 간과하시는 것이 오해되어 하나님의 공의에 손상이 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죄를 간과하시고 믿는 자들을 의롭다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독생자를 속죄 제물과 화목 제물로 삼으사 그에게 하나님의 공의에 따른 진노와 저주를 담당케 하신 사실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처사는 여전히 공의로우시며 그의 공의로운 처사를 따르는 자들도 의롭다고 인정되는 것이다.
믿는 자를 의롭다하려 하심 - 본절에서 ''를 뜻하는 '디카이오스'(*)는 서로 다른 형태로 세번이나 반복되고 있다. 맨 마지막에 사용된 '디카이운타'(*)는 서로 다른 형태로 세번이나 반복되고 있다. 맨 마지막에 사용된 '디카이운타'(*)는 앞에 있는 두 의로움의 결과로 주어진 것이다. 요한은 '디카이오스'를 심판과 구원의 개념으로 이해하여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우리 죄를 사하신다고(요일 1:9) 말하고 있으나 본절에서는 하나님의 의를 또다른 두 가지 의미에서 해석한다. (1) 바울은 죄인들의 행악을 당장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오랜 세월 동안 간과하신 하나님의 인내를 의의 개념으로 해석하며 (2) 또한 절대적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 속에 드러낸 하나님의 의를 설명하고 있다. 즉 하나님은 자기 안의 의로움을 인하여 참으시기도 하셨으며 또한 죄인의 의로움을 위하여 희생적 죽음을 원하셨다는 것이다. 이제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되었으므로 대속적 죽음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의가 전가(轉嫁)되는 사건 곧 의롭다고 간주하는 신분의 변화가 현재적인 시간 속에서 일어나고 있다. 바울은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피흘림에 동참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라고 말한다.
 
성 경: [3:27]
주제1: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
주제2: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
자랑할 데가 어디뇨 - 인간이 의롭게 되는 모든 과정에서 인간 자신은 조금도 개입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활동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는 존재이다. 특히 바울은 여기서 율법을 받은 것을 자랑하는 유대인을 염두에 두고 있다.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 바울은 '믿음의 법'을 행위와 대조시킴으로써, 믿음이 결코 인간 편에서 취한 행위가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이 믿음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바 선물에 불과하다(2:8).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행위를 자랑할 수 없다.
 
성 경: [3:28]
주제1: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
주제2: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
그러므로 - 어떤 사본에는 접속사 '가르'(*)가 생략되어 있다. 그러나 개역성경과 같이 본절에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가르'가 사용되면 27절에 종속되어 부가적인 설명이 된다. '믿음의 법'에 대한 변호를 위해서 본절은 독립적으로 해석되기보다 종속적으로 해석되는 편이 타당하다.
율법의 행위 - 20절 주석 참조.
우리가 인정하노라 - 여기서 '우리'라는 것은 '예수를 믿는 자'(26) 의미하며 바울 자신을 포함한 모든 성도들을 가리킨다. '인정하노라'에 해당하는 헤라어 '로기조메다'(*)'생각하다'(4:3;3:6;2:23) '추론하다' 또는 '결론을 맺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로기조마이'(*)의 현재 중간태로서 '그러므로'가 지시하는 두 가지의 요소를 확고 부동하게 인식한다는 뜻이다. 바울이 성도들과 더불어 확실하게 결론을 맺은 두 가지는 (1)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것이며 (2)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할례자나, 무할례자나 누구든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사실이다. 바울은 다음 구절에서 '누구든지'라는 사상을 다시 한번 반복한다.
 
성 경: [3:29]
주제1: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
주제2: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
유대인의 하나님 뿐이시뇨 -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을 유대인에게만 국한시킨 종족 수호신의 개념을 공격하면서 범우주적 창조주, 섭리주, 구속주로서의 하나님을 역설(力說)하고 있다. 유대인은 하나님을 근동 지방의 다른 나라들과 같이 자기들만의 신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들은 자신들의 제사장 나라로서(19:6) 열국의 구속을 위해 살아야 할 의무를 무시했다. 더 나아가 그들은 율법의 준행과 할례 제도의 시행이 그러한 자신들의 신앙이 옳은 것임을 나타낸다고 확신했다. 바울은 이처럼 유대인의 잘못된 신앙관을 비판함으로써 유대인들이 섬겼던 하나님을 이방인들이 믿는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음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바울은 4:1-25에서 유대인의 자랑거리인 아브라함이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 된다는 자신의 주장을 미리 정당화 시킬 준비를 하고 있다.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 당시 유대인들이 이방인을 무시했던 것을 고려하면 바울이 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매우 충격적인 발언이었다. 특히 하나님의 이름조차도 감히 부르지 않았던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을 이방 민족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신성 모독과 같이 무거운 범죄에 해당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오히려 유대인의 교만을 책망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방인의 하나님되심을 바울 자신의 개인적인 소신이 아니라 이미 구약의 선지자들에 의하여 예언된 것이기 때문이다. 구약에서는 이방인들을 '고임'(*)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노동자들과 같은 '집단' 또는 '무리'를 뜻하는 말에서 유래된 것으로 혈연 관계의 결속(結束)보다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관계를 뜻하는 말로 쓰여졌다. 족장 시대에는 이방인에 대한 배타적인 태도를 발견할 수 없으나(12:2;18:18) 시내산 계약 이후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선별 의식과 하나님의 유일한 백성이라는 민족 의식에 의하여 배타 의식은 강화 되었다. 특히 헬라 시대에 들어와서 이방인에 대한 유대인들의 태도는 더욱 배타적이어서 '이방인' (*, 에드노스)이라는 말 자체가 경멸적인 뜻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와 관련된 예언서에서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찾으며(11:10) 참 이스라엘의 영광을 높이는 자로서(60:5, 6) 묘사되었으며, 그들의 구원은 메시야가 오셔서 참된 빛이 되시고 세상을 구원하실 때에 이루어질 것이고(42:6;49:6) 그때에 그들은 하나님을 예배할 것이라고 기록되었다(1:11). 예수께서도 그의 사역 가운데서 이방인의 메시야되심을 증거하셨으며(17:18) 또한 제자들을 이방 가운데 파송하시면서 온 세상에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하도록 하셨다(28:19, 20).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하여 아브라함에게 주신 축복에 동참한 이방인(3;14)은 참된 이스라엘이 되었으며 또한 영적 아브라함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을 예배하는 백성이 된 것이다.
 
성 경: [3:30]
주제1: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
주제2: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
29절에 '유대인''이방인'이 대조된 것처럼 할례자와 무할례자가 같은 방식, 같은 의미로 언급되고 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 이신 칭의를 얻는 길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한 가지 길밖에 없다. 유대인이 율법과 할례를 통해서 의롭게 되지 못함을 바울이 그동안 강조해 왔듯이, 이방인도 하나님을 통하지 않고는 의롭게 될 수 없다. 여기서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란 표현은 하나님의 유일성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좀더 적절하게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에게 이신 칭의를 베푸시는 '하나님은 동일하시다'란 의미로 이해된다. 29절의 내용에서도 역시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하나님은 동일하시다는 사실을 바울이 주장했던 점을 참고해 보면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해진다.
 
성 경: [3:31]
주제1: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
주제2: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 바울은 지금까지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을 사람이 없다(20)고 주장했으며, 또한 율법 외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21) 주장하면서 믿음의 법(27)을 율법과 배치되는 원리로 설명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유대인에게 직접 주신 그 율법이 아무 쓸모없다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으며, 구약성경의 하나님과 현재 바울이 주장하는 하나님간의 단절이 생각될 수 있다. 이와 같은 단절의 반론을 잠재우기 위해 바울은 신약과 율법이 서로 배치(背馳)되지 않음을 피력하고 있다. 실제로 초대 교회 시대에 마르시온(Marcion)뿐 아니라 영지주의자들(Gnostics)은 구약성경의 하나님을 저급한 신(Ialdaboath)으로 취급하면서 구약성경 자체를 무시했다.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 이 말은 '도리어 율법을 굳게 지킨다'란 의미이다. 어떻게 해서 율법을 굳게 지킬 수 있는가 ? 이에 대한 대담은 이신 칭의에서 나온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받았으나 율법을 굳게 지킬 수 없었다. 다시 말해 유대인들은 율법의 원리에 따라 살지 못함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율법과 선지자들에 의해 증거된 하나님의 의를 믿는 사람은 그 의를 받게 되어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된다. 이러한 사람이야말로 구약성경에 증거된 율법의 원리대로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의 원리에 따라 사는 것은 율법의 증거를 더욱 확실하게 보증하며 율법이 지향하는 목적을 남김없이 성취하는 것이다.
성 경: [4:1]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아브라함의 의()]
그런즉 - 2:1에서 언급된 '그러므로'라는 접속사처럼 별 의미 없이 다른 화제로 전환하고자 사용된 접속사이다. 자세한 것은 2:1 주석을 참조하라. 3:19-31에서 바울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라 믿음에 의해 의롭게 된다는 사실에 대해 설명하고 이제 본절부터는 이신 칭의의 구체적 실례로 아브라함을 예()로 들고 있다.
육신으로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타사르카'(*)는 직역하면 '육신을 따라'이다. 이 말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1) 하나는 '우리 조상'과 연결된 수식어로 해석하는 경우이며 (2) 또 하나는 동사 '얻었다'를 수식하는 부사구로 해석하는 경우이다. 이는 사본에 따라 다소 차이를 두고 있는데 만약 '얻었다'를 뜻하는 헬라어 '휴레케나이'(*)'아브라암'(*, '아브라함')앞에 있는 것으로 인정한다면 '카타 사르카'(1)의 의견에 따라 자연적인 혈연 관계를 나타내는 말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반면 '휴레케나이''헤몬'(*, '우리') 뒤에 위치시키는 소문자 사본들에 의하여 해석한다면 '카타 사르카'(2)번의 의견에 따라 윤리적인 의미, 다시 말해서 '육신의 원리를 따라' 또는 '율법의 행위를 따라'라는 의미로 해석해도 될 것이다. 전자를 주장하는 자는(J. Murray) 바울이 보편적으로 사용했던 '육신'의 개념을 증거로 제시한다. 바울은 '육신'이라는 말을 '죄의 지배를 받고 있는 인간의 본성'과 동의어로 사용하기도 하였으며(8:4, 5, 12;고전 1:26) 때로는 '육신으로'라는 표현을 '썩어질 육체의 소욕과 충동에 의하여'라는 경멸적인 의도로 사용하기도 하였으나 순수한 자연적 출생 관계를 나타내는 의미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증거할 때(1:3) 또는 다른 사람들을 육신적인 형제 관계로 표시할 때 등이다(9:3;고전 10:18). 이와 같은 의미에서 '육신'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면 바울이 '우리의 조상'이라고 부르면서 혈연적인 관계를 나타내는 '육신'이라는 말을 추가한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자의 경우를 따를 때에는 '우리'라는 말이 유대인만을 칭하는 말인가 ? 라는 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바울은 본서에서 '우리'라는 말을 사용할 때에 보통 모든 이방인들까지 포함하는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하기 때문이다(3:31). 한편 후자의 견해를 지지하는 자들(Lenski, Calvin, Meyer, Godet, Hodge)'육신으로'라는 말을 '얻었다'라는 동사에 연결시킴으로써 '육신''행위' 또는 '율법'의 의미로 취급한다. 이 경우 본절의 뜻은 '아브라함이 육신의 행위로 무엇을 얻었는가 ?' 라는 의문문 형태가 된다. 본 구절의 앞 뒤의 문맥으로 보면 후자의 견해가 더 타당하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에게는 행위로 말미암아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2;3:27) 사실이므로 본절의 '육신으로'라는 의미는 유대인의 조상된 아브라함의 혈연적 관계를 뜻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윤리적인 의미에서 '자랑할만한 것' 또는 '율법의 행위' 등으로 해석하는 것이 보다 더 논리적인 결론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얻었다 하리요 - '얻었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휴레케나이'(*)는 완료형으로 '발견했다'(have found), '얻었다', '만났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문제는 이 단어가 어떤 사본에서는 생략되어 있다는 점이다. 혹자는 이 단어의 삽입에 의문을 제기하여 생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Lightfoot, Murray). 이 견해를 취할 경우 '육신으로'는 자연스럽게 '우리 조상'과 연결된다. 그리고 '우리'란 대명사는 바울과 유대인 특히 로마에 있는 유대인이 된다. 그러나 '우리'가 유대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님을 이미 3:9에서 밝힌 바 있다. 또한 2절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이란 구절은 '얻었다'는 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본절에서 '얻었다'라는 말이 첨가되어 있어야 바울의 의도가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성 경: [4:2]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아브라함의 의()]
아브라함이 - 바울이 아브라함을 설명한 것은 유대주의자들도 아브라함의 의로움을 인정하고 있으며 또한 선민의 조상으로 아브라함을 높이고 있기 때문이다. 유대교 랍비들의 문헌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3살부터 하나님을 섬기기 시작하였으며 할례와 율법을 예비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의롭다함을 받았다고 기록한다. 그들 역시 창 15:6의 말씀을 인용하여 아브라함의 공로를 증명하려고 했으며 특히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공로'에 의하여 후사(後嗣)가 되어 의롭다함을 받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Hendriksen). 그 당시의 유대교적 가르침보다 성경을 중요시한 바울은 '나는 너를 열방의 조상으로 세웠다'라는 말씀에 근거하여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으로서 아브라함을 칭의를 받는 신앙의 본질적인 모범으로 인정함으로써 모든 시대의 사람들이 따라야할 신앙의 본질적인 통일성을 추적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완성된 구원을 돌이켜 보는 믿음 속에 있는 반면 아브라함은 장차 되어질 일들에 대하여 믿음으로 기다렸다는 것에서 서로의 차이를 발견할 수는 있으나 본질적인 ''의 개념에 있어서 양자는 동일한 신앙을 소유하고 있다.
행위로써 - 아브라함 시대에는 아직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지 않았으나 바울은 율법의 원리 곧 행함의 원리를 아브라함 시대까지 적용시키고 있다. 이로써 바울은 (1) 믿음의 원리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이미 율법이 주어지기 이전부터 시작되었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2) 행위의 원리가 단순히 모세에 의해서 주어진 율법에만 국한된 것이 아님을 암시해 주고 있다.
만일...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 바울은 '에이'(*, '만일')에 부정 과거 직설법 수동태 동사 '에디카이오데'(*)를 연결시킴으로 하나의 조건문을 만들었다. 이 조건문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두 가지로 나뉜다. (1) 혹자는 논리적이며 형식적인 가정으로서 현실적이며 실재적인 근거에 있어서는 '없느니라'는 부정(不定)을 유도하는 조건문으로 인정하는 반면, (2) 혹자는 바울이 부정 과거 가정법을 사용하여 단회적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조건문으로 해석한다(Lenski).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은 '행위로'(*, 여스 에르곤) 의롭다 함을 받았으므로 일차적으로는 자랑할 것이 있다는 뜻이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치려 하였던 구체적인 행위의 결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인정을 받았다는 것이다. 렌스키(Lenski)는 바울의 주장이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을(3:19-31에서 말한 것과) 증명하기 위해 '여스 에르곤''여스 에르곤 노무'(*, '율법의 행위')를 서로 구별하려 한다. 신앙의 행위로서 '행위'는 칭의의 근거가 되지만 '율법의 행위'는 칭의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는 주장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절의 '행위'는 유대주의자들의 거짓 자랑과 구분이 되는 것으로서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아 생긴 것이 아니라 순수한 신앙으로 말미암아 나오는 '행위'인 바, 바울이 자신을 자랑할 수 있었던 것(고후 11;21;12:12)과 같은 성격의 행위라고 한다. 그러나 만약 이 주장에 따른다면 우리는 자칫 믿음을 공로로 인정하는 유대 랍비적인 교훈에 빠지게 되는 오류를 범할 수도 있다(1절 주석 참조). 칭의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사역에는 신앙이라는 인간의 공로조차 아무 효력을 발생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한편 전자를 주장하는 자는(J. Murray)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면 자랑할 근거가 있다는 형식적인 논리를 인정하나 그 논리가 실제로 아브라함에게 적용될 수 있느냐하는 문제는 단호하게 거부한다. 왜냐하면 본절 하반절은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없다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브라하미 자랑할 것이 없다라는 구절은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결정적인 근거가 된다. 바울은 가정적인 추론 속에서 아브라함이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보다 확실하게는 가정문을 반증(反證)하기 위해 다음절에서 창 15:6을 인용하고 있다.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 본문에는 누구에게 자랑하는 것인지 그 자랑의 대상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 이런 이유로 혹자는 '자랑할 것'이란 말을 '영광받을만 한 것'으로 대치할 것을 주장한다(Meyer). 그렇지만 그렇게 의도적으로 본문의 의미를 바꾼다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의 주장대로라면 영광을 주는 대상이 하나님이 되어야 하는데, 곧바로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는 구절이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문 전체가 다음과 같은 의미로 수정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하나님 앞에서도 자랑할 것이 있겠으나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없다.'
 
성 경: [4:3]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아브라함의 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 일반적으로 문어체에서는 '기록된 바'(*, 카도스 게그라프타이)란 용어를 사용하여 구약성경을 인용한다(3:10). 본절에서 바울이 의문문의 형식으로 구약성경을 인용한 것은 구어체적(口語體的)인 것으로 독자들과 보다 밀접한 관계에서 지금 논하고 있는 주제에 대하여 심사숙고해 보기 의함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 본 구절은 창 15:6을 인용한 것이다. 혹자는 본절을 약 2;21과 배치되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Luther). 그런데 엄격한 의미에서 약 2:21은 창 26:5과 관계된 것으로 보아야 하고, 야고보 사도는 믿음 자체를 무시한 것이 아니라, '믿음'에 따르는 삶(행위)에 강조점을 두고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 아무튼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은 것은 창 15:5에서 하나님을 통해 선포된 약속에 대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인격과 능력에 대한 신뢰이다. 아브라함 자신은 스스로의 능력으로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을 이룰 수 없다. 오직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약속을 성취시키실 뿐이며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신뢰를 두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에게 이루어진 약속의 성취는 그 자신의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그의 믿음을 통해서 값없이 주어진 것이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 - 믿음과 행위의 대립적 관계를 설명함에 있어서 구약에 기록된 또 하나의 구절을 극복해야 한다. 시편 106:31은 비느하스의 열정적인 행위로 인하여 하나님이 '저에게 의로 정하였으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 여기심을 받았으며 비스하스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의롭다 여기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비스하스가 의롭게 여김을 받았다는 것은 경건치 아니한 자들도 의롭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칭의와 구별이 되어야 한다. 비느하스의 행위는 앞에서 살펴본대로 믿음의 한 열매로서 주어진 결과로 보아야 한다(J. Murray). 경건치 아니한 자, 또는 할례받지 아니한 자들의 칭의를 논하는 문제에 있어서 '의롭다 여기시는 것''믿음의 선한 열매로 인한 결과'를 구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한편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엘로기스데'(*)'로기조마이'(*)의 부정과거 수동태로서 (1) 의롭다 여김을 받은 수동적 행위를 의미하며 (2) '의롭게 만들었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단지 '그렇게 평가해 주었다'라는 의미를 강조한다.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이 의롭다 여김을 받을 정도로 인격(person)에 변화가 있었다는 뜻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과의 신분적 관계에 있어서 새로운 지위를 부여받았다는 뜻이다.
 
성 경: [4:4]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죄사함의 은총]
일하는 자에게는 - 본 구절에 대해 혹자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마땅히 열심으로 추구해야 할 선행을 행하는 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행적을 내세워 자기 공로를 자랑하려는 사람을 의미한다고 설명하고 있다(Calvin). 본절 전체가 일상적인 고용 관계에 대한 것을 비유적으로 진술하고 있는 점에서는 1차적으로 삶을 위해 일하는 일꾼을 의미하며, 2차적으로는 다음절에 기록된 '일을 한 것이 없는 자''믿는 자' 등과 대조를 이루는 개념으로서 단지 행함으로 의롭게 되려는 자들을 의미한다.
그 삯을 - 일꾼이 요구하는 ''(*, 미스도스)은 문자적으로 일해준 것에 대한 품삯을 의미하지만(10:7;딤전 5:18) 은유적으로는 '보상'(reward)을 뜻하는 말로 사용된다고 한다. 이외에도 신약에는 삯을 뜻하는 말로 '와소니온'(*)이라는 단어가 있었는데 이는 눅 3:14에 병사의 급료라는 뜻으로 쓰였으며 본서에서는 죄의 ''(6:23)이라는 의미로 쓰였다. 일꾼이 그의 일한 대가를 요구하는 것은 정당한 일이며 당연한 요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본절에서 바울이 이 정당한 요구를 ''(*, 오페일레마)이라는 개념과 동일시하고 있는 것은 매우 특이한 용법이다.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 ''(*, 오페일레마)''이라는 말과 동의어로 쓰였으나 '은혜'(*, 카리스)와는 대조적인 뜻으로 사용되었다. ''은 히브리어로 '맛솨아'(*)로서 주로 모세의 율법에 나타나는 바, 채무 관계를 지적하는 데 쓰여졌다(22:25). 무엇을 빌린 자는 반드시 갚아야 했으며 만일 채무자가 정당하게 갚지 못했을 경우 채권자는 권리를 주장할 수 있었고 채무자로부터 생계 수단이 되는 어떠한 것들을 전당물로 잡을 수 있었다(24:6). 신약에서 '오페일레마'는 구약에서와 같이 사업적인 용어로 쓰이기도 하였으며(7:41) 특히 비유 속에서는 채무자를 용서하거나 또는 죄인으로 취급할 때 쓰였다. 채무자는 빚을 다 갚기 전에는 옥에 갇혀 있어야 했으며(12:57-59) 또한 송사(訟事)하는 자에 의하여 재판관에게 고발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본절에서 일하는 자가 삯을 요구하는 것은 마치 채권자가 송사하는 것과 같이 마땅히 받아야 할 돈을 요구하는 것으로서 빚을 탕감받은 자들이 탕감받은 것을 은혜로 여기는 것과는 다르다. 따라서 그들에게 있어서 ''은 자랑이며 동시에 정당한 자기 평가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바울은 일하는 자들의 정당한 삯을 언급함으로써 다음절에 나오는 일하지 아니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용서와 칭의(稱義)의 위대함을 강조하고 있다. 행함으로 의롭게 되려는 자에게 있어서 행위의 결과는 일꾼이 일한 것에 상응한 대가를 받는 것과 똑같은 이치이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설 만한 자리가 없다. 오로지 행위의 주체인 자신의 자랑만이 존재할 뿐이다.
 
성 경: [4:5]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죄사함의 은총]
일을 아니할지라도 - 삯을 위해서 일하지 않은 사람, 즉 행함으로 의롭게 되려는 자가 아니라 의를 얻기 위해 아무 수고도 하지 않은 사람을 가리킨다. 바울이 본절에서 의를 얻기 위해 아무 행위도 하지 않고서 의롭게 되는 것에 대하여 계속 진술했듯이 오직 하나님은 행위로써가 아니라 '그의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 하신다. 4절과 비교해 볼 때, 이 믿음은 곧 하나님의 은혜로운 활동과 관련된다(2:8).
경건치 아니한 자 - 이는 행함으로 의롭게 되려 애쓰지 않는 자와 동의어지만 죄인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으므로 그보다 더욱 강한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이 용어는 하나님의 은혜의 깊이와 넓이를 보여 주고 있다(Murray).
의롭다 하시는 - '의로 여기시나니'(*, 톤 디카이운타)라는 현재 분사형 포현은 그 시제에 있어서 '믿는 자'(*, 피스튜온티)와 일치하는 것으로서 의롭다 여기시는 것이 철저하게 믿는 것과 연결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경건치 아니한 자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죄인에게도 임한다는 구원의 진리를 적용한 것으로서 아브라함에게 적용되었던 원리와도 일치한다.
 
성 경: [4:6]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죄사함의 은총]
일한 것이 없이 - 이 말은 원문상으로 '행위와 상관없이'(*, 코리스 에르곤)라는 의미를 지닌다(without works, KJV). 바울이 거듭 강조하여 이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것이 인간의 행위 내지 노력과 아무 상관없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 '행복'에 해당하는 헬라어 '마카리스몬' (*)'축복'이나 '행복'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특별히 이 단어는 단순한 '축복'이나 '행복'만을 의미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총'에 강조점이 있다. 그래서 혹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복되다고 선포되는 것'이라고 의역하기도 했다(Black). 이 해석을 따를 때, 본절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이 받은 바 축복에 대한 다윗이 선포하기를'로 번역될 수 있다. 따라서 '사람이 받은 축복'이라는 구절은 그 속에 이미 하나님의 은총을 내포하며 동시에 믿음으로 참여한 모든 자들에게 임할 동일한 축복을 선언하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성 경: [4:7]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죄사함의 은총]
그 불법...복이 있고 - '불법'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하이 아노미아이'(*)이다. 이 말은 '율법'(*, 노모스)이란 말에 부정 접두어 '' (*)가 첨가되어 이루어진 파생어이다. 포괄적으로는 법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을 의미하나 보다 정확하게는 '율법을 어긴 행위'를 가리킨다. 그리고 '율법을 어긴 행위'는 이스라엘 사회에서 죄로 규정된다. 그렇기 때문에 본절에서 '불법'''는 동의어의 반복으로 보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사하심을 받고'(*, 아페데산)라는 동사와 '가리우심을 받고'(*, 에페칼뤼프데산)라는 동사 역시도 동의어의 반복이다. 일반적으로 히브리 시문학에서는 평행 대구법(parallelism)을 사용하여 앞절과 뒷절이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면서 뜻을 강조하고 그 내용을 보다 명확하게 구체화시키곤 하였다(6:1). 한편 '아페데산''에페갈뤼프데산'은 둘다 부정 과거 수동태로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능동적인 사역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축복의 상태를 나타낸다. 자신의 죄를 용서함 받거나 가리움 받는 것은 이미 과거에 성취되었으므로 그에게 남은 것을 성취된 구원 속에서 누려야 할 축복 외에 아무것도 없다.
 
성 경: [4:8]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죄사함의 은총]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 - 본절은 7절의 중복으로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면서 하나님의 사유(私有)하시는 은혜를 보다 강조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앞절에서는 '불법이 사함을 받는 것', '죄가 가리움을 받는 것' 정도로 언급했으나, 본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죄인으로 규정되는 ''조차 없는 것으로 인정한다는 사실이 강조되었다. 바울이 이신 칭의에 대해 설명할 때에 본 구절은 결정적인 논리의 뒷받침이 되고 있다. 5절에서는 하나님께서 '행위와는 상관없이' 그 사람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다고 할 때 논리상 믿음이 의로 여겨지는 중간 과정이 생략되었다. 그 논리의 틈을 본절이 메우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믿는 사람이 의로 여김을 받기 위해서는 실제로 그 사람이 행한 죄악이 어떻게 여겨지게 되는 가에 대해 설명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7절과 본절의 인용 구절에 분명히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다.
 
성 경: [4:9]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할례의 의미]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 바울은 죄인을 의인으로 간주하는 하나님의 축복의 범위에 대해서 진술하고 있다. 지금 예로 들은 아브라함은 유대인의 조상이므로 무할례자된 이방인이 이 축복에서 제외될 수 있다는 문제가 유대인에 의해 제기될 수 있다. 그래서 행위에 관계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축복이 할례자인 유대인에게만 주어지는 것인가 아니면 이방인에게도 동등하게 주어지는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바울은 본절의 질문을 제기했다. 할례는 율법과 더불어 유대인들에게 있어 하나님의 선민(選民)임을 보증해 주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그래서 바울은 본절에서 할례의 문제를 언급한 것이다. 바울 논지의 핵심은 비록 할례가 유대인들에게 중요시되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베푸시는 칭의의 축복에 할례가 전혀 중요하게 작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J. Murray). 바울은 이러한 논지를 본절의 질문을 제기함으로 더욱 확고히 하고자 했던 것이다.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 3절에서 언급했던 구절이 다시 반복되고 있다. 그러나 이 구절은 3절에서와 같이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을 재차 강조하기 위한 구절이 아니다. 이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의로 여겨지게 되었던 시점으로 화제를 전환하기 위하여 반복되는 것이다.
 
성 경: [4:10]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할례의 의미]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 이 구절의 헬라어 본문은 '포스 엘로기스 데'(*)인데, 이를 직역하면 '그것이 어떻게 여겨졌느뇨 ?'가 된다. 다시 말해 '어떻게 해서 그의 믿음이 의로 여겨졌느뇨 ?'라는 질문이 된다. 그런데 이에 대한 대답이 의롭다고 여겨지게 된 시점(時點)에 관한 것이므로 '어떻게'보다는 '언제'라고 번역하는 편이 적절하다.
할례 시가 아니라 무할례 시니라 - 아브라함의 믿음이 의롭다고 여겨진 것은 할례 의식을 한 때로부터 20여년 전이었다(15:6;17:23, 24). 이 대답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할례와 전혀 상관이 없다는 바울의 논리를 뒷받침해 주는 결정적인 단서이다. 15:1"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는 말씀이 언급되어 있듯이 초대 교회 시대에 유대인들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자기들이 받은 바 우선권을 포기하지 않았다. 또한 예로 베드로는 이방인들(무할례자들)과 함께 애찬을 나누다가 할례자들이 들어오자 그들을 두려워하여 슬그머니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2:12). 이처럼 초대 교회 당시는 할례자와 무할례자에 대하여 구별하는 관습이 남아 있었고, 그로 인해 복음의 본질이 변질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바울이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 하나님의 의()의 전가(轉嫁)가 보편성을 지닌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는 것은 그 당시 팽배되어 있는 그러한 분위기에 대하여 명백한 복음적인 해결책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성 경: [4:11]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할례의 의미]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 본절에서 바울은 그동안 문제시되었던 '할례'의 의미에 대해서 진술한다. 유대인들은 할례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되는 유일한 증표로 믿고 있었으나, 바울은 그들의 신학이 잘못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17:10, 11에는 할례가 '언약의 표징'(*, 세메이온 디아데케스)으로 언급되어 있다. '언약의 표징'이라는 것은 언약을 맺은 것에 대한 증거로 나타내 보이는 표시(sign)이다. 그리고 구약 시대에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간에 언약을 맺는 것은 쌍무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것이었다(Robertson). 그러면서도 그 언약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 대하여 취하신 은혜와 사랑의 증표이며 약속이었다. 따라서 할례가 '언약의 표징'이라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할례 이전에 베푸신 은혜와 사랑에 대한 증거이며, 앞으로도 그렇게 하실 것에 대한 약속이라는 의미를 함축한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와 같이 할례에 내포된 은혜의 비밀을 간과하고 겉모양만 취하여 그것이 매우 귀중한 것처럼 자랑하였다.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 ''(*, 스프라기스)은 신약에서 책을 봉()하거나(5:1), 도장 찍는 것과 같은 증표(딤후 2:19;7:2)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주로 모든 일을 결론짓는 마무리를 나타낼 때나 또한 어떠한 것을 그대로 보존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예수의 무덤을 봉인하였다는 것도 그의 죽음이 확인되었다는 뜻이다. 예수의 부활이 확실한 것은 세상이 인봉을 통하여 그의 죽음을 확고하게 증명했기 때문이다(27:65). 이와 같이 인()이라는 것은 어떤 사건에 대한 진실성을 최종적으로 확인하는 수단으로 쓰였다. 특히 본절에서는 이미 무할례시의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실을 확인하는 외적 보증의 의미로 이 용어가 쓰여졌다. 다시 말해서 할례는 의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며 또한 의의 수단도 아니며 단지 이미 의롭게 된 것을 입증하는 표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늘날 성도들에게 있어서 구원의 표적은 성령의 오심(1:13;4:30)과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또한 함께 살아났다는 사실을 예표하는 세례라고 할 수 있다.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 바르트(K. Barth)는 본절을 주석하면서 원()역사계와 역사계를 구분하여 설명하고자 시도했다. 즉 아브라함이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원역사적인 사실의 믿음의 의가 역사계에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서 역사적인 사건은 원역사적인 것 속에 파묻히게 된다. 이러한 주장은 암시적으로 율법 폐기론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율법은 원역사적인 하나님의 의가 현 역사 속에서 단순히 나타나진 것에 불과할 뿐 그 이상의 의미도 갖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은 율법이 의의 전달 내지 계시로서 충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강조했다(3:31). 성도의 신앙은 히 11:1에 언급된 바와 같이 원역사적인 것과 역사적인 실재가 동시적으로 의미를 지닐 때 올바른 길로 나아가게 된다. 예수의 천국 비유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도 원역사적인 실재임과 동시에 현 역사적인 실재이다(Ridderbos). 할례는 무할례시에 주어진 믿음의 의(원역사적인 것)가 현 역사 속에서 공표되는 의미를 지닌다. 그런 연고로 구약 시대에는 할례가 의미있는 의식이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는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으므로 그 표는 단지 그리스도를 부각시키고 확증시켜 주는 역할을 담당할 뿐이다. 따라서 할례 자체가 전혀 필요없는 것이 아니라 율법과 같이 그리스도 중심의 예언적 사건으로 그 의미는 항상 남아 있게 된다.
 
성 경: [4:12]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할례의 의미]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 아브라함이 할례자의 조상이 될 수 있는 것은 (1) 그가 처음으로 할례를 받아 혈통으로 자기에게서 난 자들에게 그 할례 의식을 전했으며, (2) 그 할례를 전할 때 할례만이 아니라 자기가 무할례시에 받았던 '믿음의 의'에 대한 것도 동시에 전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11절만 떼어서 생각하면 아브라함은 단지 무할례자의 조상이 되어 할례받은 유대인의 조상은 되지 않는다는 오해가 발생될 수 있다. 그래서 본절에서 바울은 아브라함이 할례자의 조상도 되는 이유를 설명하게 된 것이다.
무할례 시에 가졌던 - 본절에서는 '할례받을 자들''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들'을 동일 선상에 놓고 있다. 할례받은 유대인이라 할지라도 믿음없는 자는 아브라함의 후사가 될 수 없듯이 아브라함의 믿음의 자취를 따르지 않는 이방인 무할례자들도 당연히 아브라함의 후사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무할례 시'가 아니라 아브라함이 가졌던 '믿음의 인'이다. 따라서 무할례든 할례이든 그것이 결코 구원에 있어서 유리하거나 불리한 조건이 될 수 없다. 우리가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1)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았다는 사실이며 (2) 또한 그 할례가 믿음으로 받았던 의를 '인치는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이 두 가지는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에게 중요하게 받아들여져야 한다(J. Murray). 바울이 할례 자체를 일방적으로 매도하지 않았다는 것은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한 사실속에 잘 나타나며(16:3) 또한 할례를 믿음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은 디도에게 할례를 행하지 아니한 사건 속에 잘 나타난다(2:3).
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들 - 이 부류에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구별없이 다 포함된다. '자취'에 해당하는 헬라어 '이크네신'(*)은 신약 성경에서 '보조'(步調;고후 12:18) 또는 '본이 될 만한 모범'(벧전 2:21) 등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으며 갈라디아서에서는 예수의 '흔적'이라는 말로 번역되기도 하였다(6:17). 본절에서 '믿음의 자취'는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살았던 삶의 흔적을 의미한다. 예수께서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어늘"(8:39)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 여기서 '아브라함의 행사를 하라'는 것은 '아브라함이 걸었던 그 신앙의 노선을 따라가라'는 의미이다. 이 가르침은 혈통상 아브라함의 자손이 됨을 시사한다. 한편 '좇는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토이케오'(*)'대오(隊伍)를 이루어' 또는 '줄을 맞추어 행진한다'라는 뜻을 가진 군사 용어로서 '일관성 있는 행함'의 의미로 번역되었다(5:25;3:16). 여기서는 아브라함의 발자취를 따르는 대열에서 낙오되지 않고 일관성 있게 전진하는 것을 의미한다.
 
성 경: [4:13]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믿음의 후사(後嗣)]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 - 이 약속은 창 17:4-8에 언급되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은 율법보다 430년 앞서 주어졌으며, 후에 생긴 율법이 이미 주어진 언약을 취소할 수 없었다(3:17).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은 율법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약속은 율법에 선행하며, 약속의 원리를 따르는 자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이 약속의 원리는 바울이 본절에서 진술하고 있는 바대로 '믿음의 의'뿐이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후에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던 것이지 율법에 근거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편 '세상의 후사'란 일차적으로 창 17:8의 말씀대로 가나안 땅을 그의 후손이 유업으로 받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보다 포괄적인 의미로는 창 17:4에 언급된 대로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비'이므로, 그의 신앙의 자취를 좇는 모든 민족이 후사가 되며 유업을 이을 자가 된다(3:29). 따라서 본절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인하여 모든 땅의 족속들이 복을 받으리라는 보증'(Hendriksen)과 관련된 것임이 분명하다.
 
성 경: [4:14]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믿음의 후사(後嗣)]
율법에 속한 자들 -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려 하는 자들' 또는 '율법의 체계에 종속된 자들'을 의미하며 바울의 또다른 표현에 의하면 '율법의 종노릇하는 자들'로서 종의 멍에를 멘 자들을 뜻한다. 이들은 하나님의 약속도 오직 율법의 행위를 통해서만 성취된다고 믿고 있는 자들이다. 신약 시대에 이르러 펠라기우스(Pelagius)와 그의 추종자들, 그리고 로마 카톨릭 교회(Roman Chatholic Church)는 하나님의 약속이 선행을 통해서 성취된다고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이 만들었다. 이런 자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질시키는 자들이며(1:7), 이렇게 전하는 자들에게 바울은 저주를 선언하고 있다(1:8, 9).
만일...후사이면 - '후사'를 뜻하는 '클레로노모스'(*)'상속자'라는 의미로서 아브라함에게 약속되어진 것을 물려받을 자를 뜻한다. 구약의 개념으로 상속자가 얻을 것은 (1) 약속의 땅 가나안(12:7;13:14, 15), (2) 믿음으로 자손된 이방인들을 포함하는 후손을 얻게 될 하나님의 축복, (3) 한 후손 메시야에 의한 세계 통치를 의미한다.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위에 열거한 세 가지 조건의 상속자라면 믿음은 의미를 잃게 되고 약속된 언약은 가치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이 자기들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자기들이 세상의 상속자라는 주장을 한다(8:39). 한편 본절에 대하여 바울은 율법과 믿음의 대립적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먼저 약속으로 시작된 구원의 역사가 믿음에 의하여 성취되었다는 것을 증명할 것인데 유대인들은 이를 두고 바울이 시작과 성취 중간에 들어온 율법의 무용성(無用性)을 말한 것이라고 한다(5:20). 그러나 바울이 의도한 요점은 율법 무용론이 아니다. 다만 바울이 말한 것은 중간에 끼어 들어온 율법이 앞서 있었던 약속을 변경시킬 수 없으며 율법에 의하여 후사가 결정될 수 없다는 것이다.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졌느니라 - '헛것이 되고'(*, 케케노타이)라는 것은 무가치한 것이 되었다는 의미보다는 원문상 '그 속의 내용이 없어졌다'라는 뜻에 더 가깝다. 다시 말해서 믿음이라는 것이 무가치한 것이 되었다는 의미보다는 믿음이 포함하고 있는 내용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허망한 것이 되고 말 것이라는 의미이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무 내용 없는 것으로 변해 버린다면 약속도 더 이상 설 자리를 잃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와 연결되지 않는 약속은 효력을 발생할 수 없게 될 것이며(*, 카테르게타이, '폐하여졌다') 또한 법적 신실성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잃게 될 것이다. 만약 율법의 행위로 약속이 보증된다면 율법 이전에 이미 보증받았던 아브라함이 약속은 무가치한 것이 되고 그 약속에 의하여 성취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 십자가를 좇는 모든 믿음은 오히려 율법의 종이 되고 말 것이다. 또한 율법으로만 약속이 보증되고 의롭다 여김을 받을 수 있다면 이스라엘의 신앙은 여타의 윤리 종교와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성 경: [4:15]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믿음의 후사(後嗣)]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 율법은 행위의 완전함을 요구한다. 그러나 인간은 완전해질 수 없는 죄인에 불과하다. 이에 대한 율법은 인간을 정죄하고 저주를 선포한다(28:58ff.). 따라서 인간 편에서 볼 때 율법은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정죄와 저주의 근거로서의 기능만을 가진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을 받은 모세의 직분을 '정죄(定罪)의 직분'(고후 3:9)이라고 진술했으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은 '율법의 저주'를 담당한 것이라고 선포했다(3:13). 이런 의미에서 율법은 인간들을 위해 의를 이룰 수 없으며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시킬 수 없다.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 쉬운 예로 어느 나라든지 그 나라의 법이 없다면 그 나라에 사는 백성은 아무런 범죄자가 되지 않는다. 오직 범죄자가 범죄자로 성립될 수 있는 것은 그 나라의 법률에 따라서만 가능하다. 이처럼 법률이 있음으로써 범법자는 죄인으로 정죄받고 심판을 받는다.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 살았던 아브라함은 율법에 따른 정죄를 받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믿음의 원리에 따라서만 살았다. 또한 노아는 아브라함처럼 할례에 대한 규례도 받지 않고 살았던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의인'으로 인정되었다(6:9). 그가 의인으로 또한 완전한 자로 칭함을 받은 것은 율법적 판단에 따른 것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 당시 사람들이 하나님께 정죄를 받은 것(6:5)은 율법적 판단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불신앙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로 율법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믿음'이 중요한 것이다.
 
성 경: [4:16]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믿음의 후사(後嗣)]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 '후사가 되리라'는 약속은 은혜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취되었다. '믿으으로'(*, 에크 피스테오스)라는 말은 '율법을 통해서'(*, 디아 노무)라는 개념과 반대적인 의미이다. 특히 바울에게 있어서 '믿음으로'라는 말은 약속이라는 개념과 절대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서 약속된 그리스도를 포함하는 포괄적인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원문이 '수단과 방법'을 뜻하는 전치사 '디아'(*)를 사용하지 않고 '에크'(*)를 사용한 것도 믿음이라는 것을 수단과 방법적인 것으로 전락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믿음은 약속이 내용이며 동시에 약속 그 자체이다. 따라서 믿음은 약속이 성취된 곳에 나타나는 결과이며 동시에 약속이 하나님에 의하여 성취되었음을 나타내는 증거이다. 본절에서는 이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표현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약속이 은혜로 말미암아 성취되도록 하려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라는 주장이다. 따라서 본절에서 보다 강조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은혜'라는 개념이다. 믿음에 의하여 은혜가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은혜에 의하여 믿음이 좌우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1) 믿는 자로 하여금 믿음의 의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하며 (2) 신앙의 확실성을 갖게 하며 (3) 궁극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영광과 신실하심을 선포하심으로써 믿는 자들의 의를 성취하도록 하는 방편이며, 또한 궁극적인 의의 보증이다.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 율법은 진노를 이루는 것이기에 율법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약속이 보증될 수 없다(15). 하나님의 약속이 보증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만이 유효하며, 이 하나님의 은혜는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따라서 믿음과 하나님의 은혜만이 하나님의 약속을 확증하고 보증해 준다.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 바울은 '그 모든 후손'이 누구인지를 설명하기를 '율법에 속한 자''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라고 했다. 통상적으로 '율법에 속한 자'는 단순히 유대인을 총칭하는 의미로 사용된다(14). 이런 사실 때문에 헨드릭슨(Hendriksen)'율법에 속한 자'가 단지 '유대인'만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전반부에 언급된 '그 모든 후손' 곧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약속을 보증받은 '그 모든 후손'에는 분명히 '믿지 않는 유대인'은 배제되어 있다. 따라서 '율법에 속한 자'는 율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원리를 따르는 '유대인'을 의미하며, 그리고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는 믿음의 원리를 따르는 '이방인'을 가리킨다(12절 주석 참조). 이에 대해서는 곧이어 언급되는 하반절에 의해 더욱 지지를 받는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 바울이 '우리'라고 표현한 것은 믿음 안에 있는 '신앙의 공동체'에 대한 것이다. 이 신앙의 공동체에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구별없이 오직 믿음의 원리를 따르는 모든 족속이 포함된다. 지금 바울이 논하고 있는 것은 혈통적인 조상이 아니라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 대한 것이다. 14절에서 바울은 혈통적으로만 '율법에 속한 자들'은 후사가 될 수 없다고 선포했다. 그러므로 본절에서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실 수 있는 후사는 믿음의 원리를 따르는 자들뿐이다.
 
성 경: [4:17]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믿음의 후사(後嗣)]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 바울이 여기서 창 17:5의 말씀을 인용한 것은 아브라함이 혈통과 관계없이 모든 사람의 조상이 되는 이유에 대한 성경적인 증거를 위한 것이다. '많은 민족'은 문자적으로 '혈연 공동체'이면서 동시에 영적으로 '믿음의 원리를 좇는 모든 사람들'을 의미한다. 여기서 '모든 믿는 자들의 새로운 공동체'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둔 이유로 인하여 아브라함의 후사에게 주어진 특권과 유익을 함께 소유하는 공동체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모든 사람의 조상이 됨으로 말미암아 인종적 보편성이 성취되었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우심을 받았다는 표현은 '무할례자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라는 표현과 '할례자의 조상'이란 표현을 포괄하는 보다 광범위한 표현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들이 차별없는 동등한 부르심을 받았음을 시사하며 또한 세계 도처의 모든 민족들이 아브라함의 믿음의 자취를 따름으로 후사가 될 수 있다는 개연성을 강조한다(J. Murray).
그의 믿은 바 하나님 - 바울은 아브라함이 믿었던 하나님을 정의함으로써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관(神觀)을 정의하며 동시에 모든 믿는 자들의 신관을 정의한다. 이는 두 가지의 사실을 전제로 하는데, (1) 창조주 하나님으로서 그분은 모든 사람들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이며 (2)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는(16) 사실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정의한 후에 그 하나님께서 인정하고 확고히 하신 '아브라함의 조상됨'을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아브라함을 모든 사람의 조상으로 삼으신 하나님 곧 예수를 죽인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을 믿는 자는 누구든지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죽은 자를 살리시며 - 이 구절은 살아 역동하는 하나님의 속성을 말해주며 또한 생명을 부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고 있다(1:20). 본절에서 그 의미는 크게 두 가지를 포함한다. (1) 이삭의 출생이며 (2)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다. 바울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자식을 낳지 못하는 상태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후손에 대한 약속을 저버리지 아니하고 믿음으로 끝가지 기다렸던 역사적 사건을 상기하면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유추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이삭의 출생을 기다리며 장차 있을 메시야의 세계와 그의 승리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Lenski, J. Murray, E.F. Harrison). 사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이'라는 표현은 유대인들이 흔히 부르는 하나님에 대한 일반적인 표현이었으나 바울은 유대인 뿐만 아니라 모든 믿는 자들에게 적용함으로써(24)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다는 것과 또한 그것을 믿는 자들을 의로 여기신다는 두 가지의 핵심적 진리를 동시에 증거하였다.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 - 이 구절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창조주로서의 특성을 묘사한 것이다. 하나님은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들 수 있는 분이시며(3:9;3:8) 그 어떠한 인간의 공로나 반항에도 구애받지 아니하시고 택하신 자들을 부르시는 절대 주권의 능력을 행사하는 분이시다. 그분 앞에서는 아브라함의 늙은 육체도 문제가 되지 않으며 죄인의 추함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무엇인가 될 수 있는 것 같은 가능성 속에서 역사하지 아니하시고 그의 미리 정하신 작정과 통치 속에서 결정해 놓으신 것들을 성취해 나아가신다.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후손을 바라보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언약이 성취될 것을 확신하였다는 뜻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결정하시고 약속하신 것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을지라도 성취된 것으로 인정하였던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은 확신이 아브라함의 믿음이었으며 본절과 같이 하나님을 정의할 수 있는 신앙이다.
 
성 경: [4:18]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믿음의 후사(後嗣)]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 아브라함은 인간적인 차원에서 자기 아내 사라가 잉태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 앞에 자기의 상속자는 자기의 종인 엘리에셀이 될 것이라고 고했다(15:2). 그럼에도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번성케 하실 것을(15:5) 믿었다. 키에르케골(Kierkegaard)은 아브라함의 모리아 산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어떤 사람은 영원한 것을 기대함으로써 위대하게 되었다. 그러나 가장 위대했던 사람은 불가능한 것을 기대했던 사람이다"라고 함과 동시에 '불가능한 것을 기대했던 사람''하나님과의 투쟁에서 승리한 자'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다([공포와 전율] 중에서). 그러나 아브라함이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한 것을 아브라함이 바라고 믿었다는 것은 자신의 소망에 대하여 믿음을 가졌다는 뜻은 아니다. 더 나아가 개인의 소망이 성취되는 것을 하나님과의 투쟁에서 승리하는 것으로 묘사하는 것은 바울의 의도와 모순된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바랐기 때문에 소망이 성취된 뒤에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었다(20). 그는 믿고 바라는 모든 것의 근원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돌리고 있다. 과학에 있어서 사실에 대한 '확신'은 과학자가 세워 놓은 가설을 추론(推論)하여 밝혀진 사실(비록 이 사실이 진리는 될 수 없을지라도) 또는 추론에 의해 세워진 가설에 대한 '확신'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신앙은 전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한 것으로 믿고 바라는 것이며, 보다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전능성과 목적의 결정성(determinateness), 곧 약속의 신실성을 믿고 바라는 것이기에(J. Murray) 전제된 가설을 추론하여 믿는 과학적 확신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 이 내용은 창 15:5 b'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는 말씀의 인용구이다. 여기서 '후손'이란 문자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되지만, 창세기 본문에서나 본절에서는 '율법에 속한 자''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 모두를 지칭한다(16절 주석 참조).
 
성 경: [4:19]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믿음의 후사(後嗣)]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 바울은 생식(生殖) 능력이 없는 것을 '죽은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헬라 본문에서 '죽은 것 같음'이란 말이 아브라함에게는 완료 수동태 분사형으로(*, 네네크로메논) 언급되어 있으며, 사라에게는 명사형(*, 네크로신)으로 언급되어 있다. 사라에게 명사형으로 사용된 것은 앞에서 사용된 분사형의 반복이며, 아브라함에게 완료 수동태가 사용된 것은 이미 생식 능력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개역 성경의 번역에서 사용된 '같음'이란 말은 헬라 본문에서는 사용되지 않고 있다. 특히 개역 성경에는 번역되지 있지 않으나 헬라 본문에는 '이미'를 의미하는 헬라어 '에데'(*)가 사용되어 두 사람 모두 생식 능력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17절에서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라는 말씀이 '이미 생식 능력을 상실한 아브라함과 사라의 생식 능력을 회복시키시고'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말씀은 24절의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라는 구절과도 연결되어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사건은 사라의 태()가 생산 능력이 없는데서 생산의 능력을 갖추게 된 사실과 영적으로 일맥 상통한다. 영적인 의미에서 생산 능력이 없는 사라가 그의 후손을 생산하게 된 것이나 죽었던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나셔서 '생명을 주는 영'(고전 15:45, life-giving-spirit)으로서 잠자는 자의 첫열매가 되신 것은 같은 의미를 지닌다.
 
성 경: [4:20]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믿음의 후사(後嗣)]
의심치 않고 - '의심하다'의 헬라어 '디에크리데'(*)'디아크리노'(*)의 부정 과거 수동태로서 아브라함의 의심하지 아니한 행위가 개인의 능동적인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님을 시사한다. '디아크리노''가려내다'(16:3), '구별하다'(2:4) 또는 '스스로 마음에 갈등을 일으키다'(14:23;11:23)라는 의미인데 본절에서는 아브라함의 '확신'(*, 플레로포레오)과 반대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의심치 않았다'는 것은 소망에 근거해서(*, 에프 엘피디) 믿음으로 살았기에 갈등할 수가 없었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네뒤나모데 테 피스테이'(*)에서 '믿음'(피스테이)은 앞에 전치사가 없이 여격으로 사용되었다. 메첸(Machen)은 전치사가 없는 단순한 여격은 수단이나 방법을 의미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한 예로 '에게이론 타이 토 로고 투 퀴리우'(*)'그들이 주님의 말씀으로 일으킴을 받는다'를 의미하는데 주님의 '말씀''일으킴을 받게 되는' 수단이 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절은 문자적으로 '믿음으로 강하여져서'라는 의미를 지닌다. '믿음''강하여지게 되는' 수단이 된다. 그리고 '믿음으로 강하여져서'라는 말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강하게 붙들었다는 의미를 지닌다. 여기서 한 가지 난제가 발생한다. 15장에 언급된 하나님의 약속을 아브라함이 끝까지 변함없이 믿었다는 사실이 창 17:17"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 세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생산하리요"라는 말씀에 의해 도전받게 된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이와 같이 분명하게 의심을 나타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해서 바울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강하여져서'라고 진술하고 있는가 ?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은 다음과 같이 해결될 수 있다. 비록 혹자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연약하여져서 의심을 하였으나 다시 하나님께서 그것을 강하게 해주셨다는 것으로 이해하지만(Hendriksen) 이 해석은 타당하지 않다. 다만 아브라함이 의심을 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방법에 대한 것이었다. 즉 그의 자손이 수없이 많아지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이고, 그 약속은 문자적으로 사라의 몸종인 하갈을 통해서가 아니라 사라를 통해서만 성취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생각하였을 것이다. 비록 하갈은 사라의 몸종이었지만 하갈의 자식은 바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 고하기를 하갈의 아들인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17:18)라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창 15장에서 말씀하셨던 그 약속을 재차 창 17:19-21에서 말씀하심은 아브라함의 약해진 믿음을 다시 확고히 해주기 위함이 아니라 사라의 태에서 난 자만이 그 약속을 성취시킬 것이라는 점을 아브라함에게 못박으신 것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 본 구절에 대해서 구약성경에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다만 다음과 같이 추론해 볼 수 있다. 17:19-21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재보증받은 아브라함은 곧바로 하나님께서 이전에 명하신 할례 의식을 행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방법에 대해 확고히 믿게 되었음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성 경: [4:21]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믿음의 후사(後嗣)]
약속하신 그것 - 본문에 언급된 약속의 구체적인 내용은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리라'(17)는 것과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18)고한 것이다. 이약속은 아브라함의 소망과 확신에 의하여 얻어낸 보증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보여 주신 하나님의 능력과 신실하심에 근거한다. 아브라함의 확신보다 더 확실한 것은 그분의 약속이다. 왜냐하면 약속은 하나님 자신의 전능성과 신실성을 나타내신 목적있는 작정이기 때문이다.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 이 말은 '능치 못할 것이 없는 여호와 하나님'(18:14)에 대한 확신이며 또한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라'(18:19)는 말씀에 대한 확신이기도 하다. 본 구절에 대하여 혹자는 본절이 "아브라함의 신앙의 힘과 활기를 완벽하게 표현해 주고 있다"고 진술하기도 한다.
 
성 경: [4:22]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믿음의 후사(後嗣)]
그러므로 - 개역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았으나 헬라어 본문에는 '그러므로'(*, 디오) 다음에 '카이'(*)가 언급되어 있다. '카이'는 일반적으로 접속사로 사용되어 '그리고'를 의미하지만 본문에서는 '또한 역시'라는 의미를 지닌다. 바울이 이 단어를 사용하게 된 것은 9절 하반절에서 언급했던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라는 말씀을 다시 반복하면서 그 의미를 강조하기 위함이다.
 
성 경: [4:23]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믿음의 후사(後嗣)]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사실은 동시성(Synchronism)과 통시성(Diachronism)을 동시에 지닌다. 즉 그 원리는 아브라함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의 후손 모두에게도 적용된다. 이에 대해서 성경 자체의 증거로는 15:4;102:18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바울의 진술은 '당신이 주장하는 것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만 적용되며 모세 이후부터는 율법만이 적용될 뿐이다'라고 주장하는 유대인들에 대한 것이다.
 
성 경: [4:24]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믿음의 후사(後嗣)]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 '우리'는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을 믿는 자들을 가리킨다. 본절은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손길이 열려 있음을 시사하고 있으며, 이는 유대인의 특권을 부인하고 있는 23절의 '아브라함만을 위한 것이 아니요'라는 내용과 호응을 이룬다. 여기서 바울은 자신의 논리를 '믿음의 내용'으로 옮기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화제를 끌어내고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자기가 언급했던 하나님의 약속이 최종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고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 하나님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은 동일한 분이심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결국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것을 믿는 것과 신약 시대에 성도가 예수를 믿는 것은 내용상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아브라함의 믿음은 실현될 '약속'에 대한 것인 반면, 신약 시대 성도의 믿음은 성취된 '약속'에 대한 것이다.
 
성 경: [4:25]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믿음의 후사(後嗣)]
예수는...살아나셨느니라 - 본절에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성도에게 적용시키면서 반대되는 의미를 지닌 두 구절을 대조시키고 있다. '우리 범죄함''우리를 의롭다하심'이 대조되어 있고,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위하여 살아나셨으니라'가 대조되어 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내어 줌이 되었다는 것은 우리 죄를 위한 대속적(代贖的)인 죽음을 의미하며, 우리를 위하여 살아나심은 대속의 결과인 ''를 보증하고 선포하시기 위함이었다. 이와 같이 바울은 24절에서 믿음의 내용으로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 살리신' 것에 대하여 언급했던 것을 성도들에게 다시 적용시키는 논리의 순서를 밝고 있다. 한편 바울이 예수의 대속적 죽으심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은 것은 사 53:1-9과 같이 구약 시대에서 메시야의 고난에 대한 내용이 언급되어 있어 유대인들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사건이 논리적으로 설명되고 증명되어질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방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 사건에 대해 구약 성경을 인용하면서까지 굳이 증명을 시도할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그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내용이 지니고 있는 하나님의 비밀을 밝혀내는 것이 유대인에게나 이방인을 위해 더 유익한 것으로 판단되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5장에서 8장까지 줄곧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성도들에게 어떤 의의를 갖게 되는지에 대해서 진술하게 되었다.
 
성 경: [5:1]
주제1: [칭의(稱義)의 결과]
주제2: [칭의(稱義)의 결과]
그러므로 - 이는 1장에서부터 4, 특히 3:21부터 4:25까지의 내용에 대한 결론이요 그 적용이 새롭게 전개되기 시작함을 시사한다. 4장에서 바울은,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고 또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구속된 자에게도 그 칭의의 혜택이 전가됨을 말하였다. 이제 5장에 들어가면서 '그러므로'(*, )라고 말하는 것은 이신 칭의에 대한 결론뿐만 아니라 그 적용이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됨을 의미하는 것이니, 이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주어지는 칭의의 열매들을 언급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 여기서 우리는 칭의의 결과에 대한 바울의 진술에 대하여 살펴보기에 앞서 '믿음' 자체에 대한 성격 규정이 필요하다. '믿음'에 대한 견해에 따라서 본서의 나머지 부분이 어떻게 해석되는지가 판가름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에 따른 선물이므로 칭의의 조건이 될 수 없고 다만 율법과 대치되는 개념으로만 생각되는 경향이 있다(Deissmann, Michaelis). 이는 믿음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며 인간의 행위가 될 수 없다는 입장에서 취해진 주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믿음이 순종과 동일시되며(3:18, 19), 본절에서처럼 '믿음으로'(*, 에크 피스테오스)라는 말이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디카이오덴테스)이라는 동사의 조건이 되는 구절에 대해서는 충분한 설명이 될 수 없다(3:22, 30;2:16;3:14;3:9). 이와 관련하여 불트만(R. Bultmann)"공적에 대한 철저한 포기로서, 하나님에 의해 정해진 구원의 길에 공손하게 굴복하는 것으로서,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것으로서 '믿음'(*, 피스티스)은 옛 '자아' 대신 새로운 '자아'가 형성되는 순종의 자유로운 행위"라고 역설하였다(Theologie des Neuen Testaments). 여기서 불트만은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기보다는 인간의 결단에 의해서 즉 '아래서 위로' 행하는 행위임을 설파하였다. 이러한 불트만의 주장에는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보수주의의 견해(Machen)를 부정하면서 '믿음'이라는 단어가 바울에게서 애매하게 사용된 것을 수정해 보려고 하는 시도가 엿보인다. 그렇지만 '믿음' 자체가 우리의 의지로 가능한 것인가 ? 불가능한 것을 바라고 믿는 그 '믿음'이 우리의 의지로 가능하다면, 합리적인 인간은 무엇을 근거로 불가능한 것을 믿는 신앙을 소유하게 되었는가 ? 불트만은 이에 대한 구체적인 대답을 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믿음'에 대해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순종''믿음'과 동일시되는 것은 '믿음'이라는 심적(心的) 요소가 외부적으로 하나님 앞에 '순종'이라는 것으로 구체화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믿음은 심적 요소로서 이 역시 하나님의 은사(恩賜)가 아니고는 믿음을 지니는 것이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에 응답할 수 있게끔 인간의 심성으로 하여금 '믿음'을 향하도록 하는 하나님의 적극적인 개입이 없이는 인간은 '믿음'을 갖을 수가 없다. 따라서 '믿음'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며 그것이 언어로 표현될 때 칭의의 조건으로 보일 때가 있으며, 더욱 구체적으로는 '순종'으로서 나타나기도 한다. 한편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카이오덴테스'(*)는 동사 '디카이오오'(*, '의롭다 하다')의 단순 과거 수동태 분사형이다. 이는 본 서신을 쓰고 있는 바울과 당시 본 서신의 수신인인 로마 교회 성도들이 이미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은 상태임을 암시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된 인간과 의로우신 하나님 간에 평화의 관계를 맺게 해주는 주체이시다. 여기서 바울이 '화평'(*, 에이레네)이란 용어를 사용한 것은 죄인된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었으나(1:18;2:5)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진노의 문제가 해결 되었음을 보여 주기 위함이다. 그리고 또한 이 용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이 칭의를 얻게 된 결과를 설명하기 위하여 채택되었다. 그런데 혹자는 본절의 '화평'이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화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에 흐르는 평안 상태를 가리킨다고 본다(Shedd). 그러나 본절의 문맥을 고려할 때 그리고 기타 바울 서신에 나타난 '화평'이란 단어의 사용을 감안할 때 그와 같은 주장은 지지를 얻지 못한다. 즉 본절의 '화평' 앞에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라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에 대한 언급이 나오므로, 하나님과의 관계성에 대한 언급이 나오므로, 하나님과 원수된 관계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사랑하는 호의적 관계로 진전되었다는 맥락에서 화평이 이해되어야 한다. 또한 골 1:20에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셨다는 사실이 강조되었고 엡 2:14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는 믿는 자의 화평이 되신다는 사실이 강조되고 있으므로, '화평'이란 단어는 진노 아래 있던 인간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평케 되었다는 견지에서 이해될 수 있다. 결국 '화평'은 인간 내부의 인격적 변화를 말하기보다는 하나님과 원수된 인간이 회복의 관계로 진전된 점을 의미한다. 그러나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받은 성도는 하나님과의 우호적 관계라는 사실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샘물처럼 끊임없이 흐르는 하나님의 평화를 내적으로 누리게 된다.
 
성 경: [5:2]
주제1: [칭의(稱義)의 결과]
주제2: [칭의(稱義)의 결과]
그로 말미암아 - 바울은 인간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음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에 대해 다시 반복하여 말하고 있다. 이는 베드로가 이스라엘의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들 앞에서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4;12)라고 하면서 구원을 얻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뿐이라고 역설한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 초기의 동방 사본들과 서방 사본들에는 '믿음으로'라는 문구가 없으며 현대의 일부 영역본에도 이 말이 생략되어 있다(NEB, RV, RSV). 그러나 이 말이 나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본절의 문맥상 그 의미가 함축되어 있으므로 이는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한편 엡 2:18에서 바울은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선언했는데, 이것은 본절과 내용상 같은 의미이다. 성도가 '믿음으로 서 있게'되는 것은 오직 성령의 사역에 의한 것이며 '은혜에 들어가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후사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본절에서 암시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예비하시고 약속하신 그 은혜 속으로 우리가 스스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들어감을 얻는' 것이다. 여기서 '들어감'으로 번역된 헬라어 '프로사고겐'(*)'접근'(access), '인도', '채용' 등으로 번역될 수 있으나 여기서는 '인도'의 의미로 봄이 가장 적절하다. '프로사고겐'은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나 신앞에 인도되거나 소개되는 특권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F.F. Bruce). 성도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를 구원주로 믿고 그의 자녀가 되었으며 그분에 의해 존귀하심과 영광중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 인도함을 받고 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는 1:23 주석을 참조하라. 본절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우코메다 에프 엘피디 테스 돝세스'(*)는 직역하면 '하나님의 영광의소망 가운데 우리가 자랑하느니라'가 된다. 여기서는 개역 성경의 '즐거워하느니라'에 해당하는 동사 '카우코메다'(*)가 다음과 같이 해석될 수 있다. (1) 일반적으로는 '자랑하다'란 의미를 지니지만 이는 유대인이 율법을 자랑하는 것과 유사한 어감이 풍기기에 오히려 '즐거워하다'(rejoice, KJV, NIV, RSV)로 해석하는 학자들이 많다(Hendriksen, Black). 그리고 혹자는 '영광스러워하다', '영광을 돌리다'라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Lenski). 그렇지만 본절에서는 '자랑하다'든지 '영광스러워하다'든지 또는 '즐거워하다'든지 어느 번역을 취하든 의미상 별 차이가 없다. 바울이 지금 진술하고자 하는 바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소망 가운데 있는 성도의 내적인 변화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머레이(Murray)'최고로 기뻐하고 자랑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2) '카우코메다'1절의 '소유하다', '취하다'를 의미하는 '에코멘'( 혹은 )의 해석과 같이 청유형(請誘形)으로 '즐거워하자'로도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3절과 본절의 문자 구조를 비교해 볼 때 청유형보다는 평서문의 문장이 더 자연스럽고 3절과도 조화가 잘 된다(3절 주석 참조). 그러면 성도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소망하며 즐거워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 첫째로,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은 곧 성도들의 영광이 된다고 그리스도께서 논증하셨기 때문이며(14:3; 17:24) 둘째로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며 성도들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구원 계획이 완성될 것이기 때문이다(2:10;벧전 5:4).
 
성 경: [5:3]
주제1: [칭의(稱義)의 결과]
주제2: [칭의(稱義)의 결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 '환난'으로 번역된 헬라어 '들마세신'(*)은 동사 '들리보'(*)의 여성 명사형이다. 원래 '들리보'는 포도즙 틀에서 포도즙을 짜내듯이 피와 땀과 눈물과 고통을 '짜낸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즐거워하나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우코메다'(*)는 동사 '카우카오마이'(*)1인칭 복수 현재형으로 '기뻐 날뛰다', '의기양양해 하다', 또는 '자랑하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바울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들어가게 된 즐거움이 복음으로 인해 받게 되는 핍박과 환난보다 훨씬 큼을 강조하고 있다. 성도가, 괴로움과 슬픔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환난을 극복하며 오히려 즐거움 가운데 힘차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세상의 즐거움과 고통은 잠깐 피었다 사라지는 안개처럼 가변적(可變的)이요 일시적인 반면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하는 즐거움과 기쁨은 불변하며 영원하기 때문이다(고후 4:18). 더더욱 성도는 주님께서 약속하신 바, 영원한 세계에 대한 소망이 지대하고 극명하기 때문에(14:1-3) 현재의 모든 고난을 즐거움 가운데 상쇄(相殺)시킬 수 있다.
환난은 인내를 - 복음을 따르는 자들에게는 필연적으로 환난이 닥쳐오며 인내가 요구된다(13:20-22). '인내'로 번역된 헬라어 '휘포모네'(*)는 동사 '휘포메노'(*)에서 유래한 여성 명사이다. '휘포메노'에는 '최후까지 남는다', '참는다', '계속하다', '기다린다'는 의미가 있다. 성도들이 이 땅에서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 때 극심한 핍박과 고난이 임하나 이 모든 환난에서 성령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참고 견디며 끝까지 살아 남을 수 있게 된다. 여기서 성도의 인내는 성령의 사역의 결과로 주어지는 수동적 의미만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성도의 성품과 인격에서 우러나오는 자발적인 의미까지 함축한다(W. Hendriksen).
 
성 경: [5:4]
주제1: [칭의(稱義)의 결과]
주제2: [칭의(稱義)의 결과]
인내는 연단을 - '연단'(鍊鍛)에 해당하는 헬라어 '도키메'(*)'증명하다', '시련을 주다', '시험하다', '분별하다', '택하다' 등의 의미를 가진 동사 '도키마조'(*)에서 유래한 여성 명사로서 '연단' 외에 '인격', '증거', '문서', '자격'등의 의미를 지니며, 일반적으로 '엄격한 시험 또는 혹독한 시련을 통과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마치 용광로에서 금이 여러번 단련됨으로써 정금과 순금이 만들어지는 것처럼 성도는 여러 가지 시험과 환난을 참고 견딤으로써 그 자신이 정화된다. 여기에는 성령의 사역이 함께하며 이 믿음의 시련을 통과한 성도는 금보다 더 귀한 신앙인으로 증명된다(벧전 1:7). 혹자는 '도키메''체험'으로 번역한다(Calvin). 즉 그는 본절의 '도키메''하나님의 확실한 보호하심에 대한 체험'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도의 삶에 있어서 환난을 당하고 그 가운데서 인내하는 이 모든 과정들이 체험이므로 본절에서는 이와 같은 포괄적인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적합하지 않다.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 바울은 신앙에서 소망의 문제로 접근했다. 신약성경에서 성도의 소망은 일반적으로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을 의미하지만 보다 구체적으로는 '부활의 소망'을 의미한다(28:20). 바울은 죽은 자가 다시 사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을 것이며, 또한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 성도의 신앙도 헛되다고 가르쳤다(고전 15:12-16). 이 말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임을 보여 주고 있다. 한편 본절의 '이루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테르가제타이'(*)'만들어내다', '행하다', '준비하다', '정복하다', '성취하다' 등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본절에서는 어떤 사건에서 어떤 결과를 '산출해 낸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성도는 불 시험과 같은 연단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을 받으며 이러한 사실을 인식함으로써 부활에 대한 소망이 구체화되고, 그 소망만을 붙잡게 된다. 또한 본절의 '앎이로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도테스'(*)'오이다'(*)의 주격 남성 복수 분사이며, '오이다''에이도'(*)의 제 2 완료 분사이다. '에이도''기노스코'(*)가 주로 육적(肉的)인 앎을 의미하는데 반해 영적 체험을 통해 얻어지는 지식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그리고 '에이도테스'는 분사 형태이므로 체험을 통해 획득한 영적 지식이 부단히 계속됨을 의미한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는 소망이 물리적 지식이 아니라 부단한 영적 지식을 통해 성도의 삶 속에 확고하게 자리잡게 됨을 시사하고 있다.
 
성 경: [5:5]
주제1: [칭의(稱義)의 결과]
주제2: [칭의(稱義)의 결과]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 바울은 연단을 통해 이루어진 소망이 부끄럽게 하지 않는 근거를 설명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무엇보다 먼저 성도 가운데 계시며 역사하시는 성령 때문이다. 성령께서는 성도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보증해 주시는(인쳐 주시는) 분이시기에 전신앙(全信仰)의 과정에 함께 계시고 보증하신 그 약속이 이루어지게 하신다. 한편 '성령으로 말미암아'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디아 프뉴마토스'(*)이다. 이처럼 헬라어 전치사 '디아'(*) 다음에 목적격인 '프뉴마'(*)가 오지 않고 소유격인 '프뉴마토스'(*)가 온 것은 성령이 원인이나 결과가 아니라 하나의 수단 내지 방법이 됨을 암시한다. 본절 외에도 신약 성경 전체에서 '디아' 다음에 '프뉴마'가 온 경우는 단 한번도 없다. 다만 '엔 토 프뉴마티'(*)처럼 여격이 와서 방법을 나타낼 뿐이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성령을 받았다고 해서 자랑할 것이 되지 못함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현재 자신이 성령으로 충만하다 하더라도 이것으로 장래의 구원까지 보장받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성령은 구원에 이르는 방법이요 수단이므로 중요한 것은 성령 그 자체보다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가까이 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가 아니면 하나님께로 갈 수 없는 것이다(14:6).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 성령께서 성도와 함께 계시는 결정적인 근거는 바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때문이다. 따라서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계심은 하나님의 사랑이 성도를 향해 물붓듯이 부어지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바울은 8:39에서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고 선포할 수 있었다. 본절의 '부은 바 됨이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여케퀴타이'(*)3인칭 단수 완료 수동태 직설법으로 '쏟아 부은 바 되었다'는 의미이다(has been poured, RSV). 여기서 하나님의 사랑이 액체처럼 쏟아 부어졌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충분히 넘치게 부어졌을 뿐만 아니라 모이는 물처럼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성도들에게 베풀어졌다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언급하면서 그 사랑의 표현이 가장 절정에 이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성 경: [5:6]
주제1: [칭의(稱義)의 결과]
주제2: [칭의(稱義)의 결과]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 바울은 8절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라고 언급함으로써 본절의 의미를 보충하며 더욱 명확하게 해주고 있다. 바울이 엡 2:3에서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라고 진술하고 있듯이, '연약할 때에'는 믿음이 약한 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시점을 가리킨다. 이는 '연약할 때에'로 번역된 헬라어 '아스데논'(*)의 의미를 살려볼 때 분명해진다. '아스데논''아스데네스'(*)의 제 2격 복수로서 '도움을 받을 수 없다', '소망이 없다'는 의미를 갖는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의 자연인은 그 자신이 스스로 구원의 길을 찾을 수 있는 힘이나 소망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특히 바울이 '우리가 아직 연약하다'는 사실을 말한 것은 우리가 전혀 구원의 소망이나 그 길을 찾을 하등의 힘이 없었음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구체화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代贖)의 은혜를 받을만한 자격과 가치가 전혀 없었음을 강조하고자 함이었다.
기약대로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타 카이론'(*)'정해진 시기에' 또한 '적절한 때에'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 표현은 하나님의 경륜(經綸)이 세상 가운데에서 시행될 정확한 시점이 있음을 보여 준다(2;4;4:23).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일찍이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예언된 바이거니와(7:14;53:2) 하나님께서 일을 행하실 때에는 막연한 시기에 하는 것이 아니라 만세전(萬歲前)에 예정하신 계획에 따라 행하신다. 본절의 '기약대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때가 '적절한 시기' '인류에게 가장 소망이 없던 때'였음을 의미하는 바, 사건이 이루어진 때의 중요성을 강조함과 더불어 배후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우주적인 계획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구약성경에 예언된 그리스도께서 기약대로 이 땅에 오셨듯이, 재림도 기약대로 이루어질 것이다(24:42-44). 실로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로서 당신의 영원하신 계획대로 인류와 유주의 역사를 다스리시며 성도들에게 약속하신 바를 반드시 성취하시는 분이시다(23:19).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 경건치 않은 자는 8절의 '죄인'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sinners, LB). 곧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이 죄인이며 또한 경건치 않은 자이다. 한편 '...를 위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페르'(*)는 그 외에도 '...대신에', '...에 관하여'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불경건한 자들의 입장에서 이루어진 대속적인 사건이었음을 나타낸다.
 
성 경: [5:7]
주제1: [칭의(稱義)의 결과]
주제2: [칭의(稱義)의 결과]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혹 있거니와 - 본절에서는 의인(a righteous man)과 선인(a good man)이 대조되어 있다. 혹자는 이 둘을 구분하여 '선한 사람은 의로운 사람보다 더 위대하다는 특징을 지닌다'고 진술한다(Lenski). 물론 문자적으로나 그 의미상 두 용어는 엄격하게 구분된다. 의인이 정의의 차원에 서 있는 사람이라면 선인은 사랑과 덕을 베푸는 사람이라는 어감을 지니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Lightfoot, Murray). 그러나 바울이 히브리인들이 시문학에서 즐겨 사용하는 평행 대구법(parallelism)을 이용하고 있으므로 본절은 평행된 두 구절이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나아가 서로의 의미를 보충해 주는 문장 구조를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해 본절은 의롭고 선한 사람을 위해 극히 드물기는 하지만 가끔 죽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의미를 지닌다(Murray). 이와 같은 본절의 핵심은 인간 세상에서 위대한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사람이 가끔 출현할 수 있다는데 있지 '의인''선인'을 구별하는데 있지 않다. 더 나아가 본절은 의롭거나 선한 사람을 위해 죽는 희생적 행위 자체도 죄인을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사랑에는 결코 견줄 수 없음을 함축하고 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절대적 사랑을 부각시키기 위하여 인간 세상의 보편적이고 통속적인 사랑을 소개하는 형식의 비교법을 사용하고 있는 본절은 8절의 내용의 서론격이다. 본절이 8절 내용에 대해 서론격이라함은 의인이나 선인을 위해 죽는 자는 혹시 있을 수 있으나, 죄인을 위해 죽는 자는 결코 있을 수 없다는 점에 있다. 결국 본절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절대적 우위성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에는 너무나도 무가치하고 자격이 없는 인간의 본질적 양상을 드러내고 있다.
 
성 경: [5:8]
주제1: [칭의(稱義)의 결과]
주제2: [칭의(稱義)의 결과]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 본절에 이르러 바울은 요점에 봉착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죄인들'(*, 하마르톨론)을 위한 것이었다. 여기서 '죄인'은 도덕적으로 의롭거나 선하지 않은 사람일 뿐만 아니라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시작된 인간의 전적 타락성과 부패성으로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J. Calvin). 이러한 의미는 9절에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이라는 대조적 표현이 나옴을 볼 때 분명하다. 사도 바울의 이러한 대조적 표현은 희생된 생명의 무한한 가치와 그분으로 말미암아 은혜를 입은 사람의 무가치성의 대조를 극명하게 해준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 이에 대한 바울의 표현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렸으니'(1:4),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고후 8:9),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5:2), 그리고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2:14)등으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으심에 대하여 풍부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한편 '...을 위하여'(*, 휘페르)라는 표현이 6-8절에서 모두 네 번 나온다. 그는 본절에서 이 전치사 대신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있어 대속적 측면을 강조하는 전치사 '안티'(*, '때문에')를 사용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이 단어를 사용하지 않은 까닭은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함과 더불어 그밖의 다른 것도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희생이 주는 대속적 특징 이외에 그리스도 안에 내재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따라 남을 위하여 행동한다는 의미를 강조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휘페르'라는 단어의 사용은 매우 적절하다.
하나님께서...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 바울은 하나님과 그의 아들 그리스도와의 밀접한 관계,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과 세상과의 화목(고후 5:19) 그리고 영적으로 죽은자를 사랑으로 이끄시는 그리스도(15:12, 13) 등에 관하여 많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 중에서 바울이 두드러지게 나타낸 것은 특히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이다. 그는 이것을 강조하여 '하나님 자신의 사랑'이라고 지적하였다. 여기서 '자기 자신의 사랑'이라고 말함은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적이고 영원하며 참됨을 의미한다. 인간의 사랑은 자기 자신의 사랑이 아니라 모범을 따르는 사랑이요 배운 사랑이다. 궁극적으로 인간의 사랑은 그 근원이 인간에게 있지 않고 그 사랑을 주신 하나님께 있는 것이다.(요일 4:10, 19).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랑을 확고하고 구체적으로 인간에게 드러내셨으니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다. 한편 본절의 '확증하셨느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슈니스테신'(*)'추천하다', '드러내다'란 의미이다. 그래서 영역 성경을 '나타내 보여 주다'(demonstrate)로 번역하거나(NASB, NIV), 혹은 단순히 '보여 주다'(show)로 번역하기도 했다(RSV). 무엇보다 본절에서 주목되는 것은 바울이 동사의 시제로 현재성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헬라어의 현재 시제는 현재에 발생하는 단순한 사건을 기술하는 것 뿐 아니라 현재 진행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슈니스테신'을 보다 정확히 번역하자면 '나타내 보여주고 계시느니라'(is demonstrating)로 된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은 과거의 단 일회적 사건으로 끝이 났으나 하나님의 사랑은 바울이 본 서신을 쓰는 당시뿐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에도 끊임없이 부어지고 있음을 나타내 준다.
 
성 경: [5:9]
주제1: [칭의(稱義)의 결과]
주제2: [칭의(稱義)의 결과]
본절은 6절과 8절 내용의 연속이나 좀더 자세하고 진일보한 면을 갖는다. 6절에서는 '우리가 연약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고 하셨고 8절에서는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셧다'고 하였다. 이제 본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해 주신 내용을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다.
그러면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은 주로 '그런즉' 또는 '그러므로'라고 개역 성경에 번역되었다(1;4:9, 10, 16, 22). 본절에서는 앞절의 설명과 연결짓기 위해 유도된 접속사의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다음에 이어지는 구절이 이유를 나타내는 분사 구문이기 때문이다. 또한 ''은 앞에서 말한 바에서 한층 논리가 진전됨을 암시한다.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 4:25에서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칭의에 대한 설명이 있었으나 본절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대속(代贖)에 대한 설명이다. 4:25은 부활을 통해 '생명을 주는 영'이 되신 그리스도가 칭의의 근원이라는 진술이며, 본절은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으심이 칭의의 근거라는 진술이다. 이러한 사실은 '그 피를 인하여'라는 표현에 분명하게 나타난다. 이 문구는 헬라어로 '엔 토 하이마티 아우투'(*)이며 이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그의 피 안에서'이다. 여기서 바울이나 전치사 '디아'(*)를 사용하지 않고 ''(*)을 사용한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디아''....을 통하여'(throught)라는 방법, 수단의 의미를 지니나 '''어떤 사물이나 사람의 상태, 조건'을 나타내는 포괄적 의미를 갖는다. 특히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엔 크리스토), '주 안에서'(*, 엔퀴리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엔 크리스토 예수)등의 독특한 표현을 사용할 때 '디아'를 썼다. 본절에서 '디아'의 사용은, 그리스도의 보혈에는 대속적 능력이 있어 죄인들을 의롭게 하는 근원이 될 뿐만 아니라 한번 의롭다 함을 얻은 자들을 계속 다스리시고 역사하시는 권세와 능력이 있음을 함축한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었으며 이후에도 그리스도의 피의 권세와 능력의 작용을 받아 계속하여 성화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한편 본절의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1절의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이라는 표현과 비교가 된다. 두 구절은 상호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1절에서는 의롭다 하심을 얻음에 있어 인간 편의 책임과 의무로서의 믿음이 강조되었고 본절에서는 의인(義認)의 근거로서의 하나님의 대속적 피흘림이 강조된 것이다.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인한 진노하심에서의 구원이 칭의를 위한 연결 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 무엇보다 여기서의 '칭의'는 재판관에 의해 무죄 선고를 받아 벌을 면하게 되는 법정적인 차원의 ''라고 단정지을 수 있다. 따라서 본절에서는 그리스도가 죄인된 인간과 진노하시는 하나님 사이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 뜨리는 '화목 제물'(propitiation)이 되셨다는 의미가 강하게 부각되고 있다. 한편 '더욱'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폴로 말론'(*)으로서 비교법 강조의 의미를 지닌다. 즉 본절에서 '폴로 말론'은 단순히 '더욱'이란 의미가 아니라 '훨씬 더', '더욱더'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대속적 피흘림이 칭의보다 더 확실하고 분명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고 있다는 뜻이다.
 
성 경: [5:10]
주제1: [칭의(稱義)의 결과]
주제2: [칭의(稱義)의 결과]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 이 표현은 '우리가 연약할 때에'(6), 또는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8)란 의미보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있을 때에 형성되는 하나님과의 단절된 관계를 보다 명확하고 적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중심을 이루는 단어 '원수'(*, 에크드로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하나님을 향해 적개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는 능동적 의미를 갖는다는 견해(Lightfoot)'하나님이 원수로 여기는 사람'이라는 수동적 의미를 갖는다는 견해가 있다(Murray, Harrison). 두 가지 견해는 서로 상충되는 것이 아니며 모두 일면 타당성을 갖는다고 본다. 그러나 어느 한쪽만을 주장한다면 다른 일면을 소홀히 하는 자가 당착(自家 撞着)에 빠지게 된다. 다시 말해서 '원수'를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범죄성의 측면에서만 이해한다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놓쳐버리게 되며, 또한 '원수'를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와 진노하심에서만 이해한다면 죄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간과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양자의 견해를 모두 포괄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원수하였을 때에'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크드로이 온테스'(*)'온테스'가 능동이나 수동의 의미가 아니라 현재 분사로서 다만 어떤 상태나 조건을 나타낼 따름이라는 점에서도 분명해진다.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 하나님과 죄인된 인간이 화목(和睦)될 수 있었던 근거는 물론 '칭의'이다. '칭의'가 없이는 하나님과 인간의 화목은 있을 수 없다. 공의로우시고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죄의 상태에 머무르는 자에게는 진노의 채찍을 내리시나, 의롭다 칭함을 받은 자에게는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에 들어갈 수 있도록 은혜를 내리신다. 바울이 이처럼 화목을 강조하는 것은 '화목' 자체가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바울이 고후 5:18에서 언급하기를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화목케하는 직책'을 주셨다고 할 때에, 이 직책이란 물론 죄악된 세상과 하나님을 화목케 하는 제사장적 직분(벧전 2:9)이지만 좀더 포괄적인 의미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선전하는 직책'이다.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 상반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화목에 대하여 진술한 반면, 본 구절에서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화목에 대하여 진술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의 죽음보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죄인된 인간의 구원과 화목에 있어 더욱 확실한 보증이 됨을 역설하고 있다. 그 이유는 (1) 그의 부활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를 따르는 무리에게 부활을 확증시켜 주셨으며, (2) 그의 부활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 조에)이 그를 믿는 성도들에게 공급되므로 성도는 그 생명으로써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고 하나님의 후사가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바울은 고전 15장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보다 부활을 더욱 강조하게 된 것이다. 한편 본절의 '화목된''구원을 얻을 것이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각각 '카탈라겐테스'(*)'소데소메다'(*)이며 이 둘은 모두 1인칭 복수 수동태이다. 이는 하나님과 죄인된 인간과의 화목을 이루는 주체가 하나님이시며 또한 구원을 이루시는 분도 하나님이심을 드러낸다. 칭의와 화목 그리고 구원은 인간의 공로나 업적과는 상관없이 오직 하나님의 아들의 죽으심과 부활로 말미암은 것이다(3:25-28).
 
성 경: [5:11]
주제1: [칭의(稱義)의 결과]
주제2: [칭의(稱義)의 결과]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 '화목을 얻게 하신'이란 표현은 지금까지 바울 자신이 설명했던 '칭의', '진노하심에서의 구원', 그리고 '구원'을 포함하는 의미로 해석해도 별 무리가 없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모든 과정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 여기서의 '즐거워하다'(*, 카우코메노이)란 말은 2, 3절에서 언급된 동사인 '카우코메다'(*)의 분사형에 대한 해석이다. 본절에서도 이 동사는 '자랑하면서 즐거워하다'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exalt, MB). 그러면 본절에서 의미하는 '즐거움'은 구체적으로 어떤 즐거움인가 ? 이에 대해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구속(救贖)의 은혜를 입은 자들의 즐거움이다.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었던 자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지심으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되었으며 영생을 소유하게 되었으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당연하다. 둘째로, 영원한 소망을 바라는 즐거움이다. 바울은 2절에서 이 즐거움을 언급했으며 본서의 다른 구절과 고린도후서에서도 수차례 언급하고 있다. 8:18에서는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고 하였고 8:24에서는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라고 하였으며, 고후 5:1에서는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라고 하였다. 셋째는, 참된 즐거움이다. 현재 이 세상에서 우리가 누리는 즐거움은 일시적이요 가변적이며 또한 거짓되고 기만적이나 그 근원과 이유를 하나님께 둔 즐거움은 영원한 즐거움이요 보증이 있는 즐거움이기에 참되다. 이에 대해 칼빈(Calvin)은 말하기를, '하나님은 만물의 근원이요 축복 그 자체이시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함으로써 아무것도 부족할 것이 없는 행복을 누리게 된다'라고 하였다.
 
성 경: [5:12]
주제1: [칭의(稱義)의 결과]
주제2: [아담과 그리스도]
이러므로 - 이는 헬라어 '디아 투토'(*)의 번역으로 어떤 학자는 이 접속사가 6-11절과 12-21절 내용을 하나로 연결해 주고 있다고 보지만 (Lenski), 본절에서 이 접속사의 사용은 매우 부자연스럽다. 왜냐하면 지금까지의 진술과 본절부터 진술될 내용은 직접적으로 어떤 상관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디아 투토'를 별 의미 없이 다른 주제로 전환하기 위해 사용된 단순 접속사로 이해해야 한다. 이는 히브리식 문장 전개 방법임을 이미 2:1의 주석에서 설명한 바 있다.
한 사람으로...들어오고 - 바울은 그리스도로 인해 새시대(new aeon)가 시작됨을 설명하기 위해 먼저 옛 창조의 시작에 대한 설명을 시작한다.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가 오염되었음을 가리킴과 동시에 '죄의 세력'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2:17)고 하셨던 명령을 염두에 두었음이 분명하다. 죄와 사망은 불가피한 연관성을 갖고 있다. 여기서 '사망'(1) 육체적인 죽음, (2)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2:1;5:14;2:13;딤전 5:6;3:1), (3) 지옥의 형벌로 영원한 죽음을 의미한다(21:8). 본절에서는 두번째와 세번째 사망의 개념이 함께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렇지만 6:23은 마지막 영생과 사망이 대조되어 있으므로 세번째 사망의 개념이 더욱 타당하다. 자세한 것은 6:23 주석을 참조하라.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 바울은 한 사람에 의해 세상에 들어온 죄가 보편성을 지님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그 죄의 보편성에 대해 증명을 시도하지 않은 것은 이미 1:18-3:19에서 이미 설명을 했기 때문이다.
이르렀느니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엘덴'(*)은 일반적으로 '통과하다', '퍼져가다'를 의미한다. 그래서 몇몇 영역 성경은 문자적으로 '퍼져가다'(spread to)로 번역하기도 한다(RSV, NASB). 그렇지만 또 어떤 영역 성경은 개역 성경과 같이 '이르렀다'(came to)로 번역하기도 한다(NIV). 어떤 번역을 취하든지 본절의 의미를 손상시키지는 않는다.
 
성 경: [5:13]
주제1: [칭의(稱義)의 결과]
주제2: [아담과 그리스도]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 본절은 삽입구로서 반론(反論)을 염두에 두고 기록한 내용으로 보인다. 그 반론이란 '모세 율법이 있기 전까지 과연 죄가 존재했던가'라는 물음이다. 이에 대해 바울은 답변하기를 하나님께서 비록 기록된 율법으로 죄를 심판하지 않으셨으나 인류는 모태에 있을 때부터 저주 아래 있었다고 한다. 즉 율법이 공포되지 않았을 때의 범죄자들 또한 결코 죄의 형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모세 율법이 주어지기 전까지의 기간 동안 죄의 결과로 생기는 사망이 인류를 지배했다는 점에서 증명된다(14). 또한 이 같은 사실은 모세 율법이 적용되기 이전의 시대에 아우를 죽인 가인이 하나님께 형벌을 받은 사실(4:9-15), 죄악이 관영했던 노아 당시의 사람들이 홍수로 심판을 받은 사실(6:1-7), 바벧탑 사건(11:1-9), 음란한 소돔과 고모라 성의 멸망(19:23-29)등 구약성경에 기록된 구체적인 여러 실례들을 통해서도 입증된다. 결론적으로 죄는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14) 기간에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구절에는 죄의 (1) 역사성(歷史性)(2) 보편성(普遍性)이 시사되어 있다.
율법이 없을 때에는...아니하느니라 - 모세 율법 전에도 각 나라마다 비록 원시적이긴 하지만, 사회를 통치해 나가는 불문률(不文律)과 법률 및 도덕적 관습이 있었으며 사람들은 그것들의 지배를 받아왔었다(Ur-Nammu Code, Eshnunna Code, Lipit-Ishta Code, Hammurabi Code, Hittite Code). 그러므로 율법 이전에도 '죄에 대한 정죄'가 있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왜 본절과 같은 진술을 하였는가 ? 바울은 단순히 법에 저촉되는 ''에 대하여 진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보다 보편적인 의미에서의 죄, 곧 하나님과 분리되고 하나님을 반역하는 삶 그 자체를 죄로 규정하고 있다. 율법이 있기 전에 사람들은 죄를 윤리적인 것으로만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었으며, 따라서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과 분리되고 하나님을 반역하던 삶이 죄라는 사실을 몰랐으므로 그러한 것을 죄로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말해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는 하나님 앞에서의 죄의식이 결여 되었다는 것이다. 역으로 모세 율법이 공포되었을 때 인류는 진정한 의미에서 죄를 죄로 인식하게 되었다.
 
성 경: [5:14]
주제1: [칭의(稱義)의 결과]
주제2: [아담과 그리스도]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 아담과 범죄는 (1)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며, (2) 하나님과 같이 되어 보려고 하는 교만이었다. 그리고 모세 이전 사람들이 이와 동일한 범죄를 짓지 않았을지라도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동일한 죄인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담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 거역하는 본성을 이어 받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호세아 선지자는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6:7)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인간의 범죄가 단순히 자범죄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파생된 근본적인 죄임을 선포하고 있다.
사망이 왕노릇 하였나니 - 본 구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바실류센호 다나토스' (*)'사망이 왕권을 잡았다'로 번역된다 이 말은 세상이 죄악으로 충만했다는 의미이며, 보다 적극적으로는 죄악의 세력이 꺾을 수 없을 만큼 강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말에 대조되는 것으로 바울은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21)라고 표현했다.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 이렇게 아담을 그리스도의 표상(表象)이라고 일컫는 것은 이상하게 생각될 수 있다. 두 사람은 신분이나 인류에게 미친 영향면에서 판이하게 다르기 대문이다. 그러면 아담이 그리스도의 표상이 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 (1) 아담이 옛 시대의 시조인 것처럼 그리스도는 새 시대의 시조이다. (2) 아담의 범죄가 모든 사람에게 미치듯이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도 모든 사람에게 미친다(고전 15:22;고후 5:14, 15). 즉 아담이 범죄의 시조라면 그리스도는 의의 시조이시다. 이 두 가지 의미에서 아담은 예수 그리스도의 '전형'(*, 튀포스)이 될 수 있다(type, RSV)
 
성 경: [5:15]
주제1: [칭의(稱義)의 결과]
주제2: [아담과 그리스도]
그러나(*, 알라) - 이는 앞에서 말한 내용과 반대되는 뜻의 내용이 전개될 것임을 암시한다. 앞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와 아담의 유사점을 말하였으나 본절에서는 그리스도와 아담의 차이점을 말하고자 한다.
이 은사 - 이는 언급된 사실과 관계있는 것이 아니라 본절에 언급된 '은혜'와 관계된다.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 '그 범죄'라 함은 '아담의 범죄''아담의 범죄외의 다른 범죄', '모든 범죄'를 지칭할 수 있다. 그러나 본절 하반절은 아담의 범죄와 그리스도의 은혜를 비교하고 있으므로 대표적으로 '아담의 범죄'라고 해석하는 편이 타당하다. 그리고 헬라어 본문에서 '범죄'(*, 파랖토마)가 단수형이라는 사실도 이 견해를 지지한다.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의 은사'(*, 카리스마)와 아담에서 비롯된 '인간의 보편적인 범죄'를 대조시키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부각시키는 논리를 전개시키고 있다.
한 사람의...죽었은즉 - 12절에서 바울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와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고 했으나, 본절에서는 '모든 사람'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 두 용어 사이에는 의미상 아무런 차이가 없다. 대표 단수를 사용하든지 단순히 복수를 사용하든지 헬라어 문법에서는 '모든'을 의미할 수 있다. 물론 영어 문법에서는 '모든'을 의미할 수 있다. 물론 영어 문법도 이와 같다. 인간의 부분적 타락을 주장하기 위해 이러한 사실을 무시해 버리려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으나, 이것은 바울이 앞에서 '모든'이라는 총칭 형용사를 사용한 것과 비교할 때 전혀 근거가 없다. 더욱 - 이 단어는 9절에서와 같이 단순한 비교가 아니라 비교급 강조의 의미를 갖는다(much more, KJV). 아담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사망에 처하게 되었으나 그리스도의 은혜로 죄와 사망의 권세는 무너지고 더 나아가 모든 사람은 소망과 기쁨 가운데 넘치는 삶을 살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Lenski).
하나님의 은혜 -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선물'과 동일하다. 하나님의 은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말미암아서만 모든 사람에게 미치기 때문이다.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 앞에서 이미 바울은 '한 사람의 범죄'를 언급했으나 지금은 '한 사람의 은혜'에 대해 진술하고 있다. 범죄가 한 사람 아담으로부터 시작되었듯이 은혜도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로써 상반절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명확해진다.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 여기서 '많은 사람'은 앞에 언급된 '많은 사람'과 대조를 이룬다. 그리고 '넘쳤으리라'는 동사는 14절의 '왕노릇하였나니'라는 동사와 대조를 이루고 있다. 한편 '넘쳤으리라'로 번역된 헬라어 '에페릿슈센'(*)'물이 그릇에서 넘쳤다', '강물이 둑에서 넘쳤다'는 뜻으로 그리스도의 은혜가 인류를 구원하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로 넘치며 모든 믿는 자에게 구별없이 풍성하게 부여된다는 문맥상의 의미를 갖는다. 또한 동사 '에페리스슈센'은 목적어로서 '에이스 투스 폴루스'(*, '많은 사람에게'), 4격을 취한다. 헬라어에 있어 4격은 3격과 같이 단순 목적의 의미를 지닐 뿐 아니라 '...을 꿰둠고', '...을 관통하여'라는 의미도 내포한다. 즉 그리스도의 은혜가 개인의 전인격을 철저히 변화시키며 죄악을 씻고 거듭나게 한다는 것이다.
 
성 경: [5:16]
주제1: [칭의(稱義)의 결과]
주제2: [아담과 그리스도]
본절에서 바울은 범죄와 은혜의 기원(起原)과 그 위력(威力)의 차이에 대해 이야기 한다. 즉 범죄는 한 사람에서부터 시작되었으나 은혜는 사망이 왕노릇하는 데서, 또는 범죄가 만연되어 있는 데서 비롯되었다. 이것은 '은혜'의 기원과 위력이 '범죄'보다 훨씬 더 크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도식으로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이 선물(*, 도레마) - 이는 15절에서 언급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을 가리킨다. 15절에서 '은사'(*, 카리스마)'범죄'(*, 파랖토마)와 비교되었고 본절에서는 '은사''심판' (*, 크리마)과 비교되었다. 은사는 값없이 주는 용서이며 심판은 엄격한 공의로서 모두 하나님이 주체이시다. 만일 하나님께서 공의로 심판하신다면 우리는 모두 버림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고 값없이 우리를 의롭다 하셨다. 본절은 바로 이 칭의의 선물이 심판의 효능보다 우월함을 선언하고 있다.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 '의롭다 하심'(*, 디카이오마), 곧 칭의(稱義)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피 흘려 죽게 하심으로 죄인들을 사면해 주시고 의로운 자들이라 칭하신 것으로서 이는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주신 선물이요 은사이다. 또한 18절의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를 보면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은 구원을 얻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의롭다 하심이 없이는 구원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은 아담의 범죄로 인해 죄와 사망의 세력 아래 놓인 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과 원수된 상태에서 회복되어 구원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 경: [5:17]
주제1: [칭의(稱義)의 결과]
주제2: [아담과 그리스도]
사망이...왕노릇하였은즉 - 본절은 12, 14절의 말씀을 요약 반복하고 있다. 즉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죄가 선하게 창조된 세상에 들어와 온 세상을 오염시켰고 그 가운데서 통치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이로써 본래 하나님을 최고의 통치자로 삼고, 그의 대리자로 인간, 그리고 인간의 지배를 받는 만물 순의 질서 체계가 죄의 지배력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대신에 죄(사단)가 최고 통치자로 군림하게 되어 하나님의 존재가 완전히 무시되어 버림과 동시에 인간도 아무 주체 의식 없이 죄의 종노릇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질서 내지 통치권의 변화는 예수께서 광야에서 시험받으시는 장면에도 잘 묘사되어 있다(4:8, 9). 마귀는 천하 만국을 자기의 것인양 자랑하면서 예수로 하여금 자기에게 경배할 것을 요구하였다. 여기서 '경배하라'는 사단의 요구는 최고의 통치자로서 마땅히 받아야만 하는 예배행위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세상의 지배권을 행사할 권리를 부여하셨는가 ? 결코 그렇지 않다. 28:18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예수 자신이 친히 하나님으로부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셨음을 가르쳤다. 만일 그러한 권세가 없다면 예수는 세상의 구주 또는 주인(Lord)이 될 수 없다. 다만 사단은 자신이 그러한 권세를 가지고 있는 것인 양 속이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실제로 사단이 죄로 세상을 오염시켰다는 의미에서는 그 역시 세상의 지배자로서 자처할 수도 있을 것이다.
더욱 - 본장에서 바울이 즐겨 사용했다. 자세한 것은 9절 주석을 참조하라.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 여기서 '은혜''의의 선물'은 별개의 개념이 아니라 동일한 의미에 대한 서로 다른 표현으로서 저자가 주장하려는 논지의 의미를 분명히 밝혀 주는 구실을 한다.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왕노릇하리로다 - 상반절과 비교할 때 대조와 구분이 완전해지려면 본 구절은 '생명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왕노릇하리로다'라고 구성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본절에서는 '왕노릇하다'의 주어가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다. 이것은 분명히 바울의 의도적인 변형이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바울은 분명히 성도가 '하나님의 후사(後嗣)'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성도가 '하나님의 후사'라는 것은 단순히 '유업을 잇는 자'(3:29)만을 의미하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갖는 영광된 신분을 강조하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 실제로 계 22:5에서는 성도가 영원 무궁토록 '왕 노릇할'것이 언급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베드로는 성도의 신분을 '왕 같은 제사장'(벧전 2:9)이라고 했다. 그리고 '왕노릇'이란 말은 '죄의 종'되었던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위치가 정반대로 바뀌게 됨을 보여주고 있다(21).
 
성 경: [5:18]
주제1: [칭의(稱義)의 결과]
주제2: [아담과 그리스도]
바울은 다시 12절부터 지금까지 진술했던 것을 요약하여 말하고 있다(Murray). 그러면서 그는 죄인된 인간이 생명에 이르게 된 과정을 설명한다. (1) 한사람(아담)의 범죄로 -> (2)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으며 -> (3) 예수그리스도의 의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 (4)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 (5) 생명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 과정에 바울이 그동안 진술했던 '믿음''화목'을 삽입해 보면, '믿음'(3)(4) 사이에 그리고 '화목'(4)(5) 사이에 삽입될 수 있다.
그런즉(*, 아라 운) - 12절에서부터 17절까지의 내용을 요약하는 결론이 시작됨을 나타낸다. 죄와 율법에 관한 13, 14절 내용과 구원의 은혜와 범죄에 대한 심판을 대조시킨 15-17절 내용으로 중단되었던 아담과 그리스도 간의 비교가 12절에 이어 다시 본절에서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12절에 천명된 결론이 본절에서 다시 언급되고 있다.
한 범죄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 헤노스 파랖토마토스'(*)는 두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즉 한글 개역 성경과 같이 '한 범죄'로 해석하거나 영역 성경이나(the offence of one, KJV;one man's trespass, RSV) 독일어 성경처럼(eines Sunde, Luther Bible) '한 사람의 범죄'로 해석하는 것이 가능하다. 어느 경우를 취하든지 전후 문맥상의 의미에 있어서 별다른 차이를 초래하지 않으나 후자의 해석이 지배적이다. 헬라어 사본들 중의 가장 유력한 사본들 중 하나인 알렙 사본(*)을 위시하여 고대 라틴어 사본들은 본문의 '헤노스' 다음에 '안드로포스' (*, '사람')을 첨가하고 있으며 많은 역본들이 이를 따르고 있다. 그리고 15-17절에 '한 사람'이란 표현이 일관되게 반복 사용되고 있는 점으로 보아서도 '한 사람'이 원문에 충실한 듯하다. 아무튼 본 문구는 '한 사람 아담의 범죄'를 가리키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정조에 이른 것같이 - '많은 사람'으로 번역된 헬라어 '판타스 안드로푸스'(*)'모든 사람'(all men, KJV, RSV)을 의미한다. 아담 한 사람의 범죄는 세상에 사망의 권세를 가져왔고 전인류는 이 사망의 권세에 눌려 종노릇을 하게 되었다.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본문(*, 디 헤노스 디카이오마토스)'한 사람의 의로운 행동으로 말미암아'라는 뜻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우신 행동을 가리킨다. 그런데 많은 학자들은 여기서 '의로운 행동' '디카이오마토스'(*)'칭의의 행동'으로 해석한다(Meyer, Gedet). 그러나 '디카이오마토스''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없다고 여기시는 행위', '하나님의 칭의 행위'란 뜻을 지닌 '디카이오시스'(*)와 구별되므로 '의로운 행동'(one man's act of righteousness, RSV)으로 해석됨이 무방하다(Murray, Holsten ).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운 행동이란 예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 행하신 모든 행동, 즉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행하신 모든 행동, 즉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행하신 사역들을 총칭한다. 물론 이 구원사역은 십자가 사건에서 최절정을 이룬다.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고 구원을 얻는 근거는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생명에 이르렀느니라 - 이 헬라어 본문 '에이스 판타스 안드로푸스 에이스 디카이오신 조에스'(*)를 번역하면 '모든 사람에게 생명의 칭의가 이르렀다'이다(KJV, Modern Language Bible). 헬라어 본문은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다'는 것을 말함이 아니라 '생명의 칭의'(justification of life)'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 자체가 이미 '생명'에 이른 것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한편 '모든 사람이 생명의 칭의에 이르렀다'함은 만인 구원론(Universalism)을 뜻함이 아니다. 성경은 분명히 그리스도를 믿고 구주로 섬기는 자들에게 구원이 임함을 밝히고 있다(3:16;14:6).
 
성 경: [5:19]
주제1: [칭의(稱義)의 결과]
주제2: [아담과 그리스도]
본절은 앞절 내용의 단순한 반복이 아니다. 앞절에서 바울은 일반적으로 범죄와 의를 대조시켰으나 본절에서는 그 범죄와 의의 본질적 성격을 설명하고 있다. 즉 하나님께 대한 아담의 범죄는 그 자신의 자발적인 불순종에 그 뿌리가 있으며 그리스도의 의는 하나님께 대한 그분의 자발적이고 절대적인 복종에 근거한다.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 아담의 범죄, 곧 원죄(原罪)를 말한다. 아담이 범죄한 내용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것이다. 에덴 동산의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아담이 거스린 것은(3:1-6) 순간적이요 단순하게 보일지 모르나 이는 창조주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고자 마음 먹었던 교만한 행위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불순종의 행위였다.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같이 - 12절에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다'고 선포했으나 15절에서는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진술했으며, 18절에서는 다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르렀다'고 선언했다. 한편 '죄인된 것같이'에서 '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테스타데산'(*)은 단순 과거 수동형으로 '제정되었다', '설립되었다'는 의미이다. 이는 KJVRSV가 번역한 것처럼 단순히 '만들어진 바 되었다'(were made)는 의미가 아니라 '법적 판결을 받았다'(were constituted)는 의미이다(NIV).
한 사람의...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 '순종'이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바울은 죄인된 것을 불순종에 대한 인간의 책임과 연관짓고 있다. '순종'이라는 용어에는 인간의 책임 문제가 강하게 내포되어 있다(3:18, 19;4:2, 6). 무엇보다 '순종'이라는 단어는 '아담의 불순종''그리스도의 순종'(53:12;6:38, 39;10:17, 18;17:4, 5;2:7, 8;5:8, 9), 특히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순종'에 대한 대조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Murray). 그리고 성도의 순종은 그리스도의 순종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데(5:8, 9),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순종하는 자'에게 죽기까지 순종하셨던 그리스도가 성취하신 결과를 아무 대가 없이 은혜로 주시기 때문이다. 한편 '의인이 되리라'에서 '되리라'로 번역된 헬라어 '카타스타데손타이'(*)는 미래 수동형으로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제정(制定)될 것이다'라는 의미이다. 혹자는 이 단어가 미래 시제임을 생각하여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성도들이 받을 영광을 언급하고 있다고 말한다(Meyer). 그러나 이보다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과거와 현재및 장래를 포함하는 모든 시대에 지속적으로 이루어진다고 보는 것이 무난하리라고 본다(Murray, Sanday).
 
성 경: [5:20]
주제1: [칭의(稱義)의 결과]
주제2: [아담과 그리스도]
헬라어 성경 본문에는 본절 초두에 ''(*)가 언급되고 있으나 한글 개역 성경은 이 접속사를 번역하지 않았다. KJV는 이를 '더욱이'(Moreover), Modern Language Bible'그러나'(But)로 번역하고 있다. 아무튼 ''는 본절에서 새로운 개념, '율법'에 관해 이야기를 하려고 유도된 것이다.
율법이 가입한 것은 - 본 구절은 인간에게 모세 율법이 부여되었음을 말하나 이는 모세를 통해 주어진 율법이 최초로 사람들에게 주어진 법이 아니라 그 이전에 법이 선재(先在)함을 나타낸다. 이는 '가입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레이셀덴'(*)이 단지 '들어왔다'라기 보다는 '곁에 들어오다'(came in beside, Green), '미끄러져 들어오다'(slipped in, Modern Language Bible)를 뜻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모세이전 아브라함이나 야곱 등과 같은 족장들은 그들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믿음의 길을 걸었고 모세 시대에는 성문화된 율법이 부여된 것이다.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 이 말은 율법이 세상에 들어옴으로써 사람으로 하여금 더욱 죄를 짓도록 동기를 유발시켰다는 의미가 결코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죄를 증가시켰다는 말이 된다. 헨드릭슨(Hendriksen)은 본 구절을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죄를 증가하게 만들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완전하신 사랑의 요구에 비추어 보아(22:37-40;12:29-31;10:27) 인간으로 하여금 죄의식에 예민해지게 하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과 목적이었음을 의미한다. 율법은 모든 죄의 가증함과 그 결과가 드러나도록 한다"(3:20;7:7, 13;3:19). 또한 혹자는 "범죄를 더하게 하는 것은 율법의 우선적인 목적이 아니라 부차적인 목적이다"라고 설명한다(Black). 이러한 주장에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동의한다. 바울의 의도는 무엇보다 율법이 옴으로써 그 전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않았던 것을 확실히 죄로 인식하게 되었다(13)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는 것이었다. 혹자는 딤전 1:9-11을 본절과 연관지어 율법이 죄를 억제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한다(Herrison). 그러나 분명히 성도들이 인식해야 할 사실은 율법 자체가 죄를 억제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실제로 딤전 1:9-11에서는 이러한 암시가 전혀 없다. 오히려 딤전 1:9-11은 율법의 정죄 기능, 즉 사람이 자신의 행위가 옳은가 그렇지 않은가를 율법을 통해서 정죄받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 이 말은 율법이 주어짐으로써 범죄의 사실이 더욱더 드러나 인간이 깊은 정죄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되면 될수록 인간을 향해 쏟으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더욱 풍성하게 드러난다는 의미이다. 바꾸어 생각하면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 곳에서는 죄사함도 없으므로 용서에 대한 은혜를 깨닫는 일도 없다. 다만 죄가 죄로서 정죄되는 곳에서는 그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더욱 풍성하게 드러난다. 이러한 사실은 '죄가 더한 곳에''더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플레오나센'(*)'넘치다'라는 의미를 지니며, 반면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더욱 넘쳤나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페레페릿슈센'(*)이 최상급의 최상급, 즉 강조 최상급으로 '넘침보다도 더욱 넘쳤다'는 의미를 지닌다는 점에서 분명해진다(Murray). 다시 말해 은혜의 세력은 죄의 세력을 휠씬 능가할 뿐만 아니라 완전히 말살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 상처입고 병들어 죽어가는 자를 완전히 소생케 한다.
 
성 경: [5:21]
주제1: [칭의(稱義)의 결과]
주제2: [아담과 그리스도]
본절에는 바울이 그동안 논의해 왔던 중요한 개념들이(, 사망, 왕노릇, 은혜, , 예수 그리스도, 영생) 종합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그래서 혹자는 본절을 '너무도 아름다운 끝 맺음'이라고 극찬하였고(Hendriksen) 송영과 같은 가치를 지녔다고 말하기도 했다(Denney).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한 것같이 - '사망 안에서'란 표현은 '생명 안에서'(17절 하반절)란 표현과는 정반대의 개념으로서 죄가 역사하는 한계를 의미한다. 죄의 결과로 사망이 세상에 들어왔다(12, 14; 6:23). 따라서 죄는 '사망 선고를 받은 자들' '사망의 세력 아래에 있는 자들'에 한해서 왕노릇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칭의(稱義)의 은혜를 받은 자들에게는 결코 죄가 왕 노릇할 수 없다(Lloyd Jones). 바울은 6장에서 이것을 '죄의 종''의의 종'의 개념으로 대조시켜 설명하고 있다.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 - 앞 구절과 완전한 대조를 이루기 위해서 본 구절의 '왕노릇하여' 앞에 '생명 안에서'라는 말을 삽입시켜 이해하면 된다. 이와 같은 대조를 통해서 우리는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 '사망 안에서 종 노릇하는 사람''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는 사람'(17)이 구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한 분명한 구분은 예수의말씀 중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5:24)라는 선포 가운데 가장 잘 나타나 있다.
 
성 경: [6:1]
주제1: [성화와 죄]
주제2: [성화의 원리]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본절은 본장이 은혜와 죄의 관계를 설명하는 5:20,21 내용을 이어 받고 있음을 나타낸다.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 5장에서 바울이 주장한 내용은 '죄에 거하는 문제'가 아니라 '죄를 깨닫는 문제'였다. 율법을 통하여 그동안 감추어져 있던 죄가 드러나게 됨에 따라 인간의 회개는 더욱 깊어지며 그와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히 느끼게 된다. 그 당시 이러한 바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죄에 거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하게 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자들이 많이 있었으며 오늘날에도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자들은 기독교 진리의 깊은 내면을 깨닫지 못하고 다만 '수박 겉핥기'식의 표면적 지식을 가지고 애매하고 오해하기 쉬운 문제에 관심을 쏟는다. 여기서 '죄에 거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에피메노멘 테 하마르티아'(*)는 두 가지로 분석된다. 첫째, 이 문구가 현재 능동태 가정법을 띤 것은 그 내용이 실현 가능성이 없음을 나타낸다. 둘째, 이 문구는 '죄와 더불어 산다'는 의미로 죄와 더불어 전혀 투쟁하지 않을 뿐 아니라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러한 상태에 빠진 자들은 자기 욕구 충족을 위해 그리스도를 섬기는 체하는 자들이다. 다시 말해 이런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色慾)거리로 바꾸는 자들(1:4)이다. 사실상 칭의의 교리 자체를 조금이라도 오해한다면 그것은 죄에 대한 저항(抵抗)을 약화시키게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구원의 전과정이 인간의 행위를 배제시키고 오로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를 강조하게 됨으로 구원 교리도 역시 죄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약화시킨다. 이러한 이유로 성도는 자유와 방종을 구분하지 못하게 되어 부도덕이 판을 쳐도 교리적으로 그것을 제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고전 5, 6).
 
성 경: [6:2]
주제1: [성화와 죄]
주제2: [성화의 원리]
그럴 수 없느니라 -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라는 1절의 가상적인 질문에 대한 단호한 부정의 대답이다. 바울은 악을 그리스도의 은혜로 가장하고자 하는 사악한 생각이 매우 모순됨을 경고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죄를 허용하는 면허장이 아니라 성도의 의를 회복시키는 특허장이다. 한편 바울은 이와 다소 다른 문맥에서(3:8, 9) 본문과 비슷한 어투로 대적들의 주장을 공박한 바 있다. 바울이 칭의론(稱義論)을 가르치던 당시, 그의 가르침이 율법의 윤리적 요구에 대한 무관심을 조장함으로써 자유 방임 사상을 만연시키지나 않을까 하고 우려했던 사람들이 때때로 그러한 종류의 반론을 제기했던 것 같다. 만약 그렇다면, 바울의 답변은 짧은 기간에 나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수년간의 깊은 명상 끝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본다.
죄에 대하여...더 살리요 - 바울은 이제 성도의 편에서 논증을 전개한다. 죄에 대하여 죽은 성도는 더 이상 죄의 세력에 지배받지 않는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피흘리셨고 이 속죄로 말미암아 성도는 하나님과 화목(和睦)하게 되었으며 하나님을 경배하는 거룩한 삶을 살게 되었다. 그러므로 만일 그리스도의 은혜 때문에 죄가 더욱 왕성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역을 터무니없는 것으로 전도(顚倒)시키는 행위이다(Calvin). 혹자는 본절의 '죄에 대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테 하마르티아'(*)'죄로 인하여'(on account of sin)로 해석한다(Michaelis, Cramer, Storr, Flatt, Nitzsch). 그러나 이는 타당하지 않다. 그러한 해석은 본절의 문맥상 바울이 의도하는 주장과 정반대되는 것이다. '죄로 인하여 죽었다'함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고 죄와 더불어 사는 삶을 말하는 것이요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죄악된 삶을 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교통(交通)하는 삶을 산다는 의미인 것이다. 한편 바울은 본절에서처럼 성도가 '죽었다'는 선포를 종종한다(11;7:4, 6;2:19;2:20;3:3). 이러한 성도의 죽음은 죄에 대한 죽음이요, 율법에 대한 죽음인데 실제적으로 죄의 종이었던 우리 옛 사람의 죽음이다. 이에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2;20)라고 고백했다. 이와 같은 체험적 고백이야 말로 시공(時空)을 초월하여 그리스도와 동시성을 갖는 것이다. 성도가 죄에 대하여 죽은 자의 신분을 갖고 있으면서 또 죄에게 종노릇한다는 것은 분명히 모순이다. 그러나 여기서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해서 죄의 세력을 전혀 의식하지 않게 되거나 죄를 결코 범하지 않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7장에서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죄와 투쟁하게 된다는 사실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죄의 세력권을 벗어났다는 의미가 아니라 죄가 초래하는 엄청난 불행들에 대하여 죽었으며 죄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났다는 의미이다(6, 14, 16, 17절 주석 참조).
 
성 경: [6:3]
주제1: [성화와 죄]
주제2: [성화의 원리]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바울은 여기서 죄에 대하여 죽는 것을 세례받음과 결부시키고 있다. 여기에 언급된 세례는 단순한 의식(儀式)이나 성례전(聖禮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설명하는 은유적 의미를 갖는다. 세례에 대한 은유적인 표현은 다른 구절에서도 본절과 비슷한 연관성을 지닌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예컨대,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는 것을 계기로 모세에게 속하여 세례를 받게 된 경우가 그러하다(고전 10:2). 그들은 처음으로 모세와 연합하였고, 모세의 지도권을 인정하였으며, 또한 그들이 모세에게 의존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스도께 속하여 세례를 받는다는 것 또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연합하여 함께 죽었다는 의미이며, 함께 죽었다는 것은 죄에 대하여 죽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유의해야 할 점은 세례 자체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사역에 의해서만 가능하며(고전 12:13), 이것은 성도의 신령한 체험이라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 카톨릭 교회는 세례와 성찬 자체에 그리스도와의 신비적인 연합이 있는 것처럼 가르침으로써 교리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죄에 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성도들이 그의 죽으심에 세례받아 연합되었다는 것은 성도들 역시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의미이다. 즉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더불어 함께 죽은 자된 성도들은 죄에 종노릇하던 옛사람이 죽었으므로 계속 죄에서 종노릇하는 신분에 머물려고 하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세례에 담긴 영적인 의미를 부각시킴으로써 바울은 많은 죄를 지으면 지을수록 더욱 처절하게 회개하게 되며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깊이 느끼게 된다고 하는 가르침의 잘못을 지적해 주고 있다.
 
성 경: [6:4]
주제1: [성화와 죄]
주제2: [성화의 원리]
그러므로 - 이 접속사는 1-3절까지의 진술에 대한 결론을 유도해 내기 위해 사용되었다. 특히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들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도 연합한 자들이라는 3절의 진술을 본절에서 더욱 진전시키고 있음을 암시한다.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함께 장사되었나니 - 침례교도들은 본 구절이 물에 잠기게 되는 침례에 대한 영적 의미를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본절은 고전 15:3, 4과 같이 침례에 대한 영적인 의미를 부각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장사되심이 갖는 영적 의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에 대한 증거는 5절 이하에서 계속되는 바울의 설명에서 더욱 분명하게 밝혀진다. 따라서 바울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장사되심 그리고 부활하심을 '세례'라는 용어와 결부시킨 것은 성도와 그리스도의 영적인 연합과 인격적인 연합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Murray). 그러나 분명히 인식해야 할 점은 세례받음 자체가 그리스도와의 생동적인 연합을 성취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바울은 비록 잠깐 동안의 일이지만 세례를 받을 때 물속에 몸을 잠그는 일을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葬事)되는 일로 묘사하였다. 여기서 '장사된다'(*, 쉬네타페멘)함은 자연적인 출생으로 맺어지는 아담과의 관계에 의해 지배되던 옛 사람(4:22;3:9)의 종말을 상징한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활을 하기 이전의 거듭나지 못한 본성과 행동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의미한다(5:24;2:12).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 어떤 사람들은 '영광''장엄한 권능'으로 해석한다(Hendriksen, Harrison, Barmby, Calvin, Black, Phillips, Erdman, Stott).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 속에는 '하나님의 전능하심'(Omnipotence)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영광'이란 용어를 '하나님의 장엄한 권능' 정도로 해석하는 것은 '영광'이란 단어가 지닌 의미를 만족스럽게 드러내었다고 볼 수 없다. 본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을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도가 새 새명 가운데 사는 것에 대한 수단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도가 새 생명 가운데 사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의 근거가 된다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영광'이란 용어 자체가 지닌 포괄적인 뜻을 드러낼 수 없게 된다.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 바울은 그리스도와 성도의 연합이 '죄에 대하여 죽는 것'만이 아니라 나아가 '새 생명 가운데 사는 것'까지 포함됨을 가르치고 있다. 이 말은 성도가 단순히 죄의 영역에서 벗어난 것만을 의미하지 않고 보다 적극적으로 의()의 영역에서 살게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는 말씀과(10:10) 잘 조화를 이룬다. 그리고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한다'는 말은 '새 생명의 원리에 의해 지배를 받으며 그 가운데서 산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므로, '은혜를 더하게 하기 위해 죄가운데 거하자'라고 가르치는 자들은 분명히 바울의 복음을 오해한 자들이다.
 
성 경: [6:5]
주제1: [성화와 죄]
주제2: [성화의 원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 블랙(Black)은 본 구절을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생애와 같이 희생적인 삶을 살 수 있을 만큼 성장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공유하게 된다'고 해석한다. 머레이(Murray)도 이 해석에 동의한다. 이 해석은 '연합한'이라는 형용사에 해당하는 헬라어 '쉽퓌토이'(*)'함께 심겨진' 또는 '함께 자라난'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그러나 본장 어느 곳에서도 그리스도와 성도의 연합이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삶에까지 자라난다는 의미를 암시하고 있는 구절은 없다. 따라서 본절의 '쉼퓌토이'는 이미 바울이 앞에서 언급했던 것과 같이 성도가 세례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되었음을 구체적으로 표현해 주는 용어일 뿐이다(Hendriksen, Barmby).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 '되리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소메다'(*)가 미래 시제인 것은(shall be, KJV) 본절에서 바울이 장래에 일어날 성도들의 신체상의 부활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라고 많은 학자들은 생각한다(Tertullian, Chrysostom, Ambrosiaster). 헬라어의 미래 시상은 앞으로 일어날 어떤 일을 언급하는 것이지만, 그 외에도 경우에 따라서는 논리적으로 또는 불가피하게 일어날 현상을 나타내기도 한다. 후자(後者)의 의미를 살려 '에소메다'RSV'확실히 되리라'(shall certainly be)고 해석하였다. 또한 몇몇 주석가들은 본절의 미래 시제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합함으로써 당연히 초래되는 결과적 사실을 암시한다고 주장한다(Murray, Meyer). 따라서 본절은 이상에서 언급한 두 가지 견해를 모두 포괄한다고 봄이 타당하다. 그러나 심사 숙고해야 할 사항은 바로 앞절에서 언급된 그리스도의 부활이 몸의 부활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가 부활했던 것과 똑같이 우리도 그렇게 부활할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 대신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그에게 속한 자들에게 허락되는 새로운 삶의 가능성과 연관시켰다. 그 삶은 장래 뿐만 아니라 현재에 속한 것이다.
 
성 경: [6:6]
주제1: [성화와 죄]
주제2: [성화의 원리]
우리가 알거니와 - 여기서 '우리'는 바울과 유대인이 아니라 바울 자신과 그의 복음을 들은 자들을 가리킨다. 여기서 그의 복음을 들은 자들을 단순히 로마에 있는 성도들만으로 한정시킬 필요는 없다. 즉 바울은 진술하고자 하는 대상으로 복음에 대한 경험적 지식을 가진 자들 모두를 염두에 두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우리 옛 사람 - 바울은 '사람'을 두 종류로 구분하여 '옛 사람''새 사람'이라고 칭한다. '옛 사람'은 영적인 죽음 아래서 신음하며(2:1;2:13) 본질적으로 마음이 악하여 죄에게 종 노릇하는 사람이며(6), 하나님에게서 떠난 사람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것 즉 '새 사람'에 대해서 바울은 이미 1:18-3:18에서 자세하게 언급하였다. '옛 사람'에 머물러 있는 자들은 죄를 지어도 그 죄로 인해 아무런 갈등을 느끼지 않으며, 바람에 밀려 다니는 돛단배와 같이 죄의 세력에 따라 이리 저리 끌려다닌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 이 표현은 3절에 기록된 바와 같이 우리가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와 합하였다는 뜻이다. 동시에 이 말은 우리가 죄와 죽음이 지배하는 낡은 질서에서 떠나 의와 평안이 있는 새로운 삶의 영역으로 들어갔다는 의미도 된다(2:20). 결국 이 말씀은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는 더 이상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따라 생활하는 삶의 변화를 가리킨다(고후 4:11;2:20).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 옛 사람이 죽은 것과 죄의 몸이 멸하는 것은 같은 의미이다. 그리고 이러한 체험을 한 사람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한다. 비록 성도가 현재의 삶 속에서 죄를 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으나 신분상으로 이미 죄의 몸은 죽은 상태에 놓여 있다.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건은 반복적인 사건이 아니라 성도에게 단일회적인(once for all) 사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4:22) '새 사람을 입으라'(4:24)고 권면한 것은 무슨 의미인가 ?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새 생명을 소유하게 되는 연합의 체험으로 '거룩한 백성'으로 불릴 수 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성도의 현재적 삶은 항상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 속에 머무르고 있다. 이에 바울은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4:24)고 권면했던 것이다. 이 권면은 한 마디로 신분에 걸맞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라는 의미가 된다.
 
성 경: [6:7]
주제1: [성화와 죄]
주제2: [성화의 원리]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 여기서 하나의 난제(難題)가 있다. '죽은 자'가 그리스도를 지칭하는가 아니면 그리스도를 믿고 그와 함께 십자가의 죽음을 체험한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는가 하는 문제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비록 본절이 단수로 언급되었으나 그리스도가 죄에서 벗어날 이유가 없다는 이유로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또 다른 근거는 본 구절이 일종의 일반 명제로서 할라카(Halakah)에 언급된 랍비적 가르침이라는 사실이다. 바울이 유명한 유대인 교법사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교육받았고(22:3) 랍비의 지식과 유대인 전통에 정통(正統)했던 점을 미루어 보아 본절이 어떤 특정한 사람을 가리키기보다는 일반적인 명제로 언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유사하게 베드로도 일반 명제 형식을 빌어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벧전 4;1)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실제적인 예로 스코틀랜드에서는 사형 집행을 받은 사람은 '의롭게 되었다'고 선언한다고 한다. 한편 '죽은 자'와 연관해서 혹자는 '성도'는 죄를 지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이미 죽으신 그리스도와 같이 성도는 모든 죄와의 관계에 있어서 죽었으므로 죄에 대해 무감각한 상태에 있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Vaughan, Liddon). 그러나 그리스도나 성도가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죄에 대하여 무감각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죄의 세력, 죄의 영역에서 벗어났다는 뜻이다.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 본절은 칭의의 순서적 과정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우리의 죄씻음이 이루어짐을 믿고 회개하는 자에게 죄의 세력으로부터의 해방이 이루어지고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다. 칼빈(John Calvin)은 본절이 죄의 세력으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한다고 지적하면서 재판관의 판결로 사면(赦免)을 받은 죄수가 그 순간 기소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듯이 성도가 죄의 노예 상태에서 자유의 몸이 되는 것도 매우 실제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설명하였다. 한편 유대인들은 본절을 '사람이 육체적으로 죽으면 그것으로 율법의 의무에서 해방을 받는다'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타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사람이 죽는다고 하더라도 그는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날에 자기의 죄를 책임져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벧후 2:10).
 
성 경: [6:8]
주제1: [성화와 죄]
주제2: [성화의 원리]
본절은 내용상으로는 3절과 5절의 내용을 반복한 것이지만 무엇보다 그리스도와 성도의 연합이 인격적이고 생명적인 연합일 뿐 아니라 영원한 연합임을 보여주고 있다(Murray).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 육체적 죽음이 아니라 3절에 언급된 바,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써 죄에 대하여 죽는 것을 가리킨다. 바울이 여기서 다시 이 말씀을 반복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성화(聖化)의 생활이 부과됨을 강조하고자 함이다.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 여기서 '살 줄을'에 해당하는 헬라어 '쉬제소멘'(*)1인칭 복수 미래형으로서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우리가 살 것이다'(we shall live;KJV, RSV)이다. 이는 5절 주석에서 언급한 것처럼 단순히 장래적인 소망 곧 부활의 소망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연합한 성도는 또한 그리스도의 살으심과 연합하여 반드시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예하게 된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곧 성도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새 생명을 얻게 되니 이 땅에서 소유케 된 생명(*, 조에)은 장래에 일어난 구속 사건의 모든 결과들을 포함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쉰제소멘'은 장차 그리스도의 재림시 일어날 성도의 부활에만 제한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연합하여 죄에 대하여 죽은 성도가 이 땅에서 영원한 나라의 생명을 소유하며 산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땅에서의 영원한 생명은 그리스도의 재림시 부활 생명과 긴밀한 연관을 맺는다. 한편 본절에 '믿노니'로 번역된 헬라어 '피스튜오멘'(*)1인칭 복수 현재 직설법으로 단순한 믿음이 아니라 확실성 있는 견고한 믿음을 가리킨다. 이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은 성도는 반드시 그리스도와 함께 살 것을 절대적으로 확신함을 나타낸다.
 
성 경: [6:9]
주제1: [성화와 죄]
주제2: [성화의 원리]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 '다시...아니하시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우케티'(*)'절대로...아니다'는 의미로서 부정을 나타내는 헬라어 단어로서는 가장 강력한 의미를 내포한다. 이러한 의미를 살려 KJV'우케티''더이상...않다'(no more)RSV'결코...아니다'(never)로 번역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것은 자의적(自意的)이며 절대적인 일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는 아무런 흠과 티가 없으셨으나 인류 구원을 위한 성업(聖業)을 이루시기 위해 스스로 십자가를 지셨고 또 다시 살아나셨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타의에 의해 죽으시고 살아나셨다면 거기에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권위도, 능력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죽지 아니하시는', '결코 죽지 아니하시는' 그리스도는 모든 인류를 위한 구원의 보장이 되신다.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다 -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되신 후 부활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사망이 그를 주장한다면 성도의 신앙은 진실로 헛된 것을 좇는 꼴이 될 것이다(고전 15:12-17).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으나 부활하심으로 사망 권세를 이기신 사건에 있다. 이 사건이 참이어야만 성도가 그리스도와 함께 생명의 연합을 하여 살게 된다는 확신이 참이 될 수 있다. 사망이 그리스도를 주장하지 못한다면 그와 연합한 자들에게도 역시 주장하지 못한다. 이러한 주장이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났다'고 하는 일반 명제에 대한 근거가 된다. 한편 본절이 자칫 그리스도께서 사망의 지배를 받은 적이 있었다는 어감을 줄 수 있다. 본래 그리스도의 신성 자체는 결코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는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는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을 입고 이 땅에 오심으로(8:3) 사망의 세력권 안에서 활동하게 되셨다. 그리고 죄인이 되시어 사망의 원리를 따라 자발적으로 십자가를 지셨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본절에서 이미 그리스도께서 한번 사망의 지배하에 있었던 것처럼 '다시'라는 표현을 사용했던 것이다.
 
성 경: [6:10]
주제1: [성화와 죄]
주제2: [성화의 원리]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 본절의 '죄에 대하여'(*, 테 하마르티아)란 표현은 각별한 주의를 요한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자신의 죄로 인한 필연적인 죽음(2:17)이 아니다. 그는 성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짐지우신 자기 백성의 죄와 허물을 위해 죽으셨다(53:4-6). 또한 본절의 '단번에' (*, 에파팥스)란 표현은 구약의 속죄 제사 규례와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다. 구약 시대에는 대제사장이 백성들을 위해 일 년에 한 번씩 제사를 드렸으며 백성들은 죄를 범할 때마다 희생 제물을 가져왔으니 그 제사는 반복적이었다. 그러나 대제사장되신 그리스도는 구약 시대에 대제사장들이 반복적(反復的)으로 드려왔던 그 제사 대신 자기 몸을 제물로 바쳐 '오직 한번만'(once for all, RSV) 드림으로써 구약의 제사를 완성하셨다(7:27;9:12;10:10). 이처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되어 십자가에 피흘리신 제사는 구약의 모든 피제사의 최종적 제사요, 완전하고 영원한 제사이기에 제사를 또 드리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다시 죽으실 필요가 없다.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 '하나님께 대하여'란 표현을 '하나님으로 말미암아'(throught God), 혹은 '하나님 안에서'(in God)로 해석하는 학자들이 있으나(Calvin, Chrysostom) 이보다는 '하나님을 위하여' 혹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고 해석하는 것이 합당한 듯하다(Murray, Meyer, Hendriksen). 우선 본절의 '하나님께 대하여'란 표현은 '죄에 대하여'와 대조되어 있다. 따라서 이 문구의 해석은 '죄에 대하여'란 표현에 대한 해석과 문맥적 일치를 요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대하여'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러한 해석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온전히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삶을 권고한 12-14절 내용과도 조화된다. 뿐만 아니라 바울 사도는 그의 서신에서 여러 차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함을 강조한 바있다(3:8, 14).
 
성 경: [6:11]
주제1: [성화와 죄]
주제2: [성화의 원리]
본절에 대해 스토트(John Stott)는 다음과 같이 매우 논리적이면서 간략하게 설명했다. "만약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죄에 대한 죽으심이었으면, 그의 살으심이 하나님에 대해 살으심이고, 그리고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살으심 안에서 그와 연합되었다면, 우리 자신은 죄에 대하여는 죽었으며(have deied) 하나님에 대하여는 살았다(have risen). 그리고 우리는 그와 같이 여겨야 한다."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 2절 주석에서 언급했듯이 죄의 세력으로부터 놓임을 받아 자유를 누림을 말한다. 칼빈(Calvin)은 이에 대해 말하기를,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죄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된 성도는 영적 자유를 얻은만큼 다시는 죄의 종이 되지 않기 위해 날마다 육체의 소욕(所欲)을 제어하는 성화의 삶을 살도록 분투해야 한다. 이것은 죄에서 완전히 끊어져 거룩함과 의 가운데 온전히 거할 때가지 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엔 크리스토 예수) - 본절에서 이 문구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라는 전 후의 문구에 동일하게 연결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떠나서는 죄의 세력으로부터의 자유를 생각할 수 없고 생명의 부활도 생각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커다란 건축물의 초석(礎石)과도 같은 기독교 교리의 핵심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바울은 이 표현을 그의 서신에서 자주 사용하였던 바, 성도와 그리스도간의 관계성을 함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에 대한 보다 상세한 내용에 관해서는 본장 주제 강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참조하라.
여길지어다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로기제스데'(*)는 현재 명령형 복수 2인칭으로 '권고'로 해석해도 되며 '명령'으로 해석해도 무방하다. 그런데 12절과 13절에 사용된 동사가 명백히 명령형으로 해석되므로 본절도 권고형보다는 명령형으로 해석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즉 성도는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렇게 여겨야 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어진 사건은 성도들을 그러한 신분으로 만든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다'는 말은 실재가 아닌 사건을 실재인 것처럼 생각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실재적인 사건을 파악하여 그것을 굳게 붙잡는다는 의미이다.
 
성 경: [6:12]
주제1: [성화와 죄]
주제2: [의의 병기]
그러므로 - 바울은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할 수 없다(1, 2a )는 자신의 주장을 설명하기 위해 교리적으로 피력했던 진술들을(2b-11) 실제적으로 적용하는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본 접속사를 사용했다.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 바울은 성도가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선포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가 성도들 가운데서 역사하고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면 바울이 논리적인 모순을 범하고 있는가 ? 그렇지 않다. 바울은 다시 14절에서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라고 언급함으로써 죄에 대한 성도의 죽음을 다시 한번 더 강조한다. 이것은 죄에 대한 성도의 죽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실재적으로 발생했던 사건에 대한 진술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죄가 성도들에게 왕노릇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 사실은 보장되어 있다. 다만 죄가 연약한 인간의 몸을 통해서 역사하고 있고 이것 역시 현실이다. 그러나 죄가 이전과 같이 성도들에게 왕노릇할 수는 없다. 성도들에게는 오직 그리스도만 주인이다. 그런데도 죄는 성도들의 연약한 몸을 통하여 역사하면서 자신이 주인인 체 할 수 있다. 이러한 거짓된 가장(假裝)조차 허용하지 않기 위해 바울은 본절과 같은 표현을 사용했던 것이다. 성도는 의인이요 거룩한 자의 신분을 가지고 있으나, '죽을 몸'을 지닌 현재는 아직 죄와 투쟁하는 신분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죽을 몸''죽을'은 헬라어로 '드네토'(*)이며 이는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인간의 원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벌로써 내려진 필연적인 죽음을 가리킨다(mortal;KJV, RSV). 아담은 하나님께 범죄하기 전에 죽지 아니하는 '생령'(生靈)을 가졌었다(2:7). 그러나 그가 범죄한 후부터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고 이 사망의 진노는 모든 인간에게 그대로 내려졌다. 그러나 사망의 진노는 구속함을 받은 성도에게는 더 이상 머물러 있지 않는다. 그렇지만 동시에 성도는 이 땅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가면서 타락한 세상과 부딪히게 된다. 그렇기에 바울은 더 이상 죄의 유혹에 빠지기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자녀된 신분에 부끄럽지 않게 살도록 지속적으로 애쓸 것을 당부하고 있다.
몸의 사욕(私慾)을 순종치 말고 - 죄는 우리 죽을 몸을 통해서 역사한다. 그 몸에서 죄를 짓게 하는 욕구가 일어난다. 그렇기 때문에 몸의 욕구대로 행하게 되면 죄에 대하여 죽은 성도는 도전(挑戰)을 받게 된다. 성도라면 당연히 죄와 투쟁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며 또한 투쟁해야 한다. 비록 죄에게 패배할 때가 많을지라도, 성도는 이미 죄에 대한 승리를 보장받은 신분이므로 염려할 필요는 없다. 한편 '순종치 말고'라는 말은 난폭하고 불같은 정욕대로 행할 것을 사단이 강요한다는 암시를 함축한다. 사단의 세력은 성도가 단순히 죄와 연합하는 것을 지나 죄에게 순종할 것을 요구한다. 여기서 죄의 심각성과 타격적인 지배성을 상기할 수 있다. 일찍이 사단은 그리스도께도 '내게 엎드려 경배하라'는 조건을 내걸은바 있다(4:9).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사단의 유혹을 이기시고 꾸짖은 것처럼 성도는 죄악의 곁에 가지 말며 죄의 유혹을 단호하게 거부해야 한다.
 
성 경: [6:13]
주제1: [성화와 죄]
주제2: [의의 병기]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 '지체'라는 말은 12절의 '죽을 몸'이라는 말과 내용상으로 같은 의미이다. 그리고 '불의의 병기'(*, 호플라 아디키아스)란 표현은 각각의 지체가 죄의 종이 되어 불의를 행하는 도구가 됨을 나타낸다. 특히 바울은 '병기'란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단순히 각 지체가 불의를 행함에 있어서 도구적인 의미보다 더 적극적인 수단이 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사실상 성도라 할지라도 자기 몸의 지체를 제어(制御)하지 않으면 이미 그의 몸은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오직 너희 자신을...하나님께 드리며 - '너희 자신''너희 죽을 몸'(12)'너희 지체'와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란 표현은 11절 내용의 반복으로, 성도가 의와 거룩함으로 지음을 받은 자의 신분임을 상기시키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누구든지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로서, 새 생명을 소유한 신분으로 자기의 지체를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마땅하다. 그 이유는 성도의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이며(고전 6:15), 성령이 거하시는 전이며(고전 6:19), 값으로 산 것(고전 6:20)이 되었기 때문이다.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 혹자는 바울이 몸의 지체를 악에 대항하고 의를 위해 전쟁하는데 사용되는 무기로 생각하게 된 것이 그의 선생들이나 스토아 철학자들에게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한다(Black). 그러나 이에 대한 근거는 매우 희박하다. 오히려 바울은 구약의 '거룩한 전쟁'(holy war)에 대한 개념을 영적 전쟁에 적용하고 있을 뿐이다. 바울은 성도의 삶을 군사적 삶에 비유하는 표현법을 즐겨 사용했다(고전 9:7;고후 6:7;6:10-20;살전 5:8;딤후 2:3). 거듭난 성도는 자신의 몸을 죄를 위해서가 아니라 죄와 투쟁하기 위한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성도가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싫어할 때, 이미 그는 자기의 몸이 불의의 병기로 사용되고 있으며 어떠한 의의 열매도 맺지 못하게 됨을 깨달아야 한다.
 
성 경: [6:14]
주제1: [성화와 죄]
주제2: [의의 병기]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 성도가 자기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바쳤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죄와 완전히 분리된 삶을 살 수 없다. 그렇지만 자기 몸을 하나님께 바치는 삶을 살고자 애쓰는 그 사람에게 죄가 왕노릇할 수는 없다. 한편 '주관치 못하리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우 퀴리유세이'(*)는 미래 능동태 직설법이다. 여기서 이 단어가 미래 시제인 것은 단순히 장래에 되어질 일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죄가 주관치 못한다는 내용을 강력하게 확증(確證)한다. 즉 죄가 성도를 주관치 못하는 것은 장래뿐만 아니라 현재에 있어서도 확실히 그렇다는 것이다. 이 강력하고 확실성 있는 보증은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하심으로 말미암는다.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 본절에서 ''(*, 노모스)'은혜'(*, 카리스)와 대비되어 있으므로 이 '''법칙'이나 '세상적인 법'이 아니라 '율법'을 의미한다. 바울이 '율법''은혜'를 대비시킨 것은 죄가 성도를 주관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즉 율법 아래 있는 자는 율법의 종이 되어 그리스도와는 관계없이 죄의 문제만으로 고민하여 항상 율법에 의해 정죄를 받게 되니, 그 사람은 죄의 종이다. 그러나 은혜의 원리에 따르는 자는 그리스도의 구속에 대한 확신과 함께 죄의 문제가 해결된 상태에 거하게 되므로 결코 죄가 그에게 왕노릇할 수 없다. 이 사실은 8:1, 2에서 바울이 선포했듯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을 뿐 아니라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성 경: [6:15]
주제1: [성화와 죄]
주제2: [의의 종]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 이 질문은 1절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즉 본절은 1절과 같은 질문이지만, 1절은 문제의 제기이며 본절은 제기된 문제를 풀기 위해 그 동안 진술했던 내용을 재확증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면서 또 다른 주제로의 전환을 위한 예비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또한 강조점의 차이로 1절은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해도 좋다'는 주장에 대한 반론이며, 본절은 '죄에서 해방되어 은혜 아래 있으므로 계속 죄를 지어도 좋지 않겠느냐'고 주장하는 자에 대한 반론이다. 한편 '죄를 지으리요'라는 표현도 역시 1절의 '죄에 거하겠느뇨'라는 표현과 같은 의미로 해석된다. 자세한 것은 1절 주석을 참조하라.
그럴 수 없느니라(*, 메 게노이토) - 바울은 자신이 스스로 질문한 사항에 대해 강한 부정의 대답을 하고 있다. KJV는 이 문구의 헬라어 '메 게노이토'가 지닌 강력한 부정의 뜻을 살려 '하나님이 금하신다'(Good forbid)라고 해석하였고 RSV'결코 그렇지 않다'(By no means !)라고 해석하였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입은 성도는 당연히 방종한 마음과 생활을 거부하고 은혜에 합당한 생활을 해야 한다.
 
성 경: [6:16]
주제1: [성화와 죄]
주제2: [의의 종]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 ''에 해당하는 헬라어 '둘로스'(*)'청지기' 또는 '집사'를 가리키는 '디아코노스'(*)와는 달리 철저히 주인에게 예속된 '노예'를 가리킨다(slave;RSV, NIV). 어떤 사람이 자기 몸을 노예로 바치면 이미 그는 자기 몸에 대한 주권을 포기해야 한다. 오직 주인에 대한 철저한 복종만 있을 뿐이다.
죄의 종으로 사망에...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 영적인 차원에서 사람은 '죄의 종'이든지 '순종의 종'이든지 어느 한 편에 속하게 되어 있다. 물론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하니한'(3:15) 미지근한 상태에 있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미지근한 상태에 있는 사람도 엄격한 의미에서 '죄의 종'에 속한다. 한편 본절에서는 '죄의 종''순종의 종'이 대조되어 언급되고 있다. 여기서 '죄의 종''불순종의 종'으로 해석될 수 있으며, 이는 곧 '불순종의 아들들'(5:6)로도 이해된다. 그리고 이들은 벧리알의 자손들로(13:13;19:22) '불법의 사람'이요, '멸망의 사람'이다(살후 2:3). 그리고 또 다른 대조로서 '사망'''가 언급되고 있는데 이것들은 '죄의 종''순종의 종'에게 각각 주어지는 열매다. 23절 말씀과 연관지어 볼 때 본절의 '사망''영원한 멸망'을 의미한다(살후 1:9). 반면에 '''사망'과 반대되는 의미를 지닌 '영생'으로 대치해도 무난하다.
 
성 경: [6:17]
주제1: [성화와 죄]
주제2: [의의 종]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 혹자는 본절에 대해 '사도 바울은 로마 교회가 하나님께로 돌아온 일로 찬양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오늘날의 상태에 이르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다'고 주석했다(Hendriksen). 이 말은 바울이 로마 교회가 성화(聖化)된 모습에 대해 감사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본절 이하에 계속된 바울의 진술은 성화의 진보에 대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과 믿은 후의 변화된 신분상태를 묘사하고 있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 사망이 한 사람(아담)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했으므로(5:17) 그의 생명에 동참한 모든 사람은 죄의 종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본 구절은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지니고 있던 사람의 상태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지 그리스도를 믿고 난 후 성화되지 않은 상태를 가리키지 않는다.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 - 혹자는 본 구절이 딤후 1:13'바른 말'과 딤전 1:10'바른교훈'(딤후 4:3;1:9;2:1)과 같이 복음 중에서 윤리적인 부분에 대한 설명에 속한다고 단언한다(Murray). 그러나 만일 이 주장을 따르면 곧이어 언급되는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18)는 선언이 믿음에 의한 것이 아니라 윤리적인 본을 순종함으로써 주어진 결과임을 의미하게 된다. 이것은 결국 기독교를 다시 율법주의로 되돌려 놓는 결과를 초래하며 반()복음적인 가르침이다. 따라서 '교훈의 본'은 복음 자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마음으로 순종하여 - 이 표현은 바울이 10:10에서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라고 언급했던 것과 같은 의미로 이해된다. 또한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순종'을 동일 선상에서 설명한다(3:18, 19;4:2, 6). 따라서 본 구절은 '마음으로 받아들여' 또는 '마음으로 믿어'라고 번역해도 무방하다. 본절에서 '순종'이라는 단어에 너무 치중하면 인간 행위가 강조되며 바울이 그동안 강조했던 '믿음'과는 별개(別個)인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성 경: [6:18]
주제1: [성화와 죄]
주제2: [의의 종]
죄에게서 해방되어 - 성도의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 죄의 몸이 멸하여졌으며(6), 동시에 죄에 대하여 죽은 그는 죄에서 벗어났다(7). 이런 이유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8:1).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 '종이 되었느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둘로데테'(*)는 단순 과거 시제를 취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단순과거 시제는 어떤 동작이 불확정직임을 나타낸다. 즉 동작의 결과가 완료되었음을 나타내지 않는다. 바울은 성도가 '의에게 종이 된'것을 단순과거 시제로 표현함으로써 7절의 '교훈의 본', 곧 복음을 믿은 결과 성도가 죄에서 해방되어 그리스도의 종이 된 상태가 현재에도 계속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성 경: [6:19]
주제1: [성화와 죄]
주제2: [의의 종]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 '육신'(*, 사르크스)은 새로운 피조물로 옮겨질 수 있는 ''(*, 소마)과는 달리 이 세상의 존재 양식에 속하여 있고 이 세상과 더불어 멸망당할 자로서의 인간을 지칭한다. 그리고 이 '육신'''(성령)과 대립을 이루면서 연약함과 허무 가운데 있는 인간성을 의미한다(Ridderbos). 따라서 본절은 본 서신을 받아보게 될 로마교회가 영적인 어린아이의 상태에 머무르고 있음을 지적한다.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 영적 진리를 설명하기 위하여 일반적인 예를 들었음을 말하는데, 구체적으로 종에 대한 예를 가리킨다. 바울은 성도의 신분이 하나님의 신실한 종이라는 진리를 설명함에 있어서 사람들이 이해하기 쉬운 종과 주인과의 관계성을 염두에 두었던 것이다. 한편 바울은 본절과 같이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라는 표현을 갈 3:15에서도 사용하고 있다.
전에 너희가...불법에 이른 것같이- 본 구절은 1:18에서 3:18까지 바울이 언급한 인간의 타락한 상태에 대한 요약 설명으로 이해된다. 바울은 여기서 로마 교회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알기 이전의 상태를 지적하고 있다.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 '거룩함'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기아스모스'(*)'성화'를 의미하는지 '성결'(holiness)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견해가 학자마다 다르다. 혹자는 고전 1:30;살전 4:3, 4, 7;살후 2:13;딤전 2:15;12:14;벧전 1:2 등을 근거로 '하기아스모스'가 과정적인 의미를 지닌 '성화'(sanctification)를 의미한다기 보다는 상태를 가리키는 '거룩' 또는 '성별'을 뜻한다고 이해한다(Murray, Barmby). 그러나 앞에서 언급된 구절들 중에 살전 4:3, 4, 7과 딤전 2:15은 단순히 '성결'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으나 그밖의 것들은 그렇지 않다. 렌스키(Lenski)에 따르면 '하기아스모스'의 접미사 '모스'(*)'활동'을 의미하는데, '활동'은 우리 자신의 '활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활동'이라고 진술하고 있다. 그리고 고전 1:30;6:11에서 '하기아스모스'는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거룩'을 의미하며 이 '거룩'함이 '''구속'과 마찬가지로 성도에게 전가됨을 가르치고 있다. 따라서 본절에서 '하기아스모스''거룩' 또는 '성별'로 해석하든지 '성화'로 해석하든지 상관없이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성도들을 위해서 성취하신 것이다. 그러면 왜 바울은 거룩함에 '이르라'고 권면하고 있는가 ? 성도는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구속''거룩'(성화)을 믿음으로 전가받았으나 아직 연약한 육신에 매여 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몸의 구속'을 기대한다고도 했으며(8:23) 우리 몸을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했듯이(13) 당연히 '거룩함에 이르라'고 권면할 수 있었다. 따라서 본절에 언급된 바울의 권면은 '거룩'(성화)이 구원의 조건이기 때문이 아니라 구원받은 백성이 마땅히 수행해야 할 사실임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성 경: [6:20]
주제1: [성화와 죄]
주제2: [의의 종]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 이 표현은 19절의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와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리스도를 믿기 이전에는 사람이 인간적인 선행을 행할 때도 있으나 그 사람이 인간적인 선행을 행할 때도 있으나 그 사람의 신분은 '죄의 종'이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聯合)하여 자기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힌 체험이 없기 때문이다.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 그리스도를 알기 이전에 사람은 '죄의 종'이 되어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으므로 그 의를 행해야 할 의무도 책임도 없었다. 비록 자연인은 본성이 율법의 행위를 할 수 있으나 그것은 하나님의 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다(2:14, 15). 그래서 칼빈(Calvin)"육체의 자유는 단지 하나님을 순종하는 데서 우리를 자유케 하여 마귀에게 얽매이게 할 뿐이다"라고 진술했던 것이다. 이러한 바울의 진술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6:24)라고 말씀하신 예수의 교훈과도 일맥 상통한다.
 
성 경: [6:21]
주제1: [성화와 죄]
주제2: [의의 종]
그 때에(*, 토테) - 바로 앞절에서 언급한 '죄의 종이 되었던 때'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알지 못하고 죄의 종이 되었던 때를 가리킨다.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 성경은 '열매'(*, 카르폰)에 대해 말할 때 '선한 열매'(3:8;4:36;5:22;1:11;3:17)'악한 열매'(22;7:5)를 구분한다. 혹자는 여기서 바울이 '선한 열매'를 의미한다고 단언한다(Murray, Barmby). 그리고 본절의 질문에 대하여 '전혀 없었다'란 대답이 암시되어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해석은 그다지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그르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때'란 표현이 죄의 종이었던 때를 의미하므로 '열매'를 달리 해석하지 않고 '열매'란 표현 그 자체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러면 본절은 "너희가 죄의 종이었을 때에 무슨 열매를 맺었느냐 ?"가 된다.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당연히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는 열매가 아니었던가 ?"일 것이다.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 이 표현은 17절에서 20절까지의 진술이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면서 '은혜를 더하게 하려면 죄에 거하자'(1)고 주장하는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기 이전 상태의 로마 교회 성도들에 대한 것임을 보여준다. 성도가 하나님을 모르던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의를 힘써 대적했었으나 하나님을 알면서부터 의에게 종이 되었으므로 그는 지난 날의 일들을 부끄러워하게 된다.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 죄의 종이 된 결과는 오직 '사망'만 있을 뿐이다. 혹자는 이 '사망''영원한 사망'을 가리키는지 확실치 않다고 주장하지만(Barmby), (1) '사망''영생'과 대조되어 언급되고 있는 점(22, 23), 그리고 (2)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종말론적 사건인 대심판에 대한 암시라는 점에 비추어 볼 때, 본절의 '사망''영원한 죽음' 곧 지옥의 형벌을 의미한다.
 
성 경: [6:22]
주제1: [성화와 죄]
주제2: [의의 종]
그러나 이제는 - 이 표현은 극적인 전환을 보여주기 위해 바울이 즐겨 사용하는 것이다(3:21 주석 참조). 지금까지 바울은 죄에게 종된 상태에 있는 인간의 실존과 그 결말에 대해 설명했으나 본절에서는 그와 정반대의 내용으로 전환(轉換)시키고자 이 같은 접속사를 사용하게 되었다.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 18절의 내용을 반복한다. 그리고 성도가 죄에서 해방된 근거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함께 옛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에 있다(6).
하나님께 종이 되어 - 하나님께 종이 된 사람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의를 행해야 한다. ''(1)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도에게 이루어졌지만, (2) 연약한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에는 성도가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실천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비록 바울이 18절에서는 '의에게'라고 언급했고 본절에서는 '하나님께'라고 언급했을 뿐이지 그 두 단어는 본질상 동일한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 여기에 언급된 '거룩함'19절에서와 마찬가지로 '하기아스모스'(*)이다. '거룩'은 인간의 순수한 노력만으로 성취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루셨던 '성화'(sanctfication)를 의미한다. 그리고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는 해석상 애매한 표현이지만 구체화시키자면 '거룩함의 열매' 또는 '성화의 열매'로 해석될 수 있다. 바울은 이 '성화의 열매'를 성도가 현재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왜냐하면 '얻었으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케테'(*)의 시제가 개역성경과는 달리 현재형이기 때문이다. 이 시제는 본절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바울은 '성화의 열매'를 미래에 이루어질 것으로 말하지 않고 성도가 현재 소유하고 있다는 점을 진술하고 있다. 그리고 이 표현은 19절의 '거룩함(성화)에 이르라'는 권면과 함께 종합적으로 해석되어야 모순이 발생하지 않는다. 본절과 19절을 종합해 볼 때 성도는 '성화의 열매'를 그리스도로부터 받았으면서도(고전 1:30;6:11) 동시에 '성화'를 수행해야 할 의무를 지닌 신분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성화' 자체도 ''와 마찬가지로 전적으로 성도의 노력에 의해 이루어져야 할 것이 아니라, 이미 성취된 것을 바라보면서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 그것이 드러나도록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 예수의 가르침대로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다(5:24;6:47, 54). 그렇지만 완전한 의미의 영생은 마지막 부활 때에 거룩함의 열매를 소유한 자에게 주어진다.
 
성 경: [6:23]
주제1: [성화와 죄]
주제2: [의의 종]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영생이니라 -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말은 죄에 계속 거하는 자에게 지불되는 대가가 사망이라는 의미이다. ''에 해당하는 헬라어 '와소니아'(*)는 흔히 '병사들의 급료'의 의미로 사용된다(Hendriksen, Murray, Calvin, Barmby, Black). 비록 '와소니아'가 딤전 5:18에서는 단순히 노동자가 일한 것에 대한 대가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을지라도 나머지 구절들(3:14;고전 9:7)에서는 군사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바울은 이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일꾼과는 달리 군인들이 철저하게 군사적인 의무에 매여있음에 대한 대가를 받는 것처럼, 사람이 '죄의 종'으로서 죄에게 충성함으로 '사망'이라는 대가를 받게 됨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이 '와소니아'는 그 다음에 언급되는 은사(*, 카리스마)와 대조되고 있다. '은사''일한 것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4:6) 것에 대하여 적용될 수 있는 적절한 용어다. 그리고 이 '은사'는 성도가 죄에서 해방되어(18, 22a) 거룩의 열매를 얻게 된(22b) 사실을 지적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처럼 성도는 구원의 전과정에 있어서 자신이 노력한 대가를 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사로 값없이 '', '성화', 그리고 '구원'을 받게 되므로 결코 자랑할 수 없다.
 
 
 
 
성 경: [7:1]
주제1: [성화와 율법]
주제2: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 이 표현은 바울이 법을 아는 자들과 법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구분하기 위해 제한적인 의미로 사용한 것이 아니다(Murray). 바울은 오히려 모든 사람이 법을 알고 있다는 전제하에 이 표현을 사용했다.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 혹자는 '율법'을 예수께서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15:6)라고 말씀하셨던 변질된 유대인의 율법으로 이해했다(Hendriksen). 그러나 이 해석은 본절과 내용상 별로 상관이 없으며 '율법'이라는 용어에 너무 집착한 해석이다. 또 어떤 사람은 '율법'이 구약에 기록된 '율법' 중 특히 '모세 율법'을 가리킨다고 주장하고 있다(Murray). 사실 바울은 '율법''모세 율법'의 의미로 사용했다(3:19;5:13;고전 9:8, 9;14:21;3:10, 19). 본절에서 '율법'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 노모스'(*)는 상반절의 ''과는 달리 관사 ''(*)를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노모스'(*)는 신약성경에서 관사를 가지고 있으면 구약 '율법'의 의미로 번역될 수 있다. 그러나 본절에서 3절까지를 반드시 모세의 율법과 관련된 결혼 규례로 볼 수 없다. 이 결혼 규례는 어느 나라에서나 통용될 수 있는 일반적인 것이다.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이와 같은 법의 강제성(强制性)하에 있게 된다는 사실이 본 구절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이다. 한편 '살 동안만'이라는 표현은 '사람의 전생애 동안'을 의미하는 것이지, '율법에 종 노릇하는 동안의 삶'(4:8, 9)으로 (origen, Ambrose, Erasmus) 한정될 근거가 거의 없다.
 
성 경: [7:2]
주제1: [성화와 율법]
주제2: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되나 - 고전 7:39에서 바울은 본절과 동일한 내용의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다만 고전 7:39에서는 '법으로'란 말이 생략되어 있다. 본절에서 이 말이 첨가되어 있는 것은 1절에서 3절까지의 비유가 율법 아래 있던 사람이 율법에서 어떻게 해방되느냐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므로, '법으로'라는 말이 강조적으로 첨가되어 있다.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 여인이 남편에게서 해방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이다. (1) 본절의 진술과 같이 남편이 죽으면 그 여인은 남편에게서 해방된다. (2) 여인 자신이 죽게 되면 역시 남편에게서 해방된다. 4절 이하의 설명에 따르면 '율법''남편'에 비유되고 있다. 그런데 '율법'은 죽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1-3절의 비유를 문자적으로 적용시킬 필요는 없다. 다만 굳이 그렇게 하고자 한다면 여인 자신이 죽음으로써 남편에게서 해방되는 것으로 본문을 고쳐야만 한다. 이렇게 되면 여인에 비유될 수 있는 신자는 그의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써 율법에서 해방되었다는 6:3, 4, 6의 진술과 합치(合致)될 수 있다.
 
성 경: [7:3]
주제1: [성화와 율법]
주제2: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본절에서 바울은 (1) 결혼 관계에 있는 여인이 그 관계를 지속시키지 못했을 때 '음부'가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율법에 의한 정죄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율법은 그 아래 있는 자들에게 조금도 자유를 주지 않으면서 그것을 범하는 자에게는 어김없이 정죄하게 된다. (2) 남편의 법에서 해방된 여인의 자유에 대해서 진술하고 있다. 본래 성도는 죄의 종이요 율법 아래 있던 자였으나, 그것에서 해방될 수 있는 길은 그것에 대하여 죽는 것뿐이다(4).
 
성 경: [7:4]
주제1: [성화와 율법]
주제2: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 바울은 율법이 죽을 수 없다는 이유 때문에 사람이 죽어야 그 사람이 율법에서 자유함을 얻을 수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율법에서 자유함을 얻기 위해 죽는 것은 바로 옛사람인 바, 이 옛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음을 맛보게 되었다. 바울은 우리의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 율법에 대하여 죽음으로써 사람은 율법에서 벗어났다. 위의 비유에서는 율법(남편)이 죽는 것으로 묘사되었으나 율법은 죽을 수 없기에 여인이 죽어야 한다(2절 주석 참조). 이 여인도 직접 죽을 수 없고 결국 대신 죽은 자에게 붙어 있게 됨으로써 그 죽음이 인정받게 된다. 그 후에 여인된 성도는 율법으로부터 자유하게 되었으므로 다시 사신자와 연합하게 된다. 여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란 표현은 무엇보다도 결혼 관계의 성립을 보여주고 있다. 결혼 관계에 들어가는 것은 또한 두 몸이 한 몸으로 연합됨을 가리킨다. 이처럼 바울은 6장에서는 성도와 그리스도와의 연합(聯合)에 대해 추상적으로 설명했으나(6:3-6). 본장에서는 결혼 관계를 비유하여 보다 구체화 시키고 있다.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 성도가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맺히게 될 열매에 대한 견해는 학자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혹자는 결혼의 비유의 연속으로 보고 결실로서 '자손을 생산하는 것'과 연관짓고 있다(Fritzsche, Reiche). 그러나 이처럼 '열매'를 결혼으로 인한 자손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이 열매는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6:22)를 연상시킨다. 그래서 하나님을 위해 맺는 열매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거룩과 의라고 할 수 있다(Calvin). 즉 성도가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를 얻고 '거룩'하게 되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 대하여 열매를 맺는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6장과 본장에서 말하는 '열매'의 본질이다. '열매'에 대해서는 6:22의 주석을 참조 비교하라.
 
성 경: [7:5]
주제1: [성화와 율법]
주제2: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 바울은 항상 '육신'(*, 사릍스)'' (*, 프뉴마)과 대조되는 개념으로 사용하여 죄와 대항하기에 무기력한 인성과 그에 근거하는 삶의 방식을 나타낸다(8:3-9). '육신'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이 '육신'을 통해서 죄가 왕 노릇하기 때문에 '육신''죽을 몸'(6:12)이다. 이런 이유로 바울은 '그리스도를 알기 이전의 인간'에 대해서 '육신'이라고 했으며, 또한 그리스도를 알지만 율법에 종 노릇하며 죄에 거하는 자들에게도 이 말을 적용했다(고전 3:1, 3).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신분상으로 육신에 속한 자가 아니라 영에 속한 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신에 속한 자 같이 행동하는 것은 그일을 행하는 사람 자신 뿐 아니라 그를 불러 의인되게 하신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2:24). 어쨋든 본절에서 육신은 그리스도를 알기 이전의 상태 즉, 그리스도와 무관(無關)한 삶을 살던 때의 신분을 가리킨다.
죄의 정욕이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타 파데마타 톤 하마르티온'(*)은 죄악의 성격을 갖는 정욕을 의미하는데, 혹자는 '색욕, 분노, 증오, 악한 뜻, 투기, 시기, 터무니없는 두려움'등으로 해석한다(Hendriksen). 그러나 본절에서는 좀더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어서, '죄로 나아가고자 하는 욕구'(Meyer, Gifford, Murray)로 해석될 수 있다. 다만 바울은 7절과 8절에서 '죄의 정욕' '탐심'을 대표적인 것으로 언급한다. 한편 바울은 '죄의 정욕'이 타락한 인간의 본성 자체에서 일어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율법'으로 말미암는다고 진술하고 있다(7, 8절 주석 참조).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 여기서 '지체''육신'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죄가 지체를 통해서 실제화되기 때문에 '역사하다'란 말과 어울리는 '지체'란 용어를 사용했다. 즉 사람의 '지체'는 죄에 붙잡혀 사용되면 '불의의 병기'이며 하나님께 붙잡혀 사용되면 '의의 병기'로 역사하게 된다(6:13).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 이 말은 6:13에서와 같이 사람의 지체가 '불의의 병기'로 사용된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맺는 것( 4)과 반대로 죄와 연합하여 죄의 종노릇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 상태에 빠진 사람은 사망 가운데 있으며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로 있다. 이러한 상태가 그의 열매이며, 최종적으로는 영원한 사망의 열매로 이어진다.
 
성 경: [7:6]
주제1: [성화와 율법]
주제2: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 여기서 두 문장은 같은 의미를 지닌다.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다'는 진술은 율법에서 벗어난 방법에 대한 설명이다(Murray).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호 카테이코메다'(*) 가운데 관계 대명사 ''(*)'율법'(*, 투 노무)을 선행사로 갖는 것이 분명하다. 비록 관계대명사 ''(*)는 여격이고, '투 노무'(*)는 소유격이어서 어울리지 않는 것 같지만 이는 ''(*)의 전치사 ''(*, '...안에')이 여격을, '투 노무'(*, '율법')의 전치사 '아포'(*, '...로부터')가 소유격을 수반하므로 차이가 날 뿐이다. 그러므로 '얽매였던 것''율법'을 설명해 주는 말이다. 율법은 사람을 얽매는 것이고, 여기에서 벗어나는 것은 죽는 방법 외에 다른 길이 없다. 사람의 정욕과 율법이 조화를 이루면 이처럼 과격한 방법이 아니고서는 율법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대표(代表)로 죽으신 것이다.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 바울은 ''이란 용어를 매우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한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성령'으로 해석하지만(Hendriksen, Murray, Stott, Harrison) 그 한 단어로 ''이란 용어가 지닌 의미를 완전히 드러낼 수 없다. 바울이 ''(*, 프뉴마)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용례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8장에서 '''육신'과 대조되는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이 죄에 대해서 전혀 배타적임을 가리킴과 동시에 율법에서 벗어났음을 보여준다. (2) ''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갖게 된 '새생명'과 깊은 연관이 있다. 이때에는 '''성령'과 동일시될 수 있다(8:14). (3) 본절에서와 같이 '''의문'(儀文)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사용된다. '의문'이 옛 시대의 지배 원리였던 것과는 반대로 ''은 새시대의 지배 원리이다. 물론 새시대의 지배 원리는 '성령'에 의해 주도되는 것이지만 새시대의 지배 원리 자체와 성령은 동일시될 수 없다. 새시대의 지배 원리에 속한 것으로는 '''복음'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성령과 사람의 영이 8장에서 구분없이 사용되고 있으며, 고전 6:17에서는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고 언급되어 있다. 이와 같은 사실들로 볼 때 바울이 ''이란 용어를 사용할 때에, 어떤 곳에서는 새 생명을 주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새시대의 지배 원리에 대해 적용하기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본절은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것'(Murray)으로 해석하기 보다는 '새시대의 지배 원리를 따라'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성 경: [7:7]
주제1: [성화와 율법]
주제2: [율법과 죄]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 이 표현은 '그런즉 어찌하리요'(6:15)라는 말과 마찬가지로 앞에서 설명한 바에 대해서 부연 설명을 하든지 아니면 앞의 내용과 연결시키면서 또 다른 주제로 전환하기 위한 바울의 상투적인 문장 전개 방법이다(3:1;4:1, 10;6:1;8:31;9:14, 30;10:8).
율법이 죄냐 - 바울이 지금까지 율법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취했으므로 그의 글을 읽는 사람들은 율법이 죄를 유발시키는 것으로 생각하게 될 수도 있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신 사실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바울이 지금까지 율법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취한 것은 율법으로 구원에 이를 수 없으며 사람이 육신의 지배를 받을 때는 율법이 도리어 죄를 깨닫게 하고, 죄의 정욕에 사로잡히게 한다는 사실을 지적하기 위한 것이다.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 이 말은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4:15)는 표현과 일맥 상통한다. 죄는 율법 때문에 생성되는 것도 아니며 율법안에 있는 것도 아니다. 바로 우리 안에 있다(Calvin). 다만 율법은 그 죄를 죄로 규정하면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낸다. '율법으로 말미암지'란 말은 율법이 죄를 깨닫게 해주는 데에 꼭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에 가까이 서 있는 사람은 자신이 죄인임을 더욱 확실하게 깨닫게 된다.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 바울은 율법 중 탐심(貪心)을 경계하는 구절을 대표적으로 언급한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1) 탐심은 인간의 심성 속에 은밀하게 자리잡고 있으며 실제적인 범법 행위가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이 죄로 깨닫지 못한다. 그러나 율법은 인간의 심성에서 일어날 수 있는 악한 동기도 죄라고 가르쳐 줌으로써 죄를 깨닫게 하여 하나님의 의를 드러낸다. 인간 사회에서는 '탐심'으로는 죄가 성립되는게 아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악한 동기조차 죄로 규정된다(5:27, 28;6:1-4, 18). (2) 아담과 하와의 타락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요일 2:16)으로 표현될 수 있듯이 타락한 인간의 죄는 탐욕에서 출발한다. 이것은 또한 우상 숭배와 같다(3:5). 바울이 '탐욕'을 우상 숭배와 같이 취급한 이유는 둘다 '헛된 것'을 추구하면서 하나님과 원수가 되기 때문이다.
 
성 경: [7:8]
주제1: [성화와 율법]
주제2: [율법과 죄]
죄가 기회를 타서 - 본문은 ''(*, 하마르티아)가 주체로서, 인격성(人格性)을 가지고 능동적으로 '기회를'(*, 아포르멘) 엿보다가 '취한다'(*, 라부사)는 의미이다. 이처럼 죄가 인격성을 가지고 능동적인 활동을 한다는 표현은 죄가 가지고 있는 특성과 그 유래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해리슨(Harrison)의 말대로 본절 배후에 유혹과 타락에 관한 창세기 기사가 깔려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가 인격성을 가진 주체로 표현되는 것은 사단의 교활한 특성을 반영하고자 한 것이다. 틈만 보이면 달려드는 맹수 같은 성격을 가진 죄의 모습을 보여준다.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 이 말을 달리 표현하자면, '탐심이 속에서 잠재해 있다가 계명으로 인해서 드러난다'라는 의미이다. 이 표현은 이미 7절 하반절에서 언급된 것과 같은 의미이기도 하다. 인간의 마음이 백지와 같음을 전제하고 죄가 계명을 통해 탐심을 유발시킨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미 인간 내부에 있는 탐심이 죄의 요구를 따라 계명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온갖 탐심을 이룬다는 말이다. 이처럼 끝없이 유발되는 죄로 인하여 인간은 도무지 살길을 찾을 수 없게 된다.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 본 구절은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4:15)는 말씀과 의미상 같다. 왜냐하면 '죄가 죽었다'(*, 네크라)는 것은 죄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에 대한 인식이 법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뜻으로서 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Calvin). 아무튼 본장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죄 자체는 항상 활동하고 있으나 인간 편에서 법이 없을 때는 그 죄를 죄로 여기지 못하고 있었는데 율법의 죄를 밝히 드러나게 함으로써 인간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된다는 사실이 본장에서 강조되고 있다.
 
성 경: [7:9]
주제1: [성화와 율법]
주제2: [율법과 죄]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 그리스도를 알기 이전이라도 바울은 율법을 잘 알고 있었다. 바울은 율법의 각 조문에 대해 익히 잘 알고 있었으며 그것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는 누구 못지않게 자신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 할지라도 그는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한'(10:3)사람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알기 이전의 바울은 율법에 대한 지식은 있었으나 깨달음이 없었던 것이다.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 '계명이 이르매'란 표현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계명을 깨닫게 되매'라는 말로 의역이 가능하다. 그리고 '살아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네제센'(*)'아나자오'(*)의 부정과거 동사로 본래 '다시 살아나다', '희생하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나 본절에서는 단순히 '활동하게 되다'라는 의미이다(Hendriksen). 죄가 본래부터 있었으나 사람이 계명에 대해 깨닫기 시작하면 죄가 자기 속에서 활동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 깨달음이 커지면 커질수록 죄의 요구도 함께 커지므로, 죄에 대한 자신감보다는 죄를 이겨내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력을 깨닫게 된다.
 
성 경: [7:10]
주제1: [성화와 율법]
주제2: [율법과 죄]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계명은 '생명과 복의 근원'이었다(5:31-33).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그 계명을 지킴으로써 생명을 얻게 되어 있었다(20:11). 이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은 범죄할 기회를 주자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의의 길에서 인간의 생명을 지도하고 규정하여 생명을 보존하자는데 있다(Murray). 그리고 율법의 정신을 바로 깨달은 시 119편의 저자는 '내가 모든 재물을 즐거워함같이 주의 증거의 도를 즐거워하였나이다'(119:14)고 고백했다. 따라서 바울이 지금까지 부정적으로 언급해온 율법은 그 진정한 정신이 망각된 형식적인 유대인의 율법이기도 하며 또한 사람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함으로써 그 기능을 다하는 의미에서의 그 율법이다(3:23-25).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 인간은 어느 누구도 모든 계명을 다 지킬 수 없으므로, 그 계명에 따라 사형 선고를 받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여기에는 바울 자신도 예외가 아니다. 바울은 엄격한 율법 교육을 받았으나, 그것은 그에게 생명에 대한 희망보다 오히려 비참한 절망감과 정죄(定罪)만 주었다. 이러한 체험은 종교 개혁자 루터(Luther)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믿음에 대한 눈을 뜨기 전에는 형식적인 교리와 규정들이 그를 짓누르며 생명에 대한 소망이 전혀 없는 사망의 상태가 그를 괴롭힐 뿐이었다. 본절의 '되었도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휴레데'(*)'발견하다'는 뜻의 동사 '휴리스코'(*)의 단순 과거 수동태 형으로서 문자적으로 '발견되었다'는 의미이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난 이후에 비로소 율법과 계명이 자신을 정죄하며 그 자체 안에서는 죽음밖에 없음을 확연히 깨닫게 되었다.
 
성 경: [7:11]
주제1: [성화와 율법]
주제2: [율법과 죄]
표현 방법상 본절은 8절과 같지만 내용면에서는 서로 다르다. 8절은 죄를 드러나게 하는 계명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나, 본절은 계명을 통해서 죄가 사람에게 철저한 좌절감을 맛보게 한다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나를 속이고 - 복음으로 말미암아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선포했던 바울은 이제 계명을 지킬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으나 이전과 같이 자신이 죄를 짓고 있음을 깨달았다. 죄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마땅히 계명을 지킬 수 있어야 함에도 현실은 그렇지 못하기에, 바울은 죄가 계명을 통해서 자기에게 속임수를 쓰는 것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이 속임수는 죄가 계명을 통해서 바울로 하여금 죄의식을 갖게 함으로써 '네가 그래도 죄에 대해서 죽었다고 자랑할 수 있느냐 ?'고 정죄하는 것을 가리킨다. 바울은 이와 같은 속임당함에 의한 심한 좌절과 고민 가운데 있게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속이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여세파테센'(*)'여사파타오'(*)의 단순 과거 능동태 형으로서 '완전히 길을 잃게 만들었다'(mislead)는 점에서 분명하다.
나를 죽였는지라 - 이 표현은 9절 하반절의 '나는 죽었도다'란 고백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Murray). 혹자는 바울이 죄로 인한 '사망의 의식'을 갖게 된 것은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 율법을 추종하던 때의 일이라고 주장한다(Hendriksen).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다음에 계속 이어지는 구절들에 의해 결코 지지를 받을 수 없다. 왜냐하면 다음에 이어지는 구절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갈등에 대한 묘사이기 때문이다.
 
성 경: [7:12]
주제1: [성화와 율법]
주제2: [율법과 죄]
이로 보건대 - 계명 자체가 사람에게서 죄를 유발(誘發)시키는 것이 아니라 죄가 계명을 도구로 하여 사람을 속이고 정죄하는 이 모든 사실을 종합적으로 생각해 본다는 의미에서 바울은 본절의 접속사(*, 호스테)를 사용하게 된 것이다.
율법도 거룩하며...의로우며 선하도다 - 이 선언은 직접적으로 7절의 '율법이 죄냐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지만, 문자적으로는 율법과 계명이 지닌 속성을 표현해 주고 있다. 율법에는 하나님의 의가 투영(投影)되어 있으므로 그 자체는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할 수밖에 없다.
 
성 경: [7:13]
주제1: [성화와 율법]
주제2: [신앙인의 내적 갈등]
본절에서 바울은 계명이 선하다는 사실을 변증하면서, 그 선한 계명과 죄 그리고 성도가 어떤 관계에 있는지 요약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계명은 성도들 가운데 있는 죄를 죄로 드러나게 한다. 이때 성도는 심한 죄의식을 느끼게 되며 선을 행하여 거룩하게 되고자 했던 소망이 좌절되어 심한 절망감을 느끼게 된다. 이처럼 계명은 성도로 하여금 스스로 의롭게 되며 선한 삶을 살겠다는 결심을 허무하게 만든다. 이러한 현상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된 성도가 그 신분에 걸맞는 삶을 살아보려고 하는 데서 비롯된다. 그러나 계명이 성도의 삶을 좌절시킨다 하더라도 계명 그 자체는 악한 것이 아니다. 바울은 이와 관련하여 계명이 성도를 허무와 좌절에 빠지게 한다면 폐기(廢棄)되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율법 폐기론 내지는 율법 무용론을 염두에 두고 이에 대하여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메 게노이토)고 분명히 잘라 말하고 있다.
 
성 경: [7:14]
주제1: [성화와 율법]
주제2: [신앙인의 내적 갈등]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 율법이 신령하다는 것은 율법의 기원이 하나님께로서 시작되었음을 가리킨다(Black). 실제로 '신령한'(*, 프뉴마티코스)이란 형용사는 신약성경에서 세상적이고 육적인(*, 사르키노스) 것과 대조적으로 사용되고 있다(고전 2:13, 15;3:1;10:3, 4;12:1;15:44;5:19;1:9;벧전 2:5). 그러나 율법이 비록 신적인 기원을 가진 신령한 것이지만, 그것이 지닌 약점(弱點)은 아무것도 온전케 만들 수 없다는 점이다(7:19).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 율법이 신령한 것이었던 점과 반대로 바울은 자신이 육신에 속한(*, 사르키노스) 자라고 고백한다. '육신에 속한 자'란 죄에 대해 저항력이 없는 자를 가리킨다. 바울이 6장에서 이미 자기가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선포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육신에 속한 자라고 고백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 성도가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은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율법과 관련해서 볼 때, 성도는 항상 육신에 속한 자이며 죄인일 뿐이다. 그리스도를 믿고 중생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신령한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의미에서 성도는 육신에 속한자요 죄 아래 팔린 자와 같은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 대해서 혹자는 이것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아니라고 주장한다(Thomas). 그렇다면 본절이 바울 자신의 체험에서 우러난 고백이 아니라는 말이 성립된다. 그러나 바울은 이신 칭의(3:21-4:25)와 그것에서 비롯된 하나님과의 화해(5:1-21) 그리고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함께 거룩(성화)의 성취(6:1-23)에 대해서 논리를 전개해 왔고, 본장에서는 앞에서 설명한 것에 걸맞는 삶을 살아보려고 시도했으나 다시 율법의 굉장한 벽에 부딪힌 체험을 고백한 것이다. 따라서 본절은 비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진술이 아니라 지극히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 겪는 신앙의 갈등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한편 '죄 아래 팔렸도다'라는 말은 '죄에서 해방되었다'(6:18, 22)는 말과 대조적인 표현이다. 성도는 이 두 가지 신분을 동시에 지니고 사는 존재라는 사실을 무시하면 본장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성 경: [7:15]
주제1: [성화와 율법]
주제2: [신앙인의 내적 갈등]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 이 표현은 바울 자신이 행하는 것 자체를 깨닫지 못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바울 자신이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결코 이해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자신이 뜻하는 바와 실제로 행동으로 옮겨지는 것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여기서 성도의 신앙적인 갈등은 최고조에 달하게 된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회의가 찾아들게 되는 시점이 바로 이때이다.
 
성 경: [7:16]
주제1: [성화와 율법]
주제2: [신앙인의 내적 갈등]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 바울이 마음으로 바라는 것은 율법에 따라 의롭고 정당한 것이지만, 실제로 그 생각이 행동으로 나타날 때에는 그 원하는 바가 나오지 않고 원치 아니하는 바가 나타난다. 이에 대한 해결책을 도출해 내기 위해 바울은 앞에서 했던 말을 다시 조건문 형식으로 반복한다. 동시에 그는 독자들로 하여금 그가 제시하게 될 해결책에 대하여 주의를 기울이게 하고 있다.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 율법은 인간 스스로의 힘과 의지로 지켜질 수 없다. 율법을 행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죄 아래 매인 자신의 모습만 발견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은 인간의 의지로 도달될 수 없는 지고선(Summum Bonum)이다. 율법은 바울이 원치 않는 바를 행할 때마다 그 자신을 정죄한다. 이때 바울은 율법이 선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성 경: [7:17]
주제1: [성화와 율법]
주제2: [신앙인의 내적 갈등]
이제는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뉘니데'(*, '그러면 이제는')3:21'이제는'과 같지만 본절에서는 어떤 주제의 전환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러면' 또는 '그런즉'을 의미하는 ''(*)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Barmby). 따라서 15절과 16절에 이어지는 논리의 진전이 본절에서 제시되는데, 15절에서는 원치 아니하는 것을 행한다는 것을, 16절에서는 이처럼 원치 않는 것을 행할지라도 율법이 선하다는 것을 서술하고 나서 본절에서는 더욱 분석적이고 세밀하게 이 사실을 말하고자 '그러면 이제는'이라는 접속사로 시작한다.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 바울은 자기가 원치 않는 것을 행하게 하는 것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자기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죄라고 고백한다. 그러나 비록 죄가 자기 의지의 소산이 아니라 할지라도 자기 속에서 나온 것이다. 즉 바울은 죄가 기회를 탈 수 있는 불의의 병기로 자기 몸을 죄에게 드렸던 점에 있어서 책임을 면할 수 없다. 그리고 본절에서 바울은 선을 행하려는 자아와 그 자아를 이기고 나타나는 죄를 구분하여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 속에 죄가 실제로 존재하며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을 뿐 아니라, 비록 자기 속에 죄가 실제로 존재하며 활동하고 있어도, 자신의 실체는 이미 의롭다 인정받은 의인임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과 죄를 구분해서 생각하고 있다.
 
성 경: [7:18]
주제1: [성화와 율법]
주제2: [신앙인의 내적 갈등]
내 속 곧 내 육신에 - 성도의 신분은 영에 속한 자이지만 현실적으로는 죄를 대항하기에 무기력한 '육신'(*, 사릍스)을 가지고 있는 신분이다. 이 육신이 있는 한 죄는 항상 기회를 타서 성도로 하여금 자신의 생각과는 다른 방향으로 가게 한다. 이러한 체험은 바울이라고해서 예외일 수 없다. 누구든지 이러한 현실을 인정치 않는 자는 외식자가 되든지 완전주의자가 될 것이다. 외식자는 자신의 잘못을 항상 합리화시키기에 바쁠 것이며 완전주의(Perfectionism)를 추구하는 사람은 다시 율법주의로 되돌아가서 평생 갈등과 고민 가운데서 허덕이게 될 것이다.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 마음은 선한 것을 행하려고 결심하지만 육신이 연약하여 마음의 원하는 바를 실천할 수 없다(26:41). 이러한 사실은 인간 속에 내재하고 있는 부패의 뿌리가 얼마나 큰 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비록 거듭나서 하나님을 믿고 따르고자 결심하지만 죄가 연약한 육신을 장악하여 성도로 하여금 선한 일을 위해서는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성도는 이 사실을 깨닫고 무력한 상태를 벗어나려고 애쓰면 쓸수록 철저한 패배로 인한 비참함만 맛볼 뿐이다(24).
 
성 경: [7:19]
주제1: [성화와 율법]
주제2: [신앙인의 내적 갈등]
본절은 15-18절까지의 진술을 요약하고 있다. 바울은 지금까지의 진술을 요약 반복함으로써 앞에서 언급했던 내용이 분명히 어떤 사실에 대한 것이었는지 보여 줌과 동시에 지금까지 고백한 신앙적인 딜레마(dilemma)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에 대한 대답을 이끌어 갈 준비를 하고 있다.
 
성 경: [7:20]
주제1: [성화와 율법]
주제2: [신앙인의 내적 갈등]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 본구절은 17절의 반복이다. 그러나 바울이 유도해 내는 내용은 서로 다르다. 본절에서는 상반절에서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이라는 조건절이 언급된 다음 본구절이 곧바로 언급된 반면, 17절에서는 본절 상반절과 똑같은 조건절이 16절 상반절에 언급되고 그 다음 17절에서 본구절과 같은 말이 진술되기 전 16절 하반절에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라는 말이 첨가되어 있다. 이러한 차이는 본 구절에서 언급된 말이 16절과 17절에서는 율법이 선하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과 연관지어져 있으나 본절에서는 우리 속에 있는 두 가지 서로 상반된 세력에 대한 진술과 연관되어 있기(21-23) 때문이다. 그리고 바울이 17절에서 언급했던 말을 본절에서 다시 반복한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이 겪어야 하는 심각한 신앙적 현실을 일깨워 주기 위함이다. 한편 본절을 따로 떼어서 생각하면 죄를 짓는 우리의 현실을 합리화시킬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은 극복되어야 할 신앙적 현실이라는 차원에서 본구절을 언급하고 있으므로, 이를 우리의 죄를 합리화시키는 진술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성 경: [7:21]
주제1: [성화와 율법]
주제2: [신앙인의 내적 갈등]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 일반적으로 바울은 ''이란 단어를 율법에 대하여 사용했다. 그러나 본절에서는 그 뜻을 명확하게 구분하기 어렵다. 혹자느 이 ''을 다음에 언급되고 있는 세가지 법, 곧 하나님의 법(22), 마음의 법(23), 죄의 법(23) 모두를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한다(Calvin). 그리고 혹자는 이 '''하나님의 법'만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Murray). 또한 이 주장을 뒷바침하는 해석을 유도하기 위해 ''이란 단어 앞에 수단을 가리키는 전치사를 써서 '법에 의해서'라는 의미로 의역하는 학자도 있다(Erasmus). 그러나 머레이(Murray)의 주장은 큰 설득력이 없다. 왜냐하면 22절과 23절에서 하나님의 법과 그와 같은 의미를 지닌 마음의 법만 강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와 대조되고 있는 '죄의 법'도 강조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절의 ''은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이 우리 몸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대립의 원리를 의미한다. 혹자는 이를 '지배 원리'(governing principle) 또는 단순히 '원리' 정도로 해석하는 데(Harrison, Black), 이것은 본절에 사용된 ''의 의미에 접근을 했으나 그 의미를 완전히 드러내지는 못한다.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 19절에서 바울은 선을 행하고자 하는 자신의 의지와는 반대로 악을 행하는 자신의 모순된 행위에 대해서 언급했으나, 본절에서는 그러한 모순된 행위가 발생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즉 그 이유는 자신 속에 선을 행하고자 하는 의지와 함께 악이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설명함으로써 바울은 악을 외부적인 어떤 요인이 아니라 사람 내부에 존재하는 실체(實體)로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이 악은 인간 내부에서 잠잠히 있지 않고 항상 인간의 모든 지체를 지배하기 위해 활동하고 있다(Hendriksen).
 
성 경: [7:22]
주제1: [성화와 율법]
주제2: [신앙인의 내적 갈등]
내 속 사람으로는 - 혹자는 23절과 25절에서 대조되고 있는 마음과 육신이 몸과 영 또는 정신과 물질 간의 어떤 형이상학적인 구별이 아니라 윤리적인 구별이라고 주장한다(Murray). 이와 반대로 혹자는 고후 4:16을 근거로 하여 속 사람을 썩어질 겉 사람과 대조되는 것으로 이해한다(Calvin, Black). 더 나아가 혹자는 속 사람을 인간의 실질적인 자아로서 영(spirit)과 혼(soul)과 같은 비물질적인 부분으로, 겉 사람을 사람의 몸과 그 지체로 이해한다(Lenski). 여기서 후자의 주장들은 바울의 전체 사상 중에서 인간 이해 부분에 대해서는 만족시켜 줄 수 있으나 본절 이하에서는 적용될 수 없는 것이다. 비록 속 사람이 23절과 25절의 '마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을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윤리적인 구분을 위한 것이지 인간의 실체를 구분하려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본절에서는 윤리적인 면에서 속 사람을 단순히 선을 행하고자 하는 자아로 규정하고 악을 행하는 다른 자아와 구분시키고 있다.
하나님의 법을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토 노모 투 데우'(*)'율법'을 의미하는지 8:2의 언급과 같은 '성령의 법'을 의미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하나님의 법''율법'으로 이해한다(Hendriksen, Murray, Harrison, Lenski). 그렇지만 '하나님의 법''성령의 법'과 일치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반드시 율법과 동일시할 필요는 없다. 지금 바울이 진술하고자 하는 것은 속 사람이 가지고 있는 '선을 행하고자 하는 의지'를 일으키는 '거룩한 원리나 힘'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이러한 거룩한 원리를 따르기를 즐거워한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법''율법'이나 '계명'을 포괄하는 '거룩한 원리'로 해석되어도 문제될 것이 없다.
즐거워하되 - 여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쉬네도마이'(*)는 일차적으로 '...와 함께 즐거워하다'로 직역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전치사 ''(*, '함께')과 결합된 합성 동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렌스키는 '...와 교제 하거나 교제하게 되어 즐거워한다'는 해석을 제안한다. 그러나 본절에서는 '함께'라는 의미를 강조할 필요가 없으므로 단순히 '...을 즐거워하다'(delight in, KJV, NIV, RSV). '...을 기뻐하다'(rejoice in;Scott, Robertson)라고 해석하는 것이 낫다. 또한 이 동사가 1인칭 단수를 나타내므로 '내가...을 즐거워하되'라고 이해해야 한다.
 
성 경: [7:23]
주제1: [성화와 율법]
주제2: [신앙인의 내적 갈등]
내 지체 속에서 - '지체'(肢體)'육신'과 동일한 의미다. 이 지체는 단순히 몸의 각 부분으로서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죄와 대항하기에 전혀 무기력하며 죄로 인해 사망의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죄의 몸'의 각 부분을 가리킨다. 비록 '지체' 그 자체는 '육신'과 마찬가지로 악한 것이 아니지만 죄가 연약한 육신의 지체를 통해서 역사하기 때문에 '지체'는 불의의 병기로 사용되는 것이다(6:13). 그러나 우리의 지체는 반드시 하나님께 드려져야 하는데 성령에 의해 인도함을 받을 때에라야 의의 병기로 하나님을 위해 사용될 수 있다.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 '마음의 법'22절의 '하나님의 법'에 상응하는 관계에 있다. 그리고 이 법은 하나님을 위해서 살려고 하는 선한 의지를 일으키며 '한 다른 법''죄의 법'과 투쟁 관계에 있는 법이다. 다시 말해 '마음의 법'은 마음자체에서 일어나는 ''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살려고 하는 의지를 선한 양심 안에서 일으키는 거룩한 원리이다. 한편 바울은 '한 다른 법''마음의 법'이 투쟁 관계에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해 '싸워'라는 동사를 사용하고 있다. 즉 성도안에는 이 두가지 법이 서로 지배력을 행사하려고 투쟁하고 있으므로 성도는 자신도 모른 사이에 갈등 상태에 놓여 있게 된다. 바울은 본 구절을 통해 성도들 가운데 일어나는 갈등이 당연한 것임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만일 바울이 이러한 언급을 성도들에게 하지 않았다면, 성도들은 이 두 법의 갈등으로 인한 신앙적 고민을 해결할 수 없었을 것이다.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 '하나님의 법'이나 '마음의 법'이 단순히 율법이나 계명만을 의미하지 않듯이 '죄의 법' 역시 어떤 명문화된 법을 의미하지 않고 죄가 역사하는 원리 또는 죄의 세력을 지칭한다.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이 싸워 마땅히 하나님의 법이 이겨야 함에도 불구하고 실제적으로 죄의 법이 하나님의 법을 이기고 성도를 죄의 법의 노예로 만들어 버린다. 이것이 성도가 현재의 삶 가운데서 겪게 되는 실상이다. 바울이 성도가 겪게 되는 신앙적인 현실에 대해 이토록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은 (1) 성도 자신이 현실에서 죄에 사로잡혀 있는 존재임을 깨닫게 하며 (2) 이러한 비참한 현실 가운데서 성도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가 지닌 넓이와 깊이를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3) 그런데 여기에는 성도 자신의 실존이 변화되어 있는 상태로 있기 때문에, 죄의 법이 심각한 도전을 해도 성도는 하나님의 법을 따르고자 한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바울은 비참한 현실 가운데 처해 있을 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25)고 선포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한편 '보는도다'라는 표현은 경험적으로 '알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이처럼 시각적인 경험으로 표현하여 성도가 처해 있는 비참한 현실을 강조한다.
 
성 경: [7:24]
주제1: [성화와 율법]
주제2: [신앙인의 내적 갈등]
스토트(J. Stott)는 본절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설했다. "불신자는 '자기 의'(self-righteousness)로 특정지워지면 본절과 같이 자신을 '비참한 피조물'로 인식하지 못한다. 성숙되지 못한 성도는 '자기 확신'(self-confidence)으로 특정지워지며 자기를 구원할 자에게 구하지도 않는다. 다만 성숙된 성도만이 '자기 혐오'(self-disgust)'자기 절망'(self-despair)의 상태에 이르게 되며 자기 육신 안에 선한 것이 조금도 거하지 않는 사실을 뚜렷하게 인식한다. 이 사람은 자기의 곤고함을 알아 믿음으로 구원을 위해 호소한다." 이와 같이 스토트는 본절을 거듭나지 못한 자의 탄식이 아니라 거듭났으며 성숙된 성도의 탄식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그가 주장한 '구원을 위한 호소'는 단순히 죄로부터의 구원을 위한 호소(Murray)가 아니라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 간의 갈등을 극복케 해달라는 호소이다. 불신자 또는 거듭나지 못한 자는 자기속에 일어나는 두 법의 투쟁을 깨닫지 못하며 따라서 그것으로 인해 탄식하지 않는다.
곤고한 사람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탈라이포로스'(*)는 개역 성경의 번역과 비슷하게 '심한 고난을 겪는 사람'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본절의 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해서는 보다 실감나게 표현하여 '비참한 사람'(wretched man, KJV, NIV, RSV)으로 번역하는 편이 자연스럽다. 혹자는 바울이 자신을 '곤고한 사람'이라고 탄식한 것은 절망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심각한 고민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Lenski). 그러나 이 주장은 별로 설득력이 없다. 지금 바울의 탄식은 선을 행하고자 노력하지만 항상 실패한 자신의 형편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자신이 전혀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는 절망감과 비참함을 탄식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고통'이나 '고민' 정도로 '탈라이포로스'를 해석하게 된다면 탄식하는 바울의 심정을 제대로 나타내지 못한다.
사망의 몸 - 숙명적인 인간의 운명에 대한 표현이 아니라 죄와 사망의 세력을 벗어날 수 없는 비참한 상태의 몸을 가리킨다. 여기서 '사망''죄의 결과'로 초래되는 것이므로(6:23) 죄의 세력을 의미한다.
 
성 경: [7:25]
주제1: [성화와 율법]
주제2: [신앙인의 내적 갈등]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 바울은 24절의 탄식에서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라고 질문을 던진 바 있다. 본 구절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즉 바울은 그토록 비참한 상황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된 구속을 자기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게 되었던 것이다. 3:21-6:23이 교리적 차원에서 예수에 대한 바울의 이해를 보여 준다면 본절은 교리를 현실적인 삶에 적용함에 있어서 자신이 겪은 갈등을 통한 예수에 대한 바울의 이해를 보여 주고 있다.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 앞에서 계속 진술했던 것을 다시 반복하고 있지만, 본절은 의미상 큰 차이를 가지고 있다. 즉 같은 표현이 앞에서는(20-23) 탄식으로 이어지는 내용이지만 본절은 진정한 해방의 선포를 위한 내용이다. 즉 이는 탄식이면서도 몸의 구속 곧 진정한 구원을 기다릴 준비를 갖게 하는 내용인 것이다(8:23). 이처럼 본 구절은 앞에서 진술했던 내용을 비참한 현실적 삶을 통해 여과(濾過)시켜 그리스도의 구속이 가진 보다 깊은 비밀로 이끌어 가도록 전환시키는 분수령이다.
 
성 경: [8:1]
주제1: [성화와 성령]
주제2: [영에 속한 자]
그러므로 이제 - '그러나 이제'를 의미하는 헬라어 '뉘니 데'(*)가 그 동안 진술했던 내용보다 한 차원 높으나 반대되는 내용으로 나아가기 위한 진술이라면(3:21), '그러므로 이제'(*, 아라 뉜)는 그동안 진술에 대하여 결론을 내리기 위한 한 차원 높은 내용이 전개됨을 시사하는 접속사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 공인 본문(Textus Receptus)에는 본 구절 다음에 '육신을 따르지 않고 영을 따라 행하는 자'(*, 메 카타 사르카 페리파투신 알라 카타 프뉴마)란 구절이 첨가되어 있다(who walk not after th flesh, but after the Spirit, KJV). 이 구절이 4절에 반복되고 있으나 다른 사본들(*, B, D)에는 대부분 생략되어 있다. 비록 4절이 본절의 의미를 보충해 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예수 안에 있는 자'만으로도 본절의 의미는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오리려 공인 본문(Textus Receptus)과 같은 첨가가 본절에서 진술하고자 하는 바울의 의도를 흐리게 만들 수 있다. '예수 안에 있는 자''육신을 따르지 않고 영을 따라 행하는 자'에 의해 한정을 받음으로써 성도가 정죄로부터 진정으로 그리고 완전하게 해방되었다는 선포가 제한적인 의미만을 지니게 된다. 본절에서 바울이 '예수 안에 있는 자'란 표현을 사용한 것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39)는 신앙 고백적인 선언을 염두에 둔 것으로 이해된다.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며 그것을 행하기를 소원하지만 항상 죄의 법이 성도의 육신을 사로잡아 마음이 원하는 바를 못하게 한다. 이로 인해 성도는 심한 정죄를 받을 수밖에 없다. 바울은 이러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성도가 결코 정죄당하지 않는다고 선포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 근거를 2절에서 34절에 걸쳐 자세하게 진술하고 있다.
 
성 경: [8:2]
주제1: [성화와 성령]
주제2: [영에 속한 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 - 본 구절을 해석함에 있어서 두 가지의 난제가 발생한다. (1) '예수 안에 있는'이라는 수식어가 단지 '생명'만을 수식하는가 아니면 '생명의 성령의 법'을 수식하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 (2) '생명''성령'을 수식하는가 아니면 ''을 수식하는가 하는 문제도 있다. 이 두 가지 난제는 함께 얽혀 있다. 성령은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 성도들에게 생명을 주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6). 따라서 생명은 성령과 불가 분리의 관계에 놓여 있으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이란 표현은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구속의 원리를 가리킨다. 성령은 이 원리에 따라 성도들에게 생명을 주는 역할을 담당하고 계신다. 이러한 점에 비추어 볼 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이란 표현은 '생명의 성령의 법' 전체를 수식하고 있다. 이처럼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이라는 표현을 수식어로 사용함으로써 '생명의 성령의 법'이 나오게 된 원천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다.
죄와 사망의 법 - 혹자는 "모세의 법은 올바르나 힘이 없으며 죄의 법은 힘이 있으나 올바르지 않다. 그러나 성령의 법은 힘이 있고 또한 올바르다"고 진술하고 있다(T.W. Manson). 여기서 맨슨은 '죄의 법''모세의 율법'을 각각 분리시켜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해석은 율법을 변호해 주면서 본 구절을 오해하도록 한다. 그러나 바울의 진술에서 '율법''정죄'는 분리될 수 없다. 비록 '율법' 그 자체는 '선하고 의롭고 거룩'할 지라도(7:12) 죄는 그 율법을 가지고 성도를 정죄한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은 죄와 사망이 인간 가운데서 역사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해 주는 것이다.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 어떤 사본에는 ''(*, ) 대신에 ''(*,)가 사용되고 있다. 7장에서 바울이 줄곧 자기 자신을 언급하고 있으므로 ''보다 ''가 본절에 더욱 어울리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7:25절부터 바울은 일반인 주어로 '우리'를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본장에서는 '' 대신 '너희''우리'를 번갈아 가면서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또한 권위있는 사본들(*, B, G)''를 지지하고 있다. 따라서 본 구절에서 ''라는 독법(讀法)''보다 더욱 타당하다. 한편 '해방하였음이라'는 표현은 '정죄함이 없나니'란 표현과 일맥 상통하지만, 전자는 보다 적극적인 표현인 반면 후자는 소극적인 표현이다.
 
성 경: [8:3]
주제1: [성화와 성령]
주제2: [영에 속한 자]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 율법은 죄에게 종 노릇하는 육신으로 하여금 율법 자체의 요구를 이루게 할 수 없다. 오히려 율법은 육신을 지닌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없음을 깨닫게 해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 보겠다고 노력하면 할수록 7:24과 같은 비참함을 경험하게 된다.
하나님은 하시나니 - 블랙(M. Black)은 본 구절을 주해하기를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율법의 요구를 성취할 수 있게 하신다. 왜냐하면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율법의 요구를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라고 진술했다. 그러나 본장 어느 곳도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성도가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있다고 선포하지 않는다. 성도는 오직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성취하신 바를 믿음으로 받아들일 뿐이며, 이를 하나님께서는 성고가 율법을 성취한 것으로 인정해 주시는 것이다. 자세한 것은 4절 주석을 참조하라.
죄를 인하여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리 하마르티아스'(*)는 영역 성경에서 '속죄 제물로서'(as an offering for sin, NASB)라고 번역되기도 하고 '속죄 제물이 되기 위해서'(to be a sin offering, NIV)라고 번역되기도 했다. 혹자는 그리스도의 업적과 관련지어 이러한 해석을 지지한다(Harrison, Black). 그리고 초대 교부 중에서도 이 해석을 시도한 사람이 있다(Origen). 그러나 본절뿐 아니라 본장 어느 곳에도 '속죄 제물''제물'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리고 '페리'(*)란 전치사가 '...을 위해' 또는 '...을 인하여'라는 의미보다 '...에 관해' 또는 '...에 따라서'라는 의미를 지니므로 본절은 '죄와 관련해서' 또는 '죄에 관해서'로 번역되는 것이 더 타당하다(Lenski).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 본절은 예수의 성육신(Incarnation)에 대한 암시이다. 예수는 죄가 없는 분이셨으나(4:15) 인간과 동일한 육신을 입으셨기에 죄의 유혹을 받았고 연약함도 경험하셨다. 이 과정을 통해서도 그는 범죄치 않으셨기에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셨던 것이다.
육신에 죄를 정하사 -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가 없으시지만 인간의 연약한 육신을 입으사 인류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셨다는 의미이다. 예수는 하나님이시면서도 죄의 유혹과 인간의 연약함을 체험하셨고 거룩하신 몸에 죄 정()함을 입으시고 십자가에 달리시사 인간의 좌와 허물을 대속해 주심으로써 죄많은 인간과 달리 하나님의 요구를 온전히 성취하셨다.
 
성 경: [8:4]
주제1: [성화와 성령]
주제2: [영에 속한 자]
육신을 좇지 않고 - 여기서 '육신'은 정죄된 육신을 가리킨다. 이미 정죄된 육신을 좇는 것은 육신대로 사는 것이며(13) 육신의 원리에 따르는 것이며 또한 인생의 목표를 육신을 만족시키는 데 두는 것이다. 그런데 본문은 성도가 선을 행하기를 원하지만, 육신에게 져서 비참함을 당하는 상태에 빠지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즉 바울이 지금 경계하고 있는 것은 선을 행하기 원하지만 육신에 져서 죄의 법 아래 사로잡히게 되는 사람이 아니라 전혀 하나님과 무관한 삶을 추구하는 자 곧 불신자들의 상태에 대한 것이다.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 성도는 매일의 삶 가운데서 연약한 육신으로 인하여 끊임없는 갈등과 고뇌의 삶을 사는 존재이다. 그러나 성도는 육신을 좇는 자가 아니라 영의 원리를 따라 사는 자이다. 이 영의 원리에서 가장 근본된 것은 복음이며, 성도는 성령을 통해서 복음을 받아들이며 양자됨과 기업을 이어받는 것에 대한 보증을 받는다. 따라서 본 구절은 매우 추상적인 표현이지만 그리스도를 진실로 믿는 성도에 대한 것이다.
율법의 요구 - '요구'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카이오마'(*)'의로운 행동', '계명'(NEB), '규칙' 등을 의미한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가 사용될 때에는 '의로운 요구'와 같은 의미로 사용된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디카이오마''의로운 요구'(the just requirement)로 해석하기를 좋아한다(Lenski, Hendriksen, Murray, Stott, Black, Harrison, Barmby). 사실상 본 구절에서 '디카이오마'를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율법'과 같은 의미를 지니게 되므로 문장이 매우 어색하게 된다. 그러므로 본절에서는 '디카이오마''의로운 요구'로 번역되는 편이 매우 자연스럽다.
 
성 경: [8:5]
주제1: [성화와 성령]
주제2: [영에 속한 자]
육신을 좇는 자는...생각하나니 - 본절에는 육신을 좇는 자와 영을 좇는 자, 육신의 일과 영의 일이 대조를 이루고 있다. 많은 학자들이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성령'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바울의 저서에 있어서 ''(*, 프뉴마)'성령'을 의미할 때도 있으나 단지 죄의 원리 또는 그 세력과 대조되는 의미로 사용될 때도 종종 있으며, 본장 전체에서도 ''이 반드시 '성령'으로 해석될 수 없는 곳이 많다. 따라서 여기서의 ''은 성령이 아니라 다만 육신과 대조되어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이나 뜻을 의미한다. '육신을 좇는 자'가 육신을 위해 모든 목표를 세우며 그것을 추구하는 자라고 하면 '영을 좇는 자'는 하나님을 위해 모든 목표를 세우며 그것을 추구하는 자다. 그리고 '영을 좇는 자'가 목표를 세우고 추구해 가는 모든 과정에는 성령의 개입이 필요하다. 그런데 '영을 좇는 자'라고 해서 연약한 육신을 이기고 마음으로 원하던 바를 모두 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영을 좇는 자'라 할지라도 그 속에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것과 그것과 투쟁하는 죄의 법이 공존한다.
 
성 경: [8:6]
주제1: [성화와 성령]
주제2: [영에 속한 자]
육신의 생각, 영의 생각 - 이는 사람의 가장 깊은 사고(思考)의 원천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육신'으로부터는 하나님과 아무상관없는 생각 곧 자기 중심적인 생각만이 나온다. 그러나 ''에게서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하고자 하는 생각이 나온다. 그런데 여기서 바울이 교훈하고자 하는 내용은 '영의 생각'을 가진 자는 오직 영의 일만을 좇게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즉 인간에게는 뚜렷하게 구분되어 나타나는 두 종류의 생각이 있는데(7:21-23) 문제는 이 두 가지 생각에 의해 발생되는 갈등을 어떻게 해결하느냐 하는 점이다. 이 해결에 대한 답을 이미 1절에서 언급한 후, 바울은 미리 주어졌던 답에 대해 설명하기 위하여 다시 두 생각을 대립시키고 있다.
 
성 경: [8:7]
주제1: [성화와 성령]
주제2: [영에 속한 자]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 죄의 법 아래 사로잡혀 있는 육신은 하나님과 어떠한 관계도 맺을 수 없다. 왜냐하면 육신이 도모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육신에 속한 자는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구원을 거부한다.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 혹자는 본 구절을 해석하기를 "하나님의 의로운 법에 순종치 아니하고 의지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과 원수된 증거요, 이는 모든 비참함의 근거다"라고 했다(shedd). 이처럼 육신의 생각에 따라 사는 자는 자신의 의도가 있든 없든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도전하기까지 한다.
할 수도 없음이라 - 자연인의 전적 불능(不能)과 전적 부패성을 보여준다. 오직 성령에 의해 거듭난 자만이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기꺼이 순종하는 마음과 의지를 가질 수 있다.
 
성 경: [8:8]
주제1: [성화와 성령]
주제2: [영에 속한 자]
육신에 있는...할 수 없느니라 - 본절은 7절의 논리에 의해 필연적으로 초래되는 결과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생각을 하며, 이에 따라 육신의 일을 하게 된다. 즉 육신에 속한 자는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전혀 생각지 않으므로 그에게서 나오는 모든 행동이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이것이 죄의 법 아래에만 있는 자의 실상(實狀)이다.
 
성 경: [8:9]
주제1: [성화와 성령]
주제2: [영에 속한 자]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 성도는 누구나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성전이다(고전 3:16;고후 6:16). 여기서 바울은 그동안(4-8) 육신의 영을 대립시킨 목적을 밝히고 있다.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 하나님의 영이 거하는 자는 육신에 속하지 않는 자라고 바울은 선언하고 있다. 즉 성도가 비록 선을 행하기를 원할지라도 그것이 뜻대로 되지는 않지만, 성도로서의 신분을 자신있게 내세울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영이 그 속에 거하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육신의 지배를 받고 있는 현실에도 불구하고 성도는 그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심으로써 '영에 속한 자'의 신분을 얻게 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 본절에는 성령에 대한 바울의 견해가 매우 잘 나타나 있다. '성령'='하나님의 영'='그리스도의 영'과 같은 등식이 보여 주듯이 성령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 불가 분리의 관계에 계신 하나님이시다. 이에 대해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Teh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성령은 영원히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나오신다'(the Holy Ghost eternally proceeding from the Father and the Son)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이 성령은 성도 가운데 거하시면서 성도의 영과 더불어 활동하신다(16). 한편 성도가 '그리스도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에 의해서 뿐이다. 성령께서 오심으로써 성도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여 믿게 하시며 또한 그는 성도안에 계시어서 하나님의 자녀로 인쳐 주신다. 따라서 성령이 거하는 자는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이기에 그리스도께서 거하는 자이고(10a) 그리스도의 사람이다.
 
성 경: [8:10]
주제1: [성화와 성령]
주제2: [영에 속한 자]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 예수께서는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5:24)고 말씀하시고 또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라"(17:3)고 가르치심으로써 사람이 믿음으로 '영생'을 이 땅에서부터 소유하게 됨을 가르치셨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바울도 이신 칭의(以信 稱義)를 근거로 성도의 영이 살아 있음을 증거하고 있다(5:18;6:11). 그러므로 성도는 새 생명 가운데서 사는 자다. 몸은 죄의 도구가 된 육신으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으나 영은 이미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로 인해 살았다. 여기서 '살아 있다'는 의미는 1절의 '정죄함이 없나니'란 말씀과 2절의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는 말씀과 매우 깊은 관계가 있다. 즉 성도가 여전히 정죄받는 신분이라면 아직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지 않았으므로 살았다는 신분을 얻을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는 정좌함이 없으므로,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속 사람인 ''은 죄의 포로가 된 육신과 심각한 갈등 관계에 있을지라도, 성도는 그리스도께서 값없이 주신 의로 인해 살아 있는 존재이다.
 
성 경: [8:11]
주제1: [성화와 성령]
주제2: [영에 속한 자]
예수를 죽은 자...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 본절은 10절의 선포에 대한 부가적인 설명이다. 그 설명을 요약하면 성령이 내주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성령에 의해 예수를 사망 권세로부터 살리심같이 다시 일으킴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여기서 바울은 단순히 영이 살아나는 것만을 진술하지 않고 성도의 '죽을 몸'이 다시 산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10절에서 바울은 '몸은 죄를 인하여 죽은 것이나'라고 선포했음에도 불구하고 본절에서는 죽을 몸이 산다고 진술하고 있다. 형식상으로 볼 때 그 두 진술은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나 내용면에서 그 두 진술은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다. 즉 몸은 죄로 인해 죽는다. 그렇지만 영은 의로 인해 살았다. 이와 같이 죽을 몸도 영이 성령에 의해 살게 된 것처럼 다시 살게 된다.
 
성 경: [8:12]
주제1: [성화와 성령]
주제2: [하나님의 후사(後嗣)]
그러므로 - 이 접속사는 1절에서 11절까지의 진술을 다시 실제의 삶에 적용하는 주제로 전환시키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 혹자는 성도가 성령께 빚진 자라고 해석하고 있다(Calvin). 또 다른 학자는 영원에서 영원에 이르도록 이미 받았고 받고 있으며 장차 받게 될 모든 축복과 비교할 때 성도가 빚진 자라고 설명한다(Hendriksen). 이처럼 '빚진 대상'에 대해서 다양한 해석이 나오게 된 것은 그 대상을 바울이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 기인한다. 그런데 본절의 '빚진 자''성령'께 빚진 자로 해석하게 되면 그 의미가 매우 축소된다. 오히려 성도는 구원의 전과정에 있어서 성삼위 하나님께 빚진 자다. 특히 1:14에서 바울은 자신을 복음에 대하여 빚진 자라고 하였는데 이는 성삼위 하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십자가의 은혜에 대하여 빚진 자라는 의미를 강하게 시사한 것이다.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 본 구절은 '빚진 자'로서의 삶을 사는 방법에 대한 제안이다. 그리고 이 제안은 13절과 14절에 의해 더 보충되고 있다. 본 구절만을 따로 떼어서 생각하면 바울의 이 제안은 다시 7장과 같은 갈등 속으로 빠져들게 만든다. 왜냐하면 7:24의 절규는 성도가 육신대로 살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는 상황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절은 7:24과 같은 비참한 경험후에 성도가 자포 자기하여 영적인 것을 추구하기를 그만두는 것과 관련된다. 성도는 현실 삶에서 죄와의 투쟁 가운데 절망을 겪지만 이미 그리스도께서 그 절망을 극복하셨으므로 그에 의해서 극복된 축복을 소유하고 있다. 다시 말해 성도는 그리스도에 의해 이미 보장된 승리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 사실을 모르고 그토록 심각한 좌절감이 찾아올 때에 예수 믿기를 포기하면, 이것은 곧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사는 삶이 되는 것이다.
 
성 경: [8:13]
주제1: [성화와 성령]
주제2: [하나님의 후사(後嗣)]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 성도는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다(9). 그러나 아직 '몸의 구속'(救贖)을 기다리면서 사는 존재이다(23). 이 사실을 모르고 절망 가운데서 고민하다가 육신에게 져서 성도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는 것으로 판단하여 믿기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 버리는 것은 영원히 사망의 종노릇을 하겠다는 것이다. 지금 바울은 구원을 성도 자신의 노력이나 의지로 성취하려는 것을 경계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원리를 가르칠 준비를 하고 있다.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 최후 승리는 성도 자신의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얻게 해주시는 것이다. 6:10-19에서 바울은 성도가 대적 마귀와 싸워 이길 수 있는 방법을 나열했는데, 그 중에 인간 스스로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모든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예비해 주신 것뿐이다. 만일 이러한 바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본절을 인간의 노력과 연관지어 이해하면 쉽게 새로운 율법주의로 빠지게 된다. 오순절 성령의 역사뿐 아니라 교회사 전체에 있어서도 성령의 역사는 성도의 어떤 노력이나 의지 여하에 따라 나타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써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에 따라 나타났다. 그러므로 본절은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 머물 때에 당연히 주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이란 말씀을 인간의 노력과 행위의 차원에서 이해한다면 7:24과 같은 비참한 상태에 빠져 몸부림치게 될 것이다.
 
성 경: [8:14]
주제1: [성화와 성령]
주제2: [하나님의 후사(後嗣)]
하나님의 영으로...하나님의 아들이라 - 성도는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자이기에 당연히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자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의 사랑'(9)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다. 예수께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1:12)라고 가르치셨다. 성도는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이처럼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는다.
 
성 경: [8:15]
주제1: [성화와 성령]
주제2: [하나님의 후사(後嗣)]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 '무서워하는 종의 영'과 비슷한 의미로 딤후 1:7에서는 '두려워하는 마음'(*, 프뉴마 데일리아스)이 언급되고 있다. 성도를 두렵게 하며 속박하는 것은 율법이다. 성도는 율법에서 해방됨과 동시에 율법이 주는 두려움과 속박(bondage)에서 벗어났다. 결국 성도는 율법을 통해서 성도를 정죄하는 그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된 신분이므로 결코 '두려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않는 것이다.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로 보다 왕과 백성의 관계로 더 많이 이해되었다. 비록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가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로 언급되었을지라도 신약 시대처럼 친밀한 관계를 보여주지는 않는다(J. Jeremias). 양자(養子)의 원리는 바울 신학의 중요한 주제 중 하나로 그 근원은 예수의 가르침에서 발견된다(6:9;14:36). 그리고 바울은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는 분이 성령이라고 가르친다. 성령께서 성도 가운데 거하심으로 성도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보증으로 인쳐 주시는 것이다.
아바 아버지 - 예레미아스(J. Jeremias)'아멘 아멘...'의 형식과 함께 '아바 아버지'란 용어가 '예수의 고유한 언어 구사 방법'(ipsissima vox Jesu)이라고 주장한다(20:11-29 주제 강해 '예수의 언어 사용에 나타난 자기 계시' 참조). 오직 예수만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아바 아버지'란 용어를 즐겨 사용했는데, 이는 (1)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철저한 복종과 긴밀한 관계, (2) 아들로서의 권위를 나타낸다. 예수는 이와 같은 용어를 제자들에게도 가르치셨는데(6:9), 이 용어는 신약 시대의 성도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장 잘 대변해 준다. '아바'는 어린아이의 언어에서 유래되었다. 탈무드(Talmud)에 언급된 "어린이가 젖을 떼면서 밀맛을 볼 때에 '아바'(*)'임마'(*) '아빠''엄마'란 말을 배우게 된다"란 구절이 그 사실을 잘 암시한다. 그리고 탈굼역(The Targum)도 사 8:4"어린이가 '아바''임마'라고 부르기를 배우기 전에"로 번역하고 있다. 이와 같이 '아바'는 매우 친밀한 언어로 하나님을 경외할 분으로만 알았던 유대인들은 기도 가운데서 하나님을 '아바'로 부를 수 없었으며 기도 형식의 문헌에조차 결코 사용된 적이 없다(J. Jeremias). 그러나 신약의 성도는 양자의 영에 의해서 하나님과 부자(父子)관계 속에 들어가게 됨으로써 '아바'란 말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성 경: [8:16]
주제1: [성화와 성령]
주제2: [하나님의 후사(後嗣)]
성령이 친히...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 본절은 성도가 '양자의 영'을 받은 사실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성도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신분을 증명해 주고 있다. 즉 성도는 양자의 영을 받았을 뿐 아니라 양자의 영이신 성령으로부터 친히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서 증거받는다. 이에 대해 칼빈(Calvin)은 말하기를 , "우리의 마음이 믿음으로 차 있을 때에만 우리의 입이 열려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데, 이것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에 역사하시고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해 주시기 때문에 가능하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신하지 못하면 하나님께 바로 기도할 수 없으며 그와 같은 믿음은 헛것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성 경: [8:17]
주제1: [성화와 성령]
주제2: [하나님의 후사(後嗣)]
자녀이면...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 혹자는 '자녀''후사'(後嗣)는 의미상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진술한다(Black). 그러나 '자녀'는 가족 관계를 강조하는 용어이며 '후사'는 상속(相續)과 관계되는 용어이다. 바울은 '자녀'로서 하나님의 후사가 되는 성도의 권세를 본절에서 강조하고 있다. 성도는 하나님과 가족 관계에 들어가 그 가족의 구성원이 될 뿐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취하신 하나님의 후사로서의 권세도 동시에 가진 신분이다.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 이 고난은 마음의 법과 죄의 법이 서로 투쟁함으로써 비롯되는 내적인 고난(7:23, 24)일 수도 있으며 의를 인하여 필연적으로 받게 되는 것일 수도 있다(5:10;벧전 3:14). 그리고 보다 포괄적인 의미로는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받는 고난일 수 있다(딤후 2:3). 어떤 의미의 고난이든 그것은 잠시 동안 받게 되는 것이며(고후 4:17), 궁극적으로 성도에게는 승리가 보장되어 있다(37).
 
성 경: [8:18]
주제1: [성화와 성령]
주제2: [소망과 인내]
현재의 고난 - 이는 무엇보다도 성도가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몸의 구속을 기다리는 것'(23b)과 깊은 연관이 있다. 따라서 이 고난은 마음의 법과 죄의 법이 투쟁함으로써 성도에게 찾아오는 비참한 경험과도 연관이 있다. 이로 보아 바울은 성도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 신분을 가지고 있으나 현재의 삶 속에서 그 두 법의 투쟁이 죽는 날까지 지속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 여기서 '영광''하나님의 후사'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가 되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가 됨으로써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하게 된다. 이처럼 바울은 성도가 부활의 몸 곧 영광스러운 몸(고전 15:43, 44)을 입어 하나님의 후사가 된다는(고전 15:50) 사실을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영광스러운 것이라고 강조했다.
 
성 경: [8:19]
주제1: [성화와 성령]
주제2: [소망과 인내]
피조물 - 바울은 지금까지 구원의 초점을 인간에게 맞추었으나 이제는 보다 영역을 넓혀 모든 피조물에게까지 확장시키고 있다. 이것은 장차 있게 될 성도의 영광이 성도들뿐 아니라 전체 피조물의 회복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타락함으로써 다른 피조물조차 악의 지배를 받게 되어 전 우주가 무질서 가운데 빠졌다.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 본 구절은 성도가 하나님의 후사로서 자기의 위치를 회복하는 것과 피조물의 회복이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더욱 분명하게 시사해 주고 있다. 즉 피조물들조차 하나님의 아들들이 자기의 영광을 회복하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은 (1) 인간의 타락과 함께 피조물들도 그 타락의 영향권에 들게 되었고 (2) 하나님 자녀가 그 영광을 회복함으로써 피조물들도 그 영광에 동참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Hendriksen).
 
성 경: [8:20]
주제1: [성화와 성령]
주제2: [소망과 인내]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 인간의 타락은 자기 자신만 허무(虛無)한 데로 이끈 것이 아니라 그의 지배하에 있던 다른 모든 피조물까지 허무하게 만들었다. 전도서의 저자는 이러한 허무를 매우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1:1-11;2:11-23). 피조물은 스스로 허무한 데 굴복하지 않았고 인간으 타락에 동참하지 않았다. 다만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을 저주하는 가운데 피조물도 인간과 함께 허무한 데 굴복하도록 명하셨다(3:17, 18). 이러한 사실은 본절의 '굴복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페타게'(*)가 제 2단순 과거 수동태로서 '굴복을 당하였다'는 의미를 지닌 점에서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was made subject, KJV). 한편 이러한 현상은 만물의 지배자인 인간이 타락하여 그 지배권을 사단에게 빼앗기게 됨으로써 발생케 되는 필연적인 것이기도 하다. 즉 만물의 대표자인 인간이 타락함으로써 당하는 허무를 그 인간에 종속된 피조물도 함께 당하게 된 것이다.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 피조물들은 각기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에 따라 자기에게 부여된 임무에 순종한다. 피조물들이 비록 이 세상에서 덧없이 사라지고 부패해 갈지라도 이와 같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온전히 회복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궁극적으로 이 땅에 도래하기를 바라는 '희망에서'(*, 에프 헬피디) 그러하다. 왜냐하면 그때에 그들도 썩지 않는 영광을 함께 얻게 되기 때문이다.
 
성 경: [8:21]
주제1: [성화와 성령]
주제2: [소망과 인내]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 바울은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고전 15:40, 41)라고 진술했다. 이와 같이 각 피조물이 각기 다른 영광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인간의 타락과 함께 그 영광들이 허무한 데 굴복하게 되어 썩어짐의 종노릇을 하게 되었다. 혹자는 본 구절의 '피조물'이 전우주와 관계된 것이 아니라 인간만을 언급한 것이라고 주장한다(E. Brunner).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22절과 23절에 의해 부정된다. 그리고 바울의 진술대로(고전 15:40, 41) 각 피조물은 각기 고유한 영광을 지니고 있으나 인간이 타락함으로써 본의 아니게 인간과 대립된 관계에 놓여지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허무하고 썩어질 것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지위를 다시 회복하게 될 때 전우주는 본래의 질서를 회복하게 될 것이며 피조물들도 각기 자기의 영광된 위치를 회복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 바울은 피조물이 자기의 영광을 회복하는 것이 그들의 힘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과 관계있음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든 죄와 불의에서 하나님의 절대 자유, 즉 구원과 영생의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 또한 그들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구원 계획에 의해 이루어지게 됨을 시사하고 있다. 본절의 '이르는 것이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엘류데로데세타이'(*)가 미래 수동형인 점은 그와 같은 사실을 확증해 준다. 한편 본절의 내용은 19절에서 22절까지가 피조물의 회복 자체를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상도가 자기의 영광을 회복해야 한다는 사실에 강조점을 두고 있음을 보여준다. 피조물의 회복은 성도의 영광의 회복에 의존하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과정이 완성될 때에 다음과 같은 사 11:6-9의 예언이 완성될 것이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이사야 선지자의 이 예언은 태초의 에덴 동산의 회복을 간접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나 실제로 앞으로 회복될 영광은 이러한 에덴 동산의 영광보다 더욱 뛰어날 것이다(P. Robertson).
 
성 경: [8:22]
주제1: [성화와 성령]
주제2: [소망과 인내]
피조물이...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 - 바울은 인간이 본래의 영광과 자유를 회복해야 할 필연성을 피조물이 그 일을 위해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과 비교하고 있다. 다시 말해 피조물조차도 영광의 회복을 위해 탄식하며 신음하고 있는데, 하물며 인간이 자신의 회복을 위해 탄식하며 신음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역설적 표현이 본절에 깊이 암시되어 있다. 바울은 이렇게 표현함으로써 인간이 자기 영광을 회복하는 것이 얼마나 절실한 범우주적인 요구인가를 깨우쳐 주고 있다. 한편 본절의 '이제까지'(*, 아크리 투 뉜)는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 인간이 저주와 고통을 받았으며, 이 저주와 고통이 주의 재림시까지 현재적으로 계속될 것임을 암시한다고 보아야 한다(Murray, Meyer).
 
성 경: [8:23]
주제1: [성화와 성령]
주제2: [소망과 인내]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 성도 자신이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라는 것은 아니다.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는 오직 그리스도이시다(고전 15:20, 23). 다만 성도는 처음 익은 열매되신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구원의 은혜를 받은 자들이다. 그러면 '처음 익은 열매'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가 ? 세가지 견해로 요약될 수 있다. (1) '성령의 보증', 곧 성령으로 말미암아 중생한 성도의 '출생 증명서'라는 견해와(Kasemann, James Dunn) (2) 성도가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누릴 완전한 후사에 대한 서약이라는 주장(Hodge), 그리고 (3) 중생의 체험을 한 성도가 몸의 부활을 하게 될 것뿐만 아니라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모든 선물을 가리킨다는 견해(Godet, Philippi) 등이 그것이다. 세 가지 견해가 모두 일견 타당하나 마지막 견해가 더욱 구체적이고 지배적이다. 한편 '처음 익은 열매'(*, 아파르켄)를 받는 대상에 대해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사도 시대처럼 이적과 기사와 각양 은사를 체험한 깊은 신앙을 소유한 일부 성도에게 적용된다(Reiche, Erasmus, de Wette). (2) 오순절 성령의 체험을 맛본 초대 교회 성도들뿐만 아니라 성령의 역사하심에 따라 중생의 체험을 한 모든 성도들에게 적용된다(Meuer, Calvin, Bengel, Keil). 이중에서 후자의 견해가 타당하리라 생각된다.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 성도는 구원의 은혜로 의롭게 되어 거룩함을 입은 자이나 예수께서 만유(萬有)를 회복하실 때를 기다리는 자다(3:21). 그렇기 때문에 여전히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이 성도의 몸 안에서 투쟁하고 있다. 다만 성도는 그리스도께서 죄와 사망의 법에서 죄인을 해방시켰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 '몸의 구속'(球贖)을 기다리며 산다. 이렇게 될 때 성도는 자기 속에서 일어나는 두 법의 투쟁에 의해 빚어지는 갈등을 해소할 수 있다.
 
성 경: [8:24]
주제1: [성화와 성령]
주제2: [소망과 인내]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 성도는 '몸의 구속'을 기다리는 소망을 가지고 산다. 이 소망은 믿음 없이는 결코 가질 수 없는 것이기에 구원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소망을 성도에게서 불러일으키는 원동력은 오직 믿음뿐이다. 이런 점에서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는 표현이나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다'는 표현은 결국 같은 의미이다. 한편 본절에 '구원을 얻었으매'로 번역된 헬라어 '에소데멘'(*)은 과거 시제로서 성도가 구원을 얻은 것이 이미 종결되었음을 의미한다. 중생의 체험으로 죄의 종에서 해방된 성도는 이 땅에서 장차 도래할 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하지만, 이미 성령의 인치심으로 하나님의 권속(眷屬)의 반열에 들게 된 것이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 본 구절은 히 11:1"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는 말씀과 잘 조화된다. 성도는 믿음으로 자기가 이미 구원받은 자임을 확신한다. 비록 완전한 구원이 아직 실체로 나타나 있지 않으나 믿음으로 그 실체(實體)를 받은 것으로 생각하며 그 실체가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이처럼 현실 세계에서 장차 이루어질 소망을 믿고 바라게 하는 기독교의 진리는 '보이는 물질만이 실상이요 믿을 것'이라고 하는 유물론(唯物論)과 명백히 구별되는 것이다.
 
성 경: [8:25]
주제1: [성화와 성령]
주제2: [소망과 인내]
만일(*, 에이) - 바울이 이 접속사를 사용한 것은 성도가 마땅히 받았어야만 하는 것을 받지 못한 사실을 지적하기 위함이 아니라, 성도가 이미 받았으나 그 실체가 손에 잡힌 바 되듯이 완성될 때까지 소망 가운데 있어야 함을 지적하기 위함이다.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 성도는 성령에 의해 양자의 보증(保證)과 구원의 보증을 동시에 얻었다. 그러나 아직 탄식하면서 양자될 것 곧 몸의 구속을 기다려야 한다. 옛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함께 이미 죽었으나 아직 완전한 구원은 완성되지 못했기에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소망을 가지고 기다려야 한다. 이는 성도가 성령의 법과 죄의 법의 투쟁에서 비롯된 갈등을 겪지만 이를 극복하고 그리스도께서 이미 성취하신 자유에 대한 기쁨과 감격 가운데서 살아야 할 것에 대한 권면이다. 더불어 바울은 성도가 소망 가운데서 기다리는 것이 '참음으로'(*, 디 휘포모네스) 이루어짐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복음과 진리를 위해 사는 성도의 삶에는 갖은 환난과 역경이 수반되므로 여기에는 오래 참는 인내가 요구된다. 인내하는 목적은 성도의 소망이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대 궁극적으로 성취된다는 데 있다.
 
성 경: [8:26]
주제1: [성화와 성령]
주제2: [성령의 중보 기도]
이와 같이 - 이 접속사는 성도가 탄식하면서 양자될 것 곧 몸의 구속을 참음으로 기다림을 지칭한다(Black).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 성령은 성도를 양자로 보증해 주는 것으로 끝내지 않으시고 최종적으로 구원이 완성될 때까지 도와 주신다. 성도는 연약한 육신을 입고 있기에 성령께서 성도 가운데 계시면서 성도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며(16:13) 양자로서의 보증이 성도 안에서 확실히 성취되도록 도와주신다. 이런 의미에서 성령은 보혜사(保惠師)이시다(14:16, 26;16:7). 한편 본절의 '도우시나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쉬난틸람바네타이'(*)'쉬난틸람바노마이'(*)의 현재 중간태 직설법으로서 '다른 사람의 손을 붙잡아 준다'는 의미이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 가운데 본절과, 마르다가 마리아의 도움을 요청하는 장면인 눅 10:40에만 나온다. 성령께서는 성도가 연약해 있을 때에 성도의 무거운 짐을 덜어 주고 곁에서 일으켜 세워주며 붙들어 주신다.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 본 구절은 기도하는 성도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암시적으로 보여준다. 성도는 연약하기에 영적 힘을 공급해주는 통로인 기도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성도는 기도함에 있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인됨을 철저하게 자각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성령의 도움을 간구해야 한다. 성령의 도움이 아니면 기도의 능력도, 기도할 내용도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 본 구절은 성령께서 연약한 성도들을 위해 일하고 계심을 강조하고 있다. 즉 성령께서 성도들 편에 서서 그들이 의식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사실들을 미리 아시고 성도들을 위해 성부 하나님께 간구하고 계신다. 이런 면에서 기도는 성도 안에 계신 성령의 사역이라고 일컬어질 수 있다(C.H. Dodd). 성도가 갈등으로 인해 탄식하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성령께서도 성도보다 더 심한 탄식으로 성도를 위해 간구하신다는 이 사실이야말로 성도에게는 가장 큰 위로이며 구원에 대한 보증이다.
 
성 경: [8:27]
주제1: [성화와 성령]
주제2: [성령의 중보 기도]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 본 구절에서 바울은 성부나 성자 하나님과는 독립된 인격체로서의 성령에 대해 진술하고 있다. 동시에 바울은 성부 하나님과 성령의 활동을 구별한다(Black). '성령의 생각'은 하나님의 구원 계시와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그 구원 계시를 바탕으로 해서 성도를 위해 이루어진 것이다(14:26;16:7-14).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 '하나님의 뜻대로'에 해당되는 헬라어 '카타 데온'(*)은 직역하면 '하나님을 따라 '란 의미이다. 여기에는 개역성경처럼 ''에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과 성부 하나님이 구속 사역을 위해 긴밀한 관계에 있음을 보여주는 데 그 강조점이 있다. 성령은 성부 하나님과 별개로 활동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부 하나님께서 세워 놓으신 거대한 구원 계획에 따라 활동하신다. 성령께서 성도를 위해 기도하시는 것도 성부의 구원 계획을 완성시키기 위한 것이다.
 
성 경: [8:28]
주제1: [성화와 성령]
주제2: [성령의 중보 기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 성도가 하나님께 '부르심을 입은 것''하나님을 사랑한 것'에 대한 보답으로 주어졌다는 인상이 본절에 나타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성도를 선택하시고 부르시는 것은 인간의 어떤 행위에 대한 보답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사람이 성도로 선택함을 받은 것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에서 비롯된다. 또한 본 구절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부르심을 입은 자'를 동격(同格)으로 취급하고 있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께 부르심을 입은 자이며, 하나님께 부르심을 입은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이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 이에 대한 헬라어 본문은 '판타 쉬네르게이 에이스 아가돈'(*)으로 직역하면 '모든 것이 선을 위해 함께 역사한다'이다. 즉 만물 또는 모든 일이 선을 목표로 하여 협조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본 구절이 나타내는 진정한 의미는 하나님께서 만물로하여금 선을 위해 역사하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절에서 '하나님'이 주어가 되지 않고 '만물'이 주어가 된 것은 만유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본에는 '하나님'(*, 호 데오스)을 주어로 삽입시키고 있다. 만물은 하나님의 섭리안에 포함되어 있으므로, 그 모든 것은 선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따라서 성도를 위한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되는 원동력은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해 간구하신다는 사실에 있다(27). 그리고 이러한 사실에 대한 적용은 31-39절에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성 경: [8:29]
주제1: [성화와 성령]
주제2: [성령의 중보 기도]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 본 구절은 '예정'(豫定)의 목적으로 언급되었다. 그러나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사건이 (1)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변화되는 것인지 아니면 (2) 그리스도를 믿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 때부터 계속 변화하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견해가 달라 두 견해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 있다. 두 입장에 대한 학자들의 분류는 헨드릭슨(Hendriksen)에 의해 잘 설명되었다. (1)의 입장을 취하는 사람으로는 그레이다너스(Greijdanus), 렌스키(Lenski), 머레이(Murray), 그리고 리델보스(Ridderbos)와 같은 학자가 포함되어 있으며, (2)의 입장을 취하는 사람으로는 칼빈(Calvin), 크랜필드(Cranfield), 로버트슨(Robertson), 그리고 잔(Zahn)과 같은 학자가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헨드릭슨(Hendriksen)은 두번째 견해를 지지한다. 두번째 견해를 지지하는 학자들은 대부분 성화(聖化)의 교리를 근거로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성도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이미 그의 형상을 받은 자이며, 하나님의 자녀들이 된 상태이다. 그러나 이 상태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므로 성도는 믿음의 눈으로 소망 가운데서 기다리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이미 3:21에서 지금까지 진술한 바울의 논리를 가장 잘 대변해 준다.
 
성 경: [8:30]
주제1: [성화와 성령]
주제2: [성령의 중보 기도]
미리 정하신 그들을...영화롭게 하셨느니라 - 본절은 29절과 함께 대부분의 학자들에게 구원에 관한 매우 중요한 교리를 제공해 주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여기에는 '믿음'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예정과 부르심이 믿음에 의해서 확정되며, 칭의와 영화도 믿음에 의해서 성도에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구원의 전과정에 있어서 '믿음'이 전제되어 있으므로 바울은 굳이 그 단어를 삽입시킬 필요가 없었다. 바울이 본절에서 구원의 과정을 자세히 나열한 것은 성도로 하여금 성도를 향하신 하나님의 변치 않는(39) 사랑을 알도록 하기 위함이다. 또한 바울이 나열한 단어 하나하나에는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가 암시되어있다.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게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2:8)고 언급했던 것처럼 구원의 모든 단계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한편 본절에 나오는 동사 '의롭다 하시고''영화롭게 하셨느니라'는 각각 헬라어로 '에디카이오센'(*)'에돝사센'(*)인데 이들은 모두 과거 시제를 취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그리스도의 재림시 궁극적으로 완성될 것이지만, 이미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확고하게 세워져 있음을 나타낸다.
 
성 경: [8:31]
주제1: [성화와 성령]
주제2: [구원에의 확신]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 '이 일'은 직접적으로는 28-30절까지 언급된 것을 지칭하지만 보다 포괄적으로는 3:21부터 지금까지 언급한 바와 같은 하나님의 구속 사역 전체를 지칭한다. 다만 28-30절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행하신 전체 구속 사역을 요약적으로 진술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를 두고 마귀와 변론할 때 다른 말보다도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1:9)고 말했던 것을 유다가 언급한 적이 있다. 선악간(善惡間)의 모든 일을 심판하시는 이는 하나님 한 분뿐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성도를 위하시면 그 무엇도 성도를 대적할 수 없다.
 
성 경: [8:32]
주제1: [성화와 성령]
주제2: [구원에의 확신]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 본 구절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칠 때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 말했던 내용 즉,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아끼지 아니하였으니"(22:12),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22:16)을 연상시킨다. 바울은 본서 4장에서 아브라함을 실례로 들어 이신 칭의를 설명하였으나 거기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기사는 언급하지 않았다. 사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음에 있어서 이삭을 제물로 바친 기사는 아브라함의 절대 순종하는 믿음을 보여주므로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을 사도 바울이 몰랐을 리가 없다. 그러면 이 이야기를 4장에서 언급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 아마도 본서의 핵심 장()이라 할 수 있는 본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사건에 그 이야기를 적용시키려고 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Gifford, Sanday, Dunn). 그렇다면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죄인들에게 내어 주신 사실은 이삭을 번제물로 바친 기사와의 유비 관계에서 적절하게 음미할 수 있을 것이다. 두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째는, 아브라함이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귀중한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고 했던 것처럼 성부 하나님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죄인들을 위해 대속물이 되게 하셨다. 둘째는,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바칠 때 많은 고통과 고초가 따랐으나 하나님의 명령대로 어김없이 준행했듯이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독생자로 하여금 온갖 수난과 고초가 따르는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처절한 집행과정을 겪도록 그대로 허용하셨다. 즉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관계 이상의 지극한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독생자를 대속물이 되게 하신 것이다.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 '만일 구원'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의 '우리 모든 사람'26절에 기록된 '성령의 간구하심을 힘입은 자들'이요, 28절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며 29, 30절의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바에 의해 '선택된 자'들을 가리킨다.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 여기서 '모든 것'은 구원 자체도 될 수 있지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28:18) 및 모든 피조물도 포함될 수 있다. 심지어 천사도 성도를 위하여 '부리는 영'으로서 활동하고 있다(1:14). 독생자를 아끼지 않으신 하나님께서(3:16) 성도를 위해 다른 무엇을 아끼겠는가 ! 그러므로 이것은 성도의 위치가 얼마나 존귀한가를 잘 보여주는 표현이다.
 
성 경: [8:33]
주제1: [성화와 성령]
주제2: [구원에의 확신]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 31절의 '대적하리요''송사(訟事)하리요'는 비슷한 의미를 지닌다. 다만 '송사하리요'란 단어는 법정적(法定的)인 술어로서 곧이어 언급되는 '칭의'와 직접적으로 연관지어진다. 사단이 여호와 앞에서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송사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사단을 거듭 책망하시면서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죄를 사하시고 아름다운 옷과 깨끗한 관을 씌우셨다(3:1-5). 여호수아 자신이 깨끗했기에 송사를 면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재판장되신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다고 선포하시고 그를 깨끗케 하셨기에 여호수아는 사단의 송사에도 불구하고 의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이 성도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것이 본절에서 바울이 진술하고 있는 논지(論旨)이다.
 
성 경: [8:34]
주제1: [성화와 성령]
주제2: [구원에의 확신]
누가 정죄하리요 - 성도는 율법에서 해방되었기에 율법의 정죄에서도 해방되었다(1). 비록 죄의 법에서 사로잡혀 마음이 원하는 바 선을 행하지 못했을지라도 성도는 어느 누구에게도 정죄를 당하지 않는 신분을 지니고 있음을 바울은 본절에서 강조하고 있다.
그는...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 바울은 26절에서 성령께서 성도를 위해 간구하신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성령은 성도의 연약한 삶을 위해 간구하시지만 성자 그리스도는 정죄받을 성도를 위해 변호하시고 탄원하신다. 비록 본절에 언급된 '간구하다'(*, 엔튕카네이)가 기도의 형식을 나타내지만, 본절에서 이 단어가 지닌 진정한 의미는 성도를 위한 그리스도의 변호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는 사실이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시면서 자신이 성취한 구속 사역을 근거로 자기 백성된 성도를 위해 하나님께 변호해 주신다.
 
성 경: [8:35]
주제1: [성화와 성령]
주제2: [구원에의 확신]
본절은 바울 자신이 직접 경험했던 것을 나열하고 있다(Black). 고후 11:23-27에서 그는 자신이 경험한 것을 보다 세부적으로 진술했으나 본절에서는 그 경험을 요약하여 대표적인 용어를 선택하여 진술하고 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 이 질문은 앞에서 언급했던 질문들(31, 33, 34)을 포괄한다. 어느 누구도 성도를 대적할 수 없으며, 송사할 수 없고 정죄할 수 없는 것은 근본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성도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그리고 본 구절의 질문은 39절 하반절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연결된 대답으로 이어지고 있다.
환난(*, 들마시스) - 이는 다음에 언급되고 있는 여섯 가지를 대표하며 '고난'(17, 18)과 같은 표현이다.
곤고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테노코리아'(*)'행동이 제한된 상태'를 가리킨다. 이 표현은 바울 자신이 옥에 갇힌 경험을 나타내고 있는 듯하다.
기근(*, 리모스) - 이는 민족이나 지역적인 차원의 기근일 수 있으나, 본절이 바울 자신의 경험이라는 사실을 고려할 때 굶주리며 마시지 못한(고후 11:27) 경험을 나타내는 것같다.
적신(*, 귐노테스) - 이는 고후 11:27'헐벗었음'과 원어상 동일하다. 바울은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자기의 겉옷을 가져오라고 부탁할 만큼(딤후 4:13) 항상 입을 것조차 변변치 않았다.
 
성 경: [8:36]
주제1: [성화와 성령]
주제2: [구원에의 확신]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 본절은 시 44:22의 인용문이다. 혹자는 바울이 이 인용문을 사용한 것을 안티오커스(Antiochus)의 폭정하에 시달리던 백성들의 비참한 고난을 묘사하고 있는 것으로 추론한다(Calin). 바울이 고후 4:11에서도 본절과 유사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바울 자신뿐 아니라 당시 성도들이 당하던 박해와 고난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반드시 안티오커스(Antiochus)의 폭정에 의한 고난만으로 이해하기는 힘들다. 오히려 본절은 바울이 35절에서 언급한 여러 환난과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하는 편이 더욱 합리적이다.
 
성 경: [8:37]
주제1: [성화와 성령]
주제2: [구원에의 확신]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 이 표현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페르니코멘'(*)은 신약성경 중 오직 여기서만 언급되고 있을 뿐이다. 이를 혹자는 '우리가 압도적인 승리를 얻고 있느니라'(We are winning an overwhelming victory)라고 풀이하기도 한다(Black). 그리고 렌스키(Lenski)도 이와 비슷하게 '우리는 가장 혁혁(赫赫)한 승리를 지속적으로 성취하고 있다'(We keep achiving the most brilliant victory)로 해석한다. 바우어(Bauer)'휘페르니코멘'(*)'정복하다'란 동사의 강의형으로 '영광스러운 승리'와 연관된 것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실제로 영역 성경 중에는 이 단어의 '정복'이라는 의미에 강조점을 두어 '우리는 정복자들 그 이상이다'(We are more than conquerors)로 번역하고 있는 것도 있다(KJV, RSV, NIV). 아무튼 본절에서 바울은 성도들이 자기들을 '사랑하시는 이'(하나님 또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게 되는 승리를 강조하고 있다.
 
성 경: [8:38]
주제1: [성화와 성령]
주제2: [구원에의 확신]
바울은 본절과 39절 상반절에서 어떤 피조물도 그리고 어떠한 상황과 여건도 성도의 압도적인 승리를 방해할 수 없음을 진술하고 있다.
권세자들(*, 아르카이) - 이는 본래 바울 신학에서 천사의 한 부류에 속하지만(1:21) 주로 사단의 세력하에서 활동하는 악한 영들을 지칭한다(2:2;6:12). 그리고 특히 바울은 본절에서 '사망''생명', '현재 일''장래 일'과 같이 서로 대조되는 어법을 구사하고 있으므로 본절의 '권세자들'은 하나님의 부리시는 영인 천사와 대조되는 영, 곧 사단에 의해 조종되는 악한 영들을 의미한다.
능력(*, 뒤나메이스) - 이 단어에 대해 혹자는 '폭풍, 천둥과 번개, 그리고 지진과 같은 자연의 힘'으로 해석한다(Lenski). 혹자는 '능력''천사들'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Calvin). 아무튼 본절에서 '능력''천사'를 지칭하든지 '악의 세력'을 지칭하든지 '신적(神的)인 세력'을 의미하는 것은 분명하다.
 
성 경: [8:39]
주제1: [성화와 성령]
주제2: [구원에의 확신]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 앞에 언급된 아홉 가지 모두 '피조물'이라는 표현 속에 포함된다. 피조물 중에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 구별할 것 없이 하나님의 손으로 창조된 모든 피조물을 언급하기 위해 바울은 아홉 가지의 단어를 나열했던 것이다.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 본 구절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35a)라는 질문에 대한 결론적인 대답이다. 그리고 이 대답은 37절의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는 진술에 따라 나오게 되는 필연적인 사실이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사랑은 성도의 견인(堅忍)뿐 아니라 불가항력적인 은혜의 근원이다. 성도는 7:24과 같은 비참한 상황에 처했을 때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자신을 해방시켰다는 사실과(2) 함께 성도를 향하신 하나님의 지속적인 사랑을 깨닫게 될 때 참된 자유와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된다.
 
 
 
 
성 경: [9:1-2]
주제1: [유대인의 구원문제]
주제2: [선택받은 이스라엘]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 이 표현은 지금부터 진술될 내용의 권위를 보다 강화시키기 위한 것이다. 특히 '그리스도 안에서'란 말은 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된 바울의 독특한 어법으로서(1) 이것이 맹세의 의미로 사용될 때에는 구약 시대에 '여호와의 사심으로'라는 표현으로 맹세했던 것과 일맥 상통(一脈相通)한다. 바울은 자기의 말과 계시의 최종적인 권위를 나타낼 필요가 있을 때 그리스도의 이름을 내세우고 있다(1:1, 12).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 - 바울에게 있는 큰 근심과 고통은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것이다. 비록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사역을 하고 있으나(2:8) 자기 동족에 대한 깊은 애정은 여전함을 보여 주고 있다.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 본 구절에서 바울은 자기 동족에 대한 자기의 애정이 거짓이 아님을 더욱 확증하고 있다. 초두에서는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란 표현으로 자신의 진술의 권위를 세운 반면 본 구절에서는 자기와 함께 계시며 자신의 생각을 다 아시는 '성령'의 이름으로 자기 마음의 진실성을 입증시키고 있다. 따라서 바울은 '성령 안에서'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자기 동족에 대한 큰 근심과 고통의 비중(比重)과 지속성 그리고 그 깊이를 보여 주고 있다(Liddon, Murray).
 
성 경: [9:3]
주제1: [유대인의 구원문제]
주제2: [선택받은 이스라엘]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 -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따라 났으며 언약과 약속에 참여한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킨다(4-13). 내 자신이 저주를...끊어질지라도 - 구약 시대나 신약 시대에 있어서 공통된 저주의 의미는 하나님과 분리되어 멸망당한다는 것이다(Murray).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저주가 되신 사건도 이러한 의미의 저주와 별개의 것이 아니다. 그러면 바울은 실제로 자기 동족을 위해 저주를 받기를 원했는가 ?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와 유사한 표현을 사용했던 모세의 경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모세는 자기 백성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든 죄를 속()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면서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32:32)라고 탄원했다. 이때 모세는 자기 백성을 하나님의 심판에서 건져내고자 하는 열심에서 그런 기도를 했다. 이것은 자기를 정말 하나님의 책에서 지워 버리고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사하여 달라는 의미라기 보다는 자기 백성에 대한 사랑과 열심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본절에서 바울은 자기 동족에 대한 연민과 열심을 나타내기 위해 그와 같은 표현을 사용했다. 즉 바울은 모세와 같이 자기 구원을 포기할 만큼 자기 동족을 사랑하고 있음을 로마 교회의 유대인들에게 보여 주고 있다(Calvin, Murray, Barmby).
 
성 경: [9:4]
주제1: [유대인의 구원문제]
주제2: [선택받은 이스라엘]
양자됨 -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은 구약 성경이 증거하고 있다(4:22;14:1;32:6;63:16;64:8;11:1;1:6;2:10). 그러나 이 부자 관계는 고대 근동 지방의 왕과 신하의 관계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그 당시 왕은 신하와 백성의 어버이와 같은 존재이자 신과 같은 존재이기도 했다. 이와 같이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에 있어서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치하시는 왕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의 어버이와 같이 경배되었던 것이지 신약 시대와 같이 친밀한 가족 관계에 있어서의 부자(父子)관계로는 파악되지 않았다. 이에 대한 증거로는 이스라엘 백성의 기도문이나 기타 다른 문헌에 하나님의 성호가 가족적인 의미의 친밀한 용어인 '아바'(*, 압바)로 결코 사용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댈 수 있다(8:15 주석참조).
영광 - 여기서의 영광은 조직 신학적인 포괄적 의미로 이해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영광'은 머레이(Murray)가 지적한 대로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 나타나셔서 임하던 그 영광이며(24:16, 17), 성막을 덮었던 영광이며(40:34-38), 지성소의 시은좌에 나타난 영광이며(16:2), 성전을 가득 채웠던 영광이다(왕상 8:10, 11;대하 7:1, 2;1:28). 그리고 좀더 비약하자면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영광도(고후 3:7)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언약들 - 구약의 언약(Covenant)은 로버트슨(Robertson)에 따르면 아담(시초의 언약, 3:14-19), 노아(보존의 언약, 6:17-22;8:20-22;9:1-7, 8-17), 아브라함(약속의 언약, 12:1;15:1-18;17:1, 2), 모세(율법의 언약, 34:28;4:13;9:9, 11), 그리고 다윗(왕국의 언약, 삼하 7:1-29)등과 맺은 다섯 가지 언약이 있다. 물론 혹자는 아브라함에게 맺어진 동일한 의미의 두 언약(15:18-21;17:1-21)만을 본절의 '언약들'이라고 주장하지만(Murray), 그렇다고 그가 다른 언약들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언약이 아브라함에게서 시작되었지만 궁극적으로는 전체 인류 구속을 목표로 하는 언약들이기 때문이다.
율법을 세우신 것 - 모세를 통해서 시내 산에서 율법이 공포된 것은(4;13, 14)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언약 백성으로 보증하시는 선언이었다.
예배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하신 제사 제도는 우상 숭배와는 구별되는 것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를 포함하는 구속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제사 제도에 계시된 구속사적 의의를 망각하고 형식적인 예배의 본질이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데 있음을 가르치셨다(4:23).
약속들 - 특별히 '언약'이 이스라엘 역사에 나타난 바,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 사이에 성립된 것에 강조점을 두는 반면, '약속'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조속들에게 주신 말씀(12:2, 3;18:18;22:18;26:4;28:14) 자체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다시 말해서 '언약'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성을 강하게 반영하며 '약속'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개별적으로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강하게 시사한다. 따라서 '언약''약속'에 비해 포괄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내용상 이를 명백히 구분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안 된다. '언약''약속'은 총체적으로 하나님의 구원 섭리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Dunn).
 
성 경: [9:5]
주제1: [유대인의 구원문제]
주제2: [선택받은 이스라엘]
조상들 - 족장들 곧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을 일컫는다(7-13). 그런데 혹자는 '조상들'을 세 사람의 족장으로 국한시키는 것을 반대하며 다윗도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1:3에서 예수께서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라고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은 본장에서 그리스도의 나심을 세 족장들과 연관지어 설명하고 있으므로 굳이 다윗을 '조상들'의 범주에 넣을 필요가 없다.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 본 구절은 골 1:15-17과 더불어 바울이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묘사한 독특한 표현이다. 그런데 혹자는 본 구절을 의도적으로 변형시켜 '저는 만물 위에 계시면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그 하나님께 속한 자이시다'(Who belongs to God over all, blessed for ever)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이단으로 낙인찍힌 소시니안파(Socinianist)의 견해에 가까운 해석에 불과하다(Black).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바울의 이해는 사도 요한의 그것과 내용상 차이가 없다(1:1-5, 10). 한편 본 구절은 '만물 위에 계신 하나님께 세세에 찬양이 있으리로다 아멘'과 같은 송영(doxology)으로 해석될 수도 있으나 형식상으로 다른 송영과 비교할 때 송영이 아니라 분명히 주장을 내세우는 진술이다(Barmby). 아무튼 바울은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신성을 언급함으로써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그리스도가 신적 권위를 지니고 있는 구세주이심을 강조하고 있다.
 
성 경: [9:6]
주제1: [유대인의 구원문제]
주제2: [약속의 자녀]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 바르트(K. Barth)는 본절과 관련된 주석에서 현재의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불완전하기 때문에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시킬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여 선포하는 즉시 하나님의 말씀은 그 참됨을 상실해버린다는 것이다. 이러한 바르트의 주장은 일견 일리가 있는 듯이 보인다. 하나님의 말씀 자체는 인간의 언어에 의해 제한되거나 왜곡될 수도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뜻을 완전하게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바르트의 생각은 인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계시를 너무 과소 평가한 데서 비롯되었다. 하나님의 계시는 인간이 구원받는 데 필요 충분하며 인간은 미약하지만 성령께서 일깨워 주시는 깨달음을 통해 완전하지는 못하지만 그 계시를 이해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시가 기록된 말씀으로 불충분하고 그 진리성이 의심된다면 인간은 무엇을 기준으로 하나님의 완전한 뜻을 살필 수 있는가 ?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은 제한된 인간의 언어로 기록되었으나 완전하다. 본절에서도 사도 바울은 실패한 이스라엘 백성으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지지 않음을 강조하고 있다. 즉 이스라엘에 주어진 율법과 약속이 문자적으로 이스라엘에 성취되지 않았다고 하나님이 실패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이미 3:3-6에서 바울이 취급했던 것이지만, 본장에서는 다시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관련하여 보다 자세하게 언급될 필요가 있었다. 즉 이스라엘이 실패했다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구원 섭리 속에는 온 인류에 대한 계획이 포함되어 있었고 이스라엘은 구속사의 전개 과정에서 모형적 선민으로 선택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혈통적 특권 의식에만 젖어든 채 그 구원 섭리를 잘못 이해하여 자기들의 역사에 그릇되게 적용시켰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 머레이(John Murray) 본 구절을 압축하여 그들이 모두 이스라엘이 아니라고 표현하다.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 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는 것으로 '이스라엘에게서 난'이란 표현이 족장들의 혈통적 후손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Murray, Harrison, Kasemann). 즉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가 혈통적인 이스라엘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영적인 이스라엘에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바울의 진술은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납득되기 어려운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한편 본 구절의 첫번째 '이스라엘'을 반드시 야곱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그 이유는 다음에 이어지는 구절들에서 바울은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 모두에 대하여 진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 경: [9:7]
주제1: [유대인의 구원문제]
주제2: [약속의 자녀]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 본절은 6절 후반 구절 내용의 정당성을 입증하고 반증하기 위한 설명이다. 이는 본절의 초두에 있는 '또한...아니다'를 가리키는 부정사 '우드 호티'(*)가 앞절(6)'...아니요'라고 번역된 부정사 '우크 호티'(*)와 논리적인 연속성을 갖고 있는데서 더욱 확인된다(Dunn). 본 구절에서 ''(*, 스페르마)'자녀'(*, 테크나)는 본절 전체에 대한 해석을 좌우한다. 먼저 이 문장에 대한 대부분의 역본들은 '그들이 아브라함의 씨이기 때문에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번역한다(RSV, NEB, NIV, NJB). 여기서 '아브라함의 씨''그의 자녀'에 대한 주석가들의 의견은 다음과 같다. (1) '아브라함의 씨''자연적, 혹은 육체적 후손'을 가리키며 '그의 자녀'란 약속을 좇아서 난 참된 이스라엘, '믿는 자'를 말한다(Hendriksen, Murray). (2) 이스마엘과 이삭은 다 아브라함의 씨였지만 여기서 말한 '자녀'는 이스마엘을 제외한 약속의 자녀인 이삭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선택과 구원이 육신적인 혈연에 의존하지 않음을 보여준다(C.K. Barrett, Calvin).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 이것은 창 21:1270인역(LXX)에서 문자적으로 인용한 것이다. 여기서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알 엔 이사악), 문자적으로 '오직 이삭 안에서'라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오직 이삭 안에서'란 무슨 의미인가 ? 여기서 ''(*)은 제한적 의미를 가진 전치사로서 '...으로부터만'이라는 뜻이다(Dunn). 따라서 이 말은 이삭을 통해서만 아브라함의 참 자녀라는 이름과 지위를 가지고 약속의 후사로 인정될 후손이 나오리라는 의미이다(Meyer). 그런데 바울 사도가 여기서 왜 유달리도 '오직 이삭으로부터'란 말을 강조했을까 ? (1) 언약의 후손에 참여할 수 있는 범주를 이삭으로부터 시작한 그 후손으로만 제한하는 의미이다. (2) 이스마엘이나 다른 형제들과는 달리 이삭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자식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한편 여기서 ''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자녀로(17:16;11:17, 18) 이 씨의 최종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따라서 앞 구절에서 사용된 ''가 제한된 범주로 해석된 반면에 본 구절에서 사용되 ''는 앞 구절 '자녀'(*, 테크나)와 같은 것으로 아브라함의 혈통을 통한 이스라엘 민족을 뛰어 넘어 믿는 자 누구든지를 포함한다는 의미에서 보다 광범위한 의미를 지닌다. 또한 '칭하리라'고 번역된 헬라어 '클레데세타이'(*)는 창 21:12에 나오는 '칭할 것임이니라'는 말씀과 동일한 관용구로서 3인칭 단수 미래 수동형이다. 이 뜻은 '이름이 주어지다', '선택되다'이다(Dunn).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로 아브라함의 참된 씨라 일컬음 받은 계열에 설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에 의한 일방적인 은혜로 되는 것임을 '수동형'이란 점이 잘 나타내 주고 있다. 따라서 이스마엘이 서출(庶出)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씨가 되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은 매우 인간적이고 단순한 발상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선하신 뜻대로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12족장과 유다의 계열을 택하셔서 아브라함의 씨라 칭해질 계통을 정하신 것이다. 또한 이 동사가 미래형으로 쓰인 것은 아브라함의 약속의 자녀인 이삭을 시작으로 하여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은 영적 후손이 역사의 과정을 통해 일어날 것을 암시하고 있다.
 
성 경: [9:8]
주제1: [유대인의 구원문제]
주제2: [약속의 자녀]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 본절은 앞 구절들(6ff.)에 대한 부연 설명으로 이스라엘이 아브라함의 생물학적 혈통에서 태어난 자녀라고 해서 모두가 정당한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되는게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는 문장 구조에서 더욱 잘 나타나는데, 앞 구절(3)과 마찬가지로 본절에서도 '오직'에 해당하는 헬라어 '알라'(*)로 연결되어 앞뒤 문장을 대치시키면서 뒷문장을 강조해주는 형식을 취한다. 따라서 본 구절은 앞절에서 언급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는 것과 연결된다. 즉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자녀는 약속의 자녀라는 것이다. 본 구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약속'에 의한 것임을 보여 주는데, '약속'(*, 에팡켈리아)의 개념은 4장의 진술을 강력하게 반복하는 것으로 보인다(4:13, 14, 16, 20). 바울은 이러한 진술을 통해 그 약속이 모든 사람에게 균등하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특별히 인정된 자들에게만 적용됨을 보여준다(Calvin). 약속의 자녀라고 할 때에 그 '약속'이라는 것이 과연 하나님의 '예정'과 연관되는지의 문제가 제기된다. 이에 대하여 혹자는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한다. 즉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라는 것으로 어떤 사람은 그 약속의 범주에 넣고 어떤 사람은 제외시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즉 모든 약속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졌으며 누구나 믿음으로써 그 약속이 제시하는 것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근거로 갈 3:26과 바울이 이방인 신자들도 그 약속 안에 포함시켰다는 것을 제시한다. 즉 약속이 모든 자연인에게 주어지지 않고 일부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의한 택자(澤子)들에게만 주어졌다면 어떻게 이방인들이 그 약속의 범주안에 들어 올 수 있었겠는가하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적 예정 안에 들어있는 사람들만이 그 약속을 약속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실로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예정을 가지고 계시며 그 택자들에게 약속의 능력으로 믿음을 선물로 주셔서 약속의 자녀가 되게 하신다. 다만 인간들은 그 예정이 구체적으로 누구에게 적용되어지는 것인지를 확실히 알고 있지 못할 뿐이다.
 
성 경: [9:9]
주제1: [유대인의 구원문제]
주제2: [약속의 자녀]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라 - '약속'(*, 에팡겔리아스)이라는 단어를 의도적으로 앞으로 두어서 강조하고 있다. 즉 이삭이 하나님의 약속에 의한 아들이고 이스마엘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 주려고, 또 다른 성경의증거를 들어 제시한다. 이는 6절에서 언급한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지지 않았다는 진술로 되돌아간다. 그런데 혹자는 이것이 약속의 아름다움과 순수성을 언급하려는 것이지 약속의 자녀로서의 '이삭'과 육신의 자녀로서의 '이스마엘'을 대조 시키려고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Lenski). 그의 주장대로라면 누구에게나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에 인간들이 믿음이라는 것으로 반응함으로써 그 약속의 대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삭의 선택은 육신적인 혈통에 의한 것도 어떤 공로에 의한 것도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다(E.M. Braiklock).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은 그가 태어나기 전에 그에게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과 특별한 배려로 이삭이 태어났다. 아브라함은 무능력했으며 사라는 이미 아기를 가질 수 없었음을 볼 때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말미암았음이 더욱 분명해진다(Harrison).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 본 구절은 구약의 인용인데, 바울은 구약을 인용함에 있어서 문자 그대로 인용할 때도 있지만(3:4) 자유롭게 인용하기도 하며(3:10-19) 단순한 암시만 하기도 한다(20, 21). 본절은 70인역의 창 18:10, 14을 자유롭게 취사 선택(取捨選擇)하여 인용하였다(Godet, Robertson, Braiklock, Matthew Henry).
 
성 경: [9:10]
주제1: [유대인의 구원문제]
주제2: [약속의 자녀]
이뿐 아니라 - 바울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의 말씀이 단산(斷産)된 사라에게서 성취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 이삭에게서도 성취 되었음을 증명하려 한다. 이러한 사실은 나이 많아 폐경된 사라에게서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이 약속 안에서 성취된 것과 같이 또 다른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이 외부의 조건에 영향을 받지 않고 선택되었음을 나타낸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 혹자는 이삭과 이스마엘 중에 선택되고 하나는 유기(遺棄)된 것이 그 외부적 환경에 의해 결정된 것이라고 한다. 즉 하나는 종의 자녀이며 하나는 주인의 자녀이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선택과 유기가 순수한 하나님의 주권에 의하여 결정된 것이라기보다는 외부적인 신분에 의하여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똑같은 환경과 신분 속에서도 하나는 선택되고 하나는 유기된 실례를 제시함으로써 다시 한번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을 강조한다. 그것은 한 아버지와 한 아내의 태 속에서 잉태된 쌍둥이의 선택과 유기이다. 이삭과 이스마엘은 그의 어머니와 같은 아버지, 그 뿐만 아니라 같은 날 잉태되어 같은 날 태어나게 된 동일한 환경과 신분을 소유한 자들이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는 서로 다른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의 약속이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리브가에게도 주어졌으며(J. Calvin) 그의 약속은 육신적 후손에 의하여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약속의 후손에 의하여 완전한 하나님의 선택으로 성취됨을 보여준다.
 
성 경: [9:11]
주제1: [유대인의 구원문제]
주제2: [약속의 자녀]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 - 이들은 육체적으로 쌍둥이라는 합법적인 조건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선악을 구별할 수도 없는 무능력한 조건 속에 있다. 바울은 태어나기 전 상태의 동일함을 제시함으로써 그들을 선택한 하나님의 주권을 더욱 선명하게 강조한다. 한편 나지도 아니한 때에 선택했다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선택이 태어날 자의 행위에 근거할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자신의 능력으로 이들이 태어나기 이전에 이미 그들의 행위가 선택받기에 합당할 것인지 불합당할 것인지를 알고 있었다는 주장이다(J. Calvin). 결국 그들의 주장은 선택이 행위로 말미암아 된 것이라는 결론이다. 그러나 본절은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을 강조하고 있음을 주시해야 한다. 보다 분명하게 뒤에 나오는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라는 표현이 이를 반증한다. 바울은 지금 한 사람이 아무런 조건도 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된 역사적 사실을 제기함으로써 혈육의 관계를 떠나 많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선택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동시에 증거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아무런 조건도 없이 선택하신다 라는 말이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한 은혜를 필연적으로 베풀어야 할 의무가 있다라는 뜻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선택과 유기는 하나님의 약속과 긍휼에 근거할 뿐이며 하나님은 자신의 기쁘신 뜻에 따라 어떤 자들은 간과하며 또 어떤 자들은 선택하는 것이다(8:28). 야곱과 에서, 이들 두 사람이 모두 기도의 응답으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25:21) 이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의 절대적 권위를 더욱 선명하게 강조한다(1:11).
 
성 경: [9:12]
주제1: [유대인의 구원문제]
주제2: [약속의 자녀]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 바울은 창 25:23 중의 일부를 인용하고 있다. 창세기 본문에서 두 아들에 대한 계시는 바로 민족과 국가에 대한 주제로 전개되고 있다. 이로 인하여 본절에 사용된 '큰 자'(*, 호 메이존)'어린 자'(*, 토 엘랏소니)라는 표현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분분하다. 혹자는 창세기의 본문이 민족과 국가에 대한 예언으로 전개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출발은 분명히 개인에 대한 섬김이라고 주장한다(Hendriksen). 이를 주장하는 이는 창세기에 사용된 '국민'이라는 단어가 문자적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며 보다 근본적인 출발에서 개인에 대한 예언임을 주장한다. 또한 혹자는 이 예언은 에서와 야곱 개인들에 대한 예언이 아니라 그들의 후손인 에돔 족속과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예언이라고 주장한다(F.F. Bruce). 그는 증거로서, 에서는 그의 생애 중에 야곱을 섬기지 않았다는 점과 실제로 에돔 족속이 이스라엘이나 유다에 의하여 오랜 기간 동안 속박 되어 있었음을 제시한다(삼하 8:14;왕상 22:47). 실제로 야곱은 형으로부터 장자권을 빼앗은 이후에 형으로부터 섬김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도망다녀야 하는 더 큰 위험에 처하게 되었으며 또한 형에게 용서를 구해야 하는 궁지에 빠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본절에 대한 해설은 보다 포괄적인 의미에서 이해 되어져야 한다. 그것은 개인이나 민족 또는 후손에 대한 예언이라는 편협된 시각에서 벗어나 그들의 개인에서 출발한 예언이 궁극적으로 메시야 왕국 속에서 성취되었다는 통시적(洞視的)인 시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따라서 개인적인 생애 속에서 동생이 장자권을 이어 받는 것이나 에돔 족속이 속박되는 것으로 제한하기보다는 보다 큰 약속 속에서 예언의 의미를 찾는 것이 바람직하다(J. Calvin). 다시 말해서 이 예언은 장자권 양도와 에돔 족속의 속박 등과 같은 역사적 성취뿐만 아니라 메시야 왕국이 궁극적으로 불의로부터 승리할 것을 계시하고 있다.
 
성 경: [9:13]
주제1: [유대인의 구원문제]
주제2: [약속의 자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 바울은 말 1:2, 3을 인용하여 개인들에게 예언된 하나님의 주권이 어떻게 성취되어졌는가를 증명한다. 한편 여기서 야곱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도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에서에 대한 하나님의 미움을 감정적인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혹자는 셈어적인 개념을 가진 '미워하였다'(*, 에미세사)라는 말이 상대적인 개념으로 '덜 사랑하다'라는 의미를 갖는다고 한다(S. Jeremias). 따라서 여기서 사용된 '미움'이란 말은 단지 에서가 하나님께서 선택하시는 대상이 아님을 의미하고 있다(Harrison). 하나님은 에서와 그의 후손들을 자신의 특별 은총으로부터 제외시킴으로써 그들의 죄로 말미암아 영원한 형벌에 처하도록 작정하신 것이다(1:4). 바울은 역사적인 사실에 비추어 하나님의 사랑과 미워하심을 대조함으로써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가 또 다른 많은 백성들에게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명분과 기득권을 가진 유대 민족일지라도 하나님의 절대적이며 주권적인 섭리로 버려질 수도 있음을 경고한다.
 
성 경: [9:14]
주제1: [유대인의 구원문제]
주제2: [하나님의 주권]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 하나님은 에서를 유기하시고 야곱을 선택하실 때에 그들이 다 자랄 것을 기다리지 아니하셨다. 만약 하나님이 그들의 다 자람을 지켜보시고 또한 그들의 업적과 공로를 다 살피신 후에 선택과 유기를 하셨다면 진정한 선택과 유기의 의미는 상실되고 말 것이다(Harrison). 실로 하나님의 선택은 야곱의 행위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의 선택은 하나님 자신의 사랑과 목적에 기인하는 것이기에 어느 누구도 에서에 대한 불공평한 대우와 야곱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항변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만약 그들의 행위를 보고 하나님이 선택하신다면 야곱 조차도 결코 선택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야곱에게 있어서 축복은, 행위와 업적이 나타나기 전에 이미 약속의 씨로 선택되었다는 것에 더 큰 사랑과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와 선택의 축복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 본절에서 '불의'(*, 아디키아)는 그것이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것인지 또는 그의 행위를 지시하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그의 속성이나 행위에 있어서 '불의'할 수 없다는 것이다. 헬라어 '아디키아'는 어떤 규범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으로서 법적인 불의를 뜻한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보다 근본적인 근거에서 창조주의 의의 개념을 제시한다(20). 다시 말해서 그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그들을 선택하거나 유기하는 것은 양자 모두에게 불평등한 것이나 잘못된 것으로 이해될 수는 없다는 뜻이다.
 
성 경: [9:15]
주제1: [유대인의 구원문제]
주제2: [하나님의 주권]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 바울은 또 다른 역사적 사건 곧 이스라엘 백성과 모세를 선택하시고 애굽을 유기하신 사건을 통하여 다시 한번 선택의 절대 주권적 의미를 강조한다. 이에 대한 이해는, 바울이 인용한 출 33:19 당시 상황을 이해한 후에 그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보다 바람직하다. 모세는 하나님 앞에서 큰 은혜를 체험하였는데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고 우상을 숭배하는 큰 죄악을 범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멸망시키지 아니하시고 용서하신 점이다. 이에 대하여 모세는 하나님께 애굽을 용서하지 않으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 백성을 용서하셨는가에 대하여 그 근거를 제시해 줄 것을 요구한다(33:16, 18). 이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은 "나의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33:19)였다. , 하나님 자신의 기뻐하시는 뜻 외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는 '스스로 있는 자'로서 그 어떠한 외부적인 환경과 조건에도 구애됨이 없이 스스로 결정하신다. 따라서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은총을 베푸시고 선택하는 것은 자신의 뜻이라는 '작정' 외에 또 다른 이유는 없는 것이다(J. Calvin). 그러므로 출 33:19의 내용을 인용하여 인간에게 내려지는 구원의 은총이 인간의 노력이나 공적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와 자비에 의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만약 하나님께서 값없이 은혜를 주시지 않았다면 인간은 아무도 하나님의 축복(구원)을 누릴 수가 없다. 이처럼 하나님의 구원사적 섭리는 결코 값주고 살 수 없는 절대적인 은혜인 것이다.
 
성 경: [9:16]
주제1: [유대인의 구원문제]
주제2: [하나님의 주권]
원하는 자로...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 '원하는 자'(*, 델론토스)'달음박질하는 자'(*, 트레콘토스)는 앞에서 언급된 에서와 야곱뿐만 아니라 모세를 포함한 모든 인간들을 의미한다. 바울은 일반적으로 '트레코'(*, '달리다', '경주하다')라는 단어를 긍적적인 의미로서 고대 운동 경기의 승리자를 묘사할 때나(고전 9:24)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는 자신의 삶을 묘사할 때에 사용하였다(2:2;2:16). 그러나 본절에서는 보다 사실적인 의미로서 모세의 소원과 민족을 위한 노력들마저도 아무런 칭찬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하였다(Meyer). 아브라함과 모세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라도 자신의 경주로 구원을 이룰 자는 아무도 없다. 뿐만 아니라 달음박질조차도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
 
성 경: [9:17]
주제1: [유대인의 구원문제]
주제2: [하나님의 주권]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 여기서 다시 논리의 전개는 유기(遺棄)의 표본으로 세워진 바로에게로 넘어간다. 바울은 '성경'(*, 헤 그라페)을 의인화시킴으로 당시 바로에게 직접 행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주권적 의지를 보다 생생하게 상기시키고 있다(Bruce, Harrison).
내가...너를 세웠으니 - '세웠으니'에 해당하는 '여세게이라'(*)70인경에서는 '디아테레오'(*, '지키다', '보존하다')의 부정과거 수동태인 '디에테레데스'(*)를 사용하고 있다. 바울은 이것을 능동태 1인칭으로 바꿈으로써 하나님의 예정 의지를 보다 선명하게 강조하고 있다. 특히 70인경과는 달리 '여세게이로'(*, '내가 일으키다')를 사용하여 그 의미를 변형시킨 것은 단순히 70인경을 번역하지 않고 보다 원문에 가까운 뜻을 찾기 위함인 것 같다(Bruce). 하나님은 출애굽 당시의 바로를 단순히 존재케 한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의미에서 자신의 뜻을 위하여 하나님의 섭리 속에 남겨두셨다(Hendriksen. Harrison. Ridderbos). 역사상에 나타난 바로는 표면적으로는 이스라엘 백성을 압제하며 하나님의 백성을 점점 더 궁지로 몰아가는 악행을 범하였으나 오히려 하나님 구원을 더 영광된 것으로 만드는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J. Calvin). 하나님은 그를 믿고 섬기는 자들뿐 아니라 그를 대적하는 자들을 통하여서도 영광을 받으실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영광을 위하여 죄를 조성하였다고 판단 할수는 없다(6:1, 2 주석 참조). 본절의 핵심은 죄를 조성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인간들이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내 능력을 보이고...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다 - 하나님이 바로를 세우신 것은 하반절에서 보다 선명하게 드러났다. 하나님이 바로를 왕으로 세우셨을 뿐만 아니라 그의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명을 보존하신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시고 창조주의 권위를 만방에 알리시기 위함이다. '능력'(*, 뒤나민)'이름'(*, 오노마)은 서로 다른 단어로 사용되었으나 그 의미는 동일하다. 왜냐하면 눈에 드러나는 이적적(異蹟的)인 기사들은 하나님의 속성 곧 그의 이름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Kasemann). 실제로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바로의 압제로부터 해방시킨 사건은 그 이후에 다른 모든 민족들 앞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더 높이는 결과를 초래하였다(2:10, 11;9:9;삼상 4:8).
 
성 경: [9:18]
주제1: [유대인의 구원문제]
주제2: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 - 바울이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강퍅하게 되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긍휼을 입었다는 단편적인 사건이 아니다. 그는 지금 하나님의 행위는 자유롭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의 선택은 '원하는 자'(*, 델론토스)에 의하여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16) '그의 원하는'(*, 델레이) 바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다. 긍휼은 당신의 선하신 뜻대로 베푸시는 하나님 자신의 주권에 속하는 문제로서(20:15) 그의 판단은 인간의 거짓된 생각들과는 달리 항상 참되시며 공의로우시다(3:4). 따라서 바울은 본절을 통해서 하나님의 선택적 섭리에 대해서 결론을 내리면서 바로와 관련된 삽화를 종결시키고 있다.
강퍅케 하시느니라 - '그가 강퍅케 하셨다'(*, 스클레뤼네이)라는 표현은 '내가 너를 남겨 두었다'(*, 디아테레오)라는 표현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이는 하나님이 강퍅케 하도록 결정하셨다는 문자적 의미보다 그의 죄악과 본성대로 내버려 두셨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보다 바람직하다. 이것은 본서의 1장에 서술된 원리와 긴밀히 관계되어 있다(1:24, 26, 28, 32). 그는 스스로 마음이 완악해지고 또한 스스로 더 큰 죄악을 범함으로 인하여(7:14;8:19) 돌이킬 수 없는 심판에 이르게 되었으며 또한 그는 완고함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증명하는 도구로 사용되었을 뿐이다(17). 하나님은 그를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지도 아니하셨으며 또한 고의적으로 그의 죄악을 조성하지도 않으셨다. 그는 자신의 죄로 인하여 더 큰 죄와 완악함을 만들어 낸 것이다(A. Barnes).
 
성 경: [9:19]
주제1: [유대인의 구원문제]
주제2: [하나님의 구원 섭리]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 15-18절 사이에 기록된 내용은 본절과 같은 의문을 제기 시킬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이미 선택과 유기를 작정하시고 바로에게서 보는 바와 같이 죄인을 강퍅케 하시고 또한 그로 인하여 더 큰 죄에 빠지도록 버려두셨다면 어떻게 하나님이 죄인을 책망하며 흠잡을 수 있느냐라는 질문이다. , 유기된 책임이 하나님께 있지 않느냐하는 문제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구원이나 멸망을 예정하셨다고 해서 이것을 숙명론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인간의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가시적(可視的) 규범은 언제나 동일한 결론으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음을 기억해야한다(11:7, 11). 만약 인간이 하나님의 불가시적(不可視的)인 섭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판단 속에서 하나님을 판단한다면 그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 것이다(Hendriksen).
 
성 경: [9:20]
주제1: [유대인의 구원문제]
주제2: [하나님의 구원 섭리]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 '힐문하다'(*, 안타포크리노마이)라는 단어는 '시비하다' 또는 '계속하여 말대꾸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바울은, 반대자가 누가 '대적하겠느냐'(*, 안데스테케)라고 야유섞인 질문을 던지는 것에 대하여 단호한 입장을 취한다. 인간 존재는 하나님과 더불어 논쟁하거나 그의 뜻에 대하여 정당성을 요구할 수 없는 존재임을 기억해야 한다. 특히 이는 '감히'(*, 메눈게)라는 말 속에 더욱 선명하게 나타난다. 인간이 자신의 존재론적 위치를 망각하고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서 논쟁하며 법적인 항변(*, 안데스테케)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출발부터 잘못된 것이다(Lenski).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 바울은 사 29:16;45:9;18:1-10을 인용하면서 하나님과 동등자가 될 수 없는 피조물의 한계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창조자를 판단할 만한 지혜를 가지지 못한 피조물이 창조자에게 항변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18:4). 또한 하나님이 자신의 공의로우신 뜻을 따라 선택과 유기를 하는 것은 우리에게 숨겨져 있기 때문에 그의 선하신 뜻을 구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29:29). 따라서 사도가 하나님의 선택적 섭리를 다룬 후 하나의 가상적 질문을 제시한 19절에 대한 답변은 지음을 받은 피조물이 마치 전능자를 판단할 충분한 지혜를 갖추기나 한 것처럼 하나님께 항의를 하는 것은 부적당하다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사도는 다음절에서 토기장이와 진흙을 예로 들고 있다. 바울은 단지 이 비유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자신의 절대적인 권리와 능력에 따라 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의 결정에 대적할 수 없다는 것을 시사할 뿐이다.
 
성 경: [9:21]
주제1: [유대인의 구원문제]
주제2: [하나님의 구원 섭리]
진흙 한 덩이로...권이 없느냐 - 이것은 구약의 대표적인 두 선지자 이사야와 예레미야에 의해서 사용된 예화로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한 사상이 얼마나 중요한 가를 대변해 주고 있다(29:16;18:6). 아울러 토기장이와 질그릇의 관계처럼 인간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손길에 달려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우리는 자칫하면 '인간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 달려 있다면 인간의 노력은 전혀 무익한 것이냐'하는 존재론적 운명론과 하나님에 대한 원망에 빠질 위험에 봉착한다. 그러나 바울은 19, 20절에서 이에 대한 논리적 답변을 주기보다는 질문을 통해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의 바른 태도는 순종과 헌신임을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렌스키(Lenski)는 본절의 의미가 단지 천하게 만들어진 그릇이 토기장에서 항변할 수 없듯이 강퍅하도록 내버려진 자들도 항의할 수 없다는 의미로 사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본절은 보다 포괄적인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 따라서 하나님이 귀하게 만들었느냐 천하게 만들었느냐 하는 것에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일을 행하실 때에 자유하다는 사상, 즉 하나님의 주권은 무한한 자율성을 전제로 하고 있음에 강조점이 있다.
 
성 경: [9:22]
주제1: [유대인의 구원문제]
주제2: [하나님의 구원 섭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 바울은 토기장이의 비유로부터 한 단계 발전된 진술을 통하여 하나님의 선하신 의지를 논증한다. 죄인의 형벌에 대하여 기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바울은 자주 다른 표현으로 기록한다(2:4). 하나님은 죄인의 멸망을 고의적으로 조성하시지 않으신다. 그는 단지 오래 참으심과 긍휼을 베푸시는 일에 관여하신다. 특히 그의 인내심은 진노의 그릇이라 할지라도 회개할 기회를 제공하시며 또한 회개한 자를 기꺼이 용납하고자 하시는 증거이다(벧후 3:9). 따라서 본절에서 '멸하기로 준비된'이란 표현은 하나님의 인내와 긍휼을 끝내 무시하고 심판에 직면하는 죄인의 최종적인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Harrison), '준비된'(*, 카테르티스메나)이라는 말이 '완료 수동태'로서 누군가에 의하여 멸망이 '완료 수동태'로서 누군가에 의하여 멸망이 준비되었으며 그의 멸망의 때는 무르익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구체적으로 그 멸망을 준비한 자가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설령 그가 하나님이라고 할지라도 이는 죄인이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강퍅케한 행동에 대한 형벌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Hendriksen).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멸망의 도구가 아니라 스스로 범죄한 죄로 인하여 멸망될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들이라고 할 수 있다(Bruce). 그러므로 왜 누구는 택하시고 안 택하시느냐 ? , 택함을 받지 못한 것은 누구의 책임이냐?를 하나님께 묻는 것이 잘못된 논리에서 나온 것이다. 즉 하나님은 모두가 죄인인 상태에서 멸망할 수 밖에 없는 자들을 오로지 당신의 사랑으로 마음에 합당한 자를 일부 구원하신 것이지 근본적으로 누구는 조금 낫고 누구는 조금 못한데도 불구하고 불평등한 처사를 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구원받는 자가 있는 것은 하나님의 무한한 긍휼을 오고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는 것이고(2:7) 반면에 멸망당하는 자가 있는 것은 하나님이 버리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본래 죄값으로 멸망함을 나타낸다. 따라서 문제의 근원은 죄인인 인간편에 있음을 보여준다.
 
성 경: [9:23]
주제1: [유대인의 구원문제]
주제2: [하나님의 구원 섭리]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 본절은 22절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양쪽에 사용된 상징적인 표현들의 의미는 서로 다르지만 그들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는 동일한 원리로 작용하였다. 다시 말해서 진노의 그릇들을 오래 참으시고 관용하신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는 것에 목적이 있었지만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오래 참으시고 관용하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부요(富饒)함을 알게 하고자 하는데 목적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양자 모두를 참으시고 관용하신 것은 동일한 하나님의 섭리였으나 그들이 초래한 결과는 전혀 다른 신분을 만들고야 말았다. '긍휼의 그릇'들은 '진노의 그릇'과는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의 풍요함을 인하여 구원의 기쁨을 알게 되었으며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성취를 경험하게 되었다(8:30). 따라서 본절의 '영광'은 개인의 구원에 관계된 하나님의 은혜일 뿐만 아니라 민족과 개인을 포함한 모든 인류를 죄의 타락으로부터(3:23)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본질적인 속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Hendriksen, Barmby).
 
성 경: [9:24]
주제1: [유대인의 구원문제]
주제2: [하나님의 구원 섭리]
이 그릇은 우리니...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 바울은 은혜의 충만함이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인류에게 임하였음을 선언하다. '긍휼의 그릇'23절에서 '진노의 그릇'이 완고한 유대인들을 칭하는 상징적인 의미로 사용된 것과는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문이 모든 이방인에게도 열려 있음을 시사한다. 23절의 '예비하셨다'(*, 프로에토이마센)에서 암시된 약속은 '부르셨다'(*, 에칼레센)라는 선언 속에서 성취되었다. 특히 바울이 유대인들을 전체로 묘사하지 않고 '중에서'라고 표현한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의 유효적(有效的) 소명으로서 참 이스라엘에게만 적용되는 것임을 시사한다(6;2:28, 29;11:5, 7). 또한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참 이스라엘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부르심을 받은 유대인들과 함께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보편적 교회의 일원으로 세우심을 받는다(Hendriksen). 결국 바울은 '긍휼의 그릇'이라는 개념을 통해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을 초월하여 오직 성령의 내적 소명에 의해서만 형성되어지는 참 이스라엘, 즉 우주적 교회를 제시하려 했던 것이다(1:13-16;2:10, 11;3:22-24, 30;4:11, 12;8:32;16:26;3:9, 29;2:14-18).
 
성 경: [9:25]
주제1: [유대인의 구원문제]
주제2: [하나님의 구원 섭리]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 바울은 이방이 유효적 부르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되는 것을 호 2:23을 인용하며 논증한다. 보다 엄밀한 의미에서 호 2:23은 이방인에 대한 예언이 아니라 고멜의 방탕과 같은 죄와 형벌 속에 처해 있는 이스라엘 민족이 다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로 회복되기를 상징하는 의미로 쓰여진 것이다. 호세아는 고멜의 방탕중에 잉태한 네 자녀의 이름 중 두 자녀의 이름을 '로루하마'(이스라엘 백성을 긍휼히 여겨 사하지 않을 것)'로암미'(내 백성이 아님)라는 상징적 의미로 지음으로써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함을 묘사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다시 긍휼을 베푸시기를 원하셨다(F.F. Bruce).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을 바울이 초대 교회의 이방인 성도들에게 적용시키는 것은 당시 교회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던 것 같다. 베드로도 벧전 2:10에서 호 2:23을 이방 신자들에게 적용시키고 있는데 이와같은 적용은 하나님의 회복과 구원의 원리가 모든 인류에게 동일하게 적용되었음을 시사한다(Hendriksen). 하나님은 이방인들을 불러 그의 백성이 되기를 원하신다(3:22).
 
성 경: [9:26]
주제1: [유대인의 구원문제]
주제2: [하나님의 구원 섭리]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 본절은 호 1:10의 인용으로 혹자는 앞절과는 달리 본절이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에게 적용되는 예언이라고 주장한다(Barmby). 즉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이해할 때 이 호세아서의 예언이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 등에 흩어져 있었던 유대인들에게서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 원리가 이방인에게나 유대인들에게 동일하다는 것을 생각할때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이방인이나 유대인들을 하나님의 아들로 부르시는 것은 동일한 예언속에 포함되어 있는 사실이지만 본절은 특별히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Hendriksen. Harrison). 이방인들뿐 아니라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도 보편적인 교회의 일원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성 경: [9:27]
주제1: [유대인의 구원문제]
주제2: [하나님의 구원 섭리]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 바울은 하나님의 약속은 무효화되지 않았으며 유대인들도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원을 얻게 될것이라고 논증한다. 그러나 이방인들이 창조자의 영광 속에서 그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고 묘사된 반면(22) 유대인들은 남은 자만 구원을 얻는다고 묘사돼 있다. 유대인의 구원은 더 이상 민족 단위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즉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는 구원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수많은 야곱의 자손 중에서도 그의 선하신 뜻에 의하여 남겨진 자들만이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Kasemann). 사실 바울이 인용한 이사야의 글은(10:22, 23) 당시 이스라엘의 위치 속에서 백성의 보존을 예언한 글이다. 이는 역사적으로 앗수르에 멸망한 이스라엘 중에 남은 자들만이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하지만 그 궁극적 의미는 하나님의 자녀의 자리를 떠난 이스라엘 유대 민족 중에 여호와의 능력을 의지한 자들만이 구원을 얻게 될 것을 시사한다(Hendriksen). 따라서 '남은 자'에 대한 이사야서의 예언은 구별된 유대 민족들 중에서도 연단(鍊鍛)의 심판을 통해 그 수효가 감소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Harrison) 또한 하나님의 긍휼과 신실성을 더 크게 나타내는 구약의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은 예서 더 큰 구원의 약속을 발견한 것이다.
 
성 경: [9:28]
주제1: [유대인의 구원문제]
주제2: [하나님의 구원 섭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 10:23에 대한 인용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의지가 반드시 실현될 것을 표명한다. 이는 '남은 자'의 구원이라는 사상 속에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이 성취될 것도 포함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다시 말해서 앗수르를 사용하셔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고 그 중에 남은 자를 회복하신 것과 같이 완악한 유대인들에 대한 구원과 심판도 절대적으로 성취될 것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성 경: [9:29]
주제1: [유대인의 구원문제]
주제2: [하나님의 구원 섭리]
씨를 남겨두지 아니하셨더면...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 소돔과 고모라는 구약성경에서 그 성민들의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철저히 멸망당한 대표적인 성읍들이다(18:20;19:23-28;29:23;50:40;4:11). 본절에서 유대인의 멸망을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에 비유한 것은 유대인들이 완악함으로 인하여 심판받게 될 것임을 경고하기 위해서이다.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께서 완악한 유대 민족을 소돔과 고모라와 같이 완전히 멸망시키지 아니하시고 ''를 남겨두신 것은 그분의 긍휼과 은혜로 말미암은 것임을 주장한다. 이것은 역사적 사건 속에서 앗수르의 침략으로 인하여 완전히 멸망받을 수밖에 없는 당시 상황을 묘사한 것이나 보다 강조점을 두고 보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러한 상황 속에 적은 자를 남겨 두셨다는 사상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씨, '남은 자'(the remnant)들을 남겨두시지 않았다면 그들은 선민(選民)임을 고사하고 제 2의 소돔과 고모라가 되어 저주받은 민족의 대명사가 되었을 것이다. 이것이 선민이라고 자처하며 구원의 독점성을 주장하던 이스라엘의 적나라한 실상이다.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과 죄악의 심층부에 자리한 소돔 고모라 사이의 윤리성을 사실상 백지 한 장 차이도 안 되었다. 그러기에 더욱 하나님의 긍휼과 인자하심이 돋보이는 것이다.
 
성 경: [9:30]
주제1: [유대인의 구원문제]
주제2: [행위로 의를 추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 이 표현은 14절에서도 사용되었으나 그 의미는 동일한 것이 아니다. 14절에서는 의문을 제기하는 반대자들의 논리를 반박하는 의미로 쓰였으나 본절에서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역설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나니 -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철저한 율법 속에서 의의 성취를 기다렸던 유대인들이 버림받고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은 것은 인간의 죄악을 무시하고는 이해가 되지 않는 문제라고도 할 수 있다. 즉 전적으로 타락한 죄인된 인간은 복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새로운 변화를 받을 때에 구원을 얻게 된다. 그런데 이 변화는 오직 믿음에서 난 ''로만 가능하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섭리는 흑암에 거하던 이방인들 속에서 복음으로 나타났으며 이는 그들의 믿음으로 성취되었다. 이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믿음에서 난 의요 - 이방인들이 의를 추구하지 않았다는 표현은 이방인 속에는 어떠한 윤리와 도덕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은 이방인들이 유대인들 보다 못한 윤리 의식을 소유하고 있었다거나 또는 절대적 진리를 추구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도 있겠으나 그 ''의 개념은 윤리와 도덕이 아닌 구원의 개념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Kasemann). 유대인들이 ''의 성취를 위하여 그토록 노력하였으나 ''의 성취는 불행하게도 이방인 가운데서 성취되었다. 사도는 이것은 믿음에서 난 것이라고 주장한다. 복음에 순종하는 자가 약속의 자녀요 의의 자녀로 부르심을 입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었다. 믿음으로 인해 그들은 의로 여기신 바 되었던 것이다(3:28, 30).
 
성 경: [9:31]
주제1: [유대인의 구원문제]
주제2: [행위로 의를 추구]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 이스라엘의 실패는 율법을 지킴으로써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을 곡해하여 잘못된 의를 추구한 데 있다(10:2). 유대인들은 누구보다도 열심히 의를 추구하였으나 율법을 그릇된 방법으로 해석함으로써 하나님의 의와는 동떨어진 개인의 공로와 업적을 자랑하는 육신의 법으로 전락시켜 버렸다. 그러나 개인의 의를 자랑하는 육신의 법으로써는 의를 성취할 수가 없다. 오히려 율법의 의는 육체의 법을 좇지 않고 영을 좇아 행하는 자들 속에서 성취되었다(8:4). 한편 바울은 '좇다'(*, 디오콘)라는 단어를 경주(競走)와 같은 의미로 사용하여 유대인의 열심있는 경주는 결국 이방인들에게 승리를 빼앗기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역설적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Harrison). 이방인의 승리는 그들이 영적, 도덕적으로 타락한 가운데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은혜와 믿음으로써 의가 주어졌다는 칭의를 증거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의지하지 않고 의를 추구한 이스라엘의 행위가 얼마나 쓸모없는 것임을 폭로한다.
 
성 경: [9:32]
주제1: [유대인의 구원문제]
주제2: [행위로 의를 추구]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 이 인용문은 사 28:16, 8:14의 내용이 복합되어 이루어진 말씀이다.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초 돌이라 그것을 믿는 자는 급절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28:16). "그가 거룩한 피할 곳이 되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거치는 돌, 걸리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 거민에게는 함정, 올무가 되시리니"(8:14). 바울은 이 두 구절의 핵심을 매우 능숙한 솜씨로 배합하여 한 문장으로 인용한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 보아야 할 사실은 사 8:14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씀인 '거치는 돌'이 바울의 인용문에서는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민으로 모든 특권을 누리던 이스라엘에게 제시된 복음은 거치는 돌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사야는 앗수르의 침략 속에서 그들에게 구원으로 제시된 하나님의 손길을 반석으로 묘사하고 있다(8:13-15).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은 반석으로 인하여 구원을 얻게될 것이며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다른 나라의 도움을 구하는 자는 오히려 그 반석으로 인하여 넘어지고 부러질 것이라고 예언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로 제시된 복음은 완고한 유대인들에게 거치는 돌이 되고, 넘어지는 돌이 되었다(Bruce).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능력과 행위의 율법을 자랑함으로써 스스로 함정과 올무에 빠지게 된 것이다. 행위를 자랑하고 말씀과 복음에 순종치 아니한 유대 민족들은 그들에게 제시된 구원과 십자가를 오히려 그들을 넘어지게 하는 거침돌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벧전 2:8).
 
성 경: [9:33]
주제1: [유대인의 구원문제]
주제2: [행위로 의를 추구]
내가 부딪히는 돌과...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 ''(*, 페트란)은 시편 118:22에 기록된 '버린 돌'과 사 28:16에 기록된 '시온의 기초 돌'로서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킨다(20:17). 이것은 또한 단 2:34절에 기록된 '손으로 하지 아니하고 뜨인 돌'로 이는 세상의 심판자이신 그리스도를 상징하기도 한다. 하나님이 시온에 두신 돌은 멸망과 저주를 선포하는 돌이 아니라 구원과 영광을 선포하는 피난처이었으나 유대인들은 이 돌을 거침돌로 만듦으로서 스스로 저주와 멸망 가운데 처하게 되었다(고전 1:18, 23). 그들은 행위와 그리스도라는 양자 택일의 선택에서 행위를 선택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게 되었으나 십자가는 오히려 그들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소망이 되었다(Harrison). 여기서 바울의 결론은 더욱 선명하게 나타난다. 그는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누구를 막론하고 십자가를 의지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의를 찾으려 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않을 것이라고 강조한다(Hendriksen). 믿음 안에서 복음에 순종하는 자는 피난처이신 시온의 반석 안에서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
 
성 경: [10:1]
주제1: [이스라엘의 불순종]
주제2: [하나님의 의와 자기 의]
형제들아 - 1:13 주석을 보라.
내 마음에 원하는 바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구절은 '헤 멘 유도키아 테스 에메스 카르디아스'(*)이다. 여기 쓰인 ''(*, '한편')은 주로 ''(*, '그러나', '또 한편')와 같이 쓰여서 달리 내용을 구별할 때나 반대되는 내용이 전개될 때 사용된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와 상관없이 쓰여서 내용이 계속됨을 나타낸다. , 본문은 9:33에 이어진 것으로 '내 마음'을 표현한 '에메스 카르디아스'(*)'에메스'('나의')''(*, '나의')보다 더 강한 표현이다. 이는 바울의 안타까운 심경(心境)을 드러낸다. '원하는 바'에 해당하는 헬라어 '유도키아'(*)는 단순히 '바라는 것'이나 '원하는 것'이라는 표현이라기보다 '기뻐하는 것'의 표현이다. 이 단어에서 바울의 마음에서부터 우러나는 사랑하는 마음을 살펴볼 수 있다.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 '구하는 바'의 헬라어 표현은 '데에시스'(*), '간구하는 것'이며 이는 '기도하는 것'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슈케'(*)와 구별되는 강한 표현이다(6:18). 따라서 본문에 쓰인 ''(에메스) '원하는 바'(유도키아), '구하는 바'(데에시스)등은 이스라엘에 대한 바울의 간절한 호소와 간구를 담은 강한 어조의 표현들이다.
구원을 얻게 함이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에이스 소테리안'(*)으로 구원을 향한 마음이 목적이나 방향을 나타내는 전치사 '에이스'에 담겨 있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불순종에 대해 확실히 언급했지만 동시에 동족에 대한 안타까움과 슬픈 마음 또한 애타게 호소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한 바울의 열망은 행 13:46에 잘 나타나 있다. 이런 간절한 마음은 신자들 모두에게 필요한 것으로 불신자들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다.
 
성 경: [10:2]
주제1: [이스라엘의 불순종]
주제2: [하나님의 의와 자기 의]
내가 증거하노니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마르튀로'(*)는 공적(公的)인 책임감과 엄숙함을 내포한 단어이다(Cranfield). 바울은 하나님께 대한 이스라엘의 열심을 개인적인 감정에 앞서 엄숙히 공적으로 증거하고 있다.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 '하나님께'에 해당하는 헬라어 '데우'(*)는 목적격, 소유격으로 '하나님을 위한'이나 '하나님에 대한'으로 해석해야 한다. '열심'을 표현하는 헬라어 '젤론'(*)은 특히 '하나님의 영광'이나 '성전', '율법'에 대해 충성하는 그런 열심을 나타낸다(왕상 19:10, 14;왕하 10:16;69:9). ,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과 성전, 율법들에 대해 대단한 열성을 가졌다. 바울 역시 유대교에 심취했던 사람으로(1:14) 누구보다 유대교에 열성이었으므로(26:5) 이스라엘의 열심에 대해 바르게 판단할 수 있었으며 동정하는 마음에서 책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 이는 하나님께 열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열심이 비난받은 이유이다. '지식'을 나타내는 헬라어 '에피그노시스'(*)'지식'을 표현할 때 일반적으로 쓰이는 헬라어 '그노시스'(*)보다 훨씬 강조된 표현이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있어 하나님이 실제(實在)하는 것 이상은 몰랐다. 즉 그들은 구원을 주는 지식(1:17)을 결여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지식이 결여된 그들은 보아도 참으로 알지 못했으며 들어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4:12). 그들의 완고한 마음과 고집은 오히려 우매하게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로막았다. 역설적으로 그들의 열심은 하나님을 바로 아는데 도리어 방해가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열심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께 대한 바른 지식, 즉 구원을 주는 지식에 의해서 수반되어야 함을 지적하는 말이다.
 
성 경: [10:3]
주제1: [이스라엘의 불순종]
주제2: [하나님의 의와 자기 의]
바른 지식이 없는 유대인들이 추구한 것은 '하나님의 의'가 아닌 '자기 의'였다. 원인을 이끄는 문장 서두의 '가르'(*, '왜냐하면')'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2절 후반부의 설명을 이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 '하나님의 의'(*, 투 데우 디카이오쉬넨)는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속성으로서의 ''라기보다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으로 이뤄지는 의, 즉 칭의(稱義)를 말한다. 신약에서 나오는 ''(Righteousness)는 주로 계약 관계를 전제로 한다. 계약을 수립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계약에 인간을 참여케 하시고 그 중간에 그리스도를 두셨다. ,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을 통하여 그것을 믿는 인간들을 '의롭다'하시기로 계약을 수립하신 것이다. 따라서 이 계약에 참여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예수를 믿음이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인간 스스로 이룰 수 없는 ''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셨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세우신 의의 길을 불순종하여 예수 그리스도로 믿기를 거부했던 것이다. 여기서 '모르고'(*, 아그노운테스)'하나님의 의'에 대해 지식이 없었으므로 기인된 '오해'를 의미한다(Meyer).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열심은 있었으나 바른 지식이 없었으므로 자신의 의를 통해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는 전적으로 이스라엘의 오해였다.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 '세우려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테사이'(*)'세우다', '정하다', '확증하다'의 뜻이 있다. '하나님의 의'에 맞서 '자신의 의'를 세워 불순종한 것을 나타낸다. 여기서 '힘써'로 번역된 헬라어 '제툰테스'(*)는 현재 분사형으로 '자기 의'를 세우려고 계속 애써 온 것을 나타낸다.
 
성 경: [10:4]
주제1: [이스라엘의 불순종]
주제2: [하나님의 의와 자기 의]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 이스라엘 백성에게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었던 예수 그리스도는 '칭의'의 근원이며 이유이다. , 의를 이루는 유일한 길이다. '모든 믿는 자에게'란 말은 뒤에 나오는 '율법의 마침'을 한정시키는 말로 '율법의 마침'은 그 목적이 의를 이루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의'는 유대인을 넘어서서 '모든 믿는자', 모든 민족에게 영향을 미친다. 즉 그리스도의 의는 공평하여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의를 믿지 않는 자들은 유대인일지라도 멸망을 받으며 반면에 이방인일지라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실로 ''(*, 디카이오쉬넨)은 율법으로나 인간의 행위로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공로로 값없이 얻게 되는 것인데 유대인들은 이러한 칭의의 의를 끝까지 불신한 것이다.
율법의 마침 - 혹자는 여기서 '율법'(*, 노모스)은 구약의 율법이 아니라 일반적인 법이나 원리를 의미한다고 한다(Meyer, Sanday and Headlam). 또 혹자는 본문의 율법은 구약의 율법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 그런데 본문의 문맥(특히 9:31)에서 볼 때 여기서 율법은 구약의 율법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마침'을 가리키는 헬라어 '텔로스'(*)(1) 문제의 종결(end), 종료(termination) 혹은 (2) 목적(aim), 의도(intention), 목표(goal)등 양면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1)은 율법이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인해 모든 요구가 충족되었으므로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종결시켰다는 의미이다(13:10;Calvin, Erasmus, Lenski, Murray, Harrison). (2)는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실제 의미이며 목적과 의도하는 모든 것이라는 것이다(Hendriksen, Cranfield). 그 중 (1)이 더 타당하다고 보는데 이유인즉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향하는 그림자로서 그 역할을 하였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실체(實體)로 인해 그 기능이 종결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 율법은 하나님의 경륜(經綸)이 진행되는 어떤 과정에서 역사상에 주어졌던 것이고 이제 그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성취되었다는 의미이다.
 
성 경: [10:5]
주제1: [이스라엘의 불순종]
주제2: [믿음으로 얻는 구원]
모세가 기록하되 - 18:5에서 인용된 것으로 모세의 말이 인용된 것은 모세가 유대인의 율법을 세운 자였기 때문이다. 이기에서 모세는 율법을 지킴으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사상은 '사람이 준행하면 그로 인하여 삶을 얻을 하나님의 율례'라는 표현을 통하여 구약 여러 부분에 걸쳐 나타나고 있으며(9:29;20:11, 13, 21) 또한 신약에 넘어와서도 그 사상을 계승되고 있다(7:10;19:17;10:28;3:12). 하지만 문제는 누가 과연 이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있느냐 하는 데에 있다. 연약한 인생 중에서는 어느 누구도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없다(3:9-18). 오직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만이 자신의 생애와 죽음을 통하여 율법의 요구를 완전히 이루시고(8:3, 4) 자기를 믿는 자에게 구원을 보장해 주신 유일한 분이시다(5:8, 9). '기록하되'를 가리키는 헬라어 '그라페이'(*)6, 8절에 나오는 '말하되'의 헬라어 '레게이'(*)와 의도적으로 대조되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레게이''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강조한 반면 '그라페이''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6절 주석 참조).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 - '말미암은'의 헬라어 '에크'(*)'...에서 나온'이라는 뜻으로 그 출신을 나타낸다. '율법에서 난 의'는 율법을 행함으로써 얻는 의이다. 이는 9:31, 32에 나오는 '행위에서 나온 의의 법'을 말한다. 율법은 행함을 요구하며 죄를 알게 하기 위한 방편으로 나아가 하나님의 은혜로운 판결을 받는 길이었다(18:5;20:11, 13, 21;10:28). 따라서, 율법을 완전히 지키며 행할 것을 언급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죄성(罪性)은 율법을 완전히 수행할 수 없다. 결국 이스라엘은 의의 법을 좇아 갔지만 법이 요구하는데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9:31). 유대교의 구원 교리에 따르면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려면 율법이 구체적으로 성취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렇게 율법을 성취하여 그 공로로 말미암아 구원이 보장되고, 하나님으로부터 죄의 용서를 받게 된다고 보았다(Strack-Billerbeck). 그러나 율법은 한계를 가지고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법에 대한 약속을 하셨고(31:33) 오순절의 성령 보내심으로 성취되었다(2:28ff.). 따라서 이제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방편은 믿음이고, 믿음으로 구원이 보장되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심과 부활로 모든 율법의 요구를 이루시고 믿는 자들의 의가 되셨기 때문이다.
 
성 경: [10:6]
주제1: [이스라엘의 불순종]
주제2: [믿음으로 얻는 구원]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 본 구절은 앞절(5)'율법으로 말미암는 의'와 대조를 이루어 상대적으로 강조되어 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righteousness)가 나타났음은 바울의 종말론적(eschatological)이며 기독론적(christological)인 가르침의 기본 구조이다(Ridderbos). 그리스도의 죽음은 종말론적 측면에서 하나님의 심판이며 의롭다하는 판결의 표시이다. 옛 시대(old aeon)와 옛 사람이 이미 그리스도안에서 심판을 받았고 생명에 이르게 하는 새 창조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어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를 의롭게 했다.
이같이 말하되 - '믿음에서 난 의'를 의인화시켰다. 이런 수사법은 바울 당시 철학적 연설을 할 때 종종 쓰였다. 의인화 용법으로써 5절의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와 대조하여 '믿음에서 난 의'를 생생하게 표현한 것이다.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 본 구절은 70인역(LXX)의 신 30:12에서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본 구절은 구약적 문맥에 비추어 보면 율법을 행함으로써 하나님의 의롭다하심을 얻으려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하늘에 오르는 것은 (1) 사람으로서 불가능할 뿐 아니라, (2) 이런 교만한 생각은 그리스도의 승천하심을 믿지 않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본 구절을 통해 율법으로 의를 구하려는 자들의 교만함과 그들의 망상을 지적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근본 핵심은 버리고 자신들의 유전과 행위를 통해 하늘, 즉 의에 이르려는 것은 불가능하다.
네 마음에...하지 말라 - '하지 말라'의 헬라어 '메 에이페스'(*)'말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믿음을 통한 의'는 율법을 통해 의를 이룰 수 없음을 알고 있다.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 이미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여 승천하셨고 이것이 역사 속에서 실제로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이를 부인하였다. 이는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를 인정치 않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성육신을 통해 그들 중에 오셔서 생명을 주셨지만 그들은 이 사실을 믿지 않았다.
 
성 경: [10:7]
주제1: [이스라엘의 불순종]
주제2: [믿음으로 얻는 구원]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 '음부'(*, 아뷩손)6절의 '하늘'(*, 우라논)과 그 높고 깊음에서 대조를 이룬다. 음부의 헬라어 '아뵤소스'(*)는 히브리어 '테홈'(*) 대신 사용된 말이다. '테홈''물들의 깊음'(1:2)이나 '바다의 깊음'(107:26)을 표현하는 데에도 사용되었다. 본문의 의미는 죽은 자들이 있는 곳인 '땅의 깊은 곳'(71:20), 즉 히브리어 표현으로는 '스올'(*, Sheol)을 의미한다(139:8;9:2;Murray, Hodge, Cranfield). 음부에 내려가는 것은 인간으로서 불가능한 일이며 그리스도께서 신자들을 살리기 위해 당하신 죽음을 믿지 않는 것으로 이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무효(無效)로 하는 것이며 부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다 - '모셔 올리는'의 헬라어 '아나가게인'(*)은 부활을 언급할 때 쓰인다(13:20). 이스라엘 중에 이스라엘인들의 메시야로 오신 예수를 믿지 않은 그들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사실을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성 경: [10:8]
주제1: [이스라엘의 불순종]
주제2: [믿음으로 얻는 구원]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 앞에서 부정적인 진술을 계속하였지만, 이제는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바울이 언급하고자 하는 주제로 돌아 온다.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 30:14의 인용인데, 70인역에는 '심히'에 해당하는 '스포드라'(*)가 있으나 본문에서는 생략하였다. 구약의 문맥에서는 율법을 통해 드러난(reveal)은 혜로운 면이 기록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그의 백성과 함께 계시며 이스라엘 백성은 신명기의 말씀대로 그들의 입과 마음에 두어 율법을 암송하며 묵상하였던 것이다(1:2). 여기서 '말씀이 가깝다'는 것은 신약에 와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 마음에 선물로서 그리스도의 영이 와 계신다는 의미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와 율법은 상대적 위치인 것이 아니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바울은 신명기를 인용하여 말씀이 가까이 있다는 것을 입과 마음에 있다는 표현으로 하늘에 올라가거나 음부에 내려가는 불가능성과 대조하면서 구원받는 것이 매우 쉬운 일이 되었음을 제시하고 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밝히 드러낸다.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 이 부분은 인용구에 바울이 첨가시킨 삽입구이다. '전파하는'의 헬라어 본문 '케륏소멘'(*)'가르치다', '설교하다', '선포하다'의 뜻이다. 따라서 본문은 사도들이 가르치고 설교하는 복음의 말씀을 뜻한다. '우리가 전파하는'이라는 한정구는 '말씀이 멀리있지 않고 가까이 있다'는 견해에 있어서 바울이 모세와 같다는 것을 나타낸다. 전파된 말씀은 유대인에게나 이방인에게나 은혜의 말씀으로 구약에 계시된 약속의 말씀, 즉 믿음의 말씀이다. 여기서 '믿음의 말씀'은 복음의 내용 그 자체이다(Calvin, Cranfield). 그리고 이 말씀은 믿음을 요구하는 말씀임을 뜻한다(Cranfield). 바울이 신 30:14에 나오는 '말씀'을 칭의(justification)와 같게 본 것은 그리스도가 그 말씀의 실체이며 실제적 의미이기 때문이다.
 
성 경: [10:9]
주제1: [이스라엘의 불순종]
주제2: [믿음으로 얻는 구원]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 '네 입으로', '네 마음으로'8절의 '네 입에', '네 마음에'와 병행을 이룬다.
예수를 주로 - 이는 '예수는 주이시다'(Jesus in Lord)란 말이다. ''에 해당하는 헬라어 '퀴리오스'(*)는 헬라 세계에 있어서 고위직에 있는 사람이나 노예를 소유한 사람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호칭이었다. 또한 신비 종교(Mystery Religion)의 신들이었던 이시스(Isis)나 오시리스(Osiris)에게도 사용되었다. 정치적으로는 통치자에게 이 명칭을 붙였다. 특히, 하나님의 칭호 '야웨'(*)는 칠십인역에서 항상 '퀴리오스'로 번역했다. '퀴리오스'라는 칭호는 초대 교회에서 하나님에 해당하는 절대적 의미의 칭호로서 하나님에 해당하는 절대적 의미의 칭호로서 사용되었다. 따라서 '예수가 주'라는 고백은 교회 최초의 신앙 고백의 형태로서(2:36;고전 12:3) 예수의 주권(lordship)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 고백에는 경배의 대상이며 승천하신 구주의 의미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 - '살리신'의 헬라어 '에게이렌'(*)'일으키다'라는 말로서 이는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 아파르케)가 되셨다는 뜻이다(고전 15:20).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은 신자들로 하여금 부활을 소망케하는 종말론적 의미가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모든 만물을 다스리시고 주관하시는 만유의 주로 높이심으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자들이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고 예수의 주되심을 시인케 된 것을 의미한다. 이런 뜻에서 초대 교회에서는 예수의 다시 사심을 고백했고 믿었던 것이다(2:9-11). 네 마음에 믿으면 - 입으로 시인하는 것과 마음에 믿는 것은 불가 분리의 관계이다. 입으로 시인하는 것은 마음에서 믿는 만큼 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진정한 신앙 고백을 전제한 것으로서 외식적이지 않는 것을 말한다. ->마음의 순서는 인용문 신명기의 순서를 따른 것으로 10절에서는 그 바른 순서, 즉 마음속에 믿는 것과 입으로 고백하는 자연적인 순서로 말한다.
구원을 얻으리니 - 헬라어 본문 '소데세'(*)는 미래형으로 종말론적 구원(eschatological salvation)을 언급한 것이다. 따라서 믿음은 의에 이르게 할 뿐만 아니라 결국 입으로 시인하게 하며 구원에 이르게 한다.
 
성 경: [10:10]
주제1: [이스라엘의 불순종]
주제2: [믿음으로 얻는 구원]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 '마음' - '', '믿는 것' - '시인하는 것'은 문장에 있어서 균형을 유지한다. 또한 '의에 이르는 것''구원에 이르는 것'은 본문에서 역으로 사용해도 하등의 문제가 없다. 본절은 본서의 주제가 되는 1:16, 17의 구절을 기억시키는 내용으로서 믿고 시인함이 구원의 열매를 맺는 것을 뜻한다. '믿어''시인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피스튜에타이'(*)'호몰로게이타이'(*)는 수동태로서 믿는 것과 고백하는 것이 자신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게 하는 근본적인 능력이 있음을 나타낸다. 즉 성령께서 역사하심으로 사람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시인에 이르게 됨을 나타낸 것이다(고후 5:14-15). '의에 이르는 것'은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얻어지는 '', , '칭의'(稱義)를 말한다. 그러므로 '마음으로 믿는 것''입으로 시인하는 것'은 신앙의 기초이며 전부라고도 말할 수 있다. 사람 앞에서 주 예수를 입으로 시인한다는 것은 자기의 신앙을 아무 두려움 없이 공언하는 것이다(10:32;8:38;12:8). 특히, 시인(是認)은 지적인 확인을 넘어 생활의 차원에서 삶으로 고백되어져야 한다.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부인하도록 강요당하고 핍박받을 때 주 예수를 구주로 시인하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런 시인은 개인적인 차원뿐만 아니라 역사 속에서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나갈 때 직면하게 되는 구체적 탄압과 고난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과 구원을 정직하게 표명(表明)하는 차원까지도 의미한다.
 
성 경: [10:11]
주제1: [이스라엘의 불순종]
주제2: [믿음으로 얻는 구원]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 9:33과 같이 사 28:16로 부터 인용된 구절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좀더 강조된 형태로 인용되었다. '저를 믿는자'란 말 앞에 '누구든지'란 말이 첨가되어 있다(Hendriksen). 이렇게 강조된 것은 앞에 언급된 4-10절의 말씀을 한 마디로 요약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바울은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여 구원이 유대 민족에게만 독점되어지고 또한 이방인에게 있어서는 모세의 율법에 의하여 할례를 받은 자에게만 국한시켰던 것을 확장시켜 이제는 복음을 받아들인 모든 자에게 허락되어졌음을 선포하고 있다(Godet).
 
성 경: [10:12]
주제1: [이스라엘의 불순종]
주제2: [믿음으로 얻는 구원]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는 이 문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 그 어떤 종족이든지 차별을 받지 않고 똑같이 적용되어진다. 설사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어떤면에 있어서는 '차별'(*, 디아스톨레)이 있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구원에 있어서는 차별이 없다(3:22). 그런데 바울은 실제로 그의 서신서에서 유대인의 우선권에 강조점을 두고 있었고(1:16;2:9, 10), 특별히 하나님의 '언약'(Covenant) 아래서는 이스라엘이 특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언급하였다(3:1, 2:9:4, 5). 그러나 이는 구원 경륜의 순서에 있어서 이스라엘이 특권을 받은 것을 나타낼 뿐이다. 구원에 있어서는 유대인과 헬라인, 기타 이방인 사이에 어떠한 차별도 없다(Dunn).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 바울은 구원이 유대인과 헬라인 그외 모든 이방 민족에게 차별이 없는 분명한 이유를 '한 주께서'(the same Lord) 모든 사람의 주님이시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다(Lenski). 여기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사람의 주'(*, 퀴리오스판톤, Lord of all)로 묘사하고 있는데 만일 유대인이 하나님을 주님(Lord)으로 믿고 있다면 그 하나님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주님이 되어야만 한다(3:29, 30). 이와 마찬가지로 이것은 구세주(救世主)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도 동일하다. 그는 유대인과 헬라인 기타 이방인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의 주'가 되신다(Dunn). 더구나 주님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그를 부르는 모든 자를 부요하게 하신다.' 이는 주님의 부요함을 말하는 것일 뿐 아니라 그의 보편적이고 동일한 은혜가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임한다는 의미이다(Godet). 여기서 '부요하시도다'는 헬라어로 '플루톤'(*)인데 능동적인 개념으로 '자비하다''은혜롭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Calvin). 이것은 주님의 구원의 은혜와 그 능력은 무한하여 그가 부르는 모든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려는 선한 뜻은 결코 약화되거나 다함이 없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부요하신 주 하나님께(50:10-12;2:8;3:8;5:12) 속하여 항상 풍성한 삶을 누리게 됨으로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2:4;9:23;10:10;고후 8:9;2:7).
 
성 경: [10:13]
주제1: [이스라엘의 불순종]
주제2: [믿음으로 얻는 구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 바울은 구약성경에서 요엘 선지자의 말을 인용하여 앞절에서 말한 내용을 더욱 강력하게 확증하고 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얻으리라"는 이 사실은 이미 구약성경 욜 2:32에 예언되어 있었다(Godet). 요엘 선지자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예언하면서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푸실 것을 약속하셨다고 하였다(Calvin). 요엘에 의해 약속된 하나님의 이 말씀을, 베드로는 예수님 승천 후 오순절날 마가의 다락방에서 주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설명하면서 인용하였다(2:16-21). 바울도 이 말씀을 인용하면서 요엘서의 '여호와'(Jehova)''(Lord)와 동일시하여 사용하고 있는데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Alford, Harrison). 실제로 70인역(LXX)에는 언제나 '야웨'를 관사가 없는 '퀴리오스'(*)로 번역하였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퀴리오스)라는 칭호를 사용하여 구약에서의 '야웨'가 곧 그리스도 예수와 동일한 하나님이심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주의 신성을 부인하는 자들에게 강력한 증거가 되게 하며 또한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과 그리스도 안에서 이룬 구원 사이에 완전한 연속성이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Dunn). 여기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란 주께 대한 신앙을 고백한 자 곧 주를 믿는 자를 가리킨다. 이와 같은 자는 하나님의 칭의(justification)를 받아 구원 받은 자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
 
성 경: [10:14]
주제1: [이스라엘의 불순종]
주제2: [믿음으로 얻는 구원]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 바울은 이제 복음을 확장하여 범세계적으로 복음을 선포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Bruce). 그래서 그는 믿음과의 관계에서 제일 먼저 그리스도를 부르는 것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 양자간에는 밀접한 연관성이 있기 때문이다(Calvin). 주는 신뢰하고 믿을 만한 분이며 죄인들을 구원하여 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확신이 없다면 주님을 부른다는 것은 무의미할 것이다. 결국 주님을 부른다는 것은 주님을 믿는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주를 부르는 일이 믿음의 첫걸음임을 가리킨다. 여기서 '어찌 부르리요'(How then shall they call on, KJV, NIV)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포스 에피칼레손타이'(*)

김엘리사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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