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파산은 빚 독촉으로 막다른 길에 내몰린 사람들이 선택하는 마지막 탈출구다. 2010년 8만4725건에 달했던 개인파산 신청건수는 지속적으로 감소해 지난해 5만5467건으로 줄었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고통스런 선택을 강요받고 있다. 법원이 선임한 파산관재인은 그 고통과 희망 사이에 선 사람들을 마주한다. 그들의 눈에 비친 개인파산 실태는 현실의 모순을 그대로 반영한다.

“대부분은 생활고 못견뎌 신청”

남편 병들자 아내 홀로 생계 책임

밤낮 일해도 빚 늘어나 결국 파산

보증 서줘 파산한 경우도 20~30%

“악성 채무자도 더러 있어”

개인사업 ‘폐업’ 신청한 파산신청자

가족 명의로 유사업종 버젓이 차려

“파산관재인 역할이 중요”

채무자 위해 신속·공정하게 처리하되

채권자엔 돈 못받는 상황 납득시켜야

조금이라도 더 돌려받게 도움주기도

■ “파산 신청자 대부분은 열심히 살았다” 일찍 아버지를 여읜 김아무개(44)씨는 스무 살이 채 되지 않아 남편을 만난 뒤 두 자녀를 낳았다. 단란했던 가정은 10년 전 나락으로 떨어졌다. 남편이 병을 얻어 일을 하지 못하게 돼 김씨가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큰아들은 2008년 ‘사고’를 쳐서 애를 낳았다. 손자 양육도 고스란히 김씨의 몫이 됐다.

김씨는 공장 등에서 밤낮으로 일했지만 생활비는 턱없이 부족했다. 어쩔 수 없이 대출을 조금씩 받았다. 늘어나는 빚에 돌려막기도 해보고, 주변에 손도 벌렸다. 설상가상으로 당뇨까지 앓게 돼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김씨는 결국 지난해 8월 개인파산을 신청했다. 김씨는 “외식 한 번 제대로 못하고 25년을 악착같이 살았다. 남의 돈을 갚지 못해 죄송한 마음이 크지만, 단 하루라도 빚 없는 삶을 살고 싶었다”고 털어놨다.

파산관재인들은 “파산 신청자 가운데 상당수는 김씨처럼 성실하게 살았는데도 생활고를 견디지 못해 감당하기 힘든 빚을 얻은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서울중앙지법 개인파산관재인 김유봉 변호사는 “은행들이 채무 변제 능력을 제대로 따지지 않고 무분별하게 돈을 빌려주는 경우가 많다. 또 아무것도 모른 채 명의를 빌려줘 보증 문제로 파산하는 비율도 20~30% 정도 된다”고 했다.

■ 부인 명의로 공장 차리고 ‘나 몰라라’ 서울중앙지법 개인파산관재인 박범진 변호사는 최근 경기도 파주시의 한 조명공장을 찾았다. 개인파산 신청을 한 50대 남성이 운영하던 공장이었다. 이 남성은 공장이 부도가 나서 폐업을 했다고 신고했었다. 하지만 박 변호사는 부인이 유사한 업종으로 사업자 등록을 한 게 마음에 걸렸다. 기습적으로 현장답사를 한 박 변호사는 공장 직원에게 “사장님 만나러 왔다”고 했다. 그러자 직원이 안내한 곳은 파산을 신청한 그 남성의 사무실이었다. 박 변호사는 “당시 남성의 얼굴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사장으로 등록된 부인은 어디 갔느냐고 물어보니 지방에 출장 갔다고 하더라. 추가 면담을 위해 법원에 오라고 했는데 남성은 나 몰라라 하고 있다”고 했다.

이런 악성 채무자는 100명 중 1~2명뿐이다. 하지만 이들이 개인파산 제도를 악용하는 것은 철저하게 막아야 한다. 박 변호사는 “채권자 중에는 평생 파지를 주워 모은 1억원을 빌려줬다가 떼인 사람도 있다. 억울한 채권자가 나오지 않게 하려면 파산관재인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 채권자들이 감사패 전달하기도 법인파산관재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김진한 변호사는 얼마 전 서울 강남의 패션의류상가 ‘점프밀라노’ 임차인들로부터 감사패를 받았다. 시행사의 부도로 투자한 돈을 몽땅 날릴 위기에 처했으나 파산관재인의 활약으로 투자금의 일부를 건진 것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였다. 임차인들은 평균 1억여원을 투자해 상가에 입점했다. 하지만 시행사는 과도한 채무로 2007년 파산 절차에 들어갔다. 임차인들은 돈이 떼일 위기에 처했다. 파산관재인으로 선임된 김 변호사는 좀 더 비싸게 건물을 팔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결국 이 건물은 520억원에 팔렸고, 임차인들은 보증금의 38%씩 돌려받게 됐다. 김 변호사는 “임차인들이 평생 노점상을 해서 모은 돈을 투자하는 등 저마다 안타까운 사연을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파산관재인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채무자를 위해 신속·공정하게 사건을 처리하되, 채권자들에게는 돈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충분히 납득시키는 것이다. 김유봉 변호사는 “나도 처음엔 돈을 빌리면, 당연히 갚아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채권자들한테는 매우 소중한 돈인데, 법원이 무슨 권한으로 그 돈을 받을 수 없다고 판정을 내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 제도가 없다면, 많은 사람들이 절망에 빠져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서영지 기자 yj@hani.co.kr